상주학/상주학 제2권

상주학 강의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의 행적行蹟

빛마당 2014. 2. 24. 22:14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의 행적行蹟

김 철 수 박사


전) 국립상주대학교 제2대 총장

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주문화원장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의 행적行蹟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박사

<目 次>

Ⅰ. 머리말

Ⅱ. 동원의 생애

Ⅲ. 김귀영金貴榮의 행장行狀

Ⅳ. 두 왕자의 피납 경위

Ⅴ. 동원東園의 행적行蹟

Ⅵ. 맺는 말

I. 머리말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은 명종2년 28세의 나이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선조 때에 좌의정까지 올랐다. 당시로서는 정치적인 면과 학문적인 면에서 두루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지만 노년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역신逆臣의 몸이 되어 동원이 남긴 정치적인 업적들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가문은 멸문의 길을 겪게 되고 동원이 남긴 글마저 병화兵禍를 겪으면서 사라졌다.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은 이조판서를 8번이나 역임하였고, 사신으로 9번이나 명나라를 다녀온 문신이며, 호당湖堂에 3선 하였고 홍문관 대제학을 6번이나 역임한 학자요 문장가로서 상주를 빛낸 분이시다.

그러나 그 동안 학계나 지역에서의 동원東園에 대해서는 관심이 크지 않았다. 지역에서는 경북대학교의 권태을 박사가 몇 년 전에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의 진폐팔조소陳獘八條疏”를 소개한 것이 처음이었고, 학계에서도 “『동원선생문집東園先生文集』비지류碑誌類 역주”와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대한 논문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주인尙州人들이 이 처럼 큰 어른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本稿에서는 동원東園 선생의 생애와 치적 그리고 선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 호종사건에 대한 내용을『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중심으로 소상히 소개하고자 한다.

II. 동원의 생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이며, 상산김씨 상산군파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김사원金士元이고, 아버지는 김응무金應武이다. 동원東園선생은 중종15년(1520) 조부 김사원金士元의 근무처인 청풍淸風관아에서 태어났으며, 중종 27년(1532) 13세의 나이에 삼휴당三休堂 윤관尹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중종32년(1537) 18세에 스승인 윤관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21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명종 2년(1547) 28세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1549년에는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 홍문관정자를 거쳐 1550년에는 저작著作, 박사博士, 1551년 32세 때는 김홍도金弘度ㆍ유순선柳順善 등과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해 8월에 부인 윤씨가 죽었다.

1551년 32세 되던 해에는 홍문관 교리 겸 예문관 응교로서 상소를 올려 을사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윤원형尹元衡의 죄악에 대해서 극론하였다.

1553년 홍문관 수찬을 지내고 35세(1554년)때는 춘천부사가 되었고, 다음해인 1555년에는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으로 광주光州에 파견되어 전라도에 침입한 왜선 60여척을 방어하였으며,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양관兩館의 제학이 되었다. 37세 때는 성천부사成川府使와 정주목사定州牧使를 거쳐 그 해 가을에 성균관 대사성 겸 이조참의 그리고 이조정랑이 되었다.

1556년에는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헌부집의로 있었으며 재임 중에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예관禮官으로 활약하였다. 1557년 시강원 보덕, 1558년 홍문관전한에 올랐다가 곧 승정원의 동부승지로 옮겼으며, 이때 경연經筵에서 경기내의 농민생활안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인 1559년에 이조참의로 전직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으로 다시 우부승지로 전보되었다.

그 뒤 1560년에는 한성부우윤, 1570년에는 춘천부사를 지냈고, 1563년(명종 18) 부호군, 사간원대사간, 1564년 45세에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진폐팔조소陳獘八條疏’와 ‘12개조의 개혁안’을 올려서 군주의 공명정대한 처신과 윤원형 첩자尹元衡妾子의 허통許通문제 등에 관해 활발한 언론을 하였다.

1569년(선조 2)에는 도승지 겸 경연經筵 성균관사成均館使과 양관 제학을 제수받고, 그해 5월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ㆍ예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50세에는 한성부 판윤判尹ㆍ공조판서ㆍ형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ㆍ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익년인 1571년에는 병조판서ㆍ대사헌ㆍ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54세에는대제학ㆍ지의금부사를 제수받았으며, 56세에는 왕명王命으로「황산대첩비문荒山大捷碑文」을 지었다.

58세(1577)때는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59세에 병조판서, 60세에 호조판서를 거쳐 61세에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더해지고 우찬성右贊成에 봉해졌다. 그리고 62세에는 의정부 좌의정에 오르고 함안이씨咸安李氏를 새로이 부인으로 맞아서 아들 김개金闓를 낳았다.

65세(1584)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조헌趙憲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이듬해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은 동원의 나이 73세 때인 선조 25년(1592)에 일어났고 동원東園은 이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있었다.

조선의 중앙군이「상주북천전투」에서 왜적과 처음으로 싸웠으나 참패하고, 이어서 가장 믿었던 신립이 충주에서 대패하자, 한양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선조가 앞장서서 서둘러 천도遷都가 논의되었으나 동원東園은 천도에 반대하면서 ‘한양을 사수하고 명나라의 원병을 기다리자’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중의衆意에 의해서 천도가 결정되었다. 그래서 동원은 어명御命에 따라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 회령으로 피난했으나, 회령의 고을 아전인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ㆍ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졌다.

이 사건으로 동원東園은 관직을 삭탈 당하였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강요에 의해서 강화를 요구하는 적장敵將의 글을 선조에게 전달하기 위해 풀려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두 왕자는 적진에 두고 본인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 빠져 나왔다’는 사유로 사헌부ㆍ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推鞫을 당했는데 유성룡柳成龍 등의 건의로 겨우 고문은 면했지만, 1594년(선조 27)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 유배지에서 동원은 75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동원東園으로 보면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었으나 풀길이 없었다. 그러나 동원東園이 돌아가신지 72년만인, 현종 5년(1664)에 좌의정 허적許積의 건의로 관작이 회복되고, 그로부터 14년 후인 1678년(숙종 4) 김석주金錫胄의 주청으로 비로소 신원伸寃되었다. 또한 허목許穆이 유사遺事를 써서 동원의 무고함이 밝혀졌고, 1796년(정조 20)에는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동원東園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또한 아들 김개金闓마져 허균許筠의 옥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되었기 때문에 집안이 거의 영락하여 동원이 오랫동안 문형을 맡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황산대첩지비荒山大捷之碑〉외에는 유문遺文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1778년경에 저자의 8세손인 김우현金禹鉉은 공사간의 기록에서 동원이 지은 시문詩文을 수집하고, 당대의 명사들에게 글을 받아서『동원문집東園文集』을 겨우 정리하였는데, 정범조丁範祖가 행장行狀을 쓰고 채제공蔡濟恭, 한광식韓光植이 묘도문자를 지었다.

현재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구룡리 산53-1번지에 있다.

III. 김귀영金貴榮의 행장行狀

행장行狀의 원제목은「推忠奮義炳機協策平難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 議政兼領經筵, 監春秋館事,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監觀象監事, 上洛府院君 東園金公行狀」이다.

대감의 8대손 김우현金禹鉉이 공사 간에 흩어진 글을 모아 정범조丁範祖에게 청하여 동원東園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원문> 公諱貴榮, 字顯卿, 號東園, 其先, 商山人也. 商山之金, 在新羅, 有諱需, 官甫尹, 爲始祖. 至高麗, 諱得齊, 官三司右使, 封商山君, 擊倭有功, 載史. 子諱洽, 始仕我朝, 官中樞院事, 三轉而爲公高祖諱錙, 官縣令. 祖諱叔春, 官縣令, 贈吏曹判書. 祖諱士元, 文科, 歷淸顯, 見枳當路, 官至牧使, 贈左贊成. 諱應武, 贈領議政, 以公貴也.

<역문> 공의 휘는 귀영貴榮이며 자는 현경顯卿이고 호는 동원東園인데 그 선대는 상산商山사람이다. 상산김씨商山金氏는 신라때 휘 수가 있으니, 벼슬이 보윤甫尹인데 이가 바로 상산김씨의 시조가 된다. 고려에 이르러 휘 득제得齊는 벼슬이 삼사우사三司右使이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으며 왜적을 물리친 공이『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상산군의 아들 휘 흡은 비로소 조선에서 벼슬살이 하여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중추원사로부터 3대를 지나 휘 치는 벼슬이 현령이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가 된다. 증조부 휘 숙춘叔春은 벼슬이 현령이며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고, 할아버지 휘 사원士元은 문과에 급제하고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는데 당로當路에 해를 받아 벼슬이 목사牧使에서 그쳤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응무應武는 영의정에 증직되었는데 공이 귀하게 되어서이다.

<원문> 妣星州李氏, 士人守寬女也. 中宗庚辰十一月一日, 公于牧使公淸風任所. 適按使巡到本邑, 素精星耀術, 推公命曰 : “是兒當工文章, 官至崇品云.”

<역문>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사인士人 이수관李守寬의 여식으로 중종 경진년(1520) 10월 1일에 목사공牧使公의 청풍淸風관아에서 공을 낳았다. 이때 마침 안찰사按察使가 순시하며 본 고을에 이르렀다. 안찰사는 평소 성요술星耀術에 정밀하였는데 공의 운명을 추론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문장에 능할 것이고 벼슬은 정품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自幼時, 儁偉有識度. 年八九歲, 隨長老觀魚, 跌墮深潭. 舟人惶撓, 而公從水中伏行, 抵岸而登, 語人曰: “有物負我出之水”, 見者咸驚異.

<역문> 공은 어려서부터 탁월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나이 8, 9세 때에 장로長老들을 따라 고기잡이 구경을 갔다가 미끄러져 깊은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에 공은 물밑을 기어 언덕에 이르러 올라와 사람들에게 “어떤 동물이 나를 등에 업고 물 밖으로 내보내주었다”고 하자, 보는 이들이 모두 놀라며 괴이하게 여겼다.

<원문> 甲午, 遭議政公喪. 庚子, 中司馬兩試. 明宗丁未, 擢謁聖丙科第一, 選弘文正字, 陞博士, 薦入翰院, 兼侍講院說書. 尋陞副修撰兼知製敎, 拜司諫院正言, 轉吏曹佐郞, 賜暇湖堂.

<역문> 갑오년(1534)에 아버지 상을 당하였고 경자년(1540)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명종 정미년(1547) 알성문과謁聖文科 병과丙科 제1인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正字에 선발되었다가 박사博士에 승진하였으며 천거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시강원侍講院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얼마 뒤 부수찬副修撰 겸 지제교知製敎에 승진하고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좌랑佐郞을 전임하였으며 호당湖堂에 뽑히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원문> 壬子, 拜校理, 上疏請雪乙巳諸人之寃, 極論尹元衡罪惡. 歷典翰, 舍人, 弘文館直提學兼藝文應敎.

<역문>임자년(1552) 교리校理에 임명되어서는 상소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억울하게 당한 여러 사람들의 신원伸寃을 청하며 윤원형尹元衡의 죄악을 극론하였다. 전한典翰과 사인舍人,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다.

<원문> 甲寅, 因養親, 出宰春川. 明年, 陞通政階, 拜弘文館副提學. 丙辰, 拜成川, 威制豪强, 愛養民士. 移拜定州, 州俗喜弓馬, 不尙儒業. 公日聚諸 生鄕序中, 勸講經義, 設酒食, 讌境內耆耉, 其老病不能赴者, 給米肉. 定人之 向文術敦倫序, 自公始. 還拜大司諫, 轉大司成吏曹參議, 承政院同副承旨 左承旨.

