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운동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 오광五狂 여석훈呂錫塤 선생先生 -오광자소(五狂自疏)를 中心으로 |
김 재 수 전) 한국문인협회 상주지부장 현)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현) 상주아동문학회 회장 |
계몽운동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 오광五狂 여석훈呂錫塤
선생先生
-
오광자소五狂自疏를 中心으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재 수
<目 次> | ||
Ⅰ. 출생 Ⅱ. 향학열의 선구자 1. 신학문 수학을 위한 국내에서의 모색 2. 신학문을 위한 일본 유학길의 선택 3. 야학을 통한 독학, 그리고 진학 4. 쿠리하라栗原와의 만남 5. 희망希望은 다시 절망絶望으로 Ⅲ. 교육敎育의 선구자先驅者 1. 선교리의 사설학원에서 교육 사업 첫 발을 딛고 2. 자양학원의 설립 3. 자양학원紫陽學院에 대한 탄압彈壓과 폐쇄閉鎖 4. 화동중학교 기성회 조직 및 화동고등공민학교 개교 Ⅳ.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 1.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조직 2. 순회 강연회 개최 3. 마을의 갱생更生운동 전개 4. 부자마을을 위한 시책 전개 5. 모범마을 선정 6. 상주・화동・황간 국도 유치 Ⅴ. 민주주의民主主義 교육의 선구자先驅者 1. 사회주의 운동에 반대 2. 민주주의 교육의 필요성 강조 Ⅵ. 탁월한 웅변가 Ⅶ. 글을 맺으며 |
역사란 미래를 향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며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지표이다.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은 과거를 살펴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하고, 미래의 발전을 모색한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상주문화원이 시민사랑방을 개최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상주의 역사, 인물, 문화와 예술에 관한 강좌를 열고 있는 뜻 또한 미래 상주 발전을 위한 모색의 하나라고 말 할 수 있다.
화동면지 편찬 집필위원이 되어 자료를 찾던 중 오광 여석훈 선생의 ‘자양학원’과 ‘화동고등공민학교’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 화동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선생의 저서 『오광자소』와 ‘자양학원 학칙’, 그리고 자양학원 학생들이 쓴 글도 읽게 되었다. 『오광자소』는 비록 60쪽 내외의 소책자였지만 우리 지역에 참으로 위대한 선각자가 계셨음을 알려 주기에 충분했다.
나름대로 『오광자소』를 분석하고 정리를 했다고 하지만 선생의 삶을 다 알지 못함과 『오광자소』에 나타난 사실 이 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찾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보다 자세한 선생의 삶에 대한 자취는 앞으로 자료를 찾아내고 탐구해야 할 과제라 여겨 잠시 미루면서 선생의 개척자적 삶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Ⅰ. 출생
선생은 1890년 6월 7일(고종 27년 경인년). 경북 상주군 화동면 관제리에서 1604년(선조 37년) 성균관 직강과 1606년 합천군수를 역임한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路의 10대 손으로 출생하였다.
선생이 태어난 그 즈음의 우리나라의 형편은 일본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에 의해 우리 주권 침탈의 위협을 받았고 국운이 극도로 약해 1889년에 방곡령 사건,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1896년의 아관파천 등이 일어난 혼돈의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선생은 어린 시절 가학家學과 봉암서당鳳岩書堂 및 모동면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본격적本格的으로 유학儒學을 수학修學하였다 하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신학문에 대한 갈망이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Ⅱ. 향학열의 선구자
선생의 신학문에 대한 목마름은 시대적 불운인 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경술년庚戌年 국치國恥와 연관이 있다. 자신이 수학해 온 유학儒學이 새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事實 나는 성리학性理學의 개요槪要를 깨닫게 된 약관弱冠 때부터 은연중隱然中 그 말폐末弊가 적지 않다는 것을 자각自覺하게 되었었다. 조선조 후기後期에 와서는 유학儒學이 공功보다는 죄罪를 훨씬 더 많이 범犯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다.”
1. 신학문 수학을 위한 국내에서의 모색
선생의 나이 21세.
신학문에 대한 선생의 갈망은 우선 국내에서 시도된다.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중동학교中東學校를 방문하였고, 여의치 않자 대구로 내려 와서 우현서루友弦書樓의 문을 두드렸지만 선생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한 장소로서 마땅치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나는 홀연忽然히 깨닫는 바가 있어서 유학수학儒學修學을 포기抛棄하고 일단 한성漢城으로 올라갔다. 소위所謂 신학문新學問을 닦아 보겠다는 뜻을 세운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찾아가 보았으나 입학入學이나 편입編入을 하는데는 당시當時 나의 가세家勢가 따를 수가 없었다. 실의낙담失意落담하여 이번엔 대구大邱로 가서 우현서루友弦書樓에 몸을 기탁寄託해 보았다. 그러나 미구未久에 그곳도 내가 신학문新學問을 수업授業할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초졸憔倅한 몰골로 귀향歸鄕길에 오르게 되었다.”
2. 신학문을 위한 일본 유학길의 선택
열정을 가진 자는 작은 절망에 굴하지 않는다. 선생의 신학문에 대한 열망은 21세에서 한 번 꺾일 듯 했지만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8세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마침내 1917년(丁巳年), 28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선생은 모내기를 한창 하다말고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리고 가족들 몰래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선생은 자신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 연락선連絡船을 타기 전에 삭발削髮을 함으로써 결의決意를 다시 한 번 다졌다. 심중에는 기필코 뜻을 세워 출향을 했으니 반드시 그 뜻을 성취하고 돌아오리라는 각오였다.
일본에 도착한 선생은 당시 우리나라 형편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다른 세계가 펼쳐 있음에 놀랐다.
19세기 말末까지 세계世界의 강대국强大國으로 군림君臨했던 청국淸國과 러시아露西亞를 격파擊破하고 조선朝鮮을 자국自國의 식민지植民地로 병탄倂呑한 아시아의 패자覇者 일본日本, 그 일본의 수도首都 동경東京의 번영은 마치 조선 벽촌의 촌사람으로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선생의 동경 생활은 고생문이 열리는 시작이었다. 우선 동경의 변두리에 집을 구하는 일이며 음식도 값이 가장 싼 것으로 골라 먹는 정도로 겨우 연명했다. 처음 며칠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무작정 동경 거리를 방황하다가 가까스로 제 정신을 차린 후 공부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다.
3. 야학을 통한 독학, 그리고 진학
잠시의 방황을 마친 선생은 수삼일 만에 마침내 우시고메쿠(牛込區)에 있는 쇼코각사(商工學舍)라는 곳에 들어가 야학夜學으로 일본어日本語를 배움으로 동경생활은 시작된다.
선생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 3개월 쯤 지나자 일본어日本語를 어느 정도 깨우쳐 무식은 면하게 된다.
