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제65강의 고분으로 본 삼국시대 상주지역의 성격

빛마당 2015. 3. 7. 00:17

고분으로 본 삼국시대 상주지역의 성격

 

김진형(상주박물관)

 

 

. 머리말

. 삼국시대 상주지역 고분의 분포 현황

. 삼국시대 상주지역 고분의 특징

1. 목곽묘

2. 석곽묘

3. 석실묘

. 삼국시대 상주지역 고분의 성격

. 맺음말

 

 

. 머리말

상주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96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1990년대 후반 청리공단 건설,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각종 도로공사, 아파트 건립 등 구제발굴 차원에서 많은 유적들이 조사되었다. 이를 통해서 상주지역 고분 자료는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고고학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상주지역 고분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살펴보면, 신라의 고총 안에서 상주지역의 고분만의 지역적 특성을 파악하거나, 상주지역 토광묘와 석곽묘의 출토유물과 조합상을 분석하여 상주지역 정치체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그리고 상주지역을 포함한 낙동강 상류지역 5세기 세장방형 석실묘에 대한 분석과 분포를 통해서 중심지와 주변지의 위계적인 일방적 전파가 아니라 인접한 지역집단간의 문화적 교류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었다. 아울러 이동양식토기의 확산이 신라세력의 정치적 확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제작자의 기술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신흥리고분군에서 고배, 대부장경호 등의 이동양식토기의 부장 유물이 적은 것은 신라의 정치적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닌 제작자의 기술과 함창분지의 지역집단이 가진 제의에 대한 관념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 파악한 것도 있다. 그리고 5~6세기대에 상주지역에서 중심묘제로 채택되고 있는 횡구식석곽묘를 형식분류하고 시기적 변화 과정을 살펴본 논고도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상주지역의 분묘자료를 토대로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정치체의 성립과 전개양상에 대해 논의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고대 상주지역은 신라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은 지역적 전통을 유지했으며, 이를 통하여 상주 고대 정치체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는 56세기의 기간동안 일부 묘제에 대한 단편적인 연구만이 이루졌을 뿐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로 이어지는 상주지역의 고분의 변화 또는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정리된 바가 없다.

따라서 본 발표문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논고를 토대로 삼국시대 상주지역 고분의 분포와 권역을 설정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고, 이와 함께 상주지역 삼국시대 고분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삼국시대 상주지역 고분의 분포 현황

상주는 서쪽으로 백두대간 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발원한 지천이 동쪽으로 흘러서 상주분지와 함창분지를 지나 낙동강에 합류함으로써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하천변에 형성된 함창분지와 상주분지는 비옥한 곡창지대로 이러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정치체가 형성되어 발전하였음을 이 일대에 분포하는 분묘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상주지역에 분포하는 삼국시대 고분군은 공성면에서 청리면을 연결하는 병성천 양안에 분포하는 고분군 상주분지를 중심으로 동쪽 능선상에 형성된 고분군 함창분지의 이안천을 끼고 형성된 고분군 낙동강 양안의 고분군 금강수계권의 모서화동 고분군 등 크게 5곳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고분은 대체로 하천을 가까이 하면서 넓은 들이 펼쳐진 구릉이나 산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가운데 발굴조사를 통해 그 성격의 일단이 밝혀진 고분군을 분포위치별로 크게 3개 지구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청리지구의 청리고분군과 병성동지구의 성동리고분군, 병성동헌신동고분군 그리고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 가장리고분군 등이다. 이 외에도 비록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표조사를 통해 고총고분이 분포한 곳으로 사벌면의 화달리고분군, 내서면의 북장리고분군, 중동면의 회상리고분군 등이 있다. 아마도 추후 이 고분군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상주지역의 고대 정치체에 대한 내용도 추가로 밝혀지지라 생각된다.

