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선생과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선생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
김 철 수 박사 전) 국립상주대학교 제2대 총장 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주문화원장 |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선생과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선생
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目 次> | ||
Ⅰ.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선생 1. 퇴재退齋선생의 생애 2.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의 묘갈명墓碣銘 3. 권민수의 상소문 Ⅱ.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선생 1. 동계桐溪선생의 생애 2. 권달수權達手의 묘갈명墓碣銘 3.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선생과 조선왕조실록 |
Ⅰ.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선생
1. 퇴재退齋선생의 생애
퇴재退齋선생은 세조 12년(1466)에 태어나서 중종 12년(1517)에 51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조선 연산군ㆍ중종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숙달叔達, 호는 퇴재退齋ㆍ기정岐亭이다. 고려高麗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으로, 대대로 벼슬한 명망 있는 집안이다. 고조부 윤균允均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증조부 회恢는 서천군사舒川郡事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유순有順은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지냈다. 아버지 임琳은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를 지냈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이보정李補丁의 따님이며,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는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퇴재退齋선생은 동생 달수達手와 함께 모두 훌륭한 인재라는 명성이 있었다. 문장文章은 진부한 행태를 없애 버리는 데 힘썼다. 처음에「문선文選」의 학문으로 유생儒生들을 창도倡導하니 당시의 동류同流들이 모두 공경하여 감히 함께 견주지 못하였다.
성종 20년(1489)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종 25년(149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연산군 1년(1495) 7월에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에 기용되고, 그해 9월에 저작著作이 되었으며, 연산군 3년(1497) 2월에는 박사博士를 거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수찬修撰이 되었다. 그리고 연산군 5년 4월에는 홍문관 부교리弘文館 副校理가 되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며, 이때 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동생 달수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는데, 연산군 10년(1504)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교리군校理君이 의논에 반대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죽임을 당하였고, 퇴재退齋선생도 부수찬으로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관사後苑觀射를 논한 일이 화근이 되어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영외嶺外(상주)로 유배되었다. 이때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퇴재退齋선생은 유배지에서 풀려나 소격서령昭格署令이 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소환되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로 바뀌어 임명되었고, 이어서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이 되었으며, 중종 4년(1509)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있을 때 있을 때에는, 부경사신赴京使臣들이 은을 국내에 반입하는 폐단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중종 5년(1510)에는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쳤는데, 그해 9월에는 이문 정시吏文庭試에 장원하였기 때문에 마장馬粧 한 벌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중종 6년(1511) 8월에는 예빈시 부정이 되었다.
그 뒤 중종 6년(1511) 10월에는 홍문관 직제학에 발탁되었고, 왜인추고경차관倭人推考敬差官으로도 활약하다가 이듬해인 중종 7년 4월에는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에는 퇴재退齋선생은 ‘군정軍政을 엄히 할 것’, ‘간쟁諫諍을 받아드릴 것’, ‘기강을 바로 세울 것’ 등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서 중종 7년(1512) 7월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차례로 승진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그리고 중종 8년(1513) 8월에는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使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중종 9년(1514) 6월에는 사간원의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어서 중종 10년(1515) 2월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여 특별히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이때 선생은 홍문관의 무기력함을 규탄하였다. 이어 체직遞職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옮겨지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으며, 이어서 중종 11년(1516) 7월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퇴재退齋선생은 평소 몸이 워낙 약하였다. 그러나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서는 도내道內에 처음으로 장문場門을 설치하는 등 민치民治에 전력하는 바람에 과로로 인해 발병發病하여 날로 병세가 위급해졌다. 중종이 이런 사정 이야기를 듣고 급히 의관醫官과 어약御藥을 보내어 가서 선생을 구하도록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중종 12년(1517) 정월 무술일에 청주淸州의 관아官衙에서 사망하였다.
2. 퇴재退齋 권민수權敏手의 묘갈명墓碣銘
찬자撰者는 남곤南袞이다. 찬자撰者는 권민수의 아내가 자신에게 비문碑文을 부탁한 사실 등 이 글을 짓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며 글을 시작하였다.
이하의 내용은 그의 생애를 기록한 부분과 그의 생애에 대해 평가한 부분으로 나뉜다. 전자는 관직생활을 위주로 건조하게 기록하였다. 이에 비해 후자는 권민수의 순수하고 관대한 품성과 돈독한 우애를 찬탄한 것인데 각각 구체적인 일화를 들어 생동감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임종 시의 풍경과 묘의 위치, 가족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명銘을 붙였다.
숙달叔達이 세상을 떠나 이미 장례를 치르고 김도탕金倒帑, 구갈촌具碣村이 친구 중에 권군을 아는 사람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할 만한 이유가 없었으나 또 차마 묘갈명을 쓰지 못하겠기에 그냥 놔두고 쓰지 않은 채 해를 넘기었는데, 올 가을에는 내가 어떤 일이 있는데다가 숙달叔達의 대상大祥도 바싹 다가왔으므로 지금 묘갈명을 쓰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숙달叔達을 저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눈물을 훔치며 다음과 같이 엮는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남곤南袞은 비문碑文을 짓다.
숙달叔達이 사망하고 장례葬禮를 마친 뒤에 그의 아내 김씨金氏가 재물을 써서 비석을 마련하고는 친구 중에 군君을 아는 사람에게 명문銘文을 부탁하였다. 나 곤袞이 이미 남에게 양보할 수는 없었으나 또한 차마 명문을 쓸 수 있었겠는가? 그대로 내버려두고 완성하지 못한 것이 해를 넘겼다. 금년 가을에 이르러 내가 북경北京에 사신使臣으로 갈 일이 생겼는데, 숙달의 대상大喪도 임박하니 지금 만약 명문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숙달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감히 눈물을 뿌리며 글을 짓는다.
군의 이름은 민수敏手요, 숙달은 그의 자字이다. 고려高麗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으로, 대대로 벼슬한 명망 있는 집안이다. 고조부 윤균允均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증조부 회恢는 서천군사舒川郡事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유순有順은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지냈다. 아버지 임琳은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를 지내고 뒤에 군 때문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이보정李補丁의 따님이시다.
군은 성화成化 병술년(1466, 세조 12)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동생 달수達手와 함께 모두 훌륭한 인재라는 명성이 있었다. 문장文章은 진부한 행태를 없애 버리는 데 힘썼다. 처음에 「문선文選」의 학문으로 유생儒生들을 창도倡導하니 당시의 동류同流들이 모두 공경하여 감히 함께 견주지 못하였다. 성종成宗 말년의 갑인년(1494, 성종 25) 과거에 올라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선발되어 임명되고, 저작著作과 박사博士를 거쳐서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옮겨졌다가 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친 뒤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얼마 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하였다. 동생 달수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는데, 갑자년(1504, 연산군 10)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교리군校理君이 의논에 반대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죽임을 당하였고 군도 직언直言으로 옥사에 연루되어 영외嶺外로 유배되었다. 이어 부친상을 당하였다. 지금의 성상께서 반정反正한 첫해에 이르러 비로소 기용되어 소격서영昭格署令이 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소환되어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로 바뀌어 임명되었고,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장악원정掌樂院正을 두루 거쳤다. 임신년(1512, 중종 7)에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서 발탁되어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고,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차례로 승진하여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어떤 일로 승정원의 승지承旨 모두가 파직을 당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형조참의刑曹參知·병조참지兵曹參知로 옮겨졌다.
을해년(1515, 중종 10)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여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체직遞職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옮겨지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군은 평소 몸이 약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과로로 인해 발병發病하여 날로 병세가 위급해졌다. 성상께서 이 말을 듣고 의관醫官과 어약御藥을 보내어 가서 구하도록 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정축년(1517, 중종 12) 정월 무술일에 청주淸州의 관아官衙에서 사망하였다.
아! 군은 행실이 순수하고 도량度量이 커서 다른 사람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식견識見이 높고 기개氣槪가 우뚝하여 세상일을 괴롭게 여겨 자족自足하며 은거隱居하던 자를 자못 고쳐서 바로잡고자 하였으며, 또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침을 뱉으며 마치 자기를 더럽힐 것처럼 하였다. 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군을 비난하였으나 군은 편안하게 개의치 않으며 말하기를, “스스로 아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 뿐이리라.”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友愛가 독실하여 교리군이 죽은 뒤로는 항상 울적해하며 스스로 즐기지 않았고 교리군에 대한 말이 나오면 번번이 눈물을 흘렸다. 교리군에게 후사後嗣가 없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아들 소紹를 그의 후사로 삼아주었다. 그리고 막내동생 개수价手가 궁핍하여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군은 부모의 유산遺産을 모두 동생에게 옮겨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사업을 성취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바로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하였다.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백성의 일에 마음을 다하여 심지어 침식寢食을 폐하니,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병이 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직하고 몸을 보양保養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군은 말하기를,
“임금에게 명을 받았으니 그 직책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병을 핑계대고 스스로 편안하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있어도 미워할 일인데 하물며 감히 허물을 본받겠는가?”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개수는 경성京城에서부터 오고, 부인의 동생 김양진金楊震은 공무公務로 호남湖南에 있다가 역말을 타고 달려왔다. 군은 손을 잡고 영결永訣하였으나 집안의 사사로운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구靈柩가 함창咸昌에 도착하여 윤閏 12월 임오일에 율곡栗谷의 계좌癸坐 정향丁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고故 진산군수珍山郡守 김휘손金徽孫의 딸로, 어진 덕이 있어 능히 군자君子의 배필配匹이 될 만하였다.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찬纘이고 막내가 바로 소紹이니, 모두가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자신을 지키기를 엄하게 하였고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인仁이었네.
큰일 할 것 같더니
어째서 갑자기 돌아가셨는가?
쌓아놓고 먹지 않았으니
그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후세後世의 사람들이
부디 군君을 알게 되기 바라노라.
정덕正德 14년(1519, 중종 14) 2월 일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수제용감정겸승문원참교守濟用監正兼承文院參校 김희수金希壽가 비문의 글씨를 쓰다.
3. 권민수의 상소문
o 중종 15권, 7년(1512) 4월 24일(戊戌)홍문관 부제학 권민수 등이 재변을 말하며 임금이 경계하고 근검하기를 청하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권민수權敏手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 정성을 다해 정사를 돌보고 힘써 폐정弊政을 개혁하시어 약간 안정되었다 하겠습니다만, 천재지변이 잇달아 일어나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나 해가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는가 하며, 붉은 기운이 자주 나타나고 형혹성熒惑星이 방성房星을 침범하며, 또한 강물이 검붉어짐은 근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풍속의 경박함은 딸이 어미를 해치고 종이 상전을 살해하기까지에 이르렀으며, 기전畿甸 내에 도둑이 횡행하되 그를 소탕해 없애지 못하며, 과조科條를 자주 바꾸고 호령이 일정치 못하여 그 따를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성명하신 전하께서 이와 같은 재변과 이와 같은 쇠세衰世의 정사가 있으리라고 뜻하였겠습니까. 밖으로 약간 안정한 형태가 보이나 안으로 걱정의 징조가 있는 것을, 옛 사람은 쓰러져 가는 집에다 비유하여 ‘고대 화려하고 단청이 잘 되어 밖으로는 그 변함을 깨닫지 못하지만 재목 속은 이미 다 썩어서 다시 지탱할 수 없다.’ 하였으니, 지금의 형세가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신 등은 듣건대, 상서는 덕을 말미암아 이르고 재앙은 일을 말미암아 난다 하였으니, 재이災異의 이름이 비록 무슨 일로 인해 응하였음을 지적해 말할 수는 없으나 필시 불러들인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신 등이 조용히 생각하건대, 나라를 경영하는 직임에 있는 자로서 또한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만, 전하의 성의가 지극하지 못하여 모든 일에 겉치레만 따르며 입지立志가 높지 못하여 선을 행함에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고, 구차히 눈앞의 무사함만 편히 여겨 스스로 만족하며, 언동과 정사에 거의 다 상례를 따라 유사有司의 상례대로 할 뿐이고, 일찍이 옛날 큰일을 한 임금이 한 세상을 진작振作시켜 모든 사업을 조치하던 것처럼 하지 못하시니, 이와 같아서 풍속이 퇴폐해지고 정사가 침체함에 이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재변을 만나 피전避殿함에는 공구 수성恐懼修省의 겉치례로 삼을 뿐, 하늘에 응하는 실지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며, 학궁學宮에 거둥하여 문난問難함에는 숭유 중도崇儒重道의 겉치례로 삼을 뿐, 몸소 실천하여 증험하는 실지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며, 경연經筵에 나아가시어 강론함에는 구치求治의 겉치례로 삼을 뿐, 이치를 궁구하고 본성을 다하는 실지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분부를 내려 직언直言을 구하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실지가 없고, 정도를 세우나 사도를 버리는 실지가 없으니, 이 모두 전하의 성의가 지극하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전하의 유신지치維新之治는 마땅히 요堯·순舜을 본받아야 하거늘, 지금 폐정과 누습을 말하는 자가 고치고자 하면 ‘조종으로부터 나온 일이라 지금에 와서 개혁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 비루함을 편히 여기고 스스로 분발하여 진작하지 않으시니, 이 어찌 전하께서 뜻을 세우심이 높지 못하고 선을 향함이 독실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병폐는 반드시 여기에 있으니, 전하께서 이때에 큰일을 하시려는 뜻을 분발하여 모든 사업을 새롭게 하지 않고 한낱 전례를 답습하는 데에 구구하신다면 정령政令이 타락하여 상하가 게을러져서 다시 구제하지 못하게 되리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겉치례를 일삼지 말고 성실을 힘써서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여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기를 도모하시고, 조금 안정됨을 믿어 고대 화려한 집이 썩어 버리게 하는 걱정이 없게 하신다면 그 다행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지금 상소의 뜻을 보니 매우 마땅하다. 근래에 재변이 계속되나 나는 어떻게 하늘의 견책에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풍속이 경박해진 지 이미 오래인데, 대저 풍속이란 윗사람의 소행에 말미암는 것이니, 상하가 서로 조심하여 닦으면 저절로 재변은 그칠 것이다. 그 모든 일에 겉치례로 하고 성실로써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만약 일이 있다면 대신과 더불어 강구하겠다.”
하고, 이어 정원에 전교하기를,
“형혹이 방성을 범한 일이 어찌 아뢰지 않았는가?”
하였다.
○弘文館副提學權敏手等上疏, 其略曰:殿下自卽位以來, 勵精圖治, 務革弊政, 可謂小康矣。然而天災地怪, 比比不絶。太白晝見, 經歲不滅, 赤氣屢見, 熒惑犯房, 江水赤黑, 近古所無。 風俗之薄, 至於女害母, 奴殺主, 畿甸之內, 盜賊縱橫, 而不克勦滅, 科條屢立, 號令紛更, 而莫適所從。豈意聖明如殿下, 而有如此災變, 有如此衰世之政耶? 外有小康之形, 而內有可憂之兆, 古人比之將傾之屋, 輪奐丹雘, 不覺其有變於外, 而材木之心, 已皆朽爛, 不可復支。當今之勢, 何以異此? 臣等聞瑞由德至, 災由事生。災異之來, 雖不敢指言某事之應, 亦必有所召。 臣等竊思之, 居經邦之任者, 雖不爲無責, 然殿下誠意未至, 而擧事徒循于文, 立志卑下, 而爲善不蒙乎古, 苟安目前之無事, 而自以爲足。言動政事, 率皆隨例循常, 應有司之文具而已, 未嘗如古大有爲之君, 擧一世而振作之, 以措諸事業。若此而不至於俗漸弊政寢衰者, 未之有也。殿下遇災避殿, 以此爲恐懼修省之具而已, 未聞有應天之實。幸學問難, 以此爲崇儒重道之具而已, 未聞有躬行心得之實。御經筵講論, 以此爲求治之具而已, 未聞有窮理盡性之實, 下旨求言, 而無納諫之實, 扶植正道, 而無去邪之實, 是皆殿下之誠意, 有未至而然也。殿下維新之治, 當法堯、舜, 而方今弊政陋習, 言者欲有所論列改革, 則以爲事出祖宗, 今不可革, 安於卑鄙, 而不自奮振。豈非殿下立志不高, 而向善之心, 有未篤而然耶? 當今之病, 正在於此 殿下不於此時, 奮大有爲之志, 以新庶績, 而徒區區於循蹈舊例, 則政令垢玩, 上下懈怠, 將不可復救矣。伏望殿下, 不事虛文, 務敦誠實, 以答天譴。圖臻至理, 勿以小安爲可恃, 而使輪奐之屋, 有朽爛之患, 不勝幸甚。傳曰: “今觀疏意甚當。近來災變不絶, 予未知何以答天譴。風俗薄惡久矣。大抵風俗, 由於上之所行, 上下交修, 則自當弭災。其曰: ‘凡事皆以文具, 而不以誠。’ 若有所爲, 則與大臣講究矣。” 仍傳于政院曰: “熒惑犯房事, 何不啓之耶。”
【태백산사고본】 8책 15권 41장 A면 【영인본】 14책 570면
o 중종 15권, 7년(1512) 5월 7일(庚戌)부제학 권민수 등이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도리를 열거하며 상소하다
부제학 권민수權敏手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 등이 듣건대, 천하의 걱정은 일이 없는 데 있고 일이 있는 것은 걱정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대개 인정人情이란 수고로우면 생각하고 안일하면 나태해지기 때문에, 일이 있으면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위태로이 여기므로 끝내는 치안治安에 이르고, 일이 없으면 교만하고 게을러 스스로 치안되었다 여기므로 끝내는 위태한 데에 이르게 됩니다. 당唐·우虞시대는 치안했다고 이를 만하였는데 군신 사이에 반드시 긍긍 업업兢兢業業하여 아무일도 없는데 경계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이는 치안은 믿을 것이 못되고 교만과 게으름이 혹 그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국가에는 일이 없다 할 수도 없고 또한 일이 있다 할 수도 없으니, 이 참으로 전하께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언제나 태만하지 말아야 하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삼가 시폐時弊를 들어 다음과 같이 조목을 들어 진술합니다.
1. 군정軍政을 엄히 하는 것. 국가가 태평에 젖어 병정兵政이 정비되지 않고 인심이 해이졌습니다. 왕년에 왜적이 남방에 침입하자 장사將士들은 그 풍문만 듣고도 산산이 흩어져서 심지어는 성을 버리고 도망쳐서 왜적으로 하여금 무인지경같이 들어오게 하여, 관사를 불지르고 인민을 도륙하되 주수主師는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망설이고 앉아 보기만 하고 잡지 않으며 관군官軍이 이르기만 기다렸으니, 적의 침입을 구경만 하고 방비하지 않아 국가에 끼친 그 수치를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북방 오랑캐가 함부로 날뛰어 열흘 사이에 두세 차례나 인민을 노략해 갔습니다. 조종조로부터 변민邊民이 한 사람이라도 납치되면 주장主將은 곧 그 도에서 백의 종군白衣從軍하였습니다. 실로 군법이 엄하지 않으면 대중의 마음을 격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옛법을 따르지 않고 사사로이 유미柳湄를 용서하여 나문拿問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우후虞候는 곧 옛날의 비장裨將이니 사사로운 일로 자기집에 왕래할 수 없거늘, 지금 이순李珣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제 마음대로 귀가歸家하였으니, 군법이 엄하지 못함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또 기전畿甸 내에 도둑떼가 몰려들어 기탄없이 도륙하는데, 특별히 금군禁軍를 보내 잡게 하면, 다만 장수 된자만 겁내고 외축하여 엄습할 꾀를 내지 않을 뿐 아니라 끝내는 장사將士가 서로 떨어져 도둑이 도망치도록 하니, 이는 진실로 군정이 해이해져서 장수는 법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졸은 장수를 두려워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군정을 다시 엄히 하여 변장의 실률失律한 자를 용서하지 마시어 장사들을 면려勉礪하소서.
2.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는 것. 기은祈恩하는 일은 조그마한 하나의 요망한 일이라, 전하께서 먼저 아셨다면 진실로 당장 없앨 것이거늘, 대간이 말하여도 따르지 않고 시종侍從이 말하여도 따르지 않으며 심지어 대신이 말하여도 따르지 않으시어, 자전慈殿을 핑계하면서 막연히 거절하시니, 이것이 비록 전하의 집안일이나 온 조정이 논집論執하여 마지않는 것은, 그 일은 작아도 누가 클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바른 말을 받아들이시되 반드시 성실로 하시고, 음사淫祀를 힘써 없애시되 미세하다 하여 경홀히 마소서.
3. 기강을 세우는 것. 일전에 전하께서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시어 열무閱武하실때 끝나기 전에 비가 내리므로 전하께서 잠깐 막차에 머무시자, 시위하던 종재宗宰들은 자리를 떠나 비를 피하느라고 크게 체면을 상실하였는데, 헌부는 돌아오는 길로 곧 탄핵했어야 마땅할 것인데도 규탄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기강을 잡고 백관을 규찰하는 자가 진실로 이럴 수가 있습니까?
4. 하늘의 경계를 삼가는 것. 요즈음 천지가 변괴를 보이므로 신 등이 소장疏章을 올려 전하의 반성하심을 기대하였더니, 듣건대 공신을 연향하고 수전水戰을 가보실 예정이라 하니, 신 등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변이 없어지지 않고 한재가 계속되니, 전하께서는 의당 덕을 닦아 하늘에 보답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의 일에 부지런히 하여야 할 것이거늘, 도리어 연락宴樂을 여시려 하니 하늘을 공경하는 실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물며 먼 지방 조군漕軍이 양식을 싸 가지고 바다를 건너자면 몇 달이 걸리는데, 지금 수전 때문에 갇혀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그 괴로움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느때라면 모르거니와 이처럼 흉년든 때는 가벼이 거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정원에 전교하기를,
“홍문관이 올린 전후 소장의 ‘군정을 엄히 하라는 것’, ‘기강을 세우라는 것’, ‘풍속’ ‘재이’ 등 몇 조목은 진정 시폐時弊에 맞는 말이다. 두루 보이고 모든 재신들과 회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이하 생략>
○庚戌/副提學權敏手等上疏。 其略曰:臣等伏聞天下之患, 在於無事, 而不患其有事。蓋人情, 勞則思, 逸則肆, 故有事則憂勤恐懼, 常若危亂, 而至於治安。無事則驕盈怠惰, 自以爲治安, 而卒至於危亂。唐、虞之時, 可謂安且治矣, 而君臣之間, 必兢兢業業, 儆戒無虞何也? 知治安之不足恃, 而驕盈怠惰, 或隨其後也。當今國家, 雖不爲無事, 而亦不可謂有事, 則此正殿下憂勤惕厲, 無時預怠之秋。故謹摭時弊, 條陳如左。其一曰: 嚴軍政。國家狃於昇平, 兵政不修, 人心解弛。往年倭寇南方, 將士望風奔潰, 至有棄城而走, 使虜如入無人之境。焚燒廨宇, 屠割人民, 而主帥擁兵, 首鼠坐觀, 不獲(以)〔已〕待官軍之至。其玩寇無備, 而貽國家之恥, 可勝言哉? 近者北虜陸梁, 旬日之間, 搶掠人民, 至於再三。自祖宗朝以來, 邊民一有被擄, 則主將卽於其道, 白衣從軍, 誠以軍法不嚴, 則無以礪衆心也。今者不循舊例, 曲容柳湄而不拿問之, 臣等未知其故。(虞侯)〔虞候〕卽古之裨將也, 不可以私往來其家, 今者李珣, 不待交承, 而擅歸其家, 軍法之不嚴, 亦可知矣。且於畿甸之內, 賊黨嘯聚, 屠戮無忌, 特發禁軍往捕之, 則非但爲將者, 懦弱畏縮, 不爲掩襲之計, 卒之將士相失, 致賊逃逸。良由軍政縱弛, 將不畏法, 卒不畏將故也。伏願殿下, 申嚴軍政, 勿饒邊將之失律者, 以礪將士。 其二曰: 納諫諍。祈恩之擧, 一幺麿陰邪之事。殿下若先知之, 則固當立革, 臺諫言之而不從, 待從言之而不從, 以至大臣言之而不從, 乃諉諸慈殿, 邈然固拒。此雖殿下家事, 擧朝尙論執不已者, 懼其事小而累大也。 伏願殿下, 嘉納讜言, 必以誠實, 務革淫祀, 勿以細而忽之。其三曰: 立紀綱。日者殿下幸慕華館, 閱武事未竣, 而天乃雨。殿下少駐幕次, 扈侍宗宰, 棄坐避雨, 大失禮貌。憲府當旋卽劾之, 而未聞有紏擧。 執紀綱察百官者, 固如是乎? 其四曰: 謹天戒。近者天文示變, 地紀見怪, 臣等封章以進, 以冀殿下省念。伏聞將燕享功臣, 幸觀水戰, 臣等竊以爲不可也。當今變異不滅, 旱荒因仍, 殿下當修德以答天, 節用以勤民, 而反擧燕樂之事, 未知敬天之實安在? 況遠方漕軍, 贏糧涉海, 動經時月, 今以水戰之故, 拘泊未還, 則其苦可勝道哉? 在常時則猶之可也, 如此凶歉之時, 不可輕擧也。傳于政院曰: “弘文館前後疏章, 如嚴軍政、立紀綱、風俗、災變數條, 正中時弊。其令徧示會議諸宰, 商確施行。” 左議政柳順汀、右議政成希顔、驪平府院君閔孝曾、礪原府院君宋軼、晋川君姜渾、左贊成李蓀、右贊成金應箕、大司憲金詮、禮曹判書申用漑、戶曹判書張順孫、兵曹判書鄭光弼、知中樞府事李坫、工曹判書朴說、漢城判尹安潤德等議啓曰: “北方常使體探人, 深入敵境, 以覘賊勢。間有一二人, 雖或被擄, 不可廢此事。然朝廷勿罪邊將之法, 業已頒示。是以前此魚游澗萬戶, 只罷其職而已。柳湄今已改差, 雖當拿問被擄之由, 其事干皆在北方, 須待敬差官尹殷輔推鞫啓狀而後, 的知所以被掠人, 或體探或採樵眞僞而科罪也。虞候李珣, 雖已見遞, 而北方防禦最緊, 當交代還家, 今聞擅還其家。亦宜拿致, 窮推治罪, 以懲其餘。是亦嚴軍政一事也。” 柳順汀、成希顔等又啓曰: “燕享功臣, 雖祖宗故事, 然而近年旱荒相因, 災變疊作, 當修省以弭災, 節用以廣儲。不宜擧此燕禮也。” 順汀啓曰: “臣於年前, 有過擧, 招集衆劾, 每懷覆餗之誚, 日夜思釋重任。願得賢相, 使之同寅協力, 則風俗醇而災變弭矣。乞許臣辭職。” 希顔啓曰: “輔導左右者, 宰相之任也。臣忝備厥位, 日夜思所以輔導之責, 每欲鞠躬竭力, 然質本卑庸, 不能仰答天意。願得賢相, 以責效則, 聖治益隆, 風化無疵矣。 請遞臣職。” 傳曰: “予觀弘文館上疏, 咎全在予。安有卿等之失耶? 勿辭。” 又傳曰: “仲朔宴, 深欲行之, 觀今春凶荒尤甚。其停之。 柳湄等拿來問之。賞加事已分勝負, 論賞不可改也。”
【태백산사고본】 8책 15권 47장 A면 【영인본】 14책 573면
o 중종 15권, 7년(1512) 5월 24일(丁卯) 부제학 권민수 등이 올린 변방을 방비하고 오랑캐를 대우하는 방책에 대한 상소
부제학 권민수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모든 일을 예정豫定하면 성립되고 예정하지 않으면 폐기된다.’ 하였습니다. 천하의 사변事變이 무궁한데, 우리가 그 무궁함에 대비하는 것은 예정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기 전에 익히 헤아리고 닥치기 전에 세밀히 계획하여 앞일에 어둡지 않고 뒤에 실수가 없으면, 온갖 일이 번잡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거나 시기에 맞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나, 만약 조용한 날에 강구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일을 당하면 중론이 어긋나고 시비가 혼잡되어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왕년에 왜적이 남쪽 변방에 돌입하자, 장졸將卒이 소문만 듣고 흩어져 감히 버티지 못하였으므로, 웅천熊川 제포薺浦가 하루저녁에 잿더미가 된 것을 전하께서는 실로 그 까닭을 아십니까? 우리 나라가 조종祖宗 이래로 백여 년 동안 태평을 누리면서 대대로 전쟁을 당하지 않아, 인심이 나태해지고 상하가 안일만 찾았습니다. 변진邊鎭들 간에는 무사한 데 익숙하여 절도가 해이해지고 병기가 못쓰게 되었어도 적을 잊은 지 일조 일석이 아니니, 일거에 탕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봉강封疆을 공고히 함을 지금 늦출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북변 계동內溪洞의 추장이 적당賊黨을 모아 저돌하여 무인지경을 짓밟듯이 기탄없이 깊숙이 침입하여 우리 백성을 노략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로되, 장사將士들은 평시에 태만히 세월을 보내니, 적을 막는 방법에 소양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 방어할 계책을 미리 세우지 않고 난리가 난 뒤에 비로소 수습하니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남·북 두 도는 실로 국가의 관문인데, 전후 이와 같이 적의 침입을 받으니, 식자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물며, 산융山戎의 궁마弓馬의 완력은 해도海島의 좀도둑에 비할 바 아닌데, 함경도의 잔폐가 경상도의 10배나 되니 먼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 흉년이 계속되어, 재정이 풍부하지 못하고 군자軍資가 탕갈되었으며, 주부州府의 저축이 1년을 지탱하지 못하는데 군현郡縣의 저축이 어떻게 몇 달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회계상 남아 있는 곡식은 태반이 허위 숫자이니 변방을 다스리는 계책이 한심하지 않습니까? 동남 지방의 곡식을 조운漕運하여 나르는 것 또한 좋은 계책이나 왕래하는 데 폐가 없지 않습니다.