<역문> 갑인년(1554)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인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가 다음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병진년(1556) 외직인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어서는 위엄으로 호족豪族들의 강성함을 제어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길렀으며 옮겨가 정주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었다. 고을풍속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하여 유업儒業을 숭상하지 않았다. 공은 날마다 학생들을 향서鄕序에 모아놓고 경의經義를 부지런히 강의하고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경내에 있는 노인 분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늙고 병들어 오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쌀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에 고을사람들이 학문을 지향하고 인륜人倫이 돈독해짐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주목사를 마치고 돌아와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승정원 부승지副承旨와 좌승지左承旨를 전임하였다.

<원문> 戊午, 出爲慶尙監司. 入界之日, 牒訢山積, 左右酬酌, 日未中而畢, 剖決皆當理, 民情大悅. 秩滿, 陞嘉善, 拜都承旨. 尋拜漢城右尹, 轉大司憲ㆍ吏曹參判兼同知經筵成均館事ㆍ藝文提學. 癸亥, 拜大提學, 陞資憲階, 拜判尹, 轉兵ㆍ工判書. 乙丑, 丁大夫人憂, 服闋, 拜禮曹判書.

<역문> 무오년(1558) 경상감사로 나아갔다. 경내에 이르는 날 소장訴狀들이 산과같이 쌓여있었는데, 좌우의 관원들과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정오가 되기 전에 모두 마치니 판결을 내린 것이 모두 이치에 맞아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경상감사 임기를 채우고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고 얼마 뒤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임명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과 이조참판을 전임하고 동지경연同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 예문관 제학提學을 제임하였다. 계해년(1563)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판윤判尹에 임명되고 병조ㆍ공조의 판서判書를 전임하였다. 을축년(1565) 어머니 상을 당하였고 상을 마치고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원문> 己巳, 拜吏曹判書. 時屢遣使明朝, 請懿仁王后冊命而不得請. 公嘗儐接明使成憲, 詩詞唱酬甚懽, 而憲時爲禮部尙書, 朝廷特差遣公奏請使. 公抵京師, 禮部卽爲奏聞, 得奉誥命還, 中閫正位, 上嘉奬之, 賜土田.

<역문> 기사년(1569)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여러 차례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의인왕후懿仁王后의 고명誥命을 청하였지만, 명나라에서는 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명나라 사신 성헌成憲을 빈접儐接하면서 시와사를 주고받으며 매우 기뻐한 적이 있었는데, 성헌이 이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맡고 있어 조정에서는 특별히 공을 주청사奏請使로 파견하였다. 공이 북경에 도착하자 예부에서는 즉시 황제에게 아뢰어 고명을 받들고 돌아오니 내명부內命婦의 지위가 바르게 되었다. 주상은 이 일을 가상히 여겨 표창하고 토지를 내려주었다.

<원문> 辛未, 由兵判, 移拜戶判, 精核會要, 節省宂費, 府庫充牣. 庚辰, 以大提學撰進 改設活字局序文, 特陞崇政階, 拜右贊成.

<역문> 신미년(1571) 병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에 임명되어서는 회계장부를 자세히 살펴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니 부고府庫가 채워졌다. 경진년(1580)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으면서 개설국활자改設局活字 서문序文을 지어 올려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었다.

<원문> 辛巳, 拜右議政. 未幾, 領相朴淳呈告, 命竝卜領ㆍ左相. 淳以李栗谷 珥ㆍ鄭惟吉ㆍ辛鄭芝衍)擬卜. 時珥負文學才術, 聲譽隆洽. 與淳及成渾ㆍ

沈義謙, 相汲引, 上亦傾心嚮用, 故首擬新卜. 而公獨持不可, 卒以朴素立, 鄭芝衍擬入.

<역문> 신사년(1581) 우의정에 임명되고 얼마 뒤 영의정 박순朴淳이 사표를 내자 주상은 영의정과 좌의정을 다시 뽑게 하였다. 박순은 율곡栗谷 이이李珥ㆍ정유길鄭惟吉ㆍ정지연鄭芝衍을 추천하였다. 당시 이이는 문학文學과 재술才術을 자부하며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박순과 성혼成渾, 심의겸沈義謙이 함께 재상으로 추천하니 주상도 역시 등용하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지만 공이 유독 불가함을 주장하여 마침내 박소립朴素立과 정지연이 선발에 들게 되었다.

<원문> 癸未, 蕃胡擾北邊, 命招兵曹諸堂議邊事, 而珥爲長堂, 稱病不進, 兩司論劾之. 珥對章辨以大臣不斥臺諫爲非, 又請以己罪有無, 質問諸臣. 而成渾上疏, 指三司不公平, 至欲加罪, 士論益激發.

<역문> 계미년(1583) 오랑캐들이 북쪽변방을 어지럽히자, 주상은 병조에서 판서判書들을 불러 변방의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이이李珥가 병조판서이면서도 병을 핑계로 들어오지 않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이를 탄핵하였다. 이이는 탄핵문彈劾文을 대조해 가며 대신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잘못을 배척하여서는 안된다 하며 또 자신의 죄가 있고 없음은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자고 청하였다. 성혼成渾이 상소하여 삼사三司의 불공평함을 지적하고 지극히 죄를 주어야 한다고 하니, 사론士論이 더욱 격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원문> 上問公曰 : “李珥果小人乎?” 公對曰: “知人固難, 不可遽以珥爲小人, 亦不敢以君子譽之. 成渾欲覈言根而罪之, 若然, 則雖權奸當國, 無敢言者矣.” 又曰 : “近日東・西之說, 因李珥・成渾致紛紜, 是亂階也.”

<역문> 주상은 공에게 묻기를 “이이李珥가 과연 소인인가” 하자, 공은 “사람을 알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갑자기 이이를 소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또한 군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성혼成渾이 소문의 출처를 찾아 죄를 주려고하니 만일 그렇다면 비록권간들이 나랏일을 맡는다면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또 “요즘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는 말은 이이와 성혼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난리의 시초입니다”고 하였다.

<원문> 翌日, 下敎于政院曰: “不知賢邪則是不智, 知而不直啓則是不忠. 左相金某, 憚於甲乙是非, 敢爲依阿苟容之態, 自古, 大臣有如此者乎?” 公惶悚不敢辨. 政院聯名救解. 應敎洪迪・諫長宋應漑, 又相繼疏救, 因劾珥. 亡何, 儒生朴濟疏, 陷公及縉紳名士十餘人, 指爲奸凶.

<역문> 주상은 이튿날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어짊과 간사함을 알지 못하면 이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요. 알면서도 곧게 아뢰지 못한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좌상 김귀영은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를 꺼려하여 이에 감히 아부하며 구차하게 남의 비위나 맞추려는 태도를 보이니 예로부터 이런 신하가 어디 있었단 말인가” 하니, 공은 황공해 하며 감히 변명하지 못하였다. 승정원에서 연명으로 해명해 구원해 주었고 응교應敎 홍적洪迪과 대사간大司諫 송응개宋應漑가 서로 상소하여 구원하면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였다. 얼마 뒤 유생儒生 박제朴濟가 상소하여 공과 벼슬아치 명사10여명을 모함한 것은 간흉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지적하였다.

<원문> 先時, 金省庵孝元, 謂: ‘沈義謙弟忠謙乃戚里, 不可擬銓郞’, 而義謙亦詆毁孝元. 由是, 右孝元者, 謂之‘東人’ ; 右義謙者, 謂之‘西人’, 東・西之目始此. 而珥時爲長銓, 陰主西論, 外托調停, 請竝出金・沈, 義謙補

松都留守 ; 孝元補慶興府使. 公屢啓, ‘慶興邊胡, 非書生所宜鎭撫’, 乃移富寧. 至是, 又竄宋應漑・許篈・朴謹元於極邊. 時公被嚴旨, 不敢與事, 而乃於筵中, 盛言三竄過重之意. 公旣立異卜相之議, 又前後力捄士林, 人皆爲公危之, 而不爲動, 累上箚乞解許副.

<역문> 이보다 앞서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이 “심의겸沈義謙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은 왕실의 외척이니 전랑銓郞의 자리에 뽑아서는 안된다”라고 하여 심의겸도 또한 김효원金孝元을 헐뜯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김효원 편에선 이들을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의 편에선 이들을 ‘서인西人’이라 하였으니 ‘동인’이니 ‘서인’이니 이름 지어진 것은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이이李珥는 판서를 맡고 있었는데 속으로는 서인을 주장하면서 겉으로는 분쟁을 화해시킬 것을 부탁하며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외직으로 보낼 것을 청하자 심의겸을 송도유수松都留守에 보임하고 김효원을 경흥부사慶興府使에 보임하게 되었다. 공은 여러 차례 아뢰기를 “경흥은 변방이니 서생書生으로서 마땅히 진무鎭撫할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라고 하여 부령富寧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篈ㆍ박근원朴謹元이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 공은 주상의 엄한 견책을 받고 있어 이 일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마침 경석經席에서 세 사람을 귀양 보냄은 지나치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공은 이미 재상을 뽑는 자리에서도 다른 이들과 뜻을 달리하였고 또 전후의 사림士林들을 힘써 구해준 일이 있어 사람들이 공을 위해 위태롭다고 하였지만, 공은 동요하지 않고 여러 번 차자箚刺를 올리고 벼슬을 그만 두고서 집에 있었다.

<원문> 廷臣有請李珥隱卒之典者, 下其議大臣, 公獻議略曰: “李珥措設, 多不合時宜, 裁制得中, 裨益必多.” 其意與癸未筵奏略同, 其始終不屈如此. 久之, 趙憲上疏, 凡士類之有名行議論稍涉癸未三司之言者, 極口醜詆, 而以公爲首, 遂呈辭, 歸商山, 爲畢命計. 己丑, 入耆社. 黽勉出肅. 尋値汝立逆獄, 公以原任參庭鞫. 變出縉紳, 株連寢廣, 而務從平反, 士林賴焉.

<역문> 조정신하들 중에 이이李珥가 죽자 은졸隱卒의 은전恩典을 청하는 자가 있어 대신들에게 내려 의논케 하였는데 공이 의논해 올린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이의 일을 처리함은 대부분 시의時宜에 맞지 않지만 제재制裁를 알맞게 한다면 반드시 유익함이 많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뜻은 계미년(1583) 경석經席에서 아뢴 것과 대략 같으니 시종일관 뜻을 굽히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얼마 뒤 조헌趙憲이 상소하여 선비들 중에 명망名望과 행의行誼가 있는 사람으로서 계미년(1583)에 삼사三司가 이이를 탄핵하는데 의논을 조금이라도 거든 자들을 말하면서 온갖 막된 말을 하고 공을 그 일의 괴수로 지목하자, 공은 마침내 사표를 내고 고향 상주尙州로 내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기축년(1588)에 기로소耆老所에 들게 되어 하는 수 없이 나아가 사은숙배 하였다. 얼마 뒤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己丑獄死를 만나게 되었는데 공은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 정국庭鞫에 참관하였다. 변고가 벼슬아치들에게서 생겨나 연좌된 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될 수 있는데로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니 선비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문> 當文衡會薦, 李公德馨, 爲衆i望所屬, 而公獨不隨圈. 圈出, 一座愕然, 公徐曰 : “老夫爲此也. 李某, 年少官卑, 不宜先諸公, 待才德老成, 未晩也.” 李公聞之悅服, 士論兩稱其美.

<역문> 대제학을 회천會薦할 적에 이덕형李德馨은 여러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는데, 공만은 권점圈點을 찍지 않았다. 권점이 찍힌 문서가 나오자, 동석한 사람 모두가 몹시 놀라하였다. 공은 천천히 말을 꺼내며 “여기에 권점을 찍지 않은 것은 제가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덕형은 나이도 어리고 벼슬도 낮으니 공들보다 대제학을 먼저하는 것은 좋지 않고 재주와 덕이 노성해지기를 기다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덕형이 이를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탄복하였고 선비들은 두 사람을 칭찬하였다.

