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목사(尙州牧使) 민종렬(閔種烈)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조선왕조에서 수령(守令)은 국왕(國王)을 대신해서 지방군현을 통치하는 왕권(王權)의 대리인(代理人)이었다.
18세기에는 수령권이 더욱 강화되면서 제지사족들이 가지고 있던 향촌사회지배권한의 많은 부분이 수령에게로 이양되었기 때문에 수령이 학교운영에도 직접 개입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삼정(三政) 등 군현의 부세운영 구조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중간층과 지배층에 의한 수탈이 심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19세기의 수령은 부세수탈자로 이해되거나, 양반관료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행정적 보조기관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수령의 부정과 부패는 농민항쟁의 원인이 되었고, 그래서 농민항쟁이 마치 수령(守令)과 농민(農民)들의 대결구조로 인식되어 갔다. 그러나 삼정(三政)폐단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한 일부 수령들은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여서 국가와 농민 양측에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수령의 행적이나 활동은 관찬(官撰)사서(史書)나 수령을 역임했던 인물이 남긴 개인문집(個人文集) 등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으나 그러한 문헌이 많지 않다. 수령재임시기의 업적을 기록한 자료의 하나로, 19세기말 상주목사로 재임했던 민종렬(閔種烈)의『상주사례(尙州事例)』를 들 수 있다.
민종렬은 1875년 노성현감(魯城縣監)을 시작으로 현풍(玄風) · 양산(梁山) · 밀양(密陽) · 상주(尙州) · 남원(南原) · 나주(羅州) · 담양(潭陽) 등 8개 군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상주사례(尙州事例)』는 1885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민종렬이 재임기간을 통해서 개선한 군현의 폐단을 기록한 구폐절목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상주사례(尙州事例)』를 통해서 당시 상주목사 민종렬이 어떤 시책을 통해서 어떤 구폐를 개선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민종렬(閔種烈)의 생애
민종렬(1831~1899)은 여흥민씨(驪興閔氏) 공목공파(恭穆公派) 25세손이며, 파조인 민효증(閔孝曾)의 11대손이다. 아버지는 승세(承世), 할아버지는 사응(師膺)이며, 자는 무경(懋卿), 호는 지담(芝潭)이다.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과 승지(承旨)를 지낸 민종묵(閔種默)이 친형이다.
민종렬의 세거지는 직산(稷山)이며, 누구의 문하에서 수학했는지는 알 수 없다.
1865년(고종 2)에 식년 생원시에 급제해서, 1869년(고종 6)에 경릉참봉(景陵參奉), 1871년(고종 8)에 제용감(濟用監)봉사(奉事) ·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 1873년(고종 10)에 예빈시(禮賓寺)직장(直長), 1874년(고종 11)에 형조좌랑(刑曹佐郞), 1875년(고종 12) 형조정랑(刑曹正郞) · 노성현감(魯城縣監), 1880년(고종 17)에 현풍현감(玄風縣監), 1882년(고종 19)에 양산군수(梁山郡守), 1884년(고종 21)에 밀양부사(密陽府使), 1885년(고종 22) 3월에 상주목사(尙州牧使), 1890년(고종 27)에 남원부사(南原府使), 1893년(고종 30)에 나주목사(羅州牧使), 1894년(고종 31)에 동부승지(同副承旨) ·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 ·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 1895년 담양군수(潭陽郡守)를 역임하였다.
민종렬의 출사방법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청선고(淸選考)』에 ‘음목사(陰牧使)’라고 표시된 것과 생원시 입격 이후 대과 급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볼 때 음관(蔭官) 출신으로 추정된다.
민종렬은 1875년 노성현감에 제수된 이후 1895년 의원면직(依願免職)할 때까지 줄 곳 지방관으로 제수되었다. 특히 상주목사로 약 5년 2개월 동안 재임하였는데, 이것은 19세기 상주목사의 평균재임기간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긴 기간이었다.
『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에 기록된 상주목사는 모두 46명이고, 이들의 평균재임기간은 1년 11개월 이다. 이 중에서 2년을 채우지 못한 인물이 58.7%이었고, 4년 이상 장기 재임한 분은 8.7%에 불과했다.
환로의 대부분을 지방관으로 있었던 민종렬은 가는 곳마다 훌륭하게 목민관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1878년(고종 15)에 전라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어윤중(魚允中)이,
“노성현감 민종렬은 일을 시행하고 조치를 취함에 대부분 헤아려 잘 생각하여 판결하니 밝고 적절하다고 할 만합니다.”
라고 하였고, 같은 해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이건창(李建昌)도,
“노성현감 민종렬은 진휼하는 것이 이미 으뜸에 있으니 실혜(實惠)를 볼 수 있습니다.”
라고 평가하였다.
민종렬이 노성현감으로 5년 동안 재임하였다. 초임지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다는 점과 그 당시 파견된 2명의 암행어사가 민종렬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점은 민종렬이 초임(初任)임에도 불구하고 군현에서 치적을 쌓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양산군수로 있을 때도 수령들의 치적을 묻는 고종에게 경상감사 조강하(趙康夏)가 양산군수 민종렬이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중앙에서는 민종렬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임지(赴任地)에서 장기간 근무하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종렬이 상주에 부임한 것은 1885년(고종 22) 4월 17일이었다. 3월 14일에 상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임지에 온 것은 약 1개월 후였다.
