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처사(皇明處士)로 이름을 남긴 성진승(成震昇) ․ 진항(震恒) 형제
곽 희 상
1639년(인조 17) 한양에서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의 방(榜)이 붙고 합격증(진사, 백패⋅白牌)을 수여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장내가 매우 소란스러웠다.
‘신성해야 할 자리가 왜 이리 소란스러운가?’
라고, 사미시(司馬試)를 관장했던 시관(試官)의 말이었다.
이에,
‘지금 창녕 성씨의 모(某)씨가 백패 수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 무엇 때문이라던가’
‘백패에 연호(年號) 연호(年號)란,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자기의 치세연차(治世年次)에 붙이는 칭호를 말한다. 예를들어 최초의 연호는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건원(建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광개토왕의 영락(永樂)·고려 태조는 천수(天授), 광종(光宗)은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가 숭덕(崇德) 숭덕(崇德)은, 청 태종(재위 1626〜1643)의 연호이다. 후금의 제2대 칸으로, 누르하치의 아들이며, 이름은 ‘홍타이지’이다. 처음에는 연호를 천총(天聰, 1627〜1635)이라 하다가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연호도 숭덕(崇德)으로 바꾸었다.
이라 쓰여 있다고 수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 합격증을 받지 않겠다더냐?’
급기야 이 사실은 당시 임석관이던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이경여(李敬輿, 1585∼1657)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백강집(白江集)』을 남겼다.
에게 보고되었다.
영의정 이경여는 다가와서
‘그대는 어디사는 누구인고?’
이에,
‘예. 소생은 영남지방 상주에서 올라온 유생 성진항(成震恒)이라 합니다.’
‘그래? 합격증을 받지 못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라더냐?’
‘예. 소생은 일찍이 계유년(1633) 한성시에서 장원을 한 바 있습니다.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기록이 없지만, 公의 종증손인 이홍(爾鴻)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나온다.
이때 숭정(崇禎)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제16대 의종(懿宗, 1611~1644)의 연호로, 이름은 주유검(朱由檢)이며, 재위기간은 1628년~1644년이다.
이란 연호의 합격증을 받고 지금까지 명나라 유생으로 생활해 오고 정진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도 안 되었는데 이번에 합격을 하였다 해서 저 원수같은 청나라의 연호가 적힌 합격증은 받을 수 없나이다.’
라고, 감히 목숨을 건듯 힘주어 아뢰었다.
북쪽의 오랑캐인 후금(後金)이 1627년에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16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면서 병자호란을 일으키고는 조선과 군신관계(君臣關係)에 이르렀다. 이 때 인조(仁祖)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삼배고구두례(三拜九叩頭禮) 삼배고구두례(三拜九叩頭禮)는,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 바닥에 세 번씩 부딪치는 의식.
를 당한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이윽고, 사방이 조용해 졌다. 냉기가 흘렀다.
참석자들은 진사 합격증을 받는데 …… 왜 기뻐하지 않는고? 라는 식이었다.
모두가 성진항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公의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영의정 앞에서도 당당하게 꿇어 앉아 있었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는 즉답을 하지 않고,
‘정녕 네 뜻이 그러하더냐?’
라고, 하문하였다.
이에,
‘예.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너는 이번 사마시에 불합격시켜도 된단 말이더냐?’
‘예. 불합격시킨다 하여도 소생은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공의 대답에는 힘이 있었고 패기와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다.
급기야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앞서 갑과, 을과 합격자들에게는 백패를 이미 수여했으니 말이다. 공은, 이때의 기묘(己卯,1639)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 3등(三等) 27위(57/100)였다.(숭정 12년 기묘 8월17일 식년감시회시방목(崇禎十二年己卯八月十七日式年監試會試榜目)』)
결국 이 사건은 영상이 주상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인조 임금은,
‘전방(全榜)에는 연호를 쓰지 말도록 하라’『정조실록』23권, 정조 11년(1787) 3월 13일 신사 1번째 기사.
라는, 비답이 내려졌다.
이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생들은,
‘과연 진정한 선비는 경상도 상주 유생 성진항이로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였다.
이윽고, 청나라 연호가 삭제된 백패가 내려졌다.
이 장본인이 누구이던가? 화은(華隱) 성진항(成震恒, 1609~1666)이었다.
생원진사시가 발표된 후 이번에는 한양에서 대과(大科)인 문과(文科) 일정이 발표되었다.
