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영남 선비의 위상(位相)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권 태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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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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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 선비의 의미244 1. 선비사(士)자에 함축된 의미244 2. 선현의 선비관245 Ⅱ. 역사상 경상도(慶尙道․嶺南)의 존재 의의247 1. 이름 유래247 2. 경상도(영남)에 대한 평247 Ⅲ. 유학사상 영남의 존재 의의248 1. 유학의 시대적 성향248 2. 영남 사림(士林)에 대한 평250 Ⅳ. 영남 선비의 기풍252 1. 총론(성호 이익)252 2. 시대별 선비상(像)254 Ⅴ. 맺는 말 - 조선시대 영남 선비의 위상261 |
Ⅰ. 머리말 - 선비의 의미
조선시대 영남 선비의 위상(位相․위치와 상태)을 살피는 일은, 먼저 조선 유학사상 영남 선비의 위상을 아는 일인 동시에 영남 선비의 정신을 아는데 기본이 되리라 본다.
이에, 선비에 대한 개념부터 살피고 본론에 임하고자 한다.
1. 선비사(士)자에 함축된 의미
“공자왈, 온것(十)을 미루어 시작(一)에 합함을 선비사(士)라 한다.” 곧, 온것(十)과 시작(一)의 회의문자.
◦ 넓은 데(十)서 간략한 데(一)로 돌아감; 박문약례(博文約禮․널리 학문을 닦아 예의로 요약함.《논어․옹야》
◦ 하나(一)의 이치로 열(十)을 꿰뚫음;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의 도리(忠恕)로써 만사에 통함.《논어․이인》
선비(士)란, 전부를 하나로 귀결시키고, 하나로써 전부를 꿰뚫는 일(學德)을 하는 사람. 선비유(儒)는, 유가의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2. 선현의 선비관
(1) 선비관공자; 살신성인(殺身成仁․자기 몸을 죽여 인(仁, 理․德)을 이룸.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자리 삶(生)을 구하기 위하여 인(仁)을 해치지 않고, 자기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논어․위령공》
증자; 홍의(弘毅․뜻이 넓고 굳셈)
“선비(士)는 뜻이 넓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임중도원(任重道遠․임무는 무겁고 길은 멂)하기 때문이다.”《논어․태백》
맹자; 항심(恒心․떳떳한 마음 곧 항상 지닌 善心)
“맹자왈, 떳떳이 살 수 있는 생업(恒業․직업)이 없어도 항심(恒心)을 지닌 자는 오직 선비(士)라야 능하다.”《맹자․양혜왕上》
◦ 사생취의(舍生取義․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함)
“맹자왈, 두 가지(生과 義)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生)을 버리고 의리(義)를 취하겠다.”《맹자․고자上》
(2) 군자유(君子儒) 지향
“공자가 자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어야지 소인유(小人儒)가 되어서는 안된다.”《논어․옹야》
◦ 군자와 소인의 구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한 마디로 분별하면, 군자는 의(義․의리)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利․이익)에서 깨닫는다. 의리에서 깨닫는 까닭에 항상 의리에 만족하고, 이익에서 깨닫기 때문에 늘 이익에 불만족한다. 항상 의리에서 만족하므로 마음이 너그럽고 넓으며, 항상 이익에서 불만족하므로 늘 근심하고 두려워 한다.”
군자(君子)는 선비의 최고 이상형이다. 같은 선비라도 의리(義)를 추구하는 군자유(君子儒)가 되어야지 이익(利)을 추구하는 소인유(小人儒)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군자의 학문을 할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소인다우면 그 학문조차 곧 이익(명예․부․권력 등)을 추구하는 소인의 학문이 되기 때문이다.
