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 제 64강 조상 기제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 2015년 2월 13일 금요일 오후 2시 문화회관 4층 소회의실에서 금중현 부원장님의 강의가 있었다.
조상忌祭祀의 오늘 그리고 내일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목 차 1. 들어가며 2. 민족적 미풍 조상 기제사 3. 전통 기제사 의례개략(儀禮槪略) 4. 오늘의 기제사 실태 5. 급변하는 내일의 기제사 의례 추의(推移) 6. 현실적 기제사의례 어떻게 할까 7. 전통기제사 의례의 문화적 전승 대책 8. 맺음글 |
조상忌祭祀의 오늘 그리고 내일
1. 들어가며
현대인들 간에 조상제사라고 하면 할 말이 많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어떤 형태이든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급격한 세태의 변화에 따라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사의 대상 범위와 제사지내는 날자와 시간, 의례의 순서, 제물(祭物) 등등 의례전반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어느새 우리들 의식에서 그 변화를 수용하고 있으되 어느 정도까지가 합리적이요 시대에 적정한가에 대하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것이 현실이다.
2011년 9월 한국국학진흥에서는 “조상제사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대대적인 학술대회를 열고 이어서 그 다음해에 같은 이름으로 책을 간행하였다. 그 내용은 대체로 조상제사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현대화된 제사의 모델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으로 아주 시의 적절한 시도였다고 본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오늘의 제사 문화는 또 저만큼 앞으로 달려 변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많다. 현대인들에게 오늘의 이 민감한 화두를 던져 보는 것은 필자자신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시대적 과제라는 것을 공감하면서 국학진흥원에서 제시한 바를 토대로 하여 다시한번 마음을 모아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역량과 식견이 부족한 필자가 전개하는 논지는 그 깊이가 얕고 정연하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책하면서 보는 이들의 주관적 견해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글머리에 적어 두는 바이다.
2. 민족적 美風 조상제사
조상제사는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보본반시(報本反始)를 큰 명제로 삼는다. 근본적으로 나를 있게 하고 길러 주시고 보살펴 주신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정신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었을때도 이어져야 하는 것이 전통적 효(孝)문화의 한국적 가치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그 문화를 제사라는 의식으로 숭상하므로 하여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다. 국조오례의에 제사를 길례(吉禮)로 하였음은 조상신이 살아있을 때와 같이 보살펴주는 이른바 복(福)을 내려주는 기쁨의 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음복(飮福)이라는 제사의 마지막 절차를 꼭 여행하여야 하고 그 절차가 조상신과 나와의 상호 교류요 신이내리는 복을 받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옛 고전에 제사와 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어진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말하는 복이 아니다. 복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갖추어 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다는 것은 모든 일을 도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충신은 그것 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효자는 그것으로써 어버이를 섬기는데 그 근본은 하나 이다.
--------- 중 략 -------------어진 사람이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정성과 믿음을 다하고 충과 공경을 바친다. 때맞추어 참여하 여 정결하게 제수를 올릴 뿐이다. 이것이 효 자의 마음이다.
라고 하여 제사의 복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나를 갖추어진 나로 전환시키는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제사의 목적이라고 하면 조상제사를 통해 나의 뿌리를 되돌아본다는 것이다. 즉 “反基所自生(반기소자생) 말미암아 나온 바로 되돌아가는 것” 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앞에서의 “보본반시”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나를 낳아준 것을 잊지 못하여 공경을 다하고 그 정을 발하며 힘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부모에 대한보답이요 의무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기억하여 의례화 한 것이 제사라는 것이다.
제사는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의 정신적 만남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소통하는 자리다. 여기에서 조상의 기억을 깨우치고 다같이 갖추어진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고 혈연을 기반으로 한 가족간의 친밀성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가족간의 불화를 치유하는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는 살아있는 자를 위한 공간이라고 단정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신종추원(愼終追遠) 이면 민덕귀후(民德歸厚)라 부모의 장례를 엄숙히 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껏 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넉넉해진다. 라는 논어장구의 격언대로 정성이 깃든 부모제사에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면 가족 간에는 저절로 웃음이 피어나는 화기애애(和氣靄靄)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 자리는 분명 풍요한자리이고 그 풍요한 전통은 한집안의 미풍이요 어쩌면 집안의 가격(家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격은 사회와 국가의 격을 높일 수 있는 미풍양속이라고 할 수 있다.
3. 전통기제사 의례 개략(槪略)
가. 개설(槪說)
조상제사는 몇 가지 전제(前提)가 있다. 먼저 돌아가신 부모를 살아계실때와 같이 섬겨야 한다. “事亡如事存之義”는 것과 제청에 조상신이 와 계신다. “祭如在(재여재)”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도록 재계(齋戒)해야 한다. 제사는 살아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의례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번독(煩瀆)한다고 하여 일정한 법식을 벗어나 제멋 데로 자주 제사를 지내므로 하여 경건한 태도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고 신분에 적정하지 못한 제사를 드려 음사(淫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전통시대에 3품관 이상은 3대 6품관 이상은 2대 7품관이하 사서인(士庶人)은 1대로 신분에 따라 제사 대수를 정한 것에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졌다가 갑오개혁(1894)으로 모든 백성들이 4대봉사로 보편화 되었다.
