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갑장산(甲長山) 이야기 - 갑장산의 스토리텔링 자료화를 위하여 -

빛마당 2014. 2. 27. 20:59

갑장산(甲長山) 이야기

- 갑장산의 스토리텔링 자료화를 위하여 -

상주시청 문화예술담당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곽 희 상

목 차

Ⅰ. 들어가면서226

Ⅱ. 갑장산의 역사적 사실과 혼(魂)227

1. 선비․문향의 고을228

2. 충효열의 고을233

Ⅲ. 갑장산의 설화와 전설237

1. 상사 바위에 얽힌 애달픈 사연237

2. 수도승을 짝사랑한 여승237

3. 백질바위238

4. 갑장사에 머물던 나옹선사의 신통력239

5. 용흥사 절에 물 맞으로 갑시다.240

6. 갑장산 용흥사의 유래(명당을 잡았다는 전설)

240

Ⅳ. 마무리하면서241

갑장산(甲長山) 이야기

- 갑장산의 스토리텔링 자료화를 위하여 -

상주시청 문화예술담당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곽 희 상

Ⅰ. 들어가면서

갑장산(甲長山, 805.7m)은 일명 연악산(淵嶽山)이라고도 부른다. 노악산(露嶽山, 노음산, 728.5m))⋅석악산(石嶽山, 천봉산, 435.8m)과 상산(商山, 상주의 옛 지명) 삼악(三嶽) 중 가장 높고 아름다운 상주의 안산(案山)이다.

갑장산의 조산은 백두대간 상의 국수봉(掬水峯, 웅이산)으로, 그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가지를 뻗어 여남재와 백운산을 거쳐 산태백이재를 건너고, 기양산과 수선산을 지나 우뚝 솟은 최고봉이 곧 갑장산이다.

그 이름은 고려 충렬왕이 명명했다는 설(구당 조목수의『甲長勝遊錄』)과, 신라 고찰이었던 갑장사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산의 서록, 갑장사 서쪽에 상사바위가 있으며, 정상에 백질바위와 시루봉 등 명승이 있다. 정상 동북쪽 너머 기슭에 구룡연(九龍淵, 옹달샘)이 있는데, 예부터 기우제를 올리던 신성지로 상산 제1의 기우제 터이다.

연악계곡을 따라 지천솔밭, 연악서원, 용흥사 주차장 근방에 수둥디미 고성(古城) 터, 용흥사(龍興寺)가 있고, 산의 정상 부위에 갑장사가 있다. 용흥사에서 갑장사로 가는 2km 지점(대숲)에 정기룡 장군이 상주 가판관(임시판관)으로 발령장을 받은 영수암(永修菴) 터(미확인)가 있다.

산의 동록 용포 쪽에는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1196년에 요양하며 시를 남긴 용담사(龍潭寺) 터가 있고, 동북쪽 너머 승장계곡에는 옥류정(玉流亭)이 있으며, 상주 사장사(四長寺)의 하나였던 승장사(勝長寺) 터가 있고, 유곡리에 3층 석탑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용포지역에도 재지사족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데, 낙동면 승곡리에 옥류정(玉流亭)․용산정사․청간정(聽澗亭) 등의 정자와, 의암고택(依岩古宅)․양진당(養眞堂)․오작당 등의 고가가 있다.

여기서는, 갑장산을 중심으로 하여 신흥동 지역 스토리텔링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임을 밝혀 둔다.

 

Ⅱ. 갑장산의 역사적 사실과 혼(魂)

 

                                                       갑장산 전경

갑장산은 상주(尙州)란 이름을 사용한 대략 1,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고찰 용흥사(837)가 있고, 고려⋅조선⋅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산 선비들의 유상처(遊賞處)이면서 상주인의 애환을 간직해 온 산이다.

특히, 구룡연에서 북쪽 둘째 봉에 문필봉(文筆峰)이 섰는데, 바위 세 개가 뾰족한 붓처럼 뭉쳐 섰다. 이 문필봉의 영기를 받아 갑장산 주변에 인물이 많았기에 ‘장원향(壯元鄕)’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즉,『상산지⋅商山誌』「청대본⋅淸臺本」에, “주의 동남 근처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이 연달아 배출되어 사람들이 장원방(壯元坊)이라고 한다. 김범⋅김우굉⋅조휘⋅하락⋅조익⋅김광엽 등이 다 이곳에 살았다”라고 하였다.