<원문> 壬辰, 倭寇深入, 上議西狩分遣諸王子. 臨海君往北關, 公從之, 順和君往關東, 長溪君 黃廷彧從之. 敵逼關東, 順和北趨臨海, 而敵追躡之, 至會寧, 兵民作亂, 執兩王子及諸宰以降, 敵置軍中爲質. 公在敵中, 謀脫兩王子, 事垂成而機泄, 敵盡殺隨行丁壯, 防守益密.

<역문> 임진년(1592)에 왜적들이 깊이 들어오자 주상을 평안도방면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의논하고 왕자들을 나누어 보내기로 하였다.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가게 되니, 공은 임해군을 호종하게 되었고, 화순군順和君은 강릉江陵으로 가게 되니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이 호종하게 되었다. 적도들이 강릉까지 다다르자, 화순군은 북쪽에 있는 임해군에게로 달려갔다. 적도들은 그 뒤를 밟아 회령會寧까지 이르게 되자, 군인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신하들을 사로잡아 항복시키고는 적도들의 군중에 인질로 삼았다. 공은 적중에 있으면서 두 왕자를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일이 채 이루기도 전에 기밀이 세어나가 적도들은 수행하는 장정들을 죽이고, 방비를 더욱 치밀하게 하였다.

<원문> 會淸正聞行長平壤敗報, 大懼, 欲約和, 而謂: “大臣往事可成”, 强之遣. 公意欲歸謁上, 備陳虜情虛實, 徐爲後圖. 旣詣行在, 上謂: “公旣被執而不死, 乃反爲和事來”, 又“疑持來敵請和書, 而匿不以聞”, 欲栲問之. 大臣諫而止, 竄熙川, 削奪官爵. 甲午五月二十九日, 卒于謫所. 享年七十有五. 訃聞, 朝野痛惜, 邑中人士會哭. 是年八月, 葬于忠州北德山洞壬坐之原. 顯宗五年甲辰, 公之孫命昌2), 上書籲寃, 大臣筵白復官.

<역문> 이때 마침 가등청정加藤淸正은 소서행장小西行長이 평양平壤에서 패전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몹시 두려워하며 화친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에게 “대신이 가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며 공을 억지로 파견하였다. 공은 돌아가 주상을 뵙고 적도들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아뢰고 서서히 훗일을 도모하고자 생각하였다. 행재소行在所에 이르자, 주상은 “공이 적들에게 잡혀 죽지 않고서 도리어 화친을 위하여 찾아 왔느냐” 하고, 또 “적도들의 화친을 청하는 글을 가지고 왔을 터 인데 숨기고 아뢰지 않는 게 수상하다” 하고는 형틀을 갖추어 고문을 가하려고 하자, 대신들이 간청하여 그치게 되고 희천熙川으로 귀양 가게 되고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갑오년(1594) 5월 29일에 귀양 간 곳에서 돌아가니, 향년 75세이다. 부음이 들리자, 조야朝野에서는 몹시 애처롭게 여겼고, 고을사람들과 선비들은 함께 모여 애곡哀哭하였다. 이 해 8월 충주忠州 북쪽 덕산동德山洞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다. 현종 5년 갑신년(1661)에 공의 손자 김명창金命昌이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니, 대신들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다시 벼슬을 돌려주었다.

<원문> 公甫登朝, 能摶擊權奸, 著直聲, 當朝論離逿(逖)之日, 視道理當否爲向背, 而其始, 東人多士流, 故周旋保護, 不計利害. 當時, 負儒名擅衡物之權, 而主張時議者, 擧措多不厭人心, 故不能屈意苟同, 用是積忤異趣者, 時議以公不死於敵爲罪.

<역문> 공은 처음 조정에 들어와 권간權奸들이 날개 칠 때에는 바른 소리를 하였고, 조정의 당론黨論이 서로 엇갈릴 때를 당하여서는 도리의 옳고 그름을 제시하여 향배를 삼았는데 그 처음에는 동인東人이 선비가 많았기 때문에 주선하고 보호하였지만, 이해관계는 따지지 않았다. 당시 명유名儒라 자부하는 자들은 형물衡物의 권한을 마음대로 하고, 시의時議를 주장하는 자들은 행동거지가 대부분 인심人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차하게 뜻을 굽혀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이로써 뜻을 달리하는 자들에게 미움이 쌓여 시의가 공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적들에게 죽지 않은 것을 가지고 죄로 삼았다.

<원문> 光海時, 言者又追論公主和, 請加罪, 下大臣議, 李相恒福議曰 : “藉令某眞主和議, 公遺事曰 : “當大臣受命也, 上之所托屬, 王子也, 大臣亦以身許王子矣. 若不幸王子死, 則大臣義不可獨生, 王子不死, 則大臣無可死之義, 此善論公者也. 且當公之謀脫兩王子也, 計無一行全脫之理, 王子脫歸, 而從臣在敵, 則敵必甘心矣. 然則公初未嘗冀其不死也.

<역문> 광해군 때에는 언자言者들이 또 공이 화친을 주장한 것을 추론推論하며 죄를 더해 줄 것을 청하자, 대신들에게 내려 의논케 하였는데 이항복李恒福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령 김귀영이 진실로 화친을 주장하였다면, 그 마음은 일시의 위급함을 늦추려고 한 것에 불가한 것이요, 더구나 겉으로는 거짓으로 화해를 한다하고는 실제는 왕자를 탈출시키려고 한 것이니 그게 무슨 죄가 되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일찍이 공의 유사遺事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신이 명을 받을 적에 주상이 왕자를 대신에게 부탁한 것이고 대신은 또한 자신의 목숨을 왕자에게 허락한 것이다. 불행히도 왕자가 죽음에 이른다면 대신은 의리상 혼자 살 수 없을 것이지만, 왕자가 죽지 않았으니, 대신도 의리상 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을 잘 논한 것이다. 또한 공이 두 왕자를 탈출시킬 계획을 하였을 적에 그 일행 모두가 빠져 나올 수 없으므로 왕자들만 탈출시키고 따르는 신하들은 적소에 있게 한다면 적도들이 달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처음부터 죽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다.

<원문> 公天資淸明溫粹, 誠孝天植. 敦宗族, 恤窮窶, 靡不用極. 口不及家人産業,恥言人過失. 莅刑政, 一以平恕爲心, 文章典贍淳雅. 主文衡數十年, 公私大文字, 多出其手. 然草藁逸於兵燹, 無巾衍藏, 可惜也.

<역문> 공의 성품은 청명淸明하고 온화하며 순수하였고 지극한 효성은 천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종족에게 후덕하였고,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는데에 정성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집안의 재산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고,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형벌刑罰과 정사政事에 임해서는 한결같이 공평함과 용서함으로 마음을 삼았다. 문장文章은 법도에 맞고, 넉넉하며, 순수하고, 고상하였다. 대제학을 수십년 동안 맡으면서 공사公私의 큰 글들은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초고는 병화를 겪으면서 잃게 되고, 궤짝에도 보관한 것이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원문> 配南原尹氏, 執義寬女. 再娶南陽洪氏, 縣監洽女, 俱不育, 贈貞敬夫人. 三娶咸安李氏, 主簿繼亨女, 生一男一女. 壬辰, 隨公北行, 寇猝至, 夫人, 度不得脫, 自縊死. 後事聞, 旌閭.

<역문> 배위配位는 남원윤씨南原尹氏로 집의執義 윤관尹寬의 여식이며 재취再娶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현감 홍흡洪洽의 여식인데 모두 자식이 없었고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贈職 되었다. 다음 함안이씨咸安李氏는 주부主簿 이계형李繼亨의 여식으로 1남1녀를 두었는데, 임진년 공을 따라 함경도로 피난 가던 중 적도들이 갑자기 닥쳐와 부인은 벗어날 수 없음을 헤아리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뒤에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원문> 男闓, 官漢城左尹, 光海戊午, 辭連賊筠獄, 歿于請室中. 肅廟戊午, 兵判金錫胄筵白寃狀, 復官. 女適進士李生寅. 庶女, 長德新令 鏡禮, 次靈川君 健妾, 次柳希亮妾. 闓男長壽昌, 贈左承旨. 次命昌. 生寅男齊衡, 判事. 壽昌男長泗, 贈戶曹參判, 次泓. 繼季父後. 餘不錄.

<역문> 아들 개闓는 한성좌윤漢城左尹으로 광해군 무오년(1618) 역적 허균許筠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죽었는데, 숙종 무오년(1678)에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연석筵席에서 억울한 사실을 아뢰어 벼슬을 돌려받았다. 여식은 진사 이생인李生寅에게 시집갔으며 서녀庶女중 장녀는 덕신령德新令 이경례李鏡禮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영천군 이건李健의 첩이 되었으며, 다음은 유희량柳希亮의 첩이 되었다. 개의 장남 수창壽昌은 좌승지에 증직贈職되고, 다음은 명창命昌이다. 이인생의 아들 이제형李齊衡은 벼슬이 판결사이다. 수창의 장남 사는 호조참판에 증직되었고, 다음 홍은 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원문> 公旣卒, 家禍震剝, 文籍無徵, 公之八世孫禹鉉, 惟賢祖之行業, 卒就湮沒是悼, 凡公一言一事之雜出公私記聞者, 竭誠蒐摭, 裒成一錄, 屬範祖爲狀, 謹閱之曰 : “噫! 此公始終大略可傳也.” 遂綴屬爲辭如此, 以竢秉筆君子之考擇焉.

<역문> 공이 돌아간 뒤 가화家禍로 사라져 문적을 징험할 수 없어 공의 8대손 우현禹鉉이 현조賢祖의 행업行業이 갑자기 인멸湮滅되는 것을 슬퍼한 나머지 공이 한 말과 한 일이 공사公私의 기문記聞에 섞여 나온 것을 정성을 다해 수집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어서 나 범조範祖에게 공의 행장을 부탁하니 삼가 그 글을 살펴보고 말하였다. “아! 이것만 가지고도 공의 시종始終을 대략적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이네” 하고는 마침내 글을 지어 이와 같이 말을 만들었으니, 붓을 잡은 군자가 고증하여 가리길 바란다.

<원문> 資憲大夫, 刑曹判書兼知義禁府ㆍ春秋館ㆍ五衛都摠府都摠管錦城丁範祖撰.

<역문>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兼知義禁府ㆍ춘추관春秋館ㆍ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금성錦城 정범조丁範祖 짓다.

IV. 두 왕자의 피납 경위

선조 25년(1592) 4월 28일. 신립장군이 이끄는 충주 전투가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있자, 선조는 즉시 대신과 대간을 불러 놓고 파천播遷에 대한 말을 꺼내었다. 그러나 모든 대신들은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그 중에서도 영중추부사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은,

“종묘와 원릉園陵이 모두 이곳에 계시는데 어디로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경성京城을 고수하여 외부의 원군援軍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고 했으며, 우승지 신잡申磼은,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했으며, 수찬 박동현朴東賢이,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을 멘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

라 하면서 목 놓아 통곡하자, 선조는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파천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고 선조의 본래 생각되로 이루어졌다. 4월 29일에 윤두수尹斗壽에게 어가扈駕를 호종할 것을 명하고, 김귀영金貴榮과 윤탁연尹卓然에게는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받들게 하고, 한준韓準과 이개李墍에게는 순화군順和君 이보를 받들게 하여 함경북도로 나가도록 명하자 4월 30일 새벽 비를 맞으면서 길을 떠났다. 이때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황혁黃赫은 자청하여 순화군順和君을 따라 나섰다.

김귀영金貴榮ㆍ윤탁연尹卓然ㆍ임해군臨海君 일행은 어명에 따라 함경도 회령에 도착했다. 5월 21일에는 조정에서 두 왕자의 음식을 풍성하게 대접하지 말도록 하서下書하였고, 6월 4일에는 함경도로 두 왕자王子를 모시고 간 배행관陪行官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과 칠계군漆溪君 윤탁연尹卓然은 긴박하지 않은 일로 치계馳啓하였다.

