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인물 제5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부모에게 욕되지 않게 산 무첨재 정도응(鄭道應)

빛마당 2017. 1. 27. 20:08

부모에게 욕되지 않게 산 무첨재 정도응(鄭道應)

 * 상주향토문화연구소 고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전) 상주고등학교장,
   전)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박 찬 선*
 
 “아! 세상의 현인과 군자들의 후손 중에 자신의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천지간의 정밀하고 밝으며 맑은 기운이 사람에게 모여서 현인과 군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세도(世道)의 높고 낮음과 문운의 성대하고 쇠퇴함에 연관이 있기 때문에 자주 현인과 군자를 길러내지는 않았다. 혹 인덕을 쌓은 선조가 있어 큰 복을 받아 누리긴 하였으나  그 기가 한 집안으로 모여 누대에 걸쳐 세상에 이름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만큼 매우 드물었다.”

  후학 진성 이중곤이 지은『무첨재선생문집서』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현인, 군자가 대를 이어 명가를 이뤘으니 바로 우산의 진주 정씨 집안이다.

  정도응(鄭道應, 1618∼1667)의 자는 봉휘(鳳輝), 호는 무첨재(無添齋)·휴암(休庵)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1618년(광해 10) 12월 6일 아버지 검열공(檢閱公) 심(杺)과 어머니 여강 이씨(驪江 李氏) 사이에 상주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났다.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대제학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도덕 문장이 당세 종사였던 우복 정경세(1563∼1633)의 손자이다. 무첨재에게 있어서 우복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세계관의 정립과 학문 수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부의 잦은 관계 출입으로 젊은 나이에 집안을 꾸려가야 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몇 차례에 걸쳐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관직에 있기보다는 자연과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남긴 다양한 시문을 통해볼 때 처세에 있어서 세상에 나아가 양명(揚名)하기보다는 주로 강호에 은거 하려고 했던 처사형 인물이었다.” 오용원「무첨재 정도응의 삶과 문학세계」해제.『무첨재선생문집』한국국학진흥원 2012
 ‘무첨’은 시경에 ‘낳아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無忝爾所生)’ 라는 말에서 취하였다. 또 당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쉬어야 하는 네 가지 이유〔사의휴(四宜休)〕 사의휴(四宜休)의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손방에게 지어준 황정견(黃庭堅)의「사휴거사시서四休居士詩序」의“거친 차와 싱거운 밥에 배부르면 쉬고, 해진 옷 기워서 추위 가려 따스하면 곧 쉬고, 평평하고 온온하게 지낼 만하면 곧 쉬고, 탐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면서 늙으면 곧 쉬는 것이다.(麤茶淡飯飽卽休 補破遮寒暖卽休 三平二滿過卽休  不貪不妬老卽休)에서 사휴가 보이며 사공도(司空圖)가 지은「휴휴정기(休休亭記)」의“첫째는 재주를 혜아려 보니 쉬는 게 마땅하고, 둘째는 분수를 헤아려 보니 쉬는 게 마땅하고, 셋째는 귀 먹고 노망났으니 쉬는 게 마땅하다.(蓋量其才 一宜休也 揣其分 二宜休也 耄且聵 三宜休也)에서 삼의휴(三宜休)가 보인다.
’라는 말에서 취하여 호를 휴암(休庵)이라고도 했다.
  시조 어사부군(御史府君)께서 상주판관 시절 아들 의생(義生)을 상주의 공성 초전리에 머물게 하니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게 되었다. 6세손 수의부위(修義副尉) 번(藩)이 율리에 처음 터를 잡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잡된 놀이를 한 적이 없었다. 겨우 대여섯 살에 같은 또래 아이와 나가서 놀았다. 한 아이의 말이 매우 공손치 않았지만 선생께서는 웃으며 따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치욕스럽지 않느냐? 어째서 따지지 않느냐?” 선생께서 웃으며 말하였다. “제가 만약 공손치 아니하고 따진다면 이는 나도 공손치 아니한 것이니 제가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이 아이가 비록 어려서 아는 게 없지만 예의에 맞지 않는 행동을 남에게 하니 깊이 사귈 수 없습니다.” 이후로 마침내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듣는 이들이 선생을 남달리 여겼다.