선생은 곧 바로 다카다 무라(高田村)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 졸업 학년卒業學年에 편입編入을 하는데 이때는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 출신인 강은준姜殷俊이란 사람을 알게 되어 그와 함께 월세방月貰房을 하나 얻어 거처居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생의 당면 목표當面目標는 신학기新學期가 되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專門部의 정경과政經科 교외생校外生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이 무렵의 생활은 촌음寸陰의 휴식休息도 허락許諾하지 않는 악전고투惡戰苦鬪였음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신문 3백여 장을 배달配達하는 것으로 일과日課가 시작되었는데, 낮에는 엿을 행상行商하고 날이 저물면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 야간부夜間部에 갔다가 귀가貴家해서는 그 날 배운 것을 복습復習하고, 다시 한 두 시간 입시入試를 위한 자습自習을 했다. 취침就寢은 으레 자정子正을 넘어서였고, 수면시간睡眠時間은 길어야 네 시간이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들려 입학入學에 관하여 문의問議했을 때 전문부專門部 교외생校外生으로 응시應試할 자격資格은 문제問題가 되지 않지만 정경과政經科를 택擇하려면 영어英語가 입시入試의 필수과목必須科目이었다. 선생은 영어를 공부하지 않았기에 앞이 캄캄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생이 의기소침意氣銷沈하는 것을 보고 교무과敎務科 직원職員이 법과法科면 영어英語를 몰라도 되는 수가 있다는 말을 부연敷衍해 새로운 용기를 얻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동경東京에 온지 8개월 되는 이듬해 봄인 1918년, 천신만고千辛萬苦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專門部 법과法科 교외생校外生으로 등록登錄을 마치고 그렇게 갈망하던 신학문新學問의 고등교육高等敎育을 받게 되었다.
“등록登錄을 마친 그날 동경東京 와서 처음으로 안도安堵의 숨을 한 번 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니 참으로 감회感懷가 새로웠다. 몇 년 전까지 메마른 조선朝鮮의 벽촌僻村에서 서양西洋의 신지식新知識을 이단시異端時하고 언필칭言必稱 공맹孔孟의 추로학鄒魯學과 송宋나라의 염락관민지학溓洛關閩之學을 지상至上이라 여겨 맹신盲信해 온 나 자신의 핍새逼塞했던 사고思考가 밉도록 어리석게 느껴졌다.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신학문에 비한다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효通曉한들 그것은 혈병지지絜缾之智에 불과不過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한 마디 말도 없이 매정스레 두고 온 산하山河와 젊은 내자內子의 모습이 뇌리腦裏에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기필코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겠소’하고 지껄여 보았다.”
4. 쿠리하라栗原와의 만남
선생의 일본 동경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쿠리하라(栗原)와의 만남이다.
선생은 신문배달新聞配達과 엿을 파는 행상을 하면서 신학문의 고등교육과정을 수학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자신의 앞에 밝게 비칠 장래를 생각하면 만학晩學과 고학苦學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동경생활에서 잊지 못할 행운이 찾아 왔다.
코이시 가와쿠(小石川區) 야니기 마찌(柳町)에 있는 쿠리하라(栗原)라는 일본인 가구공장에 엿판을 메고 발을 들여놓았는데, 마침 그 집 직공들이 휴식 시간에 봄볕을 쬐고 있을 때였다.
“초색청청유색황草色靑靑有色黃이라 했으니 여러분과 나는 아무래도 초록동색草綠同色인 것 같소이다. 자 엿 좀 사 자시오.”
이 한마디가 선생의 동경생활에 희망과 활력을 준 계기가 되었다.
엿장수 주제에 문자를 쓴다는 그들에게 선생은
草色靑靑有色黃 풀색을 푸르고 버들 색은 누르구나
桃花歷亂梨花香 복사꽃이 만발하고 오얏 꽃이 향긋하다.
東風不爲吹愁去 동풍이 산들거리면 나의 시름은 실어가지 말고
春日偏能惹恨長 봄볕이 화창하지만 나의 한을 햇빛처럼 길게 끌어당길 뿐이다.
당唐나라 시인詩人 매지買至가 읊은 ‘춘사春思’라는 시 한 수를 읊어 주었다. 매지買至는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같은 시대時代에 산 시인으로서 벼슬이 경조윤京兆尹에서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르고, 사후死後 일본의 문부대신文部大臣격인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는 보충설명補充說明까지 해 주면서 말이다.
이 일로 인해 마침내 이 공장의 주인인 쿠리하라(栗原)를 만나게 된다.
쿠리하라(栗原)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인물로 당나라 시인 매지買至의 시를 줄줄 외우고 해설해 주는 선생의 학식에 반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동경에 유학을 온 까닭도 알고는 선생을 가구공장 직공들의 선생으로 채용하게 된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한 율원이었다. 일본인들이 얕보는 식민지 출신의 시골 청년에게서도 배워야 한다는 강한 의지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학비와 식생활의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공장에서 물품 구입物品購入과 전표 정리傳票整理 등 서무庶務에 관한 일과 직원들에게 틈틈이 한문을 가르쳐 주는 일을 맡았다. 직공들에게 주로 점심시간과 쉬는 날을 이용利用하여 우선 명심보감明心寶鑑과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나오는 대목을 하나씩 들어 가르쳤다.
그리고 일을 함에 있어서도 율원栗原의 신임에 대해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에는 신중愼重과 정확正確을 기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에 율원粟原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선생을 2학기부터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대신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 법과法科에 정규생正規生로 편입編入을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대학日本大學에 보증인保證人은 물론 등록금登錄金까지 감당堪當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요 행운이 온 셈이다.
5. 희망希望은 다시 절망絶望으로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은 선생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동경 유학의 부푼 꿈이 한 순간 무너지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7월이 가고 8월 상순 어느 날 새벽에 골목길을 비질하던 선생은 쓰러졌다. 병원에 옮겨 진찰을 받은 결과가 악성각기병惡性脚氣病이었는데, 원인은 환경이 맞지 않고 심한 영양실조營養失調 때문이었다. 서둘러 치료治療를 하지 않으면 생명生命이 위험危險한데 풍토가 맞는 고향故鄕에 가서 치료治療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效果的이라는 진단이었다.
그 때 선생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선고宣告인가! 나라는 위인이 이토록 흘복訖福하단 말인가! 병마病魔야 액귀厄鬼야, 네 어디 붙을 데가 없기에 하필何必이면 나 같은 빈핍도골자貧乏到骨者에게 붙었느냐! 무심하고 야속野俗한 하늘이 참으로 밉고 원망怨望스럽구나! 혈혈고종孑孑孤蹤 이역만리異域萬里에 와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요행僥倖으로 잡은 신학문新學問의 수학修學 길이 고작 1개년個年 남짓해서 이토록 허무虛無하게 허물어지고 말다니, 나는 입술을 깨물고 병상病床에 누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탄식은 바로 피눈물이었다. 청운의 뜻이 병마病魔 때문에 중도中道에 그치게 되었으니 그 원통함이 얼마나 컸을까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의사醫師와 율원의 권고勸告를 쫒아 동경東京땅을 하직下直하고 일단 귀향歸鄕길에 오른다.
그 후 해가 두 번 바뀐 1920년 고향에서 선생의 병은 완쾌 되었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와 당시의 집안 형편形便은 다시 동경東京으로 갈 수 있게끔 허락許諾해 주지를 않았다.
Ⅲ. 교육敎育의 선구자先驅者
1. 선교리의 사설학원에서 교육 사업 첫 발을 딛고
1922년 임술년壬戌年.
선생의 나이 31세 되던 해이다.
인근隣近 마을 선교仙橋리 이영구李榮求씨 댁宅 사랑舍廊에서 사설학원私設學院을 차리고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다는 소문所聞을 들었다. 선생은 조카 술용述龍과 동생 석범錫範을 데리고 간다. 그러나 예정豫定된 인원人員이 찼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다는 대답對答이다. 궁여일책窮餘一策로 두 반을 편성하여 한 반은 유급有給교사가 맡아 일본어日本語와 산수算數를 가르치고, 한 반班은 선생이 맡아 한문漢文과 조선어朝鮮語를 가르치도록 제안했다. 이는 동생과 조카가 사설학원에 들어가서라도 무식함을 면하게 하려는 마음에서 자진 봉사自進奉仕를 제의提議한 것이다. 이 일이 선생의 교육의 길로 들어선 첫 발걸음이었다.
