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舊當) 조목수(趙沐洙)의
<상산지(商山誌)> 초책(草冊) 고(考)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목 차 | ||||
1. 들어가며168 2. 조선시대의 지리사록(地理史錄)171 3. 구당 본 초책 이전 상산지 개설(槪說)177 4. 구당본(舊堂本) <상산지(商山誌)> 초책(草冊)215 5. 구당본 이후의 상산지240 6. 현대의 상주 지리사록256 7. 글을 맺으며257 |
1. 들어가며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역사 속에서 역사를 창조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 가고 있다 이에 따른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가 통용되는 시대부터 기록으로 전하게 되었고, 한지역의 지역사를 근원으로 하여 나라의 국사가 되고 세계의 세계사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바로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바람직한 역사를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에 부합하여 뒷사람들의 삶이 더욱 발전되도록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상주에도 시대를 대변하는 여러 편의 향토지지가 간행되어 오늘까지 전하여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후대에 또 하나의 책 편으로 계속이어 질 것이다.
창석본을 위시한 우리 상주의 향토지리사록의 책본 별 개요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상주 지리사록 책 본별 개요
책본별 | 간행년도 | 년차 | 간행 주체 | 편저자 | 형식 | 지역 범위 |
상산지창석본 | 1617 (광해9) |
| 개인 | 이 준 | 순한문 | 상주목 |
상산지청대본 | 1749 (영조25) | 132 | 사찬 | 권상일 | 필사본 | 상주목 |
상산지구당본 (초책) | 1786 (정조10) | 37 | 〃 | 조목수 | 〃 | 〃 |
상산지임진본 (상주목읍지) | 1832 (순조32) | 46 | 〃 | 조술립 채주욱 등 | 〃 | 〃 |
상주읍지 | 1871 (고종8) | 39 | 관찬 | 미상 | 〃 | 〃 |
상주목읍지 | 1895 (고종32) | 24 | 〃 | 〃 | 〃 | |
상산읍지 | 1899 (고종36) | 4 | 〃 | 〃 | 〃 | |
상산지무진본 | 1928 (왜정) | 23 | 〃 | 이시은 정동철 | 순한문 인쇄본 | 상주군 |
상 주 지 | 1989 | 61 | 〃 | 권태을외 | 국한문 혼용 | 상주시 상주군 |
상주시사 | 2010 | 21 | 〃 | 상주문화원 | 인쇄본 | 상주시 |
창석(蒼石) 청대(淸臺) 구당(舊堂) 본이라고 함은 편저자의 호(號)를 책 본의 이름으로 취한 것이고, <상산지> 무진본은 일제침략기 무진년에 간행된 것이라고 하여 필자가 편의상 구분한 것이다. 지역 범위의 상주목 관할은 1914년 함창군이 상주군에 편입되기 이전의 구역으로 현대의 의성군 단밀면 일원과 문경시 영순면, 산양면, 산북면 일부, 동로면 일부가 상주목 관내였음을 뜻한다. 1871년 이후 조선조 고종년간에 간행된 세 차례의 읍지(邑誌)는 책머리에 서문(序文)과 말미에 발문(跋文)이 없으므로 정확한 년대를 알 수 없어 간행 내용 중에 환적(宦蹟)조목 최종 인물목에 상주목사 재직년도를 간행년도로 필자가 추정한 것일 뿐인 만큼 뒷날의 상고(詳考)를 요하는 바이다.
향토에서 간행된 지리사록은 위의 표와 같이 483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10차례 책본이 간행되었으나 일반적으로 우리 상주의 예전 역사지리서를 상산지라고 총칭하기도 한다.
그중에도 1928년 왜정치하 무진년에 간행된 책 본은 앞에서 간행한 내용들을 비교적 종합 증보한 성격이 있어 이것으로 역사적 사실들을 상고하는 경우가 많다.
옛 <상산지> 책본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는 관계로 현대 사람들이 보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1984년도에 당시의 상주읍장으로 재직하던 김자상씨가 일제강점기 무진년 간행본의 주요부분을 발췌하여 국한문 문체로 1차 번역을 하였고 뒤이어 2003년도에 상주문화원에서 김자상씨에게 재차 의뢰하여 일제와 관련된 인물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번역한 바 있다.
<상산지> 구당본은 간행되었음이 분명하나 지금까지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다가 최근에 “<商山誌> 丙午草冊. 舊堂誌(상산지 병오초책, 구당지)라는 책본이 발견되었다. 초책이라고 하지만 그 내용이나 편집이 거의 완성된 수준으로 정서(淨書)되어 주요 사록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할 정도로 소중한 책본이다. 1749년(영조25) 청대본이 간행되고, 1832년(순조32) <상주목읍지>가 간행되기까지 83년이 지나는 동안 이 책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공간적 시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뜻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간행되었음이 분명한 책 본이 세간에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초책이라도 발견되었다는 것은 지역사의 한 부분을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상산지> 구당본 초책을 중심으로 한 그전과 그 후의 상주지리사록의 대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조선시대의 지리사록(地理史錄)
조선시대의 지리사록은 조선조 초기에부터 각 고을의 지지(地誌)인 동시에 지방사록(地方史錄)이며 행정사례집으로서 읍지(邑誌)로 총칭하여 간행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전국적인 관찬지지(官撰地志)의 1차 자료로 각 고을 별로 작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형되고 구체적이었다.
따라서 우리 상주에 현존하는 최초의 향토지지인 <상산지> 창석본이 간행된 1617년 이전에 이미 전국적 간행지지의 한 지역사로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상주와 관련된 주요 지리사록의 책본 별 개요와 상주 지역사에 관한 주요목록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상주 관련 주요 지리사록의 책본 별 개요
책본별 | 간행년도 | 년차 | 간행 주체 | 편저자 | 지역 범위 | 체재 | 상주지역사 주요목록 |
경상도 지리지 | 1425 (세종7) | 관찬 | 하연(河演) 금유(琴柔) 김빈(金鑌) | 경상도 | 필사본 | 연혁, 속현, 부곡, 명산대천, 사방계(四方界), 호수, 인구, 토성(土姓), 공부(貢賦)토산(土産), 제언(堤堰), 봉수(烽燧) *본주와7개속현별로구분 | |
신찬팔도 지리지 | 1432 (세종14) | 7 | 〃 | 노사신 (盧思愼) 강희맹 (姜希孟)등 | 전국 | 〃 | 경상도지리지와같은 지지의전국합본 |
경상도 속찬 지리지 | 1469 (예종1) | 15 | 〃 | 각읍도 | 경상도 | 〃 | 경상도지리지속편으로 항목 추가 수령명현(守令名賢), 제언추가, 역참과거리, 영현(嶺峴), 도진(渡津), 정도(程途), 약제, 도자기소, 읍성, 관방(關防), 유명누대(樓臺), 제영(제영), 원우(院穻) |
세종실록 지리지 | 1454 (단종2) | 22 | 〃 | 변계량 (卞季良)등 | 전국 | 〃 | 연혁, 속현, 부곡(部谷), 명산대천, 사방계 호수, 인구, 토성, 인물, 기후, 풍속, 간전(墾田)토산, 토공(土貢), 자기소.읍성, 역, 봉수, 누대제(大堤) |
신동국 여지승람 | 1530 (중종25) | 61 | 관찬 | 이행(李荇) 윤은보 (尹殷輔) 신공제 (申公濟) 등 | 전국 | 목판본 | 건치연혁, 속현, 관(管), 관원, 군명(郡名)성씨, 풍속, 형성(形腥)산천, 토산, 성곽, 봉수, 궁실(宮室), 누정, 학교, 역원, 교량, 불우(佛宇), 명환(名宦), 사묘(祠廟)고적, 인물, 제영 |
여지도서 (輿地 圖書) | 1765 (영조41) | 235 | 〃 | 각읍 | 〃 | 필사본 | 상주목지도,방리(坊里),호구,건치연혁,군명,형성읍성,관직,산천,성씨,풍속,궁실,학교단묘,서원,공해(公廨),제언,창고,물산,교량,역원,목장,산성,봉수,누정,사찰,고적,명환,인물,제영,한전(旱田),수전(水田),진공(進貢),조적,전세,대동, 균세(均稅),봉름(俸廩),군병 |
대동지지 (大同 地志) | 1866 (고종3) | 101 | 사찬 | 김정호 (金正浩) | 〃 | 〃 | 연혁,고읍(古邑),방면(坊面),산수,형성,성지.고성.영아(營衙)봉수.창고.역참.진도.교량.토산.누정.원사.고적 |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 1911 | 45 | 사찬 | 이긍익 (李肯翊) | 전국 | 필사본 | 임진왜난사일부.경상감영설치.서원.사벌국역사.경상도내력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 勝覽) | 1937 | 26 | 〃 | 이병연 (李秉延) | 전국 | 목활 자본 | 견치연혁.속현.군명.산천.군세.토산.기차역.교량.형승.고적.문묘.단묘.사찰.학교.수비(竪碑).능총묘.누정.제영 유현(儒賢)학행.명환.충효열.문무.사마(司馬) |
교남지 | 1940 | 3 | 〃 | 정원호 (鄭源浩) | 영남 | 활자본 | 연혁.군명.관직.성서.산천.읍면동리.호구.토지.부세..토산.관공서.교원(校院)사찰.관안(官案).인물.도로.교량.제언.시장.역원.봉수 능묘.고적누정.비판(碑板)책판 |
위의 표에서 보는바 <경상도지리지>는 조선시대 현존하는 지리지 중 가장 오래된 책본으로서, 1392년 조선이 개국한 이후 20여년이 지난 때에 경상도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지리사록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 또한 그 지역의 역사적 연혁과 관할하는 단체(속현)나 주요지역(부곡)․명산과 대천․호수와 인구․성씨․인공적 방제시설(제언)․세금(공부)․지역의 토산품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우리 상주와 그 당시 인구와 호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지리지> 내용 중 상주 관내 인구 및 호수
지역별 | 호 수 | 인 구 (口) | ||
계 | 남 | 여 | ||
계 본주(本州) 중모현 청 리 단 밀 산 양 공 성 영 순 | 2,392 1,845 109 54 140 112 110 22 | 12,164 6,397 822 629 1,425 1,339 1,279 273 | 5,718 3,132 150 307 700 667 630 132 | 6,446 3,265 672 322 725 672 649 141 |
표에서 보는바 당시의 상주목 관내 인구가 12,164명이고, 호 수가 2,392명이니 호당 평균 인구가 5명 정도이다. 당시의 호 수와 인구 기준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를테면 노비의 호 수와 인구도 계수에 포함되었는지 중모현의 경우 남자 인구가 여자 인구에 비하여 현저히 적은 것은 어떤 연유인지 의문되는 것이 많기는 하나 일단은 조사에 의한 통계라는 점은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경상도지리지>가 편찬되기까지 조정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현대와 같이 교통통신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국가적인 큰 일을 수년간에 걸쳐 정책적 과제로 수행하여 <경상도지리지>가 간행되기까지는 7년이 지난 1432년에야 전국적 지리지인 <신찬팔도지리지>가 비로소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록된 내용을 각 목․읍별로 조사하고 일정한 체재와 기준에 따른 보고서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우리 상주 어디에도 그 기록에 전하지 않고 있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지리지>로부터 <신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100여년에 이르는 동안에 책본 별 수록 목록을 살펴보면 앞의 책본에 의거하여 증보(增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고, 시대가 지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 수록하여 사회가 발전되고 다양하였으며, 책본의 편집 또한 더 구체적이었음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인물, 기후, 풍속, 간전, 자기소, 읍성, 역, 누 등이 추가 되었고,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역참과 거리 영현, 도진, 정도, 약제와 원우, 그리고 유명한 문학작품이나 남겨두어야 할 기록물을 제영이라는 목으로 구분하여 새로이 수록하였음은 지리 사록으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기준에 대한 중요성을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책이 간행되기까지 편찬과정은 한 왕대에 완성되지 못하고, 두 왕대 또는 세 왕대에 이르는 경우도 있으며 이에 관여한 인사(人士)도 여러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지지의 편모(片貌)는 조선조 이전에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간략한 것이 수록되었으나 주(州)․군(郡)․현(縣)의 각 소속 관계와 변천 과정을 약기(略記)한 것에 불과 하다. 지리지다운 기록은 세종대에 와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전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지지편찬의 시도는 세종 6년(1424)년의 일이고, 그때에 저술된 지지가 <경상도지리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세종 14년(1432)왕명으로 윤회(尹淮)․신장(申檣) 등에 의하여 편찬되어, 전국지지로서의 본격적 면모를 갖춘 것으로 세종실록에 수록하였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조선초기의 전국적 지리지로서 국가 통치 자료로서의 가치를 더 하였다고 할 수 있고, 그 뒤의 지리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고 본다. 세조대에 와서도 집현전 학사 양성지에게 지도까지 첨부하는<팔도지지>를 편찬하도록 명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예종 대에까지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계속 추진하게 하였지만, 역시 완성을 거두지 못하였다. 양성지가 계속 추진하던 <팔도지지>는 성종 대에 와서야 완성 되었다. 성종은 양성지가 만든<팔도지지>를 기간으로 삼고 규모를 다시 크게 하여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양성지 등을 총재로 임명하여 <동국여지승람>으로 책이름을 바꿔 계속 찬수(撰修)하게 하여, 성종 12년(1479) 도합 50권의 책으로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후 성종 16년(1483)에 다시 김종직 등으로 하여금 수정을 더하게 하여 그 이듬해에 2차로 수정을 거친 <동국여지승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이 2차 수정본은 정(精)에 정(精)을 더하여 5권이 늘어난 55권의 방대한 지리사록이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도 성현(成峴), 임사홍(林士洪)등에게 명하여 다시 수교(修校)를 거쳐 동왕 5년(1499년)에 완성하여 인출하였다. 다음 중종 대에 와서도 전대의 편찬 간행사업은 계속되어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등에게 명하여 다시 새로운 것을 더하고, 교오(校誤)하여 동왕25년(1530)에 끝을 맺으니, 이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본은 권 수 55권 그대로이나, 다만 증보 한 곳에 新增(신증) 두 글자를 삽입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사회 경제적 변화가 큰 폭으로 진행되면서 지역 실정의 변화를 반영한 읍지들이 각 고을별로 작성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전국적인 지리지가 편찬되어 지방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편찬된 것이 여지도서이다. 이 책 본은 조선전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을 변화된 조선후기의 실정에 맞게 개정된 지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말기 내지는 근대에 이르러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 정원호(鄭源浩)의 <교남지> 등이 간행되었는데 일개 개인 또는 사람들이 민족적 자존감과 사명감으로 상당한 비용을 들여가면서 발로 뛰어 지역의 유지들과 관청의 협조를 얻어 간행된 역사서로 매우 소중한 책본들이다.
3. 구당 본 초책 이전 상산지 개설(槪說)
가. 상산지 창석본
창석 이준은 이 책본을 편찬한 후지(後識)에 “상산은 영남 중에 상유(上遊)이니 산수의 수려함과 인재가 많음이 옛적부터 있어왔으나 읍지가 없어 그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상주 최초로 목읍지를 편찬한 것임을 밝혔다. 편찬하게 된 경위는 “당시의 강복성(康復誠) 목사의 권유에 따라 착수하게 되었고, 그 근거는 때마침 자기의 친구인 구희급(丘希岌)이 공관에서 등사한 것이 있어서 이에 그 기본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이 책본 편찬 이전에 이미 작성되었던 사록의 자료가 있어 왔음을 밝힌바 있다. 그리고 “<신동국여지승람>과 잡지(雜誌)의 기록을 유취(類聚)하여 강목(綱目)을 정비하였다”고 하였다. “편찬 도중에 정호선(丁好善) 목사의 독촉이 있어 10개목의 조목을 정하고 자문과 순방을 하여 편집의 가닥을 잡았다”고 하였으며, “만약 수집에 미진한 사항이 있으면 하루 빨리 보완하여 속간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창석의 후지를 살펴 보건데, 비록 편찬사업은 자기가 주관하였다고는 하나 목사의 청이 있었으며, 독촉까지 받았다는 점은 관청의 행정력을 의지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아울러 자문과 순방을 하였다고 하여 관내 지도자급으로 하여금 충분한 이해와 협조를 얻었고, 지역별로 순방하여 현지 실상을 파악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석본이 간행되고 난 뒤 그의 손자 이재관(李在寬)이 속록을 내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책 본의 형태는 간결한 필사본으로 번호를 붙여 목록을 먼저 수록하고 뒤 이어 차례차례 서술하였는데, 그 주요 사항별 내용과 특기 할만한 것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목록
商山誌目錄
1. 與地(其目凡11) : 沿革, 屬縣, 疆域, 山川, 城池, 驛院, 橋梁, 姓氏, 風俗, 烽燧, 津渡
2. 貢賦(其目6凡) : 田賦, 土貢, 土産, 戶口, 軍兵, 徭役
3. 學校(其目凡5) : 鄕校, 書院, 書堂, 學制, 學田
4. 秩壇(其目凡2) : 壇壝, 廟制
5. 官制(其目凡4) : 牧使, 判官, 文提督, 武提督
6. 公署(其目凡4) : 客館, 州衙, 附留鄕所, 醫局
7. 名宦
8. 人物(其目凡5) : 文官, 武擧, 蔭敍, 恩錫, 孝烈
9. 古蹟(其目凡6) : 古都, 古縣, 山城, 部曲, 亭觀, 寺刹
10. 文翰(其目凡6) : 題詠, 記, 序, 碑文, 上樑文, 雜著
2) 여지(輿地)
가) 연혁
사벌국(沙伐國)ㅡ상주(上州)ㅡ상낙군(上洛郡)ㅡ사벌주ㅡ상주(尙州)ㅡ사벌주ㅡ상주(尙州)ㅡ안동도독부ㅡ상주목ㅡ귀덕군ㅡ안동대도호부ㅡ상주목(전국 8목 중 하나)ㅡ조선시대에 목사가 우도병마 절제부사를 겸하게 되었다는 등 지역의 변천사를 수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 9개주 나눌 때 신라 본토에 3개 주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도 웅주였다는 것을 수록하였다.
나) 속현(屬懸)
화령, 중모, 산양, 단밀, 공성, 청리, 함창, 영순, 문경, 가은현 예천 다인현의 내력을 수록하였는바 문경 가은현은 고려 공양왕 때 문경에 감무를 두고 가은을 속현으로 하였으며, 예천 다인현은 고려 인종 때 예천현을 이관되었다는 여지승람의 사록을 수록하였다.
다) 진관(鎭管)
상주의 수령이 관할하였던 군(軍)지휘권에 관한 영역으로 1목 1부 1군 5개 현을 소속하였으나 성주목은 1679년(숙종5), 선산부는 1699년(숙종25)에 별도의 독진 체제로 이관되고, 김산군과 개령, 지례, 문경, 함창, 고령현을 관장하였다.
라) 군명(郡名)
상주 고을의 이름이 상주(上州)ㅡ상낙(上洛)ㅡ사량벌(沙梁伐)ㅡ사벌(沙伐)ㅡ상산(商山)ㅡ타아(陀阿)ㅡ귀덕군(歸德軍) 등으로 변천되었음을 수록하였다. 상주의 고을 이름은 이미 경덕왕 때에 상주(上州)에서 지금의 상주로 개정된바 있었음에도 ‘尙州’ 명칭이 누락된 것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다.
마) 강역(彊域)
상주 고을의 구역을 밝힌바 주치로부터 동서남북 사방계(四方界)까지의 거리를 수록하였다. 동서의 길이는 137리요, 남북의 길이는 76리이며, 동쪽은 비안현까지 67리, 서쪽은 보은현 까지 70리, 남쪽은 선산 부까지 39리, 북쪽은 함창현 경계까지 29리로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과 보은군 마로면, 구미시 옥성면, 그리고 당시의 함창현 관할지였던 공검면 양정리 또는 함창읍 금곡리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바) 산천(山川)
왕산(王山), 갑장산, 천봉산, 구봉산(九峯山), 속리산, 사불산, 병풍산, 백화산, 노음산, 서산(西山), 웅산(熊山), 소곡산, 만악산, 왜유현(倭踰峴), 대조현(大鳥峴)등 주요 산과 고개, 그리고 북천, 남천, 낙동강, 화천(花川), 단밀천, 송라탄(松羅灘)등 주요 하천에 이어서 공검지, 불암지, 대제지, 굴수지, 기지 등 주요 관개용 저수지의 위치와 둑의 길이를 덧붙여 수록하였다.
사) 성지(城池)
상주읍성의 둘레가 1,549척(尺), 높이가 9척이고, 성안에 21개소의 정(井)과 2개소의 지(池)가 있었다. 성 밖에는 원래 해자(垓字)가 없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구가 14개월 점거하여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성 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다.
