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난, 의승대장(義勝大將) 남암(南巖) 손경석(孫景錫)
금 중 현
손경석(孫景錫; 1669, 현종 10~1732, 영조 8)은 조선 영조 년간에 일어났던 무신난에 상주 의병의 의승대장(義勝大將)으로 추대되어 국난을 극복하는데 공을 세운 상주의 지도자이다.
상주 청리면 율리촌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 손씨 야촌(野村) 손만웅(孫萬雄)의 아들로 자는 중백(仲百)이요 남암(南巖)은 그의 호이다. 이 집안이 여기에서 문호를 이루게 된 것은 상산 김씨 상산군(商山君)파 파조인 김득제(金得齊)의 사위로 일찍이 고려 말에 상주로 들어와 정착한 진양정씨 정의생(鄭義生)의 후손으로서, 조선 명종·선조 년간에 문명을 얻은 바 있는 복재(復齋) 정국성(鄭國成)의 사위인 손당(孫糖; 1567~1629)이 처향을 따라서 들어와 자리 잡은 것이 그 연원이다.
입향조 손당은 호를 정옹(鼎翁)이라 하는데 월천 조목의 문인으로 광해군 년간에 진사로 퇴도학맥을 이었고 그의 자 야촌(野村) 손만웅(孫萬雄; 1643~1712)은 사헌부 장령에 이어 나주목사와 경주부윤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환로를 역임하여 가문의 이름을 빛나게 하였다.
이어서 야촌의 아들인 남암(南巖) 본인 또한 관료를 역임하고 당대의 상주 지도자로 대를 이으니 상주에 들어온 지 3대에 불과하지만, 화벌 경주 손씨 밤갓 마을의 문호를 열어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남암공은 1696년(숙종 22) 문과에 올라 춘추관의 편수관을 거쳐 울진군수와 강릉진관병마절제부위에 이어 예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영조시대 무신난(戊申亂)에 의승대장으로 참여한 유공으로 통훈대부로 승차하어 능주목사(綾州牧使 ; 현재의 전남 화순)를 역임하였다.
무신난은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전란으로 일명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한다. 1565년(명종 20) 영남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정계를 주도하여 집권하였던 정치세력은 1623년 기호 지방에 서인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인조반정을 계기로 하여 점차 멀어져, 이후로부터 전개되는 정치사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와 같은 정치적 배경에서 정파 간에 세력다툼이 거듭된 가운데 경종 임금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부터 건강을 구실로 하여 임금과 다른 정파였던 거대한 노론 벽파의 지원을 받아, 혈통으로는 왕위에 오르기 어려운 무수리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영조 임금이 즉위하기 전 군호)을 왕세자로 삼고 경종 이후의 정치체재를 구상하였다. 불행이도 경종은 집권 4년 만에 급사하고 뜻한 데로 영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집권을 하고도 자기 신분에 대한 자괴감(自愧感)은 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무신난의 직접적 동기는 경종의 사인 문제였다. 무신난을 일으킨 중심 인물이었던 이인좌는 난을 명분으로 하여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것이고, 그 배후의 인물이 영조와 그를 지원하는 정파로 지목하고, 영조 집권 초기에 그를 축출하여 핍박받았던 해묵은 원한을 품어 권력을 잡고자 하는 것이 통설이다.
반란의 주도 세력은 청주를 중심으로 한 이인좌 일파였지만 경기권과 오랜세월 동안 정계 진출이 막혀있어 울분을 품고 있었던 영남의 세력들과 지방토호들이 내통하고, 전국 각처에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과 경종을 독살한 장본인이라는 내용의 괘서(대자보)를 붙이는 등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 일당들은 삽시간에 청주 관아를 점령하고 도성을 향하여 용인까지 진격하였다가 조정의 진압군 출동으로 마침내 궤멸되었다.
그의 동생 이웅좌와 정희량은 그들의 세력 근거지였던 경상도 안음에서 거병(擧兵)을 하여 하루만에 안음과 거창을 함락한 뒤 합천과 삼가 등지를 점령하여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각 고을의 관군에 의하여 격파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조정에서는 경상도에 박사수[朴師洙, 1686(숙종 12)∼1739(영조 15)]를 안무사(按撫使)로 하고, 소모사(召募使)에는 상주 중모 출신인 황익재[黃翼再, 1682(숙종 8)∼1747(영조 23)]를 임명하여 진압군으로 대처하였다.
이에 따라 상주에서도 즉각적인 진압체재를 갖추는 창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니, 이른바 영조시대 상주 무신창의이다. 그 당시 상주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최일선에 있는 황익재 소모사가 상주 출신이라는 것과, 남인이 주도하는 영남 전체의 정치 환경으로 일부 반란 세력에 영합하였다는 오해를 살수도 있다는 것인 만큼, 국난에 대처하는 기민한 정치적 결단으로 지역의 의지를 표출하였던 것이다.
