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제54강좌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를 위한 변명(辨明)

빛마당 2014. 11. 6. 22:26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를 위한 변명(辨明)

- 성극당은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지 않았다 -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선생은 본관이 상주(尙州)이고, 자는 창원(昌遠)이며, 호는 성극당(省克堂)이다.

6대조 김상직(金尙直)은 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과 형조 참의(刑曹 參議) 이었고, 증조 김예강(金禮康)은 건공 장군(建功將軍)이었으며, 할아버지 김윤검(金允儉)은 장사랑(將仕郞)이었고, 아버지 김범(金範)은 경학(經學)과 덕행(德行)으로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옥과 현감(玉果縣監)을 지냈다.

선생은 조식(曺植)과 류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이었고, 류성룡의 형인 류운용(柳雲龍)의 사위였다.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5년의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발탁되고,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어, 당시 형인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과 함께 옥당(玉堂)에 재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리고 저작(著作), 예문관 검열(檢閱) 등을 거쳐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였다.

1589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 도사(都事)로 복직되었고, 이어서 교리(敎理) 겸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을 거쳐 이듬해《주역》경연관(經筵官)으로 있으면서 응교(應敎)・사간(司諫)・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597년 좌부승지(左副承旨)・훈련도감 제조(訓練都監 提調)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대사간(大司諫)・이조참의(吏曹參議)・승문원부제조(承文院 副提調)등을 역임하고는 1598년 관직에서 떠났다.

그러나 이듬해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서,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1604년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선생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하던 해에 강릉(江陵)에는 큰 비가 내려서 백성들이 큰 재난을 당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약한 몸을 이끌고 수재(水災)로 죽은 자를 조문(弔問)하고, 굶주린 자의 진휼(賑恤)에 진력하다가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1605년 10월에 향년 49세로 현지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문헌(文獻)의 지방에서 생장하여, 타고난 기질이 아름답고 학문을 좋아한데다가 일찍이 어진 부형(父兄)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스승과 벗의 유익함을 얻어 덕성(德性)스러운 기국(器局)이 온화 고상하여 성대하게 문질(文質)을 갖춘 군자(君子)의 기풍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을 섬길 때는 늘 임금이 칭찬하였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명성(名聲)과 의리(義理)로 일생을 살았던 분이다

그래서 장유(張維)가 지은 김홍미의 묘갈명(墓碣銘)에는,

동남(東南)의 아름다운 산물은 화살대(箭竹)뿐만이 아니라 찬란한 정령(精靈)이 모여서 이러한 영걸을 탄생했도다. 행실은 치우친 바 없었고 말씀은 거친 바가 없도다. 비하자면 저 여번(璵璠)과 같아 종묘에 올릴 것이었도다. 찬란하고도 찬란한 경연에 경전(經傳)을 좌우에 진열했도다.

공이 그 모훈(謨訓) 베풀어 드나들며 모두 꿰뚫었으므로, 임금님 마음이 부지런하여 쉴 새 없이 기쁘게 탐구했도다. 한번밖에 펼치지 못하고 아침의 이슬처럼 떠났도다.

매호산(梅湖山) 저 언덕의 자리에 한 조각 비석이 있도다. 내가 이 시(詩)를 지어서 그 면(面)에 새기었도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에 이런 구절이 있다.

“1597년 김홍미(金弘微)가 승정원(承政院)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여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統制使)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그래서 그 뒤 좌부승지·훈련도감제조를 거쳐,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승문원 부제조 등을 역임하다가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과 같은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투옥되는 일과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순신(李舜臣)을 원균(元均)으로 체임(遞任)하는 일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순신과 원균이 사이가 나쁜 일로 조정 대신들이 걱정하는 기록도 있고, 철저하게 이순신을 미워했던 선조의 모습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에는 마치 성극당 김홍미(金弘微)가 원균과 더불어 이순신을 탄핵한 이후에 원균의 후광(後光)으로 출세(出世)의 길을 걸었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어 그 오류(誤謬)된 부분을 규명하고자 한다.


2. 변명 1 : 누가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했는가?

1593년(선조 26)7월 20일에 전라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보낸 치계를 보면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즉,

“지난 해 6월 27일 좌도 수군 절도사(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치보(馳報)에 ‘부산(釜山)·김해(金海)의 적선(賊船)이 웅천(熊川)으로 옮겨 모였는데 그 수가 7∼8백 척(隻)은 족히 된다.’고 했던 것을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웅천 등지에 정박해 있던 적선들이 금년 6월 23일에는 야음(夜陰)을 틈타 몰래 도해(渡海)하여 거제(巨濟) 경계에서부터 영등포(永登浦)·송진포(松珍浦)·하청가이(河淸加耳)까지 가득 정박하고 있는데 선박의 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여염(閭閻)을 분탕(焚蕩)하는 것은 전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이들 적세(賊勢)를 보건대, 수륙(水陸)이 함께 공격하여 호남을 침범할 뜻이 분명하므로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인 거제(巨濟)의 경계와 한산도(閑山島)·견내량(見乃梁) 등에서 삼도(三道)의 주사(舟師)가 합세하여 죽을 각오로 막기로 작정하였으나 행재소(行在所)가 멀리 있어 미처 치보(馳報)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금년 7월 4일에 구례(求禮)의 지경(地境) 석주(石柱)에 복병(伏兵)하고 있던 복병장(伏兵將) 고부 군수(古阜郡守) 왕경조(王景祚)의 치보에 ‘흉적 2만여 기(騎)가 진주(晉州)로부터 곧바로 악양창(岳陽倉)으로 와서 분탕한 다음 점점 우리 군사가 매복해 있는 곳으로 나오고 있다.’ 하였습니다.

4일에 보낸 왕경조(王景祚)의 치보에 또 ‘흉적이 우리 군사가 매복하고 있는 10여 리 밖에서 분탕질을 친 뒤에 진(陣)을 치자, 파수(把守)하는 군사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파수할 방법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적세가 가까워지자 매복한 군사들이 풍문만 듣고 모두 도산(逃散)하니 본도(本道)가 와해(瓦解)되는 화(禍)는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급히 처치하여 정예(精銳)한 군사 다수를 보내주소서.”

라고 하였다.

이렇게 다급한 시기에 비변사(備邊司)에서는 ‘통제사 이순신 이하 수사(水使)를 모두 추고하여 죄 줄 것’을 선조 임금에게 청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네댓 척이 출몰하는 적선(賊船)은 능히 쫓아가 무찌를 수 있는데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수사(水使)가 서로 잊어버린 것처럼 버려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조정(朝廷)이 ‘수군(水軍)이 바다에 오래 있어서 견디기가 어려우니 잠시 군사들을 쉬게 하여 예기(銳氣)를 기르도록 허가한 일’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는

‘적장(賊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울산(蔚山)서생포(西生浦)에 있기 때문에 배신 고언백(高彦伯) 등이 경주를 지키어 북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고, 적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김해(金海)와 웅천(熊川)에 있기 때문에 배신 이빈(李薲) 등은 의령(宜寧)을 지켜 서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막고 있으며, 또 거제도(巨濟島) 등지를 점거하고 있는 적이 전라도 남쪽으로 해서 서해로 나오면 중심지인 충청도·경기와 황해·평안도 등이 모두 염려가 되기 때문에 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전선(戰船)과 수군을 거둬 모아서 거제현 서쪽 한산도(閑山島) 어구에서 지키게 하는 것이 소방(小邦)에서 적을 방어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는 이야기들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비변사에서도 별도로 왜적을 격퇴하는 전략을 선조에게 보고하였는데, 이순신이 일정한 계책이 없이 그럭저럭 날만 보내는 것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는 말을 했다.

“육지에 주둔한 적들은 진영이 이미 견고하고 무리들이 많아서 우리의 약졸(弱卒)과 무딘 병기(兵器)로는 깨뜨리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사(舟師)를 가지고 해로(海路)를 가로질러 차단하고 그 양도(糧道)를 끊고 견고한 곳을 피하고 틈 보이는 곳을 공격하면 적을 깨트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거제(巨濟)에 주둔하고 있는 적(敵)은 형세가 외롭고 힘이 잔약(孱弱)하나, 이들 때문에 우리 주사(舟師)들이 견내량(見乃梁)을 지나서 동쪽으로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거제의 적들을 먼저 공격하면, 적들은 지탱하지 못하고 웅천으로 가서 합류할 것이니, 주사가 동쪽으로 가는 데에 장애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제도(諸道)의 전함(戰艦)을 영등포(永登浦) 앞바다에 정박시켜 놓고 소굴을 공격하고, 한편으로는 기치(旗幟)를 많이 벌여놓고, 금고(金鼓)가 서로 들리게 한다면, 언덕 위의 적들은 오로지 바다를 막으려고만 하여 반드시 모두 배로 옮길 것입니다.

