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제55강 경상도선생안과 상주慶尙道先生案과 尙州

빛마당 2014. 11. 6. 22:38

慶尙道先生案 尙州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목 차

1. 들어가며 ………………………………………………… 2

2. <경상도 선생안>의 보존 과정 ……………………… 3

3. <경상도 선생안>의 내용 ……………………………… 7

가. 경상도 도 이름 변천사 …………………………… 7

나. <경상도 선생안>의 직명과 제도의 변천 …………8

다. 경력(經歷), 도사(都事)의 기명(記名) …………… 15

라. 영리(營吏)의 기명(記名) ……………………………16

4. 경상도 관찰사와 상주목사 겸직사실 …………………17

5. 경상도 관찰사 역임 주요 인물 ……………………… 19

가. 고려시대의 주요인물 ……………………………… 19

나. 조선시대의 주요인물 ……………………………… 21

6. 맺음글 …………………………………………………… 24

1. 들어가며

「경상도선생안(慶尙道先生案)」은 원 이름이 「경상도 영주제명기(營主題名記)」이며, 고려 문종 32년(1078)부터 조선 고종23년(1886)까지 경상도의 지방통치를 책임 맡았던 관직자의 명단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그것을 이름하여 영주(營主)라고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도부서사(都府署使), 안찰사(按察使), 제찰사(提察使), 안렴사(按廉使)로, 이어 조선시대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또는 관찰사로 기록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관찰사로 통용한다.

대개 조선시대의 관찰사는 8도의 방백(方伯)으로서 국왕이 종2품의 고위 관직이며 1년의 임기동안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의 수령을 감찰하고 수령7사(首領七事)에 의거하여 수령의 직무수행 고과(考課)등급을 매기는 행정권과 일정한 기준 이하의 죄를 범한자에 대한 재판권, 그리고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직하는 군사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따라서 (도선생안)이라고 함은 권력을 가진 만큼 백성들과 여민동락(與民同樂)하면서 선정(善政)을 하고 많은 치적을 남겨 온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선생(先生)으로 이름을 남겨 달라는 염원으로 도선생(道先生)이라 이름하고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안(案)으로서 뒷날에 사람들이 새길 것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

상주문화원에서는 지난 1997년도에 상주향교에 보관하고 있던<경상도 선생안>을 영인하여 298페이지에 이르는 책으로 간행하였다. 그 원전(原典)은 세종대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하연(河演) 관찰사가 남긴(하연본)에 이어 광해군 년간의 김지남(金止男)관찰사가 편집한(김지남본)이다. 이 원본들을 400여년 긴 세월을 거쳐 오늘까지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웅주거목의 상주역사에 큰 자취라고 하겠다.

본고는 상주문화원에서 간행한 영인본의 해제(解題)를 토대로 하여 원본의 보전과정과 역대 영주제명(營主題名)의 변천사실을 살펴보고 조선조 초기부터 200여 년간 경상감영지로서 상주 목사가 경상도 관찰사를 겸임한 사실에 따라 현존하고 있는 상주목 선생안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울러 이 책에 이름을 남긴 인물 중에 국가적으로 명망이 있는 인사와 본향 상주 출신인사들에 대한 사실(史實)도 기술 하고자 한다.


2. 경상도 선생안의 보존과정

경상도선생안의 최초기록은 1425년(세종7)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하연(河演)이 전임자의 인사(人事)와 행적을 간추리기 위하여 시도된 것이다.

책이름은 <棠下題名記당하제명기>이고 1078년(고려문종32)부터 하연전대(前代)까지 347년간의 관찰사 명단을 기록 하였다.

그뒤 수시로 추가 기록되어 1718년(숙종44)까지 640년간 모두 867명의 관찰사 명단과 부임, 퇴임 일자와 당시의 균역(均役), 세제(稅制)등이 기록 되었고 책의 말미에 “本營慶州府置(본영경주부치)라고 하여 경주부에 둔 것임을 밝혔다.

하연 관찰사가 남긴 경상도 영주제명기서에 이르기를

“ 당시는 왜구들의 만행으로 문적과 자료가 흩어져 찾을 길이 없어서 경 주 본영에 있는 공사간(公私間)의 문적을 찾았던바 다행히 전임 주부(注簿) 손 희(孫熙)라 하는 관리가 자기집에 소장한 기록본이 있는 것을 바쳐서 이를 근 거로 하여 지금 이 통적(通籍)을 이루게 되었다”

하였고, 이어서

“위에는 중조(中朝:고려조)와 본조(本朝:조선)의 연호를 쓰고 아래에는 해마 다 부임한 사신(使臣)의 성명을 써서 책이름을 <영주제명기(營主題名記)>라고 하고 2부를 베껴 한부는 경주 본영에 두고 한부는 행영(行營)에 두어 후일 상고(詳考)에 편리 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따라서 현재 보존되고 있는 경상도 선생안은 원이름이 <영주제명기(營主題名記)>이고 영주(營主)는 왕의 명을 받은 사신(使臣)으로 오늘의 도 단위의 우두머리 벼슬로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행영(行營)에 한부를 두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기록물이 멸실될까 우려한 바이고 그 행영이 어디인가에 대하여는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여러 문헌을 참고 하건데 상주로 보는 것이 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연 관찰사가 편수한 기록이 속칭하여 <하연본(河演本)>이라고 하고 원전(原典)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96년이 지나 1621년(광해군 13)에 김지남(金止男)이 경사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 다음해에 <하연본>에 이어서 제명록(題名錄)을 남긴 것이 <김지남본(金止男本)>이다. 김지남은 이 책본의 서문에 이르기를

“영남은 옛 신라가 건국한 지방이며 지역이 넓고 백성이 많은 번창한 곳으로 왕 명을 받들어 선정(善政)과 덕화(德化)를 펴는 소임이 타도에 비하여 가장 무거 웠다. 세대마다 변천이 있어 관리의 직위와 책무가 달라지고 사람마다 어질며 착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여 정치 또한 같지 아니하니 그 치적과 그 인품을 민몰(泯沒)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므로 이 제명록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여 경상도의 위상과 비중을 부각함과 아울러 영주의 치적(治績)은 후세에 귀감이므로 선비정(善批政)에 구애 없이 그 이름을 모두 남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천명하였다 이어서

