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금요사랑방 제467 강의자료. 강홍립 비운의 선비이자 장군

빛마당 2014. 5. 24. 23:41

금요사랑방 제47 강의 자료


강홍립(姜弘立), 비운의 선비이자 장수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재수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을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역사다.

-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중에서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과거를 통해 오늘의 삶을 비쳐주는 거울이며, 내일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한다.

 상주문화원에서 금요 사랑방을 열어 우리 상주와 관련된 문화와 인물을 소개하는 까닭 역시 지나 간 역사가 주는 교훈을 한 번 열어 오늘에 다시 비추어 보자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 주제로 선정한 상주의 인물 강홍립은 임진왜란 이후 격동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광해군의 실리외교에 참여 하여 최선을 다하다가 희생된 비운(悲運)의 선비이자 장수로 기억되고 있는 분이다.

본 원고는 조선왕조실록과 교육방송(EBS) 기획시리즈 “한국 인물사” 연속 특강 및 그 외 인터넷 자료를 통해 다소 미흡하나마 그의 자취를 살펴보면서 역사 속에 희생자로 낙인찍힌 한 사람의 생애가 어떠했으며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강홍립의 자취는 총 국역 351. 원문 325건에 해당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내용을 모두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다만 강홍립이 살던 시대의 형편과 선비로서 삶, 오도도원수가 되어 어떻게 명나라의 원군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흔히 알려진 것처럼 광해군의 밀명에 의해 청나라에 계획된 항복을 했는지, 그로인해 조선군사의 희생을 최소화 했는지, 그 후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선봉장으로 조국에 돌아와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살펴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혔던 ‘반역자’라는 누명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출생과 가계

 강홍립(姜弘立). 상주인 이다. 명종(明宗)15年(1560)에 태어나 인조(仁祖) 5年(1627) 67세의 일기로 회한의 삶을 살다간 문신(文臣)이자 무장(武將).

 본관은 진주(晋州), 자(字)는 군신(君信), 호(號)는 내촌(耐村))이다. 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이고 아버지는 참판(參判)이자 판중추부사 강신(姜紳)이다. 어머니는 동래(東萊)정씨,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증손녀이며 정유의(鄭惟義)의 딸. 부인은 우주(紆州)황씨, 좌의정 황헌(黃憲)의 손녀이며 황이형(黃履亨)의 딸이다.

슬하에 삼남 삼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강숙(姜璹), 차남은 강원(姜瑗), 삼남은 강찬(姜瓚), 장녀는 윤감(尹堪)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진사 심자(沈鎡)에게 출가, 삼녀는 통제사 이현달(李顯達)에게 출가하였다.

 

 강홍립은 선비로서 삶은 명문 가문의 후손답게 화려하고 대단했다.

선조(宣祖) 22년(1589) 29세에 진사가 되더니, 1597년(선조 30년) 문과 알성시에 병과 1등위로 급제 하였고,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역임하고 1599년 함경도 도사, 1601년 성균관 전적, 공조정랑, 1602년 사헌부 장령, 홍문관 수찬, 1604년 홍문관 교리, 부수찬, 사예를 역임하더니 1605년(선조 38년)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이 되었고, 같은 해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1606년 예조정랑, 부교리, 성균관 직강, 내자시정,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이 되었고,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이듬 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광해군 6년(1614)에 순검사(巡檢使)가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 아버지의 공신호를 계승하여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지고, 도원수가 되었다. 다시 도원수, 비변사 당상, 형조참판, 좌참찬, 한성판윤을 지냈다.


 개인적으로도 화려한 관직의 경력도 그러하지만 그의 가문 또한 실로 명문의 집안이었다.

 

“봉대문중의 급제자에는 강사상, 강사안, 강사필, 강서, 강연, 강신, 강항, 강박, 강백, 강 영, 강세백, 강세륜, 강홍립, 강홍중, 강필문, 강필보, 강필리, 강필신, 강필구, 강필경, 강 석구, 강석빈, 강난형, 강준흠, 강시영, 강경희, 강국형, 강문형, 등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 다. -중략

진주강씨 종보 제431호 제목 “3대 문과급제의 영광과 관찰사 강홍중 선조님”에서는 봉 대 가문의 3대 문과 급제와 법전 가문의 3대 문과급제 이야기를 하였다. 이외에도 봉대 문중에는 3대 문과급제가 2건 더 있다. 강사안, 강신, 강홍립의 3대 문과급제와 강준흠, 강시영, 강국형의 3대 문과급제가 바로 그것이다. -중략

그 이외 봉대 가문의 문과급제 중에 강사상과 강서, 강영과 강필신, 강준흠 과 강시영은 부자(父子)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 또한 강사상, 강사안, 강사필은 3 형제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 강세백과 강세륜은 형제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 법전 문중 문과급 제 중 강덕서, 강억, 강징이 3대 문과급제 기록을 세우셨다고 지난 번 종보에서 이미 이 야기 하였다. -후략.”

그리고 이어 강홍립의 직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월포 대감의 아버지 강온(姜溫)은 문과에 급제하고 의정부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어 머니는 밀양박씨 진사 박식(朴拭)의 딸이다. 배우자는 파평 윤씨 훈련원 부정 윤광운의 딸이었다. 정정공 강사상 부부에게는 4남 3녀가 있었다.

장남 서(緖)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으며 감식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고, 오리 이 원익 및 조충남(조광조의 종질)과는 특히 막역한 친구로 알려져 있다.

둘째 아들 신(紳)은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숭정대부 우참찬으로 평난공신 진흥군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 인(絪)은 유술을 좋아하고 경사에 통박하여 음직으로 출사한 후 여러 지방관 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홍성공신 자헌대부 진창군이 되었다.

넷째 아들 담(紞)은 음사로 벼슬하여 서애 유성룡이 제철사가 되자 그 종사관에 기용되 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사위는 민여건(閔汝健), 이의가(李義可), 김충각(金忠각)이다.

강사상은 장남으로 세 동생을 두었다. 공조정랑(工曹正郞) 강사안(姜士安), 충청도 관찰 사 후금 토벌군의 대장으로 출병한 5도 도원수 강홍립은 둘째 아들 강신의 아들로 손자 이다.”


2. 선비로서 삶

가. 북쪽 오랑캐를 정벌을 위한 모병 계획

그는 선비였지만 함경도사(1599년 39세)로 있을 때 오랑캐를 응징을 위해 필요한 제반 사항을 잘 점검하고 있었다.

먼저 오랑캐를 지금 대규모로 응징하지 않으면 국경을 침입하는 화가 계속 될 것이라는 것(당시 북방의 형세),(군의 현황) 그러나 농사철에 군사를 움직이면 백성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군사를 움직여야 할 시기), 그러나 너무 이르면 눈과 얼음으로, 너무 늦으면 장마로 어려우니 3월 초에 군사를 움직여야 하는 점을 들고, 군량미의 조달과 아울러 행군하기 좋은 지리적 요충지와 병력을 배치해야 할 장소, 적과 맞닿았을 때 전개할 화공 전법까지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북방에 대한 일을 함경 도사 강홍립(姜弘立)에게 물었더니 ‘본도(本道)의 변경 사정으로 볼 때, 모두들 이 오랑캐를 만일 대규모로 응징하지 않으면 국경을 침구하는 화가 그치 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토벌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불어나고 커져서 제압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까 염려되니, 속히 문죄(問罪)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본도의 병력이 적고 약하므로 경포수(京砲手) 7백, 8백 명으로 본도 포수와 함께 각 진지에 나누어 배치하여 선봉을 삼고, 또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형세를 과시하면 적은 모두 질서가 없는 오합지 졸이므로 싸우기도 전에 먼저 무너질 형편이다. -중략 그러나 돌아오는 봄에 군사를 움 직이게 되면 농사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절기가 이르면 얼음이나 눈이 다 녹지 않을 것이고 절기가 늦어지면 장마가 질 염려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3월 초에 군사를 소집하 였다가 기회를 보아 진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략

본부(本府)의 군량이 매우 모자라 감사가 지금 청암창(靑巖倉)에 있는 곡식과 남방(南方) 으로 운반해 갔던 곡식을 실어 와서 군량을 이어 줄 계획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서 변경에서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병사들을 두 갈래로 나누어 한 갈래는 풍산 차유령(豊山車踰嶺)을 지나서 바로 노토 부락으로 진격하게 되면 거리가 대 략 70, 80리쯤 되니, 차유령 위에서 병사를 주둔시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행군 하면 정오쯤에 노토 부락에 도착할 수 있다. 노토 부락에 도착하기 전 20리쯤에 명가노 (明家奴) 제추(諸酋)의 후면 공격을 방비하기 위하여 병사를 갈라 배치할 곳이 있다. 그 러니 이쪽 길로 가는 병사는 적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길은 다른 길에 비하여 가장 평탄하다고 한다. 또 한 갈래는 무산(茂山)에서 출발하여 무산 차유령(茂山車踰嶺)을 경 유하여 명가노 부락을 진공하는 길로 거리가 약 60, 70리가 된다. 적은 이 길에 목성(木 城)을 많이 설치하여 행군하는 길을 막아 두었다. -중략

노토 등 오랑캐들은 한 개의 시벌(時伐)을 노토 부락 서쪽 약 5, 6리쯤에 설치하고 나무 와 돌로 튼튼히 쌓았는데 그리 높지는 않으며 모든 적들이 함께 들어가서 지킬 계획이라 고 한다. 또 시벌 곁에 높은 산이 있는데 아군이 만일 이 산을 점령한다면 화살과 탄환 이 미칠 만한 곳이다. 또 그 가운데는 전부 모옥(茅屋)이므로 화공(火功)도 할 만하다. 」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는 함경도 순검어사(1607, 47세)로 있으면서 1.이곳 군대의 상황과 우리 군대가 적을 무찌르기 위해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를 소상하게 아뢰고 있다. 그리고 2. 군사의 모집 방법에 대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모집한 토병들과 남방의 병사들과의 관계를 따져 3. 적은 비용으로 토병들을 훌륭한 기병으로 만들 수 있는 방도를 알고 있었다.


