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3권

뇌허雷虛 김동화金東華의 생애와 업적

빛마당 2014. 2. 25. 19:42

뇌허雷虛 김동화金東華의 생애와 업적

박 찬 선


전) 상주고등학교 교장

전) 국제펜클럽 경북지역회장

현) 인, 상주문화원 고문


뇌허雷虛 김동화金東華의 생애와 업적


시인 박 찬 선

<目 次>

Ⅰ. 머리말

Ⅱ. 뇌허의 생애와 학문

1. 뇌허의 생애 연보年譜

2. 뇌허의 인품

Ⅲ. 학문과 저술著述

1. 방대한 저술활동

2. 한국불교에 대한 사명의식과 학적 체계

3. 교육적 측면에서 본 불교

Ⅳ. 뇌허의 한국불교에 대한 진단

1. 한국불교의 당위문제

2. 종합 재정리

3. 종합재정리綜合再整理의 방법론方法論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고구려 17대 소수림왕 2년(AD.372)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순도順道와 불상 및 경전을 보내온 것에서 비롯한다. 1700년 불교 수용의 긴 역사를 가진 불교문화가 한국문화의 기층을 이루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논리적 강건성이 고구려 문화의 기반이 되는가 하면, 계율적 온화함이 백제문화를 형성하였고, 조화와 통일성이 신라불교를 장엄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의 호족적 기질과 선사상이 고려장경과 청자 빛 청정성을 창의하였고 배불排佛의 시대에도 조선조 불교는 호국의 의지로 승계되었으니 어찌 한국문화 전반을 불교를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일제 강점기에도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스님들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뇌허 김동화이다.

뇌허 김동화 박사는 상주에서 태어나서 일흔아홉의 생애를 마감하고 상주의 노악산록에서 영겁의 순리에 동승하고 있다. 남장사와 관음전 사이 중간지점 왼편에 뇌허의 사리탑舍利塔과 행적비行蹟碑가 세워져 있다.

뇌허가 유명을 달리하신지 33년, 뇌허의 학덕을 기리는 뇌허 불교학술상도 제정되어 14회에 걸쳐 시상이 되었고 2001년에는 뇌허 김동화전집 전 14권이 문하생의 정성으로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에서 발간되었다. 이로 보면 뇌허는 생사의 분별을 초탈하여 근세 한국 불교계에 지남指南이 되고 있음을 알겠다.

필자는 1989년에 발간한 『尙州誌』의 종교편을 집필하던 중 한국 불교계의 거목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 얻어진 결과물이 『상주문화』 2호에 「뇌허 김동화의 생애와 사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불교인으로서 언제 어느 곳에서나 청정淸淨함을 견지하시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대도사大導師이셨습니다. 원만한 수행을 통해 구현하신 참되고 바르며 곧고 자비로운 인품에 있어서나, 넓고 깊게 천착穿鑿하여 명증明證하고 체계화하시는 학문에 있어서나, 따뜻하면서도 엄하고 간곡하면서도 명확한 지도력을 갖추신 교육자로서의 풍모에 있어서나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경륜經綸에 있어서나 모든 사람의 사표요 길잡이이셨습니다.”

위에 인용한 글은 뇌허에게 바친 헌사의 일부이다. 유고遺稿를 물려받아 책을 펴낸 발행인으로서 책을 헌정獻呈하는 취지를 기록한 것이지만 뇌허의 인간적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글이다.

뇌허는 첫째로 불교인으로서, 둘째로 불교학자로서 셋째로 교육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한국 불교계에 빛나는 자취를 남긴 인물을 조명照明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인 줄 알면서도 용단을 낸 것은 상주 불교와 직접적인 연관성 때문이다.

원래 인물연구는 냉철한 판단과 객관적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감정에 이끌린 과잉포장이나 실재에서 벗어난 과장은 금물이다. 가능한 범위에서 이와 같은 상식을 지키면서 뇌허의 생애와 학문 및 불교사상사에 끼친 공적을 살펴볼까 한다.

Ⅱ. 뇌허의 생애와 학문

1. 뇌허의 생애 연보年譜

뇌허雷虛 김동화金東華는 1902년 8월 30일(음력) 경북 상주군 상주면 서곡리에서 아버지 김학수金學洙(본관 김해)와 어머니 전주이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80년 4월 5일 입적했다. 향연享年 79세.

뇌허의 일생은 불교와의 만남을 통해 불교를 위해서 헌신한 기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 “뇌허는 민족국가 사회와 불교승단의 전환기적 격변기 속에서 묵묵히 승려소서, 유학승으로서, 초기 불교교육 담당자로서, 교수로서, 포교사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로서 뇌허가 당대 한국불교에 진력한 역할을 짐작케 한다.

뇌허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① 청소년기의 수학기修學期 ② 청년기의 일본 유학기留學期 ③강단에서 후진양성에 몰두한 장년기와 중년기 ④퇴임 후의 노년기로 나눌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조선 승단의 일본화를 획책하기 시작했다.

1913년 12세 때 동해사에 출가하여

1914년 13세 때 남장사에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1916년 15세 때 승려 도첩度牒을 받고 상주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3월 남장사에서 1913년부터 4안거를 마치고

1919년 18세 때 상주 남명학원南明學院에서 초등과(사집과四集科)를 수료했다.

1920년 19세에 문경 金龍寺에서 1917년부터 四安居를 마쳤고 3년 뒤

1923년 3월 금룡사 지방학교를 졸업했다.

