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戊午士禍)와 표연말(表沿沫) 선생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목 차 | ||||
1. 머리말 64 2. 표연말(表沿沫) 선생의 생애 68 3. 조의제문(弔義帝文) 70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전개 74 5. 맺는 말 96 |
무오사화(戊午士禍)와 표연말(表沿沫) 선생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1. 머리말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조선왕조 최초의 사화(士禍)이다. 이 사화(士禍)의 발단은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근신하지 않고 장흥(長興)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사초(史草)에 올린 것이 동기가 되었다.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존중하는 김종직(金宗直)과 신진사류들은 단종을 폐위․살해하고 즉위한 세조의 불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정인지(鄭麟趾) 등 세조의 공신들을 멸시하고, 대간(臺諫)의 직책을 이용해 세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편 세조의 공신을 제거하고자 계속 상소해 그들을 자극하였다.
특히 김종직(金宗直)은 유자광(柳子光)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고, 함양군수로 부임해서는 유자광(柳子光)의 시(詩)가 현판된 것을 철거해 소각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자광(柳子光)은 김종직(金宗直)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또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 김일손(金馹孫)도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이극돈의 비행을 직필해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극돈과 유자광(柳子光)은 서로 손을 잡고 보복을 꾀하려 했으나 성종이 김종직(金宗直)을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꾸미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승하하고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을 개설하였는데, 이극돈이 그 당상관으로 임명되면서 훈구파가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가지게 되었다. 즉, 이극돈은 김일손(金馹孫)이 기초한 사초 속에 실려 있는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글이라 파악하고 그 사실을 유자광(柳子光)에게 알렸다.
유자광(柳子光)은 즉시 세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해서 김종직(金宗直)이 세조를 비방한 것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한 행위라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연산군은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연산군은 유자광(柳子光)의 상소를 기회로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金宗直)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그래서 이미 죽은 김종직(金宗直)을 대역죄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ㆍ이목(李穆)ㆍ허반(許磐)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凌遲處斬) 등의 형벌을 가하였다. 또한 같은 죄에 걸린 강겸(姜謙)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官奴)로 삼았다.
그리고 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瀚)ㆍ정여창(鄭汝昌)ㆍ강경서(姜景敍)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 등은 불고지죄(不告之罪)로 곤장 100대를 맞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이종준(李宗濬)ㆍ최보(崔潽)ㆍ이원(李黿)ㆍ이주(李胄)ㆍ김굉필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 등은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朋黨)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모두 귀양을 보내어 봉수(烽燧)와 노간(爐干)의 역을 지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魚世謙)ㆍ이극돈(李克墩)ㆍ유순(柳珣)ㆍ윤효손(尹孝孫)ㆍ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洪貴達)ㆍ조익정(趙益貞)ㆍ허침(許琛)ㆍ안침(安琛)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옥사로 많은 신진사류가 희생되었고, 최초의 발견자요 최초의 발설자인 주모자 이극돈까지도 파면되었으나, 유자광(柳子光)만은 그 위세가 당당하였고, 신진사류는 크게 위축되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는 이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속전속결이었다. 시작부터 주요 연루자들의 처벌이 끝날 때까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추국이 시작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20일도 되지 않았다.
2. 표연말(表沿沫) 선생의 생애
1449년(세종 31)에 태어나시고, 1498년(연산군 4)에 49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다.
본관은 신창(新昌)이고,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ㆍ평석(平石)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할아버지는 을충(乙忠)이고, 아버지는 감찰 계(繼)이며,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었다.
약관에 문행(文行)이 세상에 알려지고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으며, 같은 문하의 조위(曺偉)ㆍ김일손(金馹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었다.
1469년(예종 1)에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禮文館)에 들어갔으며, 1485년 장례원(掌隷院)사의(司議)로서『동국통감』찬수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ㆍ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490년에는 이조참의ㆍ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벼슬 첫길인 예문관 시절에 신관(新官)들을 침포(侵暴)하여 금육(禁肉)과 여악(女樂)으로 주연(酒宴)을 베푼 사실이 알려져 징계가 내렸는데, 표연말 선생도 이 자리에 참석한 탓으로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후로 향회(鄕會)에서 금육(禁肉)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聖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喪)을 주자의『가례』에 따라 치른 일로써, 스승인 선산부사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資級)이 하나 높여졌다. 그 뒤 1495년(연산군 1) 응교(應敎)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고, 이듬해인 1496년(연산군 2)에는 직제학(直提學)으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추숭(追崇)을 반대하였다. 그 뒤 승지ㆍ대사간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10) 무오사화(戊午士禍)때는 소릉(昭陵)추복(追復)에 관한 사실을 사초(史草)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장(行狀)을 미화(美化)해 썼다는 이유로 경원(慶源)으로 유배 가던 도중에 애석하게도 은계역(銀溪驛)에서 객사(客死)하셨다.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는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으나,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되었다.