오직 함흥咸興 등지에는 내수사內需司에서 거두어 저축한 곡식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 역시 국가의 재산이지 어찌 전하의 사유私有이겠습니까. 군자로 옮겨 위급危急에 대비하면 더욱 가깝고 편리하겠습니다. 옛날 제왕이 동병動兵 할 때 내탕內帑을 죄다 기울여도 아까와하지 않은 것은, 실로 군량이 넉넉하지 못하면 능히 싸워 지키지 못하고 싸워 지키지 못하면 사재가 있더라도 보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해년 북정北征을 일으킨 후부터는 북도에 목축이 번성하지 못하여 항간에 말(馬)을 볼 수 없으니, 사졸이 장차 무엇을 의지하겠습니까? 목장의 번식은 의당 길렀다가 군용을 도와야 하거늘, 지금은 음사淫祀하는 자의 밑천으로 쓰이게 하니 또한 전도된 일이 아닙니까? 신 등은 들으니 ‘이적夷狄을 제어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이적을 대우하는 것이 어렵다.’ 하였습니다. 한번 실책하게 되면 후일의 무궁한 걱정이 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명철한 임금이 일찍이 충직한 말과 좋은 의견을 내는 신하로 더불어 그 가부를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일치된 논論을 결정하였습니다. 지금 화친을 청하는 일본 사신이 거의 조정에 이르렀는데도, 상하가 묵묵히 귀일한 의논을 내지 않고 있으니, 국가의 대사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기에, 널리 의논하고 두루 자문하여 일찍이 결정하지 않습니까? 옛적에 금金나라가 송宋나라에 대해 말하기를 ‘너희의 의논이 정해질 때에는 우리는 이미 하수河水를 건넜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의논을 고집함이 분분하여 미리 결정하지 못함을 풍자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경사卿士들과 의논하여 절충의 묘책을 취하지 않으십니까? 절충의 묘책이란 ‘속히 화친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종조世宗朝에 귀화한 왜인 평도전平道全이 비밀히 대마 도주對馬島主와 내통하여 이르기를 ‘근래 조선에서 너희를 대우하는 것이 점점 박해지니, 만약 다시 변군邊郡을 침략하여 위협을 주면 반드시 처음같이 대우할 것이다.’ 하더니, 얼마 안 가서 왜적이 충청도忠淸道 비인庇仁에 쳐들어와 병선兵船을 불지르고 현성縣城을 포위하고 민가를 약탈하니, 개와 닭도 씨가 말랐었습니다. 세종께서 노하시어 장수를 명해 토벌하자 그들은 형세가 부득이하여 항복을 청하므로 비로소 화친을 허락했었는데, 지금 삼포三浦의 반란 역시 위협하여 후대厚待를 요구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나, 행악은 전보다 더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 응징해야 할 분노를 풀고 교활한 사신의 말을 들어 너무 경솔히 허락하였으므로 국위가 이미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왜적의 괴수 종성친宗盛親이 조금도 두려워 아니하고 교사한 글을 써 보내며 국가를 우롱하니, 어찌 조정에 사람이 있다 이르겠습니까. 만약 접대하기를 처음같이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계획대로 되었다 하여 더욱 경모輕侮하는 마음을 가지리니 다른 날 화가 반드시 없으리라는 것을 또한 보증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문죄하는 군사를 경솔히 움직일 수 없으나 화친을 청한 것은 결코 속히 허락할 수 없습니다. 송宋나라 경덕景德 연간에 거란契丹이 화친을 청하자, 구준寇準이 불가하다 하였으나 진종眞宗이 듣지 않다가 과연 경력慶曆의 후회가 있었으니, 화친을 속히 한 화는 전대에서도 이미 징험할 수 있습니다. 가령 화친이 급하다면 모르겠습니다마는 한번 화친한 뒤에 우리의 수비를 거둘 수 있으며 남비南鄙를 잊을 수 있으며 한백년 걱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이익이 있기에 급급하십니까? 만약 허락하기를 쉽게 한다면, 삼포에 다시 살게 해 달라는 요청이 반드시 이를 따라 이를 것이니 모르겠습니다만 조정에서는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그 청을 다 들어 준다면 흉중에 있는 못된 마음이 점차 다시 발생할 것이요, 그 청을 허락지 않으면 왕래하는 사신이 도로에 잇달아 후관候館의 비용과 수역水驛의 지공이 거만巨萬에 이르러 몇 해 안가서 남방 일로一路는 앉아서 곤욕을 받게 될 것이니, 어찌 경솔히 화해를 허락하여 청거請居의 길을 열어 주겠습니까. 《역경易經》에는 ‘군자가 환란을 생각하여 미리 방비한다.’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너의 꾀를 원대히 하라.’ 하였고, 《시경詩經》에는 ‘꾀가 원대하지 않은지라 이 때문에 크게 간한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성인은 비근卑近을 편히 여기지 않고 고식姑息에 빠지지 않으며, 의논은 반드시 정당한 법을 취하고 지모는 반드시 원대한 것을 세워서 장구히 치안治安하는 형세를 이룹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구하면 마음이 밝아서 능히 결단하는 데 있으니, 마음이 실로 밝지 못하면 비근한 꾀에 현혹되고 원대한 것을 오활하다 하여 능히 결단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를 경계하여 성경誠敬으로 지키고 마음을 밝혀 시비를 통찰하실 것이며, 《역경》·《시경》·《서경》의 가르침을 준행하여 잃지 않으면 변방을 방비하고 오랑캐를 대우하는 방책이 거의 잘 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상소의 뜻을 보니 매우 마땅하다. 지금 일본 사신이 변방에 있는데도 화친을 의논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이번 의논을 보니 알겠다.”
하였다.
○副提學權敏手等上疏, 略曰:子思子曰: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天下之事變無窮, 而吾所以待無窮者, 在乎豫, 故及其未著而熟度之, 未至而詳畫之, 不迷於機先。 無失於後時, 則雖萬事旁午, 而處之, 無一不中於理, 不適於時矣。若不究討於從容之日, 而卒然遇之, 則衆論矛楯, 是非淆駁, 不終於僨事者無幾耳。往年倭奴, 奔突南鄙, 將卒望風潰散, 莫敢枝梧。熊川、薺浦一夕(猥)〔煨〕燼者, 殿下誠知其故耶? 我朝自祖宗以來, 昇平百有餘年, 世不見兵, 人心惰弛, 上下偸安。而邊鎭之間, 苟喘無事, 節度縱廢, 器械墮窳, 玩寇相忘者, 非一朝夕, 則無惑乎一擧而盡蕩也, 愼固封彊, 今可緩乎? 日者北門之內溪洞之酋, 狶聚豕突, 深入不憚, 如蹈無人之境, 搶擄我民者, 不一而再。將士之玩愒, 平時折衝禦侮之無其素, 可知已。經略之方, 夙不區析, 而覩風塵飛起, 始爲之料理, 何嗟及矣? 南北二路, 實國家之關鍵, 而前後受敵如此, 有識莫不懍懍。況山戎弓馬之健, 非海島小醜之比, 而咸鏡彫弊, 十倍慶尙, 則是不可不爲之先慮也。近來凶荒仍荐, 財用不敷, 兵資晙渴, 州府之蓄, 不足以支一年, 郡縣之儲, 焉得以供數月? 會計見存, 太半虛數, 籌邊者(可)〔何〕不寒心? 漕東南之粟, 漸次以輸者, 國策之得, 而往來不無弊焉。惟咸興等處, 內需司之收積穀, 不爲不多, 此亦國家之財, 豈殿下之私藏乎? 移補軍資, 以備緩急, 尤得便近。 古之帝王, 臨用兵之際, 有傾瀉左(帤)〔帑〕而不惜者, 誠以軍餉不裕, 則不能戰守, 不能戰守, 則雖有私蓄, 莫能保也。且自辛亥征興之後, 此道畜乘不繁, 街巷未見有馬, 則士卒將何所賴也? 牧場孶息, 宜爲之儲養, 以扶兵用, 而乃使淫祀者資焉, 不亦傎乎? 臣等聞制夷狄非難, 而待夷狄爲難。一失其策, 則基後日無窮之患, 可不懼歟? 此明智之君, 所以嘗與忠言嘉謀之臣, 相可否於廟堂之上, 定其畫一之論也。今者日本請和之使, 幾達朝廷, 而上下寥寥, 不出一定之論, 國家大事, 孰加於此, 而不博議徧咨以早斷乎? 昔金虜語宋曰: “待汝家議論定時, 我已渡河。”譏執議之紛紜, 而不豫定也。殿下何不謀及卿士, 而取折衷之策耶? 折衷之策, 不過曰: “不速和耳。” 世宗朝向化倭平道全, 潛通于對馬島主云: “朝鮮近來, 待汝等漸薄, 若更侵掠邊郡, 以恐動之, 則必將待之如初。” 未幾倭賊入寇忠淸道庇仁, 焚兵船圍縣城, 剽掠民居, 雞犬殆盡。世宗震怒, 命將問罪, 至於勢窮乞降, 始許通好。今三浦之反亂, 亦不過陵脅恐動, 以要厚待。 而爲惡則過之, 殿下寬是膺之憤, 聽黠介之辭。 然諾失輕, 國威已墮, 故賊魁宗盛親, 略不畏沮, 文詐移書, 愚弄國家, 豈謂朝廷有人乎? 若待之如初, 則彼必自以爲獲計, 益有輕國家之心, 他日之患, 亦不可保其必無也。今者問罪之師, 雖不可輕擧, 許和之請, 決不可速聽也。宋景德間, 契舟請和, 寇準以爲不可, 眞宗不聽, 果有慶曆之悔。速和之患, 前世已驗。假令急於通好, 未知一和之後, 吾守可撤乎, 南鄙可忘耶, 百年可無虞耶。不然, 有何利益, 而汲汲爲耶? 其許也易, 則復居三浦之請, 必繼此而發, 未審朝廷, 何以處之。盡許其請, 則腹心之(蠹)〔蠧〕, 殆將復生, 不許其請, 則往來之使, 道路相接, (侯)〔候〕館之費, 水驛之供, 積至巨萬, 不出數年, 南方一路, 坐受困弊, 豈可輕許通好, 以開請居之路乎? 《易》曰: “君子以, 思患而豫防之。” 《書》曰: “遠乃猷。” 《詩》曰: “猷之未遠, 是用大諫。” 故聖人不安卑近, 不溺姑息, 取論必經常, 植謀必遠大, 以成長治久安之勢。然求其本, 則在心明能斷耳。心苟不明, 則惑於近謀, 未嘗不以遠者大者爲迂, 而莫之能斷。殿下宜戒乎此, 存之以誠, 守之以敬, 使方寸, 炯然不(眛)〔昧〕,洞徹是非。 《易》、《詩》、《書》之敎, 遵而勿失, 則備邊之策, 待夷之方, 庶乎得矣。傳曰: “今觀疏意甚當。方今日本之使在邊, 而無議和之事, 故未敢言之, 觀此時之議, 則可知也。”
【태백산사고본】 8책 15권 57장 A면 【영인본】 14책 578면
o 중종 16권, 7년(1512) 6월 10일(壬子)부제학 권민수 등이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여 한결같이 치국하기를 청하다
부제학 권민수權敏手 등이 상소하기를,
<祈恩祭에 대한 비판>
“신 등이 듣건대, 선유先儒 호인胡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은 망령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복을 바라는 일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 한 마디 말은 족히 천고 임금의 미혹迷惑된 관문을 부술 수 있습니다. 대저 선과 악은 사람으로 말미암고, 화와 복은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선을 하지 아니하고 사곡하게 비는 것으로 복을 받는 사람이 없고, 악을 하지 않고 바른 길을 지키는 것 때문에 화를 당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니, 어찌 예禮를 어겨 망령되이 제사하고, 떳떳하지 못한 짓으로 복을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예를 제정하여, 근본根本에 보답하고 선대를 제향 하는데 일정한 법이 있고, 희생犧牲·그릇·일시日時도 떳떳한 법도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인의 법을 제쳐놓고, 사도邪道의 그릇된 풍속을 빌어다가 그 법복法服을 차리고 그 위장衛仗을 엄하게 베풀고, 광대(倡優)가 돌아다니고 무당이 희롱하면서 이것을 기은祈恩이라 하니, 이것이 무슨 제사입니까? 북을 둥둥 울리며 하늘에 있는 선조先祖들의 영혼을 잡아다가 희롱하니, 실로 효성있는 아들이나 인자한 자손으로서는 차마 할 일이 아닙니다.
북쪽에서 온 사대부士大夫들이 여러 가지로 더럽게 여기어 차마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함흥은 땅이 멀고 지경이 막히어 한 번도 중동重瞳을 접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만일 한 번이라도 보았더라면 반드시 놀랍고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오히려 빨리 혁파하지 않은 것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쁜 전례를 만든 자의 무식함이 심합니다. 예禮 아닌 제사가 곧 이른바 망령된 제사이니, 반드시 신명神明에게 꾸지람을 받을 것인데, 어찌 복福이 오게 되겠습니까.
함흥은 곧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 용비龍飛하신 땅으로서 상商나라의 경박景亳이나 주周나라의 기岐·빈邠과 같이 국가의 원기元氣가 뿌리 박아 서린 곳이니, 마땅히 교화敎化하여 배양培養시켜 한없이 경사가 나도록 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방탕하고 사특한 폐습弊習이 무지개 서듯이 몰래 젖어들게 하시니 되겠습니까? 더구나 경박이나 기·빈의 사이에서 성탕成湯과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자손들이 부지런히 기도하고 빌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도 현조玄鳥의 제사가 6백 년이나 계속되었고 창희蒼姬의 나라가 30대나 누렸으니, 근거 없는 기은의 보장은 기필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 이것을 아끼고 폐하지 아니하시니, 과연 무슨 뜻입니까? 이미 목장牧場의 말을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을 빙자하신다면, 맹자孟子의 이른바 ‘한 달에 닭 한마리만 훔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아, 인정人情은 화복禍福에 버릇이 들어 동요하기 쉽고, 귀신은 형체가 없어 알기 어려운 것이니, 동요하기 쉬운 인정을 가지고 알기 어려운 이치를 연구하여 백 년이 넘는 그릇된 일을 바로잡자면, 도道를 밝히는 임금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적에 광형匡衡이 무제武帝 이래의 옳지 못한 제사를 혁파하도록 아뢰었다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일에 연좌되어 면직免職되었는데, 우매한 지아비가 아는 것도 없이 부당하다고 많은 말을 하여 제사를 변동시키므로 천자가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저 성제成帝는 심지心志가 이미 내폐內嬖에게 고혹蠱惑되고 학술學術이 정대한 이치에 밝지 못하였으니, 그가 괴이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영명英明이 고금에 탁월한 자품으로 족히 천리天理의 성性을 밝힐 수 있고 만물의 실정을 알 수 있으신데도, 이 미신을 고집하심은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비록 하늘이 내신 고명高明을 지니셨지만, 처음부터 감반甘盤의 학문이 없으시고, 재위 7년의 공부가 빛이 나지 못하였고, 강연講筵을 더러 쉬는 날이 있었으니,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함(學問思辨)이 어찌 다 오묘한 경지에 도달하고 격물·치지·성의·정심(格致誠正)이 어찌 다 지극한 데에 나아가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화복禍福에 동요하기 쉬운 인정과 알기 어려운 귀신의 이치가 전하의 총명을 가려서 막은 것이니, 신 등이 통탄스럽게 여기는 것의 하나입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왕이 사당을 두는 것은 효성으로 대접하기를 다함이다.’ 하였는데, 자손의 정신은 곧 조종祖宗의 정신이니 그러므로 선왕先王께서 조묘祧廟를 마련하여 조종의 정신이 깃들게 하고, 자손들로 하여금 효성으로 대접하는 정성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위로는 조종의 기운과 혈맥의 전통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자손들의 연면連綿하는 근본을 배양培養하게 한 것이요, 이 이외의 방탕하고 외설한 것은 단지 조종들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선왕께서 좋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로 친히 묘정廟庭에 향사享祀한 것은 겨우 한 번뿐입니다. 정신이 집결된 곳의 약·사·증·상禴祠蒸嘗에는 정성과 공경을 드리지 않고 유독 구구하게 황폐한 성터에서 들제사를 지냄은 무슨 일입니까? 신 등이 알지 못하거니와, 조종의 정신이 여기에 계시겠습니까, 저기에 계시겠습니까? 조종께서 알게 되신다면 반드시 완구宛丘의 파사婆裟들에게 굴욕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조종조 이래의 일이라고 그릇 말씀하시니, 신 등이 마음 아프게 여기는 것의 하나입니다.
선유先儒의 말이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시의時宜에 맞도록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시의에 맞도록 한다.’는 것은 정치의 잘잘못과 국가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옛날 주周나라가 쇠퇴할 적에는 그때 사람들이 눈앞의 안일만 바랐고, 진秦나라가 쇠퇴할 적에는 그때 사람들이 이익만 탐하였고, 한漢나라가 쇠퇴할 적에는 그때 사람들이 혹은 나약하여 겁을 내고 혹은 과격過激하여 분발奮發하였습니다. 대체 시의時宜라는 것이 어찌 그 스스로 만드는 것이겠습니까. 위에 있는 분이 실로 주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그보다도 더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오랑캐의 풍습이 있어, 마을마다 귀신의 사당이 있고 종가宗家마다 귀신의 집을 지어, 그 조상의 제사는 혼매昏昧하게 방치하면서 무당(巫覡)을 높게 믿으며, 사대부士大夫 가운데에도 혹 이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어찌 그 원인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문文·무武로 왕업王業을 일으킨 땅인데, 영 땅 같은 풍속(郢俗)이 시작된 것이 근원이 되어 풍속을 더렵혀 백 년이나 긴 세월이 흘러 내려왔으니, 후세에 모범을 보이는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제사에 오랑캐의 예를 쓰는 것은 옛사람들이 좌임左衽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구릉을 타고 넘는 물도 남상濫觴의 물에서 비롯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작은 일이라 생각지 마시고 통쾌하게 끊어야 하는데도 ‘전대前代부터의 풍속이지 내가 창시한 것이 아니다.’고 핑계하시니, 이는 조종祖宗께서 그 근원을 파놓고 전하께서 그 물줄기를 키우는 격입니다. 어찌 왕자王者로서 풍기를 고치고 세속을 바로잡는 도리이겠습니까. 신 등의 마음 아프게 여기는 것의 하나입니다.