당시 상주는 임술농민항쟁을 격렬하게 겪은 뒤였고, 지역이 넓기 때문에 유능한 목민관이 와야할 처지였다. 그런데 민종렬이 발탁된 것이다. 왜 민종렬이었는가? 는 이조(吏曹)의 계문에서 잘 드러나 있다.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금 차출해야 하는데, 본주는 영남의 큰 고을로 인구가 많고 땅이 커서 평소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일컬어지고 있으니, 가려서 차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도(道) 및 다른 도의 성적(聲績)이 있는 수령을 이미 삭수(朔數)가 찾거나 찾지 못한 것에 관계없이 모두 의망(擬望)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상주에 부임한 민종렬 목사가 시행한 읍정(邑政)의 개선책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을까?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당시 백성들의 실제 반응을 판단하기가 어려우나, 기록으로 남아있는 선정비(善政碑)의 내용과 관찰사(觀察使)의 평가 등을 통해서 그 대략적인 반응을 알 수 있다.
1889년(고종 26)에 경상감사 김명진(金明鎭)이 올린 장계의 내용을 보면,
“상주목사 민종렬은 5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데 힘써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게 일을 처리하고 공평하게 송사(訟事)를 듣고 심리하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체납되어 온 조세를 찾아내 완납시킴에 있어서는 익숙하고 민첩하게 일을 처리하였고, 흉년이 든 봄에 진휼하는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은혜를 극진히 베풀어 창고의 양식을 다 꺼내주고 녹봉을 많이 덜어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학교를 세우고 농사에 힘쓰도록 독려하고 책임지우니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방해하고 소란을 피우는 무리를 제거하고 불량한 행위를 강력히 단속하니 호활(豪猾)한 무리들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온갖 일이 다 잘 거행되어 온 경내가 편안하고 고요하였는데 임기 만료가 가까워지니, 백성들이 모두 유임(留任)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수한 치적이 이미 드러나 고을의 일을 이루도록 책임지우는 것이 합당하니, 특별히 잉임(仍任)을 허락하여 끝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경상감사 김명진의 주청에 따라 민종렬은 상주목사에 잉임되었으나, 그러부터 7개월만에 남원부사로 이임되었다. 민종렬이 남원부사로 차출된 것은 동부승지 정이섭(丁理燮)이 올린 계문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를 지금 차출하여야 하는데, 본부는 호남의 큰 고을로 물산이 많고 땅이 커서 평소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왔습니다. 그런만큼 가려 차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도 및 다른 도의 명성과 치적이 있으면서 이미 임기가 만료되었거나 아직 임기가 만료되지 않은 수령을 모두 의망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정이섭(丁理燮)의 계문은 남원부사로 차출할 인사로 명성과 치적이 있는 수령을 의망하자고 한 것이다. 남원 역시 상주와 마찬가지로 읍의 규모가 크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경력(經歷)과 실무(實務)능력을 모두 갖춘 인물을 수령으로 보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민종렬이 남원부사로 이임된 것은 상주목사로 차출될 때와 같은 이유였다고 본다.
민종렬 목사에 대한 선정비(善政碑)는 민종렬이 목사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에 건립된 것이다. 그리고 선정비에 대한 통념상의 일들을 고려하면 이드 선정비 내용만으로 민종렬에 대한 평가의 객관적 지표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경상감사가 잉임을 주청한 장계나 ‘명성과 치적이 있는’인사를 차출하자고 한 동부승지가 주청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민종렬의 치적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민종렬은 1895년 의원면직할 때까지 나주목사, 호남소모사, 호남초토사, 담양군수를 역임하였다.
3. 목민관으로서의 업무수행
1) 상주사례(尙州事例)
상주사례는 1888년 당시 상주목사 민종렬이 작성한 구폐절목(救弊節目)으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읍사례(邑事例)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지방연구에 활용되는 읍사례에는 군현(郡縣) 하부조직의 회계내역이나 민호(民戶), 전결(田結)의 현황이 정리되어 있으나 상주사례는 읍사 전반에 걸친 구체적인 운영내역을 다루고 있다.
“본주는 경상우도 상류 지역에 처해서 땅이 넓고 커서 가히 웅읍(雄邑)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런데 근래에 여러 가지 폐단이 거듭 생겼다. 군정, 전정, 환정으로 말하자면 임술년(1862)에 한번 바로 잡은 후로 점점 해이해져 수습할 수 없었다. 그래서 허다한 폐단의 근원이 어디로 가든지 백성들을 좀먹고 읍을 해치는 단서가 되었다. 비유하자면 온 몸에 병이 나서 평범한 의사는 어쩔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렇듯 민종렬은『상주사례』에서 1862년에 한번 교정(矯正)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상주지역에 만연해 있던 폐단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신이 시행한 개선책과 그것을 시행한 과정, 개선책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적고 있다.