현대에 와서 1973년 대통령령으로 정한 ‘가정의례준칙’이 제정되고 일부전통을 지키는 집도 있으나 많은 집이 조부모까지 2대 봉사로 변하였다. 봉사자손은 원칙적으로 장자손(長子孫)이 주사자(主祀者)가 되고 그 주사자집 정침(正寢)에서 지낸다. 제삿날은 예서에서 먼동이 틀 때 궐명(厥明)에서 날이 밝아올 때 질명(質明)에 끝낸다고 하나 우리의 전통은 대개 죽은날 첫 새벽에 지낸다. 제의기구나 제수(祭需), 진설 그리고 고비위(考妣位) 합사와 제사 절차 등은 집집마다 달라서 오죽하면 “제사”하면 “가가례(家家禮)”란 말이 항상 따르고 “도랑건너서 제사집사하지마라” “남의 집 제사에 곶감 놔라 밤 놔라 하지말라” 라는 말이 생겨 났을까
제사에는 주사자의 위상이 절대적이다. 전통적으로 주사자는 맏아들이 원칙이고 맏아들이 없을 경우는 맏손자가 된다. 아내의 제사에는 남편이고 형의 제사는 맏동생 순으로 한다. 때로는 무후하여 외손이 봉사하는 예도 있다.
평상적으로 정해진 제사 사례를 다음과 같이 정리 해본다.
나. 제구(祭具)
병풍 · 제상 · 향상 · 제석자리 · 축판 · 촛대 · 향로 · 향합 · 모사기 · 지필묵 · 시접 · 지저(수저) · 잔반 · 반갱기(숭늉그릇) · 편틀 · 소접 · 탕기 · 적틀(구이틀) · 전접(둥근접시) · 포 해그릇 · 숙채접(산채·야채그릇) · 침채기(물김치그릇) · 과일접시 · 주전자 · 퇴주그릇 등.
이상 열거한 제구는 형편에 따라 적당한 용기를 택하여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병풍이 없으면 자리를 쳐도 되고 축판의 경우는 무축단잔(無祝單盞)으로 행사 할 시는 없어도 된다.
다. 제수(祭羞)
메(밥) · 갱(국) · 숙수(숭늉) · 편(떡) · 편청(조청) · 탕(육탕, 어탕, 계탕) · 전(육전, 어전, 육회) · 초장(간장) · 적(구이 : 육적, 어적, 계적) · 포 · 혜(식혜) · 숙채(익힌나물) · 김치(물김치) · 과일(조, 율, 이, 시) · 제주(술)
이상 제수 즉 제사음식도 형편에 따라 적당한 음식으로 하면된다. 이 또한 가가례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다. 봉화 닭실 마을 충재(冲齋) 댁에는 제수의 필수음식인 본편이 없고 동곳 떡이라는 손가락 굵기의 떡으로 하고 퇴계(退溪) 댁에는 지짐을 쓰지 않고 양동의 회재(晦齋) 댁에는 지짐대신 병탕(餠湯)이라는 음식을 쓴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제수가 특별한 경우는 우선 제사 대상자가 생시에 즐겨먹었거나 싫어 한 음식을 가려서 택하는 경우도 있고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음식으로 인한 갖가지 사고 또는 기막힌 사연으로 때로는 평상적 원칙에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특별한 예를 들면 안동의 서애 제사에는 종개라는 과자를 쓰고 학봉제사에는 생마를 쓰며 상주의 현대 어떤 집에서는 자기 어머니가 생시에 좋아 하였던 박카스를 제사상에 올린다고 한다.
이것이 곧 가가례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제수야 말로 깨끗하고 정성을 드려 담아야하는 것이 기본이다.
아무리 진수성찬일지라도 정성이 담겨지지 않으면 조상신이 응감(應感)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제수를 담는 것 또한 제사 절차에 중요대목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부잣집 권세가에서는 편을 두자 괴임을 하였다 던지 또 어떤 집에서는 구이 괴임을 우모린(羽毛鱗)으로 얼마만큼 높이 하였다고 하는 것들이다. 현대에 와서는 이 제수 굄 기술이 인간 문화재적으로 인정할 만큼 귀해지기도 하다. 제사 음식은 지방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안동에는 고등어와 상어 돔배기가 필수 이지만 상주에는 조기를 필수 좌반(佐飯)으로 한다. 지방의 형편과 관례에 따라서 제수 음식이 다른 경우가 많다.
제수음식으로 꼭 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봉숭아, 살구와 같이 한 알의 씨종이 있는 과일, 어물 중에 꽁치, 삼치, 가물치와 같이 치자가 들어가는 어물을 쓰지 않는다고 하고 조상이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일지라도 흉물스런 음식은 쓰지 않는다. 즉 개고기라던지 뱀장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굳이 말하자면 조상이 좋아하였다고 구렁이 술을 제사에 쓰랴.
과일은 조 · 율 · 시 · 이가 원칙이고 가급적 시식(時食)이어야 한다고 본다. 한 겨울에 수박을 놓는 것은 제사상이 화려할 지언정 천리에 어긋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라. 제수진설
제수는 대개 5열을 원칙으로 한다. 신위(지방)로부터 열거한 전통적 진설도와 가정의례 준칙에서 정한 진설도를 여기에 적어본다. 그림,
그림
<가정의례유법> “제6절 제의례” 조 2009. 거창문화원
제수 진설에 단설(單設)과 합설(合設)이라는 큰 차이점이 있다. 어떤 집에는 제삿날 돌아가신 한 분만 지내는가 하면 어떤 집에는 내외분을 함께 모셔 지내기도 한다. 고전에 이르기를 단설은 예지정(禮之正)이요, 합설은 예지정(禮之情)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이현령 비현령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과일의 위치, 두미(頭尾)의 방향, 배복(背服)의 방향, 포의 위치, 시접의 위치 등등이 집집마다 가가례이
나 일반적 설(說)을 정리해 본다.