또 관석 화균關石和鈞은 왕부에 있는 것으로서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고치지 못하는 것이니, 《상서商書》에 이른바 ‘선왕의 성헌成憲을 보아서 하면, 길이 잘못이 없을 것이다.’고 한 것이 이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에 어긋나고 사리에 거슬리는 일에 있어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법을 고쳐야 효자의 도리를 잃지 않고 손자가 할아버지의 법을 고쳐야 자효慈孝스러운 손자의 도리를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니, 선유先儒의 이른바 ‘도리가 아닌 것이라 하면 어찌 3년을 기다리겠는가.’ 한 것이 이를 말한 것입니다. 사특한 일을 따르고 간특한 일을 답습하여 구차하게 자신의 사심만 채우는 임금이라면 ‘이는 아무 조祖와 아무 종宗 때에 세운 것이니, 아들로서 아버지의 것을 고칠 수 없고,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것을 고칠 수 없다.’고 할 것이요, 간사하게 아첨하여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는 사람들이 또한 옆에서 유도하여 마침내 난망亂亡에 빠지는 이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황탄荒誕하고 괴벽한 일을 가지고 대대로 준행하는 항법으로 생각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대궐 아래에서 논쟁하여도 모르는 체 움직이지 않으시니,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는 조종의 영혼이 전하께 바라는 바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도 잘못을 고집하고 돌리지 않으시기를 이토록 심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7년 동안에 선왕의 영갑令甲이 고쳐지기도 하고 혹은 복구되기도 하여 번거로와서 일정하지 못한데, 유독 이것에 있어서는 굳이 고집하며 고치기를 어렵게 여기시니, 또한 사물의 경중을 아신다 하겠습니까? 신 등의 마음에 통탄스럽게 여기는 것의 하나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여 안으로 살피시고 주야로 생각하여 한결같이 옛날 제왕帝王을 본받아 당唐·우虞와 삼대三代의 융성한 때가 되게 하소서. 왜냐 하면, 옛날의 유정 유일惟精惟一을 본받으면 능히 천명(性命)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좌설左說에 끌리지 아니할 것이요, 옛날의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는 것을 본받으면, 능히 사당 제사(宗祊)에 힘을 들이고 음사淫祀를 숭상하지 않을 것이요, 옛사람들의 오직 자신이 먼저 덕으로 행한 것을 본받으면, 마땅히 백성들을 선善한 길로 인도하여 정도正道를 좀먹게 하는 풍속을 맑게 할 것이요, 옛사람들의 사특한 것 버리기를 의심하지 않은 것을 본받으면, 옛날 풍속만 따르지 않게 되어서 여러 대의 폐습弊習을 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은殷 고종高宗이 아버지 제사를 풍성하게 차리자, 조기祖己가 극력 간하였었습니다. 하물며 음벽淫僻한 기은祈恩 같은 것이겠습니까. 이래서 대간臺諫이 복궐伏闕하여 극력 논쟁하고, 신 등도 간하여 마지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너무 고집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副提學權敏手等上疏曰:臣等伏聞先儒胡寅曰: “帝王, 無妄祭, 無徼福。” 此一言, 足以破千古人主之迷關也。 大抵善惡由人, 禍福自天, 未有不爲善而以曲祈獲福者, 未有不爲惡而以守正取禍者, 則其肯越禮以妄祭, 不經以徼福哉? 故聖人制禮, 報本享先, 莫不有定典, 牲器、日時, 莫不有恒度。今也外聖人之法, 而假野道之謬, 陳其法服, 嚴其仗衛, 倡優匝行, 巫覡揶揄, 名曰祈恩, 是何祭也? 坎坎擊鼓, 把弄先祖在天之靈, 實非孝子慈孫所忍爲也。士大夫之自北來者, 嘖嘖唾鄙, 尙不忍掛諸牙頰, 惜其壤夐界閡, 不得一接重瞳耳。苟一見之, 必驚愕而不暇自安, 猶悔革去之不早也。甚矣, 作俑者之瞢於理也。非禮之祭, 卽所謂妄祭, 必見謫於神明, 又何福之來也? 咸興, 乃康獻大王龍飛之邦, 如商之(景亳)〔京亳〕、周之(歧邠)〔岐邠〕,國家元氣之所根盤也。當敎化以培養之,匹休于無(彊)〔疆〕, 而及使淫邪弊習, 蝃蝀而陰食之可乎? 況京亳、岐邠之間, 成ㆍ湯、文ㆍ武之子孫, 未聞禱祝之勤, 而玄鳥祀延六百, 蒼姬卜世三十, 則無稽之祈, 未可必保。而殿下顧惜不廢, 果何意歟? 藉以爲已蠲牧乘之弊, 則與孟子所謂月攘一雞, 何以異哉? 於戲, 人情狃於禍福而易動, 鬼神隱於無形而難知。以易動之情、 究難知之理, 而矯百年之謬妄, 有非邃於明道之君, 則不可得己。昔匡衡, 奏罷武帝以來不度之祠, 未幾坐事免, 瞢夫寡識, 多言不當, 變動祭祀, 天子異之。彼成帝則心志旣蠱於內嬖, 學術未晣於正理, 其生異也宜矣。今殿下以英明冠古之資, 足以明天理之性, 知萬物之情, 而猶執迷於此何也? 殿下雖有天縱之高, 初無甘盤之學, 而七年之功夫, 未純於緝熙, 講筵或有間斷之日, 則學問思辨, 豈盡造妙也, 格致誠正, 豈盡詣極也? 若然則其於禍福易動之情, 鬼神難知之理, 不無蔽礙也, 臣等之所痛心者一也。《易》曰: “王假有廟致孝享。” 子孫之精神, 卽祖宗之精神也。 是故先王制爲廟祧, 以棲祖宗之精神, 使子孫能竭孝享之誠, 上以承祖宗氣脈之傳, 下以培子孫似續之根。而他外淫黷, 則祇衊祖宗, 先王所不屑也。今殿下卽位之後, 親享廟庭, 僅一擧矣。精神凝聚之地, 禴祀蒸嘗, 未見誠敬之實, 而獨區區於荒城野祭何也? 臣等不知祖宗之精神, 在此乎, 在彼乎? 冥冥之中, 如有知也, 必不屈辱於宛丘之娑娑矣。殿下謬以爲祖宗之事, 臣等之所痛心者一也。先儒有言曰: “治法不若治時。” 時者, 治之所以汚隆, 而國之所以存亡也。昔周之衰也, 時人苟偸; 秦之衰也, 時人饕利; 兩漢之衰也, 時人或柔懦而謹畏, 或矯激而奮厲。夫時者, 豈其所自爲也? 在上之人, 實倡之, 故上有好者, 下必有甚焉, 詎不信哉? 我國有荊蠻之風, 村村鬼社, 家家神廬, 昏棄厥祀, 崇信巫覡, 雖士大夫, 或不脫焉。 豈無自而然耶? 蓋以文、武興王之地, 而創鼓郢俗, 爲源以溷之, 流至百年之久, 大非垂範後世之義也。祀用夷禮, 古人知其爲左衽, 則襄陵未必不初於濫觴也。殿下罔以爲少, 而痛絶之可也, 乃諉曾世故俗, 非我所創, 是祖宗濬其源, 而殿下扶其瀾也。豈王者移風易俗之道乎? 臣等之所痛心者一也。且關石和(釣)〔鈞〕, 王府則有, 子孫世執, 而不可易者。《商書》所謂, “監干先王成憲, 其永無愆。” 是也。至於悖道逆理之事, 則子改父之道, 不失爲孝子, 孫改祖之道, 不失爲慈孫。 先儒所謂如其非道, 何待三年, 是也。若夫踵邪襲慝, 苟循己私之君則曰: “是某祖某宗之所樹, 子不可改父, 孫不可改祖也。” 奸諂希合之人, 又縱臾而導之, 卒陷亂亡者衆矣。今殿下以荒媟怪僻之事, 擬世遵常久之典, 雖言者扣論闕下, 邈然不動焉。 祖宗臨質, 在上之靈, 望於殿下者何如, 而抗非不回, 若是其甚歟? 七年之間, 先王令甲, 或更或復, 紛紛未定, 而獨於此, 牢持重變, 亦可謂知類乎? 臣等之所痛心者一也。 殿下固宜不遠而復, 反省內照, 晝度夜惟, 一法古世帝王, 以臻唐、吳〔虞〕、三代之盛焉。何則法古之惟精惟一, 則能盡性命之理, 而左說不得牽矣; 法古之奉先思孝, 則能盡宗祊之享, 而淫祀不足尙矣; 法古之祗台德先, 則當知動民以善, 而淸(蠹)〔蠧〕正之俗也; 法古之去邪勿(擬)〔疑〕, 則當知不循古常, 而撥累世之陋也。昔殷宗失豐昵廟, 祖已極諫, 況淫僻如祈恩乎? 此臺諫所以伏闕力論, 而臣等所以執爭不已者也。 伏願殿下勿惟庸。不允。【태백산사고본】 8책 16권 20장 A면 【영인본】 14책 590면
o 중종 22권, 10년(1515) 윤4월 23일(경진) 시정의 풍습, 대간의 논계 등을 거부하는 것을 논핵한 권민수의 상소문
대사헌 권민수 등이 상소하기를,
“《시경詩經》에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하늘은 진실로 밝으시니, 그 명命을 보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였고, 또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길이 천명天命을 지켜가리,’ 하였으며, 한漢나라 광형匡衡도 ‘하늘과 사람의 관계에는 정침精祲이 서로 움직이는 것 같고, 선과 악은 서로 밀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행해지면 천상天象이 위에서 움직이게 되어, 하늘이 변이變異로써 꾸짖는 것은 하늘의 마음이 인군을 인애仁愛하여 화패禍敗를 방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찌 깊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정사를 맡아서 잘 다스리기를 바라신 지가 1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자상慈祥하시고 개재愷悌하나 정이 아래에까지 두루 다 미치지 못하였으며, 비록 부지런히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나 시름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교사驕邪한 음기와 지나친 양기陽氣, 바람의 이변異變과 요괴妖怪한 일이 없었던 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재앙을 당하여 삼가 두려워함이 지극하셨습니다. 어선御膳을 줄이시고, 음악을 중지시키며, 바른말을 요구하고 원죄冤罪와 지체된 죄수를 관대히 처리하시며, 정전正殿을 피하여 거처하시니 하늘의 뜻을 돌이켜 재변을 해소시키기에 넉넉한데, 오히려 해마다 재변이 더욱 심합니다. 이제 이 정월正月에는 서리가 많이 오는 재앙이 있었고, 그 위에 우박과 지진이 겹쳐 일어나 자못 중첩하여 재앙이 보임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오직 헛된 외식外飾만 있고 실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모든 관료들은 게을러서 눈앞의 안일安逸만을 탐내 구차하게 편하려 하며 학교는 폐이廢弛하고, 선비의 풍습은 날로 경박輕薄해져서 시들어지고 무너지며 풀어지고 흩어져서 장차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서로 몸을 닦아 삼가고 조심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정돈整頓할지라도 오히려 극복克服하지 못할까 두렵거든, 더구나 이제 구구하게 일의 꼬투리나 주워모아 이지러져 새는 틈을 막고서, 헛된 이름만 내걸고 겉치레만 하면서 하늘을 응대하여 재앙이 그치기를 바라니, 어찌 속이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대신이란 것은 나라의 고굉股肱으로서 음양의 이치를 도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결하고 의문이 있으면 반드시 판단을 내려, 국론國論을 통일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옛것만 따라 구차하게 세월이 지나가는 것만 보면서 사리 사욕만 채우며, 큰일을 결정하고 큰 계책을 논정論定할 때면 겨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애매하게 우물우물하여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논이 한번 나오면 뭇사람의 심정에 맞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길가집 짓는 일 같아서 마침내 정론定論을 얻지 못하니, 그 ‘하늘의 조화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홍문관은 경연에서 논사論思하는 곳으로, 문한文翰을 다스리고 임금의 고문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성종조成宗朝에서는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을 들어 날마다 강연講筵에서 접견接見하고, 총애와 대우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상참常參하는 날에는 전 관원館員을 참여하게 하고, 물러가서는 전적典籍을 자세히 강론하여 밤이 다 되어야 파하는 것이 날마다의 상례常例가 되었으며, 또 묘년妙年의 문사文士를 뽑아서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되, 한가한 곳에 거처하게 하여 저술著述을 일과日課로 주고 직무에 얽매이지 않게 하였으니, 그 뜻이 자못 성대하고 그 일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요즈음 홍문관에는 강관講官 두 사람만이 있어서, 하루씩 윤번으로 숙직하는 자만이 상참常參에 들어가고, 그 나머지는 항상 집에 있으면서 특별한 회의라도 있지 않으면 일찍이 한번도 관문館門에 오지 않습니다.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한 자는 소관본사所管本司가 ‘사무가 바쁘다.’고 아뢰어, 모두 도로 출사出仕하게 하며, 그들 중 서당書堂에 돌아간 자 또한 출입出入을 제멋대로 하여 학문에 전심專心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문사를 융숭하게 권장勸奘하는 방법이 지난날만 못하고, 이 지위에 있는 자 또한 전례에 따르는 것이 관습이 되어 전일의 옛 상태를 되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인륜人倫을 밝히고 덕행德行을 성취成就시키기 위한 곳입니다. 옛날에는 공경 대부나 원사元士의 적자嫡子와 나라의 귀유 자제貴遊子弟들은 참여하지 않는 이가 없고, 그 중에서 서로 비교하여 어진 자와 유능한 자는 흥기興起시키고, 불경不敬한 자에게는 벌을 주며, 태만한 자에게는 매를 쳤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거처居處에 장소를 달리하는 자가 없고, 벼슬하는 데 다른 방법이 없으며, 사람을 취하는 데 다른 길이 없었으니, 이것이 주희朱熹가 ‘선비는 정한 뜻이 있어서 다른 것을 사모함이 없고, 오직 덕업德業이 닦이지 않음을 두려워할 뿐 벼슬과 봉록俸祿이 이르지 않음을 염려하지 않는다.’ 한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약관弱冠의 나이만 지나면 그 부형된 자가 전래의 습성에 따라 청탁하고 매개媒介하여 벼슬을 얻고, 온갖 연줄을 통하여 품등과 직급을 거듭하여 올리다가 하루아침에 우연히 과거에 급제만 하게 되면 갑자기 좋은 벼슬을 취득取得하게 되고, 머리가 백발이 되도록 경서를 깊이 연구한 자는 도리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가 그 빠른 길을 버리고 오래도록 관학館學에 근고勤苦하여, 아침에는 나물죽을 먹고 저녁에는 소금밥을 먹는 괴로운 길을 택하려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학교는 날로 천시賤視되고, 스승의 도道는 정립定立되지 않고, 가르침과 훈도는 밝아지지 않습니다. 요즈음 어떤 대학생이 오리를 훔치다가 남에게 구타를 당하고, 성균유생成均儒生의 신분증을 갖고서 송부訟府에 드나들고 있으니, 매우 부끄럽고 미워할 만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학교와 과거의 두 길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공경 대부와 귀유의 자제들이 학교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부화浮華하고 경망輕妄한 무뢰배無賴輩들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늘이 이미 존경각尊經閣에 화재를 일으켜 경고警告하고 두려워하게 하였건만, 전하께서는 아직도 경계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대학大學에 거둥하시기를 권한 일이 있었건만, 대신의 천변설天變說에 구애되어 중지하였고, 명현名賢의 유서遺書를 찾아 모을 것을 권한 일이 있었건만, 당해 관사가 각閣을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았으니, 학교를 일으키고 유술儒述을 숭상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옛날의 임금이 정승을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신중하게 하되, 이미 적임자를 얻으면 오로지 그에게 맡기어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그에게 자문諮問하였습니다. 요즈음 변경邊境의 일을 회의할 때에 수상首相이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있었는데, 조정이 그를 내버려 둔 채 문의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있고 없고는 비록 크게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 그를 정승으로 삼은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전하께서 처음 즉위卽位하실 때에는 아름다운 말을 찾아서 받아들이고, 간쟁諫諍 듣기를 기꺼워하여, 오직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까를 두려워하였는데, 지금은 간언諫言을 따르는 사실이 처음과 크게 다릅니다. 비록 청납聽納하는 일이 있더라도 역시 억지로 힘써서 할 뿐이요, 듣기 싫어하는 모습이 말하지 않는 가운데에도 드러납니다. 심형沈亨의 탐욕貪慾과 황여헌黃汝獻의 간사함과 정혜鄭譓의 노병老病과 김양좌金良佐의 잔약 졸렬함과 윤염尹·윤광령尹光齡의 직책을 오로지 아전에게 일임하는 것과 김극성金克成·민원閔㥳이 당해 직임에 합당하지 못한 일들은 신 등이 되풀이하여 논계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아득히 먼 일처럼 들어넘기시니 신 등은 더욱 의혹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절실하게 몸을 닦고 반성하시며, 성실誠實로써 응대應對하시고 사사로운 지혜를 쓰지 말며, 작은 것을 살피는 것을 지혜로운 일로 여기지 말며, 허위를 성실하다고 여기지 말며, 범상凡常한 구례를 전례로 삼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로잡고 문교文敎를 중하게 하여 풍속을 진작振作시키며, 허심虛心으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여서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게 하신다면, 자연히 재앙은 변하여 상서가 되고, 요망한 기운은 화기和氣로 바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소를 보고 대간에게 아뢰기를,
“지금 상소한 말을 보니 대개 오늘 아침 경연經筵에서 말한 것이다. 그 중에 ‘재변이 한둘이 아니고, 모든 관료들이 해이하며 선비의 풍습이 날로 경박하여 간다.’고 한 것은 확실히 현시現時의 병폐를 올바로 지적하였다. 요즈음 잇달아 재변이 있으므로 나는 항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모든 관료들이 해이해진 일은 법사法司가 그 실책을 규찰糾察하여 두려워하게 한다면, 그 폐단은 저절로 고쳐질 것이다. 학교의 폐이廢弛는 말이 있은 지가 오래되어, 내가 특히 유의留意하고 문교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는 것은 사장師長된 자가 부지런하지 않고, 부형들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효과를 바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서서히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학교에서 가르침을 베풀고 교육을 올바르게 하면, 선비의 풍습도 따라 고쳐질 것이다. 대신의 일에 대하여 말한 것은 그들이 이를 듣고 스스로 고치면 그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홍문관이 전원 상참常參에 참석하는 일이 조종조祖宗朝에는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입직入直한 관원만 참석하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독서당讀書堂에 있는 관원을 도로 불러온 것은 당해 관사의 실책失策이고, 자기 마음대로 출입出入하는 것은 관원 자신의 잘못이다. ‘변경의 일을 수상首相에게 문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의收議하는 날에 ‘몇 품品 이상의 관원이 회의하라.’고 하교下敎하였는데, 정원政院이 서계書啓한 뒤에야 어느 정승이 불참한 것을 알았고 그 전에는 내가 미처 몰랐다. 수상이 불참하면 담당 승지가 그의 제택第宅에 가서 수의해야 하는데 미처 생각지 못하였으니, 조정 대사를 수상에게 문의하지 않은 일은 과연 잘못된 것 같다. 논박論駁한 인물에 대하여 윤허하지 않은 것은, 옛날부터 임금된 자는 인물을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어렵게 여겨 작량酌量하는 것이요, 혹 듣기도 하고 혹 듣지 않기도 하는 것은 그 진퇴進退를 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어찌 딴뜻이 있으며, 또한 간언諫言을 싫어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大司憲權敏手等上疏曰:《詩》曰: “敬之敬之。天維顯思, 命不易哉?” 又曰 “畏天之威, 于時保之。” 漢匡衡亦曰: “天人之際, 精祲有似相盪; 善惡有似相推。” 事作於下者, 象動於上, 其譴告以變異者, 此, 天心仁愛人君, 而欲止其禍敗也, 豈不深可畏哉? 伏覩, 殿下臨政願治, 十年于玆。雖慈祥愷悌, 而情未下究; 雖勤恤民隱, 而愁歎不止。驕淫亢陽, 風變物怪, 無歲無之。殿下遇災而懼, 非不至也。減膳、撤樂, 求直言、疏冤滯, 避正殿不御, 宜足以回天意、消災變, 而彌年愈甚。今玆正月, 繁霜爲災, 加以雨雹、地震, 頻見疊出, 其故何哉? 特以徒有其文, 而無其實故也。方今百僚解慢, 偸安苟便; 學校廢弛, 士習日偸; 委靡頹墮, 渙散奔潰, 將至於不可救。君臣上下, 交修恪恭, 振懾整頓, 猶懼不克, 而方且區區焉掇拾緖餘, 堤防罅漏, 揭空名, 持文具, 求以應天弭災, 不幾於誣耶? 大臣者, 爲國股肱, 贊理陰陽, 有難必解, 有疑必斷, 一國論定民志, 乃其職也。今也, 因循苟且, 翫愒歲月, 營己自私, 而至於決大事、議大策, 特多端、糊塗不明。議或一出, 末愜群情, 道傍作舍, 終無定論, 其代天工、經邦國之意, 安在? 弘文館, 處經幄論思之地, 治文翰、備顧問者也。在成宗朝, 選時名士, 日接講筵, 寵待有加。常參之日, 令合館與焉, 退而商確典墳, 竟夕而罷, 日以爲常, 又揀妙年文士, 給暇讀書, 處之閑地, 課其著述, 不以職事相累, 其意甚盛、其事甚美。今也弘文館, 只有講官二人, 輪日直宿者, 入常參, 其餘則常家居, 非別有會議, 未嘗一至館門。給暇讀書者, 所管本司, 啓以事劇, 悉令還仕, 其得歸書堂者, 亦出入自便, 不復專意文墨。此, 殿下褒崇勸奬之道, 不及於向時, 而居此地者, 亦循例習常, 非復前日之舊矣。學校, 所以明人倫、考德行也。古云: “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國之貴遊子弟, 無不與焉, 比視而興其賢者、能者, 鱑其不敬, 撻其怠慢。所以居之者無異處, 官之者無異術, 取之者無異路, 此, 朱熹所謂“士有定志, 而無他慕, 惟其懼德業之不修; 不慮爵祿之未至也。” 今也, 自旣冠以上爲父兄者, 因循屬托, 媒得仕版, 千蹊百徑, 累資聚級, 一朝偶捷科第, 驟得美仕, 而皓首窮經者, 反不及焉。人誰欲捨其捷徑, 而勤久館學, 以取朝薺暮鹽之苦哉? 由是, 學校日卑, 師道不立, 敎訓不明。近者, 太學生偸取鴨子, 被歐於人, 靑衿持牒, 出入訟府, 甚可羞惡, 良由學校與科擧, 岐而爲二。公、卿、大夫、貴遊之子弟, 不肯在學, 而浮妄無賴之徒, 間仄其間, 以至於此也。天旣火尊經閣, 以警懼之, 殿下尙不知戒。有勸幸學, 而拘於大臣天變之說, 而止之。有勸搜討遺書, 而該官廢閣不行, 其興學校、重儒術之意, 安在? 古之人主, 置相之際, 必愼必重, 旣得其人, 則任之專, 而勿疑, 事無大小, 咸就咨焉。 頃者因邊事會議之際, 首相病告在家, 朝廷置而不問。彼雖不關於有無, 其初爰立作相之意, 安在? 殿下卽位之初, 延訪嘉言, 喜聞諫諍, 惟恐人不言。今也從諫之實, 大不如初, 縱有聽納, 亦出於勉强, 厭聞之端, 已露於不言之中。如沈亨之貪饕、黃汝獻之憸邪、鄭譓之老病、金良佐之殘劣、尹ㆍ尹光齡之專委下吏、金克成ㆍ閔㥳之不合當職, 臣等反覆論啓, 而殿下聽之邈然, 臣等尤竊惑焉。 伏願殿下, 側身修省, 應之以實, 勿以私智自用, 勿以小察爲明, 勿以虛僞爲實, 勿以常舊爲例, 正吾心, 以正百官; 重文敎, 以厲風俗, 虛懷迎納, 日新又新, 自然災變爲祥; 沴變爲和矣。上覽疏, 傳于臺諫曰: “今觀疏意, 今朝經筵, 言其大槪耳。其曰: ‘災變不一, 百僚解弛, 士習日偸。’者, 正中時病。近者連有災變, 故予嘗懷未安焉。百僚之解弛, 則法司糾擧其失, 使之畏懼, 則自變其弊矣。學校之廢弛, 言之久矣, 予特留意焉。欲興文敎, 而至今未變者, 師長不勤, 而父兄不敎也。雖然, 不可望效於一朝也, 悠久而待之, 可也。學校有敎, 而敎育以正, 則士習亦從而自變矣。所言大臣事, 大臣聞而自改, 則其弊自去矣。 弘文館合與常參事, 在祖宗朝, 則予未及知, 只入直官員參入, 其來已久矣。讀書堂官員推尋事, 乃本司之所失也, 出入自便, 則官員之自失也。不問邊事於首相者, 大抵收議之日, 敎以某品以上會議, 則政院書啓然後, 知某相之不參也, 其前則予未之知也。首相不參, 則色承旨竝收議於其第, 可也, 而未及計焉。朝廷大事, 不問首相, 果似非也。 所駁人物不允者, 自古人君, 愛惜人物, 故留難酌量, 或聽或否, 乃重其進退也。豈有他意乎, 亦何有厭諫之理乎?”
【태백산사고본】 11책 22권 6장 A면 【영인본】 15책 73면
o 중종 23권, 10년(1515) 9월 3일(병술)권민수·이행 등이 안당의 상소에 대해 부당함을 상소하다
대사헌大司憲 권민수權敏手·대사간大司諫 이행李荇 등이 상소上疏 하였다.
“예부터 정론正論을 억누르고 저의 그른 것을 스스로 옳다고 하는 대신은 반드시 먼저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임금이 대간의 말을 믿지 않게 한 뒤에 제가 하는 일을 남들이 어기지 못하게 합니다. 당 대종唐代宗 때에 대신이 진언進言하기를 ‘낭관郞官이나 어사御史가 아뢰는 일은 재상이나 장관長官이 그 가부를 먼저 결정한 뒤에 아뢰게 하소서.’ 하였고, 헌종憲宗 때에 또 어떤 자가 진언하기를 ‘요즈음 대간이 부실하게 논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다 간사한 신하가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대간의 말을 옳게 여길 것이 없다고 여기게 하여 스스로 방자한 행동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때에 안진경顔眞卿·이강李絳이 말하기를 ‘간사한 사람이 여기에 핑계대어 말을 만들어서 임금의 마음을 현혹시켜 간쟁諫諍하는 길을 막으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 정대하고 명백하여 간사한 사람의 꾀를 깨뜨릴 만하였는데, 대종·헌종 두 임금은 대간을 억누르는 죄를 쾌히 바르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간사한 사람들이 끝내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근일 안당이 조계에서 아뢰기를 ‘대간의 말을 반드시 죄다 따를 것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국시는 조정에 있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그 뜻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당瑭이 처음에 박상 등의 죄를 다스리지 말기를 청하되 언로를 위한 계책이라고 스스로 궤변하여 전하께서 대간의 말에 따르지 마시도록 권하였으니, 대간은 조정이 언책言責을 맡긴 자인데, 대간을 버리면 조정의 언로가 어디로부터 비롯하겠습니까? 처음부터 여기에 핑계대어 말을 만들어, 겉으로는 언로를 위하는 듯이 꾸몄으나 실은 대간의 의논을 막아서, 전하께 믿음을 얻지 못하게 하여 간쟁하는 길을 막은 것에 불과합니다. 대간의 정론이 믿음을 얻지 못하여 간쟁하는 길이 막히면,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무엇을 꺼리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이목耳目의 책임을 대간에게 맡기셨고 대간은 쟁론爭論을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의 생각하는 것이 다 국시요 그들의 말이 다 국시이며 전하께서 믿고 따르는 것이 다 국시입니다. 신 등의 근일 논한 것이 곧 국가의 큰일이요 국시로서 정해야 할 바입니다. 성감聖鑑이 환히 살피시어 국시가 이미 정해졌으니 이는 참으로 국가의 행복인데, 당이 오히려 말하는 까닭은 신 등이 논하는 것 외에 따로 국시가 있기 때문인지 신 등은 잘 모르겠습니다. 대간은 조정에서 기강을 맡았으니 조정의 일이라면 크고 작은 것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말해야 하는데, 당은 ‘국시는 조정에 있어야 한다.’고 하니, 대간의 직임이 조정과 관계가 없다는 것인지 또는 대간 말고 조정에 따로 기강을 유지할 자가 있다는 것인지 신 등은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당은 사리를 아는 재상이다.’ 하셨거니와 당은 과연 사리를 모르는 자가 아니니, 임금이 대간을 믿지 않는 것이 그르며 신 등이 논하는 것이 국시이며 대간과 조정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당이 감히 꺼리는 바 없이 이토록 궤변하니 이는 대간을 업신여기고 조정을 업신여기고 국시를 업신여기는 것이요,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즐기지 않는 처지에 전하를 빠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행해질 수 있게 하면, 그 해독은 말하기 어려울만큼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이미 환히 살피시어 미혹되지 않으셨으니, 마땅히 그 죄를 밝게 바루어 정론正論을 억누르는 자의 경계가 되게 하신다면 못내 다행이겠습니다.”
○大司憲權敏手、大司諫李荇等上疏曰:自古大臣, 欲排抑正論, 自是其非者, 必先蔽人主聰明, 必使人主不信臺諫之言, 然後惟其所爲, 而人莫之違。唐代宗朝大臣進說曰: “郞官御史奏事, 請委宰相、長官, 先定其可否, 然後奏聞。”憲宗朝又有進說者曰: “比, 臺諫多論事不實。” 此皆奸臣欲蔽人主聰明, 使諫臣之言, 爲不足是, 而己得以自恣也。其時顔眞卿、李絳以爲: “憸邪之人, 托此爲辭, 熒惑上心, 以塞諫諍之路。” 其言正大明白, 足以破憸人之計, 而代、憲二君不能快正, 沮抑諫官之罪, 此所以憸人之終無所忌也。近日安瑭, 乃於朝啓, 啓曰: “臺諫之言, 不必盡從。” 又曰: “國是, 當在朝廷。” 其意不難知矣。瑭初請勿治朴祥等罪, 自詭爲言路計, 而勸殿下不從臺諫之言。臺諫爲朝廷任言責者也。朝廷言路, 捨臺諫, 將何從始乎? 其初亦不過托此爲辭, 陽若爲言路, 而實沮臺諫之議, 使不得取信於殿下, 以塞諫諍之路也。臺諫正論, 不得取信, 而諫諍之路塞, 則己所欲爲, 何所忌憚? 殿下旣以耳目, 付臺諫; 臺諫以爭論, 自爲己責, 其所懷皆國是也; 所言皆國是也, 殿下信而從之者, 皆國是也。臣等之近日所論, 是誠國家之大事, 國是之所當定也。聖鑑洞照, 國是已定, 是誠國家之福, 而瑭猶以爲言者, 臣等未審臣等所論之外, 別有國是乎。臺諫於朝廷, 爲紀綱, 朝廷之事, 無有小大, 宜無不言, 而瑭以爲: “國是當在朝廷。” 臣等未審臺諫之職, 不關於朝廷, 而朝廷之間, 捨臺諫, 別有持紀綱者乎? 殿下敎曰: “瑭, 識理宰相。” 瑭果非不識事理者也, 非不知人主不信臺諫之爲非也, 臣等所論之爲國是也, 臺諫、朝廷之非有二也。 而瑭敢爲詭言, 無所忌憚, 至於如是, 是不有臺諫也, 不有朝廷也, 不有國是也, 欲陷殿下於不樂從諫之地也。使其說得行, 其害豈易言哉? 殿下旣已洞照昭然, 不爲所惑, 宜亟明正其罪, 以爲沮抑正論者之戒, 不勝幸甚。
【태백산사고본】 12책 23권 2장 A면 【영인본】 15책 105면
o 중종 23권, 10년(1515) 9월 29일(壬子)권민수가 음양의 조화를 위해 중전을 살필 것, 군정 강화, 무관직의 자질 강화 등을 상소하다
<군정에 대한 상소이다>
대사헌大司憲 권민수權敏手 등이 상소하였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재변이 자주 나타나서 거의 없는 해가 없었는데, 올해는 더욱 심하여 정양正陽의 달(月)에 서리가 많고 우박이 오더니, 이제 계추季秋가 다해 가고 겨울이 이미 다가왔는데, 24일과 26일 밤에 천둥 번개가 사납게 일어났습니다. 장재張載의《정몽正蒙》을 상고하니 ‘음기陰氣가 엉켜 모여서 안에 있는 양기가 나오지 못하면 분격하여 천둥 번개가 된다.’ 하였습니다. 대개 서리와 우박은 음의 붙이이고, 천둥과 번개는 양의 붙이입니다. 순전한 양이 바야흐로 운행하는데 음이 범하거나, 순전한 음이 엉켜 막혔는데 양기가 새어 나오는 것은 모두가 음과 양이 절도를 잃은 것이니, 큰 재변입니다. 대저, 하늘은 음·양 두 기운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하고, 사시四時를 정하여 한 해를 이루는데, 두 기운이 엇갈리면 사시가 차서를 어겨서 한 해의 완전함을 이루지 못합니다. 임금은 하늘을 이어받아 나와서 다스리니, 또한 하나의 음·양이 있을 뿐입니다. 기쁨은 양이 되고 성냄은 음이 되며, 움직임은 양이 되고 고요함은 음이 되며, 군자는 양이 되고 소인은 음이 되며, 조정朝廷은 양이 되고 궁곤宮壼은 음이 되는데, 비록 어느 일의 잘못 때문에 어느 재변이 응하였다고는 지적할 수 없으나, 아래에서 사람이 작위作爲함에 따라 위에서 하늘이 감동하는 것이니, 음·양의 기운이 같은 유를 따라서 감응하는 것도 반드시 그러할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아, 기뻐하거나 성내고 움직이거나 고요히 있는 사이와, 나아가거나 물러나고 사그러지거나 자라나는 즈음에, 단서가 되는 것은 매우 희미하나 그 발현되는 것은 매우 큽니다. 조정의 일로 말하면 드러나서 알기 쉬우나, 궁곤 가운데의 일은 숨겨져서 보기 어려운데, 드러나서 알기 쉬운 것은 혹 힘쓸 수 있으나 숨겨져서 보기 어려운 것은 더욱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지조를 지켜 홀로 있을 때를 삼가서 정일精一로 지키고 강건剛健으로 행하여 광명光明하고 중정中正함을 뭇사람과 함께 하지 않고서 조금이라도 그른 마음이 싹트면, 일에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넉넉히 천지의 기운을 상하여, 캄캄한 가운데에 숨어 엎드려 있더라도 겉으로 밝게 드러나니 매우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여 홀로 알아서 몸소 살피시기에 달려 있을 뿐이요, 입으로 다투어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도 여기에 생각이 미치십니까?