“내가 살펴보니 하경재(河敬齋) 연(演)이 공사간 문적에서 자료를 찾아내어 위에 는 년대를 싣고 중간에는 방백(方伯:영주(營主) 아관(亞官)그리고 그 아래 영 리(營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록하여 영주록을 작성하였다. 고려 문종32년 (1078)무오년부터 시작하여 조선 세종6년(1424)갑진년 까지 작성하였으며 이 로부터 세대마다 빠짐없이 기록하여 오다가 선조25년(1592)임진년에 이르러 경상도가 왜로(倭路)의 요충에 처하여 혹심한 병화의 피해를 입어 옛 서적과 물려받은 기물들이 모두 불타고 부서져서 남은 것이 없었으니 어찌 이 제명록 만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경주의 관리 최락(崔洛)이 그 난리 속에 생명 을 겨우 구해가면서도 이 한편을 숨겨 지켜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다.”

라고 하여 김지남 본 작성이전까지의 보존 경위를 밝혔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 경주 관아의 호장(戶長)최락(崔洛)이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문헌들을 기림사(祇林寺)로 옮겨 보관할 때 이 서책 또한 같이하여 온전하였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광해 13년(1621) 겨울에 내가 왕명을 받들어 이 경상도를 수재(守宰)하게 된 다음해 봄에 감영안에 노리(老吏) 오일섭(吳一燮)이가 이 제명록을 나에게 바치 니 그의 뜻은 이 기록을 보완하여 영구히 전하고저 하는데 있었다.

드디어 지필(紙筆)을 구해오고 서리(書吏)들을 불러 모아 하나같이 구록(舊錄)에 의하여 4절을 베끼니 원본과 합하여 5질이 되었다. 옛날에는 계림(鷄林※경주) 이 본영이었으니 이 원본은 본영에 보관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대구(달성達城)가 본영이므로 원본과 사본1질은 본영에 보관하고 나머지 3질은 3대읍인 경주, 상 산(商山), 화산(花山※안동의 속명)에 각 한질을 보관하게 하였으니 이는 설사 혹 후일에 변고가 있더라고 네 곳에 보관한 것이 모두를 잃어버리지 아니하여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김지남본>은 1622년(광해14)에 간행하였는데 <하연본>이후 계속하여 기록하고 있던 것을 보완하였음을 밝혔고 중요한 기록인 만큼 여러부를 베껴서 큰 고을 관아에 분산 보관토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지남본>이전에는 구록(舊錄) 한 권뿐이었음을 암시하여 김 관찰사의 철저한 사명을 엿 볼 수 있다.

이후 경주박물관에 보관된 <하연본>과 상주에 보관된 <김지남본>외에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상주<김지남본>은 책의 말미에 “尙州牧置”(상주목치)라고 하여 상주목 관아에 둔 것이라는 것을 밝혀 두었고 책 표지에 “丙辰仲秋改莊”(병진중추개장)이라 쓰여 있어 1676년(숙종2)에 새로 다시 꾸몄음을 표기 하였다. 이책은 이후 언제 부터인지 상주향교에서 보관하다가 지난 2011년에 상주 박물관에 위탁 보관중이다.

이 책의 규격은 가로39cm, 세로83cm, 두께가 7.5cm이고 무게가 약 9kg에 이르는 대형서책으로서 한면(面)이 8간(間)으로 되어있고 표지는 초록색 비단으로 장정(裝禎)하였다.

총매수는 120매(240페이지)인데 뒤에 2장은 백지(白紙)상태이다. 마지막 관찰사로 기재된 분은 1886년(고종23)병술에 부임한 이호준(李鎬俊)공인데 부임일자는 적혀있으나 퇴임 날자와 전출(轉出)등에 관한 기록은 없다.

1886년은 갑신정변(1884)이후 2년째가 되는 해로 정변과 함께 일본, 중국 등 외세가 각축하여 지방행정에도 기강이 문란해졌기 때문에 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본다. <김지남본>의 글씨체를 보면 광해군 11년(1619)이전 정조(鄭造) 관찰사 까지는 같은 글씨체이고 김지남 본인 시대부터는 왕대별 또는 관찰사 도임순서에 따라 다른 글씨체로 차례차례 기록하였다. 따라서 현존<영주체명록>은 구본에 의거하여 한사람이 정리하였고 <김지남본> 자신부터 왕대별 또는 관찰사 역임순서대로 매번 기록한 것으로서 생생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더더욱 소중하다고 하겠다.


3. <경상도 선생안>의 내용

가. 경상도 도 이름 변천사

“경상도” 명칭은 고려 충숙왕 원년(1314)에 명명(名命)하였다. 신라를 개국한 경주와 사벌국의 터전이요 교통의 요충지인 상주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이름 한 것이다. 경상도 도명이 있기 이전의 명칭도 여러번 바뀌었으나 대체적으로 경 ․ 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변천 되었다. 참고로 ‘경상도’ 이름 변천사실을 표로 요약하기로 한다.

경상도 도 이름 변천사

년 대

변 천 사 실

995년(고려성종14)

․ 상주관할 : 영남도(嶺南道)

․ 경주와 金州(금주:김해) 관할 : 영동도(嶺東道)

․ 진주관할 : 산남도(山南道)

1106(고려예종1)

․ 경상진주도 (경주, 상주, 진주)

1171(고려명종1)

․ 경상주도 (경주, 상주), 진 합주도 (진주, 합천)

1186(고려명종16)

․ 경상주도

1204(고려신종7)

․ 경, 상, 진, 안동도(경주, 상주, 진주, 안동)

1314(충숙왕1)

․ 경상도

1408(태종8)

1416(태종16)

1519(중종14)

․ 경주안동도(경주, 안동), 상주진주도(상주, 진주)

․ 경상좌도 , 경상우도

․ 경상좌도(경주), 경상우도(상주)분리

같은 해에 다시 합침

1592(선조25)

․ 경상도(경주) 경상우도(상주)분리 1593년 다시 합침

1895~1896

․ 대구부, 안동부, 진주부, 동래부로 개편

1896(고종33)~현재

․ 경상북도(대구), 경상남도(진주)로 개편

태종무자(1408)에 경상도는 땅이 넓고 군무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경주안동도와 상주 진주도로 호칭하였고, 동왕16년(1416)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왼쪽을 경상좌도 강의 오른쪽을 경상우도로 했으나 감사만은 종전대로 한사람으로 하여 경상도 도관찰출척사로 하였다.