뇌허의 일본 유학은 일제하의 어려움 속에서 이뤄졌음이 짐작된다. 식민지의 젊은 지성인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수모와 울분, 굴욕과 비애를 삭이면서 앞서 있는 학문에 대한 수용과 이를 극복하려는 오기가 그를 더욱 학문적 열기로 부채질 했을 것이다. 또한 민족적 양심의 결의가 또 한편으로 불교를 전수한 나라로서 입장이 뒤바뀌어 오히려 배워야하는 처지에 놓인 한스러움이 그를 뜨겁게 몰아쳤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계는 1920년 유신회를 중심으로 30본산제를 폐지하고 총본산제 설치운동이 일어나고 1928년 3월 14~17일까지 이운허, 이청담스님 등 49명이 발기,각황사에서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8개 단체가 연맹하였다. 1929년 1월 전 조선 승려 대표자 102명이 경성에 모여 종헌제정과 종회구성 결의를 하여 한국불교 전래 이래 획기적인 제도적 구각을 일소하는 일대 혁신이 있었다. 백성욱이 승려대회 취지문을 작성함. 1929년 6월 10일 총독부는 사찰령 시행세칙 중 사찰재산에 부분을 개정 그 감독을 강화하였다.주지들의 부정부패로 야기된 사찰재산 보호의 명분이나 신불교운동을 억압하였다. 이때 불교승단은 자체 정화淨化에 실패하였고 총독부의 힘에 의존 불교활동은 정체되어 결과를 가져왔다.

1928년 3월 27세 때 동경 立正大學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함.

1930년 29세 때 남장사에서 혜봉선사慧峰禪師를 법사로 건당建堂하여 뇌허雷虛라는 법호法號를 받았다.

1932년 3월 31세 때 입정대학 학부 종교과를 졸업했는데 이때 성적우등상을 받았다. 이어 그해 4월 입정대학 국내 유학생에 선발되어 3년간 불교교리발달사佛敎敎理發達史를 연구하고

1936년 4월 35세 때 입정대학 전문부 종교과 전임강사로 취임했다. 이로보아 그의 유학시절은 오직 불교 연구에만 몰두하여 진지한 학구적 자세를 지녔음을 알겠다.

1940년 3월 뜻하는 바가 있어 일본 입정대의 강사를 사임하고 귀국했다. 뇌허의 학행일치學行一致는 4월 39세 때 대구시 경북불교협회 총무에 취임하고 그해 김룡사에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품수稟受함에도 나타난다.

1941년 2월 40세 때 경북 오산불교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41년 10월 경성京城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강사 겸 생도주사에 취임, 1942년 4월 동교의 생도과장, 1943년 7월에 동교 교수로 출발한 그의 대학 강의는 72세 때(1973) 동국대학교를 정년퇴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강단에 선 이후부터 명예교수로 있은 기간까지 합치면 40년이 넘게 후진 교육에 전념한 셈이 된다. 그리고 이 시대에 불교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사람으로 뇌허 외에는 드물었고 거의가 정치승, 운동승, 포교승 등으로 본격적인 불교운동과는 동떨어진 상태였다.

1944년 5월 조선불교중앙포교사 및 조선불교교학위원으로 취임.

1945년 9월 동국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로 임명되고 동년 조선불교법규위원 및 상벌위원이 됨.

1947년 조선불교 법계法階 고시위원이 되었다.

1948년 8월 13일 동국대학 부학장으로 임명 1년간 봉직하고

1950년 5월 13일 동국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어 2년 6개월간 봉직했다.

1952년 고등고시 위원 위촉 받다.

1953년 3월 성균관대학교 강사 취임.

1953년 8월 동국대하교 대학원장 취임.

1955년 3월 고려대학교의 강사 1959년 대우교수로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다시 동국대학교 교수로 복직, 동년 12월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사임하고 12월 2일 동국대 대학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64년 8월 20일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소장 취임

1965년 8월 1일 동국대학교 불교 대학장취임

1966년 5월 8일 10년 근속표창 및 금메달 받음

1966년 12월 19일 동교 대학원장에 취임(2임)

20여권이나 되는 불교학 관련의 저술과 발표될 때마다 학계의 주목을 받은 40여편의 논문과 논술이 다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1969년 5월 15일 대구 능인고등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일에 초대교장기념패 및 금메달 받음

1969년 12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장에 3임됨

1970년 12월 5일 69세 때 교육공로자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1971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장(4임) 및 불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계셨고 학술원의 종신회원이 되었다.

1972년 7월 17일 71세 때 학적 성과와 업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도 누렸다.

1973년 동국대학교 정년퇴임 동교 명예교수로 임명받음.

1980년 4월 5일 열반 하셨다. 영결식은 동국대학교 교정에서 있었다.

1980년 상주 남장사에 사리 부도 봉안함

2002년 뇌허당동화대종사행적비 세움.

2. 뇌허의 인품

“뇌허 김동화는 확고부동한 신해信解를 갖춘 학승이다. 어디에도 회유되거나 아부곡세하지 않는다. 불교적 학과 신을 성불에 초점을 맞추어 일관투달一貫透達하였다.”

“선생님은 결코 현하지변懸河之辯의 변설가辯說家는 아니셨고 어디까지나 한마디 한마디가 진지하고 진실하며 온화한 가운데 자상하시며 논리적 명징성明徵性을 지니고 상대방을 깨우쳐 차분한 가운데 감동케 하는 분이셨다. 자기과장이나 허세와는 체질적으로 관계가 전혀 없는 분이셨으며 그렇다고 유표有表한 겸손이나 영합과도 또한 거리가 먼 분이셨다. 진실과 온화 그리고 강직함으로 일생을 일관하셨던 분이시라고 생각된다.”

고 회고의 말을 남기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뇌허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온화하며 말씀이 적었던 선생님은 아버지다운 자애를 베풀어 주시기도 했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 뇌허의 인간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진실眞實, 온화溫和, 강직强直 이 세 낱말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뇌허의 이와 같은 인간미人間味는 그의 천품과 오랜 수행의 결실이다.