『상주사례』는 총 22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세목을 살펴보면, ① 전정의 폐단 ② 군정의 폐단 ③ 환정의 폐단 ④ 읍채(邑債)의 미수문제 ⑤포군(砲軍)의 운영비 문제 ⑥ 별효사(別驍士)의 차정과 삭료에 관한 문제 ⑦ 수성군관(守城軍官)의 차정(差定) 및 삭료(朔料)에 관한 문제 ⑧ 이서층(吏胥層)에 의한 네가지 폐단 ⑨ 반민(班民)의 폐단 ⑩ 사도(私屠)의 폐단 ⑪ 직첩(職帖) 매매의 폐단 ⑫ 통영하납미(統營下納米)의 수취와 운송에 관련된 폐단 ⑬ 진영직책(鎭營職責)에 의한 폐해 ⑭ 외동진두(外東津頭)의 역(役) 부담문제 ⑮ 고마가(雇馬價)의 폐단 ⑯ 사직단(社稷壇) 려제단(厲祭壇)의 보수문제 ⑰ 교궁(校宮)과 서원(書院)의 경비 ⑱ 향교(鄕校) 전답(田畓)문제 ⑲ 서원(書院) 충의단(忠義壇) 향사(饗祀) 시 필요 경비문제 ⑳ 성첩(城堞)의 수리문제 (21) 장대(將臺) 수리문제 (22) 서산서원(西山書院) 유허비(遺墟碑)를 세우는 문제이다.
(1) 재정(財政)관련 폐단과 개선책
『상주사례』의 20여개 조목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이 재정과 관련된 항목이다. 상주목사로 부임한 민종렬이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점은 상당한 양의 부세(賦稅)를 수봉(收捧)하는 문제와, 이 과정에서 생기는 각종 폐단의 개선이었다.
『상주사례』의 항목 중에서 재정운영과 관련된 폐단은 읍채(邑債)미수문제, 통영하납미(統營下納米)의 징수와 운영문제, 외동 진두(外東津頭)의 역(役) 부담문제, 고마비(雇馬價)의 운용문제 등이었다.
① 읍채邑債) 미수문제
읍채(邑債)는 지방관청이 출자한 금융업무로 일종의 식리(殖利)활동을 뜻한다. 그리고 부채층은 관직 및 품직자에서 공사천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지방관청의 읍채(邑債)는 삼정(三政)과는 분리된 다른 자본으로 운영 되었으며, 그 운영 수입으로 다양한 재정 수요를 충당했다. 이러한 읍채가 미수되면 지방재정에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읍채의 폐단은 한 가지가 아니니 민고(民庫)에서 추가로 지출하는 것과 암행어사가 역참에서 비용을 쓰는 것, 경영(京營)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으로 가는 곳마다 상납(上納) 중에서 나대(挪貸)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유이(流伊)가 점점 쌓여 19,000여 냥이 되었다. 상납이 부족해졌는데 관에서 범한 것도 아니고 또한 아전들이 포음을 낸 것도 아니면, 결국은 민간의 예산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상주의 읍채 중에서 미수된 것이 19,000여 냥이다. 민종렬은 이 읍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회(民會)를 열어 19,000여 냥 중에서 1,000냥은 관(官)에서 내어주기로 하고 2,000냥은 이청(吏廳)에서 담당하게 하고, 1,200 냥은 통영미가 부족한데에 보태어 내는 돈으로 삭감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은 14,000여 냥은 배결전(排結錢)을 획급(劃給)하여 갚게 하였다.
민종렬이 이 읍채의 해결과정에서 민회(民會)를 열고 민의(民意)를 반영했다는 것이 특기할 일이다.
② 통영하납미(統營下納米) 폐단
‘통영하납미’는 고을의 대동미(大同米)를 중앙정부에 바치지 않고 통영으로 하납하는 곡식을 뜻한다. 조선 후기 상주의 통영하납미는 총 1,200석으로 나라전체 통영곡(統營穀)의 10%에 해당되는 양이기 때문에 1862년에 일어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 중의 하나이다.
『상주사례』를 보면, 상주에서 통영으로 하납하는 쌀 가운데 600석은 돈으로 대신하였고, 600석은 본색(本色)으로 사서 납부하였는데 1석에 12냥이 정해진 법규였다. 그런데 흉년이 들면, 1석의 값이 17~20냥까지 올라서 이 때문에 하납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잦았다. 또한 통교가 감독을 칭하고 봄부터 와서 몇 달을 머물렀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이 많게는 천 여 금이 넘었다.
1석 당 정해진 가격이 있는데, 풍흉에 따라 미가(米價)에 차이가 생기게 되면서 관민이 서로 대립하게 된다. 또한 통영곡의 수봉이 지체되면 감독을 명분으로 올라온 통교가 머무르는 기간이 늘어나고 이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상주사례』가 지목한 통영하납미의 폐단이었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1886년 겨울 이후로 정해진 배결전(排結錢)과 시장의 쌀 가격을 비교하고 1되당 운임을 정해서 납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7년 정월에 창고를 열고 직접 수봉하였다.
민종렬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 백성들이 모두 가져오는 것을 즐겁게 여겨서 소로 운반하고 또는 지고 와서 600석 쌀이 금방 마련되었다고 기뻐하였다.
③ 외동 진두(外東津頭)에서의 접대문제
외동 진두(外東津頭)는 낙동강 상류의 역참에 있는 큰 동리였다. 이 동리는 낙동나루의 초입에 있었기 때문에 외국 사신의 왕래, 통영미의 수봉, 진예읍속(鎭隸邑屬)과 경영포교(京營捕校)의 시중 등 그 폐단이 컸다. 게다가 매년 염선수세가(鹽船收稅價)가 650냥씩 복정(卜定)되어 포군의 급료로 제공하고, 진본부(鎭本府)와 향교의 장염 40석을 책임지고 납부하기도 하였다. 이때 매번 납부하는 것이 많게는 200금에 이르렀는데, 담당하는 존위(尊位)가 포흠(逋欠)할 경우는 1,000금이 넘었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1887년 겨울부터 존위(尊位)를 혁파하고 장사하는 백성 중에서 집강(執綱)과 감관(監官)을 임명하여 감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염세(鹽稅) 중 200냥을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진(鎭)이나 읍(邑), 서울에서 오는 졸병들을 따지는 것 없이 공무에 관계되는 것만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시행하게 하고 지나치게 시중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 과외로 쓰는 비용이 있으면 끝까지 적발하여 해당 관에서 받아내고, 감독자에게 책임을 지게 하였다.
