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66강의 상주의 효자, 중동 나루 이야기

빛마당 2015. 3. 7. 00:07

상주학 66강의 자료 상주의 孝子, 中東의 나루 이야기

상주문화   회원 김 광 희

 

 

목 차

1. 들어가며

2. 상주시에서 중동면의 役割

3. 낙동강을 타고 넘는 중동의 나루

4. 나루 周邊集成村

5. 나루와 江 沿岸에 접한 文化遺蹟

6. 4대강 사업 이후 변화된 나루공간

7. 맺 음

 

 

 

 

 

 

 

1. 들어가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상주는 지리적으로 백두대간의 태산준령이 북에서 서로 이어져 남으로 이어가고, 동쪽으로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돌아 나가니 대체적으로 산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갈수록 낮다. 그 안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가 넓어 일찍이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고, 따라서 인심이 순후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명승지에는 사람이 모이게 마련인데 강을 연접한 중동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 누정문화(樓亭文化)와 선비정신의 흔적(痕迹)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산업사회로 변천하는 과정에 거의 한 세기 이상을 강과 인접한 이 명승지를 거의 내버리듯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상주의 어느 곳에 이처럼 많은 勝景이 있었으며 삶의 애환이 서린 나루가 있었는가, 이제 그에 따라 전해 내려오는 많은 글()들을 再 照明하고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살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의 의식주가 해결되고 시민들이 여가를 이용하여 레저활동을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는 시대로 변함에 따라, 그동안 사회적으로 餘裕(風流)文化에 다소 냉소적인 대우를 받아 왔던 이곳에 옛 영화를 되살려,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로 다시 태어나 상주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상주시에서 중동의 역할

상주시의 행정조직 24邑面洞에서 23개의 읍면동은 속리산 줄기 아래로 낙동강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중에 유일하게 중동면만이 보현· 팔공산의 끝자락으로 낙동강 동쪽에 소재한다.

상주시의 최동단(最東端: 우물리 동경 128° 2028)으로 三面이 강으로 위요(圍繞)된 반도로서 강물이 범람하면 그야말로 육지속의 섬이나 다름이 없었던 곳이다. 중동면의 면적은51.61(상주시 1254.78/4.1%), 인구1,646(상주시102.892/1.6%.‘14.12.31현재)으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그 역할은 아주 크다 할 것이므로 상주의 작은 孝子인 것이다. 중동을 감아 돌아 나가는 강은 17.5km(상주전체34.0km정도)나 된다. 지방자치제가 정착 되면서 모두가 자기 고장의 발전을 위하여 관광지를 조성하고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4대강사업 이후 낙동강권역이 관광자원화 되면서 부터 많은 레저사업이 들어오고 있는 이때에 중동면이 상주의 관할이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면 그 답은 간단 할 것이다.

 

3.낙동강을 타고 넘는 중동의 나루(11)

옛말에 산은 인간의 생활을 나누고 물은 잇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나루를 통하여 생활에 불편함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교통수단으로 삼으면서 그 고된 삶을 영위해 온 곳이라 주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곳이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하여도 그러 하였다. 작은 행정구역 하나에 이처럼 많은 나루를 이용한 곳이 어디에 또 있으랴마는 이제 교량이 가설 되면서 나루에 관한 모든 것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고 젊은 세대는 옛 어른들의 삶 자체를 잘 알지도 못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오르면 얼굴만 보아도 어느 곳에 사는 누구네 집의 아들, 손자를 알아맞히고, 뱃사공 에게 물으면 누구네 집의 친인척 까지도 마을이 어디인지 소상히 아는 곳이 바로 이 나루이다. 일상적으로 대개 선창가, 뱃가라 부르고 배가 닿는 곳의 지명은 주막걸이 많다.

낙동강의 상류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중동의 나루를 소개하면, 먼저

(1)낙동강을 이용한 곳으로

1)역골나루(淮谷津, 엿골나루)

상산지에淮谷津 在中東 淮谷店前 安東通路라 적고 있으며 중동면 회상2리 맷골마을(鷹洞)과 사벌면 매협리 역곡(力谷)마을을 잇는 뱃길로 중동이나 풍양에서 상주나 함창으로 내왕하던 곳이다. 옛날 이곳에서 소금과 쌀 등 물물교환이 이루지기도 하였다고 전하고, 이후 이곳에는 버리마(회상2)양수장이 설치되어 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나루 위쪽으로 운성진(매호삼탄진(광대정하풍진이 있었다. 주로 배를 역곡에서 운영 했기에 역곡나루로 불리었는데, 도로가 개설되고 농촌인구가 감소하면서 없어졌다.

 

2)횟골나루(회상나루, 檜洞津, 回村津, 回谷津))

상산지에 亦在中東淮谷店前安東通路라 적고 있으며, 회곡진(回谷津)이라고도 했는데, 중동면 회상리와 상주시 도남동을 잇는 나루로 규모가 꾀나 큰 편이었다.

중동이나 풍양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의성, 안동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이며 그 옛날 목재나 농산물이 운송되었으며 나루터 주변에는 객주촌이 있었다고 하는데, 1980년대 까지만 하여도 선창가에 술집이 있었다. 농업용수 해결을 위하여 횟골 양수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도선은 주로 암벽(뒷방구) 밑의 회상에서 운영하고 이후 운영주체는 입찰을 보이기도 하였다. 현재 경천교 바로 위의 지역이며 목선이 없어지고 철선으로 변했을 때는 강 양안에 쇠줄을 매어 놓고 그 줄을 이용하여 내왕 하였다. 나루 본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경천교의 끝머리 중동 쪽에 옛 횟골나루터표지석이 추억을 되살린다.

 

3)대비나루(飛鸞津, 대비진, 큰 비라이진)

중동면 오상리 대비마을과 상주시 도남마을을 잇는 나루로 큰 규모라고 한다. 병성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바로 위쪽이라 예전에는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고 무임포라 불렀으나 도남서원이 건립된 이후로 도남리로 바뀌었다고 한다.부산에서 소금배가 이곳까지 올라와 주변에는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낙동강의 최상류에 설치한 상주보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도 역시 양수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상주보 사무실이 위치하고 위에는 飛鸞亭이 아닌 竹巖亭이 서 있다.

국토종주 자전거는 모두 이곳으로 달려 중동으로 들어와 중동교에서 낙동으로 나가며, 국토종주 인증센터가 있다.

4)강창나루(江濸津)

상산지에 在中東面竹巖津上中東通路라 적고 있는데, 중동면 죽암리 강창마을과 낙동면 신상리 주막걸 마을을 잇는 나루로 강 연안 중동 쪽에 관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가장 늦게 생긴 나루이나 군도 11호선 개설로 상주에서 중동으로 진입하는 가장 큰 관문의 나루가 되었다.

 

여름철에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다른 곳의 뱃길은 모두 끊어져도 이곳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건너는 곳으로 이곳에 배를 띄우지 못하면 낙동강은 그야말로 대홍수가 난 것이다.

1980년대 까지만 하여도 중동강가 백사장에서 목선을 건조(마지막 배 건조 대목장: 죽암거주 안창기씨)하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으며 배의 운영은 입찰을 보았었다.

 

신상리 국도25호선 까지 강물이 범람할 때는 목숨을 걸고 배를 산 옆으로 띄워 병풍산 밑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삿대(뱃지매)를 사용할 수가 없어 후리채로 배를 저어 죽암리 밑에 까지 가서야 당도 할 수가 있어 가히 를 넘나드는 지역주민의 도강(渡江) 모습이었다.

 

소를 싣고 다니기도 하였고, 강창잠수교가 가설되기 전 만 하여90cc이륜차 4대정도와 10여명의 사람을 함께 건너기도 하였다.

배 삯은 1인당 2~300, 이륜차는 500원 이었고, 지역민은 하곡과 추곡 각 1()씩을 기본으로 하고, 내왕횟수가 많고 가족이 많으면 더 받았다고 한다. 지역민의 친인척이 있는 곳은 먼 곳까지도 곡식을 받으러 갔다고 전한다(상주 도남·병성, 예천풍양 등:죽암리 거주 김국영씨). 강창잠수교 건너 낙동강제()에 서면 옛 강창나루터표지석이 길손을 반긴다.

5)대바위나루(竹巖津, 대바우나루)

낙동나루와 함께 오래된 곳으로 중동면 죽암리와 낙동면 분황리를 잇는 나루이다. 상산지에 竹巖津 有舡楫通左右往來라 적고, 의성주민과 중동의 아래쪽(하면)주민들이 토진나루나 강창나루를 이용하지 않고 상주로 통하는 지름길이다.

도로개설과 농촌주민의 급격한 감소로 이용객이 적어 일찍이 폐쇄 되었다. 최근 이 나루 위쪽에 국궁장이 조성되어 있다.

 

6)토진나루(兎津, 토전나루, 티전뱃가))

상산지에 後浦津上醴泉安東兩邑通路이라 적고 있는데, 중동면의 신암리(토진)와 낙동면 물량리(주막걸)를 잇는 나루로 도로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때에 河上무역의 중심지로서 해산물과 전곡이 교환되는 시장이 번성 하였던 곳이라 한다. 이후에도 실제로 兎津場(신암장)1957년도에 개설되어 1990년에 폐지되고 최근 까지도 시장의 장옥이 남아 있었으나, 상주 낙동사격장 안전구역에 편입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강의 수심이 깊어 포구로서 적당하여 상주에서 예천과 의성으로 연결되는 무역항으로서 갑술년 대홍수 이전까지 염창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양의 과거에 임하기 위하여 이곳을 이용, 중동면의 금당2리 다래마을을 거쳐 풍양을 지나 하풍나루를 이용하면 문경새재로 가는 지름길이라 내왕객이 많았었다고 한다.

국도25호선 낙동면 구잠리에서 토진으로 진입하므로 구잠1리의 이곳 마을이 토진목이라 불린다. 중동교가 가설되기 전까지 1인당 50~100원의 삯을 받았으며 차량은 500원 이었다. 지역민은 하곡과 추곡을 각 1()를 기본으로 하고, 내왕횟수와 가족수, 친인척에 따라 추가로 더 거두었다고 한다(신암리 거주 안문호씨). 이곳은 주로 화물차를 싣고 다닌 중요한 길목으로 중동교 건너 왼쪽의 광장에 서면 옛 토진나루터표지석이 설치 되어있으며, 현재는 국도59호로 승격 되었으며, 국토종주길 자전거는 모두 이곳을 지나간다.

