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영남문화재연구원 박 승 규
1.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기반
2. 고고학적 조사의 성과
3. 고고문화 연구의 성과
4. 고고문화 연구의 과제
1.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기반
상주(尙州)는 현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의 북서단에 위치하여, 북에서 동 및 남으로는 경상북도 문경시, 예천군, 의성군, 김천시 등과 접해 있고, 서에서 남으로는 충청북도 괴산군,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등과 접경해 있다. 상주의 지형은 서쪽으로 백두대간 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발원한 지천이 동쪽으로 흘러 평야지대를 지나 낙동강에 합류
한다. 나아가 이들 산지와 하천들이 어우러져 상주분지와 함창분지를 형성하고, 이러한자연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북천, 이안천, 병성천지역을 비롯한 여러 곳에 많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상주의 선사유적으로는 구석기시대의 신상리유적을 비롯하여 청동기시대의 복룡동유적 주거지와 청리유적의 지석묘, 외답동 지석묘군, 헌신동 입석 등이 분포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는 병성동유적의 수혈주거지에서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와 원형점토대토기, 발형토기,두형토기가 발굴되었으며, 원삼국시대에는 사벌면 금흔리의 이부곡토성과 주변에서 와질토기와 주조철부가 수습되어 대 사벌국의 존재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고분군은 상주분지를 중심으로 동쪽 병풍산 가지 능선에 형성된 병풍산고분군, 함창분지의 이안천을 바라보며 형성된 신흥리고분군, 병성천 상류의 청리고분군이 있다. 그리고 이들 고
분군과 더불어 수리시설인 공검지유적과 통일신라시대의 도시유적인 복룡동유적이 고대상주의 역사적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시대 상주읍성의 실체를 보여주는관아유적과 무양동의 건물지 및 제방유적 등은 조선시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상주시가지의 변화상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상의 지리적 환경과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연계하여 상주지역의 고고문화적 기반과 특성을 살펴보면,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교통로의 기능, 상주와 함창분지에 의한 지구분할, 문헌기록에 보이는 사벌국의 존재, 영남 내륙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상주(上州, 尙州)를 들 수 있다. 세부적으로 교통로의 기능에서 보면 낙동강을 끼고 있을 뿐 아니라 백두대간의 조령·계립령을 통해 중원지방과 연결되고 있어서 내륙에 위치하면서도 문화연결지대로서 교통로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또한 상주지역은 낙동강의 본류를 접하고 있으면서도 백두대간 너머의 금강수계, 남한강수계와 이어지고 있어서 문화접촉지대에 의한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리적으로 병성천과 이안천을 따라 상주권과 함창권으로 크게 나누어짐도 지역적 특성의 하나로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문헌 기록에 의해 고대 사벌국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지방도시 상주로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영남지방 내 중심지로서 위치하고 있다.
그간 상주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 성과에 의해 상주의 선사와 고대문화를 해명하는 데 필요한 많은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병풍산고분군을 비롯한 고분 자료와 복룡동의도시유적 자료는 상주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한층 높여주는 발굴자료로 평가된다. 이에 더하여 수리시설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공검지유적은 조사의 한계와 보존 및 활용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또 상주읍성의 조사는 도시 개발과 유적 조사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향후 상주의 고고문화 분야의 발전을 가늠하는데 중요한 갈림길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상주지역의 신상리 구석기유적으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 성과를 살펴보고, 그에 따른 고고문화의 발전을 위한 방향성과 과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2. 고고학적 조사의 성과
상주의 고고학적 조사는 사벌국 관련 유적의 지표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문화유적총람”이 기반이 되었겠지만, 1996년에 상주문화연구소가 발간한 “고대사벌국 관련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가 실질적인 활동으로 여겨진다. 이 지표조사 보고서에는 선사유적, 고분, 산성, 불적 등에 대해 구체적인 조사내용을 담고 있다. 그 후 신상리 구석기유적으로부터 조선시대 무양동 제방유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상주의 고고학적 조사는 국토개발에 따른 발굴이 199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역사 기록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던 사벌국과 상주의 문화사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는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 확보된 고고자료를 구석기, 청동기, 사벌국, 삼국, 통일신라, 고려·조선시대로 나누어 소개하고, 시대별로 대강의 문화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의 자료로는 경상북도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신상리 구석기유적이 있으며, 학사적 의미가 크다. 신상리유적은 상주시 낙동면 신상리 구촌마을 남쪽에 위치하는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한다. 낙동-상주간 국도 25호선의 확포장공사로 인해 2001, 2003년에 조사되었으며, 낙동강과 장천의 합류에 의해 형성된 제4기 퇴적층이 양호하게 남아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유적의 연대는 1문화층이 약 2만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 2문화층이 6~7만년 전의 중기구석기시대, 3문화층이 14~15만년 전의 전기구석기시대로 보고되어있으며, 2,3문화층이 통합될 가능성도 있다. 유물은 모두 석영제로 긁개, 찍개, 몸돌, 망치돌 등 다양하며, 3개의 문화층에서 모두 출토된다. 대부분의 유물에는 사용흔이 잘 남아있어 고인류의 행위 복원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2.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에 앞서 형성되는 신석기유적은 아직 상주에서 발굴된 바가 없다. 그러나 인근의 김천 송죽리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로 보아 병성천 등 하천변의 충적지대에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상주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지석묘와 입석, 주거지를 들 수 있다. 지석묘는 청리유적에서 15기가 발굴되었으며, 2개의 군으로 형성되어 있다. 상석이 하부 석관의 개석 역할을 하는 소위 개석식 지석묘로서 유물은 석검, 석촉, 홍도, 완이 있다. 이외의 지석묘는 헌신동, 부원동, 중덕동 등 10여개소가 알려져 있으며, 지석묘와 유사한 분포양상을 보이는 입석은 부원동, 중덕동, 헌신동, 증촌리 등에 다수 분포한다. 주거지로는 청리유적에서 주거지 1동과 수혈이 발굴되었고, 복룡동유적의 하층에서 장방형 주거지와 원형의 송국리형 주거지가 발굴된 바 있다. 이외에도 무문토기와 석기 등의 유물산포지가 다수 전해지는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사벌국시대(초기철기~삼한)
1) 병성동유적
병풍산의 북서쪽 능선에서 발굴된 수혈유구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가 출토되었다. 발굴된 B-1호는 평면형태가 장방형이고, 규모는 길이 215㎝, 너비 125㎝, 깊이 57㎝인 수혈유구이다. 내부에서는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 원형점토대토기, 주머니호, 발, 두형토기, 유구석부, 탄화미 등이 출토되었다. B-2호는 평면형태가 타원형이고, 규모는 장축203㎝, 단축 146㎝, 깊이 61㎝인 수혈유구이다. 내부에서는 조합우각형파수부호, 원형점토대토기, 삼각형석도, 석부, 무문토기, 미완성석기, 박편 등이 출토되었다.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69 2) 이부곡토성(吏部谷土城)(경상북도 기념물 제127호)사벌국의 고성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진 곳이다. 주변의 지형은 성안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외서천이 남쪽으로 흘러 병성천이 합류되어 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사벌국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이부곡토성에 대한 조사는 1996년 사벌국 관련 지표조사를통해 구체적인 모습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기초조사 및 시굴조사가 1998~1999년에 실시되었으며, 이부곡토성의 입지적 환경과 토성 단면조사 등이 이루어졌다.