(3) 용사행장(用舍行藏)에 일관된 선비 자세
“공자가 안연에게 일러 이르기를, 써주면 나아가 도(道)를 행(用行)하고, 버리면 은둔하여 도(道)를 지킴(舍藏)을, 오직 나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인저.”《논어․술이》
이는, 나라에서 발탁하여 써주면 유도(儒道)를 행하여 공택(功澤)이 백성에게 미치게 할 것이요, 버리면 은둔하되 유도를 스스로 지키고 후대인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글로 남김을 곧 장(藏)이라 한다. ‘용사행장’을 실천한 분이 곧 공자요 맹자다.(논어․맹자는 유도를 갈무리해 놓은 경전임) 곧, 선비의 처세에 행도(行道)와 수교(垂敎․수훈)의 두 측면이 있음을 밝힌 글이다.
요약하면 선비(士․儒)란, 쓰이어 행도(行道)하거나 안 쓰이어 수교(垂敎)하거나 살신성인(殺身成仁)하여 인(仁․正義․道德)을 수호하고 홍의(弘毅)․항심(恒心)을 바탕으로 한 지조로 사생취의(舍生取義)함을 임무로 여겨 보다 나은 사회를 이끄는 주체로서 학덕을 닦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Ⅱ. 역사상 경상도(慶尙道 ․ 嶺南)의 존재 의의
1. 이름 유래
경상(慶尙)이란 이름은 1314년(충렬왕 원년) 경주(慶州)․상주(尙州)의 머릿자를 따서 지었다. 이곳을 영남(嶺南)으로 일컫게 된 것은 사색당파가 치열할 때 남인(南人)의 본거지가 조령 밑 경상도였기 때문이다.
2. 경상도 <영남>에 대한 평
(1) 경제(敬齊) 하연(河演)의 평
“경상도는 동서남북(經緯) 사이에 토지가 기름지고 생산물이
풍요하며 인물이 번성하기로 다른 도의 배가 된다. 옛날 삼국이 솥발같이 대치하였을 때부터 있어, 신라는 56왕을 거치며 992년의 가장 장구한 역사를 누렸고 고려 왕씨가 하나로 다스려 성대(盛大․조선)에 이르렀다. 이 도는 본디 신라의 옛터요 국가의 근본으로, 충신․효자․의부(義夫)․절부(節婦)․풍류(風流․교화가 행해짐)가 숭상되어 신악(新樂․새로운 악곡)과 문물(文物․예악과 전장제도)이 저절로 태어난 곳이다.”
(2) 인조실록 권12, 4년(1626) 5월 己巳日의 평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영남의 한 도는 선비의 기풍(士習)이 바르고 풍속(風俗)이 바르기로 예부터 일컬어져 왔다.”
(3) 현종실록 권8, 5년(1664) 3월 辛巳日의 평
“전라감사 정만화(鄭萬和)가 아뢰기를, 영남인즉 인심이 돈후하고 성실(敦實)하여 예부터 혁호(革號․혁명)의 변은 없었다.”
(4)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평
“우리 동국에 영남이 있음을 지세(地勢)로써 보면, 중국의 파한(巴漢)과 관중(關中)이 효함(崤函)으로 가로막히고 강한(江漢)을 띠고 있음과 같다.
민물(民物)․풍요(風謠)․예악(禮樂)․교화(敎化)로써 말하더라도 또한 중국의 추로(鄒魯․맹자 공자의 나라)에서 성현(聖賢)이 계속하여 일깨워 선왕(先王․聖王)의 유풍(遺風․풍속과 교화)과 여교(餘敎․후세에 남은 가르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같다.(중략)
일국의 근본이 되어 홍유(弘儒․큰 선비)와 석보(碩輔․훌륭한 신하), 충(忠)․효(孝)․정열(貞烈)로 명성과 품행이 뛰어난 사람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이상을 종합하면, 경상도(영남)는 지리․역사․문화․학문․교육․철학․풍속․인물․국방․산업 등에서 일국의 근본이 되어 온 고장이다.