 함경도 순검 어사(咸鏡道巡檢御史)인 홍문관 수찬 강홍립(姜弘立)이 치계하기를,

“ -전략. 신은 삼가 살피건대, 도내의 군사는 정군(正軍) 이외에 속오군(束伍軍)과 삼수 군(三手軍)이 있는데, 실상은 모두가 역(役)이 있는 사람이고 모두가 농민입니다. 징발하 기 어려움과 정예롭지 못한 점은 남방 입방군(入防軍)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북변에 있는 각 고을 군사는 추위를 견디는 참을성이 남쪽 고을 보다는 약간 나으나 역시 모두 기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기예(技藝)가 미숙하며 춥고 배고픔에 시달리어 군대다운 위 용이 없습니다.

육진(六鎭)의 토병은 본디 정병(精兵)이라고 칭하나 현재 전마(戰馬)가 있어 전진에서 버 틸 만 한 자는 통틀어 수백 명에 불과합니다. 수백 명의 군사를 다 합쳐 지킨다고 하더 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인데 각기 지방을 지키고 있으니 매우 엉성합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주관하는 사람은 부득이 매번 증병(增兵)의 요청이 있는데 변방에 들어가 수어 (守禦)하는 남군이 매년 2천∼3천 명을 밑돌지 않으나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오랑캐의 실정을 몰라서 한 번 소식을 들으면 벌벌 떨면서 어쩔 줄 모릅니다. 정장(精壯)한 남군 이 피잔(疲殘)한 토병만도 못하니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오늘의 사세는 토병을 모집하 는 이외에 다시 다른 묘책이 없습니다.

길주(吉州) 이북의 속오군은 남에게 고공살이하는 장정들입니다. 만일 법을 만들어 모집 한다면 수천 명의 군사는 하루도 안 되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모적(募籍)에 오른 사람 은 공사천(公私賤)을 막론하고 모두 토병을 만들면 토병의 위세가 진작될 것입니다. 신 은 듣건대 ‘남군이 부방(赴防)할 때 기마병은 말 값을 민간에게 내도록 요구하고 뒤따 르는 비용과 식량의 준비도 면포(綿布) 수십 필을 밑돌지 않으며 보군(步軍)의 비용도 10여 필을 밑돌지 않는다.’ 하니, 이 남군의 말 값을 토병에게 주어 말을 사게 하고 치 장(治裝)하는 비용을 토병에게 주어 의복을 갖추게 하고 남군이 먹을 식량을 토병의 식 량으로 삼는다면, 남군은 멀리 부방한다는 원망이 없을 것이고 열읍(列邑)은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이 없을 것이고 각도는 징발하는 소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토병은 의식 (衣食)과 전마(戰馬)가 있어서 병사는 배불러 노래 부르고 말은 마구에서 뛰노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이미 들은 바가 있어 부득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니 모병(募兵)과 조련(操練)·성행 (聲行)의 절목을 특별히 순찰사·병사·방어사 등으로 하여금 회동(會同)하여 의논한 다음 조목조목 기록, 계문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공하게 감히 품달합니다.”



나. 장졸들과 백성들의 형편을 보살피다.

군사가 전쟁을 수행함에 앞서 병사의 사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구나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전쟁에 마음 놓고 싸움을 할 수가 없음을 그는 알았다. 그리하여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1618년 58세)

“지금 강홍립(姜弘立)의 장계를 보건대(, 양서의 군사들은 얇은 홑옷을 입고 있고 남방의 군졸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지금 초겨울인데도 이미 동상에 걸리고 있다 합니다. 이번 서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관에서 지급한 군장이 매우 충분치 못했고, 서울을 지나갈 때 호궤하여 위로하던 날에도 1필의 면포(綿布)도 지급하지 않은 채 단지 한 사발의 막걸리만을 먹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군사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그들이 죽 을 힘을 다하여 싸울 수 있게 하겠습니까.

지금 선유관(宣諭官)이 내려가려고 하는데 실질적인 혜택이 없다면 빈말이 되고 마는 것 입니다. 만약 2만 필의 목면을 덜어내어 나누어 주게 한다면 서북의 여러 군병들이 환호 하고 덕에 감격하는 뜻이 단지 은혜에 감복하여 솜옷을 입은 듯이 느낄 뿐만이 아닐 것 입니다.

-중략.

그리고 구원하러 나가 변방을 지키고 있는 군졸에 대해서는 그들의 요역(瑤役)을 면제해 주게 했지만 지방의 관리들이 간혹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은 화살과 돌멩이가 날 아드는 전쟁터에 있으면서 집에 있는 처자식들이 옥에 갇혀 있다는 집안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발을 구르면서 애통하게 부르짖고 있으니 그 실정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뽑혀 변방을 지키고 있는 모든 군졸에 대해서는 일체 가호(家戶)와 전부(田賦)의 역(役)을 대 소 경중을 막론하고 아울러 모두 면제해 주도록 하며, 그들의 부모와 처자 가운데 매우 심하게 빈궁하여 스스로 살아나갈 수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관에서 늠료를 지급할 일로 특별히 제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소서.


다. 불의한 일에는 강직한 성품이었다.

 그가 장령(1602년 42세, 언론과 감찰을 관장하던 관청 종 4품)으로 있을 때 지평 조정견과 집의 이효원과 함께 파주 목사 이성록(李成祿), 광주 목사 조익(趙翊), 전주 판관 민유경(閔有慶) 등이 헌부에 있으면서 영남 유생 문경호의 상소 건을 부당하게 처리하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정철이 최영경에게 절교 당한 것을 이유로 왕이 특병으로 석방하게 했음에도 국문을 계청하여 마침내 옥사하게 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에게 죄 줄 것을 청하였다. 아울러 자신들이 나약하여 직무수행을 바르게 하지 못함을 이유로 사직까지 각오를 하였다.


 “국가에서 대간(臺諫)의 관직을 설치한 것은 시비를 바르게 하고 공론을 밝게 하기 위해 서입니다. 따라서 그 직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 아첨하여 왜곡되게 편사 (偏私)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파주 목사 이성록(李成祿), 광주 목사 조익(趙 翊), 전주 판관 민유경(閔有慶) 등은 지난번 헌부에 있으면서 영남 유생 문경호(文 景虎)의 상소로 인하여 피혐한 당시 대사헌 황신(黃愼)을 처치할 때에 많은 말을 늘어 놓아 극력 구제하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최영경이 마침내 나국을 받게 된 것은 실로 양남의 감사와 병사의 장계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고, 또 ‘「왕법(王法)은 속일 수 없으 니 그들은 참으로 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라는 전교를 내렸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간신 정철이 최영경에게 절교당하자 항상 분한 마음으로 독심을 품어온 지가 오래 되었 습니다. -중략.

정철이 최영경을 삼봉(三峯)이라고 지목하여 국문하기를 청하였지만 국문한 뒤에 상께서 허물이 없음을 분명히 아시고 특병으로 석방하도록 하셨는데, 정철은 도리어 자기 도당 을 몰래 사주하여 다시 국문하기를 계청해서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이는 천 하에 지극히 원통한 일로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이성록 등은 사당(私黨)을 비호할 줄만 알았지 공의는 엄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 하여 성혼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간신 정철까지도 구제하려 하였으니, 이 점이 사론(邪 論)이 마구 나오게 되고 부탄(浮誕)한 무리가 기탄없는 짓을 하게 된 까닭입니다. 만일 성상께서 그 정상을 통촉하지 못하시어 그들의 말을 행해지게 한다면 시비가 어지러워지 고 공도가 어두워져서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지나 간 일이라 하여 추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성록·조익·민유경 등을 모두 파직 불서 (罷職不敍)하소서.”

집의 이효원, 장령 강홍립, 지평 조정견이 아뢰기를,

“이성록 등은 간신 정철이 양천경 등을 은밀히 유혹한 정상을 숨기고서 도리어 전교의 한 구절을 끌어다 성혼과 정철을 구호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들 마음씨의 간교한 속 셈이 환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옥당은 사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여 편당을 짓는 죄를 곧바로 지척하지 못하고 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도리어 출사하기를 청 하였으니, 그들이 사당(私黨)을 구호하고 공론을 업신여긴 것이 심합니다. 신 등이 언관 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곧바로 논하여 그에 합당한 율로써 죄를 주지 못 해 직무 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지 못한 죄가 큽니다. 뻔뻔하게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신 등의 직을 체척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의사를 말하였을 뿐이니, 아울러 논할 것이 없다. 사직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가 장령으로 있을 때 전성군(全城君) 이준(李準)이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일을 처리한 문제를 두고 파직하라고 아뢰기까지 했다.


 지평 이유연(李幼淵)이 와서 아뢰기를,【대사헌 박홍로(朴弘老), 집의 이덕형(李德泂), 장 령 강홍립(姜弘立)·윤의(尹顗), 지평 최동식(崔東式)이다. 】

“전성군(全城君) 이준(李準)이 전에 그의 종이 성균관 전복(典僕)과 서로 싸운 일로 형조 에 정장(呈狀)했습니다. 이런 경우 사건의 해결은 본래 담당하는 곳이 있는 법인데, 종을 풀어 반궁(泮宮)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소란을 피우게 하였고, 심지어는 데리고 있는 나 장(羅將)을 시켜 성균관 종을 잡아다가 바로 수금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서 제멋대로 사형(私刑)을 행한 죄가 크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런 일 때문에 파직까지 할 수는 없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라. 스스로도 국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가 장령으로 있을 때 자신의 종부형매(從父兄妹)인 정호선(丁好善)과 상피(相避)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 그 때 그는 자신의 경우가 법에 맞지 않으니 물러가기를 원했다.