· 고비각설(考妣各設) : 남녀 각각 진설
· 시접거중(匙楪居中) : 수저는 신위 중앙에
· 반서갱동(飯西羹東) : 메는 서, 국은 동쪽
· 조율시이(棗栗枾梨) : 대추, 밤, 감, 배 순으로
·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색 과일은 동, 흰 과일은 서쪽
· 적접거중(炙楪居中) : 적은 중앙에
· 어동육서(魚東肉西) : 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
위에 적시한 설은 설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설을 그대로 통일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집집마다 해오던 음식을 해오던 방식대로 진설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설이다.
마. 제의절차(祭儀節次)
제사의 절차는 조상을 기리고 추모하는데 생시와 같이 정성 드린 음식을 드리고 후손들이 평화롭고 넉넉한 화합의 장이 되도록 하는 절차이다. 그 절차로 조상신을 불러 모시고 음식을 바치면서 산사람들이 기원을 올리며 신이 흠향하고 신이 계시던 곳으로 모셔 드리는 환송의 절차, 음복으로 기원(祈願)에대한 응답을 받는 절차로 구성되었다. 이것을 영신(迎神), 오신(娛神), 송신(送神)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1) 지방(紙榜)
지방의 규격은 대개 6×24cm (2치×8치)정도이다. 위에서 아래로 써내려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합설의 경우를 예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적는다.
顯① 顯① 考② 妣② 學③ 孺③ 生 人 府④ 00 君 金⑤ 氏 神⑥ 神⑥ 位 位 |
① 顯(현) : 형이상학적으로 분명하게 와계신 또는 높고 훌륭하신
② 考, 妣(고, 비) : 아버지 ,어머니
※ 祖考(조고) 조비(祖妣)등으로 당일 제사 대상에 따라 변함
③ 學生(학생), 孺人(유인) : 벼슬하지 않은 남자와 그 아내
④ 남자 조상의 존칭
⑤ 여자조상의 성씨
⑥ 신이 와 계신자리
대체적으로 지방의 서식은 통일 되었다. 문제는 ③항의 벼슬에 관하여는 통정대부(通正大夫) 행(行) 00목사(牧使) 라든지 관작에 따라 각각 다른데 현대에 와서 주사, 사무관, 서기관 등등 벼슬의 품계와 관직을 쓰는가에 대하여는 이설(異說)이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관직자 보다는 기업가, 인간문화재, 과학자 내지 학술 연구에 뛰어난 사람, 기능인 등등 더 뛰어난 행적을 남긴 사람은 어떻게 표기하느냐 하는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관직자는 적어도 관(官)자를 붙인 직급이상으로 하고 그 이외 지냈던 행적에 따라 적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이 또한 민감하여 가가례로 넘길 수 밖에 없다고 본다.
2) 축문(祝文)
축(祝)이라는 글자를 사전에 이르기를 빌 축, 하레할 축, 축문 축, 축읽을 축, 축 읽는 사람 축이 라고 명정하였다. 그리고 우리 말 사전에는 “제례에 신명(神明)에게 고하는 글이라고 정의하였다. 풀이하여 각종제사에 제례를 주관하는 주사자 즉 초헌관이 신위에게 술잔을 드리는 헌작 시에 그 신명의 넋을 추모하고 그 덕망을 흠모하며 정성이 깃든 감회(感懷)로 당일 행공하는 뜻을 알려주는 일종의 추도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축문을 읽는 그 시점이 당일 제사에 가장 핵심적인 시점인 것이다. 기제사 축문의 형식은 대체적으로 정해진 서식데로 하는데 아버지 제사를 예로 하면 다음과 같다.
“維 “유
歲次 甲午 庚寅 八月 辛酉삭 十一日辛未 세차 갑오 경인8월 신유삭 11일 신미
孝子 0 0 敢昭告于 효자 0 0 감소고우
顯考學生府君 현고학생부군
顯妣孺人0 0 0氏 歲序遷易 현비유인 세서천역
顯考 諱日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 현고 휘일부임, 추원감시, 호천망극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근이 청작서수, 공신전헌 상
饗” 향”
풀이하면
『정신을 차려서(유)
올해(세차)갑오년 8월 11일을 맞이하여(경인, 은 월건(月建), 신유는 8월 초하루 일진(日辰)이고 신미는 11일의 일진임)
제사를 받드는 장자(효자) 0 0는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삼가 고하나이다. 어느 듯 해가 바뀌어 아버님 돌아가신 날을 다시 맞게 되오니 하늘과 같이 넓으신 은 혜를 다시생각하게 하고 잊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숲과 몇 가지 음식을 차려 공손 히 제사를 드리오니 흠향 하시옵소서』 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시대에는 누구든지 제사에 축문을 읽고 3헌례를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축문 없이 이른바 무축단잔(無祝單盞)제사가 대부분으로 변하였다. 전통을 계승하고 효를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한문으로 된 글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 또한 지나친 형식일 수밖에 없고 축문을 닦을 지식이 안되는 집안이 많다는 것이 무축제사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3) 서립(序立)
제청에 서는 순서를 말한다. 이 또한 옛 전통시대에는 소(昭), 목(穆)이라는 차례로 좌·우에 질서를 지켰지만 많이 변하였다. 살아있는 사람은 이동위상(以東位上)이라고 하여 동쪽을 선순위로 하므로 제청의 동쪽 즉 왼쪽에서부터 나이 순으로 서립하면 무난하다고 본다.
마. 의식차례
제사의식의 차례는 분향과 강신으로부터 음복까지 이다. 의식차례를 열거하기로 한다.
