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상주문화원 금요강좌. 경빈(敬嬪) 박씨(朴氏)를 위한 변명

빛마당 2015. 7. 16. 18:11

경빈(敬嬪) 박씨(朴氏)를 위한 변명

상주문화원장・농학박사 김 철 수


1. 머릿말

 경빈(敬嬪) 박씨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상주 여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임금의 아내가 된 사람이며, 당시 여건으로서는 정비인 계비자리에 충분히 오를 수 있었으나 간악한 사람들의 모략 때문에 빈의 자리로 만족해야 했던 비운의 여인이었다.

이 경빈(敬嬪) 박씨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는 1985년에 mbc 드라마 <풍란>이 있었고, 1996년에는 kbs 드라마 <조광조>가 있었으며, 2001년에는 sbs 드라마 <여인천하>등 세편이다.

특히 2001년에 방영된 sbs의 ‘여인천하’는 국민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저녁이면 다른 일들 모두 미루어 놓고 이 드라마를 보았고 이튿날이 되면 드라마를 본 소감으로 서로의 스트레스를 풀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다.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늘 경빈 박씨가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사극(史劇) 속의 최고 악녀(惡女)’라고 하면 ‘장희빈’이었으나, ‘연인천하’ 방영 후로는 ‘사극(史劇) 속의 최고 악녀(惡女)’라고 하면 단연히 경빈 박씨를 꼽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경빈으로 출연하는 도지원의 연기력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시청자의 허를 찌른 ‘신의 한 수’였다.

도지원은 강수연과 전인화 등 ‘기(氣)가 센 여자’들 사이에서, 결코 지지 않는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뭬야?”를 외치는 경빈의 역할을 통해서 시청자들의 미움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이 ‘연인천하’에서 천하의 악녀로 나오는 경빈 박씨가 ‘상주사람’이고, 상산박씨 집안의 여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리고 경빈 박씨는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악녀가 아니다. <중종실록>을 보아도 악녀라고 할 정도의 대목은 없다. 다만, 경빈이 중전자리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과정에서 대신들이 성격이 나쁜 사람이라고 한 이야기는 있으나, 그 성격이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는 없다. 단지 일부 사신(史臣)들이 몇 토막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천하에 몹쓸 악녀’로 내몬 사람은 드라마 작가들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경빈박씨가 자기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앉히기 위해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 방자한 모습이었으며, ‘작서의 변’을 일으키다가 비참하게 사사(賜死)되는 여인으로 묘사되었지만, 이 ‘작서의 변’을 꾸민 사람은 경빈 박씨가 아니라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였다는 사실이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드라마작가들은 전반부의 일만 부풀리고 후반부의 일은 다루지 않는 바람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사실과는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는 중대한 역사왜곡이다.

따라서 경빈박씨는 비록 빈(嬪)의 자격이었지만 상주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왕의 아내였으나, 사악한 사람(김안로와 그의 아들 연성위 김희)의 음해로 억울하게 아들 복성군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중종실록>을 근거로 하여 이 경빈 박씨의 억울함을 변명하려고 한다.


2. 중종(中宗)과 중종반정(中宗反正)

중종은 성종과 세 번째 부인인 정형왕후와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중종반정은 1506년 9월 1일 밤 11시 경에 시작하여 9월 2일 아침 거사가 완료된 사건이었다. 지중추부사 박원종과 영의정 유순정, 전 이조참판 성희안이 반정계획을 세웠고, 사복시 첨정 홍경주와 군기시 첨정 박영무가 훈련원의 병력들을 모았다.

이 반정군은 연산군의 최측근인 훈구파 임사홍부터 주살하였고 이어서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을 주살한 뒤에 곧이어 궁궐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반정군은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 연산군의 폐위를 종용하였고,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인 진성대군으로 보위한다는 교지를 받아내었다. 그러고는 곧 바로 연산군을 찾아가서 옥새를 빼앗고 진성대군의 사저를 찾아갔다. 이때 진성대군은 반정군 일당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 줄 알았다고 한다.

중종은 이복형인 연산군이 반정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1506년 9월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1506년 9월부터 1544년 11월까지 38년 2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이 재임기간 동안에 중종은 정비 3명과 후궁 9명해서 모두 12명의 여인들과 살았으며, 아들 9명과 딸 11명을 두었다.

정비로는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등 3명이고, 후궁으로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귀인 한씨, 숙의 이씨, 숙의 홍씨, 숙의 나씨, 숙원 이씨, 숙원 김씨 등 9명이다.


1) 첫째부인 단경왕후 신씨

첫째부인 단경왕후 신씨와는 12살 나이 때 혼인을 했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단경왕후 신씨가 연산군의 조카라는 사실 때문에 왕비에 오른지 7일만에 폐위되었으며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영의정 유순정,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 유자광 등 공신들이 마음씨 곱고 착하기만 한 아내 단경왕후의 폐위를 이야기했을 때, 중종에게는 이를 거절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궁 밖으로 쫓겨나는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기력한 자신을 자조해야 했었다.

그러나 단경왕후 신씨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다고 한다. 그녀가 보고 싶으면 높은 누각에 올라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으며, 그 사실을 전해들은 신씨는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고, 중종은 그 치마를 바라보며 보고픈 마을을 달랬다고 한다.

이 단경왕후 신씨는 230년이 지난 영조 15년(1739)에 가서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왕후로 복위하였다.

반정공신들이 단경왕후 신씨를 궁 밖으로 내치라고 몰아 부친 이유는 첫째, 박원종이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에게 반정에 가담하라고 했을 때,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거절한 것이 괘씸죄에 해당되었고, 두 번째로, 신수근의 누이가 연산군의 아내이기 때문에 단경왕후에게 연산군의 아내는 고모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2) 둘째 부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이 숙의 신분(후궁)으로 들어왔다가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다음해인 1507년에 제1계비(第一繼妃)가 되었다. 숙의 신분이었던 이 분이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였다.

슬하에는 1남1녀가 있었으나 1515년에 아들을 낳고 산후통으로 6일만에 죽었다. 이 아들이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이었다.

인종은 1520년 6살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서 무려 25년 동안 세자 노릇을 하다가 1544년 11월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다음해 7월에 31살의 나이로 죽었다. 불과 7개월 동안 임금노릇을 했다. 이 인종에게는 정비와 후궁 2명이 있었으나 자녀가 없었다.


3) 셋째 부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

1517년에 중종은 제2계비로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였다. 슬하에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이 아들이 나중에 인종 다음으로 조선 13대 임금이 된 명종이다.

1544년에 중종이 57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왕위에 오른 인종도 재위 7개월만에 죽자, 명종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어린 왕이기 때문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문정왕후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다. 그래서 인종이 왕위에 있을 때, “우리 모자(명종)을 언제 죽일 거냐?”고 괴롭혔을 사람이었다.

문정왕후는 첩 정난정으로 유명한 오빠 윤원형으로 하여금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인종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제거할 정도로 성질이 표독하였다. 그리고 수렴청정에서 손을 땐 후에도 정사에 지나치게 간섭을 했으며, 임금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퍼 부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사림파 성리학자들로부터 ‘조선의 악녀’로 낙인 찍혔던 사람이 ‘경빈 박씨’가 아니라 이 ‘문정왕후’였다고 한다.


4) 경빈 박씨(敬嬪 朴氏)

경상도 상주의 사족(士族) 박수림(朴秀林)의 딸로 태어나서 연산군 10년(1504)에 흥청(興淸)으로 궁중에 들어왔다.

그러고 2년 뒤인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진성대군이 중종이 되었고, 미모의 경빈 박씨가 중종의 눈에 들게 되었다. 더욱이 이 경빈 박씨가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인 박원종의 수양딸이라는 인연으로 경빈 박씨는 쉽게 후궁이 되었다.

그러고 1509년 숙의(淑儀)시절에 중종의 장자 복성군을 낳았고, 1512년 혜순옹주, 1514년에 혜정옹주를 출산하여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를 낳고 죽자, 다음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었으나 ‘흥청’출신이고, 장차 원자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한 신하들에 의해서 계비가 되지 못하였다.

1527년 “작서(灼鼠)의 변(變)”에 연루되어 아들 복성군과 함께 서인(庶人)으로 강등 당하고 친정이 있는 상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533년 “목패(木牌)의 변(變)” 이 일어나자 또 다시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는 바람에 사약을 받았고, 이후 아들 복성군도 사사(賜死)되었다.

그러나 후에 이들 사건들은 김안로(金安老)와 김안로의 아들이고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 김휘’가 한 짓이 밝혀지며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복권되었다.