이 장에서는 위와 같은 고분군 가운데 분포지구를 중심으로 함창지구, 병성동지구, 청리지구 등 크게 3개 지구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 함창지구

함창지구의 고분군으로는 신흥리고분군과 가장리고분군이 있다. 신흥리고분군은 함창읍 신흥리와 증촌리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이곳은 고령가야의 古地로도 알려진 함창지역의 중심이 되는 고분군이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함창분지의 남쪽에 솟아 있는 오봉산(해발 238m)에서 북쪽 능선이며, 일부는 직경 20m 정도의 대형 봉토분들도 확인되고, 고분군의 북쪽과 접해서는 서에서 동으로 이안천이 흘러 그 북편에 함창분지를 발달시켰다. 이 이안천은 유적에서 4.5떨어진 지점에서 영강과 합류하고 이것이 더 흘러 낙동강의 본류와 합류한다. 그리고 북으로는 점촌을 지나 문경과 연결되므로,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낙동강에서 조령으로 향하는 길목인 셈이다. 신흥리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1997년 상주-점촌간 국도3호선 확포장 공사와 관련하여 고분이 분포하는 능선의 말단부를 따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고분이 분포하는 4개의 능선에 따라 가~라지구로 구분하여 실시되었으며,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분묘 458기와 건물지, 담장지 각 1개소가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분묘는 삼국시대의 토광묘 150, 옹관묘 51, 석곽묘 177, 석실묘 45기 등 423기와 고려시대 이후의 분묘 35기로 보고되었다.

가장리고분군은 이안면 가장리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으로 숭덕산(해발 222.8m)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과 산사면에 위치한다. 고분군에서 북쪽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이안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고, 이안천 주변으로는 넓은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이안천에 인접하여 오봉산이 위치하며, 산정상부를 중심으로 하여 남산성과 그 아래로 신흥리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가장리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실시되었는데 2001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조사결과 삼국시대 석실분 13, 고려시대 석곽묘 3, 조선시대 이후 토광묘 13, 용도미상의 유구 2기 등 모두 31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 병성동지구

상주시 병성동헌신동성동동 일대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고분군이다. 현재 이곳의 고분군의 명칭은 행정구역상 병성동 고분군과 헌신동 고분군으로 나누기도 하나 크게 보아 모두 병풍산 일대에 분포하는 하나의 고분군이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상주시 중심가의 남동편에 위치한 병풍산(해발 365.6m)에서 북으로 뻗는 몇 개의 가지능선이다. 고분들이 분포하는 병풍산에는 고분군과 세트를 이루는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인 병풍산성(屛風山城)이 위치하고 이 주변에는 같은 시기의 고분군인 성동리(城東里) 고분군, 보다 이른 시기의 헌신동 지석묘군, 헌신동 입석, 성동리 민무늬토기산포지 등이 분포하여 오랜시간 다양한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다. 고분군은 병성동 검동골 마을을 남에서 감싸는 2개의 능선과 그 능선들이 합쳐진 남쪽 능선에 넓게 분포하는 고분군(병성동헌신동지역)과 그 동편 골마마을 서편 능선에 분포하는 고분군(병성동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전자는 직경 29m 정도의 초대형분부터 7~8m의 소형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봉토분 수십 기가 남아 있고, 후자의 경우는 직경 12m 내외의 봉토분들이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다. 고분군의 북쪽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병성천이 낙동강과 합류되면서 이 일대에 넓고 비옥한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고분군 가운데 헌신동과 병성동에 걸쳐 분포하는 고분군의 중앙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게 되어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 의해서 발굴조사 되었다. 조사결과, 초기철기시대 수혈유구 2, 삼국시대 석곽묘 78, 옹관묘 11, 석실묘 11, 주거지 4, 수혈유구 12기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성동리고분군은 상주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관문인 ?성골고개?라는 작은 고개가 있는 곳으로 그 북편에는 상주분지가 넓게 펼쳐져있다. 성동리고분군은 1998년 중부내륙고속도로의 건설에 따라 일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토광묘 25, 석곽묘 81, 옹관묘 3기 등 모두 109기의 삼국시대 분묘가 조사되었다. 또한 2001년에는 국도 25호선 확포장공사와 관련한 발굴조사를 통해 토광묘 3, 석곽묘 150, 옹관묘 6, 석실묘 14기 등 모두 173기의 삼국시대 분묘가 조사되었다.