 

7)물댕이(무댕이,작은마) 나루

중동면 우물1리 작은마을(수암종택 밑)에서 낙동면 물량리(탑말개, 봉양)을 잇는 나루로, 말지천과 토진나루를 이용하지 않고 상주로 이동하기에는 훨씬 지름길이다.

수암종택이 소재하고 또한 명문 풍산류씨의 세거지라 주로 한 문중의 나루이기도 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중동의 낙동강 구간중 가장 절경을 이룬다. 이 나루 아래로 뒤디미· 낙동나루가 있었다.

 

(2)위강을 이용한 곳으로

1)무릉나루

중동면 우물2(솥골마을)와 다인면 무릉리를 잇는 나루로 현재 솥골 큰 양수장 주변인데, 우물리에서 무릉리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이용 되거나 다인, 단북에서 우물을 지나 상주를 가고자 할 때 지름길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다인면 무릉리 주민들이 이 옛 무릉 나루터 위로 교량가설을 원하는 청원서를 경상북도에 제출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2)솥골나루(鼎谷津)

중동면 우물1(가실)와 우물2(솥골)를 잇는 나루로 1914. 4.1. 행정구역 개편시 우물2리가 중동면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나루의 필요성이 있었겠지만 안계, 단북, 단밀등 의성군으로 연결되기에 필요한 곳이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낮게 건설되어 홍수기마다 많은 불편이 있었으나 우물교가 완성되고, 군도22호선이 확·포장됨으로서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가실마을은 상주낙동강 공군사격장 안전구역에 편입되어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며, 나루의 기능은 완전 상실되고, 낚시객이 많이 찾았으나 4대강사업으로 인하여 지금은 이곳까지도 호수로 변하였다.

 

3)재궁나루

중동면의 우무실과 위강 건너 재궁과 왕래하던 조그마한 나루로서 주로 농사를 짓거나 재궁에 출입할 때 이용하였으나, 우물교가 완공되고 제방이 축조되어 솥골 마을에서 토봉 밑으로 농로가 개설되어 폐쇄되었고, 현재는 4대강사업으로 인하여 완전 담수호 상태로 변하였고 우물1리의 우무실 마을 또한 상주낙동강 공군사격장 안전보호구역에 편입되어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4)셉디나루

중동면 우물1(우무실)와 우물1(셉디마을)를 잇는 나루로 주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이용되던 곳인데, 토봉 밑을 돌아 농로가 완공됨으로 그 기능은 완전 폐쇄되고 고기잡이배로 이용되었으나, 이곳 또한 우무실 마을이 편입으로 없어짐에 따라 지금은 낙동강과 인접한 거대한 호수가 되었다.

 

4.나루 주변의 集成村

어느 지역에 언제부터 마을을 이루며 사람이 생활을 하게 되었지는 정확히 고증하기가 어렵다고 말 할 수 있다. 중동의 낙동강 연안 마을에 입향유래를 살펴보면 山紫水明한 이곳에 벼슬살이를 마치고 조용한 餘生을 보내기 위하여, 또는 生活苦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는 하여 등등 제마다 각각의 緣由를 가지고 삶의 터전을 잡았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강을 건너 정착한 이 지역에 한 姓氏10代祖 이상의 祖上을 모시고 지금까지 그 後孫繁昌하고 集成村을 이루고 산다는 것은 그 지역을 지켜왔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鄕俗文化에 기여한 이 많다고 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풍조가 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世居地를 떠나 도시로 移住 하면서 이제 집성촌은 노인들만이 지키고 어느 성씨의 세거지로서의 이름만 남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중동면내에 10代祖 以上 세거한 문중이 25門中이 넘지만 隣接하여 세거하고 있는 문중들을 살펴보면

 

1)봉화금씨(奉化琴氏)

임진왜란(1592)시 난을 피하고자 13參奉 大馹이 낙동강가에 움막을 짓고 갈밭마을에 정착 하였다고 전한다. 묘소는 회상리(갈밭) 마을 초입에 산15이다.

 

2)의성김씨(義城金氏)

입향은 1550년경 開巖 金宇宏선생으로 란봉(鸞鳳)의 인연으로 상주에 와서 낙동강 개암(開巖)에 별장을 열면서부터 라고 전합니다.

개암선생은 의성김씨 개암공파의 파조이시며 충청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을 지내셨다. 묘소는 회상리(맷골) 12-5이다.

 

3)동래정씨(東萊鄭氏)

입향은 조선조 光海君(1608~1623)亂政을 피하여 修撰公派 17承表이 이곳 회상리 횟골에 정착 하였다고 전한다.

묘소는 회상리 憲基山 子坐午向配位 恭人 開城高氏合窆이고 이후 司直이라 司直公派分派되어 派祖이시다.

 

4)함녕김씨(咸寧金氏)

입향은 1456~1460년경으로 錄事公派 15"諱 漢碩" 入鄕祖이시다. 당초 영주 순흥에 世居 하셨다고 한다. 그의 祖父 金季文(柳亭公)李甫欽등과 함께 端宗復位圖謀하다가 사전에 發覺되자 斬刑하지 못한다는 것을 豫見하고 滅門之禍만은 하기 위하여 그의 孫子 한석을 避身시켰다. 이때 한석의 나이 20, 率孩兒二人遂出門南行晝伏夜徒引一兒負一兒坡蒙我林登山渡水千辛萬苦 끝에 다다른 곳이 이곳 중동 땅이라 한다. 이 와중에 그의 조부모는 물론 부모, 심지어 그의 부인까지 잃은 채 生死도 모르고 묘소조차 없이 지내오다 지난 1960(庚子)에 그의 조부의 祭壇과 그 후 1970(庚戌)에 부친 宗貞祭壇設立하여 오늘에 이른다. 입향조의 묘소는 오상리 산84-1이다.

 

5)상산김씨(商山金氏)

1602년경 贈 通政大夫嘉善大夫 吏曹參判 內苑令公派 23日來이 입향조 이시다. 世居地는 상주시 도곡동(인평) 烏巖에 자리 하였는데 高祖父上護君 仁康公이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던 장소인 상주시 도남동으로 移住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그 후 화재로 인하여 宗宅이 불타고 先塋마져 를 당하자 선영을 강 건너 九舞山으로 이장하고, 오상리 대비동에 정착 하였다고 전한다. 입향조의 묘소는 오상리 산90(구무산)이다.

 

6)의성김씨(義城金氏)

1600년경으로 입향조는 "諱 聃壽(1535~1603)" 이시다. 賜號黃溪處士 이고, 西溪. 星州 倫洞에서 정유재란때 長子 廷龍예안현감 급 독운량관시에 중동 토진군량고 옆 죽암리에 피란(1596) 우거 하던 중 모부인이 1598臨終하시니 전란중이라 성주로 모시지 못하고 우물리 셉디 뒷산에 安葬 하시고 3侍墓後 죽암리에 세거 하게 되었다.

 

7)진주류씨(晋州柳氏)

1540년 전후 文成公派19이며 충북 황간의 縣監을 역임하신 "諱 滋" 이 입향조 이시다. 정확한 입증은 어려우나 황간의 현감을 지내시면서 山紫水明한 낙동강변의 중동 땅에 安坐하시고 有子孫繁盛居留한 것으로 추정된다. 죽암리 산72에 입향조의 단소가 있다.

 

8)파평윤씨(坡平尹氏)

1620년경 만돈암파 23"修義處士 諱 浩" 이 입향조 이시다.

6代祖 司憲府集義 師晳公子 石奧 公께서 청주에서 남하, 예천의 용궁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석오공의 자 殷佐公은 김천찰방을 지냈지만, 반복되는 사림파의 성쇠에 휘말리어 8명의 아들이 모두 고향을 등지고 피환의 길로 흩어졌다고 한다. 8형제중의 7째인 께서 어린 몸으로 고향인 용궁에서 살다가 돌아가시고, 입향조인 께서 다시 쫒기어 낙동강류에 몸을 의탁, 이곳 낙강변의 간상리에 정착 하셨다고 한다. 입향조의 묘소는 간상리 가무골이다.

 

9)풍산류씨(豊山柳氏)

1618년경 西厓 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修巖 柳珍" 이 우물리의 가사리에 터전을 잡으니 곧 입향조 이시다.

구전에 의하면 우복 선생이 스승인 西崖의 부탁으로 택지 하였다고도 하며 또는 이곳이 河回地形과 닮은 점이 많아서 라는 도 있다.

이곳은 三山(太白,日月,八公)終端地이며 二水(洛東江,渭江)合流하는 지점으로 梅花落地吉地라고 일컫는 곳으로, 愚川은 넓게는 중동면 우물리 전체를 말하고, 좁게는 修巖宗宅이 있는 마을만을 하기도 하는데 우천이라는 마을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이후 愚川派를 이루면서 많은 선비를 배출 하였고 江皐 柳尋春 - 洛坡 柳厚祚 - 溪堂 柳疇睦 - 江史 柳時浣으로 이어지는 은 우리지역의 자랑이다.

 

10)남원양씨(南原梁氏)

1595(선조28)경으로 입향조는 兵部公派18"杜菴 諱 世龍"이시다. 임란시 兵禍로 가족과 흩어져 都城을 빠져나와 流流轉轉 하신 끝에 飛鳳山 남쪽 二水三山調和하여 洛江을 사이에 두고 螺角山을 마주보는 길 기암절벽의 에서 난을 피하고 도성으로 돌아갔으나 天地荒亡하여 벼슬길도 버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터전을 삼았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암벽의 굴을 梁處士 窟이라 부르고 이후 南原梁氏 于勿派를 이루었다.

입향조의 묘소는 우물리 산13이다.

 

5.나루와 강 연안에 접한 문화유적

 

1)문헌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자연적인 것.

三呈巖: 중동 開巖下 白沙場 가운데 있으니 玉柱峰을 사이 에 두고 相對하여 서 있고 傳說에 모래가 이 바위를 묻으면 豊 年이 들고 못 묻으면 凶年이 든다 하였다.

현재는 회상2리 맷골마을 강변으로 낙동강의 개발로 인하여 볼 수가 없다.

竹 巖: 洛江北岸이니 金光準所卜이다.

죽암1리 대바위 마을 앞으로 현재도 옛날 그대로이며 위쪽 둔 치에 새로이 조성된 국궁장이 있다.

