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상주의 서원문화

빛마당 2014. 2. 27. 21:30

상주의 서원문화 (敎育을 中心으로)

강 경 모

목 차

1. 서원 성립의 사회적 배경266

2. 서원 건립과 유형272

3. 서원의 운영과 교육278

4. 결어284

1. 서원 성립의 사회적 배경

서원은 조선시대 관학을 대신하여 발생한 사학으로 학문발전, 유학진흥, 사회교화 등을 이룩하여 조선의 전시대(全時代)를 관류(貫流)하며 우리의 의식구조에서 부터 사회전반에 이르기 까지 서원의 영향은 실로 심대하였다고 하겠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교육뿐만이 아니라 향풍을 단속하고 민심을 교도하며, 지역민의 여론을 선도하여, 크게는 중앙정계와 연결된 당쟁(黨爭)과 향전(鄕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하면서 지방행정에 대한 영향을 미치는 유력한 압력기관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지방의 재지사족과 문벌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교육기관인 서원이 도입, 정착되는 과정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기 선행연구, 조사, 발표된 자료가 많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상주지역의 공식적인 서원 설립 시기가 타 지역보다 다소 늦게 나타나는 문제에 대하여는 이 장에서 밝혀 두고자 한다.

1) 서원제도의 도입

조선개국 후 약 100년간인 태종(太宗)~성종대(成宗代)의 시기는, 새로운 국가제도의 정착기로, 잦은 정변(政變)과 사화(士禍)로 얼룩져, 사회가 혼란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조선이 개국하면서 표방하였던 “전국민(全國民)의 문명화(文明化)”를 이루기 위한 관학교육(官學敎育)의 확대실시(擴大實施)로 고을 마다 향교(鄕校)가 설립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의 수급과 풍화(風化)가 잘 실시되었으나, 약 100여년이라는 기간을 거치면서, 관학의 쇠락과 새로이 출현한 신진사대부들의 거듭된 참화로 이들의 낙향은둔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었으니, 중종 36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고려 말의 문신이며 송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을 향사(享祀)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선현향사와 교육을 함께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세우게 된다.

당시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관학인 향교를 대신 할 지방사학의 출현은 너무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백운동서원은 당시 풍기를 거쳐 간 퇴계 이황과 경상감사 등의 조력에 의해, 서원이 건립 된지 7년 만인 명종 5년(1550년), 정부로 부터 최초로 사액을 받아, 이름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바꾸어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소수서원이 명종으로 부터 사액을 받은 지 2년 뒤가 되는 1552년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임소인 상주관아에서 졸할 때까지 3년간 상주에 대소 18개소의 서당을 세워, 상주민을 위한 흥학에 전념하였다.

상주의 서원 도입 시기를 명종7년으로 기산하는 것은, 신잠 목사가 상주에 부임하여 세운 18개소의 서당을 서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 서원제도를 만든 중국의 송나라의 서원관과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주세붕의 서원관, 그리고 서원보급운동을 제창하였으며 실제로 서원건립에 직접관여 하였던 퇴계 이황의 서원관을 살펴보면, 상주의 서원건립시기를 명료하게 증명 할 수 있다.

2) 중국 송나라의 서원제도

송대 서원의 특징으로, 첫째 학전(學田)이 있어서 제생을 공궤해야 하며, 두번째, 제생의 입학자격은 상당한 학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강학을 위한 원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며, 서원의 명칭에 대하여는 다양하여 정사(精舍)․서당(書堂)․강당(講堂)․강원(講院)․학사(學舍)․서옥(書屋)․서재(書齋)․재(齋)․소학(小學)․서사(書舍)․서장(書莊)․숙(塾) 등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가) 정사(精舍):「후한서유림전(後漢書儒林傳)」의 기록에 정사란 동한(東漢)사람 포함(包咸)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하며, 宋나라의 육구연(陸九淵)이 이것을 본받아「상산정사(象山精舍)」를 지었는데 실제로 그때 사람들은 서원과 정사를 다 같은 것으로 보았다.

나) 서당(書堂): 황적(黃績)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연유하며, 서원의 성질과 같다.

다) 학사(學舍): 강학(講學), 취서(聚書), 수도(授徒)의 집으로, 호중효(胡仲堯)의 학사가 유명하다.

라) 숙(塾): 塾은 원래 사숙(私塾)의 의미가 있으나, 서원의 별칭이 되었다.