  8세 때 아버지 검열공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직소(直所)에서 천연두를 앓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조부의 사랑이 자연 손자에게로 쏠리게 되었다. 우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 정심, 둘째 아들 정학을 모두 이른 나이에 먼저 보냈다. 말 그대로 창자가 끊어지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었다. 따라서 손자인 무첨재를 끔찍이 사랑하였다. 우복은 발령지로 나아갈 때마다 항상 손자를 데리고 다녔다. 할머니 정경부인은 손자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조부도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할 시기를 놓칠까봐 걱정을 하였다. 7세 때부터 조부에게 사략(史略)을 배웠으니 어린 손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터라 그때마다 조부는 “이 아이는 비록 늦게 배우더라도 뒤에 반드시 대성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라고 말하였다. 16세 때 자신의 삶의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조부께서 별세 하시자 가사에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할아버지 문장공이 별세하심에 모든 의절을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행하였고 조정으로부터 사제(賜祭)함에 응접함이 조금도 예에 어긋남이 없으니 예관이 탄식하기를 즉 무첨재의 대례 진행이 절도에 맞고 법도가 있음을 보고 이르기를,

 “노선생이 비록 돌아가셨지만 또 어진 손자가 그 세업(世業)을 잘 받드니 사문(斯文)의 다행함이라.”

라고, 하였다. 승중(承重)의 상을 치르는데 상례의 법도를 절차에 맞게 하였으며 상제례의 예법을 동춘당 송준길에게 묻고 논의하여 실천하였다.
  무첨재는 20세(1637)에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따님이자 서애의 손녀인 풍산 류씨와 결혼하였다. 이전에 문장공께서 수암공에게 직접 혼인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수암공이 세상을 떠나자 조모 정경부인께서 시간만 가는 것을 염려하여 다른 곳으로 정하려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정하셨던 것이니 지금 져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10년을 지체하더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정경부인께서 의롭게 여겨 허락하였다.
  31세 되던 1648년(인조 26)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부 교관(內侍府敎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4월에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제수되고 6월에 국가에서 동궁(東宮)을 보필 양육하기 위해 관택을 짓고 당시 뛰어난 인물을 선발하였는데 그때에 발탁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자의(諮議)에 임명되었다. 이때 서울로 가는 무첨재에게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가 자호인 무첨을 담아 증서(贈序)를 지어주었다.

“한 가지 절개에만 국한되지 말고,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말며, 순수하게 순일한 유자(儒者)의 도로 자신을 다스리면서 출처의 큰 절의는 한결같이 노선생을 본받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참된 ‘무첨’이 될 것이다.”(「자의소명지증행서諮議召命時贈行序」)
라고, 하면서 출처의 중요성과 유자의 도를 강조하였다.
  모친의 봉양을 위해 사직소를 올렸으나 비답(批答)은 “너는 능히 세자를 깨우쳐 인도하고 학문을 권하여 날로 성취시키는 공이 있으면 국가가 인재를 얻은 것일 뿐만 아니라 어찌 대대로 네 집안의 영광이 아니겠느냐? 사양하지 말고 힘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모친의 병환으로 1년간 서울에 머무르다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39세(1656)에는 황산찰방(黃山察訪)에 임명되었다. 40세 4월에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되었고 8월에 다시 시강원 자의(諮議)에 임명되었다.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체직을 청하였으나 “너는 사양하지 말라. 조정의 지극한 뜻을 알아서 어머니의 병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올라오라.”고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41세 정월에 윤허를 받았다. 12월에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어 9개월 동안 재직하다가 사직하고 돌아왔다. 뒤에 공조좌랑 뒤이어 창녕현감에 제수되었다. 50세(1667) 정월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율리로 돌아왔는데 4월 27일 율리의 바깥 사랑채에서 별세하였다.
  선조의 가훈을 복응(服膺)하여 행의(行誼)가 돈독하였고 국조(國朝) 이후에 제가에서 초록한 야사를 수집하여『소대수어(昭代粹語)』를 편저하고 또『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8책을 찬하였다. 목재는 이 책의 발문에서 이 책의 공력은 역사책의 백배나 된다고 칭송하였다.