이러한 헌신의 길도 쉽지 않았다.
수업授業을 시작한지 사나흘 밖에 되지 않아서 말썽이 일어났다. 유급 교사有給敎師의 일본어日本語 실력實力이 당시의 학생수준에 맞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는데 비난은 선생에게 돌아왔다. 일어日語의 유급교사有給敎師를 재채용再採用키로 했으나 쉽지 않아 끝내는 보통학교普通學校를 나온 청년靑年 한 사람을 불러다 미봉책彌縫策을 썼고 그리고 나머지 과목은 모두 선생이 다 맡아서 가르쳐야 했다. 한편 수업 장소授業場所도 종전從前의 이영구李榮求씨 댁宅 사랑舍廊에서 한산이씨韓山李氏네 재실齋室로 옮기게 되었다.
2. 자양학원의 설립
선교리仙橋里의 사설학원私設學院이 일어교사日語敎師 자질 문제資質問題와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재실齋室이라는 장소 문제場所問題로 해서 또다시 말썽이 생겼다. 그러자 관제마을에 선생이 결성한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계원契員들 중심으로 관제리官堤里에 강습소講習所를 설립設立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내 그해 추수秋收가 끝난 뒤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임시총회臨時總會가 소집召集되어 강습소講習所 설립안設立案을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결의決議하기에 이르렀다.
총회總會에서는 강습소講習所 건물建物을 건축建築하는데 1천원의 적립특별계금積立特別契金과 부족不足되는 비용費用을 충당充當하기 위해 별도別途의 현금現金 찬조금贊助金과 곡물 기부穀物寄附, 노력 제공勞力提供 등을 받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해서 1023년 계해년癸亥年 봄, 선생의 나이 32세에 관제官堤에 건평建坪 15평坪의 강습소講習所 건물建物이 들어서게 되었다.
선생은 『자양학원紫陽學院』간판看板을 걸었다.
“『자양紫陽』이라는 말은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송宋나라의 대유大儒 주희朱熹의 별호別號이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선대인先代人 주송朱松은 중국中國의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 성남城南의 자양산紫陽山에서 글을 읽었다. 뒷날 주자朱子는 그곳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 부르고 자양紫陽을 자기의 별호別號로 삼았다. 또 주자朱子의 문하생門下生들은 그곳에 서원書院을 세워 자양서원紫陽書院이라 이름하고 주자朱子의 글을 자양지노필紫陽之老筆이라 하여 추앙推仰한데 연유緣由한 것이다.”
선생은 정식正式으로 당국當局에 학술강습소學術講習所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하고 학생學生들을 널리 모집募集했다. 그리고 학생學生한테서 약간若干의 월사금月謝金을 받아서 그것으로 유급有給 일어 교사日語敎師 1명을 채용採用하고, 그 이외以外의 과목科目은 구봉회具奉會 씨와 선생이 맡아 전력專力했다.
유급교사는 1인은 쯔키오카 우사부로(月岡卬三郞)으로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출신이었다. 조교 구봉회具奉會씨는 충북 보은군 마로면 궁기리 출신으로 관기공립보통학교 출신이다.
한편 설립연도에 대해 『오광자소五狂自疏』에는 ‘1923년 계해년癸亥年 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상주시사尙州市史』에는 다음과 같다. 1922년(大正11) 6월 5일 인가를 신청하여 6월 15일 경상북도지사 후지카와 이사부로(藤川利三郞)에 의해 ‘경북학 제1,631호’로 인가되었고 상주군청은 6월 16일 제1227호로 이를 확인했다. 학생 수는 1923년 8월 현재 1학년 여자 3명 남자 30명, 2학년 남자 26명, 3학년 남자 27명, 4학년과 6학년은 없고 5학년 남자 7명으로 모두 93명이었다.
그러나 ‘1925년 10월 월말 조사보고 표’에 의하면 1학년 2명, 2학년 6명, 3학년 12명, 4학년 8명, 5학년은 없고 6학년은 16명이었다.
학칙學則은 9장 29조로 되어있고, 입학금入學金 1원에 월사금月謝金은 1학년 40전, 2학년 60전, 3학년 80전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정 사정이 곤란한 자는 후에 대체할 수 있도록 했고 모범생은 장학하는 의미로 1학년 간 면제하도록 했다.
자양 학원은 1930년 6월 화동면에 4년제 보통학교가 개교 1주년을 맞으면서 폐쇄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問題가 생기게 되었다. 계원契員 가운데서 자양학원紫陽書院 발족發足을 반대했던 사람이 선생을 모함謀陷하여 주재소駐在所에 부정不正이 있는 듯이 밀고密告를 한 것이다. 주재소駐在所에서는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서류書類 일체一切와 강습소講習所 건축 서류建築書類를 압수押收했고 이 일로 여러 차례 호출呼出도 당하고 심문審問도 받았다
10여일이 지난 뒤에 부정에 대한 혐의는 풀렸지만 근검저축계契의 일은 타인他人에게 위임委任하고, 자양학원의 경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우선 자식子息을 가르치고 싶어도 월사금月謝金을 내지 못해 애를 태우는 사람을 위해 면面에 교섭交涉하여 면답面沓의 경작耕作을 주선周旋도 해 주었다. 또 부형父兄이 연로年老하거나 극빈한 학생學生에게는 기한期限 없는 장래將來를 구두口頭로 담보擔保토록 하고 월사금月謝金을 면제免除해 주기도 했다.
3. 자양학원紫陽學院에 대한 탄압彈壓과 폐쇄閉鎖
1926년. 자양학원을 설립한 지 3년 뒤이다. 선생은 그해 여름 교육敎育의 성과成果를 부형父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름방학放學을 이용利用하여 학력 발표회學力發表會를 가지기로 했다. 하루는 부형父兄들을, 하루는 모자母姉들을 초청招請하여 학생들이 그간 배운 학문學問을 당당히 발표 하도록 했다.
그러자 주재소駐在所에서는 이번에는 자양학원紫陽書院의 학생들이 순박淳朴한 부모형제父母兄弟들에게 불순不純한 신사상新思想을 고취鼓吹시켰다는 트집을 잡아 학생學生 10여명을 불러 청취서聽取書를 작성作成하게 한 다음 선생을 불러 그 책임責任을 추궁追窮하였다.
선생은 이 일이 주재소駐在所의 계획計劃된 탄압彈壓임을 알고, 책임자責任者인 나 혼자서 시도試圖한 일이라 주장主張한 끝에 보안법保安法 위반違反혐의嫌疑로 상주경찰서尙州警察署 유치장留置場에서 13일간 구속拘束당하는 일을 겪었다.
뿐만 아니었다. 선생이 자양학원紫陽學院을 발족發足한 이후以後 매년每年 군郡 학무과學務課에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해 왔지만 번번이 서류書類가 반려返戾되곤 했다. 그러다가 8년 째 되는 해에는 선생을 군청郡廳으로 불렀다. 그리고 학무과學務課 직원이 한다는 말이, “당신은 청년운동靑年運動도 하고 사회운동社會運動도 하면서 또 교육사업敎育事業도 하겠다고 매년 학원설립學院設立 인가원認可願을 내고 있는데 교육사업敎育事業과 사회社會 청년운동靑年運動은 이율배반二律背反되는 일이 아니오. 어느 쪽이든 하나를 택擇하시오.” 했다.