태종13년(1413)에는 경상도 상주목관할인 보은, 옥천, 영동, 청산, 황간을 충청도에 이관하였다. 중종14년(1519)에 다시 경상 좌 ․ 우도로 분리하였다가 폐단이 많아 다시 통합 하였고 선조11년(1583) 다시 좌 ․ 우도로 분리하여 좌도감영은 경주에 우도 감영은 상주에 두었다가 그해 다시 혁파하였다.

경상도는 낙동강 유역의 광활한 평야지에 물산이 풍부하고 뿐만 아니라 퇴계를 정점으로 하는 영남학맥에 출중한 현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예나 지금이나 국가동력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리 인문적 여건에 따라 지역을 통할하는 관찰사의 위상은 더더욱 컷다.

. <경상도 선생안>의 직명 변천

<경상도 선생안>은 경상도 관찰사의 명단을 적은 기록임을 앞에서도 서술하였거니와 별칭으로 이 책의 원명(原名)과 같이 영주(營主)또는 감사(監司), 도백(道伯), 번신(蕃臣), 방백(方伯), 순상(巡相), 외헌(外憲), 순사(巡使), 영문선생(營門先生)등으로 널리 불리어졌다. 특별히 경상도 영주는 영남백(嶺南佰), 영백(嶺伯), 남백(南伯)등 약칭으로도 통용하였다.

이 책에는 고려초기 문종32년(1078)부터 조선말기 고종 23년(1886)까지 모두 962명의 영주와 중앙의 왕이 파견한 하위직으로 경력(經歷)42명과 도사(都事)659명이 수록 되었으며 이하 영주(營主)에게 부속된 영리(營吏)의 이름을 병기 하였다. 왕조별 왕대별 영주제명의 원수(員數)를 집계한바 다음과 같다.


경상도 영주 제명록 집계표

○ 고려시대의 제명록

영주제명

(營主題名)

왕대벌(王代別)

원수(員數)

최초년도

재위기간

기명(記名)

허명(虛名)

도부서사

(都部署使)

문종 32 (1078)

선종 1 (1084)

헌종 1 (1095)

숙종 1 (1096)

예종 1 (1106)

36

11

1

10

17

11

21

2

19

12

1

1

1

안 찰 사

(按察使)

예종 7 (1112)

인종 1 (1123)

의종 1 (1147)

명종 1 (1171)

신종 1 (1198)

희종 1 (1205)

강종 1 (1212)

고종 1 (1214)

원종 1 (1260)

충열왕 1 (1275)

17

24

24

27

7

7

2

46

15

34

22

49

47

57

14

15

4

49

24

51

1

2

6

제 찰 사

(提察使)

충선왕 1 (1309)

충숙왕 1 (1314)

충혜왕 1 (1331)

충숙왕복 1 (1332)

충혜왕복 1 (1340)

충목왕 (1345)

충정왕 1 (1349)

공민왕 1 (1352)

5

17

1

8

5

4

3

23

6

15

2

9

8

7

6

19

1

안 렴 사

(按廉使)

공민왕 13 (1364)

우왕 1 (1375)

23

14

20

19

2

7

도관찰출척사

(都觀察黜陟使)

창왕 1 (1388)

공양왕 1 (1389)

도사(都事) 2명

경력(經歷) 1명

1

2

1

3

28 왕대

512

22

영주제명

왕대별

원수(員數)

최초년도

재위

기간

영주

(營主)

경력

(經歷)

도사

(都事)

기타기록

안렴사

태조 1 (1392)

7

1

세종 5년 겸감창안집 전수권농관학사제조 형옥병마공사 업무는 경직(京職)과 겸직을 금하고 관찰사직명에서20자를 삭제

경상도관찰사의 직인을 새로 만들어 구인과 교환함.

중종14 (1519) 본도를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낙동강 동쪽은 좌도로 낙동강 서쪽은 우도로 나누어 시행하다가 같은 해 다시 합하였다.

안렴부사

태조 1

1

도관찰

출척사

태조 2 (1393)

정종 1 (1399)

2

6

2

4

1

3

1

안렴사

태종 1 (1401)

18

2

도관찰

출척사

태종 2 (1402)

세종 1 (1419)

문종 1 (1450)

단종 2 (1454)

32

2

3

20

30

2

2

14

13

4

18

6

3

관찰출척사

세조 1 (1455)

13

3

4

4

도관찰

출척사

세조 5 (1459)

9

5

4

관찰사

세조 11 (1465)

1

1

수(守)

관찰사

세조 12 (1466)

1

1

행(行)

세조 13 (1467)

예종 1 (1469)

1

2

1

1

관찰사

예종 1 (1469)

성종 1 (1470)

25

1

1

1

행(行)

성종 2 (1471)

1

1

겸(兼)

관찰사

성종 3 (1472)

5

5

관찰사

성종 8 (1477)

5

6

행 관찰사

성종 12 (1481)

1

관찰사

성종 13 (1482)

4

4

행 관찰사

성종 16 (1485)

1

1

관찰사

성종 18 (1487)

3

3

행 관찰사

성종 21 (1490)

1

1

겸 관찰사

성종 22 (1491)

2

2

관찰사

성종 24 (1493)

연산 1 (1495)

중종 1 (1506)

11

39

3

11

33

2

10

32

겸 관찰사

중종 38 (1543)

1

1

영주제명

왕대별

원수(員數)

최초기록

재위

기간

영주

(營主)

경력

(經歷)

도사

(都事)

기타기록

관찰사

인종 1 (1544)

1

1

2

선조25년(1592) 8월 본도에 왜적이 창궐하여 도로가 불통하므로 좌 · 우도 관찰사겸, 순찰사로 삼다가 그 다음해(1593)다시 합하였다가 선조28년(1595)을미년에 땅이 넓어 다스리기 어려워 다시 좌 · 우로 나누었다가

다음해(1596) 병신년다시 합하였다.

