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인물 제5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불운 인생 문장4걸(文章四傑) 홍언충(洪彦忠)

빛마당 2017. 1. 27. 19:36

불운 인생 문장4걸(文章四傑) 홍언충(洪彦忠)

*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상주고등학교 교사
김 정 찬*

  공의 휘(諱)는 언충(彦忠)이고, 자(字)는 직경(直卿)이다. 홍씨는 본디 부계(缶溪)의 망족(望族)으로 원조(遠祖) 홍난(洪鸞)은 고려 때 벼슬하여 현달하였다. 황고(皇考) 홍귀달(洪貴達, 1438∼1504) 홍귀달(洪貴達, 1438∼150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1460년(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3년『국조오례의주(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경주부윤·대사성·지중추부사·대제학·대사헌·우참찬·이조판서·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뒤 좌참찬이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廢妃) 윤씨(尹氏)를 돕다가 투옥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신원(伸寃)되어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는『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daum백과)
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좌참찬(左參贊)인데 두 번 문형(文衡)을 맡았고 도덕과 문장이 일세에 으뜸이었으며, 어머니 상산 김씨(商山金氏) 역시 대성(大姓)인데, 공을 성화(成化) 계사년(癸巳年, 1473년, 성종 4년)에 출생하였다.
 
  공은 홍치(弘治) 을묘년(乙卯年, 149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곧 동방과(同榜科) 제 5명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홍문관 정자를 제수했으며 다음에 저작(著作)과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498년) 가을에 질정관(質正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오자 부수찬(副修撰)을 제수했다가 이조 좌랑으로 천전했는데 병으로 사직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503년)에 교서관 교리를 제수했다가 예조정랑으로 옮겼다. 갑자년(甲子年, 1504년)에 집안이 화(禍)를 만나 내외상(內外喪)을 당하였다.

  옛날 직언한 신하를 소급해 죄를 줄 때 시종신(侍從臣) 중에 죄를 면한 사람이 드물었다. 공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나서 담여(擔輿) 아래에서 조금 쉬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 1481∼1537) 김안로(金安老, 1481∼153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이숙(頤叔), 호는 희락당(希樂堂)⋅용천(龍泉)⋅퇴재(退齋)로, 난재 채수(蔡壽)의 매부이다. 1506년(중종 1)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조판서⋅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34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중종의 부마(駙馬)로,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켰으며,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불린다.
는 그의 옷이 피로 물든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그것을 가리키면서,

‘참혹하도다.’

하니 공은,

‘이것은 홍문관 물이 든 것이라.’

하였다.
  대개 홍문관 탄핵으로 죄를 받았다는 말인데 홍(弘)과 홍(洪)은 음이 같다. 국문을 마치고 귀양을 갔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김안로는 교외(郊外)에 나가 전송하였는데, 공이

‘학문을 한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라며, 자못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에 김안로는 희롱하기를,

 ‘만약 자네에게서 지혜를 깎아 버리고 학식을 어둡게 하여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고 콩과 조를 서로 혼합하여 아무 것도 분변 못하는 그런 물건이 되라 하면 자네가 또한 그리 하겠는가?”

라 하니, 공은 탄식하기를,

‘무슨 말이냐. 떠돌아다니며 고생하는 중에도 사람들이 혹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은 학문 때문이고, 나그네 길에 온갖 고생을 하고 양식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이 혹 나에게 양식을 대주는 것이 다 학문 때문이다. 바다 섬 속에 귀양 가 있으면서 정신이 괴로운 중에 문묵(文墨) 아니면 즐거워할 일이 없으니, 학문의 공은 큰 것이다. 진실로 나로 하여금 마음으로는 착하고 악한 것을 가려내고 입으로는 옳고 그른 것을 말하게 하여, 남의 시기와 미워함이 내 한 몸에 모여서 이 세상에서 화를 당하게 한 것도 학문이지만 또 스스로 학문의 힘으로 저만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죄를 얻고 고통을 당할 적에 나의 학문을 미워하여 나를 어리석은 자로 돌리고 나의 지각을 빼앗아 미련하게 밥만 먹고 있을 뿐이라면 하늘 위에서 떨어져 구덩이 속으로 내려오는 것처럼 망연자실할 것이니, 비록 엎드러지고 자빠지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이 짓을 하리오.’