아, 재변을 부른 까닭이 된 일은 이미 지나갔으나,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도리는 거기에 응답하는 방법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 하늘에 응답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실지를 무엇이나 다 하셔야 합니다. 서정庶政의 궐실闕失과 소민小民의 원망까지도 모두가 넉넉히 재변을 부를 만하니, 백성의 일을 버려두고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지혜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상하가 약해져서 모든 일이 태만한데, 군정軍政이 해이한 것은 더욱 심한 걱정거리여서 혹 급한 일이 있으면 참으로 한심합니다. 평안·함경 두 도는 서쪽으로 중국에 잇닿았고 북으로 야인野人에 잇닿았으니, 참으로 국가의 중요한 울타리요, 무武를 쓸 곳입니다.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여기에 염려를 더하시어 땅은 넓고 사람은 적다는 것을 늘 생각하여, 때때로 장정이 많은 남쪽 고을에서 장정을 뽑아다가 채우고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죄를 범한 자들도 일체 여기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뽑혀 들어간 자에게는 기한을 작정하여 복호復戶하고 관에서 집과 집기什器를 주는 법조가 이미 있으나, 죄를 범하여 옮겨진 자에게는 그런 법례가 없습니다. 배소配所에 도착하자 곧 구속하는 영令을 더하여, 조금이라도 할일을 다해내지 못하면 매질이 따르니, 힘이 지탱해 내지 못하므로 도망하는 자가 잇달아 생깁니다.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옮겨졌으나, 어찌 이들만은 백성이 아니기에, 이토록 영令이 절박하여 유리流離하게 해야 합니까? 더구나 수령 중에 마땅한 사람이 못 되는 자가 많아서 절도 없이 조세를 거두므로, 살아갈 수 없어서 제몸을 사천私賤으로 의탁하는 자는 형편이 조금 나아지니, 드디어 서로 권세 있는 자에게 의탁해 들어가서 달갑게 종이 됩니다.
요즈음 듣건대 수령·변장邊將으로부터 아래로는 군관軍官에 이르기까지 양계兩界의 현직에 있는 자가, 원래 있던 노비奴婢라 칭하거나 도망자를 잡아 얻은 것이라 칭하여, 거의 거리낌없이 뽑아내어 데리고 나오는데, 이것이 어찌 죄다 자기의 노비이겠습니까? 신역身役을 피하여 갈 데가 없는 자를 꾀어들여 남몰래 끌어다 붙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재지의 수령에게 청탁하여, 그 지치고 약한 자를 속여서 억지로 사천을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양계의 백성은 한정되어 있고 현직으로 다녀오는 자는 한이 없는데, 한정된 백성을 한없는 지역에 마음대로 데려가는데도 금하는 것을 알려 주지 않으면, 장차 변방의 백성이 죄다 사천으로 들어가서, 국가에서 부지런히 채우더라도 미처 구제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죄를 범하여 옮겨 들어간 자에게도 연한을 정하여 복호하여 주어서 생업에 안정할 수 있도록 하며, 양계에 사는 사천도 본주本主가 데리고 나오지 못하게 하되 어긴 자에게는 죄주며, 도망하여 등록에서 빠졌다고 칭하는 자는 소재한 고을에서 마음대로 처결하지 못하게 하고 관찰사에게 신보申報해서 조정에 전문轉聞하여 사실을 상고하게 하여 간사한 술수를 막도록 하면 새로 옮겨진 자는 유산流散하는 고초를 면하고, 예전부터 살던 자는 사천으로 들어가는 폐해가 없어서 변방이 절로 충실해질 것입니다.
하삼도下三道는 왜노倭奴와 아주 가까우므로, 그 방비의 방책을 서둘러야 할 바입니다. 조종조에서는 고려 말기의 우환에 징계되어, 바다에 연한 땅 중에서 요해지要害地를 가려 영營·진鎭을 벌여 놓고 첨사僉使·만호萬戶를 두어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지나치게 많으므로, 주의注擬할 때에 정하게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무예武藝의 잡류雜類로 채우니, 무뢰한 무리가 어지러이 섞여 들어가서, 눈으로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손으로 활을 잡을 줄 모르되 제수除授된 자가 자못 많았습니다. 처음으로 제수될 적에는 매리媒利에 뜻을 두었고, 이미 제수되고 나서는 살과 뼈를 깎는 온갖 침탈을 다하여 제가 거느리는 군졸을 공공연히 놓아 보내고서 다달이 가포價布를 거두어 제 집으로 날라 가져가고, 또 뇌물을 써서 뒷날의 터전을 만들며, 지쳐서 곧 속바치지 못하는 자는 번番에 빠졌다는 핑계로 어지러이 공문을 보내서 침학侵虐이 갖추 이르니, 이리저리 자꾸 가산을 팔다가 생업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원망을 일으켜서 화기를 상하는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으니, 이를 구제하는 길은 어떠한 방책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대저, 문文으로 안을 다스리고, 무武로 난을 다스리는 것이니, 문과 무를 아울러 쓰는 것이 장구長久한 방법인데, 국가에서 문과 무를 아울러 쓰는 방법을 지극히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과武科에서 출신出身한 자를 훈련원訓鍊院에 예속시켜 권지 참군權知參軍이라 하고, 매년 겨울과 여름의 도목都目에 겨우 3원員을 거관去官하니, 이 때문에 그 직에 침체되어 있는 것이 날로 쌓여서 짧으면 10여 년, 길면 수십 년이 되어야 참직參職을 얻게 되며, 권지 참군의 액수에도 끼지 못하여 시골에 물러가 집에서 살며 늙고 마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 등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예전대로 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에 훈련원을 아울러 삼관三館으로 하여, 무과에서 출신한 자를 모두 여기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이 액수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자급資級의 고하를 헤아리지 말고 만호·첨사로 출보出補하였다가, 고만考滿하여 갈아서 제 차서에 도로 들어오게 하면 저들도 전도前途를 아껴서 전일처럼 심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저마다 부지런히 애쓸 것이며,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넓어져서 침체할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대저 직사職事를 주어 봐야 그 재능을 알 수 있고, 간난艱難에 처하게 해 봐야 그 지혜를 알 수 있는 것인데, 평소에 시험하여 미리 길러 두지 않고서 제수할 때마다 인재가 없음을 늘 한탄하니, 이것이 지금의 큰 걱정거리이요, 신 등이 염려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 사람에게 흠이 없으면 재변이 함부로 일어나지는 않는 것이니, 그 일어남이 이미 사람으로 말미암는다면 그 사라짐도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습니까? 오직 전하의 생각에 달려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이 있는데도 신 등이 다만 군정軍政에 관한 한 가지 일을 거론한 까닭은, 그 큰 것은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하실 바이겠으나 군정 또한 지금의 큰 걱정거리여서, 재변을 그치게 하는 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천청天聽을 번거롭히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여기에 유념하소서.”
○大司憲權敏手等上疏曰:伏以, 殿下臨御以來, 災沴變異, 頻出疊見, 殆無虛歲。而今年彌甚, 當正陽之月, 繁霜雨雹, 今玆季秋將晦, 冬律已應, 而乃於二十四日、二十六日夜, 雷電暴作。謹按張載《正蒙》曰: “陰氣凝聚, 陽在內者不得出, 則奮擊而爲雷電。” 蓋霜雹者, 陰之類也; 雷電者, 陽之屬也。純陽方運, 而陰沴干之; 純陰凝閉, 而陽氣發泄, 皆陰陽失節, 變之大者。夫天以二氣, 化生萬物, 定四時成歲, 二氣或錯, 則四時反序, 而歲功不成。人君繼天出治, 亦有一陰陽而已。喜爲陽而怒爲陰, 動爲陽而靜爲陰; 君子爲陽, 而小人爲陰; 朝廷爲陽, 而宮壼爲陰, 雖未可指以某事之失、某災變應之, 作於下, 動於上, 陰陽之氣, 隨類以感, 亦所必然。嗚呼! 喜怒動靜之間, 進退消長之機, 爲端甚微, 而其發甚遠。至於朝廷之上, 顯而易知; 宮壼之中, 隱而難見, 顯而易知者, 容或可勉; 隱而難見者, 尤爲難保。自非操存謹獨, 守之以精一, 行之以剛健, 光明中正, 與衆共之, 而一有非心思念萌焉, 不待發於事爲, 而亦足以傷天地之氣, 潛藏隱伏於冥冥之中, 而明揚顯露於昭昭之際, 甚可畏也。 然此在殿下沈潛默識, 而體察之耳, 有未可以口舌爭者, 殿下其亦動念及此乎? 嗚呼! 致災之由, 其事旣往, 弭災之道, 在所以應之如何耳。殿下所以應天, 宜無所不用其實。至於庶政之闕、小民之怨, 皆足以召變, 舍民以言天, 不可以言智。方今上下委靡, 頹惰之事, 莫不然, 而軍政廢弛, 爲患滋甚, 脫有緩急, 誠可寒心。平安、咸鏡兩道, 西連上國, 北接野人, 實國家雄藩, 而用武之地。自祖宗朝, 軫念有加, 常以地廣人稀, 時抄南郡多丁者以實之, 罪犯全家, 亦一切徙焉。其抄入者, 酌限復戶, 官給廬舍、什物, 已有法條, 而犯罪者獨無是例, 纔到配所, 卽加拘令, 少有不及, 鞭撻隨之, 力不能支, 因以逃散者, 項背相望。當初雖以罪見徙, 獨非赤子, 而迫令流離至此乎? 加以守宰, 多非其人, 徵斂無藝, 而民不能聊生, 而託爲私賤者, 其勢稍康, 遂相與投入權豪, 甘爲僕隷。比聞, 見任兩界者, 自守宰、邊將, 下至軍官, 或稱元居奴婢, 或稱捕得逃者, 公然括出, 略無畏忌, 此豈盡己之奴婢哉? 不過招誘避役無歸者, 陰加傅會而不然, 則請囑所在守令, 欺其疲弱, 壓勒爲賤耳。夫兩界之民有限, 而見任往還無窮, 以有限之民, 委諸無窮之域, 而莫之知禁, 將恐邊民, 盡託私賤, 國家所以實之者雖勤, 而無所及救矣。臣等之意以爲, 其犯罪入徙者, 亦令限年給復, 使得安業, 而私賤之居兩界者, 亦勿許本主率來, 違者罪之, 其稱逃漏者, 所在縣邑, 毌得擅決, 申報觀察使, 轉聞于朝廷, 詳加考覈, 以杜奸術, 則新徙者免流散之苦; 舊居者無投賤之弊, 邊鄙自爾實矣。下三道與倭奴密邇, 其防備之策, 在所當急。在祖宗朝, 懲麗季之患, 乃於沿海之地, 度其要害之處, 列置營鎭, 設爲僉使、萬戶而領之。但厥數猥多, 注擬之際, 勢不得精, 率以武藝雜類補之, 無賴之徒 紛然雜進, 有目不知字, 手不執弓, 而見除者頗多。其初得之也, 志在於媒利, 及其得之也, 剝膚椎髓, 侵奪萬端, 所管軍卒, 公然解放, 月徵價布, 輸載其家, 又用行賂, 爲他日之地。其有疲困不卽贖納者, 託以闕番, 文移交錯, 侵虐備至, 轉輾貿賣, 失業流離者, 不知其幾。起怨傷和, 莫甚於此時, 其救之之道, 當何策而可乎? 夫文以治內, 武以勘亂, 文武竝用, 長久之道也。 國家竝用之道, 非不至也, 然其出身武科者, 隷于訓鍊院, 名爲權知參軍, 每年冬夏都目, 僅三員去官。由是, 沈滯日積, 近者十餘年, 遠者數十年, 方得參職。其不與權知之額, 退處鄕曲, 家居終老者, 不可勝計 臣等之意, 依古事, 合司僕寺、軍器寺, 竝訓鍊院爲三館, 出身武擧者, 悉令分隷, 其未入額者, 不計資級高下, 出補萬戶、僉使, 考滿而遞, 還入己次, 則彼亦愛惜前途, 各自勸勉, 不至如前日之甚, 而用人之路廣, 沈滯之患息矣。夫授之以事, 然後知其能否; 投之以難, 然後觀其心智。當平居之日, 不有以試之, 預爲儲養, 每當除拜, 常有無人之嘆。此, 當今大患, 臣等之慮, 正爲此也。嗚呼! 人無釁焉, 災不妄作。其作也, 旣由乎人, 則其消也, 又豈他求哉? 特在殿下一念之間。事有大於是者, 而臣等獨擧軍政一事者, 其大者殿下所當自省, 軍政亦當今巨患, 而弭災之一端, 故敢瀆天聽。伏惟, 殿下留神焉。
【태백산사고본】 12책 23권 11장 B면 【영인본】 15책 110면
o 연산 18권, 2년(1496) 9월 29일(壬申)곽종원 등과 입묘와 신자건의 일 등을 논의하다
경연에 납시었다. 지평 곽종원郭宗元이 아뢰기를,
“의논이 경卿·사士 서인에 미친다.’ 했으니, 입묘立廟의 일을 널리 의논하여 사士에까지 미쳐야 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수의收議하게 하였다.”
하였다. 종원이 아뢰기를,
“신자건愼自建의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그 아들이 올린 말만을 듣고 죄목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들 서용敍用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지금 만일 서용한다면 탐욕과 청렴이 뒤섞여집니다.”
하고, 영사 윤필상은 아뢰기를,
“신이 처음 의논할 때에는, 제 것으로 한 죄가 아니라 했고, 또 큰 사赦가 지나갔으므로, 영구히 서용하지 않는 것은 특별히 율 밖의 죄이기 때문에 허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간의 말을 들으니, 대개 선비의 기풍을 아껴서 바로잡자는 것인즉, 예전대로 서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시독관侍讀官 남궁찬南宮璨은 아뢰기를,
“성종께서 이 사람을 죄주실 때 어찌 잘 생각해서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때 대간이 특별히 율 밖의 조목으로 계청啓請하였는데, 성종께서 간언을 잘 받아 들이기 때문에 들어 준 것이요, 애초 제 것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하였다. 정언正言 조원기趙元紀가 아뢰기를,
“일대의 선비 풍습은 인군이 숭상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일이지만 관계되는 것은 매우 큽니다. 김순손金舜孫의 일은, 신 등이 한 사람 내시를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사람을 저자에 형벌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보내어 그 죄를 분명히 다스리되 온 나라로 하여금 다 그 죄가 죽음에 이를만 하다는 것을 알게 한 후에 죽여야 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순손은 망령스럽게 스스로가 존대한 체하며 군상에게 오만했으니, 그 죄가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하자, 원기가 아뢰기를,
“군상께 오만했다면 죄가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깥 사람들은 모두 그 죄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종원은 아뢰기를,
“윤필상이, ‘자건은 제 것으로 한 죄가 아니다.’ 하였는데, 자건이 사사로이 전세田稅 13석을 감하였으며, 또 수령守令에게 청하여서 농籠·상箱·철칠려鐵蒺藜 등 물건을 취하였으니, 이것이 제 것으로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특진관 이세좌李世佐는 아뢰기를,
“간관의 말이 옳습니다. 성종조의 강삼姜參이 전라도에서 와서 자건의 불법한 일을 아뢰니, 성종이 크게 노하여 비록 장안贓案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크게 선비의 풍습을 훼상했다고 하여 죄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명예와 절조에 관계되오니, 대간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사하여 용서하였고 또 대신의 의논을 거두어 허통하였다.”
하였다. 특진관 이세좌李世佐가 아뢰기를,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박학博學하며 심문審問하며 신사愼思하며 명변明辨하며 독행한다.’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다섯 가지에 하나라도 없으면 학문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제왕帝王은 하루에도 천만 가지 일을 보는데, 학문을 하다 말다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해가 긴 때에는 마땅히 주강晝講·석강夕講에 납시어 어진 사대부를 접하시어야 합니다. 만일 좀 미령하시다면 대신을 보지 못하시더라도 편전에 납시어 경영관을 불러서 학문을 강론하며, 또 때로 상참常參과 윤대輪對에 납시어 대신을 접견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근일 감기 증세가 있기 때문에 좀 조리하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전경典經 권민수權敏手가 아뢰기를,
“학문의 도는 정심正心이 앞서야 하니, 마음이 바른 후에야만 쓰고 버리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신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본즉, 당唐나라 헌종憲宗이 정심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배도裵度는 직언直言으로 하여 내쫓기고, 배연령裵延齡·이봉길李逢吉·황보박皇甫鎛·정이程异의 무리는 사특하고 아첨함으로 하여 직임을 받았습니다. 그때 배도가 말하기를, ‘학문의 도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후인들이 말하기를, ‘배도는 정심의 도만을 말하고 정심의 요결을 말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정심의 요결은 성誠과 경敬으로 본을 삼아야 합니다. 전번 경연에서 이 글을 진강進講하다가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편전에 납시어서 다만 경연관·사관을 불러 진강하게 하신다면, 책 수가 많지 않아 쉽게 모두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잘 생각하여 하지 않을 것인가.”하였다.
○壬申/御經筵。持平郭宗元曰: “謀及卿士庶人。’立廟事, 當廣議以及於士。”王曰: “已令收議。”宗元曰: “愼自建事議得大臣, 但見其子上言, 未見罪目, 故多請敍用。今若敍用, 則貪廉混矣。”領事尹弼商曰: “臣初議時以爲, 非入己之罪, 且經大赦, 其永不敍用, 特律外之科, 故謂當許通。今聞臺諫之言, 蓋惜士風, 而矯之也。宜仍舊勿敍。” 侍讀官南宮璨曰: “成宗之罪此人也, 豈不商量?” 王曰: “其時臺諫特以律外之條啓請, 成宗納諫, 故聽之耳, 初非入己也。”正言趙元紀曰: “一代士習, 由人主所尙。此雖小事, 關係甚大。金舜孫事, 臣等非惜一宦寺也。古人云: ‘刑人於市, 與衆棄之。’ 當付之有司, 明治其罪, 使一國共知, 罪可至死, 然後殺之。”王曰: “舜孫妄自尊大, 傲慢君上, 其罪固當死矣。” 元紀曰: “若傲慢君上, 則罪固當死, 然外人皆不知其罪。” 宗元曰: “弼商以自建爲非入己之罪, 自建私減田稅十三碩, 且請於守令, 以取籠箱、鐵蒺藜等物, 非入己而何?” 特進官李世佐曰: “諫官言之是矣。成宗朝姜參自全羅道來啓自建不法事, 成宗大怒。雖不錄贓案, 以爲大毁士習, 故罪之。此關名節, 不可不聽臺諫之言。”王曰: “已經赦宥, 且收大臣之議而許通矣。” 世佐曰: “《中庸》曰: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程子曰: ‘五者廢其一, 非學也。’ 帝王一日萬幾, 學問不可作輟。如此日長之時, 當御晝、夕講, 以接賢士大夫。若少有未寧, 雖不見大臣, 當御便殿, 召經筵官, 以講學問。又時御常參、輪對, 以接大臣。”王曰: “近有感冒之證, 故欲少調理耳。”典經權敏手曰: “學問之道, 正心爲先, 心正然後用舍分明。臣觀《大學衍義》, 唐憲宗不能正心, 故裵度以直言而見黜, 裵延齡、李逢吉、皇甫鎛、程异之輩, 以邪諂而見任。其時裵度曰: ‘學問之道, 須當正心。’ 後人有言曰: ‘裵度但言正心之道, 不言正心之要。’正心之要, 須以誠敬爲本。前者於經筵, 進講此書而未畢。請御便殿, 只召經筵官、史官, 使之進講, 則簡帙不繁, 易得畢覽。” 王曰: “予豈不商量乎?”
【태백산사고본】 5책 18권 13장 B면 【영인본】 13책 147면
Ⅱ.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선생
1. 동계桐溪선생의 생애
동계桐溪선생은 예종 1년(1469)에 태어나서 연산군 10년(1504)에 35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통지通之이며, 호는 동계桐溪다.
고려高麗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증조 권회權恢는 서천군사舒川郡事이고, 할아버지 권유순權有順은 공주 목사公州牧使이고, 아버지 권임權琳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이고, 어머니는 이보정李補丁의 딸이다. 권민수權敏手는 형이며, 부인 정씨는 상산의 저명한 씨족으로 감찰監察 정계금鄭繼金의 딸이다.
성종 23년(149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연산군 1년(1495) 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예문관 봉교奉敎・대교待敎를 거친 뒤, 연산군 3년에는 정언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으며, 동지사冬至使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리고 연산군 4년 7월에는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10월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이때 동향인同鄕人인 홍귀달洪貴達이 의정부議政府 좌찬참左參贊이 되었다. 연산군 5년 4월에 홍문관의 부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연산군 9년(1503) 1월에는 경연經筵의 시독관試讀官이 되었다.
1504년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生母 폐비윤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復位시켜 왕비王妃로 추숭追崇하고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는 일을 백관百官에게 의논하라고 하였다. 그때만 해도 연산군은 흉악한 노기怒氣가 한창 등등하여 비위를 거슬렸다하면 피살되어 시체가 거리에 가득했으므로 온 조정이 벌벌 떨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때 동계桐溪선생은 분개하여 말하기를,
“어찌 나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임금을 나쁜 곳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의논은 옳지 않다고 하자, 동료의 인사와 어사御使, 간관諫官 등이 동계桐溪선생의 말을 의롭게 여겨 모두 그의 의논에 따르자, 연산군이 모두 쫒아내 버렸다.
이 일로 인해서 연산군 10년(1504) 3월에 간관들을 의금부에 가두었고, 이어서 승지 강징姜澂과 동계선생을 비롯한 홍문관 관원 24명이 태笞 40대씩을 속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4월 7일에는 부교리 권달수에게 장 60대를 때리고 용궁龍宮에 부처하라고 하였다. 그 뒤 반년이 되어서 이일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다시 체포하여 처벌하려고 하자, 동계桐溪선생은,
“반대 의논을 제기한 사람은 나이지, 다른 사람은 간여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무사하고 동계桐溪선생만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옥사하였다.
그리고 동계桐溪선생이 체포되었을 때 함창咸昌에 있던 그의 부인 정씨鄭氏가 밥알 하나도 입에 넣지 않고 속이 답답하면 물만 마시고 있다가 동계桐溪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나도 그와 같이 한 구덩이에 묻히면 만족하다.”
하고, 오랫동안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남곤南袞은 권달수權達手의 묘갈명墓碣銘에서,
“권달수權達手 같은 사람은 열사烈士였으며, 부인까지 곁들었으니, 정말 절의節義로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라고 하였다.
동계桐溪선생은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무리 중에 우뚝 뛰어났다. 당시 과거 공부를 하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에서 주워 모아 외람되고 비루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고문古文에 주력하여 부賦를 지을 때에는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웅揚雄을 원조元祖로 삼고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상당히 건안建安 제가諸家의 문체를 취하였으므로 그의 저작이 나올 때마다 후생後生들이 앞 다투어 전하여 외웠으니, ≪문선文選≫에 대한 학문이 마침내 세상에 성행한 것은 교리군의 영향력影響力으로 인한 것이었다.
성종 23년 임자년壬子年(1492년) 과거에 합격하여 곧바로 예문관藝文館에 보임되었다. 임금이 문장에 능한 인사를 선발하여 용산龍山의 독서당讀書堂에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동계桐溪선생과 탁영 김일손金馹孫 등이 그 선발에 들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재차 연경燕京에 가는 사절을 따라가 연산燕山에서 중국어中國語를 질문하였으며, 돌아와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校理가 되었다.
동계桐溪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출중하고 흉금이 시원스러워 사람과 사귈 때 천진天眞을 털어놓고 진실하게 담소談笑를 나누었으므로, 보는 사람이면 모두 그가 화평和平한 군자君子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올곧아 자신을 굽히고 남을 따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도량은 감복하면서도 그의 엄격한 것을 꺼린 바람에 결국 화를 당하고 말았다. 중종中宗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떤 사람이 동계桐溪선생 부부의 일을 아뢰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의 관작을 추증하고 그곳 관리로 하여금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정씨鄭氏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를 해주어 그의 정렬貞烈을 포상하였다.
동계桐溪선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두가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중종 12년 1월 22일에 충청도관찰사 권민수가 졸卒하자, 권민수의 졸기에서도 사신史臣들은
“권달수權達手는 강의剛毅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폐조廢朝 때 바른 말을 많이 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니 지금까지 사림士林들이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그의 아내 정씨鄭氏도 행실이 어질었는데, 남편의 불행을 듣고 굶다 죽었다.”
라고 기록하였고, 영조 3년 7월 19일에는 참찬관參贊官 송인명宋寅明이
“한선제漢宣帝가 무제武帝를 높여 세실世室로 하려 할 때에는 하후 승夏侯勝이 그 무력武力을 남용濫用하였다는 것으로 배척하였고, 아조我朝의 일로 말하면 심대부沈大浮·유계兪棨 등이 추숭追崇하는 일을 힘껏 간쟁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사친私親을 추존追尊할 때에는 권달수權達手가 힘껏 간쟁하다가 화를 입었는데, 이것은 곧은 절의節義입니다.”
라고 했다.
동계桐溪선생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언遺言에 따라 그의 형 정랑正郞 권민수權敏手의 아들 권소權紹를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조정에 요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그리고 동계桐溪선생의 시체를 한양漢陽에서 반장返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인은 임시로 옛날의 거주지 상산商山에다 매장해 놓았었다. 형 정랑正郞 권민수權敏手가 이리저리 귀양 다니느라 미처 돌아볼 겨를이 없다가 귀양지에서 풀려나자마자, 맨 먼저 가산家産을 털어 묘소를 잡고, 동생 부인이 소망한 대로 한 곳에다 합장合葬하였는데, 그곳은 함창현咸昌縣 관아 남쪽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자리였다.
숙종 19년(1693)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2. 권달수權達手의 묘갈명墓碣銘
저자 : 남곤南袞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교동주喬桐主가 王位에 오른 지 10년 되던 갑자년甲子年에 폐비廢妃 윤씨尹氏를 추존追尊하고자 그 일을 백관百官에게 의논하라고 하였다. 그때 흉악한 노기怒氣가 한창 등등하여 비위를 거슬렸다하면 피살되어 시체가 거리에 가득했으므로 온 조정이 벌벌 떨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때 교리敎理 권달수權達手군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어찌 나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임금을 나쁜 곳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 의논은 옳지 않다고 하자, 동료의 인사와 어사御使, 간관諫官 등이 교리군敎理君의 말을 의롭게 여겨 모두 그의 의논에 따르자, 교동주가 모두 쫒아내 버렸다.
그 뒤 반년이 되어 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려고 하자, 교리군敎理君이 말하기를,
“반대 의논을 제기한 사람은 나이지, 다른 사람은 간여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리군만 저자에서 사형당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였다. 교리군敎理君이 체포되었을 때 함창咸昌에 있던 그의 부인 정씨鄭氏가 밥알 하나도 입에 넣지 않고 속이 답답하면 물만 마시고 있다가 교리군敎理君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나도 그와 같이 한 구덩이에 묻히면 만족하다.”
하고, 오랫동안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아! 교리군敎理君 같은 사람은 어찌 옛날의 열사烈士가 아니겠는가마는 부인까지 곁들었으니, 정말 절의節義로 쌍벽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교리군은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무리 중에 우뚝 뛰어났다. 당시 과거 공부를 하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에서 주워 모아 외람되고 비루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고문古文에 주력하여 부賦를 지을 때에는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양웅揚雄을 원조元祖로 삼고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상당히 건안建安 제가諸家의 문체를 취하였으므로 그의 저작이 나올 때마다 후생後生들이 앞다투어 전하여 외웠으니, ≪문선文選≫에 대한 학문이 마침내 세상에 성행한 것은 교리군의 영향력影響力으로 인한 것이었다. 성종成宗 23년(壬子年, 1492년) 과거에 합격하여 곧바로 예문관藝文館에 보임되었다. 임금이 문장에 능한 인사를 선발하여 용산龍山의 독서당讀書堂에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교리군과 김일손金馹孫 등이 그 선발에 들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다. 재차 연경에 가는 사절을 따라가 연산燕山에서 중국어中國語를 질문하였으며, 돌아와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군은 타고난 자품이 출중하고 흉금이 시원스러워 사람과 사귈 때 천진天眞을 털어놓고 진실하게 담소談笑를 나누었으므로, 보는 사람이면 모두 그가 화평和平한 군자君子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지론持論이 올곧아 자신을 굽히고 남을 따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도량은 감복하면서도 그의 엄격한 것을 꺼린 바람에 결국 화를 당하고 말았다. 지금 주상主上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떤 사람이 교리군 부부의 일을 아뢰자,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도승지承政院 都承旨의 관작을 추증하고 그곳 관리로 하여금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정씨鄭氏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를 해주어 그의 정렬貞烈을 포상하였다.