그러면 육지의 제장(諸將)과 약속하여 동시에 함께 거사하되, 산골짜기나 숲속에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적들이 병사의 다소(多少)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고, 간간이 정예병을 내어 수미(首尾)를 차단하는 것이 제일의 기책(奇策)입니다.

그리고 거제의 형세를 신들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영등포와 옥포(玉浦) 사이에는 수풀이 하늘에 닿고 초수(草樹)가 무성한데 거제의 사람 중에는 사냥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이들을 모두 모아서 밤낮으로 적진(賊陣)의 좌우에서 초격(勦擊)하게 하여 적들을 사살(射殺)한다면 거제의 적들은 반드시 달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의 계책인데도 그럭저럭 날만 보내어 지금까지도 일정한 계책이 없으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급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이 뜻을 가지고 주사 통제사(舟師統制使) 이순신(李舜臣)에게 통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다급한 선조는 속히 거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594년(선조 27) 11월 12일 경연에서 선조가 <주역>을 강하고 나자, 김수(金晬)가 슬그머니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의 불화설(不和說)에 대해서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이 서로 다투는 일은 매우 염려가 됩니다. 원균에게 잘못한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일이 점차 악화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라고 하자, 선조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그랬더니 김수(金晬)는,

“원균이 10여 세 된 첩자(妾子)를 군공(軍功)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이것을 불쾌히 여긴다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미 원균과 이순신의 불화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선조이었으나 이를 바로 묻지 않고 ‘고언백(高彦伯)과 김응서(金應瑞)가 왜 서로 다투는 가’를 물었다. 이번에는 김응남이 나서서 답변을 하였다.

“공(功) 다툼 때문입니다. 당초 수군이 승전(勝戰)했을 때 원균(元均)은 자기가 공(功)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功)이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원균의 윗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합니다.”

정곤수(鄭崐壽)도 거들었다.

“정운(鄭運)이 ‘장수가 만일 가지 않는다면 전라도는 필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부득이 가서 격파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평소 이순신에게는 좋은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이 나온 김에 궁금한 것을 또 물어 보았다. 그래도 “이순신이 왜적을 포획한 공은 가장 많지 않은가?”라고 반문하자, 정곤수(鄭崐壽)는,

“이순신의 부하 중에는 당상관(堂上官)에 오른 자가 많고, 원균의 부하 중에 우치적(禹致績)이나 이운룡(李雲龍)같은 자는 전공이 많은데도 상(賞)은 다른 사람만도 못하기 때문에 서로 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내가 저번에 남방에서 올라온 사람에게 원균에 대해 물었더니 ‘습증에 걸린 몸으로 장기간 해상에 있으나 일을 싫어하는 생각이 없고 죽기를 각오하였다고 하더라.

하면서 슬쩍 원균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탁(鄭琢)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신이 남방에 가서 들으니, 왜적이 수군을 무서워한다 합니다. 원균은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 만한 장수요 이순신도 비상한 장수인데, 단 이들이 다투는 일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나라가 어지러운 이때에 어찌 감히 사적인 분노로 이렇게 서로 다툴 수 있겠습니까. 글을 내려서 국가의 급무에 우선하도록 질책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내린 글을 본다면 그들 또한 어찌 감격하고 뉘우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 때문에 원균을 체직시킨다면 필시 수군이 흩어질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이날 조정에서는 원균과 이순신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만 대신들과 선조사이에서 있었다. 그러나 10여일 지난 1594년 11월 22일에 사헌부가 권율과 이순신을 나국(拿鞠)하고 윤두수를 파직(罷職)하라고 들고 나섰다.

“전번 거제의 싸움에서는 3도의 병력을 다 동원하였으므로 군세(軍勢)가 매우 웅장하였습니다. 양굴(兩窟)의 적도는 수백 명이 못 되었으니, 중과의 형세로 말한다면 마치 태산이 새알을 누르는 격과 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수륙(水陸)의 제장(諸將)들은 한 사람도 죽음을 각오하고 힘껏 싸우지 않고서 혹은 외양에서 배회 하기도 하고 혹은 나갔다 물러갔다 하면서 관망하기도 하고, 혹은 안정된 곳에 물러나 있으면서 단지 대장(代將)만을 보내어 결국 군사들이 패하여 위엄을 손상케 하였습니다.

사후선(伺候船) 3척이 실종되고 사도의 병선은 남김없이 소탕되었으며, 그 배에 실린 군졸들은 거의 다 죽었는데도 서로 숨기고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도리어 장황한 말을 늘어놓고 망령되이 공훈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이 조정을 안중에 두지 않고 속이는 일을 자행한 죄가 여간 많지 않으니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도원수 권율(權慄)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아울러 나국(拿鞫)하여 율(律)에 의해 정죄(定罪)하도록 하소서.

체찰사 윤두수(尹斗壽)도 몸소 대신이 되어 병권을 전담하고서 능히 기회를 보아 책응하지 않고 경솔히 거병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였으며, 또 사실대로 계문하지 않고 방자하게 속이고 숨겼으니, 더욱 무어라고 말할 대상이 안 됩니다. 파직시키소서.”

라는 내용이었다.

이날이 바로 이순신을 탄핵하는 소리가 나온 첫 번째 날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선조는 “어찌 나국까지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신(大臣)은 더욱 파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튿날에는 사간원에서도 사헌부와 똑 같은 주장을 하였다.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은 이미 분군율(僨軍律)을 범했고 또 기망(欺罔)한 죄가 있으니, 왕법(王法)으로 따지면 결코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나국하고 율을 살펴 정죄하게 하소서. 전 체찰사 윤두수는 처치를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고 또 제장들의 허위 보고를 가볍게 믿고 사실대로 계문하지 않았으니, 역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어제에 이어서 사헌부에서도 전일 했던 주장을 되풀이 했으며, 24일에도 사헌부와 사간원이 집요하게 전일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 25일에는 양사가 합동으로 탄핵을 주장하자 선조는,

“도원수와 통제사는 이미 추고하였으니 나국할 수 없고 체찰사는 대신이므로 파직시킬 수도 추고할 수도 없다.”

는 대답으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이런 주장이 26일에도 이어졌다.

‘이순신을 나국(拿鞠)하여 추고해야 한다’는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주장은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 동안 줄기차게 이어졌으나, 이때에도 성극당 김홍미의 개입은 전혀 않았다.

이렇게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동으로 공격하고 이에 선조가 극한적으로 대립하자, 11월 28일 비변사는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不和)에 초점을 맞추고 ‘윗전에서 중재를 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헐뜯고 있습니다. 만일 율로 다스린다면 마땅히 둘을 다 죄주어 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왜변 초에 병선(兵船)을 모아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참괵(斬馘)을 바친 공로가 많았고, 원균은 당초 이순신과 협력하여 역시 적의 선봉을 꺾는 성과를 올렸으니, 이 두 사람의 충성과 공로는 모두 가상합니다.

위에서 특별히 잘 화합시켜 진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생각하시어 급히 선전관을 보내 하서하여 국가의 위급을 우선으로 돌보라고 권하면, 두 사람 또한 전혀 양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찌 감격한 마음으로 성상의 명령을 공경히 받들어서 옛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성상의 뜻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 채 그전의 잘못을 영영 고집한다면, 그때에는 자연 나라의 법이 그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두 사람은 틈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으니, 원균을 체차(遞差)하여 그들의 분쟁을 지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선조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은 대장으로서 하는 짓이 잘못된 것 같으니, 그중 한 사람을 체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혹 이순신을 체차할 경우는 원균으로 통제사를 삼을 수 있거니와, 혹 원균을 체차할 경우는 다른 사람을 차출해야 할 것이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면서 ‘이순신을 멀리하고 원균을 가까이하는’ 평소의 속내를 내비쳤다. 그러자 12월 1일. 장령 이철(李鐵)이 논의에 가담했다.

“거제의 싸움에서 제장(諸將) 중에 어떤 자는 배회하면서 관망만 하고 나아가 싸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사후선(伺候船) 3척이 행방불명 되었는 데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군대를 무너뜨리고 위를 무시한 죄를 여러 날 논집하고 있는데도 아직껏 윤허를 않으시니, 몹시 민망하고 답답합니다.”

그리고 김응남(金應南)은 두 장수가 화목치 못하니 부득이 원균을 체직시키고 충청도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원균 자리에 추천하였다.

그러나 이안에 대해서는 비변사가 반대했다. ‘원균이 이미 군율을 범하여 지금 추핵(推覈) 중에 있으므로 병사의 직임으로 바꾸는 것은 사체에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선조가 또 원균의 편을 들었다.