 장령 강홍립(姜弘立)이 사피하면서 아뢰기를,

“이조 좌랑 정호선(丁好善)의 처(妻)는 신의 종부형매(從父兄妹)이므로 법으로 보아 사피 해야 합니다. 신의 아비 강신(姜紳)이 남의 후사로 나아갔으므로 본종(本宗)에는 복(服) 을 1등 낮추어야 하기 때문에 이조(吏曹)가 이것을 예로 들어 상피할 것 없다고 여겨 신 을 본직에 의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복제에 있어 응당 낮추어야 할 사람도 관직에 있을 경우 상피를 적용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신이 호선과 함께 옥당(玉堂)에 있었는데 호선은 겸춘추를 감(減)하게 하였었으니 지금 이 의망은 더욱 미 안합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라. 존숭을 위한 선비로서의 노력

 당시 국조(國朝)의 유종(儒宗)인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문헌공(禮獻公) 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등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을 상소하였으나 선조의 확실한 비답을 받지 못하자 상소를 올려 존숭을 위한 선비로서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홍문관 부제학 신식(申湜), 전한 강첨(姜籤), 부응교 이덕형(李德泂), 교리 이정험(李廷 馦), 수찬 강홍립(姜弘立), 부수찬 민경기(閔慶基)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변고를 겪은 이래로 국가가 혼란스러워 학문과 예를 닦는 일을 대부분 못하게 되어 유현(儒賢)을 존숭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이 점이 진정 식견 있는 자가 한탄하고 다사(多士)들이 억울하게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관학 유생들이 국조(國朝)의 유종(儒宗)인 문경공(文敬公) 신(臣) 김굉필(金宏弼), 문헌공(禮獻公) 신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신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신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 등을 문묘(文廟)에 종 사(從祀)하는 일을 가지고 대궐에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그들의 뜻은 대체로 오도(吾 道)를 위해 긍식(矜式)하는 바가 있게 하여 흥기(興起)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 로 온 나라 대소 신민들의 공통된 공론으로서 어떤 사람도 그 사이에서 조금도 이견(異 見)을 내지 않고 똑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임금께서는 즉시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미안한 비답을 내리시면서 ‘이언적같은 사람도 그 속에 끼 어 있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온 지 오래이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의혹만 가득할 뿐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하 생략


3. 도원수가 되기 전의 국내 상황


 가. 조선 조정의 청에 대한 태도와 국내 형편

 당시 우리 조정에서는 여진족을 야만인으로 봤다. 그래서 누루하치를 노추(奴酋-오랑캐의 추장)라고 불렀고, 청태종의 이름인 황타이지(皇太極)을 병자호란 이후 청에게 항복한 이후에도 홍태시(紅太豕-붉고 큰 돼지)라고 불렀다. 이뿐 아니라 청태종의 오른팔 격인 장수 영아이대(英我爾岱)를 용골대(龍骨大)라고 부를 정도로 멸시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국내 상황과는 달리 밖으로는 점점 그 힘이 강성해지고 있어 후금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 기 시작했다. 그러함에도 지는 해와 같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명나라의 정치적 간섭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국토는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민생은 극도로 피폐한 상황 속에서 1608년 광해군이 등극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고 국운을 되살리는 일과 전쟁이라는 엄청난 재앙이 다시는 이 땅에서 사라지도록 사회·경제적 회복에 최대의 역점을 쏟고 있을 때이다.


 나. 후금의 명에 대한 선전 포고

 그러나 이러한 광해군의 기대는 정면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1618년(임진왜란 종식 20년 후) 후금의 누루하치는 명나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만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가 명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에 대해 가진 감정을 7대 한(七大恨)

1. 누르하치의 부조를 살해한 한

2. 명이 건주위와 여허 부족간의 전쟁에서 여허를 원조한 한

3. 명이 광영에서 건주위의 사신을 살해한데 대한 원한

4. 명이 여진을 유인하여 몽고에 압송한데 대한 원한

5. 명이 건주위와 자하, 삼차, 무안에서의 경작을 방해한 원한

6. 명이 건주위의 국서를 모독한 원한

7. 명이 건주위에 귀순한 한인의 소환을 강제한 원한

으로 명분 삼아 명의 정치, 경제적 요충지이자 여진족을 방어의 최대 전진기지인 무순(撫順)을 점령하고 말았다. 더구나 무순(撫順)을 지키던 명의 장수 이영방(李永芳)(정묘호란때 아민과 함께 조선 정벌을 나온 장수)은 화살 하나 쏴보지도 않고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고 누루하치의 딸과 혼인까지 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명나라는 누루하치를 응징하기 후금의 거점인 만주 지방의 신빈(新賓)을 점령하기 위한 원정군을 편성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 조선에 대해 원병 2만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조선에 원군을 보내라는 명분은 1592년~1598년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을 비롯한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해 줬으니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하는 뜻에서 조선이 갚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7년 전쟁에서 망해가는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줬으니 이제는 은혜를 갚으라는 말이었다.


 다. 광해군의 고민

 광해군의 고민은 심각하였다.

2만 명의 군대도 군대려니와 그들이 먹을 식량, 군수물자, 운송부대의 동원이 문제,

이를 충당하기 위한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일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의 형편은 왜란이 끝 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7년이란 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을 해결하지 못한 시점에서 2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명이 주도하는 다국적군과 함께하는 일이란 실제로 불가능 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조선은 사회·경제적 회복의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한편 명나라가 재조지은을 구실로 조선을 끌어 들인 데는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또 하나의 전술이 있었다. 다시 말해 조선 오랑캐를 이용하여 여진 오랑캐를 제압하자는 술수였다. 명나라 관인(官人)들이 남긴 자료에는 조선을 순이(順夷)로, 명의 뜻을 강하게 반발하는 여진을 역이(逆夷)로 보았다. 광해는 이러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략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명의 원군으로 지원군을 보내는 일에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명의 술수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어버이의 나라임으로 부모의 나라가 어려울 땐 설령 우리가 망해도 원정군을 보내야 한다는 명분 논리가 더 우세하였다.


 라. 광해군의 파병 지연 전략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광해군의 심각한 고민은 명나라 원군 파병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후유증도 물론이려니와 파병을 함으로서 후일 날로 강성해지는 누루하치의 보복 공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교적인 해결이 최선임을 간파하고 이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1. 그래서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이 명나라가 보낸 파병에 관한 외교문서였다. 다시 말하면 당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문서는 명나라 황제인 신종(新宗)의 황인이 찍힌 칙서가 아닌 요동도사(요동사령부)의 외교 문서였음을 확인한 것이다. 광해군은 이를 명분으로 명으로의 파병은 불가하다고 버티기 시작했다.

 2. 그리고 두 번째로, 설령 황제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당시 왜란 이후 조선의 형편은 파병을 할 수 없는 처지임을 황제에게 알려 파병 면제를 얻기 위한 전략을 폈다. 그래서 주문사(奏聞使), 주청사(奏請使)를 끊임없이 보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가면 또 한 사람을 보내고 연속적으로 계속 보내면서 황제께서 조선의 형편을 알고 참아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명은 임진왜란 때 전쟁에 참전 경험이 있는 양호(楊鎬)를 요동군 사령관으로 보내 광해군이 계속 파견하는 조선 사신들을 검문 검색하여 사신들이 가지고 있는 공문서 내용들이 황제의 심기를 오도할 우려가 있다고 삭제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윽고 이러한 조선의 전략을 간파한 명의 조정은 만약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후금보다 오히려 조선을 먼저 혼내겠다는 등 전 방위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마침내 성절사 윤휘가 황제 명의의 칙서를 받아 오고, 이에 맞추어 조정의 비변사 신료들의 압박에 못 이겨 사면초가가 된 광해군은 1618년 겨울,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4. 도원수가 되어서

 

 가. 강홍립이 도원수가 된 까닭

 이때 광해군의 외교 전략으로 선정 된 사람이 강홍립이었다.

강홍립은 본래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형조참판이었다. 무관이 아닌 문관을 오도도원수로 임명한 것이다. 왜 광해군은 무관이 아닌 그를 임명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광해군은 이번 출병이 전쟁이란 목적보다는 외교에 더 치중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래서 중국어에 능한 강홍립을 내세워 명나라 장수들과 정치적인 싸움, 즉 외교전으로 이끌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을 것이다. 대화야 필담으로도 가능했을 터이지만 현장에는 중국어에 능통한 것이 오히려 유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광해군의 외교적 혜안(慧眼) 그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서장관으로의 활약과 사신을 잘 접대한 공로로 포상을 받은 바 있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해군이 오도도원수가 출정하기 전에 밀명(觀形向背 ‘정세를 살피고 행동을 결정하라)’을 내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밀명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추측일 뿐 밀명에 대한 자료는 없다. 다만 광해군은 포수를 차출하여 경략에게 보낸 도원수 강홍립에게 하유하는 말 중에 “그대는 폐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데 힘을 쓰라.” 라고 질책한 내용이 있고, 이 말은 조선군의 지휘권은 도원수가 행사해 군사의 보존을 최우선적 가치로 생각하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이는 밀령이 아니라 공개된 명령이었다. 전투 현장에 있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도 투항이 우발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실록을 보다보면 강홍립 스스로가 광해군에게 보내는 장계에 마치 밀명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언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글에는 결코 일부러 항복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광해군 자신도 원병을 보내는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글에서 비슷한 심경이 비쳐 지기도 한다.


 도원수 강홍립에게 하유하였다.

