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인물 제5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5권.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사표(師表) 금영택(琴英澤)

빛마당 2017. 1. 27. 20:41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사표(師表) 금영택(琴英澤)

                                                                                                     

                                                                                                             권 태 을

 

 만우재(晩寓齋) 금영택(琴英澤·1739~
1820)의 자는 재경(再卿)이요 본관은 봉화다. 아버지는 효자 일협(一協)이요 어머니는 영천이씨 호군 시번(時蕃)의 따님이다. 7세조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은 퇴계문하 오천 칠군자(烏川七君子)의 한 분으로 충신독경(忠信篤敬)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사우(師友) 간에도 존중된 학자였다. 학문과 덕행으로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다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자제들을 훈계할 때면,
  “모(某·일휴당)의 사람됨이 바로《소학》의 표준이다.” 금영택,《만우재집》(권3), <부록·家狀>. “某之爲人 追是小學㨾子”. 앞으로는 家狀으로 요약하고, 특수한 경우 외는 원문을 생략함.
 라고 할 정도였다. 5세조 처겸(處謙)은 초야에 덕을 감추었으나 유림에 덕망이 높았고,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사위가 되어 자손이 상주에 살게 되었다.
  만우재(晩寓齋)는 재능과 기량이 남다르게 빼어났고, 소꿉놀이를 할 나이에도 깨어진 기왓장으로 솥과 그릇을 삼아 제삿놀이를 하였는데 절하고 예의를 차림이 법도에 맞아 보는 이들이 놀랐다 한다. 8세에 재종조부 열와공(悅窩公)으로부터《소학》을 배웠는데 일휴당 이후의 가학(家學)과 가풍(家風)에 영향받아 몸소 행함에 힘씀(體行爲務)으로써 공부와 심성 수양에 너무 열중하니, 아버지가 대기만성(大器晩成)에 건강을 해칠까봐 염려할 정도였다. 각고암(覺古菴)에서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과《대학》과《중용》을 강론하였는데 주야를 잊고 열중하였고 여가에 나뭇잎에다 글씨를 썼다가 물에 헹구니 개울이 검어질 정도였다 한다. 이같이 하기를 수년만에 학문과 문장이 크게 진전되고 견해가 넓게 틔어 큰 선비의 면모를 갖추게 되니 주위에서 과거를 보아 벼슬길로 나아가기를 권하였으나, 세속의 영리를 따라 분에 넘치는 희망을 가짐이 선비의 바른 도리가 아니라 여기었다. 이같은 선비관은 전적으로 선조 일휴당의 영향이었다 할 수 있다.

◦ 공맹학(孔孟學)을 바탕으로 한 도학자(道學者)
  공자·맹자의 유교는, 나부터 닦은 뒤 남을 다스림으로 나아가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 학문의 목적을 둔 실천 위주의 생활 철학이다. 만유재 당대는, 이미 성리학(性理學)이 공리공론으로 치달아 학문은 있되 실행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실학자들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 시기었다. 만우재는 유학의 본지(本旨)에 충실함으로써 현실을 타개함이 선비의 본래 모습이요 공맹학을 신봉하는 이의 사명이라 여기었고, 그러기 위하여서는 유학 정통 맥으로서 유도(儒道)를 지킴이 선비도(道)로 여기었다. 이같은 사실은,

  “공(公)은 강의(剛毅)한 자질과 재능으로 일찍부터 각고면려하여 이른바 고인(故人)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중용》·《대학》·《논어》·《맹자》에 기본하고 제자백가서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내 몸에서 체득하여 어버이 섬김에 효(孝)를 다하고 자제를 교육함에 반드시 의리로써 하였으며, 남에게 확충하여서는 붕우에게 간절히 착함(善)을 권하고 향당(鄕黨)에서는 돈후하고 화목하며, 선조를 받듦에는 추모하는 정성을 다 하였으며, 선현(先賢)을 존중하여 유학(儒學)의 도통(道統)을 지킴에 공(功)이 많았다.”《만우재집》, <만우재문집서(序)>, “奉先盡追遠之誠 尊賢多衛道之功”


라고 하였다. 이로써도 사서(四書)를 통하여 유학의 근본사상을 공고히 하고, 배운 바를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실현함으로써 후진 양성의 표본이 되었으며 향풍쇄신에 솔선수범하여 유가(儒家)의 도덕과 학문을 지킨 도학자(道學者)가 되었다.