④ 고마비(雇馬費)의 폐단
『상주사례』에서 지적된 고마비(雇馬費)의 폐단은 곧 고마청(雇馬廳) 운영에 관한 폐단이다. 고마청(雇馬廳)은 조선 후기에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迎送)에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상주에서도 각 면의 고마전(雇馬錢)과 고마답(雇馬畓)에서 매년 식리로 받은 도지를 수령 교체시 신구치행(新舊治行)하는 자본으로 하고 남은 돈은 면내의 공비로 쓰게 하였다.
이때 고마청의 운영을 담당하는 도감(都監)이 중간에서 허흠하는 것이 많아졌다. 고마청의 수입은 주로 수령이 교체할 때의 비용이나 면내에서 예비비로 사용되었는데, 도감의 허흠으로 고마청의 예산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필요한 비용을 백성들에게서 거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각 면 중에서 외서면과 내서면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특별히 외서면에 남아있는 논 22마지기와 내서면에 있는 논 25마지기를 팔아서 그 돈을 면(面)에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4할 이자를 취해 이러한 폐단을 바로 잡았다.
(2) 군사(軍事)관련 폐단과 개선책
『상주사례』에서 재정운영 못지않게 많은 비중을 치지하고 있는 항목은 군사(軍事)와 관련된 항목이다.
① 포군자비(砲軍資費)의 폐단
각 지방에 포군을 설치하는 것은 병인양요 이후 군비강화과정에서 크게 강조되었다. 상주의 포군도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1872년에 설치되었으며, 설치 당시 상주포군은 100명이었다.
“포군자비(砲軍資費)는 원래 수만여 금으로 수입과 지출이 각각 조목이 있었다. 을유년 부임한 이후에 문부(文簿)를 취고(取考)하니 공비전(公費錢)이 부족한 것이 1,500여 냥이 넘었다. 또 달마다 급료를 지급하는데 3/4는 굶주리고, 봄과 가을의 옷감은 2년동안 돈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곡식은 일체 병이 들었다. 때문에 그 본말(本末)을 캐보니, 포청(砲廳)에서 규정을 만들 때에 당초부터 공비전(公費錢)을 마련하지 않고, 매년 공원(公員), 유사(有司)무리들이 배용(排用)이라고 칭하면서 빚을 내니, 시장에서 계산하는 이자에 따라서 점점 불어나서 옷감값 및 요전(料錢)과 요미(料米)를 유용해서 썼다.
쌀에 대한 조목으로 말하면 각처의 도답(賭畓)이 여러 번 흉년을 겪어서 간혹 토사에 덮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해장배(該掌輩)가 몰래 스스로 허위로 사고를 보고하여 도곡(賭穀)이 점점 줄어드니 지방(支放)을 계속 이을 수가 없어서 새 도곡(賭穀)으로 전 날에 주지 못한 급료를 우선 주게 되니 이 때문에 돈과 곡식이 비어서 귀속(歸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1878년에 구황을 위해 마련했던 논 80두락을 방매한 돈 1,228냥과 을유년에 별도로 비치한 식리전(殖利錢) 120냥, 교구사획전(矯捄査劃錢) 1,152냥 등, 총 2,500 냥을 마련하였다.
이 가운데 1,982냥은 밀린 포군의 급료와 의자전(衣資錢) 등을 지급하고, 일정한 변리로 민간에 출부(出付)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서 포청 병사와 장무군관의 급료 및 공비소용조(公費所用條)를 마련하여 지급하였다. 남은 돈 118냥은 병사와 장무군관에게 출부하고 식리조는 전사의 배용공비(排用公費)로 입부(入付)하게 하였다.
그 결과 포군의 급료가 밀리는 폐단이 개선되고 기존에 설치되었던 포군 100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② 별효사(別驍士) 혁파
별효사(別驍士)는 본래 총융청(摠戎廳)의 외영(外營)인 남양 · 파주 · 장단에 두었던 군병이다. 1878년(고종 15)에 경상우도 암행어사 이정래(李正來)의 별단에 “상주목의 별효사 50명을 읍진에 나누어 소속시키고서 급료를 주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게 하는 일”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상주에서는 1870년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초입자(抄入者)는 모두 읍내에 한잡(閑雜)한 부류들로 취산(聚散)이 일정하지 않고 폐단 만드는데 단서가 많다. 혹 일이 있어서 촌으로 나가면 관의 명령을 핑계삼아 토색질하거나 주구(誅求)하니 닭이나 개들도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업무를 익힌다고 하는 것은 창이나 칼 쓰는 두 가지에 불과한데 게을러서 나와 익히지도 않고 나태해져서 포기하니, 무예를 시험하면 아이들 장난하는 것 같다. 헛되이 급료와 재물을 허비하고 털끝만치도 실효가 없으니 이러한 폐단은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별효사의 초기 설치 목적은 무비(武備)에 관계된 것이었으나 18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군사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읍내에 소란을 일으키는 폐단이 되고 있었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1886년 겨울부터 별효사의 명색(名色)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구례(舊例)를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어서 읍외촌(邑外村)의 한정(閑丁) 중에 초선(抄選)하던 기존의 방식 대신에 3청 나졸 중에서 50명을 가려서 원액(元額)을 충당하게 하고 명칭을 별효대(別驍隊)라고 하였다.