선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육사업敎育事業만 하겠다는 대답對答을 하고, 그날로 청년회와 신간회에 탈퇴서脫退書을 냈고 그 증명證明을 첨부添附하여 또 자양학원紫陽學院의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1930년 6월을 기期해 화동면化東面의 4년제 보통학교普通學校가 개교開校 일주년을 맞았다. 따라서 인가認可를 받지 못하고 근 10년간 경영經營했던 자양학원紫陽學院을 폐쇄閉鎖하고 말았다.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變한다 했는데 자양학원紫陽學院은 근 10년을 두고 노심초사勞心焦思를 했으나 인가認可라는 새로운 변화變化를 얻지 못하여 시대時代의 흐름 속에 소멸消滅되고 만 것이다.
선생의 첫 교육 사업에 대한 꿈은 이렇게 10년 만에 무너졌다. 학원學院의 문門을 닫는 날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관제官堤라는 마을에 대해 무한無限한 연민憐憫의 정情을 느꼈다. 이 학원學院이 관제官堤에 소재所在했지만, 지난 10년 동안에 이곳을 다녀간 학생學生들 가운데 관제官堤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꼽을까 말까 하는 숫자였던 것이 선생을 가슴 아프게 했다. 이유理由는 마을이 전반적全般的로 가난한데다가 일부 학부형學父兄들이 고루한 사상思想과 고집固執때문이었다고 판단하면서 학원學院의 폐문閉門 자체自體보다도 그 점이 못내 애석哀惜하기만 했다.”
4. 화동중학교 기성회 조직 및 화동고등공민학교 개교
선생이 다시 교육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조국 광복祖國光復을 계기契機로 고향故鄕 화동化東에 중학교中學校를 세우고자 한 일이었다.
1945년 을유년乙酉年 9월 15일.
조국이 광복 된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모든 이들이 광복의 환희로 들떠 있을 때 선생은 관제의 김진만 씨 댁에서 자양학원 강학계 총회를 열고 화동중학교 건립발기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10월 20일에는 ‘화동중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고향발전을 도모하고 조상들이 하지 못한 영광된 향토건설을 꿈꾸었다.
선생의 꿈은 가정이 어려워 도회지都會地에만 있는 중학교中學校를 가지 못하는 향토鄕土의 어린 새싹들에게 중등교육中等敎育을 우리 힘으로 이수履修시키자고 함에 있었다.
선생의 꿈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11월 1일에 화동초등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학생모집 시작하였고 1946년에는 화동중학교 교지를 상주와 황간, 화령의 중심인 화동면 이소리에 확보 하였다. 그리고 1월 27일부터 정지 작업을 시작으로 4월에는 75평의 교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수업을 시작한 지 8 개월 만에 내적으로도 수업의 성과가 나타났다. 학생들 중에는 도시의 기존 중학교 2학년에 15명이 편입을 하게 되었고, 상주농잠학교부설 사범과에 3명이 합격 했으며, 초등학교 교원 채용시험 합격자도 10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 일도 순탄하지 않았다. 의욕적意慾的이고 진취적進取的이었던 육영사업育英事業이, 발족發足 1주년周年이 되자 관官에서 무인가無認可를 빌미로 문책問責도 하고 이것저것 규제規制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설이 인가 기준에 미달이라 하여 당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면민面民의 후원後援도 그 열도熱度가 식기 시작했고 또 우리의 고질적 병폐인 중상모략中傷謀略과 유언비어流言蜚語까지 생겼다.
결국 선생의 뜻은 또 한 번 꺾이게 되었다. 1968. 3. 7 화동중학교가 개교함으로 정식 중학교 인가를 얻지 못하고 화동고등공민학교化東高等公民學校로 그 명맥을 다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에 지역민이 뜻을 모아 향토 인재를 길러 내려는 높은 교육에 대한 열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Ⅳ.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
농촌계몽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 농촌사회의 현실적 문제점과 폐해, 그리고 농민의식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농촌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생각한다. 특히 상록수의 주인공인 최영신은 실제 최용신 이라는 인물로 이론과 실습을 통해 농촌운동가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우리는 상록수의 ‘샘골 학원’과 ‘최영신’이라는 여성 계몽운동가는 대부분 알고 있지만 정작 우리 고장의 계몽 운동가이자 선각자는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1.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조직
1922년. 선생의 나이 31세 때 관제 마을 사람들과 협의하여 ‘근검저축계’ 조직하였다. 근검저축계란 말 그대로 근검절약勤儉節約의 정신으로 새로운 농촌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조직한 계契이름이다.
우선 1구좌口座를 현금現金 10전錢으로 하여 1인당 5구좌까지 가입할 수 있도록 규약規約을 만들었다. 그 결과 일차적一次的으로 금 천 원金千園이 모였다. 그래서 그 천원을 계원契員들과 의논한 후 월리月利 4분分으로 융자融資를 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매월每月 신규 가입자新規加入者가 증가增加하여 1개년個年이 지났을 때는 계원 수契員數가 1백 명에 육박肉迫하고 총 계금總契金이 6천여원에 달達하였다.
2. 순회 강연회 개최
1927년 34세, 화령청년회장으로 피선되어 화령청년회化寧靑年會 주최로 동경유학생東京留學生 순회강연단을 초청 지방계몽강연회를 가졌다. 유학생 강연단의 중심 인물은 정열모鄭烈模 씨였는데 결과結果는 의외意外로 대성황大盛況이었다.
이튿날 유학생 연사演士 5명을 초대招待하여 위로연慰勞宴 겸 평가회를 가졌다. 선생은 솔직한 심정으로 연사들에게 청년회원靑年會員들은 강연講演의 내용이 다분히 전문적專門的이고 어려워서 많은 청중聽衆이 나중에는 졸았는데 역사적歷史的이고 문학적文學的인 수준水準 높은 표현表現을, 보다 서민적庶民的이고 보다 평범平凡한 말로 대신 해 주었더라면 아주 효과적效果的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현하며 그들이 다른 곳에 강연이 있을 경우 참고로 삼도록 조언을 하기도 했다.
3. 마을의 갱생更生운동 전개
당시 30여호戶가 되는 관제 마을은 자작自作 농가農家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마을 전체全體에 농우農牛가 두 세 마리뿐이고, 농기구農器具 하나를 구입購入하는 것도 두 세집이 어우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춘궁기春窮期에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기아飢餓를 모면謀免하면서 장리곡長俚穀을 얻으려 인근隣近 마을의 부자富者를 찾아 가는 것이 매년의 관행慣行으로 되었다. 가을에는 지붕을 이는 집이 거의 없어 비가오면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비가 새어 그 모습이 비참했다.
그런 상황狀況이건만 소위所謂 양반兩班 행세를 하는 자들은 노동勞動을 천시賤視하여 안일安逸을 쫒으려 들었고, 일부 몰지각沒知覺한 이들은 도박賭博으로 마을이 거의 폐촌廢村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1) 의식 개혁 운동
이를 보다 못한 선생은 결연決然히 마을의 갱생更生을 도모圖謀하기로 했다. 선생은 전 동민洞民을 모아서 회의會議를 열어 다음과 같은 결의決議하였다.
첫째, 남녀노소男女老少와 반상班常을 막론莫論하고 전 동민이 1일 10시간의 노동勞動을 실행實行한다. 10시간 중에 점심시간點心時間 1시간이 포함包含된다.