“왕자들을 나누어 보내어 인심을 진정시키려는 성념聖念의 소재는 실로 보통이 아니시건만 신들이 변변찮아서 부로父老들을 위유慰諭하여 덕의德意를 선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눈물을 닦으면서 우러러 절을 하고 기뻐하며 생기가 도는 것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천만 마디의 빈말은 조그마한 실제의 혜택만 못한 것입니다. 본도는 근래에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운송함으로 인하여 사람은 집집마다 다 전쟁에 나아갔고 마굿간에는 말 한 필도 없으니, 목장의 말 1백여 필을 혹은 요로要路의 쇠잔한 역에 지급하기도 하고 혹은 재능은 있으면서 말이 없는 병졸에게 지급하소서. 그리고 함경도의 공물貢物 및 문소전ㆍ연은전에 진상하는 물선物膳 등을 감면하라는 은명恩命을 내려 백성들이 다시 생기를 찾도록 하소서.”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다소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9월 4일에 느닷없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그리고 재신宰臣 5∼6명이 모두 사로잡혔다”는 소문을 듣게 되자, 즉시 최홍만을 불러 하문下問하니,

“유복有福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와서 전해주기를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재신宰臣 5∼6명이 모두 사로잡혔다.’고 하였으나 정확히 근거할 만한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동궁도 감히 치계馳啓하지 못하고 우선 사람들을 강계江界 등지로 보내어 정탐하고 있습니다.”

라고 회계하였다. 혈육이 적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에 놀란 선조는 다급하게 “북도北道에서 사로잡힌 왕자들이 혹 경성으로 오거든 순찰사와 감사에게 은밀히 유고諭告하여 여러 가지 계책을 써 탈출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연유로 두 왕자와 호종한 재상들이 포로가 되었는지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9월 16일 선조는 근자에 회령 땅을 갔다 왔다는 이희득李希得을 불러 두 왕자가 붙잡힌 이유를 물었더니, “신이 듣기로는 적장이 명령을 내려 현상금을 걸고 왕자와 대신을 사로잡았다고 하였습니다.”라는 대답만을 들었다. 시원한 대답이 아니었기에 궁금이 더해진 선조는 이번에는 경기 관찰사 심대沈岱를 불러 물어 보았더니,

“함경도의 주회인走回人 장복중張福重이 병조 좌랑 서성徐渻을 따라다니며 강원도 지방에서 군사를 모으다가 왜적에게 쫓겨 함경도 함흥부咸興府로 들어갔는데, 왜적이 대거 핍박하자, 원임原任 의정부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황정욱黃廷彧, 원임 승정원 우부승지 황혁黃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허명許銘 등이 제1왕자와 제5왕자를 받들고 북도의 회령진會寧鎭으로 피난하여 들어갔다고 합니다. 또한 북도 절도사 한극함韓克諴과 남도 절도사 이영李瑛 등은 만령蔓嶺 싸움에서 패하여 종적을 모르게 되었고, 적세는 점점 치성하여 7월 26일 회령진을 함락시킴에 따라 왕자와 김귀영 등이 한꺼번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라고 비교적 소상하게 피랍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제는 두 왕자가 피랍된 것이 확실해 지자, 선조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궁리 끝에 9월 25일 요동 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事使에게 구원병을 청하였다.

“본인이 전에 왜적을 피해 서쪽으로 오면서 생각하기에, 함경도는 선조가 기업을 일으킨 땅이고 또 그 지세가 견제하기에 편리함이 있을 듯하여 재신宰臣 김귀영 등에게 큰아들인 진과 함께 함흥부로 나아가도록 하였고, 또 황정욱에게는 다섯째 아들인 보와 함께 강원도 철원부鐵原府에 머무르면서 군사를 모집, 왜적을 막아 길을 끓음으로써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본인의 처음 생각에는, 오직 두 도를 수습하여 회복하는데 협찬하기를 바랐었는데, 뜻밖에 대군이 몰아쳐 끝내 사로잡히게 되어 골육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더욱 비통하고 분합니다.

지금 둘째 아들이 임시로 국사를 처결하며 문무 배신文武陪臣을 거느리고 본도 성천부成川府에 머물면서 의병을 규합하여 적도들을 소탕시킬 방법을 도모하고 있습니다만, 성천과 강동은 매우 가깝습니다. 이 적도들이 반드시 이곳의 수비가 단약하다는 것을 알 터인데 얕은 여울을 건너 흉계를 부린다면, 참으로 명군이 압록강을 미처 건너기도 전에 본국은 이미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속히 전보轉報하여 군사를 진발시켜 구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호소하였다.

이렇게 왕자를 구출하고자 노심초사하는 선조에게 안변安邊에서 비밀 문서가 왔다. 왕자와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의 언서諺書였다. 문서의 내용은 금ㆍ은과 호피ㆍ표피 등의 물건을 왜통사倭通事를 시켜 들여보내 준다면 탈출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안변에 보낼 물건을 즉시 준비하라고 비변사에 하교하였다. 임금의 초조한 심정을 잘 알고 있는 비변사는 하명이 떨어지자, 곧 바로 물건들을 챙겼다. 그러고는,

“안변으로 들여보낼 물품을 이미 준비하였습니다. 다만 표피는 이곳에서는 구득하기가 어려운에 주단紬緞도 그들이 요구한다 하니 헤아려서 보내소서. 별감別監 전운田耘과 김허롱金許弄을 이들과 동행시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그곳에 사로잡혀 있는 재신과 당상 및 관계가 중한 조신朝臣에게는 은 각 10냥을 이들 편에 보내 은밀히 가지고 가서 나누어 줌으로써 뒤따라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모색토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 왕자는 그만두고라도 재신들까지 포로가 되어 적정賊庭에서 무릎을 꿇는 곤욕을 치르고 있다니 명절名節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러니 스스로 도망해 나오는 것은 모르겠으나, 조정에서 뇌물을 주고 데려온다는 것은 사리에 어떨지 모르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그러자 다시 비변사에서는,

“신들의 처음 생각으로는 ‘사로잡힌 재신들은 본래 왕자를 배행陪行하던 사람들로 계책이 잘못되어 결국 사로잡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일이 놀랍고 그 정상이 애처롭다. 그들이 굴욕을 감수하는 것은 아마 왕자 때문일 듯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국가에서 훈구勳舊의 신하들을 돌보는 뜻에 비추어 볼 때 비록 은을 나누어 주어 돌아올 수 있게 도모하는 것도 크게 해로울 것은 없을 것입니다.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런 가운데에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이 오랫동안 적에게 잡혀 있다가 성천成川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의 서장書狀과 적장 청정淸正의 편지가 들여 있었다.

이홍업李弘業이 가져 온 한극함韓克諴과 이영李瑛 등의 서장書狀에는,

“일본에서 차정差定되어 나온 장수 중 한 사람인 청정淸正이라는 장수가 이번에 신들을 불러 ‘일본이 조선과는 오랫동안 인국隣國의 수호를 닦아왔으므로 당초부터 다투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대마 도주對馬島主 종의조宗義調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두 나라의 서계書契에 막히는 것이 많아졌고 피차의 사이를 이간하기까지에 이르렀으므로 이미 죄를 받아 복주伏誅되었다.

당초 우리나라의 군사가 온 것은 대명大明을 바로 침범코자 하여 귀국의 길을 잠깐 빌리고 또 선도先導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군행軍行이 편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변방을 지키는 신하들이 이런 뜻을 알지 못하고 부산 등지에서 먼저 무기를 썼기 때문에 난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중략>

관백關白이 이국異國에 대하여 막아 싸우려는 나라는 쳐서 멸망시키고 강화하려는 나라와는 굳게 우호를 맺고 있다. 귀국의 군현郡縣은 거의 일본의 소유가 되었으나 대왕이 다시 인국隣國과의 맹약을 맺으려 한다면 그중 한두 도를 귀국에 돌려줄 것은 물론 전처럼 신의를 지킬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을 갖추어 대왕께 진달하도록 하라. 평안도에서 사신을 보내어 답장을 보내되 좋은 뜻으로 허락해 온다면 곧 바로 관백에게 아뢰어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겠다.’고 합니다.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한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과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의 서장에는,

“황혁 등이 지난 7월 24일 회령부會寧府에서 사로잡혔으나 그 일의 곡절을 치계할 길이 없어 혼자 속만 태울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일행이 안변부에 압송되어 와 머무르고 있은 지 이미 한달이 되었습니다. 왕자와 대소 일행의 제관諸官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다른 것은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일본의 장군이 행재소行在所 등을 다그쳐 묻기에 ‘6월 초순부터 길이 막혀 알기가 어렵다. 지금 어느 곳에 계신지 알 수가 없는데 틀림없이 이미 요수遼水를 건넜을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지난번에 이 도에 계셨다고도 했다.’고 답했습니다. <중략>

단지 당신네 나라 국왕이 언지言旨를 차분히 지켜 2∼3도로 경계를 삼아서 국경을 나누고 군사를 파할 것은 물론 양국의 강화를 논하고자 한다. 모름지기 재상 중에서 한 사람을 파견시켜 함께 편부에 대해 의논케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 군주의 인신印信이 적힌 문서를 내보였으나 맹랑한 것으로 준신準信할 것이 못되었는데도 그는 매우 믿을 만한 것이라 하였습니다만 합당한 문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지금 계신 곳을 알지 못하니 사람을 시켜 찾아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을 하기에 감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품의합니다. <중략>

일본 장군의 서계 1통을 아울러 첨부하여 올리니 참고하소서.”

하는 내용이 있었다. 10월 23일 적의 서장을 가지고 온 이홍업을 의금부가 추고한 결과 선조가 궁금해 하는 왕자들의 행적의 일부가 진술 되었다.

“신은 7월 24일 경성鏡城에서 사로잡혔는데 왕자도 7월 24일 회령부會寧府에서 사로잡혔다고 했습니다. 날짜는 기억되지 않는데 9월 초승에 적장 청정淸正이 환군還軍할 때 왕자도 함께 그곳에서 나왔었습니다. 옥교屋轎를 만들었는데 위아래며 사방을 돗자리로 싸 묶었습니다. 두 왕자와 두 부인은 모두 사람을 시켜 메게 하였는데 두 왕자는 때로 말을 타기도 하였습니다.

쉬는 곳은 공아公衙와 군사郡司나 아니면 민간인 집이었고, 유숙할 적에는 방문을 막고 새끼로 얽어 묶었으며 많은 왜인을 사방에 수직守直으로 정하여 세우고 밤새 불을 밝혔습니다.

안변安邊에 도착하여서는 두 왕자가 공아에 유숙했는데 왜적들이 생선과 소 한 마리를 보내어 공궤하였습니다. 이런 따위의 일들만이 있었을 뿐 별달리 곤욕을 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은 공아의 각방에 구류되었고 황혁黃赫은 부처夫妻를 각방에 나누어 수감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와 혼인을 맺었다는 이유로 곤욕이 잦았는데 칼을 빼어 목을 치려하기도 했습니다. 한극함韓克諴은 성밖 용당龍堂의 왜적이 만든 토실土室에 감금하고 따로 수직을 세웠으며 문몽헌文夢軒과 이신충李信忠은 신과 한방에 같이 갇혀 있었습니다.

지모가 있는 사람이 안팎에서 서로 응한다면 왕자를 탈출시킬 꾀를 부려봄직한 형세입니다. 배신陪臣들은 각기 멀리 수감되어 있어 꾀를 낼 수가 없습니다.”

하는 내용이었다.