또한 서거정(徐居正)의 문생이 된 인연으로『필원잡기(筆苑雜記)』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고「논학(論學)」에서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을 중심으로 한 초기 사림파의 학문관(學問觀)과 정치관(政治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名文章家)인 유호인(兪好仁) 등과 함께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함양의 구천서원(龜川書院),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17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54년(철종 5)에 후손 석준(奭峻)이 간행한『남계문집(藍溪文集)』4권 2책이 전해지고 있다.
3. 조의제문(弔義帝文)
무수한 인재들이 희생되었던 무오사화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었다. 조의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가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생각하기를「회왕(懷王)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간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하고, 드디어 문(文)을 지어 조문(弔問)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과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낭탐(羊狠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踏溪驛, 夢有神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 “楚懷王^孫心爲西楚霸王所弑, 沈之郴江。” 因忽不見。 余覺之, 愕然曰: “懷王南楚之人也, 余則東夷之人也。地之相距, 不啻萬有餘里, 而世之先後, 亦千有餘載。來感于夢寐, 玆何祥也? 且考之史, 無沈江之語, 豈羽使人密擊, 而投其屍于水歟? 是未可知也。”遂爲文以弔之。惟天賦物則以予人兮, 孰不知尊四大與五常? 匪華豐而夷嗇, 曷古有而今亡? 故吾夷人, 又後千載兮, 恭弔楚之懷王。昔祖龍之弄牙角兮, 四海之波, 殷爲衁。雖鱣鮪鰍鯢, 曷自保兮, 思網漏而營營。時六國之遺祚兮, 沈淪播越, 僅媲夫編氓。梁也南國之將種兮, 踵魚狐而起事。求得王而從民望兮, 存熊繹於不祀。握乾符而面陽兮, 天下固無大於芉氏。 遣長者而入關兮, 亦有足覩其仁義。羊狠狼貪, 擅夷冠軍兮, 胡不收而膏齊斧? 嗚呼! 勢有大不然者兮, 吾於王而益懼。爲醢腊於反噬兮, 果天運之蹠盭。郴之山磝以觸天兮, 景晻愛以向晏。郴之水流以日夜兮, 波淫泆而不返。天長地久, 恨其可旣兮, 魂至今猶飄蕩。余之心貫于金石兮, 王忽臨乎夢想。循紫陽之老筆兮, 思螴蜳以欽欽。擧雲罍以酹地兮, 冀英靈之來歆。)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말 그대로 "의제(義帝)를 조문(弔文)하는 글"로써 초한쟁패기에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회왕) 귀신이 꿈에서 나타났다는 형식을 취했는데 내용 중에서, 회왕(義帝)과 단종 모두 어린 왕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회왕이 왜 꿈에 나타났을까?"라는 마지막 문장의 뉘앙스도 그렇다.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칠장의(七章衣)"이다.
‘칠장의(七章衣)’는 왕세자(王世子)가 입는 대례복(大禮服)으로서, 구장(九章)에서 용(龍)과 산(山)을 뺀 화충(華蟲)ㆍ불(火)ㆍ종이(宗彛)ㆍ조(藻)ㆍ분미(紛米)ㆍ보(黼)ㆍ불(黻)의 7개 무늬를 새겨 넣은 옷이다. 이 옷을 입은 사람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端宗)을 의미하며, 항우는 세조를 뜻하고, 의제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한 단종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었다.
조의제문은 당시 지식인들도 읽기 어려울 정도로 은유적 표현이 가득한 글이었기 때문에 연산군이 알 수 없는 내용이었으나, 조의제문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를 유자광에게 보고한 자가 이극돈(李克墩)이고, 유자광(柳子光)이 조의제문을 친절하게 조목조목 해석해서 연산군에게 일러주었던 것이다.
또한 비록 자신의 허물은 아니지만, 선대(先代) 세조(世祖)의 왕위찬탈(王位簒奪)이란 허물을 일개 신하(臣下)가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왕조(王朝)의 전통성(傳統性)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반드시 응징해야한다는 것이 연산군의 생각이었으며, 훈구파들은 이 일이 신진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전개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연산군 4년(1498) 7월 1일에 시작되었다.
