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와 덕행(德行)으로 참 선비의 삶을 산 입재(立齋) 조대윤(趙大胤)
김 재 수
1. 하늘이 내린 효자
그믐 즈음, 칠흑 같은 어둠만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며칠 째 초저녁부터 한 자리에 꿇어 앉아 밤이 맞도록 기도를 올리는 그림자만 어둠속에서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 간절하게 비는 기도임을 뒤뜰 감나무만 진작부터 짐작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부디 비오니 아버님의 병환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늘이 원하신다면 아버님의 병환을 낳게 할 수 있나이다. 자식된 자로 무슨 일이라도 못하겠습니까. 부디 방법만이라도 알려 주시기를 빕니다.”
어둠을 밝히고 있는 뒤뜰에 꿇어 앉아 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올리는 기도 소리. 비록 마음속으로만 외치는 기도이기에 주변에 아무도 그의 기도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미물인 풀벌레마저 울음을 그치고 함께 정성을 모우고 있었다. 이렇듯 간곡한 기도가 며칠 째 이어지던 어느 새벽이었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집안을 감싸는 듯 하드니 하늘에서 문득 흰옷을 입은 신선이 나타나 잔잔한 음성을 들려주었다.
“나는 신의(神醫)인 정연(鄭涎)이다. 너의 지극한 정성을 하늘이 기억하였노라. 이제 일어나거라. 네 부친의 병환은 세상에서 고치기 어려운 폐병이니라. 하지만 너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이 비방을 알려 주노니 네 아버님을 고칠 수 있는 약은 세신탕(細辛湯, 족두리 풀)이 성약(聖藥 )이니라.”『풍성세고』,「입재유고부록」연보, 489쪽.
그는 벌떡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하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하늘에서 신선이 남긴 음성만 그의 가슴에 메아리치듯 계속 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늘이시여”
그날 하늘을 향해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이윽고 달음질하듯 의원을 찾았다. 새벽에 일러준 신선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의원에게 알리고 약을 지어 나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그 약을 아버님께 달여 드렸더니 정말 아버님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낳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효감소치(孝感所致)라 하였으니 하늘이 감동한 까닭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부모님의 병환은 물론 평생 부모님 대하기를 하늘을 모시듯 하신 분이 계셨으니 이분이 바로 조대윤(趙大胤, 1638∼1705) 공이다.
공은 1638년(인조 16)에 상주 장천 요포리에서 출생한 조선 중기 유학자이다. 본관은 풍양, 자는 계창(季昌), 호(號)를 입재(立齋)라 하였다. 고조는 조광헌(趙光憲)이고, 증조부는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임란일기(壬亂日記)를 기록한 검간(黔澗) 조정(趙靖)이며, 조부는 조영원(趙榮遠), 부친은 모암공(慕庵公) 조릉(趙稜)이다.
공은 1675년(숙종1)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였으나 당쟁이 심한데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스스로 학문을 닦기에 전념하였다.
공이 상주 장천 요포리에서 출생할 때의 일화가 있다. 한 노인이 꿈에 공의 부친인 모암공(慕庵公)에게 말하기를,
“기특한 남자 아이를 낳을 것이니 이름을 관일(貫一)이라 짓는 것이 좋겠다.”
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모암공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공을 낳게 되자 아명(兒名)으로 지어 주었다.
어린 시절의 일화는 몇 가지가 더 있다.
공이 겨우 6세 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그 해에는 이웃에서 죽어 나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주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쉬쉬’하고 숨기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무얼 숨깁니까? 나는 무섭지 않습니다.”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8세 때는 우연히 목욕을 하다가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다른 아이들은 놀라 달아났으나 공은 뛰어 들어가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오니 남들이 모두 그 숙성하고 재빠른 생각을 기특하게 여겼다.
또한 어린 시절에 어쩌다 술을 과하게 마신 일이 있었다. 그 후부터는 음주를 끊었고, 7세 때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장성하자 학문에 별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알고 끝끝내 다시 두지 않았으니 과단성과 용감함이 이와 같았다.