갑장산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갑장의 혼(魂)에 대하여 살펴본다.

 

1. 선비⋅문향의 고을

1) 12지간(十二支干)의 으뜸인 갑자(甲字)를 붙여

고려 충렬왕이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남쪽지방에 군사를 배치하고 이 곳을 지나면서 산 동록에 있던 승장사에 잠시 머무를 때?영남 제1의 명산?이라며 십이지간의 으뜸인 갑(甲)자를 붙여 갑장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온다.(구당 조목수의 차갑장산운)

2) 창석 이준선생과 사인암(舍人岩)

사인대(舍人臺)라고도 하며,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낙향한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과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 1562∼1635) 등이 이 곳에서 유상할 때 조정으로부터 사인(舍人, 정4품)의 첩지를 가진 사신이 이준(李埈)을 찾았다 하여 강응철(康應哲)이 붙인 이름이다. 이준은 이 곳을 경치가 가장 좋은 곳이라 하여 <유연악최승암(遊淵嶽最勝巖)> 이란 시를 남기었다.

3) 갑장산은 영산(靈山)이다.

갑장산에는 연꽃 모양과 같은 모습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하여 구룡연이라 하고 그 중간에 산신제당, 솟대목 용지라는 샘이 있는 곳이 있으니 가뭄 때 제사를 지내면 3일만에 비가 내린다는 이 고장 제1의 기우제 터이다.

그 외에도 바위의 높이가 100길이나 되고 백정이 도를 닦아 승천하였다는 백길바위(일명 백정암), 과거에 급제자가 많이 나오게 하였다는 문필봉, 고을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세운 나옹바위 등이 저마다의 전설을 간직하며 산재하고 있는 영산(靈山)이다.

4) 갑장산은 상산 문학의 산실이다.

갑장산은 고려시대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 서하(西河) 임춘이 산사에 머물면서 시를 남겼고, 후대로 상주 선비들이 유상처가 되어 누정(樓亭)문학을 꽃피운 곳이다.

산 어귀의 신잠(申潛) 목사가 세운 연악서당(원)은 이 지방 유교문화의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1622년 5월에는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 1562∼1635)이 당시 상주목사 조찬한을 초청, 4박5일간 시회를 개최하여 상산 최초의 공동시집인?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을 낳게 하고 나아가 도남동 무임포에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세워 영남학파를 탄생시킨 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5) 상산 제1의 기우제 터

연악산이라 함은, 갑장산 꼭대기의 동북편 부근에 ‘용지(龍池)’라는 못이 있어 일명 ‘구룡연(九龍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샘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또한, 이 구룡연에는 옛날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리’라고도 한다.

이 곳은 겨울에 아무리 눈이 오더라도 단 번에 녹아 버리고, 바람도 한 점 없어서 이 곳에 묘(墓)를 쓰면 당대에 천석꾼과 정승이 난다고 하여, 밀장(密葬)을 많이 하였는데, 묘만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비만 오지 않으면 이 근처 사람들이 으레히 이 곳을 파 보게 되었다. 또, 날이 가물 땐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바로 상산 제1의 기우제 터이기도 하다.

기우제문으로는,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상주목사를 대신하여 사직단(社稷壇)⋅노음산(露陰山)⋅우담룡(雩潭龍)⋅연악산(淵嶽山) 등 네 곳의 ‘기우제문(祈雨祭文)’을 지었으며, 그의 아들 임하(林下) 이경유(李敬儒)도, ‘제연악기우문(祭淵嶽祈雨文)’을 남겼는데, “연악(淵嶽)은 하늘 높이 우뚝하게 노악산과 서남방으로 대치하여 상주민이 우러러 볼 만큼 그 신령함이 밝고도 밝다. 무릇 수재(水災)나 한재(旱災)의 이변에는 반드시 이 산에 기도하였는데, 그 응함이 빨라 비를 호소한 즉 비가 오고 개이기를 빈 즉 개어서, 소원을 비는 제를 올려 거의 감응치 않은 해가 없었으니 이는 연악(淵嶽)이 영험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초은(樵隱) 조기원(趙基遠)도 연악의 공택(功澤)을 지적한 바 있다.