Ⅲ. 유학사상 영남의 존재 의의
1. 유학의 시대적 성향
孔․孟․荀子代(공․맹․순자대) ; 원초유학(原初儒學)
漢代(한대) ; 훈고학(訓詁學․경서나 고문의 지구 해석, 經學)
唐代(당대) ; 문장 위주의 사장유학(詞章儒學)
宋代(송대) ; 도학(道學)․정주학(程朱學)․송학(宋學)․성리학(性理學)․신유학(新儒學)
한대(노자․장자의 자연주의 사상) 송학(신유학) 발생
당대(불교의 심성철학) ↔ 유학의 정통성 회복,
道統 중시
※ 중국 도통 ; 요․순․문․무․주공․공자․증자․자사․맹자…(단절)…
정자(정호․정이)․주자가 집대성
대내적 ; 인․4단(仁․四端) <인의예지>에 입각한 인도주의적 정치실현
대외적 ;《春秋》의 正名思想(정명사상)에 입각한 의리사상 실현
明代(명대) ; 심학(心學)으로 발전한 양명학(陽明學)
淸代(청대) ; 고증학(考證學)과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삼국시대 ; 고구려 소수림왕2(372년) 태학(太學) 창설
신라시대 ; 유불도(濡佛道) 공존, 화랑정신, 유학은 정경제도(政經制度)의 주축이 됨.
고려시대 ; 불교전성시대와 병행. 입춘, <소림사중수기)
“儒釋二敎 本無異歸焉(유석이교 본무이귀언)”
여 말 ; 송학(정주학․도학․성리학) 도입
안향(최초 주자학자)․백이정․우탁․정몽주(동방이학의 祖)․길재․김숙자 등으로 전승
조선시대 ; 유교(성리학)를 국시로 삼음
<도통(道統) 확립>
안향(최초의 주자학자)․우탁․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조식
( )안은 영남학파 도통에서는 제외시킴.
16세 말, 국론으로 통일됨.
※ 조선의 성리학은 영남 선비에 의하여 도입․보급되고, 집대성 되었다고 봄.
17세기 초(1606), ‘吾道南(오도남)’의 긍지로 도남서원(道南書院) 창설
2. 영남 사림(士林)에 대한 평
(1) 지봉 이수광의 평
“우리 동국의 선유(先儒)로서 문묘(文廟)에 종사된 자는 최문창(최치원)․설홍유(설총)․안문성(안향)․정포은(정몽주)․김한훤(김굉필)․정일두(정여창)․조정암(조광조)․이회재(이언적)․이퇴계(이황)의 무릇 아홉 분이나 정암을 제외하면 다 영남인이니 가히 성대하다 하겠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영남(嶺南)은 인재부고(人材府庫)’라 하였으니 과연 그렇도다.”
(2) 학봉 김성일의 평
“생각하면, 영남은 평소 인재의 부고로 일컬어져 왔다. 1천년의 신라, 5백년의 고려 및 우리 조선 2백년 사이에 충신․효자․영성(英聲․훌륭한 명성인)․의열(義烈)이 청사에 찬란히 남아 절의(節義)의 아름다움과 습속(習俗․풍습과 풍속)의 순후함은 동방의 으뜸이니, 이는 실로 사민(士民)이 다 아는 바이다. 또한, 근래의 일로 말하더라도 퇴계․남명 두 선생이 한 세상에 나란히 나시어 도학(道學)을 이끌로 밝혀서 인심(人心)을 선량(淑)하게 하고 인기(人紀․인륜의 근본)를 부축함을 자기 책임으로 여기니 선비(士子)들이 훈도에 점점 젖어들어 감동하여 분발하고 사숙(私淑)하는 이가 많아졌다”
(3) 영의정 김재로의 평
무신란(1728년․이인좌의 난) 이후 노론(老論)에 의해 영남이 반역향으로 취급될 때, 노론이면서 탕평론자인 영의정 김재로가 조정에서 한 말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영남은 평소 인재의 부고로 일컬어졌으나 지금의 조정에 벼슬사는 이는 아주 끊어져 없고 겨우 있더라도 사풍(士風․선비의 기풍) 또한 벼슬함을 부끄럽게 여긴다.(중략) 무신년의 일은 일종의 잘못을 남긴 유에 불과하니 반드시 사람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믿음직스럽고 정성스러움의 성품은 예의지향(禮義之鄕)에 많으니, 변고가 발생하였을 때 힘을 얻음이 어찌 이곳에 있지 않다고 알리오”
라고 하였다.