장성하여 취학하였는데 대부분의 글을 한 두 편만 읽고도 이미 큰 뜻을 통달하였고 번거롭게 시키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희와 놀이를 끊고 말과 행동에 스스로 엄격하니 모암공(慕菴公)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 대를 이을 사람은 이 아이다.”
라고,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알아 일찍이 부모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부친이 친구를 좋아했는데 친구와 모이기를 생각하기만 해도 공은 이미 악기와 주안상을 마련하여 소홀함이 없게 하였고, 부친이 산수를 좋아하면 어느 곳에라도 금방 가마를 대어 명승지를 두루 다니며 즐기도록 하였다.
부친은 평생을 부종을 앓아왔는데 신기하게도 일찍이 상지수(桑枝水) 뽕나무 가지 삶은 물.
를 복용하였으므로 상지수를 늘 달여 올렸을 뿐 아니라 부친이 돌아간 뒤에도 뽕나무 가지를 함부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 뿐만 아니라 평생 해와 달을 향하여 소변을 보지 않으며 조상의 묘소가 계신 방향이면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피하였으니 그 잠시도 부모를 잊지 않는 모습이 모두 이와 같았다.
부친의 말년에는 공 또한 나이 들어 늙어 갔지만 부친이 드시는 음식의 짜고 싱거움은 물론 의복의 춥고 따스함을 반드시 직접 맡아 살피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매번 탄식하기를,
“내 이제 나이 늙고 보니 대강이나마 향방을 알 만하다. 이러한 때에 노부모를 받들게 되면 혹 자식된 직분을 이바지할 수도 있을 것인데 미칠 수 없다.”
하시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부친인 모암공이 연세가 많아 돌아가시니 공은 애절하여 땅에 쓰러지기 네 차례나 하면서도『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철저하게 상을 마쳤다. 새로 쓴 분묘가 강 건너 30리 밖에 있었는데 날마다 묘소에 오고 감을 비바람이 사나워도 폐지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하니 사공이 삼베로 된 말 안장을 탄 사람을 보고는 먼저 그가 입재공인 줄 알고 배를 대어 기다리곤 하였다. 복을 벗고 나서도 추모하는 마음이 가시지 아니하여 눕고 앉음에도 꼭 돌아가신 부친이 계시던 자리를 피하면서 말하기를,
“아랫목에 앉지 못하는 것은 아버님이 안 계신다 해서 달리 할 수 없다.”
고 하여, 항상 북쪽 벽 밑에서 잠자기를 종신토록 변치 않았다.
만년에는 봉암산(鳳巖山) 아래 집 한 채를 지어 망송재(望松齋)라 이름하였으니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이 묻힌 곳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제삿날을 당하면 슬퍼하기를 초상 때와 같이 하였으니 공의 부모에 대한 효성을 가리켜 하늘이 내린 효성이라고 말할 만 하였다.
2. 형제 우의와 이웃 사랑의 삶
형제간의 우애도 또한 돈독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사사로이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모든 물건이나 갓과 신발같은 것을 스스로 마련한 적이 없었는데 꼭 필요한 경우는 반드시 백씨의 처분을 기다려 장만하였다. 이는 형님의 마음을 늘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함이었다. 늘 마음으로 받드는 형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공은 여러 조카들을 보살피되 자기 자식과 차별이 없이 하여 조카들이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물건과 특히 과거 볼 때의 준비물도 자신의 자식과 갖게 했다. 그리고 조카 딸 혼인에도 신행이나 혼수품들 또한 자신의 딸과 똑같이 하여 불편함이 없게 하였다.
심지어 서숙(庶叔) 봉(逢)의 집안이 가난하게 되자 공이 농지를 빌려 주었으나 집안 사람들은 알지 못했는데 그 후 균전(均田) 세금을 결정하기 위하여 농경지의 면적과 등급 등을 고르게 조사하여 정하던 일.