토성의 평면형태는 자연구릉의 능선을 따라 전체적으로 ‘C’자 형태이며, 세부적으로는 다섯 개의 면을 이루는 오각형에 가깝다. 토성의 규모는 둘레가 1,239m, 동-서간 330m,남-북간 340m이며, 면적은 약 112,947㎡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토성은 구릉 사면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성벽의 내부는 성벽 상면과 등고차가 없거나 극히 미미하지만 단을 지워 자연사면과 구분하거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주거지 등과 같은 공간으로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릉의 바깥쪽 사면에 성토한 부분은 편축형으로 축조하였으며,성문지는 계곡부로 추정된다. 추정 성문지로 진입하는 길 좌측으로는 계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성문지에 이르면 좌측에는 현재 계곡부를 막아 농수를 확보하기 위한 연못이 위치한다. 성벽은 북쪽과 남쪽의 완만한 구역은 성토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반면 기반암이 노출되어 있고 자연 경사면이 가파른 서쪽과 동남쪽에는 자연 경사면을 성벽으로 그대로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축성 시기는 시굴조사 C구간 트렌치에 출토된 두형토기를 통하여 그 상한은 초기철기시대의 기원전3~2세기경으로 추정할 수 있고 하한은 경질토기로 보아 출토되고 있으므로 4~5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토성 내외부에서 타날문이 시문된 와질토기편, 연질토기편, 경질토기편 등이 채집된다.
3) 양범리 134유적
상주시 이안면 야무진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부지에서 발굴된 주거유적이다. 원삼국시대 장방형 주거지가 분포하며, 유물은 중도식토기, 타날문토기들로서 호, 발, 옹, 시루등이 있다. 이 유적의 주거지 양상은 중부지역의 주거지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상주의 초기철기~원삼국문화가 중부지역과 밀접한 교류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을알 수 있다. 향후 영남지역과 중부지역 간의 문화교류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4) 삼국시대
1) 병풍산고분군
병풍산고분군은 상주시 병성동ㆍ헌신동의 병풍산 일대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고분군으로 병성동고분군, 헌신동고분군, 성동리고분군 등이 해당된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상주시 중심가의 남동편에 위치한 병풍산(해발 365.6m)의 둘레에 해당되는 몇 개의 가지능선으로 병성동고분군이 가장 규모가 크다.
병성동고분군(屛城洞古墳群)은 상주시 병성동 응국마을 동쪽에 위치하는 병풍산의 여러 능선 중 북쪽과 북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일대에 봉분을 갖춘 대형의 고분군을 말한다. 병풍산의 정상 부근에는 둘레 1,770m의 포곡식 산성인 병풍산성이 위치하고 있으며, 병성천은 이 고분군의 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다. 병성동고분은 일찍부터 도굴의 피해를 입어 세간에 알려졌으며, 상주분지의 최고 위계 집단의 고분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는 1999년에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관통하는 병풍산의 서쪽 능선허리부분에서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조사결과 삼국시대 석곽묘 78기, 옹관묘 11기, 석실분 11기, 주거지 4기, 수혈유구 12기가 확인되었다. 석곽묘 중에서 특징적인 것은 선축된 1차 석곽묘의 단벽을 파괴하고 양장벽을연장하여 2차로 석곽을 후축하여 추가장을 실시한 구조이다. 출토유물은 개, 이단투창고배, 단각고배, 파수부배, 단경호, 장경호, 대부완, 기대 등의 토기류와 철촉, 철부, 철겸,철도자, 철모, 등자, 재갈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유적의 형성시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말 정도로 편년된다.
성동리고분군(城洞里古墳群)은 1998년 중부내륙고속도로의 건설에 따라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토광묘 25기, 석곽묘 81기, 옹관묘 3기 등 모두 109기의 삼국시대 분묘가 조사되었다. 또 2001년에는 국도 25호선 확포장공사와 관련한 발굴조사를 통해 목곽묘 3기,석곽묘 150기, 옹관묘 6기, 석실묘 14기 등 모두 173기의 삼국시대 분묘가 조사되었다.