상주에까지 도착된 이 소식은 급기야 창녕 성씨 가문에도 전파되었다.
이에, 公의 아버지인 여백(汝柏)은 두 아들(진승⋅진항)을 불러 놓고,
‘이제 우리 가문을 빛낼 기회가 왔구나. 그동안 너희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좋은 기회이니라’
라고, 과거 시험을 볼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맏아들 진승(震昇)은 사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지난 뒤에 과업(科業)을 단념(斷念)하고 은둔(隱遯)하면서 자기 수양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이윽고,
‘저는 과거를 보지 않겠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그 무슨 말인고?’
하셨다. 그러자 진승은,
‘한 사람의 홍패(紅牌, 대과)와 백패(白牌, 소과)에 어찌 두 나라(명⋅청)의 연호를 쓰겠습니까?’ 송치규 찬,「동곽공 행장」(宋稚圭 撰, 東郭公 行狀)
라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 하였다.
이윽고, 근엄하셨던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시더니
‘오 그래? 정녕 너의 생각이 그렇단 말이지?’
하셨다. 그리고는,
‘자고로 선비란 기개와 지조가 있어야 하느니라. 지난 번 사마시에서 둘째 진항이가 백패를 거절했듯이 또한 이로 인하여 영상(領相)께서도 인정을 하였으니, 정녕 너희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다만, 나는 너희 조부께서 임란 후 질병에 무방비상태였던 당시에 향촌 사회의 환자들을 위해 존애원의 주치의(主治醫) 조부 람(灠)은 조선 최초의 사설의료원인 청리면 율리 ‘존애원(存愛院)’의 초대 주치의였다.
로서 존심애물(存心愛物)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았더냐? 앞으로 너희들도 명심 또 명심하여 가문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도록 매사 삼가야 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두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다행히 화를 면하였다. 아마 지난 번 사마시 백패사건으로 동생의 행동이 떳떳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한층 더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에 이르렀다.
향리에서는 이내 소문이 퍼졌다.
‘청나라 연호가 적힌 백패(白牌)는 받을 수 없다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청나라 연호를 안 쓸려고 아예 대과(大科)까지 포기했다’고……
주인공은 바로 동곽(東郭) 성진승(成震昇, 1606〜1677)과 화은(華隱) 성진항(成震恒, 1609~1666) 형제이다.
먼저, 가계를 살펴보면,
시조는 창녕 성씨 인보(仁輔)요, 2세는 문하시중 송국(松國)이다. 시중공의 현손(玄孫) 언신(彦臣)은 지임주사(知林州事)로 公의 9대조이고, 지사공(知事公)의 아들 이암(易庵) 사달(士達)은 대제학으로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公의 8대조이다. 7대조는 문효공의 아들 미산(眉山) 부(溥)로 고려 말의 두문동(杜門洞) 충신이다. 6대조는 효연(孝淵)이며 사온서(司醞署) 사온서(司醞署)는, 고려시대 궁중에서 쓴 주류(酒類)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으로, 문종(文宗) 때에는 양온서(良醞署)라 칭하였다.
직장(直長, 정7품)으로 증 좌찬성(贈 左贊成)이고, 5대조 완(琓)은 호조좌랑(戶曹佐郞)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며, 고조부 희주(希周)는 문과에 들어 벼슬이 종부시(宗簿寺) 종부시(宗簿寺)는, 조선시대 선원보첩을 편찬하고, 종실의 허물과 잘못을 규찰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정(正)은 정3품 당하관이다.
정(正)으로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贈 嘉善大夫 禮曹參判)이다. 증조부는 세평(世平, 1516〜1590)으로 문과에 들어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증 좌찬성(贈 左贊成)이다. 조부는 람(灠, 1556〜1620)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다. 초명은 협(浹)이고, 자는 사열(士悅), 호는 청죽(聽竹)이다. 효릉참봉⋅공조좌랑⋅무주현감에 재임하였으며, 특히 1599년 조선 최초로 사설의료원인 존애원(存愛院)의 초대 주치의(主治醫)로서 임진왜란 후의 질병퇴치에 이바지하였다. 권태을 외 3,『조선 최초 사설의료원, 존애원』,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 2005, 163-169쪽.