할 때에 이르러 봉의 아들 삼윤(三胤)이 찾아와 말하기를,
“아무 곳에 있는 농지는 너무 오래 빌려 쓰기만 하고 돌려 드리지 못하여 늘 죄송하였습니다. 이제라도 돌려받으시고 측량토록 하기를 청합니다.”했으니 그것은 공의 은혜에 감복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숙(庶叔) 봉이 나이가 들자 공은“나의 윗대 항렬에서는 다만 이 숙부만 남아 있다.”
고, 하여 조그만 별찬만 있어도 반드시 맞아다가 함께 드시었으며 그 회갑에 당해서 반드시 자질들과 더불어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직접 가서 위로해 드렸다.
어느 날 도적을 맞았는데 남들이 와서 위문을 하니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물건을 잃기만 하였지만 그 사람은 가져다가 굶어 죽는 일을 면했을 것이니 무엇이 아까우냐?”
고 하였고, 흉년에 별도로 식량을 저축하였다가 구제하여 주니 품팔이꾼이나 이웃들이 이에 힘입어 불을 때는 자가 많았으며 땅을 요구하는 친척이 있으면 이따금 옥토를 나눠 주어 밑천을 삼게 하기도 하였다.
자기의 삶은 매우 검소하게 하면서도 남을 대접 하는 일은 늘 후하여 이웃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힘닿은 대로 도와주고 상사(喪事)나 장례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음을 다하여 아는 사이의 부고가 오면 또한 반드시 며칠 동안을 자신이 당한 일인 것처럼 고기를 드시지 않았다. 가난과 다급함을 주제하려는 의협심은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어서 굶주림에 죽어가던 빈한한 이웃이나 일가들 중에 도움을 받아 살게 된 자가 매우 많았으니 이는 이웃과 형제를 극진하게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3. 학문을 통한 밝은 삶
공은 평생에 걸쳐 곧 나라에 충성(忠誠)함은 물론 이웃과는 신의(信義)를 지켰으며 서로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닦는 일과 남을 대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가는 공부에 힘을 썼다. 그리하여 비록 어두운 방이나 깊숙한 곳에 있을지라도 항상 밝고 넓은 데 있는 것같이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이르러서는 조용히 침묵만 지키고 말씀을 아니하여 초연히 듣지 못한 것 같이 하셨으며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입이란 화복이 나오는 중요한 기관이니 진실로 말조심을 못하면 재해가 반드시 닥쳐 올 뿐 아니라 비록 재주와 행위가 남보다 나은 자라 하더라도 진실하고 완전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 하여 말조심을 중요한 공부를 삼았으므로 평생 동안 조그만 말의 실수도 없었다.
남의 선함을 보면 비록 작으나 반드시 찬양하고 남을 악함을 보면 비록 미세하나 반드시 숨겨 주셨으며 친구에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차근차근 깨우쳐 주시고 곧바로 판단하거나 엄하게 꾸짖는 일이 없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기꺼이 복종하여 감화되는 자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조정의 득실・이치의 잘못이나 인물의 잘 잘못에 관해서는 종신토록 입에 올리지 아니하셨다. 천부의 바탕이 온유하고 전아(典雅) 단정하고 우아함.
하여 입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이 보였으나 지조는 확고하여 의리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일도양단(一刀兩斷) 어떤 일을 머뭇거리지 않고 선뜻 결정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만년에는 항상 자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나이 늙어서 너희들의 귀와 눈에만 의지하여 바깥 소식을 듣고 있으니 너희들이 나에게 알려 주지 않을 수는 없으나 도리에 어긋나고 복잡하여 듣기 거북한 말은 조심하여 말하지 말라. 내가 듣기를 원하는 바가 아니니라.”라고 하였다.
공의 성품을 잘 나타낸 글 중에 ‘지팡이에 쓴 명(杖銘)’이 있다.
