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종가와 불천위 제례
상주박물관
조 연 남
1. 종가의 의미와 관련 문화 이해하기
종가는 한 문중에서 맞이로만 이어져 온 큰집으로서, 종손이 사는 집이다. 종손이 사는 집을 중심으로 하나 하나 따져보면 그 사전적 의미를 약간 벗어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종가는 각 성씨별 시조가 아닌 불천위 조상과 같은 현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파종가를 일컫게 되었다.
종가는 10대 이상(1700년 이전) 계승되는 집성촌의 문중 가운데 큰집을 의미하며, 불천위는 아니더라도, 서원에 배향되었거나 현조(顯祖)가 있는 문중의 큰집을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종가는 10대 이상 계승되는 집성촌 문중의 큰집 및 서원에 배향되거나 현조가 있는 문중의 큰집까지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종가는 중국의 유교 이념인 종법사상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다. 중국의 종법은 원래 봉건제도를 위한 것으로 『예기(禮記)』16 대전(大傳)에는 종법의 골간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자(庶子)가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것은 그 종을 분명히 하는 까닭이다. 서자가 장자(長子)를 위해 3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은 조(祖)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이자 별자(別子, 제후의 별자)가 조(祖)가 되고, 별자를 계승하는 이가 종(宗=大宗)이 되며, 아버지를 계승하는 이는 소종이 된다. 百世가 되어도 옮기지 않는 종(=대종)이 있고, 오(五世)만 되면 옮기는 종(宗=小宗)이 있다. 백세가 되어도 옮기지 않는 종(宗)은, 별자의 자손이 별자를 계승하여 종을 이루었기에 백세가 되어도 옮기지 않는 것이다. 고조를 계승하여 종을 이룬 경우에는 오세가 되면 옮기는 것이다. 조를 존숭하므로 종을 공경하는 것이며, 종을 공경한다는 것은 조를 존숭한다는 뜻이다.”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대종은 제후의 별자를 시조로 하여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종을 말하며, 소종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5세까지 제사하고 그 사이에 친족관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중국의 종법제도를 모델로 하여 종법에는 없지만, 한국에는 그 중간 개념의 파종(派宗)이 있다. 파종은 성씨별로 불천위 조상과 같이 뛰어난 조상을 파조로 하여 형성된 종이다.
전통사회에서 종가가 갖는 의미는 국가 및 사회에 공헌한 것으로 인정되는 불천위 제사의 가풍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생활공간인 종택 및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포함한 재실, 서원 등의 유교문화 경관을 두루 갖추고 동성마을, 더 나아가 향촌사회에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이다. 즉 종가는 유교문화의 구심점이며, 다양한 전통문화를 오롯이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가는 조상 대대로 유무형의 다양한 문화를 전승해온다. 종택을 비롯한 종가의 여러 살림살이들은 그자체로 당대 생활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학문적 성취를 비롯한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가풍은 그 종가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소통의 부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나눔과 배려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던 종가의 정신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특히, 명문종가 타이틀은 사회적 배려에 대한 충실여부로 판단되는데, 자기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타자와의 원활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종가의 기본 책무라 할 수 있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제사를 받는 봉제사는 스스로의 긍지를 높이는 문화이며, 접빈객은 타자에 대한 배려의 문화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상주 역시 유교문화의 꽃을 피운 고을로서 아직까지 종가의 다양한 문화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주의 대표적인 종가는 16곳으로 꼽아 볼 수 있다. 종가는 유교문화와 선비정신, 그 속에 묻어 있는 종손과 종부들의 삶이 녹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우리 지역에 있는 종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2011년 상주박물관 조사연구총서를 집필하기 위해 직접 불천위 제사를 조사한 월간 종가와 입재공 종택의 종가문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종부 홀로 종가를 지키며, 문중 어른들과 제사 등 종가의 살림살이를 거뜬하게 지키고 있는 월간 종가와 종택을 비롯한 사당, 문화유산 등을 잘 갖추고 있고, 종손과 종부가 오롯하게 종가를 이끌어가는 입재공(오작당) 종택이다.
