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난곡(蘭谷) 강서(姜緖)승지의 생애(生涯) 소고(小考)

빛마당 2014. 7. 14. 21:53

난곡(蘭谷) 강서(姜緖)승지의 생애(生涯) 소고(小考)


                                                                                                  윤 재 수

머리말

사람은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하여 갑니다. 우주공간에 천체가 존재하고 우리가 생활하는 지구가 있습니다. 지구는 지표에 둘려 쌓여 있습니다. 지표에는 돌, 흙, 물, 공기 그리고 생명체가 있습니다. 땅 위에서 자라는 식물이 있고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이 있고 그리고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연환경 속에서 알게 모르게 그 들의 영향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사회 계급을 형성하는 인간사회는 남이 있어야 “나”라는 내가 존재함을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훌륭하고 능력이 있다하여도 남이 인정하지 않고 사회에 선의적(善意的) 영향을 주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먼저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고, 다음으로 친척들이 인정하고, 친구들이 인정해 주고, 사회가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나의 존재는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재미를 느끼고 지루한 줄 모르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역경의 환경 속에서도 인내와 끈기로 지혜를 모아, 참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 진실이 왜곡되고 공권력이 정당하게 사용되지 않는 세상을 혁신하고, 아양과 아첨 그리고 재화적 부(富)에 의하여 인간의 서열(序列)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흩어진 제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던 사람들이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였고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이 공간에 먼저 살다간 옛 사람들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오늘을 연구하는 일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하지요, 옛날을 공부함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고 거울삼아 오늘의 삶을 보다 차원 높은 값진 삶의 토대로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현들의 삶에서 생활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선택의 순간순간 마다 선현들의 지혜를 빌려와서 선(善)의 방향, 도덕과 윤리의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들의 삶의 철학을 날줄로 하고 오늘의 시간을 씨줄로 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작은 한조각의 옷자락을 만들기 위함에서입니다. 그 들이 추구 했던 진선미(眞善美), 효(孝) 사상 등 윤리적 인간의 보편적인 진리는 역사 속에 잠겨 변함없이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경제 우선의 시간 속에 삶을 살아가는 현재 우리에게는 유학의 경전을 높이 받들고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修身齋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실천 하려고 노력했던 옛날의 정신문화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노동력은 하루에 5억 여 원의 가치로 평가되어 황재노역이란 단어가 유행하고 또 다른 이는 일당 5만원으로 평가 되어 노동력의 가치적 차이가 상상을 초월하는 현 시대의 사회상을 마주할 때면 옛 선현들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옛날의 영화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화려한 선조들의 경력을 회상하여 자만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보편적 진리는 아무리 세상이 변하여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만 그 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난 일을 이야기하기를 좋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었는지 그 기억과 영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요. 어제의 내가 모여서 오늘의 내가 된 것이지만 내일의 내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을 온전히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어느 때 내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만나야 합니다.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오늘의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온고이지신의 효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사랑방에서는 상주 봉대에 뿌리를 두고 인맥을 형성한 진주 강씨의 후손이며 현인적 삶을 영위한 난곡(蘭谷) 강서(姜緖)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합니다.


1. 난곡 강서의 가계(家系)

난곡(蘭谷) 강서(姜緖)의 가계를 살펴보면 진주 강씨로 고려조(高麗朝)의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의 자손이다. 박사공의 후손 강군보(姜君寶)는 봉산군(鳳山君)이요,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강시(姜蓍)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이며 시호는 공목(恭睦)이다. 강자평은 세종 때 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고조부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학자로서 강형인맥을 형성한 강형(姜詗, ?~1504, 연산 10년)으로 성종조에 지평(持平)을 거쳐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幹)이며 증조부는 세자 익위사 세마 강영숙(姜永淑, ?~1504, 연산 10년)으로 사인(舍人)이었고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아버지 강형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이들 부자는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조부 강온(姜溫)은 문과에 급제하고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정되었다. 아버지 강사상(姜士尙)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영의정에 추정되었고 진주부원군(晉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 윤씨로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 윤광운(尹光雲)의 딸이었다. 강서는 강사상의 맏아들이고 동생 신(神), 인(絪), 담(紞)이 있어 4형제이다.

서(緖)는 단양 우씨(禹氏) 정량 우치홍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두분의 사이에는 1남 1여를 두었다. 아들 강홍덕은 군수를 역임하였고 사위는 정호선이다.

강서(姜緖)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으며 식견이 높은 사람으로 유명했고, 오리 이원익 및 조충남과는 특히 막역한 친구로 알려져 있다.

강신(姜紳)은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숭정대부 우참찬으로 평난공신 진흥군에 봉해졌다.

강인(姜絪)은 유술을 좋아하고 경사에 통박하여 음직으로 출사한 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홍성공신 자헌대부 진창군이 되었다.

강담(姜紞)은 음사로 벼슬하여 서애 유성룡이 제철사가 되자 그 종사관에 기용되었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2. 난곡 강서의 생애

난곡(蘭谷) 선생은 1538(중종 33)년 3월 27(庚子)일에 태어나 27세인 1564년(명종 19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1568년(선조 1년)에 음서(蔭敍)로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569년 기사(己巳)년 선조 2년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과거제도; 과거 제도로 선발된 인원은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영우는 태조 건국(1392년)부토 1894(고종 31)년 갑오경장(甲午更張)까지 502년에 문과급제자 14,615명을 배출하여 년 평균 35.14명을 선발하였다.고 하였고 김영모는 조선시대의 문과시는 개국이래 고종 32년 갑오 문과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789회가 있었고 14,991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고 하였으며, E. W. Wagner 와 송준호(宋俊浩)는 744회이고 합격자는 14,620명이라 하였다. 이러한 자료는 조선시대 과거합격자들의 명단이 방목(榜目)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고자료(古資料) 조사과정에서 정시와 별시의 정확한 기록 확인의 어려움에서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었을 것으로 본다. 방목에는 과거의 종류, 과거 내용, 과거 년도, 성명, 출생년도, 거주지, 부모 생존여부, 입양, 부친 관직, 사조(四祖) 및 장인의 성명 및 입방 여부, 고시관의 직위 등이 기록 되어 있다. 방목에는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방목(國朝榜目), 문무과방목(文武科榜目), 잡과방목(雜科榜目) 등이 있다. 사마방목은 사류(士類)로서 사회적 지위를 공인 받는 소과(小科) 합격자의 명단이고 국조방목 및 문무과방목은 관료(官僚)로서 사관(仕官)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는 문과 및 무과합격자의 명단이다. 사마시는 조선시대에 김영모는 238회가 시행되었고 합격자는 약 50,000여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송준호는 229회 47,748명이라 하였다.