 

. 청리지구

상주시 청리면 마공리청하리하초리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군이다. 유적은 상주시의 중심가에서 서남부를 향해 길고 넓게 형성된 평야의 중앙으로 병성천 남쪽에 위치한다. 이 평야를 통해 상주에서 김천, 성주를 거쳐 경남서부지방으로 통하는 통로가 일찍부터 개발되어 있었으므로 이 일대는 남부지방에서 상주로 들어오는 관문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경북선 철도와 3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청리일대 고분군은 기양산(岐陽山)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2개의 능선 말단부와 능선 사이에 위치하는 속칭 밀매동산으로 불리는 해발 80~150m 내외의 낮은 구릉성 산지에 분포하고 있다. 또한 이 일대에는 월로리고분군, 원장리고분군, 청하리고분군 등 삼국시대 고분들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청리고분군이 위치한 기양산 정상부에는 마공산성이 위치한다. 이곳에 대한 조사는 1996년 청리지방산업단지 조성에 따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청동기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718기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그 가운데 삼국시대 고분은 토광묘 62, 석곽묘 116, 석실묘 87기 등이 확인되었다. 분포양상을 살펴보면, 기양산에서 마공리쪽 능선인 AH지구에서는 석실묘가 중심이 된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고, 용안리 방면의 산사면인 BCDE지구에서는 삼국시대 토광묘와 석곽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 삼국시대 상주지역 고분의 특징

상주지역 삼국시대 고분의 전개양상은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변천양상과 같이 목관(), 석곽묘(수혈식, 횡구식), 석실묘(횡구식, 횡혈식)로 이어진다. 이하에서는 상주지역에서 확인되는 각 분묘별 특징에 대해 분포 지구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목곽묘

상주지역의 목곽묘는 3지구 모두에서 확인된다. 이 가운데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함창지구에서는 모두 150기의 목곽묘가 확인되었다. ‘지구로 이어지는 능선에 목곽묘가 집중 분포하며, 묘형은 대체로 장방형을 이룬다. 유물의 부장 위치는 대체로 한쪽 단벽을 택하여 유물부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사된 매장주체부 형태는 상자형, ‘자형, 격벽을 두고 '자형의 목관을 설치한 형태 등 다양하다.(도면 4) 축조 시기는 대략 4세기 초반경에 등장하여 5세기 중반까지 이어진다. 유물의 부장양상은 대체로 단경호와 연질발, 발형토기를 조합으로 하는데 이러한 것을 볼 때, 청주 송절동고분군과 같은 금강수계권의 호서지역과 유사하다. 그리고 4세기 후반경부터 아주 적은 양이지만 고배 등도 일부 출토된다. 또한 이 무렵에는 신흥리 나지구 373839호묘와 같은 동혈합장묘 형태의 목곽묘가 축조되며, 무기류와 마구류 등 철기유물이 다수 부장되고 있어 함창지구의 최고 위계의 분묘로 생각된다. 한편 5세기 중반경으로 편년되는 신흥리 목곽묘 가운데 가장 대형에 속하는 가-57호묘와 같이 수혈식석곽묘가 등장한 이후까지도 목곽묘가 중심분묘로 사용되고 있어 목곽묘와 석곽묘가 장기간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병성동지구의 경우, 성동리고분군에서 총 26기의 목곽묘가 확인되었다. 묘형은 대체로 장방형을 이루고, 매장주체부는 결구식으로 축조하여 다양한 형태를 만들고 있다. 유물의 부장위치는 한쪽 단벽쪽에 부장공간을 마련하였다.(도면 5) 유물은 경식 등의 출토 위치로 보아 대체로 피장자의 머리쪽에 부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과 마찬가지로 단경호와 연질발을 조합으로 하고 있으며, 파배가 추가되기도 한다. 축조시기는 4세기 전반경에서 후반경으로 보여진다.

청리지구에서는 총 62기의 목곽묘가 조사되었다. 묘형은 대체로 세장방형을 띠며, 유물의 부장양상을 보면 양쪽 단벽쪽에 나누어 부장하는 경우가 다수 확인된다.(도면 6) 목곽묘의 축조시기는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중반으로 보여지는데 출토유물에 있어서 다른 지구와 달리 등장 초기부터 고배와 장경호의 조합상을 이루고 있다.

 

2. 석곽묘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에서는 5~6세기대 석곽묘가 총 177기가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 구역 가운데 지구 능선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수혈식으로 추정되는 것은 27기이며, 횡구식은 18기이며 나머지는 석곽의 파괴가 심하여 원형을 알 수 없다.