6) 연악구곡은 상산선비의 유상처(遊賞處)

 

                                                                                    연악구곡

상주에서 유일한 구곡(九曲)인 연악구곡(淵嶽九曲)은 상주시 지천동 지천계곡(상주남부초등학교 ↔ 갑장사 밑)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조사 보고된 경북의 구곡 현황(경북도⋅경북대 퇴계학연구소 공동조사)에는 6곳이 조사된 안동, 5곳으로는 문경, 4곳으로는 영주⋅봉화, 2곳은 영천⋅청도⋅성주이며, 1곳은 포항⋅경주로 조사 보고 되었다. 상주에는 없는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최근, 상주고교 김정찬 교사(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가 연악구곡기(淵嶽九曲記)의 발견으로 소개되었다. 연악구곡기는 1601년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 1562∼1635)의『남계집(南溪集)』에 최초로 이름을 얻어 이는 상주에서 유일한 구곡이기도 하다.

구곡(九曲)의 기원은 송나라 주자(朱子)가 무이산(武夷山, 福建城, 세계복합유산 100선)에서 무이구곡을 설정하여『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남기면서 구곡(九谷)은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문하에서 산수가 빼어난 곳을 지정하여 구곡시(九谷詩)⋅구곡도(九谷圖)를 남겨 성리학의 적통을 이으려고 해 왔다.

갑장산의 연악계곡에 있는 연악구곡은 다음과 같다.

즉, 갑장산 어귀인 지천솔밭을 들어서면서부터 연악구곡이 시작된다. 제1곡은 탁영담(濯纓潭)으로, 갓끈을 씻을 정도로 깨끗한 물이 고여 있는 곳에서 유래되었다. 제2곡은 사군대(使君臺)로서, 조찬한(趙纘韓) 상주목사와 함께 유상(遊賞)한 곳을 기념한 뜻에서 명명하였다. 1곡에서 300m거리이다. 제3곡은 풍암(楓巖)으로, 바위 주위에 돌단풍이 많아서 붙인 이름이며, 2곡에서 600m 거리이다. 제4곡은 영귀암(詠歸巖)으로,‘시(詩)를 읊고 돌아오다’라는 논어(論語)에서 따 왔으며, 3곡에서 200m 거리로, 연악서원 중건기에는,‘수석이 맑고 기이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5곡은 동암(東巖)으로, 바위의 형태가 동향(東向)이며, 4곡과 200m이다. 도깨비도로 밑이다. 제6곡은 추유암(楸遊巖)으로, 가을에 놀 만한 곳이라 하여 이름하였으며, 5곡에서 약 200m 거리이다. 큰 바위 밑에 담(潭)이 형성되어 물이 가장 많이 고여 있는 곳이다. 도로 밑 절벽 바위에는 초서(草書)로 3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자가 추유암(楸遊巖)인데 이를 종전까지 구유음(龜遊陰)으로 오독(誤讀)하여 왔다. 제7곡은 남암(南巖)으로, 제1곡에서 남쪽에 해당되는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곡에서 200m의 거리이다. 갑장산의 계곡과 와목동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되는 곳의 바로 하류이다. 제8곡은 별암(鱉巖)으로, 바위의 모양이 자라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7곡에서 갑장산 쪽으로 700m 상류이다. 좌우로 큰 바위가 있고 물이 고여 있으며, 용흥사 절에 물 맞으러 간다는 곳이기도 하다. 제9곡은 용추(龍湫)로, 용이 물에 잠길 만한 곳이라 한다. 별암에서 700m의 거리로 최상류이다. 1곡인 탁영담에서 9곡까지의 거리는 대략 3.4㎞로서,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지난 2003년도 태풍 루사의 피해로 인한 복구공사를 하면서 일부에는 원형이 변형된 곳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또한 이 지천계곡에는 최근까지 무려 12개의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2. 충효열의 고을

1) 강신(姜紳) 불천위 사당(不遷位祠堂)

상주시 신봉동 284-2(3통 회관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풍판)으로 1635년(인조 13)에 건축된 강신(姜紳, 1543∼1615)의 불천위 사당(不遷位祠堂)이 있다.

본관은 진주(晋州)로, 아버지는 강사안(姜士安)이다. 생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며, 생모는 임간(任幹)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의간공(毅簡公)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이다.

1567년(명종 22)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1577년(선조 10) 정축(丁丑) 별시(別試)문과에 갑과(甲科) 장원(壯元) 급제하였다. 1589년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晉興君)에 봉해졌다.

이조낭관⋅홍문관직을 역임하고, 1592년 승지‧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함께 왜군을 격퇴한 뒤에 1602년 경기도관찰사, 1609년 우참찬, 다음 해 좌참찬을 역임했으며, 기로소에 들었다.