◦ 벼슬길을 학문의 길로 바꾼 유학자
  만우재가 스스로를 시험하여 1790년(정조16), 성균생원에 합격하였으나 이내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만우재가 벼슬을 포기한 배경에 대하여서는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공산 송준필(1869~1943)은, 한말의 독립 지사요 학자며 교육자였다.
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公)의 세대에는 국가가 과거로써 인재를 취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영재들이 문장을 지어서 공명(功名)을 노림을 능사로 삼지 않음이 없어서, 풍우가 몰아치는 자리로 치달아서 득실의 기회를 따라 성쇠와 기복을 거듭하면서도 부질없이 끝내는 지친 목과 누렇게 뜬 얼굴로 가난한 집에서 슬픈 탄식을 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도도한 때였다.” 공산 송준필 찬, <行狀>.


  만우재는 실천 유학자로서 체행위무(體行爲務)의 학문을 소중히 여긴 선비였다. 게다가, 선조 일휴당의 실천궁행을 생활 신조로 삼았기에, 유학을 지향하며 명리를 추구하는 자들과 다툴 리는 더욱 없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만우재의 학식을 아껴 또 과거를 권하자,

  “궁하고 통달함은 운에 매인 것이라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 집은 대대로 청빈함을 지켜 청한(淸寒)해야 성정(性情)이 안정된다.” 공산 송준필 찬. <行狀>.

라고까지 하였다. 곧, 청렴하고 가난해야 성정이 안정된다 한 것은, 분주히 명리를 좇아 부귀에 들뜨기보다는 청렴결백하여 비록 가난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선비의 도리를 다 함이 분수에 맞다는 뜻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고상한 선비정신 실현에 평생을 바친 만우재의 학문·인생관이 함축된 의지의 표명이라 하겠다. 평소 학문을 논하고 정의를 나눈 선비들은, 정와(靜窩) 조석철(趙錫喆),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구당(舊堂) 조목수(趙沐洙), 묵암(黙巖) 김동필(金東弼), 김간묵(金澗黙),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등으로서 당대 상산의 석학(碩學)들이었고, 또한 지향하는 바도 만우재와 같아서 성현의 마음을 터득함으로써 덕(德)으로 나아가는 바탕을 삼으려 한 선비들이었다. 이에, 만유재의 삶을 총체적으로 알려 준 송공산의 말을 보면,

  “모름지기 돌아가고자 한 것은 반드시 유가(儒家)의 지결(旨訣)에 젖고자 함이어서, 드러내는 문자(文字: 글·문장)는 화려함을 거두고 실질로 나아갔기 때문에 학식이 깊고 넓음으로부터 예(禮)로써 그것을 잡도리하는 박문약례(博文約禮)로 귀결되었다.” 위와 같은 곳. “…其要則必澤之於儒家之旨訣 發之文字 歛華而就實 因博而反約”