“군율을 범했다고 말한다면 유독 이순신만은 군율을 범하지 않은 사람인가.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의 죄가 원균보다 더 심하다고 여겨진다. 원균을 병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그 주장을 나는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는 12월 1일에도 계속되었다. 이날 비변사에서는

“상께서 ‘군율을 범했다고 말한다면 유독 이순신만은 군율을 범하지 않은 사람인 가. 나의 생각에는 이순신의 죄가 원균보다 더 심하다고 여겨진다. 원균을 병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그 주장을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참작해서 시행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통제사 이순신은 지금 기망죄(欺罔罪)를 범했으니 마땅히 중벌로 다스려야 합니다만, 주사(舟師)를 조치하는 일이 날로 급해지고 있어 이런 때 주장(主將)을 바꾼다는 것은 실로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단지 추고만 해서 후일의 성과를 책임지운 것입니다.

원균도 체직시키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순신이 통제사가 되고 원균이 부장(副將)이 되었을 때에도 주장(主將)의 절제를 따르지 않았는데, 원균을 체직시켜 다시 병사(兵使)로 올려서 가까운 지방에 옮겨 놓는다면 군중 통령(軍中統令)의 체통은 이로부터 더욱 무너져 수습 정돈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논의가 일치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순신과 원균이 다 같이 중한 군율을 범했는데, 원균만 체직시키는 것도 편중의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의 계청에 의하여 선거이와 서로 바꾸는 것이 무방합니다.”

라고 하자, 선조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시 이의를 달고 나왔다.

“해로(海路)를 차단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는 주사(舟師)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주사의 성쇠에 국가의 경중이 매인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깊이 생각할 것이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인데 종시 협력한 장사(將士)들을 태반이나 교체시키니, 허술해진 것이 이미 식자(識者)들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경상 수사 원균(元均)을 지금 또 내지(內地)로 옮겼으므로 군정(軍政)이 해이해지고 형세가 쇠퇴해져 주사의 일이 형편없으니, 후일의 걱정을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원균과 이순신은 다 일시의 명장(名將)으로서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둘 다 양립(兩立)하기가 어렵다.’ 하나, 이는 너무도 생각이 없는 말입니다.

원균과 이순신은 공(功)은 같은데 상(賞)이 달랐으므로 원균이 마음에 불쾌하게 여겼고, 관하의 장사들이 각자 좌지우지하여 다투어 서로 말을 주고받음으로써 틈이 벌어지고 결국은 서로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조정이 대의(大義)를 들어 나무라서 각자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면 저들도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의리를 알 것이니, 어찌 거룩한 명(命)을 공경히 받들어 옛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각오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격려하여 협력할 뜻으로 하서하여 호되게 꾸짖고, 그대로 원균에게 수사(水使)의 직을 맡기소서.”

하였으나 선조는 ‘이미 정(定)하였다’고 답하였다고 하며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해를 넘겨서 1595년(선조 28) 1월 13일에 비변사가 거제를 협공할 계책을 선조에게 아뢰었다.

“김응서(金應瑞)의 장계를 보니, 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과 서로 모여서 수군과 육군으로 거제(巨濟) 등처를 협공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분개하여 적을 토멸하려는 뜻은 가상하거니와, 듣건대 수군은 형편없이 약하고 육군 또한 잔약한데다 군량까지 떨어진 판국이어서 비록 대거 진공하려 해도 그 형편이 용이하지 않다 합니다.

이순신이 결행하지 못하고 미루고만 있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니, 가볍게 거사하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니 수군과 육군을 약간 수습한 뒤에 종사관(從事官)을 급히 올려 보내어 조정에 품의해가지고 거사할 것을 김응서와 권율에게 비밀히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조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여기에서 이순신이 결행하지 못하고 미루고만 있는 것은 이유가 나왔다.

이순신이 애초부터 선조의 명령을 무시해서 거제를 침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이 모여서 수군과 육군으로 거제(巨濟) 등처를 협공하려고 계획은 하고 있었으나, 당시 수군은 형편없이 약하고 육군 또한 잔약한데다가 군량까지 떨어진 판국이기 때문에 대거 진공하려 해도 그 형편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거사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1595년(선조 28) 7월 8일. 선조가 별전에서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자.

“비록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거제(巨濟)에 주둔 한다해도 우리가 요해처를 점거하면 저들은 요해처가 없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수전(水戰) 등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거제(巨濟)를 잃었기 때문이다.

웅천(熊川)·천성(天城)·가덕(加德) 등 지역도 모두 텅 비었으니, 또한 때맞추어 들어가 점거하지 않을 수 없다. 왜적이 물러가면 이순신(李舜臣)에게 거제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리고 1596년(선조 29) 6월 26일에 선조는 <주역>을 강독하고 나서 대신들과 천재(天災),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에 관해서 의논하였다.

순신과 원균에 대하여 의논을 하는 자리에 성극당 김홍미(金弘微)가 참여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김홍미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천문에 관해서만 발언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이순신에 대해서 제일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선조였다. 선조는

“이순신(李舜臣)은 밖에서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元均)으로 말하면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勇力)으로 선전(善戰)하는 점도 있습니다.”

라고 하였고, 다시 선조가,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東宮)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

라고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李舜臣)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공이 이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하니, 선조가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장사(將士)들은 이순신이 조용하고 중도에 맞는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제(巨濟)의 진(鎭)에는 원균을 보내야 하니, 거제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이르기를,

“거제에서 군사를 철수한 뒤에 나도 물었고 비변사도 주둔시켜 지키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산도(閑山島)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윤근수(尹根壽)가 ‘꼭 지킬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으나, 선조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10월 5일 날. 도체찰사 이원익과 적의 동태와 민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이 힘써 종사하고 있는지를 물으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미욱스럽지 않아 힘써 종사하고 있을 뿐더러 한산도(閑山島)에는 군량이 많이 쌓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이르기를,

“당초에는 왜적들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던데, 그 후에 들으니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다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어떠하던가?”

라며 다시 이순신에 대해서 묻자, 선조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이원익이 이순신을 감싸는 이야기를 했다.

“소신의 소견으로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음과는 달리 태만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소신의 생각으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이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라고 대답했다.

1596년(선조 29) 11월 5일에 비변사는

“지난 11월 1일의 조강(朝講) 때에 윤근수(尹根壽)가 아뢴 장문포(長門浦)를 방수(防守)하는 일에 대하여, 위에서 ‘우상(右相)과 비변사가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한산도(閑山島)는 1만 척의 배를 감출 수 있고 출입하며 방어하기에도 편리하므로 끝내 버릴 수 없는 땅이니, 이것이 한산에서 철수하여 거제(巨濟)로 옮기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군사를 나누어서 지키려 하면, 거제의 적은 물러가더라도 안골(安骨)·가덕(加德)의 적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왕래가 무상하므로 뜻밖의 근심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외로운 군사를 갑자기 들여보낼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부산으로 오는 적의 길을 막으려면 거제를 잃어서는 안 되는데 적이 물러간 지 한 해가 지나도록 아직 웅거하여 지키는 것을 구획(區劃)하지 않았으니,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도체찰사가 이미 분부하여 올 가을부터 백성에게 경작하게 하고 또 이순신(李舜臣)을 시켜 진주(進駐)하는 것이 온편한지를 살펴서 회보(回報)하게 하였다 하니, 조정에서도 통제사(統制使)에게 하유(下諭)하여 들어가 지키는 방책을 여러 가지로 계획하여 상세히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아뢰니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 대목에서도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철수하여 거제도로 옮기지 않은 사유가 무엇인지 밝혀져 있다. 조정에서는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한산도는 1만척의 배를 감출 수 있고 방어하기에 더 편리하다’는 의견을 이순신은 물론이고 비변사도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다.

1596년(선조 29) 11월 7일 미시(未時)에 선조는 별전(別殿)에 나아가서,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윤두수(尹斗壽)·김응남(金應南)·정탁(鄭琢)·이원익(李元翼)과 비변사(備邊司) 유사 당상(有司堂上) 김명원(金命元)·김수(金晬)·이덕형(李德馨)·유영경(柳永慶) 그리고 승지 이덕열(李德悅)을 인견하고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먼저 유성룡이 ‘원균이 용맹스럽게 싸우는 것은 잘하나 지친 군졸을 어루만지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원균에게 영남의 수군을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육장(陸將)은 수전(水戰)을 잘 못하고, 수전하는 자는 육전을 잘 못했습니다. 원균이 제 몸을 잊고 용감히 싸우는 것은 그의 장점이나 지친 군졸을 어루만지지 못하니,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써야 하겠습니다.