  무첨재의 학문 수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 우복이었다. 그리고 우복과 학연이 있거나 무첨재와 친인척 관계에 있던 인물들이다. 묵계(黙溪) 조희인(曺希仁), 무주(無住) 홍호(洪鎬), 노준명(盧峻命), 죽헌(竹軒) 정헌세(鄭憲世),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등이다.
  무첨재가 수학에 몰두한 시기는 12세(1629) 때 노준명의 문하에 들면서 비롯됐다. 노준명은 소재 노수신의 증손이자 무첨재의 고모부였던 노석명의 아우였다. 그는 깊은 사색, 총명한 이해, 분명한 판단을 하는 무첨재를 칭찬하였다. 노준명이 하세한 뒤 무첨재는 제문에서

 “못난 저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기에 외람되게도 공의 보살핌을 입어 평생토록 의탁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께서 이리도 빨리 돌아가시니 누구인들 슬퍼하지 않겠습니까?”(「제노울산준명문, 祭盧蔚山峻命文」)

라고 하여, 부모처럼 의지하고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무엇보다도 무첨재의 학문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고모부였던 동춘당 송준길이었다. 우복은 생전에 무첨재의 공부를 자신의 사위였던 동춘당에게 부탁하였다. 동춘당의 가르침으로 큰 성취를 이뤘으며 상주를 떠나 있을 때는 편지로서 신칙하였다.

“영남에서 온 사람마다 그대를 ‘대유(大儒)로 칭찬하니, 그 명성이 과연 실제보다 지나친 명성이 아닌가? 명성은 두려운 것이지 기쁜 것이 아니니, 부디 위기(爲己)의 학문을 하여 내면을 채워 실제가 명성보다 지나치게 하게나. 그리고 또 반드시 재능을 감추어 어지러운 세상에서 몸을 보전하는 방법으로 삼으면 매우 다행이겠네.”

  무첨재에게 보낸「정봉휘에게 답함」편지에 든 글이다. 무첨재가 젊은 나이에도 영남에서 큰 유학자라고 칭송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동춘당은 이에 자만할까보아 세상의 명성보다 자기를 위하는 학문에 치중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갈등과 반목을 일삼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튀지 말고 자신의 몸을 잘 보전할 것을 경계하였다. 동춘당의 세심한 배려와 가르침은 영남 남인들이 정치적 굴곡이 심했는데도 우복가가 평탄했던 것도 동춘당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가례(家禮), 예기(禮記),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을 직접 수학하였다. 조부의 연보 작성, 문집 교정, 시장(諡狀) 작성 등을 자문 받았다. 그러나 훗날 먼저 간 무첨재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을 지었다.

 『무첨재선생문집』은 정도응의 시문집으로 4권 2책 목판본이다. 1911년 후손 철우(喆愚 1841-?)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중곤의 서문과 권말에 철우의 발문이 있다. 권1-3에 시 213수, 만사 12수, 소(疏) 3편, 서(書) 5편 제문 9편, 묘지명 5편, 행록(行錄) 1편, 잡저 1편 권4는 부록으로 연보, 행장, 묘지명, 각 1편과 만사 21편, 제문 7편, 증행서(贈行序)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시는 주로 자연경물을 관조하여 감회를 읊은 작품과 서로 뜻이 맞고 도가 합하여 시종 마음의 틈이 없던 조부의 벗이었던 월간(月澗)을 비롯하여 주위 지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輓詩)등이 실려 있다. 무첨재 시의 주제는 첫째, 출처(出處)와 충효에 대한 내적 갈등을 토로한 시와 둘째, 은자적 삶의 표출과 산수에 대한 유상(游賞)이 태반이다. 셋째, 산수욕(山水欲)에 대한 각별한 애착을 엿볼 수 있다.
  서(書)는 대개 친지들과 안부를 교환한 것으로 학문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 잡저인 한거잡기(閑居雜記)는 책을 읽거나 생활하는 중에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만필 형식으로 기록한 글로 청빈한 선비의 이야기로부터 탐관오리, 조상이 남긴 일화 등이 들어있다.
  그중 그의 할아버지인 정경세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김자점(金自點)과 그의 재종질 김 연(金演)의 이야기, 임진왜란 때 이 전, 이 준 형제가 백화산에서 난리를 피한 일 등 역사의 숨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면,