“당초 도료군(渡療軍) 1만 명은 오로지 양서(兩西)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단속하고 훈 련 시켰으므로 장수와 졸개들이 서로 익숙하니, 지금에 와서 경솔히 바꾸기는 곤란하다.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 경략이 징발하는 포수는 비록 보내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정문(呈文)으로 회답할 때에 만약 ‘우리나라의 군사 1만 명이라고 말은 하지만 숙달된 포수는 매우 적은데 지금 그 중에서 4백 명을 차출하게 되면 동쪽 방면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다.’고 말 했다면, 경략이 다른 진영에 배치하지 않고 우리나라로 돌려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털끝만큼도 곤란해 하는 기색 없이 들여보낼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으니, 경 의 이 조치는 잘못 생각한 일인 듯하다. 만약 우승은(于承恩)의 왕래하는 인편을 만나게 되면 사정을 갖추어 말하여 그로 하여금 경략의 아문에 주선하게 함으로써 진영을 나누 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일본인 역사학자 다가와 고죠(田川學三)와 같은 이가 밀지를 보냈다거나 밀명을 내렸다고 하나 불확실 한 일이다.

이렇게 파병을 결정한 광해군은 마침내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는다.,

(문무지략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판단)


 나. 도원수 사임 상소

 그러나 강홍립은 자신은 도원수의 자질이 없음을 밝혀 여러 번사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서 병사(兵事)를 익숙히 아니 지금 급한 때를 당하여 원수의 직책을 받기에 충분하다.” 라고 그의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원수 진령군(晉寧君) 강홍립(姜弘立)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장수를 임명하는 일은 옛사람들이 중하게 여겼고 적을 어떻게 상대했는 지는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과 삼군(三 軍)의 사명(司命)을 책임지는 그 임무가 어떠한 것입니까. 돌아보면 그 일이 중대하지 않 습니까. 무사한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이추(夷酋)가 틈을 엿보아 변방 사태가 심각해지는 오늘날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중략

그런데 이달 9일 이른 아침에 하리(下吏)가 와서는 원수의 후보 중에서 신의 이름에 낙 점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다가 이어 놀란 마음에 가슴이 뛰면서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실(私室)에 엎드 려 있으면서 공의(公議)가 발동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또 여전히 조용하 기만 하였으므로 신이 더욱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천지 부모 앞에 간절한 심경을 진달 드리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옵건대 성 상께서는 판단해 주소서.-중략

그런데 소위 원수라는 직책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책임이 수반되는 자리입니까. 그리고 지금 변방의 사태에 비추어 볼 때 신의 재질과 역량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한창 세력을 떨치는 오랑캐를 막아내고 중국 조정의 명령에 책응(策應)해야 할 터인데, 성패의 기틀 이란 숨 한번 쉬는 사이에 결정이 나고 응수하는 일도 눈앞에서 결판이 날 것이니, 비록 문무를 겸비한 자질을 소유하고 위망(威望)이 출중한 사람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반드시 잘 처리하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처럼 걸맞지 않는 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중략.

다시 더 생각하시고 정신(廷臣) 중에서 택하시어 특별히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제수하심 으로써 나랏일을 중하게 하고 신의 분수를 편하게 해주소서. 지극히 간절하게 명을 기다 리는 심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경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서 병사(兵事)를 익숙히 아니 지 금 급한 때를 당하여 원수의 직책을 받기에 충분한데 비국에서도 모두 경을 천거 했으므 로 내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경은 나이도 많지 않은데 어찌 병들고 쇠 약하기까지야 하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이러한 강홍립의 상소는 몇 차례 더 있었다. 광해 10년 무오년 6월 15일과 8월 6일, 그리고 1619년(광해 11년) 2월 19일에 있었고, 같은 해 2월 24일에는 모친의 병을 이유로 체직되기를 원했지만 역시 “맡은 일을 다 하는데 최선을 다하라.”라는 비답이 내렸다.


 진령군(晉寧君) 강홍립(姜弘立)이 도원수를 사직하는 재소(再疏)를 입계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모두 유시하였다. 사직하지 말고 군량과 방비하는 일 등을 단단히 마음 먹고 강구하면서 묘당과 자세히 의논해 선처토록 하라.”

하였다.

도원수 강홍립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기를,

“국사가 위급하니 사직하지 말고 몸조리한 뒤 속히 내려가서 삼군을 통솔하여 장대한 계 책을 이루어 나의 근심을 덜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도원수 강홍립이 상소하여 체직되기를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러한 때에 망극한 남의 말을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보아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도원수 강홍립이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체직되기를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십승(十乘)으로 행차하여 삼군(三軍)의 명을 맡았으니, 비록 사사로운 근심이 있다 고 하더라도 가벼이 사직해서는 안 된다. 경의 연로한 부모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이미 내의(內醫)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구완하도록 조치하였다. 신명이 도와서 약 을 쓰지 않아도 병이 낫는 기쁨이 있을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맡은 일을 다 하는 데 더 욱 힘쓰도록 하라는 〈것으로 회유하라.〉”

하였다.


 다. 원정군 현황

 몇 번이나 사양을 했지만 광해군의 하명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강홍립은 지원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조선 국왕이 명나라 제독 양호(楊鎬)에게 보낸 자문에 의한 기록을 보면 당시에 파견된 인물 구성과 방어 지역, 그리고 군사들의 장비와 병종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조명연합군을 구성하여 요동에 파견된 인물로 다음과 같다.


강홍립 (姜弘立) - 도원수 (당시 의정부 좌참찬)

이계선 (李繼先) - 중군관 (원임 절도사)

김경서 (金景瑞) - 총령대장 부원수 (당시 평안절도사)

안여눌 (安汝訥) - 중군관

문희성 (文希聖) - 방어사

김응하 (金應河) - 좌조방장 - 부차 전투에서 장열히 사망(유일하게 칭찬받고 신원)

이원일 (李一元) - 우조방장

이들이 방어해야 할 지역은 강계(江界), 상토(上土), 만포(滿浦), 고산리(高山里), 위원(渭 源), 이산(理山), 아이(阿耳), 벽동(碧潼), 창주(昌洲), 창성(昌城), 삭주(朔州), 의주(義州) 였다.

총 1만 명의 병사들의 병종은 다음과 같다.

포수(砲手) - 3,500명 (평안도 1천, 전라도 1천, 충청도 1천, 황해도 5백)

사수(射手) - 3,500명 (평안도 1,500, 전라도 5백, 충청도 5백, 황해도 1천)

살수(殺手) - 3,000명 (평안도 1천, 전라도 1천, 충청도 5백, 황해도 5백)


 이러한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명나라는 다시 더 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도독 유정은 특히 포수의 숫자가 적다고 하여, 5,000명을 요구한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치계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이 경략의 영전(令箭)과 발령패(發令牌)를 교 유격(喬遊擊)에게 보내어 격문을 신에게 전달하였는데, 포수 5천 명을 징발할 것을 독촉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도 독이 총제(總制)의 책임을 맡고서 이런 징발령을 내었으므로 우리나라로서는 일각이라도 지체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래서 신이 삼영(三營)에 전령하여 우선 우영(右營) 포수 2천 명, 좌영(左營) 포수 1천 5백 명, 중영(中營) 포수 1천 5백 명을 뽑아 5천 명을 채 워서 지금 들여보내려고 합니다.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로 하여금 군졸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게 하였고, 내지에 머무르고 있는 군대도 대열을 지어 차례로 이동하여 강변으로 들 어가게 하였으며, 순변사 우치적(禹致績)도 옮겨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군향(軍餉)은 분 호조(分戶曺)가 운송한 것이 1만 2천 석에 이르는데 강의 얼음이 녹으려 하는데도 배를 갖추지 못하여 군량을 운송하기가 매우 곤란하니, 조정에서 속히 지시하소서.”


 그리하여 강홍립은 우영 2,000명, 좌영 1,500명, 중영 1,500명을 맞춰 포수를 보강하여 총 1,5000명을 맞춘다.

다른 이는 파견된 군사는 15,500명으로 그 중 5,000명은 최신 무기인 조총을 장착한 정예부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라. 압록강을 건너다.

 1619년 2월19일 조선군 좌영장 김응하 휘하의 좌영이 압록강을 도하했다. 도원수 강홍립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2월 21일, 조선군 중영이 도하한 시점은 22일이었다. 우영을 포함한 전체 조선군이 도하를 마친 시점은 그 다음 날인 2월23일이었다.

이때까지 명군 주력과 조선군은 합류하지 않았지만 조선군을 통제할 임무를 부여받은 명나라 유격 교일기(喬一琦)는 이미 2월22일 조선군 지휘부와 접촉을 해왔다. 강홍립은 사실상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조선군의 지휘권 작전권은 양호에게 넘어 가고 강홍립은 조선 전쟁에 참여했던 유정의 휘하에 배속이 된다. 우익남로군의 전체 지휘관이었던 명나라 제독 유정과 강홍립이 직접 만난 것은 2월26일이었다. 이날 조명연합군 지휘부 사이의 첫 만남부터 도원수 강홍립은 생각이 깊어진다.


 “그대는 폐하지 않는 싸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라는 말을 되새겨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조선군의 식량 보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이동을 늦추어 달라고 명나라 측에 요청한다. 하지만 4개 방면으로 나눠 진격하는 명군이 만주족 후금의 도성에 3월1일 출발하기로 사전에 정해진 마당에 행군을 늦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당연히 유정은 "군율이 지엄하다"며 조선 측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음날인 2월27일에도 조선군은 식량 보급이 되지 않는다며 행군을 지연시키려했지만, 명나라 측의 반응은 한층 격해졌다. 특히 우 수비는 "조선군이 후방에 쳐지면 제독(유정)이 나를 벨 것"이라며 “조선군은 군량이 없다고 하나, 실은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다"라고 칼을 빼들고는 행군을 독촉했다.