마) 소학(小學): 소학이 서원으로 불리게 된 것은「염계서원(濂溪書院)」에서 유래하였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전래되어 오는 서당은, 마을단위로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서 동내훈장의 지도를 받는 곳을 글방 또는 서당이라 한다. 다만 여기에서의 서당은 마을 단위를 넘지 않는 초학위주의 글방을 말하며, 글방은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진, 자기집안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곳이 되며, 또한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그 집안의 학문의 수준에 따라 가르치는 교과가 다르며, “가학”으로 일컬어지는 높은 경지의 학문수준까지도 이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3) 주세붕(周世鵬)의 서원관(書院觀)

중종시대의 흥학진흥책은 권신계열이나 사림계열이나 다 같이 교학에 의한「정사습(正士習)」을 제시하였으나 사림과 권신계열이 인식하고 있는 정사습에 대한 근본적 본질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고 하겠다.

권신계열에서는 “정사습(正士習)”을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도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사림들은 그들의 교학진흥책을 추진하다가 그들 자신이 기묘사화로 일시에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사습”이라는 도학정치의 이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이러한 정서들이 ‘살아나면서 서원건립의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본다.

처음 우리나라에 서원을 건립한 주세붕의 서원관은 그의 죽계지(竹溪志)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교화는 배고픔을 구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며, 이것은 반드시 존현에서 부터 시작하여야 하며, 이에 사당과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죽계는 문성공 안향의 궐리로 이곳에 사묘를 세워 풍기를 교화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서원이 먼저냐, 아니면 사묘가 먼저냐 에서도, 주세붕은 이에 대한 해답을 사묘로 인해 서원이 세워진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교화는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존현이 우선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

주세붕은 이후 내직에 들었다가 명종 4년 7월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워 최충(崔沖)을 배향하였으며, 수양서원은 소수서원과 함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4)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서원관(書院觀)

주세붕에 의해 건립된 사묘인 백운동서원(紹修書院)이 사림들의 장수지소(藏修之所)가 되고 명도술(明道術)을 밝히는 교학의 장이 되어 교화를 이루기를 바랐다. 그러나 퇴계의 서원관은 주세붕과는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본인이 48세 때인 명종3년 10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인 명종4년 12월에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소수서원에 대하여 사액을 내려 줄 것을 청하는 협조의 글「상심방백서(上沈方伯書)」를 감사에게 올리고 현직에서 퇴관한다.

그러나 퇴계선생이 지은 여러 서원의 “서원기(書院記)”나 서원찬시(書院讚詩) 등에 나타나는 글들에서 서원관을 요약한다면, 가장 먼저 서원은 강명도학(講明道學)의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하는 사자(士子)의 장수처(藏修處)로, 반드시 지덕(知德)을 겸비한 산장(山長)이 있어, 유생을 창솔(倡率)하여야만 도술(道術)이 불분하고, 학자가 추향(趨向)을 알게 되며, 만약 산장이 없다면 서원이 있어도 아무 소득이 없다고 하여 지덕(知德)을 겸비한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경상감사에게 소수서원의 사액을 요청하는「상심방백서(上沈方伯書)」에도 잘 나타나 있으니「탁연위세사표자(卓然爲世師表者)」라 하여 훌륭한 인물의 소유자를 산장으로 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

다음으로 서원은 장수지소로 궁행심득(躬行心得), 명체적용(明體適用)을 수기의 본으로 삼아, 수기와 과거를 내외, 본말, 경중, 완급으로 대비하여 논하고 있으며, 과거에 대하여 ‘서원본의 불위습거업설야(書院本意 不爲習擧業設也)’라 하여 과거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가지고 있다 하겠다.

또한 주세붕은 존현은 교화의 근본이라 하였으나, 퇴계는 사묘와 서원을 하나로 보았으며 나아가 사묘는 서원에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었으니, 사묘는 유생에 있어 증식(矜式)과 흥기지심(興起之心)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현(祀賢)이 절대적으로 필수결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영천의 이산서원(伊山書院)의 건립과정에 잘 나타나 있다. 다만 배향인물에 대하여는 도학위주로 당연히 사림의 사표여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 성주목사 노경인(盧景麟)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다시 환언하면 서원은 기본적으로 유생을 위한 강도처이며, 사묘는 유생의 긍식과 흥기심을 기르기 위해 도학자를 배향하고 제향(祭享)하는 것으로 보아 사묘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2. 서원 건립과 유형

1) 장수(藏修) 기능시기(機能時期)

우리나라에 서원제도가 도입된 시기를 명종 5년(1550년) 소수서원에 사액이 내려진 것을 기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대한 사액이 내려지면서 시작된 서원 보급운동은, 엄청난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는 명종 대에 29개소였던 서원 건립이,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124개소로 불어나, 기하급수적으로 서원이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은 17개 서원으로, 명종 대에는 4개 서원에 불과하였으나,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사액 또한 13개 서원으로 불어나게 된다.