아) 역원(驛院)
역원은 명령을 전달하고 행여객(行旅客)을 접대하는 시설인데, 임난 이후 거개가 무너져 행정보고 및 하달에 문제점이 있어 보수가 급선무함을 서술하고, 뒤이어 낙양, 낙동, 낙원, 낙서, 낙평, 장림 등 6개 역과 남원, 안빈원 등 21개 원의 위치와 읍치로 부터의 거리를 병기(並記)하였다.
자) 교량(橋樑)
북천교, 남대교, 양산지교 등 3개 교량의 위치를 수록함.
차) 성씨(姓氏)
본주에 김, 박, 주(周), 황. 고, 이, 형(荊), 라(羅)씨와 중모 단밀 현 등 지역별 거주 성씨를 열기(列記)하였다.
카) 풍속
속풍색간 민풍순박(俗尙嗇蕑 民風淳朴)이라고 하여, 간결하고, 검소하며, 순박하다는 권근(權近)의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에 주민이 적에게 부화 굴종하는 자가 없어 복호(復戶)를 내렸다는 것과, 선조임금이 상주 고을 사람들을 찬양하였다는 교서(敎書)를 수록함.
타) 봉수(烽燧)
회룡산, 소산, 서산, 산양현 소산, 국사당 등 5개 소 봉수의 위치와 전후 전달지와의 계통을 수록함.
파) 진도(津渡)
죽암(竹岩)과 관수(觀水) 나루터에 배로 도강(渡江)하였음을 수록함.
3) 공부(貢賦)
농민은 경작토지의 수확물 중에서 공여(工女)는 그 의직포(衣織布) 중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이나, 대체로 9등분 이외로 가중(加重)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는 사이에 판적(版籍)이 모두 소실되어 9개 부와 9공의 법을 알 수 없으니 토지경계를 바르게 하고 균등하게 세금을 바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아직도 개선하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살펴 보건데 예나 지금이나 토지의 소유권과 조세정책은 국가유지의 근본일진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토지 공부 정리가 미진하였다는 것은 당시 지방행정의 지지부진을 엿볼 수 있다.
가) 전부(田賦)
구 분 | 평 시 결 수 | 1603년(임난이후 선조25년) | ||||
계 | 전(田) | 수전 (水田) | 계 | 전 | 수전 | |
계 원액(原額) 름전(廩田) 속전(續田) | 15,592 14,054 628 910 | 8,363 7,378 213 772 | 7,229 6,676 415 138 | 3,874 | 1,470 | 2,404 |
살펴 보건데 1603년의 결수는 임진왜란 후 최초의 토지 조사를 실시한 계묘량전(癸卯量田)인데, 이것은 현재 경작되고 있는 시기전(時起田)을 대상으로 하여 량안(量案)에 등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전세를 위 표에서 보는 바 임진왜란 전 평시와 난후의 면적 감소는 현격하여 평시대비 25%에 불과 하니, 난의 피해가 심각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평시 결수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상주목에 간전(墾田)이 이미 15,360결이고, 그중에 수전(水田) 즉, 논의 면적이 5분지2라고 수록된바 있어 그때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는 태종13년(1413) 상주에 속하였던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청산을 충청도로 이관한 이후이기 때문에 상주의 강역은 창석본 편찬 당시와 같으므로 임진왜란 이전 경작 농경지 면적은 160여년이 지난 창석본 편찬시까지 큰 변동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나) 토공(土貢)
지역에서 생산되는 산물을 중앙 조정에 공납하는 것으로 봉상시(奉常寺), 재용감(齋用監), 상의원(上醫院), 혜민서(蕙民署) 등 14개 기관에 참기름, 인삼 등 각종 진공물품의 수량을 수록하였다는데 특별히 초석자리 5장 정포(正布) 94필, 홍시 30두(斗), 우황(牛黃) 1부, 화살 8부, 창 2자루, 소뿔 22쌍, 소몽동(작은 몽둥이) 10개, 은어, 연밥, 자전거 등등 농경시대에 소요되는 품목들을 열기하였다. 품목별 종류와 수량은 조정 각 관서에 수요하는 용품일체의 년간 수급계획에 의하여 각 지방목읍에 할당한 것인 듯 하다.
다) 토산(土産)
지역 특산물로서 갑장산의 옥석, 대조현의 옥등석, 호도, 감, 밤, 은어, 송이, 인삼, 백화사(흰뱀), 완초(莞草)등인데 감은 그때부터 우리 지역의 특산품이었으며 백화사가 지역 토산품이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라) 호구(戶口)
평시에 7만 명 이었으나 장부로는 상고 할 수 없고 임진왜란 후(1616)에는 만 여에 불과 하였다고 수록된바, 전쟁을 인한 인구 감소가 막심하였음을 말해준다. 호구는 그 지역의 군세(郡勢)인 만큼 본 책 앞의 사록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시대별 호구 비교>
책본별 | 호수 | 인구 | 비고 |
경상도지리지(1,425) | 2,392호 | 12,164口 | |
세종실록지리지(1,454) | 2,392호 | 5,718口 | |
상산지 창석본 | 만여 | 평시 임난 이전 7만 |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가 간행되기까지 29년이 경과되었음에도 호수는 같고 인구는 오히려 6,446명이 감소 하였는 것은 노비나 여자를 제한 남자인구를 적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창석본 간행 시는 만 여 명이라고 하여 계수적 통계를 수록하지 않았음은 의문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7년 뒤 1606년(선조39)에 병오호적(丙午戶籍)조사를 실시하여 전국적 조사를 실시한 바 있음에도 당시 조사된 호구 숫자를 수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난이 끝나고 인구 파악을 위하여 호구법 또는 요패법(腰牌法)등의 실시를 주장하는 측도 있었다. 전란 후 급격한 인구 이동이 일어난 상황에서 유리민(遊離民)들을 원주지로 되돌아가게 하던가 안집(安集)시켜야 한다는 등 이설이 있기도 하였지만, 해당지역 지방관의 주관 하에 원주민과 유랑민을 불문하고 모두 함께 가호(家戶)로 등록하는 것으로 하였다.
마) 군병(軍兵)
평상시에는 교양을 통하여 결합하고 유시시는 법령에 따라 동원한다. 병제(兵制)가 문란하고, 장수가 주구(誅求)만 일삼으니 원성이 가득하다는 실태를 서술한 후, 정로위(丁盧衛)등 8조의 부분에 4,425명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에 보병이 775명으로 가장 많다.
바) 요역(徭役)
행정업무에 부수적으로 소요되는 인력으로서 악공, 경방자(京房子), 장빙(藏氷)등에 동원하되 인원은 향당(鄕黨)의 협의로 정함을 서술함.
사) 학교(學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당시의 교육풍토가 부화(浮華)한 문장을 시험하는데 치우치고 학규의 퇴패가 우심하다는 서술에 이어 향교, 서원, 서당 등 당시의 교육기관을 거론하였다. 향교의 위치와 선덕초에 판목 조치(曺致)가 짙은 남루(南樓)가 있으며 홍여방(洪汝方)의 기문과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가 있다. 서원은 낙동강가에 병오년(1606) 창건한 도남서원이고, 서당은 가숙지제(家塾之制)에 따라 각 면에 있으며 그 절반 이상을 신잠(申潛)목사가 창건한 것이다. 학제(學制)와 학전(學田)은 소목(小目)만 정하였을 뿐 내용의 서술은 없다. 그러나 당시에도 각 교육기관별로 학제와 운영에 소요되는 경작토지 등 학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4) 질사(秩祠)
가) 단유(壇壝)
사직단(社稷壇)의 위치와 정곤수(鄭昆壽)목사가 위판을 봉안 하였다가 임난 후에 폐지.
나) 묘제(廟制)
◦ 문묘(文廟) : 향교 북쪽에 대성전(大成殿)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중수하였고, 난중에 송이회(宋以誨)가 오성위의 위판을 별도로 보관하여 화를 피하였다.
◦ 오현묘(五賢廟) : 서원의 뒤에 있으며 봉안 상량문과 5현 봉안문(奉安文), 춘추향사 축문(享祀祝文), 춘추향사 축문 개 5위 1(改五爲一), 소재(穌齋) 종향시(從享時) 5선생 고사유문(告祠由文), 소재선생 배향(配享) 제문(祭文), 서애(西厓)선생 배향 5현묘 제문, 고유 5선생문 등 기록문을 수록하였다. 오현묘는 도남서원의 묘우(廟宇)인 오늘의 도정사(道正祠)를 말한다. 도남서원은 상주 최초의 서원으로서 창설 당시의 기록과 이후 소재 노수신(盧守愼)과 서애 류성용(柳成龍)을 배향할 때 그에 관한 제문(諸文)을 수록하였음은 기록문의 중요성을 엿 볼 수 있고, 서원의 기능을 존현(尊賢)과 양사(養士)라고 할진데 존현의 사묘(祠廟)와 양사의 교육을 별도로 하여 앞의 학교 조목에 구분하였음은 특기할만하다고 하겠다.
◦ 이현사(二賢祠) : 난계(蘭溪)김득배(金得培)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의 봉안제문(奉安祭文)과 춘추향사 축문을 수록하였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현묘(五賢廟)와 이현사(二賢祠)로 묘(廟)와 사(祠)로 그 격을 달리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史實)이라고 하겠다. 도남서원의 5현은 동방의 유학(儒學)을 창시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부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適), 그리고 그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봉향하였다는 것은 5현이 국조(國祖)급으로 숭상할 만큼 위(位)가 높았다는 것과 그러한 위의 위판을 모신 5현사를 우리 상주에 세웠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뒷날 옥성서원(玉城書院)으로 발전한 이현사는 상주 출신으로서 국가에 큰 공헌을 한 김득배와 상주의 흥학(興學)을 위하여 서당 교육기반을 확고히 한 신잠 목사를 고을의 합의로 숭상하였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 성황사(城隍祠) : 천봉산에 있고 만민의 평안과 풍요를 신령께 비는 곳이라고 함.
◦ 여단(厲壇) : 주북(州北)에 있으며 돌림병이 없도록 천신께 기도함.
◦ 기독사(旗纛祠) : 주의 남문 안에 쇠꼬리로 만든 큰 깃대를 세워둔 곳으로 전쟁 출병 시 이 기독신(神)에게 제(祭)를 지냈다는 것.
5) 관제(官制)
가. 목사 : 1명
나. 판관 : 1명 임난 후에 없어짐
다. 문제독(文提督) : 1명 구 참하문관(參下文官)으로 향교의 교수직이다. 예조판서 류성용이 교수를 제독으로 하여 6품문관으로 임명하고 소속된 고을의 제독교관을 겸하였다.
라. 무제독(武提督) : 1명 만력 경자년(1600)에 정승 李德馨(이덕형)이 처음 시행한 제도로서 군대의 조련 하는 법을 중국의 진법(陳法)을 모방하여 시행하였다.
6) 공서(公署)
공서는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곳이고 민원을 해결하는 곳이니 사치하거나 퇴루(頹陋)해서는 안된다. 관리는 부서(簿書)에만 골몰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완급을 가려서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일들을 처결(處決)하며 공청을 잘 보수하여 관리하여야 한다는 서술에 이어 동헌(東軒), 주아(州衙), 서헌(西軒)에 이어서 누정(樓亭)과 주요 당원(堂院)을 수록하였다. 그 내용은 풍영루, 관수로, 응신루, 청량각, 추월당, 천향정, 군자헌, 향사당, 존애원으로 건물이 있고 없는 것을 표기하지 않고, 건물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부기(附記)하였다.
7) 명환(名宦)
상주는 강역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교통의 요충지로, 주목(州牧)은 높은 품직이고, 이에서 제상으로 승진되고, 명망이 높은 분이 많았음을 관풍안(觀風案)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병난 시 문적의 소실로 성명과 정적(政績)을 잘 모르나 잡지의 기록과 부로(父老)의 전언을 정리하여 수록하였다고 하고, 착오나 누락이 있을까 염려되고, 고증(考證)이 어려워 선후의 잘못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고려, 조선 등 시대별로 공적이 있는 주목(州牧)을 차례로 수록하고 인물별 공적을 약술(略述)하였다.
시대별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신라 : 김유신(金庾信), 이등(이등)
◦ 고려 : 이주좌(李周佐), 김부일(金富佾), 김인경(金仁鏡), 최자(崔滋), 안유(安裕), 김영후(金永煦), 안축(安軸), 정택(鄭澤), 전리(田里) 등 23명
◦ 조선 : 권집경(權執經), 강구손(姜龜孫), 김수온(金守溫), 손중돈(孫仲暾), 권기(權褀), 윤탕(尹宕), 전팽령(全彭齡), 신잠(申潛), 정곤수(鄭昆壽), 류성용(柳成龍), 황준량(黃俊良), 고응척(高應陟), 권길(權吉), 김해(金澥), 정기룡(鄭起龍), 김용(金勇), 김취문(金就文), 김상용(金尙龍), 정호선(丁好善), 김지남(金止男), 조찬한(趙纘韓)등 108명 수록된 인물중에는 공적이 없고 성명만 기록된 경우도 있고 임진왜란 때 상주 목사를 역임하다가 이일(李鎰) 중앙군 대장을 영접한다는 명목으로 화북면 용화 산중으로 피신하다가 왜병이 그들이 숨어있는 것을 알고 습격하여 목숨이 경각인차 권판관(權判官), 정기룡(鄭起龍)장군이 구출한바 있는 김해(金懈) 상주목사도 함께 수록되었음은 특기할만하다 하겠다.
8) 인물
예로부터 상주는 산천의 정기를 타고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혹은 공업으로, 혹은 문장으로, 또는 행의(行誼)로 칭송을 받아 마땅히 후세에 방명(芳名)을 전해야 할 분이 한없이 많다. 그러나 문헌에서 고증 할 수 없고 남아있는 기록 또한 상세하지 못하며 병난 중에 사녀(士女)의 효절(効節) 한 분이 많았음에도 창황(蒼荒)한 가운데 인멸됨이 많았으니, 이 어찌 천고(千古)에 한이 아니랴… 중략… 인물은 개관(盖棺)하지 아니하면 기록하지 않는 것이 구례(舊例)이므로 이를 따랐으니 참고 하기 바란다는 장황한 서술을 하였다. 이와 같은 장황한 서술은 예나 지금이나 인물의 수록으로 인한 일각의 잡다한 구설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이해토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인물의 수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려 : 김식(金湜), 김일(金鎰), 임춘(林椿), 김수자(金守雌), 김득배(金得培), 김선치(金先致), 김득제(金得齊), 정의생(鄭義生), 김록(金祿), 조운흘(趙云仡)등 20명의 성명과 행적을 수록하였다. 행적의 기록중 김득배, 김선치, 김득제 삼형제와 조운흘에 관한 것이 제일 많다.
◦ 조선 : 박안신(朴安信), 박이창(朴以昌), 노숭(盧崇), 황보신(黃保身), 조숭((趙嵩), 황효헌(黃孝獻), 김수화(金守和), 홍귀달(洪貴達), 한가구(韓可久), 홍언충(洪彦忠), 김순고(金舜皐), 강사상(姜士尙), 김언건(金彦健), 주세붕(周世鵬), 김범(金範), 박언성(朴彦誠), 노수신(盧守愼), 김우굉(金宇宏), 정국성(鄭國成), 권문해(權文海), 김각(金覺), 김홍민(金弘敏), 김홍미(金弘微), 조익(趙翊), 이덕형(李德馨), 김정룡(金廷龍), 조우인(曺友仁), 김혜(金寭), 황뉴(黃紐), 정심(鄭杺)등 201명이 수록되었다. 수록된 인물 중에 행적이 가장 많이 수록된 인물은 노수신, 홍언충, 박이창이고 김정룡, 조우인, 김혜 등 일부 인물은 이 책본 편찬당시(1617)에 현존하는 인물들임에도 수록되었음은 의문점이다. 이와 같이 현존하였던 인물이 수록되었다는 것은 지금 남아 있는 이 책본 자체가 창석 당시 편찬 한 것이 아니고 책본의 머리에 적어둔 바와 같이 창석의 손자 이재관(李在寬)이 다시 작성할 때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일반적 현사(賢士) 인물의 수록에 이어 효열(孝烈)과 은사(恩賜) 인물이 수록되었다.
◦ 효열(孝烈) : 신우(申祐), 강식(康栻), 서상남(徐尙男), 박세정(朴世廷), 김유성(金有聲), 정흥세(鄭興世)등 27명이 수록되었는데 이 중에 12명은 임진왜란 때 해를 입은 인사들이다.
◦ 은사(恩賜) : 노홍(盧鴻), 강온(姜溫), 조윤성(趙允成), 고흥운(高興雲), 황빈(黃賓), 정여관(鄭汝寬), 조광헌(趙光憲)등 12명이다.
9) 고적(古蹟)
가) 고도(古都) :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 곁의 언덕이 사벌 왕릉으로 전하고, 신라 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웅거한 곳이다.
나) 고현(古縣) : 화창(化昌), 공성(功城), 청리(靑里), 영순(永順)등 4개 현으로 화창현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본래는 지내미현인데 경덕왕 때 개명하였으나 지금은 그 영현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고, 영순, 공성, 청리 3개 현은 그 약사와 위치를 덧 붙여 수록하였다. 살피건데 이 조목에서 중모, 화령, 단밀, 산양현 또한 고현이었음에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의문으로 앞으로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다) 산성(山城)
◦ 백화산성(白華山城) : 둘레가 1,904척(尺)이고, 성 안에 1개소의 내(川)와 5개의 우물샘이 있었다.
◦ 성산산성(城山山城) : 주의 서쪽 40리에 있고, 무오년(1618)에 정호선 목사가 중수하였다고 하고, 이어서 우리나라는 3면이 적들로 둘러싸여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성을 잘 관리 보수하여야 한다는 서술이 있음을 정호선목사가 성산산성을 보수하였다는 무오년은 1918년으로서 이 책본이 간행되었다고 하는 1617년 이후인 만큼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라) 부곡(部曲)
장천(長川), 무림(茂林)등 12개 부곡을 이어서 적고, 주치로부터의 거리를 덧 붙여 기록하였다. 부곡의 말미에 新增(신증)이라고 적고, 장원향(壯元鄕), 사마방(司馬榜)으로서 장원이 계속이어져 장원방(壯元坊, 장원동네)이라 하니 김범(金範), 김우굉(金宇宏), 조휘(趙徽), 하락(河洛), 조익(趙翊), 김광엽(金光燁)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라고 수록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신증’이라고 함은 구본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기록 하는 것이다. 이 창석본 상산지는 책머리에 적은바와 같이 최초의 향지였다고 하는 것과는 일면 상통하지 않은 것인즉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책 자체가 창석이 작성 한 것이 아니고, 창석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 이재관이 새로 편찬한 것이 아닌지 연구할 과제이다.
마) 정관(亭觀)
본주의 산은 상령(商嶺), 물은 낙강(洛江)이라고 하니 대체로 신령스러운 산수의 이름이 그때그때 불려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옛적부터 전해온 것이다. 이에 따라 유람 할 곳이 많으므로 그 중에 가장 경치 좋은 곳을 차례로 적는다는 서술에 이어서 정관별 소재지와 지은 사람을 간략히 적었다. 수록된 정관은 육익정(六益亭), 낙지정(樂志亭), 초학대(招鶴臺), 가사촌(佳士村), 사담(沙潭), 창석정(蒼石亭), 우복산(愚伏山), 석천대(石川臺), 서대(西臺), 임천석대(林千石臺)등 33개 소이다. 특별히 본책의 편찬자 창석 자신의 호를 정자의 이름으로 취한 창석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청리 오른편 골짜기 곁에 맑은 물이 흐르는 그 밑에 송석(松石)의 아취(雅趣)가 있으므로 내가 점찍은 곳이다. 중간에 이거 하면서 폐정하고 정자가 있던 곳으로부터 남쪽 수십보 쯤에 마을 사람들이 새로 서재(書齋)를 지어 관동(冠童)이 풍영(風詠)하는 곳으로 하였으니 만족하고 축하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바) 사찰(寺刹)
용암사(龍巖寺), 승장사(勝長寺), 미륵암(彌勒庵), 소림사(小林寺), 용담사(龍潭寺), 흥왕사(興王寺)등 6개 사찰만 수록하였다. 수록된 사찰 중 승장사에 대한 설명문이 제일 많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장천부곡에 있으며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에 고려 충열왕이 조정의 명을 받은 상낙군(上洛君) 김방경(金邦慶)이 동쪽의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싸우러 가는 것을 김해부까지 전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가(御駕)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나. <상산지> 청대본
이 책본은 1749년 (영조25)에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편찬한 상주읍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갈한 해서체의 글씨로 체재나 편집이 질서 정연하고 단정하다. 청대가 이 책을 편찬할 때 나이가 70세였고 1617년 창석본이 간행된 후 132년이 지난 뒤에 간행되었다. 청대본 이전에 전국적 지리사록으로 1530년(중종25) <신동국여지승람>이 있었고 이후 87년이 지나 창석본이 간행되었기 때문에 그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책 본의 머리에 “書商山誌後(서상산지후) 李埈商山誌本續一(이준상산지본속1)”이라고 하여 창석본 상산지의 후기(後記)를 그대로 싣고 창석본을 근거로 계속하여 속지(續誌)로 편찬하였음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商山續誌凡例己巳五月某日鄕會議定(상산속지범례기사5월모일향회의정)’이라고 하여 이 책의 편집기준을 향회에서 정하였음을 먼저 알리고, 7개 항목을 개조식(個條式)으로 나열하였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창석이 찬술한 구지에 의하여 부득이 보완해야 할 경우는 그 밑에 ‘補(보)’자를 기록하고, 계속하여 이어지는 항목에는 ‘新增(신증)’이라는 두 글자를 써 둔다.