상주의 향토지(鄕土誌)인 상산지(商山誌) 청대본의 고적(古蹟)편 운정(雲亭)조에 경빈(敬嬪) 박씨(朴氏)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운정(雲亭)은 외북(外北) 덕동(德洞)에 있다. 중종(中宗)때 경빈박씨(敬嬪朴氏)는 상호군(上護軍) 수림(秀林)의 딸이니, 어릴 때 여름에도 파리가 얼굴에 앉는 일이 없고 항시(恒時) 무지개가 세수 대야나 화분(花盆)에 박혀 있더니 얼마 안 있어 선발되어 궁중(宮中)으로 들어갔다.

중종이 지환(指環)하나를 주었는데 경빈(敬嬪)이 보니 이는 어릴 때 자기가 끼던 한쌍(雙)이 되었다. 이는 중종이 후원(後苑)에서 새가 물고 가다가 떨어트린 것을 주어둔 것이다.

뒤에 죄(罪)로 폐출(廢黜)되어 이곳에 궁(宮)을 짓고 와 있으니 항시 구름이 궁위에 덮혀 있어 운정(雲亭)이라 하겠다. 드디어 사약(賜藥)이 내려 죽게 되니 이곳에 장사(葬事)지냈다.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상소(上疏)하여 신원(伸寃)하고 한양(漢陽)으로 이장(移葬)하였으며 그의 아들이 복성군(福城君) 미(嵋)이다.

(九 古蹟 雲亭 在外北德洞. 中廟敬嬪朴氏上護軍秀林女生在襁褓雖盛夏蠅不止面十四時有虹六於與분인向西北未幾選入宮 中廟賜指環一雙敬嬪視之乃兒時所着而亡其一者出舊有合之宛然成雙蓋一中廟於後苑見烏舍墜而拾得者也後以罪廢歸築宮以處常有雲氣覆其上故謂之雲亭竟 賜死葬此 仁宗在東宮時陳蔬伸寃移葬干京城外子福城軍嵋)”


*운정(雲亭)이 있던 곳에 대궐에서 쫒겨온 경빈 박씨가 살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운정(雲亭)이 있던 곳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상주지명총람」에서 ‘능(陵)’자가 들어간 지명과 ‘궁터’를 찾았더니 사벌면 덕가못 부근에 ‘구릉지 마을’이 있어서 가 보았으나 운정(雲亭)이나, 경빈박씨의 무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3. 경빈(敬嬪) 박씨를 위한 변명


변명 1. 왕비(王妃)가 되기 위해 방자하지 않았다.

경빈 박씨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왕비가 되고 싶은 강한 소망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빈은 중종과의 사이에서 나중에 인종(仁宗)이 된 세자보다 여섯 살 위인 아들 복성군을 두었고, 앞의 장경왕후도 경빈과 같은 후궁출신으로 왕비가 되었던 전례가 있으며, 당시 중종이 후궁속에서는 경빈을 가장 총애했기 때문에 다음 중전자리의 0순위였다.

당시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후임으로 누구가 중전에 오를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조정에서는 모두가 경빈 박씨를 후임으로 꼽았다. 그런 분위기를 전하는 대목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숙의(淑儀) 박씨(朴氏) 즉 경빈(敬嬪)이 왕을 가장 가까이하여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있다”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자못 안에서 굄을 받았고, 그의 소생 복성군(福城君)이 나이가 원자보다 위다”

“이보다 앞서 곤위(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그런데 정광필만이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후비 간택을 진간(進諫)하는 바람에, 박씨의 뜻은 저지되고 상의 뜻도 새 왕비를 맞기로 결정하였다.”


는 것이 사신(史臣)들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제1계비(第一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1515년에 산후통으로 돌아가시고 2년 동안 중전 자리가 비워 있었는데, 당시 조정의 대신들과 사신들은 모두 중종의 장남을 낳았고, 또한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빈 박씨가 장경왕후의 예를 따라서 중전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보았으나, 영사 정광필의 단호한 반대로 중종 12년(1517) 7월 22일로 왕비가 되는 꿈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경빈 박씨가 왕비가 되기 위해 방자한 짓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만약에 경빈이 ‘꼭 왕비가 되고 싶다’고 했더라면, 영사 정광필이 자신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에 중종의 총애를 머리에 이고 별스러운 행동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사실이 왕조실록에 올라갔을 것이다.

이미 정광필의 훼방으로 자신이 왕비가 될 수 없게 된 처지였고, 더구나 장경왕후의 아들과 제2계비 문정왕후가 왕자(후일의 明宗)을 낳자, 왕권다틈은 장경왕후의 아들과 문정왕후의 아들 간에 일어날 것이고, 복성군의 경우는 여기에서 한발짝 물러난 경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를 핍박하고 죽기를 바라는 쪽은 문정왕후였을 것이다. 만약에 인종이 일찍 죽으면 문정왕후의 아들이 대를 잇는 0순위였기 때문이다.

단지 대사간인 서지(徐祉) 등은,


“박빈(朴嬪)이 국가에 공덕(功德)이 있지도 않으면서 지위가 1품(品)에 오르고 총애(寵愛)가 후궁들 중에 제일이라 하니, 신 등은 전하께서 사정에 치우쳐서 집안을 다스려가는 정사에 누덕(累德)이 될까 싶습니다.”


라고 상소한 기록이 있으나, 중종이,


“모든 왕자녀의 제택이 법도에 벗어난다는 일은 이미 금지하도록 한 것이고, 후궁(後宮)의 승직(陞職) 일은 여관(女官)들도 차례대로 승진하게 되어 있어 오래되면 비록 공덕(功德)이 없더라도 으레 1품(品)으로 승진하게 된다.”


라고 분명한 답변을 해 주었다.

따라서 박빈(朴嬪)이 1품을 받은 일은 공덕이나 총애 때문이 아니고 조정의 율에 따라서 1품으로 승진되었다는 설명이었고, 또한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는 “명종이 된 자기 아들이 자신이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종아리와 뺨을 때리며 욕설을 하였고, 탐욕이 도를 넘어 축재를 많이 했다”는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경빈이 중종으로부터의 총애를 빙자해서 방자하게 처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종실록>에서는 경빈 박씨가 아들 복성군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정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노력하였고, 이것은 국본(國本)을 위해하는 행위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경빈 박씨가 복성군을 왕위 계승자로 정하기 위해서 한 일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홍문관에서


“경빈 박씨가 외람되이 궁액(宮掖)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화심(禍心)을 품고 국본(國本)을 위해하려 했었으나 권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저주를 한 것이며 그 근거는 자전(慈殿)의 전지(傳旨)에서 나왔다고 했다.”


라는 이야기를 내 놓았을 뿐이다.


변명 2. 경빈 박씨의 성격에 대한 변명

경빈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삼가 살피건대 박씨가 외람되이 궁액(宮掖)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화심(禍心)을 품고 국본(國本)을 위해하려 했었으나 권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저주를 한 것입니다. 지위가 상당하고 권력이 대단했더라면 요괴로운 술법을 쓸 것도 없이 화란(禍亂)을 일으켰을 것이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박씨(朴氏)는 본디 요사한 자질로 은총을 믿고 횡행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으며 오랫동안 불측한 마음을 품고 남몰래 흉측한 계교를 부렸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박씨는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궁액(宮掖)에서 깊은 사랑을 받아 권세가 매우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겸억(謙抑)하는 마음이 없이 매양 방자한 생각을 품어 명분(名分)을 범하고 왕후를 무시했습니다. 그리하여 천인(天人)의 분노를 일으켰고 한번 흉모(兇謀)를 부림에 오묘(五廟)에 죄를 졌습니다.”


따라서 경빈이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고, 성품이 공손하지 않고, 방자하고, 뇌물을 긁어 모으는데 전력하는 등 악녀로서의 소양을 전부 가지고 있다고 드라마에서는 부각시켰으나 정작 실록에서는 세 번의 기록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중종 22년(1527) 4월 26일에는 경빈 박씨의 인척을 파출하라고 대간이 여덟번째 건의하여 박수림·박인형·박인정 등을 파직하는 성과를 얻은 날이었는데, 이날 사신들이 논한 이야기속에는,

“박수림은 대대로 상주(尙州)에 살았다. 족계(族係)는 사족(士族)이지만 비길 데 없이 한미하고 군색했기 때문에 정병(正兵)에 예속되어 있었다.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에 채홍(採紅)의 일로 궁중(宮中)에 들어온 여인이 경빈(敬嬪)이다.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이다.“

라는 기록이 들어 있다. 이 이야기는 사관들이 한 이야기이고, 대신들은 이렇게 이야기한 일이 없다.

그러나 중종 27년(1532) 3월 20일에 이종익이 올린 옥중 상소에는,


“대저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는 전하의 서자(庶子)이고 박씨는 빈잉(嬪媵)의 처지로서 모두 지친(至親)이 됩니다. 오늘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가 내일 전하께서 아시게 되면 이 세 사람은 모두 전하께서 천하다고 버리게 될 처지인데도 세 사람의 지혜로 이를 깨닫지 못했단 말입니까?