※영주제명 앞에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관직의 품계를 기록한 이후 자헌대부 통정대부 등으로 계속 기록되었다.

※영조50년(1774)년부터 영주제명 앞에 대부(大夫)로만 표기 하다가 정조 4년(1780)부터 다시 가선대부 또는 통정대부라는 품계를 기록 하였다.

겸 관찰사

명종 1 (1545)

22

1

1

관찰사

명종 1 (1546)

25

27

겸 관찰사

선조 1 (1568)

41

2

1

관찰사

선조 2 (1569)

2

2

겸 관찰사

선조 5 (1572)

1

1

관찰사

선조 5 (1573)

20

27

겸 관찰사

선조 23(1590

2

2

좌도 관찰사

선조 25(1592)

1

2

우도 관찰사

선조 25 (1592)

2

1

관찰사

선조 27 (1594)

1

2

우도관찰사

선조 28 (1595)

1

1

관찰사

선조 29 (1596)

1

2

겸 관찰사

선조 31 (1598)

1

1

관찰사

선조 31 (1598)

1

1

겸 관찰사

선조 31 (1598)

1

1

관찰사

선조 32 (1599)

1

1

행 관찰사

선조 33 (1600)

1

2

관찰사

선조 34 (1601)

광해 1 (1609)

인조 1 (1623)

효종 1 (1649)

현종 2 (1661)

숙종 1 (1675)

경종 1 (1721)

영조 1 (1725)

정조 1 (1777)

순조 2 (1802)

헌종 2 (1836)

철종 1(1850)

고종 2 (1865)

14

27

10

15

46

4

52

24

34

15

14

32

6

14

28

11

12

38

6

41

19

21

10

12

11

8

21

47

24

28

85

9

95

48

60

25

25

.

450

41

657

○ 조선시대의 제명록

위 표에서 보는바 고려때 처음 관직명은 도부서사(都府署使), 안찰사(按察使), 제찰사(提察使), 안렴사(按廉使),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등으로 영주의 이름이 변천 되었고 고려중기 예종 년간으로 부터 충열왕까지는 안찰사였다. 그리고 비교적 왕권이 안정되었던 이때가 영주의 기명(記名), 원수(員數)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영주 제명 중에 보직자의 이름이 없고 빈칸으로 된 경우가 모두 22원(員)인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고려말 공양왕대에는 도관찰출척사라 제명하고 도사(都事)와 경력(經歷)을 하위직으로 보임 하였다.

고려 말기 공양왕 시대까지의 영주는 5품 이하의 낮은 관직자로 봄 · 가을마다 6개월씩 도내의 주현(州縣)을 순찰하고 규찰하는 왕이 파견한 경관직(京官職)으로 지방의 사정을 왕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가졌을 뿐 지방의 비리를 알았어도 지방수령에게 벌을 주거나 출척(黜陟) 하는 등 직접 해결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창왕 때부터 고려의 끝 임금이었던 공양왕까지 4년의 기간에는 영주의 권한을 강화하여 도관찰출척사로 임명하는 동시 영주의 품계도 정2품의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승격하고 “겸 감창 안집 전수 권농관학사 제조 형옥 병마공사(兼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提調刑獄兵馬公事)”라고 하는 임무를 겸하였으니 학사(學事)와 권농 그리고 세곡을 운반 보관하는 것과 죄인에게 형벌을 주며 군무(軍務)에 따른 병권을 행사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태조가 조선을 개국 하면서(태조원년 6월) 고려 공민왕대에 제명이었던 안렴사로 하였다가 같은 해 10월에 다시 안렴부사(按廉副使 )라는 제명에 앞의 고려 말 겸직을 그대로 하고 익대개국공신보공장군천우위대장군(翊戴開國公臣保功將軍千牛衛大將軍 )이라는 아주 높은 품계의 인물을 보임하였다. 이와 같이 높은 품계는 조선을 개국 하면서 공을 세운 훈구 척신 세력임을 알 수 있고 이에 따라 지방 영주의 권한 또한 막강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의 영주는 기본적으로 외관직(外官職)이고 정2품의 높은 직위로서 1년 임기로 감영에 머물면서 직접 지방 행정을 관장하였다. <경상도 선생안><하연본>에 하연 관찰사가 기록한 「경상도 영주 제명기서(慶尙道 營主題名記序)」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서 고려 초기에는 제상들을 여러도에 절도사로 파견하여 그 지방들의 행정을 전행(專行)또는 견제(牽制)하여 수령들의 승임과 면직을 직결(直結)하게 하였다가 그 뒤에는 이를 고쳐서 3품 이하의 관리로 도부서사, 안찰사, 안렴사 등으로 임명하여 제반 업무를 규찰하게 하니 그 임무가 막중하였다. 려말에 이 르러 조정의 기강이 퇴폐하여 원수(元帥)로 부터 진관(鎭管), 목사(牧使), 부사(府 使)에 이르기까지 왕명을 시행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직급이 낮은 사람이라 하여 작은 절차까지도 싫어하고 기피하며 조금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기색이 없으며 직무의 봉행마저 삼가지 않으니 안찰사는 한갓 구차하게 부서(簿 書)에 전곡(錢穀)의 출납이나 점검하는데 그치고 중요한 행정을 살피거나 수령들 의 승진 파면 등 인사에 간여하는 일은 생각조차 못하니 기강이 무너지고 질서가 흐트러져서 거의 무법천지의 혼란에 빠졌다. 조선 태조가 고려 우왕 14년(1388) 무진에 의거로서 위화도 회군을 한 뒤 퇴폐한 국정을 혁신하기 위하여 양부(兩 府) 이상의 고관으로 도관찰출척사로 삼고 조정의 관원 중에서 선택하여 경력 (經歷)과 도사(都事)로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군과 민의업무를 통찰하고, 능력 과 치적을 점고하는, 법에 따라 2품 이상의 고관이 죄를 범했을 때는 감옥에 가 둔 뒤 벌을 상부에 신청하고, 3품 이하의 관원은 법률에 의하여 직결처단하며 또 안렴사를 서로 경질하고 파견하는 제도를 실시하며 퇴폐 된 기강을 떨쳐 일어나게

하므로 오늘의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어찌 성적(盛績)이라 아니하리오.”