③ 수성군관(守城軍官)
수성군관은 성을 지키는 군관을 말한다. 조선 전기 경상도에 축성된 읍성은 29개 처가 있었는데, 둘레로 보아 그 가운데 상주읍성이 경주읍성, 진주읍성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수성군관 일백 명은 옛날에 읍의 가까운 촌에서 건실한 장정 중에 택차(擇差)하여 급료를 주었다. 부역을 면제하여 성(城)을 순찰하면서 경비를 시킨 것은 진실로 외환을 염려하는 깊은 뜻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약은 백성 중에 조금 여유 있고 부유한 자가 연역(烟役) 회피의 수단으로 역이용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1886년 겨울부터 기존의 수성군관을 혁파하고 호포(號砲)로 환충(還充)하였다. 이어서 성(城)의 안팎에 사는 백성들 중에서 50명을 가려서 수성군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부역을 면제하고 급료를 지급한다는 점은 여전하였다.
이외에도 무너진 성첩(城堞)과 장대(將臺)를 보수하였다. 필요한 경비를 충당한 과정을 보면, 성첩(城堞)은 읍속영납전(邑贖營納錢)과 토색환추전(討索還推錢) 500냥을 얻어서 성의 수리비로 쓰고, 식리전(殖利錢)으로 장정을 고용하여 보수하였다.
장대(將臺)는 1885년 봄에 장대 뒷동산에 말라죽은 나무를 팔아서 수리하였다.
군현 내 기물의 수선과정에서 필요한 경비와 인력은 백성들을 통해 충당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서, 상주목사 민종렬은 재정운영상 일어나는 폐단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온 돈을 이용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3) 사회 관련 폐단과 개선책
① 이서층(吏胥層)의 폐단
상주목사 민종렬은 이서층의 폐단으로 4가지를 지목했는데, 첫째는 이액(吏額), 둘째는 이포(吏逋), 셋째는 이습(吏習), 넷째는 이임(吏任)이다.
“이액(吏額)은 거의 180명이 넘는데 임과(任窠)를 돌아보면 50여개에 불과하다. 조금 권력이 있는 자들은 부모형제가 겸병(兼倂)하는 데까지 이르니 진실로 의지할 데나 비호해주는 자 없으면 입안(入案)한지 십여년이 지나도 한 자리도 얻지 못한다.
이포(吏逋)는 아전 중에서 몰지각한 사람이 자신의 힘도 헤아리지 못하고 손을 써서 임명되기를 도모하니 기록한 문서나 돈 같은 것이 거의 만 가지나 되었다. 채무를 가지고 들어와서 포흠(逋欠)을 가지고 나가니 재산을 탕진하고서도 부족했다. 친척들에게 옮겨 배당하고 관청에서 징수하는데 까지 이르니 백성들에게 독이 흘러가고 읍의 폐단을 양성하였다. 시험삼아 김장섭(金璋燮)의 일을 보면, 3년 동안 맡아서 포흠한 것이 수 만 금이다. 어디로 가든지 공금을 끌어 쓰지 않은 적이 없어서 상납해야 할 공금까지 지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습(吏習)으로 말하면, 요로(要路)에 분경(奔競)은 방임(房任)에 불과한데 권리가 마음을 얽고 알력이 풍모(風貌)를 이루어서 이에 관에서 하는 정사가 막혀져서 읍의 정사가 거기에 따라서 타락하고 어지러워졌다.
이임(吏任)은 매번 파방(派房)할 때에 조종하고 취사를 오직 돈 생기는 데만 보고 으레 잘못된 것은 살피지 않고 앉아서 추한 비방을 불러서 이욕을 따라가고 다투는 것이 기강을 어지럽히는 데까지 이르러서 청렴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 모두 없어졌다.“
19세기에 이액(吏額)이 급증한 가장 큰 원인은 이직(吏職)이 경제적 이권을 보장받는 직임(職任)으로 특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주 역시 일부 이족들에 의해 이직이 세습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상주에서 이방(吏房)이나 호장(戶長)을 역임할 수 있었던 이족은『연조귀감』을 편찬한 월성이씨(月城李氏) 이외에 상산박씨(商山朴氏), 연안차씨(延安車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진양강씨(晉陽姜氏), 밀양박씨(密陽朴氏), 달성서씨(達成徐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등 8개 이족이었다. 이 가운데 상산박씨와 월성이씨가 가장 세력이 커서 이들 가문에 의해 요직이 독점되었다. 18세기 중반에 작성된『상주계유장적(尙州癸酉帳籍)』에 보면, 상주에서 향역을 담당한 성관은 모두 26개가 확인된다. 하지만 이 가운데 호장이나 기관(記官)과 같은 상급직역자를 배출한 성관은 상산박씨, 밀양손씨, 월성이씨, 김해김씨 4개 성관에 불과하다. 이 중 상산박씨가 가장 많은 직역자를 배출하였다. 이는 호장과 기관의 수가 한정된 상황에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성관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9세기에 이르면 향리(鄕吏)들의 차임(差任)과 관련하여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매임(賣任)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규정된 임뇌(任賂)를 받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상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해진 자리에 비해 이액이 3배 이상 많았기 때문에 매임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뇌물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임을 맡는 향리들은 매임에 소요된 경비를 채우기 위해 포흠을 지행하였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원액(元額)에서 죄가 있는 자는 도태시키는 방식으로 이액의 숫자를 줄였다. 이습의 경우, 서로 다투고 호소하는 일이 있으면 엄하게 단속해서 점점 커지는 것을 막았으며, 이임의 경우, 1885년 겨울 파방 때부터 영회(領會)하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였다.