2) 영수암은 정기룡장군의 상주 가판관 부임지이자

상주성 수복 전투의 비밀전략회의 거점지였다.

임진왜란 때 육전의 명장인 삼도수군통제사 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 1562∼1622)장군이 당시 상주성의 함락으로 무주공산이 된 상주목의 가판관(假判官, 임시판관, 종5품)으로 부임한 곳이 영수암(永修菴, 暎水庵)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하나, 용흥사에서 갑장사 가는 길목 2㎞ 지점의 넓은 공지에 대숲이 있다. 여기에는 미미하게 축대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으로 추정을 한다. 영수암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상주 가판관으로 발령을 받아 취임을 한 곳이며, 또한 의병소로도 유명한 암자였다고 한다.

1592년 11월 중순에, 당시 관병장(官兵將) 김광복(金光復)과 의병장 김각(金覺) 등의 영접을 받은 다음, 선조 임금으로부터 상주성수복 전투의 밀명을 받고 비밀 작전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의 결정한 비밀 작전회의 거점지였다.

『상산지(商山誌)』에는, 수양서당(修陽書堂) 뒤 1리(里) 지점의 산에 있으며, 별곡(別曲)이 동남쪽으로 통활(通豁)하고, 임진왜란 때 정기룡 목사가 본 주(州)에 도임할 때 이곳으로 왔으며, 유지(遺址)가 있다고 한다.

3) 김범 정려각(金範 旌閭閣, 1512∼1566)

갑장산 아래 가장동 268번지에는 1635년(인조 13)에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후계(后溪) 김범(金範, 1512∼1566)의 정려각이 있다.

본관은 상산(商山)으로, 장사랑 윤검(允儉)의 아들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후계(后溪) 또는 동계(棟溪)이며, 진사시에 장원을 하였다.

효성이 출천하여 몸소 약이나 음식을 다리고 삶고 찌면서 노비에게는 일체 시키지 않았다. 어버이 질환에 대변(糞)의 맛을 보고 병의 증세를 판단했으며, 또한 산제(山祭)를 지내며 정성을 다하니 어느 날에는 산노루가 스스로 들어오는 기적도 있었다.

1633년(인조 11)에 정려가 내려지고, 1635년에 각(閣)을 세워 포상하였다.(가장동)

4) 호랑이를 감동시킨 강원(康源)의 효성

재령강씨인 강원(康源)은 갑장산 남록의 양촌에 산 사람으로 대략 300여 년 전 사람이다. 강효자가 그의 어머니 시묘(侍墓)를 할 때의 전설이다.

어느 날 강효자가 급한 볼 일이 있어 집에 잠시 들렀다가 묘소를 가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 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헤엄을 칠 재주도 없으면서 오로지 시묘(侍墓)할 생각만 하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거센 물살에 강효자는 떠내려가게 되었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일심으로 신령님께 기도를 하기를 ‘제 목숨 하나 아깝지 않사오나 어머님 혼자 계시니 일을 어찌 하오리까!’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위급한 찰나에 어디서 왔는지 큰 호랑이가 물로 뛰어 들어 강효자를 구출하고 또한 어머니의 묘소까지 업어다 주었다.

어느 날은 시묘 중 강효자가 이리떼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또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 날의 그 큰 호랑이가 달려들어 강효자를 구출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이는, 그동안 강효자가 지극정성을 다한 효성 때문인지 미물도 강효자의 효성에 감동한 때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찬탄하였고, 끝내는 조정에서 알게 되자, 1755년(영조 31)에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양촌동)

5) 선산김씨 열녀각(善山金氏 烈女閣)

상주시 신봉동 봉강서원 옆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풍판)으로 1506년에 건축된 선산김씨 열녀각이 있다. 대사헌 강형(姜詗, 1450∼1504)의 처(생몰 : 1656∼? )이며, 군수 김승경(金承慶, 본관은 선산)의 딸이다.

남편 강형은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신주를 묘(廟)에 안치하려는 데 반대하다가 그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1504년(연산 10) 세 아들과 사위인 허반(許磐)과 함께 능지 처참을 당하였다. 이에, 부인은 한 달 동안 먹지 않고 슬피 울다가 죽었다. 1506년(중종 1) 정려를 받고, 1507년(중종 2)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신봉동)

6) 채씨 열녀각

채씨 열녀각은 갑장산의 남쪽 기슭아래 양촌동에 있다. 1860년(철종 11) 재령 강씨 문중에서 마을 앞에 세웠다가 1957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열녀 채씨는 강치목(康致穆)의 처이다.

