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상주문화원금요사랑방 제76강

빛마당 2015. 9. 29. 18:13

조선시대 상주의 도자문화

- 최근 발굴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

신순철

Ⅰ. 머리말

인류의 발전과 함께 해 온 그릇의 역사는 선사시대 무문토기로부터 시작하여 유약을 시유한 도자기로 이어져 왔다. 유약이 시유된 도자기는 유약과 태토의 차이에 따라 크게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으로 구분된다. 상주의 대표적인 도자기를 언급할 때에는 조선시대 전기에 전국에 퍼져있던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磁器所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으며 또한 상주에 우수한 품질의 생산하던 자기소가 3개소가 위치해 있으니 상주의 대표적인 도자기는 분청사기라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시대 말기 상감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이어져 생산되었으며, 이후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어 본격적으로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사라지기까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 비록 사용기간은 짧으나, 문양 및 제작기법과 명문이 표기된 유물 등 한국 도자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분청사기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하에 일본 연구자들의 골동품 수집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 광주 충효동 유적을 국내 학자들이 처음으로 발굴조사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요업에 대해서는 『朝鮮王朝實錄』, 『東國輿地勝覽』, 『慶尙道地理志』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朝鮮王朝實錄』 중 『世宗實錄』「地理志」가 가장 상세하게 되어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는 모두 139개소의 磁器所가 있으며 그 중 경상도에는 37개소가 있다.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上品磁器所 4개소는 경기도 광주에 1개소, 상주에 2개소, 고령에 1개소가 있다 이 중에 3개소가 경상도에 있으며, 명문이 기입된 銘文 粉靑沙器의 경우도 대부분 경상도 지명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世宗實錄』「地理志」가 편찬될 당시 경상도 지역만의 독특한 도자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문헌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상주지역의 도자의 중심은 조선전기의 분청사기라고 볼 수 있으며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서 문헌기록과 일치하는 유적을 확인하는 성과를 얻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상주 도자기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 앞으로 상주의 도자문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데 기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본 발표를 하고자 한다.


Ⅱ. 조선시대 분청사기 관련 문헌

조선시대의 요업에 대한 기록으로는『世宗實錄』「地理志」,『慶尙道地理志』, 『慶尙道續撰地理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서 볼 수 있다.

『世宗實錄』「地理志」는 世宗의 명에 의해 1424년~1432년 사이에 지리지 편찬을 위해 자료수집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고, 1454년『世宗實錄』이 편찬될 때 함께 부록으로 간행되었다. 따라서 1454년에 기록된 내용은 1420년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제반자료들이 중점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磁器所 ․ 陶器所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는 土産條의 내용도 제작되었다. 地理志의 토산조는 八道 ․ 府 ․ 牧 ․ 郡 ․ 縣의 관청소재지를 기준으로 磁器所와 陶器所의 위치를 동서남북으로 표기하였고,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上品, 中品, 下品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어 15세기 전반의 도자소의 분포와 品等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문헌사료이다.

지역

磁器所

尙州牧

磁器所三, 一在中牟縣北楸縣里上品,一在中牟東己未隈里上品,一在功城縣西院洞中品

<표 1>『世宗實錄』「地理志」 상주지역의 磁器所

『慶尙道續撰地理誌』는 睿宗 원년(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의 地誌로서 1453년에 시작하여 1477년에 완성된 『八道地理志』의 편찬과정에서 작성된 도별지지이다. 이것은 世宗때 편찬한 『慶尙道地理志』의 속편으로 변동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내용이 강화되었다. 『慶尙道地理志』와 체제와 내용은 비슷하나 土産貢物로서의 磁器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貢納磁器 생산지로의 磁器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磁器所의 수량이 전체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상주 지역의 磁器所의 수량과 품등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地 域

磁器所

品等

尙州牧

縣內

中牟縣

奴山里

<표 2>『慶尙道續撰地理誌』 상주의 磁器所 현황

『東國輿地勝覽』은 1455년(세조 1년) 양성지가 『世宗實錄』「地理志」의 미비점을 보충하여 1476년(성종 7년)에 완성하였는데 1485년과 1487년에 2차에 걸쳐서 수정 하였다. 이후 1524년에 『新增東國輿地勝覽』이 완성되었는데 새로이 증가하여 1530년에 수정된 것은 ‘新增’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陶器所 ․ 磁器所와 관련된 사항에는 새로 수정된 것은 없다.