교리군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어머니의 유언遺言에 따라 그의 형 정랑正郞 군의 아들 권소權紹를 후사後嗣로 삼겠다고 조정에 요청하자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교리군의 시체를 한양漢陽에서 반장返葬하지 못하였으므로 부인은 임시 옛날의 거주지 상산商山에다 매장해 놓았다. 정랑군이 이리저리 귀양 다니느라 미처 돌아볼 겨를이 없다가 귀양지에서 풀려나자 맨 먼저 가산家産을 털어 묘소를 잡아 부인이 소망한 대로 한 곳에다 합장合葬하였는데, 그곳은 함창현咸昌縣 관아 남쪽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자리였다.
교리군의 휘諱는 달수達手, 자字는 통지通之이고,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고려高麗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다. 증조 권회權恢는 서천 군사舒川郡事이고, 할아버지 권유순權有順은 공주 목사公州牧使이고, 아버지 권임權琳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이다. 부인 정씨는 상산의 저명한 씨족으로 감찰監察 정계금鄭繼金의 딸이다. 정랑군의 이름은 민수敏手인데, 교리군과 어렸을 때부터 같이 공부하여 조정에 벼슬할 때까지 그 명망과 지위가 백중지세伯仲之勢를 이루었다. 그의 우애가 독특하였기 때문에 애통도 더욱 심하였으므로 교리군을 위한 일이라면 더욱더 근실히 하였다. 그가 교리군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에게 찾아와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이 남곤南袞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차마 그의 묘비명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그의 묘비명을 쓰지 않는다면 그 누가 그를 알 수 있겠는가?”
하고, 감히 눈물을 뿌리며 다음과 같이 비석에 쓴다.
지아비는 직언直言으로 죽었고 지어미는 정렬貞烈로 죽었으니,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의 그 도리가 일월日月처럼 나란히 찬란하네. 맺힌 분노 풀리지 않았으니 마땅히 우레로 변화하여, 사특한 간담을 깨뜨려서 궤도로 들어서게 하였겠지. 관작과 정문을 하사한 건 그들의 영광만 될 뿐이겠나? 온 세상에 찾아보기 힘드니 풍성風聲을 수립하게 되었었지. 묘소가 길 위에 있으니 나그네들 그 아래로 지나다가, 이마에 손 얹고 추모하거나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겠지. 찬란하게 그 방명芳名 들날렸는데 후사를 세우는 데 미치었도다. 후사에 유감이 없으니 선량한 형님이 있었도다. 일편一片의 비석을 세우니 만고토록 생존한 것 같도다.
3.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선생과 조선왕조실록
o 연산 4권, 1년(1495) 3월 19일(壬寅) 대교 권달수 등이 명을 내릴 때에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참여하기를 아뢰다
파평 부원군 윤필상・좌의정 노사신・영돈녕 윤호를 불러서 전교하기를,
“영의정이 여러 번 병으로 사직하려 하였으나, 내가 윤허하지 않았는데, 지금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만약 안심하고 조리하지 못하면, 병을 치료하기 어려울 터이니, 좌의정을 영의정으로 올리고 우의정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정괄鄭佸을 우의정으로 삼아서 북경에 사신으로 가게 함이 옳겠다.”
하였다. 이날 승전내관承傳內官 김자원金子猿이 필상 등에게 명령을 전할 적에 가고 온 말이 많았으나, 승지와 사관史官이 참석하여 듣지 못하였다. 대교待敎 권달수權達手·검열檢閱 강징姜澄이 아뢰기를,
“무릇 명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승지와 사관으로 하여금 참석하여 듣게 하는 것인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으니, 청컨대 그 말씀을 들려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대행 왕조大行王朝에서는 정승을 낼 때에는 반드시 사람을 파하게 하였으므로, 지금도 역시 이와 같이 한 것이다.”
하매, 달수 등이 아뢰기를,
“국가의 큰일을 대신과 의논하면서 사관이 참예하지 못하는 것은 심히 온당치 못합니다. 또 대행왕께서 정승을 낼 때에는 비록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하였어도, 사관은 좌우에 있어서 그 시말을 함께 들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영의정·우의정이 다 병이 있어 북경에 갈 수가 없는데, 전일에 서연書筵에서 정괄을 보니 정승이 될 만한 사람이므로, 지금 영의정을 갈고 정괄로써 우의정을 삼으려 한다.”
하였다.
○壬寅/命召坡平府院君尹弼商, 左議政盧思愼, 領敦寧尹壕, 傳曰: “領議政屢以病辭, 而予不允。今當多事之時, 若未得安心調保, 則難以治病。其以左右議政, 次次陞之, 以鄭佸爲右議政, 使之赴京可也。”是日, 承傳內官金子猿, 傳命于弼商等, 多有往復之辭, 而承旨、史官, 不得與聞。待敎權達手、檢閱姜澂啓: “凡宣命之時, 必使承旨史官與聞, 而今日則不爾。請聞其辭。”傳曰: “大行王朝議相之時, 必辟人。故今亦如是耳。”達手等啓: “國家大事, 與大臣謀議, 而史官不得與聞, 甚未便。且大行王議相之日, 雖使他人不得聞之, 而史官則在左右, 俱聞其始末。”傳曰: “今領議政、右議政, 皆病未得赴京。 前日, 書筵見鄭佸, 可作相者。今欲遞領議政, 而以佸爲右議政。”
【태백산사고본】 1책 4권 6장 B면 【영인본】 12책 656면
o 연산 7권, 1년(1495) 7월 1일(壬午) 정광국・기저 등이 불교의 폐해를 고하며 불경 박는 일을 파하기를 청하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정광국鄭光國・기저奇褚와 대교待敎 권달수權達手・신징神澄과 검열檢閱 강덕유姜德裕・강징姜徵・고세창高世昌・조치우曺致虞 등이 상소하기를,
“불경 박아내는 일을 듣자옵고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능히 선열先烈을 계승하시니, 중외中外 신민이 지극한 정치가 베풀어지기를 상상하고 바라는데, 맨 먼저 이단異端의 서적을 박아내어 유신維新의 정화政化를 상하려 하시니, 신 등이 욕되이 시종侍從의 열에 있으면서 전하의 옳지 않은 처사를 보고서 끝내 침묵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저 불씨佛氏의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설邪說은 비록 불에 태워서 영원히 없애지는 못할 망정 어찌 공장工匠을 모아 날로 천 권씩을 박아내서 이 세상에 해독을 끼치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근일에 경악經幄의 신하들이 상차하여 논계하였으나, 전하께서 분부하시기를 ‘이는 자전慈殿의 명령이다.’ 하시니, 신들이 의혹스럽습니다. 전하께서 모르시는 일인데, 어떻게 명령이 국중에 행해질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업을 받아 일국 신인神人의 주인이 되셨으니, 종묘 사직을 중히 여겨 대의로 결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자전慈殿의 명령이 계실지라도 어찌 다 구차스러이 순종만 하시고 만세의 해됨을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성종 대왕께서 금승禁僧의 법에 있어서도 양전兩殿께서 역시 불가하다 하셨는데, 성종 대왕께서 기미를 살펴 간하기를 되풀이하여 양전의 뜻을 돌리심으로써 성덕聖德이 더욱 빛났으니, 이제 자지慈旨가 이와 같다 할지라도 전하께서 만약 공경과 효도를 다하시어 의리로써 간하시고, 부모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효도가 아니라 생각하신다면, 대비께서 어찌 듣지 않으시겠으며, 전하의 덕도 어찌 선왕을 빛내지 않으리까. 또 고정지藁精紙를 궐내로 들이라는 명령이 마침 불경 박아내는 시기에 내려지니, 신들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교서관校書館에 간직한 종이는 선왕께서 경적經籍을 박아 반포하여 문교文敎를 융성하게 하려던 것인데, 이제 만약 이단異端의 서적을 박아내는 데에 이용하시면 신들은 후세에까지 이것으로써 전하를 논란할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불공을 드려 이미 재齋 지낸 일이 있었는데, 이제 또 재력을 소비하여 널리 그 서적을 박아내신다면 누구인들 전하가 불씨佛氏의 사설을 숭신崇信하지 않는다고 이르리까. 장차 이단이 날로 성해져서 마지막에는 막지 못할 형세가 될까 염려이오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을 힘써 따르시어 빨리 불경 박아내는 일을 파하소서. 전하의 총명과 성지聖智가 태양이 한창 솟아오르는 것 같은데, 한 번 덕에 누를 끼침이 있어 역사에 쓰이게 되면 신들은 지극히 원통하고 애석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대간과 예문관藝文館에 전교하기를,
“탕로의 일은 듣지 못하겠고, 불경 박아내는 일에 있어서도 경들은, ‘기미를 살펴 간해서 그만 두게 하라.’ 하지만, 대비전의 하시는 일을 어떻게 간해서 그만 두게 할 수 있겠느냐. 만약 간해서 그만 두게 한다면 대비의 마음이 반드시 불안하실 것이다.”
하였다.
○藝文館奉敎鄭光國ㆍ奇褚、待敎權達手ㆍ申澄、檢閱姜德裕ㆍ姜徵ㆍ高世昌ㆍ曺致虞上疏曰:伏聞印經之事, 不勝駭愕。殿下新服厥命, 克紹先烈。中外臣民, 想望至治, 而首印異端之書, 以傷惟新之化。臣等忝在〔侍〕從之列, 見殿下非義之擧, 難以終默。佛氏亂眞之說, 雖不能付之炎火, 永絶根株, 豈可以鳩集工匠, 日印千卷, 以貽害於斯世? 近日, 經幄之臣, 上箚論啓, 殿下敎之曰: ‘是慈旨也。’ 臣等竊惑焉。安有殿下所不知, 而命令行於國中乎? 殿下受祖宗艱大之業, 爲一國神人之主, 當以宗社爲重, 大義斷之耳。雖有慈旨, 豈皆苟徇而不顧萬世之害耶? 其在成宗大王朝禁僧之法, 兩殿亦以爲不可, 而成宗大王反復幾諫, 以回兩殿之旨, 聖德益以光大。今慈旨雖或如是, 殿下若起敬起孝, 以義開諫, 不以從親之令爲孝, 則大妃豈不念聽, 而殿下之德, 亦豈不有光於先王乎? 且藁精紙入內之命, 適當印經之時, 臣等不得無疑焉。校書所藏之紙, 先王所以印頒經籍, 以隆文敎, 而今若移用於異端之書, 則臣等恐萬世之下, 有以是議殿下也。殿下嗣位之初, 飯僧、供佛, 旣有設齋之擧; 今又糜費財力, 廣(引)〔印〕其書, 孰謂殿下, 不崇信佛氏之說也? 將恐異端日熾, 而末流不可復塞矣。伏願殿下勉從臣等之言, 亟罷印經之役, 殿下聰明聖智, 如日方昇, 而一有累德, 筆之於書, 臣等不勝痛惜之至。傳于臺諫、藝文館曰: “湯老事, 不聽。印經事, 卿等欲予幾諫而止之, 大妃殿所爲, 何以諫止之乎? 若諫止, 則大妃之心, 必不安矣。”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1장 B면 【영인본】 13책 1면
o 연산 7권, 1년(1495) 7월 17일(戊戌)예문관 봉교 기저 등이 삼공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노사신을 처단하기를 상소하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기저奇褚와 권달수權達手・대교待敎 신징申澄과 강덕유姜德裕・검열檢閱 강징姜徵과 고세창高世昌과 조치우曺致虞 등이 상소하기를,
“엎드려 아뢰옵니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사람의 한 몸과 같아서, 임금은 우두머리라면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은 팔・다리・가슴・등이요, 대간・시종은 귀와 눈이요, 내외 여러 유사有司는 근기筋肌・지절支節・혈맥인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맥박 하나만 좋지 않으면 병이 되고, 임금의 나라가 관리 하나만 잘못 등용하면 나라가 병드는데, 하물며 삼공三公임에리까. 삼공이란 만기萬機를 돕고 백관들을 거느려서, 한 나라의 우러러 바라보는 바요 모든 관원의 사표가 되는 것인데, 불행히 음흉하고 간사한 소인이 그 지위에 앉게 되면 백관百官이 해체되는 동시에 국사의 쇠란衰亂이 따를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주상 전하께서 대위大位를 계승하여 참신한 뜻으로 나라 다스리기를 계획하여, 백관과 여러 유사가 각기 자기 직책에 충실한데, 여러 대의 조정을 섬긴 간신이 오히려 수상首相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면, 마치 사람의 가슴과 등이 병을 받으면 근기筋肌와 지절支節이 이에 따라서 해체되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의 망함을 당장에 볼 수 있습니다. 영의정領議政 노사신盧思愼은 본시 하나의 음험하고 간사한 소인으로 4대의 조정을 내리 섬겨 국가의 대신이 되었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시게 되매 권세를 농간해서 제 마음대로 휘두를 계획을 하여 조종祖宗 만세의 기업基業을 그르치고자 하니, 이는 종묘 사직의 죄인이므로, 무릇 관에 있는 자라면 누구나 다 논할 수 있는데, 어찌 자기 직책을 벗어남을 혐의로 삼아서 되겠습니까. 옛날 이임보李林甫가 임금의 이목을 가리고 권세를 독차지하려고 장마仗馬를 지적하면서 여러 간관을 공갈하였지만, 일찍이 조정에 분명히 말하기를 사신思愼처럼 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오히려 거리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족히 당唐나라의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 사신은 정원政院에서 승지承旨가 좌우에 있고 사관史官이 앞에 있는데도 곧 나라 망칠 말로써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리는 기색이 없이 조정의 좌상에 드러내 말하였으니, 이는 조정을 업신여기고 사관도 업신여긴 것이므로 그 화가 임보林甫의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릇 소인이 그 임금에게 영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술책으로써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신이 일찍이 불경佛經을 해석하여 부처에게 아부해서 다행히 광묘光廟의 지우知遇를 입게 되었고,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재齋를 지내는 일을 찬성하였는데 전하께서 따르셨으니, 이는 이단異端의 술법으로써 전하를 영합한 것이며, 시종侍從의 간언한 말을 듣지 마시라고 권하였는데 전하께서 따르셨으니, 이는 가리우는 술책으로써 전하를 영합한 것입니다. 사신이 이미 이 두 가지 술책으로써 전하에게 시험하였는데, 영합하였으므로 자기 딴은 뜻을 얻은 양 묘당廟堂의 위에서 의기양양해 하는데, 홀로 대간이 자기의 일을 문득 논하였으므로 해치려고 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상교上敎를 받고서 위의 의사에 영합하여 대답하기를 ‘지당하십니다.’ 하고, ‘기뻐서 치하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또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술법으로써 전하를 영합한 것이므로 그 화가 어찌 두렵지 않습니까.
신들이 또 듣자오니, 사신이 대간으로부터 자기를 국문하기를 청하는 것을 보고는 감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나를 국문하겠느냐? 국문을 한다면 나로서도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사신이 이미 나라 망칠 말로써 전하께 아유하였는데, 다시 또 무슨 말을 꾸며 대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시종의 논란을 들었다면 마땅히 형구 앞에 엎드려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터인데, 도리어 잘못을 꾸며대며 고칠 줄을 모르고, 거짓을 굳혀서 부끄러워함이 없으며, 나도 할 말이 있다 하였으니, 신하로서 불경 무례함이 이보다 클 수 없는데, 도리어 간쟁諫諍하는 선비를 무례 불경하다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총명 성지聰明聖智가 다른 임금보다 뛰어나시고, 또 대간관 시종이 조석으로 논쟁하고 있으니, 어찌 사신의 음사와 간흉을 모르시겠습니까만, 다만 대신이기 때문에 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혹시 어쩔지 모른다면 오히려 희망이라도 있거니와, 이미 그 간사함을 알고도 제거하지 못한다면, 악惡을 알아보는 것만으로 귀한 것은 아니다.’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미 사신의 간사함을 알고 계시니, 빨리 법에 처치하여 조정에 보여 주소서. 처단해야 할 일을 처단하지 않으시면 마침내 사신에게 그르침을 받게 될까 두렵습니다. 예로부터 명왕明王 명후明后라 칭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능히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는데 있으며, 임금의 직책도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군자와 소인은 하나가 자라면 하나는 사그러지는 관계이므로 함께 처하고서는 다투지 않는 일이 없는데, 다투게 되면 군자는 이기지 못하고 소인이 항상 이기는 것입니다. 지금 대간과 시종이 여러 달을 두고 궐문 앞에 엎드려 있어도 아직 윤허하심을 입지 못하오니, 어찌 직을 사퇴하고 물러나는 것이 편안하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만, 선왕께서 발탁하여 전하에게 물려주신 것이기에 위는 선왕의 남다른 은혜를 잊지 못하고, 또 전하를 도울 자가 없음을 차마 볼 수 없어 분을 참고 반열에 나아가 전하께서 깨달으심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비태否泰 소장消長의 도를 관찰하고 국가 안위의 기틀을 유념하시어 힘써 공론에 따르시고 의심 마시어 간인을 버리시면 보다 다행한 일은 없습니다. 신들이 모두 보잘것없는 자격으로 사국史局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전대의 사적史籍을 살펴보니, 그 사이에는 군자와 소인이 많지 않은 바 아니며, 소인으로 임금을 우롱하는 그 술법도 역시 많았지만, 사신처럼 기탄 없는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더욱 통분히 여기는 까닭이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부디 유념해 주소서.”
하였다.
○藝文館奉敎奇褚ㆍ權達手、待敎申澄ㆍ姜德裕、撿閱姜徵ㆍ高世昌ㆍ曺致虞上疏曰:伏以君臣之道, 猶人之一體。君者元首也, 三公、六卿股肱、心膂也, 臺諫、侍從耳目也, 內外群有司筋肌、支節、血脈也。人之體一脈不仁, 則爲疾矣, 君之國一官非人, 則國病矣, 況三公乎? 三公輔贊萬機、摠百官, 爲一國之所觀望; 群有司之所師表也。不幸, 陰邪小人冒居其位, 則百官解體, 而衰亂隨之矣, 可不懼哉? 恭惟主上殿下嗣大曆服, 銳意圖治, 百官群有司各得其職, 而累朝奸臣, 猶據首相之位, 如人之心膂受病, 而筋肌、支節從此而解矣, 其人之亡, 可立待也。領議政盧思愼本一陰險憸邪之人, 歷事四朝, 爲國大臣。當殿下正始之日, 爲弄權、專擅之計, 欲以誤祖宗萬世之業, 此宗社之罪人也。在官者皆得而論之, 豈可以出位爲嫌哉? 昔李林甫欲蔽主、擅權, 指仗馬以恐喝諸諫官, 亦未嘗明言於朝如思愼也。是猶有所忌憚也, 然猶足以亂唐之天下。今思愼在政院, 承旨在左右, 史官在前, 而乃以亡國之說, 曾無所畏忌, 顯言於朝廷之上, 是不有朝廷也, 不有史官也, 其禍不止於林甫也。凡小人欲中其君, 必先以其術試之。思愼嘗解經佞佛, 幸遇光廟之知。逮我殿下卽位之初, 贊設齋之事, 而殿下從之, 是以異端之術, 中殿下也; 勸毋答侍從之諫, 而殿下從之, 是以壅蔽之術, 中殿下也。思愼旣以二術, 試之於殿下而中之, 自以爲志行、意得, 揚揚於廟堂之上, 而獨有臺諫輒論己事, 故陰欲傷之者久矣。會承上敎, 逢迎以對曰: “允當。”曰: “喜賀不暇。”是又欲以拒諫之術, 中殿下也, 其禍豈不懼哉? 臣等又聞, 思愼見臺諫請鞫, 乃敢謂人曰: “何以鞫我? 鞫則我亦有辭。” 思愼旣以亡國之說, 獻諛於殿下矣, 未知復有何辭, 以文之也。聞臺諫、侍從之論, 當伏鑕待罪之不暇, 乃反遂非不悛, 堅僞無恥曰: “我亦有辭。”人臣之無禮不敬, 莫大於此, 而顧以諫諍之士爲無禮不敬, 何哉? 殿下聰明聖智, 高出百王, 而又有臺諫、侍從論執於朝夕, 豈不知思愼之兇邪陰險哉? 第以大臣而優之耳, 然古人有言曰: “未之或知者, 猶有所覬也。旣知其奸, 而不能去, 則無貴於知惡。”伏願殿下, 旣知思愼之奸, 則速置於法, 以謝朝廷。當斷而不斷, 則恐終爲思愼之所誤也。自古稱明王、明后者, 無他, 能辨別君子、小人, 而人君之職, 亦不過於此。君子、小人相爲消長, 未有共處而不爭。爭之則君子常不勝, 而小人常勝。今臺諫、侍從累月伏閤, 未蒙兪允, 豈不知奉身而退之爲安哉? 但以先王所簡選, 以遺殿下者也, 上不忘先王之異恩, 又不忍殿下之無助, 含憤就列, 冀殿下之見悟。伏願觀否泰消長之道, 念國家安危之機, 勉從公論, 去邪勿疑, 不勝幸甚。臣等俱以無狀, 待罪史局, 觀前代史籍, 其間君子、小人不爲不多, 而小人之愚弄君上者, 其術亦爲多矣, 未有如思愼之無忌憚者也。此臣等尤所痛憤者也, 伏惟 殿下留心焉。【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6장 A면 【영인본】 13책 13면
o 연산 7권, 1년(1495) 7월 18일(己亥) 예문관 봉교 기저 등이 노사신의 간사함을 밝히고 죄를 내리기를 바라다
예문관 봉교藝文官奉敎 기저奇褚와 권달수權達手·대교待敎 신징申澄과 강덕유姜德裕·검열檢閱 강징姜徵과 고세창高世昌과 조치우曺致虞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듣자오니,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일으킬 수도 있고, 한 마디 말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나라는 한 사람으로써 흥하기도 하고, 한 사람으로써 망하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국가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어질고 간사함과 한 마디 말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 달렸으니, 어찌 깊이 두렵지 아니하오리까. 이는 만세를 두고 임금으로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노사신盧思愼은 심술이 간사하고 학술이 바르지 못하여, 일찍이 불경佛經을 읽어 세묘世廟에게 벼슬을 구하고 심지어 석공釋孔이란 말까지 써서, 우리 유림의 타매唾罵를 받았으며, 성종께서 모든 인재를 등용하시던 때에는 평소의 간사한 행동을 모조리 숨기고 겉으로 진솔眞率함을 내보이고, 의논도 간혹 바르게 나왔으니, 이는 다 안녹산安祿山이 치직癡直한 척하고, 왕안석王安石이 소박함을 내보이는 수단으로서 임금을 속여 총애를 굳히는 술책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있어서는 그가 선왕의 중한 부탁을 받았으니, 평일에 성종을 섬기던 도로써 전하를 섬겨야 가한데, 성종이 승하昇遐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마음을 모두 바꾸어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권세를 독차지하려는 술책을 못할 짓 없이 발휘한 것이니, 신들은 이 한 사람이 족히 나라를 망칠 만하다고 여깁니다.
국가가 대간을 설치하여, 무릇 사직의 휴척休戚과 민생의 이해를 그 곳에 집중시켜 그들로 하여금 전부 말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그 책임이 중한 것입니다. 간관諫官이 할 말을 다하게 되면 다스려지고, 할 말을 다 못하게 되면 어지러워지는 것은 떳떳한 이치입니다. 이제 천안天顔에 범접하여 대궐 뜰에서 논쟁을 벌이면, 숨김 없이 곧은 말을 하여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사신은 도리어 이기기에만 힘쓴다 하고, 간관의 목을 매어 옥에 가두어 대각臺閣이 전부 비게 되니, 온 나라가 놀라워 하는데, 사신은 도리어 기뻐서 치하한다 하며, 영합하고 찬성하되 오히려 부족될까 걱정하니, 비록 저 진秦나라 이사李斯의 자수恣睢를 권하고 간쟁을 끊어버리라는 말과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사람들의 말은 걱정할 것(諫諍)이 못된다.’는 말도 반드시 이처럼 참혹하지 못할 것이므로 신들은 이 한 사람이 족히 나라를 망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대간·시종이 사신의 말을 듣고서 서로 놀라며 나라 망칠 말이라 하옵는데, 전하께서는 염두에 두지 않으시니, 웬일입니까. 만약 삼사三思를 하시어 자세히 풀이해 보시면, 어찌 이 말이 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만약 아시면서도 버리지 않으신다면, 이는 악惡한 줄을 알고도 능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 악한 자를 미워하는 성의가 지극하지 못한 것이며, 만약 몰라서 버리지 못하신다면, 전하께서 이미 사신의 술책에 빠지신 것이 아닙니까.
사신이 스스로 생각할 적에 전하께서 명성明聖하시고 조정에는 바른 말하는 선비가 많고, 자신은 또 이미 늙어서 그 간사한 술책을 부리게 되지 못할 것이 걱정되므로, 전하께 퍅간愎諫한다고 교사하여 대간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한 뒤에 그 간흉을 함부로 내부리려는 것이니, 그 음험하고 참독하여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을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면, 선왕의 업을 계승하여 능히 장구한 치안을 도모하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어찌 하나의 사신을 아끼시고 공론의 소재를 따르지 아니하십니까? 사신을 아깝게 여기실 줄만 아시고 유독 선왕의 업을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전하의 오늘날 첫 정사는 바로 국가 안위安危의 기틀이요, 정사正邪가 사라지고 자라나는 즈음이오니, 비록 대신大臣이 주공周公·소공召公 같더라도, 나라를 위하여 장구한 계획을 하자면, 심려를 다하여 깨우쳐 이끌되 오히려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능히 책임을 감당해 내지 못할까 근심되는 것인데, 하물며 사신 같은 간흉이 수상首相의 지위을 차지하여 위로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아래로 말하는 자의 입을 막음에리까. 바라옵건대, 쾌히 그 죄를 다스리어 조정에 함께 서지 못하게 하여 주시면, 종묘 사직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듣지 않으매, 대간이 글을 올려 사직하니, 복직을 명하였다.