“파평 부원군(坡平府院君) 윤필상(尹弼商),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盧思愼), 우의정(右議政) 한치형(韓致亨),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이 차비문(差備門)에 나아가서 비사(秘事)를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都承旨) 신수근(愼守勤)으로 출납을 관장하게 하니 사관(史官)도 참예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참예하기를 청하니, 수근은 말하기를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윽고 의금부 경역(義禁府經歷) 홍사호(洪士灝)와 도사(都事) 신극성(愼克成)이 명령을 받들고 경상도(慶尙道)로 달려갔는데, 외인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연산군 4년(1498) 7월 17일에 연산군은 전라도 도사(都事) 정종보(鄭宗輔)에게 김종직의 문집 판본을 불태울 것을 명하였으며, 예조에 전교하기를,
“중외의 사람 중 혹 김종직의 문집을 수장한 일이 있으면 즉시 수납(輸納)하게 하고 수납하지 않은 자는 중히 논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같은 날.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에 대해서 연산군과 신하들이 논의를 시작했다.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시황(秦始皇)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羊狠狼貪)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金宗瑞)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왜 노산은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反噬)를 입어 해석(醢腊)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꾀해 화(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없앰으로써 종묘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不臣)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ㆍ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ㆍ홍문관들로 하여금 형(刑)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연산군의 하명(下命)을 받은 정문형(鄭文炯)ㆍ한치례(韓致禮)ㆍ이극균(李克均)ㆍ이세좌(李世佐)ㆍ노공필(盧公弼)ㆍ윤민(尹慜)ㆍ안호(安瑚)ㆍ홍자아(洪自阿)ㆍ신부(申溥)ㆍ이덕영(李德榮)ㆍ김우신(金友臣)ㆍ홍석보(洪碩輔)ㆍ노공유(盧公裕)ㆍ정숙지(鄭叔墀)는,
“지금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보니,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사옵니다. 종직이 세조조에 벼슬을 오래하여 재주가 한 세상에 뛰어났는데 세조가 받아드리지 못한다 하여, 울분과 원망의 뜻을 품고 말을 글에다 의탁하여 성덕(聖德)을 기롱했는데, 그 말이 극히 부도(不道)합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 보면 병자년에 난역(亂逆)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 마땅히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 참시(剖棺斬屍)해서 그 죄를 명정(明正)하여 신민의 분을 씻는 것이 실로 사체에 합당하옵니다.”
라고 하였고, 다른 신하들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김종직에게 극형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또한 상주사람 채수(蔡壽)도 같은 의견을 내었고, 표연말(表沿沫) 선생도
“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 마땅하옵니다.”
라 하였다. 그래서 김종직에 내리는 형(刑)은 정문형(鄭文炯)등이 주창한대로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같은 날 연산군은 다시
“김종직의 제자를 끝까지 추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알고자 하니, 모조리 써서 아뢰라.”
라고 전교하자, 윤필상 등이 일손에게 직접 물으니,
“신종호는 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曺偉)는 종직의 처제(妻弟)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채수(蔡壽)ㆍ김전(金詮)ㆍ최보(崔漙)ㆍ신용개(申用漑)ㆍ권경유(權景裕)ㆍ이계맹(李繼孟)ㆍ이주(李胄)ㆍ이원(李黿)은 제술(製述)로 과차(科次)받았고, 정석견(鄭錫堅)ㆍ김심(金諶)ㆍ김흔(金訢)ㆍ표연말(表沿沫)ㆍ유호인(兪好仁)ㆍ정여창(鄭汝昌)도 역시 모두 수업하였는데, 어느 세월에 수업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창신(李昌臣)은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적에 종직이 응교(應敎)로 있었는데, 창신이《사기(史記)》의 의심난 곳을 질문하였으며, 강백진(康伯珍)은 삼촌 조카로서 젊었을 적부터 수업하였고, 유순정(柳順汀)은 한유(韓愈)의 글을 배웠고, 권오복(權五福)은 종직이 동지성균(同知成均) 시절에 관에 거접하였고, 박한주(朴漢柱)는 경상도(慶尙道) 유생(儒生)으로서 수업하였고, 김굉필(金宏弼)은 종직이 상(喪)을 만났을 때에 수업했습니다.
그 나머지도 오히려 많다고 한 것은, 이승언(李承彦)ㆍ곽승화(郭承華)ㆍ장자건(莊姉健) 등입니다.”
라고 하였다.,
7월 18일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이원(李黿)이 종직(宗直)의 시호(諡號)를 의론하면서 아름다움을 칭찬한 것이 공자(孔子)와 같았으며, 표연말(表沿沫)이 종직의 행장(行狀)을 지었으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하옵소서.”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연산군이 ‘그렇게 하라’고 전교(傳敎)하였다. 그래서 김종직의 시호를 의론한 이원(李黿)과 김종직의 행장(行狀)을 지은 표연말(表沿沫) 선생의 공초(供招)가 시작되었다. 먼저 이원(李黿)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일찍이 종직에게 수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직이 동지성균(同知成均)으로 있을 적에 신이 생원(生員)으로 성균관에 거접(居接)하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觀魚臺賦)를 차운(次韻)하여 종직의 과차(科次)로 나아가니, 종직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일손이 신더러 그 제자라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오며, 그 문집도 신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고, 이른바 ‘육군(六君)’이란 것도 역시 알지 못하옵니다.