원균이 힘껏 싸운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이기는 하나 한번 수전한 뒤부터 착오를 일으켜 영남의 수군 중에는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가 많이 있으니, 원균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구나 이순신(李舜臣)과 원균이 사이가 나쁜 것도 진실로 조정에서 아는 바입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수륙의 차이가 있더라도 함께 협동해야 할 것이므로 두 사람이 모여 의논하게 하였으나 원균은 발끈하여 노기(怒氣)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균은 가선(嘉善)이 되었을 뿐인데 이순신은 정헌(正憲)이 되었으므로, 바로 이 때문에 원균이 분노한 것입니다.”

이원익도 ‘이순신은 별로 말이 없으나 원균은 늘 발끈하는 성미이기 때문에 한산도를 지키는 일은 이순신이 맡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별로 없었으나, 원균은 기색이 늘 발끈하였습니다. 예전의 장수 중에도 공(功)을 다툰 자는 있었으나, 원균은 심하였습니다. 소신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 대하여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閑山)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다 글러질 것입니다. 위에서 하교(下敎)하시어 그대로 병사(兵使)로 있게 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조정에서 여러 가지로 하유(下諭)하여도 뜻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소신도 이런 위급한 때에 마음을 합하여 함께 구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으나, 원균은 노기를 풀지 않으니, 이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이 이순신을 비호하는 발언을 하자, 윤두수가 ‘두 사람이 사이가 나빠진 것은 후진(後進)이었던 이순신이 원균의 위에 있게 되자 발끈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균은 소신의 친족인데, 신은 오랫동안 그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이순신이 후진인데 지위가 원균의 위에 있으므로 발끈하여 노여움을 품었을 것이니, 조정에서 헤아려 알아서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선조가 원균의 편을 들었다.

“내가 듣기로는 당초 군사를 청한 것은 원균이 한 것인데 조정에서는 원균이 이순신만 못하다고 생각하므로 원균이 이렇게 노하게 되었다 하고, 또 들으니 원균은 적을 사로잡을 때에 선봉(先鋒)이었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로는, 군사를 청하여 수전한 것은 원균에게 그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라 하며, 또 들으니, 이순신이 왜자를 많이 잡은 것은 원균보다 나으나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하였다 한다.”

고 하였다. 그러자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원균의 공(功)은 이순신보다 나을 수 없다고 조용히 말하니, 원균이 말하기를 ‘이순신(李舜臣)은 물러가 있고 구원하지 않다가 천 번 만 번 불러서야 비로소 진군(進軍)하였다.’ 하였는데, 원균은 침범당한 지방에 있으면서 오직 대적하기를 바랐으나, 이순신이 원균과 한꺼번에 나가 싸우지 못한 것은 그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열도 원균의 편을 들었다.

“이순신(李舜臣)은 열다섯 번 부르기를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가서 적의 배 60척을 잡고서 맨 먼저 쳐들어간 것으로 자기 공을 신보(申報)하였다 합니다.”

하고, 이원익이 다시 반론을 제기했다.

“호남에 있던 적의 배가 자기가 있는 곳에 돌진해 오면 적이 충만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뒤에 간 것입니다. 원균이 당초에 많이 패하였으니 이순신(李舜臣)이 따라가서 옆에 서 있거나 손수 잡지 않았더라도 관하(管下)가 잡은 것 또한 많았을 것입니다. 참급(斬級)이 많은 것으로 논한다면, 원균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원균은 당초에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하였고, 정탁은

공을 다투는 마음을 보면 두 장수가 다 잘못한 것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나, 이순신은 가볍지 않은 장수이니, 위에서 하교하여 화해시켜서 뒷날의 공효를 당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날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서 발언한 사람은 류성룡, 이원익, 정탁, 이덕열이었다.

1596년(선조 29) 11월 9일에,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왜적에 대한 대책과 함께 ‘이순신보다는 수전(水戰)에 능한 원균(元均)이 적임(適任)’임을 이야기하였다.

“신이 접때 원균(元均)을 도로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로 삼아 주사(舟師)를 다시 거느려 적이 오는 데에 대비하기를 청하였으나, 원균이 현재 맡은 병사(兵使)를 대신할 자를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려 왔습니다.

신이 전에 《일본고(日本考)》를 보니, 근일 임회후(臨淮侯) 이언공(李言恭)이 지은 것인데, 왜적은 육투(陸鬪)를 잘하고 수전(水戰)을 잘못한다고 분명히 말한 것이 있습니다.

또 임진년의 병화(兵禍) 이후로 저들의 예봉(銳鋒)을 크게 꺾은 것은 주사(舟師)만이 그러하였을 뿐이고 육전(陸戰)은 다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적은 주사를 특히 심하게 두려워하여 피하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나 우리 육군은 어린아이처럼 생각한다 합니다.

임진년에 수전한 장수들 중에서 공이 있는 자는 손꼽아 셀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원균이 가장 우직하여 제 몸을 잊고 용맹을 떨치며 죽음을 피하지 않아서 공적이 매우 뚜렷합니다. 또 수전에 익숙하여 적을 보는 대로 나아가 이기기만 하고 지는 일이 없으므로 군졸이 믿어서 두려워하지 않는데, 이제 주사를 버리고 기보(騎步)를 거느리니, 병사(兵使)가 수사(水使)보다 높기는 하나, 이것은 옛사람이 이른바, 그 잘하는 것을 버려두고 그 재주를 못 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다섯 적장(賊將)과 큰 군사가 겨울이나 봄에 올 것이라는 신보(申報)를 들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서둘러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죽일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조금이라도 늦추어서 적이 뭍에 내릴 수 있게 한다면, 뒤에 보기(步騎) 수만 명이 있더라도 어찌 선풍처럼 빨리 오는 예봉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임진년의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다 가운데에서 막아 죽여서 적이 감히 언덕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적을 막는 첫째 방책이라면, 주사의 장수는 본디 과거에 싸워서 여러 번 이긴 자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원균이 수군을 거느리면 반드시 이길 도리가 있음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마땅하지 않은 사람으로 담당하게 하여 적에게 대항하지 못함으로써 적이 혹 호남으로 가는 길을 한번 범하면 원균이 한 도의 기보 군졸을 거느려 대장(大將)이 되더라도 결코 수전에서처럼 뜻대로 싸우지 못할 것이니, 다시 수사를 삼아서 전일에 싸웠던 장기(長技)를 쓰게 하지 않아서는 않되겠습니다. 육군의 장수로 말하면 마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어찌 원균을 대신하여 감당할 자가 없겠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원균은 이순신(李舜臣)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이므로 원균을 절제(節制)할 것인데, 원균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감수하지 못하여 두 장수가 화합되지 않을 것이니, 일이 성공될 리가 없을 듯하다.’ 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통제사란 직임은 한때의 필요에서 생긴 것이어서 그대로 둘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으므로, 이순신의 통제사라는 직명도 오히려 낮출 수 있고 혹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라 칭하여 이순신과 명위(名位)가 대등하게 할 수도 있으니, 신축자재하게 임의로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는 대개 원균의 자급(資級)이 본디 이순신(李舜臣)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감히 다시 아뢰어 번거롭게 하는 혐의를 피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신은 지난번 또 한산(閑山)의 주사(舟師)를 빨리 거제(巨濟)의 장문포(場門浦)에 진주하게 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제는 저 적이 와서 침범할 형상이 이미 드러나 눈앞에 닥친 일이라 매우 급박하므로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죄다 거제에 진주하여 수로(水路)를 제압하고 있다가 책사(冊使)가 나온 뒤에는 모든 오가는 적의 배를 곧 주사로 막아서 잡아 죽임으로써 적이 오는 길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적의 장수가 나오는데 주사의 장수들이 전쟁을 꺼려서 미처 막지 못하였다고 핑계하거든 곧 군법으로 처리하여 군율(軍律)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하서(下書)하여 이순신 등이 급히 진주하도록 엄히 신칙(申勑)하여 다른 말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해를 넘기고 1597년(선조 30) 1월 23일에 선조가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한 자리에서 ‘행장(行長)이 김응서(金應瑞)에게 청정(淸正)을 도모할 계책을 일러주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은 점’과통제사 이순신의 안일함’을 탓하는 말을 꺼내었다.

“왜추(倭酋)는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야말로 정말 천하(天下)에 용렬한 나라이다. 행장(行長)이 김응서(金應瑞)에게 청정(淸正)을 도모할 계책을 일러주었는데, 유성룡(柳成龍) 등이 적의 말을 경솔히 듣다가 그들의 계책에 빠질까 싶다며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장계를 보니, 행장 역시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고 조롱까지 하였으니, 우리나라는 행장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閑山島)의 장수인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

그러자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은 왜구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나가 싸우기에 싫증을 낸 것입니다. 임진년 정운(鄭運)이 죽을 때에도 절영도(絶影島)에서 배를 운행하다 적의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라고 하였고, 이산해는 아뢰기를,

“이순신은 정운과 원균이 없음으로 해서 그렇게 체류한 것입니다.”