지역

世宗實錄地理志

(1454)

慶尙道續撰地理誌

(1469)

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磁器所

(個所)

品等

磁器所

(個所)

品等

磁器所

(個所)

品等

尙州牧

3

上2․中1

1

<표 3> 문헌으로 본 상주지역 磁器所의 변화

<표 3>를 통해 보았을 때 『世宗實錄』「地理志」, 『慶尙道續撰地理誌』, 『新增東國輿地勝覽』의 문헌이 제작된 시기는 각각 5년과 61년의 차이가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은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고 난 이후에 제작되었으며, 자기와 관련한 내용이 너무 간략하고 수량도 급격하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상주의 분청사기 유적

현재 상주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분청사기 가마터는 모두 16개소이며 이중에 상판리 자기요지1 주변 5㎞이내에서 확인된 가마터는 모두 6개소이다.


1. 상주 상판리 자기요지1

최근 상주박물관에서는 상주 상판리 자기요지1 지점에 대해 2015년 5월 20일부터 8월 5일까지 발굴조사를 하였다. 유적이 위치하는 모동면은 고려 현종 9년(1018) 지금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묶어서 중모현으로 이름 하였으며, 1896년 상주가 군이 될 때 중모현의 동쪽이므로 모동면이라고 변경하였다.

상판리요지1의 위치를 보면 상주시 모동면과 공성면의 경계에 위치한 상판저수지에서 서쪽으로 1.7㎞ 가면 반계천이 나온다. 여기에서 반계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고내미골과 지내미골 사이의 야산(해발 387m)이 나오는데 상판리 요지1은 이 야산의 남쪽 말단부에 해당한다. 이곳은 북쪽으로 갓점봉과 남쪽의 와곡산 등 주변 산의 계곡에서 발원한 여러 지류들이 합류한 반계천이 북동-남서로 흐르고 주변에 건너들이 형성되어 있다. 유적의 서쪽으로는 고내미골, 동쪽으로는 지내미골이 南北으로 있다. 요지는 고내미골과 접한 동쪽능선의 해발 255~287m 사이에 해당한다. 발굴조사를 착수할 당시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및 잡초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지표면에 분청사기편과 도침, 가마벽체편 등이 다수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유적에서는 자기가마 1기와 폐기장 1개소가 조사되었다. 


가. 유구


1) 자기가마

가마는 유적의 서쪽 조사경계에 위치하며 해발고도 239~247m에 걸쳐서 조사대상지의 북쪽상단부에서부터 남쪽 말단부까지 걸쳐서 위치한다. 가마의 전체규모는 길이 22m, 너비 1.6~1.8m이며, 소성실의 경사도는 22°정도이다. 가마가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후대의 나무뿌리로 인해 가마가 상단부분 훼손이 된 상태이다.

가마의 구조는 불을 피우는 입구인 아궁이부터 연소실, 소성실, 초벌칸, 연도부로 구분이 된다. 가마 구조의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궁이는 연소실의 입구로 30~40㎝내외의 천석을 이용하여 시설을 만든 듯하나, 무너져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다.

연소실은 가마의 가장 하단부에 위치한다. 소성실과 연소실이 연결되는 부분은 대부분 훼손되고, 요상의 모래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연소실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규모는 210×240㎝이고, 불턱의 높이는 100㎝ 정도이다. 연소실내에는 천정과 벽체편 및 소토가 가마가 폐기되면서 가득 채워져 있는 양상이다. 바닥에는 조업시에 사용한 나무로 인해 재가 깔려 있으며 불턱에는 단단하게 소결된 부분은 대부분 떨어져 붉게 산화된 흔적만 남아있다. 벽체부분은 바닥에서 10~15㎝ 위로는 단단하게 소결된 부분이 남아 있으나, 위로 가면서 붉게 산화된 부분만 남아 있다.

소성실은 번조실이라고도 하며 가마의 중앙에 해당한다.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다. 규모는 길이 170㎝, 폭 160~180㎝, 깊이는 10㎝내외이며 요상면의 경사도는 22°이다. 소성실의 바닥은 단이 없이 완만하게 이어지는 구조이며 요상에 불기둥 등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가마의 구조가 상당부분 노출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로 인해 후대의 훼손이 심해 소성실 벽체가 10㎝ 정도만 남아 있어 천정과 벽체의 구조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다. 조업시 연료의 보충과 기물의 출입을 했던 용도인 측면 출입구는 아궁이에서 가까운 부분에 1개소만 확인된다. 소성실내에서 확인되는 가마 보수흔적은 연소실과 소성실의 연결되는 지점에만 확인되는데 불의 영향으로 굳어진 소결층과 모래층으로 이루어진 요상면이 2단 확인된다. 소성실 내부에는 표토아래에 소토덩어리와 벽체편이 포함된 적갈색사질점토로 채워져 있으며 일부 요상에서 모래층이 확인된다.