도원수 강홍립은 2월29일 "식량이 도착하지 않아 행군하기가 어렵다"며 다시 한 번 행군 연기를 명나라 유정 제독에게 요청한다. 유정은 "군대에서 약속한 날짜가 이미 정해졌으니 잠시도 머무르기 힘들다"면서도 "원수의 얼굴을 봐서 하루만 머무르겠다."고 조선군 측의 요청을 수락한다.

당시 조선군의 형편을 보면 강홍립의 지연 요청은 눈치 보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였고 더구나 당시의 임란에도 참전했던 명나라 총사령관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와 도독 유정 사이의 지휘부 분열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뿐 아니라 그들의 장비조차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여 전쟁 수행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1.군대의 숫자. 2. 양호와 유정의 반목, 3. 무기 현황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기를,

“대설 중에 행군하느라 각 영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어 있는데 도독의 전 진하라는 명령도 없었으므로 신들은 주둔하여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도독이 강안찰과 함께 양마전으로 와서는 사람을 보내어 신들을 전진하도록 재촉했으므 로 신들은 즉시 삼영의 병마(兵馬)에게 명하여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중략

신 홍립이 가서 도독을 만나보고 각 방면 군사의 수를 물었더니, ‘서남 방면에 대병(大 兵)이 일제히 전진하고 있고, 동쪽 방면의 군사는 내가 친히 거느린 장정 수천 명과 각 장수가 거느린 병사가 있을 뿐이니, 통틀어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쪽 방면의 군대가 매우 고립될 텐데 대인(大人)은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습 니까?’ 하고 신이 물었더니, 말하기를 ‘양 대인(大人)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 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고, 나도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죽기로 작정 하였다. 신이 ‘왜 이렇게 빨리 전진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병가(兵家)의 승산은 오직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얻고 인심을 따르는 데에 있을 뿐이다. 날씨가 아직 추 우니 천시를 얻었다고 할 수 없고, 도로가 질척거리니 지리를 얻었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병권을 잡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답하였는데, 무척 기분이 나쁜 기 색이었습니다. 신들이 그 진영에 나가 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 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였다.


 더구나 당시 명나라 조정은 여진의 정벌을 위해 명군 47~50만의 대병을 출병할 것이라고 장담을 했다. 그러니 조선이 2만을 보내봐야 별거 없지만 성의차원에서 보태라고 한 상태였다. 그러나 실제 강홍립이 확인한 명나라 군사는 7만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조그마한 폭포 하나를 두고 ‘비류직하 7천척(飛流直下 七千尺)’이라고 과장하는 중국인다운 처사였다.

도원수의 눈에 비친 명나라 군대의 수와 사기는 형편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도원수 강홍립이 전두산으로부터 행군하여 주둔한 일을 치계하다

원수의 삼영(三營) 군사가 전두산으로부터 압아하(鴨兒河)를 건너고 배동갈령(拜東葛嶺) 을 넘어 우모령 쪽으로 40리를 행군하여 주둔하였다. 중국 조정의 장관 유 총병 이하는 동서로 진영을 벌여 대비한 채로 밤을 지냈다.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였다.(군대 수, 형편)

“동쪽 방면의 장수들이 거느린 군병과 장수는 유 총병(劉摠兵), 강 부총(江副摠), 조 참 정(祖參政), 요 유격(姚遊擊), 서 수비(徐守備), 유 수비(劉守備), 주 지휘(周指揮)가 관전 (寬田)으로부터 출병했고, 교 유격(喬遊擊), 주 도사(周都司)가 진강(鎭江)으로부터 출병 하였는데, 말로는 3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신이 보기로는 1만여 명을 넘지 않는 듯합 니다. 도독은 뒤따라오는 군대를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출병하게 한 데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드러내 놓고 하였으며, 교 유격도 창졸간에 군사를 일으킨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 다. 대개 동쪽 방면의 군대가 전진하는 길은 험난하고 멀며 큰 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또 강을 가로질러 건너야 했는데, 압아하(鴨兒河)에 비하여 더 깊고 넓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건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압아하를 모두 네 번 건넜는데, 깊 이가 말의 배에까지 차며, 물이 검고 돌이 커서 사람과 말이 건너기 어려웠습니다. 군인 들은 각자 행장을 가지고 있는데 반도 채 못 와서 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또 가지고 온 군량은 이미 다 떨어져 가는데 군량과 건초가 아직 후송되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 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군사들을 독촉하는 경략의 영전(令箭)의 도독에게 도착했으므 로 군대를 전진하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


 마. 조선군이 진군이 늦어진 이유

 당시 조선군 15,000명중 기병이 4-5,000명이고 나머지 10,000여명은 보병이었다. 거기에 명군은 모두 기병이어서  조선군이 기병인 명의 군대와 보조를 맞추기가 힘이 들었다. 거기다가 또한 15,000명의 군사가 먹어야 할 군량미나 군수품을 지원하는 후속부대가 뒤에서 처져 있어 더욱 힘이 들었다. 이러한 형편을 두고 강홍립은 명군에게 전쟁을 좀 늦추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앞서 말한 교일기(喬一琦)와 우승언(于承恩)과 같은 고문으로 파견된 그들이 계획적인 엄살이라고 판단하여 묵살 당하고 말았고 강홍립은 어쩔 수 없는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당시 조선군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보병 1인이 갖추어진 장비는 대략 칼이나 조총이나 활과 같은 무기, 열흘치의 양식, 그리고 추위를 이길 방한복 대신 가마니 몇 장과 짚신 몇 켤레, 그리고 여진의 기마병을 제어하기 위한 장애물인 거마작(拒馬柞)이란 장비까지 등에 지고 행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빨리 행군하라는 명나라 장수들의 독촉에 조선군은 밤에 양식을 땅에 묻거나 거마작, 또는 가마니를 버리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짐이 가벼우니까 행군은 쉬웠지만 신빈(新賓) 가까운 부차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조선군은 식량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군량이 떨어진 강홍립은 명의 유격(遊擊) 교일기(喬一琦)에게 요청해 겨우 소미(小米) 10포와 마두(馬頭) 2포를 군량이 바닥난 우영(右營)에 나눠주었다. 강홍립은 “화가 눈앞에 닥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호소할 정도로 사기가 저하되었다. <광해군일기>는 “박엽(朴燁)과 윤수겸(尹守謙)이 군량길을 끊어서 강홍립 등이 큰 곤경에 빠진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평안감사 박엽과 분호조참판으로 관향사(館餉使·군량공급 책임자)에 임명된 윤수겸이 군량 수송을 제때 안 한 것이었다.


 원수의 군대가 우모령(牛毛嶺)을 넘고서 치계하기를,

“어제 배동갈령(拜東葛嶺)으로부터 도독이 주둔한 곳으로 뒤 쫓아 가서 ‘보병의 짐이 무 거워 말을 탄 군사를 쫓아갈 수는 없다.’는 뜻을 고하였더니, 도독이 ‘나도 알고 있다. 그 러나 기일이 임박했으니 다른 방면보다 늦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내가 우모채에서 밤을 지낼 것이니 귀영(貴營)의 군대는 조용히 뒤쫓아 오도록 하라.’ 하고는 즉시 먼저 출발하 였으므로 우리 군대는 뒤를 쫓아 재를 넘었습니다. 이른바 우모령은 철령(鐵嶺)보다 더 험하며 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곳인데, 적이 새로 큰 나무를 베어 시내와 골짜기에 이리저리 쓰러뜨려 사람과 말이 지나가지 못하게 해놓은 곳이 세 군데였습니다. 나무를 베면서 행군하여 해가 질 무렵에 우모채에 닿았습니다. 원래 있던 호가(胡家) 30여 가구 가 이미 불탄 뒤였으므로 그들이 묻어놓았던 곡식을 도독의 군사들이 파내어 양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은 본채(本寨)로부터 1백 50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창성에서 강 을 건너던 날에 사람들이 제각기 10일치 양식을 가지고 출발하였는데, 지금 이미 거의 다 되어 양식이 떨어질 날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신이 이러한 뜻으로 도독에게 재차 삼 차 간곡하게 말하였더니, 도독은 ‘귀영의 군사들은 양식이 운송되어 올 때까지 머물러 있어라. 나도 하루동안 더 머물렀다가 내일 귀영의 군사들과 함께 전진하겠다.’ 하였습니 다. 장 부총(張副摠), 요 유격(姚遊擊), 교 유격(喬遊擊), 주 도사(周都司), 서 비어(徐備 禦), 주 비어(周備禦)가 거느린 군사들은 먼저 전진하였습니다. 날이 저물도록 군량이 도 착하지 않았으므로 우영(右營)에는 어제 저녁에 양식이 떨어져 교 유격이 보내온 소미 (小米) 10포와 마두(馬頭) 2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화가 눈앞에 닥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박엽(朴燁)과 윤수겸(尹守謙)이 양로(糧路)를 끊어서 홍립 등이 큰 곤경에 빠 진 것이었다.>】


 명나라의 작전은 명나라 군사가 세 방향으로 그리고 조선의 원군과 협공을 하는 또 하나의 방향으로 모두 4개의 전진로를 계획하고 있었다. 강홍립은 “그대는 폐하지 않는 싸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라는 말을 되새겨 신중을 기한다. 이를 간파한 유정은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눈치만 볼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여 명군 장군 교일기(喬一琦)와 우승은(于承恩)을 고문관으로 파견하여 심지어 강홍립에게 칼을 겨누면서까지 빨리 진군할 것을 독촉한다