극개(克愷)는 박씨와 사돈간이고 극핍은 극개의 큰 형이니 극핍이 극개을 구하고자 하는데 어찌 박씨의 뇌물을 받으며, 또 한창 말썽이 되었을 때에 박씨는 어찌 다른 돕는 자를 버리고 극핍에게만 급급했겠습니까.

또 임금의 궁인(宮人)이 외정(外庭)에 뇌물을 주었는데도 임금이 몰랐다면, 왕실의 체통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본다면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가 그 아비를 위하여 상언(上言)하고자 하여 먼저 심정에게 청하니 심정은 거짓으로 이를 승락하고 그 수의(收議)함에 있어서는 공론(公論)에 따랐습니다.“

<중략>

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경빈 박씨는 구름같이 사람을 모으지도 않았고, 뇌물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또 한번은 대간이

박씨는 참람스럽게 상(上)의 측근에 있으면서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었고, 권세가 치열하여 문정(門庭)이 시장과 같았고, 서로 굳게 교결하여 중외(中外)에 뿌리박고 있었습니다.

평소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실 때 밖으로는 온순한 체하면서 몰래 세자(世子)를 위해(危害)할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었으니, 전하께서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어찌 섬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대간 등이 경빈 박씨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과정에서 의당 거론이 되어

야 할 항목일 것이다.

그러나, 대간과 대신들은 ‘작서의 변’이 국본을 해친 일이라는 것과 경빈 박씨를 그 주모자로 몰아가는 일 외에 경빈의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한 일이 없다.

따라서 실록의 자료를 검증해 보면, 조정에서 공론화된 이야기가 아니고 일부 사신들의 일방적인 견해였다고 볼 수 있고, 후대의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드라마 작가들이 흥행을 목적으로 경빈 박씨를 이렇게 ‘천하의 악녀’로 분장시킨 일이라고 생각한다.


변명 3. 경빈(敬嬪)이 “미천한 출신‘이 아니었다.

경빈 박씨가 조선왕조실록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중종 10년(1515) 7월 26일의 일이었다.

이날 중종은 대신들에게 공석으로 있는 왕비 자리에 대해서 의견을 물어 보았다. 이미 조정에서는 경빈이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기 때문에 후궁에서 왕비가 된 장경(章敬)의 예를 따라 경빈 자신도 중전자리에 오르고자 하였으며, 중종도 이것을 기정사실로 받아 드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이를 알고 있는 영사(領事) 정광필이 유독 반대를 했다.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됩니다.”


라며 후비를 따로 간택할 것을 진간하였고, 성격이 우유부단한 중종이 단호하게 자기 이야기를 못하는 가운데 정광필의 의견이 수렴되었다. 정광필은 ‘경빈 박씨는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고, 그 이유를 ‘미천한 출신’때문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서 경빈의 꿈과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당시 사관들은 영사 정광필이 경빈 박씨를 반대한 것은 원자를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라고 했다. 즉,


“임금의 서자 복성군은 원자보다 나이가 많고 그 어머니 경빈이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복성군이 후일에 원자와 대적하게 될 화근을 미리 차단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경빈 박씨를 지목해서 “미천한 출신”이라고 한 정광필의 이야기는 실제로 잘못된 부분이다.

먼저 경빈의 고조(高祖)인 안의(安儀)는 고려말에 등과하였으나, 조선조에 불사(不仕)하셨던 선비였다. 그리고 아우들 가문보다는 큰 벼슬을 하신 선대(先代)가 적어서 잠시 당친(堂親)중에 등과(登科)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조부 휘(諱) 사영(士英)은 제주목사를 역임했고, 증조부 휘(諱) 미창(美昌)은 좌(左) 군사정(軍司正)이였다. 그리고 종종고조부(從宗高祖父) 휘(諱) 안예(安禮), 휘(諱) 안지(安智), 휘(諱) 안신(安信)은 전부 판서에 이르렀고, 종백숙부(從伯叔父) 휘(諱) 세훈(世勳), 휘(諱) 세희(世熹)는 기사명현(己巳名賢)이었으며, 휘(諱) 세후(世喣)는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등 열거할 필요도 재론할 필요도 없는 명문의 종가(宗家)태생이었다.

경빈의 고조인 휘 안의(安儀)에 관해서 박씨문헌록에는


“朴安義右贊成文老 子號商巖文科判典農寺事入國朝不仕見與誌”


라면서 려조(麗朝)의 절의(節義) 충신(忠臣)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무리 명문대가라 할지라도 방목 인물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문은 드물다. 그래서 잠시 당친 중에 등과한 인물이 없었다고 “미천한 출신”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며, 한 사람의 잘못된 이야기 때문에 한 인생의 꿈이 좌절된 일은 아주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경빈 박씨를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한 정광필의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고, 이런

변명 4. 경빈과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은 무관하다.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은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대사헌 조광조(趙光祖)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내어 사림계를 일거에 타도하였던 훈구파들의 음모사건이었다.

개혁을 주도한 조광조가 중종 반정 때 참가하지도 않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사람들을 모두 가려내어 78명을 공신록에서 지워 버리고, 그들에게 주었던 공신전(功臣田)과 노비(奴婢)를 몰수를 해 버렸다.

이에 반정공신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등이 조광조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중종의 사랑을 받고 있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움직였다.

그들은 희빈과 짜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 肖 爲 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그것을 벌레가 먹게 했다. '주(走)'자와 '초(肖)'자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되며,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이 궁중에 퍼졌다.

그래서 조광조는 1519년 12월 20일, 사약을 받고 38살의 젊은 나이로 숨졌으며, 처자들은 노비가 되었고, 재산은 모조리 빼앗겼다.

그런데 경빈이 밑에 있던 궁인들을 이용하여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궐내에 유포하였다는 소문 때문에 경빈이 이 음모사건에 가담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음모사건은 반정공신인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가 기획하고 홍경주의 딸인 중종의 희빈 홍씨가 실행한 사건이었고, 반정공신과 신진사림파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이 사건에 있어서 양부(養父) 박원종 때문에 경빈을 훈구파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중종반정의 1등공신인 박원종은 이미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는 말이었다.


변명 5. ‘작서(灼鼠)의 변(變)’은 경빈 박씨의 소행이 아니다.

경빈박씨(敬嬪朴氏)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이 이 ‘작서의 변’이다. 1527년 2월 26일의 일이다.

동궁(東宮)은 장경왕후가 낳은 왕세자가 거주하는 궁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에 탄 쥐의 머리통과 왕세자를 저주하는 방서가 동궁의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불에 탄 쥐는 꼬리와 사지가 잘려져 있었고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바로 전날이 세자의 생일이었고, 세자는 돼지띠였다.

그래서 당시의 조정 신료들은 세자를 저주하고, 누군가가 세자를 모함하기 위해 저지런 사건이 틀림없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3월 초하루에 대전(大殿) 침실의 책장에서 ‘작서의 변’과 비슷한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누구가 저지런 일일까?’, ‘왜 저질렀을까?’하는 의문이 일어나고, 만에 하나 왕세자에게 변고가 닥치면 누구가 제일 덕을 볼까?‘하는 생각이 일었다.

중종은 후궁인 경빈박씨와의 사이에 복성군을 두고 있었다. 만에 하나 왕세자가 급사라도 하는 날이면 복성군이 세자위에 올라서 중종의 뒤를 이어서 보위를 이을 수도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빈박씨는 이 일의 주모자로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경빈을 비롯해서 경빈(敬嬪)의 계집종 범덕(凡德), 안씨(安氏)의 방자(房子) 잉읍화이(仍邑火伊), 김씨(金氏)의 방자 가지가이(加知加伊), 시녀(侍女) 향이(香伊)의 방자 가응지(加應之), 돈일(頓逸)의 방자 생심(生心), 효덕(孝德)의 방자 석비(石非), 천이금(千伊今)의 방자 이비(李非) 등이 추문을 받았다.

먼저 경빈(敬嬪)의 공초(供招)에는,


“소첩(小妾)이 지난 3월 초하룻날 오후. 거처하는 방에서 귀인(貴人)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 뒤 귀인은 대비전(大妃殿)으로 나아가고 소첩은 침실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 소첩은 대청 서남쪽 분합문(分閤門) 밖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나인(內人)들과 퇴선(退膳)을 나누어 먹기 위해서 안씨(安氏)·돈일(頓逸)·천이금(千伊今)·효덕(孝德) 등에게 동침실 동쪽 모퉁이에 있는 빈 그릇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퇴선을 나누려 하므로 그대로 앉아 있기가 거북해서 동침실로 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상(上)께서 그 침실로 나오셨고 마주 대하여 앉아 있다가 세수하러 나가셨습니다.