라고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정운(鄭運)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대개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 정언신(鄭彦信)이 항상 정운의 사람됨을 칭찬했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명령을 했는데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순신에게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제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시위할 약속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고 말하고는 한참동안 차탄(嗟歎)하고는 길게 한숨지으며 신조가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1597년(선조 30) 1월 27일. 선조는 대신들과 비변사 유사 당상과 함께 다시 수군을 강화하는 일을 논의하였다. 선조가 “적선이 비록 2백 척이라 하니 매우 많다. 그리고 전라도는 전혀 방비를 하지 않고 있으며 한 사람도 수군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자,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곳은 호령(號令)이 행하여지지 않기 때문에 군사들이 즉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간사한 아전들이 용사(用事)하여 제장(諸將)의 호령이 하나도 시행되지 않았고, 혹시 한 가지 명령이 내려도 수개월이 걸려 오는 자도 있고, 오지 않는 자도 있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 이번 대계(大計)를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대소 인신(人臣)이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지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이순신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라고 거들자, 선조는,

“이순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이순신이 부산 왜영(倭營)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 영상(領相)이 이 자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랬을 이치가 없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라고 다시 분노하니, 유성룡이 그 분노를 줄이기 위해서 완곡하게,

“이순신은 한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 여겼습니다. 그는 평일에 대장(大將)이 되기를 희망하였었습니다. 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과람합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

라고 아뢰었으나 이순신의 이야기만 나오면 분노가 치미는 선조는 더욱 완강하게,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武將)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자 좌의정 김응남이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릴 수 없습니다.” 라고 선조의 생각에 동조하였고, 유성룡도 할 수 없이 동의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그 자리에서 “원균을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하니, 김응남이 “지당하십니다.”라고 화답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잘못된 일로 인식한 윤두수가 이순신을 전라 충청 통제사(全羅忠淸統制使)로 삼고, 원균을 경상 통제사(慶尙統制使)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라며 절충안을 제시하였으나, 선조는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에게 “원균의 일을 급히 조처하라.”하였다.

이덕형도 비록 왕명이긴 하지만 잘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원균을 좌도(左道)로 보낼 것을 건의하였으나 선조는 이덕형의 건의도 묵살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있은 지 4일 후인 1597년(선조 30) 1월 27일에 선조가 별전(別殿)에 나아가자, 비변사 대신 및 유사 당상인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의정부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 김수(金晬),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상호군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다.

그리고 좌승지 이덕열(李德悅), 주서 조즙(趙濈),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이순민(李舜民), 검열 심액(深詻)·이유홍(李惟弘)이 차례로 입시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조는 수군의 통제권에 대해서 대신들과 논의를 하였는데, 윤두수는,

“전일에 권율이 소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보니, 행장(行長)이 바야흐로 강화(講和)를 말하는데 고성(固城)·곤양(昆陽) 근처에 적도들이 쳐들어왔으므로 이것을 행장에게 말했더니, 행장은 ‘그 적은 나의 무리가 아니다. 조선에서 비록 그들을 죽이더라도 내가 가서 구할 리가 없다.’고 했다 했습니다. 신이 선거이(宣居怡)·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永登浦)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長門浦)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觀望)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 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 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원수(元帥)가 길에서 왜적 5∼6명을 만났다고 하는데, 적이 만약 원수가 고단(孤單)함을 알았다면 말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체찰사 역시 간약(簡約)한 사람인데 행동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罪狀)을 이미 헌의(獻議)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행장(行長)이 지휘(指揮)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라고 하자, 정탁이 ‘비록 이순신에게 잘못이 있긴 하지만 지금같이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정탁의 말을 가로 막았다.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元均)으로 대신해야 하겠다.

중국 장수 이 제독(李提督)이하가 모두 조정을 기만하지 않는 자가 없더니,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걸 본받는 자가 많다.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金鸞瑞)와 안위(安衛)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이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해임하는 선을 넘어서 노골적으로 그 후임으로 원균을 지목하였다. 선조의 이야기가 너무 서릿발 같다고 느낀 류성룡이,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했습니다. 그러나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武將)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라며 이순신을 비난하는 듯 하면서도 이순신을 감싸는 이야기를 하였고, 이어서,

“거제(巨濟)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永登)·김해(金海)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閑山)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邀擊)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하였으나, 한번 노한 선조는 과거에 이순신이 조산 만호로 있을 때의 일을 예로 들면서 계속 이순신을 공격하였다.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武臣)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조산 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金景訥) 역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하는 일로 마침 그곳에 있었는데, 이순신과 김경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이순신이 밤중에 호인(胡人) 하나를 잡아 김경눌을 속이니, 김경눌은 바지만 입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김경눌은 허술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위태로운 곳에서 계엄을 하지 않았고, 이순신은 같은 변방의 장수로서 서로 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일찍이 들었다. 김경눌은 매양 공(功)을 세우는 데 뜻을 둔 사람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평일에 자부하던 기개를 어찌 난시(亂時)에 시험하지 않고 있는가.”

그러자 내내 선조의 하는 일에 아첨을 떨었던 이정형이 재빨리 아뢰기를,

“이순신이 ‘거제도에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선박을 감출 수 있는데다가 적들이 천심(淺深)을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만이 비록 넓기는 하나 선박을 감출 곳이 없을 뿐더러 또 건너편 안골(安骨)의 적과 상대하고 있어 들어가 지키기에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합니다.”

하였고, 선조가 “들어가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하고 묻자, 이정형은

“신 역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그렇습니다. 원균은 사변이 일어난 처음에 강개(慷慨)하여 공을 세웠는데, 다만 군졸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조가 “원균의 성품이 그처럼 포악한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경상도가 판탕(板蕩)된 것은 모두 원균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 원균은 적과 싸울 때에나 쓸 만한 사람이라 하였는데 이제는 짐작하겠구나”하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조가 지금까지 화를 내었던 이순신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내비췄다.

“체찰사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분부하는 일이 있으면, 비록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이순신은 그런대로 면종(面從)을 하지만 원균은 노기를 내어 청종(聽從)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공(功)을 빼앗겨서인가? 원균을 좌도 주사(左道舟師)에 임명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2인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정형과 김수 그리고 이덕열이 ‘원균을 좌도주사에 임명하고 다른 사람으로 두 사람을 진압하는 방법은 옳지 않다’고 했다.

또 선조가 이르기를,

“전라도는 중국 사신을 지대(支待)하느라 주사(舟師)와 격군(格軍)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모두 이순신만을 책할 수는 없다.”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변방의 일은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서서히 처리해야 합니다.”

라고 하고, 이어서 윤두수가,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統制使)로 삼아, 서로 세력을 협조토록 해야 합니다.”

라고 하자, 선조가,

“비록 두 사람을 나누어 통제사로 삼더라도 반드시 조절하여 절제(節制)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에 나가는데 이순신이 물러나 구하지 않는다면 사세가 어려울 것이다.”

라고 하니, 김응남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순신을 중죄에 처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가 다시 이르기를,

“옛날 이현충(李顯忠)의 일도 있었으니 반드시 문관(文官)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조절하게 하여 기탄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한다. 그가 이미 통제사가 되었으니, 수군을 모아야 하는데 어째서 정돈하지 않고 있는가?”

하니, 윤두수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남원(南原)에 있을 때, 이순신이 군관을 남원에 보내 군사를 모집하다가 그곳 병방(兵房)을 참(斬)하기까지 하여 백성들이 잇따라 소란하고 곡성(哭聲)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군관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그들의 멀고 가까운 친척까지 붙잡아 갔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군사를 모을 즈음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이렇게 자기 주장을 중심으로 많은 논의를 한 이튿날. 선조는 원균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아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중한 임무를 맡고서 마음대로 기망(欺罔)하여 적을 토벌하지 않아 청정으로 하여금 안연히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바야흐로 적과 진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공을 세워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

나는 평소 경의 충용(忠勇)을 알고 있어 이제 경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노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 우선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해적을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훈공이 종정(鍾鼎)에 새겨지게 하라. 경은 공경히 하라. 이를 원균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헌부는 재빠르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막대한 국가의 은혜를 받아 차례를 뛰어 벼슬을 올려 주었으므로 관직이 이미 최고에 이르렀는데, 힘을 다해 공을 세워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은 지가 이미 5년이 경과하였습니다.

군사는 지치고 일은 늦어지는데 방비하는 모든 책임을 조치한 적도 없이 한갓 남의 공로를 빼앗으려고 기망(欺罔)하여 장계를 올렸으며, 갑자기 적선이 바다에 가득히 쳐들어 왔는데도 오히려 한 지역을 지키거나 적의 선봉대 한 명을 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뒤늦게 전선(戰船)을 동원하여 직로(直路)로 나오다가 거리낌없는 적의 활동에 압도되어 도모할 계책을 하지 못했으니, 적을 토벌하지 않고 놓아두었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한 죄가 큽니다. 잡아오라고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하였으나 선조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김홍미에게 전교했다.