1)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생원진사시는 조선 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이다.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 국자감시(國子監試)와 승보시(陞補試)를 계승한 것으로, 진사시는 전자를, 생원시는 후자를 계승하여 성립된 제도이다.

생원·진사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져 있었다. 생원시는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의 제목으로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문예 창작의 재능을 각각 시험하였다. 그리하여 합격자에게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일종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한 사람이 같은 해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양시(兩試)에 다 합격한 사람을 역시 양시라고 하였다. 생원·진사시에는 3년에 한차례씩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왕의 즉위와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해 실시하는 증광별시(增廣別試)가 있었다.

이 시험에서 생원과 진사를 각각 100인씩 뽑고 이들에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따라서 합격자 중의 일부 극소수가 생원 또는 진사의 자격으로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관리임용제와 직결되는 제도가 아니었다. 때문에 처음부터 관리임용제로서 출발한 문·무과(文武科)나 잡과(雜科)와는 그 성격이 기본적으로 달랐다.


2) 생원진사시와 문과와의 관계

생원·진사시와 문과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였다. 이것은 문과 응시 자격에 관한 조선 초기부터의 규정이 문과는 생원 또는 진사 합격자로서 성균관에 입학해 일정 기간 (≪경국대전≫의 규정에서는 300일)의 수학을 마친 자만이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원·진사시를 문과의 예비 시험제로 이해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생원·진사시는 문과와는 독립된 제도로서 존재했다. 따라서 그 시험도 문과의 일부가 아닌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3) 설치 목적과 운영

생원·진사시 설치의 본래 목적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데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생원 또는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균관의 운영이 부실해 입학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문과 시험 제도가 처음부터 원칙대로 운영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즉,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들어가 300일 간의 수학을 마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문과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원이나 진사가 아닌, 즉 유학(幼學)으로 호칭되는 사람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예외적인 길이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이리하여 생원·진사시를 거치지 않고 문과에 진출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져 조선 말기 약 100년 간에는 문과 급제자수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조선 초기 약 100년 간에는 그 비율이 15% 정도였다.). 따라서, 생원·진사시를 설치한 본래 의의는 후기에 내려오면서 거의 상실하였다. 그런데도 시험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전보다 더 자주 실시했고, 뽑는 인원도 더욱더 많아졌다.

예컨대, 고종대에는 과거제가 완전히 철폐되는 1894년(고종 31)까지 모두 17회의 시험이 있었으며(증광별시가 6회나 있었다.), 이를 통해 생원 2,753인과 진사 4,275인을 합쳐 7,028인이 배출되었다. 특히, 1894년의 마지막 시험에서는 생원이 279인, 진사가 1,040인이나 되었다.

한편, 생원·진사시 응시자 중 후기로 갈수록 고령자가 많아 70 또는 80대의 노인도 적지 않았으며, 그 평균 연령이 문과 급제자보다 높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관계 진출이나 또는 문과에 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응시한 것이 아니라,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지위 그 자체를 최종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생원이나 진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가문과 후손의 영예를 위해서도 절실한 소원이었다. 물론, 그들 중 관계 진출을 목적으로 다시 문과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욱더 그러하였다. 그들은 생원이나 진사가 관계(官界)와는 인연이 멀다는 사실에 더 큰 의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생원 또는 진사야말로 학자로서의 공인된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깨끗한 선비로서의 위신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었다. 생원·진사시가 국가 시험 제도로서 본래의 의의를 거의 상실한 뒤에도 계속 실시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 풍조 탓이 컸다.


4) 설행 횟수와 합격자수

생원·진사시는 조선 시대를 통해 모두 229회가 있었으며, 그 중 67회가 증광별시였다. 문·무과의 경우는 식년시와 증광별시 외 별시(別試)·정시(庭試)·춘당대시(春塘臺試)·알성시(謁聖試) 등 각종 임시 특설의 시험이 있어, 그것이 모두 500여 회나 되었는데 생원·진사시는 식년시와 증광별시 두 종류뿐이었다.

그리고 그 총인원은 생원 2만 4221인, 진사 2만 3776인을 합쳐 모두 4만 7997인이었다. 말기에 오면서 진사를 생원보다 더 많이 뽑았지만, 초기 약 60년 동안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생원만을 뽑았기 때문에(생원시와 진사시를 정식으로 병설하기 시작한 것은 1453년부터이다.) 전기간의 총계에 있어 진사의 수가 오히려 적게 나타난 것이다.

생원·진사시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시는 한성(漢城)과 각 도에서, 그리고 2차 시험이자 최종 시험인 복시는 한성에서 실시하였다. 초시에는 정액(定額)이라 하여 한성 및 각 도별로 뽑게 될 인원수가 배정되어 있었다. 즉, 한성시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200인, 각 도별로 실시하는 향시(鄕試)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경기도에 60인, 충청도에 90인, 전라도에 90인, 경상도에 100인, 강원도에 45인, 평안도에 45인, 황해도에 35인, 함경도에 35인씩 모두 1,400인이 배정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최종 시험에서 뽑을 인원의 7배의 수를 각 지역별로 안배, 과거제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지역 간의 불공평 내지 불균형을 억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복시의 최종 선발에는 그러한 지역 간의 균형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역 간의 격차가 컸다. 예컨대, 서울 출신이 전체 합격자의 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생원시 합격자 중에는 지방 출신이, 그리고 진사시 합격자 중에는 서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후기에 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면서도 자신을 진사로 기록하고 또 그들을 진사로 호칭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원이라는 호칭 자체가 ‘김생원’이니 ‘박생원’이니 하는 식으로 속화되어갔는데, 아마도 진사시가 단순히 경서에 관한 지식만을 시험하는 생원시보다는 훨씬 어려웠다는 점과, 또 생원의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다는 사실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5) 사회적 위신