(4) 다산 정약용의 평
“나라 가운데 장서(莊墅․장원을 이룬 마을)의 아름다움으로는 오직 영남이 최고가 된다. 까닭에 사대부가 수백년 동안에 액(괴로움)을 만나고도 그 존귀함과 부유함이 쇠하지 않았다. 그곳의 풍속은 각 가문마다 한 조상을 받들어 한 장원을 차지하여 겨레(씨족)가 거처하며 흩어짐이 없으므로 공고함이 유지되고 근본이 뽑히지 않는다.”
요약하면, 경상도(영남)는 고래로 예의지향․인재부고로 국가의 근본이 되어 온 고을이다. 조선 유학(도학․성리학)의 도입도 영남 선비(안향․우탁)에 의해서요, 크게 보급함도 영남 선비(포은․목은․도은․야은․강호 김숙자․점필재․한훤당․일두․회헌)들에 의함이며, 집대성한 선비(퇴계․남명)도 영남인이었다. 까닭에, 유학사상 영남은 도통(道統)의 정통맥을 잇고 있는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자타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도남서원(道南書院)의 묘호를 도정사(道正祠)라 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영남 사대부의 집안은 훌륭한 조상 한 분을 받들어 모시고 겨레끼리 누대로 한 장원을 지키며 살기에 어떤 난관에도 근본이 흔들리지 않아, 충의(忠義)․효열(孝烈)의 미풍양속이 유지되고 본보기가 될 사풍(士風) 또한 쇠함이 없이 생명력을 지녀왔다.
Ⅳ. 영남 선비의 기풍
1. 총론(성호 이익)
“(영남의) 선비(士)를 논하면, 관부의 직위로서가 아니라 실로 한 고을에서 세력있고 명망 높은 씨족이 아니더라도, 비록 신분이 고관일지라도 더불어 가까이 하지 않고 즐겨 선현을 사모함이 심한 까닭에 퇴계(이황)․남명(조식)․서애(류성룡)․한강(정구)․우복(정경세)․여헌(장현광)의 제 선생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이 자손 대대로 이어짐을 다들 우족(右族․지위가 높은 집단)이라 일컫고 선조의 작위 없음은 달갑게 여겨 말하지는 않는다.(중략)
사풍(士風)으로 말하자면, 부지런하고 게으러지 않으며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아 부녀는 반드시 밤에 길쌈하고 선비는 다 짚신을 신는다. 혼인과 상례에는 집안의 형편에 따라 벗과 친지들이 부조하여 집이 망하거나 유리걸식하는 환란을 면한다. 백성은 다 토착민으로 생업에 종사하므로 교활한 도적이 일어날 수 없고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솔선하여 어려운 현장으로 나아가 사생을 돌보지 않는다. 진실로 독서하고 도리를 논하며 품행과 재능이 드러난 자면 옷깃을 여미며 스승으로 존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야말로 풍속이 돈후한 낙토(樂土)의 인의지향(仁義之鄕)이라 일컬을 만하다.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가 귀의할 것인가.”
선비(士)는, 벼슬로 현달함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선현(퇴계․남명․서애․한강․우복․여헌 등)의 학덕을 흠모하여 대대손손 그 정신을 본받아 감을 우족(右族)으로 여기며, 그 기풍은 근면․검소․상부상조․세거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사생취의(舍生取義)하니 영남이야말로 낙토(樂土)의 인의지향(仁義之鄕)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나아가, 성호는 영남의 선비들이 대대로 그들의 신분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음을 밝혀, ‘영남에는 사환(仕宦․벼슬길) 외에 따로 세족(世族․한 고장에 대대로 사는 겨레)이 있어 문학(文學․儒業)을 업으로 삼아 스스로 티없는 삶을 누려 비록 10세(十世)토록 벼슬이 없어도 한 고을의 신망(郡望)을 얻음을 스스로 높게 여기는 유풍(儒風)이 있으니 이는 신라의 골품제(骨品制)가 끼친 영향이라 하고, 선비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조금도 실추시키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라고도 하였다.