사액된 이들 17개 서원의 주향(主享)인물에 대하여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삼국시대인 백제 1인. 고려시대 4인. 조선시대 7인. 중국 2인으로 총 14인이다. 이 중 경북 성주의 천곡서원이 증이천(程伊川)을, 함경도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공자를 배향하여 외국인이 2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함흥의 문회서원은 공자를 배향하였는데, 성균관과 각 지방의 향교에 주향자로 배향되어있는 인물인 공자를 지방의 서원에서 다시 주향자로 배향한 것이 특이하며, 첩설(疊設)된 인물 또한 세 분으로 정몽주(鄭夢周)가 영천의 임고서원과 개성의 숭양서원에 배향되어 2곳, 조광조(趙光祖)가 경기도 양주의 도봉서원과 전남 능주의 죽수서원의 2곳에 배향되었으며, 김굉필(金宏弼)이 전남 순천의 옥천서원과 황해도 서흥의 화곡서원에 배향되어 2곳이다.

壬辰倭亂以前의 賜額書院

書 院 名

主享者

創建年度

賜額年度

地域名

紹修書院

安 珦

中宗癸卯(1543)

明宗庚戌(1550)

경북 영주

首陽書院

崔 沖

明宗己酉(1549)

明宗乙卯(1555)

황해 해주

臨皐書院

鄭夢周

明宗乙卯(1555)

明宗乙卯(1555)

경북 영천

灆溪書院

鄭汝昌

明宗壬子(1552)

明宗丙辰(1556)

경남 함양

文倉書院

李 珥

創建 未詳

宣祖戊辰(1568)

황해 백천

氷溪書院

金安國

明宗丙辰(1556)

宣祖丙子(1576)

경북 의성

文會書院

孔 子

明宗癸亥(1563)

宣祖丙子(1576)

함북 함흥

崧陽書院

鄭夢周

宣祖癸酉(1573)

宣祖乙亥(1575)

경기 개성

道峯書院

趙光祖

宣祖癸酉(1573)

宣祖癸酉(1573)

경기 양주

玉山書院

李彦迪

宣祖癸酉(1573)

宣祖甲戌(1574)

경북 경주

義 烈 祠

成 忠

宣祖丙子(1576)

宣祖戊寅(1578)

충청 부여

川谷書院

程伊川

中宗戊子(1528)

宣祖癸酉(1573)

경북 성주

金烏書院

吉 再

宣祖庚午(1570)

宣祖乙亥(1575)

경북 선산

陶山書院

李 滉

宣祖甲戌(1574)

宣祖乙亥(1575)

경북 예안

竹樹書院

趙光祖

宣祖庚午(1570)

宣祖庚午(1570)

전남 능주

玉川書院

金宏弼

明宗甲子(1564)

宣祖戊辰(1568)

전남 순천

花谷書院

金宏弼

宣祖朝 建賜

壬辰倭亂 燒失

황해 서흥

위의 서원들이 사액되어, 장려될 당시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사문(斯文)의 진흥과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강박(講學)”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보여 진다.

명종 7년(1552년)상주의 목민관으로 부임한 신잠(申潛)은, 세조조의 명신인 신숙주(申叔舟)의 현손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오랜 기간 관직을 떠나 있다가,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재임중 명종 9년(1554년)12월에 상주의 임소에서 사망하였다.

신잠(申潛) 목사(牧使)가 재임한 3년간 상주에 대소 18개소의 서당을 세워 흥학(興學)을 장려한 목민관으로, 상주에 서당을 세우면서 “주문공(朱文公)의 제도”를 따라, 그곳의 유력자를 원장으로 천거하여 학사(學舍)의 운영과 강학을 하게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설립과 운영방식은 앞의 宋나라의 서원제도에 언급된 것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당시 하나의 지방행정 단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서원이 세워진 곳은 상주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하겠다. 이 시기를 지나 성숙단계로 접어들면서 서원들은 저마다 배향사장(配享師長)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서원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이 시기를 서원제도의 제 1기(16세기 중엽)로 분류하며, 이 시기는 강학과 선현에 대한 향사의 기능이 결합을 시작하는 불완전 결합이라고 보며 오히려 선비들의 장수하는 시기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하겠다.