우연히 공이 지팡이 하나를 얻었는데 절반은 꾸불꾸불하고 절반은 곧았다. 남들이 이 지팡이를 보고 우습다고 놀렸는데 공이 명(銘)을 지어 해명을 하였다.
저 지팡이의 곧음이여, 나의 곧은 행실을 보아 충당해 가리라.
저 지팡이의 굽음이여, 나의 굽은 행실을 보아 징계하리라.
굽고 곧은 것은 저 지팡이에 있고 충당하고 징계함은 내 마음에 있으니 나의 위경(危境)을 부지해 주는 책임도 크거니와 나의 굽은 것을 곧게 잡아주는 공 또한 크도다.
지팡이여 지팡이여!
동지(動止)를 함께 하세
지팡이여 지팡이여!
사생(死生)을 함께 하세. 彼杖祉直兮(피장지직혜) 視我直而充之彼杖之曲兮(시아직이충지피장지곡혜) 視我曲而徵之曲兮(시아곡이징지곡혜) 直兮在彼杖兮(직혜재피장혜) 充之徵之在我膣兮(충지징지재아질혜) 扶我之危責旣大直我之曲功亦夥(부아지위책기대직아지곡공역과) 杖呼杖呼偕動止(장호장호해동지) 杖呼杖呼共生死(장호장호공생사).
4. 남긴 글
공은 많은 글을 공의 문집인 입재유고(立齋遺稿)에 남겼다. 그 중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이 되는 계치록서(戒癡錄序)와 송여계(送女戒), 목인계약조(睦婣稧約條)가 있다.
계치록서(戒癡錄序)란 어리석음을 경계하도록 여기에 제목을 붙인 것으로 이는 옛날 어른들이 말씀한 차서치(借書癡), 곧 책을 빌려주는 어리석음이란 뜻을 적용시킨 것이다.
공은 이 계치록서에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책을 빌려주는 일의 중요함을 후손들에게 일깨워 주셨다.
“아 아, 우리 가문에서는 서책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선고께서(先考 慕菴公-稜)께서 만년에 모두 맏 아드님(啓胤)께 주시고 불초로 하여금 공책 한 권을 만들고 권질(卷帙)의 목록을 갖추어 쓰게 하시고, 병중에 부축을 받아 않으시더니 책 머리에다가 단단히 보관하여 빌려주지 말 것이며, 애호하면서 학업을 부지런히 하라’ 는 뜻의 경계의 말씀을 손수 쓰시어 정영 되풀이 하여 당부하시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여러 권의 책과 낙질된 책 그리고 근년 들어 갖추어 진 것과 동방사적(東方事蹟) 등 사천장(思泉庄)에 있던 책 십수 권을 불초에게 주시었다.
불초 스스로 생각할 적에 ‘종가에 보관되어 있는 책을 내가 빌려 보겠다면 종손이 완강히 고집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나 혹시라도 불초로 말미암아 산실되는 폐단이 있게 된다면 이는 불초의 죄가 더 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이러한 경위로 십분 애를 써서 약간 권의 책을 장만하여 아자(兒子-속헌공)에게 전속(專屬) 시키는 것이니 모름지기 내가 윗대를 체득(體得)했던 뜻을 체득하여 비록 친족관계가 한 집안이고 정분이 관포(管鮑)와 같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함부로 빌려주지 말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 유폐(遺弊)가 높은 집에 묶어 둘 따름으로 방치함에 이르지 않게 하라. 그렇게 한다면 아마 ‘나도 자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니 경계 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병자년 숙종 22년(1696) 2월 1일
사천의 오작당(晤昨堂)에서 쓰다.『풍성세고(豊城世稿)』, 신흥인쇄(주), 2003, 456∼458쪽.
다음은 딸을 시집보낼 때 훈계하는 글로 송여계(送女戒)가 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여자가 시집가면 부모와 형제를 멀리한다.’하였으니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시집에 가거든 공경하고 공경하라. 시부모를 공경으로 섬기기를 친부모를 섬기듯이 하고 남편을 공경으로 대접하기를 높은 손님을 대접하듯이 하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근신하여 종신토록 게을리 아니하면 네 부모들 마음을 위로함이 될 것이다.”(후략) 위의 책, 461~462쪽.