라고 하여 고려 말에 와서 중앙정부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지방의 기강도 따라서 문란해 졌고 군정과 민정을 살피는 안렴사의 위상이 떨어지므로 하여 뒤늦게 창왕과 공양왕 대에 기울어져가는 국운에 나라와 지방의 기강을 세우고자 했으나 바로서지 않아 태조 이성계의 조선 왕조에 와서 국정이 바로 서게 되고 지방 또한 기강이 확립되었음을 서술한 것이다. 태조2년 민개(閔開) 영주부터는 도관찰출척사로 제명하고 품계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2품급으로 하였으며 태종이 등극하는 초기에 다시 안렴사로 제명 하다가 같은 해 다시 도관찰출척사로 제명하고 품계를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하며 “지의 정부사 판예조사 집현전 대제학(知議政府事判禮曺事集賢殿大提學)”이라는 직함을 덧 붙였다.

이처럼 영주의 제명(題名)과 품계 그리고 겸직의 직함을 모두 기록 하므로 하여 명록(名錄)이 길어서 태종2년(1402) 이문화(李文和) 관찰사의 경우는, “도관찰출척사자헌대부 겸 감창 안집전수 권농관학사 제조 형옥 병마공사 지의정부사 판예조사 집현전 대제학 이문화(道觀察黜陟使資憲大夫兼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提調刑獄兵馬公事知議政府事判禮曺事集賢殿大提學李文和)”라고 하여 무려 48자에 이른다.

세종 5년(1423)에는 이조(吏曹)의 공문에 의하여 도관찰출척사라는 제명아래에 덧붙였던 “겸감창 안집전수 권농관학사 제조 형옥 병마공사兼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提調刑獄兵馬公事)” 라는 20자를 삭제하였다.

태종8년(1408) 이원(李原) 관찰사부터 태종12년(1412)까지 안순(安純), 안등(安騰), 한옹(韓雍)등 4대의 관찰사는 상주목사를 겸직하였는데 이 사실은 뒤에 상론하기로 한다. 이후의 영주 제명은 세조 초기까지 관찰출척사, 도관찰출척사로 칭하다가 세조 11년부터는 맨 끝 고종 때까지 관찰사로 일관하였다.

다만 관찰사 앞에 수(守) 또는 행(行), 그리고 겸(兼)자를 덧붙인 경우가 있는데 수, 와 행자를 붙인 것은 조선시대 관직의 행수법(行守法) 을 말하고 겸자는 글자 그대로 겸직을 뜻하는 것이다.

중종 14년(1519)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을 좌도로, 서쪽은 우도로 나누어 시행하다가 같은 해 다시 합친바 있고 성종1년(1470)에는 관찰사의 직인을 조정에서 새로이 만들어 구인(舊印)과 교환하였다.

세종 6년(1424) 하연(河演) 관찰사 때는 제명 끝부분에 작은 글씨로 본가와 외가 등 출신 신분과 전출(轉出)관직을 기록 하였고 그 다음해부터는 제명 끝에 도임 및 전출일자를 기록 하였는데 이와 같은 관행은 책의 말미까지 계속되었다. 선조25년(1592) 임진 8월에는 임진왜란으로 도내에 왜적이 창궐하여 도로가 불통하므로 좌, 우도로 나누어 관찰사를 임명하다가 다음해에 다시 합하였고 선조27년(1594) 을미 2월 27일에는 경상도의 구역이 넓어서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해서 또 다시 좌, 우도로 나누었다가 다음해(1595)에 또 다시 합하였다. 성종3년(1472) 윤필적(尹弼啇)관찰사부터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와 순찰사(巡察使)를 겸하였고 숙종10년(1684) 윤지완(尹趾完)관찰사부터는 일관되게 대구도호부사(大丘都護府使)를 겸하였다.


다. 경력(經歷), 도사(都事)의 기명(記名)

경력과 도사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주요부서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원으로서 경력은 4품직이고 도사는 고려시대에는 7품직이었다가 조선시대에는 5품직이었다. 지방감영에 경력과 도사 관직은 관찰사의 보좌관으로, 왕이 파견한 중앙관료로 경력은 군사 행정을 도사는 관리의 규찰 등 일반 행정을 담당하였다.<경상도선생안>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경력과도사직은 고려말기 창왕1년(1388)에 처음 기록 되었으나 보임된 사람의 이름이 없다가 공양왕 3년(1391) 안익(安翊)도관찰출척사때에 경력 이문화(李文和)와 도사 남금(南琴)이 기명(記名)되었다.

이후 조선이 개국되기 이전 이거인(李居仁)관찰사 때까지는 도사직만 유지하다가 조선 개국 초에는 경력과 도사직 모두 폐지되었다. 조선 태조 3년(1394)에 다시 도사직이 부활되었고 태조 5년(1395)에는 경력과 도사직 모두를 두게 되었다가 이후에는 경력 또는 도사만을 두거나 경력과 도사 모두를 두는 것으로 변천되었는데 경력직은 세조10년(1464) 정문형(鄭文炯)관찰사때 정충기(鄭忠基)공이 마지막으로 기명되었다. 도사직은 이후 끝까지 직제는 유지되었으나 철종14년(1863) 박래붕(朴來鵬), 백봉삼(白鳳三)도사까지만 기명되었다.