생원·진사시의 응시 자격은 기본적으로 문과와 동일하였다. 다만, 기성 관리의 응시를 가급적 억제한다는 정부 정책에 따라 문과에는 통훈대부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다고 한 것을 생원·진사시에서는 통덕랑 이하로 규정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원이나 진사의 사회적 위신은 무과 출신자보다는 훨씬 높았다. 조선 시대는 어느 가문이나 지역의 품격(品格)을 논할 때 반드시 그 가문 또는 지역에서 배출된 홍백패(紅白牌)의 수를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그 홍패 속에 일반적으로 무과 홍패는 들어가지 않았다. 백패는 물론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수여하는 합격증이다. 조선 전체를 통해서 연평균 100인이 못 되는 이들의 사회적 위신은 오늘날 일반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높았다.


그해에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병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병환 치료를 하였다. 질병이 완쾌되

는 1576(선조 9)년 2월 1일에는 정언이 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전임 되었다.

1576년에 성균관 전적에 옮긴 후에 형조·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하고 사간원,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다가 곧 홍문관 교리로 옮기었다. 또한 부응교로 승진한 후 사간원 사간으로 전직되었으며 성균관 사예(司藝)로 옮긴 후에는 장령(掌令)이 되었다. 1581년(선조 14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치른 후 1584년(선조 17년) 봄에 다시 장령에 배명되었으나 모친 봉양을 위해 외직인 선조 16(1583)년 3월 10일 수원부사로 근무하면서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한 것을 나누어 결정하여 아전(衙前)들에게는 엄격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깨끗한 정사를 시행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신병으로 인하여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부사직을 사양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586년에 다시 남양부사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변경(邊境) 사변(事變)이 있어 연해변 고을의 해변을 경계하기 위하여 수령을 모두 무관으로 바꾸게 되어 그때 교체되어 돌아와서는 1586년 3월 1일 동부승지에 제수 되었다. 그 후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자리가 바뀐 후 오래지 않아서 신병을 앓았다. 우승지를 거쳐 좌승지가 되었고, 1588년 여름에 인천부사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병환으로 사직하고 귀가하여 병환을 치료하였으나 1589년 5월 6일(壬申日)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52세이었다. 같은해 10월 무인일(戊寅日)에 금천(衿川)(현재의 관악구 난곡동) 난곡리 술좌진향(戌座辰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후에 아들 강홍덕(姜弘德)이 원종훈(原從勳)에 참여하여 호성공신이 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비(墓碑)의 앞면에는 증의정부영의정행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수찬관강공지묘(贈議政府領議政行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修撰官姜公之墓)라고 인각되어 있다. 뒷면에는 가계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비문은 대제학 문장공 우복 정경세(1563~1633)가 짓고 선조 부마 문추공 낙전당 신익성(1588~1644)이 필하였다.


3. 난곡 강서의 인생철학

난곡 강서는 천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명쾌하였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마음 씀과 행하는 일이 의리에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의 악한 것을 보면 내 몸을 더럽힐 뿐이라 하고, 또한 각박한 논의를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비록 존경하고 꺼리었으나 감히 원망하거나 성을 내지 않았다. 스스로의 처신(處身)은 평탄하였고 현격히 다르다는 것을 보이려 아니하였으며 가장 꺼린 점은 뚜렷이 드러나는 명성이었다. 선조 12년(1578년) 3월 24일에는 지제교를 사임 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평 강서(姜緖)가 지제교(知製敎)를 사면하는 상소를 올리니, 답하였다. “그대가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대가 질박하고 정직하여 말이 반드시 성심에서 나왔음을 알고 있는 까닭으로 이에 윤허한다.”고 하면서 그 직을 선조는 수납하였다.


지제교; 조선시대 국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이다. 고려시대의 지제고(知制誥)를 고친 것으로, 조선 전기에는 승정원(

政院)‧사간원(司諫院)의 관원으로써 임명한 내지제교(內知製敎)와 다른 문관 10명으로 임명한 외지제교(外知製敎)로 구분하였다. 세종 때 집현전(集賢殿)이 설치되면서 학사들이 외지제교를 겸직하다가 1430년(세종 12)에 집현전의 녹관(祿官)을 내지제교, 다른 문관 10명을 외지제교로 삼았다. 그 뒤 집현전을 폐지하고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면서 부제학(副提學: 正三品) 이하 부수찬(副修撰: 從六品)까지 지제교를 겸하게 하고, 따로 6품 이상의 문관을 뽑아 지제교를 겸직하게 하였다. 전자를 내지제교, 후자를 외지제교라고 불렀다. 아울러 규장각의 직제학(直提學: 正三品) 이하 관원은 전‧현직을 막론하고 외지제교를 겸직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의 지제고 (知制誥)에 이어 설치되었으며, 대소(大小)의 제문(祭文:國祭)도 지제교가 왕의 명에 따라 지어 올렸다. 중국 당·송나라 때의 지제고 제도에 따라 지제교를 내제(內制)·외제(外制)로 구별했다. 처음에는 승정원·사간원의 관원이 지제교를 겸해 내지제교(內知製敎)라 하고, 또한 문관 10명을 선발하여 지제교를 겸임시켜 외지제교(外知製敎)라고 했다. 집현전이 설치된 뒤에는 집현전 학사에게 외지제교로 겸임시켰다가, 1430년(세종 12) 집현전의 녹관(祿官)이 내지제교를 겸임했고, 문신 10명을 선발하여 외지제교로 삼았다. 〈경국대전〉에서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으로부터 부수찬(副修撰)에 이르는 관원과 별도로 선발한 6품 이상의 문신이 지제교를 겸임했다. 〈대전통편〉에 의하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의 관원이 겸임하는 것을 내지제교, 대제학이 이조판서와 상의하여 6품 이상의 관원 가운데 특별히 뽑은 후보자를 초록(抄錄)·상주하여 지제교로 임명하는 것을 외지제교라고 불렀다. 외지제교는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이를 때까지 겸임하며, 규장각의 직제학 이하 관원은 현임·전임을 막론하고 모두 외지제교를 겸임했다.