청죽 공은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여송(汝松)으로 주부(主簿)이고, 3남은 한산군수를 지낸 여춘(汝櫄) 내서면 신촌리에 ‘유명조선 통정대부 한산군수 성공 묘갈명’이 세워져 있다.(졸고,『상주의 목민관(1)』, 상주문화원, 239-250쪽 참조). 함창지역의 임란 창의를 주창한 채유종(蔡有終, 1561〜1606)의 손서(孫壻)이다. 본 책 참조.
이다. 2남인 선교랑(宣敎郞, 종6품) 여백(汝柏, 1582〜1655)이 公의 아버지로, 자는 직천(直天), 호는 노계(魯溪)로 가평이씨(嘉平李氏) 충의위(忠義衛) 백령(柏齡)의 여식으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두 분이 황명처사(皇明處士)로 이름을 남긴 진승(震昇)과 진항(震恒)이며, 시중공의 13대 손(孫)이다.
1) 성진승(成震昇 : 1606〜1677, 선조 39〜숙종 3)
초명(初名)은 진흥(震興)이고, 자는 자서(子舒), 호는 동곽(東郭)으로, 청죽(廳竹) 람(灠)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질이 있으며 천품이 도(道)에 가까웠다. 늘 ‘사친효사군충(事親孝事君忠)’ 여섯 글자를 써서 좌우명으로 삼고 항상 바라 보면서 경계하였다. 1633년(인조 11, 계유)에 진사에 뽑히니 문장과 명성이 세상에서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정축년(1637)에 청나라와 강화(講和)한 뒤부터는 문을 닫고 과거 공부를 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 충효를 서로 전해오니 어찌 한 사람의 홍백패(紅白牌)에 어찌 두 나라의 연호(年號)를 차마 쓰겠는가?” “…曰, 吾家世守國恩忠孝相傳 豈以一人紅白牌忍書二國年號乎”(동곽공의 행장)
라고 하였다.
명나라의 황제가 사직(社稷)을 위해 순국(殉國)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 진항(震恒)과 함께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한 다음 집 뒤에 북망단(北望壇)을 설치(設置)하고 의종의 기일이 오면 재계하고 곡소리를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통곡하며 시(詩)를 지었다.
天地無窮吾輩限 천지와 함께 우리들의 한이 끝이 없고
年年此日問何時 해마다 이 날을 어느 때라 물을고?
一脈王春不復回 일맥의 명나라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人間萬事己寒灰 인간 만사가 이미 찬 잿더미가 되었구나.
孤臣忍別黃明世 외로운 신하는 차마 황명(黃明)의 세상을 이별하고
門掩商山詠雪梅 상산에 문을 닫은 채 설매(雪梅)를 읊네. 송치규 찬,「동곽공 행장」(宋稚圭 撰, 東郭公 行狀)
라고, 읊으면서 심정을 달랬다.
이 무렵에 조정에서 경학(經學)에 있는 선비를 널리 부른다는 전교(傳敎)가 있어 公을 교관(敎官)에 제수하자 공은 전관(銓官) 전관(銓官)은, 조선시대 이조·병조에서 인사행정을 맡은 관원을 말한다.
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기를,
“살아서 숭정(崇禎)의 진사가 되었으니 죽어서는 마땅히 묘갈(墓碣)에 쓰기를 황명처사 성모지묘(黃明處士 成某之墓)라고 써되, 이 영광이 만족하거늘 다시 무슨 벼슬을 하겠는가? 황명에 태어나 황명에 자라고 황명에 늙어 황명에 죽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곧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결국 벼슬을 사양하였다.
병오년(1666, 현종 7) 효종(재위 1649〜1659년)의 국상(國喪, 1659년) 때에 계모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 자의대비(慈懿大妃, 1624〜1688) : 조선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 본관은 양주(楊州). 1638(인조 16)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의 논쟁이 벌어졌다. 송시열 등 서인은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을, 허목(許穆) 등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였다. 이때 公은 우암의 예지설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연숙,『17〜18세기 영남지역 노론의 동향 - 송시열 문인 가문을 중심으로』, 충남대, 2012.
이에 신석번과 더불어 유세철(柳世哲) 유세철(柳世哲, 1627∼1681)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자우(子遇), 호는 회당(悔堂). 1654년(효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공조좌랑·군위현감을 역임하였다. 그는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대하여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상복고증(喪服考證)」29조를 지어 서인 측의 기년설(朞年說)을 반박하는「의례소(議禮疏)」를 올렸다.