2. 상주 종가 현황과 전승되는 문화
(1) 경북에서 뒤지지 않는 상주 종가 문화
경상북도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음은 물론, 유교문화가 부흥했던 지역으로 각종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 경주와 안동, 영주, 문경 등에서는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도록 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점차 퇴락해가는 종가문화를 살리고자 2009년부터 경북의 대표적인 종가문화를 조사 연구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조사연구서인 『경상북도의 종가문화연구』를 간행하였으며, 연차적으로 경북종가의 문장․인장 제작 사업을 서울대학교 조형연구소에 위탁하여 진행한 바 있다. 상주에서는 1차 문장 인장 제작 사업에서 소재 종택 인장이, 2차 사업으로 월간, 창석, 우복 종가의 인장이 제작되었다. 당시 조사에 따르면 경상북도의 대표적인 종가는 모두 244곳이 있으며, 이 가운데 안동이 73곳으로 독보적이며, 영덕 25곳에 이어 상주가 16곳으로 세 번째를 달린다. 이 밖에 봉화, 예천, 구미, 성주 순이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3년차 사업으로 “한국의 종가문화 발굴 및 활용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사업 중간보고회가 열렸으며, 올해까지 현지조사를 마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지난 조사에서 누락된 부분은 한국국학진흥원 조사에 반영되어 아래 표에서 제시한 현황보다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연번 | 본관 | 파조/현손 | 종손명 | 종택/고택명 | 종택주소 | 불천위 | 사당 | 문화재 (종택) |
1 | 진양 | 정경세 | 정춘목 | 우복종택 | 외서면 우산리 | ○ | ○ | ○ |
2 | 풍산 | 류 진 | 류한민 | 수암종택 | 중동면 우물리 | ○ | ○ | ○ |
3 | 광주 | 노수신 | 노병학 | 소재종택 | 화서면 사산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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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풍양 | 조대윤 | 조정희 | 오작당 | 낙동면 승곡리 | ○ | ○ | ○ |
5 | 흥양 | 이 전 | 이병훈 | 월간종가 | 청리면 가천리 | ○ | ○ | ○ |
6 | 흥양 | 이 준 | 이준희 | 창석종가 | 청리면 가천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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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풍양 | 조 정 | 조성기 | 양진당 | 낙동면 승곡리 | ○ | ○ | ○ |
8 | 진주 | 강 신 | 강경모 | 애련재종택 | 상주시 신봉동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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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옥천 | 전 식 | 전상룡 | 사서종택 | 외서면 관동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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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여산 | 송 량 | 송상윤 | 우곡종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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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창녕 | 조우인 | 조희열 | 이재종택 | 사벌면 매호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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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창녕 | 조계형 |
| 퇴우당종택 | 사벌면 매호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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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인천 | 채 수 | 채홍근 | 나재종택 | 이안면 이안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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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안동 | 권달수 |
| 동계종택 | 이안면 여물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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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상주 | 김 범 |
| 후계종택 | 가장동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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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경주 | 손만웅 |
| 야촌종택 | 청리면 율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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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종가 현황
위에서 살펴본 16곳의 종가 가운데 우곡종택을 제외한 나머지 종가에서 모두 불천위를 위하고 있으며, 후계와 야촌종택을 제외한 곳에 사당이 설치되어 있다. 종손 또는 종부가 사당에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종가는 크게 8곳 정도로 축약된다. 우복, 수암, 소재, 입재공(오작당), 월간, 창석, 양진당, 사서종택이다. 지금까지 상주 종가 문화에 대한 연구는 폭넓게 진행되지 않았다. 종택의 건축학적 접근으로 박명덕 외 1인, 「朝鮮中期 同族마을의 宗家 擴散 成立過程에 관한 硏究」,『大韓建築學會論文集』7권 4호(1991.8)에서 풍산류씨 수암종택과 풍양조씨 양진당과 오작당의 성립과정과 건축에 대해 밝히고 있다. 상주산업대학교와 상주문화연구소에서 집필 편집한 『尙州의 文化』, 「상주지방의 祭需에 관한 조사 연구」(新新社, 1994)에 상주 지방의 제폐 현황이란 소제목으로 하여 진주 강씨 애련재종택, 풍산 류씨 수암종택, 광산 노씨 소재종택, 흥양 이씨 종가, 풍양 조씨 종가에 대해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밖에 개별 종가에 대한 연구는 우복종가에 대한 연구가 단연 두드러진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우복 정경세 종가의 제례」,『종가의 제례와 음식』(예맥, 2008)과 앞에서 언급한 『경상북도 종가문화 연구』(2010)에서 상주의 대표적인 종가로 우복종가의 인문지리적 환경, 유교문화 경관, 종가 인물과 문헌자료, 건축적 내용 등을 다루고 있다. 또한 상주문화연구소, 김유희,「검간 조정(趙靖)선생의 불천위 제사에 나타난 문중의식」,『상주문화연구 19』(2009), 상주문화연구회, 「불천위 제사의 현대적 의미」, 『上州 4』(한일사, 2010)가 있다. 많은 종가를 보유하고 있는 안동에서 종가 관련 조사연구가 활발히 진행된 것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다 할 수 있다.
점차 사회가 발달하면서 옛 종택을 지키며, 종손과 종부가 일궈놓은 다양한 문화들이 대를 이어 종가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지면서 단절의 위기에 놓인 지금, 2011년 상주박물관에서 상주의 불천위 제사를 직접 조사 연구하여 발간한 『상주의 문중인물과 제사 문화를 담다』은 주목된다. 또한 종가 문화의 기록화를 통해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확보하고, 종가문화의 다양성을 활용하고자 경상북도 대표 종가를 기록으로 남긴 『마르지 않는 효제의 샘물, 상주 소재 노수신 종가』등 경북대학교의 종가 시리즈는 주목된다.
(2) 종택에서부터 종손과 종부가 만들어낸 문화
종가는 우선 인문지리적 환경으로 동성촌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종가의 중심이 되는 종택은 생활과 사당공간으로 크게 나누어지며, 종택 외에 주변에 재실, 정자, 서원 등을 보유하고 있다. 종택의 구성 요소를 보기 좋게 표로 만들어 놓은 자료가 있어 소개해 본다.