지제교와 같은 경우는 화려한 직함(職銜)이고 권력의 중심에 영향을 주는 고귀한 벼슬 이었으나 여러 번 글을 지을 능력이 부족하다고 사양하였으며, 당시의 논의들이 전조(銓曹)의 자리로 끌어들이려 하면 고의로 거리낌 없는 태도를 보여 피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성만(盛滿)을 두려워해서였다. 성품이 굳세고 방정(方正)하여 경연(經筵)에 있을 때는 할 말을 모두 하고 기피하지 않으면서 ‘주색(酒色)을 삼가고 궁금(宮禁)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등의 일을 여러 번 간(諫)하였다. 1579(선조 12)년 7월 2일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고 승지가 되었다. 선조 11년(1578년) 7월 1일 경연에 우상 노수신과 승지 강서가 입시하다.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우상 노수신(盧守愼)이 입시하였는데 문의(文義)를 따지다가 교(驕)자를 논하게 되었다. 승지 강서(姜緖)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을 멸시하시고 일세(一世)를 능가하시는 허다한 병통은 모두 교(驕) 자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니, 수신이 아뢰기를, “강서가 말한 것은 같은 상대 이하의 사람으로서도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어려운 말인데, 가만히 주상의 천안(天顔)을 뵙건대 듣기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시니 옛사람이 이른바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다는 말과 꼭 맞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강서가 솔직하다는 것은 내가 본디 알고 있었다.” 하였다.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것을 경계하라’고 진달함으로써 자못 임금이 마땅치 않게 여기는 말을 하였으나, 선조(宣조)께서는 본래 공의 질박하고 곧은 것을 알아 그 말이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의 면전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할 말을 다해 간쟁을 한다거나, 일신의 안위에 연연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하여 일어나는 행위들은 모두 전통 있는 유가의 선비정신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경연은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 특강(特講)인 소대(召對), 야대(夜對), 독대(獨對) 등이 있다. 조강이 경연의 중심이 된다. 조강을 중심으로 경연절차를 알아본다.

경연 전일; 승정원에서 분판에 경연 종류를 적어 승정원 정문에 걸어 놓는다. 홍문관 기별서리(奇別書吏)가 당번 경연관에게 알려준다. 책색서리(冊索書吏)가 대전의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대전별감에게 청하여 왕이 쓸 어람책을 내어 와서 당번 경연관에게 준다. 당번 경연관은 진강할 내용의 시작(自)과 끝(止)을 정한다. 그리고 서사(書寫)가 붉은 색으로 토를 단다. 책색서리는 서사가 토단 것을 확인한 후 경연당번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이 다시 확인 한다. 자지(自止) 단자(單子)를 갖추어 어람책과 함께 대전으로 들여보낸다.

경연일; 조강은 주로 동이 틀 무렵인 미명(未明)에 이루어진다. 조강(朝講)을 하기 위하여 경연관들이 입시한다. 경연관들은 다음과 같다. 령경연사(領經筵事)는 삼정승이 겸임하며 그 중 1명이 교대로 참석한다. 지경연사(知經筵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중 1인, 특진관(特進官) 2인, 육승지(六承旨)와 홍문관 부제학 중 1인, 경연관(經筵官) 상번(上番) 1인, 경연관 하번 1인, 사헌부, 사간원의 간관(諫官) 각 1인, 승정원 주서(注書) 1인, 한림(翰林) 상번 1인, 한림 하번 1인 이 참여한다.

경연 2각(刻) 전(前); 금누관(禁漏官)이 홍문관에 경연을 알린다. 홍문관 상번과 하번은 공복을 착용하고 합문(閤門) 밖 막차(幕次)에 나간다. 연이어 입시 관원이 나간다. 마지막으로 영경연사가 들어오면 지경연사 이하 모두 자리를 비켰다가 돌아와 선다. 영경연사가 자리를 잡으면 차례로 영경연사 앞에 나가 절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앉는다. 책색서리는 책함을 가져와서 진강할 책을 경연관의 자리 앞에 1권씩 놓는다. 홍문관의 상번, 하번이 책을 가지고 영경연사 앞에 가서 예행 연습인 습강(習講)을 한다. 먼저 상번이 읽고 다음 하번이 읽는다. 한림의 하번은 무릅을 꿇고 좌목단자를 영경연사, 지경연사, 특진관, 승지에게 보이고 책색서리에게 건네준다. 책색서리는 이것을 받아 홍문관 상.하번, 사헌부, 사간원의 간관에게 보인 뒤 대전별감을 불러 단자를 대전에 들이게 한다. 금누관이 정시를 알리면 임금이 외전으로 납신다. 서방색(書房色)이 임금이 사용할 지필묵을 준비하여 놓는다. 사약(司鑰)이 합문 밖으로 나와서 막차에 들어가 자리에 단정히 꿇어 앉아 손을 들고 임금이 전좌(殿座) 했다은 사실을 알린다. 경연관들은 각자 책을 가지고 좌목의 차례에 따라 대전에 들어가 어전에서 각자의 자리로가 부복하고 책을 펼치면 진강(進講)이 시작된다. 진강은 임금이 먼저 전날 배운 내용을 읽는다. 강관이 새로 배울 내용을 읽는다. 임금이 새로 배울 내용을 읽는다. 강관이 글으 뜻을 강론한다. 강론이 끝나면 해산한다. 주강(晝講)은 정오에 열리고 석강은 미정(未正)에 열린다. 경연의 내용은 사서오경과 역사책으로 자치통감, 자치강목, 고려사 등이다. 왕실에 제사 있는 날은 3일 전부터 재계(齋戒)로 결강한다. 한 책의 강의가 끝나면 7일간 결강 한다(온역간탈품, 溫繹間頉稟). 왕실에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 소한과 대한 사이, 초복과 처서 사이에도 결강을 한다(탈품 頉稟). 경연은 조강이 주이고 가끔 소대와 야대가 행하여진다. 경연관은 왕에게 유학의 경전과 역사를 강독하고 시사에 대하여 논평하고 토론하며 사려(思慮)하여 왕으로 하여금 교훈을 얻어 성군이 되게하는 임무를 맡는다.