牛 巖: 渭江濱에 있으니 郡守 趙靖舊業이다. 盤石江 邊에 깍은 듯 높이 솟아 있는데, 넓이가 50~60명이 앉을만하 고 높이는 數十丈이나 되며 景致絶勝하고 展望이 좋아 오 르면 胸襟爽快하다. 趙靖昏朝政事紊亂하니 스스로 을 버리고 이곳에 退去하여 逍遙 吟賞하니 後人들이 景慕하 여 巖上에 글을 새겨두고 를 모으며 을 세워 管理 하였다.

우물1리 우물교 윗부분으로 반석은 그대로이고 지금은 이 부 분에 양수장이 설치되어 있다.

千仞臺: 洛濱에 있고 縣監 金覺卜所이다.

우물1리 낙동강변으로 지금도 그대로이고 지금은 낙단보 건설 로 호수가 되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최고의 극치를 자 랑 하는데 공군사격장 안전구역안 이다.

退致巖: 낙강상에 사인 강온이 거처 하였다.

신암리 토진으로 중동교 윗쪽으로 호수가 된 낙동강과 함께 절경이다. 토진고개 자전거길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비경이다.

龜 岩: 退致巖 아래에 마치 거북 모양과 같은 바위이니 姜溫孫 護軍 姜積이 이 터를 얻어 龜岩이라 이름하고 또 자기의

로 하였으며, 그의 叔父 貞靖公 姜士尙嶺南按廉

때 지은 墻梅得雨胎動 嶺栢經霜黛色寒 담장에 매화는 비를 얻 어 꽃이 피어나고 영마루에 송백은 서리를 겪고 나니 빛이 더욱 푸르구나라 하였다.

퇴치암 아래인데 낙단보의 영향으로 강물에 잠기어 볼 수가 없다.

 

)인위적인 것.

開巖亭: 洛江 上流副提學 金宇宏이 세웠다.

회상리 맷골마을로 옛 모습은 볼 수가 없으며 4대강사업 이후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열리면서 이곳 부근에 팔각정을 세웠다.

蕈巖亭: 회상 맷골에 있었으며 典翰 金弘敏이 세웠다고 하며 지금은 없다.

靑龍庵: 중동 靑龍山下 洛江邊에 있으니 道南書院해 있다.

회상리 산200번지로 飛鳳山(230m) 아래에 소재하고 법화종이 며 전통사찰 청룡사이다.

梧山書堂: 州東 25里 飛鸞村에 있었으니 처음에 寶灘上에 세웠 다가 임진란 때 燒失되고, 그후 梧桐梧山重建 하였으며 1719(숙종45)에 또 소실되어 중동면 서편인 현장소로 이건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飛鸞亭: 飛鸞津 옆에 判決事 趙珪가 세웠다.

오상리 큰비란으로 상주보가 축조 되었고 현재 竹巖亭이 서있다.

洛巖書院: 州東 중동면에 竹巖里에 있으니 1745년에 창건하여 參奉 金聃壽, 郡守 金廷龍, 生員 金廷堅奉享하였으며

1870毁撤 되었다.

지금은 중동면 대바위길 183-13으로 1988년에 복원 되었으며 편액은 洛嵓書院이다.

樂志亭: 竹巖下에 있고 傍近居人卜所인데 佳辰燕集하 는 곳이다.

죽암1리 대바위 마을인데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南溪亭: 죽암 樂志亭 아래로 南溪 康應哲이 세웠다고 한다.

죽암1리 대바위 마을인데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佳士村: 合江臺이며 渭水에 있으니 持平 柳珍卜地이다.

우물1리 가실 마을인데 없으며 지금은 낙동강공군사격장 안 전 구역이 되었다.

合江亭: 중동에 渭水洛江에 들어가는 地點縣監 金覺이 터 를 잡고 아들 知德築亭 하였다.

우물1리로 山頂에는 원삼국 시대로 추정하는 봉황성의 흔적 이 현재도 뚜렷이 남아 있다.

觀瀾亭: 중동 佳士里 東麓 渭水上持平 柳珍이 세웠다.

우물1리로 현재는 없다.

合江亭: 渭江洛東江合流되는 北岸洛西軒 李沆이 세웠다.

우물1리로 사격장안전구역이다.

 

溪 亭: 중동 佳士里 四,五坪의 땅에 溪堂 柳疇睦이 세웠다.

우물1리로 사격장 안전구역이다.

溪堂集: 在 愚川溪亭

 

상주낙동사격장

시 기: 1953년부터 사용

장 소: 간상리 일원 258만평(사격장:50만평. 안전구역:208만평)

 

) 주요인물의 소재지

金宇宏: 在 鷹洞 後, 後下有子得可

묘소는 회상리 산12-5에 소재하고, 재실은

회상리(맷골마을) 1363로 편액은 開巖亭이다.

 

趙 崇: 在 小飛鸞村 左後

묘소는 죽암리 산75에 소재하고 재실은

죽암리(소비마을) 1176로 편액은 飛鸞齋이다.

 

柳千之: 在 佳士里前 打麥臺

묘소는 우물교 입구이며 호는 漁隱(1616~1689)이다.

 

孫 登: 在 鼎谷村 南麓

묘소는 우물리 산32에 소재하고 재실은

우물리(솟골마을) 156-1로 편액은 涑村齋舍이다.

 

孫萬雄: 在 孫登墓 南麓

우물리 산30-1, 본관은 경주, 자는 敵萬, 호는 野村 (1643~1712), 동래부사, 경주부윤, 귀호사에 배향.

 

 

 

 

(손만웅신도비)

 

 

 

 

金 濤: 在 梧串村 後

묘소는 오상리(머그티) 40이고, 본관은 商山, 자는 長 源, 호는 恭黙堂(1626~?) 화암서원 배향

金安節: 在 干牧里 西麓

묘소는 간상리 산55에 소재하고, 본관은 商山, 자는 子 亨, 호는 洛涯(1564~1632),화암서원배향, 재실은

간상리(새가무골) 1527-1로 편액은 感慕齋이다.

李世仁: 중동면 洛江東岸 子 左贊成 沆

묘소는 우물리 산21에 소재하고, 본관은 星山, 자는

元之(1452~1516), 호는 蓮潭, 이조참의, 부제학. 황해도관찰사

 

)효행으로

金順發中東良人事父至孝年及九十坐以絹紬蒲團冬寒則抱父而臥以身溫之夏熱則扇枕而凉之甞置小鍋于爐上手自煮粥以進父或不食必免冠伏庭請罪及父歿哀號不絶葬前居宿于殯三年內不越塲市本面士林嘉其孝呈官免役(중동에 良人이다. 事父에 지효하여 부친의 연세가 90에 이르니자리에 앉으면 명주로 둥글게 싸고 겨울에 추우면 안고 누워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 더우면 부채로 베개머리에 부쳐 시원하게 하며 항상 적은 냄비를 화로 위에 얹어 놓고 죽을 드리다가 혹 잡숫지 않으면 관을 벗고 뜰에 내려가 請罪하여 끝내 식사를 하도록 하였다. 父 歿葬前에는 빈소에만 거처하며 哀毁不絶하였고 3년내 한번도 시장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사림에서 그의 효행을 嘉尙하여 襃呈하니 드디어 免役이 되었다)

2)낙동강 연안의 여러 문집

)修巖先生文集 全: 19809柳時浣이 발간 하였으며

저자는 柳診(1582~1636)으로 季華, 修巖, 豊山으로 선생의 문집을 한서편과 국문편으로 간행 하였다.

 

)洛坡先生文集 全: 19957월 류한민이 발간 하였으며

저자는 柳厚祚(1798~1875)으로 豊山으로 선생의 ··告由文· 祭文· 등을 간행 하였다.

 

)溪堂集: 19849월 계당선생문집발간위원회가 발간 하였으며 저자는 류주목(1813~1872)이며 豊山으로 선생의 시문집,편찬물등을 한데 묶어 간행 하였다.

 

)克菴集 全: 20068柳洛佑가 발간하였으며 저자는 한말에 해박한 학문과 고고한 덕행으로 향당의 흠앙을 받았던 柳欽睦(1843~1910)이다. 致潔, 克菴이며, 豊山으로 선생의 · · 祭文· 告由文旣刊 한문본 문집을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국역하여 重刊 한 것이다.

 

)西溪先生逸稿 全: 19962월 발행 하였으며 저자는 金聃壽(1535~1603)이며 台叟, 書溪, 義城으로 선생의 · ·附錄· 追錄으로 편집 발행 하였다.

 

)洛隱集: 저자는 金起洙(1734~1790)이며 洛隱, 商山으로 선생은 일찍이 중동면 中里隱居하여 하였으며 孝行友愛로서 추앙을 받았다. 문집은 한권으로 를 비롯하여 遺事· 記文· 書簡 등이다. 선생은 警遺錄도 남겼는데 총10권이다.

 

)周易講究: 1978년에 저술 하였고 저자는 金有福(1926~1982)으로 주역의 각 괘마다 분석하고, 본인의 이론을 정립하였는데, 형식은 詩經四字句 형식을 취하였고 모두 한문으로 기술한 手書本이다.

 

)開巖集: 개암 김우굉(1524~1590)의 문집으로 6대손 경렴이 1729散佚되고 남은 시문을 수집, 편차하여 행장과 연보 등 부록을 증보하여 1772년에 목판으로 간행 하였으며 4권으로 구성 되어 있다.

 

3)강과 관련된 여러 글

)行過洛東江(白雲 李奎報 1168~1241)

百轉靑山裏 閑行過洛東 草深猶有路 松靜自無風

秋水鴨頭緣 曉霞猩血紅 誰知倦遊容 四海一詩翁

(푸른 산 속을 굽이돌아 한가한 길, 상락(上洛)의 동쪽을 지나네.

수풀 깊어도 길은 오히려 났는데, 솔숲 고요해 절로 바람기 없네.

가을 물은 오리머리처럼 푸르고, 새벽안개는 성혈처럼 붉네.