소첩은 제 아비의 병이 위중하기 때문에 의원(醫員)에 관해서 아뢰려 할 때 상께서 ‘저기에 쥐가 있다……’ 하셨습니다. 소첩이 ‘쥐가 어디로 들어왔을까요?’ 했더니, 상께서 ‘남고란(南高欄) 유렴(油簾) 밑으로 들어왔는가 보다.’ 했습니다.

소첩이 즉시 그 곳으로 가보니 남고란의 유지의(襦地衣) 위에 쥐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상께서 아랫것들을 불러 ‘집어다 버리라.’ 하셨습니다. 안씨는 그 쥐를 보자 기겁했으므로 김씨(金氏)가 치마[赤亇]로 쥐를 덮어싸서 동전(同殿)의 서쪽 뜰에다 내버리려 할 때 상께서 ‘쥐구멍이 있는 곳에다 내버리라.’ 하셨습니다.”


하는 내용이었다. 도승지(都承旨) 유보(柳溥)가 추문 대상자들이 진술한 내용을 가지고 입계하였다.


“경빈(敬嬪)의 계집종 범덕(凡德)의 공사(供辭)에는 ‘지난 3월 1일 대전(大殿) 침실의 곡란간(曲欄干)에 발이 끊기고 불에 지져진 쥐가 버려져 있었다는 데 대한 근인(根因)을 추문하시는데, 저는 그 날 오후 안씨(安氏)와 시녀(侍女) 향이(香伊) 등이 그 쥐를 대비전(大妃殿)으로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대비전 감찰시녀(監察侍女) 소매(小梅)와 나 그리고 각방(各房) 사람들이 실지로 보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추문하시는데, 이는 들어서 알 뿐입니다. 쥐는 직접 못보았고 또한 누구의 소위인지도 모릅니다.’ 했습니다.

안씨의 방자 잉읍화이(仍邑火伊)는 ‘지난 3월 1일 대전(大殿)의 곡란(曲欄) 위에 발이 끊기고 불에 지져진 쥐가 버려져 있었던 근인을 추문하시는데, 이 일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제가 대전(大殿)에 가서 빈 그릇을 가지고 왔었습니다만 침실 근처에는 으레 가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그 쥐를 못보았고 아울러 근인(根因)도 모릅니다.’ 했습니다.

김씨의 방자 가지가이(加知加伊)·시녀 향이(香伊)의 방자 가응지(可應之)·시녀 돈일(頓逸)의 방자 생심(生心)·시녀 효덕(孝德)의 방자 석비(石非)·시녀 천이금(千伊今)의 방자 이비(李非)의 공초도 위와 같았습니다.”


러자 중종이 다시 전교하기를,


“모두 예사(例事)로 받은 공사(供辭)였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바른 말을 받아낼 수 있겠는가? 지금 다시 추문하기를 ‘너의 주인이 쥐를 가지고 왕래할 때 네가 보았지?’ 하거나 ‘이 일은 너의 주인이 한 짓이지? 너의 주인이 한 일을 네가 어찌 모르겠느냐? 너의 주인이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궁중(宮中)에 반드시 의심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네 생각에 의심가는 사람은 누구냐? 그리고 네가 빈 그릇을 가지고 드나들 적에 같이 드나든 사람은 누구냐? 또 어느 곳에 서 있었느냐?’ 하고 다방면으로 힐문하면 착오점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드나들 때 가져다 버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이 점도 힐문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다시 힐문하도록 하라.”


도승지 유보가 다시 조사하여 입계(入啓)하였다.


“나인들을 전교의 뜻에 의거 힐문했습니다. 그랬더니 범덕(凡德)의 공사(供辭)에는 ‘지난 달 초하루 오후 홍귀인(洪貴人)은 대비전(大妃殿)으로 갔었고 우리 주인 경빈(敬嬪)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쥐를 불에다 지진 일을 사람들이 혹 우리 주인의 소위인 줄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고 억측했을 뿐입니다. 기타 의심스러운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했고, 잉읍화이(仍邑火伊)의 공사에는 ‘나는 당초에 그 쥐를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 3월 1일 다른 방자(房子)들은 먼저 빈 그릇을 가지고 왔었고 나는 맨 나중에 혼자서 가지고 왔습니다. 시녀 돈일(頓逸)은 동편 박석(薄石) 쪽에서 나와 음식을 받아가지고 가는 것만 보았을 뿐 달리 본 사람이 없습니다.’ 했습니다. 가지가이(加知加伊)·가응지(加應知)·생심(生心)·석비(石非)·이비(李非)의 공사도 같았습니다.”


하였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진술이 이처럼 한결같이 ‘보지 못했다’, ‘모른느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자전(慈殿)이 이 사건의 관련자로 경빈을 지목하고 나섰다.


“동궁(東宮)에 매달려 있던 쥐에 대해서는 전일 세자궁(世子宮) 시녀들의 초사(招辭)와 같다. 3월 1일 경복궁 침실에 버려져 있던 쥐에 대해서도 별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경빈(敬嬪)이 오랫동안 혼자 앉아 있었고 그의 계집종 범덕(凡德)은 뜰 밑을 두번이나 왕래하였다. 계집종이 왕래한 일에 대해서 경빈이 스스로 변명하기 위해 ‘나의 계집종이 두 번이나 뜰 밑을 왕래했지만 어찌 그가 쥐를 여기에다 버렸겠는가?’ 했고, 계집종이 왕래한 일은 바로 경빈이 스스로 한 말이었다.

쥐를 보았을 때도 경빈 혼자 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여기에다 버렸다면 경빈이 의당 보았어야 했다. 따라서 경빈외에는 달리는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고 그 사상(事狀)은 이와 같다.

지금 경빈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의심한다.’ 하면서 욕지거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월 28일에 경빈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의 계집종들이 인형(人形)을 만들어 놓고 참형(斬刑)에 처하는 형상을 하면서 ‘수레가 몇 대나 왔는가? 쥐 지진 일을 발설한 사람은 이렇게 죽이겠다.’ 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추문했더니 자복(自服)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복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경빈의 계집종 3인을 즉시 추문할 것을 상에게 아뢰었다.”


자전은 이렇게 이 사건을 경빈의 탓으로 돌렸지만, 물증은 하나 없고 정황을 토대로 추측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경빈의 계집종인 사비(四非)·춘월(春月)·덕복(德福)을 문초할 때는 자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형신(刑訊)을 가했으나, 앞의 진술과 같았다. 혜순 옹주(惠順翁主)를 모시는 계집종 모이강(毛伊姜)·자귀(者歸)·귀인(貴仁)들도 추문하였으나 모두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이렇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못 보았다’고 진술하는데도 불구하고 일은 점점 경빈 박씨가 불리한 쪽으로 흘렀으며, 조정 대신들이 드디어 경빈을 궁중에서 쫓아낼 것을 간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중종은,


“자전의 뜻은 그날 박빈(朴嬪)이 혼자 동침실(東寢室)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스럽게 여겼던 것이고, 박빈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의 계집종들이 또 인형을 만든 일을 하여 그 사상(事狀)이 주도 면밀한 것 같았으므로 아랫사람을 추문하라 명한 것이다.

아직도 정범(正犯)을 분명히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죄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조정에서 그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가지고 죄줄 수 있겠는가? 이는 중대한 일이니, 다시 의논해서 아뢰라.”


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의논한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중종은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날로 박빈을 폐하고 복성군의 작호를 삭탈하는 전지(傳旨)를 내려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지난 2월 25일 동궁(東宮)과 3월 1일 대비전 침실에서 있었던 쥐를 지져 저주한 일에 대해 상하(上下)가 통분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초하룻날 박빈이 침실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의심했고, 그뒤 혜순 옹주(惠順翁主)의 시비(侍婢)가 송백당(松栢堂) 동쪽 뜰에서 인형을 만들어 참형을 집행하는 형상을 했다. 그리고 자전(慈殿)이 쥐를 지진 요술을 부린 것도 이들의 소위인가 의심하여 유사(有司)로 하여금 하인(下人)을 추국(推鞫)하게 했었다.

그리하여 누차 형장(刑杖)을 가했으나 죽음을 한하고 승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이 국본(國本)에 관계되고 종묘 사직에 죄를 얻는 것이었으니 자복(自服)을 받아내어 의(義)에 입각하여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조정과 같이 의논한 결과 박빈을 궐외(闕外)로 내치고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을 것으로 의죄(擬罪)했다.