“문필을 농하기보다는 사색을 좋아하고 언론을 변하기보다는 이해를 힘쓰고자 하는 것이 나의 성질이다.”

라고 사상의 원숙기에 들어설 무렵에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기술한 것으로 보아 수행과 동시에 학문을 할 수 밖에 없는 타고난 성품을 알겠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한국불교의 장래를 걱정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근본적인 문제가 특히 우리시대에 와서 사상적으로 빈곤화하고 왜소화한 데에 있다고 보고 열반을 목전에 두시고 원고를 집필하셨습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아 뇌허의 일생이 한국불교와 그 사상의 탐색과 정리에 집중되었음을 알겠다. 특히 열반을 눈앞에 두고 한국불교의 현실을 진단하고 이것의 당위문제와 통일원리를 개진開陳한 것을 볼 때 뇌허의 불교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학자적 양식良識을 짐작케 한다. 흔히 하는 말에 한 사람의 평가는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정당하게 평가된다고 한다. 뇌허는 입적入寂한 뒤 다비茶毘의 결과 네 과의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본디 사리는 3천도의 높은 열에도 녹지 않는 오랜 기간의 수행과 정진精進의 정신적 결정체라고 한다. 청정淸淨 구도求道의 생활이 극진했음을 일러준다.

뇌허의 사리는 출생의 고장이자 어린 시절 사미계를 받은 남장사 후원後園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나란히 모셔진 취진당 명부도醉眞堂 銘浮屠, 소영당대사신종 명부도昭影堂大師神宗 銘浮屠, 환옹대사삼응 명부도喚翁大師三應 銘浮屠, 쌍원당 명부도雙圓堂 銘浮屠의 와 나란히 노악산 기슭 양지 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 사리탑 바로 곁에 2002년 뇌허 김동화박사행적비가 장대한 오석의 비신으로 우뚝 세워져 있다.

Ⅲ. 학문과 저술著述

1. 방대한 저술활동

필자는 불교에 입문한 50년대 후반 불교서적으로 처음 읽은 책이 김동화 저 불교학개론佛敎學槪論이었다. 우선 불교의 전문 용어에 당황하게 되었고 불교의 핵심내용이 논리적, 조직적인 엄격한 체계에 경직성硬直性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끙끙거리며 읽은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그 책을 참고로 하여「불교의 특질」이란 소론을 적어본 감회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개론서를 비롯하여 전문 영역의 저술은 방대하면서도 다양하다. 불교사佛敎史와 관련된 것, 불교철학과 사상에 관련된 것, 불교 일반의 신행불교信行佛敎의 요체要諦를 기술한 것으로 대별된다.

대개 불교연구의 방법에는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논리적 연구의 방법(공시적)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 연구 방법(통시적)이다. 불교의 전반적 연구도 그렇지만 종파불교宗派佛敎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뇌허의 불교연구는 내용이나 방법상에 있어서 위의 방법을 두루 사용했음이 확인된다. 그의저술에는『한국철학사상사韓國哲學思想史』『선학사상사禪學思想史』『불교교리발달사佛敎敎理發達史』『불교유심사상佛敎唯心思想의 發達史』등에서 보듯 역사적 방법도 썼고『불교학개론』『유식학개론唯識學槪論』『구사학개론俱舍學槪論』『대승불교사상大乘佛敎思想)』『원시불교사상原始佛敎思想』등으로 보아 논리적 연구방법도 썼다. 특히 불교의 요체要諦라 하며 불교교리사상佛敎敎理史上 정통사상적正統思想的 지위를 점유하는 유식학唯識學에 대한 개척은 큰 업적이라고 하겠다.

그리고『불교독본佛敎讀本』상하권(權相老 共著)과『불교대의佛敎大意』를 저술활동의 초기에 출간한 것은 불교의 입문과 대중화에 초점을 두었다고 판단된다. 이어서『신행불교 1‧2 집도『신편불교성전新編佛敎聖典』. 權相老 共編著)도 그러한 의도와 맥락에서 집필된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불교의 특징으로서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차원에서 다룬 책으로 『佛敎의 護國思想』과 논문으로「護國大聖四冥大師의 硏究」가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문화인 불교문화 형성의 사상적 배경을 탐구코자한『한국역대고승전韓國歷代高僧傳』이 있다.

특히 뇌허의 최대 관심사는『불교교리발달사佛敎敎理發達史』였다. 이것은

“입정대 학생 때부터 관심사로 시종여일한 성도문聖道門이었고 이 대란사大難事를 회통하기 위하여 이목을 돌리지 않고 장좌궤상長坐机床 하면서 교해의 문류를 섭렵하였고 생각은 삼매에 일경시켰다. 그 결과 방대하고 정밀한 교리사가 산태産胎하게 되었고 고고히 법명法鳴을 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학개론』은 1954년 한국 불교계 최초로 저술 출판하였다. 이것은 당시 불교계와 지성인들에게 지적 목마름을 달래준 청량제가 되었다.

이처럼 뇌허는 방법적 문제에서 뿐 아니라 미개척의 한국불교를 학적으로 정리 체계화시키는데 진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적 체계를 갖추는 한편 교리와 선학禪學, 호국불교 등 사적체계史的體系도 함께 추진하여 확립시켰다. 과학적이요 논리적인 기술방법에 의한 체계화의 작업이 뇌허에 의해서 비로소 정립된 것이다.

2. 한국불교에 대한 사명의식과 학적 체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민족문화의 창조와 생활의식의 변화 및 국민의식의 함양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뚜렷한 사실이다. 불교가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으로 우리문화를 창출하였으므로 마땅히 존재가치의 규명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럴 여유가 없이 미진한 채 흘러왔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불교에 대한 정당한 자리매김-그것을 뇌허는 스스로 자청한 것이요, 사명의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한 것이다.