누가 알랴, 지루한 나그네가, 사해의 한 시옹(詩翁)인 줄을)

 

)開巖亭(開巖 金宇宏1524~1590)

山本白頭出 江分文莊來 走流多屈曲 凝峙幾縈廻

臺政鰲跌伏 岩眞龍口開 主人晩卜築 恐被白鷗咍

(산은 백두에 근본해 나고 강은 문장에서 나누어 온다. 빨리 흘러 굴곡이 많은데 얽힌 때에 몇 번이나 둘렀던고 대는 정히 새우가 엎드렸으며 바위는 참용이 입을 벌였다. 주인이 늦게 집을 찾으니 백구의 웃음을 입을까 두려워 하네)

 

)開巖十二曲 中 八曲(開巖雜錄에서)

묻노라 버리바회야 얻디하여 버럿

萬頃滄波水를 다마시랴 버러다 우리도

人間翻復을 몬내 우서버런노라 - 開巖-

鰲臺邊玉柱峯을 어니년에 가션고

亭亭矗矗하며 壁立萬仞나 만일에

天柱옷것거디면 네바틸가 노라 -玉柱峯-

突巖諺傳이요 鰲臺뉘디은고

龜巖이라노니 洛龜呈瑞

네귄가 노라 -龜巖-

 

遠山에 비걷든 前江진저긔

一片苔磯에 낟대를 빋기들고 몰래라

富春山釣臺도 이러턴동 마던동 -釣磯-

 

野渡一片舟 멷사건네노라

  쉴적업시 니다가

明月을 싣고 절로 沂沂- 虛舟-

 

二十年役役紅塵汚각거든 싀여싀틋 이리됴흔

江山을 누를주고 가잇던고 이야 오나니

白鷗를 벋들삼고 終老노라 -歸來-

 

江村에 비린날 벋보랴 가랴고 술걸러

병에 너코 芒鞋로 내거니 이슬겨워 옷전

舟子가저오리 가쟈 - 訪友-

 

백사중 엎드려인 뎌바회야 얻디거시

나면 흉년들고 물들면 풍년 고두어라

나인전에 란드럿다 어더-三呈巖-

 

)登 靑龍寺(克菴 柳欽睦1843~1910)

叢林尙在鳥聲間, 滿月荒凉晝掩關, 悅㤼千年同火電

臨江一面映衣冠, 心如明鏡無些累, 脚踏懸崖到底艱

(빽빽한 숲에선 아직 새소리 들려오는데 보름달 떠도 황량하고 낮에도 대문 닫혀 있네. 흐르는 천년 세월은 전광석화와 같고 강에 임한 한쪽 면이 옷에 어른거린다. 마음이 맑은 거울 같으면 조금의 번뇌도 없으나 낭떠러지 밟아가면 아무리 해도 어렵지)

屛城古堞

蒼屛聳立起千古 伊洛東流連大浦 羅濟之間列國多 彈丸愼勿瞰來覜

(푸른 병풍산 우뚝히 천고에 섰는데 이수와 낙수가 동으로 큰 포구에 이었네.

신라, 백제시대 열국의 다툼 많았거니 조그마한 땅이라 내려다보지 말라)

 

)竹巖(龍岡 金光澈1712~1770)

丹厓翠壁兩江灣 玉露銀沙十里間 天地幾回今夜月 風烟無讓古江山

堪傳勝事庚寅後 何待淸秋壬戌還 酒盡更闌相枕籍 不如擄沬濺人顔

(붉은 언덕 푸른 절벽은 두 강의 물굽이에 있고 옥 이슬 같은 은모래는 십리에 펼쳐졌네. 천지는 몇 번이나 오늘 밤의 달을 돌렸던가 풍연은 옛 강산에 양보할 것이 없네. 하늘이 베푼 오늘의 승사(勝事) 경인년(1770) 뒤에 어찌 맑은 가을에 임술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랴. 술 다하고 밤도 깊어 서로 베고 잠이드니 노에서 튕기는 물방울에 얼굴 젖는 줄도 모르네)

 

) 月潭 金廷龍(1561~1619) 선생의

僑寓洛東江上村 滄浪千頃護柴門 松間竹裏成茅棟 借與鳥衣養子孫

(낙동강 상류의 촌에 우거하니 푸른 물결 천 이랑이 사립문을 보호하네.

솔숲 대숲에다 띠 집을 얽고 오의항(烏衣巷)을 빌어 자손을 기르네)

 

)題 合江亭(金 覺1536~1610)

沙岸松皐枕碧流 計將終老築葂裘 窓前二水千尋合 天外三山一髮浮斜日渡江飜絶壁 行雲拖雨過長州 世間萬事無心久 磯上閒盟共白鷗

(모래톱 솔두둑에 푸른 물 베개하여 늘그막을 위해 토구를 쌓는다. 창 앞의 두 물()은 천 길로 합했으며 하늘 밖 삼산(三山)은 한 터럭같이 떴다. 석양은 강을 건너 절벽에 번득이고 가는 구름 비를 안고 장주를 지난다. 세상 만사에 뜻 없는 지 오래 낚시터 한가함을 백구와 기약한다)

)千仞臺(江臯 柳尋春1762~1834)

千仞臺何許 翠屛天半垂 中間風度急 高處鳥飛危

淸露承盤影 癯仙立月儀 休祥多聖世 丹鳳未應遲

(천인대가 어떠하뇨 푸른 병풍이 하늘가에서 드리워진 것이다.

중간은 바람이 겨우 지나가게 되고 높은 곳은 새가 날기도 위태롭다. 맑은 이슬을 쟁반에 받든 형상이고 늙은 신선이 달빛에 서 있는 모양이다. 聖世에 아름답고 祥瑞로운 일 많으니 붉은 봉황이 오는 것이 아마 늦지 않으리)

 

 

(천인대)

 

) 河南寓鄕(‘90년 임하댐 건설로 34가구 移住)

흘러 흐르거라 飛鳳을 감아 돌아라, 하남 구곡 상류 반 천년 열두 동네 이끼 묻은 주춧돌 벌레 먹은 서까래 갈앉은 임하다목적댐을 뒤돌아 보던 날 藥山 鵝歧山 뼈마디 들석거리고 소쩡도 부엉도 차마 설워 목을 태웠지, 안동땅 동쪽 반변 구곡 상류 하남 악사 도연 국란 화곡 지풍 후평 천곡 지동 아, 세세년년 글 읽으며 밭갈던 가향, 낯 설고 물설은 땅 상주 중동 오상리에 꿈에선 아기산 솔소리 깨면 落淵 물소리 지산마루 뜬 구름 辛酸을 삭이고 삼키면서 비봉산하 낙강 물머리 대비마을 여기에 보아라, 六姓寓鄕 서른네집 새터 열고서 웅비할 기상으로 나래 접고 앉아라 흘러라 흘러 흐르거라 비봉을 감아 돌아라 하남 구곡 상류 산자락이여 물굽이여.

1990. 5. 金鱗九 , 金時雄 .

 

4) 현재까지 이어지는 문화편으로

)洛江詩會

시 기: 매년 정기적으로 (축제기간 중)

장 소: 도남서원 일원(변동)

내 용: 낙강시제, 낙강범월시회 재현, 전국한시백일장 등

주 최: 세계유교문화재단(상주시 후원)

 

)江史儒契 (1997. 4.26 발기)

시 기: 매년 4

장 소: 중동면 우물리(수암종택)

내 용:

-강사 류시완 선생 추모사업(사단법인 강사기념사업회로 변경)

-강사문화 창간호 발간- 700(2014)

 

6.4대강사업 이후 변화된 나루공간

 

상주보 건설:

기 간: 2012. 6.30 준공

시설설치: 가동보105m,

고정보230m,

전도식가동보45m,

관리교540m,

어도700m,

수력발전소1,500KW*2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사업기간: 2009~2013(922억원)

부지면적: 123,592. 건축연면적 23,458

주요시설: 연구·수장, 전시·교육, 방문자숙소등

전시물관람: 생물표본 2,000여종 5,000여점 전시

교육, 영상관

임시개관: 2014.10.10~ 일주일에 3(,,) 사전예약

 

자전거 박물관

개 관: 2010. 10.27(남장동:2002.10.26)

규 모: 부지 28,778, 건물 2,874(지하1,지상2)

주요시설: 체험자전거 대여소, 전시관, 기획전시실, 영상관

 

낙동강 자전거이야기촌 조성

기 간: 2010~2017

장 소: 사벌면 삼덕리일원(국제승마장 주변) 부지 929,305

내 용: 자전거를 테마로 한 관광레저 인프라 구축

 

전국국토자전거종주길 (상주구간: 50km정도)

구 간: 서해 아라뱃길~ 충주~ 상주~부산: 620km정도

통과인원: 34,250여명(2015. 2.12 현재)

4대강 자전거길 有人인증센타 소재(상풍교,낙단보무인)

 

낙동강자전거종주길 (상주구간: 32km정도)

구 간: 안동댐~상주~부산: 385km정도

통과인원: 37,070여명(2015. 2.12 현재)

 

전국 MTB 챌린저 대회

시 기: 매년10월중

구 간: 37.3km

참여인원: 1,500명정도(전국에서 참여)

낙동강 수상레저 기반시설 조성

기 간: 2013~2015

장 소: 도남동, 상주보 일원

내 용: 자전거,승마,활공,서바이벌,국궁장,수상레저로 이어지는

종합레포츠벨트 구축

 

낙동강 국민여가캠핑장 조성

기 간: 2014~2015

장 소: 도남동 송악공원

내 용: 체류형 관광객 수용, 주변관광자원과의

시너지효과 창출

 

낙동강 신나루(회상나루) 조성

기 간: 2011~2015

장 소: 중동면 회상리 일원에 부지 164,900

내 용: 나루, 객주촌, 주막촌, 낙동강문학관, 주차장

 

낙동강 역사이야기촌 조성

기 간: 2010~2015

장 소: 낙동면 낙동리 일원에 부지 148,558

내 용: 역사이야기관, 단지조성, 나룻배민속타운 등

 

경천섬 관광자원화 사업

기 간: 2015~2016

장 소: 경천섬 일원

내 용: 현수교(330m) 설치.

 

향후 상주낙동사격장의 이용

 

7. 맺 음

상주에서 낙동강 兩岸을 모두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동쪽의 중동면을 접한 지역으로서 4대강사업 이후 상주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효자인 것이다. 상주가 이 지역에 관광산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바, 보다 더 체계적으로 알찬 계획을 세우고, 적절한 예산을 투입, 낙강시회를 바탕으로 한 선비문화를 재정립 하고, 상주의 옛 영화를 되 살려 시대에 맞는 문화로 계승발전 시키고, 사격장을 이용한 발전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하여, 누정문화에서 여유(여가)문화로 새롭게 태어나 찾아오는 상주, 볼거리가 있는 상주, 즐길거리가 있는 상주가 되어 재도약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낙파 대감의 이야기

(낙파대감 6世孫 昌夏 글 중에서)

)갸륵한 여인 40년간 致誠을 드린 힘...