신흥리고분에서는 오봉산 능선 사면에 장방형의 석곽묘가 4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목곽묘와 동일한 입지에서 축조되고 있으며, 유물 역시 단경호와 연질발 등이 조합을 이루며 부장된다.

내부시설 중 시상은 아무런 시설없는 무시상에서 5세기 전반경부터 묘광 바닥에 자갈을 깔아 상면을 마련하는 형태로 변화하여 중심분묘로 자리잡게 되고, 소형단경호가 출현하는 5세기 중반경에 이르러 횡구식석곽묘가 중심이 된다. 한편 5세기 후반경에는 마구류와 무구류가 집중되어 부장되고, 목곽묘는 더 이상 축조되지 않는다.

청리지구의 석곽묘는 5세기 전반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4세기 중엽부터 등장한 목곽묘와 함께 확인되며, 출토유물 역시 목곽묘에 부장되는 장경호와 고배가 부장된다. 청리 석곽묘는 석관계석곽묘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으며, 초기에는 목곽묘의 하위 묘제로 채용되다가 5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중심묘제로 발전한다. 5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는 D지구 4호 횡구식석곽묘는 시상과 관대를 같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구조이다. 청리유적 석곽묘 출토유물 가운데 철기의 비중은 낮으며, 토기에 있어서도 목곽묘 이래의 지역양식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병성동 지구에서는 5세기 전반경 이후 병성동 4-1, 13, 12-1, 14호와 같이 횡구식석곽묘가 축조되고, 목곽묘에서와는 달리 고배와 장경호 등을 중심으로 하는 기종이 부장된다. 이러한 유물상의 변화는 영남북부지역양식 토기의 확산으로 이해되며, 신라의 세력확장과 일정한 관계하에 나타난 변화라고 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횡구식석곽묘가 중심묘제로 채택되어 있으며, 수혈식석곽묘는 배장묘적 성격이 강한 길이 2m이하의 소형묘에서만 확인된다. 세장방형의 평면형태를 가지며 석곽 전면이나 유물부장공간으로 추정되는 양단벽, 혹은 횡구부 쪽 일부 면을 제외하고 1~2겹의 할석을 깔아 높이 20cm내외의 시상을 마련한 형태가 다수 확인되며, 병성동 지구에 분포하는 대형의 횡구식석곽묘는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한편, 세장방형의 평면에 횡구부가 확인된 것은 모두 64기로 한쪽 단벽 전면을 폐쇄한 것이 31, 하단을 벽석과 동시에 축조하고 상단을 횡구부로 이용한 반문구조인 것이 32, 창형구조인 것이 1기이다.

그리고 병성동 지구에서는 5세기 후반부터 축조되기 시작하는 석곽묘 가운데 묘광을 연장하여 벽석을 축조하여 추가장이 가능한 소위 이음식석곽묘가 특징적이다. 이러한 석곽묘는 상주지역내 다른 지구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병성동 지구만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 석실묘

석실묘는 연도의 유무에 의해 보통 횡구식석실묘과 횡혈식석실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상주지역에서는 3개 지구 모두에서 석실묘가 확인된다. 출토유물로 볼 때, 대부분 6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석실묘가 축조된 것으로 보여지지만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에서는 라지구 1, 28, 171호 등과 같이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석실묘가 확인되어 주목된다. 이 석실묘들은 묘역의 구분과 석실의 규모, 은제과대 등의 출토유물로 보아 이 시기 신흥리고분군 내에서 가장 높은 계층의 피장자로 추정된다. 하지만 6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여전히 석곽묘가 주묘제로 자리잡고 있으며, 6세기 중반 이후 병성동지구와 청리지구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확인되는 대부분의 석실묘와 같은 양상인 단각고배를 표지로 하는 석실묘가 본격적으로 축조된다. 이 시기부터 함창지구에서 축조되는 석실묘는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횡구식석실묘로 횡혈식석실묘는 확인되지 않는다. 횡구식석실묘의 평면형태는 대체로 장방형에서 방형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보이며, 매장주체부는 모두 지상에 위치한다. 이는 5세기 중후반의 초현기 석실인 라1, 28, 171호분의 매장주체부가 벽석의 절반 정도가 지하에 위치하는 점과는 다르다. 시상대는 라7, 94호와 같이 중앙 또는 좌벽에 접해서 주축방향과 평행되게 설치하거나 중앙에 설치한 점이 특징적이다. 횡구부의 형태는 단벽 상부 전체를 사용하거나 단벽 상부 일부를 사용하는 등 혼재하는 양상이다.