임진년 한해가 다 지나 가도록 두 왕자를 구출하지 못했다. 영의정 최흥원이 대신들과 연일 머리를 싸매고 논의를 거듭하였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였다. 선조는 무엇보다도 추운 날씨에 무사한지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안좌도 방어사 정희현이, “2월 27일 안변安邊에 머물던 두 왕자를 모시고 정평定平으로 들어갔는데 아침부터 신시申時까지 잇달았습니다. 필시 이는 적도가 중국 장수가 본도로 군사를 이동시킨다는 소식을 듣고는 함흥咸興과 고원高原 두 고을에 있는 적들과 합세하여 큰 병력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라는 치계를 하였고, 이어서 같은 날 함경도 순찰사 홍세공은 “왜적이 두 왕자를 데리고 함흥부로 향했다”고 치계하였는데 내용 중에는

“포로가 된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의 첩자妾子인 김천金闡과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의 종인 돌모치乭毛赤 등이 이달 26일 도망해 진영에 도착했습니다. 그 근본 원인을 자세히 물어보니 ‘적은 중국군이 평양을 소탕한 뒤에 10만 여의 군사가 안변으로 넘어온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포로가 된 인물들을 다수 살해했다.

적장 청정淸正은 두 분 왕자와 왜적 2천여 명을 이끌고 함흥부咸興府로 향해 갔는데 장차 진을 통합하여 돌아가려는 계책입니다. 영부사 김귀영金貴榮,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 승지 황혁黃赫 등은 안변부安邊府에서 토굴에 그대로 갇혀 있고, 북우후北虞候 이범李範, 온성부사穩城府使 이추李錘, 회령부사會寧府使 문몽현文夢軒,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신희수申希壽, 전 경성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의 가속家屬은 전부 살해되었습니다.’

고 하였다. 따라서 왜군이 함흥부에 집결하여 진을 통합해서 침공한다면, 두 왕자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선조는 2월 11일에 서둘러 이 제독에게 다음과 같이 이자移咨하였다.

“제독에게

이달 4일에 함경도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치계하기를 ‘남쪽의 각 주군州郡이 보고하기를, 각처에 머물던 왜적들이 모두 무리를 지어서 함흥부로 향해 간다고 하고, 또 일찍이 포로가 된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본디 수행하던 배신陪臣 원임原任 의정부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판중추부사 황정욱黃廷彧, 원임 승정원 우승지 황혁黃赫을 묶어 가지고 먼저 함흥부에 도착했고, 당시 포로가 된 회령진 절도사會寧鎭節度使 문몽헌文夢軒 등 관원 10여 인을 살해하였으며, 두 왕자와 수행하는 배신들을 굳게 지키면서 갖은 모욕을 주니 형세가 더욱 위급하여 끝내 온전히 보존할 수 없겠다.’고 하여 당직當職은 알았습니다.

소방小邦은 오래도록 적의 화를 입어 살륙을 당하고 불타버려 말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뜻밖에 당직의 두 자식 또한 적에게 잡혀 가서 오래도록 적진에 억류되어 석방되지 못하였는데 백방으로 구출하려 하나 끝내 좋은 방책이 없어 밤낮으로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중략>

바라건대 격문檄文 한 통에 달래는 말과 협박하는 말을 갖추 써서 엄하게 이해득실을 보이되 ‘본국의 왕자 두 사람과 권속 및 관원들을 온전히 돌려보내 준다면 실로 너희들을 대접하여 죽이지 않고 상을 내릴 것이다. 만약 혹시라도 천도天道를 어겨 끝까지 세력을 믿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쳐부수어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써서 사리에 의거하여 되풀이 깨우치고 준엄한 말로 협박하여 적에게 보인다면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후인 3월 4일에 전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이 적중賊中에서,

“2월 20일에 중국 사신이 서쪽으로 돌아가고 왕자 일행은 적추賊酋가 데리고 떠나서 22일에 남곡嵐谷에 도착하였습니다. 적추가 강화를 이루지 못하여 늘 한스러워하는 뜻이 있으므로 왕자께서 적추를 보고 일행 중에 한 사람을 보내어 강화의 일을 다시 의논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적추가 곧 따랐으므로 왕자께서 소신을 시켜 행재소에 급히 진달하게 하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왕자의 서장에 있습니다. 적추가 중국의 사신과 경성에서 다시 강화를 의논하기로 약속하고 나서 기대하는 뜻을 현저히 드러냈으니 사세가 종전에 비해 매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라고 치계하였다. ‘사태가 쉬워질 것’이라는 전갈에 모처럼 선조는 흐뭇한 마음이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김귀영이 풀려서 조정에 돌아왔다. 그런데 모든 대신들이 그 동안의 고생을 위로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왕자들은 적진에 남겨두고 자신만이 목숨을 건져서 나왔다’면서,

“급제及第 김귀영金貴榮이 일찍이 대신으로서 왕자를 보호하라는 명을 받들고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적의 수중에 빠지게 하고 자신마저 사로잡혔으니 국가의 수치됨이 그지없습니다. 그런데도 여태 군부君父의 원수를 전혀 모르고 한결같이 흉적들의 말을 따라 화의시키겠다고 몸을 빼서 돌아왔습니다.

만약 그대로 두고 문죄하지 않는다면 인신人臣의 의리가 이로부터 끊어지고 강화의 의논이 이로 인해서 잇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으려는 의리가 밝아지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이 모두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만을 편안하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찬출竄黜을 명하시어 호오好惡의 올바름을 보이소서.”

라고 김귀영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귀영이 황정욱黃廷彧 등과 같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북도北道로 피난했는데, 회령會寧에 이르러 토민 국경인鞠景仁 등이 모반하여 어쩔 수 없이 왕자와 자신들이 붙잡혔을 때 무슨 방도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조에게 적장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본인이 빠져 나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렸고, 비록 적진이긴 했지만 두 왕자를 극진하게 모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나이가 75세나 된 노인이요, 직분으로도 좌의정까지 지낸 원로중신에 대해서 너무나 심한 공격을 하였다.

이처럼 김귀영의 추국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3월 26일에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

“관북의 적이 상경할 적에 두 왕자군께서 한 가마를 타고 두 부인께서도 한 가마를 탄 채 함께 오셔서 당시 남대문 밖 적진賊陣에 있었는데, 황정욱黃廷彧 부자도 그 진중에 있었습니다.”

라고 치계하였다. 두 왕자가 회령에서 서울로 이동한 것이다.

4월 20일에는 이언우李彦祐ㆍ함인수咸麟壽ㆍ정석수鄭石壽 등을 처형하였다. 이들은 함경도 회령부會寧府 사람으로 반적叛賊 국경인鞠敬仁과 함께 모의하여 자칭 삼대장三大將이라 하며 두 왕자와 여러 재신들을 묶어 왜적들에게 넘겨 주었고 국경인을 추대하여 왕을 삼으려고 까지 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그 동안 중국의 경락은 ‘왜적이 왕자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진토進討하겠다.’는 뜻을 반복해서 말했었고, 이들이 서울을 떠날 때에는 풀어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왜병들은 서울을 떠나면서 왕자를 내어주지 않고, 다시 ‘죽산竹山이나 충주忠州 등지에 가서 송환한다.’고 했다.

그러자 더 이상 왜적들의 농간에 당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4월 20일 경성에 진주한 중국군 중에서 1만 5천명의 군사를 내어 대장 장세작張世爵과 이여백李如栢으로 하여금 ‘패주하는 왜적을 섬멸하고 두 왕자를 구출하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런 것들을 예측한 왜적들은 중국 사신들과 우리 두 왕자를 후미에 두고 행군하고 있기 때문에 공격을 할 수 없게 되자, 왜적을 쫒던 중국군中國軍이 중도에서 포기하고 되돌아왔다.

이렇듯 왕자를 구출하려는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 가운데, 의금부에서는 5월 25일 김귀영을 조사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선조에게 아뢰었다.

“김귀영金貴榮의 일을 판부判付한 내용에 ‘대신의 신분으로서 적의 뜨락에 무릎을 꿇고 오직 강화講和를 구걸하는 것만이 능사인 줄로 알아서 왕자王子를 버리고 빠져나올 것을 도모하였으니, 책망할 가치조차 없었다.’ 하시고,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에 대신들과 의논하니, 윤두수尹斗壽의 의논은 ‘삼가 판하의 내용을 보건대, 무너지는 기강을 정돈하고 인륜을 붙들어 세운 것이 지극하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그 사이에 다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김귀영은 70세의 노쇠한 몸으로서 일이 잘못되어 붙잡혔는데 죽지 않은 데에 죄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왕자王子가 그 곳에 계셨으니, 그가 자결하지 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만일 적의 뜨락에 무릎을 꿇고 강화를 구걸하는 것만이 능사인 줄 알았다는 말로써 그를 죄준다면 아마도 미안한 일이 아닐까 한다. 현재 그가 빠져나온 것도 바로 왕자의 분부에 의한 것이니, 그렇다면 이 역시 그 한 몸의 독단적인 사계私計는 아니다. 아침에 죽을지 저녁에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 구차히 생명을 보전하려 하기를 언자言者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였겠는가. 신은 매번 탑전榻前에서 이 생각을 말씀드리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하교를 받드니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말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김귀영이 적에게 잡혀 있었을 때에 매우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 탓으로 극도로 몸이 수척해졌으며 무릎을 꿇고 화친을 요청한 일도 없었고, 왕자가 편지를 주어 내보낼 때에도 왜적의 추장酋長은 김귀영이 거의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여서 그가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다 하여 내보냈다고 합니다. 지금 또 한극함韓克諴이 한 일에도 별도로 동참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판하한 내용을 참작해 보라는 분부를 받들고 감히 분간分揀하여 입계人啓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니, 선조가 이르기를,

“만일 김귀영이 무릎을 꿇고 화친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내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에 화친을 구걸하는 일로 편지를 써서 보내왔겠는가. 감옥에 가두는 것은 필요 없으니 유배지로 보내도록 하라.”(上曰: “若非屈膝乞解, 則予在義州時, 貴榮何以乞和爲書, 而通之乎? 囚在無用, 還送配所。”

하였다.

왕명王命을 받들어, 75세 노인이 된 원로중신 김귀영은 서둘러 유배지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몇일 뒤인 5월 30일에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김귀영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자, 선조는 잠시 만감이 교차하여,

“김귀영의 시체는 검시檢屍하지 말라. 그의 아들 김천金闡은 의심할 만한 흔적이 있기는 하나, 현재 드러난 죄상이 없으니 풀어주어 그 아비를 매장하게 하라.”

고 하였다. 임해군을 호종했던 김귀영은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한 채 유배길에서 돌아가셨다. 그런 가운데 6월 26일에 회령부사로 있던 정기룡鄭起龍이,

“본도의 반민反民 급제及第 김수량金守良 등 16인은 왜적에게 투항하여 여러 재신宰臣들을 결박하거나 왕자를 왜적에게 내어 주었던 자들이므로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효시하고 나서 머리ㆍ손ㆍ발을 상자에 담아서 관찰사에게 보냈습니다.”

라고 치계하였다. 두 왕자가 왜적에게 피랍되었을 때의 사람들이 한 사람씩 형을 받는 셈이다.

