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산문

비우는 일

빛마당 2010. 12. 28. 12:14

 

 

                                       253. 비우는 일

 기온이 뚝 떨어진다더니 일기예보를 얹혀 온 시린 바람이 사방을 휘젓고 다닙니다.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 가로수 노란 이파리들이 바람 따라 잎눈을 뿌리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시인 이형기님은 벚꽃이 지는 모습을 ‘하르르-’라는 말로 표현을 했는데 은행나무는 꽃눈이 아니라 그대로 노란 잎눈을 ‘와르르-’ 흩날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잎눈 내리는 모습은 ‘아름답다’라는 감정보다는 쓸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합니다. 무심한지 아니면 무심한 척 하는지 바람 따라 이리 저리 흩날리는 이파리들.

 불과 몇 분 동안에 은행나무는 황금빛 옷을 다 벗어버린 채 바람과 맞고 서 있습니다. ‘저럴 수가’라는 말이 튀어 나올 만큼 삽시간의 일입니다.

 나무를 보면서 비우는 일을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참 복된 자요 천국이 저희 것이며, 마음이 청결한자도 참  복된 자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예수님은 여덟 가지 복을 일러 주셨고, 비워둠이 행복이요 기쁨이라는 것, 버리고 비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이 들어설 수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 그래서 비우는 일은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이라는 가르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실감하지 못하는 자신에 놀라곤 합니다.

 ‘빈자리’

 나무는 스스로 빈자리를 만들어 놓고 새롭게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그 빈자리로 인해 때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눈을 들면/네가 앉았던 자리/ 바람만 보이는구나/그 빈자리/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고 믿었는데

그래도 마른 낙엽 하나/다행스럽게 남아 있다./문풍지 떨어진 장지문처럼/보이지 않는 틈 하나 생기고/그 작은 틈으로/웬 바람이 그리도 매서운지/옷깃을 여미고 여며도/보이지 않는 틈은 여며지지 않고/낙엽 하나 내 안에서/자주 바스락거린다.


                                                                        - 빈자리(2)-

 

 졸작 ‘빈자리’는 머물다 간 마음들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의 일기를 찍은 스냅 사진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참 묘합니다. 일상을 통해 숱하게 만났다 헤어지는 일들이 다반사임에도 잊혀 지지 않고 머물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어도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는 장갑이 벗겨진 손가락처럼 시릴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당당하게 선 나무도 어쩌면 잎 떨어져 빈자리가 몹시 시리고 아파 보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때마다 윙윙 우는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 나무도 이 겨울, 아픔의 터널을 지나면 나이테 하나 더 거두고 희망의 새 봄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나도 내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하나 비워내고 빛 고운 세월의 나이테를 두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날입니다.

2010.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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