유물은 소성실의 전면에 도침이 흩어져 있는 양상으로 남아있는데, 연소실에서 가까운 부분에는 일부 도침이 열을 지어 남아 있다. 열을 지어 있는 도침은 소성할 때 사용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며 도침간의 거리는 10㎝내외로 매우 가까운 편이다. 도침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고 도침의 지름도 10㎝내외로 매우 작은 편에 속하므로 도침위에 올려놓는 자기의 크기도 매우 작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 2> 상주 상판리 가마 및 폐기장

연도부와 초벌칸은 유적의 북쪽상단부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규모는 평면 220×220㎝, 깊이는 30㎝이다. 소성실에서 연도부로 연결되는 부분에는 원형으로 넓어지며 붉게 산화된 흔적만 확인된다. 초벌칸 바닥의 경사도는 소성실에서 경사지게 올라오다가 초벌칸에서 연도부로 연결되며 바닥은 거의 수평에 가까운 상상태이다. 내부에는 연도부쪽으로 후대의 나무뿌리로 인해 교란되어 가마의 폐기양상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연도로 이어지는 부분의 형태를 추측하기는 어렵다.

초벌칸은 조선시대 전기 가마에서 주로 확인되는데 소성실의 끝부분에 위치한다. 가마의 가장 상단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부분 훼손되고 남아있는 경우가 없는데 이번 유적에서는 양호한 형태로 확인되어 초벌칸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초벌칸의 구조는 중앙을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벽체부분을 지름 15~40㎝의 석재를 이용하여 4~5단을 쌓아서 구축 하였다. 내부의 중앙 바닥에 초벌된 접시, 대접편이 깨진 상태로 다수 남아 있는 상태였다.


2) 폐기장

가마의 동쪽면에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넓게 퍼져 있는 양상이다. 규모는 길이 27m, 너비 11m, 깊이 20~60㎝이다. 폐기장의 퇴적양상은 비교적 간단한테 소토를 포함한 명갈색사질점토 아래에 자기편과 벽체편, 소토 등이 다량 포함된 적갈색사질점토층이 확인된다. 폐기장내의 유물은 적갈색사질점토층에서 출토되었다. 폐기장내에서 확인되는 재층은 가마의 중앙부에서 소량 확인되는데 재층의 두께가 10㎝내외이며, 길이는 3m 내외이다.

폐기장내에서 확인되는 유물의 양상은 초벌칸이 있는 상단부 주변에는 자기 초벌편이 깨어진 채로 모여 있는 양상이 확인되며, 중앙부와 하단부에는 초벌편 외에도 벽체편, 도침, 자기편이 다수 확인된다.

폐기장내에는 가마와 50~100㎝ 정도 떨어진 지점에 가마의 방향과 평행되게 너비 1m, 깊이 50㎝로 굴착한 흔적이 확인되는데 가마의 벽체와 천정편이 채워져 있는 양상이다. 가마의 방향에 맞추어 굴착을 한 것으로 보아 배수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표 4> 자기가마 속성표

유 구

규 모

비 고

길이

너비

깊이

요상경사도

자기가마 1호

22m

1.6~1.8m

0.1m

22°


나. 유물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폐기장에서 대부분 출토되었으며, 가마 내부에서는 소성실과 초벌칸에서 확인된다.

유물의 종류는 분청사기 대접과 접시, 도침이 대부분이며, 연질 백자접시, 분청사기 베개와 제기, 표형병, 호, 고족배 등 비교적 다양한 기종이 출토되었다.

연질백자는 1점이 출토되었는데, 조선전기 상품자기소에서만 제작되는 것으로 알려진 백자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본 유적이 상품자기소였음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베개는 그동안 청자베개는 많이 알려져 있으나, 분청사기 베개는 흔하지 않고 또한 출토위치가 분명한 곳에서 확인된 예는 최초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제례에 쓰이는 제기를 비롯하여 표형병은 관청이나 사지에서 주로 확인되는 유물로 유물의 구성을 통해 볼 때 유적에서 제작되어 관청이나 절에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시문기법이 특징이다. 문양에 사용되는 기법은 상감, 인화, 조화, 박지, 귀얄기법이 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문양시문기법에 변화가 있다. 본 유적에서는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이 주로 확인되는데 인화기법이 중심문양이다. 대접과 접시 등에 시문된 문양을 보면, 기면의 내외면에 빽빽하게 인화문을 시문하였다. 내저면의 중앙에는 국화문을, 그 바깥으로 소국화문 또는 연권문을 내저면과 측사면에 그릇 전체에 빽빽하게 시문하였는데 인화기법 중에 가장 전성기이며, 기술적인 면에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겹침없이 정교하게 한 고도의 기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굽내면에는 굽다짐흔적외에 국화문양을 찍었는데 국화문은 다른 유적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방식이다.