신이 봉상 참봉(奉常參奉)이 되어 종직의 시호를 의론하기를 ‘종직은 천자(天資)가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온량(溫良)하고 자애(慈愛)하였고, 일찍이 시례(詩禮)를 배워 자신이 이 도를 책임하여 덕에 의거하고 인(仁)에 의지하고, 충신하고 독경(篤敬)하여 사람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자기 직책을 삼았다. 그 학문을 하는 데는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겼고, 그 일에 임해서는 지극히 간략하여 번거함을 제거하였고, 그 사람을 가르침은 문(文)을 널리 배워 예로 간략하고, 어버이를 섬기면 그 효를 다하고 임금을 섬기면 그 충을 다했으며, 사람의 선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악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청(淸)해도 애(隘)하지 않고 화(和)해도 흐르지 않았으며, 문장과 도덕이 세상에 특출하였으니, 참으로 삼대(三代) 시대의 유재(遺才)인 동시에 사문(斯文)에 대한 공이 중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본시 종직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옵고, 다만 표연말(表沿沫)이 지은 행장(行狀)에 극구 칭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의론한 것이온데, 그때에 신이 과찬을 한 것으로써 죄를 받았습니다.”
하였다. 다음은 표연말(表沿沫) 선생이 공초하기를,
“신은 함양(咸陽)에 사옵는데, 종직이 본군의 군수로 와서 신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이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경의(經義)에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였으며, 그 문집은 신이 보았으나, 조의제문은 문의를 해득하지 못했고, 그 시집(詩集)은 당시에 보지 못했으므로 이른바 ‘육군(六君)’이 어느 사람을 지적한 것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신이 종직의 행장을 지으면서 쓰기를 ‘공의 도덕과 문장은 진실로 일찍이 현관(顯官)으로 등용되어 사업에 베풀었어야 할 것인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빌어 오래 하리(下吏)에 머물러 있었고,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입어 빨리 육경(六卿)으로 승진되어 바야흐로 크게 쓰이게 되었는데, 공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두 번 다시 조정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도의 불행이 아니랴! 의논하는 자는,「공이 조정에 선 지 오래지 않아서 비록 큰 의논을 세우지 못하고 큰 정책을 진술하지 못했다.」하지만, 한 세상의 사문(斯文)의 중망을 짊어지고 능히 사도(師道)로서 자처하여 인재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근세에 한 사람일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두 사람은 단지 학문적으로 김종직이란 거유(巨儒)를 숭상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시호를 의론하고 행장을 지었을 뿐인데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7월 19일에는 실록청(實錄廳)에서,
“홍한(洪瀚)의 사초(史草)에는, ‘세조께서 화가위국(化家爲國)을 꾀하고자 하여 음으로 무사(武士)와 결탁했다.’ 하였고, 신종호(申從濩)의 사초에는 ‘노산(魯山)의 난(亂)에 정창손(鄭昌孫)이 맨 먼저 계창하여 벨 것을 청했으니, 노산이 비록 세조에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창손(昌孫)이 몸소 섬기었는데, 차마 제창하여 베자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표연말(表沿沫)의 사초에는 문종 비의 처음 능인 소릉(昭陵)을 헌 일들은 문종에게 저버림이 많았다.’ 하였습니다.”
라며, 일을 확대하려 하자, 표연말(表沿沫) 선생이 나서서,
“세조 대왕께서 운을 타고 흥기하셨고 문종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소릉(昭陵)을 반드시 헐지 않아도 되는데 헐어버렸기 때문에 문종에게 저버림이 있다 한 것입니다. 세조조(世祖朝)의 일을《성종실록》에 쓴 것은, 이미 정미수(鄭眉壽)를 수용한 것을 썼기 때문에 그 사유를 자상히 밝히고자 하여 그런 것입니다.”
하고 일의 전말을 있는 그대로 아뢰었으며, 홍한(洪瀚)도 공초하기를,
“신이 한림(翰林)이 되어 국조의《실록》을 보니 이르되, ‘세조 대왕이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바야흐로 선비를 구하자, 권남(權擥)이 한명회(韓明澮)를 추천하니, 명회는 심복(心腹)과 이목(耳目)이 되어 많은 무사를 천거하여 마침내 큰 공을 이루었다 하였기에, 명회의 죽음을 기록함에 있어 그 출처와 시말을 자상히 하고자 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고, 화가(化家)를 꾀하고자 했다는 것은 옛 글에, ‘집을 화(化)하여 나라를 만든다.(化家爲國)’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고, 음(陰)으로 무사와 결탁했다는 것은, 그때에 권간(權奸)들이 용사(用事)하여 흉화(兇禍)가 불측하므로 감히 드러나게 일을 도모할 수 없었고 명회도 역시 음으로 무사를 천거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날 연산군은 정석견(鄭錫堅) 등의 초사(招辭)를 보고, 전교하기를,
“표연말(表沿沫)ㆍ이원(李黿)은 진실로 죄가 있거니와, 석견이 말하기를 ‘종직의 시집(詩集)을 펴 볼 겨를이 없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떠냐? 그 나머지 사건 관계자는 모조리 석방하는 것이 어떠하냐? 이주(李胄)의 말한 바는 반드시 내용이 있으니, 신문해 보라.”