2) 향사(享祀) 우위(優位)의 시대

위의 서원 도입기는 서원은 근본적으로 사문의 진작과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강학우위(講學優位)」의 기능이 강조되고 이러한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임․병(壬,丙)의 양난(兩亂)을 겪고 난 이후의 서원들은, 그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강학보다「향사우위(享祀優位)」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서원 향사인물에 대하여 교육적 기능을 일차적으로 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인데, 인물위주의 배향에 치우치게 되자 서원 배향인물에 대한 시비가 일게 되고, 또한 사문(斯文) 유공인물이 아니더라도 가하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래의 교육과 장수(藏修)의 목적이 변질되면서, 단지 사사로운 명예를 드러내는 기구로 전락하면서 서원의 남설(濫設)․첩설(疊設)의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 하였다. 이를 시기별 서원 설립과 사액 수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년대별 원(院)·사(祠)의 건립 및 사액일람표

구분

건립수

사액수

中宗以前

中宗(1506~1544)

仁宗( 1545 )

明宗(1546~1567)

宣祖(1568~1608)

13

1

-

17

82

1

-

-

3

21

光海君(1609~1622)

仁祖(1623~1649)

孝宗(1650~1659)

顯宗(1660~1674)

肅宗(1675~1720)

景宗(1721~1724)

英祖(1725~1776)

正祖(1777~1800)

38

55

37

72

※327

29

159

7

15

5

10

44

131

-

13

13

※ 純祖(1801~1834)

憲宗(1835~1849)

哲宗(1850~1863)

高宗

(大院君執政期1864~1873)

年代未詳

1

1

1

1

62

1

1

1

1

-

合計

903

270

※ 1. 숙종 · 경종 · 영조 대의 건립수 는 숙종40~영조14년 사이에 건립된 원사로 영조14~17년 사이에 훼철된 서원을 서원등록(書院謄錄)에서 조사 포함(숙종 21, 경종 19, 영조 137개소).

2. 조두록(俎豆錄)은 영조 말에 편찬된 것으로, 순조 이후에 대하여는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기재된 숫자임.

3) 서원(書院) 정리기(整理期)

서원에 대한 남, 첩설의 폐단은 일찍부터 논의 되어 왔지만 재지사족과 유림의 완강한 저항으로 숙종대와 영조대에 시행한 서원의 정비는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남, 첩설을 용인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았나 한다.

고종의 등극과 함께 섭정을 시작한 대원군은, 고종 2년(1865년) 3월 29일 대왕대비의 전교로,「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명하고, 고종 8년(1871년) 신미 3월 9일 전국 600여 개소의 서원 가운데 ①문묘종사유현(文廟從祀儒賢) ②충절대의탁연자(忠節大義卓然者) ③백세숭보자(百世崇報者)로서 일인일원의 원칙하에 전국 47 서원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를 명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辛未存置四十七書院>인 것이다.

‘서원을 설립함에는 도학이나 충절의 공이 백세토록 이어지는 공이 있는 자에 대한 논의를 한 연후에 비로소 배향하여야 함에도 근래 이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서원설립의 본뜻이라 하겠는가.

또한 한 사람만을 위한 서원이 간혹 서너 곳이나 되는 것은 진실로 괜찮은 일인가. 지금부터 도학이나 충절에 대한 공적을 논의 하여 이러한 도학과 충절지사 이외에는 설치하지 말 것이며, 비록 설립된 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한사람에 하나의 서원에 배향된 이외에 중첩되게 설립된 서원도 또한 보전할 수 없다.

엄중히 살펴 도학과 충절지사 이외의 인사가 망령되이 배향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이를 금석의 전고로 하라.’

고종 8년 전국을 휩쓴 서원 훼철령은 전국 47개소의 서원이 남게 되었으며, 상주 또한 조선초의 명재상인 방촌 황희를 배향한 옥동서원과, 서인의 영수요 우복 정경세의 사위인 동춘당 송준길을 배향한 흥암서원의 2곳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훼철되게 되었다.