○藝文館奉敎奇褚ㆍ權達手、待敎申澄ㆍ姜德裕、檢閱姜澂ㆍ高世昌ㆍ曺致虞上疏曰:臣等聞: “一言可以興邦, 一言可以喪邦。”又曰: “國以一人而興; 亦以一人而亡。”夫國之興喪, 係於一人之賢邪, 一言之得失, 豈不深可畏哉? 此萬世人主之所當戒也。思愼心術憸邪, 學術不正。嘗讀佛經, 干進世廟, 至有釋、孔之言, 坐受吾黨之(垂)〔唾〕罵。至於成宗駕馭之時, 則盡匿平生之奸, 外示眞率, 謨議或出於正。此皆祿山之若癡直, 安石之示朴野, 罔君固寵之術也。當殿下卽位之初, 受先王付托之重, 當以平日之事成宗者, 事殿下可也。成宗上賓未幾, 盡變其心, 其所以欲蔽主、專權之術, 無所不至。臣等以爲: “此一人足以亡人國也。”國家設臺諫, 凡社稷之休戚, 生民之利害, 萃于一官, 使言之, 其任重矣。諫官盡其言則治, 不盡其言則亂, 此理之常也。今犯顔庭諍, 直言不諱, 以盡其責, 而思愼反以爲務勝。至於係頸下吏, 一空臺閣, 擧國驚駭, 而思愼反以爲喜賀, 逢迎之、贊成之, 如恐不及。 雖李斯勸恣睢、絶諫諍之辨, 安石進人言不足恤之說, 亦未必如是之慘矣。臣等以謂: “此一人足以亡人國也。”臺諫、侍從聞思愼之言, 相與駭愕以爲: “亡國之言。” 殿下不以爲意何哉? 若留三思, 曲加紬繹, 則豈不知此言之爲害耶? 若知而不去則是知惡而不能去, 惡惡之誠未至也, 若不知而不去則殿下無乃已誤於思愼之術耶? 思愼自見殿下明聖, 朝多直言之士, 而身且已老, 恐不得售其奸, 故敎殿下以愎諫, 欲一網打盡, 然後肆其奸凶, 其陰險慘毒, 貽禍於國, 可勝言耶? 殿下不去此人, 則繼先王之業, 能長治久安, 不亦難乎? 何惜一思愼, 不從公議之所在耶? 思愼可惜, 獨不念先王之業乎? 殿下今日之初政, 乃國家安危之幾, 正邪消長之際。 雖大臣如周、召, 爲國長遠慮者, 竭心殫慮, 開導啓迪, 猶當兢兢業業, 以不克負荷爲憂, 況如思愼之奸, 得據首相, 上以蔽殿下之聰, 下以杜言者之口乎? 伏願快治其罪, 而不與同朝, 則宗社幸甚。不聽。 臺諫上狀辭職, 命復職。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28장 B면 【영인본】 13책 14면
o 연산 15권, 2년(1496) 6월 19일(甲午) 예문관 봉교 권달수 등이 폐비의 존숭 문제를 상소하다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권달수權達手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모두 못난 자질로, 직책이 사국史局을 맡아 있어, 전하께서 한 마디의 착한 말이나 한 가지의 착한 정사가 있는 것을 보면 기뻐하여 책에 기록하고, 한 마디 호령이나 한 가지 정사가 잘못 됨을 보고는 붓을 잡고 탄식하여, 차마 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군부君父의 허물을 의논하게 할 수가 없는데, 근자에 전하께서 폐비를 위하여, 이미 명령하여 신주와 사당을 세우게 하시고, 또 추숭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고자 하여 비록 선왕의 유교일지라도 또한 좇지 않으시고, 이것이 비록 전하의 망극한 애모哀慕의 정에서 나온 것이나, 사책史冊에 써서 후세에 전한다면, 신들은 천만 세 뒤에 전하의 예를 어긴 잘못을 의논하는 이가 있을까 저어합니다. 그러므로 붓을 잡고는 눈물이 흘러 지극히 슬프고 애석함을 금하지 못합니다.
상고하옵건대,《예禮》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출모出母에게 상복이 없다.’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출모는 아버지가 버려서 끊은 바이므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가 출모의 상복을 입지 못하는 것은 종사宗祀를 중히 하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어머니의 사랑을 저버릴지언정, 감히 예를 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저 예라는 것은 성인의 제정한 바로서, 천하의 대방大防입니다. 폐비가 선왕께 득죄하여 종묘와는 끊어졌으면, 전하께서 비록 골육骨肉의 은혜가 있을지라도 정으로써 예를 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장사에 빈嬪의 의식儀式으로 하여 융숭한 예를 쓰고,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어 존숭함이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장사를 예禮로써 하고 제사를 예로써 하는 것이겠습니까. 예는 본디 무너뜨릴 수 없는데, 하물며 선왕의 유교임에리까. ‘윤씨의 묘墓라 칭하고 속절俗節에 제사지내기를 정하여 비록 내 백세百歲 뒤에라도 변경하지 말아서 아비의 뜻을 준수하라.’ 하신 유교는 바로 오늘날을 위하여 변경하지 못할 제도를 미리 정한 것인데, 전하께서 바야흐로 상중에 계시어 갱장羹墻으로 애모哀慕하실 때에 문득 꺼림 없이 유교를 어기시니, 이것이 어찌 3년 동안 아버지의 일을 변경하지 않는 효도이겠습니까. 대간과 시종이 글을 올려 논계하면, 일체 거절하시기를, ‘성종께 아첨하는 사람들이 말리고자 하는 것이니, 들을 수 없다. 비록 유교가 있을지라도 혈육의 은혜는 잊을 수 없다.’ 하시니, 성종께서 승하하신 지 얼마 안 되어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데, 전하께서 어찌 차마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릇 신하들이 아첨을 하여 지위를 오래 보전하려 한다면, 누가 전하의 뜻을 거슬리고 하늘에 계신 성종의 영靈에 아첨하려고 힘쓰겠습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모친에게 혈육血肉의 은혜를 중하게 여겨 정성껏 섬기면서, 그 부친에게는 비록 명령함이 있어도 모두 듣지 않는 자가 있다면, 전하께서는 그 사람을 효자라 하시겠습니까? 반드시 효자가 아니라 하실 것입니다.
《예禮》에 이르기를,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쫓겨난 출모라면 계모繼母의 당黨을 위해 복을 입는다.’ 하였는데, 주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자기의 어머니가 내쫓김을 당한 뒤에, 아버지가 재취再娶하였을 때에는 자기의 어머니와는 의義가 끊어졌으므로 계모의 당堂을 위하여 복을 입는다.’하였습니다. 선왕이 예를 제정한 것이 이와 같으니, 출모는 비록 골육의 은혜가 있었더라도 아버지에게 의절義絶이 되었으면, 계모를 어머니로 삼는 것이 예禮입니다. 대비大妃께서 전하에게 비록 낳아 기르신 은혜는 없으나, 위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성종의 배필이 되었으니, 전하께서 어머니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신들이 어서御書를 보오니, ‘다른 사람의 살을 베어서 내 몸을 붙인다면 그 빛깔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사私로써 의義를 멸하는 것이요, 예로써 마음을 억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 예에 어긋나는 말씀을 가벼이 하시어, 일국의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놀라게 하십니까. 만약 대비大妃께 들리면 그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대간이란 공론이 있는 바이라, 말이 임금에게 미치면 천자가 낯빛을 바로 하고, 말이 묘당廟堂에 미치면 삼공三公이 자리를 피하며, 임금이 만홀히 하지 못하고, 대신이 대항하지 못하니, 그 직책이 중한 것입니다. 근일의 일로써 보건대, 훈구 대신勳舊大臣으로서 노사신과 같은 무리가 임금의 뜻에 맞추어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전하를 예가 아니요 의義가 아닌 곳으로 인도하는데, 대간이 홀로 말하니, 이것이 바로 공론이 있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심하게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또 간관의 바른말을 하인들이 외치는 구호로 삼아서 내정內庭과 외구外衢에서 호창呼唱하게 하시니, 전하께서 간관의 말을 바른 의논이라고 하십니까? 바른 의논을 하지 못한다고 기롱하십니까? 만약 바른 의논이라 한다면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고 만약 바른 의논을 하지 못한다고 기롱하신다면 배척하여 쫓는 것이 옳은데, 어찌 그것을 희롱하는 말로 삼아서 중외中外로 하여금 전하께서 대간을 존경하는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까. 옛사람이 말하되, ‘임금의 하는 일은 반드시 사책史冊에 쓰는 것인데, 쓴 것이 법되지 못하면, 후사後嗣가 무엇을 보고 본받으랴.’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왕의 유교를 어기시고 비례非禮로써 폐비를 높이시고, 모후母后를 성심으로 섬기지 못하시고, 대간을 대우하기를 존경하지 않으시어 한꺼번에 4가지 실례를 하셨으니, 신들이 장차 어떻게 사책에 써서 후사가 본받게 하겠습니까.”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藝文館奉敎權達手等上疏曰:臣等俱以無狀, 職掌史局, 見殿下有一善言、一善政, 則歡然有喜, 而筆之於書; 一號令、一政事之失, 則操筆慨然, 不忍使後世之人得以議君父之失。近者殿下爲廢妃, 旣命立主廟, 又欲擧追崇之典, 雖先王遺敎, 亦且不從, 是雖出於殿下哀慕罔極之情, 然筆之於史, 傳之於後, 則臣等恐千萬世之下, 有以議殿下悖禮之失。故秉筆涕泗, 不勝痛惜之至。按, 《禮》曰: “爲父後者爲出母無服。”釋之者曰: “出母父所棄絶, 爲父後者, 不喪出母, 所以重宗祀也。”故寧奪母慈, 而不敢廢禮。夫禮者, 聖人所制, 而天下之大防也。廢妃得罪於先王, 與廟絶則殿下雖有骨肉之恩, 不可以情而悖禮也。今葬用嬪儀, 曲加隆禮, 廟祀尊崇, 無所不至, 則是豈死葬之以禮, 祭之以禮乎? 禮固不可壞, 況先王遺敎乎? 其曰: “名以尹氏之墓, 定以俗節之祭, 雖予百年之後, 其勿改易, 以遵父志。”之敎, 正爲今日之事, 預定不易之制, 而殿下方宅憂哀慕羹墻之日, 遽違遺敎, 無所忌憚, 此豈三年無改之孝乎? 臺諫、侍從封章論啓, 則一切拒之曰: “阿諛成廟之人, 所欲止之, 不可聽也。雖有遺敎, 血氣之恩不可忘也。”賓天未幾, 聖敎在耳, 殿下何忍出此言也? 凡臣子獻諛而固寵, 則其孰肯忤殿下之旨, 而務悅成宗在天之靈乎? 設有人焉, 於母則以血氣之恩爲重, 而事之以誠; 於父則雖有所命, 率皆不從。 殿下謂其人爲孝乎哉? 必謂其非孝矣。《禮》曰: “出母則爲繼母之(倘)〔黨〕服。”釋之者曰: “出母爲己母被出, 而父再娶, 己母義絶。故加服繼母之(倘)〔黨〕。”其先王制禮如此。出母雖有骨肉之恩, 義絶於父, 則以繼母爲之母禮也。大妃於殿下, 雖無誕育之恩, 上以承宗廟, 下以配成宗, 殿下當以母事之矣。臣等伏覩, 御書曰: “割他人之肉, 而付之我體, 則其色豈有同乎?” 是殿下以私滅義, 而不以禮制心也。何輕出悖禮之言, 使一國臣民有所驚駭乎? 若聞於大妃, 則其心爲如何哉? 臺諫者公論之所在, 言及乘輿, 則天子改容; 言及廊廟, 則三公避位, 人主不得以慢之, 大臣不得以抗之, 蓋其責之重也。以近日之事觀之, 勳舊大臣如思愼之輩, 莫不迎合上意, 唱爲邪說, 以導殿下於非禮無義之地, 而臺諫獨言之, 此正公論之所在也。殿下非徒拒之甚確, 又以諫官正論爲警巡之語, 使行呼唱於內庭外衢之間, 臣等未知殿下以諫官爲正論而言耶, 譏其曠不能正論而言耶? 若以爲正論, 則言而聽之可也, 若譏其不能正論, 則斥而去之可也, 豈可爲戲慢之語, 使中外知殿下無尊敬之意? 古人云: “君擧必書, 書而不法, 後嗣何觀?” 今殿下違先王遺敎, 尊廢妃非禮, 事母后有二, 待諫士不敬, 一擧而四失禮焉, 臣等將何以書史, 以爲後觀乎?不聽。【태백산사고본】 4책 15권 23장 B면 【영인본】 13책 118면
o 연산 31권, 4년(1498) 10월 7일(己巳) 김심·이곤·이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심金諶을 공조 참판 겸 동지성균관사工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로, 이곤李坤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이관李寬을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권달수權達手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以金諶爲工曹參判兼同知成均館事, 李坤司諫院獻納, 李寬弘文館副校理, 權達手修撰。【태백산사고본】 9책 31권 10장 A면 【영인본】 13책 332면
o 연산 33권, 5년(1499) 4월 22일(辛亥) 이세인·권달수·이희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세인李世仁을 사헌부 장령으로, 권달수權達手를 홍문관 부교리로, 이희순李希舜을 수찬으로, 최숙생崔淑生을 부수찬으로, 홍언충洪彦忠을 박사로, 박은朴誾을 저작으로, 이자화李自華를 정자로 임명하였다.
○以李世仁爲司憲府掌令, 權達手弘文館副校理, 李希舜修撰, 崔淑生副修撰, 洪彦忠博士, 朴誾著作, 李自華正字。
【태백산사고본】 9책 33권 4장 B면 【영인본】 13책 357면
o 연산 48권, 9년(1503) 1월 16일(甲申)경연에 나오다
경연에 납시었다. 강하는데 ‘이필李泌이 사직辭職하기를 요청했으나 황제가 들어주지 않으므로, 이필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지금 신의 자리에 드셨는데도 오히려 감히 청할 수 없거늘, 하물며 다른 날 향안香案 앞에서이겠습니까? 폐하께서 지난날에 신을 대우하기를 그와 같이 하셨지마는, 신은 모든 일에 있어서 오히려 거리낌 없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라고 했다.’는 대목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권달수權達手가 아뢰기를,
“숙종肅宗은 이필의 집에 나아가서 술을 마셨고, 자리를 같이 하여 누웠으니, 그 군신간에 서로 만남이 천고에 드문 일로서, 생각이 있으면 꼭 아뢰어 어려움은 없을 터인데도, 이내 말하기를 ‘오히려 거리낌없이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말씀드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군주는 마땅히 너그럽게 포용한 뒤에라야 사기士氣가 펴져서 그 말을 능히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御經筵。講至李泌求去, 帝不聽。泌曰: “陛下今就臣榻, 猶不得請, 況異日香案之前乎? 陛下曏日, 待臣如此, 臣於事, 猶有不敢言者。”侍讀官權達手曰: “肅宗就泌飮酒, 同榻而臥, 其君臣際會, 千古罕有。有懷必啓, 宜無難也, 而乃曰: ‘猶有不敢言者。’ 臣之進言, 其難如此。人君當曲賜優容然後, 士氣得舒, 而能盡其言。”
【태백산사고본】 13책 48권 6장 A면 【영인본】 13책 539면
o 연산 48권, 9년(1503) 2월 19일(丙辰)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나오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통감강목》을 강하는데, 당唐나라 헌종憲宗 본기本紀에 ‘상이 묻기를「간관諫官이 헐뜯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이 없으니, 짐朕이 그 가운데 심한 사람 한둘을 적발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려고 하니 어떻겠는가?」하니, 이강李絳이 답하기를「이것은 아마 폐하의 뜻은 아닐 것이며, 반드시 간사한 신하가 폐하의 총명을 가로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이강의 대답은 비록 언로가 열기를 주장한 것이지만, 과연 사실이 없다면 죄를 다스리는 것이 옳은데, 이강은 어찌 이처럼 말했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권달수權達手가 아뢰기를,
“헌종 때 일은 신이 미처 상고하지 못했으나, 대간이 어찌 감히 사실이 없는 말을 아뢰겠습니까?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진실로 너그러이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지사知事 노공필盧公弼은 아뢰기를,
“간하는 자가 비록 지나친 말을 해서 끝내 사실이 없다 해도, 처음 아뢸 때에는 스스로 사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많고 국가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적은 것이니, 사실이 없는 것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죄를 가한다면, 간하는 사람이 비록 마음에 생각한 바가 있더라도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제왕으로서 당나라 태종太宗같은 이는, 말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고,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여 말하도록 하였으니, 군주는 대간에 대하여 진실로 너그럽게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丙辰/受常參, 御經筵。講《綱目》至《唐憲宗紀》: “上問曰: ‘諫官多謗訕無事實, 朕欲摘其尤者一、二, 以警其餘, 何如?’ 李絳對曰: ‘此殆非陛下之意, 必有邪臣, 欲壅蔽陛下之聰明也。”王曰: “絳之對, 雖主於開言路, 然若果無實, 則治罪, 可矣。絳何以至此云耶?” 侍讀官權達手曰: “憲宗時事, 則臣未及考, 臺諫安敢以無實之言, 啓之乎? 雖有差誤, 固當優容。”知事盧公弼曰: “諫者雖有過越之辭, 而終歸無實, 然初啓之時, 自以爲實。人臣, 愛身者, 多; 循國者, 少。苟以爲無實爲謗訕, 而罪之, 則諫者雖有所抱, 不能盡言矣。是故, 古之帝王如唐太宗, 則以不言爲非, 和顔色, 而開導, 人主於臺諫, 固當優容。” 不答。【태백산사고본】 13책 48권 17장 A면 【영인본】 13책 544면
o 연산 52권, 10년(1504) 3월 16일(丁丑)간관들을 의금부에 가두다
승지 강징姜澂・직제학直提學 박소영朴紹榮・부응교副應敎 이행李荇・교리校理 이자화李自華・부교리 심정沈貞과 권달수權達手·수찬修撰 박광영朴光榮・부수찬 김양진金楊震과 이사균李思鈞・박사 유부柳傅・저작著作 김내문金乃文・정자正字 강홍姜弘・승지 이의손李懿孫・형조 좌랑 김언평金彦平・전 정자 김양보金良輔・전 대사간 강형姜泂・호조 참의 이과李顆・부제학 손주孫澍・전 사간 성세정成世貞・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유희저柳希渚・병조정랑 이후李堣・예조좌랑 윤원尹源・전 정언 조유형趙有亨・정언 유인귀柳仁貴를 의금부 옥에 가두게 하였다.
○命下承旨姜澂、直提學朴紹榮、副應敎李荇、校理李自華、副校理沈貞ㆍ權達手、修撰朴光榮、副修撰金楊震ㆍ李思鈞、博士柳傅、著作金乃文、正字姜弘、承旨李懿孫、刑曹佐郞金彦平、前正字金良輔、前大司諫姜泂、戶曹參議李顆、副提學孫澍、前司諫成世貞、奉常寺僉正柳希渚、兵曹正郞李堣、禮曹佐郞尹源、前正言趙有亨、正言柳仁貴于義禁府獄。【태백산사고본】 14책 52권 17장 B면 【영인본】 13책 596면
o 연산 52권, 10년(1504) 3월 18일(己卯)홍문관 관원들을 속바치게 하다
전후 홍문관원 정자正字 강홍姜洪・저작著作 김내문金乃文・박사 유부柳溥・수찬修撰 박광영朴光榮・부교리副校理 권달수權達手・교리 이자화李自華・부응교副應敎 이행李荇・승지 강징姜澂과 이의손李懿孫・전 정자 김양보金良輔・정언 유인귀柳仁貴・부수찬 이사균李思鈞・부제학 손주孫澍・호조 참의 이과李顆를 태笞 40대씩을 속바치게 하였다.
○贖前後弘文館員正字姜洪、著作金乃文、博士柳溥、修撰朴光榮、副校理權達手、校理李自華、副應敎李荇、承旨姜澂ㆍ李懿孫、前正字金良輔、正言柳仁貴、副修撰李思鈞、副提學孫澍、戶曹參議李顆笞四十。
【태백산사고본】 14책 52권 19장 B면 【영인본】 13책 597면
o 연산 52권, 10년(1504) 4월 4일(乙未) 제헌 왕후 추숭을 의논한 일로 박안성·최숙생 등을 국문케 하다
전일에, 재상·홍문관·대간臺諫 등이 제헌 왕후齊獻王后를 추숭追崇한 의논을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박안성朴安性의 의논에 ‘악은 대소가 있고 죄는 경중이 있다.’ 하였는데, 이 일은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건만 이렇게 의논하였으니, 그르다. 또 홍문관 원 최숙생崔淑生·이행李荇·이자화李自華·권달수權達手·박광영朴光榮·이사균李思鈞·김양진金楊震·유부柳傅·김내문金乃文·강홍姜洪이 역시 의논하기를 ‘추숭하는 의식은 예에 이미 자극하게 하였으니, 지금 다시 더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간 황성창黃誠昌의 의논과 같으니, 옥에 가두고 국문하라.”
하였다.
○乙未/下前日宰相、弘文館、臺諫等追崇齊獻王后議曰: “朴安性議: ‘惡有大小, 罪有輕重。’此非疑似之事也, 而以是爲議非矣。且弘文館員崔淑生、李荇、李自華、權達手、朴光榮、李思鈞、金楊震、柳傅、金乃文、姜洪亦議云: ‘追崇之典, 於禮已極, 今不可復加。’ 此與臺諫黃誠昌議同, 其下獄鞫之。”
【태백산사고본】 14책 52권 29장 A면 【영인본】 13책 602면
o 연산 52권, 10년(1504) 4월 7일(戊戌) 박안성·최숙생 등을 곤장 때리고 유배 보내다
전교하기를,
“승지 박열朴說·이계맹李繼孟은 금부에 가서 홍문관 원에게 형장 때리는 것을 감독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라. 박안성朴安性은 장형杖刑을 속받고 진잠鎭岑에 부처하고, 응교 최숙생崔淑生은 장 60을 때려 신계新溪에 부처하고, 부응교 이행李荇은 장 60을 때려 충주忠州에 부처하고, 교리 이자화李自華는 장 60을 때려 아산牙山에 부처하고, 부교리 권달수權達手는 장 60을 때려 용궁龍宮에 부처하고, 수찬修撰 박광영朴光榮은 장 60을 때려 목천木川에 부처하고, 부수찬 이사균李思鈞은 장 60을 때려 보은報恩에 부처하고, 부수찬 김양진金楊震은 장 60을 때려 예천醴泉에 부처하고, 박사 유부柳溥는 장 60을 때려 은진恩津에 부처하고, 저작著作 김내문金乃文은 장 70을 때려 청안淸安에 부처하고, 정자 강홍姜洪은 장 70을 때려 익산益山에 부처하라.”
하였다. 이때 대간臺諫이 되었다가 죄를 입은 자가 매우 많으므로 무릇 조사朝士들이 모여 이야기할 때 서로 간에 가리키며 말하기를, 아무개가 대간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 손을 저으며 ‘불상不祥 불상’이라 하였었다.
○傳曰: “承旨朴說、李繼孟其往禁府, 監杖弘文館員, 付處外方。” 朴安性贖杖, 付處鎭岑; 應敎崔淑生杖六十, 付處新溪; 副應敎李荇杖六十, 付處忠州; 校理李自華杖六十, 付處牙山; 副校理權達手杖六十, 付處龍宮; 修撰朴光榮杖六十, 付處木川; 副修撰李思鈞杖六十, 付處報恩; 副修撰金楊震杖六十, 付處醴泉; 博士柳溥杖七十, 付處恩津; 著作金乃文杖七十, 付處淸安; 正字姜洪杖七十, 付處益山。時爲臺諫而被罪者甚多, 故凡朝士會談, 相指言曰: “某當爲臺諫。” 則揮之以手曰: “不祥不祥。”
【태백산사고본】 14책 52권 29장 B면 【영인본】 13책 602면
o 연산 55권, 10년(1504) 9월 26일(癸丑)승지 권균 등이 회릉의 추봉 및 천묘에 논계한 자를 아뢰니, 속히 잡아오게 하다
승지 권균·강혼·윤순尹珣이, 회릉懷陵의 추봉 및 천묘遷墓 때에 논계한 사람을 고찰하여 아뢰기를,
“추숭하는 특전은 예에 이미 극진하게 되었으니, 다시 더할 수 없는 듯하다.’고 한 자는 최숙생崔淑生·이행李荇·이자화李自華·권달수權達手·박광영朴光榮·이사균李思鈞·김양진金楊震·유부柳溥·김내문金乃文·강홍姜洪이고, ‘그 정과 예를 참작, 추숭하여 효도하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지금 다시 더할 수 없다.’고 한 자는 황성창黃誠昌·김세필金世弼·정침鄭沈·유인귀柳仁貴·신봉로申奉盧이고, ‘사초와 대석의 설치는 비록 선왕·선후先后의 능침이라 할지라도 모두 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천묘遷墓에 배설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고 한 자는 그때 정승이며, ‘천묘하는 일로 도감까지 두는 것은 잘못이다.’고 한 자는 장령 이수공李守恭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모두 속히 잡아오라.”
하였다.
○承旨權鈞、姜渾、尹珣考追封懷陵及遷墓時論啓人以啓: “追崇之典, 於禮已極, 恐不可復加’ 者, 崔淑生、李荇、李自華、權達手、朴光榮、李思鈞、金楊震、柳溥、金乃文、姜洪也。酌其情禮, 以盡追孝之誠, 今不可復加者, 黃誠昌、金世弼、鄭沉、柳仁貴、申奉盧也。設莎臺石, 雖先王、先后陵寢, 皆未得爲之。今於遷墓排設未便者, 其時政丞也。遷墓事, 至設都監非也者, 掌令李守恭也。” 傳曰: “皆急速拿來。”
【태백산사고본】 15책 55권 26장 A면 【영인본】 13책 663면
o 연산 56권, 10년(1504) 10월 27일(甲申) 발언한 일로 홍문관 대간 등을 형신하게 하다
승지 권균權鈞이 당직청에 가서 홍문관 대간臺諫 등을 국문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홍문관에서는 권달수權達手가 먼저 발언하였는데, 권달수의 공술에 ‘이 일은 어찌 불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의사疑似하게 여겨 먼저 발언한 것이다.’ 하였고, 대간에서는 김세필金世弼이 먼저 발언하였는데, 조숙기曺淑沂의 공초에 ‘신이 권경우權景祐와 같이 가토加土하는 일을 살폈고, 또 천묘遷墓할 능소陵所를 살펴 이미 수미首尾를 알았고, 또 성상의 정이 망극함을 알았기 때문에 대사간으로 있을 때 또한 감히 아뢰지 못하다가 이세걸李世傑의 논박을 받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강홍姜洪·유부柳溥·김내문金乃文이 ‘어느 사람이 먼저 발언한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너무나 간사한 짓이니 그를 형신하라. 이수공李守恭은 사죄死罪로 가두고 형신하여 신구新舊의 정상과 사유를 분변하고, 권달수權達手는 다른 사람이 일찍이 먼저 발언하였다고 지적하였는데도 의사疑似하게 여겼다고 말을 하니, 그도 또한 형신하여 사죄로 가두라. 김세필은 그 공초에 ‘다른 관원이 의논을 주장하고 아무아무 관원이 글자를 썼다.’고 하여, 평문平問할 때 자복하지 않았으니 그도 형신하되, 만약 스스로 밝히지 아니하면 또한 죽을 죄인으로 가두라. 김양진金楊震·이행李荇·최숙생崔淑生은 임금을 능멸하고 명예를 낚았으니 또한 형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承旨權鈞往當直廳, 鞫弘文館、臺諫等還啓: “弘文館則權達手先發言, 權達手之供曰: ‘此事無奈不可乎? 以疑似間先發之。’臺諫則金世弼先發言, 曺淑沂之供曰: ‘臣與權景祐同審加土事, 又審遷墓陵所, 旣知首尾。又知上情罔極, 故大司諫時, 亦不敢啓之, 而被李世傑之論駁。’” 傳曰: “姜洪、柳溥、金乃文言: ‘不的知某人先發言。’ 甚姦詐, 其刑訊。 李守恭以死罪囚之刑訊, 新舊分辨情由。權達手則他人曾指爲先發言, 而供云: ‘問以疑辭。’ 其亦刑訊, 囚以死罪。金世弼供: ‘他官主議, 某某員下字。’ 云, 而平問不服, 其刑訊, 若未自明, 則亦死囚。金楊震、李荇、崔淑生陵君釣名, 亦不可不刑訊。”
【태백산사고본】 15책 56권 12장 B면 【영인본】 13책 670면
o 연산 56권, 10년(1504) 10월 28일(乙酉) 의금부가 강홍 등이 전일 발언한 일로 변명한 것을 아뢰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강홍姜洪·김내문·유부는 공초하기를 ‘신 등은 추숭推崇을 수의할 때에 다만 권달수가 의논을 주창한 것으로 기억하고, 신 등은 별로 다른 뜻이 없었다.’ 하고, 황성창黃誠昌·유인귀柳仁龜·신봉로申奉盧·이자화李自華·박광영朴光榮·이사균李思鈞·김양진金楊震은 공초하기를 ‘잘못하여 의계議啓한 것이다.’ 하고, 권달수는 공초하기를 ‘신이 과연 발언하였으나, 동료와 합의하여 아뢰었다.’ 하고, 김세필金世弼은 공초하기를 ‘신이 발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홍문관 회의 초안을 보고 모든 동료들이 같이 글을 고친 것이나, 다만 시일이 오래되어 어느 어느 사람이 어느 글자를 썼는지 기억할 수 없다. 하고, 이수공은 공초하기를 ‘신이 정사년 정월 천묘遷墓할 때에 아뢴 것은 신구新舊를 분변함이 아니라, 다만 천묘하는 일과 공력이 많지 아니하므로 도감都監을 둘 필요가 없다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義禁府啓: “姜洪、金乃文、柳溥供云: ‘臣等於追崇收議, 只記權達手爲首議耳, 臣等別無他情。’黃誠昌、柳仁貴、申奉盧、李自華、朴光榮、李思鈞、金楊震供云: ‘誤錯議啓。’ 權達手則供云: ‘臣果發言, 而同僚合議啓之耳。’金世弼供云: ‘非臣起議, 乃見弘文館議草, 語諸同僚, 相與變文耳。但日月〔已〕久, 不能記某某人下某字也。’李守恭供云ㆍ‘臣於丁巳正月遷墓時所啓, 非今辨新舊, 只以遷墓事功不多, 不必立都監云爾。’”
【태백산사고본】 15책 56권 13장 A면 【영인본】 13책 670면
o 연산 56권, 10년(1504) 10월 29일(丙戌)최숙생·권달수 등의 죄를 논하여 모두 중형에 처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정승과 의금부 당상을 불러 최숙생崔淑生 등의 죄를 논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다시 묻기를,
“권달수權達守 등이 임금을 능멸, 명예를 낚고도 이 하늘 밑에서 살고자 할 것인가? 또 정침鄭沈은 그 족친이니 다만 장형에 처하라.”