1) 분향(焚香)과 강신(降神)
제주(주사자, 이하 제주로 표기함)가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향을 세 번 피우고 한발 물러나 두번 절한다.
2) 강신뇌주(降神酹酒)
제주가 다시 신위 앞에 꿇어앉으면 좌집사(左執事)가 잔을 내려 제주에게 주고 우집사(執事)가 술을 조금 쳐서 그 술을 모사 그릇에 세 번 나누어 부은 뒤 한발 물러나 다시 두 번 절한다.
3) 참신(參神)
제주이하 모든 참사자들이 조상신에게 인사하는 절차이다. 모두 함께 두 번 절한다.
4)진찬(進饌)
식지 않은 따뜻한 제수를 올리는 절차인데 이 의식은 없어지고 한꺼번에 진설하는 것을 관례로 한다.
5) 초헌(初獻)
첫 번째로 제주가 올리는 잔이다.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끌어 앉으면 좌 집사가 잔을 제주에게 주고 우집사가 잔에 술을 가득 부으면 제주는 두손으로 받들어 눈높이만큼 올리고 집사에게 주어 올리도록 한다.
이때 수저를 고르는 정저(正著)를 하는데 수저를 재상에 세 번 아래로 내려 밑이 고르게 한다. 제주는 가득 부은 술잔을 그대로 올리는 것이지 속되게 향불 위에 빙빙 돌리지 않는다.
6) 개반삽시(啓飯揷匙)
이 절차는 메 그릇 뚜껑을 열고 수저를 꽂는 의식인데 집안에 따라 초헌 후 바로 하지 않고 뒤로 미루는 경우도 있다.
7) 독축(讀祝)
제주와 참사자 모두 꿇어앉고 축이 제주의 동쪽에서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끝나면서 모든 참사자가 재배한다. 무축단잔일 경우는 이 절차가 당연히 없고 다음 아헌, 종헌 절차도 없다.
8) 아헌(亞獻)
두 번째 잔으로 대개 주부(主婦)가 올린다. 주부가 올리지 못 할때는 차자(次子)나 장손(長孫)이 올린다.
9) 종헌(終獻)
세 번째 잔으로는 차자나 장손 또는 사위, 친척 등이 올린다. 아헌 종헌 각각 잔을 올리고 재배한다. 종헌시 술잔에는 반잔만 채운다.
10) 유식(侑食)
음식을 권하는 절차로 종헌시 반잔에 그친 술잔에 제주가 메뚜껑으로 다시 가득 채우고 메에는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은 적이나 편에 올린다.
집안에 따라서 앞의 6)항의 절차를 이때 하기도 하고 주인과 주부가 재배 하기도 한다.
11) 합문(闔門)
조상신이 음식을 흠향하도록 하는 절차로 제청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거나 제상뒤 병풍을 둘러 가린 후 모두 부복(俯伏)한다. 부복시간은 9번정도 수저를 뜨는 시간으로 하고 축이 기침 3번으로 신호(3희흠(歆))를 하면 제청안으로 들어오거나 병풍을 걷고 모두 일어난다.
12) 헌다(獻茶)
갱(국)을 숭늉(熟水)으로 바꾸고 메 3숫가락 정도를 풀고 숟가락을 노은다음 조상신이 후식을 흠향하도록 참사자 모두 국궁(鞠躬묵념)한다. 이때는 잠시로 하고 축의 신호는 11)항의 절차와 같다.
13) 철시복만(撤匙覆飯)
수저를 거두어 시접 그릇에 정리하여 놓고 모든 그릇의 뚜꼉을 덮는다.
14) 사신(辭神)
참사자 모두가 신을 배웅하는 절차로 모두 재배한다.
15) 분축(焚祝)
지방과 축문을 태우는 절차로 집안에 따라서 문밖 삽작에서 태우고 국궁하기도 한다.
16)철상(撤床)
모든 제수를 거두는 절차이다. 집안에 따라 거두는 순서가 있어 포와 4실과를 제일 늦게 하기도 한다.
17) 음복(飮福) 또는 준(餕)
모든 참사자들이 제수를 나누어 먹는 절차이다. 옛 고전에는 기제사에 음복절차가 없었다는 설이 있으나 관행적으로 반드시 행하는 절차이다. 음복은 제주에게 먼저 제공하는 것이고 제주 술은 모든 참사자가 조금씩 이라도 먹는다.
살피 건데 이와 같은 절차는 사당(가묘家廟)이 없고 지방을 붙여 지내는 것을 젼제로 하였다.
이 절차 또한 집집마다 조금 달라서 어떤 집은 호곡(號哭)을 하는 경우도 있고 메밥을 따로 높은 곳에 얹어 두었다가 다시 먹는 집도 있다.
사. 가정의례준칙에 정한 기제사 의례
1973년도 대통령령으로 정하였던 가정의례준칙은 1999년도에 법률 제 5837호로 “건전 가정의례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로 재정되었고 2010년도에 일부 개정된바 있다. 이에서 정한 제례(祭禮)의 요지는
“기제사 및 명절에 지내는 차례의식 절차를 말한다.” 라고 정의하고 “기제대상은 제주(祭主)부터 2대조까지로 하고 매년조상이 사망한 날에 제주의 가정에서 지낸다. 차례의 대상은 기제사를 지내는 조상으로 하고 매년 명절의 아침에 맏손자의 가정에서 지낸다. 제수는 평상시의 간소한 반상음식으로 자연스럽게 차린다. 성묘는 각자 편의 데로 하되 제수는 마련하지 아니 하거나 간소하게 한다”
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부 급진사고를 가진 가정에서는 여기에서 규정한 의례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고 한다.