4) 상주의 서원 건립시기

상주는 서원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사용된 서원은 도남서원이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서원이다. 도남서원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7년 만인 선조 39년인 1606년으로, 타 지역보다는 늦은 시기에 해당 하지만, 실질적으로 상주에 서원이 건립된 시기는 매우 이른 시기로, 상주에 시설된 사학을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주의 서원건립 시기별 분류

서원명

주향자

건립시기

시기별 구분

비고

하곡서당외 17개소

없음

1552년(명종7)

書院導入期

(제1기)

배향우위시대

도남서원

국조오현

1606년(선조39)

옥성서원

김득배,신잠

1633년(인조11)

濫,疊設期

(제2기)

향사우위시기

근암서원

홍언충.이덕형

1669년(현종10)

임호서원

표연말 외

1691년(숙종17)

화암서원

김안절

1692년(숙종18)

흥암서원

송준길

1702년(숙종28)

연악서원

박언성

1702년(숙종28)

속수서원

손중돈

1703년(숙종29)

봉산서원

노수신

1708년(숙종34)

운계서원

성 람

1711년(숙종37)

옥동서원

황 희

1714년(숙종40)

효곡서원

송 량

1735년(영조11)

지강서원

정국성외

1745년(영조21)

청암서원

유 포

1752년(영조28)

도안서원

김우태

1783년(정조 7)

귀호서원

김선치

1784년(정조 8)

웅연서원

채귀하

1795년(정조19)

낙암서원

김담수

1796년(정조20)

서산서원

김상용

1797년(정조21)

봉강서원

강회중

1817년(순조17)

衰退期

(제3기)

서원정비기

서원명

주향자

건립시기

시기별 구분

비고

하곡서당외 17개소

없음

1552년(명종7)

書院導入期

(제1기)

배향우위시대

도남서원

국조오현

1606년(선조39)

옥성서원

김득배,신잠

1633년(인조11)

濫,疊設期

(제2기)

향사우위시기

근암서원

홍언충.이덕형

1669년(현종10)

임호서원

표연말 외

1691년(숙종17)

화암서원

김안절

1692년(숙종18)

흥암서원

송준길

1702년(숙종28)

연악서원

박언성

1702년(숙종28)

속수서원

손중돈

1703년(숙종29)

봉산서원

노수신

1708년(숙종34)

운계서원

성 람

1711년(숙종37)

옥동서원

황 희

1714년(숙종40)

효곡서원

송 량

1735년(영조11)

지강서원

정국성외

1745년(영조21)

청암서원

유 포

1752년(영조28)

도안서원

김우태

1783년(정조 7)

귀호서원

김선치

1784년(정조 8)

웅연서원

채귀하

1795년(정조19)

낙암서원

김담수

1796년(정조20)

서산서원

김상용

1797년(정조21)

봉강서원

강회중

1817년(순조17)

衰退期

(제3기)

서원정비기

위 표와 같이 상주는 처음 서원 제도가 도입되는 시기 지방의 목민관(목사 신잠)에 의해 사학교육제도가 도입되어, 제2시에 해당하는 숙종대에 가장 많은 8개소가 건립되었으며, 다음으로 정조 년간에 5개소의 서원이 건립되어 이 지역의 서원 건립은 숙종~정조대에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겠다.

3. 서원의 운영(運營)과 교학(敎學)

1) 서원의 조직

서원의 운영에는 크게 2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선현에 대한 향사와 또 다른 하나는 교육이다.

서원의 두 가지의 기능을 조율하고 원활히 운영하기 위한 재정의 조달은 첫째, 관부에서의 부담과, 둘째, 서원자변(書院自辯)하는 방법, 셋째 관,사공변(官,私共辯)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서원들은 설립당시부터 일정의 전답을 보유하여 영구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또한 사액을 받기 위한 노력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모든 서원들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소요경비의 대부분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서원으로서는 官으로부터 간섭에 상당히 여유로웠을 것이다. 이후 서원들이 그들의 원규(院規)를 갖추면서 경영의 최고 책임자를 호칭하는 여러 가지 이름들을 사용하였다고 보여 진다.

그 명칭에는「산장(山長)」·「원장(院長)」·「동주(洞主)」등 다양한 이름들이 사용되었으나 아마도「산장(山長)」으로 불리우던 것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원장(院長)」이라는 명칭은 송나라 인종(景泰年間)때 숭양서원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동주(洞主)」라는 명칭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사용하였던 것 같다고 하였다.