1. 문과 음직(文科蔭職)은 모두 수록하고, 무과(武科)는 수령의 관직을 지낸 사람을 수록하며, 사마방(司馬榜)은 모두 수록하고, 그 행약(行略)은 각주(脚註)로 설명하였다.
1. 충절(忠節)과 효열(孝烈)은 정문 증직(㫌門贈職)을 받은 자를 수록하고, 이외에 행실이 남다르게 지극하여 향리에서 널리 알 수 있는 자는 간략하게 그 행약을 더하여 수록한다.
1. 처사(處士) 수재(秀才)로서 특별한 행실이 없으면 수록하지 않는다.
1. 떠돌아 들어온 사람으로 여러 해 동안 입적하지 않고 거주한자는 수록하지 않고, 본주에서 출생한자는 이사 온 것을 구애하지 않고 수록한다.
1. 명환(名宦)과 인물은 창석에 의하여 수록된 것은 그대로 한다.
1. ‘補(보)’ 新增(신증)한 것이 많은 항목은 부득이 매서(每書)마다 글자를 쓰지 않았다. 이어서 11개 항목의 목록에 이어 목록별로 차례차례 수록하였다. 이 청대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청대본 목록
전지(前誌) 창석본과 같이 11개 조목으로 구분하였으나 소목 (小目) 일부가 삭제 또는 신증되었다.
가) 여지(輿地) 조목 중 속현(屬縣)소목이 삭제되고, 창석본 간행시 운영되었던 속현제도가 31개 면으로 행정제도 자체가 개정됨.
나) 관제(官制)조 4개 소목에 영장(營將)소목이 신설됨. 영장제도는 선조 33년(1600) 만력 경자(庚子)년간에 새로이 창설되었다가 중간에 폐지하였고, 다시 순치 갑오(甲午) 1714년에 도별(道別)로 5개 영(營)을 두게 되므로 인함.
다) 공서(公署)조 4개목에 “창고”목이 신설됨.
라) 인물(人物)조 5개목 중 문관(文官), 무거(武擧), 음서(蔭敍)는 같고, 은사(恩賜)․효열(孝烈)을 충효(忠孝)와 정열(貞烈)로 구분함.
마) 문한(文翰)조 6개목 중 제영(題詠), 기(記), 서(序), 비문(碑文), 상량문(上樑文), 잡저(雜著), 목을기(記), 서발(序跋), 문(文), 갈명(碣銘), 제영(題詠), 잡저(雜著) 순으로 일부 변경 됨.
2) 여지(輿地)
창석본에 이어 사벌국의 역사를 기술 하였는데, 다음 내용을 신증 하였다.
◦ 함양박씨 세보에 박혁거세 7세손 아달라왕이 후사가 없어서 탈해왕의 손자 벌휴를 왕으로 세웠고, 아달라왕의 동생 8공자가 각각 주군(州君)에 봉하게 되니, 사벌주는 그중에 하나인 듯, 서기 185년(벌휴왕2) 아달라왕이 죽었으니 사벌국이 새워짐이 이때이며, 서기 248년(첨해왕2)신라에 멸망하여 입국(立國)한지 불과 60년이다.
◦ 신라건국 후 아달라왕이 죽을 때까지 200년이 사벌국 시대인데 입국(立國) 위군(爲郡)의 고적이 전무하다.
가) 연혁(沿革)
창석본과 같고, 연혁의 끝에 옛 속현(屬縣)의 역사를 덧붙였음.
나) 진관(鎭管)
창석본과 같고, 끝에 ‘補(보)’하여 고령은 지금 소속하지 않았음을 부기함
다) 군명(郡名)
창석본과 같음
라) 강역(疆域)
동서의 길이 137리를 ‘新增’하여 180리로 하고, 동은 단동면, 서는 화북면까지 라고 하였고, 남북의 넓이는 新增(신증)하여 남은 공성면 왜유현(倭踰峴)에서부터 북은 산북면 마전령까지 165리로 명정함.
‘新增’으로 1주 31개 면(面)의 명칭과 주치(州治)로부터의 거리와 면 경계와 접한 구역의 주군(州郡)명칭을 수록함.
마) 산천(山川)
◦ 산은 신증 표기 없이 상산(商山)을 추기하고 ‘新增’하여 수선산(修善山), 식산(息山), 팔음산(八音山) 운달산(雲達山), 등 27개 산을 추기(追記)하였고, 천(川)은 산양천, 중모천, 장천 등 7개의 천을 추기함.
◦ 공검지 등 5개 지(池) 중에 대제지(大堤池)는 제외 되었고, 신증 표기 없이 연이어 묵계제, 현재, 우제 등 33개의 제(堤)를 추기함
바) 성지(城池)
창석본에는 ‘1. 여지조’에는 창석본 지목과 ‘9. 고적조’ 산성(山城)으로 구분된 바 본책에는 창석본에 수록된 읍성에 이어 창석본의 ‘9. 고적’ 조 산성목의 성산산성을 ‘신증’ 수록함
사) 역원(驛院)
창석본과 같고 25개 원(院) 중에 죽현원(竹峴院)과 공성원(功城院) 이 외는 금무(今無)하다고 함
역원에는 기마(騎馬) 2필과 복마(卜馬) 5필 대마(大馬) 2필이 배치되었음을 신증 표기 없이 덧붙여 수록함.
아) 교량(橋樑)
북천교 등 3개 교량에 이어서 신증 표기 없이 점교(簟橋)와 광탄교를 추기함
자) 성씨(性氏)
본주와 각면 별로 거주하는 성씨를 관향(寬鄕)과 함께 수록하였는데 창석본을 근거로하여 전반적으로 보완하였음
차) 풍속(風俗) : 창석본과 같음
카) 봉수(溄燧) : 창석본과 같음
타) 도진(渡津) :
청석본에 이어 회동진(檜洞津)을 ‘신증’함
3) 공부(貢賦)
창석본에 따라 공부의 개념과 운영의 원칙을 먼저 서술하고, 6개의 목별로 구분하였다.
가) 전부
창석본에 이어 ‘신증’으로 乾隆己巳踏驗實數(건융기사답험실수)라고 하여 1749년(영조25)에 조사한 실수(實數)를 수록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밭 : 8,847결 75부 5속
◦ 논 : 6,641결 30부
계 15,489결 5부 5속으로 이 중에 실제로 세금을 부과 할 수 있는 행용실전(行用實田)은
◦ 밭이 6,014결 57부 8속
◦ 논이 5,415결 97부 8속
계 11,430결 54부 16속이다.
나) 토공(土貢)
창석본 시대에는 봉상시(奉常寺) 등 조정의 각 부서에 납부하던 공물을 지금은 대동비(大同備)로 납부 하므로 전지의 내용을 모두 수록 하지 않음.
다) 토산 : 창석본과 같음
라) 호구
“乾隆丁卯戶籍數(건융 정묘 호적 수)”라고 하여 1747년(영조23) 현재를 신증수록 하였다.
호수(戶) | 인구(口) | ||
계 | 남 | 여 | |
28,988 | 90,163 | 44,361 | 45,802 |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2,392호였었고 창석본에는 호수의 통계는 없고 평시에 인구가 7만 여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만 여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나 137년이 지난 시기에 계수적으로 비교적 정확한 통계수치를 수록하였다 할 수 있다.
마) 군병(軍兵)
창석본에 이어 ‘신증’하여 각 군정(各軍丁) 도합 12,162명 중 그 절반을 어영장군이나 기병 등 47개 부서에 배치 계획 하였다. 그 중에 보군(步軍)이라는 오늘날의 보병인 듯한 부서에 제일 많게 2,858명을 배치하였으며 악공(樂工) 형조서사(形曹書史), 상주진영 토포군관, 동래진속유황군(東萊鎭屬流黃軍) 등 행정부서에 필요한 모든 부서의 보조자를 구분하였고, 중앙조정의 경안부(京案付)에 6,790명 그 외 감영이나 병영에 5,372명을 배치 계획하였다. 창석본에는 요역(徭役)이라는 목을 설정하여 악공이나 경방자(京房子) 등 사복제원(司僕諸員)을 별도로 하였으나, 본지에는 군병에 모두 포함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학교(學校)
가) 항교
창석본에 이어 임진왜란에 사인(士人) 송이회(宋以誨)가 오성위(五聖位)의 위패를 안정된 곳에 매안하여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는 기록과, 정호선(丁好善)목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중건(重建)하였다는 것, 그리고 김안국(金安國) 도백(道白)이 향교를 순시하던 중에 권학문(權學文) 조현명(趙顯明) 도백의 명률당 강학(講學) 그리고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향교에 도훈장(都訓長)을 역임하였다는 것을 ‘신증’ 수록하였다.
나) 원사(院祠)
창석본에는 서원의 명칭도 없이 다만 ‘서원’이라고 하여 도남서원을 유일한 서원으로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목을 달리한 원사(院祠)로 하고 ‘신증’이라는 표기 없이 도남서원을 필두로 하여 흥암(興巖)․백옥동(白玉洞)․옥성(玉城)․봉산(鳳山)서원 별로 그 위치와 건원년대(建院年代) 그리고 배향선현을 간략히 수록하였다.
다) 서당(書堂)
창석본에는 집안마다 내려오는 서당이 각 면에 있었다고 말하였으나 본 책에는 하곡(霞谷) 노동(魯洞)․석문(石門)․수양(首陽) 등 18개 서당을 수록하고 서당별 위치 창건년대 등 간략한 약사를 부기(附記)하였고, 수계소(修稧所)․존애원(存愛院)․향약사(鄕約社)․향약당(鄕約堂) 등을 병기(並記)하여 원소(院所)에 본래의 기능에 교학(敎學)기능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창석본에는 각 면의 서당 과반을 신잠(申潛)목사가 창건하였다고 서술한바 있으나 본 책에는 하곡․노동․석문․도곡․수양․수선,․용문․영빈․매악․오산․고봉․봉성․백화․봉암․송암․지천․죽림 서당을 나열하고, 말미에 이상 16개 서당은 모두 영천자 신잠(申潛) 목사가 창건하였다고 수록하였다는데, 위 수록된 서당의 합한 실제의 수는 17개 서당이니 숫자 상 착오인지 알 수 없다.
서당으로 존립해 오다가 서원으로 승격한 곳이 있으니 수양 서당이 옥성서원으로 봉암서당이 봉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수록되었음.
라) 학제(學制)와 학전(學田)은 목록만 있을 뿐 내용은 없다.
5) 질사(秩祀)
창석본에는 단유(壇壝), 묘제(廟制) 목으로 구분하였으나, 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소목(小目)으로 구분하여 그 위치와 기능을 간단히 덧 붙였다.
가) 사직단(社㮨壇) : 창석본과 같이 사직지신을 섬기는 역사적 사실을 수록하였으나 제의(祭儀)는 언급이 없다.
나) 문묘(文廟) : 오현묘(五賢廟)는 향교․서원 조목으로 이기 하였고, 충열사(忠烈祠)를 신증 표기 없이 수록하였는데 그 위치와 숙종 무자(1708)에 창건하여 권길(權吉) 판관․정기룡(鄭起龍) 통상․김종무(金宗武)찰방과 그 곁에 박걸(朴傑) 등 임진왜란 때 순국 배향한 사묘(祠廟)임을 덧붙였다.
충열사는 뒷날 북천단소라고도 하였다.(충열사 훼철후 매판 설단했기 때문)
임진왜란과 충열사에 관련하여 살펴 보건데 임란 때 중앙조정에서 파견한 정규군과 왜군과의 공식전인 첫 전투였던 상주 북천 전장에서 순국한 열사는 위충열사에 배향된 네 분 외에 중앙군 대장이었던 순변사 이일 대장과 함께 종사관으로 참전한 교리 윤섬 좌랑 이경류 교리 박호 당시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와 임난 최초의 의병 김준신 그리고 김일 의병 등이 있다. 이 분들에 대하여는 충열사가 창설된 후 30년이 경과된 영조 14년 (1738)에 성이한, 성이홍 등 상주 선비들이 증연사(甑淵祠)라는 사묘를 창건하였다가 영조 17년(1741)에 서원과 사단(祠壇)의 남설을 금하는 조령(朝令)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이후 정조16년(1792)에 상주성 밖 무양동에 삼충신과 일의사를 배향한 경절단(景節壇)을 설단하고 단 아래에 장사단(將士壇)과 이졸단(吏卒壇)을 설단하여 제향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맹진태, 김사현 등이 상소를 올려
“忠臣義士壇(충신의사단)”이라는 사호(賜號)를 받았고, 이때 북천전쟁에서 함께 분전 순국한 낙동의 김일 의사를 추배하였다. 1988년도에는 정부에서 임난북천 전투 현장을 지방문화사적지로 지정하고 앞의 충열사와 충의단에 모셔진 8충신과 이름 없는 무명 의사 800여명의 위패를 합사(合祀)하고, 매년 6월4일(당시 전쟁 날짜였던 임진년 4월 25일 양력으로 환산) 상주시장의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 충열사와 충의단(충신의사단)에 관련하여 살펴 보건데, 모신 8충신 모두는 한 날짜에 한 전장에서 순국하였는데도 충열사는 숙종 년간(1708)에, 충의단은 무려 84년이 지난 정조 년간(1792)에 창설된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더구나 충의단에 모셔진 윤섬, 이경류, 박호는 조정의 촉망받는 간부급 관료였고, 김준신은 순수 민간인으로 자진참전한 임난 최초의 의사(義士)였음에도 뒤늦게 천양(闡揚)하였다는 것은 앞으로 연구과제라고 할 수 있다.
- 성황사와 여단, 기독사는 창석본과 같다.
6) 관제(官制)
창석본 외 목사, 판관, 문제독, 무제독에 이어서 영장(營將)을 ‘신증’ 수록하였다.
영장제도는 선조 33년(1600) 만력 경자년에 새로이 창설되었다가 중간에 폐지되었고, 다시 순종 40년(1714) 순치 갑오에 한 도(道)에 수 개의 영(營)을 두어 무과 당상의 관직으로 하였다.
7) 공서(公署)
창석본에 따라 관서의 역할과 관리외 근무자세, 그리고 건물의 관리 등에 관한 공직자의 의무를 먼저 서술하고, 공서별로 그 위치와 간략한 약사를 덧붙였다.
그런데 창석본에 수록된 것과 새로 등재된 것을 ‘신증’으로 구분하지 않고 섞어서 나열하다가 중간에 ‘신증’이라 표기하고 계속 적어 나갔으나 여기에도 창석본에 수록된 것을 재차 수록한 바도 있다.
대체적으로 앞의 창석본과 새로이 신증하는 것을 순서 없이 조정수록 한 것이다.
기록상 ‘신증’이라고 표기하여 새로 수록 한 공서는 객관(客舘), 사무당(使無堂), 진남루(鎭南樓), 진영(鎭營), 제승당(制勝堂), 사각(射閣), 우림당(羽林堂), 장대(將臺), 무학당(武學堂), 영빈관(迎賓館)과 의국(醫局)이다. 창석본에는 공서 별로 간략한 설명문이 없고, 주아(州衙), 천향정(天香亭)에만 그 내력을 비교적 상세히 덧붙였으며, 공서별로 유기(有記)라고 하여 공서의 기록이 있다고 말하였다. 본 책에도 매(每) 공서별 설명문이 부기(附記)되지는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주요공서는 상세한 설명문을 부기하였다.
가) 객관(客館) : 상산관을 말하는데 고려 때 창건하여 두 번에 걸쳐 중수하였고, 임난 때 모두 소실된 것을 현종 7년(1666)에 이송령 목사가 옛 건물에 인하여 다시 지었다. 앞의 창석본에는 수록되지 않았는 것은 임난 때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나) 풍영루(風詠樓) :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목사 김남득이 창건하고, 이색이 기문을 짓고, 이숭인이 시를 지었으며, 우왕 6년(1380)에 왜적으로 인하여 소실된 것을 이인 목사가 중건하고 권근이 기문을 짓고 조선 성종 18년(1487)에 설순조 목사가 중창하여 김종직이 기문을 짓고, 중종 30년(1535)에 목사 김취문이 중수하고, 황준량이 상량문을 지었다. 임난에 소실 후 다시 짓지 못하였다.
다) 관수루(觀水樓) : 낙동 나루터 머리 강 기슭에 있었으나 문적이 없어 처음 것은 알 수 없고, 효종 3년(1652)에 목사 이지무가 중수하고, 영조 9년(1733)에 김태년 목사가 개축하고, 스스로 현판을 써서 달았다.
라) 청량각(淸凉閣)과 추월당(秋月堂)은 금무(今無)라고만 하였다.
마) 이향정(二香亭) : 처음 이름은 연당(蓮堂)이라 하였고, 정완수 목사가 지었으나, 임난 때 소실된 것을 한술 목사가 다시 지었다. 정자 좌․우에 못을 파고 연과 화초를 심었으며, 강복성 목사가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이름을 천향정(天香亭)이라 하였다가, 이항 목사가 다시 연못을 손질하고 이향정 이라고 고쳤다.
바) 의국(醫局) : 남문 밖에 있었다. 본래는 조(趙), 성(成), 강(姜), 홍(洪), 박(朴), 김(金), 이(李), 전(全), 등 8개 성씨가문에서 계를 모아 창설하였는데, 중간에 관가에서 조세와 부역을 일부 감면하고, 약제를 재배하여 관국(官局)으로 하고, 8가문의 자손에게 위임하여 주관케 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상고컨데 존애원의 경우 창석본에는 공서(公署)조에 분류하여 기록이 있다고만 하였으나 본 책에는 학교조로 옮겨 수록하였다. 공서조에 ‘신증’ 표기 없이 새로이 ‘창고’ ‘목’을 신설하고, 양곡을 보관하는 주창(州倉)․공성창 등 7개 창고와 말을 관리하는 고마청(雇馬廳)을 수록하고, 그 위치와 간략한 약사, 그리고 양곡을 수납하는 관할구역을 부기하였다.
이어서 만력 병진년(1616, 광해 8) 현재 곡종 별 보관 수량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 쌀 : 26,692석
- 벼 : 13,175
-보리: 9,721
- 콩 : 35,395
8) 명환(名宦)
창석본을 근거로 하며 왕조 별로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 신라 : 김유신, 이등
- 고려 : 이주좌, 김부일 등 23명이 수록되었는데, 판관 전리(田理)가 누락되었음.
고려 시대 수록 인물 중에는 중앙에 진출하여 고위 관직을 지냈거나 학문이 뛰어나 시호를 받은 건축 인물이 여러 명이다. 대표적으로 김부일, 정항, 정숙공, 김인경, 최자와 문묘에 종사된 안유, 안축이다.
- 조선조 : 창석본에는 권집경, 송인, 손중돈, 정기룡, 류성룡, 신잠 등 108명이었으나 본지에는 김해, 김구 등 73명을 제외하고 35명만 수록하고 창석본 간행 이후 인물로 심락. 조개원 등 28명을 ‘신증’ 수록하였다.
9) 인물
창석본과 같이 공적을 쌓았거나, 문장과 행의로 칭송을 받아 마땅히 후세에 전해야 할 분이 많으나 병난으로 기록이 인멸되어 누락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외가나 처가로 향중 인물이 수록된 경우도 있다.