제주로부터 2대 까지는 이미 보편화 되었고 사망 한날이 아니고 한날을 택일하여 모든 제사를 합제(合祭)하거나 고, 비위를 합제하며 제사의 장소도 가정이 아니고 콘도나 호텔 또는 외국에서 제주의 편의에 따라 지내고 있다. 다만 제수를 평상시의 간소한 밥상이 아니고 너무 많이 차려 정부에서 정한 권고 사항을 위반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기제사에 관한한 이 준칙은 사문화(死文化) 하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바. 체천위(遞遷位)제사
체천위 제사라고 하면 요즈음 사람들은 아주 생소 할 것이다. 4대봉사 제사이면 고조부까지의 제사인 만큼 고손자간의 촌수는 8촌간이 된다. 제일 맏집에서 시직된 제사를 고손자들 모두 차례대로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다. 요즈음 생각으로는 있을 수도 있어 서도 안 되는 일 같지만 불과 30여년 전까지 있던 일이고 요즈음에도 일부 전통가정에서 지낸다고 한다. 그러나 제사 그 자체가 효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까닭에 같은 자손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오히려 제사를 재낸다는 그 자체를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한다는 자부심으로 삼고 무엇보다도 제사를 지내므로 하여 조상으로부터 복을 내려 준다는 관념이 깊었던 것이다.
4. 오늘의 기제사의례 실태
필자가 알기로 4대 봉사에 체천위제사가 있었고 제사 시간과 제수(祭羞)등을 옛 전통대로 지냈던 때로 부터는 약 40여년 정도 였다고 본다.
1973년도 정부의 가정의례준칙이 공포되었을 때도 큰 변화가 없다가 70~80년대 산업화가 되고 급격히 무너져 간소화 되었다.
간소화 초기에는 집안끼리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가문에 흉이 될까 염려하였다. 그런데 1988년도에(88.2.14)우리나라 여러 단체 중에 어쩌면 옛 의례에 대하여는 가장 보수적 성격을 띤 유림(儒林)들 중에서 당시 포항 공과대학의 학장이던 김호길 박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신사고를 가진 모임이 결성되었는데 창립당일 대구에 유력한 곽모씨가 이 제사 의례간소화에 대한 것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때 필자를 포함하여 창립회원 약60여명이 모두 이에 긍정하였던 분위기를 기억한다. 그 자리에 참석자는 퇴계 종손가를 비롯하여 안동, 예천, 대구, 성주등 도내 각처의 전통 유가(儒家) 출신자들이었는데 필자가 느끼기로 파격적인 분위기 였다. 이와 같은 신사고의 유력한 유림단체가 제의례 문화개혁에 큰 작용을 했다고도 본다. 그러면 개혁된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제사의 대상에 큰 변화가 있었다.
국학진흥원에서 2012년에 실시한 안동지역 제사의식 실태조사에 제사대상에 대한 비중은 부모 10.4%, 조부모까지 46.4%, 증조부모까지 25.0%, 고조부모 까지는 12%, 기타 6.2%로 조사 되었다. 결과적으로 2대 까지를 56.8%가 동의하고 있다.
이 비율은 그 당시 이고 3년이 지난 지금은 증조부모까지를 동의한 부류까지 이에 동의 할 것으로 사회분위기는 급변하였다고 본다.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할지 모르나 필자 주변에 4대 봉사를 지낸다고 하는 집은 거의 없는 것으로 짐작한다.
요즈음은 제사를 개혁한 그 자체를 두고 흉 거리로 삼는 사회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이 현대인들의 사고이고 거의가 공감하는 것이 사실이다.
체천위 제사는 아예 거론 할 필요도 없다.
나. 제사재내는 시간은 대부분 초저녁으로 변하였다.
제사는 반드시 궐명(厥明) 즉 제사 대상이 별세한 날 첫 세벽에 지내야 조상신이 응감하고 그것이 원칙이었다고 전통적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그 고정된 사고는 일시에 바뀌었다. 바뀌게 된 동기는 80년대까지 있었던 야간 통행금지 시절에 도회지에서 원활한 제사 참사의 방편으로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에 새벽 제사로 잠을 설친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점이었기 때문이고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정리하는 주부들은 1박 2일 잠을 못자고 오직 이에 몰두해야 하는데 주부가 직장인일 경우는 도저히 불가한 실정이었다.
2012년 국학진흥원에서 실시한 안동의 주민의식조사에 밤 11시 이전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80%이상 이미 동의한바 있고 2년이 지난 지금은 필자 주변에서 새벽제사를 지내는 집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
다. 시계가 없던 시대에 제사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그저 첫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지내고 음복을 할 때 닭이 울면 아주 적정하다고 한때가 있었다는 것은 옛 이야기 거리로 넘어갔다. 그리고 주부들이 메밥을 짛기 위하여 정지(부엌)에서 한 여름 제사 한밤중에 보리 집단으로 두꺼운 무쇠 솥에 불을 때는 그 고충과 애환은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기기도 하였다.
다. 제사장소의 변화는 불가피 했다.
제사 장소는 주사자의 정침(正寢)에서 행한다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바쁜 현대 생활은 불가피하게 변화하도록 하였다. 주사자가 부득이한 일로 출장을 갔을 때 그것도 외국 출장일 때는 어쩔 수 없이 주사자가 머무르는 그곳에서 지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현대 글로벌시대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특별히 제삿날 주사자 가족이 여행을 갔을 때는 호텔, 콘도, 또는 야외 텐트 안에서 지내도 큰 허물로 보지 않는 세태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격세지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집안에서도 좁은 정침보다 거실 넓은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보편적 현상으로 바뀌었다.