2. 시대별 선비상(像)
선비의 덕목이 된 효․충․의․열로 국사(삼국사기․삼국유사)에 방명을 남긴 이들을 일일이 예거할 수 없으나 여기서는 유교 정신을 발양한 몇 분만을 시대별로 살펴 본다.
(1) 신라시대
1) 물계자(勿稽子 ; 나해왕(재위 196~229)조. 삼국사기 열전8, 삼국유사 권5)
◦ <견위치명․見危致命,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침. 논어․자장>
“내 듣기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견위치명(見危致命)하고, 환난을 당해서는 자신을 잊어버리며, 절의만을 지키고 사생을 돌보지 않음이 충(忠)이다.”(유사 권5, 피은)
2) 박제상(朴堤上 ; 눌지왕(재위 417~457)조. 삼국사기 열전5)
◦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3) 원광법사(진평왕조(597~631). 삼국사기 열전5(귀산), 삼국유사 권4)
◦ <세속오계 ; 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以信․臨戰無退․殺生有擇>
유불병진(儒彿並進)
4) 눌최(訥崔, 진평왕조. 삼국사기 열전7)
◦ <지사(志士) 의부(義夫) 입절(立節) ; 見危致命․舍生取義>.
“오늘, 고성(孤城)에는 원병이 없고 날로 위험이 더해지니, 이야말로 진정 지사(志士) 의부(義夫)가 절의를 다하여 이름을 드러낼 때다.”
5) 화랑정신 ; 見危致命․捨生取義
사다함(진흥왕, 화랑, 忠․信義), 관창(태종무열왕, 화랑, 충절),
비녕자(진덕왕,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동시에 忠節을 이룸), 원술(김유신의 아들, 忠), 죽지(태종무열왕, 화랑, 信義, 모죽지랑가), 죽죽(선덕왕, 충효) 등
6) 설총(薛聰 ; 신문왕(재위 681~691)조. 삼국사기 열전6)
◦ <구경(九經, 주역․시경․서경․예기․악기․춘추․효경․논어․소학)을 방언(이두)으로 풀이하여 교육함) ※ 수교(垂敎)
◦ <화왕계․花王戒로 왕의 주색을 경계함 ; 포폄사상(褒貶思想) 고취>
※ 채소권(1480~1547), 花王傳 창작(화왕계계 최초 소설)
7) 대아찬 거칠부, 국사(國史) 편찬<삼국사기 권4, 진흥왕 6년(545)>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국사(國史)는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폄(褒貶․상주고 별줌)을 보이고자 함이니, 사기(史記)를 꾸며 두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
※ <요약>
첫째 ; 충효․순절로 의리실천(殺身成仁․舍生取義․見危致命 ; 공자․맹자의 의리사상)
둘째 ; 설총의 구경석의(九經釋義)․화왕계(花王戒) 및 거칠부의 국사(國史) 편찬으로 수교(垂敎․교훈을 내림)를 행함
셋째 ; 비판정신 앙양으로 화왕계․국사를 통하여 포폄사상을 고취함
넷째 ; 영남을 인재의 부고로 초석을 놓음
(2) 고려시대
1) 역사의식 고취
◦ <김부식(1075~1151․경주), 삼국사기(1145년 완성․50권․官撰), 일연(1206~1287․경산), 삼국유사(5권․私撰)
※ 현존하는 최고본(最古本)의 우리 역사서
2) 의리실천(殺身成仁․舍生取義)
◦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킨 삼은(三隱, 목은․포은․야은, 일설 도은)