“필자가 일본국 입정대학에서 우리나라 혜화전문과 동국대학교, 서울, 기타 제대학교에서 유식학唯識學을 강의하기 30여년, 구사학俱舍學을 강의하기도 30여년, 그 강의안을 활자화해서 후래 동호자들의 연구에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염원은 이미 오래되었으나”

로 보아 두 영역의 중요성을 헤아릴만하다.

구사학이 소승불교의 기초학이요 종국終局이라 한다면 유식학은 대승불교의 기초학이다. 그러면서도 ‘구사俱舍 8년 유식唯識 3년’이란 말이 불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로 보아서 불교학설 중에서 이해가 어려운 학문임은 틀림없다.

불교학을 조직적 체계적 논리적으로 연구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구사학과 유식학이다. 이것은 독립적 영역을 지녔으나 불교의 여러 종학宗學과 관련이 있으며 모든 불교학의 기초적 학설이 된다.

다만 구사학은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실유實有를 주장하고 유식학은 일체제법의 가유假有(空이나 中道)를 주장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전자는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說을 주제 교설하고 있는 색본심말설色本心末說이요, 후자는 ‘오위백법五位百法’ 說을 주제로 하고 있는 심본색말설心本色末說이다. 발생의 선후로 볼 때 구사학이 먼저요, 유식학이 뒤이다. 예를 든다면 중국불교의 정화精華인 천태학天台學은 구사학을 이어 받았고 화엄華嚴 진언眞言의 기초는 유식법상종唯識法相宗의 해석을 따랐다.

이와 같은 불교의 기초 관문인 구사와 유식의 연구가 신라시대를 제외하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점은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뇌허는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참으로 불법佛法을 위한다면 먼저 불법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불교의 시종 과정은 신 - 해- 행 - 증의 네 단계를 거친다. 먼저 신으로써 믿음의 문을 열고, 해로서 불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를 바탕으로 행하고 행한 다음에 증득證得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와 조선에서는 解의 불교를 뛰어넘어 바로 行의 불교로 비약하였다고 보았다. 빠진 解의 공백을 메운 작업이 뇌허의 저술을 통해서 나타났다.『구사학』과『유식철학』이 바로 그것이며 또 하나의 업적이라고 하겠다.

3. 교육적 측면에서 본 불교

“뇌허의 입지는 앞서 살펴본 한국적 상황의 타파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많았고 그것에 대한 타파를 위한 구학求學, 수학修學, 강학講學 연구와 발표로 차라리 후학들의 지도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과가 오늘날 한국불교 근대의 제자들의 배출과 불교학의 전반적인 체계화에 성공하게 된 큰 계기가 토대로 마련된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로 보아 뇌허의 불교관에서 불교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거기에 전력투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뇌허의 불교사상의 근원이 불타의 혜명慧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교육자로서의 뇌허의 모습은「석가釋迦의 사상思想과 교육敎育」을 통해서 잘 나타나 있다. ‘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라고 추앙받는 석가에 대한 교육적 측면의 조명은 누군가는 꼭 다루고 규명해야할 사항이다.

위의 논문에는 석가여래의 일생과 그의 사상을 전제로 하여

제1편, 교육자 석가의 인격 제1장, 육년 수도로 인격을 완성 제2장, 인격의 찬탄 제3장, 교단의 번성 제4장, 위대한 감화력

제2편, 교육의 원리 제1장, 四聖 平等과 남녀평등 제2장, 여인과 도심道心 제3장, 용녀의 성불 제4장,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교설敎說 제5장,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의 교설 제6장, 불설부증불감경佛說不增不減經의 교설 제7장, 대열반경大涅槃經의 교설

제3편, 교육의 방법 제1장, 여러 가지 교육방법 제2장, 지육知育 제3장, 덕육德育 제4장, 여러 가지 교훈

제4편, 교육의 목적 제1장, 인격완성의 수기授記 제2장, 국가관 4편으로 나누어 밝히고 있다.

제1편에는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지식보다는 인격에 중점을 두고 경문을 통한 석가의 인격을 살핀 것이다. 육년 수도로 인격을 완성하고 인격의 찬탄과 교단의 번성 및 감화력을 기술하고 있다.

제2편에는 불타가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데는 부처될 본질을 갖추어 있지 않고서는 아무리 부처되게 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두텁다 할지라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사성평등과 남녀평등, 용녀의 성불을 비롯하여 불경에서 말한 교설을 언급했다.

제3편에는 교육자로서 참고 될 여러 가지 교설을 수집하여 놓았다. 교육자의 교수방법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이 속에는 신족교화神足敎化, 언교교화言敎敎化, 훈회교화訓誨敎化의 세 가지 교화의 방법을 제시하고 칠지법七知法과 반성을 통한 결점과 장점 찾기 그리고 마음이 물드는 것을 경계했다. 아울러 자기 자신을 증명證明으로 할 것과 자타自他를 두호斗護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지육과 덕육, 유교졍遺敎經과 四十二章經의 요체를 옮겨 놓았다.

4편에는 불교적 교육의 목적을 밝힌 것으로 하나는 인격완성의 수기授記 즉 인증이요, 다른 하나는 이상적 국가의 건설이다. 이것은 불교뿐 아니라 동서고금 어느 때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인류의 공통적 이상일 것이다.

위의 4분야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불교는 불본주의佛本主義가 아니라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종교라는 것이다. 이점은 불타는 인간 석가의 수양의 결과로 이뤄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인 자유의지自由意志(佛性, 如來藏, 眞如心)를 선천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을 개시오입開示悟入케 한 것일 뿐이다. 본질을 체득하여 각자覺者가 되는 것이 불교 제일의 목적이요, 완성된 인격자로서 그 인격에 상응한 생활요건의 구비와 불국토佛國土 건설이 제2의 목적이다. 따라서 불교학이란 인간학인 것이다.