라. 제사음식은 더 풍요로와 졌다.
전통시대는 거의가 가난을 면치 못 하였다. 따라서 제수는 원칙에 따라 조금씩 형식을 지키는 정도에 그 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사자 가정에서는 오로지 봉제사를 위한 제수 갈무리가 가정생활에 첫째 요건이었지만 요즈음과 같이 풍부 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사과, 배를 몇 개씩 쓴다든지 고기를 넉넉히 하고 갖가지 제수를 풍부히 한다는 것은 가정 경제가 그 만큼 좋아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사 음식이 남아서 몇일동안 이 음식으로 끼니를 할 만큼 풍부해졌다는 것도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제수 음식이 상품화 되어 전문제사상차림 장사가 있어 더욱 편리해 졌으며 아마도 이 사업은 앞으로 유망한 업종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주부의 정성이 담긴 음식 장만으로 정성스럽게 담은 제수이여야 한다는 옛 관념은 역사속의 이야기로 남게 되는 시초이라 하겠다. 그러한 반면에 가정의례 준칙 데로 저녁밥상에 간단한 제수를 올리고 지방을 모셔 지내는 집도 많다고 한다.
마. 의례절차는 거의 평준화 되었다.
전통적 제사 절차를 제대로 지켜온 가정은 대체적으로 일부 사대부집 가정 이었다. 서민들은 우선 학식이 따라가지 못했고 지키고자 했던 정신도 부족했다. 그것은 전통적 제도와 관행 탓이기도 하거니와 경제생활이 어려웠고 사회적 분위기가 서민들은 철저하지 못해도 큰 허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지방도 축문도 없었고 정해진 절차도 지키지 않았던 것이 피치 못 할 그때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다 고등교육을 받아 경제생활이 넉넉해진 까닭으로 정해진 글에 따라 누구든지 의례절차 데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글을 모르는 집에서는 유식자에게 지방 쓰는 것을 빌었거나 한번 쓴 지방을 두고두고 사용한 사례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바. 합제(合祭)라는 새로운 제사 의례가 생겼다.
제사의례 용어중에 단설(單設)이니 합설(合設)또는 단탁(單卓), 합탁(合卓)이라는 용어는 들었어도 합제라는 용어와 의식은 근년에 새로 생긴 말이다. 조상제사를 전통적 제삿날에 각각 지내던 것을 합하여 지낸다는 것이다. 합하는 형식은 대개 두가지로 나눈다. 가정의 모든 기제사를 한날에 함께 지내는 통일형과 세대별로 부부를 합치는 세대통합형 이라고 한다. 통일형의 제삿날은 제주로부터 가장 가까운 아버지 제삿날 또는 4대 봉사의 가장 윗세대인 고조부제삿날에 통일하고 세대통합형은 대개 아버지 제삿날에 어머니 제사를 지내는 고위(考位) 위주로 제삿날을 정하거나 고위와 비위(妣位) 즉 아버지, 어머니 제삿날을 해마다 번갈아 가면서 지내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옛 조상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현실 적으로 그렇게 지내는 집들도 여럿 있다는 것이다. 앞의 국학진흥원 조사에 2012년도에 안동이라고 하는 전통 고장에서 이미 5.6%가 이를 행하고 있고 지금쯤은 추세에 따라 10%는 될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 상주에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제삿날을 조절하여 제삿날과 가까운 토요일 초저녁으로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라고 볼 수있다.
이밖에도 제사 참사자의 참여의식도 많이 변하여 먼 곳에 살던 지차 아들이 부모 친기(親忌)에 만은 꼭 와야 한다는 관념은 거의 없어졌고 제수 준비를 맏집에서 만이 아니고 자손 각 집에서 각 각 적당히 분담하여 맏집으로 모여 지내는 대한히 민주적이고 바람직한 사례도 있다.
5. 급변하는 내일의 기제사 의례 추이(推移)
제사문화는 이미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왔고 앞으로는 급변하는 세태에 따라 더 빨리 변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 변화는 가족 구조의 변화와 함께 피할수 없는 경우도 있고 자손으로서의 의식변화와 사회분위기 등 여러 가지 여건을 들 수있다. 급변하는 내일의 기제사 의례 추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적어 보기로 한다.
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이 많아질 것이다.
그 이유는 독신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이 추세는 앞으로 더할 것이라는 점이다. 몇일전 언론 보도에 여대생들의 47%가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놀라운 조사결과를 듣고 참으로 암담한 감을 참을 수 없었다. 독신자는 제사 대상이 없고 독신자가 부모제사에 의무감을 가질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에 따른 제사 문화의 소멸현상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 맏집에서 기독교를 믿어 지차가 제사를 모시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것은 그 이유를 뒷받침한다.
나. 산자들의 제사 기대감 저하로 인한 변화
요즈음 필자 같은 70대 세대에 제사와 관련된 상담이 있으면 결론에 가서는 “다 나죽으면 그만” 이라는 말로 끝을 내는 경우가 많다. 급변하는 세태에 내 아들 손자들이 과연 내가 가진 만큼 투철한 제사 의식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는 말이다. 실제로 필자 자신이 아버지가 가지신 제사의 신념 만큼에는 부족하고 내 아들은 모르긴 해도 50%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내 며느리가 또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세대가 은연중 그런 사고를 가질 때 우리 아들은 더 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자손들의 제사 의식에 대한 투철한 교육이 은연중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다. 사회 분위기에 쉽게 동화되므로 인한 변화
지금까지의 제사문화가 변화되기까지는 다른 집들의 변화 사례를 봐가며 나름 데로 어렵게 변화하여 왔다고 본다. 그것은 제도상에는 명정되지 않았지만 사회 통념상 어느 정도의 규제가 있었고 급격한 변화로 지친간 또는 외인들로부터 지탄이 될까 하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이에 대한 의식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형편 데로 제사를 안지내거나 줄이거나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 사회 실상이다.