경역과 도사의 보직 인원은 세종 28년(1446) 김조(金銚)관찰사때 김영원(金永源)도사까지는 각각 한 사람을 보직하였으나 세종29년(1447) 민공(閔恭)관찰사때에는 김윤복(金閏福), 신전(愼詮), 조계팽(趙季砰)등 3명의 복수 도사를 보직한 후 복수 또는 단수를 거듭 하였는데 대개 조선중기에는 단수가 많고 조선 말기에는 3~4명이 기명된 경우가 많다. 경력과 도사의 기명(記名)을 살펴보면 이름 앞에 품계를 먼저 기록하였다. 고려 말에는 봉순대부(奉順大夫), 통직랑(通直郞), 조봉랑(朝奉郞)등의 품계이고 조선시대에 와서 경력직의 경우 태조2년(1393) 민개(閔開)관찰사때 처음으로 보직을 받은 최득경(崔得冏)의 이름 앞에 “전봉정대부삼사우자의(前奉正大夫三司右咨議)”라는 품계 및 전력(前歷)을 기록하였고 이후 이와 같은 관행이 이어진 경우도 있고 이름 앞에 봉순대부, 봉정대부, 통정대부, 봉열대부, 조봉대부, 조산대부등 품계만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별히 태조 4년(1395) 심효생(沈孝生)관찰사때 경력으로 역임한 전백영(全伯英)공은 품계가 정3품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니 조선개국초에 지방 군권(軍權)을 관리하는 중요성을 부각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도사직의 기록은 성명 앞에 통직랑(通直郞), 조봉랑(朝奉郞), 통덕랑(通德郞), 봉직랑(奉直郞), 승의랑(承義郞), 통선랑(通善郞), 봉훈랑(奉訓郞), 선무랑(宣務郞), 선교랑(宣敎郞)등 관직의 품계를 먼저 기록 하다가 세종 6년(1424) 이숙무(李叔畝)관찰사때의 박융(朴融)도사부터는 “도사통덕랑이조정랑박융(都事通德郞吏曺正郞朴融)” 이라고 하여 경상도 도사로 도임하기 전에 이조정랑 벼슬을 지낸 전력(前歷)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의 관행은 세종14년(1432) 신인손(辛引孫)관찰사때 까지 이어지다가 이후에는 전력(前歷)을 기재하지 않았는데 이 관행은 세조1년(1455)까지 계속 되었다.

전력기록이 없고 품계만 있는 것은 신규 채용자 일수도 있으나 그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경력과 도사직 기명(記名)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도임된 날자와 이임(離任)된 날자 및 이임 보직을 기록하였다.


라. 영리(營吏)의 기명(記名)

영리(營吏)는 감영(監營), 군영(軍營), 수영(水營)에서 행정업무를 보던 실무관원으로 고려말 창왕1년(1388) 장하(長夏)관찰사 때부터 기록되었다. 이때 기록은 최운(崔雲), 김신을(金臣乙), 이응(李應), 김인좌(金仁佐), 손권(孫權), 최잠(崔潛), 최공(崔公), 김상고(金商皐), 김조(金朝), 김언(金言), 김칭(金稱), 이령(李寧), 최순(崔淳), 이표(李表)등 14명의 이름만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왕조 및 왕대의 관찰사 또는 경력, 도사직이 바뀌는 것에 불구하고 계속하여 기록된 경우가 많다. 영리는 대개 6방(房)관속을 말하는데 관찰사 밑에 행정조직의 부서별 책임자로 신분적으로는 문과에 응시 제한을 받는 등 신분상승에 제한을 받았으나 이들 또한 막강한 권력자였다.

조선조에 와서도 고려때의 영리를 계속 임용하였는데 세종 9년(1427) 최부(崔府)관찰사부터 세조 1년(1456)까지는 영리의 제명(題名)기록이 없다가 세조 3년(1457) 이극배(李克培) 관찰사와 이후 김순(金淳), 김연지(金蓮枝)관찰사 때에 다시 기록되었고 이후 성종 16년(1485)까지는 기록, 무기록을 반복하였다가 성종 20년(1489) 김려석(金礪石)관찰사 이후부터 끝까지 기록되었으나 경종 1년(1721)부터는 이름은 없고 단지 “영리(營吏)”라고만 기록되었다. 영리로 기록된 이름의 원수(員數)는 대개 20여명이나 많을 때는 30여명인 경우도 있다.

성종 1년(1470)이서장(李恕長)관찰사때의 영리 제명은 경주 · 안동 · 상주 · 진주 · 창원 · 성주 · 김해 · 울산 · 함안 · 협천 등으로 나누어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경주의 경우는 7명, 상주의 경우는 4명 함안, 협천은 각1명으로 기록 되었다. 이와 같이 지역별로 나누어 기록된 것은 도내 주요 부 · 목 · 군 · 현의 행정 비중에 따라 영리의 직무를 나누어 관장하는 일정의 지역분담제 행정을 뜻한다고 하겠다. 영리의 성명(姓名)을 보면, 고려말 조선전기의 이름들은 운(雲), 응(應), 언(言), 순(淳), 표(表), 잠(潛), 종신(從信)등 사람의 성격 또는 인품등을 그대로 표현하는 천한 이름이었다가 조선 중후기로 오면서 바른 이름으로 변천되었다.

이러한 이름의 변천은 영리 이속의 지위와 인권이 세태가 발전 할수록 높아졌음을 엿볼 수 있다.


4. 경상도 관찰사와 상주목사 겸직 사실

경상도라는 이름은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를 취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경상도는 고려 현종 3년(1012)경 오도양계(吾道兩界)가 성립되면서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가 합처져 경상도가 되었고, 고려 문종 32년(1078)경상도에 도부서사(都府署使)를 처음 파견 하였다.

고려 예종 1년(1106)에는 경주와 상주 그리고 진주를 거점으로 한 경상진주도를 만들었으며 고려 명종 1314년(1171)에는 경상주도 그리고 진주 협천을 거점으로 하는 진협주도를 분리하였다. 고려 명종 16년(1186)에 다시 경상주도로 합쳤다가 고려 신종7년(1204)에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고려 충숙왕 (1314)년에 ‘경상도’라는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상주를 뜻하는 상(尙)자가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상주의 위상과 역할이 그만큼 컷음을 말해준다. 조선이 개국하면서(1392) 도관찰사 출척사의 감영을 경주에서 상주로 옮겨 도정(道政)을 펴게 하므로 조선 초기 상주의 위상은 더욱 높고 컷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관찰구역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뿐 만 아니라 충청도의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청산에 이르기 까지 경상도 관할이었으니 경상도 본영(本營)으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위상을 가히 알만하다고 하겠다 태종 8년(1408)에 이르러 경상도 도관찰출척사가 상주 목사직을 겸임하여 태종 12년(1412)까지 4년 동안 4명의 관찰사가 역임하였고 이후 문종과 단종년간에 3명의 관찰사가 겸임하였는데 그 명록(名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관찰사 겸 상주목사 명록(名錄)

관찰사

이름

재임기간

하위관원

기타기록

경 력

도 사

영 리

이원(李原)