7월 15일에는 두 왕자와 함께 적진에 남아 있었던 황정욱이 풀려났다. 그는 풀려 나오자 곧 바로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에게 달려가서 풀려나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면서 조정에 보고해 달라고 하니, 한효순韓孝純은 모두가 두 왕자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치계하였다.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황정욱黃廷彧이 이달 20일에 부산을 출발하여 어제 저녁에 대구大丘에 도착하여서 신에게 단자單子를 올려 조정에 전달轉達하게 하였습니다. 그 단자에 ‘비무卑務가 왕자王子를 모시고 5월 6일 밀양부密陽府에 도착하니, 적장賊將이 우리 일행一行 모두를 배에 태우고서 그들의 나라를 향해 출발하여 다대포多大浦 앞 바다에 이르렀는데, 부산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적장 셋이 와서 왕자를 뵈옵고 지극하게 위로하면서 말하기를「지금은 여름이라서 바다를 건널 수 없으니 안심하고 이곳에 머물러 계시면 우리들이 주선하여 위험에서 면하게 해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관백關白의 서신을 가지고와서 왕자께 보여 주었는데, 그 글에 「조선 왕자가 이곳에 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서울로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배를 돌려 김해金海에 정박하였다가 5월 23일에 부산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머무는 곳에 기류羈留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명사明使 두 사람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명사가 돌아오기를 고대하였으나, 6월 22일에 평행장平行長이 일본에서 먼저 나와서 “강화가 되든 안 되든 간에 포로로 잡은 왕자는 방송放送한다. 그러나 진주목사晉州牧使가 우리 일본인을 많이 죽였으니 이 원수는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심유경沈惟敬이 날마다 왕자를 방송하여 함께 갈 수 있게 하고 또 진주에 군사를 가하지 말 것을 요청하니, 소서행장이 말하기를「왕자는 오래지 않아서 돌려보낼 것이니 우선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유경이 부인들과 늙고 병든 배신陪臣들을 먼저 방송하기를 청하니, 행장이 “부인을 먼저 방송하면 서로 근심하고 그리워하여 병이 생길 것이다. 늙고 병든 사람은 중요하지 않으니 먼저 방송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경이 먼저 비무卑務를 대동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왕자께서 돌아오실 때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여 들여보내느라 7∼8일이 지났으므로 이렇게 지체하는 사이에 혹시나 왕자의 행차가 나오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서둘러 달려오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대죄待罪합니다.’

갖은 고초를 감내했지만 황정욱도 김귀영과 마찬가지로 왕자를 남겨둔 채 적진에서 홀로 빠져 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곱게 보지 않았다. 7월 28일 선조는 ‘잡아다가 추국하라.’ 하였다.

8월 2일에 삼성三省이 모여 황정욱黃廷彧을 추국하였는데, 이때 황정욱의 공초는 다음과 같았다.

“제가 당초 승여乘轝가 성을 떠나실 적에 황급히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동파관東坡館에 도착한 뒤 알현謁見하였더니, 왕자王子 보호의 임무를 주시고 이어 방백方伯들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소호召號하라는 임무를 주셨습니다. 한 몸에 두 가지 임무를 겸하여 받았으니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오래 머물러 있을 형세가 아니어서 곧 철원부鐵原府에 도착하여 양호兩湖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였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전혀 없고 대적大賊은 이미 포천抱川의 길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왕자를 모시고 회양부淮陽府로 피란하였으나 적의 세력이 점점 가까워 오므로 부득이 추지령楸池嶺을 넘어 통천通川에 도착하니, 또 수많은 적선賊船이 동해東海로 오고 있다는 비보飛報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안변安邊으로 들어가니 적이 이미 영하嶺下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행재소行在所로 가려 할 즈음에 대가大駕와 중전中殿께서 이 도로 옮겨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신자臣子의 도리 상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뒤이어 기성箕城이 함락당하고 대가는 멀리 용만龍灣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부자父子가 함께 통곡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넋이 다 빠졌습니다. 이에 북도北道의 민심이 이미 배반한 줄도 모르고 다만 깊이 들어가면 혹시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서 회령會寧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왕자가 적에게 잡히는 환란을 초래하였으니 왕자를 잘 보호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호의 임무는 일에 모두 번잡스러운 것이고, 보호의 임무는 심장深莊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어서 두 가지 일이 서로 모순되어 겸전하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화환禍患의 빌미를 누구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반민叛民이 왕자를 묶어 적에게 넘겨주자, 적은 기화奇貨로 여겨 강화講和를 하고서야 돌려보내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어린 왕자가 죄없이 죽게 될 것을 걱정한 나머지, 왜인의 진정을 계달啓達하자니 매우 애긍哀矜한 노릇이고 그렇다고 배행陪行한 자로서 저들의 말을 무시해 버리고 계달하지 않는다면 잔인무상殘忍無狀한 사람이 될 뿐더러 보호하는 뜻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적정賊情을 밀장密狀으로 써서 보냈으니, 이는 의리상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졸간에 쓴 것이라서 혹시 그 사이에 땅을 끊어주라는 말이 있었는지를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말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어렴풋이 기억되기로는, 쪼개어 노끈으로 만들어 어지럽게 쓴 글을 봉과封裹한 것과 그 밀서에, 거짓으로 화친을 허락하고서 서서히 도모하라는 말로 끝을 맺었던 것 같습니다.

신 및 김귀영金貴榮ㆍ이영李瑛ㆍ한극함韓克諴과 천식賤息 황혁黃赫이 각기 다른 방에 갇혀 있어 서로 통할 수가 없었고, 또 그때 안변安邊 사람이 문서文書를 가지고 가다가 잡혀 와서 50여 명이 모두 도살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틈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기초起草하면 정서正書할 겨를도 없이 그 초본을 황급히 올려보냈기 때문에 조리가 없고 모양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으니, 만약 그 글을 조사하여 죄를 주기로 한다면 죽어야 될 자가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 위장僞狀은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은밀히 당부하여 수화水火 속에 던져버리고 밀장密狀만을 행재소行在所에 전달하라고 하였는데, 이홍업李弘業ㆍ이진충李盡忠이 전달한 것은 모두 위장이며, 이혜李蕙만이 진·위眞僞 두 서장을 다 가지고 갔으나 밀장만을 올렸고, 김귀영金貴榮은 위장만을 가지고 갔으나 올리지 않았습니다. 신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강화講和의 일을 비록 거짓으로 허락하기는 하였지만 저의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어려울 듯하여 천식賤息과 모의하기를 ‘할지割地에 대한 일은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로서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고서, 곧 장문長文의 글을 만들어 한극함韓克諴의 군관軍官 이장배李長培에게 정서正書시키고, 또 언서諺書로 번역하여 통사通事 함정호咸廷虎로 하여금 적중에 선포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지난 1월 18일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소장小將과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나라 사람 심이沈怡를 보내어 천식 혁에게 와서 묻기를 ‘조선의 땅을 천자가 끊어주려 하면 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혁이 답하기를 ‘조선과 중국은 집안의 부자父子와 같은 사이인데 어찌 땅을 떼어줄 리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소장이 달려가서 청정에게 이것을 보고하고, 다시 돌아와서 신에게 이것을 묻기에 신이 ‘너희 나라가 아무 까닭없이 침범해 왔는데 천자께서 어찌 고황제高皇帝께서 주신 땅을 끊어서 너희들에게 주겠는가.’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시 말이 없었습니다. 뇌물을 바치고서 생환하기를 도모하였다는 말은 어느 곳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천만 뜻밖입니다.

신은 행리行李를 반민叛民들에게 다 빼앗겨 가진 물건이라고는 보내주신 백금白金 10냥뿐이었습니다. 안변安邊에서 풍중영馮仲纓이 거짓으로 화친을 할 때 왕자 탈출을 도모하기 위하여 백금을 수합收合해서 적장에게 준 일은 있지만, 신 혼자만이 백금을 주고서 애걸했다고 와전訛傳된 것입니다. 그리고 왜적의 뜰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더욱 무리無理합니다. 개 돼지 같은 왜적이 만약 격노한다면 왕자라도 온전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긴 하였지만 평소에 그들이 왕자를 알현할 때면 갓을 벗고 맨발로 뜰 밑에서 서서 나배羅拜 하였으므로 우리 일행들도 인국隣國의 대부를 만나면 약간 공경하여 대하였을 뿐, 무릎을 꿇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지 않아 왕자께서 나오게 되면 자연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더구나 신과 김귀영은 적들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한번도 만나보지 않았는데, 어찌 신 홀로 무릎을 꿇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천만 무리한 말입니다. 땅을 베어 준다고 했다는 것과 뇌물을 바쳤다는 것과 무릎을 꿇었다는 일에 대해서는 함정호咸廷虎ㆍ이장배李長培ㆍ심이沈怡와 조인징趙仁徵ㆍ김운金雲ㆍ기언인奇彦仁ㆍ김천金闡등을 추문推問하시면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중략>

이진충이 위장을 받아가지고 갈 때 두 왕자와 이영李瑛ㆍ황혁黃赫 등은 남대문南大門 밖에 있었고 저는 장흥고동長興庫洞에 있었습니다. <중략>

유격이 말하기를 ‘두 왕자는 천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방송하더라도 부인夫人 이하와 노병자老病者들은 먼저 방송하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부인이 먼저 떠나면 피차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병이 생길 것이니 먼저 보낼 수 없고, 노병자는 먼저 보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만 홀로 먼저 나가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신이 만약 왕자를 버리고 먼저 나오고자 했다면 안변安邊에 있을 때 적장이 왕자를 모시고 함흥咸興으로 들어갈 즈음 그 기회를 틈타 부사府使 최전崔錪이 인마人馬를 보내어 신을 탈출시키려 하였을 때 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호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금구金軀를 버려 두고 먼저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최전에게 물어보면 허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왕자께서 나오시면 일행들의 시비ㆍ정위情僞를 조정에서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이 일은 신 혼자서 책임질 성질도 아닌데 먼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중죄重罪를 덮어쓰게 되었으니 더욱 애매합니다.

신은 양조兩朝의 구신舊臣으로 휴척休戚을 함께하였으며, 왕실王室과 혼인까지 하였으므로 은분恩分이 지극히 중하니, 신의 순국徇國의 충성은 진정 보통 신하들의 유가 아닌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급한 사이에 몸을 보전하고자 하여 평소에 지키던 바를 잃었다면 다시 무슨 면목으로 곧장 행재소行在所로 와서 삼경三京이 탕패蕩敗되고 이릉二陵이 참변을 당한 뒤에 군부君父를 뵙고자 하였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이와 같이 한다면 금수禽獸도 그런 자가 먹다 남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 유무를 임금께서 굽어 살피시어 그때에 함께 있었던 여러 사람과 위장僞狀의 본문本文을 모두 가져다 빙문憑問하여 만일 일호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비록 중전重典을 받고 죽더라도 달게 여기겠으니, 상고하여 분간하소서.”

구구절절 사건의 전말을 밝힌 황정욱의 공초를 본 선조는 “황정욱을 더 이상 형추하지 말고 귀양 보내라” 명하였다.

이로서 임해군을 호종하던 황정욱도 귀양길에 올라서 두 왕자를 호종하던 최고위급 인사 두 사람이 모두 귀양을 가는 것으로 책임을 물었다.

선조 26년(1593) 8월 10일. 형조판서 이덕형이 ‘왕자가 적진에서 나왔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 실제로 두 왕자가 왜적으로부터 돌아와서 길 왼쪽에서 알현謁見하였다. 1년이 넘도록 그렇게 애를 태웠던 두 왕자들이 건장한 모습으로 귀환한 것을 보고 좌의정 윤두수가 통정通政 이상을 거느리고서 아뢰기를,

“두 왕자께서 돌아오시니, 신들은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나, 슬픔도 견딜 수 없습니다. 신들의 위감慰感의 뜻을 계달啓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두 왕자가 답하기를,

“망극한 황은皇恩을 무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선조의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이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건이 약 1년 4개월만에 끝이 났으나 이 와중에서 두 왕자를 보호하지 못한 죄목으로 아까운 명신 김귀영金貴榮대감이 희생되는 억울함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김귀영 대감이 억울하게 죽은 지 70여년이 지난 1664년(현종 5)에 김귀영의 손자가 상언하여 관작이 회복되었고, 이어서 숙종 때 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V. 동원東園의 행적行蹟

동원東園은 어려서부터 주변으로부터 ‘탁월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청풍淸風관아에서 갓 태어났을 때, 평소 성요술星耀術에 정밀했던 안찰사按察使가 “이 아이는 반드시 문장에 능할 것이고 벼슬은 정품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말로, 동원은 28세에 홍문관 정자로 벼슬길에 나아가서, 돌아가시기 까지 좌의정을 거쳐 상락부원군으로 47년 동안 벼슬길에 있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두 왕자가 왜적에게 피랍되는 바람에 삭탈관직하기 까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선조실록에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귀영金貴榮이 기우氣宇가 관후한 듯하고 국량도 천박하거나 협애하지 않았다. 이름이 천거되던 때에는 문장과 명망이 한 때에 유명하였고, 출세한 뒤에도 한 번도 파직당하지 않고서 지위가 태정台鼎에 이르렀다. 다만 말에 규각이 없고 일에 임해 주선을 잘 했기 때문에 혹 모릉模稜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는 기록이 있다. 동원의 주요 치적을 몇 가지로 묶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늘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했다.