한 당로자(當路者)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인재의 추천을 마땅히 대사헌에게 

겸하도록 해야 합니다.”하자, 공이 말하기를, “대사헌은 탄핵(彈劾)을 주관하고 있는데, 또 인재를 추천하게 하면 권병(權柄)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며, 불행히 간사한 자가 그 자리에 있게 되면 화(禍)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듣는 이가 옳게 여겼다.

일찍이 장령으로서 입궐(入闕)하였다가 취기(醉氣)를 띠고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는데, 조정(朝廷)의 논의를 거머쥐고, 시배(詩輩)의 영수(領袖)인 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공이 눈을 부라리며 공박하기를, “홍문관은 매우 엄중한 곳인데 네 어찌 이러이러할 수 있느냐?” 하니, 그 사람의 얼굴이 흙빛이었으며 곁에서 듣는 이도 몸을 옹송그렸는데, “술 취해 미친 말을 한 것이 참으로 후회가 된다.” 라고 하였으나 그 얼굴을 보면 실은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어느 날 금협지(琴協之, 이름은 應夾)라는 선비가 서울에 와서 여사(旅舍)에 묵고 있었다. 우경선(禹景善)이 협지를 찾아가 술 마시고 이야기 하는 사이에 강원경(姜遠卿, 名; 緖)이 술에 몹시 취하여 가지고 멘발로 와서 손으로 경선의 두 눈을 여러 번 쓰다듬어 내렸다. 경선이 왜 이르느냐고 묻자, 원경은 대답하였다. “네 눈이 하도 높기로 쓸어내리려 하는 것이다.”하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돌아갔다. 원경은 술로써 미치광이란 말을 듣지만 정말 미친 것은 아니니 마치 원정(猿亭) 부서진 배로 노천(老泉)에 비유한 것과도 같다.

또한 김시찬(金時讚)은 치계기문(治溪記問)에서 승지 강서(姜緖)는 우의정 사상의 아들이다. 그는 거짓 미친체하여 술에 숨어 사니, 사람들이 그를 매취(每醉)라 불렀다. 그는 두 다리를 뻗고 수수께기 같은 말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길가에 쓰러져 있으니, 어린 아이들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 령공(令公)께서는 길에 눕지 마십시오, 옥관자(玉貫子) 깨어질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매취는 말하기를 “ 금관자(金貫子)로 바꾸면 되지 ”라고 하였다.

오성(梧星) 이원익(李元翼)이 하급관료에 침체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인물로 생각지 않았다. 강서는 그를 볼 때 마다 문득 말하기를 “ 국가에 큰 변란이 있으면 이 사람이 반드시 눈물을 뿌리며 담당할 것이다. ” 하였다. 사람들은 다 웃었다. 임진년(壬辰年)에 이르러 드디어 그 말이 맞았다.

승지 조인복과 전한(典翰) 김홍민은 한때 함께 무거운 명망이 있었다. 김협천창일(金陜川昌一)이 강서에게 묻기를 “조인복은 어떠한 사람입니까?”하니 강서는 두 다리를 앞으로 뻗치고 앉아서 대답하기를 “나의 종이요” 하였다. “김홍민은 어떠한 사람이오” 하니 꿇어 앉아 서 말하기를 “나의 스승이요”라고 말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조인복이 그의 본성을 잃고 처사가 전패(顚悖)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선견지명에 사람들은 탄복하였다.

당파에 초월한 성품을 지녔다. 석담일기 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계휘가 “지금 시론이 결렬되었으니 되도록 진정 시켜야하고 공격하여서는 안된다.”라고 하자 나이 젊은 무리가 이것으로 김계휘를 불퀘하게 여겼다. 홍문관 수찬 강서가 경석(經席)에서 아뢰기를 “사류가 나누어 져서 동.서로 두 편이 되었는데 모두 쓸만한 사람들이니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이 때에 임금이 동.서라는 것을 알았다. 이발(李潑)은 동편을 주장하고 정철은 서편을 주장 하였다. 두 사람의 견해는 같지 않았으나 모두 인망이 있고 나라에 봉사하는 점에 있어서는 당시 제일이었다. 이 이가 매양 정철과 이방에게 이르기를 “군들 두 사람이 화합하여 동심(同心)으로 조화시키면 사림(士林)이 가히 무사 할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는 것을 싫어하여 평소에 늘 자제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淸貧)으로 이어왔다. 너희들은 삼가서 변함이 없어야 하며, 거처(居處)와 음식도 모두 검소하게 해야 한다.“ 하니 집안의 젊은이들이 감히 화려함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훈자명(訓子銘)이 서갑(書匣)에 있는데, 내용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름을 공경하며, 형제에게 우애(友愛)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침묵하여 말수가 적어야 하고 검소함을 숭상해야 하며 사치를 사모하지 말라. 주색(酒色)은 몸을 망치는 것이니 이를 가장 경계하라. 사람의 선행(善行)을 보면 감정이 솟구쳐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사람의 악행(惡行)을 들으면 징계(懲戒)를 삼되 논의하지 말며, 잡희(雜戱)를 물리쳐 단절하고 서사(書史)에 마음을 두도록 할 지어다. 옛 사람과 같게 되기를 배우지 않는다면 노로(奴虜)와 무엇이 다른가? 남이 하나를 하면 나는 백을 해야 하며 그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라. 이 훈계를 행하면 곧 효자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서로 밀치고 끌어당기고 하였는데, 공은 문을 닫고 종적을 감추어 교유(交遊)를 즐기지 않고, 오직 서사(書史)에서 즐거움을 찾으면서 때론 거문고를 타거나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취하면 노래를 불러 흥을 돋았다. 말년에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옷을 풀어헤치고 술자리에 빠지다시피 하니, 사람들은 괴이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사(時事)에 관한 말이 나오면 곧 개연히 탄식하기를, “내가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보면 예부터 이러 하고서 난리가 없는 때가 없는데 4, 5년 못 가서 큰 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죽음에 임해서 자제들을 돌아보면 말하기를, “너희들 슬퍼하지 말아라, 병으로 죽으니 무어 슬퍼할 거야 있겠느냐?” 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과연 정여립(鄭汝立 )의 변이 있었고,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이르러서는 그의 말이 모두 증험되었다.