◦ 사제간의 절의를 지킨 상산삼충의(商山三忠義). 난계 김득배(忠), 포은 정몽주(난계제자,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고 제문을 남김), 단구재 김후(난계 3종손, 포은 제자,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고 만시(輓詩)를 남김
◦ 살신성인한 형제이절(兄弟二節
백암(白巖) 김제(金濟)는 평해군사로서 조선 혁명에 동해로 숨고, 아우 농암(籠巖) 김주(金澍)는 예의판서로 조선 혁명에 명나라로 망명함
※ 기자(은나라 三仁의 한 분, 조선으로 망명)․백이 숙제(고죽국 충신, 은나라가 망하자 수양산으로 은거)․노중연(전국시 제나라 충신, 진나라에 항거하여 바다로 숨음)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이룸
3) 여말, 도학(道學․性理學)의 보급과 전승
◦ 안향(최초의 주자학자)․우탁․정몽주(동방이학의 祖宗)․길재․김숙자(김종직의 부)로 보급 전승됨
※ 도학의 도통(道統) 성립
※ 인재부고(人材府庫)․추로지향(鄒魯之鄕)의 명예 획득
※ <요약>
첫째 ; 의리를 실천하여 살신성인․사생취의를 이룸(三隱․商山三忠義․兄弟二節)
※ 예의지향(禮義之鄕)․충절향(忠節鄕)으로 천양
둘째 ; 도학(道學․性理學)의 보급과 전승
※ 도통(道統) 성립
※ 추로지향․인재부고․교육향(垂敎)의 명예 획득
셋째 ; 역사의식 고취. 영남인에 의하여 우리나라 최고본(最古本)인《삼국사기》․《삼국유사》편찬
넷째 ; 인재부고․추로지향․충절향․교육향으로 부각됨
(3) 조선시대(중기 이전)
1) 불사이군에의 절의파 계승됨
사육신 ; 하위지(선산)․박팽년(하빈 묘골)
생육신 ; 이맹전(선산)2) 사림파(士林派)의 절의 숭상, 4대사화(1494․무오, 1504․갑자, 1519․기묘, 1545년․을사사화의 순절인)
※ 사림파 형성
김종직․김일손․권오복․권경우․표연말․정여창․감혼(이상, 무오사화)
권주․홍귀달․권달수․김굉필․정여창․홍언충․권민수․채수․이자건․이자견․이자화(이상, 갑자사화)
정굉필․이장곤․권벌․박영(이상, 기묘사화)
노수신․이언적․권별․이황․권응정․김진종․권응창(이상, 을사사화)
3) 도학(성리학)의 도통(道統) 확립
◦ <설총․안향․우탁․정몽주․길재(김숙자․ 김종직)․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조식>
16세기 말에 이르면 국론으로 통일됨. ( )안의 두 분은 사장학(詞章學)으로 제외. 김굉필 뒤의 조광조는 김굉필 제자나 타도인으로 제외됨
첫째, 퇴계와 남명의 존재 의의
퇴계 ; 경상좌도의 정신적 지주, 도학적 이론탐구로 수교적(垂敎的)인 학풍을 조성함
남명 ; 경상우도의 정신적 지주, 도학적 의리실천으로 행도적(行道的) 학풍을 조성함
둘째, 퇴계와 남명의 학문 자세
출처(出處)와 지행(知行)을 중심으로 살핌
◦ 퇴계의 출처관(出處觀
“퇴계 이선생 왈, 이른바 (진퇴의 도리에) 다하지 못함이 있다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배움(學․知)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는데도 자처(自處․行)하기는 지나치게 높아 때는 헤아리지도 않고 세상 다스림에는 용맹한 것을 이름이다. 이는, 실패를 취하는 길이요, 큰 이름(大名)을 등에 업고 큰 일(大事)을 맡은 사람이 절실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 남명의 출처관(出處觀)
“남명 왈, 대장부의 행동거지(動止)가 중(重)하기는 마치 산악이 만 길의 절벽처럼 우뚝 솟은 것 같고, 때가 이르면 힘을 다하여 비로소 허다한 사업을 이루어 낸다. 비유하면, 천균(1균 3천근)의 돌로 만든 활을 한 번 쏘면 능히 만 겹의 견고한 서역을 부술 수 있으나, 본래 다람쥐를 쏘려고 만든 것은 아니다.”