둘째, 남녀간男女간의 내외內外 인습因習을 타파打破하여, 남녀가 함께 노동한다.
셋째, 도박賭博의 근절根絶을 위해, 1회 발각發覺 시時는 충고忠告하고, 2회 발각 시는 전 동민이 절교絶交하고, 3회 발각 시는 마을에서 추방追放한다.
넷째, 전 동민의 백주白晝 주점酒店 출입出入을 금禁하고, 야간夜間일지라도 그 출입을 삼가 하도록 한다.
다섯째, 매每 호당戶當 저금통장貯金通帳을 필必히 만들고, 매월每月 10전錢 이상 저축貯蓄할 것을 의무화義務化한다.
이를테면 노동의 중시, 내외하는 인습 타파, 도박 근절, 백주 주점 출입 금지, 저축의 생활화를 전 동민의 결의決議로 시행하게 했다. 이런 결의가 있은 후에 매월每月 10전錢의 의무 저축금義務貯蓄金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반상班常의 타파打破였다고 선생은 고백했다.
“나는 먼저 소위所謂 양반兩班입네 자칭自稱하는 사람들을 보고 알량한 양반兩班의 가식假飾을 털어 버리라고 충고忠告했다. 양반兩班의 자격資格을 옳게 따지자면 당시當時 관제官堤에는 양반兩班이 한 집도 없었다. 아무리 양반兩班 가문家門이라도 3대代 무현관無顯官 다시 말해서 백골남행白骨南行의 음직蔭職 관명官名조차 못 붙여 제사祭祀 지방紙榜에 학생부군學生府君 신위神位나 처사부군處士府君 신위神位를 쓰는 집은 백두白頭로서 중인中人에 준準하는 대우待遇밖에 받지 못한다. 5대 6대 때부터 품계品階의 최하위最下位인 종구품從九品의 장사랑將士郞도 지방紙榜에 쓰지 못하는 집안이 양반兩班은 무슨 양반兩班이란 말인가. 그따위 양반兩班 핑계로 굶더라도 천賤한 노동과 상인商人과 장인匠人 노릇 못하겠다는 어리석은 잠꼬대에서 깨어나라고 했던 것이다.”
“또 상인常人을 보고는 제발 스스로 상놈 질 그만 하라고 타일렀다.
그랬더니 자칭自稱 양반兩班들보다 상인常人이 전혀 반응이 없는 데는 정말 기가 막혔다.”
2) 혼례와 상례, 세시풍습의 정화
먼저 혼례의 간소화와 낭비浪費를 없애기 위해, 부락部落 공동소유共同所有의 혼구婚具 일습一襲을 장만하여 타동他洞에서 빌려오는 폐단弊端을 막고, 신랑新郞의 행차行次를 보행步行토록 적극 권장勸獎하여 실효實效를 거두었다.
그리고 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약規約을 만들었다.
첫째, 장례葬禮는 3일장으로 한다.
둘째, 상가喪家의 일을 보는 사람은 자기 집에서 식사食事를 하고 다닌다.
셋째, 장사葬事 날에는 20세에서 40세까지의 남자 전원이 나서서 상여喪輿와 산역山役을 맡는다.
넷째, 장사葬事 날의 점심을 위하여 가가호호家家戶戶 빠짐없이 형편形便대로 부조扶助한다.
다섯째, 상가喪家에서는 최고最高 5두斗 이상의 술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한편 음력陰曆 정초正初만 되면 으레 보름 이상을 놀면서 물자物資와 시간時間을 낭비浪費하는 폐습弊習이 오랫동안 이어 왔다. 선생은 이를 척결剔抉키로 했다.
우선 마을의 집단集團 세배안歲拜案을 실행實行에 옮겨 음력陰曆 섣달그믐께 동민 회의洞民會議를 열어서, 그 집의 형편形便에 따라 떡이나 과일을 부담 시키고, 탁주濁酒 몇 말만 마을 기금基金으로 받게 하고, 초初 3일에 남자男子들의 세배歲拜를, 초 4일에는 여자女子들이 세배歲拜를 마치도록 했다.
오전午前에 세배歲拜를 마치면 매호每戶에 분담分擔시켰던 음식飮食으로 함께 점심點心을 먹고, 오후에는 편을 갈라 척사대회擲柶大會를 열어 설을 마냥 즐기도록 했다.
그러고는 5일부터 14일까지 특별노동기간特別勞動期間을 설정設定하여 가마니와 새끼와 그 밖의 고공품藁工品을 생산生産토록 하여 대보름 하루를 쉰 다음날 아침 그것들을 마을의 너른 마당에 일제히 출하出荷시켜 수량數量의 다과多寡와 품질品質의 우열優劣을 가려 포상褒賞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17일에는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삶기, 고공품藁工品 만들기 경진대회競進大會를 열어서 시상施賞함으로서 종래從來의 무위도식無爲徒食의 폐풍弊風을 시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 종전從前의 나쁜 관례慣例를 교정矯正시킨 일로 품앗이 노력 제공勞力提供이었다. 춘궁기春窮期 때 꾸어 먹은 곡식穀食을 일로 갚는 품앗이인데, 그러다 보니 자기 집 이앙移秧할 때를 잃게 되어 한 해 농사農事를 낭패狼狽보는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강력强力히 자기 집 이앙移秧을 우선于先하라 강조强調하여 실천實踐에 옮기도록 했는데, 반대급부反對給付로 선생은 때로 비난非難을 받기도 했다.
4. 부자마을을 위한 시책 전개
1) 가마니 짜기
어느 정도 저축액貯蓄額이 적립積立되었을 때, 선생은 그것을 담보擔保로 군郡 농회農會에서 가마니 짜는 기기器機 20대, 새끼틀 1대, 타고기打藁機 한 대를 주문注文하여 마을에 적절適切히 안배按配했다.
그리고 가마니 1매枚 짜는 노임勞賃은 10전錢, 가마니 날 새끼 대는 3전錢, 가마니 꿰매는 품삯은 2전錢, 원자재비原資材費 5전錢해서 완성完成된 가마니 한 장에 20전錢을 매상賣上하기로 했다. 선생은 매일每日 아침에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수數를 조사調査하여 기록記錄했다가 보름마다 모아 대금代金을 현금現金으로 지불支拂해 주었다. 이렇게 두세 달을 모으니 가마니가 근 1천장에 달했다.
당시 가마니 값은 1등품이 17전錢이고 등외품等外品은 7전錢이었는데 관제마을에서 짠 가마니의 초기初期 것은 거의 등외품等外品으로 보아야 했다. 거기에다 상주읍尙州邑까지 운반運搬하는데 한 장에 운임運賃 1전이 먹혔다. 20전錢 원가에 1전錢의 운임運賃을 물어 상주읍尙州邑으로 가지고 가서 검사檢査를 받는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2) 매상을 위한 화동출장소 설치
선생은 그 적자를 보충補充하기 위해 검사원檢査員이 화동化東에 나와서 검사토록 요청要請을 한 것이다. 생산자生産者로서는 매당枚當 1전錢씩의 운임運賃과 상주읍尙州邑 왕복往復의 여비는 물론 왕복往復에 소요所要되는 긴 시간을 오히려 생산生産에 활용活用할 수 있는 이득利得이 있었다. 거기에다 농회農會에서 다량多量 생산자生産者에게 지급支給하는 매당枚當 3전의 장려비獎勵費가 가산加算되는 것이다.