다만 여기에서는 서원의 운영에 관한 것은 생략하고 교육을 위한 조직의 명칭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원은 원장이라는 명칭이 보편화 되어 있지만,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세운 상주의 서당들은 아직도「산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 밖의 조직과 명칭은 다음과 같다.

도청(都廳) : 운영의 총책임자.

구관유사(句管有司) : 재정과 운영담당.

향유사(享有司) : 향례를 담당.

제유사(祭有司) : 〃 〃

당장(堂長) : 원무(院務)를 맡는 사무장(事務長) 격의 직위

제장(齋長) : 학생장(반장)격.

직일(直日) : 그 날의 당번

2) 교육으로서의 강(講)

교생들에 대한 교육을 위한 교재는 유교경전(儒敎經典)을 사용한다, 이 가운데서「논어·대학·중용·맹子」의 사서가 주된 교재이고, 오경과 성리서, 그 외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위한 경(經)들이 해당되며, 교육「강(講)」이 주된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

교육에 있어서 교재의 범위와 학습의 순서가 있는 법으로, 이는 퇴계의 이산서원 원규에 잘 나타나 있다.

‘사서오경을 근본으로 하고 소학이나 가례는 문호로 한다’고 하여, 훗날 서원의 교육과정에 대한 기본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로 차례로 공부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학에서 규모를 정하고, 논어에서 근본을 세우며, 맹자에서는 그 발전을 터득하고 난 뒤, 중용에서 古人의 미묘한 사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講)이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의리를 묻고 답변하는, 전통적인 교수법으로, 강에 대한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서원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강으로는, 순강(旬講), 망강(望講), 월강(月講)이 있어, 순강은 한 달에 3번, 망강은 2번, 월강은 1번의 강회(講會)가 개최되는 것이다.

강회에서 경전에 대한 암송을 아무리 잘 하여도 문리를 터득하지 못하면 이는 단순한 암기일 뿐으로, 학문은「박학지(博學之)」,「심문지(審問之)」,「신사지(愼思之)」,「명변지(明辯之)」하여야 한다.

강회(講會)의 시작과 끝날 때는 백록동규(白鹿洞規)나 향약(鄕約)을 낭독하는 것이 상례이며, 강생(講生)은 차례로 사석(師席)에 나아가 두번 절하고 꿇어앉아, 주어진 글을 읽고 응답을 한다. 응답이 끝나면 다시 절하고 물러나면 사석(師席)의 평점을 기록하여 둔다. 이에 대한 평점은 다음과 같다.

<講讀의 評點> : 대통(大通)․통(通)․야공(略通)․조통(粗通)불(不)의 5단계와, 통․약․조․불통의 4단계의 평가척도로 하였다.

- 대통(大通) : 구독과 설명에 막힘이 없어, 다른 문장에 까지 두루 미치어 밝게 통한다.

- 통(通) : 더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어도 구독에 상명하고, 설명이 간중한 것.

- 약통(略通) : 밝게 알고, 철저하게 통하지는 못하지만 구절의 선후가 분명하고, 문의가 통하는 것.

- 조통(粗通) : 구독에 상명하고 문장의 큰 뜻은 알고 있으나 설명이 미진한 것,

- 불(不) : 낙제점.

- 강석도(講席圖) -

서원으로서 과거공부에 대한 격려는 강조하지 않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 과업이므로 경전에 대한 강회만을 한 것은 아니고, 제술(製述)에 대한 고과(考課)도 하였으니 이를 삭회(朔會)라고 하며, 초순에는 의․의․논(疑·義·論)을, 중순에는 사․표․송․명(辭·表·頌·銘)을 하순에는 대책과 기를 주로 하였다.