하였다. 정승 및 의금부 당상이 아뢰기를,
“최숙생과 황성창黃誠昌 등은, 모두 ‘망령된 생각으로 아뢰었다.’ 하는데, 그중 이수공은 독단으로 아뢰었으니 그 죄가 가장 중하고, 권달수는 수의收議하라는 명을 받아 망령된 생각으로 의계議啓하였고, 김세필은 달수의 의논에 따라 망령된 생각으로 아뢰었으며, 최숙생과 이행도 또한 김세필로 인하여 망령되게 아뢴 것이니, 어느 율을 적용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자질구레한 것들이 남에게 끌려 남이 하는 것만 보고 반드시 따라 한다. 지금 바야흐로 풍속을 고치는 때이니. 이와 같은 사람이 다 없어진 뒤라야 되리라. 정승에게 묻노라.”
하였다. 유순柳洵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다만 이 사람들은 모두 풍속을 고치기 전에 말한 것으로써, 이수공과 같이 독단하여 아뢴 것이 아니고 수의收議로 인하여 아뢴 것이니, 그 자신自新의 길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달수와 세필은 모두 마땅히 중형에 처해야 하고, 숙생과 이행은 다만 사형을 감하라. 무릇 부자 사이에도 그 마음은 각각 다르고, 형제 사이에도 뜻이 또한 같지 아니한 것인데, 어찌 남에게 끌려 ‘저 사람이 이와 같으니 내가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저가 나를 무어라 할 것인가.’ 하는가. 다만 남의 말만 듣고 군상君上의 일을 망령되이 의논하니, 이런 풍습은 마땅히 고쳐야 한다. 또 이들이 비록 수다스런 말을 하지만 어찌 한결같이 그 말을 좇아 하거나 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불가하다고 하였음은 반드시 그 정이 있는 것이니, 더 형신하라.”
하였다. 유순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이들의 소위가 이러하니 가두어 고통을 준 뒤에 형벌을 가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리하되, 도로 당직청에 가두고 금부 당상으로 하여금 숙직하게 하라.”
하였다.
○丙戌/傳曰: “其召政丞、義禁府堂上, 議崔淑生等罪。” 更問曰: “權達手等陵君釣名, 欲立於天日之下乎? 且鄭沉族親也, 只決杖。”政丞及義禁府堂上啓: “崔淑生、黃誠等皆以爲: ‘妄料(計)〔啓〕達。’其中如李守恭擅度啓之, 其罪最重。 權達手承收議之命, 妄料議啓。金世弼因達手之議, 而妄料啓之。崔淑生、李荇亦因世弼妄啓, 當照何律?” 傳曰: “猥瑣之徒, 牽制於人, 見人所爲, 而必從之。今方革風之時, 如此之人盡無, 然後可也。其問于政丞。” 柳洵等啓: “上敎當矣。但此人等皆言於革俗之前, 而非如李守恭之擅啓, 因收議而啓之, 其存自新之路, 無奈可乎?”傳曰: “達手、世弼皆當重刑, 淑生、李荇只減死。凡父子之間, 其心各異; 兄弟之間, 意亦不同。豈可牽制於人以爲, 彼則如此, 我若不然, 則彼謂我何如? 只顧人言, 而妄議君上之事, 此風固當革之。且此輩雖喋喋, 豈可一從其言, 而爲與不爲乎? 在所當爲, 而以爲不可, 必有其情, 其加刑訊。” 洵等啓: “上敎允當。此輩所爲如是, 拘囚困苦之而後, 加刑何如?” 傳曰: “可。還囚當直, 令禁府堂上直宿。” 【태백산사고본】 15책 56권 13장 A면 【영인본】 13책 670면
o 연산 56권, 10년(1504) 11월 1일(丁亥) 권달수를 의금부로 옮기게 하다
전교하기를,
“당직청에 가둔 죄인 권달수權達手 등을 의금부로 옮겨 가두라.”
하였다.
○傳曰: “當直囚人權達手等, 移囚于義禁府。”
【태백산사고본】 15책 56권 14장 A면 【영인본】 13책 671면
o 연산 56권, 10년(1504) 11월 12일(戊戌)추숭하는 일을 해서 안 된다고 한 최숙생 등을 고문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권달수權達手 등은 비록 명령을 받아 의논한 것이기는 하나, 누군들 부모가 없겠는가. 선후先后를 추숭追崇함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또 대간은 홍문관의 의논을 보고 본받았으니, 이는 심히 옳지 못하다. 먼저 발언한 자를 중한 벌에 처하려고 하는데, 중벌에도 또한 참형과 교형이 있으니, 최숙생崔淑生 등 고문해야 할 자를 고문하라.”
하였다. 영의정 유순柳洵이 아뢰기를,
“달수와 세필은 모두 중벌에 해당하나, 참형과 교형은 모두 사죄로서 그 감등을 모두 유 삼천리流三千里시킨 것은, 참형과 교형이 비록 차등은 있을지라도 죽는 것은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전일 이수공李守恭의 일이 비록 이와 같지만, 수공은 자기의 의견으로써 경연經筵에서 아뢰었기 때문에 이미 중벌을 받은 것이요, 달수는 수의收議를 인하여 말한 것인데 그 말이 또한 공손하였고, 세필은 달수의 의논을 보고 말한 것이어서 모두 수공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강홍姜洪·김양진金楊震·김내문金乃文·유부柳溥 등은 세 사람이 같이 상의하였다고 하고 누구를 적실하게 지적하지 않으므로 모두 이미 세 차례 고신拷訊하였고, 황성창黃誠昌 이하는 모두 바른 대로 말하므로 다만 한 차례 형신하였으나 모두 잘못 의논한 것이라 하고 다른 말은 없으니, 그 중에 형신 한 차례만 한 자를 더 형신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달수 이하를 모두 한 차례 더 형신하라.”
하였다.
○傳曰: “權達手等雖承命議之, 然誰無父母? 追崇先后, 在所當爲, 而謂不可爲。且臺諫見弘文館之議而效之, 此甚不可。其先發言者欲置重典, 重典亦有斬有絞。崔叔生等可拷者拷之。”領議政柳洵等啓: “達手、世弼皆當重刑, 而斬與絞俱是死罪, 其減等, 皆流三千里。(者以)斬與絞雖有差等, 而死則一也。前日李守恭之事, 雖與此同, 而守恭則自出己意, 啓於經筵, 故已被重典, 達手因收議而言, 其言亦遜, 世弼見達手之議而言之, 皆與守恭有間。且姜洪、金楊震、金乃文、柳溥等言三人共議, 不的指爲某也, 故皆已三次拷訊, 黃誠昌以下則皆直告, 故只刑訊一次。然皆云誤議而無他辭, 其中刑訊一次者加刑何如?” 傳曰: “達手以下皆加一次。”
【태백산사고본】 15책 56권 17장 B면 【영인본】 13책 672면
o 연산 56권, 10년(1504) 12월 2일(戊午) 추숭하는 절차로 죄를 얻은 권달수 등을 죄를 고쳐 즉시 중형을 집행하게 하다
권달수權達手의 조율안照律案을 내리며 이르기를,
“추숭追崇하는 절차가 예에 이미 극진하게 되었으니 다시 더할 것이 없다.’고 한 이와 같은 의계議啓는 진실로 잘못이다. 대체로 사람이 비록 적선謫仙의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마음이 진실로 불초하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조율을 고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조율을 고쳐 권달수權達手·김세필金世弼은 죄를 참형에 해당시키고, 최숙생崔淑生·이행李荇은 장 1백에 처하여 먼 외방에 종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각각 장 1백 유 삼천리流三千里의 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즉시 형을 집행하되 백관을 참관시키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달수와 세필은 비록 죄가 같다 할지라도 달수가 수범이니, 세필은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외딴 섬에 종으로 삼도록 하고, 또 세필 등 13인의 홍패紅牌를 추탈하라.”
하였다.
달수는 함창咸昌 사람으로 글을 잘 지었는데 꾸미기를 일삼지 아니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선한 일을 즐겨 하며, 기절氣節이 탄탕坦蕩하여 큰 뜻이 있었다. 장차 죽음에 당하여 같이 수감된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술을 가져다가 나의 길을 전송해 주어야 하네.’ 하였는데, 말이나 모양이 평시와 같았었다. 그 아내 정씨鄭氏도 절조가 있어 장례를 마치자 먹지 않고 죽었다. 이때 죄없이 죽은 자를, 더러 그 처자를 종 삼으므로 분주하게 역사에 나가지 않는 자가 없어 절의를 스스로 지킨 사람이 드물었는데, 홀로 정씨와 대사간 강형姜詗의 처 김씨만의〈절의를〉지키다 죽었다.
○下權達手照律案曰: “‘追崇之典, 於禮已極, 無以復加。’如此議啓, 固爲非也。夫人雖有謫仙之才, 而心苟不肖, 則將焉用之? 其令改照律。”義禁府改照權達手、金世弼罪當斬, 崔淑生、李荇決杖一百, 遠方爲奴, 餘各決杖一百, 流三千里, 傳曰: “卽令行刑, 百官序立。” 又傳曰: “達手、世弼雖同罪, 而達手爲首, 世弼特減死, 絶島爲奴。且世弼等十三人, 追奪紅牌。” 達手咸昌人。善屬文, 不事修飾。好古樂善, 氣節坦蕩有大志。將死, 語同囚諸友曰: “君等宜取酒餞我歸。” 言貌如平時。妻鄭氏有節操, 收葬畢, 不食而死。時無罪誅戮者, 或孥其妻子, 莫不奔走就役, 鮮有以節義自持, 獨鄭氏與大司諫姜詗妻金氏死之。【태백산사고본】 15책 56권 24장 B면【영인본】 13책 676면
o 연산 63권, 12년(1506) 9월 2일(己卯)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금상今上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왕을 폐廢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겼다.
처음에 왕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尹氏가 성질이 모질고 질투하였다. 정희貞喜・소혜昭惠・안순安順 세 왕후가, 윤씨의 부도不道한 짓이 많음을 보고 매우 걱정하여 밤낮으로 훈계하였으나, 더욱 순종하지 않고 악행惡行이 날로 심하므로, 성종成宗이 할 수 없이 의지懿旨를 품稟하여 위로 종묘에 아뢰고〈왕비를〉폐하였었다.
왕은 그때 아직 강보襁褓 속에 있었는데, 자라남에 미쳐 성종은 그가 어머니 여읜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왕세자王世子로 세웠다. 그런데 시기와 모짐이 그 어미와 같고 성질이 또한 지혜롭지 못하므로 성종은 당시의 단정한 선비들을 골라 뽑아 동궁東宮의 관원으로 두어 훈회訓誨하고 보도輔導함을 특별히 지극하게 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성종이 시험삼아 서무庶務를 재결裁決시켜 보았으나 혼암하여 분간하지 못하므로 성종이 꾸짖기를,
“생각해 보라. 네가 어떤 몸인가. 어찌 다른 왕자들과 같이 노는 데만 힘을 쓰고 학문에는 뜻이 없어 이같이 어리석고 어둡느냐.”
하였었는데, 왕이 이 때문에 부왕父王 뵙기를 꺼려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하루는 성종이 소혜 왕후에게 술을 올리면서 세자를 명소命召하였으나, 또한 병을 칭탁하고, 누차 재촉해도 끝내 오지 않으므로, 성종이 나인內人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병이 없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병이 없다고 아뢰면 뒷날 너를 마땅히 죽이겠다.’
하매, 나인은 두려워서 돌아와 병이 있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속으로 알고 마음에 언짢게 여기며 그만두었었다.
이로부터〈세자를〉폐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금상今上이 아직 어리고, 다른 적자嫡子가 없으며, 또한 왕이 어리고 약하여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 차마 못하였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馴鹿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고, 심지어 군신群臣들을 접견接見하고 교명敎命을 내리면서도 숨기고 가리며 거짓 꾸미기를 힘썼는데,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초년에는 선조先朝의 옛 신하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아직 조정이 완전하므로 정령政令이 문란하지 않았는데, 무오년 주륙誅戮이 있는 뒤부터는 왕의 뜻이 점차 방자해져,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억제하매, 선비의 기개가 날로 꺾여져 감히 정언正言 극론極論을 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더욱 꺼릴 것 없어 멋대로 방탕해졌다.
임술·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狂暴한 짓이 많으므로 소혜 왕후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외부에까지 왕왕 듣고 서로 보여 귓속말을 하며 그윽이 근심하게 되므로, 소혜 왕후가 또 다시 몰래 대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간절히 간하게 하니, 왕이 더욱 분해했다. 그리하여 항상 조정에 구애되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발로할 수 없었다.
이때 임사홍任士洪이 음험하고 간사한 자로 선조先朝 때부터 내쫓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므로 항상 이를 갈다가, 그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옹주에게 장가듬을 인하여 금중禁中을 출입할 수 있게 되자 왕의 뜻을 짐작하고 마침내 조정을 위협하는 술책으로써 가만히 뜻을 갖추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급히 숭품崇品에 발탁, 아무 때나 불러 보았으며, 무릇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묻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사홍이 부름을 받으면 반드시 미복微服으로 어둠을 타 편문便門으로 들어갔고 왕은 항상 내 벗 활치옹豁齒翁이 왔다 하였으니, 아마 사홍이 이가 부러져 사이가 넓었기 때문이리라.
왕은 이에 크게 형륙刑戮을 자행하였는데 언관言官들을 추구追究하여 대신으로부터 대간臺諫·시종들까지 거의 다 죽이거나 귀양 보내어 조정이 텅 비었고, 폐비한 일을 원망하여 성종의 후궁을 장살杖殺하고 그 자녀를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그 며느리를 남의 첩으로 시집보내거나 제군諸君·부마駙馬에게 주어 갖게 하였고, 소혜 왕후를 후욕詬辱하여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게 하고서는 그 상기喪期를 단축하되 날을 달로 치는 제도(以日易月制)로써 하였고, 대행大行이 아직 빈소에 있는데도 풍악을 그치지 않았다. 폐비하는 의논에 참여한 자와 추숭追崇을 불가하다고 의논한 자를 모두 중형重刑에 처하되, 죽은 자는 그 시체를 베고 가산을 몰수하며, 그 족속을 연좌하고, 살아 있는 자는 장신杖訊하여 멀리 귀양 보냈는데,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는 ‘먼저 주창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했다.
드디어 조종祖宗들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또 사헌부의 지평 2원員을 없에므로써 언로言路를 막았고, 손바닥 뚫기(穿掌)·당근질하기(烙訊)·가슴빠개기(斮胸)·뼈바르기(剮骨)·마디마디 자르기(寸斬)·배가르기(刳腹)·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의 이름이 있었으며, 말이 조금만 뜻에 거슬리면 ‘명령을 거역한다’ 하고, 말이 내간內間에 미치면 촉상屬上이라 지적하여, 얽어 죄를 만들되, 기제서棄制書를 경률輕律로 삼고 족속을 멸하는 것(夷族)을 상전常典으로 여겨 한 번만 범하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잡혀 살륙되고 일가까지도 또한 찬축竄逐을 당했고, 익명서匿名書 및 다른 죄로 잡힌 자가 사연이 서로 연루되어 옥을 메웠는데, 해를 넘기며 고문하여 독한 고초가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옛 당직청當直廳이 협소하다 하여 이내 복야청僕射廳으로 옮겨 넓히되 밀위청密威廳이라 하고 감옥의 관원을 더 두었으며, 죄수를 신문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공三公과 승지·금부 당상이 섞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사대부로서 매를 맞는 자가 빈 날이 없었으나 모두 그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또 비방하는 의논이나 우어偶語를 금하는 법을 만들어 감찰로 하여금 날마다 방방곡곡을 사찰하였다가 초하루 보름으로 아뢰게 하였고, 온갖 관사官司와 여러 부府도 또한 초하루 보름으로 시사時事를 비방하는 자가 있나 없나를 적어 아뢰게 하여, 비록 부자간이라도 관에 보고한 뒤에라야 서로 만나도록 하므로, 모두 서로 손을 저어 말을 막았고,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 길에서 눈짓만 했다.
또 도성都城 사방에 백 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그 안의 주현州縣과 군읍郡邑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거시켜 비운 뒤에 사냥터로 삼고, 만약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당장 베어 조리를 돌리고, 기전畿甸 수백 리를 한 없는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내수사 종 중 부실富實한 자를 가려 들어가 살게 하여 몰이하는 데 편리하게 하니, 본래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사망하여 길에 즐비하였고, 능침陵寢이 다 금표 안에 들어가 지키는 사람이 없어 향화香火 역시 끊겼다.
또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하고 문묘文廟의 신판神版을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길렀으며, 수리 도감修理都監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사방의 공장工匠을 모으고 민호民戶를 징발, 모두 서울에 집중시켜 궁실을 넓히고, 대사臺榭를 더 지어 강가나 물구비에 그들먹하게 벌여 놓으며,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 길을 이리 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각산 밑 장의사동藏義寺洞에 있는 탕춘정蕩春亭인데, 시냇물이 구비쳐 흐르는 위에 위치하여 단청丹靑이 수면에 현란하고, 시내를 가로 질러 낭원廊院을 벌여 지었는데 규모가 극히 웅장하였다. 일찍이 강물을 끌어 정자 밑에 이르게 하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끌어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것은 서총대瑞葱臺라 하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며 넓기도 높이와 걸맞았다. 그 아래 큰 못을 파는데 해가 넘도록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 또 임진강 가 툭 내민 석벽 위에 별관을 지어 유행遊幸하는 장소를 만들었는데, 굽이진 원院과 빙 두른 방房이 강물을 내려다 보아 극히 사치스럽고 교묘하다.
또 이궁離宮을 장의사동藏義寺洞과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짓게 하여 바야흐로 재목을 모아 역사를 하는데, 모든 역사를 감독하는 벼슬아치들이 독촉하기를 가혹하고 급하게 하여 때리는 매가 삼단과 같으며, 조금만 일정에 미치지 못하면 또한 반드시 물건을 징수하므로, 원망과 신음이 길에 잇달았다.
축장군築墻軍·축성군築城軍·서총정군瑞葱亭軍·착지군鑿地軍·이궁 조성군離宮造成軍·인양전 조성군仁陽殿造成軍·재목 작벌군材木斫伐軍·유하군流下軍이라고 부르는 따위의 징발하는 명목을 다 셀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지치고 공사公私가 탄갈殫竭하여 유리 멸망이 서로 잇달아 온 고을이 거의 비게 되었으며 서울에서 역사하는 자는 주리고 헐벗고 병들어서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마을과 거리에 시체가 쌓여 악취를 감당할 수 없는데, 더러는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길가에 병들어 쓰러진 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그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시체를 버려두었다는 죄를 입을까 겁내어 서로 끌어다 버리므로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구수영具壽永은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사위이고, 그 아들은 또 왕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들어, 아첨과 간사로 왕에게 굄을 받았는데, 그는 미녀美女를 사방으로 구하여 바치니, 왕이 매혹되어 수영을 발탁, 팔도 도관찰사八道都觀察使를 삼으니 권세가 중외를 기울였다.
이때부터 내총內寵이 점차 성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것이 전 숙원田淑媛과 장소용張昭容이다. 왕이 두 후궁에게는 하는 말을 따르지 않음이 없고, 하려는 것을 해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장획臧獲·가사家舍를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반드시 화로써 갚으므로 종척宗戚이나 경대부卿大夫들이 그들의 침해와 모욕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주인을 배반하고 이익을 노리는 무뢰배로서 일가라 일컫고 투탁投托하는 자가 다 셀 수 없었다. 두 집의 도서圖書나 서찰을 가진 자가 사방에 널려 이르는 곳마다 소란을 피우며 수령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에게 못살게 굴어 기세가 넘쳤으나 아무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빌며 사양하고 움츠려 피할 뿐이었다.
왕이 이들을 위하여 큰 집을 짓되, 대관臺官에게 감독하게 하여 지어 주었는데, 그들이 만약 부모를 뵈러 출입할 때면, 중관中官 및 승지·주서注書·재상들이 모두 따라가며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감싸 마치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또 시녀 및 공·사천公私賤과 양가良家의 딸을 널리 뽑아 들이되, 사자使者를 팔도에 보내어 빠짐없이 찾아내어 그 수효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급사給使·수종隨從과 방비房婢라고 일컫는 자도 그 수와 같았으며, 7원院 3각閣을 설치하여 거처하게 했는데, 운평運平·계평繼平·채홍採紅·속홍續紅·부화赴和·흡려洽黎 따위의 호칭이 있었으며, 따로 뽑은 자를 흥청악興淸樂이라 하고 악에는 세 과科가 있었는데, 굄을 거치지 못한 자는 지과地科라 하고 굄을 거친 자는 천과天科라 하며, 굄을 받았으되 흡족하지 못한 자는 ‘반천과半天科라 하고,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자는 작호를 썼는데, 숙화淑華·여원麗媛·한아閑娥 따위의 이름이 있으며, 그 기세와 굄이 전 숙원이나 장 소용과 더불어 등등한 자도 또한 많았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혹은 사냥, 혹은 술 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 성질이 광조狂躁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그 행방을 헤아리지 못했다. 또 자전慈殿을 효도로 받든다 하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되 때로는 밤중에 달려가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때로는 시종들을 핍박하여 험한 곳에 놀이를 나가기도 하였는데, 대비大妃 또한 능히 감당치 못하면서도 두려워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언제나 내연內宴을 베풀되 반드시 종재宗宰·사대부의 아내를 입참入參하도록 하였는데, 연달아 밤낮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므로 추문醜聞이 파다하였다.
이때 대비는 경복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는데, 왕은 대비를 위하여 경회루 연못에 관사官私의 배(船)들을 가져다가 가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평지처럼 만들고 채붕彩棚을 만들었으며,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여 가운데는 만세산萬歲山, 왼쪽엔 영충산迎忠山, 오른쪽엔 진사산鎭邪山을 만들고 그 위에 전우殿宇·사관寺觀·인물人物의 모양을 벌여 놓아 기교를 다하였고, 못 가운데 비단을 잘라 꽃을 만들어 줄줄이 심고 용주 화함龍舟畫艦을 띄워 서로 휘황하게 비췄는데, 그 왼쪽 산엔 조정에 있는 선비들의 득의 양양한 모양을 만들고 오른쪽엔 귀양간 사람들의 근심되고 괴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왕은 스스로 시詩를 지어 걸고 또 문사들도 짓되, 모두 세 산山을 명명한 뜻을 서술하게 하고 날마다 즐겁게 마시며 놀되, 화초와 인물의 형상이 비를 맞아 더러워지면 곧 새 것으로 바꾸었다. 대비가 억지로 잔치에 참석은 하였지만 연회가 파하면 늘 한숨 쉬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또 궁내宮內에 조준방調隼坊을 두어 매와 개를 무수히 기르므로 먹이는 비용이 걸핏하면 1천千으로 헤아렸고, 사방의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모아 들여 역시 그 속에 두되, 따로 응군鷹軍이란 것을 두어 내응방內鷹坊에 소속시키고 번갈아 바꾸도록 하여 1만 명이나 되는데 두 대장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또 위장衛將이 있어 여러 장수들의 수를 서로 통솔하게 하고, 고완관考頑官과 해응관解鷹官을 두어 매와 개를 몰아 사냥하는 일을 살피도록 하는데, 모두 미치고 방종한 무뢰한이었다. 왕이 사냥을 하려 하면 대장 이하가 각기 응군을 거느리고 달려오는데 이것을 내산행內山行이라 했다.
또 사방의 준마駿馬를 모아 용구龍廐·인구麟廐·운구雲廐·기구麒廐·신준방神駿坊·덕기방德驥坊·봉순사奉巡司를 따로 두어 기르되, 사복시의 관원을 더 두어 오로지 감목監牧하게 하여, 유행遊幸·출엽出獵할 때 썼다.
왕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不道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여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하여, 사대부의 친상親喪을 단축하였으며,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궤이詭異하다 하여 죽였고, 형제들을 핍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범하게 하니,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이륜彝倫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탈하여 중외中外가 다 원망하는데, 오직 사홍士洪·수영壽永 및 간사하고 아첨하는 군소群小 무리들이 세력을 믿고 스스로 방자하므로, 당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방관할 뿐 어찌 할 수 없었다. 총애를 탐내며 화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사직을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항상 귀양간 사람들이 원한 때문에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시켜 고역苦役을 치르게 하고, 2품品 당상을 진유 근리사鎭幽謹理使라 칭하여 보내되 각기 종사관 1명씩을 거느리고 가서 검찰하고 구류당한 죄수들을 얽매어 자유롭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이 조석간에 있음을 알았다.
왕은 오랠수록 더욱 의심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장곤李長坤이 가장 용맹한 사람이니 마침내 변을 일으킬까 싶다 하여, 경사京師로 잡아 보내게 하여 장차 먼저 죽이려고 하므로 장곤이 듣고 곧 망명하니, 왕은 크게 노하여 상금을 걸고 체포를 서둘되, 경조관京朝官을 보내어 모든 도에 있는 관원과 함께 군대를 풀어 찾게 하니, 도하都下가 흉흉하여, 혹자는 이장곤이 망명하여 무리들을 모아 거병擧兵한다 하였다.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서로 만나 시사를 논할 적마다,
“이제 정령政令이 혼암 가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종묘 사직이 장차 전복될 것인데, 나라를 담당한 대신들이 한갓 교령敎令을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 한 사람도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은 함께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명과 인심을 보건대 이미 촉망된 바 있거늘, 어찌 추대하여 사직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큰 계책을 정했는데 모사에 참여할 자가 있지 않았다.