모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어느 편에 서기를 꺼려하였다. 그래서 선조가 “좌상 김귀영은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를 꺼려하여 이에 감히 아부하며 구차하게 남의 비위나 맞추려는 태도를 보이니 예로부터 이런 신하가 어디 있었단 말인가. 어짊과 간사함을 알지 못하면 이는 지혜롭지 못한 것이요. 알면서도 곧게 아뢰지 못한다면 이는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라는 핀잔을 받았지만 이에 귀 기우리지 않았다.

예를 들면, 1551년 32세 되던 해에는 홍문관 교리 겸 예문관 응교로서 을사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의 신원伸寃을 청하여 원혼들을 달래 주었고, 조정의 중신重臣 윤원형尹元衡의 죄악에 대해서 극론하였다.

또한, 정여립鄭汝立의 기축옥사己丑獄死 때에는, 변고가 벼슬아치들에게서 생겨나 연좌된 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될 수 있는 데로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을 내려서 억울한 선비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한, 사림士林들을 힘써 구해준 일이 있어 사람들이 공을 위해 위태롭다고 하였지만, 공은 동요하지 않고 잘못된 일이면 어김없이 차자箚刺를 올렸다.

특히 조정의 중신들의 잘못함에는 관용이 없었다. 예를 들면, 명종 5년(1550) 5월 16일과 7월 21일에는 부제학 경혼慶渾 등과 함께 경상도 관찰사 구수담 등을 가볍게 견책함이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고, 명종 6년(1551) 10월 24일에는 홍문관 부수찬으로 홍문관 부제학 조사수趙士秀, 직제학 이탁李鐸, 전한 윤춘년尹春年, 수찬 허엽許曄 등과 함께 조정의 중신인 영중추부사 이기李芑의 처벌을 주장하는 담대함이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을 위하는 일에는 앞장섰었다. 예를 들면, 동원이 우부승지로 발탁되기 직전에 참찬관으로 기전畿甸 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기전畿甸 고을들은 실농失農이 특히 심한데다가 우박마저 내려, 비록 조금 여문 데라 하더라도 모두 이삭이 떨어졌으므로 노약자老弱者들이 광주리를 들고 하나하나 줍고 있는 정상情狀이 지극히 가련합니다. 그런데 호조가 세입稅入만 중히 여기므로 수령들이 그 뜻만 본받아 전연 재결災結로 매기지 않고, 또한 지난 해의 공채公債를 독촉하여 받고 있으니, 백성들이 이산離散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라고 건의해서, “왕도王都에 가까운 지역의 민생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지난 해의 공채를 받지 말라는 것을 호조에 말하라.”는 윤지를 받아내기도 했다.

둘째, 나라가 바로 서고, 왕도王道가 바로 가는 일에 진력盡力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명종 19년(1564) 대사헌으로 재직시에 나라를 걱정한 나머지 올린 “진폐팔조소陳獘八條疏’”와 명종 20년(1565)의 “6간의 죄와 간계에 대한 차자” 그리고 “시정에 관한 12조목 상소”다. 이 중에서 “진폐팔조소陳獘八條疏”는 당시의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 중에서 가장 큰 것 여덟가지를 들어 상소하여, 병폐의 원인을 고발하고 그 구제책이 오로지 임금에게 있다고 직언한 유명한 상소문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사헌 김귀영金貴榮 등이 상소하였다.

“신들이 전하께서 즉위한 이후를 보건대, 깊은 못가에 서고 얇은 살얼음을 밟듯이 하여 자신을 억제하고 두려워하면서 안으로는 몸을 닦아 그다지 실덕失德한 일이 없으며, 밖으로는 국가를 다스려 크게 그르친 정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을 그치지 않아, 세자世子가 요절하고, 재앙이 거듭 닥치며 사상死喪과 화란禍亂이 매우 많습니다. 폐색閉塞의 달에 천둥이 치면서 비가 오고, 꽁꽁 얼어 붙은 계절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며, 심지어는 별들의 괴이함이 자주 천문天文에 나타나고, 산야에 사는 맹수가 도성에 모여들기까지 하니, 이 무슨 놀라운 변괴가 마음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려는 때에 일어나서 전하에게 걱정을 끼친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하늘의 경고를 자신의 잘못으로 자책하고, 상심해 하는 전교를 내리기까지 하면서 기탄없는 직언을 듣기를 바라시니, 온 나라의 신민치고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몇 달이 지나도록 충직한 선비가 천둥 같은 임금의 위엄을 범하고 극형을 당할 위험을 잊고서, 임금의 잘못된 거동을 바로 지적하고 조정의 잘못된 정사를 모두 진술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벼슬아치들은 모두 아첨하는 무리들이고, 초야에 있는 사람 중에도 수양이 깊은 무리가 하나도 없어서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중략>

현재의 일로서 말할 만한 것이 많지만, 우선 시병時病의 급한 것만을 조목조목 진술하겠습니다.

기강紀綱은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강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임금이 이를 힘입어 존재하게 되고, 국가가 이를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도 기강이 없으면 강성해지지 못하고, 정치하는 근원도 기강이 없으면 강성해지지 못하고, 다스림을 드러내는 근원도 기강을 버리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임금은 위에서 사무를 도맡아 통솔하고 신민臣民은 아래서 받들어 행함이, 마치 마음이 손발을 움직이고 뿌리가 지엽枝葉을 통제하는 것과 같아서, 명령이 나오면 백성이 따르고 법을 세우면 백성이 두려워하여, 궁전에서 호령하면 천리 밖까지 진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래에는 위복威福이 백성에게로 옮겨져서 임시로 변통만 하는 정사가 많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으며, 그럭저럭 예전대로만 하는 병폐가 있으니, 차츰 쇠퇴해지다가 끝내는 흩어져버리게 되고 말 것입니다. 모든 관리는 거만하여 명령을 받들지 않고, 어린 백성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법을 범하는 일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왕법王法이 두려운 줄을 알지 못하며 고을에서는 횡포하고 방자하여 죄없는 사람을 멋대로 죽이기도 하고, 도로에서 머뭇거리면서 곧장 적에게로 진격하지도 않으니, 전하의 기강이 떨치지 못한 데 가까운 게 아닙니까. 삼가 바라옵건데, 이 지경에 이른 근본 까닭을 생각하시어 전하의 일념에서 반성하소서.

궁금宮禁<중략>

사기士氣는 당연히 진작시켜야 합니다.

사기士氣는 당연히 떨쳐져야 합니다. 선비는 국가의 동량棟樑이고 치화治化의 근원이어서, 천하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이 달렸고, 풍속의 성쇠가 판가름되는 것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왕의 다스림에 있어서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을 급선무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차하고 안일한 풍습이 이루어지면, 신나라 왕망王莽을 찬미하는 아첨꾼을 따라 진작에 부끄러운 줄을 모르지만, 절의節義를 서로 숭상하면, 머리를 잘리고 심장을 쪼개이는 형을 당해도 보통일로 여겨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기가 국가에 있어서 이처럼 중한 것인데 진작시키는 방도를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신이 권력을 잡고서 총애만 믿고 교만하게 굴며 제멋대로 하여 위로는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사사로이 통치자의 상벌권을 농간하여 국가의 형편이 몹시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해 직언直言과 정론正論으로 그들의 간사함을 배척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지금의 사기는 통탄할 만합니다.<중략>

사기士氣가 싹트자마자 잘리어졌고, 겨우 사기가 샘솟자마자 막혀 버려서 점점 위축되어 날로 떨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어깨를 움츠리고서 아첨을 떨고, 꼬리를 치면서 애교를 떨며, 심지어는 완석完席의 의논을 통하여 자신을 변명하고자 하였고, 동료의 말을 누설하여 불측한 화에 빠뜨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사습士習의 구차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어떻게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이를 전환시키는 기미는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는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염치廉恥는 당연히 권장하여야 합니다.

염치廉恥는 응당히 힘써 닦아야 합니다. 예ㆍ의ㆍ염ㆍ치는 국가의 네 가지 벼리四維입니다. 네 가지 벼리가 펼쳐지면 국가가 다스려져서 편안해지고, 네 가지 벼리가 펼쳐지지 않으면 국가가 어지러워져서 망하게 됩니다. 염치가 국가에 있어서 이같이 관계가 깊으니, 권장하고 격려하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느슨히 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는 아직껏 청렴하고 삼가는 행실을 하는 자가 없고, 열읍列邑의 수령은 하나같이 재물을 탐내는 풍습이 자라나고, 녹봉祿俸만을 탐내는 마음이 기승을 부려, 가렴 주구를 싫어할 줄 모르고, 뇌물은 공공연히 행해지니, 배로 운반하고 육로로 운반되는 재물은 권세 있는 집으로 몰려들고, 가족 수를 계산하여 가혹하게 세금을 거둬들여 백성은 세금 잘 걷는 자의 손에 곤궁해졌습니다. 심지어는 관가官家 소유의 제방이 개인의 점유물이 되기도 하며, 농민의 물건이 모두 벼슬아치의 집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되었는데도 권세에 아첨하며 붙좇는 벼슬아치는 큰 흉년에 쓸 곡식을 남기지 않고 궁한 백성의 힘은 점점 다하여 가는데 탐욕스런 풍습의 해로움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하겠습니까. 크게 변화시키는 기틀은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교화敎化를 흥기시키는 요점은 풍속을 도탑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흥화지요興化之要는 풍속을 도타와지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먼저, 조정에서 일반 가정에 까지 통달해야 하니, 반드시 서울을 말미암아서 사방에 두루 퍼지게 하되 마치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지듯이 하여야 합니다. 어질고 겸양謙讓하고 탐욕貪欲과 도리에 어긋남은 오직 임금의 좋아함에 달렸으니, 조정에 선정善政이 없으면 백성이 어떻게 본을 받겠습니까. 방종하고 사치스러우며 분수를 넘고 예의를 벗어나, 저택은 상례를 어기고 구름에 닿을 듯이 지어, 외람되게도 궁궐을 모방하고, 물쓰듯이 음식을 장만하여 한 길[丈]이나 되는 식탁을 차려 날마다 만전萬錢이 허비됩니다.

사치하는 풍습이 처음에는 고관대작으로 부터 시작되어, 탐내고 야박한 풍속으로 변하여 원근遠近에서 완전히 굳어졌습니다. 재산을 기울여 사치한 혼례를 치르느라 파산破産하고, 의복의 장식을 아름답게 꾸미느라 비루한 풍속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인심은 더욱 나쁘게 변하여 이익을 다투는 일이 끊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갖가지 송사가 많아지고, 고을에는 효도와 화목의 행실이 없으며, 서울에는 분수를 모르는 참람한 걱정이 있어서, 부민部民이 고을 수령을 모해하고 하인이 관장官長을 업신여깁니다. 강직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 있어서 직분職分의 일을 다하려 하면, 뜻밖의 죄에 빠뜨려 발돌릴 겨를도 없이 패망敗亡하게 하는 까닭에, 관직에 있는 자는 남이 하는 대로 뒤를 따라 그럭저럭 세월이나 보내고, 일을 담당하는 자는 잘 보여서 죄책이나 면하려고 시키는 대로 따라 합니다. 국가의 습속이 이 지경에 이르러 눈물만 납니다. 전하께서는 일념의 사이에서 반성하여 도제道齊의 근본을 세우소서.