그녀는 18세에 평소 허약하던 남편과 시부모를 섬기면서 가정사에 충실하였다. 남편의 건강을 위해 평소에 음식, 복약, 의복, 침구 등을 보살폈으나 병이 깊어 결국 남편은 자리에 눕게 되었다.

부인 채씨는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으나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되자 부랴부랴 염습할 수의를 손수지어 정중하게 장례와 삼우를 마치고는 빈소에서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이 내용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재령강씨 문중에서는 각(閣)을 세웠다.(※ 열녀는 두 지아비를 모시지 않는다는 강한 윤리의식)(양촌동)

 

Ⅲ. 갑장산의 설화와 전설

1. 상사 바위에 얽힌 애달픈 사연

옛날 어떤 젊은이가 수도를 하러 이곳을 찾았다. 그의 고향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인생무상을 느끼고 속세를 떠나 수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젊은이를 기다리던 여인은 그리움에 지쳐서 죽고 그의 혼은 구렁이가 되어 생시에 사랑하던 젊은이를 찾아와 그의 몸을 칭칭 감아 버렸다. 수도에 몰두한 젊은이는 몸이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떠니 구렁이는 사랑하는 연인임을 말하면서 죽어서 함께 살자고 하였다. 그러나 젊은이는 수도중 이었기에 현혹되지 않고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한참을 외니 구렁이는 힘이 빠지는 듯하더니 결국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날이 밝고 해가 떴다. 젊은 수도승은 간밤의 번뇌를 씻어 버리려는 듯 절 앞에 있는 바위 위에서 멀리 바라보다가 절벽아래 구렁이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젊은이는 여인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상사바위(상사암)?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해온다.

 

2. 수도승을 짝사랑한 여승

지금부터 약 600년 전의 일이다.

어느 가을날 이름도 없는 수도승 한 분이 갑장사를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이 절에는 그전부터 예쁜 여승이 있었는데 늠름한 수도승에 반하여 짝사랑을 하게 되었다.

고민에 빠진 여승의 심신은 초췌해지고 말 못하는 인고(忍苦)의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 수도승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에 이르니 여승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였다.

드디어 이별의 날이 왔다.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고 헤어져야 하니 여승의 마음은 미칠 지경이었다. 여승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늘 괴로울 때마다 찾던 바위의 벼랑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수도승이 좁은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스님 한번만 뒤를 보아줘요?

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골짜기에 울렸다. 비단 폭을 찢는 듯한 여승의 외침에 수도승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쳐다 보았다. 그 순간 수도승의 눈에는 흰 비단천이 벼랑 끝에서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수도승은 발길을 돌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만 외면서 걷고 있었다.

인생은 뜬구름이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인생은 무상하다는 건지..... 갑장산 상사바위는 애절한 전설을 간직한 채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3. 백질바위

갑장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거대한 기암괴석이 하나 보인다. 이 바위를 백정암 또는 백질암이라 부른다.

옛날 어떤 노인이, 마음을 정제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정성을 다해 천일기도를 마치고 그 벼랑에서 뛰어 내리면 신선이 된다는 말을 듣고 천일기도에 들어갔다. 그 노인은 많은 역경을 견디어가며 수도하던 중 끝까지 버틸 수 없다는 마음에 벼랑 아래로 떨어지자니 수도가 부족하여 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 때 마침 백정 한 사람이 고리를 만들 버들을 구하러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산중에서 우는 소리를 들은 백정은 그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로 이 산중에서 울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노인은 그 간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백정은 자신이 노인의 뒤를 이어 수도하고 신선이 되기로 작심하였다. 과연 백정은 기한을 다 채우도록 열심히 수도하였는데 벼랑에서 몸을 날리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이 바위는 그 때부터 백정암 또는 백길이나 된다하여 백질암이라 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갑장사에 머물던 나옹선사의 신통력

나옹선사가 갑장산에 머물던 어느 봄날, 우물가에서 상추(치)쌈을 씻고 있었다. 그때 나옹선사는 아득하니 남쪽하늘을 바라보더니 씻고 있던 상추 잎으로 남쪽 해인사를 향하여 물을 뿌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 해인사에 큰불이 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에 불이 옮으려던 참이었는데 청천백일에 소나기가 내려 진화되었다고 하니 이는 곧 나옹선사의 영각과 신통력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어느 때는 상좌들과 한자리에 앉아 계란 반죽으로 떡을 만들어 먹을 때 상좌들에게 떡을 하나씩 수저로 들고 있으라 하고, 잠시 주문을 외우자 들고 있던 떡에서 병아리가 생겨 폴폴 날며 자리에 내려앉았다.