라. 남녀 평등시대의 기제사 변화
이 시대를 전통 관념으로는 완전한 남녀 평등시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건은 빠르게 신장하여 오히려 여성이 더 우월한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제사문화 또한 이 시류에 따라 큰 변화가 올 것이다. 우선 우리 주변에 딸만 둔 가정들이 많다는 것이 그 첫째 요인이고 제도상 재산 상속이 아들, 딸, 평준화 된 것도 그 원인 이라고 본다. 따라서 딸만 둔 집의 부모제사는 딸이 지낼 수밖에 없고 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딸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집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딸이 친정 조상 제사를 지낼 때는 남편과의 협의가 꼭 이루어져야 할 것인데 남자의 전통적 관념상 이에 대한 의식의 수용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딸, 아들 둘 뿐인 집들이 허다한데 한집안에 본가와 처가 두 집의 제사를 지내야 하고 대를 이어 친가와 외조부모가지 한집에서 적어도 8위의 제사를 지낸다고 할 때 또 하나 새로운 문제점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가족 구조상 미구에 우리주변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어느 한 쪽 이던지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두 집 모두 지내지 않는 집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6. 현실적 기제사 의례는 어떻게 할까?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미풍양속이요 어쩌면 효를 바탕으로 한 민족의 정체성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사문화의 장점과 전통 기제사의 의례를 살펴보고 오늘의 실태와 급변하는 내일의 제사 의례를 추이해 보았다. 그러면 시대에 부응한 현실적 제사의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화두를 던져 보고자 한다. 이것은 필자 자신이 제사 지낼 때 마다 느껴왔던 현안 이었고 집집마다 겪고 있는 피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제사 지낼 때 마다 서투르고 민첩하지 못하여 순서가 바뀌거나 때로는 절차를 빠뜨리는 경우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먼저 기본은 지키되 의례는 간소하게 하자는 것을 전제로 하여 현실적 현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제사대상은 조부모까지로 하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고 이미 실행하고 있는 집들이 많다. 이에 대하여 몇몇 전통세거 문중에서는 문중차원으로 결의하여 일원화 하였다는 말을 들은바 있는데 대단히 바람직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부모 까지는 봉사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생시에 조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경우에 따라 부모보다 조부모의 보살핌이 더 한 경우도 있어 인정상 의리 의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이와 같은 인정(人情)에 따른다고 하면 100세 시대에 증조부모 까지 확대하여 가족 간에 합의만 된다면 탄력적으로 행사 하여도 무방하다고 본다.
나. 제사 일자와 시간은 앞에서 여러 가지 현실적 실태를 살펴보았는데 아직 까지는 별세한 날자 오후 어두움이 시작되었을 때로 하는 것을 제언한다. 일부 통일된 날짜에 합제하고 있다는 말도 들은바 있으나 너무 급진적임을 떨쳐 버릴 수 없고 세태가 더 변하여 부모제사를 한 날짜에 합제하는 때가 올것으로 예상 하는데 그것은 그때 가서 시류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제사시간을 어두움이 시작되었을 때로 하자는 것은 별다른 천기(天氣)의 논리가 아니고 생업에 바쁜 현대인들이 퇴근을 하여 제사를 마치고 돌아가 다음날 일상에 지장이 없도록 일찍이 행사 하자는 것이고 제사를 지내고 음복상이 저녁식사 자리인 만큼 그 시간쯤이 적정하지 않을까하는 현실적 생각에서이다.
다. 제사 장소는 주사자의 집을 기본으로 하되 현대인들의 삶과 함께 어디에서든지 지낼 수 있다고 본다. 주사자가 멀리 출타 하였을 때는 남아있는 식구 누구든지 지내면 되고 가족 모두가 출타하면 출타한 그 장소에서 지내면 될 것이다.
라. 제수(祭羞)는 적당한 양을 준비해 가급적 음복상에서 소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제사가 있은 후 여러 날 동안 음식이 남아서 경건한 음식이 하대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된다. 가정의례준칙에 정한 제수 음식은 저녁식사 상에 몇 가지 기본 되는 제수를 적당히 차리고 지방을 붙여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것은 일리가 있는 규정이라고 본다. 제수음식 장만이 주부들의 몸과 마음을 고되게 하는 큰 문제점은 차츰 해소 될 수 있다고 본다. 경제가 허용하는 만큼 모든 것을 시장에서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대단히 바람직한 것은 형제 자매간에 서로 약간씩 분담하여 감당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집에는 형제자매들이 먼 객지에서 약간씩을 택배로 부쳐온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마. 더 나아가 제사 자체를 형제자매간에 분할하는 집도 있다는데 이 또한 합리적이고 우애를 일으키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아버지의 제사는 큰아들 집에서 어머니제사는 큰 딸집에서 또는 작은 아들이거나 막내딸 집에서 지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새로운 바람직한 미풍이지 흉 거리는 될 수 없다고 본다.