하니, 윤필상(尹弼商) 등이 공의(共議)하여, 채수(蔡壽)ㆍ이창신(李昌臣)ㆍ김심(金諶) 등을 써서 아뢰기를,
“이 세 사람은 당연히 석방해야 하오며, 김전(金詮)은 당연히 신문할 일이 있사오며, 최부(崔溥)는 사초(史草)와 행장(行狀)에 제자(弟子)라 칭하였고, 그 초사(招辭)에 또 이르기를, ‘비록 시집은 수장하였지만 펴 볼 겨를이 없었다.’ 한 것은, 이 말이 바르지 못한 것 같사오며, 사초에 이르기를, ‘김굉필(金宏弼)은 더욱 종직이 애중히 여기는 바 되었다.’ 하였으니, 이 세 사람은 석방할 수 없사옵니다. 석견의 ‘단지 목록만 보고 그 글을 보지 못했다.’는 그 말도 바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마는, 전라도는 사무가 하도 많으니 진실로 펴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오며, 또 그가 종직에게 붙지 않은 내용은 유자광이 갖추어 알고 있사옵니다.”
하였다. 그러자 정석견이 김종직에게 붙지 않은 사유를 유자광이 알고 있다고 지목받은 유자광(柳子光)은 아뢰기를,
“신은 듣자온즉, 함양(咸陽) 사람들이 종직의 사당을 세운다 하기에 바로 물어 본 결과, 대개 표연말(表沿沫)ㆍ유호인(兪好仁)이 사주한 것이요, 그 고을 부로(父老)들이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본 고향이므로 중지시켰더니, 나중에 신이 거상(守喪)하느라고 남원 고을에 사는데, 이 승지(承旨)가 되어 정석견에게 편지를 통해서 신에게 촉탁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석견은 신을 찾아와 표연말(表沿沫)의 뜻을 말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그대의 생각에는 사당을 세우는 것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더니, 석견은 말하기를, ‘우리 조부(祖父)가 향곡(鄕谷)에 있어 아이들을 교수(敎授)하여 근후(謹厚)함으로 소문났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학식과 도학이 높은데도 벼슬을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구하자, 고을 사람들이 내 조부로 명(命)에 응하려 하니, 내 형(兄)은 말리면서 말하기를, ‘내 조부의 행적은 이뿐인데 어진 이를 구하는 명령에 응하려고 한다면, 이는 비단 당세(當世)를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후세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이 사당을 세우는 것도 역시 후세를 속이는 것이다.’ 했은 즉, 석견이 종직의 당(黨)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옵니다.”
하니, 연산군은,
“채수ㆍ이창신ㆍ김심은 석방하라. 무령군(武靈君) 유자광이 석견(錫堅)이 종직에게 붙지 않은 사실을 해명했지만, 역시 선뜻 석방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뭇사람들의 공론이 역시 석방할 만하다 하니 석방하도록 할 것이나, 다만 문집(文集)을 간행한 잘못만은 율(律)에 비추어 계하도록 하라.
성중엄(成仲淹)은 구금을 당한 지가 이미 오래요, 또 그가 연류된 것은 이목의 편지 때문이니, 아직 석방을 보류하고 신문해야 할 일이 있거든 국문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매, 윤필상(尹弼商) 등이 아뢰기를,
“중엄(仲淹)의 범죄에 대한 경중은 현재로 분변되지 못했으니, 선뜻 석방할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알겠다. 지금 이 옥사(獄事)는 세상에 폭로하기 위한 것인데, 불초한 자가 다시 써 두는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윤필상(尹弼商) 등이 아뢰기를,
“신문이 끝나면 당연히 교서(敎書)를 발포(發布)하여 중외에 유시해야 하고, 그 옥사(獄辭)와 교서는 사관(史官)이 마땅히 모두 써야 하니, 비록 불초한 자가 써 두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후세에서 누가 잘 믿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내일 내가 마땅히 다시 말하겠다.”
하였다. 윤필상(尹弼商) 등이 이주(李胄)를 형장 심문할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반드시 사연이 있을 것이니, 형장 심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주는 형장(刑杖) 30대를 맞고서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언관(言官)으로서 전하의 의향을 돌리고자 그리하였습니다. 어찌 딴 사정이 있사오리까.”
하였다. 또한 필상 등은 왕명으로 석방된 홍한(洪瀚)ㆍ표연말(表沿沫)ㆍ최부(崔溥)를 형장 심문할 것을 청하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왕은 그들의 주문에 응하였다. 그러자 필상 등이 아뢰기를,
“율(律)에 비추어 정석견이 종직의 문집을 발간한 죄는 곤장 80대와 고신(告身) 3등을 박탈하는 것에 해당하옵니다.”
하니, 파직(罷職)시키도록 하였다.