라고 하였다. 이는, 만우재의 삶이 진유(眞儒)에의 덕을 갖춤에 성실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곧, 만우재의 깊고 넓은 학덕으로 결과된 문자(문장)는 겉보다는 속(實)을 충실히 함에 힘썼고, 나아가 박학(博學)함을 유학의 본지로 예(禮)를 삼아 다 거기로 집약시키었다고 한 것이다. 벼슬길을 포기하고 평생을 유학자로 입명(立名)한 만우재의 삶은, 박문약례의 생활화로써 유가의 본분을 지키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대유(大儒)가 추천한 명 논저(名論著)와 내용
  ∙ <명 논저>
 《만우재집》(권3) <잡저>에는 평소 연구하여 이론을 세운 논저 44제(題)가 수록되었는데 대유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 추천한 논저로는, <선후천방위변증(先後天方位辨證)>, <춘추강해(春秋講解)>, <서명변해(西銘辨解)>, <태극 사칠설(太極四七說)>, <오행 팔괘 납음기례(五行八卦納音起例)>, <감여가 해설(堪輿家解說)> 등이다. 이들 논저는 깊은 학문 연구의 결과물들로 만우재의 독창적 견해가 있기에 공산이 추천한 것이나, 필자가 주석을 달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전문인의 가치평가를 기다려 여기 소개하여 준다. 이들 밖에도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비롯한 <홍범(洪範)> 洪範은,《서경·書經》의 편명. 중국 하나라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하늘로부터 받은 洛書를 보고 만들었다는 9개 조목의 큰 법칙. 홍범구주(洪範九疇)로 일컬어지며 기자(箕子)가 주 무왕에게 강론하였다 함.
, <태극도(太極圖)> 太極圖는, 송나라 주돈이(周敦頤)가 만든 도형. 우주의 근본과 만물의 발전하는 이치를 도해(圖解)로 밝힘.
 속의 오행순서(五行順序)에 관한 논술과 <언문자음기례(諺文字音起例)> 언문(諺文·한글)의 글자(子母) 체제와 자모음의 소리값(音價) 및 중국음과 비교하여 범례를 세운 것.
 등의 논저가 있어 이들 가운데서 몇 내용을 살피기로 한다.

  ∙ <내용>
  첫째, 춘추(春秋)로써 대의(大義)를 밝히려 함.
 《춘추(春秋)》는 공자가 지었다는 중국 노(魯)나라 역사책으로, 춘추시대 노나라 은공(隱公)으로부터 애공(哀公)에 이르는 2백 4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특히, 공자가 자신의 윤리관으로 바르고 사악(正邪)한 것·선하고 악(善惡)한 것의 가치를 판단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히려 한 까닭에 춘추대의(春秋大義)란 말이 났다. 이에, 본문의 내용을 소개하여 논의하도록 한다.

  “주(周)나라 제도에 천자(天子)의 죽음을 붕(崩)이라 쓰고 제후(諸侯)의 죽음을 훙(薨), 대부(大夫)의 죽음을 졸(卒)이라 써서 5등급 5등급은,《예기·곡례下》에 있음. 천자 붕, 제후 훙, 대부 졸, 사(士)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이다.
이 있었는데, 제후의 죽음을 다 졸(卒)이라 썼다. (이는) 당시의 제후들이 방자 당시 방자한 제후는, 종주국인 주(周)나라를 업신여긴 제후들로 제(齊)·진(晋)·초(楚)·오(吳)·월(越) 등이다.
하여 성인(聖人·공자)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討罪)함으로써 왕법(王法·국법)을 안정시키고 (저들을) 비난하고 배척하여 형벌을 가하려 한 때문이었다. 나라를 어지럽힌 신하(난신·亂臣)를 벌주고 부모 뜻을 어긴 자식(적자·賊子)을 성토함에 먼저 그 무리(黨)를 치고 더불어 지극히 작은 것까지 미루어 헤아림에 앞장서 벌준 뜻은 근본부터 깨끗이 다스려 어지러이 바뀌고 함부로 원망치 못하게 하고, 의리(義)를 버리지 말게 하여, 악(惡)하여 어버이의 은혜를 잊지 않고 노(怒)하여 예의(禮)를 버리지 않으며 절의(節義)를 높이고 권장함이 천하의 대관(大關) 大關은, 발에 끼워 고통을 주던 형구. 곧 주릿대로 여기서는 역사적인 큰 형벌을 가리킴.
이요 국가가 급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만우재집》(권3), <잡저·春秋大義>(잡저 제1제).