온천지가 백설로 뒤덮인 엄동이었다. 경북상주군우천으로 가는 길목의 토진(兎津)나루터, 인가가 끊긴지도 5리가 되는 그림 같은 백사장 위를 한 떼의 인마가 지나가고 있었다. 가마 앞뒤로 하인이 따르고 또 그 뒤를 부담농을 바리바리 실은 말 몇 필이 더운 김을 내쉬며 가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그뿐 그것마저 없었다면 토진 나룻 터의 설경은 한 폭의 동양화를 떼다놓은 것과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정적을 깬 것은, 어디서 얼어붙은 듯한 가느다란 아기의 울음소리가 찬 공기를 타고 계속 들려왔다. 가마 안의 문이 열리고 사대부집 자제답게 수려한 얼굴이 나타나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살피다가 다시 사라지며 문이 닫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가마 행열은 몇 발자국 못가서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전 고개를 내밀었던 훤칠한 키의 미소년이 모래사장 밖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거참 이상한 일이다. 이 추운 겨울 벌판에 어디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난 담그 미소년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듯 하인들을 바라보며

너희들은 울음소리가 들리자 않느냐?”는 듯 물었다.

글쎄올시다. 보시다 시피 이 나루터를 건너야 할 토진 주막집이 한 채있을 뿐인데요허리를 조아리고 있던 하인하나가 춥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을 했다. “저리 가보자갓 결혼한 듯 틀어 올린 상투가 아무래도 어색해 보이는 미소년이 백여 보 옆으로 총총이 줄지어 서있는 버드나무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 나으리 그 눈 속에 빠지시면 발이 얼어 붇습니다. 제가 달려가 보고오지요

뒤 따르던 하인이 염려스럽다는 듯 나섰으나 미소년은 멈추지 않은 체 찬바람소리가 윙윙 나는 버드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미소년은 몇 걸음 못가 !”하고 가벼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멈춰 섰다.

바로 거기였다. 백여 년을 좋게 넘었을 싶은 아름드리 버드나무 고목 속에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나고 있는 것이다. 나무껍질 뿐 속이 텅텅 비어있는 고목 속에 남루한 차림의 여자걸인 하나가 막 해산을 한 후 삼을 가르고 있는 중이었다. 피투성이 어린애 몸엔 다 낡아 혜진 여인의 치마폭 하나와 보드라운 갈대 잎 몇 웅큼 뿐 어린애와 산모는 얼마못가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여인은 기진한 듯 눈을 힐거머니 뜨고 그 미소년을 쳐다보았지만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가마를 이리 갔다대고 이불도 한 채 가져 오너라뒤이어 쫓아온 하인에게 소년이 말했다. “가마를요?” 하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엉거주춤 서 있었다. “뭘 꾸물 거리는거냐? 냉큼 부르지 않고소년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하인은 놀란 듯 불이나케 가마 쪽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가마가 달려오고 뒤이어 말위의 부담 농속에서 방금 시친 듯 한 새하얀 비단이불하나가 내려졌다. “어서 어린애와 저 여인을 싸서 가마에 태워라.”

도련님은요소년은 멍청하게 서있는 하인을 답답하다는 듯 직접 피투성이의 아기를 들어 이불에 쌓다, 하는 수 없는지 하인들도 우루루 달려들어 여인을 등에 업고 가마에 태웠다. “가자 난 걸어가면 된다.” 또다시 행열이 시작되었다. 조금 쉰 데다가 이불 한 채가 떨어져 나간 탓인지 말굽이 한결 가볍게 옮겨졌고 가마 안에서 간혹 나오는 어린애의 울음소리만 없으면 조금 전과 하나도 다름없는 행열 이었다.

 

일행은 얼마못가 나루터에 닿았다. 하인하나가 건너편 주막집 쪽으로 소리치자 사공이 배를 져어 건너왔다. “아이고 초행길에 피곤 하시겠읍니다뱃사공이 건너와 소년에게 인사를 했다. “이 추운 날씨에 우리 때문에 수고가 많소인사를 받은 소년은 <초행>이라는 말에 새삼스러운 듯 틀어 올린 상투와 망건을 매만지며 배에 올랐다. “그렇잖아도 대감마님께서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서 오늘 <초행>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니 나룻터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대감마님이란 낙파 류후조의 어머니다. 낙파의 아버지 당대에서 대감까지 벼슬이 오르진 않았지만 대대로 동리사람들은 낙파의 집을 류대감 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15살 나던 낙파가 네 살 위인 연안이씨 (상주의 학자 芹谷 (근곡) 李觀微(?)의 손녀)에게 장가를 들었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거지여인의 해산을 보자 서슴없이 비단이불 한 채를 꺼내 구한 것이다.

이윽고 배는 토진 나루터에 닿았다. 일행이 내리고 가마에 탄 산모도 내렸다. 토진나루터서 얼마 못가면 바로 주막집이 있었다. 비록 초가삼간이긴 하지만 여름철엔 길손이 목을 추기고 큰 물이 불어 나룻배를 띄울 수 없을 땐 몇일 씩 묵어가기도 하는 일종의 여관이었다. 또 겨울이면 늙수구레한 나이의 주모가 따라주는 탁배기에 언몸을 녹이며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동네의 인심을 점치는 그러한 곳이기도 했다. “애들아 여기 좀 쉬었다 가자 새신랑 차림의 낙파 행열을 멈추게 했다. 바깥 인기척에 놀란 주모 내외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아이구 도련님께서 이 누추한 곳을 찾으시다니주모 내외는 송구스러운 듯 어쩔줄을 몰랐다. “아니 관계찮소 먼길을 오느라 모두 몸이 꽁꽁 얼었는데 탁주나 몇 되 놓으시오낙파는 툇마루를 성큼 올라서서 주모가 안내하는 토방 안으로 들어가 좌정을 하며 먹을 것부터 먼저 시켰다. 하인들은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차에 주인어른이 선심을 베풀자 부엌 옆 양지바른 봉당위에 앉으며 짚신에 묻은 눈덩이를 털어냈다.

가마안의 여자를 이리 들려라 .그리고 주인양반 나좀 봅시다.”낙파는 방안에 엉거주춤 하게 서있는 주막집 주인을 당기듯 잡아 앉히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내 초행길에 오다가 노상에서 해산하는 여인을 하나 데려왔는데..” “아이쿠 네.” 주막집 주인은 사뭇 황송스럽다.

 

지금 집에 데려가기도 뭣하고 하니 이곳에 방하나 비워 산후조리 좀 잘 시켜주게. 그 사례는 내가 섭섭지 않게 해 주리다.” “그야 여부 있겠습니까. 사례 같은 건 아예 말씀도 마십시요. 그런 분부가 없다 하더라도 성심껏 돌봐 주는 게 인정인 뎁쇼.” <주막집 주인은 감히 누구의 예기라고 거역을 하겠습니까.>하는 투다. 그때 이불속에 푹 싸인 여인과 어린애가 들어왔다. “바로 저 사람인데 우선 따뜻한 국물이라도 좀 마련해 주게 내 집에 가서 미역이라도 있으면 좀 보내리다.” 낙파는 갖고 있던 돈을 한웅큼 꺼내 주막집 주인의 손바닥위에 쥐어주었다. “아니 이렇게 많이 주신다니주막집 주인의 말을 낙파가 가로막았다. “아무소리 말고 받아두게 추운 삼동안만 잘 조리시키면 회복할 걸세낙파는 이불속을 헤집고 힘없이 핏기가 없는 얼굴을 드는 산모를 바라보며 일어섰다. 삼동지내고 완쾌 되거든 우리 집에 들렸다가 가시요.” 여인은 감동스런 얼굴로 낙파를 쳐다보았다.

 

마당에선 술좌석이 한창이었다. 낙파는 툇마루로 나와 하인들의 흥겨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빨리 마셔라. 도련님이 나오셨다.” 눈치 빠른 하인하나가 술을 마시다 말고 일어서며 재촉했다. “아니 괜찮다. 있는 술은 다 마시고 가야지.” 낙파는 손짓으로 하인들 눌러 앉히면서 신을 신었다. “그런데 말이다. 너희들 집에 가서는 오늘 있은 일 일체 말하지 말도록 해라. 알겠느냐?”

낙파는 속으로 미리 뭔가 생각하는 듯 하인들에게 미리 다짐을 받았다. 낙파의 이러한 예견은 집에 도착하자 딱 들어맞았다. 결혼 예물로 바리바리 실려온 물건과 물목을 대조하던 낙파의 어머니가 이불 한 채가 빈 것을 안 것이다. “이상한 일이로다. 다른 것은 다 맞는데 이불 한 채가 비어 있담. ”

주인마님 앞에 불려온 하인은 아까 주막에서 낙파에게 다짐한 사실도 있고 해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면서 아버지에게 신행인사를 드리려고 낙파가 있는 사랑채 쪽으로 힐끔힐끔 바라보기 만 했다. “글쎄 옳습니다요. 소인들은 모르는 일 이옵고 혹시 도련님께서는 아실런지요..” 잠시 후 사랑방에서 나온 낙파를 어머니가 불렀다. “애야 어째서 이불 한 채가 비느냐?” “예 소자가 오다가 딱한 사람에게 이불 한 채를 적선 했읍니다.”

아니 적선이라니?” 낙파의 어머니는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예 강을 건너오기 전에 허허벌판 눈구덩이 위에서 여자하나가 해산을 하고 있길래 동사를 면하라고 한 채 주고 왔읍니다.” “아니 얘야?”

낙파 어머니는 기가 찬 듯 말했다. “어머니 어떻게 합니까.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도와 줘야지요” “글세 네가 한 일이야 참으로 잘한 일이지만 하필이면 초행 갔다 오는 그 귀한 이불을 내 주었다니 딱해서 그런다.”