“이순신(李舜臣)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宣傳官)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元均)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이상의 기록이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는 전라 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의 치계가 기록된 선조실록 40권(선조 26) 1593년 윤 11월 6일 부터 우부승지였던 성극당 김홍미에게 ‘이순신을 잡아 드리라’고 하명한 선조실록 85권(선조 30)1597년 2월 6일 까지 약 5년 동안에 일어난 이순신 장군의 탄핵에 관련된 기록의 전부이다.

왕명을 거역한 이순신의 잘못을 탓하는 많은 이야기들과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전시(戰時)에서 최선봉의 두 장수 원균과 이순신의 불화(不和)를 일으킨 것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많은 대신과 선조 사이에 오갔다.

결국 이순신의 탄핵을 주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선조였고, 이에 동조한 대신들의 발언이 있었다. 그러고 작은 숫자이지만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순신을 옹호하는 일부 대신들의 발언이 있었으나 우부승지 김홍미가 나서서 ‘이순신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없다.

마지막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극당 김홍미가 당시 관직이 우부승지였기 때문에 그에게 하명(下命)했을 것뿐이고 그 왕명(王命)을 받았을 뿐이다.


3. 변명 2 : 성극당 김홍미는 이순신을 탄핵하지 않았다

<선조실록>을 보면, 성극당은 이순신에 대해서 논의하는 조정회의에 딱 한번 참가했는데 그때가 1596년(선조 29) 6월 26일이었다. 그리고 한번은 이순신을 잡아오라는 전교를 받았는데, 그날이 1597년(선조 30) 2월 6일 이었다.

먼저 1529년(선조 29) 6월 26일에 열렸던 회의에서의 이야기다.

이날은 선조가 <주역(周易)>을 강독하고 나서, 대신들과 함께 천재(天災)와 이순신 그리고 원균 등에 관해서 의논을 하였는데, 이 자리에 성극당(省克堂) 김홍미가 참가하였다. 그러나 성극당은

“요즈음 천문 분야를 보면 우리나라가 아닙니다. 한 문제(漢文帝) 때에 혜성과 일식의 변이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나, 문제가 능히 덕으로 변이를 사라지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재응이 없었습니다. 일념(一念)이 선(善)하면 경성(慶星)·경운(慶雲)이 나타나고, 일념이 악(惡)하면 열풍(烈風)·진뢰(震雷)가 나타납니다. 상께서 공구 수성하며 마음으로 힘을 다하소서. 그러면 하늘에 있는 변이가 사라질 것입니다.”

라고 천재(天災)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이 자리에서 “이순신(李舜臣)은 밖에서 의논하기를 어떠한 사람이라고들 하는가?”하고 말을 꺼낸 사람은 선조(宣祖)였다.

그러자,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이,

“이순신은 쓸 만한 장수입니다. 원균(元均)으로 말하면 병폐가 있기는 하나 몸가짐이 청백하고 용력(勇力)으로 선전(善戰)하는 점도 있습니다.”

라고 답하였고, 선조가 다시 이르기를,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賊)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동궁(東宮)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불러도 오지 않았다.”

라고 선조가 이순신을 폄하하자, 다시 김응남(金應南)이,

“원균이 당초에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이순신이 오지 않자 원균은 통곡을 하였다 합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청하여 성공하였는데, 도리어 원균이 이순신보다 위에 있게 되자, 두 장수 사이가 서로 벌어졌다 합니다.”

라고 아뢰니, 선조가 다시 “이순신의 사람됨으로 볼 때 결국 성공할 수 있는 자인가? 어떠할는지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영사(領事) 김응남(金應南)이 다시 아뢰기를,

“알 수 없습니다마는, 장사(將士)들은 이순신이 조용하고 중도에 맞는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제(巨濟)의 진(鎭)에는 원균을 보내야 하니, 거제를 지키는 일이라면 이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겠습니까.”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1597년(선조 30) 2월 6일에는, 선조가 우부승지(右副承旨)인 성극당(省克堂)에게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전교(傳敎)하였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이순신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사헌부와 사간부에서는 당장 잡아드려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전시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못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잡아오라’는 명(命)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선조가 이런 명령을 성극당에게 내린 것은 당시 성극당의 벼슬이 우부승지였기 때문에 지극히 업무적인 하명(下命)이었다.

선조도 전시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통제사를 원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듯 하였다. 이틀 뒤인 1597년 2월 7일에 선조는 우부승지인 성극당(省克堂)에게 이런 전교를 내렸다.

“이러한 때에 힘껏 싸우는 장수는 비록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깊이 책할 것 없이 부리는 것이 가하다.

주사(舟師)는 지금 한창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그 형세가 대단히 긴박하다. 그러나 부득이 통제사는 고쳐 차임해야 하겠고 경상 우수사도 갈아야 하겠다.”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게 된 사연을 두 곳에서 읽을 수 있다. 그 하나는 “이순신을 살린 전형적인 충신, 정탁(鄭琢)”이란 글속에 있다.

“1597년 겨울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순신을 모함하기 위하여 자신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짓으로 서로 싸우는 듯한 형상을 짓고, 자신의 부하인 요시라를 간첩으로 파견하여 ‘가토 기요마사가 왜에 갔다가 다시 조선에 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토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민다.

이를 사실로 믿은 선조의 명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의 간사한 술책임을 알고 난색을 보이자, 사헌부는 ‘출정하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탄핵하고, 박성은 ‘참수’를 주장하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결국 이순신은 1597년 2월 26일 선조의 명으로 파직되어 한산도포박과 한양압송으로, 3월 5일 한양의금부옥(獄)에 갇혀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라고 이순신이 옥(獄)에 갇히는 사연을 기록하였고, 선조가 거론한 이순신의 죄목(罪目)으로는,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주고 치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저버린 죄, 심지어 남의 공로를 가로채고, 또 남을 죄에 몰아넣은 죄, 그 모두는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한 죄(欺罔朝廷, 無君之罪, 縱賊不討, 負國之罪, 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姿, 無忌憚之罪)”

이었다. 이처럼 선조를 비롯해 조정은 모두 이순신을 죽음으로 내 몰았지만,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은,

“왜적들이 꺼리는 바는 주사(舟師), 수군(水軍)이니 이순신을 경질해서는 안 되고, 원균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

는 보고서를 올렸으나, 조정에서 따르지 않자,

“나라 일을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라고 탄식했다. 1597년 3월 정탁은 이순신에 대한 시기질투로 똘똘 뭉쳐있는 선조에게 목숨을 건 ‘신구차(伸救箚)’상소문을 올렸다. 약포 정탁의 상소문에는,

“이순신은 명장입니다.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군기(軍機)는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어서 이순신이 나아가지 않은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뒷날에 다시 한번 공을 세울 수 있게 하소서.”

1597년 4월 1일. 이순신은 28일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라는 명을 받는다.

또 하나는 김육(金堉)이 쓴 <이순신의 비명(碑銘)>에 있다.

원균은 성품이 본디 급하고 질투심이 많았으며, 또 스스로 선배라 하여 공의 아래에 있기를 부끄럽게 여겨서 지휘를 따르지 않았는데, 공은 입을 다문 채 그의 장단(長短)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체차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았다. 그러자 원균은 조정의 대신들과 사귀어 온갖 방법으로 공을 모함하였다. 이때 적장(賊將)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거짓으로 서로 싸우는 듯한 형상을 짓고서, 요시라(要時羅)를 간첩으로 파견하여 먼저 가등청정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 말을 곧이 듣고 공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라고 재촉하였는데, 공은 왜적들의 간사한 술책을 알아채고는 편의대로 하려고 하면서 난색을 보이자, 간관이 ‘출정하지 않고 머뭇거렸다’고 탄핵하였다.”

두 기록에서 공통적인 이야기는 ‘이순신이 이미 거짓 정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뭇거린 것이 이순신의 공식적인 죄명(罪名)이 되었다’는 것이고, 이순신을 탄핵을 한 것은, 성극당 김홍미가 아닌 ‘사헌부’와 ‘간관’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성극당의 벼슬은 승정원 소속 우부승지(右副承旨)였다. 승정원(承政院)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고, 우부승지는 승정원(承政院)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에 법제화된 사헌부(司憲府)의 직무를 살펴보면,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 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잡는 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펴주는 일’, ‘외람되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직무 가운데에서, 정치적 언론과 백관을 규찰해 탄핵하는 언론은 대사헌(大司憲)·집의(執義)·장령(掌令)·지평(持平) 등만이 참여했으며, 감찰(監察)은 관여할 수 없었다.