  이는, 공자가《춘추》를 찬술하여 난신(亂臣)·적자(賊子)를 징벌하고 의리를 숭상하려 한 뜻을 밝힌 논(論)이다. 춘추시대의 제후를 공자는 대부로 폄하함으로써, 공자의 포폄사상(褒貶思想)에 의해 선악인이 역사상 생겨나게 되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란 말 역시 이에서 유래하였다. 만우재가 춘추 대의를 논한 것은, 역사를 두려워 할 줄 아는 사회를 희구한 작자의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둘째, 1월을 정월(正月)이라 한 뜻을 밝힘.

  “바를 정(正)이란 말은, 공평하고 정직하며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아 한결같이 조절하여 적절하게 함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무릇 천지 만물의 이치는 근본(本·처음)을 바로잡아 다스린 뒤라야 말기(末·끝)가 다스려 지나니, 마지막을 삼가려면 처음부터 함에 있음이다. 만약, 음양(陰陽)의 처음에 계절과 절기에 가득참과 빔의 차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추위와 더위가 반대로 뒤바뀌고 한해 농사의 수확도 이룰 수 없는 까닭에 성인(堯)이 역서(달력)를 만들어 농삿일에 때를 어기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반드시 첫째 달을 먼저 정(正)이라 한 이것은 올바른 시작(正始)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였다.”《만우재집》(권3), <잡저·正月>(제4제).


  1월을 정월(正月)이라 한 까닭을 명쾌히 변론하였다. 더구나, 정시(正始)란 말 속에는 ‘예의 법칙에 맞는 시작’이란 뜻이 함축되어 있어, 정월(正月)이란 말은 저절로 절기를 가리키면서도 농삿일에 바르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발라야 한다는 의미도 내재한 말이라고도 하겠다.

  셋째, 풍수설(風水說)로 미혹함을 일깨움
  풍수설을 감여설(堪輿說)이라고도 한다. 풍수설에 대한 당시 보편적 인식을 알게 하였는데, 평소에는 선비의 체통을 지켜 풍수가의 길흉화복설을 비판하다가도 정작 상을 당하면, 아버지의 장지가 형제의 누구에게는 좋고 누구에게는 나쁘다고 하여 형제간의 불화가 장지 선정으로 하여 야기됨을 예로 들었다. 이같은 풍수설에 대하여 만우재도 미혹한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하여 주자(朱子)의 풍수설로 자신의 뜻을 대신하였다.

  “주자(朱子)가 장지를 택함을 논하되, 땅의 주된 형세의 강약, 무덤자리의 치우침과 바름, 바람의 모임과 흩으짐, 물과 흙의 옅음과 깊음, 역량(力量)의 온전함과 아님으로써 말하고 어느 산수(山水)가 공후(公侯)가 날 만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앞날의 길흉화복을 어찌 욕심스러운 생각으로써 망녕되이 구할 수 있으랴.”《만우재집》(권3), <잡저·葬家迷惑堪輿解>(제40제). 장례하는 사람이 풍수설에 미혹함을 변해(辨解·해명)함.


  이 말은, 풍수설에 미혹한 사람을 깨우치러 인용한 것이면서 나아가, 앎(知)과 행함(行)이 다른 선비들을 경각시키려 한 만우재의 비판의식이기도 하다.