종가의 공간별 용도와 기능(모형)
생/사 구분 | 건물명 | 공간명 | 공간의 용도 | 남/여 구분 | |
생 자 의
공 간 | 안 채 | 정침 | 안방(큰안방, 작은안방) | 주부, 어린이 | 여성공간 (아녀자) |
안대청 | 제사(불천위), 소반 보관 | ||||
상방 | 며느리(미혼 딸) | ||||
부엌 | 취사, 난방 | ||||
익랑1 | 방 | 미혼딸 | |||
방 | 여성손님 방 | ||||
창고 | 곡식 저장 | ||||
익랑2 | 방 | 미혼 자녀 | 아녀자 남성 | ||
서고 | 책, 제기류 | ||||
사랑채 | 큰사랑방 | 가장(남성손님) | 남성공간 | ||
작은사랑방 | 장자(남성손님) | ||||
사랑대청 | 손님맞이, 문중회의(불천위) | ||||
행랑채 | 행랑방 | 집안일 돕는 사람의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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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 | 말 사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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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공간 | 안변소 | 여성들의 변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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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변소 | 남성들의 변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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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 도정, 제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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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공간 | 일반사당 | 불천위, 4~1대조 신주 모심, 사당의례 | |||
불천위사당(부조묘, 별묘) | 늦게 인정된 불천위 신주 모심, 사당의례 |
또한 지금의 종가를 있게 한 두드러진 인물들이 있으며, 종가에서 전승되는 역사적인 산물로 각종 문헌들이 전승된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종손과 종부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종가의 문화가 곳곳에 숨어있다.
현재, 유무형의 자산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가장 눈에 띠고, 앞으로 지금의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이나 종부가 없어지게 되면, 그네들만의 독특한 문화는 앞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종부의 부제로 인하여 종가의 문화가 단절되어 가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제례, 불천위 제사를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물론, 종손과 종부의 삶, 종가의 문화를 계승하고자 현재 그 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오려는 젊은 차종손 및 차종부의 삶 역시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3. 우애를 근본으로 이어져오는 월간 종가의 불천위 제사
이전(李㙉,1558(명종13)~1648(인조 26))은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재(叔載)이며, 호는 월간(月磵)이다. 이수인(李守仁)의 아들이고, 이준(李埈)의 형이다. 종가라 하면 오래된 고택을 쉽게 머리에 떠올리지만, 월간 종택은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이 살기에 알맞도록 조금씩 바뀐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종가를 일군 월간 이전의 6대조는 원래 단밀에 살았다고 한다. 그의 증조부가 당시 벼슬을 버리고 이곳 상주 청리에 첫 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월간의 아버지가 지금의 청리면 ‘유천’, 즉 ‘달래’에 옮겨와 살게 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월간을 말하지 않고, 어찌 창석을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분은 형제라도 지금 뿌리내린 그 후손들을 촌수로 따지면 30촌을 넘어간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촌수를 따지지 않고 서로 오고 감이 옛 형제분 못지않다.
청명 한식이 지난 다음날이다. 2011년 4월 6일 12시 월간 이전의 차사가 있다. 12시 가까이 도착을 해서인지 이미 집사를 선정하는, 집사분정과 제물 진설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월간 종가에는 현재 종부가 홀로 지키고 있다. 넷째로 태어난 젊은 종손은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아, 종부 노릇은 여전히 그녀의 몫이다. 종손이 죽기 전까지인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종가에는 고지기가 있었다고 한다.
종손과 지금의 종부는 평생을 달래에서 종가를 지키며 살았다. 한해 농사를 지으며 종가의 살림살이와 육남매를 길러냈던 것이다. 종손이 떠난 10년 이란 세월은 종부에게 여간 큰 시간이 아니다. 종부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즉 ‘한배미(한밤)’에서 시집을 왔다. 자연마을 이름인 ‘한배미’는 부림 홍씨가 대대로 터 잡고 살아온 마을이다. 종부는 군위의 이름난 부림 홍씨로, 종가의 윗대 어른이 ‘한배미’ 서원 향사에 갔다가 혼례가 성사되어 종가집 맏며느리가 되었다고 한다. 살림이 빈천한 종가에 시집와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며 종가를 꾸려가고 있으나, 점차 나이가 많아져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종가의 제사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3월, 6월의 두 번의 불천위 제사, 한식 및 동지 차사, 묘제를 지낸다. 이 밖에 설, 추석 명절, 4대 봉사 때마다 모시는 제사는 종가 차원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 역시 종가문화의 일부이다. 불천위와 한식 및 동지 차사의 차이는 크지 않다. 각각 시절이 다름으로, 시절에 맞게 올라가는 제물, 대표적으로 떡의 종류가 달라지고, 특히 동지에는 팥죽이 더해진다. 종가에서 동지와 동지 차사를 각별히 여김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한일합병되고 난 다음에, 우리네 그 긍께 나한테 따지만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여 아닙니까? 이 어른들이 양력설을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왜설’이라고 했어. 왜설. 왜놈들 설이다. 우리는 절대 양력설을 못 쉬겠다. 왜설을. 그래가주고 음력설을 쉴라고 하니깐 음력설도 못 쉬게 하잖아. 그니까도로 양력설은 왜설이라 못 쇠고, 음력설을 쉬지 마라고 못 쉬그로 해서 못 쉬고. 그래가주고 동짓날 달래나 일가들이 전부다, 그것도 낮에 멀쩡하게 지내면 왜놈들한테 또 그 들킨다든지 하면 또 말썽이 생기거든. 그래서 동짓날 새복에 일찍 일어나가주고 설을 다 쉬었어요. 일가들이.