 조부께서는 월간(月澗)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의 호. 자는 숙재(叔載), 본관은 흥양.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으며 평안도 찰방과 현감을 지냈다. 이준이 백화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형 이전이 죽음을 무릅쓰고 동생 이준을 업고 전장을 빠져나와 생명을 건지게 했다는 내용이「형제급란도」로 전한다.
 창석(蒼石)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의 호. 이전의 아우. 별시에 등제하여 부제학을 지냈다. 도학과 문장이 백대간에 추중(推重) 되었다. 중흥귀감(中興龜鑑) 연거십잠(燕居十箴)을 지어 임금께 올렸고 광해군이 斁倫을 극언으로 상소하였다.
 두 선생과 뜻이 맞고 도가 합하여 종시(終始)토록 마음의 틈이 없었다. 매번 며칠이 말미가 생기면 반드시 말을 타고 오갔으며 도의를 갈고 닦으며 고금을 토로하다가 번번이 몰입하여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일찍이 말하였다. “나와 두 사람은 성(姓)이 다른 형제이다.” 그러므로 창석께서 시를 지은 것이다.

  ‘한 세상에 나서 성이 다른 형제 되었네(同世而生異姓兄)’

  아래는 현손 종로가 쓴 행장에서 선생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부군(府君)께서는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기량(器量)이 단정하고 엄하였다.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에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매번 책을 읽을 적에 반드시 읊조리고 찾아보아 깨치지 못하거든 놓지 않았다. 깨치지 못하거든 놓지 않았다.(不得 不措): 백배의 공부를 더하여 자신의 이해를 높이는 행위를 말한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을 할진댄 깨치지 못하거든 놓지 않는다.(思之 弗得 弗措也)”에서 유래한다.(『中庸』20장)
 경전 외에 역사책과 백가들을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인 도백이 선비들을 모아 통독(通讀)함에 과조(科條)가 매우 엄격하였다. 부군께서 강하여 풀어냄이 매우 정미하고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으니 도백이 대유라고 칭찬하였다.
  숙모 강씨께서는 일찍 홀로 되시어 자식이 없었기에 부군을 의지하였다. 부군께서 섬기기를 어머니같이 하고 강씨께서도 아들같이 여겨 양자를 들이지 않고 말하였다. “죽어도 이 아이에게 제사를 받으면 충분하다.”
  매번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어렵게 물러나는(難進易退): ‘난진이퇴’는 “신하가 군주를 섬길 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을 쉽게 여기면 지위에 차서가 있게 된다.(事君 難進易退 則位有序)”에서 유래한다.(『예기』「표기」)
 절도를 지켰다. 바야흐로 부르심이 자주 내려와서 비록 부득이하게 명에 응하였지만 반년 이상 머문 적은 없었다. 외직으로 여러 고을을 다스림에 청고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간척인(干尺人) 간척인(干尺人)은, 신분은 양민이면서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
들을 통렬히 끊으니 감시 사사로움으로 요구하지 못하였다. 단성현감으로 있을 때에 어떤 동향인이 오래도록 과일을 보내왔다. 부군께서 처음에는 받았다가 사사로운 부탁을 하자 불가하다고 꾸짖고는 돌려보냈다.
  평소 산수를 좋아해서 공무의 여가에 번번이 나가 경내의 경승지를 유람하고 읊조리며 스스로 만족스러워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각(閣)에 발을 치고 종일토록 보내니 문에는 잡스러운 손님이 없었다. 오직 한 때의 훌륭한 분들과 도의의 교우를 맺고 서로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강마(講磨)할 따름이었다. 문장은 간결하였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맏이인 석교는 학행으로써 바로 육품에 올라 현감으로 마쳤다. 둘째는 석현이다. 딸은 각각 참봉 이윤해, 참봉 이원지, 사인(士人) 황종대, 신강제에게 시집  보냈다.