  넷째, 언문(諺文·한글)의 우수성을 재천명함.
  2백여 년 전에 우리 글의 우수성을 인정한 선비가 상주에 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주 학술계의 다양성·진취성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만우재가 남긴 <언문자음기례(諺文字音起例)>《만우재집》(권3), <잡저·諺文字音起例>(제44제). 언문(한글)의 글자와 음에 대하여 글자를 만든 원리와 소리값의 용례 및 중국음과의 관계를 밝혀 체제와 범례를 세운 해설문이다.
에는, 글자를 만든 원리(製字原理), 자모음(子母音)의 소리값(音價), 초중종성(初中終聲)의 용례, 우리 음(音)과 중국 음과의 비교 등을 체계화하여 범례를 작성하였다. 오음초성(五音初聲)의 내용은 포암(圃菴) 박성원(朴性源·1697~1767)의《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약칭《화동정음(華東正音)》의 음운론(音韻論)을 참고하여 정리하였는데, 특히 우리 음(東音)과 중국음(華音)을 비교함에 [◇]은 순경음 [ㅱ]을 대신한 것으로 보이며 [△]을 반치음으로 보지 않고 반후음으로 보아 우리 현실음을 반영한 사실이다. [ㄱ,ㄴ,ㄷ,ㄹ,ㅂ,ㅅ]의 종성은 본래 화음에 없는 것이라 하고, [ㅁ]은 [ㄴ]으로 소리낸다고 하여 당시의 현실음을 바르게 설명한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한, 참고 자료로서《화동정음》외에 흡재(翕齋) 이사질(李思質·1753出仕, 1759년 고양군수)의 《훈음종편(訓音宗編)》의 이론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설명은 전적으로 한글학자 李東和 박사의 자문을 받아 쓴 것임을 밝혀 둔다.
 이와같이, 19세기 초에 유학을 신봉한 선비가 우리 글의 우수성을 중국음과 비교하여, 초·중·종 삼성(三聲)으로써 중화의 반절(反切)을 포괄하는 우리 글자를 창제한 세종대왕의 공덕이 큼을 천양한 일만으로도 만우재의 학문 세계가 굉박하며, 보다 선진한 실학자적 자세를 지닌 학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이 논저 또한 전문인의 가치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

◦ 향약당(鄕約堂)을 중수하여 향풍을 쇄신함
  선비의 학문하는 근본은, ‘자기의 덕을 성취하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사물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하는 목적을 이루어줌’의 성기성물(成己成物)과 ‘나부터 수양한 뒤에 남을 교화함’의 수기치인(修己治人)함에 있기에, 만우재도 향리의 미풍양속 보호에 솔선하였다. 중동 죽곡리에 있는 향약당은 수암(修巖) 류진(柳袗)과 외서(畏棲) 김추임(金秋任) 등이 창설(1618·9)하고 어은(漁隱) 류천지(柳千之·1616~1689)의 중수를 거쳐 1798년에 이르러서는 만우재(晩寓齋)를 비롯한 김동초(金東礎)·강백흠(姜伯欽) 등이 10년의 준비 끝에 강당을 중수하고 고사(庫舍)를 신축하였다. 이때 만우재가 향약의 의문(儀文) 및 범례(範例)를 주도하여 다시 작성하고, 향약의 의식 절차 및 범례를 적은 책《만우재집》(권3), <跋·書鄕約儀節後>. 이 발문에 중동 죽곡리의 향약당 연혁이 자세히 기록됨.
의 발문을 썼다. 나아가, 이해 11월 10일에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중동의 향풍 쇄신에 만우재의 공이 큰 사실을,

  “중수(重修)의 논의를 앞장 서 주도하여 개축하여 그 제도를 확대하였으며, 구약(舊約)을 닦아 더욱 밝게 하고 춘추로 강신(講信) 講信은, 향약의 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우의와 신의를 새롭게 다짐하는 일.
하여 한 고을 선비와 백성으로 하여금 과실없기를 권면하고 서로 구휼(救恤)하는 의리를 알아 힘을 다함을 즐길 줄 알게 하였다.”《만우재집》(권4), <부록·행장>.“公倡議改策而宏其制 修明舊約 春秋講信 使一方士民 知有勸規交恤之義 樂致力焉”


라고 하였다. 선비로서 수기치인(修己治人)에 학문의 뜻을 두어 성기성물(成己成物)하여 일향(一鄕)의 풍속을 순화시켜 그 미풍을 대대로 내리는데 만우재의 공이 컸음을 특기한 것이다.