실례로 영천의 임고서원 소장의 고문서인「임고서원강독록(臨皐書院講讀錄)」과「통강도(通講圖)」는 강독에 관한 문서로 강독록에는 강독의 당위성과, 강회시 지켜야 할 조항들을 정하여 이를 실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강회는 지금까지 배운 바를 시험해 보는 기회이며, 또한 석유(碩儒)의 특강을 들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시간으로, 중국의 송나라에서는 당시의 강회를「使四方來學之士 得以傳道 授業解惑焉(사사방래학지사 특이전도 수업해혹언)」이라 하여, 스승에게서 강을 받기 위하여 선비들은 앞을 다투어 모여 들었는데, 육구연(陸九淵)의 상산서원(象山書院), 주희(朱熹)의 무이정사(武夷精舍), 여조렴(呂祖謙)의 여택서원(麗擇書院), 장식(張栻)의 성남서원(城南書院) 등은 당시 중국의 청년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큰 선비들이 강의를 하였던 곳이었으며, 이 강을 듣는 것을 일생의 광영으로 알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중기 경상감사인 김안국(金安國)이 도내 향교를 돌며, 권학에 대한 강을 한 것을 기념하여, 지금도 여러 향교에 권학문(勸學文)을 현액(縣額)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다. 이처럼 대유(大儒)가 서원을 찾을 경우「특강」이 있어, 이때는 그 서원의 제생뿐만이 아니고 인근의 많은 유생들이 참집하여 강을 듣기도 한다. 또한 대유가 특강을 할 때는 장보(章甫)들이 “의관삼열(衣冠森列)”하고 “청자충연(聽者充然)”하다. 고 하여, 강회의 번성함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3) 사 장(師長)

서원교육은 교학의 직분을 가진 명칭과 책임자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교육은 그 서원의 대표자인 원장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서원의 사장은 나라에서 지급하는 녹봉이나, 세속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지만, 한 서원의 책임을 맡은 유사(儒師)는, 유학교육은 사제간(師弟間)의 지식수수(知識授受)가 아닌, 인격적 감화로 결합된 윤리관에 의한 인간형성의 윤리가 강학의 내용보다 우선하는 전인교육이 더욱 중시되는 교육이었다.

이는 서원에 배향된 선현이 바로 교육의 인격적 대상이 되어, 후생들이 흠앙(欽仰)하고 사모(思慕)하는 교육적 감화력이 “학습”이며, 이것이 곧 선현, 선사에 대한 사숙(私淑)인 것이다.

유생들에 있어서 서원의 모든 연장의 유사(儒士)들은 곧 그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며, 또한 집지(執摯)의 예를 올리는 경우에는, 그것이 단 하루의 기간이라 하더라도 평생의 사제관계가 유지되는 것으로, 오늘날의 단순한 지식의 수수만을 의미하는 사제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와 같이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사장은, 산장(院長 · 洞主)으로 산장은 당세의 홍유(鴻儒)로 그 서원의 지주이면서 향당의 사표(師表)여야 한다.

이러한 사장의 경력은 재조(在朝)하여서는 당상관(堂上官)이상으로, 재야(在野)하여서는 중망을 받는 산림으로 도학연원(道學淵源)의 정맥(正脉)을 잇는 다는 포부가 있으며, 학행이 뛰어난 분이어야 한다. 이는 산장의 인물됨이 곧 그 서원의 성가(聲價)를 재는 척도이기도 하였다.

4. 결어

상주는 영남의 인후지지로서 삼한이래, 대 도회로 경제뿐만이 아니라 문화의 결절지로 그 역할을 하여 왔으며, 조선조 성리학의 최고 아카데미즘인 서원문화 또한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일찍 받아들이고 이를 융성시켰으니, 이 지역 교육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하겠다.

서원의 초기 도입단계인 16세기 중엽에 영천자 신잠에 의한 하곡서당을 비롯한 18개소의 서당이 건립된 연대는 명종7년으로, 이 시기 조선 전체의 서원 수가 30여개 미만인 시점이다.

또한 서원건립 제2기에 해당하는 향사우위의 시대인 17세기 초인 1606년(선조 39)에 낙동강변에 도남서원을 세워 성균관보다 4년 먼저 국조5현(國朝五賢)을 배향하여 조선유학의 도통을 정립하여, 서원문화의 백미를 발한 지역이다. 서원교육의 최종목표는 참 선비를 양성하는 데 있었으며, 하나의 경전 자구해석보다는 인성이 함양된 선비로, 거경궁리(居敬窮理)와 존양성찰(存養省察)하는 내적자유(內的自由)와 절의(節義)와 명예(名譽)를 지키는 외적존엄(外的尊嚴)도 함께 갖춘 인격체의 완성을 위한 교육을 시행하였다고 하겠다.

조선조 말의 국난기를 겪으며 또한 새로이 도입된 서양식 교육으로 우리의 전통교육방식인 강학을 통한 사제일체식 교육으로 그 명맥을 지켜가야 할 서원 자체가 본연의 의무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과 우리의 전통교육방식을 전승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