등 영남 유림들이 송시열의 예론을 공격한 상소 즉 의례소(儀禮疏)「상복고증(喪服考證)」29조를 지어 서인측의 기년설(朞年說)을 반박하는 소이다.
가 영남인의 공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사감(私感)에 의한 상소를 함으로써 영남 유림에 정면으로 대응『백원집』권2, 소 변송시열피무소.
하기도 하였으며, 우암 선생을 모함한 유세철(柳世哲)에게 그 죄를 다스려 줄 것을 公이 상소하였다.
‘상주(尙州) 유생 성진승(成震昇) 등이 상소하였다. 예(禮)를 논한다는 핑계로 유현(儒賢)을 무함(誣陷) 무함(誣陷)은,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함정에 빠뜨림.
한 유세철(柳世哲)의 죄를 다스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이미 관학(館學)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현종실록』12권, 현종 7년(1666) 6월 29일 무인 3번째 기사.‘尙州儒生成震昇等上疏, 請治柳世哲假托論禮誣陷儒賢之罪, 上答以已諭於館學疏批.’
이후로 公은 날마다 아우와 함께 경전(經典)을 토론하고 의리를 연구하여 하락도설(河洛圖說)과 역통(易統)을 저술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우암 선생이 말하기를,
‘영남의 동지 중에서 의리가 정대한 자는 이 친구보다 더 한 이가 없다’고 하고, 또‘뜻이 높아서 세속에 흐르지 않는다.’
고 하였다.
숙종 정사년에 향년 72세로 별세하여 상주 논실에 장사하였다. 배위는 의성 김씨 진사 이원(以元)의 딸로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으며, 통허재(洞虛齋) 헌징(獻徵)은 공의 손자이다.
외답 3거리에서 경천대 방향으로 진입하다가 오른쪽 야산 아래에는 숭모재와 유허비각이 북향으로 세워져 있다. 그 안에는 1805년(순조 5)에 세워진 ‘황명처사 동곽성공진승 화은성공진항 유허비(皇明處士東郭成公震公花銀成公震恒遺墟碑)’가 있는데, 뒷면에는 ‘쌍절북망단비음기(雙絶北望壇碑陰記)’를 전자로 세로로 새겨 놓았다. 북망단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2) 성진항(成震恒 : 1609~1666, 광해 1~현종 7)
노계(魯溪) 여백(汝柏, 1582~1655)의 둘째 아들이며, 진승(震昇)의 아우이다. 자는 자구(子久), 호는 화은(華隱)으로 명나라를 사모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뜻에서 스스로 호를 삼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절인(絶人)하여 벌써 가을을 읊은 시(영추, 呤秋)가 있다.
一年殘暑隨蟬去 일년의 남은 더위는 매미를 따라서 가고
萬里金風帶雁回 만리의 가을 바람은 기러기를 띠고 돌아 오도다.
라고, 하였다.
즉 여름의 더위에는 매미가 울고 가을에는 기러기가 돌아 온다는 평범한 진리와 함께 어려서부터 깨닫는 것이 남보다 뛰어 났다고 한다.
1633년(인조 11) 계유 한성시에서 장원을 하여 시관(試官)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만나지 않고 ‘내 어찌 권세의 문에 허리를 굽히리요?’ 하고는 그 청을 듣지 않았다. 화은당공 묘갈명(성이홍 찬).
1639년(기묘, 인조 17) 식년시(式年試)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공은 기뻐하지 않고 말하기를,
‘비록 편방의 한 선비가 대명(大明)에 생장하고 백패(白牌)에 거짓연호 청나라의 연호(年號). 이 당시 청태종의 연호는 숭덕(崇德)이었음.
를 차마 쓸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함에, 시관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가 왕께 건의해서 백패에 연호를 쓰지 않았다. 화은당공 묘갈명(성이홍 찬).
1644년(인조 22, 갑신)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이 승하하자 과거를 폐업하고 백화산에 은둔하면서 스스로 호를 ‘화은(華隱)’이라 하고 시(詩)를 짓기를,
山岳誰知尙暗然 누가 산악이 더욱 어두워짐을 알리요
百年披髮見伊川 백년 뒤에 오랑캐 될 일 이천(伊川)에서 보았네. 옛날 주평왕(周平王)이 낙양으로 동천(東遷)을 할 때 신유(辛有)라는 사람이 이천(伊川)에 가보니 머리를 풀고 들에서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신유(辛有)는 백년이 못되어서 오랑캐가 될 것이라고 하였음.