선생은 군郡 농회農會측에 매每 2,000장 단위單位로 출장 검사出張檢査를 간청懇請하면서, 상주尙州의 곡상穀商들이 중화中化 5개 면面에 나와 곡물穀物을 매상賣上하는데 현지現地 조달調達이라는 편의便宜가 따른다는 점을 역설力說했다.
그 결과結果 교섭交涉을 벌인지 한 달 만에 마침내 농회農會 측으로부터 화동 출장 검사化東出張檢査의 동의同意를 받아 내는데 성공成功했다.
뿐만 아니라 1차次 검사檢査 때는 가마니의 수량數量이 2천장이었으나, 2차 이후부터는 3천장으로 증가增加하게 되었고, 등급等級도 1차분에서 2, 300장 등외품等外品이 나왔을 뿐 항상恒常 전량全量이 1등의 판정判定을 받았다.
이렇게 전 동민洞民이 합심 전력合心全力하여 가마니와 새끼 생산生産에 큰 성과成果를 거두는 것을 보고, 군郡 농회農會에서는 마침내 그 노력努力을 포상褒賞하는 뜻으로 관제官堤에 가마니와 새끼의 지정검사소指定檢査所를 설치設置하여 종전從前의 월 1회 검사檢査를 2회로 하게 되었다.
3) 전錢・곡穀 장리채長利債 일소一掃
그쯤 되자 이번에는 마을의 전錢・곡穀 장리채長利債를 일소一掃하기 위하여 총력總力을 경주傾注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방안方案으로 마을사람 전원을 화령금융조합化寧金融組合에 가입加入시키고 신용대부信用貸付를 받아 그것으로 장리채長利債를 일차적一次的으로 정리整理했다. 그리고 잔여殘餘 장리채長利債는 마을의 공동共同 저축금貯蓄金으로 반제返濟토록 하고 그래도 부족분不足分은 여유餘裕있는 사람들의 돈을 모아서 마침내 마을의 전錢・곡穀 장리채長利債를 청산淸算하였다.
첨엔 금융조합金融組合의 신용대부금信用貸付金 상환償還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매호每戶의 형편形便이 되는대로 원리금元利金의 일부一部라도 거두어서 우선于先 대부금액貸付金額이 많은 사람의 몫부터 상환償還해 나갔다. 그 결과結果 약정約定한 그 해에 한 집의 미상환未償還도 없이 갚을 수가 있었다. 면내面內에서 관제官堤만이 금융조합金融組合 직원의 채무債務 독촉督促 출장出張이 없었던 마을이 되어 또 한 번 그 성과成果를 거두게 되었다.
4) 문맹퇴치文盲退治 운동 전개
장리채 정리가 끝을 낸 그 해 가을부터 동민洞民 전원全員의 문맹文盲 퇴치退治를 위해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야학夜學을 열었다. 장소場所는 자양학원紫陽學院 자리였다. 낮에는 부지런히 일하고 밤에는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기를 1년쯤 계속하니, 마을의 부녀자婦女子치고 편지便紙와 가계부家計簿를 못 적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5) 공동 우물 파기와 보洑의 설치
마을의 공동共同 편의便宜를 위해 종전從前에 하나밖에 없었던 공동우물을 네 군데로 늘리고, 화재火災와 한발旱魃에 대비對備하여 새로 연못을 세 군데 팠다.
보洑의 경우는 종전從前보다 더 많은 보洑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한해旱害를 무사히 극복克服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6) 공동양잠共同 養蠶과 마을 공동 경작을 위한 토지 마련
마을의 소득所得을 높이기 위해 공동양잠共同養蠶을 시도試圖했다. 선생은 백씨伯氏 소유의 산전山田 약 2천 평坪을 금金 일백一百원에 지가地價를 정하고 매년 10원씩 지불하여 10년에 완결完結토록 주선했다.
아울러 마을 부녀자婦女子들의 공동共同 경작耕作 전田 한 필지筆地와 부락 소유의 공동共同 경작耕作답沓 3천 평坪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산家産 농우農牛의 생식生食을 권장勸獎하여 군郡 농회農會에서 장려비獎勵費 70원을 수령受領하여 56평짜리 함석지붕의 건초 저장고乾草貯藏庫를 세웠다.
그리고 마을 사람의 자작自作 농토農土 증대增大를 위해 금융조합金融組合에서 저리低利 대출금貸出金을 인출引出하여 우선 저축액貯蓄額이 많은 집부터 몇 마지기씩 매입買入토록 하였다. 그 결과 10년 가까이 지났을 때는 동리洞里 주변의 농토農土가 거의 동민 소유洞民所有가 되었다.
7) 마을 공동 판매장共同販賣場을 통한 상공업商工業 권장
상주・화동・황간 국도가 관제마을을 중심으로 신설 되는 행운이 오자 선생은 종전從前에는 반대反對했던 상점商店과 주점酒店 개설開設을 권장勸獎하고, 마을 사람에게도 적극적積極的으로 상공업商工業에 종사從事할 것을 권했다. 그와 동시에 마을에서 가까운 신작로 교차점交叉點에 마을의 공동 판매장共同販賣場으로 쓸 30여 평짜리 함석지붕의 창고倉庫를 짓고 1차적으로 벼의 공판共販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창고 옆에 다시 20여 평의 집을 지어 여인숙旅人宿과 음식점飮食店. 잡화점雜貨店을 겸하게 했다.
이 해 가을 마을의 공판장共販場에서는 군 농회農會의 검사원檢査員이 검사檢査한 벼 5만 가마니 정도가 거래去來되었다. 그래서 검사檢査 수수료手數料와 보관료保管料로 징수徵收한 돈으로 창고倉庫와 부속附屬 점포店鋪의 건축비建築費 융자금融資金의 이자를 어렵지 않게 갚을 수가 있었다.
이상과 같이 부촌富村 건설建設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동민의 사기진작士氣振作과 정서 함양情緖涵養을 위해 봄의 이앙移秧이 끝났을 때는 전全 동민洞民이 참석參席하는 야유회野遊會를 가지고, 7월의 백중伯仲날에는 씨름대회를, 추수秋收가 끝났을 때는 각종各種 농산물農産物과 고공품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례행사年例行事로 성대盛大히 개최開催했다. 특히 이 품평회品評會는 소문所聞이 널리 퍼져서 타지방他地方의 관리官吏들이 견학見學하러 오는 마을이 되었다.
5. 모범마을 선정
1936년 병자년丙子年.
선생은 다시 마을 사람의 앞장을 서서 소득증대所得增大를 위해 협동協同하고 근면勤勉하는데 전력全力을 경주傾注했다.
이해 가을 마을에서는 예년例年처럼 농산품農産品의 품평회品評會를 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주군수尙州郡守와 경찰서장警察署長이 경상북도慶尙北道 경무부장警務部長인 오노 갠이지(大野謙一)를 수반隨伴하여 품평회品評會와 경진대회競進大會를 참관參觀하러 왔다. 실實로 화동면化東面 유사이래有史以來 최초로 맞는 고관高官들의 행차行次였다.
그들은 품평회品評會와 경진대회競進大會뿐만 아니라 마을의 연중 행사표年中行事表와 개량 실적표改良實積表, 저축 상황貯蓄狀況 등을 일일이 살핀 다음 많은 칭찬稱讚과 격려激勵를 하고, 군郡과 도道로서 포상褒賞하겠다는 말까지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 대야大野 경무부장警務部長은 김천 군청金泉郡廳에 도내道內 군수郡守・서장署長의 기관장 회의機關長會議가 소집召集된 자리에 나가 상주군尙州郡 화동면化東面 관제리官堤里의 발전적發展的인 실황實況을 소개紹介하고, 모두 모범模範으로 삼으라는 훈시訓示를 했다.