허목은 지적 성숙이 고조에 이른 73세에 지은 청사열전에 김시습을 비롯하여 정희량, 정렴, 정작, 정두경, 강서, 조충남 등 조선의 도가로 일컬어지는 인물 7명의 열전이 그의 손에서 정리된 것이다. 허목의 아버지 역시 도가로 알려진 서경덕의 제자 박지화의 가르침을 받았다. 미수 허목은 도교 수련의 인물들과 도맥과 행적들을 기록한 청사열전에서 난곡의 이름을 열거 하고 있다.


도가(道家); 고려 후기부터 국가적인 보호를 받아 관제(官制)에까지 편입된 도교(道敎)에 대한 신앙은 조선에도 계승되어 소격서(昭格署)를 두고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나, 중종 때 조광조 등이 소격서를 폐지한 적도 있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 관청은 다시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다시 폐지되고 말았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도교 계통의 신앙이 전해졌으며, 또 임진왜란 때 조선에 나왔던 명나라 군대가 관왕숭배(關王崇拜) 신앙을 들여와서 경향 각지에 관왕묘(關王廟)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이단으로 취급되면서 도교(道敎)는 크게 위축되었고, 그에 따라 도교는 신앙보다는 “도학”이라는 학문으로서 연구되었다. 그러나 잇단 사화와 당쟁을 겪으면서 향촌에 은거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심신의 연마를 위한 수련 도교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시기에는 전 세계적인 기온 강하로 기근과 질병이 계속되면서 질병 치료의 수단으로서도 수련 도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수련 도교 혹은 신선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선조 때부터 광해군 때까지 정렴(鄭磏)의 《용호비결(龍虎秘訣)》, 한무외(韓武畏)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곽재우의 《양심요결(養心要訣)》, 광해군 때부터 인조 때까지 권극중(權克中)의 《참동계주해(參同契註解)》 등이 그런 것들이다. 특히 권극중은 도교를 유교나 불교보다도 철학적으로 윗자리에 놓으려는 이론을 구성하여 주목을 끌었고, 한무외는 한국 도교의 기원이 신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체계화하였다. 수련 도교가 유행함에 따라 성리학자들 중에서도 도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타났는데, 17세기 전반의 한백겸·이수광·허균·이식·장유·유몽인·정두경(鄭斗卿)·허목·유형원, 그리고 17세기 말의 홍만종(洪萬宗)이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한국 선도(仙道)와 방술(方術)의 유래를 소개하였고,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허균은 《사부고(四部稿)》에서 선도(仙道)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소개하였다. 이를 계승하여 허목은 《청사열전(淸士列傳)》을 쓰고, 홍만종은 《해동이적(海東異蹟)》(1666년)을 저술하여 단군에서 곽재우에 이르는 40여 명의 단학인(丹學人)들을 소개하였다. 특히 홍만종은 한국 산수의 아름다움 때문에 수련 도교가 자연 발생하였다고 보고 그 시초를 단군에서 찾음으로써 수련 도교의 민족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18세기에는 황윤석(黃胤錫)이 《해동이적》을 증보하여 《증보 해동이적》을 편찬하였다. 한편, 수련 도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교의 사상적 뿌리인 노·장(老莊)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7세기 말 박세당(朴世堂)의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8세기 서명응(徐命膺)의 《도덕지귀론(道德指歸論)》, 그리고 홍석주(洪奭周)의 《정로(訂老)》 등이 그것이다. 허목은 도가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73세에 저술한 [청사열전(淸士列傳)]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김시습(金時習), 정희량(鄭希良), 정렴(鄭磏), 정작(鄭碏) 등 도가와 관련된 인물들이 실려 있다. 또한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때,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세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에는 도가의 주술적인 비유들이 있어서 그의 도가적인 취향을 잘 반영해 준다. 이외에 허목의 학문에 영향을 준 인물은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정구(鄭逑, 1543~1620)였다. 허목은 1613년(광해군 5) 이원익의 손서(孫壻: 손녀사위)가 되었다. 이원익과 부친인 허교가 평소 절친했기 때문이었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한 만큼 뛰어난 실무관료였는데, 허목은 이원익의 관료적 성향도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원익은 “뒷날 내 자리에 앉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고 하며 허목에게 특별한 기대를 보였다. 허목은 1617년(광해군 9) 거창으로 갔다가 성주에 들러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구는 영남학파의 영수인 조식과 이황의 학풍을 함께 계승한 학자로서, 성리설이나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ㆍ역사ㆍ의약ㆍ복서ㆍ풍수지리 등에 두루 능통한 면모를 보였다. 정구의 박학풍(博學風)은 허목에게도 계승되어 허목 스스로도 ‘박학불무택(博學不務擇: 여러 학문을 하여 선택에 힘쓰지 않음)’이라 하여 박학을 인정하였다. 허목의 학문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원시유학인 ‘고학(古學)’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허목은 [기언(記言)]의 서문 첫머리에서 “목(穆)은 독실하게 고서(古書)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라 하여 고서에 대한 관심을 비췄다. 고서는 원시유학인 육경(六經), 즉 ‘시경ㆍ서경ㆍ역경ㆍ춘추ㆍ예경ㆍ악경’을 말하는데, 허목은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가 융성했던 것은 육경의 다스림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허목은 육경 가운데에서도 특히 [춘추(春秋)]를 중시했는데, [춘추]의 ‘존군비신(尊君卑臣)’의 이념을 강조하였다. 군주를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남인들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허목은 당색으로는 남인에 속하며, 지역적으로는 서울ㆍ경기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기 때문에 근기남인(近畿南人) 학자라 칭한다. 근기남인의 학통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황 → 정구 → 허목 →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일반화 되어있는데, 최근에는 정구의 학문 형성에는 이황과 함께 조식이 큰 영향을 주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조식 → 정구 → 허목으로 계보가 연결되면 허목의 학문 형성에는 북인적인 기반도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허목의 학문은 북인과 남인의 학문을 고루 수용한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공은 본래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 고사(高士) 조충남(趙忠男)과 더불어 막역한 사귐을 가져 도(道)가 같고 뜻이 같았으며, 서로 더불어 당시 사대부(士大夫)의 현능(賢能)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평론하면서 드러내놓지 않고 누구는 현능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 하였는데, 그 뒤 그 말은 하나도 맞지 않는 것이 없었고, 명도(命途)의 길흉에 있어서도 역시 모두 들어맞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으나 능히 헤아리지 못하였다.