神州赤縣非吾土 신주적현(神州赤縣) 중국의 별칭이다.
은 우리 땅이 아닌데
玉璽瑤圖不直錢 옥새(玉璽)와 요도(瑤圖)는 아무런 값어치도 없어졌네.
漢宋相承三代後 한(漢)나라와 송(宋)나라는 삼대의 뒤를 서로 있고
金元遙出五胡前 금(金, 청)과 원(元)나라는 멀리 5호 오호(五胡)는, 노(奴), 갈(羯, 흉노), 선비(鮮卑), 저(氐), 강(羌)을 말함.
앞에서 나왔도다.
華夷乘運今如此 화이(華夷)의 승운(乘運)이 이제 이와 같으니
無路茫茫問醉天 앞길이 아득해서 몽롱한 하늘만 바라보네.
라고, 하였다.
조선의 선비로서 운(運)을 다한 명(明)나라를 되새기면서 오랑캐가 나라를 세웠으니 장차 청나라(중국)의 앞날도 걱정된다고 읊었다.
집 뒤에 단(壇)을 모으고 형 진항(震恒)과 함께 숭정의 기일이 되면 제복을 갖추고 통곡을 밤이 다 하도록 거두지 아니하였다.
뒤에 증손(曾孫) 이연(爾演) 성이연(成爾演, 1693∼1789) :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중문(仲文), 호는 지옹(芝翁). 진항(震恒)의 증손자이다. 81세의 고령에 과거를 보자 영조가 대궐로 들게 한 후 특별히 양식을 하사하고 정릉참봉(貞陵參奉)을 제수하였다. 178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오위도총부 도총관(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임명하였다. 문집으로는『지옹집(芝翁集)』이 있다.
이 귀하게 되어 증조부에게 참의(參議)가 증직(贈職)되자 예사(例事)로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자,
‘신(臣)의 증조부 진항(震恒)이 인조조(仁祖朝) 때 기묘년(1639, 인조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정축년(1637)의 강화(講和)로부터 3년 밖에 되지 않아 신의 증조부가 개연히 좋아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몸이 명(明) 나라의 진사(進士)라면 가(可)할까, 백패(白牌)에 어찌 청(淸)나라의 연호를 쓰겠는가?’하니,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건의하여 전방(全榜)에 연호를 쓰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에 신의 증조가 마침내 과거를 그만두고 은거하여 사림(士林)에서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습니다. 전일 내린 증첩(贈牒)에 모두 연호(年號, 청나라)를 썼는데 아마도 신의 증조의 본의가 아니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이처럼 앙달합니다.’『정조실록』23권, 정조 11년(1787) 3월 13일 신사 1번째 기사.
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른 예(例)를 두루 참조하여 고쳐 쓰도록 명하였다.
이와 같이 公의 존명배청(尊明排淸)한 행적(行蹟)은 3대에 내려가도 존중되었다. 얼마나 심지가 깊었으면 임금께서도 특별히 명하여 증첩(贈牒)에다 청의 연호를 지우고 다시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인 숭정(崇禎)으로 바꿔 쓰서 내렸으니 말이다.
부모님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제를 지킴이 지극히 엄하였다. 그리고는 公도 1666년(현종 7, 병오) 11월 2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8세였다.
배위는 장수 황씨(長水黃氏) 주부 수(修)의 여식으로 4남 2녀를 두었으며, 상주 화서 동화사(東華祠)에 봉향(奉享)되었다.
진승(震昇) 진항(震恒) 형제로부터 상주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살펴보았다. 혹여 누가 되지 않았는지 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정조⋅현종)』
2.『상주시사』
3.『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4.『국역 청죽선생유고』
5.『백원집』
6. 권태을 외3,『존애원』,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 2005.
7.『昌寧成氏 大同譜』
8. 송치규 撰,「동곽공 행장」
9. 성이홍 撰,「화은당공 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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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대명(大明) 4처사(四處士)의 대표 눌헌 강용후(康用候)와 상주의 (0) | 2017.01.27 |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함창현 최초 임란창의 주창자 - 채유희·유종(蔡有喜·有終) 형제 (0) | 2017.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