삼국시대 목곽묘는 능선의 중앙부에서 골짜기까지 비교적 일정한 열을 이루며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게 조영되었다. 이들 목곽묘는장방형과 세장방형으로 분류되며, 4세기 중엽경을 전후한 시기에 조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수혈식석곽묘는 5세기부터 조영되며 늦은 시기까지 구조의 변형을 보이며 존속되고 있다. 이들 석곽묘는 추가장의 방
법으로서 시상을 추가로 설치하는 것과 구별되어 먼저 선축된 1차 석곽의 한쪽 단벽을파괴하고 석곽의 장벽을 연장하여 2차 석곽을 축조하였음이 밝혀져 고분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2) 신흥리지구 고분군
이안천이 흐르는 함창분지와 주변 산록을 포함하는 신흥리지구에는 신흥리고분군, 가장리
고분군이 해당된다.
신흥리고분군(新興里古墳群)은 함창읍 신흥리와 증촌리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함창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고분군이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함창분지의 남쪽에 솟아 있는 오
봉산(해발 238m)의 북쪽 능선이며, 일부는 직경 20m 정도의 대형 봉토분들도 확인된다.
신흥리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7년에 상주-점촌간 국도3호선 확포장 공사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71와 관련하여 고분이 분포하는 능선의 말단부를 따라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는 삼국시대에
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분묘 458기와 건물지, 담장지 각 1개소가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분묘는 삼국시대의 목곽묘 150기, 옹관묘 51기, 석곽묘 177기, 석실묘 45기 등 423기와
고려시대 이후의 분묘 35기도 분포한다. 이곳의 목곽묘와 석곽묘에서 출토된 토기 중 장
경호의 점유율이 높은 반면 영남지방에서 보편적인 기종인 고배는 아주 낮은 빈도로 출토
되고 있어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유물 조합상에서도 장경호, 단경호, 연질발이라
는 극히 단조로운 조합상을 보이고 있어 영남지방의 타 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유적
의 형성시기는 목곽묘의 경우 4세기 전반에서 5세기 후반이고, 석곽묘의 경우 5세기 중
엽에서 6세기 후반, 석실분은 5세기 후엽에서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가장리고분군(佳庄里古墳群)은 이안면 가장리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숭덕산(해발
222.8m)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과 산사면에 위치한다. 이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2001년 중부내륙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이루어졌으며, 조사결과 삼국시대 석실분 13기,
고려시대 석곽묘 3기, 조선시대 이후 토광묘 13기, 용도미상의 유구 2기 등 모두 31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적의 형성시기는 석실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았을 때 6세기 후
반부터 8세기 초까지로 추정된다.
3) 청리지구 고분군
병성천 상류의 청리고분군을 중심으로 월로리고분군, 원장리고분군, 청하리고분군 등이
해당된다. 이곳의 중심고분군은 청리고분군이며 인근의 기양산 정상부에는 마공산성이 위
치한다.
상주 청리고분군(靑里古墳群)은 기양산의 북쪽 말단부에 조성된 유적으로 청리면 마공리
일대의 속칭 밀매동산으로 불리는 해발 80~150m 내외의 낮은 구릉성 산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 대한 조사는 1996년 청리지방산업단지 조성에 따른 발굴조사가 한국문화재
보호재단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청동기시대 지석묘 16기, 수혈유구 1기, 삼국시대 고분
217기, 기와가마터 5기, 건물지 1개소 등 모두 889기가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고분은 목
곽묘 63기, 석곽묘 45기, 옹관묘 20기, 석실 89기 등 모두 217기가 확인되었다. 목곽묘
는 능선의 등성이와 서쪽사면에 밀집 분포하는 양상을 보이며, 묘광의 장축방향은 대부분
등고선방향과 평행하게 조성되어 있고, 서로 중복 없이 조영되어 각기 일정한 묘역을 가
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고배, 파배, 대부직구호, 단경호, 발, 철촉, 철겸,
철부 등이며, 유물의 부장상태로는 토기의 경우는 목곽 내부의 단벽쪽에, 철기류는 묘광
중앙부 바닥에 부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곽묘는 평면형태가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이며, 장축방향은 등고선 방향과 대부분 일치한다. 바닥은 할석을 깔아 시상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출토유물은 고배, 개, 파배, 대부
장경호, 단경호, 철촉, 철검, 철부, 도자 등이다. 이 유적에서는 횡구식석실분이 58기, 횡
혈식석실분이 29기가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개, 고배, 단각고배, 단경호, 완, 부가구연
장경호, 편병, 합 등 토기류가 대부분이고, 철도자와 청동과대금구도 있다. 유적의 조성연
대는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중엽으로 편년된다. 청리고분군의 분포양상은 마공리쪽 능선
에 석실묘가 중심이 되고, 용안리의 산사면에는 삼국시대 목곽묘와 석곽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4) 화달리고분군(化達理古墳群)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의 전사벌왕릉 뒤쪽의 독립 구릉상에 분구를 가진 삼국시대 고분군
이 분포하고 있다. 고분은 산정부에서 뻗어내린 능선사면에 동서로 내려오면서 집중적으
로 조성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흔적만 남은 소형 석곽묘들이 배치되어 있다. 봉토가 잘
남아 있는 고분은 직경 15m에 이르고, 작은 규모의 고분은 직경 5m 내외이다. 이처럼
봉분이 있는 고총이 50여기 확인되었는데 봉분 곳곳에서 도굴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 도굴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도굴갱을 통하여 고분의 내부를 살펴보면, 석
곽묘로 대개 편평한 할석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단면은 상부가 축약되는 사다리형으로 그
위를 4~8개의 천정석으로 덮은 모습이다. 또 내부 구조상 병렬의 주부곽식 또는 다곽식
의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지표에서 확인되는 유물로는 단경호와 장경호의 구연부편 등이 있으며, 고분의 내부 구조
가 병풍산고분군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5~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5) 공검지 수리유적
삼한시대 저수지의 하나로 알려진 상주 공검지(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21호) 제방 일부
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공검지 제방의 축조수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성토 공정층과 부엽
공법 및 제방 보강용 목재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제방 유적에서 부엽공법과 목재시설이 함께 확인된 것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규모 및 세부
축조수법 면에서도 고대 수리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는 특징적인 발견이다. 부엽공법(3~
5개 부엽층)은 제방의 성토 공정층 하부에 잔가지류와 나뭇잎을 제방 진행방향 또는 직교
방향으로 3~5개층을 정연하게 켜켜이 깔고 그 사이에는 사질토 등으로 충진 다짐했다.