Ⅳ. 뇌허의 한국불교에 대한 진단

1. 한국불교의 당위문제

뇌허가 한국불교에 대한 진단은 불교사적 입장에서 취해진 것으로 예리한 면을 지녔다. 특히 한국불교의 당위문제當爲問題를 논할 때는 매우 단호한 면이 있다. 한국불교가 현재와 같이 단일 종파로서 유지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 나라 민족성은 그것을 과연 용납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불교사적 입장에서 논박하고 있다.

고구려의 불교는 유부종有部宗, 삼론종三論宗, 열반종涅槃宗의 사상이 종파로 성립되지는 않았지만 교리적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다고 파악했다. 백제의 경우는 율종律宗의 비조鼻祖가 된 겸익謙益으로 하여 율종의 권위를 인정받았고 또 성왕聖王은 양나라에서 열반경소를 구한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연구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본 불교계의 최초의 승정이 되었던 관륵觀勒이 삼론학자三論學者인 점으로 보아 삼론학三論學의 연구와 도장道藏이 일본에서 성실론소成實論疏를 저술하고 이를 강의한 점으로 보아 성실학成實學의 연구 수준을 알 수 있다.

신라불교는 통일 이전에는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과 화랑도정신花郞道精神으로 기본사상의 특징을 지녔고 통일이후에는 이론불교理論佛敎와 실천불교實踐佛敎의 특징을 지녔다. 이론불교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사상(실재론적 사상) 성실학成實學(空思想), 삼론학(中道思想), 섭론학攝論學(원시유식사상), 열반종涅槃宗의 사상(인격주의사상), 법화종法華宗의 사상(實相哲學) 법상종法相宗의 사상(유식철학), 화엄종華嚴宗의 사상(法界緣起思想)을 일컫는데 화엄종과 법상종만이 종파불교를 형성했고 나머지는 학문으로 유포되었다.

한편 실천불교는 미륵불彌勒佛 신앙사상(兜率往生注意), 율종律宗의 실천사상(도덕 躬行主義), 미타彌陀의 정토사상淨土思想(극락왕생주의), 진언종眞言宗의 사상(郞身成佛主義), 선종의 사상(現身成道主義) 등이다. 신라말기에는 실천적 종파에 눌러 이론적 종파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신라불교의 특이성은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이 현실화 된 것이다.

고려불교는 표면상 가장 화려했던 황금기로 왕사王師와 국사國師가 있어 특수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교학상 암흑기인데 국가를 보호하고자 기도불교로서 비밀진언종의 성격을 뛴다. 오교五敎 九山 오교양종五敎兩宗 모두 선종禪宗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 470여 년간의 불교는 몽수상태夢睡狀態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론불교의 침체기였다.

조선불교는 조계曹溪, 총지摠持. 천태소자天台疏子, 천태법사天台法事, 화엄華嚴, 도문道門, 자은慈恩, 중도中途, 신인神印, 남산南山, 시흥始興의 11개 종파에서 7종으로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서 조선까지 역사적 전개로 보아 과거에는 여러 종파가 분립하였는데 후세에 이를수록 종파가 합해졌음을 보게 된다. 종파라 하면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있는 것이 상례인데 과거 불교에는 그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종파불교라고 하기가 어렵다. 특정 분야를 연구‧전공한 학자도 있었지만 종파적 학문을 초월하여 보편적 태도로 두루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 학풍이었다. 신라학자들이 보편적 포용주의적包容主義的인 면을 지닌 것은 원효元曉와 태현太賢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불교학의 태도는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상이한 결과는 민족성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종파불교를 중국과 일본에서 좋아했음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려시대는 실천적 종파가 계승되어 국가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기도가 있은 것은 불교가 유일한 국가적 공헌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조선조의 11종에서 7종으로 이어서 선교양종으로 점차 폐합한 것은 불교 자체의 자발적인 통합이 아니라 국가운영상 재정 궁핍으로 종파를 줄이도록 강요한 굴욕적인 폐합이었다. 우리 민족성은 특정의 한 종파만을 고수하는 편협성偏狹性과 퇴보성退步性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뇌허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통정신에 의한 종합불교로 생각했다. 그 전형은 원효였다. 선교 양종이던 정통 종단을 선종으로 단일화가 수많은 신흥종단의 난립이 이어졌으며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계승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회통불교로서 한국불교의 맥을 이어가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2. 종합 재정리

한용운韓龍雲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제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현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더구나 6‧25직후 조계종단은 포교布敎, 역경譯經, 도제양성徒弟養成을 종단의 사업으로 공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불교계에 사상적 종합을 꾀했다.