또한 간관(諫官)이란 사간원과 사헌부를 합친 명칭이고 두 관서의 관원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따라서 승정원(承政院)의 우부승지(右副承旨)란 벼슬은 백관(百官)을 탄핵하는 업무가 아니었다. 백관을 규찰해 탄핵하는 일에는 대사헌·집의·장령·지평 등만이 참여할 수 있다.

성극당은 당시 승정원의 우부승지이었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직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극당이 이순신을 탄핵했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순신을 잡아드려라”고 하명(下命)한지 약 한 달이 지난 1597년 3월 13일에 선조는 우부승지(右副承旨) 성극당(省克堂)에게 이순신에게 벌하는 것을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며(장성한 원균(元均)의 아들을 가리켜 어린 아이가 모공(冒功)하였다고 계문(啓聞)하였다.)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기 때문에 법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이 비망기(備忘記)를 보면, ‘이순신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라고 말한 것도 선조(宣祖)이고, ‘이순신이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라고 말한 것도 선조(宣祖)이며, ‘이순신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한 죄’라고 말한 것도 선조(宣祖)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라고 지적한 사람도 다름 아닌 선조(宣祖)였고 성극당(省克堂)은 아니었다.

또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고 주창한 사람도 선조(宣祖)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고 주창한 것도 다름 아닌 선조(宣祖)였다.

따라서 이순신을 향한 혐의는 오로지 선조의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해 4월 23일에 선조는 성극당(省克堂)에게 좌부승지(左副承旨, 정3품 당상관)를 제수하였고, 1597년(선조 30) 6월 15일에 비문사(備問使)로 삼았으며, 11월 22일에는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제수하였다.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9월 20일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삼았다가, 9월 26일에는 다시 대사간으로 삼았으며, 12월 30일에는 다시 좌부승지를 제수하였다.

그리고 1599년(선조 32) 1월 3일에는 청송부사, 1602년(선조 35)에는 여주목사, 1604년(선조 37)에는 강릉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9월 19일에 중병 때문에 사임하여 환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나서, 1597년(선조 30) 7월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의 유인전술에 속아 대패하여 전사(戰死)하였다. 따라서 성극당이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된 것은 원균이 죽은 뒤인 그해 11월 22일이었고,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된 것은 이듬해인 1598년(선조 31) 9월 20일이었으며,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된 것은 1598년 9월 26일이고,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된 것은 1598년 12월 30일이었다.

그리고 1599년(선조 32) 1월 3일에는 청송부사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에는 여주목사, 1604년(선조 37)에는 강릉부사가 되었다. 모두가 원균이 죽고 난 후의 일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성극당이 후반기에 많은 벼슬을 한 것이 원균의 도움이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오로지 선조가 성극당을 신임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에서 지적한 ‘1597년’을 중심으로 성극당(省克堂)의 행적을 더듬어보았으며, 선생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598년 관직을 사퇴하였다”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기록도 잘못된 것이다.

1604년(선조 37) 강릉부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1605년(선조 38) 9월 19일에 “성극당(省克堂)은 중병으로 관직을 사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성극당(省克堂)은 1598년이 아니고 7년 뒤인 1605년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4. 맺는 말

<한국민족대백과사전(韓國民族大百科事典)>은 우리나라의 민족・역사・자연・생활・사회 등 한민족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백과사전이다. 이를 펴내기 위해 연인원 7,000명의 전문분야 학자들이 집필하였고, 수록된 항목이 무려 6만 5천 항목이다.

이 백과사전을 펴내기 위해서 1980년부터 1987년까지 8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원고를 집필하였으며, 1988년부터 1991년까지 4년 동안 전27권을 발간하였다.

발간비(發刊費)로 국가예산 175억 원이 투입되었고, 200자 원고지만 해도 42만 장이 쓰여 졌다.

따라서 이렇게 국가에서 만든 백과사전(百科事典)에 오류(誤謬)가 있다는 것은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신뢰성(信賴性)이 떨어지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일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전공(戰功)과 함께 ‘어명(御命)을 곧 바로 시행하지 않았던 일’과 ‘원균(元均)과의 불화(不和)’ 등을 놓고 대신들이 논의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성극당이 ‘이순신 탄핵을 주장했다’는 기록은 없다.

더구나 당시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이순신을 적극 옹호하고 있었고, 류성룡 영의정은 성극당의 스승이었고 장인(丈人)인 류운용(柳雲龍)의 형님이었기 때문에 이런 전통적 가학연원(家學淵源)과 세의(世誼)를 버리고 이순신을 탄핵하였다는 기록은 대단히 잘못된 기록이다.

따라서 정사(正史)에도 없는 일이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버젓하게 기록되어 있는 일은 시급하게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부록 1> 이순신 장군의 허위보고 내막

1597년(선조 30) 1월 1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은 군공(軍功)이 있는 김난서(金鸞瑞)·안위(安衛)·신명학(辛鳴鶴)의 포상을 청하는 서장(書狀)을 올렸다.

“신의 장수 가운데 계려(計慮)가 있고 담력과 용기가 있는 사람 및 군관(軍官)·아병(牙兵)으로 활을 잘 쏘고 용력(勇力)이 있는 자들이 있는데, 항상 진영에 머물면서 함께 조석으로 계책을 의논하기도 하고 그들의 성심(誠心)을 시험하기도 하고 함께 밀약(密約)하기도 하였으며 또 그들을 시켜 적의 정세를 정탐(偵探)하게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터에 거제 현령(巨濟懸令) 안위(安衛) 및 군관 급제(及第) 김난서(金蘭瑞), 군관 신명학(辛鳴鶴)이 여러 차례 밀모(密謀)하여 은밀히 박의검(朴義儉)을 불러 함께 모의했습니다. 그랬더니 박의검은 아주 기꺼워하여 다시 김난서 등과 함께 간절하게 지휘(指揮)하면서 죽음으로 맹세하고 약속하였습니다. 같은 달 12일, 김난서 등은 야간에 약속대로 시간 되기를 기다리는데 마침 서북풍이 크게 불어왔습니다. 바람결에다 불을 놓으니, 불길이 세차게 번져서 적의 가옥 1천여 호와 화약이 쌓인 창고 2개, 군기(軍器)와 잡물 및 군량 2만 6천여 섬이 든 곳집이 한꺼번에 다 타고 왜선(倭船) 20여 척 역시 잇따라 탔으며, 왜인 24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지만, 대개 김난서가 통신사(通信使)의 군관(軍官)에 스스로 응모하여 일본을 왕래하면서 생사를 돌보지 않았기에 마침내 이번 일을 성공한 것입니다.

안위(安衛)는 평소 계책을 의논하다가 적에 대해 언급할 경우 의분에 분개하여 자신이 살 계책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의 군관 김난서와 신명학 등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들어가 갖가지로 모의하여 흉적의 소굴을 일거에 불태워 군량·군기·화포 등 제구(諸具)와 선박 및 왜적 34명을 불태워 죽게 하였습니다. 부산(釜山)의 대적을 비록 모조리 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적의 사기를 꺾었으니 이 역시 한가지 계책이었습니다.

일본을 왕래하는 경상 수영(慶尙水營) 도훈도(都訓導) 김득(金得)이 부산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날 밤 불타는 모습을 보고는 이달 12일 2경(更)에 부산의 왜적 진영 서북쪽 가에다 불을 놓아 적의 가옥 1천여 호 및 군기(軍器)와 잡물·화포(火砲)·기구(器具)·군량 곳집을 빠짐없이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서로 모여 울부짖기를 ‘우리 본국(本國)의 지진(地震) 때에도 집이 무너져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이번에 이곳에서 또 화환(火患)을 만나 이 지경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합니다. 이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럴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안위·김난서·신명학 등이 성심으로 힘을 다하여 일을 성공시켰으니 매우 가상하며, 앞으로 대처할 기밀(機密)의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니 각별히 논상(論賞)하여 장래를 격려하소서.”

그러나 이순신이 공(功)이 있는 부하들에게 상(賞)을 내려달라고 장계한지 이틀 후에, 이조좌랑 김신국이 ‘적의 소굴에 불을 지른 사람은 허수석(許守石)’이라고 서계하여, 앞서 이순신이 올린 장계의 내용이 허위라는 논란이 조정에서 일어났다.

“지난날 부산의 적 소굴을 불태운 사유를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장계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거느린 군관 정희현(鄭希玄)은 일찍이 조방장(助防將)으로 오랫동안 밀양(密陽) 등지에 있었으므로 적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정희현의 심복이 된 자가 많습니다.