바. 의례절차 요목(要目) 별 행사는 지금까지 해오던 데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전에는 하지 않던 것을 책을 보고 새로이 추가 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가례의 전통을 지켜 내려 오게 한 조상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극단적으로 지방을 붙이지 않고 제사를 지내왔다고 하면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축문에 대하여는 새로운 조심스러운 제안을 드려본다. 제사는 주사자가 술을 드리는 헌작 때 축문을 읽는 독축 시점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그 축문의 형식은 순 한문 이거나 그 내용이 지극히 형식적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바다. 축문을 읽는 것을 대신하여 한해동안에 있었던 중요한 가정사를 조상에게 보고 하는 글을 지어서 낭독한다는 어떤 유력자의 T.V 강연을 듣고 그야말로 본받을 만한 사례라고 생각 되었다.
그것이 바로 축문의 원리적(原理的)근원 이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사(吉祀)라는 제사의 원리에 따라 참사자 모두 좋은 것은 기뻐하고 잘 못한 것은 반성하여 가족이 화합 분발하는 기회로 삼는다고 할 때 널리 보급할 일이라고 본다. 나아가 이와 같은 글을 계속 모으게 되면 한 가족의 역사가 될 것이요. 한 문중의 역사가 되고 국가 사회적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꼭 글을 짓지 않고 형편에 따라 말로 하여도 무방하다고 본다.
사. 이 밖에 기제사의 원만한 행사를 위한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
· 제삿날은 마음을 안정하고 존심(存心), 조신(操身)해야 한다. 전통시대에는 3일 재계(齋戒)또는 7일 재계한다고 했는데 현대에는 하루만이라도 여행(厲行)해야 한다고 본다. 제삿날 초상집에 안가는 것이고 남과 다투거나 문제성 있는 일을 피하고 음주가무 또한 자제 하여야 한다.
· 제삿날은 가족끼리 언행을 조심하고 특히 주부들의 많은 일에 협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수고로움을 서로 위로하자.
· 제삿날 객지에 자손들은 반드시 안부를 전하는 전통을 세우자. 자기부모 제삿날 만취가 되어 횡설수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부모를 욕보이는 소치가 될 것이다. 아울러 요즈음 세태에 따라 다과를 불문하고 약간의 돈을 보내는 것이 상례이다.
· 제삿날에는 반드시 한복을 입자. 주사자는 가급적 도복을 갖추고 그 외 참사자도 한복을 입어 우리 문화를 더욱 뜻있게 하자. 얼마 전에 안동출신 어떤 도의원이 한복에 관한 도 조례를 발의 재정하였다는 보도를 들었는데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고유의 한복문화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때가 올 것인지도 모를 만큼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우리 상주는 한복에 대한 관심이 너무 희박하다는 것을 느껴 온 것이 사실이다.
· 제사 날짜와 의례 요목을 비치하자. 거창하게 한지에 붓으로 쓴 것을 목판에 새겨두자는 것이 아니라 A4용지에 적어서 애스태이지를 붙여서 제사지낼 때마다 보고 지내면 유루(遺漏)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종교인들의 기제사
제사문화가 유교적 전승문화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나 불교,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교리적으로 크게 어긋남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기독교 계통 일부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듯한데 필자가 아는 어떤 기독교신자는 제삿날에 음식을 장만하고 형제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다.
훗날 솔직히 모인 이유를 물었던바 그날이 자기 아버지 추도식 날이었다는 것이다. 추도식이라면 그것이 제사가 아닌가, 유교식 의례절차가 있을 뿐이지 원론적으로는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다만 추도식이라는 의식자체도 하지 않는 것이 교리에 합당한지는 문외한으로서 거론 할 수 없다.
7. 전통기제사 의례의 문화적 전승대책
현실적으로 옛 전고(典故)에 의한 전통기제사 의례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혁명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례는 점점 쇠퇴하여 가고 있음을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제사 문화는 어디에선가 분명히 지켜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 문화를 지키는 몫은 이제 정부가 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근자에 경상북도에서 “종가포럼”이라는 전통문화 계승 대책을 펴고 있는 것이 바로 이에 뜻을 둔 것이라고 본다.
조금더 확대하여 가묘(家廟)를 모시고 있는 전통 가정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도 제사 문화 보전책이라고 본다.
현실적으로 가묘를 모시고 있는 가정에서는 솔직히 그 자체를 크게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고 자손들의 협조 또한 점점 쇠퇴해져 전통 유지보전에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필자 자신이 종종 보고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그분들이 바로 전통 유지 보전의 보루이고 유무형의 분화재라는 점을 간과 해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늘 상 말해오는 가가례(家家禮)의 전통을 그대로 채록하고 계속 보전하는 행정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감히 제언하는 바이다.
8. 맺음글
제사에 대한 것을 옛 전고(典故)에서부터 글로 옮긴다고 하면 더 많은 연구와 실증(實證)을 제시하는 구체적인 글이어야 하는데 식견이 부족한 필자가 이 시대에 민감한 사실을 거론하는 자체가 모험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 칠 수 없다. 다만 필자는 문화원에 몸을 담아 익지 않은 풋내기 문화건달이긴 하지만 우리네 가정에서 모두 겪는 통과의례에 다 같이 공감하는 방안을 찾고자 하는 필자의 소견임을 해량하고 누구인가 뒷사람의 더 깊은 연구와 좋은 방안이 제시되기를 바라면서 제현의 질정(叱正)을 기다린다.
<참고문헌>
1. <국조5례의>
2. <조상제사 어떻게 지낼 것 인가> 2012. 한국국학진흥원
3. <현대인을 위한 예법편람> 2002 이남철 편저
4. <가정의례유법요약> 2009 거창문화원
5. <가례편람> 2000 정임석, 문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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