 바. 조명 연합군이 패하게 된 까닭

 신빈을 향해 진격하기로 한 3개부대가 3월 1일에 출발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가장 북쪽을 담당한 두송(杜松)이란 장수가 자신이 먼저 큰 공을 세워야 하겠다는 공명심으로 먼저 출발을 해 버렸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여진의 정벌을 위해 명군 47~50만의 대병을 출병할 것이고 말하면서 조선이 2만을 보내봐야 별거 아니지만 성의차원에서 보태라고 장담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실제 강홍립이 확인한 명나라 군사는 7만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나마 7만 명의 군사를 삼군으로 편성을 했으니 군사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거기에 두송(杜松)이 먼저 도착을 했으니 누루하치와의 싸움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두송(杜松)은 거기에서 대패를 하고 말았다. 이 전쟁은 명군의 작전 실패, 즉 명군은 여러 장수가 서로 떨어져 있어 완전한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것과 장수들이 공을 다투어 후금군을 각개 격파하도록 허락한 전략이 가장 치명적 원인이었다. 누루하치는 그 여세를 몰아 신빈(新賓)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강홍립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당시 누루하치는 8기군의 군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1기군이 약 7,500명 정도이니 8기의 군단 병력은 결국 6만 명이 넘는 군사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6만의 군사를 섬멸하기 위해서는 18만에서 20만의 병력이 필요한데 조선군 합쳐봐야 10만이 안 되는 군사가 그것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병력의 분산이 있었고, 거기에 공명심으로 인해 미리 전진한 부대가 패함에 따라 강홍립의 군대도 같은 운명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누루하치의 큰 아들 귀영개(貴永介)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명군의 원병으로 참여하게 된 까닭이 후금과 원한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명분 때문이었다.’ 라고 설명하자 귀영개(貴永介)는 이를 받아 들여 항복으로 마무리 하게 된다.

평안감사는 조명연합군이 삼하에서 패배한 전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치계하였다.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三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이 때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였고, 도독이 중간에 있었으며 뒤이어 우리나라 좌·우영이 전진하였고, 원수는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뒤에 있 었습니다. 적은 패한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回軍)하여 동쪽으로 나와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앞장서 가다가〉 갑자기 【부거(富車) 지방에서 노추(奴酋)의 복병을】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 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 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뭉개고 죽이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 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 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 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 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 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 약 이 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 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나라의 오랑캐 말 역관인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경서(金景瑞)가 먼저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약속을 하 고 돌아왔는데 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와서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중국의 패잔병 수백 명이 언덕에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이 우리 군대에다 대고 ‘너희 진영에 있는 중국인을 모두 내보내라.’고 소리치고, 또 ‘중국 진영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 고 소리쳤습니다. 이 때 교 유격이 아군에게 와서 몸을 숨기려고 하다가 우리나라가 오 랑캐와 강화를 맺으려는 것을 보고는 즉시 태도가 달라져 작은 쪽지에다 글을 써서 자신 의 가정(家丁)에게 주면서 요동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고는 즉시 활시위로 목을 매었는데, 우리나라의 장수가 구해내자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홍 립 등이 중국 군사를 다 찾아내어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자 적은 그들을 마구 때려서 죽 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홍립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경서는 투구와 갑옷을 벗어 〈오랑 캐 깃발 아래에 세워 두고〉 오랑캐 진영으로 갔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로 하여금 삼군 (三軍)을 타일러 갑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게 하였습니다.

백(白)씨 성을 가진 호남(湖南)의 무사가 이민환(李民寏)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항복할 뜻을 이미 정했다면 공은 막부의 계책에 참여했으면서 어찌하여 군막으로 나아가 대의로 써 꾸짖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두 원수를 목 베어 삼군을 격려하여 한 번 싸우다가 죽는 것이 노추에게 무릎을 꿇어 천하 만세의 욕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였지 만, 민환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부하 장수 이일원(李一元)·안여눌(安汝 訥)·문희성(文希聖)·박난영(朴蘭英)·정응정(鄭應井)·김원복(金元福)·오신남(吳信男) 등과 함 께 제각기 거느린 군졸과 말을 인솔하여 무기를 버리고 갑옷을 벗은 채로 오랑캐 진영으 로 가서 항복했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와 장수들로 하여금 군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고 적병으로 둘러싼 채로 노추(奴酋)의 목책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노추는 홍립과 경서만 목책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 밖의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성 밖에 두고 감시하 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싸움에 개철 총병(開鐵摠兵) 두송(杜松)이 공을 탐내어 경솔히 전진하는 바람 에 전군이 패몰함으로써 적병이 동쪽 방면에 전념하게 되어 끝내는 사방의 군대가 모두 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후 오랑캐에게 잡혔던 장수와 군사들이 대부분 달아나 동 쪽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굶주림으로 골짜기에서 뒹굴거나 오랑캐에게 잡혀 거의 다 죽고 돌아온 자는 겨우 수천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5. 패장 강홍립에 대한 광해군의 보호


 가. 조선조정의 강홍립에 대한 공론

강홍립의 항복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라 조선군의 늦은 보급, 명군의 군사 분산 조치, 공명심에 의한 각개 격파라는 실패라고 하는 총체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항복 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강홍립이 억류된 후 직명을 써서 올린 장계(1619년 4월)를 보면 광해군과 사전에 이 문제에 의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호차(胡差)가 국경에 와서 노추(奴酋)의 서신을 바쳤는데, 포로로 잡혔던 종사관 정응정 (鄭應井)【무관. 】등이 함께 왔다. 강홍립(姜弘立) 등이 직명을 써서 장계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배동관령(背東關嶺)에 도착하여 먼저 호역(胡譯) 하서국(河瑞國)을 보내어 노(虜)에 게 밀통하기를 ‘비록 명나라에게 재촉을 당하여 여기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항상 진지의 후면에 있어서 접전(接戰)하지 않을 계획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패한 후에도 서 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화친이 속히 이루어진다면 신들은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 다.”

하였다.【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會寧府)의 시장 장사꾼 호족(胡族)에게 이 일 을 통보하게 하였는데, 그 장사꾼 호족이 미처 돌아가기도 전에 하서국(河瑞國)이 먼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갔으므로 노추가 의심하여 감금하였다. 얼마 후 회령의 통보가 이 르자 마침내 하서국을 석방하고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체로 미리 예정된 계획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강홍립에 대해 변호해 줄 사람은 국내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자신을 보호해 주고 변명해 주던 후원자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그는 1620 후금에 억류된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등 10여명과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기까지 청나라에 잡혀 있다고 보니 그는 영원히 패배자요 배신자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조정 신료들은 명의 눈치를 보면서 명군의 전쟁 실패까지 강홍립이 항복한 때문이라고 강홍립을 매도하고 마침내 그의 가족을 구속하고 심지여 죽여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와 그의 가족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두둔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강홍립 등의 하늘에 닿는 죄는 그에 따른 율(律)이 있는데 다만 잠시 확실한 보고를 기 다리라는 하교로 인하여 묘당이 단지 직명을 삭제하고 가족을 감금하라고만 청하였습니 다. 그런데 이번에 이민환(李民寏) 등이 차호(差胡)와 함께 호서(胡書)를 가지고 도착하 였고 보면 강홍립 무리의 한 짓을 다시 물어볼 것도 없는데 어제 저녁에 다만 그 직책을 먼저 삭제하라고만 하교하셨으므로 신들은 답답하고 통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비국의 계사에 의거하여 가속도 아울러 구금하여 법을 시행하는 뜻을 밝히소 서.”

하니, 답하기를,

“알아서 참작하여 처치할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장수란 삼군(三軍)의 사명(司命)으로서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기 때문에 고금천하의 법 중에 군율만큼 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 등은 자신이 원수(元帥)가 되어 적지에 깊숙이 들어가서는 중국 장수와 함께 힘껏 싸워 목숨을 바치 지 않고 도리어 투항을 청하여 적의 뜰에 무릎을 꿇었으니, 신하의 대의가 땅을 쓸듯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심지어는 노적의 후한 향응을 편안히 받으며 노추의 친위병을 많 이 거느리고 신하가 되기를 달게 여겼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한 국가의 모욕이겠습니 까?-중략

청컨대 강홍립·김경서의 가족 및 정응정 등을 모조리 잡아서 구금하라고 명하심으로써 군율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고상한 말은 국사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강홍립 등의 죄를 논할 때가 어찌 없겠는가. 젊은이들의 부박한 논변은 잠시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비국이 계를 올렸는데 답하기를,

“오랑캐에게 포로로 잡혀 함몰되어 들어갔으므로 그 사이의 사정을 여기서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억지로 말할 것 없다.”