그래고 집에서 설을 쉬고 어 달래 모이가주고 동지 차사를 지냈거든. 그래서 동지차사가 언제라도 좀 늦어. 집에서 설을 쉬고 와서 동지 차사를 지내다 보니깐. 그러니깐 왜설을 안 쉬기 위해서, 그래고 음력설을 못 쉬게 하니깐 못 쉬고. 그래서 동짓날 설을 다 쉬었어요. 그래 고거는 아주 참, 뭐 어데 문서로 돼 있는 데도 없고 그 저 구구전전으로 입으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얘기라요. 지금까지 계속 내려와요. 그래서 동지를 더 참 소중하게 여기고 그랬어요.
일제에 대항하여 양력설을 쇠지 않기 위해 동지 때 설을 쉬면서 팥죽을 떠서 차사를 위했다는 것이다. 이는 월간 창석 두 종가가 모두 마찬가지이다. 달래 이씨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 자존심이 강하다는 부분을 읽을 수 있다. 종가의 제사 문화는 횟수와 제물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부터 점차 축소되어 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종부는 그럼이 없다. 가까이에서 종가의 살림살이를 지켜보고 있는 이태하씨는,
그 종부가 거기에 대해서 갖다가 한 가지 우리가 고마운 것이 그렇키 해도 당연히 내가 하는 걸로 알고, 제사 지내겠다 못 지내겠다. 그 얘길 안한께 우리가 고마워. 다행히 또 종부가 있으이, [종부 : 내 할 일이니 뭐 누구한테?] 그래 인제 그 뭣한 종가에는 제사를 지내니 못 지내니 그런 기 없어요.
라며, 홀로 종가를 지키면서 제사를 유지하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종가의 문화를 이어가는 종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한다. “내 할이니 뭐?”라는 종부의 말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당연하단 의미가 담겨 있다.
(1) 겨우 향화를 받들 정도의 종가의 살림살이
종가의 살림은 예나 지금이나 넉넉지 않다. 종부의 입을 통해 “째지게 가난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전은 앞의 이야기에도 나와 있듯이 아껴 쓰고, 낭비하지 않는 검약을 몸소 실천했던 인물이다. 그런 까닭인지 종가의 살림은 넉넉지 않았는데, 이는 제사 제물에서도 그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문중의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중살림살이. 월간에 갖다가 지금, 인제 지금 앞으로 계획은 그 인제 이래여. 인제 종가에 이래 보면은 갖다가 어느 내가 인제 옆에서 종가를 겪어보니깐 원래 종가라 카는 데는 갖다가 쓰임새가 많아여. 많은데 그걸 갖다 자손들이 다 모르고, 종손이 인제 자연히 전부다 쓰고 나면은 갖다가 지금 경제적으로 궁핍해요. 궁핍해요. 그러니깐 자연히 갖다가 그 모든 게 어려와. 어렵고 한데, 우리는 그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이 자손들이 모이만, 절대 갖다가 그 싸우고 그런 건 없어. 말다툼하고 언제든지 그 연장자가 이야길 하면 항상 순의를 하고, 사랑에 모여도 큰 소리 한 번 안 나고 웬간하면(웬만하면) 다 상의를 해서 하고 이는데, 지금 앞으로 갖다가 문제가 있는 것이 세금 관계라든가 모든 게 나오고 하면 겨우 꾸려나가는 그 정도지, 여유라는 거는 하나도 없어요. 지금. 그래.
종가 이름으로 된 땅이 조금 있다. 거기서 나온 소출로 일 년 동안 종가 제사에 향화(香火)를 올리는 정도이다. “원래 종가라 카는 데는 갖다가 쓰임새가 많아여. 많은데 그걸 갖다 자손들이 다 모르고, 종손이 인제 자연히 전부다 쓰고 나면은 …” 이 대목에 눈길이 간다. 그만큼 이래 저래 종가의 쓰임이 많은 모양이다. 항상 넉넉하진 않지만, 종가 사랑에서는 한 번도 큰소리가 오고 간 적이 없다. 언제나 웃어른의 말에 따라 살림살이를 꾸려 간다. 이 역시 말 안 해도 윗대부터 내려온 가풍 덕택이리라.
종가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설날이 지나면 상주에 사는 일가친척들을 모두 모아 공식적인 모임을 연다. ‘유천일가계’라는 이름으로 계원들이 일 년에 한 번씩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점심 준비를 하여 일가친척들과 모여 밥을 먹으면서 친목을 다지는 것은 물론 문중의 큰일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이다. 한가한 시절이라 젊은 사람들도 비교적 많이 참석하여 문중의 화합을 다진다. 이 밖에 사람이 비교적 많이 모이는 차사나 동지 때 살림살이에 대해 간단히 의견을 주고받는다. 2008년에 발간된 월간선생문집은 문중에서 주도한 것으로, 이종욱이라는 분이 선뜻 돈을 내놓은 덕분이다.
2011년 한식 차사에는 20~30명 정도가 종가에 머물렀다. 제물을 준비하는 분이나 제사에 참석하신 분들이나 하나같이 나이가 많다. 그 가운데 음복상을 차릴 때 할머니들 틈에 끼어 접시에 열심히 제물을 담고 있는 젊은 분이 눈에 띤다. 제물을 썰고 접시에 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 뵈어도 제물만 벌써 20년 동안 만져온 솜씨라고 한다. 종가의 음식은 물론 다양한 문화를 이을 아랫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다.