뇌허가 사용한 종합이란 용어는 “불교가 비록 종파의 형태는 갖추지 않았더라도 그 사이에서 생생하게 살아 전해옴이 사실인 만큼 그 불교사상을 될 수 있는 한 살리자는 의미”로 썼다. 그리고 재정리는 “현재까지 신앙되는 교리사상을 명분이 명확하도록 체계를 세워 몇 개의 종파로서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뇌허는 현재(1979년 기준) 우리의 불교사상을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교리로서 지적할만한 내용은 없다고 파악했다. 다만 신앙면에서 예불 때 외우는 지송문持誦文으로 보아 여러 종파의 잔재가 나타나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는 석가세존, 대일법신불大日法身佛, 미타보신불彌陀報身佛, 문수, 보현, 관음, 대세지, 지장보살 등이 있다. 주로 외우는 경전으로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뿐이고 진언眞言다라니와 미타불찬彌陀佛讚,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주가 되었으니 진언종眞言宗과 염불종念佛宗이 합쳐진 현상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우리 불교의 현실을 뇌허는 비정상적인 전통적 신앙으로 간주하고 정리를 주장한 것이다. 즉 현재 살아있는 신앙적 불교로서 선과 염불念佛과 교로 파악하고 이 세 가지 종파로 재정리를 강조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선과 염불念佛은 실천종파實踐宗派이다. 선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정적靜的인 종파요 염불은 동적動的인 총파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염불이 곧 선정禪定이며 선정禪定이 곧 염불(念唱卽定 定卽念唱)이라면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선, 염불念佛, 교의 관계는 선과 염불은 실천의 다리요, 교는 지혜의 눈인 셈이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은 선할 사람은 먼저 교학敎學을 한 뒤에라야 되고 교학을 마친 뒤에 실천문인 禪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치가 깊어 이해가 적으며 행하기 어려운 성인의 길”인 교는 禪과 念佛의 뒷받침이 되지만 경륜론經律論 삼장三藏 뿐 아니라 종파가 많은 교종敎宗의 종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3. 종합재정리綜合再整理의 방법론方法論

원래 중생이 없으면 부처의 說法도 없다. 부처 설법의 목적은 크고 작은 능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의 내용은 모두 평등하다. 부처의 가르침을 말하는 교종은 경률론 삼장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다. 율장律藏을 제외한 많은 경장經藏과 논장論藏의 각기 다른 교리사상을 어떻게 종합 정리할 것인가. 이것이 뇌허의 중심과제였다.

고려말기 5교양종설, 조선 초기 11종-7종 등이 있었으나 그 종지宗旨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종파불교로서 정착하지 못한 한국불교는 우리 민족성이 부분적 편협한 사상을 선호하지 않은 때문이다.

부처의 설한 법을 다 받아 가지는 것을 교법敎法, 모든 부처의 깨달음을 받아 가지는 것을 증법證法, 모든 부처가 교화하는 법을 다 지키는 것을 수행법修行法이라 하는데 이 세 가지를 포함한 것이 교종敎宗이다.

법운法雲. 지의智顗 四一說은 법화경의 우수성을 말한 것이고 지엄智儼(602~668)의 신해행증信解行證은 화엄경의 품단品段을 경문經文의 내용에 따라 나눈 것이며 친란親鸞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교리 요지를 교행신증敎行信證이라 했다. 법운法雲 이하의 모든 학설은 특수교법에 의한 분류이다. 이것은 불교교리 전체를 종합 정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천태天台 지의智顗도 법에 세 가지가 있으니 교행증敎行證(乘有三種謂敎行證-法華玄義 권5)이라 하였다.

자은기慈恩基도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법에는 세 가지 때가 있으니 정, 상, 말법末法이 있다. 교행증敎行證 셋을 다 갖춘 때의 법을 정법正法이라 하고 敎와 行만 있는 때를 상법像法, 오직 敎만 있는 때를 말법末法이라 한다. 이러한 견해는 십경지론의 전체 불교설을 종합 정리한 설과 부합한다.

뇌허는 불교교리 일반을 종합 재정리한 방법으로 위 삼분설三分說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교‧행‧증의 보편적인 방법에 신을 보태어 네 가지로 종합 정리하고자 했다. 信을 보탠 것은 교학敎學이 지식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신념으로 해야 한다는 선현의 교훈과 믿음이 도의 근원이라는 화엄경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교四敎에 앞서서 뇌허는 ①불교의 시대관時代觀 ②불교의 중생근기관象生根機觀 ③포교의 지역(국토)관 ④교설법敎法說을 사강四綱이라 하였다. 사강四綱과 사교四敎의 관계는 긴밀한 유기적 관계에 있다. 사강四綱을 비유하면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하나의 큰 집에 있어서 사방의 기둥과 벽과 같은 것이다. 사교는 불교라는 큰 집의 문에 들어가서 불교의 우주 및 인생관을 이해하기 시작하여 앞뒤 순서와 단계를 나누어 분간한 후 목적지를 향해 실천해 가는 것과 같다. 불교의 문에 들어서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경로이기 때문이다.

뇌허는 사강설四綱說과 사교설四敎說로서 종합 재정리의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뇌허 김동화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았다. 청정하게 일생을 살다간 불교인으로서 많은 저술을 남긴 불교학자이자 교육자로서 한국불교의 당위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두드러진 점이다. 특히 이 소고에는 방대한 그의 저술과 그 에 따른 사상을 일별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기에 일부에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뇌허의 사상적 공적은 다음 세 가지로 압축이 된다. 한국불교사를 학적으로 체계화 했다. 교육자로서 석가를 조명했다. 한국불교의 당위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결의 방법을 제시했다. 뇌허는 특히 종파불교를 들어 불교전반을 종합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저술著述

佛敎讀本 상권(권상노 공저) 1952. 12.1

*佛敎學槪論 백영사 1954. 8.20

佛敎大意 1958. 11.30

佛敎讀本 하권(권상노 공저) 1958. 4.25

*三國時代의 佛敎思想 민족문화사 1964. 3

韓國哲學思想史 1964. 5

*原始佛敎思想論 1967. 3

*唯識學槪論 보련각 1968. 4

신행불교 1집 1970. 11.20

신행불교 2집 1973. 9.5

*韓國歷代高僧傳 1973. 10.25

*佛敎의 護國思想 1976. 6.15

*俱舍學槪論 (소승불교의 有哲學思想 1968.3

釋迦의 思想과 敎育 1968. 10.1 *(불교의 교육사상)

*禪學思想史 보련각 1968. 6.11

*佛敎敎理發達史 불교통신교육원 1969. 12.30

*佛敎唯心思想의 發達史 1970. 5.10

*佛敎倫理學(인간학으로서의 불교) 보련각 1971. 4.25

護國大聖 四溟大師의 硏究 1971. 8

新編佛敎聖典(권상노 공편역) 1972. 2.10

*大乘佛敎思想 보련각 1974. 2.20

*韓國佛敎思想의 座標 보림사 1984. 4.5

뇌허 김동화전집 전14권 2001년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에서 간행. 각권의 제목은 위의 *표 외에 불교 소 논문‧논설. 불교교양 雜文이 있다.