부정副正 신윤무辛允武는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로서 평소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일조에 변이 있게 되면 화가 장차 몸에 미치리라.’ 생각하고, 원종 등에게 가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왕의 좌우에 친신親信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떠났으니, 환란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이장곤은 무용과 계략을 가진 사람인데, 이제 망명하였으니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만약 귀양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郡邑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 들어온다면, 비단 우리들이 가루가 될 뿐 아니라,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비록 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니, 원종 등이 뜻을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하고, 그 계획을 말하자 따르므로 이어 장정張珽·박영문朴永文을 불러 윤무允武와 더불어 무사를 모을 것을 언약하였다. 또 용구龍廐의 모든 장수들과 각기 응군鷹軍을 거느리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이윽고 무인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희안이, 김수동·김감에게 달려가 함께 가자고 하니, 감은 즉시 따랐고 수동은 두려워 망서리다가 결국 따랐다. 또 유자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역시 불러 함께 하는 한편 용사들을 임사홍과 신수근·신수영의 집에 보내어 퇴살椎殺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신수겸愼守謙을 개성부에서 베니, 이를 들은 도중都中의 대소인들이 기약도 없이 모여 들어 잠깐 동안에 운집하자 즉시 모든 장수들을 편성하고 용구마龍廐馬를 내어 주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고 지키게 하였으며, 또 모든 옥에 있는 죄수들을 놓아 종군하게 하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윤형로尹衡老를 금상今上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그 사유를 아뢰고 그대로 머물러 모시게 하고, 이어서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과 무사 수십 명을 보내어 시위하여 비상에 대비하게 하였다. 희안 등은 모두 돈화문 밖에 머물러 날새기를 기다리니, 숙위宿衛하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알고 다투어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잠시 동안에 궁이 텅 비었다.
승지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이우李堣가 변을 듣고 창황히 들어가 왕에게 사뢰니, 왕이 놀라 뛰어 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왕에게 가 옥새를 내놓고 또 동궁에 옮길 것을 청하였으며, 전동田同·심금손沈金孫·강응姜凝·김효손金孝孫 등을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여명黎明에 궁문이 열리자 원종 등이 경복궁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기를,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 대군 〈이역李懌〉에게 돌아갔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진성 대군을 맞아 대통大統을 잇고자 하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대비는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순정이 전지를 받들고 즉시 금상의 사제로 가 아뢰니, 상이 굳이 사양하기를,
‘조정의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재삼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순정이 호종 시위하여 경복궁에 들어가니, 길에서 첨앙瞻仰하는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들 ‘성주聖主를 만났으니 고화膏火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책공策功을 의정議定하게 하자, 원종 등이 여러 종실·재상들과 공을 나눔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니,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유순柳洵 등 수십 인이 다 정국공신에 참여되었다.
당초에 원종 등이 돈화문 밖에 모여 순洵에게 사람을 보내어 순洵을 부르니, 순이 변이 있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나와 문틈으로 엿보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너덧 차례나 하였으며, 또 문틈으로 말하기를
‘나는 구항溝巷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일이 가하오. 마음대로 하오.’
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이 없음을 알고서야 나왔다. 그리고 구수영具壽永은 당초 원종 등이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훈련원에 달려가 제장들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랬지만, 벌써 와 몸바치기를 허하였으므로, 마침내 훈적勳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때 적인謫人 유빈柳濱·이과李顆·김준손金駿孫 등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전라도에서 거병하기로 하고, 조숙기曺淑沂 등은 또한 경상도에서 거병하기로 의논하여, 모두 금상을 추대하려 하였다가 상이 이미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
처음에 왕이 백관에게 충忠 자·성誠 자를 새겨 사모紗帽의 앞뒤에 붙이게 하였으니, 대개 충성으로써 책려責勵하려 한 것이요, 모든 유행遊行과 출입을 행행行幸이라 일컬음을 금하고 거동이라 하게 하였으며, 또 흥청을 선치選置하되 기필코 1만 명을 채우려고 했었는데, 교동으로 폐천廢遷되어 가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들이 왕을 뒤쫓아 원망하여 이가俚歌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 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 가는고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하였으니, 대개 사모紗帽와 사모詐謀, 거동擧動과 교동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荊棘)는 말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뜻을 빌어 노래한 것이다.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己卯/今上卽位于景福宮, 王廢遷于喬桐縣。初, 王母廢妃尹氏, 性悍戾妬忌, 貞熹、昭惠、安順三王后, 見尹氏所爲, 多不道, 甚憂之, 日夜警訓, 愈不順, 惡行日甚。成宗不得已稟懿旨, 上告宗廟而廢之。王時尙在襁褓中, 及長, 成宗憐其失母, 且長嫡, 立爲王世子。猜忌剛戾, 類所出, 性又不慧, 成宗妙選一時端正之士, 備東宮官屬, 訓誨輔導特至。王久就師傅, 年且長矣, 猶不通解文理。一日, 成宗試令裁決庶務, 闇不能辨。成宗責之曰: ‘試思汝身。是何等身? 寧可與諸子, 同爲優游, 不加意學問, 若是愚暗乎?’ 王以此憚見父王, 其召也, 多稱病不往。一日, 成宗進酌昭惠王后, 命召世子, 又托疾, 屢促之竟不進, 成宗遣內人視之, 故無疾, 謂曰: ‘爾若不以疾白, 後當殺爾。’內人懼, 還以病啓。 成宗心知之, 內不樂而罷。自是多有廢之之心, 而以今上尙幼, 他無嫡子, 且憫王少弱無恃, 竟不忍也。及成宗薨, 王在喪疚中, 無戚容, 射殺後苑馴鹿而啗之, 戲遊如平日。至見群臣, 下敎命, 務隱掩矯飾, 外人不識也。然其初年, 先朝舊臣, 多有存者, 朝廷尙完, 政令不至荒紊, 自戊午誅芟之後, 王志漸肆, 務以嚴刑制下, 士氣日索, 無敢有正言極論者, 王益無所憚, 多縱荒慾。至壬戌、癸亥之間, 爲張綠水所蠱惑, 荒淫日甚, 又多狂暴, 昭惠王后憂憊, 屢加規警, 王反怨焉。外間往往聞之, 相聚耳語, 竊憂之, 昭惠又潛諭大臣, 使切諫, 王益忿。常以拘制於朝廷, 不能縱欲, 爲怏怏, 未有以發。時任士洪, 以陰險奸賊, 自先朝斥廢, 幾三十年, 居常切齒, 因其子崇載尙翁主, 得出入禁中。揣知王意, 遂以威脅朝廷之術, 密中之, 王大悅, 亟擢崇品, 召見無時, 凡有所欲爲, 無不諮焉。士洪承召, 必微服, 當昏由便門以入, 王常稱吾友豁齒翁來矣, 蓋士洪齒折而豁故也。王於是, 大肆刑戮, 追究言事之人, 自大臣、臺諫、侍從, 誅竄殆盡, 朝廷一空。怨廢妃事, 杖殺成宗後宮, 竄戮子女, 其子妻令嫁人妾, 給諸君駙馬畜之。詬辱昭惠王后, 竟以憂悸, 成疾而斃, 乃短其喪, 從以日易月之制, 大行尙在殯, 而動樂不輟。其與廢妃議及議追崇不可者, 皆加以重刑, 死者剖斬其屍, 籍其産, 而坐其族, 存者杖訊遠竄, 校理權達手, 以首倡見殺。遂盡變祖宗舊典, 而紛亂之, 首革弘文館、司諫院, 又革司憲府持平二員, 以杜言路。又制淫刑, 有穿掌、烙訊、斮胸、剮骨、寸斬、刳腹、碎骨飄風之名。言少違意, 則稱爲逆命, 辭涉內間, 則指爲屬上, 羅織成罪, 以棄制書爲輕律, 以夷族爲常典, 一有所犯, 父子兄弟, 連逮就戮, 以至疎族, 亦被竄逐。以匿名書及他罪被繫者, 辭相逮及, 塡滿牢獄, 經年(栲)〔拷〕掠, 毒楚備至。謂舊當直廳狹隘, 乃移搆僕射廳而廣之, 名曰密威。增設監獄之員。至訊囚, 必命三公及承旨、禁府堂上雜治之, 士大夫受(榜)〔杖〕笞, 無虛日, 皆非其罪。又立非議偶語之禁, 令監察, 日巡坊曲以伺察, 至朔望則啓之, 百司、庶府, 亦於朔望, 書啓非議時事人有無, 雖父子, 亦許告官, 然後相見, 衆庶搖手觸禁, 人人自危, 道路以目。又於都城四方, 皆限百里立禁標, 廢其內州縣郡邑, 撤居民而空之, 以爲遊獵之所, 苟入此者, 立斬以徇, 畿甸數百里, 蕪莽極目, 鞠爲禽獸之場。 擇內需司奴富實者入處, 以便驅使, 元居之戶, 流離死亡, 相望於道路, 陵寢皆入標內, 無守護之人, 香火亦絶。又撤都城內近闕人家, 自東抵西, 築石城以限之, 撤移文廟神版, 畜禽獸其中, 置修理都監, 大興工役, 聚四方工匠, 調發民戶, 皆至于京, 恢大宮室, 廣搆臺榭, 江濱水曲, 羅列遍滿, 鑿高塡陷, 錯通周道, 日夜率姬侍, 遊衍往來。其最大者, 在三角山下藏義寺洞, 曰蕩春亭, 當溪水環曲抱流之上, 丹碧炫燿, 其下橫截溪流, 列搆廊院, 制極敝豁。 嘗欲引江流, 至亭下, 又欲鑿山, 引他溪, 合流亭下, 皆不得就。在昌德宮後苑曰瑞葱臺, 高數十丈, 廣袤稱是。鑿大池其下, 經年工未訖就。 又於臨津石壁斗絶之處, 搆別館, 以爲遊幸之所, 曲院回房, 俯瞰江流, 極爲奢巧。又命造離宮於藏義寺洞、昭格署洞, 方鳩材就役, 諸董役之官, 侵督苛急, 笞(朴)〔扑〕如麻, 少不及程課, 又必徵歛物貨, 冤呼呻吟, 相續於路。其稱築墻軍、築城軍、瑞葱亭軍、鑿池軍、離宮造成軍、仁陽殿造成軍、材木斫伐軍、流下軍等, 調發名數, 不可勝擧。中外俱困, 公私殫竭, 流亡相繼, 至有闔邑幾空者, 其役于京者, 飢凍疾疫, 死者殆半。坊井逵道, 人屍成積, 醜穢不可當, 或飢困羸, 病臥道側, 雖氣息尙存, 其傍居人, 畏被停屍之罪, 遞相曳棄, 無不死者。具壽永, 永膺大君琰之壻, 其子又尙王女徽順公主, 以便侫邪媚, 見寵于王。乃旁求美女以進之, 王惑之, 擢壽永爲八道都觀察使, 權傾中外。自此內寵漸盛, 其最幸者曰田淑媛、張昭容。王於二姬, 所言無不從, 所欲無不成, 鬻獄賣官, 攘人財物、臧獲、第舍, 無所不至。少有忤拂於己, 必以禍中之, 宗戚、卿大夫, 無不受其侵辱, 背主規利, 無賴之徒, 稱爲族親而投托者, 不可勝紀。持兩家圖書簡牘者, 交午四方, 所至騷然, 陵逼守宰, 殘虐齊民, 勢焰薰灼, 人莫敢有所犯, 謹祈遜避縮而已。王爲起大第, 令臺官監督以賜之, 若因覲出入, 則中官及承旨、注書、宰相從行, 前導後擁, 如王妃之行焉。又廣選侍女及公私賤良家女以入, 遣使八道, 搜採無遺, 數幾至萬, 其給使、隨從、稱房婢者數稱之。設七院三閣以處之, 有運平、繼平、採紅、續紅、赴和、洽黎等號, 別選者曰興淸樂。樂有三科, 未經幸者曰地科, 經幸者曰天科, 幸而未洽歡者曰半天科, 其最寵者, 用爵號, 有淑華、麗媛、閑娥等名, 其勢焰寵幸, 與田、張埒者亦多焉。王沈酗其中, 惟日不足, 率興淸等, 遊馳禁標內, 或獵或飮, 歌舞荒亡。性狂躁, 不能久留一處, 驅逐倏東忽西, 雖近侍內人, 莫測其行止。又稱奉孝慈殿, 進宴無虛日, 或深夜馳進開宴, 或逼侍遠遊, 歷崎嶇阻險, 大妃亦不能堪, 懼不敢違。常設內宴, 必命宗宰、士大夫妻入參, 至有連日夜不出者, 醜聲播聞。 時大妃移御景福宮, 王爲大妃, 於慶會樓池, 輸運官私船艦, 橫亘連結, 上鋪以板, 若平地然, 設彩棚, 象海中三山, 中曰萬歲, 左曰迎忠, 右曰鎭邪, 上列殿宇、寺觀、人物之狀, 極其奇巧, 池中剪綵爲花, 而列植之, 泛龍舟畫艦, 交耀輝暎, 其左山, 設在朝之士揚揚得意之形, 右爲竄謫之人窮愁苦困之態。王自製詩揭之, 又令文士製之, 皆敍三山命名之意, 日歡飮爲樂, 其花草、人物之形, 因雨以漫毁, 則易之以新。大妃雖黽勉與宴, 罷常噓噫不樂。又於宮內, 置調隼坊, 畜鷹犬無數, 料食之費, 動以千計, 徵四方珍禽奇獸, 亦聚其中, 別設鷹軍, 屬內鷹坊, 分番遞更, 以萬數, 分屬于兩大將, 又有衛將以下諸將之數, 使相統屬, 設考頑官、解鷹官, 以檢鷹犬驅獵之事, 率皆狂縱無賴之徒。王欲獵, 則大將以下, 各率鷹軍以赴, 謂之內山行。又聚四方駿馬, 分設龍廐、麟廐、雲廐、麒廐、神駿坊、德驥坊、奉巡司以養之, 加置司僕寺員, 俾專監牧, 以爲遊幸、出獵之用。王自知所行不道, 內怍於心, 欲混亂人道, 使同於己。乃短士大夫親喪, 指有孝行者, 爲詭異而殺之, 逼令兄弟, 相奸其妾, 三綱絶而彝倫熄滅。於是衆叛親離, 中外咸怨, 唯士洪、壽永及群小奸侫之輩, 怙勢自恣, 當時在大臣之列者, 傍觀無如之何。貪寵畏禍, 一復一日, 莫有爲圖存社稷計者。王常慮竄謫之人, 因怨生事, 皆令移配絶島, 定苦役。分遣二品堂上官, 稱鎭幽謹理使, 各率從事官一員, 往檢之, 拘囚纍繫, 使不得自由, 人皆自分死在朝夕。王久益疑之, 欲盡殲除, 謂李長坤最武勇, 恐終爲變, 命執送京師, 將先殺之, 長坤聞之, 卽亡命。王大怒, 購捕甚急, 遣京朝官, 同諸道所在發軍搜捕, 都下洶洶, 或謂長坤亡命, 唱衆擧兵。平城君朴元宗、前參判成希顔同里閈, 每相就論時事曰: ‘今政令昏虐, 民墜塗炭, 宗社將覆, 當國大臣, 徒承順敎令不暇, 無一人有圖安之計。吾等俱受成廟厚恩, 安忍坐視? 觀天命人心, 已有所屬, 盍圖推戴, 以匡社稷乎?’ 遂定大計, 而未有與謀者。副正辛允武, 爲王所寵任, 居常憂懼, 自慮一朝有變, 禍將及己, 就見元宗等語曰: “方今中外怨叛, 王之左右親信, 亦皆離心, 禍患朝夕必發。且李長坤武勇有略, 今亡命, 必不浪死溝壑。若倡謫人檄郡邑, 興兵內向, 則非徒吾輩爲所齏粉, 社稷將輸他人之手, 事至於此, 則雖欲有所爲, 不可及已。’元宗等決意。謂吏曹判書柳順汀, 可與共事, 以其謀語之, 亦從。因召張珽、朴永文, 與允武約聚武士。又約龍廐諸將, 各領鷹軍以赴。乃於戊寅夕, 皆會訓鍊院, 希顔馳見金壽童、金勘, 語與同赴, 勘卽從之, 壽童驚懼罔措, 良久乃從。又以柳子光多機謀, 且歷事多, 亦召與俱, 分遣勇士于任士洪、愼守勤ㆍ守英家, 椎殺之, 又遣人斬愼守謙于開城府。都中大小聞者, 皆不期而會, 須臾雲集, 乃部署諸將, 發龍廐馬以給之, 使各領軍, 圍把宮城, 又縱諸獄囚, 以從軍, 時夜已三鼓。遣尹衡老, 詣今上私第, 白其由, 仍留侍, 繼遣雲山君誡等及武士數十人侍衛, 以備非常。希顔等俱止敦化門外待曙, 宿衛將士、侍從、閹寺等知之, 爭由溝竇而出, 俄頃宮已空矣。承旨尹璋、曺繼衡、李堣聞變, 倉皇入白王, 王驚惶走出, 執承旨手, 噤不能言。璋等托以伺察外變, 稍稍亡散, 皆自水溝中走出, 或有失足墜溷廁間者。 元宗等令內侍, 從將士數人, 白王出寶, 又請移處東宮, 誅田同、沈今孫、姜凝、金孝孫等于軍中。黎明宮門開, 元宗等詣景福宮, 啓于大妃曰: ‘主上大失君道, 不可以主宗廟, 天命人心, 已屬於晋城大君諱, 群臣欲奉懿旨, 迎晋城, 入承大統, 請下成命。’ 大妃傳曰: ‘國勢至此, 於社稷計, 所不得已。可依卿等所啓。’ 順汀奉旨, 卽詣今上私第白之, 上牢讓曰: ‘朝廷爲宗社大計, 固當如是, 予實不德, 何以堪承?’ 拒之再三, 然後乃許。順汀扈侍入景福宮, 行路瞻仰, 莫不垂涕, 咸自以爲 ‘得聖主, 出於膏火中。’ 申時卽位于勤政殿, 受百官賀, 大赦中外, 以大妃命, 廢前王降封燕山君, 遷于喬桐, 廢王妃愼氏, 出處私第, 安置世子及諸王子于諸邑, 誅田非、綠水、白犬于軍器寺前, 都人爭以瓦礫, 擲其陰戶曰: ‘一國膏血, 盡於此。’ 須臾成積。命議定策功, 以元宗等, 欲與諸宗宰分功, 以安衆心, 初不與議如柳洵等數十人, 皆參靖國功臣。初元宗等, 會敦化門外, 遣人召洵, 洵知有變, 罔知所爲, 出窺門隙, 復入者數四, 又從門隙語曰: ‘吾不欲死于溝巷, 可於此, 任爲之。’ 久知無他, 然後出。具壽永初聞元宗等擧義, 卽往赴訓鍊院, 見諸將。諸將相顧愕然, 然業已至, 許自效, 竟得參勳籍。時謫人柳濱、李顆、金駿孫等, 唱衆謀擧兵于全羅道, 曺淑沂等, 又議擧兵于慶尙道, 皆欲推戴今上, 及聞上已卽位乃止。初王令百官, 書刻忠字、誠字, 分貼于紗帽前後, 蓋以忠誠責勵也。凡遊幸出入, 禁稱行幸, 而曰擧動, 又選置興淸, 必欲滿萬, 及廢遷喬桐, 居棘圍中, 民間追怨王, 作俚歌以歌之曰: 忠誠是詐謀, 擧動卽喬桐。一萬興淸何處置, 夕陽天末去誰從? 已哉此亦娘婦家, 無妨達曙且從容。蓋紗帽與詐謀, 擧動與喬桐, 音相近, 方言稱婦與稱荊棘, 語相類, 故托意歌之。廢婦愼氏, 有賢德, 和厚溫謹, 撫群下以恩, 王有所寵幸, 妃亦加厚之, 王雖狂虐, 甚見重。每見王多殺不辜, 淫縱無道, 日夜憂悶, 時或泣諫, 辭意切至, 王雖不能聽, 亦不之怒。又每戒勑大君、公主、姆保、奴僕, 不令橫恣, 至是號泣, 必欲從王而去, 不得。燕山君日記卷第六十三
【태백산사고본】 17책 63권 20장 A면 【영인본】 14책 67면
o 중종 1권, 1년(1506) 11월 28일(癸卯)교리 권달수의 아내 정씨의 일을 아뢰게 하다
전교하기를,
“헌납 강중진康仲珍이 아뢴 바 있던 교리 권달수權達手의 아내 정씨鄭氏의 일을 다시 물어 아뢰라.”
하였다. 중진이 아뢰기를,
“정씨는 남편이 피주被誅됨을 듣고, 상주尙州에서 함창咸昌 고모의 집에 왔는데, 그 고모가 죽粥을 권하니, 대답하기를, ‘내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살아서 무엇하느냐?’ 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대지 않고 죽었습니다.”
하였다.
○癸卯/傳曰: “獻納康仲珍所啓校理權達手妻鄭氏事, 更問以啓。” 仲珍啓曰: “鄭氏聞夫被誅, 自尙州來于咸昌姑家, 其姑勸以粥, 答曰: ‘吾夫已死, 生而何爲?’ 勺水不入口而死。”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7장 B면 【영인본】 14책 99면
o 중종 27권, 12년(1517) 1월 22일(戊戌)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의 졸기
충청도 관찰사 권민수權敏手가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권민수는 젊었을 때에 벗을 만나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더러는 그의 마음 속이 은밀하여 헤아릴 수 없음을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헌장憲長이 되자 이행李荇과 뜻이 맞아 박상朴祥·김정金淨의 봉사封事가 그르다고 논하여 찬출竄黜되게 함으로써 전자의 의아가 과연 맞아 들어갔다. 그의 아우 권달수權達手는 강의剛毅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폐조廢朝 때 바른 말을 많이 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니 지금까지 사림士林들이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그의 아내 정씨鄭氏도 행실이 어질었는데, 남편의 불행을 듣고 굶다 죽었다.
또 논한다. 권민수는 젊어서부터 글을 읽어 글짓기를 잘함으로써 명사名士의 무리가 되어 자못 인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품이 거칠고 용렬하여 분발할 기개氣槪가 없었으므로 근세의 명유名儒 김일손金馹孫이 항시 희롱하기를 ‘그대는 인품이나 재질이 모두 차상次上이다.’ 하였으니, 대개 그의 범상함을 말한 것이다. 다만 벗들과 널리 좋게 지내고 인물들을 찾아 접하되 좋고 나쁜 사람 없이 한결같아, 세상에서 미워하는 사람이 없고 또한 나타난 과오나 큰 실수가 없었기 때문에 명성과 지위가 매우 현달하여 기세가 혁연赫然했다. 그러나 사람됨이 공평하지 못하여 매양 임금 앞에서 후진後進이 선진을 경시하고 하관下官이 상관을 멸시한다고 논하였고, 이로써 책제策題를 내어 폐단을 묻기까지 함으로써 온 세상에 의구심이 일게 하여 은연중 선량한 사류들을 배격 억압하는 뜻이 있었으며, 남의 정론正論이나 격언格言을 듣게 되면 반드시 미워하여 ‘이는 화의 씨이다.’ 하였다. 그가 죽으매, 사람들이 거개 ‘명성은 사람을 속일 만하고 권세는 사람을 움직일 만하여 바로 한 세상의 향원鄕愿이니, 그가 일찍 죽음은 실로 선량한 사류들의 다행이다.’ 하였다. 한 마을에 살며 같이 지내는 정희량鄭希良 같은 사람은 항시 그의 아우 권달수와 사이좋게 지냈는데 이 사람은 그다지 허여許與하지 않았고, 그가 깊이 사귄 사람은 이행李荇의 무리였다. 후일에 권민수를 논평하는 사람들이 ‘기우氣宇가 침중沈重하고 확고하여, 일찍이 좋고 나쁨이나 기뻐함과 노함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그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 없다.’ 하였다.
○忠淸道觀察使權敏手卒。【史臣曰: “敏手, 少得友有名, 然或疑其城府深密不可測。 及爲憲長, 與李荇志同, 論朴祥、金淨封事之非, 至於竄黜, 前疑果孚。 其弟達手, 剛正强項人也, 多直言於廢朝, 竟被殺, 至今士林惜之。 其妻鄭氏, 亦有賢行, 聞夫不幸, 不食而死。”】 【又曰: “敏手, 自少能讀書爲文, 爲名士徒, 頗有人望, 然其資品麤庸, 無激發之氣, 近世名儒金馹孫常戲之曰: ‘君之人品才品, 皆次上也。’ 蓋言其凡庸也。 但廣善朋友, 存接人物, 無好惡一如也。 在世無疾惡之人, 又無顯過大失, 故名位甚顯, 氣勢赫然。 然爲人不平夷, 每於上前, 論說後進輕先進; 下官蔑上官僚之事, 至於以此發策問弊, 以疑動一世, 隱然有排抑善類之志, 聞人正論、格言則必惡之曰: ‘此禍胎也。’ 其卒也, 人多曰: ‘名足以欺人; 勢足以動人, 直一世鄕原, 其死之早, 實善類之幸也。’ 同里閈交游, 如鄭希良, 常好其弟達手, 而不深許此人, 其所與深交者, 李荇之徒。 後來議敏手者謂: ‘氣宇沈固, 未嘗以好惡喜怒示人, 人不測其中’ 云。”】
【태백산사고본】 14책 27권 30장 B면 【영인본】 15책 255면
o 영조 12권, 3년(1727) 7월 19일(癸酉)주강을 마치고 윤지술의 배향이 적절하지 못한 것을 논의하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고서, 참찬관參贊官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말하기를,
“삼가 유정柳綎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성명聖明께서 미처 의리義理의 정미精微함을 죄다 살피시지 않은 듯하므로, 비지批旨를 감히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말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윤지술尹志述을 정몽주鄭夢周와 육신六臣에 견주신 것은 매우 가깝지도 않습니다. 무릇 임금이 꺼리는 것을 신하가 범하여 죄받아서 죽었다면 비록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죽었다 하여도 될 것입니다. 만일 임금이 혹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거나 조종祖宗에게 지나치게 예禮에 어그러지는 예를 더하면 신하로서는 때때로 꺼리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하여 간쟁諫爭합니다.
한선제漢宣帝가 무제武帝를 높여 세실世室로 하려 할 때에는 하후 승夏侯勝이 그 무력武力을 남용濫用하였다는 것으로 배척하였고, 아조我朝의 일로 말하면 심대부沈大浮·유계兪棨 등이 추숭追崇하는 일을 힘껏 간쟁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사친私親을 추존追尊할 때에는 권달수權達手가 힘껏 간쟁하다가 화를 입었는데, 이것은 곧은 절의節義입니다. 경종景宗께서 만약 사친을 너무 지나치게 숭봉하셨다면 신하가 죽을 힘을 다하여 간쟁하였어야 하겠으나, 윤지술은 까닭 없이 지문誌文의 일 때문에 임금이 숨기는 것을 들추어내어 전혀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일이 놀라운 것은 말하고 말하지 않는 사이에 절조를 잃었을 뿐이 아닙니다. 이는 의리의 정미한 것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이하 생략>
○行晝講。 講訖, 參贊官宋寅明進曰: “伏見柳綎疏批, 聖明似未及盡察於義理精微, 故批旨敢此持入矣。” 上曰: “第言之。” 寅明曰: “殿下以尹志述, 比之於鄭夢周及六臣, 極爲不襯。 凡君父所諱, 臣下觸諱, 被罪而死, 則雖謂之死節可也, 如君父或崇奉私親, 或於祖宗, 過加非禮之禮, 則爲臣子者, 往往不諱, 以死力爭。 漢宣欲尊武帝爲世室, 則夏侯勝斥其窮兵黷武。 以我朝事言之, 沈大孚、兪棨等, 以追崇事力爭, 燕山追尊私親, 則權達手力爭被禍, 此則直節也。 景廟若奉私親太過, 則臣子當以死爭之, 而尹志述則無端因誌文事, 訐揚君父所諱, 全無顧忌, 事之可駭, 不但爲語默失節而已。 此義理精微之不可不察者也。<이하 생략>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9장 A면 【영인본】 41책 649면
'상주학 > 상주학 제3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산상속법 알아보기 (0) | 2014.02.25 |
---|---|
뇌허雷虛 김동화金東華의 생애와 업적 (0) | 2014.02.25 |
계몽운동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 오광五狂 여석훈呂錫塤 선생先生 (0) | 2014.02.25 |
상주학 제3권 목차 (0) | 2014.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