② 양반(兩班)의 폐단
조선 전기까지 상주는 읍세(邑勢)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토성사족(土性士族)이 적어서 김(金) · 박(朴) · 주(朱) · 황(黃)이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15세기부터는 타읍출신 사족들이 혼인을 통하여 상주로 이거하였다. 따라서 상주에서 사족 중심의 향론 주도가 이루어진 것은 사족의 숫적 기반이 확대된 15세기 후반 이후였다.
상주지방의 재지사족은 난중(亂中)의 의병활동과 난후(亂後)의 전후 복구를 주도함으로써 향촌질서를 재편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서원의 건립과정에서 보는 바와 같은 사족 내부의 분열상이나 향소(鄕所)의 지위 격하, 그리고 향약의 기능 변화와 같은 현상도 보이고 있었다.
“본읍은 대개 사족지향(士族之鄕)인데 사족들의 취향이 바르지 못한 것(失正)이 많아서 인심이 점점 옛날과 같지 않고 있다. 향교와 서원을 빙자해서 나쁜 관습을 제거하지 못하고, 혹은 진부(鎭府)와 체결하여 청탁하는 단서가 많으니 혼인하거나 장례지낼 때 복정(卜定)하는 것이 등록(謄錄)을 이루었고, 마을간에 침탈하고 학정(虐政)하는 것이 예투(例套)를 이루었다. 부랑(浮浪)하고 패려(悖戾)한 무리가 양반의 세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고, 읍의 관리를 조롱하고 마음대로 협박해서 토색질하는 것을 마음으로 쾌하게 여기는 자가 손가락으로 이루 다 혜아릴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
③ 반민(班民)의 폐단
『상주사례』에서 지적하고 있는 반민의 폐단은 곧 토호의 폐단이라고 볼 수 있다. 노론 집권이후 상주의 재지사족들은 향교나 서원 등을 기반으로 향권을 유지하려 힘썼다. 그 과정에서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는 토호 (土豪)로 변질되는 사람도 많았다.
토호들이 무단으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은 1862년 임술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이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토호에 의한 수탈은 여전히 자행되었다. 이러한 점은 1867년(고종 4) 암행어사 박선수(朴瑄壽)가 올린 토호별단(土豪別單)에 잘 들어나 있다.
“상주 유학(幼學) 성숙원(成肅源)은 오랫동안 원임(院任)을 맡아 평민들을 호시탐탐 노렸다가 흑패(黑牌)로 잡아들이고 위협하여 토색(討索)하여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고치지 않았으며 패악(悖惡)한 짓을 하는 것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유학(幼學) 강복(姜福)은 평소 무인(武人)으로 거드름을 피워서 임술년에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을 때 자신의 집이 불탔습니다. 그러하다면 진실로 예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일신(日新)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한층 더 사람을 잡아들여 경내의 부민(富民)들을 공갈하고 위협하여 새로 만든 물건들을 많게는 140~150냥, 적게는 20~30냥을 징출(徵出)하여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 가득할 정도입니다.
유학(幼學) 정상경(鄭象庚)은 집안의 권세를 믿고 패악한 짓을 함이 아주 심합니다. 지친(至親)간에도 전답을 다투어 빼앗고 요민(饒民)을 위협하고 욱박질러 재화를 강제로 빼앗으며, 동네의 장정들을 위협하여 품삯도 주지 않고 부역을 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성숙원(成肅源) · 강복(姜福) · 정상경(鄭象庚)은 각각 창령성씨 · 진주강씨 · 진주정씨 모두 상주의 유력가문 출신이다. 이처럼 상주의 재지사족 중에는 자신들의 권세를 이용해서 개인적인 일에 복정(卜定)하는 등, 읍권을 조롱하고 마음대로 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폐단에 대해 상주목사 민종렬은 ‘작은 것을 따라 적발해서 법에 의해 징계하여 막고, 여러 방법으로 금하고 막는 방식으로 폐단에 대처하였다.
④ 직첩(職帖)의 폐단
직첩(職帖)은 관리 임명장으로 여기에서는 공명첩(空名帖)으로 인한 폐단을 말한다. 공명첩은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1882년(고종 19)에 고성의 유점사(楡岾寺) 3,000여 칸이 화재로 소실되자 공명첩을 만들어서 수리비용에 보태어 쓰게 한 것으로 보아, 19세기까지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감역(監役) 직첩은 군수(軍需)를 보충하는 일에서 나왔는데, 왕왕 이것을 빙자해서 백성을 침탈하는 폐단이 있었다. 심지어 부랑자나 항상 수입이 없는 무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여 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 · 동녕부 도정(東寧府) · 감찰 등의 공명직첩을 만들어서 미리 부유한 백성들의 이름을 쓰고 토가(討價)하기에 이르렀다. 많게는 혹 1~2,000금에 이르고, 적어도 5~600냥 이상이었다.