두 분의 출처관을 보면, 퇴계나 남명이 배움(學․知)의 궁극적 목적을 행함(行)에 두고 있음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출처(진퇴)의 차례에 있어서 퇴계는 보다 앎(知)을 먼저라 생각하였고, 남명은 보다 행함(行)이 중하다고 보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남명이 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오늘날의 학자는 몸소 물뿌리고 쓰는 예절 곧 쇄소지절(灑掃之節)도 못 지키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남명은 ‘선지․先知’와 ‘행중․行重’으로 문호를 나누려 한 것은 아니다. 주자(朱子)도 이미 지행(知行)의 선후를 논하면, ‘지선행후․知先行後’가 되고, 그 경중을 논하면, ‘행중지경․行重知輕’이 된다고 한 사실은 정론으로 익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학문이 당쟁의 도구화로 전락함에 따라 퇴계․남명의 ‘知行說’에도 원 뜻과는 다르게 갈래가 짐을 볼 수 있으니.
“앎(知)과 행함(行)은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쳐서는 안 됨은 이미 정론(定論, 필자주․朱子의 이론)이 있어 두 말이 있을 수 없다. 남명선생의 가르침은 대개 입과 귀로만 학문하는 무리를 경계하려 한 것뿐이다. 만일, 학문하는 문로(門路․절차)의 대본(大本․근본)인즉 퇴계선생의 말을 좇은 뒤라야 구애됨의 걱정이 없을 것이니, 이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
라고, 하였다. 퇴계․남명의 학문을 신봉하던 당대의 선비들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봉자들에게도 보다 바른 이성적․지성적 사물관은 필요하리라 본다. 퇴계는 보다 수교적(垂敎的) 태도로 지행(知行)의 선후를 논했다면, 남명은 보다 행도적(行道的) 태도로 지행(知行)의 경중을 논한 것이라 처음부터 관(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先知後行‘과 ’行重知輕‘은 맞바로 견주어 논할 일이 아니요, 누가 맞고 누가 틀리는 것도 아니다. 퇴계․남명을 갈라놓은 것은 당쟁을 일삼는 비이성적인 추종자들에 의해서라 하겠다.
※ 예 ; 기계조립의 경우
선후(先知後行), 경중(行重知輕)
4) 성리학의 집대성자 퇴계(退溪)
이기론(理氣論)에서,
퇴계 ; 理發而氣隨之(理가 발함에 氣가 거기 따른다)
氣發而理乘之(氣가 발함에 理가 거기 탄다)
율곡 ; 氣發而理乘(氣가 발함에 理가 탄다) 라고, 함.
퇴계 ; 호발설(互發說․主理思想)
율곡 ; 일도설(一途說․主氣思想)
※ 퇴계의 이기철학은 理氣(純善․有善惡)의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쳐지지 않았다.
※ 퇴계(退溪)의 학문은 주자(朱子) 이후 제1인자다.(息山言)
“주자(朱子) 이후(학문상) 퇴계(退溪)만큼 순수한 분은 있지 않다고 가르치신 바는 옳은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 동국인이 좋다고 하는 말에 영합하여서가 아니라 족히 천하의 공론(公論)이 되리라 봅니다.”
Ⅴ. 맺는 말 - 조선시대 영남 선비의 위상
이상에서 살핀 바를 종합하여 조선시대 경상도(영남) 선비(士林․儒林)의 위상을 정리하도록 한다.