◦ 경사(經史) 위주로 제자를 교육함
  만우재는 원려(遠慮)로써 인재양성에도 성심을 다한 스승이다. 제자를 가르치는 공간으로 오산서당(梧山書堂)을 활용하였는데 이 서당은 영천(靈川) 신잠(申潛·재임 1552~1554)이 상주목사가 되어 전역에 18개 서당을 건립한 것 중의 하나다. 창건 이래 중건(1592)·이건(1719)을 거쳐 1800년을 전후하여 중동 비봉산 밑 오동리(梧洞里)로 옮겨 세울 때 만우재가 주도하였다. 이 때, <오산서당 이건 개기축>과 <상량문>《만우재집》(권3), <축문>에 <梧山書堂移建開基祝>이 있고, <상량문>에 <梧山書堂上樑文>이 있다.
을 지었는데 서당의 건치 연혁과 만우재의 육영사업도 알 수 있다. 교육의 기본은 경학(經學)으로 세우고 겸하여 사서(史書)를 강하였으며 문예는 말기로 하였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후진을 성취시킴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반드시 향리의 자제들을 오산강사(梧山講舍·서당)에 모아 공령(功令) 功令은, 학생의 학업 성취도에 대한 考課와 관리 선발을 규정한 법규.
을 부과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가르치되 재능에 따라 장려하고 나아가게 하니 위수(渭水)와 낙강(洛江) 사이에 문채와 바탕(겉과 속)이 고루 갖추어져 재덕(才德)이 뛰어난 인재가 성행하였으니 공(公)의 공로가 컸다.”《만우재집》(권4), <행장>.“渭洛之間 彬彬有髦乂之興 公之功爲多焉”


  이 말로써도 만우재의 수기치인한 실효가 오산서당을 중심으로 한 위락(渭洛) 간의 인재양성으로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이를수록 만우재의 선비 위상은 점점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거니와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역사에 관심을 갖고 후진에게 실질적인 역사교육을 실시한 데 있다고 하겠다. 만우재가 살던 시기는 이미 서구문물이 청나라를 통하여 물밀듯 유입되고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때였던 만큼 앞날을 염려한 원려지사(遠慮之士)는 갖가지로 우리 것 지키기에 나름의 방법을 동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우재의 위국념(爲國念)은 제자들에게 바른 역사 교육으로 드러났다. 특히, 국사와 중국사(당시는 세계사)를 시대적으로 동시에 개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 역사 교육에 임했음을 알 수 있으니,

  “대게, 신라로부터 고려 이후에 역사(국사)가 있어 세상에 전파되었으나 중국의 역사와 각 책으로 나누어져서 좌우에 한데 모아 보지 않으면 연대의 상하를 요령있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 연대 순에 따라 주요한 사실(史實)만을 간추려 같이 적어 한 책을 만들어서 아손배(兒孫輩)를 수업하였다.”《만우재집》(권3), <序·兩華通錄序>.“蓋自羅麗以後 有史 行于世 與中國之史 分在各秩 不合聚左右看 則年代上下難以領略 今乃只撮其年紀 通錄爲一冊 以授兒孫輩”


라고 하였다.
  중국(中華)과 조선(小中華)의 역사를 동시에 보게 한 책(兩華通錄)은, 국사와 중국사를 동시에 열람하는 연대기(年代紀)로서 오늘 날 성행하는 한국사연표(韓國史年表)와 체제가 같은 책이었다. 국사와 세계사를 동시에 열람할 수 있게 한 사실은, 만우재의 사관(史觀)이 주체성에 입각하여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데 섰음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이같은 사관은 국가의 미래를 내어다 본 원려(遠慮)에서 결과된 지사(志士)의 위국념(爲國念)임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만우재(晩寓齋) 금영택(琴英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가(儒家) 근본에 입각한 선비로서, 후대에 남을 만한 명저술을 남긴 학자요, 우리 글(인문·한글)에 대한 우수성과 우리 국사에 대한 세계사적 위상을 깨닫게 함에 실학자적 선진 안목을 지닌 선비며, 향풍쇄신과 후진양성에 성심을 다한 교육자로서, 실천궁행의 사표(師表)로 남은 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