출토유물의 수량에 비해 갑발편은 3점만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기물의 중첩소성은 최대 3단까지 확인되는데, 가마 내부의 도침간의 거리를 통해서 추정하듯이 비교적 작은 기물을 소량으로 생산하였던 가마로 판단된다.

명문은 폐기장에서 2점이 출토되었는데 굽내면에 ‘×’문이 확인되었으며, 대접 초벌 내저면에 ‘○○芭○十三’ 묵서명의 명문이 1점 확인된다. 특히 초벌편에서 확인되는 명문은 이 시기에 확인되는 일반적인 명문의 양상과는 다소 다른 형태이다.


2) 상주 대포리 요지

유적은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진 유적이다. 유적의 위치는 상주시 모서면 대포2리 499번지 모서초등학교 대류분교 일대로 학교 뒤쪽으로 넓게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다.


                                     <도면 2> 상주 대표리 요지 위치도

유적에서는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확인되었으며 기종은 대접, 접시편과 갑발, 도침이 있으며, 문양의 시문기법으로는 상감기법, 인화기법, 귀얄기법이 확인된다. 상감기법으로는 흑백상감으로 된 연화문, 당초문과 초문, 중권문이 있으며, 인화기법으로는 단독 국화문이 많으며, 내면에는 성긴 국화문대를 외면에는 뇌문을 시문한 접시가 수습되었고, 집단 인화문이 시문된 호편이 수습되었다.

백자는 무문과 음각의 두 종류가 수습되었는데 백자는 연질이며 목단문을 새겼다. 요도구로는 갑발과 도범이 수습되었는데, 도범의 형태는 원형으로 상면과 측면에 모두 크고 작은 국화문이 있는데 분청사기 유적에서 도범이 확인되는 예는 처음이다. 갑발은 측면에 투공이 있는 사발의 형태로 내면에 ‘金’銘이 상감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양은 흑백상감으로 시문되어 있으며, 성긴 인화문과 집단 인화문이 모두 확인된다. 대포리 요지의 위치는 당시의 읍치를 기준으로 북쪽에 가깝게 있으며, 백자가 출토되고 있다. 읍치를 기준으로 본 요지의 위치와 분청사기 및 백자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대포리 요지가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上品磁器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 2> 상주 대표리 요지 출토유물

 3) 상주 우하리 요지

유적의 위치는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에 해당하며,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이다. 가마의 구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분청사기와 가마 벽체편 등을 수습하였다. 출토유물의 기종으로는 ‘司膳’銘 연당초문대접과 매병편 등이 있다. 대접편의 문양은 내저면 중앙에 흑상감으로 ‘司膳’銘이 시문되어 있다.


<사진 9> 상주 우하리 요지 전경 및 출토유물

지표조사로 인해 보고된 유적으로 출토유물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보고된 유물이 흑상감된 ‘司膳’銘 대접과 흑백상감된 문양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앞서 살펴본 유적보다는 다소 앞선 시기의 유물이 확인된다.

『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공성현 서쪽 원동에 中品磁器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공성면은 『世宗實錄』「地理志」 尙州牧條에 기록된 지명과 동일하며 위치도 공성면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방위와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하리 요지가 공성현 中品磁器所일 가능성이 크다.


Ⅳ. 맺음말

최근 발굴조사를 실시한 상판리 자기요지와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磁器所일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을 살펴보았다. 상판리자기요지1 주변으로는 조선시대 자기가마가 많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진 지역이다. 또 다른 상품자기소로 추정되는 대포리유적은 상판리자기요지1과 직선거리 5.5㎞ 거리에 위치하며, 상판저수지의 동쪽에 위치하는 중품자기소로 알려지 우하리요지도 직선거리 2㎞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상주의 조선전기 도자의 중심은 현재의 모동면과 모서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번에 조사한 상판리요지1에서 상품자기소에서만 확인되는 백자가 확인되며, 유물의 종류 및 질을 통해 볼 때 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上品磁器所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모동면 상판리 일대와 공성면 우하리 일대에는 조선시대 전기에 많은 가마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도 많은 가마터가 확인되는 지역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상품자기소가 위치하는 경기도 광주 분원가마터(사적314호)와 고령 사부리․기산리(사적510호)유적의 경우에는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를 하고 있는데 상주의 경우에는 모두 3개소의 자기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리되지 않고 있음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상주의 우수한 도자문화를 밝히고 알리기 위해서는 원료 산지 및 공방지 등 가마와 관련된 조사 및 연구가 많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