그러나 대간은 이 정도의 조처로는 만족하지 않고 다시 차자를 올려 박빈을 죄줄 것을 간하였고,이에 중종이 전교하기를,


“자전께서 분명히 지적했다면 죄를 정하기가 뭐 어렵겠는가? 단지 의심스럽기 때문에 하인(下人)을 추문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대죄(大罪)는 반드시 사간(事干)의 증언이 귀일된 뒤에야 죄를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추관(推官)에게 말했더니 추관도 실정을 알아내기가 어려우니 그대로 의죄(擬罪)할 일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조정과 같이 의논해서 의죄한 것이다.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고 대죄(大罪)를 결정하는 것은 고금에 못들은 일이다.”


라며 중종은 화를 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경빈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건의를 이후 16차례나 하였으나 중종은 그때마다 이를 거절했다.

대신들은 ‘무조건 벌을 내리라’고 했지만, 중종은 ‘대죄(大罪)는 반드시 사간(事干)의 증언이 귀일된 뒤에야 정할 수 있다.’ 고 맞섰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추관도 실정을 알아내기가 어렵다고 해서 조정에서 의논하여 의죄한 것’이라는 중종의 생각이나 처신은 올바른 생각이고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확실한 물증이나 증인없이 이 사건으로 경빈 박씨를 폐하고 서인으로 상주로 유배시켰으며, 복성군의 작호를 삭탈하고, 경빈 박씨의 두 딸도 폐서인이 되어 유배한 것은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당시 드라마에서는 경빈을 몰아내기 위해 국유지 목장을 사취한 혐의로 유배중이던 희락당 김안로와 문정왕후의 장자방(張子房), 정난정이 연합하여 동궁 후원에 작서를 매달아 세자를 저주한 작서의 변을 일으켜 그 일을 경빈의 소행으로 몰아 경빈과 복성군을 사사했으며, 그 일로 김안로가 조정으로 돌아와 심정과 손을 잡고 정권을 잡기 시작했으나 후에 작서의 변의 진범이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 김희의 아내였던 효혜공주로 의심받자 김안로의 사주를 받아 동궁에 작서를 놓아두었던 효혜공주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죽고, 김안로가 심정을 몰아내기 위해 효혜공주가 졸한 시각을 어의를 협박해 왕에게 늦추어 알렸다가 이 일이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나은 이후에 발각되어 김안로 일당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실추한 뒤에 윤임이 세자를 중심으로, 윤원형이 경원대군을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대립하였으나 중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인종에 즉위하면서 윤임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인종이 곧 승하하고 경원대군이 명종에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에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윤원형과 정난정이 그 권력으로 갖은 행패를 부리다가 문정왕후 사후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나왔다.

중종의 총관 후궁이었던 경빈 박씨는 중종의 모든 후궁들을 통틀어 왕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으며, 중종의 맏아들 복성군을 나으면서 중종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경빈은 그만큼 권력의 중심에 서있는 여인이었으며 세자, 즉 인종의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죽자 중궁전을 탐하였으나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에게 중궁전을 빼앗겼다.

경빈은 박원종의 수양딸로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조정 공신들과 결탁하여 큰 힘을 휘둘렀다.

그의 아들 복성군을 왕세자로 옹립하고 자신이 중궁전에 앉기 위해 세력을 모으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녀의 세력의 중심 인물은 남곤, 심정 등이었다.

1519년에 경빈은 남곤, 심정 등과 함께 모의를 하여 남양군 홍경주와 손을 잡고 희빈 홍씨에게 사주하여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을 써 넣어 벌레가 이부분을 갉아먹자 글씨가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이를 중종에게 보여주며 조광조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을 하늘이 알려주시는 것이라며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신진 사림파를 몰아냈다.

그 후 김안로가 그 아들 연성위 김희가 중종의 맏딸 효혜공주와 결혼 한 것을 빌미로 권력을 남용하자 경빈은 자신의 세력을 움직여 김안로를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1533년 작서의 변이 일어나자 범인으로 몰려 복성군과 함께 폐위되었다가 그해 복성군과 함께 사사당했다.

그 후 조정에 돌아온 김안로는 심정이 경빈과 내통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심정과 그 일당을 모두 몰아내고 조정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중종을 압박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치를 좌지우지 하며 권력을 남용한 공포정치를 펼쳤으나 문정왕후를 폐위하려는 음모가 발각되고, 작서의 변이 그의 아들 김희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중종의 밀령을 받은 윤안임과 대사헌 양헌에 의해 체포되어 유배갔다가 사사당하였다.

그 후 조정의 세력은 세자의 외숙부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파와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의 외숙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파로 나뉘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소윤파는 쥐의 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에 불을 내는 등 갖은 수작으로 세자를 죽이려고 힘썼으나

실패하고 중종이 승하하여 세자가 인종에 즉위하자 대윤파는 윤원형일파를 모두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심신이 쇠약했던 인종이 후사 없이 8개월만에 승하하면서(이부분에 있어서는 문정왕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음)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명종에 즉위하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 결과 당연히 권력은 윤원형과 소윤파가 장악하였으며 소윤파는 윤임과 대윤파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과 대윤파 일당을 모조리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윤원형의 첩 정난정은 이 과정에서 문정왕후에게 대윤파의 죄를 고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 후 윤원형의 정실 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정실의 자리를 차지했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괴임을 받으며 당의를 하사받고 외명부 정 1품의 작위인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았으며 궁궐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정난정은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키고 불교의 중흥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조정에서는 윤원형과 정난정에 대한 탄핵상소가 끊이질 않았고, 결국 명종은 외숙부였던 윤원형과 정난정을 황해도 강음으로 귀양보냈다.

정난정과 윤원형은 다시 조정 권세를 잡을 날을 꿈꾸며 숨죽여 지냈으나 정난정이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독살한 사건이 탄로나자 그곳에서 음독자살하였다.**


변명 6. ‘목패(木牌)의 변’은 경빈박씨의 소행이 아니다.

이 사건은 일명 “가작인두의 변”이라고도 하며, ‘작서의 변’이 일어난지 6년이 지난 중종 28년에 일어났으며, ‘작서의 변’과 비슷한 내용의 사건이었다.

동궁 빈청 남쪽에 얼굴 모양을 분명하게 새긴 목패를 달아 놓았는데, 한쪽 면에 새긴 글씨는,


"이와 같이 세자의 몸을 능지한다.“


”이와 같이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한다.“

”이와 같이 중궁(中宮)을 참한다"


라는 무시무시한 글귀가 새겨져 있고, 한쪽 면에는 "병조의 서리 한충보 등 15인이 행한 일이다" 라고 씌어 있었다.

‘작서의 변’이 일어난 뒤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나자,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이 ‘목패의 변’이 일어난 이튿날. 조정에서는 영의정 정광필을 위시한 31명의 대신들이 모여 익명서 사건을 논의하였다.

먼저 영의정 정광필은,


“어제의 일은 천고에 못듣던 흉역으로 누구의 소행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쓰인 글자가 가까스로 쓴 것 같으나 내용이 매우 황당합니다. 시종과 대간들도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일이 있으면 모두 말해야 됩니다”


라고 했고, 순손은 “동궁의 각 색장(色掌)들을 추문하면 의심스런 단서가 나올 것”이라고 했으며, 정광필은 “동궁의 차비인(差備人)을 추문하면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안로는 “아무리 흉역스런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만고에 없었던 일”이라고 통분했다. 이러는 가운데 채무택은,


“아랫사람들의 생각엔 의심가는 곳이 있습니다.【아랫사람들의 의심은 모두 박씨(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의 당여에 있었다.】 궁내의 사람이 이곳에다 세워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자는 따로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고, 또,


“예부터 역신(逆臣)은 있었습니다만,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신하들 뿐만이 아니라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통분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목패(木牌)에 쓰여있는 글자를 살펴보면 뜻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무식한 사람의 소행은 아닙니다. 신거관의 집에 던져 넣었던 투서에 ‘13일 작성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거기에 쓰인 글씨도 보통 사람의 글씨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다 해도 자기 한몸에 해당되는 작은 일이라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라고 했고, 양연(梁淵)은 동궁 근처에 입직(入直)했던 사람과 출입한 사람 가운데 의심스런 사람을 추문하기를 청했고, 채무택은,


“아랫사람들의 생각엔 의심가는 곳이 있습니다.【아랫사람들의 의심은 모두 박씨(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의 당여에 있었다.】그리고 궁내의 사람이 이곳에다 목패(木牌)를 세워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 자는 따로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신거관은,


“이달 12일 본사(本司)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해가 아직 일렀고, 족질(族姪)도 마침 왔었습니다. 마침 노

자(奴子)와 구사(丘史)들이 모두 흩어져 나가고 문밖에 사람이 없었는데, 5∼6세 되는 아이가 흰 종이를 창 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뜯어보니 글자가 겨우 모양을 이루었고 내용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살펴보았더니 ‘병조의 서리 한충부(韓忠副)와 출시인(出市人) 노경종(盧敬宗).’이라고 쓰여 있었고, 유빈(猶賓)이라는 말이 그 아래 더 기입되어 있었습니다. 또 ‘아무날 밤’이라는 말이 있었고 그 곁에 ‘13일 씀’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으며, 또 그 곁에 두 줄의 글이 있었으나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유세자(猶世子)라고 쓴 그 다음의 말은 목패의 글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찢어버리고 나서 그에게 아이를 데리고 가서 받은 곳을 물어보게 하니 그 아이는 집앞 언덕밑에서 어떤 사람이 주더라고만 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물으니 모른다고 했답니다. 이는 입에다 담을 수 없는 일이라서 감히 계달(啓達)하지 못했는데, 요즈음 이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 못했었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중종은,


“이번에 일어난 이 일은 익명서(匿名書)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패에 쓰인 글을 가져다가 보니 흉역스럽고 부도(不道)한 정상이 너무도 경악스러웠다.