인물은 죽은 사람만 수록하였다는 등의 글을 서술하고, 왕조별로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가) 문관(文官) :
- 고려시대 : 창석본에는 모두 20명이 수록되었으나 박견(朴甄) (상산박씨 시조로서 화령에서 살았다), 상산 김씨시조 김수(金需), 그리고 그의 아들 도, 식, 희일, 문도, 비공, 걸, 성, 지연, 치화, 분, 승귀, 상온, 등 상산 김씨계 인물과 상산박씨 박견의 아들과 이하 자손으로 원정, 천, 안의, 윤창, 등 21명을 ‘신증’하여 수록하였다.
이에 반하여 상산김씨 낙성군 김선치의 아들인 김상인은 오히려 누락되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살펴 보건데 본책에 새로 ‘신증’하여 수록된 인물은 대부분 상산김씨와 상산박씨시조와 그의 자손들로서 상주를 관향으로 한 인물들이다.
아울러 고려 시대 수록 인물 중에는 상주를 관향한 인물로서 중국에서 난을 피하여 귀화한 상주이씨 시조 이민도가 있고, 상산김씨 집안과 혼인으로 들어온 정택의 아들 정의생과 조운훌, 당대의 문장가이요 예천임씨의 시조인 임춘과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본주 장천 백원산(白元山)에 숨어 살았던 몽계 한철중이 수록되었다.
- 조선시대 : 창석본에 모두 201명이 수록한 바에 이어서 김흡, 김고와 고려 시대에 인물 중 창석본에는 수록되었으나 본 책에서는 제외된 김상안 등 22명을 ‘신증’ 표기로 새로이 수록 하였는데 우복 정경세의 아들 정심과 상주 황씨 시조로서 상산군에 봉해진 황효원, 소재 노수신의 동생 노극신 임진왜란에 군공으로 거제현령이 되고 이순신 장군의 노량진전투에서 순국한 김사종, 임진난 흘촌전투에서 순국한 윤식 등 20명이 제외 되었고, 창석본 이후 새로운 인물로서 이전, 이준, 전식, 강응철, 고상안, 홍여하, 이관징, 홍호, 김안절 등 223명의 명현(名賢)을 ‘신증(新增)’ 표기로 하여 추록하였다.
인물 항목에는 명환(名宦)이나 일반 명현(名賢), 그리고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은사(恩賜), 등이 한 항목에 포함되어 그 성격에 따라 소목(小目) 별로 하지 않고 각각 별도의 목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창석본의 은사(恩賜), 목은 전면 수록하지 않았다.
나) 충절(忠節)
창석본에는 없던 신설된 목으로 임진 병자 양난 때 순국한 우성적, 박걸 노도응을 수록하였다. 살펴 보건데 이 항목에는 상당한 의문점이 있을 수 있다. 임진 병자 양난 당시 순국한 인물은 위의 3명 이외에도 많은 인사가 있었음에도 수록하지 않았는 점은 어떤 연유였는지 알 길이 없다.
다) 효자(孝子)와 열녀(烈女)
창석본에는 효열(孝烈)목으로 하였으나 본지에는 효와 열을 분리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하였다.
◦ 효자 : 고려 인물로 신우와 조선시대에 박세정 등 27명이 수록된 창석본 이후 신증으로 김유성(金有聲), 정흥세(鄭興世), 송이해(宋以海), 염행검(廉行儉), 조대윤(趙大胤)등 36명의 효자를 ‘신증’하였고,
◦ 열녀 : 노기(盧圻)의 처를 비롯하여 윤씨, 박씨, 하씨 등 사대부와 유월(六月) 서을녀(鋤乙女) 정화(貞化)등 23명을 신증 추록하였다. 살펴 보건데 효자와 열녀 중에는 임진왜란 때 부모나 남편 또는 비록 노비이지만 상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중에는 임난 안령전투에서 5부자가 함께 순국한 김유성과 부모를 피난시키고 자기는 적과 싸워 목숨을 바친 정흥세, 권응정, 하경휘, 송이해, 하빈 효자가 그들이고, 김순외의 처 윤씨, 부장충원 처 배씨, 사인 권손달의 처 김씨, 사인 황위의 처 전씨, 사인 정영국의 처 한씨, 정병 최순형의 처 전씨, 이응남의 처 한씨, 사인 김체신의 처 정씨, 정일의 처 윤씨, 하식의 처 박씨, 하만계의 딸 하씨, 광규의 딸 이씨, 송량의 딸이요 사인 노경건의 처 송씨와 사인 정이괄의 처 송씨 형제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남계 강응철의 아들 강용정과 그의 아들 강식과 강원 형제 우곡 송량의 아들 송이회와 그의 자매 형제는 대를 이어 한 집안이 효열한 가문으로 세칭하여 강(康)씨 집안 집성촌인 양촌리 터골 마을을 강효자 집으로, 송씨 집안 집성촌인 공성면 효곡(孝谷)마을 이름이 이에 따라 지어졌다 한다.
10) 고적(古蹟)
사벌국 고성과 병풍산 그리고 사벌왕능에 대한 창석본의 기록을 더 구체적으로 수록하였고, 기타 고적에 대한 것들을 발굴하여 새로운 사실을 수록하였다.
가) 고도(古都)
- 사벌국의 수도는 알 수 없고, 사벌왕능은 사벌촌 서쪽 수백 보 둔진산 밑 구릉에 언덕이 솟아 있고 담장이 무너졌다.
- 그 옆에 석탑이 있으니 고노들이 이곳을 왕묘라 전해 오고 있다. 현종 13년(1672) 이초로(李楚老) 상주 목사의 꿈에 “나는 사벌왕이다, 내능이 사벌에 있는데 소와 양이 와서 침범하니 그대가 돌봐주기 바란다”고 하여 이 목사가 능을 찾아 봉축을 크게 하였다.
- 마을 서쪽 들 가운데 돌다리가 있고, 속설에 왕활교(王活橋)라고 하니, 이는 왕이 이 다리 밑에서 적을 피한 때문이다.
- 사벌 흔국촌에 비석이나 초석이 많이 묻혀있고, 5기의 석탑이 있었는데, 도남서원을 창건할 때 계단과 주초로 사용하였고, 지금은 1기의 탑만 남았다.
- 흔국촌 서북면 수리에 옛 산성이 있으니, 이부곡 토성이라 전한다.
- 주북 석악 산록에 산성이 있으니 자산산성 이다.
- 병풍산에 고성이 있으니 사벌왕이 쌓은 것이라 전해오는데 성 안에 못 하나와 세 곳의 샘이 있고, 성 밖 동쪽은 100길이나 되는 낭떠러지가 있어 성안에 물이 마르면 수차(水車)로 강물을 달아 올렸다 하며, 남쪽 수리에 소금 창고 터가 있다.
- 본주 성 밖 4모퉁이에 큰 사찰이 있어 사장사(四長寺)라 하였으니 남장(南長), 북장(北長), 갑장(甲長), 승장(勝長)이다.
그 뒤 승려와 속인이 섞여 사는 것을 싫어하여 각각 근처 산중으로 옮기고, 그 사적비(寺蹟碑)가 어느 밭 가운데 있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 알기어려웠으며, 만력년간(1600년대 선조년간)에 다시 갈아서 목사 류성용의 선정비로 세웠다.
- 상주(上州) 옛터가 주북 45리 밖 은성촌에 있으니 마을 밑에 창고와 관아의 옛터가 있으며,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 문무왕이 품일(品日)을 상주 총관으로 삼아 대장 김유신 등 18명의 장수와 함께 당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쳐 부셨다.
나) 고현(古縣)
창석본에는 화창, 공성, 영순, 청리 등 4개 현이었으나 본지에는 문경과 가은현 그리고 예천과 다인현의 속현 내력과 영동, 청산, 보령, 문경, 용궁, 개령, 함창, 비옥, 일선, 군위 의 속현의 내력과 이 현에 별도의 감무를 설치한 내력을 ‘신증’ 수록함
이어서 고적이라고 할 만한 유적지(遺蹟地) 몇 곳을 다음과 같이 수록 하였다.
◦ 퇴옹정(退翁亭) : 주북 광대천(廣大遷) 위에 있으니 나이가 많아 물러난 정승이 축조하였다고 하고, 주초(柱礎)가 남아 있을 뿐 그 성명은 알지 못함.
◦ 운정(雲亭) : “외북면 덕동에 있으니 중종 년간 경빈 박씨는 상호군 박수림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여름에도 파리가 얼굴에 앉지 않고 항시 무지개가 세수대야나 화분에 박혀 있으니 얼마 뒤 궁중으로 입궐했다. 중종과 처음 만나 가락지 하나를 주었는데 이는 자기가 어릴 때 끼었던 반지 한 쌍 중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며 남은 것과 맞추어보니 꼭 맞은 한 쌍이었다.”는 신화 같은 글들을 실어 놓았다.
◦ 이어서 충신담(忠臣潭), 절부애(節婦崖), 임천석대(林千石臺), 백암(白巖), 군명교(軍鳴郊), 봉황대(鳳凰臺), 신라석탑(新羅石塔), 효자리(孝子里), 미륵당, 화령고성, 백화고성, 근암고성, 만경산고성 ,사화진(沙火鎭), 광대천(廣大遷), 항갈암(項葛巖), 삼정암(三呈巖)등에 대한 고사(古史)를 수록하였다. 그중에 백암(白巖)은 산양의 선암촌 남쪽으로 난계 김득배(金得培)가 운명한 곳이고, 군명교(軍鳴郊)는 병풍산 북쪽에 그의 군사들이 난계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모여 들어 통곡한 곳이라고 수록하였다.
◦ 풍기 은풍면, 명봉산(鳴鳳山)밑에 태실이 있고, 그 비에 고려국 상주 명봉악(鳴鳳岳)이라는 글이 있다.
◦ 고려 공민왕 10년(1361) 12월 왕이 홍건적 난을 피하여 남행(南行)할 때 공주가 연(輦)을 두고 말을 타고 연서역에 도착하니, 상주판관 조진(趙縉)이 군병 1,400명을 인솔하고 와서 대장군 김득배로 하여금 영솔하게 하여 광주, 이천, 충주를 거쳐 12월 복주(福州)에 왔고, 이듬해 장수들이 홍건적을 파하고 경성을 수복하니, 2월에 왕이 복주를 출발하여 3일 후에 상주에 도착했는데, 상주 목사 최제(崔帝)의 대접이 불실하여 파직하였다. 안우(安祐)가 명에 의하여 행궁(幸宮)으로 오니 김용(金鏞)이 문지기로 하여금 죽이고, 용궁에서 이방실(李芳實)을, 산양에서 김득배를 죽여 상주에서 효수(梟首)하니 보는 이들이 슬퍼하였다. 이후 왕이 상주에 있기를 8월까지이고 속리사로 떠났다.
◦ 고려 고종 22년(1235) 몽고병이 충주에서 상주 백화산성을 공격하니 황령사 중 홍지(洪之)가 물리쳤다.
◦ 금돌성(金堗城) : 백화산에 있으니 당나라 소정방의 30만 대군과 신라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정벌한 곳이다.
◦ 북천전장(北川戰場) : 임진년 4월 24일 순변사 이일 중앙군과 왜병이 접전한 사실과 안령전투 용화동 전투 상주성 탈환전투 의병의 봉기와 승전(勝戰) 등 임진왜란 때 상주의 전쟁 상황 전반을 ‘신증’ 수록함. 상주의 임진왜란사를 향토 사록으로는 본지에 처음 수록하였으며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 장원향(壯元鄕)
주의 동남쪽 근처를 말하는데 김범(金範), 김우광(金宇光), 조휘(趙徽), 하락(河洛), 조익(趙翊), 김광엽(金光燁)이 계속 이어서 사마방에 장원을 하였는고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창석본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함.
다) 부곡(部谷)
창석본과 같이 장천(長川) 무림(茂林)등 16개 부곡을 수록하고 주치로부터의 거리를 부기하였다.
라) 정관(亭觀)
창석본과 같이 상주의 산수에 관한 것을 먼저 서술한바 있으나 본지에는 그 내용을 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산칭 상산(商山)이라 함은 상서계봉(商書契封) 소주(小註)에 상(商)은 태화지양(太華之陽)이라 하니 우리 주의 상산은 그것으로 백화산 남쪽을 이르는 것이다. 사호(四皓)가 상낙(商洛)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일명(一名) 지령모시상령(芝嶺毛詩商嶺)의 주(註)에 이르기를 계봉상(契封商)은 지금의 상낙(上洛)의 상(商)이다”라고 하여 중국의 상산(商山)에 대한 고사(古史)를 간략히 서술하였고 “수왈(水曰) 낙강(洛江)이라함은 낙동진(洛東津)이 상낙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낙동강이라는 강 이름에 대한 사실을 수록하였다. 이어서 “이와 같은 영경지명(靈境之名)은 산수에 따라 옛적부터 전해 온 것이다. 강의 지류(支流)와 산의 골짜기가 모두 분수에 따라 배치되어 놀만한 곳이 많으므로 그 중에서 가장 절승(絶勝)한 곳을 다음에 열기(烈記)하고, 인물의 선후는 구애(拘碍)하지 않는다”라는 창석본에 수록한 설명문을 먼저 서술하고 정관(亭觀)별로 그 위치와 건물을 지은이 또는 이름을 붙인 사람과 기록문(記錄文)을 남긴 선비들을 수록하였다. 창석본에는 육익정 등 31개 소의 누정대(樓亭臺)가 수록되었고, 그 뒤에 지어진 정우정(淨友亭) 무정(舞雩亭) 등 37개 소를 ‘신증’ 수록하였음. 정관 조목에 수록된 것 중에는 지형지물(地形地物)의 경관이 아름다운 대(臺), 폭포(瀑怖), 암(巖) 등, 또한 이에 포함하여 식산폭포(息山瀑怖)가 수록 됨.
11) 문한(文翰)
이 조항은 내용 없이 조항만 있을 뿐이다. 추정컨대 문한편은 장문(長文)의 글인 만큼 별책(別冊)으로 편수한 것인 듯한데 이청대본에 따른 별책 본을 찾지 못하였다.
12) 총묘(塚墓)
창석본에 없던 것을 본지에 ‘신증’한 조항이다. 사벌왕릉, 김선치(金先致), 노수신(盧守愼), 이전(李塡), 김택(金澤), 김상안(金商安), 황보신(黃保身), 황맹헌(黃孟獻), 김순고(金舜皐), 한가구(韓可久), 조정(趙靖), 김우굉(金宇宏), 류천지(柳千之), 조숭(趙崇), 김담수(金聃壽), 손만웅(孫萬雄), 김안절(金安節), 신우(申祐), 김홍미(金弘薇), 김록(金綠), 홍언충(洪彦忠), 이준(李埈), 전식(全湜), 등의 묘 위치를 부기하였다. 특별히 김택(金澤)에 대하여는 “상주 외북 월제(月堤) 송현산(松峴山) 비석에 진사추봉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김택지묘(進士追封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 金澤之墓)”라고 하고, 아들은 함령군(咸寧君)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 요(饒)이고, 사위는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이요, 호는 稼亭이라는 것을 부기하였다. 이 청대본의 끝에는 발문(跋文)으로 ‘영조 25년(1749) 중추(仲秋)에 권상일(權相一) 서(書)’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1616년(광해8) 창석공이 <상산지> 2권을 찬성하여 옥성동에 소장하였고,
◦ 그 후 그의 손자 신와(新窩) 이재관(李在寬) 공이 간략한 속록을 내었다.
◦ 1690(숙종6)에 향부로(鄕父老)들이 도남서원에 모여 상산지 속록을 초간하고 완성코자 하였으나 유고로 중지하고,
◦ 금년 여름 목사 이협의 명으로 향회(鄕會)에서 도감(都監) 3인을 선출하고, 각 면이 면지를 수보하여 기초로 삼았다.
◦ 이와 함께 각 문중의 보첩을 참고하고, 구지(창석본)를 보완하여 속편으로 초고를 작성하였다.
◦ 여지의 지(誌)는 각읍지(各邑誌)에서 유래하여 총합하면 일국의 여지가 되는 것인데 여러 곳의 군읍이 모두 지(誌)가 있으나 우리 상산은 도내에서도 이름 있는 고을인데도 빠져있었는데 선배의 힘써 노력한 덕분으로 찬수(撰修)하여 이 지가 완성되었다.
- 그 선배의 뜻은 우연이 아니다.
만약 선배의 뜻에 따른 이 속편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우리 읍의 사적은 마침내 인멸되었을 것이고 후인들에게 선배의 뜻을 알지 못한 바에 원망을 두었을 것이다.
- 이 지(誌)는 제승람(諸勝覽)에 실려 있는 것을 살려서 빠져 있는 것이 없도록 하는데 힘썼다.
- 우리 상주 100여리 산천과 인물을 일목요연하게 알게 된다면 좋은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노병 중(老病 中) 정력이 부족하여 초략(草略)을 면하지 못하나 이를 따라서 보완하는 군자(君子)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살펴보건데, 이 청대본이 찬술 될 때까지의 제반 기록이었던 각 면의 면지(面誌)등 일체와 이에 참여한 인사들의 명첩(名牒)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
이 청대본이 1749년 간행된 후 16년이 경과한 1765년(영조41)에 조정에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간행할 때 우리 상주의 내용이 이 청대본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4. 구당본(舊堂本) <상산지(商山誌)> 초책(草冊)
가. 구당 조목수(趙沐洙)의 가계와 인물
구당 조목수의 처음 이름은 호연(虎然)이다. 1736(영조12)에 출생하여 1887년(고종24) 71세로 생을 마친 조선 후기 상주의 큰 선비요 교육자였다.
시조는 고려 시대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 휘(諱) 맹(孟)으로 풍양(豊壤) 조씨로 득관(得貫)한 분이고, 조선 시대에 상의중추원(商議中樞院)을 지낸 휘(諱) 숭(崇)이 본향 상주에 터를 잡아 살았다.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으로 조선 중기에 우리 상주의 큰 선비였던 검간(黔澗) 조정(趙靖)공은 그의 7세조이고, 고조(高祖) 입재(立齎) 조대윤(趙大胤)공은 효행(孝行)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은 분이다.
증조(曾祖) 소헌(疏軒) 조해(趙瀣)공에 이어 문학행의로 당대 사림에 추앙을 받은 중애(中厓) 조시경(趙時經)공은 그의 조부(祖父)이며 문과(文科)에 올라 지평(持平)을 지낸 존성재(存省齋) 석우(錫愚)공은 그의 아버지이다.
어릴 때부터 그의 조부 중애공에게 글을 익혀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깊고 넓었으며, 당대 사림(士林)을 이끌어 사문(斯文)의 표준(表準)이라고 할만큼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나. 구당본 상산지의 개설 및 경위
이 책본은 구당이 50세 되던 1786년 정조 10년 병오(丙午)에 찬술하였다. 책이 간행되었다는 기록은 구당본이 간행된 후 46년이 경과된 1832년 (순조32)에 간행된 관찬(官撰) <상주목읍지(임진본)>의 발문(跋文)과 <상산지> 전말(顚末)에 “본주의 전지(前誌)로 창석본과 청대본 그리고 구당본이 있다”는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지(本誌)는 전해지지 않고, 그 초책(草冊)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지난해 (2011년) 겨울 어느 날 구당의 주손(冑孫) 조정희(趙正熙)씨로부터 그 초책(草冊)이 집안의 누구 집에 보관 된 것을 보았다는 전갈을 받고 비로소 초책 사본 1부를 접하게 되었다. 초책이니만큼 완성된 책 본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성본은 자체가 보존되지 않고 있으며 초책 자체의 편집 내용이 정밀하여 그 사료적(史料的) 가치가 있다고 보아 그 사실과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 구당본의 주요내용
구당본은 전지 청대본이 간행 된 후 37년이 지난 뒤에 편수된 것으로 전지 청대본(이차 전지로 통칭)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조목별 수록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전지에는 서문(序文)과 발문(跋文) 그리고 범례(凡例)와 목록(目錄)이 있으나 본지에는 표지 다음에 바로 내용을 수록하였다. 목록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전지의 순서에 따라 편수되었고, 일부는 순서가 바뀐 것도 있음.
2) 첫머리에 商州鎭, 商州牧(상주진, 상주목)이라고 하여 목(牧)보다 진(鎭)을 앞새워 군사적으로서의 상주의 위상을 연상하게 하였고, 강역(疆域)조의 주요지역과의 거리 표기에 본주 연접지역은 전지와 같으나 일정(日程)을 병기(並記)하였다.