그러자 우리 마을에는 도내道內 각지各地에서 시찰단視察團이 끊이지 않고 방문하게 되었다.
6. 상주・화동・황간 국도 유치
해가 바뀌어 1937년 정축년丁丑年이 되었다.
양력陽曆 1월 초에 선생은 상주경찰서尙州警察署 경무 계장警務係長의 호출呼出을 받았다. 이 호출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 하고 선생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와 국체명징國體明徵을 위해 국민계발國民啓發의 앞장을 서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선생은 그에게 건성으로 동의同意한 다음, 오히려 이 무렵 도道에서 개설開設을 추진하고 있는 상주尙州. 보은報恩간의 새로운 국도國道가 화동化東을 경유經由할 수 없겠는가 하는 부탁付託을 해 보았다.
그 점은 이미 계획計劃이 확정確定된 것이기 때문에 수정修正을 할 수 없지만 그 공사工事에 뒤이어 상주尙州-황간黃澗 간에 신작로新作路 개설開設이 있으니 그 도로道路는 반드시 화동化東을 경유經由토록 서로 힘을 써 보자는 새로운 정보情報를 귀 뜸해 주었다.
그리고 그 후 수개월數個月 뒤에 경무계장警務係長의 말대로 상주尙州-황간黃澗 간의 도로가 관제官堤 바로 앞을 지나서 개설開設되었다. 매 호당戶當 2개월이라는 가중加重한 부역賦役이 고통스러웠으나, 이 신작로新作路의 개통開通은 선생뿐 아니라 마을의 발전發展을 약속約束해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Ⅴ. 민주주의民主主義 교육의 선구자先驅者
1. 사회주의 운동에 반대
선생이 사회주의 운동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첫 기회는 선생이 1921년 화령청년회 회장 일을 할 때였다.
당시 상주에는 상주읍尙州邑과 함창咸昌, 화령化寧의 3개소個所에 청년회靑年會가 결성結成되어 있었다.
경북도慶北道 당국當局에서는 도내(道內)의 각各 청년회를 지도指導하기 위해 1921년부터 매년每年 각 지방의 청년회장靑年會長을 불러 모아서 수일간數日間씩 교양 강습회敎養講習會를 개최했다. 마침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서 열린 제2회 강습회講習會 때 함창咸昌의 김한익金漢翊 씨와 화령化寧의 선생이 지명指名을 받고 나갔다.
강습회 마지막 5일 째 되는 날 참석參席한 사람들끼리 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민족주의民族主義를 겉으로 표방標榜하며 사회주의 단체社會主義團體를 만들려는 사회주의자들의 계책이었다.
선생은 그들이 의도한 회칙과 결성방법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반대의견을 분명히 했다.
“회칙會則에는 30세 이상 자는 청년회 회원 자격을 제한制限한다는 조항條項과 각 청년회의 규약規約을 동일同一하게 통일統一하여 이번에 새로 결성結成되는 모임의 산하傘下에 예속隸屬시킨다는 조항條項이 있었다.
그 두 가지 점點에 대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의 토론討論이 시작되었다.
나는 각 청년회의 규약을 통일한다는 점에 의혹疑惑이 갔다. ‘어떤 내용內容으로 통일을 한다는 말인가?’ 나는 미심未審쩍게 여긴 나머지 일어서서 ‘규약 통일안規約統一案을 제시提示하라, 맹목적盲目的으로 규약 통일을 한다는 것은 절대絶對 승복承服할 수가 없다. 적어도 상주尙州 화령청년회化寧靑年會만은 그런 불투명不透明한 조직組織에 가담加擔하는 것을 나 혼자서 결정決定 할 수가 없다’라는 발언發言을 했다.”
이 발언으로 회의가 무산되자 회의 무산의 책임이 선생 때문이라고 한 청년에게 폭행을 당할 뻔했다.
“그날 저녁 그 청년은 내가 묵고 있는 여관旅館에 술 한 병을 사들고 찾아와서 자기의 무례無禮한 짓을 사과謝過했다. 그리고 자기는 의성義城이 고향故鄕이고 명치대학明治大學에 재학 중이며 지삼달 씨는 자기가 존경하는 학교 선배先輩라고 하면서 사회주의社會主義 운동運動만이 조선朝鮮을 일제日帝의 식민지植民地에서 구救할 수 있다는 일장一場의 열변熱辯을 토吐했다.”
그들의 정체를 선생은 이미 간파看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1922년부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표방標榜하는 사회주의社會主義 운동이 젊은 지식층知識層의 호응呼應을 받아 전국적全國的으로 맹렬猛烈히 확산擴散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유학생留學生의 7할割이 사회주의社會主義 동조자同調者였고, 그 중 절반折半 정도는 맹신자盲信者가 되어 그 선전宣傳의 전위前衛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강습회講習會 이후도 몇 차례 여러 사람으로부터 가맹加盟의 권고勸告를 받았으나 끝내 동의同意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선생은 몇 년이 지난 1927년 정묘년丁卯年 3월에는 자진自進하여 신간회新幹會 상주지회尙州支會의 회원이 되었다.
“신간회新幹會는 ‘우리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정치적政治的, 경제적經濟的 해방解放의 실현實現을 기諆한다’, ‘전全 민족民族의 현실적現實的 공동이익共同利益을 위하여 투쟁鬪爭한다’는 정강정책政綱政策을 밝혔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민족주의民族主義에 공명共鳴해서 회원會員으로 가입加入했던 것이다.”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2. 민주주의 교육의 필요성 강조
선생은 광복 이후 사회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혼란이 극심할 때 민주주의 정신의 교육이 필요함을 확신한 분이었다.
그 이유를 앞으로 세워질 이 나라의 국체는 민주정부임에 틀림이 없다고 예견豫見하고 있었다.
“아직 국체國體가 확정確定되지 못하고 우리의 정부政府도 수립樹立되지 않은 상태狀態에서 교육敎育의 민주화民主化를 부르짖는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구未久에 세워질 우리 정부政府는 민주정부民主政府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니까. 지금의 시점時點에서도 정치가政治家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구현具現을 위해, 사업가事業家는 민주적民主的 산업産業을 위해, 교육자敎育者는 민주주의民主主義에 입각立脚한 교육敎育을 위해, 연구硏究와 노력努力을 기울여야 한다.”
선생은 민주 정부와 민주교육의 필요성은 국치의 수모를 겪은 까닭이 왕조시대 교육을 받을 권리의 불평등에서 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옛 왕조시대王朝時代 특히 조선 조朝鮮朝 시대時代의 교육敎育의 장場은 서당書堂, 서원書院, 향교鄕校, 성균관成均館 등이었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돈과 권력權力이 있는 소위所謂 양반 계급兩班階級과 일부一部 중인 계급中人階級에 제한制限되어 있었다. 또 교육과정敎育課程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바탕으로 한 성리학性理學 뿐이었다.
그런데 유교儒敎는 효孝를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으로 지나치게 강조强調했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자들이 이기利己 이가利家를 우선于先하고, 사회社會나 국가國家를 2차적二次的으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경시輕視하는 폐해弊害가 있었다.
그 폐해弊害가 결국結局은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자초自招하였으며, 다시 일제日帝 하下에서는 모든 교육敎育이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의 수행遂行에 귀결歸結되어 왔다.