죄송합니다.” 낙파는 어머님께 허리를 조아렸다. 바깥이 한참 소란하자 사랑채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낙파의 아버지가 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내 밀었다. “아니 부인 무슨 일로 이 경사스런 날에 소란을 피우십니까?” 강고 <江皐>가 얼굴을 내밀자 대청마루에서 두 모자사이 오가던 대화도 주춤했다. 원체가 조용한 것을 즐기는 남편성미를 잘 아는 부인은 그냥 조용히 덮어둬도 될 일을 괜스FP 끄집어내어 남편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낙파는 낙파대로 내가 너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선뜻 예물로 온 이불 한 채를 줘 버린 게 부모님을 심려하게 만들었구나 하고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막상 따지고 보면 그렇게 잘못한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거늘 한사람의 목숨도 아니고 갓 태어난 어린생명까지 생각하면 이불 한 채가 아니라 열개라도 주고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게 도리인 것으로 어린 낙파는 생각 되었다. 말이 오리지 실제로 걸어보면 십 여리가 좋게 되는 그 백사장 버드나무 속에서 해산한 여인을 만약 자기들 일행이 구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죄가 될 것 같았다. “초행길 집으로 오다가 강 건너 벌판위에서 해산하는 아낙이 있길래 이불 한 채를 주고 왔습니다용기를 낸 낙파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께 말했다.

별일 아닌 것으로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일이야 참으로 잘한 일이지만 하필이면 사돈댁에서 갖은 정성으로 만들어 보낸 신혼금침을 내주었다니까 약간은 꺼림해서 하는 말 이지요낙파의 어머니가 자초지종을 덧붙여 이야기했다. 강고는 왼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어 그것참 장한 일이로고 내 나이 오십이 넘도록 그런 생각은 미쳐 하지 못할 터인데 ...그참 잘한 일이로다낙파는 아버지의 찬사에 가까운 칭찬을 듣자 가슴속에 꽉 막혔던 체증이 저절로 가시는 것 같았다. 어머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그 역시 속으론 찜찜한 점이 없지도 않았던 게 사실이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소자의 미거를 그렇게 칭찬해 주시다니 오히려 몸둘바를 모르겠읍니다.” 낙파의 얼굴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빛이 떠돌았다. 그는 다시 어머니께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어머님의 말씀 또한 깊이 새겨 듣겠읍니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덤비지 말고 냉철한 판단으로 행동하라는 분부로 알겠읍니다.”

오냐 오냐 그래 잘했다. 아버님께서도 저렇게 기뻐하시니 나의 조그만 염려야 문제될 것도 없다.” 낙파의 어머니는 남편 앞에서 칭찬을 받는 새신랑차림의 아들이 새삼 대견스러운 듯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러한 어머님의 가르침이 훗날 낙파의 관직생활에 큰 영향을 끼쳐주었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덤비지 말고 냉철한 판단을 한 후에 행동하라 이것은 그가 70이 넘도록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신조처럼 지켜진 것이다.

그러는 새에 그해의 길고도 추웠던 삼동도 다 지나갔다. 풍습에 따라 초행을 다녀 온지 얼마 뒤에 재행과 삼행을 다녀왔고 그때마다 토진나루터의 주막집에 하인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신랑 낙파에겐 그해의 삼동이 그의 인생에 큰 의미를 준 해였다. 그동안 단편적인 지식의 가르침만 주던 아버지 강고가 이젠 어리지만 어였한 한 여자의 지아비가 된 낙파에게 그대로의 세상을 살아가는 경륜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당대의 유명한 한학자이고 입제(立齊) 정종로(鄭宗魯)문하에서 수학한 아버지 강고는 정조 10년에 司馬試에 올랐고 그 학행이 높아 왕세자 삼대에 걸쳐 (순조 純祖, 翼宗익종, 憲宗헌종)洗馬(세마=왕세자의 스승)를 지냈고 또 堂上官인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관직을 즐기지 않아 끝내 사양하고 낙향했기 때문에 낙파는 아버지로서보다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강고를 존경해 왔다. “선비는 글만 읽는다고 되는게 아냐.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고 진실 앞에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히지 않는 제 나름대로의 경륜이 있어야 한다. 특히 공직에 있을 때의 책무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다. 그러한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돌볼 생각은 않으면서 당파에만 얽매인 관리는 북쪽 오랑캐보다 더한 역적과도 다를 게 없다. 모름지기 참된 관리가 되려면 經書한권 더 아는 것 보다 땀 흘리며 일하는 백성들의 노고를 아는 일이다아버지 강고는 밤마다 낙파 형제를 불러놓고 참된 선비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見物生心이란 말이 있지만 사람은 뭣에든 너무 탐을 해서는 않된다. 조물주가 세상에 인간을 내어 놓을 때는 다같이 먹고 잘 살수 있을 정도의 양식이 있기 때문에 내어 놓은 것이다. 그러한 것을 몇몇 특권층 사람들이 탐을 내기 때문에 온갖 사악한 부정부패가 생기고 도둑이 생기고 살인이 생기고 인간이 인간을 서로 못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역시 다 탐욕에서 기인된 것이다. 위정자들은 우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아버지의 꾸밈없는 가르침을 듣다가 보면 삼동의 긴 겨울바람도 잠깐이었다.

그러는 새에 봄이 왔다. 정월이 지났는가 싶게 사랑방 서창사이로 모진 절개를 자랑하듯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아침 저녁 부는 바람이 한결 부드러워 진 것은 사실이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앞산 구석구석엔 아직도 잔설이 남아있었다. 그전날밤 늦도록 책을 읽은 탓인가. 점심을 먹고 난 낙파는 읽던 책을 그대로 둔 채 서탁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었다. 한숨이나 잤을까. 낙파는 갑자기 누가 흔드는 바람에 잠을 깼다. “누구냐?” “. 저 소인입니다. ” 잠을 깨운 건 집안 대대로 충복으로 내려온 하인이었다. “웬일이냐.” 낙파는 괴이쩍다는 듯 긴 하품을 하며 하인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왔읍니다. 왔어요.” “아니 오다니 孝祚 가 왔다는 말이냐?”

낙파는 혹시 사흘 전 사냥을 간다고 집을 나선 동생 효조가 왔는가 싶어 물었다. 사실 같은 쌍둥이 형제였지만 두 사람의 성질은 너무나 달랐다. 동생 효조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보다는 놀고 즐기는 잡기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여서 부모님도 내색은 않지만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흘 전에도 그랬다. 같이 책을 읽던 효조가 괜히 주리가 틀리는 듯 기지개를 하더니 이렇게 코리타분하게 책만 읽고 있다간 완전히 책상물림의 따분한 서생노릇밖에 더 하겠읍니까?”면서 갑자기 사냥을 간다고 부산을 떨던 것이다. 형로서 낙파는 몇마디 충고하고 싶었지만 아직 장가도 못간 몸이 오직 쓸쓸하겠느냐 싶어 그대로 보냈던 것인데 부모님이 걱정을 하자 자꾸만 동생이 기다려지던 참이었다. “아닙니다. 작은 도련님이 이틀 후에 오신다고 했는뎁쇼하인은 그게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그러면 누가 왔단 말이냐?” “..아기를 낳은 여자가 왔단 말입니다.”하인은 답답하다는 듯 낙파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놈아 그렇다면 진작에 그렇다고 말 할 것이지..그래 지금 어디 있느냐?” “. 대감마님께 인사드리러 안채로 들어 갔읍니다.”

하인은 그제야 자기가 두서없이 말한 것을 알고 뒷머리를 긁었다.

알았다. 내 곧 안채로 들어가마.” 낙파는 읽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그렇지. 그러고 보면 벌써 삼동이 지났구먼. 모자가 모두 큰 탈 없이 지냈는지 모르겠군. 낙파는 혼자 말을 되 내이며 뜰을 내려 안채로 들어섰다. 안채 마당엔 말끔히 차려입은 젊은 여인 하나가 어머니께 막 큰절을 끝내고 있는 참이었다. “. 부인 무사하셨구려.” 낙파는 반가운 듯 웃음을 띠면서 마당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애를 번쩍 들어 안았다. “ . 이놈 참 준수하게 생겼구나...” 아이는 낙파의 얼굴이라도 아는 듯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도련님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 드려야 하올지.. 참으로 백골이 난망이옵니다...” 여인은 낙파를 보자 새삼 추운겨울을 강바닥의 썩은 고목 속에서 해산을 하던 일이 생각 키운 듯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부인 일어 나시요. 내가 뭐 그리 크게 도운일도 없거니와 사람이 사경을 헤멜 땐 누구나 우선 살리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소.” 낙파는 안고 있던 어린애를 여인에게 건네주면서 계집종에게 부축해 일으키라고 눈짓을 했다. “애야. 네가 좋은 일을 해서 목숨을 건진 두 모자를 대하니 내 마음도 흐뭇하구나.” 낙파의 어머니도 코끝이 찡한 듯 손수건을 눈으로 가져갔다.

. 부인 보아하니 걸인은 아닌 듯 하고 필경 무슨 사연이 있는 여념 집 사람 같은데 이리 올라오시오낙파는 아직도 울고 있는 여인에게 방으로 들도록 권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대감님계신 그곳에 같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아옵고 생각 끝에 평생토록 대감댁에서 밥이나 지으면서 제 힘 닿는 데까지 일이나 해드리면 그 은혜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을까 싶어 이렇게 찾아 뵌 것 뿐 입니다.” 여인은 권하는 자리를 굳이 사양하며 마당에 그대로 서 있었다. “부인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예에서 벗어난다 했으니 주저 말고 어서 방으로 드시오보다 못한 낙파가 끌어당길 기미를 보이자 여인은 마지못한 듯 방안으로 들어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 부인의 고향은 어디요? ” 낙파는 아무래도 여인이 노상에서 해산을 하게 된 내력이 미심적은 듯 물었다.

강릉이 옵니다.”

강릉이라면 이곳에서 천리 길이 좋이 되는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왔소?”

소인의 지아비께서 저 애를 밴지 두 달 만에 돈 벌어 오겠다면서 집을 나갔습니다 만 그 뒤 편지 한 장 소식하나 전해 듣지 못 했읍지요

그래서요?” 낙파는 점점 이상하다는 듯 다구쳐 물었다.

 

그동안 먹고 살라고 두고 간 양식도 다 떨어지고 이러다간 산월도 가까워 오는데 앉아서 굶어 죽겠다싶어 길을 나섰읍니다. 집을 나설 때 지아비가 남쪽으로 간다는 말만 듣고 수 소문 수소문 하면서 이곳까지 왔읍니다.”