그리고 함창지구의 가장리고분군에서는 총 13기의 석실묘가 확인되었는데 신흥리고분군의 석실묘와 마찬가지로 6세기 중반경 이후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석실의 평면형태와 횡구부의 형태 등 유사하다.

병성동지구에서는 총 25기의 석실묘가 조사되었다. 모두 횡구식석실묘로 보이며, 석실의 평면형태와 횡구부의 형태 등 구조에 있어서는 함창지구와 유사하다. 석실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나 평면비가 1m내외의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다. 시상대는 대부분 할석을 여러 겹 깔고 그 상면을 소형 할석이나 자갈을 이용하여 고른 형태이다. 시상대의 높이는 30cm내외의 비교적 높은 단상형으로 시상대의 위치는 한쪽 장벽에 붙인 형태와 가운데 횡구부 반대쪽 단벽에 가로방향으로 설치한 형태가 확인되며, 가로방향으로 설치된 시상은 7세기 이후의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석실묘의 내부 출토 유물의 경우, 재지계 토기가 부장되던 것이 신라계의 단각고배로 거의 통일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현상은 전체 상주지역 고분군에서 동시에 확인되는 것으로 이 시기에 상주의 각 지역 고분군 묘형이 통일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병성동지구 석실묘의 축조시기는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6세기 중반이후부터 시작되어 7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리지구의 석실묘는 A지구에서는 71, H지구에서는 16기가 확인되었는데 축조시기는 6세기 중반경 이후부터 7세기 후반까지로 보여진다. 이 청리고분군의 석실묘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상주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석실묘가 축조되는 6세기 중반 이후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와는 달리 연도가 있는 횡혈식석실분이 다수 축조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표자는 전고를 통해 석실묘 축조단계에 있어서 청리지구는 다른 지구와는 정치체의 전개양상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추정한 바 있다.

청리지구는 횡구식석실묘가 횡혈식석실묘에 비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횡혈식석실묘의 연도의 위치는 우편연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현실의 규모를 보면, 횡혈식석실묘는 횡구식석실묘보다 규모가 훨씬 큰 것이 다수를 차지하며, 횡구식석실묘은 호석이 대다수 돌려지지 않았거나 1중으로 돌려진 경우가 확인되는 반면, 횡혈식석실묘는 대부분 24중의 호석이 확인되고 있다.

 

 

