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顯官) 권민수(權敏手)의 기개(氣槪)
*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권민수의 자는 숙달(叔達)이요 호는 퇴재(退齋)이고, 조선 세조 11(1466)년에 태어나 중종 12(1517)년에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상주의 현사이다. 안동 권씨 검교공파로 고조부 윤균(允均)은 공조전서를 지냈고, 증조부 회(恢)는 서천군사(舒川郡事)를 역임하였으므로 이 가문에서는 서천군으로 통칭한다. 조부 유순(有順)은 공주목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림(琳)은 광흥창 주부를 역임하였으니 보기 드물게 대대 명문집안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1489년(성종 20)에 공의 아우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공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종 임금의 마지막 년도인 1494년(성종 25)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선시대 중앙 관료중에 이른바 옥당(玉堂)이라고 선망하였던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에 기용되어 부수찬, 부교리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이조정랑(吏曹正郞),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사간원 대사헌(大司憲) 등 화려한 청요직을 두루 거쳐 충청도관찰사를 끝으로 공주 관아에서 순직하였다.
성균관 전적에 재임할 때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2년(성종 23) 12월 7일자『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일개 성균관 생원으로서 영의정을 탄핵하는 상소에 소두로 천거될 만큼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종묘에 추숭(追崇)하고자 하는 사건과 관련하여 일어났던 갑자사화 당시, 공은 홍문관(弘文館) 부수찬으로 재임하여 연산군이 궁중 안에 유희시설을 하고자 하는 후원관사(後苑觀射)라는 사업에 대한 반대 논의를 하였다는 것이 화근이 되어 먼 곳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이때 아우 동계 공은 응교(應敎) 벼슬에 재임 중 그 부당함을 반대한다는 죄목으로 곤장 60대의 형벌을 받은 뒤 용궁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옥에 같혀 죽임을 당하였다.
퇴재공은 평소 행실이 순수하고 도량이 커서 다른 사람을 거스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식견이 높고 기개가 우뚝하였으며 불의를 보면 침을 뱉으며 마치 자기를 더럽힐 것처럼 하였으니 공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였지만 ‘스스로 아는 사람만이 알 뿐 이리라’ 고 하면서 이에 대적하거나 개의치 않은 성품이었다고 한다.
공이 졸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명성은 사람들을 속일만 하고 권세는 사람들을 움직일만 하다’하였고, 기우(氣宇, 기세와 도량)가 깊고 엄중하며 확고하여 일찍이 좋고 나쁨이나 기쁘고 노여움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므로 아무도 그 마음속을 헤아릴 수 없다 하였는데, 이는 조광조 등 신진 개혁 세력과 훈구 사이에서 중도의 세력인 이행(李荇) 등과 뜻을 같이 하므로 사림파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한다.『안동권씨대동세보』권민수 조.
형제간에는 우애가 독실하여 아우 동계공이 무참히 죽은 것을 항상 울적해 하며 스스로 유희를 즐기는 것을 삼가고, 아우의 죽음에 대한 말이 있으면 번번이 눈물을 흘려 애통해 하면서, 후사(後嗣)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공의 아들인 소(紹)를 양자로 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그리고 막내 아우 개수(价手)공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자 부모의 유산을 넉넉하게 옮겨주는 아량을 베풀어 맏형으로서 집안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남곤(南袞)이 지은 권민수의 묘갈명에서 출전
퇴재공은 시정(施政)에 대하여 신하로서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하여는 상소문을 올리는 간언(諫言)을 서슴치 않았다.
퇴재공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의 표제를 소개하면,
. 연산군 2년(1496) 9월 29일
곽종원(郭宗元) 등의 입묘와 신자건(愼自建)의 일 등을 논의하다.
. 중종 7년(1512) 4월 24일
홍문관 부제학 권민수 등이 재변(災變)을 말하며 임금이 경계하고 근검하기를 청하다.
. 중종 7년(1512) 5월 7일
부제학 권민수 등이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도리를 열거하며 상소하다.
. 중종 7년(1512) 5월 24일
부제학 권민수 등이 올린 변방을 방비하고 오랑케를 대우하는 방책에 대한 상소
. 중종 7년(1512) 6월 10일
부제학 권민수 등이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여 한결같이 치국하기를 청하다.
. 중종 10년(1515) 윤4월 23일
시정의 풍습, 대간(大諫)의 논계 등을 거부하는 것을 논핵하는 권민수의 상소문
. 중종 10년(1515) 9월 3일
권민수·이행 등이 안당의 상소에 대해 부당함을 상소하다.
. 중종 10년91515) 9월 29일
권민수가 음양의 조화를 위해 중전(中殿)을 살필 것, 군정강화, 무관직의 자질강화등을 상소하다.
등 모두 8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는데「조선왕조실록」연산군 18권 및 중종 15권, 16권, 22권, 23권에서 출전
표제에 나타나듯이 지존의 왕으로서 화를 품을 만 한 내용이 있을 것임에도 과감한 충언을 하였다는 것은 신하로서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고 하겠다.