7월 20일에는 허반(許磐)의 공초가 있었다.
“신의 처음 초사(招辭)에 ‘덕종의 상(喪)을 끝마친 뒤에 세조께서 권씨에게 육식(肉食)을 권했는데, 권씨가 먹지 아니하니, 상이 노하시자 권씨가 달아났다.’는 일은 집안에서 항상 말해 오기로 신이 이를 일손에게 말했다 하였사온데, 그 실상인즉 당초에 윤씨의 일을 말할 때에 권씨의 일까지 연속해서 말하였기 때문에, 말이 오가는 사이에 착오가 생겨서 과연 일손의 기재한 바와 같이 되었사옵니다.”
그리고 표연말(表沿沫) 선생도 공초하였다.
“신의 사초(史草)에 ‘소릉(昭陵)을 꼭 헐지 않아도 되는데 헐었다.’고 한 것은, 문종께서 승하하신 뒤에 헐어버렸기 때문이며, 조의제문으로 말하오면 글 뜻이 험하고 궁벽하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였사옵고, 종직의 행장에 도덕과 문장을 극구 칭찬한 것은, 종직의 가슴속에 쌓인 포부를 비록 알리지는 못했을지라도 한 시대 사람들이 다 일컫기 때문에 신이 행장에다 이와 같이 칭찬한 것이옵니다.”
하였다.
7월 26일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ㆍ권경유 등의 죄목을 논하여 서계(書啓)하기를,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는 대역(大逆)의 죄에 해당하니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이목(李穆)ㆍ허반(許磐)ㆍ강겸(姜謙)은 난언절해(亂言切害)의 죄에 해당하니 베어 적몰(籍沒)하고, 표연말(表沿沫)ㆍ정여창(鄭汝昌)ㆍ홍한(洪瀚)ㆍ무풍부정(武豊副正) 총(摠)은 난언(亂言)을 했고, 강경서(姜景敍)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는 난언(亂言)한 것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아울러 곤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내쳐서 봉수군(烽燧軍) 정로한(庭爐干)으로 정역(定役)하고, 이종준(李宗準)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강백진(康伯珍)ㆍ이주(李胄)ㆍ김굉필(金宏弼)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은 붕당(朋黨)을 지었으니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付處)하고, 윤효손(尹孝孫)ㆍ김전(金詮)은 파직을 시키고, 성중엄(成重淹)은 곤장 80대를 때려서 먼 지방으로 부처하고, 이의무(李宜茂)는 곤장 60대와 도역(徒役) 1년에 과하고, 유순정(柳順汀)은 국문하지 못했으며, 한훈(韓訓)은 도피 중에 있습니다.”
하고, 따라서 대간(臺諫)들도 역시 붕당(朋黨)으로 논할 것을 청하였다. 유자광은 아뢰기를,
“강겸(姜謙)이 맨 처음 허반(許磐)의 말을 들었으나, 일손이 말을 내놓은 후 답하기를, ‘나도 역시 일찍이 권씨의 조행이 과연 높다고 들었다.’ 하였은 즉, 허반의 죄와는 사이가 있지 않을까 하옵니다.”
하고, 노사신은 아뢰기를,
“종직이 시문(詩文)을 지어서 기롱하였으니, 그 정이 절해(切害)하므로 대역(大逆)으로써 논단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오나, 일손 등은 단지 종직의 시문만을 찬양하였으니, 종직과 더불어 죄과를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이 일은 마땅히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 온 즉 용이하게 결정지을 수 없사오니, 난언 절해(亂言切害)로 논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비록 이와 같이 하여도 역시 마땅히 가산(家産)은 적몰(籍沒)해야 하옵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아뢰기를,
“신종호(申從濩)ㆍ이육(李陸)은 지금 비록 사망하였사오나, 아울러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일손 등을 벨 적에는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가 보게 하라. 근일 경상도(慶尙道)와 제천(堤川) 등지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사람은 지진이 임금의 실덕에서 온다 하였으나, 금번의 변괴는 이 무리의 소치가 아닌가 여겨진다.
유생(儒生)이 혹은 관(館)에 있고 혹은 사학(四學)에 있으므로 단지 옛 글만 보았고, 조정의 법을 알지 못하여 서로 더불어 조정(朝政)을 비방하니, 어찌 이와 같은 풍습이 있었겠는가.
이 무리가 비록 문학이 있다 할지라도 소위가 이러하니, 도리어 학식이 없는 사람만 못하다. 죄 있는 자는 당연히 그 죄에 처해야 하는 것이니, 이 뜻으로써 다시 선성 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에게 물으라.
무령군 유자광이 말한 강겸(姜謙)의 일은 과연 가긍한 점이 있으니, 그 죄가 마땅히 허반보다 경해야 하며, 그 나머지도 스스로 율문(律文)이 있을 것이나 오직 이주(李胄)만은 당연히 한 등급을 더해야 하며, 윤효손(尹孝孫)은 기망(欺罔)한 말이 있었으니, 당연히 파직해야 하며, 이극돈(李克墩)은 아뢰려 한 지가 오래라고 한다.