- 경도(京都) 477리 5일정
- 동거(東距) 감영(監營) 180리 2일정
- 남거(南距) 통영(統) 480리 5일정
3) 건치연혁(建置沿革)
전지와 같이 사벌국의 역사와 이후의 건치 과정 연혁을 서술하였으나 내용이 소략(疏略)함
4) 속현(屬縣)
화령, 중모, 단밀, 산양 등 4개현의 간략한 약사에 이어 본주로부터 현 소재지까지의 거리를 ‘신증’ 수록하였다.
5) 진관(鎭管)
상주진의 군사적 관할구역으로 성주목(星州牧), 선산부(善山府), 김산군(金山郡)과 문경, 고령(高靈), 개령(開寧), 지례(知禮), 함창(咸昌) 등 5개의 현을 두었다는 전지의 내용 그대로 수록함.
6) 군명(郡名)
상주(上州), 상낙(上洛), 사량벌(沙梁伐), 사벌(沙伐), 상산(商山), 타아(陀阿), 귀덕군(歸德郡)으로 변화하였다는 전지의 내용 그대로임
7) 관원(官員)
목사의 품계(정3품)와 이하 좌수(座首), 별감(別監), 별장(別壯), 천총(千摠), 파총(把摠), 초관(哨官), 지곡관(知穀官), 기패관(旗牌官), 군관, 의생, 기생, 관노에 이르기까지 목치(牧置) 관아에 수발하는 인원을 명정하고, 판관(判官)과 교수(敎授)는 금무(今無)라 하여 폐지된 직제였음을 표기하였다. 이어서 ‘신증’으로 영장겸토포사(營將兼討捕使)라는 직원을 명기하였는데 ‘순치(順治) 갑오 창설(1774년 영조 50)’이라 표기하고 정3품 무관으로 대솔(帶率) 2인과 군관 200인 등 산하 지휘 인력을 부기하였다. 전지의 경우는 관제(官制)라고 하는 조항을 두었으며, 공부(貢賦)조에 관안부(官案府)라는 목을 별항으로 하였으나, 본지에는 이를 통합하여 수록하였다. 전지와 다르게 목사나 영장의 품계를 명정한 것과 영장이 토포사를 겸하는 제도의 신설년대를 표기하였음은 새로운 사실이다.
8) 성씨(姓氏)
전지에는 본주(本州)와 산동면(山東面)등 7개 면별로 거주한 관향(貫鄕)별 성씨를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본주와 단밀, 산양 등 옛날의 현(縣)과 장천(長川) 연산(連山)등 옛 부곡(部谷)별 주거 성씨를 관향을 구분하지 않고 수록하였다.
9) 풍속(風俗)
“俗尙簡嗇民風淳朴(속상간색민풍순박)”이라고 하여 상주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다는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을 전지에 따라 수록함. 이하 전지에 수록된 임진왜란에 주민(州民)들이 적에게 기부(寄附)하지 않아 조정으로부터 복호(復戶)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선조 임금의 교서가 있었다는 내용이 모두 누락되었음.
10) 형승(形勝)
전지에 따라 동남백도지수(東南百都之首)요 팔달지충(八達之衝)으로서 신라 때부터 대부(大府)였다고 하는 것에 최자전(崔滋傳), 안축기(安軸記), 이색기(李穡記)에 이 글이 전해졌음을 ‘신증’ 부기(附記)하였다.
11) 산천(山川)
산은 왕산과 천봉산 등 18개 천, 산천은 북천, 남천, 낙동강 등 9개 천을 수록하고, ‘신증’으로 갈가치(葛可峙) 증연(甑淵), 용유동(龍遊洞), 삼탄(三灘)을 새로이 수록하였다. 산천조에는 사불산(四佛山)과 낙동강(洛東江)에 대한 사기(史記)와 시문(詩文)등을 비교적 상세히 부기하였다.
12) 토산(土産)
전지와 같이 옥석(玉石), 등석(燈石), 호도, 감, 밤, 은어 등 12개 품목을 수록함.
13) 진공(進貢)
전지에는 토공(土貢)이라는 조목으로 “지금은 대동비납(大同備納)”이라고 서술되었으나 본지에는 생꿩, 생은어, 소금 절인 은어, 호도, 홍시, 감, 밤, 마른꿩, 산돼지, 여우, 인삼, 백작약, 백복령, 적봉령, 백복신, 적작약, 천남성(天南星), 자초용(紫草茸), 포황(蒲黃), 자고(紫故), 연화예(蓮花蘂), 차전자(車前子), 감국(甘菊), 생모과, 연자(蓮子), 수달 간, 백출(白朮) 등 30종을 ‘신증’ 수록하였다.
14) 성곽(城廓)
전지에는 여지조 성지(城池)목에 성지의 군사적 중요성을 서술한 후 읍성(邑城)의 규모와 시설물을 수록하였으며, 임진난 때 왜병이 성 밖에 10자 넓이 쯤 되는 해자(垓字)를 팠고, 성 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는데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였으나 모두 누락되었고, 읍성의 규모와 시설물도 다르게 표기되었다.
책 본 별 | 둘레(尺) | 내 용 |
청 대 본 | 1,549 | 성안에 21개소의 정(井)과 2지(池)가 있다 |
구당초본 | 3,883 | 동서남북 4대문안에 4개소의 지(池)가 있다 |
15) 관애(關隘)
전지에는 성지 조목에 읍성과 성산산성을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을 별도 목으로 하여 그 위치와 성안에 시설물과 기타 사록(史錄)을 부기하였는데, 전지보다는 사록의 내용이 매우 소략(疏略)함.
16) 진보(鎭堡)
무(無)라고 표기함
17) 봉수(烽燧)
회룡산(回龍山), 서산(西山), 국사당(國師堂), 산양 소산(山陽所山), 중모 소산(中牟所山), 소산(所山) 등 6개 봉수에 대한 기록이 청대본과 같음
18) 면리(面里)
전지에는 내동면(內東面)등 31개 면이었으나 본지에는 대평면(大平面)이 제외된 30개 면별로 주치로부터 거리를 부기하였음
19) 호구(戶口)
구 분 | 호 수 | 인 구 | ||
계 | 남 | 여 | ||
청 대 본 | 23,988 | 90,113 | 44,311 | 45,802 |
구당초본 | 18,642 | 69,443 | 32,292 | 37,351 |
전지 간행 후 37년이 경과 된 시점에서 호수와 인구가 오히려 현격히 감소되었음은 의문이다.
20) 전부(田賦)
육전(陸田 밭)이 8,847결 5부, 수전(水田 논)이 6,641결 30부로 도합 면적이 15,489결로 전지 청대본과 같다. 이 또한 상당한 년륜이 경과하는 동안 경작 면적이 확장되어야 마땅하나 면적이 동일하다는 것은 의문이라 할수 있다. 이어서 전세(田稅)와 대동(大同) 균세(均稅) 결전(結錢) 선무목(選武木) 요역(徭役)등 조세(祖稅) 양정(量定)을 다음과 같이 새로이 수록하였다.
구 분 | 양정(量定) | 수납(收納) |
전세(田稅) | 살1562석12두9도1합6석 콩1609석6두9도2합6석 | 3월에 호조에 납부하여 허가받음 |
대동(大同) | 작목(作木)300동 쌀670석14두8도5합1석 | 4월까지 육로로 선혜청에 납부 |
균세(均稅) | 전세조에 쌀12석4도2합4석 콩30석11두6도 | |
결전(結錢) | 5594양6전6분 강세(舡稅)11양 | 전세 상납시 같이 수납 |
선무목(選武木) | 10동2필 | 10월에 균청에 납부 |
요역(徭役) | 시초(柴草), 탄(炭), 치(稚), 계(鷄)값으로 매부(夫) 4양씩 납부 |
*양정의 석(石), 두(斗), 도(刀), 합(合), 석(夕)은 당시 통용하던 도량형(度量蘅) 단위임
전지에는 본지와 같이 구체적으로 세목을 구분하지 않았으나 본지에는 세목(稅目)별 구분과 수납방법까지 수록하였음.
21) 봉름(俸廩)
본지에 새로이 정한 조목으로서 관직자에게 지급되는 봉록을 정한바 다음과 같다.
◦ 아록위(衙祿位) : 50결
◦ 공수위(公須位) : 15결
◦ 수미(收米) : 18석 콩 5석 5두
◦ 공수미(公需米) : 390석
◦ 사객지공미(使客支供米) : 120석
22) 군액(軍額)
전지에는 군병(軍兵)이라는 조목이었고, 군병의 편성과 평시에 교양 그리고 유란시에는 법령에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결전하여야 하며, 후세에 병제가 문란하고, 옳은 장수가 없어 우려하는 바이니 하루 빨리 정도를 찾아야 한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본지에는 서술 없이 군별 인력만을 수록하였다.
◦ 훈련도감포보(砲保) 413명, 군향보(軍餉保) 5, 어영정군(御營正軍) 209, 자보(資保) 223, 관보(官保) 617명, 금위정군(禁衛正軍) 389, 자보(資保) 416, 관보(官保) 851, 병조 기병(兵曹騎兵) 1141, 보병(步兵) 1758, 별기병(別騎兵) 15, 금군보(禁軍保) 176, 보직(洑直) 9, 호련대(扈輦隊) 16, 경역보(京役保), 내취보(內吹保) 7, 낙강여정(落講余丁) 8, 보충대여정(保充隊余丁) 90, 삼산봉군(三山峰軍) 300, 악생(樂生) 23, 악공(樂工) 5, 보(保) 18, 이조 유조서리보(吏曹留曹書吏保) 178, 공조 장인(工曹匠人) 222, 전설사 제원(典設司諸員) 47, 주진 군(主鎭軍) 500, 지례 신이정(知禮新移定) 12, 수군 사부(水軍射夫) 138, 관일수(官日守) 30, 율생(律生) 9, 율부(律夫) 8, 속오원군(束伍元軍) 2,691, 복마군(卜馬軍) 165, 보(保) 165, 병영(兵營) 초관(哨官) 1, 기패관(旗牌官) 1, 원군(元軍) 120, 보(保) 220, 별무사군관(別武士軍官) 8, 별무사기패관 20, 양여보(良余保) 56, 작령군(作領軍) 5, 순영군뢰(巡營軍牢) 6, 이상 총 인원 11,298명이 동원됨을 수록하였다. 전지에 수록된 인원은 총합이 12,162명으로 864명이 감원되었으나 각 군문 별 인원은 대동소이함.
23) 창고(倉庫)
전지에는 공서(公署)조에 한목(目)이었으나 본지에는 별도 조항으로 하였고,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진휼고(賑恤庫), 읍창(邑倉), 산양, 공성, 중모, 화령, 은척, 단밀창과 성산산성 안에 있는 산성창(山城倉)의 위치를 열기(列記)하였다. 위 각 창 중에 군기고와 대동고 진휼고는 본지에 신설하였고, 각 창에 재고된 양곡은 다음과 같다.
◦ 미(米) 52,510석 10두 8도 9합 6석
◦ 콩(太) 50,087석 4두 4도 9합 5석
◦ 벼(祖) 29,318석 1도 2합 1석
◦ 보리쌀(米牟) 7,062석 3두 9합 3석
◦ 보리(麥) 670석 12두 5도 5합 3석
◦ 겉보리(皮牟) 7495석 8두 7도 1합 7석
창고는 을사(1785 정조9)년에 허가한 바에 따라 10월에 개방하고 12월에 봉하며 곡종 중에 보리는 6월에 거둬 봉한다고 수록됨. 이어서 신증을 빙고(氷庫)의 위치를 끝에 수록함
24) 단사(壇祠)
사직단(社禝壇), 성황사(城隍祠), 여단(廬壇), 독사(纛祠)의 위치를 열기(列記)하였다. 전지에는 질사(秩祠)조 단유(壇壝)목에 수록한바 있으나, 본지에는 별도 조항으로 함.
25) 학교(學校)
향교(鄕校)와 서원을 이어서 수록하였는데 서원으로는 도남(道南)․흥암(興巖)․옥성(玉城)․근암(近嵒)․봉산(鳳山)․서산(西山)․백옥동(白玉洞)․속수(涑水)․연악(淵嶽)․효곡(孝谷)․화암(花巖) 등 11개 서원에 이어 운계(雲溪)서원과 충열사(忠烈祠)를 ‘신증’표기 없이 추가 수록하였다. 전지에는 학교조에 향교․서원․서당․학제(學制)․학전(學田)등을 목으로 구분하여 글머리에 학교의 중요성과 향교의 사략(史略)을 상세하게 밝힌바 있으나 본지에는 교원(校院)별로 소재지와 소략(疏略)한 사실(史實)을 수록하였으며, 학교조에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서당(書堂)목이 누락되었다. 본 조항에 새로이 충열사(忠烈祠)가 포함되었는데 사(祠)라고 학교의 기능이 아닌 존현(尊賢)에만 목적을 둔 사당이 이 조항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에 이미 향교나 서원의 기능이 양사(養士), 즉,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6) 궁실(宮室) 객관(客官)
객관을 궁실(宮室)조로 상향(上向)하여 비교적 상세한 사실(史實)을 수록하였다. 궁실이라고 표기하였음은 실내에 국왕의 위패를 봉안한 높은 뜻을 의미 하거니와 초하루와 보름에 목사가 향망궐례(向望厥禮)를 올리는 곳으로 왕정시대 왕권의 상징적 성소(聖所)라는 것을 암시하고, 본지 편찬 당시에 이를 여행(厲行) 하였음을 엿볼수 있다. 전지에는 공서 조목에 하나의 기관으로 소략한 사실만 수록하였을 뿐이었다.
27) 공서(公署)
주아(州衙)․사무당(使無堂)․제금헌(製錦軒)․사성헌(四省軒)․제승당(制勝堂)․힐융루(詰戎樓)․연군루(鍊軍樓)․향사당(鄕射堂)․양무당(養武堂)․영빈관(迎賓館)의 위치를 열기하였다. 전지에 수록되었던 추월당(秋月堂)․동헌(東軒)․서헌(西軒)․진영(鎭營)․사각(射閣)․우림당(羽林堂)․장대(將臺)․무학당 의국 등은 모두 누락되었다. 누락된 건물 중에 임난 때 소실되어 당시에는 없는 건물도 있다하겠으나 대부분의 건물은 존치되었을 것임에도 미수록 하였음은 의문이다.
28) 누정(樓亭)
전지에는 고적(古蹟) 조목에 분류하였으나 본지에는 신설한 조항이고, 공서(公署)조에 포함하였던 풍영루(風詠樓)․응신루(凝神樓)․청량각(淸凉閣)․이향정(二香亭)․관수루(觀水樓)를 본 조에 이기(移記)한데 이어 자천대․한연당․합강정을 수록하였다. 조목의 첫 머리에 누정이 자리한 배경에 대한 서술없이 누정별 위치와 간단한 역사와 함께 관련된 문한(文翰)을 수록하였는데 풍영루와 응신루․한연당(閒燕堂)에 관한 기록이 많은편이다. 전지에 수록된 육익정․낙지정․개암․초학대․창석정․무정 등 61개 누정이 누락되었다.
29) 역원(驛院)
전지와 같이 낙양(洛陽)․낙동(洛東)․낙평(洛平)․낙서(洛西)․장림(長林)․낙원(洛原)역이고 역별로 부기한 내용이 더 상세하게 수록되었음.
<역 별 주요 수록 내용>
역별 | 주치로부터거리 | 역간거리(리) | 말비치(필) | 배치인력 | ||||
대 | 중 | 복마 | 역리 | 노 | 비 | |||
낙양 | 주서3리 | 낙서30낙평20낙동40낙원15 | 2 | 2 | 5 | 94 | 52 | 16 |
낙동 | 주동40리 | 낙양40낙원40선산연향역40 | 3 | 2 | 8 | 565 | 64 | 25 |
낙평 | 주남25리 | 낙양20선산안곡20 | 2 | 3 | 50 | 78 | 19 | |
낙서 | 주서30리 | 낙양30장림20 | 2 | 4 | 115 | 42 | 10 | |
장림 | 주서55리 | 낙서20보은원남50 | 2 | 5 | 224 | 11 | ||
낙원 | 주북12리 | 낙양15낙동40함창덕통30 | 2 | 2 | 129 | 27 | 9 |
원(院)의 경우 전지와 같이 원 별 위치를 부기하였으나 본지에는 원의 현존유무(有無)를 신증 수록하였다.
원 별로는 다음과 같다.
원 별 | 주치로부터거리 (리)위치 | 현존유무 | 원 별 | 주치로부터거리(리) | 현존유무 |
죽현(竹峴) 공성(功城) 남원(南院) 안빈원(安賓院) 광제(廣濟) 이두등(泥豆登) 흥왕(興王) 요재(要齎) | 주남30 죽현 하 일명오리원 주남40 주남2 주동11 주동19 주동30 주남9 주동30 |
무 무 무 무 무 무 | 양산지(陽山旨) 서(西) 어암(於巖) 율원(栗院) 부원(釜院) 북원(北院) 송원(松院) 당제(唐梯) 퇴산(退山) 류등(柳登) 대두(大豆) 중생(重生) 장혜(長惠) 동(東) 반암(班巖) | 주남15 주서3 주서15 주서33 주북8 주북2 주북26 주북15 주북42 주남24 주남24 주서65 주서72 주서56 주북57 |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무 |
위 표에서 보는바 동원과 반암원은 새로이 수록된 것이 모두 23개 원 중에 21개 원이 폐지되었고 죽현원과 공성원이 존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에 이어서 발참(撥站)을 새로이 수록하였다.
<발참 별 수록내용>
발참 별 | 주치로부터거리 | 배치인력 |
낙동(洛東) 낙원(洛院) | 주동37리 주북16리 | 장(將)1군(軍)45 장1군45 |
살피건데 역은 통신과 인력 물자를 수송하는 국가 통치기능에 필요한 중요한 기관이었다. 6개 역 중에 낙동역에는 565명에 이르는 많은 인력이 배치되었는데 이 역은 낙동강을 건너야 하는 특수한 위치에 있어 강을 건너는 수 개 소의 도강 인력이 포함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밖에 장림, 낙원, 낙서 순으로 인력의 배치 규모가 컷다는 점을 알 수 있고 이와 같은 많은 인력에 대한 호구(湖口)대책에 관한 내용 등 연구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원(院)은 역과 역 사이에 공무수행 관리가 투숙하던 국영 여관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인도 이용하였다가 대부분 없어지고, 선조 30년(1597) 이후에는 통신망만 전담하는 파발(擺撥)제도가 새로 만들어 졌다. 낙동 발참은 오늘의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이고, 낙원발참은 오늘의 상주시 낙상동이다. 전지에는 역원 조목을 여지(輿地)조에 목(目)으로 책편의 앞에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책편의 뒤로 편집되었음도 고려할 사항이라 할 수 있다.
30) 교량
남대교(南大橋)․북천판교(北川板橋)․동술교(東述橋)․양산지교(陽山旨橋)가 수록되었으나 동술교 이외는 모두 파괴되었다고 부기하였다. 전지의 점교(簟橋)와 광탄교(廣灘橋)는 누락되었고 동술교는 본지에 신증 수록된 것이다. 동술(東述)이라는 이름은 소리나는 옛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듯 하다. 지금의 상주시 동쪽 남천에 놓인 화개교 근방을 동수내 또는 동시내라고 하는데 옛날 이쪽에 우거진 숲(藪)이 있어 “숲이 있는 냇가”라는 것이 변형되었는 것으로 본다.
31) 도로
본지에 새로이 설정된 조목이나 조선 후기에 오면서 교통이 발달하여 도로의 기능이 부각된 현상이라고 할수 있다. 도로라고는 하나 자동차가 왕래할 만큼 넓은 도로는 아닌 것 같고, 동서 남북 4통 5달의 연접된 지역과 그 중간에 주요 지점간의 거리를 측정하여 수록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도로 주요 노선 거리>
방위별 | 도로노선별거리(리) |
북 | 막곡(幕谷)20-함창 경계7 송현-용궁 경계40 |
동 | 낙동40-선산 경계5 단밀-비안 경계37 |
남 | 청남 독송정(靑南獨松亭)30-안곡-선산 경계10 공성-왜유현(倭踰峴)-김산(金山) 경계17 |
서 | 낙서10-모동-황간 경계60 율원(栗院)20-보은 경계40 |
32) 도서(島嶼)
전지에 없던 새로이 신설된 조목이나 내용은 없고, 다만 무(無)라고만 표기하였다.