각 부엽층 사이에는 간간이 보강재를 대고 그 앞에 말뚝을 박아 보강하기도 했다.
또한, 부엽공법은 김제 벽골제, 함안 가야리 제방, 당진 합덕제 등 제방 유적과 서울 풍
납토성, 김해 봉황토성, 부여 나성 등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토성과 제방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공검지 부엽공법은 깬돌이 섞인 사질토를 두껍게
성토 다짐하여 기초부를 견고하게 축조하고 그 위에 시설한 점과 부엽층을 말뚝으로 보강
한 점 등 타 유적에서 발견된 부엽공법과 큰 차이가 있음이 확인됐다.
대규모 목재시설은 제방 성토 공정층 끝단에서 바깥으로 10m 떨어진 지점의 부엽층에서
확인된 것으로 현재 확인된 규모는 너비 5.5~6.0m, 길이 15m(조사구역 바깥으로 확장
가능성)이다. 목재시설은 남단에 직경 25~30㎝, 길이 90㎝ 가량의 통나무를 제방 진행방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73향과 직교방향의 2단(윗단은 밑단보다 20㎝내외로 들여 축조)으로 빈틈없이 깔고, 그 안쪽으로는 단부의 것보다는 작은 직경의 나무를 빈틈없이 깐 뒤 깬돌이 섞인 사질토로 다짐 충진했다. 그리고 목재 단부 앞에는 대략 3렬의 말목을 박고 그 사이로 나뭇가지를 엮
은 보강시설이 확인됐다.
제방 축조는 기초층 조성, 기초보강법 적용, 성토공정, 성토층 외단 보강의 순으로 이루어
졌으며, 제방의 초축시기는 기초보강에 사용된 목재의 연륜연대를 분석한 결과에 의해 7
세기 후반임을 알 수 있고, 개축시기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1129년으로 추정된다.
공검지 수리유적은 공검지 제방 중 부분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으로서 이들 자료는
공검지 제방 축조의 전모는 물론 한반도 고대 수리 토목시설의 변천 및 발전 과정을 밝
힐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6. 통일신라시대
1) 복룡동 도시유적(사적 제477호)
상주시 복룡동 256번지 및 230-3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상주 시가지의 동쪽 외곽에 해
당된다. 유적은 상주의 북천과 병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부터 동남쪽의 평야지대에 입
지하며,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일대가 논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주변유적은 서
쪽으로 상주읍성지, 상주관아지 등이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복룡동 당간지주와 조공제가
있다.
복룡동유적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주택건설에 앞서 3차례 발굴조사(복룡동 256유적,
복룡동 230-3유적, 복룡동 10-4유적)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청동기시대의 주거
지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생활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적심건물지, 우물, 수혈유구, 구상
유구 등 여러 시대에 걸쳐 조영된 생활유구가 주를 이루면서 당시의 취락 모습을 보여주
고 있다. 이들 유구의 배치상태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사벌주(沙伐州) 설치 당시에 적용된
이방제(里坊制)의 공간 구획에 의해 이방도로와 방(155× 155m 크기) 내부의 주거공간으
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공간구성은 조선시대의 읍성 설치 때까지 활용되고 있음이 확
인된다. 발굴된 지역은 사벌주의 도시 일부로서 적심건물지가 밀집된 공간과 일반 가옥의
공간으로 구분되며, 이방제에 따른 도로와 측구인 배수로도 확인된다.
우물은 모두 석조우물로 굴광의 평면은 원형, 타원형, 방형, 부정형의 형태를 보이고 단면
은 대부분 상광하협의 형태를 보인다. 최하단 시설의 재료는 크게 목재 또는 대형할석이
나 아무런 시설을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조사되었는데 대부분 목재를 ‘정(井)’자 형태로
결구하여 사용하였다.