어세겸(魚世謙)도 역시 파직해야 하느냐? 의논하여 아뢰라. 이육과 신종호도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한다. 이는 큰일이니 나는 종묘에 고유하고 중외(中外)에 반사(頒赦)하려고 한다. 경 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윤필상(尹弼商) 등이 아뢰기를,
“종묘에 고유하고 사령(赦令)을 반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옵니다. 이육ㆍ신종호에 있어서는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다. 윤필상을 중심으로 한 일파들은 연산군의 구미(口味)에 맞는 이야기만 하였으나, 사신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김일손의 죄를 무겁게 이야기한 것에 비해서 사신들은 김일손이 시문(詩文)을 자작(自作)한 것이 아니고 단지 김종직만 찬양하는데 그쳤기 때문에 그 죄가 마땅히 가벼워야 한다고 했으나 연산군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전교하기를,
“종호(從濩) 등은 아뢴 바에 의해 처치하라.”
하였다.
같은 날,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유형(流刑)이나 부처(付處)를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15일 노정(路程) 밖으로 정배(定配)해야 한다.”
하니, 윤필상(尹弼商) 등이 서계하기를,
“강겸(姜謙)은 강계(江界)에 보내어 종을 삼고, 표연말(表沿沫)은 경원(慶源)으로, 정여창(鄭汝昌)은 종성(鍾城)으로, 강경서(姜景敍)는 회령(會寧)으로, 이수공(李守恭)은 창성(昌城)으로, 정희량(鄭希良)은 의주(義州)로, 홍한(洪瀚)은 경흥(慶興)으로, 임희재(任熙載)는 경성(鏡城)으로, 총(摠)은 온성(穩城)으로, 유정수(柳廷秀)는 이산(理山)으로, 이유청(李惟淸)은 삭주(朔州)로, 민수복(閔壽福)은 귀성(龜城)으로, 이종준(李宗準)은 부령(富寧)으로, 박한주(朴漢柱)는 벽동(碧潼)으로, 신복의(辛服義)는 위원(渭原)으로, 성중엄(成重淹)은 인산(麟山)으로, 박권(朴權)은 길성(吉城)으로, 손원로(孫元老)는 명천(明川)으로, 이창윤(李昌胤)은 용천(龍川)으로, 최부(崔溥)는 단천(端川)으로, 이주(李胄)는 진도(珍島)로, 김굉필(金宏弼)은 희천(熙川)으로, 이원(李黿)은 선천(宣川)으로, 안팽수(安彭壽)는 철산(鐵山)으로, 조형(趙珩)은 북청(北靑)으로, 이의무(李宜茂)는 어천(魚川)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연산군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튿날 7월 27일에는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 사직에 고유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령(赦令)을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 신의 자질로 국가가 위의(危疑)하고 뭇 간신이 도사린 즈음을 당하여, 침착한 기지와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시키시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되어,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우뚝 백왕(百王)의 으뜸이었다.
그 조종(祖宗)에게 빛을 더한 간대(艱大)한 업적과 자손에게 끼친 연익(燕翼)의 모훈(謨訓)을, 자자손손 이어 받아 오늘에까지 이르러 아름다웠었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내포하고, 음으로 당류(黨類)를 결탁하여 흉악한 꾀를 행하려고 한 지가 날이 오래되었노라.
그래서 그는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假託)하여, 문자에 나타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넘실대는 악은 불사(不赦)의 죄에 해당하므로 대역(大逆)으로써 논단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고, 그 도당 김일손ㆍ권오복ㆍ권경유가 간악(姦惡)한 붕당을 지어 동성상제(同聲相濟)하여 그 글을 칭찬하되, 충분(忠憤)이 경동한 바라 하여 사초에 써서 불후(不朽)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종직과 더불어 과(科)가 같으므로 아울러 능지처사(凌遲處死)하게 하였노라.
그리고 일손이 이목ㆍ허반ㆍ강겸 등과 더불어 없었던 선왕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대서 서로 고하고 말하여 사(史)에까지 썼으므로, 이목ㆍ허반도 아울러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내쳐 종으로 삼았노라.