33) 제언(堤堰)
전지에는 여지산천(輿地山川)조목에 이어서 지제(池堤)를 구분하지 않고 수록했었으나 본지에는 새로운 조목으로 설정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전지에 수록된 제언(22개 제) 척(尺)
제언별 | 위치 | 규모(척) | 제언별 | 위치 | 규모(척) | ||
둘레 | 깊이 | 둘레 | 깊이 | ||||
공검지(恭儉池) 불암지(佛巖池) 대제지(大堤池) 기지(機池) 굴사제(堀史堤) 오리방제(五里坊堤) 연제(硯堤) 신제(新堤) 오리제(五里堤) 부제(釜堤) 죽전제(竹田) | 주북27리 주북40 단밀 주남4 내북 중동 단동 단동 단남 단남 내북 | 16647 1921 2896 1181 2481 651 1598 647 538 550 1070 | 10 0.3 10 금패 3.5 4 4 3 6 3 3 | 생물제(生物堤) 수정제(水淨堤) 대현제(大峴堤) 광동제(廣洞堤) 오감산제(五甘山堤) 옥산제(玉山) 산천제(山川) 두모곡제(杜毛谷) 기제(機) 남곡제(楠谷) 진목제(眞木) 연화제(蓮花) | 단남 단남 청동 공성 공성 공성 외남 외남 모서 화동 영순 산동 | 511 471 350 914 605 403 918 553 1253 883 1288 1269 | 7 10 4.5 5 5 2 5 2 5.5 6 3 5 |
나) 본지에 신증 수록된 제언(29개 제)
제언별 | 위치 | 규모 | 제언별 | 위치 | 규모 | ||
둘레 | 깊이 | 둘레 | 깊이 | ||||
죽전제(竹田堤) 유제(酉堤) 월봉제(月峯堤) 말지제(末只堤) 동원제(洞員堤) 구좌제(仇佐堤) 송제(松堤) 소제(小堤) 저제(猪堤) 이천제(伊川堤) 유제(酉堤) 람동제(檻洞) 고윤석제(高允石) 대사제(大寺) | 내북 내북 단동 단동 단남 외동 외동 외동 외동 외서 외북 외북 산남 산동 | 1070 699 939 2465 282 907 610 650 503 1800 1447 824 133 600 | 3 2.5 7 3 3 5 4 4 1.5 5 6 4 2 2 | 분황제(分皇堤) 언가방(言可坊) 상원제(上院堤) 월로제(月老堤) 상초전(上草田) 동정제(洞井堤) 입암제(立巖堤) 대제(大) 비아제(飛兒堤) 검물석(檢勿石) 매호(梅湖) 직곡(直谷) 진정(辰井) 이촌(梨村) 오갈(烏渴) | 외동 장천 장천 청동 청남 외남 모서 화서 화서 화서 외북 산남 산남 산동 대남 | 480 312 550 605 409 863 1607 2290 1600 1300 834 748 170 1251 570 | 3 4 5 5 4 9 6 5 5 5 4 3.7 2 3 3 |
다) 전지에 수록되었던 제언이 누락된 곳(15개 제)
묵계제(墨溪堤)․우제(牛堤)․산정제(山亭堤)․형천제(兄川堤)․이곡제(泥谷堤)․무림제(茂林堤)․매화제(梅花堤)․덕동제(德洞堤)․월당제(月塘堤)․현수제(賢守堤)․기제(機堤)․봉산제(鳳山堤)․장림제(長林堤)․입석제(立石堤)․동전제(東前堤).
살펴보건데 일반적으로 제언이라고 하면 인공적으로 물길을 막는 방재(防災)시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지에는 저수 기능인 지(池)와 함께 둘레 또는 깊이를 측정하여 제(堤) 또한 지(池)와 같이 물을 가두어 이용한 수리시설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수록된 것 중 공검지는 특별히 “함창 상주 몽리(咸昌 尙州 蒙利)”라고 하여 당시로서는 상주목 구역이 아닌 함창 현 구역에 있는 수리시설을 상주목 관내에까지 이용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본 조항 제언에 대하여는 모든 제언의 규모를 부기하는 등 전지보다 더 상세히 기록되었다.
34) 장시(場市)
전지에 없던 새로이 설정된 조목이다
<장시 별 내용>
장 시 별 | 위 치 | 일 자 | 장 시 별 | 위 치 | 일 자 |
읍장(邑場) 북천(北川) 낙동(洛東) 단밀(丹密) 공성(功城) 장공(長蚣) 중모(中牟) | 재성내(성내) *읍장에포함 낙동진두 단밀창고 공성창고 외 남 중모창고 | 2. 7 4. 9 5. 10 3. 8 1. 6 3. 8 4. 9 | 철곡(鐵谷) 화령(化寧) 은척(銀尺) 낙원(洛原) 삼탄(三灘) 산양(山陽) 어염(魚塩) | 화 동 화령창고 은척창고 내 북 외 북 산 남 무 (無) | 2. 7 3. 8 4. 9 5. 10 3. 8 5. 10 |
장시 별 일자는 지금의 장날이 바로 그때 정한 날이라는 것이고, 단밀․공성․중모․화령․은척에 있는 창고에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장이 섰음을 알 수 있다. 낙동장은 낙동강 뱃나드리였으며, 소금을 파는 염창은 전지에 수록되었으나 본지 간행시에는 장 자체가 없어졌다.
이 조목이 신설되었다는 것은 사회가 발전되어 경제 활동이 산업화되고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35) 목장(牧場)
본지에 신설한 조목이다. ‘無(무)’라고 표기하여 없어졌다고 하나 “분양한 말 4필을 매년 7월에 받아 길러서 다음해 4월 본시(本寺)로 올려보냈다”라고 하였는데 본시(本寺)라고 함은 조정의 말관리 부서였던 사복시(司僕寺)를 뜻하는 것인 듯하다.
36) 불우(佛宇)
용암사(龍巖寺)․승장사(勝長寺)․용담사(龍潭寺)․미륵암(彌勒巖)․남장사(南長寺)․용흥사(龍興寺)․동관음사(東觀音寺)․만경사(萬景寺)․청계사(淸溪寺)․대승사(大乘寺)․김용사(金龍寺)․묘적암(妙寂庵)․사사(沙寺) 등 13개 사찰이 수록되었다. 승장사와 용암사는 ‘今無’라고 하여 없어졌다고 하나 옛 기록을 상세하게 부기하였고, 미륵암 또한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을 상세히 부기 하였다. 전지에는 사찰이라는 조목으로 표기하였고, 본지에는 불우라고 하였으나 그 뜻은 같다. 전지에는 모두 62개 사찰이 수록되었으나 북장사(北長寺)․갑장사(甲長寺)․윤필암(潤筆庵) 등 49개 사찰이 누락되었다. 용암사․승장사․용담사․미륵암에 이어 “구증(舊增)”표기 후 남장사․용흥사․동관음사․만경사․청계사․대승사․김용사․묘적암을 열기하고 ‘신증(新增)’ 표기에 이어서 사사(沙寺)를 수록하였다. ‘구증’이라고 함은 전지에 새로이 신증 수록되었다는 뜻인데, 전지 청대본에는 ‘신증’이라는 표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청대본의 전지였던 창석본에는 용암사․승장사․미륵암․소림사․흥왕사․용담사 등 6개 사찰이 수록되어 있어 본 구당지에서 ‘구증’이라고 표기한 책본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37) 고적(古蹟)
사벌국고성과 화창(化昌) 공성․영순․청리 등 4개 폐현(廢縣)에 대한 사략(史略)을 부기하였고, 이어서 무림(茂林)․연산(連山)․백원(白原)․양령(壤寧)․하해(河海)․양보(陽寶․관제(灌濟)․선은소(鐥銀所)․가량(加良)․보량(保良)․평안(平安)․주선(主善)․단곡(丹谷)․생물(生物)․상이소(上伊所) 등 16개 부곡의 사략(史略)을 부기하였다. 16개 부곡 중 연산․양녕․하해․양보․관제․선은소․가량․보량․평안․평산․주선․단곡․생물․상이소 등 13개 부곡은 ‘今無(금무)’라고 표기하여 없어졌다는 것이고, 무림․백원․부곡은 ‘금무’ 표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어서 ‘신증’ 표기 뒤에 왕활교(王活橋)와 봉황성(鳳凰城), 그리고 장천(長川) 부곡을 연기(連記)하였다. 살펴 보건데 왕활교와 장천부곡은 이미 전지에 수록되어 있음에도 신증 수록한 것으로 표기되었음은 오기(誤記)인듯 하다. 전지에 수록된 중요한 고적사실(古蹟史實)이라 할 수 있는 사벌왕릉과 사벌촌의 비석을 도남서원 창건에 사용하였다는 것, 이부곡토성․자산산성․사장사(四長寺)․상주(上州)․퇴옹정(退翁亭)․운정(雲亭)․충신담(忠臣潭)․절부애(節婦崖)․임천석대(林千石臺)․백암(白巖)․군명교(軍鳴郊)․봉황대․신라석탑․효자리․광대천(廣大遷)․항갈암(項葛巖)․삼정암(三呈巖)․효자비․미륵당․화령고성․백화고성․근암고성․만경산고성․사화진(沙火鎭)․풍기 은풍면 명봉산의 태실 비석, 고려 공민왕의 상주남행(南幸),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 장군의 죽음, 금돌성(金突城)․백화산성과 홍지(洪之)의 몽고병 격퇴, 임진왜란 북천전장, 장원향(壯元鄕)에 관한 사록(史錄)등이 누락되었음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38) 환적(宦蹟)
전지에는 명환(名宦) 이라고 표기되었으나, 본주에 목백(牧伯)이나 판관(判官) 또는 교수(敎授)등 관직을 역임한 사람 중에 공적이 있는 인물을 수록한 항목이라는 점은 같은 뜻이다. 전지와 같이 왕조별로 하여
◦ 신라 : 김유신, 이등
◦ 고려 : 이주좌, 김부일, 한충, 정극영, 정항, 양원준, 최유청, 최기우, 최득평, 최제, 윤혜, 김인경, 최자, 김부의, 안유, 정운경, 안축, 최충청 등 18명
◦ 조선 : 권집경, 박이창, 이인손, 이전수, 유문통, 정종보, 이요연, 손중돈, 전팽년, 이덕창 신잠, 이진희, 홍보세, 남응노, 김취문, 정곤수, 윤탁연, 류성용, 김해, 권길, 한명윤, 정기룡, 김용, 한술, 강복성, 정효선, 김지남 조찬한, 이송령, 이초로, 조정만, 등.. 151명이 수록하였음.
수록한 인물을 살펴보며 조선조 이후에는 도임한 년도와 공적을 부기하였는데 고적이 없고, 성명 또는 성명에 도임한 년도만 부기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전지에 수록된 인물이 누락 되거나 새로 수록한 인물이 많다.
전지수록 인물 중 누락
․ 고려조 : 김영구, 전택, 박분, 김남득
․ 조선조 : 안성, 하윤원, 이복시, 한암
송인, 강구손, 권기, 황준량, 고응척, 윤국형, 심락, 박장원, 류다후, 이회, 이만원, 이식, 이종적, 김광우, 등 24명이다.
․ 본지에 신증 수록한 인물
원성유, 이세항, 정식, 이징해, 권황, 박휘등 이제, 권부, 안상원, 김도협, 박사수, 이정숙, 김서노, 이종적, 이협 등이고, 전지 이후에 역임한 조증회, 원경렴, 이시증, 김성휴, 이민보, 조덕상, 임매, 정석달, 홍익팔, 이학원, 김이신, 심기태 등 12명을 신증 하였다. 본지에 누락된 인물 중에 고려 때 김영구, 정택은 상산관을 중수하였거나 본향에 처음 입향한 인물임에도 누락된 반면, 조선시대 인물 중에 별다른 공적 기재가 없이 성명만 기록된 인물을 수록하였다는 것과, 임진왜란 때 읍성을 버리고 용화 산 중으로 피신하였던 김해 목사가 수록되었다는 것은 의외라 할 수 있다.
39) 과제(科第)
조선조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서 인물 성명에 등재년과 총관직을 부기하였다. 전지에는 인물, 하나의 조목에 과제인물과 인물 현사(賢士)를 혼합 수록하였으나, 본지에는 별도 목으로 구분하였으며, 중종조 이후부터 왕대별로 수록하였다. 과제인물을 별도 조목으로 분류 하였음은 벼슬에 나아가는 길이 공식적으로 시험에 입격하여 진출하였다는 것에 더 무게가 있음을 알려줌을 엿 볼 수 있다.
○ 과제 인물 수록 내용 : 105명
홍여강, 한겸, 강려, 김겸, 한가견, 한가구, 이곽, 이과, 신귀정, 이항, 김효급, 손등, 김광준, 노상지, 황맹헌, 강신, 권겸, 김정간, 김수화, 김사원, 노기, 조휘, 서극일, 신호, 김광복, 강사안, 강서, 강신, 조익, 강연, 강제, 강설, 황뉴, 김혜, 고상안, 최정호, 이원규, 서진병, 김의재, 정심, 김지복, 서희조, 노준명, 이양복, 한극술, 한극창, 강교년, 김호철, 조희인, 조정융, 여능, 김사락, 조우신, 전명룡, 이장, 신후제, 신후명, 이성익, 손만웅, 이재용, 이옥, 손경석, 이형상, 박세화, 김중겸, 정익, 조세후, 황익제, 황경익, 성기인, 홍도달, 류상익, 강필신, 이만유, 이지성, 황준, 하대연, 문덕겸, 김익겸, 황항, 송지현, 황개후, 정태형, 김수담, 김집, 김성흠, 류문룡, 조중직, 홍성원, 윤즙, 김이복, 서윤석, 홍상조, 권상룡, 신성택, 김용, 조석우, 고유, 김이상, 안정욱, 이 수, 노천우, 허유, 정언승, 조석호
40) 인물
전지에는 인물의 등재 기준을 서술한 후에 인물의 성명과 성명 밑에 공적과 덕망행신(行身德望)을 부기하였으나, 본지에는 전지의 형식대로 왕조 별로 인물을 수록하였다.
○ 고려조 : 김득배, 김선치, 김득제 등 상산 3원수 형제와 상산김씨 시조 김수, 상산박씨 시조 박견, 김수자, 이민도, 조운흘, 김비궁, 김록, 신원수 등 11명을 수록함.
전지에 수록한 박원정, 박천 등 상산 박씨 박견의 자손과 김도, 김식, 김희일, 김문도, 김성, 김지연, 기조, 김치화, 김일, 김분, 김승귀, 김상곤, 등 상산김씨 자손 그리고 임춘, 박인석, 김선, 김구용, 정의생, 박안의, 한철중, 감자연, 김구, 김전, 김한, 김축, 김추, 김구용 등 28명이 누락되었음.
○ 조선조 : 전지에 수록된 인물중 박안신, 김상직, 황효원, 노숭, 주세붕, 홍언충, 황효헌, 황영헌, 하락, 김범, 노수신, 김귀영, 강사상, 김충, 성윤해, 김우굉, 성람, 송량, 김순고, 김홍민, 이덕형, 김홍미, 정경세, 김각, 조정, 이전, 이준, 전식, 조우인, 고인계, 정기룡, 이연, 김인절, 류진, 김광엽, 채득기, 성헌집, 성만진, 강응철, 김담수, 이관징, 정도응, 류천지, 권상일 등 71명이 수록되었다.
전지에 수록된 인물 중 홍여강, 조숭, 황보신, 김수화, 조서경, 홍귀달, 한가구, 한가견, 노우, 박수림, 장순손, 조윤령, 박언성, 노홍, 노기, 조휘, 정국성, 권문해, 조익 등 모두 413명이 누락되었음.
살펴보건데 누락된 인물 중에는 소재 노수신의 입향조 노숭과 저자 구당 자신의 입향조 조숭과 조윤령, 세종대의 명상 황희의 제3자로 본주에 입향한 황보신, 도덕문장에 뛰어난 홍귀달, 김혜, 조정융, 이구, 홍여하, 손만웅, 이만부, 황익제 등 여러 현달한 인사가 누락 되었음은 특이한 일이고, 본지에 신증 수록한 인물은 성이홍과, 전지 청대본을 저술한 권상일이다.
41) 충절(忠節)
전지에 수록한 우성적, 박걸, 노도응에 이어서 박동형, 전극항, 미정(未貞)을 신증 수록하였음.
42) 효자(孝子)
전지에 수록한 고려조의 신우, 조선조 박세정, 박언성, 김희정, 임창무, 김범, 정흥세, 하경휘, 송이해, 송이필, 권응정, 박선간, 김언건, 김유성, 정일, 서상남, 이효원, 염행검, 이익화, 조구협, 김형석, 강원, 임성무, 장복례에 이어, 신증으로 김씨, 예귀주, 유유발, 이랑 등 모두 28명을 수록함. 전지에 수록되었으나 누락된 인물은 정은 , 하빈, 고응두, 이사즉, 이명이, 이숙, 조대윤, 강용정, 황재만, 이찬, 서명징, 김박, 조상준, 김순발, 안귀동, 임소사 등 16명이다.
살펴보건데 지리사록에 인물로 수록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다. 그런데 누락된 인물 중에는 본지의 저자 구당 자신의 증조부인 조대윤이 누락되었음은 특이하다. 아울러 역사 인물의 수록은 편찬 당시에 엄격한 검증을 거쳐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어야 하나 편찬 이전에 수록되었던 인물을 누락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다. 그러한 점에서 본지의 인물 항목은 400여 명 이상을 누락한 바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43) 열녀(烈女)
조선조에 김심의 처 김씨, 교리 권달수의 처 정씨, 박사 강설의 처 황씨, 정영국의 처 한씨, 양인 최인선의 처 김씨, 최하규의 처 김씨, 이장의 첩 노씨, 송량의 딸이요 노경건의 처 송씨, 이봉의의 처 김씨, 강만보의 처 김씨, 사인 강치목의 처 채씨, 이민화의 처 권씨, 김자의 처 이씨 등 13명이다. 전지에 수록한 인물로 누락된 이는 참봉 김도의 처 하씨, 부솔 김헌의 처 양씨, 부장 충원의 딸 배씨, 김순의 처 윤씨, 사인 권병달의 처 김씨, 사인 황위의 처 전씨, 정병 최순형의 처 전씨, 이응남의 처 한씨, 사인 김체신의 처 정씨, 정병 엄석산의 처 이씨, 양녀 노흔의 처, 현감 김유지의 종 유월이, 진사 정일지의 처 윤씨, 상린 하시지의 처 박씨, 참봉 하만계의 딸 하씨, 사인 이광규의 딸 이씨, 사인 이각의 처 신씨, 조하창의 딸 조씨, 사인 시매의 서녀 류씨, 중모 사인 황유의 처 윤씨, 장천의 사비 서울녀, 송량의 딸이요 정이괄의 처 송씨, 부제학 김상직의 후예이고 사인 송도흥의 처 김씨, 사인 김수행의 처 이씨, 외남의 사비 정화 등 25명이다.
살펴보건데 수록된 인물과 누락된 인물 모두 38명 중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인물이 15명이다. 그 가운데 13명은 누락된 25명 안에 들어있다.
44) 총묘(塚墓)
전지에 수록한 김선치, 노수신, 성윤해, 김구굉, 전식, 이준, 홍언충의 묘와 신증으로 김범, 정기룡 묘를 수록하였다.
전지의 것이 누락된 묘는 사벌왕릉, 김상안, 곽득하, 고원, 이계선, 김윤종, 김자구, 황보신, 노덕기, 이전, 황맹헌, 황성원, 박안의 박윤창, 황보신의 처 홍씨, 김효우, 유제, 김거도, 한가구, 김순고, 조정, 신석번, 김득가, 조승, 류천지, 김담수, 손등, 손만웅, 김도, 김안절, 신우, 김홍미, 김록, 김흡, 김전, 김택 등 30개소의 묘이다.
살펴보건데 누락된 묘 중에는 본지의 편찬자 구당 자신의 입향조 조숭과 그의 중시조 조정의 묘와 함께 수록된 인물에 버금할 만한 인물의 묘소가 누락되었음은 전통적 조선시대 조상숭배 정신과 괴리된다고 할 수 있다.