※硏究 論文

緣起說에 대한 管見(서울대 논문집 제1호) 1954.3.10

선종소의경에대하여(동대논문집) 1955.11.5

印度哲學에 대하여(서울대 발행 교양과 철학) 1956.6.1

佛敎의 護國思想(이병도 회갑 기념 논문집) 1956.10.6

原始佛敎의 哲學思想(서울대 발행 철학교양) 1958.4.5

彌陀思想의 諸問題(정토문화 6회)1959.11

新羅佛敎의 特性(한국사상) 1959.8.12

佛敎信仰의 本質(삼단전입의논리 3회 현대불교)1950.2.1

佛敎學上의 智와 知(성대 발행 동양철학) 1061.6

佛敎의 智慧論(새길) 1962.3,10

佛敎의 敎育思想(교육의 철학적 이해) 1971,6.15)

宗敎는 不可缺의 것인가(현대사상강좌) 1963.5.10

佛敎의 永生 및 來世觀(이십세기강좌) 1963.6.20

成實論의 諸問題(동대논문집) 1970.5.30

※論說

印度思想으로 본 佛敎의 思想的 地位(鹿苑) 1949. 7.12

佛敎의 思想的 理解(서울신문) 1953. 3.7

佛敎思想의 現代的 理解(서울대학신문) 1954. 6.16

學生과 佛敎(東國月報) 1954. 10.2

文化受人의 態度(무자각한 문화수인은 민족문화를 망친다)고대신문 1955. 10.24

與者와 受者(고대신문) 1956. 5.28

宗敎와 理性(고대신문) 1958. 9.27

佛敎와 政治觀(고대신문) 1962. 5.12

佛敎와 民主主義(고대신문) 1960. 7.2

東洋精神과 그 世界觀(동아일보 2회) 1959. 6.5

亞細亞의 佛敎思想(고대신문) 1959. 4.25

佛敎思想의 現代的 意義(고대신문) 1961. 6.17

佛敎文化의 精華(鹿苑) 1957. 7.1

佛敎文化의 過去와 將來(사상계) 1958. 10.1

空의 槪念에 對하여(고대철학연구) 1958. 11.21

現代史上과 佛敎(현대불교 창간호) 1959. 12.1

우리民族과 佛敎(불교사상)1960. 7.1

坐禪의 眞髓(해군) 1961. 1.10

現代 宗敎家 生活體制(불교사상) 1962. 9.3

佛敎의 國家觀(새길) 1962. 7.30

東洋的 思考의 長短(사상계) 1962. 5

불교의 時代性(불교사상) 1962. 7.30

불교(동아춘추) 1963. 1.1

불교의 大慈悲思想(새길) 1963. 2.15

佛敎二千五百年(사상계) 1965.5.1

불교의 護國理念(불교계) 1967.12.30

佛陀以前의 印度思想界(불교계) 1968.3.30

※뇌허에 대한 연구성과(자료검색>한국철학연구안내>기본참고자료)

『불교문화연구』 2집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2001 특집. 게재된 논문은

「김동화의 생애와 사상」 (목정배)

「뇌허 김동화 선생의 저술세계」(김영태)

「信行불교운동의 제창과 전개」(한정섭)

「김동화 선생님과 입정대학」(三友健容)

「뇌허 불교학의 비전과 그 계승」(이봉춘)

박사학위논문

박제선, 「뇌허 김동화의 불교사상 연구」 동국대 대학원, 1998

단행본

박제선, 『뇌허 김동화의 불교사상 연구』 서울, 민족사 2007

일반논문

권오민,「뇌허 김동화의 불교관」 『문학 사학 철학』 13한국불교사연구소:발해동양학한국학연구원 2008

조성택,「The Formation of Modern Buddhist Scholarship: The Case of Bak Jong-hong and Kim Dong-wha」『Korea Journal』 45,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2005