모두들 놀라 멍하니 있는데 선사가 다시 주문을 외우자 금새 병아리는 간 곳 없고 들고 있던 수저에 떡이 하나씩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5. 용흥사 절에 물 맞으로 갑시다.

갑장산을 오르는 연악구곡(淵嶽九曲)의 제8곡인 별암(鱉巖, 바위의 모양이 자라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에 바느질을 해서 살아가는 아낙네가 12개 집안의 치마저고리를 만들어 주면서 남은 옷감을 조금씩 모아 자신의 옷을 만들고 그 옷을 입고 용흥사 절에 물 맞으러 가서 바위에 올라 치마와 저고리를 벗으려는 순간 옷자락이 12갈래로 갈라져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 후부터 이 아낙네는 내 물건이 아니면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전설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갑장산 용흥사의 유래(명당을 잡았다는 전설)

갑장산 아래 마을에 사는 부농의 집안에 나이 드신 어른이 계셨다. 그 어른이 젊었을 때는 매우 가난하여 나무를 해다 팔아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른 사람보다 나뭇단이 크고 좋아서 미리 예약을 해야 했다. 좋은 나뭇꾼으로 소문이 나자 소득이 늘어나 부자가 되어 3남 2녀를 성가(成家)시켰다.

나뭇꾼은 늙어 세 아들을 불러 놓고, 큰 부자는 하늘이 내지만 작은 부자는 흘린 땀만큼 이루어진다면서 내가 죽거든 갑장산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이 정도 잘살게 된 것이 갑장산 덕분이라 여겼기에......

결국 나뭇꾼은 별세하고 세 아들은 지관과 함께 갑장산에서 선친이 나무를 하고 쉬던 언저리에 유택을 정하여 산역을 시작하였다. 황토흙을 걷어 내고 광중자리에 널쩍한 반석이 나오자 다시 의논을 하여 쪼아 내자고 결정하였다. 시간은 자꾸 흘러 후회도 하였으나 이미 시작한 일이라 그냥 둘 수도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희뿌연 먼지가 솟아 오르고 검광이 이는 순간 새하얀 학 한 마리가 솟아 올라 산을 넘어 갔다.

이어 정신을 차리고는 ‘학이 앉은 곳을 살펴라’ 고함을 지르고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 후 한 젊은이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화개리의 뒷산에 학이 앉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산역을 중단하고 이튿 날 화개리에 장례를 치루니 이 지명이 한자음으로 ‘학이래(鶴而來), 하기래’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설이다.

즉 용흥사는 학이 아니라 용(龍)이 승천한 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용흥사라 붙였다는 전설이다.

 

Ⅳ. 마무리하면서

역사(歷史)란,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로,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한, 인간이 거쳐 온 모습이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넓은 의미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자취를 총칭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본고는 필자가 신흥동 총무담당으로 재직하면서 “갑장(甲長)의 웅비(雄飛)”라는 학습동아리의 발표자료를 갑장산 이야기로 묶어 역사적 사실과 혼(魂), 설화와 전설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상주란 이름을 얻고 사용해 온지 대략 천 오백년의 고도요, 웅주거목이다. 조선초부터 중기까지 200여 년간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영남을 호령한 곳이기에 이는 갑장산이 중심이 되었음에, 이를 스토리텔링화 하는 작업이 병행되었으면 한다.

지금에 와서, 대한민국의 중심도시와 청정도시로서의 이미지 부각과 대한민국 농업의 수도를 자처하는 것과 국제슬로시티에도 가입되었음은 갑장의 웅비(雄飛)에서 비롯되었다고 함은 과장된 표현일런지?

【참고문헌】

1. 상주시,『상주시사』

2.『상산지(商山誌)』

3.『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辭典)』

4. 권태을,『상주한문학』, 문창사, 2002

5. 조희열,『상주지명총람』, 상주문화원⋅상주얼찾기회, 2002

6. 상주군,『상주의 얼』

7. 박찬선,『상주이야기』, 상주문화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