. 삼국시대 상주지역 고분의 성격

먼저 상주지역의 목곽묘는 3지구 모두에서 확인되는데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에서 가장 일찍 출현한 것으로 보이며, 매장주체부는 병성동지구와 청리지구와는 달리 다양한 형태가 확인된다. 특히 유물의 부장양상에 있어서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에서는 단경호와 연질발이 조합을 이루고 있는 반면, 청리지구의 경우 목곽묘의 등장초기부터 영남남부지방에서 널리 확인되는 고배와 장경호의 조합상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유물 조합상을 통해 봤을 때,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는 청주 송절동유적의 목곽묘 양상과 유사한 점에서 금강수계권의 호서지역과의 그리고 청리지구의 경우 경주를 비롯한 영남남부지방과의 연관성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상주지역에 석곽묘가 축조되면서 목곽묘와는 또 다른 양상이 확인된다. 청리지구의 석곽묘는 장판석을 눕혀 쌓은 장방형의 석관계석곽묘에서 출발하여, 큰 변화없이 세장방형의 석곽묘로 변화한다. 유물은 목곽묘단계와 같이 장경호와 고배 등이 중심 기종으로 부장되고, 경주양식의 토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병성동지구 석곽묘는 5세기 전반경 세장방형의 횡구식석곽묘가 축조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목곽묘에서 출토되던 단경호와 연질발의 유물 조합에서 경주양식의 고배 등이 본격적으로 부장된다. 특히 병성동고분에서는 주능선을 따라 거대한 봉분을 가진 다곽식의 횡구식석곽묘가 축조되면서 상주분지의 중심묘역으로 등장하며, 주변으로 소형의 수혈식석곽들이 중심고분을 둘러싸고 분포하고 있다. 아울러 5세기 후반부터 병성동, 성동리고분군에서는 선축된 석곽의 한쪽 단벽 또는 양장벽을 연장한 형태로 묘역을 넓히는 덧댄 구조의 이음식석곽묘(도면 7)6세기 중반 석실묘가 축조되기 시작할 무렵까지 축조되는데 이러한 묘형은 이 시기 상주지역 묘제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반면 함창지구의 신흥리고분군에서는 5세기 전반경 수혈식석곽묘가 등장한 이후에도 목곽묘가 상당기간 중심묘제로 사용되다가 5세기 중반 이후 장방형의 석곽묘로 중심묘제가 변화한다. 유물 조합상은 목곽묘와 동일한 양상으로, 영남지방에서 특징적으로 부장되는 고배는 아직까지 출토되지 않는다. 하지만 5세기 후반경에 고총의 형태로 횡구()식 묘제가 축조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확인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출토유물을 근거로 5세기 후반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흥리 라-1호 석실묘(도면 2)를 통해 알 수 있다. 신흥리 라-1호 석실묘는 묘역의 구분과 석실의 규모, 그리고 출토유물 가운데 은제과대가 출토된 점에서 고분군내 동일한 시기의 석실묘 가운데 가장 높은 계층의 분묘는 분명한 것 같다. 이는 이전까지 단경호와 연질발을 부장하는 양상과는 달리 라-1호 석실묘가 축조되면서 고배 등과 함께 은제과대가 출토된다는 사실은 이전과는 다른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라-1호묘는 능선의 말단 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하는데 이 주변으로 같은 시기의 라-20218095100108호 석곽묘들이 의식적으로 에워싸는 모습으로 축조되어 있다.(도면 2) 그리고 이 석곽묘들에는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던 각종 고배류와 금공품인 태환이식, 세환이식, 경식 등이 출토되고 있어 5세기 후반경 금공품의 지방 분여와 관련해 볼 때 신라와의 관계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함창지구의 정치체가 유물의 부장에 있어서는 오래동안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다가 5세기 후반경을 기점으로 신라와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5세기 전반경으로 보여지는 나373839호묘와 같은 대형의 목곽묘에서 출토된 마구류와 무기류 등이 경주에서 유입된 물품으로 본다면 이 시기 즈음에 소위 신라의 간접지배에 있었겠지만 5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유물이 경주적인 색채가 강한 유물들로 급변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신라의 지배방식에 있어서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연구와 같이 5세기 후반 즈음에 고구려 세력과 접하고 있는 경북 내륙에 대한 신라의 지방지배가 한층 강화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라-1호분과 비슷한 시기의 라-28호분 역시 석실의 규모가 아주 대형으로 높은 계층의 묘로 보여지는데 특히 고구려계 장동호의 출토(도면 8)로 보아 석실의 계통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후술하겠지만 상주지역에서 횡구()식석실묘는 대체로 6세기 중반경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5세기 후반경에 함창지구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함창지구의 최상위계층에서만 일부 도입된 초기 석실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주지역에 위치한 3개 지구 정치체의 규모와 관련해서 병성동고분군이 주목된다. 이 일대에는 발굴조사된 고분 외에도 육안으로 확인되는 고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상주박물관에서 2010년 이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862기의 삼국시대 고분이 조사된 바 있다.(도면 3) 특히 병성동고분군 지표조사 시에 확인된 고분의 밀집도를 보았을 때,」ㆍ「구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으며, 특히구역은 대부분 소형분으로 능선을 중심으로 좁은 지역에 군집하여 분포하고 있는 반면,」ㆍ「구역의 능선상에는 봉분 저부가 직경 20m 이상의 대형분이 밀집분포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를 통해 추정해보면 병풍산고분군에서 중심 고분군은」ㆍ「구역으로 보여진다. 또한 이 고분들의 내부구조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도굴의 양상을 통해 세장방형의 횡구식석곽묘로 보여진다. 아울러 병성동고분군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화달리고분군 역시 능선상에 대형의 고총군이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병성동고분군과 화달리고분군을 포함한 병성동지구는 상주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군 가운데 그 수나 규모 그리고 고총들의 존재를 통해 어느 고분군보다도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본다면, 병성동고분군이 위치했던 이 일대가 5~6세기동안 상주지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했던 정치체가 아닐까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곽묘가 등장하면서부터 상주지역 분묘의 전개양상은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 그리고 청리지구 별로 묘제 양상은 다르게 전개됨을 볼 수 있다. 특히 유물의 부장양상을 볼 때 청리지구가 가장 먼저 신라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고, 이후 청리지구와 비교적 가까운 병성동지구에서 경주적인 색채가 강한 고배류 등이 등장하면서 신라와의 관계가 엿보인다. 함창지구 역시 5세기 전반경 대형의 목곽묘에서 출토된 마구류와 무기류를 볼 때, 이 시기부터 신라의 간접지배하에 들어간 것 같지만 5세기 후반 이전까지 단경호와 연질발이 부장되는 유물의 조합은 독자적으로 유지되었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5세기 중후반경은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에서 대형의 고총이 축조되는 시기로 병성동지구의 고총에서는 내부구조가 매우 세장한 형태의 횡구식석곽묘로 축조되는 반면, 함창지구의 고총은 최상위계층에서 석실묘의 형태로 축조되고 있다. 이러한 고총고분을 볼 때, 상주지역이 신라의 간접지배 하에 놓여 있었지만 고총의 내부구조는 지역내에서도 다르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김대환의 지적대로 매장의례의 측면들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전개되고 매우 독자적인 자율성이 견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청리지역에서는 고총고분의 형태는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발굴조사된 청리지구의 청리고분군이 이 지구의 하위고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6세기 중반 이후에는 세 지역 모두 횡구식(횡혈식)석실묘가 주묘제로 등장하는 등 점차 동일한 양상으로 바뀌어 가면서 병성동지구와 함창지구는 7세기 초반까지, 청리지구는 8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다가 각 지역의 분묘는 자취를 감춘다.