그런 후진적後進的이고 모순矛盾된 과거過去의 교육 잔사敎育殘渣는 이제 티끌하나 남기지 않도록 깨끗이 털어버리고, 모름지기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 교육敎育을 시행施行해야 한다.”
아울러 민주교육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전국全國의 각各 면面에 최소한最小限 1개의 중학교中學校가 있음직하고, 큰 군郡일 경우에는 전문학교專門學校나 대학大學이 하나쯤 있는 것이 바람직한 민주국가民主國家의 교육정책敎育政策이며 가장 효과적效果的인 방법方法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Ⅵ. 탁월한 웅변가
화동의 교육과 잘 사는 화동을 만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선생은 대부분의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정에는 소홀했던 부분이 없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희생하고 노력한 대가가 온전히 큰 기쁨으로 안겨오지도 않았다. 그 실망과 허무함이 얼마나 컸을까?
선생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자양학원을 위해 10년의 노력이 인가조차 받지 못하고 문을 닫는 경험이 그랬고, 화동중학교 설립을 위해 또 헌신했지만 고등공민학교 인가로만 그치는 아픔도 맛보았다.
잘 사는 화동을 만들기 위해 의식개혁으로부터 시작하여 공동작업, 공동판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았으나 정작 선생에게 돌아 온 것은 원망과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멍에로 짊어지고 고향을 떠나는 삶을 살기도 했다.
오광자소의 마지막인 ‘오광’은 이러한 선생의 아픔과 좌절을 딛고 다시 한 번 일어 서려는 선생의 웅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오광의 내용은 화동중학化東中學 건립建立 발기인發起人 제위諸位에게, 화동면化東面 공무원公務員 제위諸位에게, 의연자義捐者 제위諸位에게 보내는 호소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첫째, 화동중학 건립 발기인들에게 드리는 글에서는 모두 열 번씩이나 물음표를 던지면서 초심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이 일을 이루어 보자는 호소를 하고 있다.
물음표는 결국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이러한 ‘되물음’의 방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그날 여러분과 나, 어른과 아이, 육체肉體 노동자勞動者와 정신精神 노동자勞動者, 문맹자文盲者와 식자識者가 똑같이 만세萬歲를 부르고 손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모임에 앞장섰던 우리 모두가 화동중학교化東中學 건립建立의 발기인發起人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있는 힘을 다 합하여 ‘내 고향故鄕 발전發展을 도모圖謀합시다. 우리들의 부조父祖가 못하신 영광榮光된 향토 건설鄕土建設을 우리 세대世代에 기필期必코 실행實行합시다.’ 하고 뜻을 모아 화동중학교설립기성회化東中學設立期成會를 발족發足시키지 않았습니까?
1945년 을유년乙酉年 9월 15일, 관제官堤의 김진만金眞萬 씨 댁宅에서의 자양학원紫陽學院 강학계총회講學契總會에 이어 결성結成한 화동중학교걸립발기인회化東中學設立發起人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습니까?
이어서 그해 10월 20일, 화동국민학교化東國民學校에서 개최開催한 화동중학교化東中學校 기성회期成會는 얼마나 화기애애和氣靄靄하였습니까?
중등교육中等敎育을 받고 싶으나 가세家勢가 허락許諾하지 않아 도회지都會地에만 있는 중학교中學校를 가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향토鄕土의 어린 새싹들을 위하여, 또 우리 향토鄕土의 내일의 장한 파수把守꾼이 될 다음 세대世代를 위해, 그들의 중등교육中等敎育은 우리 힘으로 이수履修시키자고 서로가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
- “화동중학化東中學 건립建立 발기인發起人 제위諸位에게” 중에서
둘째, ‘화동면化東面 공무원公務員 제위諸位에게’는 역시 화동중학교 설립의 배경과 경위, 그 동안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하루 속히 정식 인가가 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간곡함이 염원으로 나타나 있고 이어 화동국민등학교 선생님들에게까지 화동중학교가 지역교육의 요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곡함을 피력하고 있다.
“이미 일부나마 교사校舍도 건립建立되었고 학생 다수多數를 확보確保한데다 그 학생學生들 가운데서는 보다 발전적發展的인 진출進出까지 한 실적을 올렸습니다. 타면他面에서는 아직 볼 수 없는 우리 면面의 선각先覺이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이제 여러분께서 조금만 더 보호保護 육성育成의 따뜻한 손길을 뻗어 주시면 미구未久에 훌륭한 중학교中學校로 굳혀 질 것이 확실시確實視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近者에 와서 여러분께서는 화동중학化東中學을 대안지화對岸之火처럼 보시는 듯이 느껴집니다. 옛말에 선즉제인先則制人이요 후즉위인소제後則爲人所制라 했습니다. 인근隣近 면面에 앞서서 장壯하게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린 우리 화동중학化東中學이 인근 고을에 빛을 발하도록 여러분께서 끝까지 지도편달指導鞭撻이 계셔야 마땅합니다.”
- “화동면化東面 공무원公務員 제위諸位에게” 중에서
마지막으로 ‘의연자義捐者 제위諸位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자 모든 것을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심기일전心機一轉하자는 호소였다.
Ⅶ. 글을 맺으며
끝으로 선생이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결사結辭에 나타난 글을 여기에 옮기면서 이글을 맺고자 한다.
“나는 매사每事에 실행實行을 앞세우고 살아왔다. 스스로 실천궁행實踐躬行했을 뿐 아니라 학업學業이든 처신處身이든 기회機會 있을 때마다 남에게도 실행實行 할 것을 권고勸告해 왔다.
보다 부연敷衍하면 나는 자로子路를 좋아하여 그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따르려고 한 것이다. 논어論語 공치장公治長 편篇에 보면
“자로유문子路有聞, 미지능행未之能行, 유공유문唯恐有聞”
하는 구절句節이 나온다. 우리말로 쉽게 풀이하면
“자로는 무엇이든 한 가지를 배우면 그것을 이내 실행實行에 옮기려 했다. 실행實行을 하지 못했을 때는 다른 가르침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라는 뜻이 된다. 나는 한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섯 차례 사업事業을 벌이면서 여섯 번 집을 지었다. 그러면서 여섯 번 모두 스스로 만족滿足할만한 성과成果를 얻지 못하고, 종내終乃는 반도면폐半途面廢의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자로子路의 행동적行動的 성품性品과 결단성決斷性을 존숭尊崇하여 따르고자 했으나, 자로子路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벼슬한 것처럼 관도官途에 나설 생각은 애시 당초부터 가지지 않았었다.
나는 끝까지 내 스스로 지향志向하는 바를 개척開拓하기 위해 실행實行하였지 관官이나 어떤 공공기관公共機關이 기설旣設한 길에 편승便乘하여 안주安住나 안형安亨을 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가 그것을 그릇된 편파偏頗고 아집我執이라 해도 좋다. 나는 그 편집광偏執狂이 삶의 전부全部였다. 한 번 미쳐보기 시작하여 다섯 번을 미쳐 보았다. 그리고 다섯 번 모두 유종有終의 미美라는 점에 도달到達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사연事緣으로 해서 나는 스스로 『오광五狂』이란 자호自號를 만족滿足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용문冗文이나마 그것을 자소自疏해 보기로 했다.”
'상주학 > 상주학 제3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산상속법 알아보기 (0) | 2014.02.25 |
---|---|
뇌허雷虛 김동화金東華의 생애와 업적 (0) | 2014.02.25 |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선생과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선생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0) | 2014.02.25 |
상주학 제3권 목차 (0) | 2014.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