완평부원군 이원익 평소 난곡과 친분이 있어 난곡의 언행과 심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난곡에 대하여 일일이 기록하여 두었는데 다음은 그 「언행록」 중의 한 부분이다. 내가 난곡과 더불어 1564년 사마시와 성균관 반학 때에는 서로 안지가 오래지는 않았으나 같이 기사년(1569년) 대과에 등제하여 승문원에 입사한 동기로서 교유하면서 비로소 난곡이 세속적인 보통사람이 아닌 큰 그릇임을 느끼게 되었다.

난곡은 비록 일찍부터 학문에 전심 종사하지는 않았으나 기도가 상쾌하고 심지가 활달하며 맘을 쓰고 행함이 자연이 어그러짐이 없고 의리와 올바름은 그 확연함이 자립 자득하여 남이 감히 따르지 못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 있었으니, 겉으로는 방종한 듯하며 학문은 좋아하지 않으나 그 성품은 강강하고 정숙하여 가을 서릿발 같고 격렬히 내리 쬐는 태양 볕 같아 감히 남이 따르지 못하는 바요, 약한 짓하는 자를 보면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니 그 과오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까다롭지 않은 것이 남이 따르지 못하는 바이다. 처사를 원만히 하며 모나지 않고 남에게 나의 선행과 능사를 알리려 하지 않은 점도 남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고,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자랐으며, 명망있고 드러낸 곳을 출입하면서도 부귀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언제나 검소한 마음으로 가난한 선비로서 교만한 빛을 나타내지 않음도 감히 남이 따르지 못함이라. 하루는 내가 옥당에 있는데 난곡이 장령으로서 술이 만취되어 지나다 옥당에 들었는데 옥당관원들이 조정의 공론을 파악하는 자리였다. 때마침 영수되는 자가 자리에 있는지라 난곡은 눈을 부릅뜨고 그 사람에게 하는 말이 “내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자로서 그대들을 공박함이 마땅할 지로되 옥당의 자리가 심히 소중한 곳이기에 참고 있는데 그대들이 나를 이같이 푸대접할 수 있는가” 하며 그 죄과를 따지니 그의 얼굴빛이 흙빛과 같고 곁에서 듣는 자는 몸 둘 바를 모르는 지라. 그 다음날 난곡에게 물어 가로되 취중망언이 왜 그리도 심했는가 하니 난곡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취중의 망언을 진실로 뉘우친다고 말을 하나 그 얼굴빛이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난곡은 성품이 활달하여 사소한 일엔 관심을 갖지 않고 큰 뜻을 품고 있었으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 일을 걱정함에 온 정성을 다하고 풍속이 퇴폐해 가는 것을 보고 항상 걱정하였으며 임금에게 간할 때에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뜻이 맞지 않으면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임금 앞에 설 때에는 흐트러진 빛이 없고 정색을 하고 목소리가 늠름하였으며 그 말이 맑은 것을 본받고 흐린 물에 들지 않게 하였다. 일찍이 나와 함께 옥당에 있을 때다. 술을 마셔 가며 담소하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취하여 정신없이 누워 있을 때 불시에 상감께서 부름이 있었다. 관원이 창황이 물을 떠다 낯을 씻기고 부축하여 일으켜서 임금 앞에 이르니 기품이 늠름하여 언론사가 평소와 아주 다름이 없었다. 중심을 잃지 않고 차분한 힘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절대로 사리사욕에 동요되지 않았으며 내가 난곡을 보고 평하건데 난곡은 참으로 세상에서 드문 호걸의 선비로 그 식도의 홍원함과 지행의 순결함이며 재국의 크고 넓음은 금세에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다.