여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지아비의 소문은 한군데서도 듣지 못했읍니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날씨는 추워 왔읍니다. 수중엔 노자도 한푼 없이 다써버렸고 참으로 이젠 죽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누가 혹시 토진 쪽으로 가보면 나루터에 장사꾼들이 많이 드나드니 소식을 들을지 모른다고 해서..” 그래서 토진 쪽으로 오다가 길가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희 모자는 그때 완전히 죽은 몸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젠 지아비 찾기도 틀린 것 같사오니 모쪼록 밑에 거두어 주시면 분골쇄신 있는 힘을 다해 모시겠읍니다.” 여인은 거듭 하인이 될 것을 간청했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이야기만 듣고 있던 낙파의 어머니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는 알겠다. 사람이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비록 생사는 모르지만 엄연히 지아비가 있는 아낙내로서 너의 직분을 다 하는 게 우리들의 도움에 보답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아비가 없으면 한사람의 어머니로서 그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낳은 저 어린 것 훌륭히 키우는 일 또한 보람 있는 일 아니겠느냐.?” “하지만..” 여인의 충정어린 간청을 이번엔 낙파가 가로막았다.

부인 .고향에 가면 살던 집은 그대로 있지요?”

. 비록 초가집이긴 하지만 아마 동리 사람들이 그대로 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인. 우선 집으로 돌아 가시요. 장사 갔던 주인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고 또 사람에겐 역시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은 없습니다. 이곳에 온 김에 며칠 유했다가 집으로 가도록 해 보시요. 내 넉넉한 돈은 아니지만 노자돈은 약간 마련해 보겠소.” 낙파는 며칠 뒤 또다시 엎드려 우는 여인을 달래며 노자 돈을 주어 강릉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지 않았다. 서른아홉 되던 해 낙파는 進士試에 합격하고 전남 장수현감 자리로 첫 관직을 맡았다. 이곳은 벼슬을 싫어했던 그의 아버지 강고가 석 달 간 역시 현감으로 있었던 곳이어서 꽤나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비록 어버지 강고가 석 달 간 있었지만 워낙 선정을 베풀어 그곳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고 道岩書院을 만들어 지금도 봄 가을로 享祀를 지내고 있다)

 

아버지가 끼친 선정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칠까 조심한 덕분에 큰 대과 없이 임기를 마쳤다. 장수현감에 이어 평창, 장흥등의 현감을 지낸 낙파는 그때까지도 관운이 없었는지 줄곧 외직자리만 돌았다.

그다음 낙파가 맡은 관직이 厚陵參奉, 후능은 이태조의 아들인 芳果, 定宗 의 능 인데 경기도 풍덕군 동흥면 교동에 있는것. <70나이에 능참봉 한다>는 속담까지 있고 보면 그 역시 한직 이였다. 그렇게 줄곧 한직에만 돌던 낙파는 회갑이 되던 해에 외직으로선 꽤나 요직인 江陵 大都護 副使로 발탁되었다. 이때가 철종 9년인 1858, 잘만하면 바로 내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갓 부임해서 한 달이 채 되었을까 말까한 여름이었다. 동헌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괴이쩍게 생각한 낙파가 문지기를 불렀다. “무슨 일로 밖이 그렇게 소란 하느냐?” “. 다름이 아니옵고 웬 노파 하나가 찾아와 기어코 부사님을 뵙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어 못 들어오게 막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라더냐?”

사연은 부사님을 만나 뵈 온 연후에 말씀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리 불러 들여라. 혹 주민들이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는지 알 수 있느냐?” 낙파의 분부를 듣고 나간 문지기가 바로 생떼를 쓴다는 노파를 데려와 동헌 밑에 꿇어 앉혔다. “어인일로 나를 만나려고 했느냐?”

낙파는 고개를 숙이고 마당에 앉아있는 노파를 향해 물었다. “다름이 아니옵고...” “그래 다름이 아니고 뭐냐?” “말씀드리기 황공스러워서..”

노파는 참으로 어려운 듯 안절부절하며 계속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어려워 말고 어서 말하라.” 낙파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저 죄가 되지 않는다면 부사님 얼굴을 한번만 쳐다 뵙고 싶습니다만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인고?” 뚱딴지 같은 노파의 말을 듣고 낙파는 기가 찬 듯 물었다. “무엄하게도..” 곁에 있던 포졸이 보다 못해 노파를 잡아채려 했다. “관계없다. 그래 무슨 일로 그러느냐?” 포졸이 욱박지르는 것을 낙파가 제지시켰다. “혹시 부사님께선 상주에 사시는 유대감댁 도령님이 아니신가 해서요” “아니 네가 어떻게 나를 아느냐?” 낙파는 참으로 이상한 일도 있다는 듯 다구쳐 물었다. “이곳 강릉은 내가 처음 온 곳인데 어떻게 나를 안단 말이냐?” “상주에 사시는 유 대감댁 도령님이 지금 부사 어른이시라면 어릴 때 초행길에서 사경을 헤메던 이 미천한 아낙네를 구해주신 일을 잊지 않을 줄로 아옵니다.” 노파의 목소리는 이제 울음으로 변해 있었다.

가만있자... 초행길이라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강가에서 해산을 하던 ..”

낙파는 이미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40여 년 전 초행길의 일을 생각해 냈다.

네 그렇사옵니다. 제가 바로..” 노파의 흐느낌을 듣던 낙파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동헌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것참 기이한 만남이로다. 40여 년 전 스쳐가던 조그만 인연이 오늘에 와서 또 만나게 되다니..” 낙파 역시 흰 머리숱이 노파의 모습으로 자기가 40여 년 전에 기억하던 여인으로 믿기지 않은 듯 한참동안 울먹이는 노파의 등줄기만 내려보고 있었다. “자 이리 올라오너라. 어서.” 한참 뒤 낙파는 노파를 동헌마루에 불러 앉혔다. 노파는 여전히 울먹이고 있었다. “이제 울음은 그만 거두라. 그래 돌아온 뒤에 지아비를 찾았느냐?” 노파는 그 말에 새삼스러운 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보구나. 지아비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홀몸으로 자식을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겠다.” “고생이랄 거야 할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대감님 댁의 음덕을 입은 저희네들 모자가 죽기 전에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 뿐 이었지요.” “그래 지금쯤 어린애도 40이 넘었겠구나.”

아직 미거한 것이 되어서 어미 곁에서 농사짓는 틈틈이 글을 읽습니다만 아비가 없으니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해서 모든게 부족하옵니다. ”

글공부를 한다? 그러면 언제 틈을 봐서 내게 한번 인사라도 하러 오도록 해라. 내가 특별히 한번 보고 싶다.” “황공하옵니다. 이 미천한 것들을 끝까지 보살펴 주시다니...” 노파가 돌아간 바로 이튿날 말쑥하게 차려입은 선비풍의 중년 사나이가 말 등에 부담농을 두짝 싣고 낙파를 찿아 왔다.

노파의 말로는 晝耕夜讀하는 일개의 匹夫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옷매무새라든가 걸음걸이며 하는 거동이 선비의 풍모가 역력했다. 저 선비가 40년 전 낙동강 변 버드나무 둥치 속에서 태어난 피투성이 어린애라고는 낙파 자신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불초소인 삼가 문안드리옵니다.” “긴 격식 차릴 필요 없다 어서 올라 오너라낙파는 동헌 뜰에 부복해있는 선비를 불러 올렸다.

그대가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될 줄은 내 어찌 알았겠느냐. 다 네 어미가 훌륭하게 키운 탓이로다. ”낙파는 마치 친자식을 대하듯 선비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기뻐했다. “과분하신 말씀이옵니다. 부사 어른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에 제가 있겠사옵니까. 철이 들어 어머님으로부터 제가 태어날 때의 이야기를 듣고 그 높으신 도량에 뼈 속 깊이 감루 했사옵니다. ”

그런 말 필요 없다. 내 오늘 자네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술이라도 한잔 아니 마실 수 없구나.” “황공하옵니다. 어미께오서 어제 밤 밤을 세우며 만든 정성을 받아 주셨으면 더 없는 영광 이겠습니다.”

 

선비는 낙파의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난 듯 말 등에서 내려놓은 부담농을 풀었다. 첫 번째 부담농 속에선 곱게 빚은 술과 떡이 한 상자 가득했다.

두 번째 상자는 낙파를 위해 지은 의복이었다. 가늘게 가늘게 짜여진 세모시 옷에다가 버선, 속옷까지 빠진 것 없이 차곡차곡 들어있었다.

어참 과분한 정성이로고. 뜻밖의 물건에 낙파는 더 없이 기쁜 모양이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더없는 영광이옵니다.”어머니의 정성그릇을 풀어놓은 선비가 낙파의 희색 띈 얼굴을 보고 말했다. “내 어찌 그대들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이 옷을 입지 않으리오낙파는 안으로 들어가 입고 있는 비단 관복을 벗어버리고 노파가 정성들여 손으로 총총히 꽤 맨 모시옷을 입고 나왔다.

품도 기가 막히게 맞는구나. 과연 네 어머니의 솜씨가 훌륭하다.”

낙파는 연신 몸의 앞뒤를 재어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자 그럼 정성으로 보낸 음식도 먹어야지.”

강릉 대도호부에는 난데없는 잔치가 벌어졌다. 낙파가 정성으로 보낸 음식을 아래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며 주연을 베푼 것이다. 아랫사람들도 낙파의 소년시절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이야기 같은 사실이라며 흥겨운 하루를 보냈다. 잔치가 파하고 선비가 하직인사를 할 때도 낙파는 아쉬운 듯 정성을 담아온 빈 상자 속에다 紙筆墨을 가득 채워 넣어주었다.

글공부를 한다니 이보다 더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모쪼록 수학을 게을리 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라. 네 어미가 너 혼자보고 이때까지 고생한 것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촌부로 늙을 수 야 있겠느냐? 내 틈을 보아 불원간 자네 집에 한번 들리겠네. “낙파는 노파의 아들에게 등을 두들기며 격려를 해 돌려보냈다. “지난번 베푸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까 싶어 찾아 뵈었는데 이렇게 많은 선물까지 내리시다니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노파의 아들은 또다시 엎드린 채 안절부절 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낙파는 바쁜 일과를 틈타 약속대로 노파 모자가 사는 집을 찾았다.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두 모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낙파는 사랑채로 들어섰다. 번거러움을 피해 포졸 몇 명만 데리고 왔던 것인데 이들 모자는 벌써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는듯 예의범절이 양반집보다 조금도 부족한데가 없었다. 사랑방에 좌정을 한 후 집안을 휘둘러본 낙파는 또 한번 놀랐다. 비록 초가지붕에 협소한 규모였지만 그래도 사대부의 집안답게 사랑채와 안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낙파가 들른 사랑방에는 사면이 각종서적으로 그득했고 은은한 묵향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래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 낙파는 노파의 아들이 보다가 덮어둔 서탁 위의 책자를 보며 물었다. “뭐 소인들이야 체계가 있게 책을 읽을 수 있읍니까.? 그저 닥치는 대로 보면서 납득 하는게 고작이지요.”