복룡동 230-3유적에서 확인된 구상유구 3기는 동서방향으로 조사구역 경계 밖으로까지
계속 연장되고 있다. 폭의 변화가 심하지 않고 진행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확인되며,
74 | 尙州文化硏究의 成果와 課題바닥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1호는 조선시대, 2호와 3호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
로 여겨진다. 특히 1927년도에 제작된 지형도를 보면, 상주읍성 주변을 둘러싼 해자가
읍성 북동쪽에서 구(溝)를 통해 동쪽으로 흘러가 남천으로 유입되는데, 1호 구상유구가 이
구의 위치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2·3호는 통일신라시대의 이방제에 의한 도
시계획상의 도로에 딸린 측구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옛 상주읍성의 시가지 계획상의
동서 가로망의 방향과 일치하고 구획된 크기와도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통일신
라시대 사벌주의 이방제 흔적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 계획
의 일단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유적의 출토유물은 토․도기류, 와․전류, 자기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토․도기류는 주로 고
려 및 조선시대의 것으로 병, 옹, 호, 완류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와․전류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암․수키와가 대부분이고 수막새와 명
문기와가 수점 있다. 자기류는 고려시대 청자, 백자 및 조선시대 분청자, 백자, 명문자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명문이 새겨진 자기류와 와전류를 비롯하여 벼루, 석구, 추,
어망추, 동물뼈, 삽날형철기, 철송곳 등 생활용품과 관련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당대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복룡동 256유적에서 ‘사벌주(沙伐州)’, ‘답리(沓里)’ 외 다
수의 명문이 새겨진 납석제품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유적의 조성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지방도시계획인 이방제의 시행이 확인되고 있어 사벌
주를 비롯한 9주가 설치된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들 도시유적이 조영되어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구잠리 가마유적
상주시 낙동면 구잠리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 토기생산유적이다. 연도부와 소성부 천장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양호한 상태로 발굴되었으며, 토기가마 3기와 회구부를 비롯하여
석실묘 1기도 함께 발굴되었다. 토기가마의 구조는 반지하식으로 연소실 앞부분에 원형의
요전부와 배수로가 갖춰져 있다. 회구를 이루는 폐기장은 가마의 남쪽에 형성되어 있으
며, 출토된 토기는 인화문토기의 유개대부완, 호 등으로서 이들 출토유물로 보아 가마의
조업연대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7. 고려·조선시대
상주지역의 고려시대 자료는 복룡동유적과 청리유적에서 조사되었다. 복룡동유적에서는
건물지, 수혈, 우물 등이 다수 조사되었으며, 이들은 통일신라 이후 지속적으로 생활권역
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리유적의 토광묘에서는 청자류가 다수 발굴되었다. 고
려시대의 고고자료는 드문 편으로 앞으로의 추가 조사가 기대된다.
조선시대는 상주읍성이 축조되고 경상감영이 설치됨으로 인해 현재의 시가지 일대에서 당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75대의 고고자료가 많이 확인되고 있다.
상주 왕산역사공원 조성부지내 유적의 발굴조사에서 관아시설에 해당되는 적심건물지 1동
과 기단건물지 1동, 연못 2기, 수혈유구 15기, 우물 3기, 공방시설 1기, 도로유구 2개소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백자류, 기와류, 금속유물, 목재유물 등 80여점이 출토
되었다. 조사대상지의 북편으로 동-서 방향의 도로가 확인되었고, 관아의 북쪽 경계로 볼
수 있다. 특히 연못유구 2기는 문헌과 고지도에서 전해지는 읍성 내부의 연못자료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관아시설 내부에서 잔존상태가 양호한 연못유구가 확인된 점은 의미
가 있다. 또 관아시설 중 고지도와 문헌에 표기된 건물들(이향정, 동헌으로 사용한 군자
헌, 청량각 등)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건물지와 연못유구, 도로유구는 왕산 주변으로 관아시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뒷
받침 하고 있으며, 왕산의 남쪽과 서쪽으로는 관아시설과 관련되는 건물지가 분포하고 있
을 가능성이 크다.
무양동유적에서는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다수 확인되었고, 최근 조사된 무양동 제방유적은
북천의 치수와 관련한 것으로서 상주 시가지의 변천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리고 호음동의 자기가마는 조선 중기의 백자를 생산한 유적으로 확인되었으며, 인근에
서 야철지도 함께 조사되었다.
3. 고고문화 연구의 성과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는 선사시대에 비해 사벌국시대 이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
며, 고고학적 주요 관점으로는 사벌국, 고분문화, 고대 도시유적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최
근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각각의 관점에 대해 개관적인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나아가 지
표조사, 발굴조사, 학술연구회, 학술지 발간을 통한 분야별 연구 성과를 살펴보도록 하겠
다.
1. 주요 관점의 연구 성과
1) 사벌국
사벌국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초기철기시대와 실제적 무대가 되는 원삼국시대의 문화
가 해당된다.
초기철기시대는 기원전 4세기로부터 기원전 2세기의 시기로서 세형동검과 점토대토기문
화로 대표된다. 병성동유적의 수혈주거지 B-1,2호에서 출토된 원형점토대의 옹, 두형토
기, 발형토기, 조합우각형파수부호의 존재는 상주의 초기철기시대를 대변하고 있으며, 전
상주 낙동리 출토 간두령, 쌍두령, 팔주령의 존재로 보아 이 시기 문화상을 가늠해 볼 수
76 | 尙州文化硏究의 成果와 課題있다. 또, 초기철기시대의 병성동유적 수혈주거지의 점토대토기와 전 상주 낙동리 청동유
물의 존재는 인접한 김천 문당동 목관묘와 대구 팔달동 적석목관묘의 자료와 견주어 볼
때 상주지역의 초기철기시대 문화가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양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원삼국(진․변한)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의 목관·목곽묘의 시기로서
대표적인 부장 유물로는 와질토기와 철기류를 들 수 있다. 상주지역에서 이 시기의 유적
으로는 사벌면의 이부곡토성이 대표되며, 금흔리와 신상리, 화산동에서 와질토기와 후기
무문토기 자료가 수습된 바 있다.
원삼국시대의 영남지방에서는 2세기 중엽경에 목관묘로부터 목곽묘로 전환되는 것으로 밝
혀져 있으나 아직 상주지역에서는 2~3세기경의 목곽묘 자료가 조사된 바가 없다. 이에
무덤을 통한 원삼국시대의 문화상을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다행히 토성을 통해 보완할
가능성이 있다. 영남지방의 토성은 대체로 3세기 말 ~ 4세기 전반에 축조되어 6세기까지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부곡토성(吏部谷土城)은 상주지역의 원삼
국시대 문화상을 구축하는데 최적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토성은 앞 시기의
주거지군에 중복하여 축조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부곡토성의 하부에는 원삼국시대의 원
형계 주거지나 와질토기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이부곡토성에서 후기무문토기와 와질토
기, 그리고 각종 타날문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들이 채집되는 점으로 볼 때 이부곡토성은
원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삼국시대까지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 보아 기원전 1세기로부터 4세기까지 삼한(진·변한) 소국의 하나로서 이부곡토성을
근거지로 하여 사벌국이 존재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조사에서 대구 팔달동
또는 성주 예산리와 유사한 목관묘 유적이 확인되어 사벌국의 실체가 더욱 명확해질 것으
로 기대된다.