45) 제영(題詠)
‘地形眞似虎起伏(지형진사호기복)’ 이규보의 시, ‘沙伐舊畿猶勝景(사벌구기유승경)’ 하륜의 시, ‘不見龜疇洛水中(불견귀주낙수중)’ 정발의 시, ‘巨邑跨商洛(거읍과상락)’ 김조의 시, ‘千年洛水書應出(천년낙수서응출)’ 박원형의 시, ‘閭井千區遠(려정천구원)’ 권맹손의 시, 이언적의 ‘北川詩(북천시)’, 유홍의 시, 이승인의 ‘風詠樓(풍영루)’시, 이행의 시, 이황의 시, 황준량의 시, 조준의 ‘객사제영(客舍題詠)’, 김종직 시, 조휘의 시, 류영길의 ‘추월당(秋月當)’시, 이황의 ‘관수루(觀水樓)’시, 김일손의 시, 김종직의 시, 김지남의 ‘이향정(二香亭)’시, 조찬한의 시, 이정겸의 시, 오도임의 ‘진남루(鎭南樓)’시, 이황의 시를 수록하였다. 수록된 제영시 중에 이언적의 북천시부터는 ‘구증’이라는 표기가 있는 후에 수록하였는데, 구증이라는 것은 전지에 신증으로 수록하였다는 뜻이지만 전지 청대본에 신증으로 수록된 기록이 없다. 창석본과 청대본에는 문한(文翰)이라는 조에 서발(序跋). 문(文), 갈명(碣銘), 제영(題詠), 잡저(雜著)등의 목으로 제영이 들어있으나 조목만 설정되어 있을 뿐이고, 책본에는 편집되지 않았다. 아마도 글의 내용이 많으므로 하여 별책으로 편집된 것인 듯한 데 아직까지 그것을 찾지 못하여 안타깝다. 본 제영조에 흥암서원의 어필비각(御筆碑閣)에 숙종왕의 비망기(備忘記)와 비문, 그리고 도남서원에 정경세가 지은 상량문, 흥암서원 이건시 성우주가 지은 상량문, 옥성서원에 이준이 지은 상량문이 수록되었다.
46) 책판(冊板)
신설된 조항이다. 小學大全(소학대전), 聖學十圖(성학10도), 蘇齋集(소재집), 道德經(도덕경), 天機大要(천기대요), 兵學指南(병학지남). 痘瘡集(두창집), 九數略(구수략), 同春集(동춘집)등을 수록하였다. 끝의 동춘집은 뒤에 다른 모양의 글씨체로 가필(加筆) 하였고, 본조항의 글씨 모두가 전편보다 난필인 편이다.
종합적으로 살펴 보건데 본 구당본 초책은 완성된 책 본이 아니고 초책(草冊)이니 만큼 공식적으로 완전한 지리사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책머리와 끝에 서․발문이 없고 기록으로서 꼭 있어야 할 책편의 편집 기준이 없는 것이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으로 시회가 발전됨에 따라 새로운 중요한 사실(史實)들이 수록 된 것은 사료로서 충분하다고 사료된다.
○ 새로이 수록된 항목 : 진보(鎭堡), 봉름(俸廩). 도로(道路), 도서(嶋嶼), 장시(場市), 목장(牧場), 과제인물(科第人物), 책판(冊板)
이에 반하여 일부 항목은 중요한 사실임에도 누락 되거나 과도히 축소되고, 후계 기록이 없다는 것이 의문되는 점이라 하겠다.
○ 누락된 항목 또는 주요 내용 : 도진(渡津) 학교 조의 서당(書堂), 질사(秩祠), 관제(官制), 고적조의 북천전장과 몽고군과의 항쟁 수록, 인물의 과도한 누락 등은 연구할 대상이다.
5. 구당본 이후의 상산지
이 글 머리에 거론한 우리 상주의 향토지리사록인 <상산지> 중에 구당본 이후의 책본은 순조와 고종 년간에 4차에 걸쳐 간행한 <상주목읍지> 또는 <상주읍지>와 일제침략기 1928년의 <상산지>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순조 32년(1832)에 간행한 <상주목읍지>는 조정의 명에 의하여 간행된 첫 관찬지라는 점과 편집후기 격인 발문(跋文)과 <상산지> 전말이 수록되었다는 점에 큰 뜻을 들 수 있다고 본다. 책 본별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상주목읍지(임진본)
순조 32년(1832) 임진년에 간행한 것으로 청대본이 있고, 83년 구당본이 간행 후 46년이 지난 뒤에 편찬된 관찬 지리사록이다.
우선 이 지에 수록된 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읍지는 40여 조목을 기록한 사실(史實)이므로 소루(疏漏)하거나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됨
◎ 우리 상산에 읍지가 있었음은 ‘구지’(창석, 청대본을 지창한 듯)의 서문을 상고한 바 창석본 간행시 구희급(丘希岌)이라는 사람이 공관에 있던 기록을 등출(謄出)하였는데, 그 간행연대는 정덕 연간(1507년 중종 2년~1521년 중종 16년)으로 추정한다.
◎ 창석본, 청대본, 구당본이 계속 이어서 수찬한 것을 목(牧)의 예리(禮吏)에 보관 되어 있었으나 화제로 소실되고, 겨우 몇 권 남은 것을 읍리(邑吏)들이 필사한 것으로 그 진(眞) 부(否)를 알기 어렵다.
◎ 다만 청대본 등사본 책 한 권이 백화서당에 보존 된 것이 본가의 초본과 내용이 같으므로 이것이 진본이다.
◎ 금년 임진 6월(순조32년 1832) 내각에서 열읍(列邑)의 지(誌)를 수정하여 주상의 어람에 대비하라는 명이 있어 침랑(寢郞) 강세은(姜世誾)이 읍지 보수를 관장하였으나 때마침 큰 홍수로 향인들이 서로 왕래 할 수 없어 백화서당과 권청대 가에 소장한 구지(청대본)를 참고하고, 상고(詳考)하기도 전에 관의 독촉이 있어 급작히 마감하여 영문(營門)에 제출하였다.
◎ 제출된 원고의 내용이 너무 소략하다는 영문의 책망으로 다시 향부로(鄕父老)들을 모아 황찬희, 조술립 내가(채주욱) 다시 닦는 것으로 하였다.
◎ 각 서당에 통문을 보내어 면지(面誌)를 수합하고, 목사와 향대부(鄕父老) 등에게 신중한 심리를 하였다.
◎ 범례는 청대본에 준하여 먼저 강세은이 찬술한 것을 보완 첨삭(添削) 교정(校定) 하였다.
◎ 대개 문과, 무과, 음사, 충절, 효행, 열행 등의 누락이 있어 새로 입록한 자가 고려조에 21명 조선조에 324명의 생원과 진사, 학생을 혹 구지(舊誌)에 의거 등록하고 또 속록으로 추가한 것이 183명이며, 세대가 바뀌거나 휘(諱), 함(銜)의 잘못과 시호(諡號)의 오기(誤記) 등 잘못된 곳이 34곳이었다.
이상 발문의 내용 요약에 이어 저술에 참께 참여한 조술립의 상산지 전말(顚末)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상산 순조 32년(1832) 임진 6월에 영문(營門)
※ 경상감영에서 본 읍으로 읍지를 수정 보완하여 어람에 대비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 이에 따라 목사가 향교에 하첩(下帖)하고 향교는 각 서당에 통문을 보내어 향회를 개최하고, 강세은 등을 선임하여 향사당(鄕射堂)에 장소를 정하고 읍지 수정작업을 착수하였다.
◎ 각 면의 자료가 홍수로 두 곳만 제출되어 빠지고 소략한 내용이 되어 영문에서 다시 수정 제출하라는 명에 따라 다시 편수자를 선임하였다.
◎ 창석본, 청대본, 구당본 등 구례(舊例)에 따라 수정 보완하고 새로 수록하는 것은 남잡(濫雜)하지 않도록 한다.
◎ 창석본은 과제(科第)와 인물을 합하여 일록(一錄)을 하였음은 후일을 고려하여 심장(深長)하게 처리 한 것이니 만큼 공문에 인물은 귀천상하를 불문하고 인물 그 자체만으로 취(取)하라는 지시에 따르겠다고 목사에게 보고 하였다.
◎ 즉 인물의 등록은 생원, 진사, 학생에 이르기까지 관직이 없더라도 문장과 행의가 특별한 자는 모두 수록한다.
◎ 이와 아울러 봉대의 강승지(강세륜)와 우천의 류도정(류심춘) 등 관내 유력한 문중의 대표에게 자문을 구한 즉 과제와 인물을 별조(別條)로 하지 않은 청대본의 예를 고치는 것은 부당하고, 영문에 제출한 읍지가 환퇴(되돌려 온 것) 된 것은 급박한 중에 대강 마감하여 착오와 흠결이 있어 향중의 공의(公議)가 붕등(崩騰)한 것은 당연하여 다시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다.
◎ 도남서원의 회중에서 원사에 입향한 선배를 1건에 병록(幷錄)하여 향중에 두었다가 후일(後日)을 기다린다고 하였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장천 조씨 문중의 두 승지공은 아무런 주각(註脚 ※이름 밑에 설명문)이 없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여 본면의 면지를 살펴보니 상세히 입록되어 있으므로 양해된 것으로 안다.
◎ 드디어 창석, 청대, 구당의 전지(前誌)와 강세은이 새로 편집하여 영문으로부터 환퇴된 신지를 참고하여 연혁, 명호, 산천, 정사(亭榭)등을 이 시대 현상에 따라 편집하였다.
◎ 인물편은 청대본의 예에 따라 증보하였으니, 혹 소루(疏漏)한 것과 흠결이 있는 것은 향의(鄕議)로 결정하였다.
◎ 읍지가 완성되어 전지와 비교해 보니 인물편에 고려조의 사환(仕宦), 21인 조선조의 문과 70인, 무과 23인, 음사(蔭仕) 173인, 충절 6인, 효행 23인, 열행 28인이 빠졌고, 잘못된 곳을 수정한 곳이 34곳이며, 금지 중(今誌 中)에 생원 171인을 구지의 예에 따라 새로 수록하였고, 학생 6인은 구지 그대로 두었다.
◎ 일을 착수한지 15일에 마치고 돌아갔다.
위에 채주욱의 발문(편집 후기)과 상산지 전말을 살펴 보건데 서술의 내용이 인물편의 수록 대상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영문(경상감영)의 공문에 인물은 귀천상하를 막론하고 다만 그 인물됨에 대한 것만으로 하라는 것이 라든지 향내 유력인사들께 호안을 보여 교영을 받는 과정에 여러 사람들을 듣고 인물에 대한 의견에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라는 등 편집과정에 향내 여론이 비등하였음을 엿 볼 수 있다. 인물 이외에 연혁이나 산천과 고적 등에 관하여는 별다른 언급이 없이 전지 창석, 청대, 구당본을 그대로 이기 한 것이다.
본 상산목읍지와 전지 구당 초본과 청대본과의 조목별 내용을 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1) 책 본의 첫 장에 읍성을 중심으로 한 상주목치(牧治)의 지도를 수록한 주요 산천과 건물 그리고 서원, 사찰, 역원, 나루터와 연접 주군의 경계 지점을 표기함.
2) 건치연혁(建治沿革)
전지와 같음
3) 속현(屬縣)
전지의 화령, 중모, 산양, 단밀 등 4개 현에 화창, 공성, 영순, 청리현의 사실을 부기하였다.
4) 군명(郡命)
전지와 같음
5) 관직(官職)
창석, 청대본은 관제(官制)조 안에 하나의 목이었고, 구당본에는 관원(官員)으로 이름하였으나 내용은 같다.
6) 성씨(姓氏)
성씨 밑에 관향(貫鄕)을 부기한 전지와 다르게 지역별로 성씨만 나열하였다.
7) 산천(山川)
왕산 등 10개 산과 낙동강 남․북천 위수(渭水) 금수(錦水) 등 5개 천이 수록되어 전지 수록분 중 여러 개소가 누락 됨.
8) 풍속(風俗)
전지 구당본과 같이 간단함
9) 방리(坊里)
전지와 같이 31개 면 그대로 임
10) 호구(戶口)
책본별 | 호수(호) | 인구(명) | ||
계 | 남 | 여 | ||
본 지 구당본 청대본 창석본 | 17,877 18,642 28,988 ․ | 65,035 70,443 90,163 | 30,624 32,292 44,361 | 34,411 37,151 45,802 |
평시 인구 7만 임난후(1616) 호적상 겨우 만 여 명 |
※ 구당본 인구 합계 70,443은 60,443을 착오 계산 한 듯함.
11) 전부(田賦)
한전(旱田) 8,847.75, 수전(水田)6,641.30, 도합 15,489.05 결인데 청대본과 구당본 모두 같다. 이어서 전세(田稅), 위태(位太), 대동(大同), 수미(需米), 균세(均稅)와 화세(火稅) 등 조세의 수량을 명정하였다.
12) 군액(軍額)
훈련도감 포보(砲保)외 44개 부문으로 전지 구당본과 대동소이 하다.
13) 성지(城池)
읍성 1개 성을 둘레 3,888척(尺), 높이 9척 동서남북간에 4개 못(池)이 있다고만 하였다.
14) 임수(林藪)
새로이 신설된 조목이다. 서수(西藪) : 주서 5리 북천위에 울창한 숲으로 조령(朝令)에 의하여 심고 보호하였으므로 어령수(御令樹)라고 속칭함.
◎ 율수(栗藪) : 주동 5리에 있고 예부터 이르기를 서쪽의 산형(山形)이 지네가 웅크리고 읍기(邑基)를 침노하는 것 같아 지네와 상극한 밤나무를 서로 바라보는 쪽에 심어 독기를 제거하고자 한다는 설이 있음.
15) 창고(倉庫)
군기고(軍器庫)와 대동창(大同倉), 그리고 읍창과 산양, 공성, 화령, 중모, 은척, 단밀, 견훤창 등 지역 창을 수록하고, 주치로부터 거리를 부기하였다. 구당본에는 진휼창(賑恤倉)이 있었는데 누락되었고, 견훤창은 전지의 산성창(山城)을 견훤산성 안에 있다는 것이다. 전지 청대, 구당본에는 각 창고 별로 재고 양곡을 부기 하였으나 본지에는 누락됨.
16) 군기(軍器)
본지에 새로 수록된 항목이다. 군무(軍務)에 소요되는 장비의 목록과 수량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흑각궁(黑角弓) 21장◦ 산성조(山城條) 20장
◦ 상각궁(常角弓) 3장 ◦ 교자궁(校子弓) 75장
◦ 산성조 175장 ◦ 장전(長箭)320부
◦ 산성조 101부 ◦ 편전(片箭) 249부
◦ 통아(桶兒) 249부 ◦ 산성조 81개
◦ 장창(長鎗)95자루 ◦ 산성조 25자루
◦ 환도(環刀) 94자루 ◦ 단혈예(單穴銳) 1자루
◦ 삼혈예(三血銳) 2자루 ◦ 정(鉦)2면
◦ 삼지창(三枝鎗) 2자루 ◦ 요령(搖鈴) 1개
◦ 화승(火繩) 1152사리 ◦ 행고(行鼓) 19좌
◦ 소쟁(小錚) 15면 ◦ 화전(火箭) 16자루
◦ 부자(釜子) 46자루 ◦ 조총(鳥銃) 731자루
◦ 산성조 13자루 ◦ 화약(火藥) 4489근 14양
◦ 산성조 100근 ◦ 연환(鉛丸)1,345,707개
◦ 산성조 3,460개 ◦ 거마창(拒馬鎗)320좌
◦ 남비개(南飛蓋) 217개 ◦ 산성조 13개
◦ 화약승(升) 432개 ◦ 산성조 13개
◦ 이약통(耳藥桶) 267개 ◦ 화철(火鐵) 431개
◦ 환추(環錐) 432개 ◦ 승철(菱鐵) 1,900개
◦ 군막(軍幕) 61부 ◦ 사관혁(射貫革) 5좌
◦ 고관혁(砲貫革) 20좌 ◦ 포관혁(砲貫革) 2좌
◦ 왜의(倭衣) 1건 ◦ 수기(帥旗)1면
◦ 백기(白旗) 1면
수록된 군기 중에 산성조라고함은 산성조 앞의 품목과 같은 것을 산성에 소요되는 수량을 뜻한다.
17) 관액(關扼)
전지와 같이 화령의 성산산성(城山山城) 1개 산성이다.
18) 봉수(烽燧)
전지와 같다.
19) 학교(學校)
향교와 도남, 흥암, 옥동, 옥성, 근암, 봉산, 서산, 속수, 연악, 효곡, 화암 등 17개 서원을 열기하고
서원 별 위치와 배향 인물을 수록하였으며, 이어서 충의단(忠義檀)을 추가 수록 하였다.
20) 단묘(壇廟)
전지와 같다.
21) 능묘(陵墓)
사벌왕 묘, 김선치, 성윤해, 노수신, 김우굉, 김범, 홍언충, 이준, 전식 묘의 위치 수록 전지의 정기룡 묘가 누락되고 사벌왕 묘를 신증수록 함
22) 불우(佛宇)
용암사, 한산, 용담, 미륵, 남장, 용흥, 대승, 김용, 동관음, 만경, 청계사 등 11개 사찰 수록 전지 구당본에 수록된 묘적암과 사사가 누락되고, 한산사를 추기하였으나, 청대본에 52개 사찰이 수록된 것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
23) 공해(公廨)
전지의 공서(公署 )항목이다.
재금당, 사무당, 청유당, 객관, 제승당, 우림당, 영빈관, 향사당이 수록됨. 전지에 수록된 주아, 사성헌, 힐융루, 연군루, 양무당이 누락되고 객관, 우림당, 청유당이 신증됨.
24) 누정(樓亭)
전지에 수록된 풍영루, 추월당, 청량각, 이향정, 자천대, 관수루, 합강정 등 7개 누정에 이어 태평루, 범향정, 대산루, 정우정, 병천정을 수록하고 뒤이어 전지 청대본 고적조에 수록한 충신담, 절부애 임천석대, 백암, 효자비를 본 항에 수록함.
25) 도로(道路)
목치(牧治)구역 동서간 137리, 남북간 76리, 동쪽 비안현 경계까지 67리, 남쪽 선산부 경계까지 39리, 서쪽 보은현까지 70리, 북쪽 함창현 경계까지 29리, 경상감영까지 180리, 경상우병영까지 360리, 경도까지 480리 등을 수록함.
전지에는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경유로선과 거리를 표기 수록하였는데 본지의 도로라는 항목과는 객관적 개념상 견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6) 교량(橋梁)
전지와 같다.
27) 도서(島嶼)
전지와 같다.
28) 제언(堤堰)
전지와 같다.
29) 장시(場市)
읍시, 공성, 장홍, 중모, 저암, 화령, 은척, 산양, 낙동, 단밀 등 10개 시장 외 위치를 수록함.
전지에 수록된 북천, 은척, 철곡, 삼탄, 장과 어염(魚鹽)장시는 누락되었는데 본지 편찬 당시에 폐지된 것으로 짐작한다. 전지에는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을 명정하였으나 본지에는 누락되었다.
30) 역원(驛院)
전지와 같음.
31) 목장(牧場)
무(無)
32) 형승(形勝)
전지와 같음.
33) 고적(古蹟)
사벌국 고성 1개 소만 수록하고 전지의 화창현과 공성, 영순, 청리 패현의 사실 기록, 그리고 무림 등 16개 부곡 또는 소(所)와 왕활교, 봉황성의 사실 기록은 누락됨.
34) 토산(土産)
옥석(玉石)등 12종이 수록되었다. 이 중에 전지에 수록된 등석(燈石)이 누락되고, 철(鐵)이 추가 수록됨.
35) 진공(進貢)
생치(生雉)등 30종으로 전지와 같다.
36) 봉름(俸廩)
전지와 같음
37) 환적(宦蹟)
전지와 같이 왕조 별로 신라의 김유신, 이등, 고려의 이주좌, 조선의 권집경 등 총 235명이 수록되었다. 이 가운데 전지 이후 환적인물이 22명이고, 공적기록 없이 성명만 수록된 인물이 상당히 많다.
38) 과거(科擧)
고려 김희일 등 22명, 조선 206명, 도합 228명이 수록되었고, 과제별 등과 내용과 관직 그리고 간단한 가계를 수록하였으며, 전지에 수록된 108명 보다 월등히 많다. 이 중에는 전지에서 누락된 고려인물 22명과 전지 간행 이후에 등재된 인물이 추가 된 것도 있겠으나, 새로이 수록된 인물이 상당히 많은데 그 사유를 알 수 없다.
39) 인물(人物)
고려 시대 박견 외 10명과 조선조에 박안신 외 88명이 수록되었다. 전지에는 모두 82명이 수록되었는데 전지 간행 이후 새로운 인물이 등재된 것이다. 청대본에 500여 명이 수록된 것에 비하면 소략한 편이다.
40) 충절(忠節)
전지의 우성적, 박걸, 노도응, 박동형, 전극항과 미정(米貞)에 이어 김준신, 김일, 김홍민, 김유성, 윤식, 이돈서, 채득기를 신증 수록하였다. 신증수록 된 인물은 임진, 병자, 양 난에 공을 세운 인물을 추가 수록한 것이다.