적의 진영을 몰래 불태운 일은 이원익이 전적으로 정희현에게 명하여 도모한 것입니다. 정희현의 심복인 부산 수군(水軍) 허수석(許守石)은 적진을 마음대로 출입하는 자로 그의 동생이 지금 부산영 성 밑에 살고 있는데 그가 주선하여 성사시킬 수 있었으므로 정희현이 밀양으로 가서 허수석과 몰래 모의하여 기일을 약속해 보내고 돌아와 이원익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날짜를 기다리는 즈음에 허수석이 급히 부산영에서 와 불태운 곡절을 고했는데 당보(搪報)도 잇따라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원익은 허수석이 한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순신의 군관이 부사(副使)의 복물선(卜物船)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도착했었는데 마침 적의 영이 불타는 날이었습니다. 그가 돌아가 이순신에게 보고하여 자기의 공으로 삼은 것일 뿐 이순신은 당초 이번 일의 사정을 모르고서 치계(馳啓)한 것입니다. 허수석이 작상(爵賞)을 바라고 있고 이원익도 또 허수석석을 의지해 다시 일을 도모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갑자기 작상을 내리면 누설될 염려가 있으니 이런 뜻으로 유시(諭示)하고 은냥(銀兩)을 후히 주어 보내소서. 조정에서 만일 그런 곡절을 모르고 먼저 이순신이 장계한 사람에게 작상을 베풀면 반드시 허수석의 시기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적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방비를 더욱 엄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모한 일을 시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원익이 신에게 계달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 이번 비밀리에 의논한 일은 이미 이원익의 장계에 있기 때문에 서계하지 않습니다.”


<부록 2> 정운(鄭運) 장군

본관은 하동이고, 자는 창진(昌辰)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전남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공조판서 정응정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성품이 곧았으며 용맹스럽고 활쏘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7세 때에 큰칼에 '정충보국'이라는 칼 이름을 새겨 스스로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한다.

28세(1570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만주의 수비대 장교로 임명받아 그해 10월 두만강을 건너 침략한 외적 20여명과 맞서 싸워 전멸 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 거산도찰방, 웅천현감, 삭녕군수, 선전관, 제주판관을 거쳤다. 그러나 제주판관으로 있을 때 제주목사의 탐학을 보고 시비를 벌이다가 오히려 관직에서 쫒겨 났으나, 임진년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다시 관직을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어 용맹을 날렸다.

정운(鄭運)은 나이도 이순신보다 많고, 군관 임관도 이순신보다 빠르기 때문에 무얼 보더라도 이순신의 선배였으나 강직한 성격과 중앙 관직에 줄이 없어서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호에 머물렀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서울 점령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망하여 곤양 부근에서 이순신과 이억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이순신은 머뭇거리며 이억기의 수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녹두만호 정운(鄭運)은 이를 보고 답답하여 이순신에게 말한다.

"나라가 이토록 위태로운데 어찌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어 생각하십니까? 왜적이 경상도만 노리고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경상도가 무너지면 전라도라고 무사하겠습니까? 그때 가서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나누어 생각하실 참이십니까? 적이 울밖에 있을 적엔 잡기가 쉬우나 울안에 들어오면 오히려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군사를 데리고 나가 경상도를 도와 전라도를 보전할 생각은 아니 하시고 적이 전라도로 올 때까지 기다리고자 하는 그런 편한 마음으로 있으면 장군은 적을 전라도로 인도하는 꼴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결국 이순신은 경상도로 출병하고 그는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적진포・당포・당항포・한산도 해전에서 분전했다.

8월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합동하여 부산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여 9월1일 이른 아침 부산포를 향하였는데 화준구미에 이르렀을 때 왜선 5척을 만나서 격파하고. 다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8척,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왜선 9척, 절영도에서 왜선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우부장(右部將)이던 정운(鄭運)이 부산포(釜山浦)로 돌진하였을 때 적선(敵船) 400여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부산포 몰운대(다대포)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죽음을 무릎쓰고 분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고 많은 적군의 군기를 노획하는 한편 적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장군은 1592년 9월 1일 50세를 일기로 이 부산 동래의 몰운대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戰死)하였다

사후(死後)에 정운(鄭運)은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리고 해남 오소재 고개에 묘소가 있으며,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는 그의 순절을 기리는 유적비가 있고, 옥천면 대산리 생가 인근의 충절사와 부산 충렬사 등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장군이 전사하자, 정묘년 9월 11일자로 이순신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고,

“녹도만호 정운은 세 번 승첩을 했을 때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에 부산포 해전에서도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날 돌아올 무렵에 철환을 맞아 죽었지만, 그 늠늠한 기운과 혼령이 뒷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라고 적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죽음을 앞두고 남긴 "나의 죽음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 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산포해전 중 몰운대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은 그의 우부장 정운이 먼저 이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는 고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9월1일 몰운대 싸움을 앞두고 정운은 몰운대의 '운(雲)'자와 자신 이름의 '운(運)자가 동일한 음이라는 것을 알고 "필시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만일 내가 죽더라도 적이 알지 못하게 하라"며 부하에게 일러 정운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운은 어찌된 일인지 선조의 공신록(功臣錄)에는 등록되지 못하였다가, 후일 1605년(선조38)에 가서야 선원종 1등훈에 책해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조 41년에는 충신문을 건립토록 하여 현재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충절사에 모셔져 있다.


<부록 3>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한 사유는?

이순신(李舜臣)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파격 승진 시키는데 가장 큰 힘이 된 인물이 바로 선조(宣祖)이다. 이때 선조는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를 적극 받아들여서 대신(大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이순신의 최대 지지자는 다름 아닌 선조 임금이었다.

그런 이순신이 첫 승전 보고를 올렸을 때 누구보다 감격했던 것도 선조였다. 그래서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남달랐다. 이순신을 위해 기존에 없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라는 지위를 새로 만들어서 조선 수군(水軍)의 지휘권을 이순신에게 맡겨준 것도 선조였다.

그러나 이런 신뢰와 애정에는 그만큼 큰 기대가 있었다. 선조는 불패(不敗)의 명장(名將) 이순신이 무적(無敵) 함대(艦隊)를 이끌고 부산(釜山)까지 진격해서 제해권(制海權)을 완전 장악함으로서 지루한 전쟁(戰爭)을 끝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원균 등 여러 수군 장수들이 이런 조정의 기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여러 차례 보고했지만, 승전보고(勝戰報告)에만 길들여진 선조 임금과 조정 관료들은 해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환상(幻想)'과 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이런 전략적 견해 차이는 점차 비극을 잉태하고 말았다. 임진년 이후 지루하게 끌어온 일본과의 평화회담(平和會談)이 결렬되고 다시 전면전(全面戰)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게 된 것이다. 거의 철군(撤軍)하다시피 했던 왜군 병력들이 다시 부산포(釜山浦)로 속속 상륙하고 있음이 연일 조선 조정에 보고되었고 조선 조정은 이에 크게 당황했다.

조정은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나아가 상륙하는 왜군병력을 다시 한번 격파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황(戰況)이 여의치 않고 강화된 왜수군(倭水軍)의 전력(戰力)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정의 기대를 묵살했다.

보통 장수가 이처럼 조정의 지시를 받아드리지 않았다면 당장 능지처참할 것이지만, 이 난국을 타개하는 것을 다른 장수에게는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달래고 어루고 협박도 해가며 종용했지만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이순신에 대한 의구심과 비난이 싹트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공(功)을 세우고 너무 큰 포상을 받더니 나태해져서 싸울 의지가 없 어졌다”

“임금의 큰 신뢰를 받더니 기고만장해져서 조정을 우습게 안다”

“이순신으론 안 되겠다. 너무 소심하다. 대담하고 용맹을 갖춘 인물로 대처해야한 다”

라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자, 과거에 있었던 이순신의 크고 작은 허물이나 실수를 한껏 부풀리었고, 결국 ‘부산포의 왜적진에 방화하여 큰 공을 세운 부하 장수들에게 상을 주라는 장계(狀啓)’가 허위 보고라고 해서 이순신을 파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두 가지 장계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허위였는지는 입증한 자료가 없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이순신이 조정을 능멸하고’, ‘군권(軍權)을 남용하며’, ‘남의 공적(功績)이나 가로채는 신뢰할 수 없는 위험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이순신(李舜臣)은 정치적으로도 조선 내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다분히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선조(宣祖)가 이순신을 시기하고 경계하려 했다고 하지만, 군주시대의 임금과 장군은 격이 다른 존재로서 이순신의 공과 백성들의 신망이 높다 해서 직접적인 왕권(王權)의 위협 요소로 보는 것은 과장된 추측이고, 조선 조정의 관료들 역시 전쟁 확대의 위기 속에서 중요한 야전 사령관을 교체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고 본다.

  결국은 남해안의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중앙 관료들과 이런 중앙 관료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현장 관리인 간의 첨예한 갈등이 빚은 비극이었던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