이렇듯『상주사례』에서 지적된 공명첩의 폐단은 공명첩을 중앙에서 매매하는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억지로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이에 상주목사 민종렬은 중앙의 묘당(廟堂)과 감영의 명령을 받아 공명직첩의 토가를 금지하고, 횡침(橫侵)하는 경우가 있으면 관청에 와서 호소하게 하였다. 사건의 규모가 크면 감영에 보고하여 징계하게 하고, 사건의 규모가 작으면 경내에서 쫒아내었는데 재임하는 3년 동안 금지한 것이 20여 차례가 넘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공명첩의 폐단이 300여 년이 지난 19세기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사직단(社稷壇)과 여제단(厲祭壇)을 수리하고, 향교의 옥동(玉洞) · 흥암서원(興巖書院), 충의단(忠義壇)을 1886년 봄부터 차례로 수선하였다. 이때 소요된 재물은 향내의 사림과 각 서원의 본손(本孫)들에게 권하여 스스로 마련하게 했다. 또한 망실된 향교전답을 다시 찾고, 서원과 충의단에서 향사할 때 쓰는 제물을 마련하는 절목을 작성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진 서산서원(西山書院)의 옛터에 단을 세우고 지키게 하였다.
4. 상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의 송덕비(頌德碑)
『상주목선생안』을 보면, 19세기 상주목사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1년 11개월이고, 임기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교체된 목사들이 58.7%였다. 그리고 약 30%의 목사들이 좌천(左遷) · 파출(派出)되었고, 이들 중 28.6%는 어사(御使)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리고 4년 이상 장기 재임한 목사는 고작 8.7%이었고, 이 중에 민종렬 목사는 5년2개월을 재임하였다.
따라서『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된 수령의 근무일수인 900일 혹은 1800일에 미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지방행정체제의 운영이 파행적인 경우가 많았음을 시사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종렬이『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을 넘어서 5년 2개월 동안 상주목사로 재임한 까닭은 1889년(고종 26)에 경상감사(慶尙監司) 김명진(金明鎭)이 올린 장계(狀啓)의 내용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게 일을 처리하고,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체납 조세를 받아드리고, 흉년에 구휼하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학교를 세워서 학문을 익히게 하고, 불량한 무리들을 과감하게 추방하는 등’의『상주사례(尙州事例)』개선을 위한 공로를 중앙정부가 높이 인정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민종렬이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로 자리를 옮기자, 당시 상주백성들이 민종렬의 치덕을 기리는 ‘고목백민후종렬송덕비(故牧伯閔侯種烈頌德碑)송덕비’를 건립하였으며, 처음 비석이 선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왕산공원에 있다.
또한 민종렬 상주목사를 그리는 비는 왕산공원 외에도, 상주의 임란북천전적지에 있는 태평루 뒤편에 ‘목사 민후 종렬 송덕비(牧使閔侯種烈頌德碑)’와 ‘목사 민후 종렬 영세불망비(牧使閔侯種烈永不忘碑)’를 비롯하여 총 3기가 그가 떠난 상주땅에 세워져 있다.
<고목백민후종렬송덕비(故牧伯閔侯種烈頌德碑)>
공(公)의 이름은 종렬(種烈)이고, 자(字)는 무경(武卿)이니, 관향은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여러 고을을 두루 맡아서 다스렸는데, 번번이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을유년(乙酉年, 1885, 고종 22) 4월 일에 밀성(密城)으로부터 이 고을에 옮겨 임명되어 청렴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즐거원하고 편안하게 되어 정사(政事)가 통달하고 인심이 화합하였는데, 임기가 차서 장차 떠나게 되자, 사민(士民)들이 길을 막고 소레의 멍에를 끌어당기며 유임할 것을 간청한 자가 천여 명을 헤아렸다.
공이 일찍이 배시법(排市法)으로 백성들에게 조세(租稅)를 내도록 권장하였는데, 처음에는 부잣집에서 시작하여 서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죽 잇닿게 통(統)을 만들고는 매 시장(市場)마다 민력(民力)이 미칠 수 있는가를 살피어 절박함을 미루어서 옮기었고, 납세(納稅)를 독촉하는 소란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기한 안에 스스로 납부하게 되었었다. 이보다 앞서는 면임배(面任輩)들이 백성들의 세금을 맡아서 거두어 들이게 되자, 백성들이 마련하지 못하였어도 관(官)에서는 오히려 이 의무를 독촉하게 되어 항상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이식(利息)을 내어 대납하는 형편이었으므로 마침내 큰 포탈(逋脫)이 있었기에 이르러서 그 폐단이 오래되었었는데, 지금 공(公)은 단지 명령을 받든 순시(巡視)로 하여금 백성들의 부지런함과 게으름만을 단속하고 통솔하게 하였으며, 마음대로 조종하는 바가 없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금을 체납하지 아니하고, 면임배들은 포탈에 빚짐을 면하여 그들의 집안을 보전하게 되고 그들의 처자(妻子)들을 즐겁게 하였으니, 전부 아름다운 법규였었다.