영남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통일한 신라 천년의 고도다. 단군․기자 이래의 우리의 역사와 정신문화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나아가 민족성 형성과 언어통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웅도(雄都)다. 그러기에, 영남은 지리․역사․문화․학문․교육․철학․풍속․인물․국방․산업 등에서 일국의 근본이 되어왔다.
영남은, 공맹(孔孟) 이래로 선비의 실천덕목으로 최상위에 오른 살신성인(殺身成仁)․사생취의(舍生取義)․견의치명(見義致命)을 몸소 이룩한 충(忠)․의(義)․절(節)․효(孝)․우(友)․열(烈)로 방명을 남긴 인물이 신라 이래로 어느 도보다도 많이 배출되었다. 이 땅을, 예의지향․예절향․층절향으로 일컫게 되고, 인재의 부고로도 널리 일컬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송나라의 도학(道學․理學․性理學․程朱學․新儒學)이 전래된 것은 여말로, 안향(최초의 주자학자)․우탁․정몽주(동방이학의 시조)․길재 등에 의하여 도입되고 보급․전개되었으며, 조선조에 이르러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김굉필의 제자․비영남인)․이언적․이황․조식 등으로 전승 발전되고 집대성 되었다.
17세기초까지 문묘에 배향된 9현(최치원․설총․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중 정암을 제외하면 다 영남인이다. 이로써도 조선의 도학이 전적으로 영남 선비에 의하여 비롯되고 집대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말에 이르면, 안향․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조식으로 도학의 정통 맥(道脈)이 이어진 사실은 국론으로 통일되었다.
1606년, 상주의 선비들에 의하여 ‘오도남․吾道南’의 도남서원(道南書院)이 창설되고 5현(포은․한훤․일두․회재․퇴계)사의 묘호를 도정(道正)으로 한 것은 그 의미가 깊다 하겠다. 영남을 공자․맹자가 태어난 나라와 같은 땅이라 하여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부르게 된 것도 연유가 있다 하겠다.
도학(道學․性理學)에 대한 학문 경향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 하나는 도학적 이론탐구의 수교(垂敎)와 또 하나는 도학적 의리실천의 행도(行道)가 그것이다. 수교(垂敎)와 행도(行道)는 지행(知行)의 선후․경중과 같이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여말에 불사이군하여 순의(殉義)․순절(殉節)한 삼은(三隱)․상산삼충의(商山三忠義)․형제이절(兄弟二節)을 비롯하여 사육신․생육신․사림파로 이어진 절의는 수교와 행도를 겸행한 선비도(道) 실현이었다고 하겠다. 다만, 퇴계와 남명이 경상좌우도의 우뚝한 두 도맥(道脈)을 이룰 때 퇴계가 보다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에서 수교적(垂敎的) 입장을 취했다면 남명이 보다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에서 행도적(行道的) 입장을 취한 차이는 있으나 수교(垂敎)와 행도(行道)가 도학(성리학) 학문상 별개가 될 수 없음은 진리다.
영남을 추로지향(鄒魯之鄕) 외에 낙민(洛閩)이라 일컬음은 도학(성리학)이 중국에서는 낙민(洛閩) 땅에서 살았던 정자와 주자에 의하여 성립되고 집성된 것과 같이 조선에서는 영남인에 의하여 도학(성리학)이 도입․전개․집대성되었기 때문이다.
도학자(성리학자)의 행도적 영향은, 조선초를 거쳐 임진란․병자호란․일제하를 통하여서도 영남으로 하여금 충신․의사․열사의 텃밭이 되게 한 사실로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공자․맹자․주자로 이어지는 수교적 영향으로 선진유학에서 신유학에로까지 전승되듯이, 앞으로도 조선 도학(성리학)은 세대를 초월하여 그 가치성을 유지해 갈 것이다.
한 마디로, 조선도 영남(경상도) 선비의 위상은, 한국 유학의 도학(성리학)사상 발생(도입)․성장(보급․전개)․집대성 과정에서 온상․곡창지의 주체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겠다.
(이 원고는 상주향교 경북선비아카데미 강의용을 조금 고친 것임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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