그리고 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瀚)ㆍ정여창(鄭汝昌)ㆍ무풍정(茂豊正) 총(摠) 등은 죄가 난언(亂言)에 범했고, 강경서(姜景敍)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難言)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으므로 아울러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를 밖으로 내치고, 이종준(李宗準)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이주(李胄)ㆍ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 등은 모두 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어 서로 칭찬하였으며, 혹은 국정(國政)을 기의(譏議)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였으므로, 희재는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 밖으로 내치고, 이주는 곤장 백 대를 때려 극변(極邊)으로 부처(付處)하고 이종준ㆍ최보ㆍ이원ㆍ김굉필ㆍ박한주ㆍ강백진ㆍ이계맹ㆍ강흔 등은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함과 동시에 내친 사람들은 모두 봉수군(烽燧軍)이나 정로한(庭爐干)의 역(役)에 배정하였고, 수사관(修史官) 등이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므로 어세겸(魚世謙)ㆍ이극돈(李克墩)ㆍ유순(柳洵)ㆍ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ㆍ조익정(趙益貞)ㆍ허침(許琛)ㆍ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시켰다.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되었으므로 삼가 사유를 들어 종묘 사직에 고하였노라.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적고 일에 어두운 사람으로 이 간당(奸黨)을 베어 없앴으니, 공구한 생각이 깊은 반면에 기쁘고 경사스러운 마음도 또한 간절하다. 그러므로 7월 27일 새벽을 기하여 강도ㆍ절도와 강상(綱常)에 관계된 범인을 제외하고는 이미 판결이 되었든 판결이 안 되었든 모두 사면하노니, 감히 유지(宥旨)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다스릴 것이다.
아! 인신(人臣)이란 난리를 만들 뜻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부도(不道)의 죄가 이미 굴복하였으니, 군자가 이용하여 과(過)를 사하고 죄를 유(宥)한다.’ 하듯이 마땅히 유신(惟新)의 은혜에 젖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이 뜻을 납득할 줄 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주가 낳은 명신(名臣) 표연말(表沿沫) 선생은 유배지 경원으로 가던 도중에 은계역(銀溪驛)에서 돌아가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5. 맺는 말
성종실록 13권에는 표연말 선생을,
“평생에 학문과 행실을 행하였으며, 어미의 상을 당하자 애훼(哀毁)함이 제도를 넘고 소상(小祥)에야 비로소 소채를 먹었고, 여묘에서 3년을 살며 술을 마시지 않았고, 이를 보이고 웃지 않았으며, 밤에 띠를 풀지 않았고, 영역(塋域) 밖에는 한 번도 발을 딛지 않았습니다. 상사(喪事)를 다스리는 데는 한결같이《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하니, 향리(鄕里)가 감화하여 불재(佛齋)를 폐한 자가 있으며, 3년상을 마친 뒤 형제를 모아 유산을 나누는데, 젊고 장성한 노비[臧獲]는 형들이 모두 점유하려고 하니,
표연말(表沿沫)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어머님은 평상시에 이 노비를 모두 소매(少妹)에게 소속시킬 뜻이었는데, 아직 신령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거늘 차마 그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하고는 노약(老弱)한 자를 먼저 자기에게 예속하니, 형들이 부끄러워 감히 논박하지 못하였습니다.
향중(鄕中)에 지식이 있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표연말의 아들의 행실은 설포(薛包)에게도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하였습니다. ”
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표연말(表沿沫)선생은 평생을 학문과 벗했으며, 효자로써의 도리를 다한 선비였다. 또한 표연말(表沿沫) 선생의 졸기에 있듯이 선생은 성품이 순후하고 성실한데다가 서사(書史)를 통하여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오래 경악(經幄)에서 모시었다.
이런 선생이 스승의 행장(行狀)을 쓴 것은 단지 제자로써의 도리를 다한 것이고, 스승의 행장(行狀)이었기 때문에 다소 미화(美化)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공(公)의 도덕과 문장은 진실로 일찍이 현관(顯官)으로 등용되어 사업에 베풀었어야 할 것인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빌어 오래 하리(下吏)에 머물러 있었고,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입어 빨리 육경(六卿)으로 승진되어 바야흐로 크게 쓰이게 되었으나, 공(公)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두 번 다시 조정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도의 불행이 아니랴!
의논하는 자는, 공(公)이 조정에 선 지 오래지 않아서 비록 큰 의논을 세우지 못하고 큰 정책을 진술하지 못했다하지만, 한 세상의 사문(斯文)의 중망을 짊어지고 능히 사도(師道)로서 자처하여 인재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근세에 한 사람일 따름이다.’
라는 행장(行狀)내용에는 세조임금을 사무치게 욕한 내용도 없고, 대대로 이어지는 왕조에 대한 깊은 불신의 그림자도 없다.
그러나 단지 정치적인 반목 때문에 스승과 6명의 제자들이 참형을 당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 속에서 표연말(表沿沫) 선생이 스승의 행장(行狀)을 썼다는 이유로 유배(流配)를 당하고, 그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객사(客死)한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표연말 선생의 죽음을 두고「실록(實錄)」에는,
“유배(流配)되어 가던 표연말(表沿沫)이 은계역(銀溪驛) 도중에서 죽었다. 표연말(表沿沫)은 성품이 순후하고 성실한데다가 서사(書史)를 통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다. 오래 경악(經幄)에서 모시었으며, 여러 벼슬에서 지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까지 이르렀다.”
는 짤막한 ‘졸기’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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