사벌국과 관련한 실질적인 고고자료는 아직 미미한 상태이다. 발굴자료가 부족한 형편이
고 상주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청동유물도 고고자료로서 가치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사벌국
과 관련된 집중적인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단지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의
자료가 사벌국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 한국고고학의 일반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특별전 등의 도록에서 자료의 소개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사벌국에 대한 포괄적 인식은 상당히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삼국시대
의 고분문화에 대해서도 신라시대의 상주지역 고분으로 보기보다는 사벌국의 실체로 이해
하는 경향이 높다. 이러한 현상은 상주 지역민들의 정서에 남아있는 사벌국의 향수 내지
는 뿌리 의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연구 차원에서 사벌국에 대
한 구체적인 활동은 부족하지만 앞으로 사벌국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노력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2) 고분문화
원삼국(삼한)시대의 진·변한으로부터 신라·가야로 바뀌는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4세기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77경으로 보고 있다. 사로국이 발전하여 신라를 구축하였지만 사로국이 신라의 중심으로 성
장하기 이전까지 영남 각지의 소국들은 상호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상주의 사벌국도 4세기까지는 그 세력이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고
고학 자료에 나타난 양상으로 볼 때 5세기 이후에는 신라와 직접적인 교섭 관계를 가졌
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영남지방의 고분은 4세기의 대형목곽묘(주·부곽식), 5세기의 수혈식석곽과 고총
(대형봉토분), 6세기의 석실묘로 변천하고 있다. 상주지역도 이러한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4세기의 대형목곽묘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상주지역의 고총 가운데서 중심 고분
군은 병풍산지구의 병성동고분군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아직 대형봉토분에 대한 발굴조사
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체에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처럼 상주의 고분자료는 다수
확보되어 있으나 대개 부분적인 조사에 머물러 있어서 고분문화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서는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상주지역의 목곽묘는 영남지방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주, 김해지역과는 달리 대형목
곽묘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소형 목곽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벌국 수장 세력
의 대형 목곽묘는 사벌면 이부곡토성이나 병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될 가능성이 있으며, 지
금까지 알려진 청리, 신흥리, 성동리고분군의 자료는 일반 성원의 목곽묘로 볼 수 있다.
영남지방의 공통적인 양상인 4세기 말의 고배자료가 청리고분군의 목곽묘에서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 신라토기 발생기의 양상이 상주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신흥리 나-37,39호에서 보이는 합장식 목곽묘의 구조는 백두대간 너머 금강수계의 충청
지역과 동일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어 상호 교류관계가 주목된다.
영남지방의 5세기는 고총의 출현기로 인식하고 있다. 아직 수혈식석곽의 고총이 발굴된
자료는 없으나 도굴된 고총의 내부구조를 보면 수혈식석곽임을 알 수 있으며, 영남의 각
지방에서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고총이 출현하는 5세기 전반의 시기는 각지의 토
착세력이 유지되는 가운데서 신라의 중앙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이 시기 고총의
내부구조는 지역에 따라 달리하고 있는데 상주지역의 구조적 특징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
히 밝히기는 어려운 단계이다. 상주지역 재지 세력(사벌국 세력)이 어떻게 신라 중앙과 교
류하였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병성동고분군의 대형 고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상주지역의 대형 고총이 병풍산지구의 병성동고분과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에 분
포하는 양상은 양 세력집단의 추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양상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후 6세기 중엽경에는 횡혈식석실분이 나타나는 시기로서 단각고배의 출현에 의한 토기
문화상의 변화와 함께 신라의 상주지역에 대한 지방통합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반영하
고 있다. 특히 횡구식석실묘의 구조가 상주지역의 주요한 석실 구조로 언급되고 있는 점
에 대해서 이러한 양상이 상주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고 생
각된다.
상주의 고분과 토기를 대상으로 한 연구논문으로는 홍지윤, 김진형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78 | 尙州文化硏究의 成果와 課題이들 논문에서 상주지역 고분의 구조와 성격을 밝혀냄으로써 학술적 기여도가 높다. 이에
더하여 상주박물관 개관5주년 기념으로 “5~6세기 고분문화와 古代 尙州”라는 주제로 학
술대회를 개최하고 이를 통해 상주지역 고분문화를 해명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시도가 있
었다.
3) 고대 도시유적
상주는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 중요성이 이어지고 있다. 6세기에 신라는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주(上州)의 주치를 이곳에 두었으며, 그 후 신문왕 7년(687)에 사벌주를 복
치하면서 성을 쌓은 기록이 있는데 이성이 자산산성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상주의 중심지
는 이부곡토성과 병성동고분군의 병풍산성을 거쳐 현재의 상주시내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
다.