옛날 송(宋)나라 주자(朱子)께서는 숭안현(崇安縣)의 조재(趙宰)가 토지를 나누어 기한을 구분하여 스스로 세금을 싣고 오게 하였기 때문에 관민(官民)이 매우 편리하게 여김을 보고는 선생께서 그의 선치(善治)를 잘한 것에 감탄하였으니, 공(公)은 여기에서 얻은 것이 있음인가?
공(公)이 떠난 후 10년쯤 되어 면임배들이 모두 사모하기를 쇠퇴하지 않아 장차 돈을 출연해 돌에 새겨서 공덕(功德)을 칭송하려 하자 읍민(邑民)들인 주사(主事) 박시유(朴時有)가 그 일을 주간하야 나한테 와서 비명(碑銘)을 청하기에 비명을 쓰노라.
“정사(政事)란 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아! 공(公)이 남긴 덕화(德化)는 상주의 백성들이 후세에 까지 흠앙(欽仰)할 것이다.”
광무(光武) 11년 정미년(1907, 고종 44)하 5월 상순
통정대부 전 행비서원승 진양 정하묵(鄭夏默)은 짓고 이동수(李東秀)는 삼가 쓰다.
공역(工役)을 주관한 이는 전 오위장(五衛將) 장덕기(張德基)이다.
또한 상주의 임란북천전적지에 있는 태평루 뒤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사 민후 종렬 송덕비(牧使閔侯種烈頌德碑)’는 상주시 무양동 동수나무 부근에서 발견되어 상주시청으로 옮겨 놓았다가 임란북천전적지로 이건(移建)해 놓은 것이다.
<목사민종렬송덕비(牧使閔種烈頌德碑)>
소부두모(召父杜母) 부견금일(復見今日)
석토반료(錫土頒料) 종차뢰활(從此賴活)
역문(譯文) :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 와 같은 부모(父母)를,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되었구려.
전지(田地)와 급료(給料)를 고루 나누어 주시니,
이로 말미암아서 은덕을 힘입어 잘 살게 되었습니다.
숭정후 무자년 11월 일에 사청(四廳)에서 세웠다.
또한, 목사 민종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상주읍성 남문 내의 비석거리였던 성하동 8-21번지에서 ‘장인가구 상주대리점 개축공사’를 하면서 발견되어 시청으로 옮겼다가 다시 북천전적지내의 태평루 뒤쪽으로 옮겼다.
<목사 민후 종렬 영세불망비(牧使閔侯種烈永世不忘碑)>
민무기뇌 정성육재 民無飢餒 政成六載
사유의귀 송일천추 士有依歸 頌溢千秋
광서(光緖) 16년(年) 6월(月) 일립(日立)
간역리(看役吏) 김재율(金在律)
역문(譯文) : 주민은 배고프고 굶주린 자가 없이 6년을 재임하였습니다.
선비들은 믿고 의지하였으니 칭송이 천년에 이어질 것입니다
광서(光緖) 16년(年) 6월(月)에 세우다
간역리(看役吏)에는 김재율(金在律)이다.
5. 맺은 말
민종렬(閔種烈)이 부임하기전의 상주는 농민항쟁(農民抗爭)이 격렬하게 일어난데다가 오랫동안 흉년(凶年)이 들었기 때문에 지역사정이 열악한 상황이었고, 또한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중심지역이었기 때문에 사족(士族)들의 영향력이 강하였고, 향리층(鄕吏層)의 영향도 상당한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지역은 광활한데 비해서, 지역의 속사정이 이토록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상주목사로 부임할 인물은 경험이 풍부하고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민종렬(閔種烈)을 최종으로 선택하였다.
민종렬은 1875년 노성현감을 시작으로 현풍 · 양산 · 밀양지역에서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어지러운 상주목사로 부임하면 일을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부세제(賦稅制)의 폐단으로 향촌사회의 저항의식이 고조되어 있기 때문에 수령이 임지(任地)를 잘 통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향촌사회의 불안정요소를 파악하고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상주목사로 부임한 민종렬은 일종의 구폐절목(舊弊節目)인 『상주사례(尙州事例)를 작성하여 상주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이고,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삼정(三政)을 비롯하여, 읍채(邑債), 포군자비(砲軍資備), 별효사(別驍士)와 수성군관(守城軍官)의 차정(差定) 및 삭료(朔料), 이서층(吏胥層)에 의한 4가지 폐단, 반민(班民)의 폐, 직첩(職帖)의 폐, 통영하납미(統營下納米)의 운송에 관련된 폐해, 진영직책(鎭營職責), 외동진두(外東津頭)의 역 부담문제, 고마가(雇馬價), 사직단(社稷壇)과 여제단(厲祭壇)의 보수문제, 교궁(校宮)과 서원(書院)의 경비, 향교(鄕校)의 전답(田畓)문제 등이었다.
이러한 민종렬의 노력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상주에 대한 언급이 관찬서(官撰書)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민종렬이 재임하고 있던 기간이나 이후 윤태원이 부임한 후 얼마간은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상주동학농민군의 봉기 당시, 농민들은 관아에서 수취하던 조세(租稅)의 상납을 거부하고, 고리대의 상환을 무시하였고, 향리(鄕吏)나 반호(班戶)에 대해 누적된 불만이 보수지배층에 대한 보복으로 이어졌다는 점으로 보아, 민종렬 목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현 내의 폐단이 잔존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한 훌륭한 목민관 한 사람이 백성들을 위해서 향촌내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기에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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