오늘 신거관의 집에 던져 넣은 글의 내용을 들어보니 거기에도 한충보와 그의 후처(後妻) 동생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전처(前妻)의 집안도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기 때문에 추문하고 있다.

기타 다른 일도 단서를 잡아서 조처하겠다. 현재 추문하고 있는 사람을 속히 형신(刑訊)하면 단서가 드러날 것 같다.”


하였다.

중종 28년(1533) 5월 20일에, 대간이 아뢰기를,


“정해년에 ‘작서의 변’이 있은 뒤로 잇따라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펴본다면 화근의 출처가 더욱 환하게 드러났습니다. 망설이지 마소서.”


라고 하였으나, 임금은,


“만일 저들【박씨(朴氏)의 부류들.】이 한 짓이라면 정해년 이후 3∼4년 동안 어째서 이런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대저 옥사를 끝까지 추문하지 않고 다른 데로 귀착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


라고 의아해 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자백이 나온 것이다. 중종 28년(1533) 5월 21일에, 보모 효덕을 몇 번 형문하니,


“수견·강손과 같이 모의해서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바로 박씨(朴氏)를 위하여 동궁(東宮)을 해치려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효덕이 자백했다. 경빈 박씨를 위해서 동궁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목패의 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중종으로서도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틀 뒤에 삼공과 추관들과 이 일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박씨가 직접 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박씨를 위해서 했다는 말이 있으니, 일의 형편상 목숨을 보전할 수 없게 되었다. 죄에는 경중이 있는 것이니 사약(死藥)을 내려야 되겠는가, 대죄(大罪)로 결정해야 되겠는가? 다만 ‘박씨를 위해서 했다’는 말은 있지만 ‘복성군을 위해서 했다’는 말은 없다. 복성군이 모의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모의에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처치해야 될 일이긴 하나, 죄에는 경중(輕重)이 있는 것이다. 전일에는 임의대로 외방에 있게 하였었지만,【상주(尙州)에 거주한 것을 말함.】 지금은 먼 곳에 부처(付處)해야 되겠는가, 아니면 안치(安置)시켜야 되겠는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위관 등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인들 처리하기 곤란한 줄 모르고 아뢰었겠습니까? 국가의 대계를 위해서 아뢴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결단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자, 중종은 결단을 내렸다.


“박씨에게는 사약을 내리고 복성군은 먼 곳에 안치시키라. 보통 사람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는 단지 도사(都事)만을 보냈었다. 박씨가 폐서인(廢庶人)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 낭관(郞官)과 나장(羅將)을 보내어 살펴보게 할 수는 없다. 조종조에서 부인(婦人)에게 사약을 내리는 예(例)에 따라 도사(都事)와 의녀(醫女)에게 아울러 말을 지급하여 보내고, 그의 죄를 나라 안팎에 분명히 보이게 하라.”


하였고, 그날 바로 의녀(醫女) 2인을 상주(尙州)로 보내어 박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런 일이 조정에서 벌어진지도 모르고 경빈 박씨는 친정이 있는 상주에 있었으며, 환궁(還宮)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사랑했던 부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중종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어미를 미리 자르면 자식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간이 이를 승복하지 않았다. 중종은 어이가 없어서,


“지금 간인(奸人)들의 입에 오른 것은 박씨이고, 복성군은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먼 곳에 안치시켰으니 가벼운 것이 아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제왕이 아들을 죽였다는 이름을 가져서야 되겠는가? 이는 작은 은애(恩愛)에 끌린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의논하여 처치하더라도 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아버지로서 아들 복성군을 막아섰다. 부자간의 끈끈한 정을 보여준 대목이다. 그러나 대간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세 번째 아뢰었다.


“상의 분부에 ‘간인의 입에 오른 것은 박씨이고 복성군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만, 박씨가 간인의 입에 오른 것은 오로지 복성군 때문입니다. 화근이 오로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상의 분부에 ‘고금을 막론하고 제왕으로서 아들을 죽였다는 이름이 있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만, 복성군은 종묘 사직의 적(賊)이므로 아들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대의에 입각하여 처치해야 될 것이요, 작은 은애에 얽매여 대의를 외명해서는 안 됩니다.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해 속히 통쾌하게 결단 하소서.”


대간이 복성군도 사사할 것을 주장하는 뜻은 지난번 ‘작서의 변’도 그렇고 이번 ‘목패의 변’도 모두 복성군 이미(李嵋)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 화근을 제거하여 종묘사직의 대게를 안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대신들의 주장은 이러 했다.


“작서의 변을 모의(謀議)하여 동궁(東宮)을 해치려고 한 것은, 그 의도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李嵋)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악역(惡逆)의 변고도 동궁에서 발생했으니, 이는 박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를 위한 계교인 것입니다. 간흉들이 미를 기화(奇貨)로 여기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변고가 끊임없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화근을 없애지 않으면 화란(禍亂)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따라서 종묘 사직의 안위(安危)가 이번 처치에 달려 있습니다. 즉시 대의에 입각하여 결단, 종묘 사직의 대계를 안정시키소서.”


“박씨가 지난날 후궁(後宮)으로 있을 적에 은혜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인심(人心)을 끌어 모으고 권간(權奸)들과 결탁했습니다. 이것이 단지 총애를 오래도록 독점하기 위한 것뿐이었겠습니까? 그의 마음은 미를 위해 기반을 구축하여 바라서는 안 될 것을 엿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정해년에 이르러 흉모가 발생했고, 권간들이 은밀히 법을 농락하여 천주(天誅)에서 벗어나게 했으므로, 분수에 벗어난 야망이 갈수록 점점 더 불어났습니다.

이들이 뒷날에도 미(嵋)를 위해 계교를 세운다면 반드시 오늘보다 더 참혹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조종(祖宗)께서 부탁하신 중책(重責)을 생각하시고 사사로운 애정 때문에 대의를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종은 받아드리지 않았다.


“작서의 변이 미(嵋) 때문에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 모의에 관계가 있는 자는 박씨(朴氏)이다. 지금에 와서 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박씨가 생존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하려는 것이었다. 미는 그때에도 전연 모의에 간예한 바 없었고 지금도 간예하지 않았으며, 또 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입에서도 거론되지 않았다.

지금 박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미도 안치(安置)시켰으니, 기대할 마음이 끊겨 아부할 리가 없을 것임은 물론 저절로 진정될 것이다. 어미와 자식을 동시에 대죄로 결단한다면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 어찌 흉흉하지 않겠는가.

예부터 자신이 간여하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만 오른 경우에는 안치시킬 뿐이었다.“


“작서의 변에는 박씨가 간여되었었다. 그러나 이번의 이 일은 간사한 무리들이 박씨에게 아부하려는 뜻에서 한 일이요 미(嵋)는 조금도 간여되지 않았다. 따라서 안치시키는 것은 엄중한 처벌이다. 박씨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빌붙을 데가 없어졌으므로 간사한 자들의 기대도 끊겼으니, 저절로 진정될 것이다.”


“이제 상차(上箚)를 보니 그 내용에 ‘작은 은애 때문에 대의를 무너뜨리려 한다.’ 했으나 그럴 리가 있겠는가. 미(嵋)가 간모에 간여했다면 진실로 아낄 것이 없다. 그러나 간여하지 않았으니 안치시키면 된다. 개정할 수 없다.”


“미(嵋)는 하찮은 사람이다. 그가 살아 있거나 죽어 없어지거나 관계되는 것이 무엇이건대 애석히 여겨 사은(私恩)을 보이려 하겠는가. 단 일죄(一罪)로 결단하는 것은 모름지기 사실이 드러난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


“미(嵋)는 간인들 중 한 사람의 입에도 오르지 않았다. 따라서 대죄(大罪)로 결단할 수는 없다.

라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종묘사직의 안녕을 위한다는 사간들의 대의명분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것이 5월 26일의 일이었다.