정치하는 도는 관원의 임명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어진 관원을 얻으면 서무庶務가 잘 다스려지고, 관원의 임명을 알맞은 사람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잘못됩니다. 나오고 물러가게 함을 신중히 하여야 한마음으로 화합하는 공을 이룰 수가 있고, 선과 악을 가리어 구별하여야 함께 뒤섞이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나오고 물러가게 하는 권력은 위(임금)에서 나오지만 선악을 가리어 구별하는 임무는 실로 아랫사람(신하)에게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임금은 구중九重 궁궐에 깊이 살기 때문에 모든 아랫사람들의 선악을 두루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는 일은 재상宰相에게 맡기고, 관직을 주어 관리로 임명하는 일은 전조銓曹에 위임하여 그들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 재상의 직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로 병폐가 많습니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의 관리에 결원缺員이 있을 경우, 자리마다 요청하고 인사 행정 때마다 말을 하여, 만호萬戶나 첨사僉使까지도 정해진 값이 있다는 비난이 있습니다. 그 천거에 의해 임용된 사람이 어찌 모두 어진 재목으로서 잘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갑자기 계급이 오른 사람은 문음門蔭 출신이 태반이고 고관高官을 제수받는 것은 무부武夫가 먼저입니다. 아부하는 자는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하는 영화가 있고, 출세에 담담한 사람은 침체되는 괴로움이 많습니다. 청탁하는 문이 열리고 권세에 빌붙는 이들이 길을 낼 정도로 모이니, 벼슬길이 어떻게 청렴할 수 있으며, 직무가 어떻게 제대로 다스려지겠습니까. 훌륭한 이재를 뽑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크게 탄식할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일념지간에 반성하시어 쓸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을 버리는 근원을 맑게 하소서.

학교는 많은 선비를 길러내어 풍화風化를 일으키는 곳입니다.

학교가 하는 일은 많은 선비를 교육하여 풍속과 교화를 진흥시키는 일입니다. 백성을 교화시켜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만드는 일의 근본은 임금님에게 달려있고, 가르치고 일깨우는 방법은 선생에게 달려 있습니다. 중앙에 학궁學宮이 있고, 지방에 향교鄕校가 있어 기르고 교육하는 제도는 지극하나,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바른 길을 잃었습니다. 오직 구두句讀만을 익혀 벼슬을 얻으려는 미끼로 삼으며, 부나 추구할 뿐 쉬지 않고 수양하는 도는 모릅니다.

공적인 천거에 자신을 팔고 권력 있는 가문에 가서 청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깨끗이 없어졌으니, 예의와 겸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국학國學이 이러하니 지방의 향교는 알 만합니다. 성균관은 인재人材를 가르치고 기르는 데에 관계되는 곳인데, 사석師席의 선생은 거개가 합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늙고 병든 사람이 아니면 거의 다 인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승으로서의 도리를 책망하여 인재를 이루어내는 효과가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몸소 행하시어 마음 속에 얻어서 인도하고 거느리는 실상을 다하소서.

부역賦役은 국가의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부역賦役은 국비를 넉넉하게 하기 위해서 백성의 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으로 정치란 백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선왕先王은 차라리 위의 것은 삭감할지언정 백성들의 재산은 풍부하게 하였으니, 농한기農閑期에 백성을 부리는 것은 백성의 힘을 피곤하지 않게 함이요, 정당한 세금만을 받는 것은 절도 있게 취하는 것입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미루어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하여 세금 받는 법은 변함이 없고 백성을 부리는 것은 시기가 있어서 제정해 놓은 법이 상세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정당한 세금 이외에 부과賦課하여 거둬들이는 명목이 많고, 명분 없는 역사役事에 백성의 농한기도 따지지 않습니다.

권귀權貴의 집안은 전지田地의 두렁이 연달아 있고 장정이 모여 있는데도 세금이나 부역을 알지 못합니다. 내수사內需司에 근무하는 백성은 이웃을 감싸고 종족을 보호하여 세금과 부역을 포탈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열 집에서 해야 할 부역을 한 집이 겸하게 되고, 백 집에서 내어야 할 세금을 열 집에다 독촉합니다. 세금 실어가는 일이 겨우 끝나자, 매질하는 형벌이 연이어 이르고, 분주하게 종사하는데도 구속되는 곤경이 극심합니다.

관가官家에는 관대하게 용서하는 관리는 적고, 호령은 성화星火보다 급하니, 들에서는 농사 짓는 시기를 놓쳐서 생명을 구렁텅이에 내맡기었습니다. 산릉山陵의 역사에 백성의 힘은 벌써 피곤해졌는데, 경기 지방은 세금이 지난날보다 배倍가 됩니다. 슬프도다. 불쌍하고 곤궁한 우리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사찰寺刹의 공양과 기도祈禱에 드는 비용을 매번 내수사內需司의 물품이니 국가의 경비와 상관없다고 핑계대지만, 내수사의 재물이 귀신이 가져다 준 것이 아닌 이상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간內間의 별진別進하는 일은 외척에게서 비롯되었고, 아부하며 청탁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고을 수령 자리를 구하는 처음에, 먼저 진상할 것을 변통할 수 있을 지를 묻고, 부임한 뒤에는 거둬들이기를 끝이 없이 합니다. 공공연히 령을 내어 내수사에 진상할 물건이라고 명목을 달고 거짓으로 꾸며 사리사욕을 채웁니다. 그러니 곤궁함은 더욱 더하여 자기 업失業을 잃은 백성들이 자기가 덕을 보기 위하여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다만 임금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되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세금을 조금 걷고 경비를 줄여서 민생의 아픔을 구휼하소서.

<중략>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啓辭를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내간에서 만일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면 어찌 알지 못하였겠는가. 이런 일이 없었을 듯한데 외간에 떠들썩하게 전파된 것은 반드시 어떤 뜻이 있어서일 것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전이라고 범칭하여 회계回啓함은 온당치 않으니, 다시 상세하게 회계하면 내가 자세히 살펴서 이와 같은 폐단이 없도록 하겠다. <하략>

셋째, 동원東園은 명문장가名文章家였다

명종 15년(1560) 7월 18일. 김귀영은 한성부 우윤으로 발탁되었는데, 사관들은 김귀영金貴榮이 “품성이 온화하고 유약했으며 글을 잘 지었다.”, “김귀영을 재주가 뛰어난 선비이다”라고 명종실록에 기록할 정도로 동원의 글 솜씨는 조정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으면서 왕명王命에 따라 개설국활자改設局活字 서문序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고, 명종 19년(1564) 6월 11일에 과거 그림 병풍에 시제를 지을 때도 홍섬ㆍ윤춘년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명종 20년(1565) 4월 12일에 대행 대왕 대비의 시호ㆍ전호ㆍ능호를 정할 때도 참여하여서 대행 대왕 대비의 시호를 문정文定이라 하고, 전호殿號를 문덕文德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대행 대왕대비의 행장을 부제학 김귀영金貴榮이 짓도록 하였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완성된 그 행장을 펴보고는 발끈 기를 돋구어 대제학 홍섬洪暹 및 김귀영에게

“이 행장이 대비大妃의 을사 정난乙巳靖難에 대한 일을 서술함에 있어 말뜻이 모두 상세하지 않고 간략한 흔적이 있으니, 이는 무슨 의도인가? 제공諸公들이 을사년의 일을 의심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실색失色하여 다만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고, 이를 논평하는 사람은 ‘윤원형이 이때 이미 그 우익羽翼을 잃어 버리었는데도 그 독사 같은 성질이 아직도 스스로 죽지 않았다. 만일 진복창陳復昌ㆍ이무강李無疆의 무리가 아직도 조정에 있었다면 반드시 모함하는 계책을 내었을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조 5년(1572) 10월 1일에는 유희춘柳希春이 당대 문장의 대표적 인물을 열거할 때도 뽑혔으며,

“이 시대 사장詞章의 대표적 인물은 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金貴榮ㆍ윤현尹鉉ㆍ이후백李後白ㆍ기대승奇大升ㆍ박승임朴承任을 치는데, 이 중에서 이후백李後白이 조금 뒤진다.”

는 평을 받을 정도로 문장가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또한 호조판서로 있을 무렵. 선조의 왕명에 의하여 유명한「황산대첩비문荒山大捷之碑文」을 지었는데, 여성위礪成衛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남응문南應文이 하였고 운봉현감雲峰縣監 박광옥朴光玉이 공사를 담당했던 이 비는 지금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화수산 남쪽에 있다.

이외에도 조선 성종때의 문신이며 ‘이시애난’을 평정했던 허종許琮의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한 아선군牙善君 어계선魚季瑄의 신도비명을 지었으며, 명종때 좌의정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된 이명李蓂의 신도비명과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이나 중임한 홍섬洪暹의 신도비명, 그리고 성종의 아홉째 아들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의 신도비명을 지은 명문장가名文章家였다.

넷째, 많은 인재를 길렀다.

세종 8년(1426)부터,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우대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케 하던 ‘호당湖堂’이란 제도가 있었다. 이 호당에는 대제학의 추천으로 왕명에 의해 들어갔다.

여기에 들어가면 녹봉祿俸은 받되 집무執務는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리고 호당을 거치면 문관文官으로서의 장래將來가 보장 되었고, 또 대제학이 되려면 반듯이 호당湖堂을 거쳐야만 했다. 동원東園은 사람 볼 줄을 알았다. 그래서 대제학일 때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을 무려 36명이나 호당湖堂에 추천하여 모두들 나라에서 큰 벼슬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퇴계의 수제자로 영남학파의 중추인물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원주사람 김응남金應南, 대제학ㆍ좌찬성을 역임한 진주사람 유근柳根,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한 전주사람 이성중李誠中, 조식曹植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유교적 정치이념과 문장이 뛰어난 문신文臣인 의성사람 김우옹金宇顒,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역임한 선산사람 김효원金孝元, 경학의 천재로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한 남양사람 홍적洪迪, 동인의 선봉으로 성균관 전한典翰을 역임 양천사람 허봉許篈등이다.

V. 맺는 말

동원東園이 활약한 시기는 우리나라의 동・서 당쟁이 일어난 시기이며 임진왜란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말년末年에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선조의 파천播遷과 함께 왕자들을 나누어 피난길에 올랐는데 이때 동원東園은 원임대신으로 임해군臨海君을 호종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회령會寧의 군민들과 국경인鞠景仁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호종하던 대신大臣들을 포박하여 적장敵將인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바치므로 적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동원東園은 적진에 있으면서 왕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계획을 세웠으나 이룩되지 못하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억압에 의해 선조에게 파견되어 화친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희천熙川으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동원東園은 관계官界에 진출하여 순차적인 관료생활을 하였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마지막 생을 순탄하게 마치지 못하였다. 특히 이런 일이 일어난 뒤를 연이어 그의 아들 김개金闓는 1618년 허균許筠의 역모에 관여하였다는 누명을 입고 옥에서 자결하였다. 이로 인해 동원東園의 가문家門은 역신逆臣의 집안이 되었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되었으나 그의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동원이 지은 문적文蹟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동원東園의 학문세계를 폭넓게 조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원東園이 돌아가신지 300여년이 지난 1935년에 그의 12대손인 김교희金敎熙에 이르러 겨우 흩어진 글을 모아『동원선생문집東園先生文集』을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올해가 동원東園이 서거하신지 420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조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의 양대兩代에 걸쳐서 무려 47년 동안 조정에서 활약했던 중신重臣이다. 이러한 동원東園이 재임기간 중에 이조판서를 8번이나 역임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9번이나 다녀왔다는 사실은 그 만큼 누구보다도 나라를 위하였고, 위로는 임금을 지극히 섬긴 충신이었으며, 조정 대신들의 어려움을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분명하게 잘 처리해 주는 폭 넓은 처신處身과 아래로는 서민들까지 두루 살피는 투철한 애민정신愛民精神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또한 홍문관 대제학을 6번이나 맡을 정도로 동원의 학문은 높았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에 비명에 돌아가시지만 않았더라면, 고향 상주에 내려와서 학문세계를 더 활짝 넓히고 후세에 만인의 스승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