하니, 비국이 또 아뢰기를,

“강홍립의 투항한 사정은 이제 다시 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비단 그들의 장계 및 정응정 등의 말한 바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크고 작은 아문에서도 모 두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이로 인하여 적지 않게 우리나라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차관이 오게 된 것이 먼저 우리나라를 정탐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경략 이 만약 차관을 만난다면 반드시 먼저 강홍립 등이 투항한 곡절과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처치하였는가를 물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은 차관이 질문을 하기 전에 주상께서 부득 불 먼저 명나라 병사가 위엄을 손상하게 된 일을 위로하고, 다음으로 강홍립 등 중영(中 營)의 장사가 포로로 잡히고 투항하게 된 사정을 말하여 온 나라의 군신이 통탄하고 분 개한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다. 이렇게 네 차례나 계문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나. 후금에 대한 정보제공

 한 편 강홍립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형편에서도 조선조정과 후금과 화친을 도모하는 내용의 글을 조선에 보내고, 아울러 끊임없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광해군에게 청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추궁이 두려워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해 벌주자는 조정 신료들의 주장에 대해 명분상 지원병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심경이 솔직하게 들어나 있다. 그리고 강홍립을 벌주는 일보다 국내 정치적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신 강홍립 등이 명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면 오직 적만을 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 데 도중에서 먼저 통역을 보내어 미리 출병하는 까닭을 통지하는 등 마치 당초에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어,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였 다가 그들의 장계를 보니, 힘이 모자라 함락을 당하였다는 정상은 조금도 없고 또한 구 차하게 살아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뜻도 없이 가는 길의 행군한 절차를 차례로 서술하고 감히 미리 통지하여 낭패하였다는 등의 말을 버젓이 아뢰면서 스스로 그들이 한 일이 당 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끝에 가서는 다시 회답할 말을 지시해 주어 살아서 돌아오 기를 꾀하고 있습니다.-중략. 전교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뜻은 좋다. 그러나 내 비록 혼미하고 병들어 맑은 정신은 아니지마 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 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 지난해 격문이 왔을 때부터 내가 우려하던 것은 징발한 병사를 보내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본래 견고하지 못하고 군병은 평소에 교련되지 않아서 하루아침에 몰고 들어가면 전쟁에 도움이 못 된다는 것을 진달하되, 서둘러 경략이 나오기 전에 주달하려고 한 것이다. 그 러면 비록 오늘날에 패배를 당하더라도 지난해에 주달한 것과 서로 부합되었을 것이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경들은 나의 뜻은 헤아리지 않고 막으려고만 하고 있는데 단지 사정을 주달하는 것이 무슨 사리에 어긋난 점이 있다고 끝내 내 말을 이행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이것이 통탄스럽다.

지난해 군병을 들여보낼 때 경들은 마치 일거에 탕평할 것처럼 여겼는데, 병가(兵家)의 일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옛사람들이 감히 가벼이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이 때문이었 다. 명나라에서 만약 군병을 진열하여 무력을 과시하고 중국의 국경을 굳게 지킨다면 마 치 호랑이나 표범이 산 속에 있는 형세와 같아 적이 비록 날뛴다고 하더라도 감이 업신 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생각지 않고 가벼이 깊이 들어갔으니 반드시 패하 리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내가 이 점을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우려하고 답답하다 보니 마음의 병이 더욱 심해져 마 치 미친병을 앓는 형상과 같았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가 모르겠는가. 이제 우려 하던 것과 같이 되었으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적의 용병(用兵)하는 지혜와 계략을 실로 당해내기 어려우니 앞으로의 화환을 예측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위 한 계책으로는 군신 상하가 마땅히 잡다한 일은 버리고 오로지 부강에만 힘써야 할 것이 다. 그리하여 군병을 양성하고 장수를 뽑고 인재를 등용하며, 백성의 폐막을 풀어주어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며 둔전(屯田)을 크게 개척하며 무기를 만들고 익히며 성지 (城池)와 척후 등을 모두 정비해야만 믿을 곳이 있어서 위급할 때를 보장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렇지 않고 혹 태만하거나 소홀히 한다면 큰 화가 즉시 닥칠 것이니, 어찌 두렵 지 않겠는가.

강홍립 등의 사건에 있어서도 비록 적에게 항복하였다고 하나 이처럼 급하게 다스릴 것 이 뭐가 있겠는가. 강홍립 등이 불행히 적진 중에 함몰되었으나 보고 들은 것들을 밀서 로 계문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이 있는가. 진실로 본사의 계문과 같이 한다면 비록 노중(虜中)에 함락되었더라도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여 보내지 않아야 옳다는 말인가. 아, 묘당에 사려 깊은 노성(老成)한 인재는 거의 죄다 내쫓아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젊 고 일에 서투른 사람이 비국에 많이 들어갔으니 국가 운영을 잘 못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다.

대국 섬기는 성의를 더욱 다하여 붙들어 잡는 계책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말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 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두고 생각지 않은 채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계문하여 번거롭게 하니, 나는 마음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본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천천히 선처하여도 진실로 늦지 않다. 오 직 국가의 다급한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추의 서신이 들어온 지 이미 7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 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하였다.


 강홍립(姜弘立) 등이 장계를 올리기를,

“죄를 진 신 강홍립·김경서(金景瑞)·이민환(李民寏) 등은 삼가 아룁니다. -중략

신들이 일을 망치고 전쟁에서 패하고도 진지에서 즉시 죽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노륙 (孥戮)을 당하여도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그 형세만 가지고 사실을 의심하 고 그 일로 인하여 실정을 의심할 경우 또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면박(面縛)당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까? 항복하기를 빌었다고 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털끝만 큼도 굴복한 일이 없었는데 투항하였다는 말은 무엇에 근거하여 운운한 것인지 알지 못 하겠습니다.-중략

화친이 성숙되어 가기에 분이 나는 대로 할 수 없어서 구차히 살다가 화친이 이뤄지고 나면 돌아가 형조의 형벌을 받고자 할 뿐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장점을 따라 선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중략

강홍립 등의 처자를 비록 아직 법에 의해 다스려 가두지는 않았으나 홍립 등을 처치하는 거조에 대해 미리 강구해 대의를 펴고 두터운 무함을 변명하는 토대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강홍립은 서울에 도착한 뒤에 마땅히 잡아 왕옥(王獄)에 가두고 급히 명나라에 보내야 하는데, 서울에서 도사(都事)를 떠나보내면 왕복하는 동안 반드시 많은 날이 걸 릴 것입니다. 〈강홍립 등이 만약 나온다면〉 본도의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영하(營下) 의 군관(軍官)을 따로 정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차꼬를 채워 올려 보내고 그가 데리고 온 차호는 성상의 전교에 따라 성 밖에 머무르게 하고 잘 대접하게 하고서 〈계문한 것 을 하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지난해에 강홍립 등이 살기 위해서 포로가 된 뒤에 상께서 ‘강홍립과 김경서(金景瑞) 이하 군병에 이르기까지 혹 탈출하여 도망해 오거나 아니면 문서를 가지고 나온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들어오도록 허락해 주어 노정(奴情)을 물어보아야 하니 변신(邊臣)은 일체 막지 말고 즉시 들어오도록 허락해 주고 즉시 계문 하도록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상이 생각하시는 바를 신 등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이 일은 관계된 것이 매우 중차대한데, 어찌 홍립 등으로 하여금 죄 없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올라오게 하여 장차 닥칠 무궁한 화를 끼치게 한단 말입니까. 신 등의 〈구구한 바람은〉 다만 성상의 계산을 공경히 받들어 조금이라도 상의 근심을 풀어드리고자 함에 있는데 도리어 ‘전혀 전교한 뜻이 아니다.’고 하교하시니, 신들은 황 공함을 금할 수 없어 감히 〈이렇게 진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강홍립 등이 노적의 실정만을 진달하였을 뿐이지 무슨 나라를 판 일이 있는가. 진달한 것이 너무 지나치다. 누가 이 논의를 주장했는가? 나라를 도모하는 훌륭한 계책을 일률 적으로만 논의할 수 있겠는가. 강홍립 등은 기필코 나올 리가 없다. 설혹 나온다고 하더 라도 올라온 뒤에 죄를 논의해도 늦지 않은데 어찌 꼭 차꼬에 채워 올려 보내야 하는가. 우선 즉시 올려 보내라고 하유하라.

하였다.


6. 인조반정·정묘호란과 강홍립


 가. 귀국과 역할

 광해군의 강홍립을 향한 무한한 방패막이도 결국 인조반정으로 실각하면서 강홍립은 또 한 번의 좌절을 맞는다. 뿐만 아니라 인조반정 다음날인 인조 1년(1623) 3월 14일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교서는 광해의 외교 정책을 극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략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어서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 자와 같다. 임진년에 재조(再造)해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 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 며, 기미년(광해군 11년·1619)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 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 지게 하였다.”


서인 정권이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명에 대한 배신으로 비판하며 후금과 단절하면서 인조 5년(1627) 후금군은 압

록강을 건너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1623) 후 불과 4년이 되는 1627년 3월 3일의 일이다.

1626년 보위에 오른 홍타이지(皇太極)는 이듬해 1월 조선정벌을 명했다. 누르하치의 조카 아민의 3만 대병에는 강홍립도 동행하고 있었다. 10년 전 조선의 도원수로 15,000의 원군을 이끌고 도성을 떠났던 그가 후금의 장수가 되어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조선은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막게 했으나 역부족이어서 후금군은 안주와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남하했다. 북삼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후금의 군대를 막을 수 없었다.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로 몽진을 떠났다.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으나 평산까지 남하했던 후금군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는데, 그 배경에는 강홍립이 있었다.

강화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강홍립은 양측의 입장을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한윤 같은 이는 팔도를 불바다로 만들자고 했으나 강홍립은 조선을 위해 노력했다. 인조와 대신들에게 후금군의 장단점을 자세히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맹약을 다짐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도록 이끌었다. 만약 그가 지난 세월의 복수를 원했다면 경기와 강원은 물론 하삼도까지 후금의 군대를 데리고 내려갈 수도 있었다.

강홍립은 후금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화의를 맺도록 종용했던 것이다. 정묘호란 때 부원수를 지낸 정충신(鄭忠信)이 ‘그대의 혀끝으로 수만의 후금군이 물러갔으니 조선 백성 가운데 누가 그대의 덕에 감사하지 않겠는가.’라는 편지를 보낸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상이 강홍립과 박난영을 인견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패전한 뒤에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오랑캐에 함몰되어 있은 지가 지금 이미 9년이 되 었는데, 다시 전하를 뵈니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어떠한가?”