“미(嵋)에게 사약을 내리라. 두 옹주는 폐서인하고, 김인경은 먼 변방에 귀양보내라. 박수림·박인형·홍서주도 먼 곳으로 귀양 보내고, 홍숙은 고신을 죄다 추탈하라. 이항에게는 사약(死藥)을 내리고, 정광필은 체직하라.”


따라서 아들 복성군은 어머니에게 사약이 전해진지 4일만에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가 보낸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하직했다.

자신의 장자인 미(嵋)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중종은 슬픈 마음으로 정원에 전교하였고, 이 전교를 들은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전교는 다음과 같았다.


“미(嵋)가 어느 곳에서 죽느냐! 그가 죄 때문에 죽기는 하지만 바로 나의 골육이다. 시체나마 길에 버려지지 않게 거두어 주어야 하겠으니, 그의 관(棺)을 상주(尙州)로 실어 보내도록 하라.

이 뜻을 감사(監司)에게 하유하고, 지금 가는 도사(都事)에게도 아울러 이르라. 그리하여 연로(沿路)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내어 호송하게 하라.”


이때 사신은 논한다. 미(嵋)가 ‘작서의 변’이나 ‘목패의 변’의 모의에 간예하였다면 종묘 사직에 관계되는 죄이므로 드러내어 처형해도 애석할 것이 없겠다.

그러나 간흉의 무리들이 거짓 공론을 빙자하여 군부를 협박하는 바람에, 임금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면서도 조정으로 하여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홀로 정광필만이 몸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여 아뢰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의롭게 여겼다.

이런 사건이 진행되던 당시는 장경왕후 소생이자 인종의 누이였던 효혜공주를 며느리로 맞은 김안로(金安老)가 동궁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한때 정권을 농단하다 권세를 잃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김안로가 그의 아들이자 인종의 매형이었던 김희(金禧)를 사주하여 일으킨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이 배후에는 문정왕후가 있었다고 보는 학자가 많다.

따라서 경빈박씨와 복성군은 ‘작서의 변’으로 서인이 되고 유배되었다가, “목패의 변”으로 억울하게 사사되었다.

이렇게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지 2개월 되던 중종 28년(1533) 7월 20일에 중종이 상전(尙傳) 김연손(金連孫)을 불러 패서를 가져다가 모든 대신에게 보이게 하고 또 전의 추관들도 모두 나가서 보게 하였다. ‘작서의 변’때 걸어 놓았던 방서의 글씨체와 이번 ‘작두의 변’에 적혀 있는 글씨체를 대조하고자 한 것이다.

중종이 이르기를,


“그 패의 글씨를 보면 그 글자 수가 많기 때문에 간혹 전의 패와 같은 곳도 있고 같지 않은 곳도 있으니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다. 만일 전의 패에 쓰인 글씨와 서로 같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 이미 자복하고 죽었는데, 지금 이 패가 어찌 전의 패와 서로 같을 수 있겠는가.

진범을 잡지 못하고 엉뚱한 다른 사람만 추문하게 된다면 진범이 숨어서 보고 있다가 조정을 시험하려는 변괴를 계속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정이 도리어 모욕을 받을 것이니, 이 일을 추문하는 것이 옳은가, 소각해 버리는 것이 옳은가? ”


“대간이 ‘역모를 꾸몄던 잔당이 전의 일을 변명하려고 종적을 혼란시킨 것’이라고 의심한 말은 나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 사람들은 모두 자복하고 죽었는데 지금 와서 전의 일을 변명하는 것이 무슨 이익될 점이 있기에 그리 하였겠는가.”


“어찌 전에 승복받은 패서와 완전히 같다고 했겠는가. 흉모를 꾸몄던 일당 중 요행히 빠진 자가 있어 한 짓이지,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와서 썼을 리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일 뿐이다.”


라고 하면서 나중 방서의 글씨체를 가지고 진범을 잡으려는 생각을 했다.

이 일에는 이종익(李宗翼)의 옥중 상소가 결정적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전일 신이 고양(高陽)에 갔을 때에 임계중(任繼重)이 신에게 이르기를 ‘세자가 고단(孤單)하여 조정에서는 김안로(金安老)를 높은 지위에 두어서 우익(羽翼)으로 삼았다.’ 하였습니다.

신은 처음 그 말을 듣고 모발(毛髮)이 곤두서고 눈이 휘둥그레 졌으나 그 까닭을 묻지 않았습니다. 고단(孤單)하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신은 차마 말조차 못하겠습니다.

지난해에 세자께서 친경(親耕)에 배종(陪從)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생(儒生)들이 가요(歌謠)하는 곳에 연(輦)을 머무셨을 때, 신은 백의(白衣)의 몸으로 연 밑에 무릎꿇고 앉아 그 심원한 의도(儀度)와 용봉(龍鳳)의 높은 모습을 우러러 뵙고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전하에게 충성할 뿐만 아니라 세자를 위하여 죽으리라 스스로 맹세하였습니다.

소신(小臣)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전하의 뒤를 이을 세자이고 사직(社稷)의 중보(重寶)이며 조정과 온 나라가 길이 의지할 것이온데 무엇 때문에 고단하다 한단 말입니까.

범인(凡人)의 부자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군부(君父)의 사이이겠습니까. 이륜의 덕으로 보좌(補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하의 천륜(天倫)의 바름을 빼앗아 어지럽히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국저(國儲)가 억울하게 애통한 말을 듣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하였으니, 그 무례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통곡하면서 죽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안로(安老) 혼자서 획책한 일이겠습니까. 심언광(沈彦光)과 같은 무리가 빙산(氷山)을 서로 의지하여 음모를 몰래 계획하여서 조정에 자기의 무리를 다시 배치하려는 술책입니다.

신은 일찍이 조정에는 노성(老成)하고 사리에 밝은 신하의 보필(輔弼)이 있고 장상(將相)이 될 만한 재능과 주석(柱石)이 될 만한 덕이 있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사직의 신하 자리가 유독 아녀자의 사치를 숭상하는 안로에게로 돌아가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상신(相臣)과 장신(將臣)에게 영구한 수치입니다.

이 말을 근거로 하여 말을 해 나가겠습니다. 그 이른바 박씨와 결탁하였다는 것이 김극핍(金克愊)·이항(李沆)·심정(沈貞)이 서로 연달아 출척당한 까닭입니다. 신이 심정의 죄를 보면 ‘몰래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 했는데, 이것은 전하의 액정(掖庭)의 일로서 그 주고 받으며 오고간 사람이 반드시 있어서 오히려 친히 보고 들으셨을 텐데도 이 같은 말을 하십니까?

신이 지난해 추문을 당할 때에 그 일이 근거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이것으로 복초(服招)하여 잠시 큰 화(禍)를 막으려 하였던 것인데, 신이 유형(流刑)을 받은 뒤 그 화가 더욱 심해져서 극핍은 울분(鬱憤)으로 목숨을 버리고 심정은 아들로 하여 죄를 받았으니, 이것은 신이 믿을 수 없는 일로서, 바람에 임하여 눈물 흘리며 두 귀신을 위하여 그 원통한 한(恨)을 크게 씻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저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는 전하의 서자(庶子)이고 박씨는 빈잉(嬪媵)의 처지로서 모두 지친(至親)이 됩니다. 오늘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가 내일 전하께서 아시게 되면 이 세 사람은 모두 전하께서 천하다고 버리게 될 처지인데도 세 사람의 지혜로 이를 깨닫지 못했단 말입니까?

극개(克愷)는 박씨와 사돈간이고 극핍은 극개의 큰 형이니 극핍이 극개을 구하고자 하는데 어찌 박씨의 뇌물을 받으며, 또 한창 말썽이 되었을 때에 박씨는 어찌 다른 돕는 자를 버리고 극핍에게만 급급했겠습니까. 또 임금의 궁인(宮人)이 외정(外庭)에 뇌물을 주었는데도 임금이 몰랐다면, 왕실의 체통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본다면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가 그 아비를 위하여 상언(上言)하고자 하여 먼저 심정에게 청하니 심정은 거짓으로 이를 승락하고 그 수의(收議)함에 있어서는 공론(公論)에 따랐습니다. 이것이 김안로가 심정을 미워하게 된 이유입니다.