라고, 하였다.

  1504년 여름에 궁금(宮禁)의 일로 추록(追錄)되어 진보(眞寶)에 귀양 가서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스스로 단정하고 옛 사람을 모방하여 자신의 만장(挽章)을 짓고 묘갈명(墓碣銘)도 지었다.
  그 묘갈문에,

 “대명(大明) 천하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洪)이며 이름은 충(忠)이요 자는 직(直)이라. 반평생에 오활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다. 32세에 세상을 마치니 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며 뜻은 어찌 그리도 긴고. 옛 고을 무림(茂林)에 묘지를 정하니, 푸른 산이 위에 있고 물굽이 언덕이 아래에 있도다. 천추만세 뒤에 누가 이 들판에 지날는지. 반드시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면서 슬퍼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라고, 하였다.
  그 해(1504년) 겨울에 또 연좌(連坐)되어 해도(海島)로 정배되었다. 병인년(丙寅年, 1506년 중종 원년) 가을에 성조(聖朝, 중종)가 중흥하여 성균직강(成均直講)을 제수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병을 앓고 있었는데 무진년(戊辰年, 1508년 중종 3년) 봄부터 더 심해져서 3월 7일에 고종(考終)하니 향년 36세였다. 천성이 탄솔(坦率, 성품이 너그럽고 대범함)하여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나이 약관(弱冠)에 학문이 크게 진보하여 문사(文辭)가 왕양(汪洋)하고 청건(淸健)하였다.
  예서(隸書)를 잘 써서 대령(大寧) 정순부(鄭淳夫), 덕수(德水) 이택지(李擇之), 고양(高陽) 박중열(朴仲說)과 서로 친하게 지내 당시 사람들이 4걸(傑)이라 했는데, 호는 우암(寓庵)이다. 지은 시문(詩文)과 자만(自挽)이 세상에 전한다.

  무반(武班) 남손(南蓀)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홍망지(洪望之)는 학문에 능하였고, 다음 홍연지(洪憐之)와 홍민지(洪憫之)는 모두 소생 없이 일찍 죽었다. 큰사위 정영(鄭英)은 유사(儒士)이고, 다음 최언준(崔彦浚)은 군기 주부(軍器主簿)인데 역시 죽었으며, 다음 홍윤최(洪胤崔) 역시 유사이다. 묘소는 무림현(茂林縣, 현 문경군 영순면) 남도연리(南道淵里)에 있다.
  시문은 딸 홍씨가 가장해 둔 것을 외손서인 김우굉(金宇宏, 1524~1590) 김우굉(金宇宏, 1524~159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이다. 1566년 별시 문과에 들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다가, 탄핵으로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개암집』이 있다. 최근 국문 가사(歌辭)인 ‘개암 12곡’ 중 8곡이 발견되어 2016년에 중동면에 시비(詩碑)를 건립해 놓았다.
이 1582년(선조 15)에 처음 간행하였다. 김우굉은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장모인 홍씨의 간곡한 청을 받아 청주목사 김중노(金仲老)에게 일을 맡겨 저자의 유고인 부 2편, 제문 1편과 시 200여 수에 자신의 발문을 붙여 3권 3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초간본은 임란을 거치면서 간본이 거의 유실되었다.
  그 뒤 1720년(숙종 46)에 이르러 종현손(從玄孫) 홍상민(洪相民)·홍상욱(洪相勖) 형제가 문집을 중간하였다.
  아우 언국(彦國) 홍언국(洪彦國, ?∼?):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공좌(公佐).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넷째 아들로, 1595년 진사가 되어 참봉(參奉)을 지냄. 문장(文章)과 지조(志操)로 명성이 있었고, 명필(名筆)로 이름이 있었다. 딸의 미모가 뛰어나 이를 탐한 연산군이 입궁(入宮)시키라고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여 1504년(연산군 10)에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
이 지은 묘표(墓表)에, 
  ‘아, 하늘이 이미 재기(才器)를 주었으면서 수(壽)는 주지 않고 또 후사(後嗣)가 없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득한 천도(天道)는 알 수가 없다.’

라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