(2) 가풍에 맞는 검소한 차사 상차림
차사 당일 날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전날 음식 만드는 모습을 담지 못했던 까닭에 사진이라도 담아보자는 욕심이었다. 이번에 올라간 제물은 제주, 메, 갱, 삼탕(육탕, 어탕, 소탕), 두부전, 편, 포(대구포, 육포, 문어포), 구이(황태, 파전, 미나리 등 각종 전, 돼지고기, 닭), 김, 조기, 숙채(고사리, 도라지, 취나물, 배추, 시금치), 실과(대추, 밤, 곶감, 호두, 배, 사과, 수박) 등이다. 옛날부터 청빈했던 월간 종가의 삶을 드러내는 듯하다. 제물을 장만하는 것은 종부와 마을에 살고 있는 친인척 세 분을 포함하여 모두 네 명이 맡았다. 제물에 관해서는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제사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편과 구이이다. 편은 본편과 웃기로 나누어진다. 본편은 시루떡과 찰편을 쓰고, 웃기는 본편 위에 오르는 것으로 웃기 또는 잔편이라고 하는데, 사정에 맞게 가짓수가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올해 장만한 편은 시루떡, 찰떡, 쑤꾸리, 부편, 송편, 송기단자, 경단, 전, 조악으로 모두 9켜이다. 시루떡과 찰떡은 방앗간에서 해오며, 나머지 잔편은 직접 만든다. 종부가 젊었을 때는 모든 떡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조사자 : 시루떡 본편은 방앗간에서 해요?] 예. 나머지는 집에서. 옛날에는 여 다 했지. 집에서 시루떡. 꼭지에 마 시루에 쪄가주고 마 집에서 다 했어. 디딜바-(디딜방아) 찧가. 시방은 저 방앗간이 나왔어. 디딜바- 찍고 하면 겨울에는 막 얼어가. 화로 불 담아가 솔로 씻고 아이고 옛날엔 참말로 죽을 고생 했어. 옛날에는 그 지내고 나만.
디딜방아에 가서 쌀을 찧어서 집에서 꼭지 시루에 쪄서 떡을 만들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세월이 좋다. 하지만, 예전에는 제사라고 하면 젊은 새댁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했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이 없어 가짓수를 줄이는 것은 물론, 떡의 양 역시 많이 줄였다. 특히 대추와 밤을 썰어서 고물로 묻히는 잡과편은 손이 많이 가서 더 이상 만들 사람이 없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는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이번에는 오르지 않았다.
편에서 눈에 띠는 것이 바로 송기단자와 송편이다. 송기 색깔이 살아 있어 기름을 묻혀 놓으니 반들반들하다. 송기단자 역시 손이 많이 간다. 소나무의 송기를 벗기면 그 나무는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어린 소나무가 있으면, 거기 있는 것으로 여름에 벗긴다. 송기의 특성상 한꺼번에 많이 벗기질 못한다. 제사를 위해 여름에 미리 장만해 놓았다가 활용한다. 벗겨서 말려서 삶는데, 잘 안 삼킨다. 송기단자 안에는 껍데기를 벗긴 팥고물이 들어간다. 팥은 붉은 색이므로, 붉은 색은 귀신을 쫓는다고 믿기 때문에 제물에는 쓰지 않는다. 옛날부터 송기단자를 하는 것은 제사의 범절로 내려 왔다. 평소에는 잘 먹을 수 없는 떡인 까닭에 별식으로 여겼다 한다.
흰 송편이 둥글둥글하다. 상주에서는 보기 드문 떡이다. 쑤꾸리는 쑥으로 만든 것으로, 맛이 좋다고 한다. 부편은 역시 안에 껍데기 벗긴 팥고물을 넣는다. 여름에는 쉬기 때문에 부편은 올리지 않는다. 쑤꾸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고물 안의 떡 색깔로 구분한다. 시루떡 바로 위에 올라가는 찰떡은 두께가 시루떡에 비해 얇다고 한다. 전과 조악은 기름에 지진다는 점에서 다른 잔편과 차이가 난다. 전 조악 순으로 조악이 편의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본편과 잔편이 다 만들어지면, 떡을 차례차례 올려서 괸다. 떡의 괴임은 종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루떡, 찰편, 쑤꾸리, 부편, 송편, 송기단자, 경단, 전, 조악이 오르는 것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시루떡을 편대에 맞게 자르는 모습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나무로 된 편대는 종가의 오랜 제사 문화를 드러내 준다.
순 서 (위에서 아래) | 편대에 괸 모습 | |
첫 번째 | 조악 |
|
두 번째 | 전 | |
세 번째 | 경단 | |
네 번째 | 송기단자 | |
다섯 번째 | 송편 | |
여섯 번째 | 부편 | |
일곱 번째 | 쑤꾸리 | |
여덟 번째 | 찰떡 | |
아홉 번째 | 시루떡 |
상주에서는 보통 구이의 제일 위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닭이다. 구이 제일 위에 문어를 올리는 안동과는 다름이 있다. 종부의 말대로 구이 괴는 순서를 따라가면, “구이 젤 밑에 가오리, 명태포, 그라고 인제 적 구운 거 막 차례차례. 그것도 순서 있지. 제일 높은 적은 미나리, 젤 위에 올라가고. 고 다음에는 배추. 첨에는 배추. 배추, 파, 그렇게 올라가.”라고 이야기 한다. 각종 전이 올라간 위에 산적이 놓이는데 여기는 산적이 없다. 제철에 맞는 제물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 되므로, 차사 때는 무적은 빠진다.