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군대가 뜻밖에 출동되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작년 10월에 유해(劉海)· 대해(大海) 등이 와서 신에게 묻기를 ‘중원이 우리와 원수진 것이 이미 깊은데도 선한(先 汗)438) 이 사망하고 신한(新汗)이 즉위한 것을 이유로 오히려 차인이 와서 경조(慶弔) 의 예를 행하였는데, 조선은 어찌 사람을 보내지 않았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당신 나라와 원수진 것이 없으니, 과연 들어서 알았다면 어찌 사람을 보내지 않 았겠는가. 다만 모문룡(毛文龍)에 의해 막혔기 때문에 미처 듣지 못한 성싶다.’ 하였습니 다. 그 뒤에 유해가 또 와서 묻기에 신이 전일의 뜻으로 답하였습니다. -중략

귀영개(貴永介)의 아들 요토(要土)가 ‘조선은 우리와 원수가 아닌 만큼 이미 1도를 쳐부 셨으니 지금 또 진군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에 따르고자 하였 습니다. 수장(首將)인 왕자라고 칭하는 자가 불가하다고 하여 드디어 황주(黃州)로 진군 하였습니다. 그날 박립이 먼저 가서 사신을 보내왔다는 말을 보고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 두 기뻐하였는데, 호차가 돌아옴에 이르러서는 호장이 성을 내어 진군하였습니다. 그러 다가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부르기에 신들이 나아가니 국서가 이미 개봉되었 었습니다. 저 적은 언제나 황조(皇朝)를 신하로 섬기는 것을 불가하게 여겼는데, 국서를 본 뒤부터는 이에 말하기를 ‘조선이 2백 년 동안 황조를 신하로 섬겼다는 말이 극히 신 의가 있으니, 이들과 우호를 통하면 오래 지속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숙 부가 볼모로 있기 때문에 신을 보내어 화친을 결정하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방이 강홍립에게 말하기를,

“그것이 과연 진정에서 나온 말이오?”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평산(平山)의 군량과 꼴이 이미 다하였으니 속히 회답하면 깊숙이 들어오는 걱정을 모 면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가 무슨 일로 나왔는가?” 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유해가 요구하는 물건은 온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여도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으므로 감히 다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화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들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저들의 칼날이 어디까지 미칠지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소.” 하였다. 윤방이 말하기를,

“화친을 결정하면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평산에서 물러가 평양에 머무르다가 풀이 자란 뒤에 돌아갈 것이라고 하오.” 하였다. 상이 박난영을 불러 이르기를, “보고 들은 것을 다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적정은 홍립이 이미 모두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전한(前汗) 때부터 언제나 ‘두 나라가 화친을 통하면 그대들은 마땅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면서 항상 손님의 예로 대우하 였습니다. 지금 화친을 청한 것이 진정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화친하고 싶으면 마땅히 신의를 지켜야 되는데, 지금 도리어 화친을 청하면서 한결같이 진군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난영이 아뢰기를,

“자기네들 중에서 진군하는 것을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신이 들어간 뒤부 터는 군중(軍中)이 퍽 기뻐하였습니다. 저들이 요구한 것이 많으나 어찌 끝없는 욕심을 다 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화친을 결정하게 되면 즉시 군사를 퇴각시켜야 되는데 평양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무 슨 까닭인가?” 하니, 난영이 말하기를,

“저들은 언제나 ‘조선은 마땅히 강화만 해야 할 뿐이지 우리들의 소유로 삼아서는 안 된 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나. 인조에 의한 관직 회복 노력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강화를 맺은 후금군은 승전고를 울리며 귀국길에 올랐지만 강홍립은 남았다. 후금의 보복이 두려워 면전에서 욕하지는 못했으나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상벌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조정에서는 그가 후금의 앞잡이로 정묘호란 때 선도했다는 의심도 받았지만 비국에서 그를 접한 한 후 10년간 절개를 지켰다고 인조에게 상을 줄 뜻도 보였고, 서인 중심의 조정에서는 그가 항복한 것을 들어 그를 참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상을 주자는 이에겐 허락을, 참수를 주장하는 이에게는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아울러 강홍립과 박난영이 변발을 하지 않고 뜻을 꺾지 않았음을 들어 관직 회복을 시켜주도록 했다.


 “박입(朴雴) 등이 ‘호장들이 다 우리나라에서 문관을 차송할 것을 바란다.’고 하지만, 이 미 사람을 보내 우호를 통하였으니 문관과 무관을 구별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담략이 있고 사리를 아는 관원 한 사람을 택하여 국서를 휴대시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강홍 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등은 적에게 함몰당한 지 10년이 되도록 신하의 절개를 잃 지 않았으며 지금은 또 화친하는 일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니, 종국(宗國)을 잊지 아니 한 그들의 마음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화친에 대한 일이 완성되면 스스로 살 아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 아들이 가는 편에 전의 허물을 없는 것으로 하고 정중한 상으로 대접하겠다는 뜻으로 밀유하소서.” 하니, 따랐다.

양사가 아뢰기를,

“저 적이 위협하여 화친하자는 것은, 모두 강홍립 등이 모주(謀主)가 되어 흉계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모욕을 감수하고 또 호차를 끌어들여 행궁에서 친히 접견 도 하려고 하니, 고금에 어찌 이러한 치욕이 있겠습니까. 먼저 홍립 등을 참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다. 근거 없는 말은 역시 적실하지 않으니, 다시는 이와 같은 의논을 하지 말라.” 하였다. -중략

“홍립은 바로 오랑캐에게 항복한 반신(叛臣)인데 상께서 그에게 좌석을 권하고 접견하였 으니 국가의 수욕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듣건대 호차가 상과 예를 대등하 게 하고자 하여 머뭇거리고 오지 않자 전하께서 오히려 뜻을 굽혀 접견하시고자 한다고 하니, 신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 심담이 모두 찢어졌습니다.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 의 높은 신분으로 개돼지와 더불어 차마 주객의 예를 행하실 수 있겠습니까.-중략

군신 상하가 배수진을 치고 한번 싸워 함께 사직을 위해 죽어야지, 어찌 차마 우리 전하 로 하여금 저 오랑캐의 차인에게 치욕을 감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호차를 접견하겠다 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강홍립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있다가 국가를 위하여 나왔으니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한 점이 있는데, 지금 심지어 반신으로까지 지목하니 또한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 뒤로 이 와 같은 말을 하지 말라.”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강홍립(姜弘立)과 박난영(朴蘭英) 등이 오랑캐에게 잡혀간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끝까 지 머리를 깍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마땅히 그의 관작을 회복하여 그의 성 의를 나타내 주어야겠으니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다. 강홍립의 병사

 두 나라는 형제의 의를 맺는 확약을 맺었고, 강홍립도 오랜 억류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고국에 정착하자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강홍립은 그해 7월27일 예순여덟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인조가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장례물품도 지급하게 했으나 승정원과 대신들의 반대가 잇따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의 신산스런 삶에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한 조선은 여전히 친명 사대주의 명분론이 우세했고, 이는 10년 뒤인 인조 14년(1636)에 정묘호란보다 훨씬 뼈아픈 병자호란으로 되돌아왔다.


 강홍립의 졸기

강홍립(姜弘立)이 병사하였다. 상이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상사에 수요되는 물품을 제급하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건대 강홍립은 사직에 제사를 올린 뒤 명을 받고 국경에 나갔습니다. 그런 데 기쁜 마음으로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가 하면 적을 이끌고 나라를 침범하여 임금이 되려는 뜻을 가졌으니 죄가 역적 예(豫)보다 지나치고 악이 역적 윤(潤)보다 심하여 실로 천하의 난적(亂賊) 중에 심한 자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법이 없고 정론이 행해지지 않아 주벌이 가해지지 않은 채 제 집에서 죽었으니 신명과 사람의 통분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상사에 부의(賻儀)까지 한다면 어떻게 신하들에게 충성을 권장하고 천하의 악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감히 분부를 받들 수 없으 므로 죄를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과 의논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적을 이끌었다는 설은 강홍립의 본의가 아닌 것 같 다.” 하였다. -후략


7. 맺으며

 강홍립.

 한 시대를 경영할 수 있었던 문신이었지만 광해군의 현실 정치 실현과 조선 군사의 목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 뛰어난 외교로 전쟁의 참화를 최소화 했던 사람, 외로운 타향살이 속에서도 조선의 기개를 지켰던 사람, 사대주의자들에게는 고국을 등진 사람이었지만 후금의 야욕과 중원의 사정을 상세하게 조정에 보내는 등 조선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운의 선비이자 장군이었다.

그가 조선에 돌아왔을 때는 수고와 희생은 사라지고 없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배신자’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만 그를 따라 다녔다. 명분 있는 삶이었지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그에게 사대부로서의 자존심과 가문에 대한 죄책감으로 심신은 극도로 약해지고 말았다.

“여기가 내가 숨 쉬는 조선의 하늘이고, 이곳이 내 뼈를 묻을 조선의 땅이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의 서울 난곡동 낮은 언덕에서 유배 아닌 은거 생활을 시작한 그는 난초를 기르며 자신을 다잡아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병세는 이미 깊어지기만 했다.

후일 그가 난초를 키우며 살았다고 하여 난곡동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그해 7월27일 타계하고 말았으니 난곡동 하늘에 흘러가는 한 점 구름만 난세를 살다간 한 영웅을 위로하고 있었다.

관악구 난곡동(蘭谷洞)의 난곡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중기 무신인 강홍립(1560-1627) 장군이 이곳에 유배돼 은거하며 난초를 많이 길렀다는 데서 유래했다.

수백 년 동안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진주강씨(晋州姜氏) 가문으로 승지 등의 벼슬을 지낸 강서(姜緖)의 호인 '난곡'을 따서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가 피치 못할 형편에 의해 항복했다고 해서 그를 매국노나 역사에서 문제아로 오명을 씌울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시 노(老) 대국 명과 신생제국 청과의 사이에서 조선이 처해 있던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적어도 광해군에게 맞는 외교문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 인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