窈窕愚谷幽(요조우곡유)  깊숙하여 골 그윽한 우산은
先祖昔所娛(선조석소오)  선조께서 예전에 즐기던 곳일세.
巖臺剔荒楱(암대척황주)  암대의 거친 잡목을 걷어내고
溪榭理遺墟(계사리유허)  시내 정자 남긴 터에 수리하네.
只嫌村烟鬧(지혐촌연뇨)  어지러운 마을 연기 싫었기에
爲此山僧居(위차산승거)  산승처럼 이곳에서 지내려함이네.
黃楊藝新叢(황양예신총)  새 떨기 회양목을 심고
蒼檜護舊株(창회호구주)  오래된 전나무 보호하네.
景物尙依然(경물상의연)  경물은 아직 예전 그대로이고
圖書亦宛如(도서역완여)  도서 또한 평소와 다름없구나.
羹墻慕靡歇(갱장모미헐)  사모하는 마음 그치지 않고
棲息樂有餘(서식악유여)  한적한 생활의 즐거움 넉넉하네.
遂初意已愜(수초의이협)  은거의 뜻은 이미 흡족하고
寡營心冞虛(과영심미허)  일을 줄이니 마음 더욱 비어가네.
灌園聊自適(관원료자적)  정원에 물대며 유유자적 하여도
寸資未全無(촌자미전무)  약간의 마음 전혀 없지는 않네.

 「우산에 들어가 정자를 수리하며(입우산수치정대, 入愚山修治亭臺)」자신의 심회를 읊은 작품이다. 첫째 수에 우산은 조부 우복이 임란 후에 관직을 떠나 작은 정자를 지은 뒤에 은거했던 공간이다. 둘째 수에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보다는 산속에서 살아가는 스님처럼 지내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이나 요 임금을 우러러 사모했던 것처럼 주위의 경물뿐만이 아니라 조부가 평소에 읽던 도서가 가득한 정자에서 조부를 사모하며 살아가려는 자신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한적한 생활이지만 은자적 삶의 넉넉한 즐거움을 찾고 있다. 마지막 수에서 진나라 손작(孫綽)과 환온(桓溫)의 고사 죽마고우(竹馬故友)의 고사: 중국 진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 때의 일. 촉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해 은호라는 은사를 건무장군 양주지사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가자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반목했다. 중원 땅을 회복하기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출병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환온이 말하기를 “은호는 내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써 은호는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를 인용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면서 자족하고 있다.
 
一臥煙霞已十年(일와연하이십년)  한번 산수 간에 누우 지 십년
不求簪忽不憂錢(불구잠홀불우전)  벼슬도 구하지 않고 돈 때문에 걱정도 없네.
溪魚野蔌當烹鼎(계어야속당팽정)  민물고기 야채 넣어 국을 끓이고
竹榻藤床勝繡筵(죽탑등상승수연)  대 걸상 등 침상 비단자리보다 낫네.
山色入簾翠滴滴(산색입렴취적적)  산빛은 주렴에 들어 푸른 물이 들고
月光窄戶皎娟娟(월광착호교연연)  달빛은 창호를 뚫어 희고도 곱디 곱네
讀書意倦還無事(독서의권환무사)  책 읽다 치쳐도 도리어 할 일 없어
時把幽竿上釣船(시파유간상조선)  때론 그윽히 낚싯대 매고 고깃배에 오르네.

 「한거언지(閒居言志)」‘한가롭게 지내며 뜻을 말하다.’의 제목이 일러주듯 속된 세상과는 먼 자연에 묻혀서 소일하는 자적한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무첨재의 한시 작품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의식적 정서는 바로 귀거래(歸去來)와 상자연(賞自然)에 대한 열망과 실현이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니 우리 당은 더욱 외롭네.(先生下世 吾黨益孤)”

라고, 허 미수가 한 말이나 “문장이 자세하고 엄격하여 공로가 역사보다 백배나 되네.[문장정격(文章精薂) 공백한죽(功百汗竹)]”이라고 홍 목재가 말한 것들은 두 선생이 당세의 정론을 지닌 분이기에 먼 후대까지 징험될 수 있을 것이다.『무첨재선생문집』에 발문으로 남긴 후손 진사 철우가 쓴 것이다.


【참고 문헌】
1.『상산지』
2. 이지락 옮김,『무첨재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 2012.  
3. 권태을,『尙州漢文學』, 상주문화원, 2001.
4. 우복선생기념사업회,『愚伏鄭經世先生硏究』, 태학사, 1996.
5. 상주문화원,『尙州史料集』,「嶺南人物考」, 1998.
6. 경상북도,『慶北偉人傳』,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