순 서 (위에서 아래) | 편대에 괸 구이 모습 | |
첫번째 | 닭 |
|
두번째 | 돼지고기 | |
세번째 | 명태포 | |
네번째 | 미나리전 | |
다섯 번째 | 배추전 | |
여섯 번째 | 부추전 | |
일곱 번째 | 파전 | |
여덟 번째 | 명태포 | |
아홉 번째 | 가오리 |
‘달래’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퍼지면, 당일날 해야 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음식 장만이 끝난다. 젊은 사람들이 없는 제물장만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종부를 비롯한 함께 제물을 장만해 주는 일가친척들의 나이도 많다. 옛날보다 제물의 가짓수는 줄었지만, 준비하는 정성은 다름이 없다. 나이 많은 종부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지금껏 제사를 줄이지는 않았다.
(3) 사당 문을 열고 제사를 받들다
12시 차사 시간에 맞추어 종가에 도착했다. 이미 차사의 제관들이 모두 정해졌다. 사랑채에서 어른들이 모여 제관분정을 마친 것이다. 종손이 젊은 데다 다른 지역에 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까닭인지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오늘의 제관은 초헌관에 이정협(李楨協), 아헌관(亞獻官)에 이채하(李采河), 종헌관(終獻官)에 이종욱(李鍾旭), 유식(侑食)에 이정석(李楨碩), 축(祝)에 이종욱(李鍾郁), 집례(執禮)에 이권(李權)으로 정했다. 사당 문이 열리고, 문 위에 제관분정표가 붙여지고, 제물이 상 위에 올랐다.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홀기가 있다. 차사는 홀기에 따라 진행된다. 이태하씨와 제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5월 5일 단오날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에 참석한 것과 창석 이준 선생의 제사의 예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불천위에는 여성도 제사에 참석한다는 점과 월간 종가에서는 유식례를 행하고, 부복만으로 마치는 데 비해 합문의 절차가 있다는 점이다.
창석 집에는 특기할 만한 거는 우리는 갖다가 메밥을 두 그릇을 떠 놓는데, 그 집에는 단설이라. 메밥이 인제 하나 뿐이라. 그런데 그는 왜냐카면 창석 할아버지가 “남자 가는데, 여자 따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 단설을 하는데, 지금도 보면은 그 집에 메밥이 하나라. 우리는 두 겐대.
형제간에도 이렇게 제사의 예법은 다르다. 제사의 절차는 유가의 제례 범절 안에서 가가례(家家禮)로 집집마다 그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4. 구당 선생을 모시는 입재공 종택
(1) 입재공 종택의 자리매김 과정
입재공 종택은 흔히 오작당(悟昨堂)이라고 일컬어진다. 오작당이 자리잡고 있는 낙동면 승곡마을은 운곡마을과 더불어 상주에서 이름난 풍양 조씨 집성촌이다. 오작당 가까이에 조정 선생의 양진당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면은 상주시의 동단에 위치하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의성군, 구미시, 상주시 중동면에 접하고, 서쪽은 국사봉을 경계로 상주시 동성동, 신흥동과 인접하고 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외동면과 장천면이 병합됨에 따라 낙동강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낙동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두 24개 법정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승곡리는 원래 장천면 지역이며 ‘승장사(勝長寺)’가 있었으므로 "승장골" 승장곡(勝長谷) 또는 "승장"이라 일컬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언상(言上), 언중(言中), 언하(言下), 제동(齊洞), 요포(繞浦), 통사(通仕), 옥곡(玉谷), 송천(松川), 승상(升上), 승중(升中), 승하(升下) 등 여러 마을을 합하여 지금의 승곡리가 되었다. 현재 양진당 즉 오포, 옥가실, 통사동, 승장, 참나무진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당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새터로 일컬어진다.
오작당은 지금의 양진당 자리에 1601년(선조 34)에 재실의 형태로 지어졌다. 1661년(현종 2년) 조정의 증손자인 조대윤(趙大胤)이 은천(恩泉)의 새터(新基, 승곡리 자연마을)로 이건하였다. 이건 당시 내사, 외사 모두 40여 칸이었으나, 1781년(정조5) 중수 시에 겹집과 홑집이 공존하는 건물이 되었으며, 양진당의 원초형이다. 부재(部材)의 세장(細裝)한 조각, 기둥의 모접과 격자창 등은 옛날 집 형태의 느낌을 더한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사당 등 3동이 남아 있다. 사랑채 전면의 외적인 공간과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내적인 공간 그리고 후원인 사당이 있는 공간으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2) 종가를 빛낸 인물과 관련 문헌들
입재공 종택은 입재(立齋) 조대윤(1638~1705)의 후손들로, 사천파(思泉派)라 한다. 조대윤은 검간 조정의 증손자로 종택 역시 사백년을 이어져 온 종가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현재 종손은 11대로 조정희(1934년생)씨며, 내외(채춘식 1927년생, 문경 현리 인천채씨 가문)가 함께 오작당을 지킨다. 종손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현재 차종손 조용권(1958년생)이 종손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대대로 학문과 덕행을 숭상하고, 석학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효우를 가규로 가문을 명성을 크게 드높인 분들이 많다. 유집이 있는 분이 17명이며, 문과 급제한 분이 4명, 생진시에 합격한 분도 2명이다. 조대윤의 자손은 현재 그 수가 1,500명에 이른다.