‘김안로의 출척(黜斥)은 남곤이 수창(首唱)하였다.’ 하였는데 이제 ‘박씨가 뇌물로 준 비단을 남곤만이 받지 않았다.’ 하니,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무함(誣陷)에 가깝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남곤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를 밀어서 공론(公論)으로 삼는 것이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뒤에 반드시 이행(李荇)과 같은 날 쫓겨났을 것입니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는 양송(梁松)보다도 더 간사한 인물로 죄악이 너무 심하여 하늘의 베임을 받았습니다. 전일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자 전하와 조정이 누구의 소행임을 알지 못하여 끝까지 힐문(詰問)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많은 궁중의 사람들이 원통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는 김희가 사심(私心)을 일으켜 요사(妖邪)를 부린 소치(所致)에 불과하며,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죄를 받은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손을 잡아 깨우치소서. 이제 조정이 이것을 먼저 힘쓰지 않고 익명서(匿名書) 한 장에만 구구히 매달려 있습니다. 이제 오래도록 가까이 두고 아무에게서 나왔다고 아뢰는 사례가 있으니 조정의 기풍이 또한 너무 각박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또 전하를 신라 덕만(德曼)의 정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이 당(黨)을 끝까지 힐문하여서 조정을 맑게 하신다면 이륜(彝倫)을 유지하고 동량(棟樑)을 발양할 수 있으며 천기(天機)가 유동(流動)하여 인도(人道)가 밝아져서 전하께서는 천재(千載)의 영명한 임금이 되고 대소 신료(臣僚)들도 마땅히 백 년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이하 생략>“


그래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된 후이긴 하지만, 은행나무에 걸린 쥐옆에 쓰여져 있던 방서(榜書)와 똑같은 글씨체임에 발견되었고, 김안로와 그의 아들이자 인종의 매형이었던 김희(金禧)가 한 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나중 방서(榜書)의 글씨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안로는 ‘작서의 변’에서 발견되었던 글씨체와 다르다고 주장하였으나, 대사간 상진은 지난번 글씨체와 같다고 여겼다.

‘작서의 변’ 당시 경빈 박씨의 사위인 홍려를 추국하면서 김안로는 이 글씨가 ‘홍려의 것’이라 했고 매질을 못이긴 홍려는 ‘자신의 글씨가 맞다’고 자백하고는 죽었었다.

그러니까 중종의 추측과 같이, 홍려가 죽고 난 후에 발견된 글씨체가 홍려의 것과 맞는다면, 이미 죽은 홍려가 다시 글을 쓸 리가 없기 때문에 지난번의 조사가 엉터리이던지 아니면 애초부터 홍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사건을 조작한 것이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안로는 이번 글씨체와 지난번 글씨체가 다르다고 계속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글씨체가 지난번 방서와 동일하다고 느낀 대사간 상진은 경빈박씨의 주변인물들이 어쩌면 억울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 조사를 더 진행했다. 그러던 중에 ‘방서가 적힌 나무를 태우라’고 중종이 명해서 수사가 종결되는 듯 했는데, 나중의 방서가 경빈박씨의 사위 홍려의 글씨체가 아니고 김안로의 아들인 김희의 글씨체로 판명났다.

따라서 이 ‘작서의 변’의 주범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이렇게 해서 상주의 여인이 희생된 것이다.


4. 경빈(敬嬪)박씨와 복성군의 신원

중종 36년(1541) 11월 9일에 동궁(東宮)이 상소를 올렸다.


“천총(天聰)을 범함이 황공하오나 정(情)이 격발하여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천현 지친(天顯之親)은 같은 기(氣)를 나누어 받아서 태어나기에 숨쉬는 것도 서로 통하여 우애로운 정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이미(李嵋)의 일은, 신이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朴氏)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嵋)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여(洪礪)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없이 되었으니,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翁主)도 나이 어린 여자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신(臣) 하나로 인하여 형제간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이 항상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자신은 천자가 되었는데 아우는 필부(匹夫)로 있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세자로서 모시고 있어 천총(天寵)이 지극한데, 두 누이와 조카딸 하나가 아직도 천민에 버려져 있으니, 자신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이란 형제간에는 원망도 노염도 간직하지 않고 서로 친애할 뿐인 것인데, 신은 형제간에 무슨 원망과 노염이 있어 친애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에도 같이 화락하게 즐기지 못하여 슬프고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더욱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다시 충정(衷情)을 아뢰어 천총을 욕되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였다. 비록 죽은 복성군이 이복형제이긴 하지만 형을 생각하는 동궁의 이야기는 간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중종 38년(1543) 1월 19일에 있었던 석강자리에서 이언적이 복성군의 사사 문제를 아뢰었다.


“전자에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가 사사(賜死)된 것에 대해 물정(物情)은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신은 마침 외방에 있었으므로 그 대강만을 들었을 뿐 미처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조정에서 패(牌)를 동궁에 매달아 놓은 일을 가지고 복성군이 미리 꾀한 것이라고 하여 논계하였고 그에 따라 사사했다고 합니다.

사리로 따져 보더라도 복성군이 그때 먼 지방에 귀양 가 있었는데 그 모의를 꾸미는데 참여했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박씨(朴氏)가 범했다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설사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아들과 함께 꾀한 형적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확실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천성(天性)의 지친을 상해한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즉위하신 이후로 성덕에 누(累)됨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언적이 경빈이 원통해 하는 이야기를 대신한 것이다. 그러자지난 날을 회상하며 중종이 이르기를,


“그때의 일은 과연 인륜에 있어서 더없이 큰 변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한창 권간들이 나랏일을 담당했던 때라서 대간과 시종들도 스스로 부회(附會)하여 그 일이 잘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왕의 후회하기 어려운 허물이야 어떻게 형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렇듯 복성군의 죽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조정에서 높아지자, 자신의 잘못을 깊이 생각한 중종은 어느 날 복성군의 묘를 이장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복성군(福成君) 【이름은 미(嵋)이다. 곧 당대의 빈(嬪) 박씨(朴氏)의 아들인데, 작서(灼鼠)의 변 때문에 상주(尙州)로 귀양갔다가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의 묘(墓)는 지금 상주에 있고 그 아내 윤씨(尹氏)의 묘는 양주(楊州)에 있기 때문에 그 딸이 올해에 양주로 이장하려고 하니, 예장(禮葬)하라고 예조에 말하라.”


그리고 중종은 역시 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경빈 박씨에 대해서도


“대행왕의 비는 왕대비(王大妃)로 올리고 빈(嬪) 박씨(朴氏)는 왕비로 삼는다.”


는 사면을 반포하였다.

그리하여 사헌부가 ‘복천군의 천장을 내년으로 미루자’고 청하였을 때 사신은,

복성군 이미(李嵋)는 상(인종)의 서형(庶兄)으로 박빈(朴嬪)의 아들이다. 박씨가 왕의 총애를 받고 미가 장성하게 되자, 상은 동궁(東宮)으로 있었으나 외롭고 미약했다. 심정(沈貞)이 이미 사림에 화를 꾸며 공론(公論)에 죄를 얻자 스스로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동궁의 후일의 지위를 굳히려 하였다. 작서(灼鼠)의 변으로 미의 모자가 상주(尙州)로 폐출되었다가 김안로(金安老)가 용사할 때에 끝내 사사(賜死)되었는데,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예장(禮葬)의 명이 있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인종 대왕 묘지문(誌文)에는,


“어리셨을 때에 서형(庶兄)인 이미(李嵋)의 어미 박빈(朴嬪)이 교만하고 참람하여 죄를 얻어 모자가 함께 귀양갔는데, 왕이 장성하여 비로소 알고는 손수 소(疏)를 지어 극진히 아뢰어 풀어 주시니, 중종께서 마음에 감동되어 명하여 그 관작(官爵)도 예전처럼 회복시키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4. 맺는 말

김안로는 나중에 인종이 된 세자의 장인이란 배경 때문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잘 모면하고, 누리던 영달을 지속하기 위해 ‘작서의 변(灼鼠之變)’을 일으켜 놓고, 이것을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경빈의 짓이라 하여, 경빈과 복성군의 작호(爵號)를 빼앗고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고, 1533년에는 모자(母子)를 모두 사사(賜死)하도록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작서의 변(灼鼠之變)’과 ‘목패(木牌)의 변’은 바로 이 김안로와 그의 아들 김희(金禧)가 은밀하게 조작한 음모임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않고 중요한 사건들을 모두 사실 그대로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야사(野史)로서는 가장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는 동각잡기(東閣雜記)를 보면,


“박숙의(朴淑儀)와 그 아들에게 죄를 씌워 마침내 죽게까지 만들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상주의 여인으로는 처음으로 임금의 총애받는 아내가 되었던 경빈의 일생은 너무 허무하였고, 그 죽음이 너무 억울하였다.

만약에 당시 영사였던 정광필이 미천한 집안 출신인 경원 박씨가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하는 일에 완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김안로・김희(金禧)부자(父子)가 ‘작서의 변(灼鼠之變)’과 ‘목패(木牌)의 변’을 조작해서 경빈 박씨를 모함하지 않았더라면, 또한 중종이 우유부단하지 않았더라면, 상주사람 경빈 박씨는 중종의 제3계비가 되고, 복성군도 왕위에도 오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라가 더 잘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상주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말로 억울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