통일신라에 들어서 9주5소경제가 성립되었을 때는 10군 30현을 관할하는 상주(尙州)의
주치로서 기능하였으며 상주 복룡동의 도시유적은 이때부터 이방제(里坊制)에 따른 도시구
조와 배치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상주 복룡동유적(伏龍洞遺蹟)은 처음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지방도시유적으로서, 상주시가
지의 동쪽 외곽에 위치하여 이방제에 의한 도시 구조의 우측 끝 부분에 해당된다. 이 유
적의 발굴조사를 통해 상주지역에서 고대 도시의 출현을 인식할 수 있었으며, 더불어 몇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통일신라시대의 이방제에 의한 도시계획이 조선시대의 읍성 설치 때에도 원상을 상
당부분 유지하고 있는 점은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지방도시계획의 변천
양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특히 발굴된 유구 중 복룡동 230-3
번지 유적의 북쪽 경계에 위치한 배수로(구상유구) 3기는 통일신라시대 사벌주의 도시계
획상 동서 가로망의 방향과 일치하고 단위 구획된 크기도 조선시대의 상주읍성을 둘러싸
고 설치된 해자의 배수로와 일치하고 있어서 지방도시계획의 변천양상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둘째, 이 유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생활유적으로, 이 유적에서
는 적심건물지, 수혈유구, 우물, 배수로 등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각종 인
화문토기와 기와, 자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구와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부
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동일지역에 지속적으로 폐기와 건립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생활 자료로서, 당시 사벌주의 지방도시와 조선시대 상주읍성 외곽의 취락모습과
그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셋째, 이처럼 상주 복룡동 유적은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지방도
시의 구조와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우리나라 고대
지방도시의 구조와 성격을 복원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79 2. 분야별 연구성과
1) 지표조사
상주지역의 문화재 현황에 관한 기초적인 자료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
람”의 간략한 유적의 설명과 소재지가 제시된 자료일 것으로 짐작된다.
상주의 문화유적에 대한 실질적인 지표조사는 “고대사벌국 관련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
서”(1996. 상주문화연구소)에 제시된 선사유적, 고분, 산성, 불적의 조사라고 하겠다. 조
사는 고고분야와 문헌분야로 나누어 실시되었으며, 사벌국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고고분야의 조사는 현지조사를 통한 약측도와 사진 등이 제시되어 유적의 전
반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학술조사를 위한 지표조사가 분야별 또는 특정 유적을 대상으로 수차례 실시되었다.
- “백화산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1998.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 “문화유적 분포지도 - 상주시”(2002.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 “상주 견훤산성 지표조사 보고서”(1997. 한국문화재보호재단)
- “상주 불교유적 지표조사 보고서”(2010. 상주박물관)
- “상주 병풍산고분군 지표조사 보고서”(2010. 상주박물관)
- “상주지역 자기요지 정밀지표조사 보고서”(2010. 대동문화재연구원)
- “사벌국 관련 문화유적 학술지표조사 보고서”(2012. 상주박물관)
이외에도 “상주-영덕 고속도로 건설사업예정지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2009. 대구대학
교 중앙박물관)를 비롯하여 개발사업에 따른 정밀지표조사가 다수 실시되었다. 이들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고고유적은 대부분 발굴조사와 연계되므로 고고학적 연구 성과는 발굴조
사 보고서에 수록되어 있다.
2) 발굴조사
상주지역의 발굴조사 자료는 개발사업에 따른 발굴조사가 대부분이다. 최근의 왕산공원
조성사업에 따른 발굴조사에서 상주읍성의 관아유적이 발굴된 사례와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병성동고분군, 성동리고분군, 유곡리고분군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주택건설
사업을 위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복룡동유적은 유적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상주 유일
의 사적지로 지정·보존되기도 하였다. 주요 발굴조사의 보고서를 모두 열거하기에는 지면
이 부족하므로 별도의 참고문헌으로 대체한다.
3) 학술연구회
상주의 고고학적 학술연구회는 상주박물관 개관 이후에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학술연구회에 한정하여 학술연구회의 주제와 세부발표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011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의 제24회 조사연구회가 “고대도시 상주와 복룡동유적”의 주제
로 상주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고대 도시 상주의 탄생(이영호), 상주 복룡동유적의 발굴
80 | 尙州文化硏究의 成果와 課題조사 현황과 성과(권헌윤), 분묘자료로 본 상주지역의 고대 정치체(김진형), 복룡동유적으
로 본 통일신라시대 사벌주의 도시구조(박달석), 통일신라시대 상주지역 瓦 연구(박헌민),
상주 복룡동유적과 경주 왕경(이은석)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상주 공검지의 역사성 재조명을 위한 국제학술대회가 2011년에 상주박물관에서 개최되었
는데, 한국의 수리시설과 역사성(이영호), 상주 공검지 연혁과 규모(김철수), 상주 공검지
발굴조사 현황과 성과(김찬영), 상주 공검지의 퇴적환경 및 형성(황상일), 일본의 수리시설
과 협산지유적(小山田宏一), 중국의 고대 수리시설(張劍光)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2012년 상주박물관 개관5주년을 기념하여 “5~6세기 고분문화와 고대 상주”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상주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발굴조사 성과로 본 고대 상주(박승규), 상주지역
5~6세기 분묘의 축조 추이(김진형), 삼국시대 상주지역 출토 토기의 특징(서경민), 상주지
역 고분자료의 역사고고학적 이해(김대환), 일본의 5~6세기 고분문화의 추이(柳本照男)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2013년에는 “조선시대의 상주”라는 주제로 조선시대의 상주(김호종), 고고학적 성과로 본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중심지(박달석), 조선시대 상주의 군현지도와 영남지도(김기혁), 경상
감영과 상주읍성(한기문), 조선시대 상주의 유학(김학수)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상의 학술연구회는 상주의 고고학적 주요 관점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으며,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연구자산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4) 학술지 발간
상주지역의 고고자료를 다룬 학술지는 전시도록이 대표적이다.
2003년 국립대구박물관의 기획특별전과 연계된 “상주 - 영남 문물의 결절지”도록은 선사
시대의 상주, 사벌국의 성립과 강성, 신라의 세력 확장과 상주, 영남문화의 결절지, 국난
의 극복과 새로운 통합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신 발굴자료가 소개되었으며, 상주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전시도록으로서 상주지역 고고자료를 집성한 점에서 의
미가 크다.