조성택,「새로운 불교학 연구의 지평을 위하여」 대순사상논총 16 대진대 대순사상학술원, 2003

박제선 「뇌허 김동화의 신행관(信行觀)」 한국불교학결집대회논집 상,한국불교학결집대회조직위원회 2002

목정배, 「김동화의 불교철학 탐구」 해방50년의 한국철학 서울 철학과현실사 1996

박찬선, 「뇌허 김동화의 생애와 사상」 상주문화 2 상주문화원 1991

雷虛堂東華大宗師碑銘

敎觀雙修流通正法雷虛堂東華大宗師碑銘

法性은 本空하여 無形無相하고 法身은 常主하여 不生不滅이라. 六根門頭에 堂堂顯露하여 神通自在한 自己眞佛을 알지 못하고 生死苦海에 昇沈하는 가여운 衆生을 濟度코자 宿歲의 願力을 타고 이 땅에 誕生하신 偉大한 스님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雷虛堂東華大宗師이시다 종사께서는 韓國佛敎의 千七百年史에 있어 三學을 精通하고 宗說을 兼通하였을 뿐만 아니라 新舊의 학문을 調和하여 근대 한국불교의 座標를 세운 우뚝한 巨星이시다. 宗師의 諱는 東華요 號는 雷虛이며 俗姓은 金氏요 本官은 金海이다 아버지의 諱는 學洙요 어머니는 全州李氏이니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獅子를 탄 靑衣童子가 書冊을 전해주는 胎夢을 꾸고 孕胎한 후 1902년 10月3日(음 八월 三十일) 慶尙道 善山郡 善山面 新基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孝心이 지극할 뿐 아니라 天品이 근면성실하고 思慮가 깊었다 여덟 살 부터는 鄕塾에서 儒學을 공부하던 중 聞慶 金龍寺에서 托鉢나온 스님으로부터 妻子眷屬이 竹筍처럼 많고 金銀玉帛이 산더미처럼 쌓였어도 마지막 갈 때는 빈손으로 훌훌欻欻히 혼자 떠난다는 人生無常의 法門을 듣고 心中에 새기고 있던 중 아홉 살 때 갑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悲痛한 마음으로 諸行無常이 理致를 새삼 切感하고 出家를 결심하여 1915年 尙州市 花開面 東海寺로 찾아가 梵海스님을 恩師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1916年 상주보통학교를 졸업 千九百十九年 상주 남장사 講院에서 四集科를 졸업 1923年 삼월 문경 金龍寺 불교전문강원에서 大敎科를 졸업 1928년 일본 立正大學 專門部 宗敎科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그해 6월 京城實業專修學校의 校員으로 採用되었다 1930년 7월 상주 남장사에서 慧峰堂 普明禪師를 法師로 하여 入室建幢하고 傳法偈와 함께 雷虛라는 法號를 받았다 1932년 立正大學 학부 종교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이어 3년간 佛敎敎理發達史를 연구하고는 1936년부터 입정대학 전문부 종교과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1940년 3월 입정대학 강사를 사임하고 귀국하여 金龍寺에서 大德法階를 받았다 1941년 2월 五山佛敎學校의 교장에 취임 그해 시월 惠化專門學校 강사 겸 生徒主事의 科長을 거쳐 1943년 같은 학교의 교수로 승진했다 1944년 5월 朝鮮佛敎中央布敎師에 취임 1947년 9월부터 동국대학교 교수가 된 이후 副學長, 學長, 大學院長, 佛敎文化硏究所長 등을 역임하면서 後學養成에 全力을 기울렸다. 동국대학교 외에도 서울대 성균관대 고려대 등의 초빙강사로서 불교 傳授에 크게 寄與했다 1948년 朝鮮佛敎法規委員과 賞罰委員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 三仙洞 正覺寺에서 正信 正行 불교운동을 일으키니 四部大衆은 물론 牧師 神父 등 異敎徒들도 敎說을 듣고 現代的이며 簡潔하고 該博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962년 12월 2일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名譽 哲學博士 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 12월 5일 정부로부터 國民勳章 冬栢章을 받았고 1972년에는 대한민국 學術院 功勞賞을 받았으며 1974년에는 學術院 終身會員이 되었다 저서에는 불교학개론 불교교리발달사 원시불교사상 대승불교사상 구사학 유식철학 불교유심사상의 발달 불교윤리학 선종사상사 불교호국사상 삼국시대불교사상 한국현대고승전 최후로 한국불교사상의 좌표와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宗師께서는 期會가 있을 때마다 나도 부처님의 생애와 같이 79년만 살다가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入寂하시기 직전까지도 붓과 책을 놓지 않고 精進하다가 1980년 4월 5일(음 3월 20일) 門徒들을 불러 앉히고 지금 回顧해보건데 後悔스러운 일도 있고 미처 다하지 못한 佛事도 많지만 이젠 世緣이 다하여 떠나야 하겠으니 二三子들은 더욱 정진하여 敎化로써 國民啓導와 자신의 鍊磨에 加行精進하여 東國의 발전과 國威宣揚에 힘쓰라고 당부하고 八十年來遊夢宅 脫殼五陰歸本鄕 處處皆眞涅槃路 何有生死去來蹤이리요 라는 臨終偈를 說한 다음 오후6시에 조용히 入寂하시니 世壽는 79세요 法臘은 67하였다. 茶毘한 후 形色이 玲瓏한 사리2顆가 출현하여 一顆는 남장사에 一顆는 수원 大乘院에 奉安하였다 忽然 同時因緣發生으로 後學대표인 全國比丘尼會會長이며 三仙洞 正覺寺住持 光雨스님이 大宗師의 行蹟碑를 세우려는 바 또한 日本立正大學의 後輩이며 그 대학의 前佛敎學部長인 三友健容博士도 發願하게되어 立碑佛事가 如發되고 많은 同參者가 追慕의 정성을 모아 이 碑를 세우게 되었다 이상 大宗師의 行蹟을 要約하며 다음과 같이 銘하는 바이다

印度에선 釋迦世尊 衆生위해 降誕하사

城을넘어 出家한後 六年동안 닦고닦아

法界眞理 깨달은뒤 四十五年 說法하니

그法門이 深妙하여 견줄바가 전혀없네

高句麗선 順道大師 百濟에는 摩羅難陀

新羅國엔 阿度和尙 各各最初 開法한後

많은大德 排出하여 佛法으로 敎化했고

舊韓末에 出現하신 雷虛堂인 東華宗師

敎觀雙修 宗說兼通 국민들을 開導하니

各界各層 찾아와서 살아가는 길을 묻다

門徒이신 光雨스님 日本後學 三友健容

報恩코자 同參하여 紀念碑를 세우노니

盤石劫을 다할망정 이자리에 우뚝서서

無言으로 說法하사 廣度衆生 하여지이다

佛紀二五四六年(二ㅇㅇ二) 六月十日

慈雲門人 伽山 智冠 글을 짓고 寶城後人 宣柱善 글씨 써서

後學韓國代表 太虛 光雨 日本代表 三友健容 碑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