한 편, 공은 일찍이 말씀하기를“관혼상제는 예 중에도 큰 것인데 없으면 예를 갖추기 어렵다.”하고 드디어 집안들과 약정하고 각각 재물과 곡식을 조금씩 출연하여 길흉사의 용도에 대비하였고, 또 내외종들과 친목계를 조직하여 좋은 명절이면 서로 모여 우호를 강구하니 보는 사람들이 화수고사(花樹故事)와 비기었다. 이를 위해 쓴 글이 목인계약조(睦婣稧約條)인데 그 취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친척 간에 돈목하는 것은 정리 상 당연한 것이나 여러 의견을 결속하여 하나로 만들고 명절 때 모이는 것은 계가 아니면 어렵기로 이 계를 만드는 바이다.
우리는 안팎으로 아주 가까운 친척이 적고, 또 제각기 일에 얽매여 일제히 모이기가 어려우니 혹은 선조의 사당에 시향을 올리는 날을 계기로 삼기로 하고, 혹은 명절의 아무 연고 없는 때를 당하거든 한자리에 모여 돈목에 관한 신의(信義)를 닦도록 한다.” 위의 책, 463쪽.
공은 문장을 짓는 데는 뜻과 생각이 통달되도록 쉬운 방법을 취하고 어려운 문구는 숭상하지 않았으며 시작도 또한 깨끗하여 아담하고 우아한 정취가 있었다.
이러한 공의 문장은 곧 글로 표현되는데 특히 당쟁으로 혼탁한 조정에 벼슬하기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 연구에 힘을 기울인 공의 마음이 제목과 내용을 통해 담담하게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거견회(閒居遣懷)>는 야인의 한가로운 생활 속에서도 당쟁을 일삼는 조정을 염려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한 내용이다.
한거견회(閑居遣懷) - 한가롭게 사는 회포를 풀다.
한거역일사(閑居亦一事) 한가로이 살아감도 하나의 일이거니
하필간조시(何必干朝市) 어이 꼭 도시에서만 살아야 되리오.
신미계산정(信美溪山靜)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 속에
무쟁시락지(無爭是樂地) 다툼이 없으니 낙원이어라.
배수수불거(排愁愁不去) 근심을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아
호주주지래(呼酒酒遲來) 술을 받아 오랬더니 더디게 오는 구나.
주영문상암(晝永門常암) 기나긴 대낮에 문은 항상 닫혔는데
인희장벽태(人稀長碧苔) 사람왕래 드물고 이끼만이 자라네.
제월미풍동(霽月微風動) 달 밝은 밤에 산들바람 불어오고
상운옥우청(祥雲玉宇晴) 상서로운 구름에 하늘은 개여 있는데
유인상대좌(幽人相對坐) 숨어 사는 사람과 마주앉아 있으니
청취익한정(淸趣益閑情) 청정(淸淨)한 취미는 마음 더욱 한가해.
우음(偶吟) - 우연히 읊다
녹수앵조어(綠樹鶯鳥語) 푸른 나무 꾀꼬리는 아침에 지껄이고
청산야견제(靑山鵑夜啼) 파란 산 소쩍새는 밤마다 우는데
청산흥녹수(靑山興綠樹) 그 파란 산과 푸른 나무가
구시옥동서(俱是屋東西) 오두막집 동서에 둘리어 있네. 위의 책, 413~414쪽.
하늘이 내린 효자에 학문을 통한 밝고 어진 마음으로 형제와 친척과 이웃들에게 참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 공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참 스승의 모습으로 늘 살아 계신다.
【참고문헌】
1.『국역(國譯) 풍성세고(豊成世稿)』중「입재유고(立齋遺稿)」
2.『상주시사(尙州市史)』
3.『한국민족백과대사전』
4.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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