이름 | 鄭 | 榮遠 | 稜 | 大胤 | 중략 | 沐洙 | 중략 | 成德 | 正熙 | 勇權 | 2남 |
관계, 위상 |
| 鄭의 차남 |
| 稜의 차남 |
| 불천위 |
|
| 종손 | 차종손 |
|
세대수 |
|
|
| 파시조 |
| 8대 |
| 10대 | 11대 | 12대 | 13대 |
<검간 선생으로부터 현재까지 종통>
조정(1555년∼1636년)
자는 안중(安仲) 호는 검간(黔澗)이며 관향은 풍양(豐壤)이다. 시조의 휘는 맹(孟)인데 초휘는 암(巖)으로 한양부 풍양현 사람이다. 고려 개국공신으로 시중평장사(侍中評章事)에 이르렀고, 훈공으로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풍양부원군(豐壤府院君)에 피봉되니 자손들이 풍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광헌(光憲)의 아들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및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9년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佐郞)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公州)까지 호가(扈駕)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의성(義城)의 속수서원(速水書院)과 상주(尙州)의 추원당(장천서원(長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조영원(趙榮遠, 1577년∼1640년)
자는 경장(景長)이며, 호는 유담(儒潭)이다. 아버지는 정(靖)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극일(克一)의 딸이다. 지기(志氣)가 굳세고 덕행(德行)과 도학(道學)에 있어 남달라 남방의 여러 선비들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고 한다. 종사랑(從仕郞)에 제수되었다. 유담유고(儒潭遺稿)를 남겼다.
조릉(趙稜, 1607년∼1683년)
자는 자방(子方)이며, 호는 모암(慕菴)이다. 영원(榮遠)의 아들로 1654년(효종 5)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그는 덕행이 준수하여 주위에서 장차 향리를 짊어질 중요한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문집으로 모암선생문집(慕庵先生文集)을 남겼다.
조대윤(趙大胤 : 1638~1705)
조선후기의 학자로, 자는 계창(季昌)이며, 호는 입재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릉(稜)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황 중에 있을 때 지극 정성으로 보양하였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였으나 당쟁이 심한 데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위기학(爲己學)에 전념하였다. 시문집으로 「입재유고(立齋遺稿)」가 있다. 오작당을 현재의 자리에 옮겨지었으며,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었다.
불천위 조목수(趙沐洙 : 1736~1887)
석우(錫愚)의 아들로, 호는 구당(舊堂)이다. 강고 류심춘과 같은 시대를 산 인물로, 그의 고종사촌이다. 박약(博約)의 공(工)을 닦아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굉박(宏博)하고 정심(精深)하며 사림(士林)을 창솔(倡率)하여 장진(獎進)하는 공(功)이 있고 사문(斯文)을 우익(羽翼)하여 전후(傳後)한 문(文)이 있어 산남 지방(山南 地方)에 표준(表準)이 되었다. 1796年(正祖20) 영남(嶺南) 유림(儒林)에서 의리(義理)를 창도(唱導)하는 상소(上疏)를 올릴 때 소수(疏首)로 추대되었다. 또한 입재공 종택의 사당에 불천위로 모셔지고 있다. 퇴계학통의 큰 흐름을 이은 대유학자로 명성이 높다. 퇴계 학맥도를 따르자면 다음과 같다.
이황 → 정구 → 조정 → 조원윤 → 조천경 → 조승수
조익 조목수 → 조상덕
창석 이준이 최초로 편찬한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商山誌)를 속록하였다. 또한 시문집인 <舊堂公稿>와 문집인 구당선생문집(舊堂先生文集)이 있다.
차종손 조용권(1958년 ~ )
차종손 조용권씨는 1958년 생으로 2년 3개월 전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에서 일을 했었다.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현재, 부인은 대구에 거주하고 있으며, 큰 아들은 서울에, 작은 아들은 군 복무 중이다. 차종손이 다시 부모님 곁으로 오게 된 이유는 사적인 문제도 있지만, 부모님의 연세가 많고 하여 대를 이어 종가를 지키기 위함이다. 사실 조사자가 “종가를 지키기 위해서죠?”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바로 “그건 좋은 말로 포장한 것이고!”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현재 종택에 거주하면서 곶감 농사를 짓고 있는데, 모든 농사가 다 그렇듯이 곶감 역시 그 철이 있는 데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한 달에 한 번 약치는 게 고작이다. 그래도 종택에 곶감 12동이 나올 정도의 나무가 있어, 소일삼아 하고 있다. 여유 시간이 많은 터라 2010년부터는 우리시 새마을관광과에서 운영하는 문화해설사가 되어 양진당을 비롯한 우리 지역의 다양한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있다.
(3) 차종손의 활약이 돋보이는 불천위
승곡과 운평의 입재공 종택과 조세희 어르신 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가 손님 우리가 다 친다”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이 근처에 자리 잡고 있고, 주변에 용산정사와 추원당(장천서원), 옥류정 등 풍양 조씨와 관련된 문화유산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다. 그런데 실제로 양진당은 비어 있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으니, 늘 종손과 종부가 오롯이 있는 오작당과 운곡마을 조세희 어른댁에 사람들이 붐빌 만하다. 또한 이곳에 가면 봉제사 접빈객 대접을 후덕하게 받을 수 있다.