태종8(1408)

무자 8월~

태종9(1409)기축8월

상·동

(上·同)

신축(辛丑)제찰사(提察使) 강(岡)

지자(之子)

안순(安純)

태종9년 기축 8월~태종11년

신묘 6월

유 면

(兪 勉)

상·동

(上·同)

안등(騰騰)

태종11년 신묘 5월

태종12년 임진 6월

최자해

(崔自海

상·동

(上·同)

한옹(韓雍)

태종12(1412)임진

6월~태종14(1414)

갑오7월

(조봉대부)

朝奉大夫

송 진

(宋 眞)

상·동

(上·同)

이인손

(李仁孫)

문종1년(1450)

1월~문종2년(1451)

조계팽

(趙季砰)

김계희

(金係熙)

강자신

(姜子愼)

예조참의 래(來) 임신2월 형조참의

거(去)

이숭지

(李崇止)

문종2년(1451)~

단종2(1454)

홍경손

(洪敬孫)

최선복

(崔善復)

이효장

(李孝長)

김 순

(金 淳)

단종2 7월(1454)~

8월

이효장

형조참의래(刑曹參의來)강원감사 이거(移去)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임한 것은 조선 전기 태종 년간 4년 동안에 시행하다가 40여간은 중단되었고, 문종과 단종 년간에 다시 4년간 시행되었다. 목사라는 직임은 백성들의 최일선에서 세세한 업무를 수행하는 목민관으로 관찰사가 그 임무를 겸하여 보살핀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위 관원으로 태종 년간에는 경력직이고 문종, 단종 년간에는 도사직뿐인 것은 무슨 연유 였는지 연구과제다. 경상도 감영은 이후 선조26년(1593) 성주목 팔거(八莒) 현으로 옮기고, 선조 15(1596)에는 대구로, 선조 32년(1599) 안동으로 옮겼다가, 선조 33년(1601)에 다시 대구로 옮기기까지 도선생안은 상주에 계속 두었으나 목사를 겸임한 사실은 없다.


5. 경상도 관찰사 역임 주요인물

예나 지금이나 경상도는 어느 도 보다도 광활하고 인물과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다. 따라서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 중에는 역사적으로 큰 자취를 남긴 뛰어난 현사들이 많고 그 중에는 상주역사 문화에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여럿이다 <경상도선생안>의 명록(名錄)에 따라 주요한 현사들을 표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현사로 발췌한다는 것은 과문(寡聞)한 필자로서 부당한 일이고 그 기준 또한 모호하다 하겠으나 통설에 따라 객관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물을 말함을 우선 밝혀둔다.


가. 고려시대의 주요 인물

성 명

재임기간

비 고

김영후(金永煦)

충숙왕17(1330) 경오년 춘하(春夏)

정몽주(鄭夢周)

공민왕23(1374) 갑인년 추동(秋冬)

김영후 공은 안동김씨로 고려충숙왕14년(1327)에 상주목사를 역임하다가 동왕 17년에 경상도 제찰사로 승차하였다.

공은 상주목사 재임시 상산관(商山舘)을(경북도지정유형문화재 157호 1982. 2. 24)고쳐 지은 공적이 있다.

정몽주는 우리가 잘 아는 포은선생이다. 포은의 벼슬길은 고려말 충신이요 학자였던 상주출신 난계(蘭溪)김득배가 지공거(知貢擧)로서 포은 선생을 천거한 것이 그 연원이었고 난계선생이 홍건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고도 모함을 받아 왕명으로 효수를 당하자, 친히 장례를 치르는 은공을 실천한 바 있다.

그래서 포은을 일러 우리나라 성리학의 조종(祖宗)이라 하고 상주사람들이 영남학맥의 산실로 자부하는 도남서원(道南書院)에 수위(首位)로 배향하였다. 그가 남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단심가(丹心歌)가 유명하거니와 난계가 비명으로 효수당한 것을 슬퍼한 제문(祭文)은 심금을 울리는 명문이다.


나. 조선시애의 주요인물

관직구분

성 명

재임기간

주요이력

관찰사

함부림

(咸傅林)

태종6(1406)

~ 7(1407)

조선전기의 문신, 포은정몽주의 행장을 지었음

관찰사

하 연(河演)

세종6(1424)

~ 7(1425)

세종때 영의정역임<경상도영주제명록>하연본을 남김

관찰사

조 치(曺致)

세종12(1430)

~ 13(1431)

상주목사에서 승차 상주목사 재임시 상주향교 남루를 건립함

고려 우왕때 상주판관 역임

경 력

전 리(田理)

정종1(1399)

풍영루 증건, 상주성 축조 상산관 별관건립

경 력

맹사성(孟思誠)

태조5(1396)

조선전기의 문신 세종때 좌의정을 역임. 호가 고불(古弗)이고 청렴 공직자로 명망이 있음.

도 사

손중돈(孫仲敦)

성종25(1494)

~열산군1(1495)

호는 우재(愚齋) 중종년(1506) 상주목사역임 청백리로 선정 속수서원 배향

관찰사

장순손(張順孫)

중종1(1506)

~ 2(1507)

조선 중기의 문신 호 오재(悟齋)군호 연복군(延福君)상주 풍양조씨 조윤영(趙允零)의 장인

도 사

윤 탕(尹宕)

중종3(1508)

~ 1510

1526년 상주목사 역임

상주목사 재임시 상산관 개축

도 사

채소권(蔡紹權)

중종8(1513)

난재 채수의 자, 호 : 졸재(拙齋) 문장과 기절이 출중 신라 설총의 화왕계(花王戒)에 연맥 될 화왕전 저술, 상주출신

관찰사

손중돈(孫仲暾)

중종1(1516)

~ 1517

성종대에 경상도 도사 역임

상주목사 역임, 기민구휼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건립

관찰사

김안국(金安國)

중종12(1517)

~ 13(1518)

의성김씨 호 모재, 저서로 동몽선습, 모재가훈이 있고 상주향교를 방문하여 소학강의를 함

관직구분

성 명

재임기간

주요이력

관찰사

이현보(李賢輔)

중종31(1536)

~ 32(1537)

영천이씨 자는 비중, 호는 농암

조선중기 시조작가 문신 홍귀달의 문인, 어부가를 지음, 분강서원배향

관찰사

권 벌(權橃)

중종33(1538)

~ 34(1539)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중허, 호는 충재, 시호는 충정이다.

