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동화

고추와 고구마

빛마당 2010. 10. 14. 15:20

동화

 

 

 

 

고추와 고구마

                                 

                                 김 재 수

해님이 유난히 쨍쨍하게 웃는 날입니다.

농부가 아침부터 열심히 고추 모종을 심고 있습니다.

이마에 땀이 흐릅니다.

잘 다듬어진 고추 골에 애기 돌보듯 고추 모종을 심습니다.

“고추란 놈은 가물어도 잘 사는데 무슨 물을 그렇게 많이 주세요?”

지나가던 이웃집 아저씨가 한 말씀합니다.

‘그래도....’

농부는 씩 웃기만 할 뿐 물을 듬뿍듬뿍 줍니다. 한 포기라도 죽을 까봐 정성을 다합니다.

농부의 정성과 며칠 뒤 내린 비로 고추는 이내 힘을 차렸는지 잘 자랐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마음을 놓을 정도로 잎사귀도 푸르고 줄기도 곧게 자랐습니다.

농부는 다시 고추 대를 새우고 찬찬히 함께 매어 줍니다.

"잘 자라야 해. 비바람에 넘어지지 말고 알았지?"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고추나무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쑥쑥 자랐습니다.

이슬이 내리는 밤에 하늘엔 은하수가 길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은하수를 바라보던 고추들은 어느새 이파리 사이사이로 예쁜 별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고추들이 하얀 별꽃을 피우기 시작할 때쯤 농부는 고추밭 옆자리 비워둔 이랑에 또 무언가를 심고 있습니다. 뿌리도 없고 줄기와 이파리만 몇 개씩 붙은 줄거리들을 잘라 그냥 이랑 사이에 쿡쿡 꽂아 둡니다.

“저게 뭐람.”

“그러게 뿌리도 없는 줄기를 저렇게 끊어서 심다니 어떻게 살 수 있어?”

고추들이 유심히 바라보더니 저마다 한소리씩 합니다.

“네 이름은 뭐니?”

싱싱한 고추가 힘없이 늘어져 누운 고구마를 보며 묻습니다.

“응. 고구마라고 해.”

고구마가 말하기도 귀찮은 듯 겨우 입을 엽니다

“그런 몸으로도 살 수 있는 거니?”

고추가 궁금해서 자꾸 물었지만 고구마는 대답도 못합니다.

해님은 고구마를 아예 말리기라도 하려는지 더 쨍쨍 내려 쬡니다.

한나절이 지나자 고구마들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시들었습니다.

“저런, 저걸 어째...”

고추들도 말라 가는 고구마 순을 바라보며 안타깝습니다.

쨍쨍한 햇볕은 며칠 동안 고구마 순을 거의 다 말라 버리게 했습니다.

“아저씨도 괜한 수고만 하셨지. 차라리 저곳에 우리 고추를 심었으면 더 좋았을 걸.”

고추들은 농부가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어쩌겠니? 우리라도 주렁주렁 고추를 다는 수밖에...”

하얀 별꽃이 피었던 곳엔 깨알 만하게 고추들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며칠이 지나자 소나기가 한 줄기 지나갔습니다.

모두들 더위에 지친 목을 축이며 땡볕을 이기고 있습니다.

“어라!”

멍하니 고구마 이랑을 바라보던 고추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바싹 말라 곧 부스러질 것 같은 고구마 이랑 이랑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죽었다고 생각한 마른 줄기 곳곳에 새파란 새순이 뾰족 뾰족 올라오고 있습니다.

땡볕에 안간힘을 쏟던 고구마의 새순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습니다.

“모두 수고했다.”

농부는 빙긋 웃으며 고구마 이랑을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다 죽어 가던 고구마는 정말 신나게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파리가 하나 나오는 가 했는데 이튿날이 되자 또 한 이파리가 올라옵니다. 뱀이 땅을 기듯이 고구마 순들은 엎드린 채로 슬슬 이랑을 메우기 시작합니다.

“너희들은 꽃도 피우지 않니?”

그냥 이랑을 기어 다니는 고구마를 보면서 고추들이 물었습니다.

“....”

고구마들은 대답대신 웃기만 합니다.

고추들은 자신들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자랑스러운 고추를 드러내 보이며 고구마들을 내려다봅니다.

벌써 농부는 고추 골을 다니며 여러 번 풋고추를 따기도 했습니다. 한 번 딸 때마다 한 소쿠리씩 땁니다.

“허허 올해 고추농사는 이만하면 성공이군.”

풋고추를 따면서 농부는 고추들에게 칭찬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추들은 더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우린 이렇게 고추를 달고도 모자라 연신 꽃을 피우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무얼 하니?”

고추들이 고추 대에 기댄 채 조금은 건방지게 고구마들에게 물어봅니다.

“아기들처럼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기만 하는 병신.”

“맞아 꽃도 피우지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병신. 게으름뱅이처럼 빈둥빈둥 놀기만 해도 농부 아저씨는 마음도 좋아.”

“아무 쓸모도 없는 걸 그냥 두는지 몰라.”

고추들은 아주 대놓고 고구마를 향해 고약한 소리를 해댑니다.

“다 뽑아 버리지 왜 그냥 두세요. 농부 아저씨는 이상해.”

풋고추를 따는 농부에게 이젠 대놓고 항의까지 합니다.

그래도 농부는 그냥 빙긋이 웃기만 합니다.

어느 날 밤입니다.

막 잠이 들려는 고추들은 어디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쩌-ㄱ”

“쩌--ㄱ”

마치 땅이 갈라지는 소리입니다.

고추들이 서 있는 곳까지 울리는 소리입니다.

환한 달빛을 받고 누운 고구마들의 잎사귀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있습니다. 고구마들이 몹시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고추들이 며칠을 살펴도 고구마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해”

“고구마들이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고추들도 조금씩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약이 바짝 오른 풋고추를 한 소쿠리 따서 나오던 농부가 고추 소쿠리를 땅에 내려놓더니 고구마 이랑으로 가십니다. 고추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아저씨를 바라봅니다.

아저씨의 손에 어느 새 호미 한 자루가 들려 있습니다.

“허허, 이놈들이 이젠 제법 자랐을 거야.”

땅위를 기어 다니는 고구마 넝쿨을 걷어낸 농부가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고추들은 일제히 고구마 이랑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호미로 땅을 파던 농부의 손에 주먹보다 훨씬 큰 고구마가 들렸습니다.

농부의 손놀림이 빨라지자 연신 땅 속에서 몰래 자란 고구마들이 땅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어머나,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담.”

“꽃도 피지 않고 빈들빈들 놀기만 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우린 고구마를 보고 게으름뱅이라고 놀리기만 했잖아.”

“맞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라고 했어.”

고추들은 일제히 서서 고구마를 바라보기만 합니다.

“허허, 그놈들 아주 맛있게 생겼는데....”

농부의 얼굴에 고구마 색깔만큼 붉은 웃음이 달립니다.

“이 녀석들아. 고추와 고구마는 서로 다른 거야.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러면서 저마다 제 몫을 다 하고 있거든. 이제 알겠지?”

농부는 할 말이 없어 바라보는 고추들을 향해 한 마디 하시곤 빙긋 웃었습니다.

이튿날입니다.

농부가 아침에 고추밭에 들렸다 깜짝 놀랐습니다.

고추들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밤새 코끝부터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00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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