열거한 상소문 중에 중종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도리에 대한 것을 열거한 상소문’의 요지를 여기에 옮겨 보면,
부제학 권민수 등이 상소하였는데
‘신 등이 듣건대, 천하의 걱정은 일이 없는데 있고 일이 있는 것은 걱정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대개 인정이란 수고로우면 생각하고 안일하면 나태해지기 때문에 일이 있으면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위태로이 여기므로 끝내는 치안(治安)에 이르고. 일이 없으면 교만하고 게을러 스스로 치안이 되었다고 여기므로 끝내는 위태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당(唐) 우(虞)시대 당우시대 ; 고대 중국의 살기좋은 요 순시대를 일컬음
는 치안을 했다고 이를 만 했는데 군신 사이에 반드시 언제나 조심하여 공경하고 삼가 아무일도 없는데도 경계한 것은 어째서 이겠습니까? 이는 치안은 믿을 것이 못되고 교만과 게으름이 그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국가에는 일이 없다 할 수도 없고 또한 일이 있다 할 수도 없으니 이 참으로 전하께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언제나 태만하지 말아야 하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삼가 시폐(時弊)를 들어 다음과 같이 조목을 들어 진술합니다.
1. 군정(軍政)을 엄히하는 것.
국가가 태평에 젖어 병정(兵政)이 정비되지 않고 인심이 해이해졌습니다. ----중략---- 바라건데 전하께서는 군정을 다시 엄히 하여 변장(邊將)의 실률(失律)한자를 용서하지 마시고 장사들이 이에 온 힘을 쏟도록 하소서
2. 간쟁을 받아 들일 것,
무속적으로 기도하는 일은 조그마한 하나의 요망한 일이라, 전하께서 먼저 아셨다면 진실로 당장 없엘 것이거늘 대간이 말하여도 따르지 않고 ----중략---- 전하께서는 바른 말을 받아들이시되 반드시 성실로 하시고, 음탕한 무속행위를 힘써 없에시고 미세하다고 경홀히 마소서
3. 기강을 세우는 것.
일전에 전하께서 모화관(慕華館)에 거동하시어 열무(閱武)가 끝나기 전에 비가 내려 잠깐 막차에 머무시자, 종자들이 비를 피하고자 자리를 떠나 체면이 크게 손상하였는데 사헌부에서 곧바로 탄핵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백관을 규찰하는 것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4. 하늘의 경계를 삼가는 것.
요즈음 천지가 변괴를 보이므로 신 등이 소장(疏章)을 올려 전하께서 반성하실 것을 기대하였더니, 듣건데 공신을 연향(聯享)하고 수전(水戰) 수전 ; 물위에서 씨름을 하는 경기.
을 가 보실 예정이라 하니 신 등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여느때라면 모르거니와 이처럼 흉년이 든 때는 가벼이 거행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소의 내용은 한결같아 오늘 이 시대 정치인에게도 크게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퇴재는 이행(李荇)〮 정희량(鄭希良) 조위(曺偉) 등 그 시대에 이름을 얻은 현사로 존경하던 인물들과 절친한 관계를 가져 문명(文名)을 얻었으며, 공이 남긴 <송사미성친남주(送士美省親南州)>·<영동현중(永同縣中)>·<우암구화(寓庵求和)> 라는 시는 작품성이 우수하여『동문선(東文選)』에 올랐는데 그 중에 <우암구화(寓庵求和)>시를 여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권태을,『상주의 한문학』, 2001, 상주문화원.
일신동서남북(一身東西南北) 한 몸이 동서남북으로
백년삼만육천(百年三萬六千) 백년은 삼만 육천 일인 것을
고래이척동진(古來夷跖同盡) 옛날에 백이와 도척은 함께 없어지고
취향유유성현(醉鄕唯有聖賢) 술속에 성현만이 오직 남았네
단세황량반숙(短世黃梁半熟) 짧은 세상에는 누른 쌀이 반만 익고
장가배주삼배(長歌白酒三杯) 긴 노래에 백주가 석 잔 이로세
상여단유사벽(相如但有四壁) 상여에게는 단지 네 벽이 있을 뿐이요
팽택욕부귀래(彭澤欲賦歸來) 도연명은 귀거래사를 읊고자 하였네
이 시는 연산군 시대의 폭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에게 마음을 전하는 시로서, 중국의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일생을 보낸 것을 비유하여 그 울화를 담은 작품이다. 우암이 퇴재보다 비록 나이는 7살이 작지만 같은 시대를 어렵게 살아가면서 서로가 격려하고 위로하는 우의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퇴재 권민수는 평생을 화려한 관료로 지내면서 절대 왕정시대에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정치질서를 창출하였던 선비로서, 올곧게 소임을 다한 현관(顯官)으로 오늘의 귀감이 될만한 상주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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