벼슬은 우찬성을 지냄

관찰사

이언적(李彦迪)

중종38(1543)

~ 39(1544)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요 문신, 여주 이씨로 호는 회재

도남서원과 옥산서원에 배향

도 사

김극일(金克一)

명종14(1559)

~ 15(1560)

의성김씨 안동천전출신, 호는 약봉, 학봉 김성일의 형이고 검간 조정의 장인이다.

관찰사

강사상(姜士尙)

명종20(1565)

~ 21(1566)

자는 상지 호는 월포 , 시호는 정정이고 봉대출신이다.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상주출신

관찰사

윤탁연(尹卓然)

선조14(1581)

~ 15(1582)

상주목사에서 승차 형조참판 역임

관찰사

류성용(柳成龍)

선조16(1583)

~17(1584)

상주목사에서 승차 부제학으로 전출, 선조시 영의정, 도남서원, 병산서원 배향

관찰사

김 수(金晬)

선조24(1591)

~ 25(1592)

홍문관 부제학에서 전입, 한성판윤으로 전출

임진왜란 당시 관찰사

도 사

김홍미(金弘微)

선조25(1592)

~ 27(1594)

후계 김범의 자

이조좌랑에서 전입

호는 성극당이고 류운용의 사위다

봉산서원에 배향, 상주출신

도 사

조 즙(趙濈)

선조31(1598)

~ 31(1598)

정언(正言)에서 전입

검간 조정의 자손, 상주출신

관찰사

정경세(鄭經世)

선조31(1598)

~ 31(1598)

우승지에서 전입

호는 우복, 임난 의병참여

대사성, 대제학 역임

도남서원배향, 상주출신

관직구분

성 명

재임기간

주요이력

도 사

조 익(趙翊)

광해2(1610)

~ 3(1611)

검간 조정의 아우

호 가규, 임난 때 충보군 의병에 주역, 진사 일기 남김, 속수서원에 배향, 상주출신

관찰사

김지남(金止男)

광해13(1621)

~ 인조1(1623)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자정 호는 용계

광산김씨, (경상도영주제명록>

본을 남김

관찰사

정 온(鄭蘊)

인조4(1626)

~ 4(1626)

조선중기의 문신

호는 동계(桐溪)자는 휘원,

시호는 문간공이다.

함양 남계서원 배향

관찰사

이관징(李觀徵)

현종14(1673)

~ 숙종1(1675)

승지에서 전입

연안이씨, 식산 이만부의 조부

자는 국빈, 호는 근곡, 시호는 정간공이다.

관찰사

박문수(朴文秀)

영조4(1728)

~ 6(1730)

암행어사에서 승배 전입

대사간으로 전출

자는 성보,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

암행어사 행적 설화 남김

관찰사

조현명(趙顯命)

영조6(1730

~ 8(1732)

조선 후기의 문신 호는 귀록이고 시호는 충효, 영의정을 역임

상주향교를 방문하여 대학을 강의함, 이 당시 향교의 도훈장이 식산 이만부였다.

관찰사

조 엄(趙曮)

영조34(1758)

~ 36(1760)

동래부사에서 전입

부제학으로 전출

자는 명서, 호는 영호(永湖)

시호는 문익공

고구마를 대마도에서 전파했다.

6. 맺음글

하연(河演) 관찰사는<하연본>서문에 이르기를

“제상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는데 있고 사신의 임무는 위의 명 령을 받들어 덕치(德治)를 펴는데 있으니 그 시대 정치의 득실과 생민의 휴척(休 戚)이 이들에게 달려있고 역대의 치난 또한 이 직책에 달려 있으니 어찌 삼가 지 않을 것인가. 여러 전임자들의 옳고 그른(是非) 행적을 참고하여 뒷날 여러 사업에 떳떳하고 아름답게 베푼다면 내가 이 제명록(題名錄)을 작성하는 것이 후래(後來)의 군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랴. 나도 또한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 니 반드시 전임자와 같이 시비(是非)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고 <김지남본>의 김지남(金止男)도 서문에 밝힌 바

고려로 부터 조선에 이르기 까지 앞뒤 515년간에 수록된 사람이 몇이고 그 가 운데 어질고 착해서 능히 직분을 다한 사람이 몇이며, 어질고 착하지 못하여 직 분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 그 몇이고 현자(賢者)와 불현자(不賢者)의 중간에서 찬 양도 나무람도 받지 않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되는가? 나와 같이 노둔하고 용열한 사람도 또한 마땅히 이네 명록에 기록될 것이니 후세에 사람들이 나를 지목하여 어질다 할 것인가? 아니면 어질지 못하다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찬양할 것 도 나무랄 것도 없다 할 것인가? 내가 이를 두려워하노라.

라고 하였다.

두 분은 이글로 공직자(관직자)로서의 자경(自警)으로 삼은바 있다. 바로 나라의 명을 받아 공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두렵고 중하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 재직 중에 항상 공익에 역점을 두고 국민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는 책무를 다하여야 하는 기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이다. 민주 현대사회에서 총리, 장관 등의 청문회을 거치는 과정에 낙마(落馬)를 하여 오명을 남기는 작금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자신들 또한 지난날의 행적을 반성치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거니와<김지남본>“경상도 영주 제명기” 책본의 역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그리고 이 귀중한 책본이 상주에 계속 보관 되었다는 것 또한 큰 뜻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상주의 위상이 도내에서도 그 만큼 높았음을 말하고 경상도 감영이 상주를 떠난 이후에도 계속하여 기록을 하여 보존하였다는 것은 상주 사람들의 역사적 사명감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경상도선생안>은 많은 연구 과제를 남긴다. 필자의 이 글은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뒷사람 누구인가 깊은 연구가 있기를 기대하며 질정을 기다린다.

참고문헌

1. <경상도선생안> 1997년 상주문화원간행

2. 인터넷(두산백과> “경상도선생안”

3. 인터넷<한국민족문화대백과>“선생안”

4. <상주문화연구> 제12집 2002,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