석실묘 단계에서 특히 주목되는 곳은 청리지구로 이전의 석곽묘 단계와의 연결고리가 없이 고총의 형태로 석실묘가 새롭게 등장한다. 청리지구는 상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71기의 석실묘가 확인되었는데 6세기 중반경 이후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8세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6세기 중반 이후의 병성동지구와 함창지구의 석실묘는 모두 횡구식석실묘만이 확인되었지만 청리지구는 횡구식과 횡혈식석실묘 모두 확인된다. 따라서 연도가 확연히 구분되는 횡혈식석실묘는 청리지역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횡혈식석실묘는 청리지구 내에서는 물론이고,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에서 확인된 횡구식석실묘와는 현실의 규모와 호석의 정도, 출토유물에서 차이점이 인지된다. 횡구식석실묘는 횡혈식석실묘에 비해 현실의 규모가 작고, 대부분 호석이 확인되지 않거나 1중 호석이 돌려진 반면, 횡혈식석실묘는 현실의 규모가 크고 24중의 호석이 돌려진 것이 다수 확인된다. 석실묘의 규모와 호석이 돌려진 정도가 석실분 축조시의 노동력, 비용과 관련이 된다고 한다면 횡구식석실묘에 비해 횡혈식석실묘의 피장자의 계층이 더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목되는 점은 횡혈식석실묘 가운데에서도 현실의 규모가 크고, 호석이 24중 돌려진 석실묘에서 유독 청동제 과대금구류가 출토된다는 것이다. 청동제 과대금구류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라는 기존의 연구를 본다면, 청리지구의 횡혈식석실묘에 묻힌 피장자들은 높은 계층의 피장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을 통해 볼 때, 청리지구의 횡구식석실묘에 묻힌 피장자는 병성동지구와 함창지구의 피장자와 마찬가지로 지역의 재지 수장층의 분묘라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 횡혈식석실묘에 묻힌 피장자는 재지 수장층이 아닌 신라에서 파견된 지방관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6세기 중반 이전까지 고총군의 분포나 규모로 보아 상주지역 내에서는 병성동지구가 중심지구였다가 그 이후 무렵부터 청리지구가 새롭게 중심지구로 등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는 아마도 청리지구가 가지는 지리적 환경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리지구 일대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주분지의 남쪽입구에 해당되는 곳으로 남부를 향해 길고 넓게 펼쳐진 병성천에 의해 형성된 평야의 중간부분 남쪽에 위치한다. 이 평야를 통해 상주에서 김천, 성주를 거쳐 경남서부지방으로 통하는 통로가 일찍부터 개발되어 있었으므로 유적이 위치한 곳은 이러한 지역들에서 상주로 들어오는 관문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백산맥을 넘어 호서지방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중계지점의 역할을 하였으며 충주, 보은 등 외부로의 길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인 환경으로 인해 고대부터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써 중요한 지역이었음은 이미 언급된바 있다.