고운 한복을 차려 입은 종부의 옷차림
구당 조목수의 불천위 제사는 4월 24일(음력 3월 22일) 입재공 종택에서 있었다. 종손 어르신을 필두로 하여, 종부님과 주변의 친인척, 따님에 며느리가 총 동원되어 안채 마루에서 제물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인지 대부분의 제물은 마련된 상태에서 제물을 제기에 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종손과 종부를 비롯하여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정성스레 제물을 준비하는 모습에 종가의 문화가 고스란히 베어있었다. 그것이 조사를 하러간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제사의 상차림은 어느 문중이나 정해져 있는 것이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문중에서 특이하게 올리는, 해당 조상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지, 제사를 지내는 철에 따라 올라가는 제물의 종류는 달라지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올라가는 제물들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불천위 제사에 올라가는 제물은 군자혈식이라는 유가의 범절 안에 있다. 입재공 종택의 특징이라 함은 직접 송화가루를 마련해 놓았다가 다과를 만들어 올리며, 양진당 검간 선생 불천위 제사와 마찬가지로 방어를 쓴다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불천위 상에 올리는 제물은 대게가 비슷한 까닭에 올라가는 제물의 간단한 내용을 소개하고, 제물 가운데 중요하게 여기는 편과 구이를 검간 선생 문중과 비교하여 제시하도록 한다. 우선 편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본편의 종류도 구당 조목수 불천위가 더욱 많을 뿐만 아니라, 잔편에 들어가는 떡의 종류 역시 다름이 있다. 첫 번째 조악에서 세 번째 잡편에 이르기까지는 같으나, 그 다음은 같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편의 모습
순 서 (위에서 아래) | 편대에 괸 모습(검간) | 구당 조목수 |
첫 번째 |
|
|
두 번째 | ||
세 번째 | ||
네 번째 | ||
다섯 번째 | ||
여섯 번째 | ||
일곱 번째 | ||
여덟 번째 |
다음은 그 다음으로 화려한 구이의 모습이다. 검간 선생의 구이는 문어, 지단, 산적, 서래, 돼지고기, 홍어 ,조기, 명태로 구성되며, 구당 선생의 구이는 사진에서도 쉽게 차이가 나지만 더욱 더 많은 종류의 여러 형태의 육류와 어류가 상에 오른다.
구이의 모습
순서(윗단부터) | 검간 선생 | 구당 조목수 |
여덟번째 |
|
|
일곱번째 | ||
여섯번째 | ||
다섯 번째 | ||
네 번째 | ||
세 번째 | ||
두 번째 | ||
첫 번째 |
이 밖에 제물로는 다른 문중과 다르지 않게, 기본적으로 과일 일체, 계적, 방어, 호두, 밤, 강정, 다과, 약과, 밥, 삼탕, 나물 등이 상에 오른다. 특히 호두를 쌓은 모습은 오랫동안 이이온 종가의 음식문화를 대변한다.
전날 모든 제물을 마련해 두고, 쌓아 놓았다가, 다음날 아침 제사 준비에 여념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차종손의 아들이 함께한 불천위 제사
다음날 아침 9시를 조금 넘어 종택에 도착했다. 대구나 다른 지역에서 오시는 문중 손님들을 위해 9시에 모였다가 10가 넘어야 집사 분정이 이뤄지고 난 뒤, 본격적인 제사가 시작된다는 종손과 차종손의 이야기에 뒤늦게 종택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이미 모든 제물을 사당으로 옮길 준비가 완료되었고, 제사에 참석하는 안팎의 문중 어른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모습이다. 특히 주목되는 사람은 차종손의 둘째 아들이 휴가를 제사에 맞춰서 나왔다는 것이다. 머리를 짧게 깎은 그의 모습과 갓 도포를 쓴 종손과 차종손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는 제사를 마치고, 편을 다시 종택으로 옮기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도왔다.
대구에 사는 문중 어른 몇 분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집사 분정은 10시가 넘어서 시작되었다. 종손과 문중의 몇 몇 어른이 모인 가운데, 오늘 헌관, 축관, 집례가 선정되었고, 새하얀 한지 위에 검은 먹물이 오가더니, 집사분정이 완료되었다. 분정을 하는 동안, 사당 안에서는 차종손과 그의 동생을 비롯한 문중의 젊은 사람들이 사당 제물 진설에 분주하고 오가고 있었다. 제물 진설이 완료되고, 집사분정이 완료 된 후, 종손 어른을 필두로 하여 헌관들이 모두 사당으로 모인 가운데 불천위 제사는 시작되었다.
유가의 여러 제사 절차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가 진행되었다. 참신례와 강신례에 이어 출주,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가 이어지고, 독축, 첨작례, 헌다례, 사신례로 진행되었다. 그날따라 집례를 맡은 어르신이 약간 횡설 수설 하는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제사는 계속되었다. 사당 안에는 바깥어른들이 가득 찬 가운데, 사당 문 밖에서 제사를 지켜보고, 재배를 하는 안어른의 모습에서 남녀의 구분을 두는 종가문화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사당에서 이뤄지는 제사의 절차가 신주를 닫고, 제물을 다시 종택으로 옮기고, 사당의 문이 잠겼다. 참여했던 바깥어른들은 종손과 함께 사랑채로 모였고, 이어서 음복례가 이루어졌다. 음복례를 마치면 비로소 제사가 끝이 난다. 조사자는 음복을 미쳐 못하고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안채 마루에서 안어른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바깥어른들은 오늘 제사와 그간 살림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불천위 제사에는 예기치 않은 손님들도 오는데, 경주에 계시는 종가의 어른은 불천위 제사만 찾아다닌다고 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곳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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