본인의 뜻은 항상 나라를 위하는 데 있었건만 맡겨진 임무는 언제나 마음에 차지 않는 직책에 있었음으로 필경 노래하고 술 마시면서 자포자기(自暴自棄) 할 때도 있었으니 어찌 본심이라 할 수 있으랴. 그 뜻이 맞지 않음을 말함이라. 항상 나에게 하는 말이 내가 성품이 활발하기 때문에 나를 진주목사를 시켜 주면 나의 재주가 크다는 것을 볼 수 있을 터인데 그때 그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그 다음을 생각함이다. 사람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무두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 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참 많은 상처를 가슴속에 품고서 살아가게 됨니다. 그 사회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씻어 버려야 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주위의 사람들 우리, 내가 상처를 씻어주는 주인공이 된다면 참 좋은 일을 하는 것이겠지요. 서로 보듬고 서로 위로하는 사회를 만나는 기쁨과 행복감은 무한히 크고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일찍이 그는 여러 아우의 현능에 대하여 말하며 이르기를, “인(絪)은 차분하고 조용하며 도랑과 학식이 있어 좀 있으면 현달(顯達)할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이상국(李相國)에게 말하기를, “내게 번거로움을 끊어 없애는 수완이 있다. 나를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제수하면 나의 재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당시에 용납되지 못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다음의 것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공은 정랑(正郞) 우치홍(禹治洪)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곧 강홍덕(姜弘德)으로 군수(郡守)를 지냈고 도량이 넓어 선인(先人)의 풍모(風貌)가 있었으며, 딸은 감사(監司) 정호선(丁好善)에게 시집갔다. 군수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강창(姜瑒)은 유학(幼學) 유희익(柳希益)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일찍 죽어 후사(後嗣)가 없고, 강환(姜瓛)은 연능 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강석무(姜碩武)를 낳았는데, 어리다. 딸 하나는 찰방 정백순(鄭白順)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사인(士人) 유시중(柳時中)에게 시집가 일찍 죽어 후사가 없으며, 감사는 아들 정언유(丁彦瑜) 하나를 두었다. 공의 아우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과 참지(僉知) 강담(姜紞)이 가장(家狀)을 갖고 와서 이상국의 명으로 나 경세(經世)에게 고하기를, “가형(家兄)이 직고한 지 수십 년이나 묘도(墓道)에 표(表)가 없습니다. 조카 강홍덕(姜弘德)이 일찍이 갈석(碣石)을 갖추고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할 군자(君子)에게 청하여 선세(先世)의 덕망을 드러내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상국이 가형(家兄)을 동기(同氣) 같이 보고 그대에게 짓도록 부탁하라고 명하였으니, 그대는 도모해 주시오,“ 하였다. 이 경세가 비록 공의 의료(儀表)는 미처 뵙지 못하였으나 이 상국을 모시고 앉아 들은 바는 더욱 많은데, ‘공은 호걸지사(豪傑之士)이다.’라고 매우 칭찬하는 것을 보았으며, 또 말하기를, “견식과 도량이 넓고 크며 뜻과 행동이 순결하고 그릇이 크고 넓어 금세(今世)에 찾아볼 때에 그와 대등한 이를 찾아보기 어려우니, 혹시 국가에서 임용하였더라면 그 사업(事業)이 어찌 작았겠는가? 결국 거문고와 노래와 술로 창피하리만큼 방종하며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니, 어찌 그것이 본심이겠는가? 하였다. 아! 이 말씀으로 볼 때에 공이 말세(末世)의 인물이 아니란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드디어 명을 받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위와 같이 쓰고 후인의 상고(詳考)를 기다린다. 묘표(墓表) 정경세(鄭經世) 지음

(이상 작성자 진주강문 박사공 후 통계공 20세 법전손 破天荒 昊聖 姜錫泰 記.)

현재의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구 신림동 3동) 주변 난곡(蘭谷)지역은 강서가 태어나기 전에는 낭천리로 불리다가, 강서의 호를 따라 현재까지 난곡(蘭谷)의 명칭으로 40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난곡(蘭谷)의 묘(墓)는 신림3동(난곡동) 선영에 있다. 서울시는 관악구 난향동 산 105-12 관악산 자락 일대에 전통 정원과 운동 공간으로 이뤄진 ‘난곡공원’을 2009년 11월 완공하고 시민에게 개방했다. 공원이 들어선 지역은 수십 년 동안 주민들의 무단 경작지와 쓰레기 적환장 등으로 이용돼 왔다. 공원 규모는 9394㎡로 8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공원 가장 높은 곳에는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사각정자가 세워졌으며, 주변에 화단과 연못, 전통 정원과 냇물 등이 만들어졌다. 주택가 부근에는 어린이 놀이시설과 운동시설이 설치된 야외 운동장을 만들고 등산로도 정비했다. 시는 특히 공원 주변에 있는 시 유형문화재 정정공 강사상(姜士尙,1519~1581년)의 묘역과 공원의 전통 정원을 연계해 ‘난곡공원역사교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난곡공원과 나란히 위치한 정정공 강사상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4호)은 조선 중기 16세기의 문신 강사상의 신도비와 주변 진주강씨 묘역이 포함된 면적 1만 876㎡의 문화재보호구역이다. 이 지역의 이름도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姜緖)의 호(난곡)에서 유래했다. 강사상 묘역에는 강홍립 장군도 모셔져 있다. 본래 난곡동 지역은 신림3동 지역으로 1991년 말에 신림3동 인구수가 4만명에 육박함에 따라 1992년 7월 1일 신림3동과 신림13동으로 분리되었다가, 2008년 8월 1일 다시 통합되어 주민들이 선정한 난곡동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현재의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구 신림동 3동) 주변 난곡(蘭谷)지역은 강서가 태어나기 전에는 낭천리로 불리다가, 강서의 호를 따라 현재까지 난곡(蘭谷)의 명칭으로 40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난곡(蘭谷)의 묘(墓)는 신림3동(난곡동) 선영에 있다.


맺는말

난곡 강서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세상과 타협이 없었으며, 꼬장꼬장한 성품에다 묵묵히 맡은 일을 하기보다 자유분망하게 생활하기를 즐기는 데가 있어서 스스로는 별로 출세하지 못했다.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쫒기보다는 안빈낙도하며 살고자 했던 인물이다. 천명을 읽을줄 알았던 기인 조충남, 친민의 정치를 실천한 이원익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앞날을 예언 했을 뿐만 아니라 정승이 되어서 신흠(申欽)의 총명함을 꿰뚫어 보는 등 이인(異人)다운 면모를 많이 보였다. 이원익이 그를 높이 평가했고, 안타까워하며 난곡의 식견이 원대함이며, 지조의 순수함이며, 기국의 활달함은 지금 세상에 그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 만약 국가에서 등용했다면 업적이 어찌 적었겠는가? 그러나 마침내 풍류와 술로써 방탕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 함에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본심이었겠는가?라고 술회 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려하는 목적은 역사의 주인공들의 귀함이나 그 시대의 중요성에 비추어 소흘히 하여 상대적으로 늘 덮어지듯이 넘어가곤 하던 것을 밝혀 현시대에서 주목하도록 제자리에 제대로 놓게 하여야 한다. 난곡 강서는 역사 속에서도 조용하게 자기를 낮추고 세태를 초탈한 삶과 인생관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세상일에 초연하고자 했던 기인 현인의 풍모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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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의 역사적 인물 19 - 난곡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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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整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명종실록(明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