창의군 주동 인물은 흥양 이씨를 중심으로 하는 옥성서원에 관계하는 사림들이었지만 중모의 수봉 황씨, 낙동의 장천 조씨, 읍내의 봉대 강씨, 내서의 넘바우 성씨, 공성의 송씨, 등등 정치적인 당색을 망라하여 결성하였는데 그 중심 인물로 남암 손경석을 의승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당시 참여한 문벌들의 면면은 대개 오래도록 상주에 세거한 벌족들인데 비하여 남암의 가문은 조부 이하 3대째 세거한지가 일천하였음에도 남암을 창의군의 대장으로 추대하였다는 것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남암의 조부와 부형의 화려한 행적과 당대 상주 향촌의 여론을 주도하는 우복 정경세 가문이 진외가이며, 남암 자신 또한 일찍이 울진 고을의 목민관을 역임하였으며 강릉의 진관에서 병마를 책임지는 군에 관한 관력(官歷)이 있었다는 등 가문과 개인의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여 추대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나라를 어지럽혔던 무신정변에 대항하고자 하는 결의에 찬 상주 창의군은 반란군이 이미 경상도 하도에서 궤멸되므로 하여 실제로 대항전을 하지도 않은 채 평정되었다.
무신난이 일어날 당시만 하드라도 상주 향촌의 지배계급 인사들 간에는 남인 또는 노론이라는 당색으로 서로가 갈라져 격렬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변란으로 나라의 중심이 무너지고 그 와중에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게 된다는 사리를 통찰한 상주 향촌 지도자들의 일치된 마음은 순수한 우국충정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민심을 통할하는 인물이 바로 남암 손경석이었다는 것은 공의 위상과 지도력을 짐작하게 한다.
난이 평정되고 난 후 남암공에게는 특전으로 통훈대부로 승차하여 능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정의 대신들이 영조 임금에게 건의한 기유년(己酉年, 1729) 6월 30일 연설(筵說)의 내용을 여기에 옮겨 보면,
우의정 이집(李集)과 좌의정 이태좌(李台佐)가 진달하였다.
작년 변란 시에 안동의 류승현과 상주의 손경석이 동반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적을 선양하는 것으로 류승현은 작은 고을에 수령으로 제수하셨고 손경석은 남쪽의 어떤 고을에 수령으로 제수 하셨습니다만, 공적에 비하여 다소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유공한 사람들의 행적을 멀리 밖의 사람들로부터 들으시고, 누구인가 공적의 내용을 감열(感悅)하여 종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영남은 불행이도 비록 융적이 나온 지역이지만 대적하여 창의한 인물도 또한 많은 고장입니다. 그 창의를 주창한 인물들 중에 두드러지게 인물을 드러내는 인물도 있지만 날자가 지나면서 차츰 그 공적 사실이 잊어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뢰옵는 바 이만부 또한 잊혀져가는 인물주에 한 사람이오니 이 사람도 고루 등용하는 은혜를 주시기 바라옵고 전하의 분부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으니, 남암공에 대하여는 공적에 비하여 훈격이 낮다고 하는 거와 아울러 당시에 상주 출신으로 전국적 문호(文豪)로 추앙하였던 식산 이만부[李萬敷, 1664(현종 5)∼1732(영조 8)]도 난을 평정하는데 음으로 양으로 공적이 있었음으로 그에 대한 공적에 대하여도 보살펴 주십사는 내용이다.
남암이 창의군을 이끌면서 지역에서 어른으로 존경하였던 식산에게(무신난 당시 식산은 65세의 고령이었다) 수시로 자문을 구하였던 것은 사실이고, 식산 또한 아들과 아우를 창의군 막료로 활동하게 하였다는 문적이 남아있다.
이 건의에 대한 회답으로 식산에게 6품직의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한 시대 국난에 대처하는 지역의 지도자로서 선배 어른을 존경하고 그 어른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아 맡은바 그 단체를 원만하게 운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진리요 윤리이며 남암공이야 말로 그 윤리를 실행한 지도자였음을 알게 한다.
남암이 남긴 유고에는 식산 이만부와 백화재 황익재를 비롯하여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효종 4)∼1733(영조 9)],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숙종 5)∼1760(영조 36)] 등 당대에 이름난 현사들과 교유한 문적이 있다.
특별히 능주목사 재임 시에 호남지역의 인사들과도 교유의 폭이 넓었고, 공이 남긴 글 중에는 스스로를 조신(操身)하는 자경(自警)의 글이 많은데 그 하나를 여기에 소개 한다.
自飭(자칙) 내 스스로 늬우치고 경계하다.
尤人不可天何怨(우인불가천하원) 사람이 하늘에 대하여 어떤 원망도 하지 말고
自愧平生行未純(자괴평샹행미순) 한평생 순박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지내야 한다
橫逆由來須莫報(횡역유래수막보) 나쁜일이 있어도 모름지기 보복을 생각하지 말고
要工亶在反諸身(요공단재반제신) 진실됨은 자기 스스로를 반성함에 있다.
위의 자경문에 나타나듯이 남암의 일생은 나라의 부름을 받은 관료로서, 지역을 선도하는 지도자로서, 항상 조신하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인격을 갖추어 남들이 스스로 따라오게 한 현사였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어 이 시대 우리 후학들에게 귀감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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