그래 책을 읽다가 보면 마음에 드는 사람의 것이 있을 터인데?”

워낙 천박한 지식이라 말씀드리기가 외람되옵니다만 굳이 말씀 올린다면 반계선생의 것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노파의 아들은 자기대로 터득한 선현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했다.

반계선생의 저술이 마음에 든다고? 그 참 깨달은 바가 많겠구나. 반계선생의 실학사상이야 참으로 백성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 절세의 명문이지.” 낙파는 노파의 아들이 한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는 새 노파는 갓 길러 올린 얼음장같이 찬 샘물에 미숫가루와 꿀을 탄 그릇을 소반에 담아서 내왔다. “더우신데 우선 목이라도 좀 축이시지요.”

노파의 아들이 소반을 앞에 놓으며 낙파에게 권했다. 낙파는 그렇잖아도 목이 마른 참이라 마다않고 받아 마셨다.

어 그 참 시원하다. 그러나 저러나 날이 가물어서 농사짓기에 애가 타겠구나.” 낙파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노파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 아직은 그렇게 가뭄이 심한 줄은 모르겠습니다 만 비가 오기는 좀 와야 겠읍니다.” 노파의 아들 말을 듣고 있던 낙파는 마당 한구석에 서있는 감나무 밑이 이상한 듯 시선을 멈추었다. “저게 무어냐?”

 

낙파가 부치던 합죽선 끝으로 가리킨 감나무 밑, 그곳엔 정성들여 쌓아올린 듯한 조그만 단이 하나있었고 그 위엔 정화수를 떠다 놓은 듯한 대접이 놓여져 있었다. “. ...그것은....”

노파의 아들은 아무래도 말하기가 거북스러운 듯 대답을 떠듬거렸다.

그래 저게 뭐냐?” 노파의 아들이 주저주저하자 낙파는 더욱 궁금한 듯 재차 물었다. “이런 말씀을 드려도 좋을지...그 단은 다른 게 아니옵고 소생의 어머님께서 상주에서 돌아오신 이후 줄곧 류 대감님 은덕을 잊을 길이 없어 매일새벽 정화수를 떠놓고 류 대감님 댁에 액운이 없기를 치성 드리고 있는 제당이옵니다.” 노파의 아들은 말을 하면서도 자못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아니 그럼 우리 집을 위해서 사십년이 넘도록 줄곧 치성을 드렸단 말인가? 그 정성 참으로 눈물겨운지고...” 뜻밖의 사실을 들은 낙파는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참으로 갸륵한 여인의 충정이구나. 오늘의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우리 집안이 번창하게 된 것도 다 이 갸륵한 여인이 40년간 치성을 드린 힘을 아니 입었다고 말 못하리라.

낙파는 관아로 돌아와서도 오랬 동안 멍한 가슴을 누를 길이 없었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이들 두 모자와 낙파와의 관계는 낙파가 강릉 대도호부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계속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파의 아들은 班常의 구별이 더없이 엄격하던 그 당시에 낙파의 후광에 힘입어 마침내 강원도 통천군수로 발탁되었다.

지금도 강원도 통천일대에 가면 <이 통천집>이라 불리우는 그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데 풍산 류씨 낙파의 집안과는 대대로 世交가 맺어져 < 이 통천집>에서는 낙파 집을 외가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낙동대감(洛東大監) 이야기

한 노인이 삿갓을 쓰고 낙동강에 나가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게 영감

낙파를 부르는 건 역시 열대여섯 살 되었을까 말까한 초립동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낚시를 하다말고 낙파가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여기 와서 越川(월천)을 하게

 

그냥 촌 영감으로 본 초립동이 겁도 없이 건너편 낙파를 불러 자기를 업고 강을 건너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러지요

고기도 잘 안 잡히는 대낮이라 낙파는 선뜻 일어나 얕은 쪽으로 강을 건너와 초립동을 업었다. “자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으시오

그리하여 멋모르는 초립동은 낙파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가운데 갔을까. 난데없이 소란이 일어났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동리 사람들이 기막힌 꼴을 보고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네 이놈 감히 대감 등에 업혀 월천을 하다니... 냉큼 내리지 못할까?”

강둑에서 팔을 둥둥 걷은 동네사람들이 고함을 치자 낙파의 등에 업혀있던 초립동이 기겁을 했다.

아이고 대감어른 어서 소인을 내려 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초립동은 발버둥을 치며 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강 한복판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초립동을 업고 있던 낙파의 몸도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잘못하면 두 사람 다 넘어질 판이다. 생각다 못한 낙파는 등 뒤의 초립동에게 말했다.

가만히 계시오. 잘못하면 여기서 두 사람 다 물에 빠집니다. 건너편서 고함 치고 있는 사람은 미친놈이라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니 상관 마시오.”

건너편 강둑의 사람이 미친놈이라서 그렇다고 하자 초립동은 안심이 되는 듯 조용히 업혀서 강을 무사히 건넜다.

 

강을 무사히 건넌 초립동은 낙파에게 낙동대감의 집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초립동은 낙파를 앞에 두고 이름만 들어왔던 <낙동대감>이라 몰라보는 게 당연했다. “그래 낙동대감은 왜 찾소?” 낙파는 시침을 떼고 물었다. “내 과거를 보러가는 길에 집의 어른께서 이르시기를 상주를 지나거든 낙동대감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가라고 하시기에 그러는 것이요.”

초립동은 노인이 강을 건너 준데 대해서 고마운 듯 자세히 설명을 했다.

여기서 곧장 가면 멀지 않은 길가에 초가집이 한 채 있소. 그곳이 낙동대감의 집인데 지금 집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소.”

낙파는 손가락으로 길을 가르쳐준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강을 건너 낚시질을 계속했다. 낙파의 집을 찾아 간 초립동이 낙파를 못 만난 건 당연했다. 예까지 와서 얼굴도 못 뵙고 가기는 안 되었다고 생각한 초립동은 마루에 앉아서 낙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상복 차림으로 집을 나갔으니 멀리 가지 않았으리라고 전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서 그러나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들어오는 낙파를 보고 초립동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낮에 강을 건너 준 그 노인이 바로 자기가 기다리던 낙파대감이 아닌가,

초립동은 눈앞이 캄캄함을 느꼈다. “아니 그대는 누구인고?”

낙파는 시침을 떼고 물었다.

 

대감어른 제가 강가에서 대감을 몰라 뵙고 방자하게 굴었으니 그 벌을 무엇으로 받아야 하올지...” “혹 사람을 잘 못 본게 아닌가? 나도 강가에 낚시질을 하러 가긴 갔네만 자네를 업어다준 일은 없는데...”

아니 그럴 리가.....” 혹시나 낙파의 말대로 자기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싶어 얼굴을 들어 낙파를 보았지만 아까 그 노인은 틀림없는 낙파 대감이었다.

상관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혹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면 또 모르되 잘못을 뉘우친다면 그리 큰 죄도 아니다.”

낙파는 마당에 엎드린 초립동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낙파의 말을 들은 초립동은 더욱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참으로 황공하옵니다. 앞으론 어느 곳을 가던 나이 많은 노인 앞에 방자하게 굴지 않겠습니다.”

 

낙파는 말없이 초립동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이러한 일은 수없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낙파는 그때마다 모든 것을 너그럽게 생각하고, 잘못이 있더라도 덮어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보다 못해 주위에서 이러시다간 잘못하면 큰 곤욕이라도 당하시겠다고 우천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낙파는 일언지하에 그것을 거절했다. “예의에 벗어나건 않건 간에 그것은 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 예의라는 게 원래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것에 너무 얽매인다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 아니냐?”

낙파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주위에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다만 모산과 우천사이를 왕래하면서 불편을 덜어드리는 일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七十古來稀가 아니더라도 워낙 지체 높은 벼슬을 하고 낙향해 있는 대감이라 70이 넘는 노인들도 감히 범접을 못하는 것이었다.

 

)경상감사가 남의 친구만...

낙파는 모산에서 가까스로 친구 하나를 얻었다. 씨 성을 가진 70이 넘은 노인인데 워낙 낙파가 서민과 같은 행동을 하자 별 두려움도 없이 매일 찾아 와 농사이야기도 하고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게 되었다.

어쨌던 나이70에 친구 하나를 얻은 낙파는 무료할 때면 하인을 시켜 양씨노인을 불러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역시 두 노인이 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데 새로 부임하는 경상감사가 인사하러 낙파에게 들렸다. 말이 경상감사이지 대소 관원들이 뒤따르는 행렬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요란한 관원을 이끌고 나팔을 불며 오던 경상감사가 낙파 앞에 오더니 넙죽이 큰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을 정신없이 보고 있던 양씨 노인은 기가 질렸는지 뒤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낙파는 감사일행의 인사를 받느라 양씨 노인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경상감사가 돌아간 후에 보니까 양씨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하인을 불러 이제 손님이 갔으니 다시 놀러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한참 후에 하인 혼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양노인 말씀이 양반인 줄이야 알았지만 대감어른이 그렇게 높은 양반인줄 미쳐 몰랐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너무 무례를 했으니 널리 용서하시라고 하면서 다시는 놀러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낙파는 기가 찬 듯 웃으며 말했다.

 

어허! 그 경상감사가 남의 친구하나만 떼버리고 갔구나.”

그 후 낙파는 몇 번이나 양 노인에게 하인을 보내 다시 놀러오도록 청했지만 양노인은 두 번 다시 놀러오지 않았다. 그러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번져 인근 동네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참고문헌>

1. 雄州典故 1998. 3. 박약회 상주지회

2. 商 山 誌 2003.12. 상주문화원

3. 尙州市史 2011.12. 상주시사편찬위원회

4. 尙州書院 2006. 2. 상주시청년유도회

5. 나루의 고장 중동 2009. 6. 중동면지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