따라서 6세기 중반이후 청리지구에 횡혈식석실묘가 축조되는 시점부터 8세기경까지 청리지구의 신라 지방관을 중심으로 상주지역은 신라의 직접지배 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7세기 중반 이후 횡구식석실묘가 청리지구, 병성동지구 그리고 함창지구에 확인되지 않는 것은 그 지구의 재지 정치체가 해체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함께 청리지구, 병성동지구, 함창지구의 고분군 주변에는 각각 6세기 후반 이후로 보여지는 석성들이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석성의 축조 자체가 곧 지역 정치체의 해체와 주군으로의 편제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상주지역도 각 지구의 정치체가 이러한 일련을 과정을 거치면서 신라의 지방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고, 수도 방위의 요충지로 바뀌었음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리고삼국사기지리지의 기사에 따르면 8세기대 상주지역은 靑驍縣, 多仁縣, 化昌縣의 세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청효현이 상주지역의 청리인 것을 보면 8세기때까지 청리가 중심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6세기 중반경까지는 고총고분의 분포를 통해 병성동지구 일대가 지역정치체로서 가장 중심지로 위치하다가 청리지구의 전략적 요충지의 이점을 이용하여 6세기 후반경 신라의 지방관 파견과 함께 군사적정치적 중심지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부터 상주지역의 모든 정치적, 군사적 운영은 청리지구의 지방관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맺음말

지금까지 고분을 통해 삼국시대 상주지역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상주지역에 분포하는 삼국시대 고분은 분포와 발굴조사의 내용을 통해 크게 함창지구, 청리지구, 병성동지구로 나눌 수 있다. 묘제의 변천상을 살펴보면 먼저, 목곽묘가 등장하면서부터 상주지역 분묘의 전개양상은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 그리고 청리지구 별로 묘제 양상은 다르게 전개됨을 볼 수 있다. 특히 유물의 부장양상을 볼 때 청리지구가 가장 먼저 신라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고, 이후 청리지구와 비교적 가까운 병성동지구에서 경주적인 색채가 보이는 고배가 등장하는 점에서 신라와의 정치적인 관계를 엿 볼 수 있다. 함창지구 역시 5세기 전반경 대형의 목곽묘에서 출토된 마구류와 무기류를 볼 때, 이 시기부터 신라의 간접지배하에 들어간 것 같지만 5세기 후반 이전까지 단경호와 연질발이 부장되는 유물의 조합은 독자적으로 유지되었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5세기 중후반경은 함창지구와 병성동지구에서 대형의 고총이 축조되는 시기로 병성동지구의 고총에서는 내부구조가 매우 세장한 형태의 횡구식석곽묘로 축조되는 반면, 함창지구의 고총은 최상위계층에서 석실묘의 형태로 축조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때, 상주지역이 신라의 간접지배 하에 놓여 있었지만 고총의 내부구조는 지역내에서도 다르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매장의례와 같은 측면들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전개되고 매우 독자적인 자율성이 견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총의 수와 분포를 통해 병성동지구의 병성동고분군 일대가 상주지역 내에서 가장 중심되는 고분군으로, 이는 6세기 중반경 청리지구에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될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청리지구의 횡혈식석실분은 동시기의 횡구식석실분과는 달리 현실의 규모, 호석, 부장유물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점에서 그 피장자가 신라에서 파견된 지방관으로 생각되며, 이때부터 신라의 직접지배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문헌기록을 통해 상주지역에 上州가 설치되면서 이전의 군사적인 지방관의 성격과 함께 정치적인 중심지로서 중시된 곳이 청리지구로 보았다.

 

 

 

 

 

 

 

 

 

 

A-25호 횡구식석실분

연도 없음, 소형, 1중 호석

A-9호 횡혈식석실분

중앙연도, 대형, 2중 호석

A-6호 횡혈식석실분

좌측연도, 소형, 2중 호석

A-3호 횡혈식석실분

우측연도, 대형, 4중 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