2008년 상주박물관 개관 도록으로 “상주 - 옛 상주를 담다”가 발간되었는데, 상주의 자
연지리적 환경, 선사시대의 상주, 사벌국과 신라,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상주, 조선시대의
상주, 근대의 상주로 구성되어 있다.
상주의 고고문화에 관한 학술지는 상주박물관의 학술연구총서와 문화총서 및 조사보고서
가 발간되고 있다. 학술연구총서에는 전시도록 이외에도 “상주분묘자료집성”이 2012년에
발간되었는데 삼국~통일신라시대 상주지역 분묘자료의 현황과 분포도를 비롯하여 청리고
분군을 필두로 상주에서 발굴된 모든 고분군의 유구와 유물의 도면을 유적별로 수록하였
다. 또 문화총서 중 고고문화와 관련된 학술지로는 2013년에 발간된 “상주 병풍산”이 있
는데 병풍산을 둘러싼 자연지리 및 고고학적 환경, 병풍산성의 조사, 병풍산유적의 보존
정비와 활용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814. 고고문화 연구의 과제
1.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의 지속
① 고분군의 조사와 연구 방향 : 상주의 고분군은 사벌국으로부터 발전된 전성기의 상주
문화를 보여줄 것으로 파악된다. 고총이 출현하는 5세기에는 역사상 사벌국이 신라에 병
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토착세력으로서 신라와 연합하던 시기이므로 5세기의
병풍산고분군은 사벌국 최고 수준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고분 연
구가 사벌국의 역사 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대 상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더불어 사벌국의 고성으로 추정되는 이부곡토성에 대해서도 발굴조사를 수반한
고고학적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이부곡토성과 금흔리, 병성동 하단의 구릉부
에 대한 발굴에서는 사벌국 수장 세력의 대형목곽묘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획에
의한 학술 발굴조사의 추진이 필요하다. 이로써 고분문화의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집중적
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실행되면 사벌국과 상주의 고분문화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② 고대 도시유적과 상주읍성의 조사 : 상주읍성은 조선시대에 구축된 기념물로서 지금은
하부구조만 남아 있다. 최근에 왕산 둘레에서 관아지가 일부 발굴되어 시가지 아래에 묻
혀있는 조선시대 상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상감영이 상주에 설치된 역사적 사
실에 비추어 보아 상주읍성의 실체 파악은 상주의 자랑이고 뿌리의 확인이다.
상주읍성의 성벽과 주요 시설물의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다. 다만 고
지도와 문헌에 의한 고증을 통해서 복원을 추진하는 방안은 재고되어야 한다. 복원에 앞
서 발굴조사를 통해 단편적인 양상이라도 찾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 복원을 추진하
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시가지의 개발사업에 앞서 상주읍성의 위치와 구조를
명확히 밝힐 수 있는 사전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하나 더 덧붙이면, 상주의 시가지와 그 주변에는 상주읍성의 유적만 분포하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통일신라시대의 사벌주, 상주의 역사 흔적이 함께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사적지로 지정된 복룡동유적이다. 우리나라 지방도시의 전모를 가
장 잘 보여주는 통일신라시대 상주를 찾기 위한 노력에 고고학계와 상주시, 상주시민이
함께하기를 부탁하고 싶다.
2. 유적의 보존과 활용
상주지역의 고고문화적 측면에서 유적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논의는 수차례 논의된 적이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고대 사벌국과 연계된 병풍산고분군과 통일신라시대 도시유적으
로서 상주의 위상을 보여주는 복룡동유적에 대한 보존과 활용에 대해 다시금 제기하고자
82 | 尙州文化硏究의 成果와 課題한다.
상주 병풍산고분군은 상주의 중심고분군이다. 그렇다면 상주의 시민들과 청소년들이 병풍
산고분군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
이다. 상주에도 당연히 고분군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겠지만 경주나 고령처럼 상주에도 웅
장한 고총(대형봉토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시민과 청소년들이 아직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병풍산고분군의 보존과 활용의 한 방안으로 고분군의 현상을 알리고 고분군의
외형을 조망할 수 있도록 고분군을 덮고 있는 수림의 간벌작업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된
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겠으나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사례를 볼
때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또 하나의 인식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기왕의 고분 발굴 자료에 대한 평가이다. 지금 우
리가 알고 있는 병풍산고분군 발굴 자료는 고분군 외곽의 것들로서 상주의 고분문화를 완
벽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고분연구에 의하면 대형 고분은 능선 아래로부터 상부로
순차적으로 축조된다고 하므로 출현기 고총에 해당되는 능선 하단부의 고총, 즉 수혈식석
곽을 내부주체로 하는 고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필요함을 제기한다.
다음은 병풍산고분군의 보존에 관한 문제로서, 병풍산고분군은 과거부터 도굴에 의해 많
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
음도 불문가지이다. 더불어 도굴갱에 대해서도 고고학적 조사방법을 통해 수습 정리할 필
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에 시민과 청소년들이 함께 참관하고 탐사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
게 고분군 보존과 활용의 방향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끝으로, 상주는 경북 내륙의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고대 도시로서 자긍심을 가질 필요
가 있다. 그만큼 많은 유적과 역사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상주 복룡동유적은 고대 도시
상주의 변두리에 해당될 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거나 지금 상주의 시가지가 고대 도시 상
주에 해당됨은 분명하다. 고대 도시에 살면서 고대 상주의 역사를 느끼고 있는지 묻고 싶
다. 또 상주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록에 분포하는 고분군이 고대 상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만 한다. 사벌국의 후예로서 사벌국과 왕릉의 이
야기, 고대 도시 복룡동유적과 왕산을 둘러싼 상주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 널리 공유할 필
요가 있다.
상주지역 고고문화의 연구성과 및 과제 | 83<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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