41) 효행(孝行)
전지와 같이 고려조의 신우를 비롯하여 모두 42명이 수록됨. 전지에 28명이 수록되었는데 14명이 증가 된 것은 책 본 간행 년간에 새로운 인물도 있겠으나, 일부는 효행 발천이 새로 이루어진 경우인 듯하다. 그러나 전지에 이미 수록된 바 있는 김유성과 임성무가 누락되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42) 열행(烈行)
모두 조선조 인물로 17명이 수록됨. 전지에는 13명이 수록되었는데 4명이 증가한 것은 책본 간행 년간의 새로운 인물이거나 열행 발천이 새로 이루어진 것이다.
43) 제영(題詠)
누정이나 서원 또는 사우(祠宇)별로 전해온 글의 전문(全文)을 수록하였다.
○ 향교(鄕校) : 홍귀달의 기문, 강세륜의 명륜당 기문
○ 향사당(鄕射堂) : 이준의 기문, 주세붕의 제명서
○ 지락헌(至樂軒) : 채수의 기문
○ 수석정(水石亭) : 성헌징의 기문
○ 도남서원(道南書院) : 정경세의 상량문
○ 흥암서원(興巖書院) : 성우주의 상량문
○ 어필비각(御筆碑閣) : 숙종의 비망기(備忘記), 권상하의
음기(陰記)
○ 옥성서원(玉城書院) : 이준의 상량문
○ 서산서원(西山書院) : 송명흠의 상량문
○ 충의단강당(忠義壇講堂) : 성재주의 상량문
○ 관수루(觀水樓) : 김일손의 시, 이황의 시
○ 서헌(西軒) : 김종직의 시
○ 연악서원(淵嶽書院) : 김범의 시, 목사 정호선의 시
○ 봉산서원(鳳山書院) : 노수신의 시
○ 계정(溪亭) : 정경세의 시
○ 존성당(尊性堂) : 구봉령의 시
○ 매호정(梅湖亭) : 류성룡의 시
○ 태극정(太極亭) : 송명흠의 시
○ 영빈관(迎賓館) : 정종로의 시
○ 소리정(素里亭) : 정종로의 시
○ 구만정(九灣亭) : 김재현의 시
44) 책판(冊板)
소장처(所藏處)별로 보유하고 있는 책판을 수록하였다.
○ 부내(府內) : 소학대전(小學大全) 동은집(垌隱集), 도덕경(道德經)
○ 도남서원 : 소재집(蘇齋集), 우복집(愚伏集)
○ 서산서원 : 선원집(仙源集), 청음집(淸陰集)
○ 흥암서원 : 동춘집(洞春集)
○ 남 장 사 : 구원집(九畹集)
○ 옥성서원 : 월간집(月磵集), 창석집(蒼石集)
○ 근암서원 : 우암집(寓庵集), 한음집(漢陰集)
나. 고종년간의 목읍지
전지가 1832년(순조32) <상주목읍지>로 간행되고 39년이 지난 1871년(고종8)과 1895년(고종32) 및 1899년(광무3)에 편찬 되었고, 근세에 와서 <한국지리총서>, <경상도읍지>, <영남읍지> 등의 지리지에 상주 목편으로 수록된바 있다. 대체적으로 고종 년간에 간행된 책 본은 그 내용이 전지 창석, 청대, 구당지와 순조 년간의 목읍지를 참조하여 증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증보 또는 수정된 내용의 상고는 추후의 과제로 남긴다.
다. 상산지 무진본
1) 1928년 일제강점기 때에 간행 되었다.
지는 모두 7권 3책으로서 1914년 상주와 함창의 행정구역이 통합된 후 처음으로 간행된 인쇄본이다.
그 1책 1,2권은 대체적으로 창석본과 청대본의 편집 순서에 따라 임진본까지 증보한 내용으로서 책의 첫머리에 창석이 지은 창석본의 ‘서상산지후(書商山誌後)’에 이어서 청대본의 청대 권상일이 쓴 발문(跋文)을 수록하고, 상산지 목록에 이어 내용을 편수한 연후 책의 끝 부분에는 임진본에 편저자의 일원이었던 채주욱(蔡周郁)이 지은 발문(跋文)과 조술립(趙述立)이 지은 상산지전말(商山誌顚末)을 수록하였다.
2) 2책 3,4,5권은 전지들을 근거로 하여 목록이나 내용을 대폭 수정 편찬한 것이다. 관제(官制)나 공서(公署), 학교(學校) 그리고 명환(名宦) 조목에는 군청의 행정관, 군수, 경찰서, 제판소, 사법관, 헌병분대장, 우편국, 은행소, 금융조합 등 일제강점기 당시의 행정제도에 따라 정해진 관서별 기관장을 수록하였다.
이 책 본은 우리 한민족에게는 치욕의 역사 기록물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진데 통분을 머금고 자강(自强)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2책 수정편수를 위한 범례 설정의 내용을 수록하면 다음과 같다.
가) <상산지>는 창석이 창시하여 청대, 구당이 속록을 내었고 이어서 순조년간 임진년에 속찬하여 앞 세 분의 지(誌)를 시대에 연유하여 증․감한 것이다.
나) 구지 중에 창석본을 원본으로 하여, 청대본에 새로 수록한 것을 “구증(舊增), 구당본은 임진본 안에 있기 때문에 아울러서 신증(新增)”이라고 표기하고, 이번에 새로 수록하는 것은 “보(補)”자로 표기하였다.
다) 우리 상주의 전장문물(典章文物)은 창석이 편찬한 문한(文翰) 일련에 수록되었고, 선조와 인조 이후에 관청이나 원, 숙, 정, 대(院, 塾, 亭, 臺)에 선배들이 지은 것을 뒤에 수록하였다.
라) 3책 6,7권은 문한(文翰)편으로 제영(題詠), 기(記), 서(序), 비문(碑文), 제문(祭文), 상량문(上樑文), 잡저(雜著) 등이다. 앞의 본책 편집 범례에 밝힌 것과 같이 6권은 상권으로 창석본에 1편으로 전해온 것이고, 7권은 하권으로 인조조 이후에 지은 글들이다.
책의 끝에는 이 책의 편집 후기인 ‘서상산지후(書商山誌後)’를 수록하였는데 지은 일자는 순묘 임진후(純廟壬辰後) 97년 무진중양(戊辰重陽)일이고, 지은이는 진양 후학(晉陽 後學), 정동철(鄭東轍) 근지(謹識)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창석, 청대, 구당본과 임진년 <상주목읍지>를 기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범례에서도 밝혔거니와 책의 끝에 후기 작성 일자를 순묘 임진후 97년 이라고 하여 고종 년간 수 차례 간행된 목읍지에 대하여는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상산지>라고 하면 왜정 무진본 1책, 1,2권 상고하기 쉽다.
그 이유는 전지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수록한 최종본이라는 것이고, 이 책을 기본으로 하여 김자상씨가 번역본을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무진본 내용 전 본에 대한 상고(祥考)는 뒷날의 과제로 남긴다.
6. 현대의 상주 지리사록
왜정 무진본 이후 61년이 경과되고 1989년에「상주지(尙州誌)」가 인쇄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처음 국한문을 혼용하여 누구든지 읽기 쉽게 하였다.
이 지(誌) 간행 시는 상주시와 상주군으로 행정구역이 분리된 때여서 상주라는 통합된 관념에는 다소 미진한 선입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창석본 이후 무진본까지의 <상산지>와 <함창현지(咸昌縣誌)>를 근거로 하였고, 여러 역사서를 참고한 상주 역사지리서로서 면모를 갖추었다할 수 있다. 이후 21년이 지나고 2010년에는 <상주시사(市史)>를 간행하니, 지(誌)의 체제에서 한걸음 발전한 종합적 역사 지리서 전5권을 간행하였다.
7. 글을 맺으며
역사지리사록은 지역의 자연과 인문을 총합한 한 시대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거울에 비춰진 그 내용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새로운 지리사록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웅주거목(雄州巨牧)으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우리 상주 역사를 사록(史錄)으로 남긴 창석본 상산지를 포함하여 청대본과 왜정 무진본으로 시대적 사실(史實)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에 연하여 이번에 새로이 구당본 상산지 초책이 발견되어 또 한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완성된 책 본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또한 전지에 이어진 또 하나의 사록이요, 후지(後識)와 상산지 전말이 수록된 <상주목읍지>의 전지라는 점에서 소중하다고 본다. 여기까지 구당본 초책을 중심으로 한 전후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서술한 내용들을 다시 요약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조선 시대의 지리사록 전반에 대한 것을 간략히 서술하여 상주의 최초 지지(地誌)인 <상산지> 창석본 간행 이전부터 전해진 전국적 지리사록의 현황과 그 이후 전국적 또는 경상도 지지의 간행 사실을 살펴 상주 향토 지지와의 관계를 대강이라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둘째, 구당본 초책 이전에 우리 상주 최초의 지지로 알려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한 창석본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다. 창석이 지은 후지(後識)에도 상산 최초의 목읍지라고 하였으나, 친구인 구희급(丘希岌)이 공관(公館)에서 등사한 사료를 기초로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미 공관에는 <경상도 지리지> 등 전국적 지지로 편찬 당시 상부에 보고된 자료가 있었으나 한 권의 책본으로서는 이 책본이 최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전부(田賦), 호구(戶口), 학교 묘제(廟制) 등 몇 가지 주요한 항목에 대하여는 앞으로 전국적 지지의 내용과 비교하여 시대적 변천에 다른 종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수록된 내용 중에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하고 여기에 적어 둔다.
◦ 현재의 상주(尙州)라는 지역 명칭은 이미 신라 경덕왕 때에 개정된 것임에도 군명(郡名)조에 빠져있음
◦ 인물조에 수록한 인물은 개관(蓋棺)하지 아니하면 수록하지 아니한다는 원칙을 정하였음에도 1617년 본지 간행 당시에 생존하였던 김정룡(1619 卒), 조우인(1625 卒), 김혜(1624 卒) 등이 수록되었음.
◦ 부곡(部谷)조 끝에 ‘신증(新增)’이라고 표기하고, ‘장원향(壯元鄕)’에 대한 사실을 수록하였는데 주지하다시피 ‘신증’이라고 함은 원지(元誌)에 없던 것을 새로이 수록한다는 것인즉, 이에 대한 의문.
◦ 산성(山城)조, 성산산성(城山山城)의 기록에 정호선(丁好善)목사가 무오년에 보수하였다고 하는데 이 해는 본지가 간행된 다음 해인 1618년인 만큼 본지 간행 년도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
위의 몇 가지 의문점을 살펴보면 현재 전하고 있는 창석본 <상산지>는 창석이 편찬한 원본이 아닐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석본 이후 간행된 청대본 발문(跋文) 첫머리에 “그 옛적 1616년(광해8)에 창석공이 상산지 2권을 찬성(撰成)하여 옥성동(玉城洞)에 소장하였고, 그 후 선생의 손자 신와(新窩)공 이재관(李在寬)이 간략한 속록을 내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들어난 몇 가지 의문점을 이 기록에 비추어 볼 때 현재 전하고 있는 창석본 상산지는 창석의 손자 신와공의 증보본(增補本)이 분명한 듯하다.
셋째, 청대본 내용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창석본이 간행되고 132년이 경과한 1749년에 창석본을 근거로하여 속지로 간행된 지지이다. 13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에는 병자호란이나 숙종대의 당쟁 등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승평(昇平)한 시대도 있었을 것임에도 그 사이에 한 권의 지지가 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하겠다. 청대본은 대체적으로 창석본에 비하여 목록의 제정이나 내용이 더 정연하고 정갈하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면(面)이 신설되고 군사를 관할하는 진영(鎭營)의 신설 그리고 창고, 목이 신설 되었으며, 여지조에 사벌국의 역사를 소상히 수록하였음은 특기할만하다고 하겠다.
호구(戶口)나 공부(貢賦)등 주요 항목은 전지(前誌)와 비교하여 변천된 상황을 살펴보았다. 인물조의 충절(忠節) 목을 새로 신설하여 우성적, 박걸, 노도응 3명을 수록하였는데 주지하는바 임진왜란에는 이외에도 많은 충절 인물이 있음에도 거명되지 않았음은 어떤 연유인지 모른다.
상주의 임진왜란사를 향토 사록으로는 처음 수록하였다. 청대본은 영조41년(1765년) 조정에서 간행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상주편의 기본 자료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넷째, 이 글의 주제(主題)인 구당본 상산지 초책에 대하여 상고(詳考)하였다. 구당본이 찬술되었음은 분명하나 그 원지는 전해지지 않고 작년에(2011) 그 초책(草冊)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과 형식이 비교적 정갈하여 원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주하여 항목별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만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구당본은 청대본 이후 37년이 경과된 1786년(정조10)에 간행된 것을 대개 전지 청대본에 의거하여 편수한 것인데 시대가 경과된 만큼 여러 항목의 새로운 사실들이 수록되었다.
◦ 첫머리에 상주진(鎭), 상주목(牧)이라고 하여 목보다 진을 먼저 표기하여 군사적으로 여러 군현을 통할하는 상주의 위상을 매김하였음.
◦ 강역 조에 주요지역과 거리를 명기한데 이어 새로 일정(日程)을 병기하였음.
․ 경도(京都) 477리 5일정
․ 감영(監營) 180리 2일정
․ 통영(統營) 480리 5일정
◦ 목사와 영장의 품계를 새로 명정하였다.
◦ 호구를 청대본과 비교하면 오히려 현격히 감소되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 청대본 : 23,988호 90,113명
․ 구당본 : 18,642호 69,443명
․ 감 소 : 5,346호 20,670명
◦ 전부(田賦)조에 토지 경작 면적이 청대본과 같이 15,489결인데 이 또한 의문점이다.
◦ 관직자에게 지급되는 녹봉(祿俸)인 봉름(俸廩) 항목을 신설하여 녹위별 지급수량을 명정하였다.
◦ 창고 조에 각 창별 재고량을 수록하고, 1785(정조9)년에 허가 한 바에 따라 10월에 개방하고, 12월에 봉하며, 보리는 6월에 거둬 봉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수록함.
◦ 객관(客館)인 상산관을 궁실(宮室)로 상향 표기하여 국왕의 위패를 봉안한 왕권의 상징성을 부각하였다.
◦ 역원(驛院)조에 역 별로 배치한 인력과 말의 비치 내용을 소상히 수록하고, 원(院)의 경우 각 원 별 현존 유무를 소상히 밝혔는데 23개 원 중에 21개 원이 폐지되고, 죽현원과 공성원은 존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조선 후기의 통신체계였던 두 개소의 발참(撥站)을 새로이 수록함.
◦ 도로(道路) 조목을 새로이 설정하여 도로로서의 기능이 부각된 것을 알 수 있다.
◦ 전지에는 여지조에 지․제(池․提) 구분 없이 합쳐서 수록하였으나 산업화시대로 변천 되므로 필수 농업기반시설인 제언(提堰)목을 새로 신설하여 제언 별 규모를 소상히 수록하였음.
◦ 장시(場市)조목의 신설로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시장경제 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사실을 수록한 것에 반하여 전지에 수록한 일부 중요한 항목이 누락되었거나 축소되고 후계 기록이 없는 경우도 있다.
◦ 학교조에 당시로서는 중요한 교육기구라 할 수 있는 서당(書堂)이 누락됨.
◦ 공서(公署)조에서 동헌(東軒), 진영(鎭營) 등 꼭 있어야할 건물의 누락
◦ 누정(樓亭)조에서 전지에 수록되었던 육익정(六益亭), 초학대(招鶴臺), 창석정(蒼石亭), 무우정(舞雩亭) 등 무려 61개 소의 누정이 누락됨.
◦ 불우(佛宇)조에서 전지에 수록하였던 62개 사찰 중에 북장사, 갑장사, 윤필암 등 49개 사찰이 대량으로 누락됨.
◦ 고적(古蹟)조에서 사장사(四長寺) 북천임난전장, 금돌성, 공민왕의 상주 남행(南幸) 사실 등 30여 중요한 역사적 사실(史實)들이 누락됨.
◦ 과제(科第), 환적(宦蹟), 일반 현사(賢士) 인물조는 전지에 비하여 400여 명이 누락되었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역사 인물을 사록(史錄)에 등재한다는 것은 엄격한 검증을 거쳐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 수록됨이 마땅하나 전지에 수록된 인물을 누락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라는 점에서 경이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누락된 인물 중에는 편저자 구당 자신의 상주 입향조 조숭과 중시조라 할 만큼 현달한 조윤령, 그리고 구당의 증조부 조대윤이 누락되었으며,
◦ 총묘(塚墓)조에도 사벌왕릉, 황보신, 이전, 김담수, 김안절, 김홍미, 김택 등 36개소의 총묘가 누락되었는데 그 중에 구당의 직계 조상인 조숭, 조정의 묘가 누락되었음은 전통적 조상숭배 정신이 투철하였던 그 시대로서는 더욱 경이로운 일이었다고 하겠다.
다섯째, 구당본 이후의 상산지에 대한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구당본 이후에는 모두 5차례의 지지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상주지>와 <상주시사(市史)>로 이름한 지지가 간행되어 있다. 먼저 구당본이 간행되고 46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상주목읍지>(임진본)를 들 수 있다. 이 지(誌)에는 발문(跋文)과 상산지 전말(顚末)을 수록하여 창석, 청대, 구당본에 이르기까지의 편찬 경위와 임진 6월(1832) 내각의 지시에 따라 편찬 작업을 시작하여 이 지가 완성되기까지의 경위와 편집기준을 비교적 소상히 밝혀 놓았다. 상산목읍지는 대체적으로 전지 구당본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지에 비하여 호구가 감소 되었음
․ 구당본 : 18,642호 70,443명
․ 본 지 : 17,877호 65,035명
․ 증 감 : 감 765호 4,308명
◦ 임수(林藪) 조목의 신설 : 서수(西藪)와 율수(栗藪)의 사실 기록을 수록함.
◦ 제영(題詠)조에는 향교 등 건물의 각종 기문(記文) 상량문 그리고 비문과 명현들의 시문(詩文) 전문을 수록함.
이에 반하여 일부 주요한 항목이 누락되거나 너무 소략(疏略)한 부분이 있음도 간과 할 수 없다.
◦ 학교조의 서당(書堂)에 관한 사실 누락
◦ 성지(城池)조에 읍성 1개소만 수록하여 관내 유수의 고성(古城)이 누락됨
◦ 산천(山川)조의 유명한 산과 천이 대부분 누락
◦ 창고조의 창고별 재고량 누락
◦ 능묘(陵墓)조에 다수의 유명 인사 묘소가 누락
◦ 불우(佛宇)조에 다수의 유명 사찰 누락
◦ 누정(樓亭)조의 소략(疏略)
◦ 고적(古蹟)조에 부곡(部谷) 소(所)오, 고현(古縣), 그리고 임난북천전장 등 여러 가지의 역사적 사실들이 누락됨
◦ 과거(科擧)조에 인물의 등록은 과거에 등재된 명록에 따라 수록한 것인데 전지에 없던 인물이 본지에 다수인이 새로이 수록되었음은 어떤 사유인지?
◦ 인물(人物)조에 구당본과 같이 청대본에 수록된 500명에 크게 못 미치는 88명이 수록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관찬(官撰)지인 <상주목읍지>(임진본)는 <상산지> 전말(顚末)과 후지(後識)를 수록하여 뒷사람을 하여금 참고 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은 소중하다하겠으나 후지에 적은 바와 같이 1차 작성된 문건이 영문(營門)에 보고되어 내용의 불실로 다시 돌아오고, 그 과정에 관의 독촉이 있었다는 등 편찬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다. 구당본이 간행되고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46년이 경과되는 년간에 인문 사회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임에도 변천된 사실의 내용이 비교적 소략하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고종년간 4차에 걸쳐 간행된 목읍지와 일제침략기 무진본에 대하여는 근대와 현대를 거치는 격변기의 지지이며 순 한문(純漢文)본의 마지막이고, 그 내용 또한 복잡한 점도 있겠으나 본고의 주제인 구당본 상산지 초책(草冊)에 대한 전․후 지지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져 한다.
상주역사 변화 과정을 종합적으로 알기 위한 창석본 이후 모든 지지에 대한 내용의 비교 검토에 대하여는 뒷날의 과제로 남긴다.
글을 맺으며 다시 한 번 언급하거니와 구당본 상산지 초책은 초책(草冊)이니 만큼 완성된 책본이 아니므로 인물의 누락이나 내용이 다소 모자라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보완하는 과정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초책 자체도 어떤 인사가 베껴 쓴 필사본 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적어 두는 바이다.
참고문헌
1. <상산사료집> 1998. 4. 상주문화원
2. 김자상 <상산지> 해제본 1984년 12. 5 대남인쇄소
3. <상주지> 1989. 9. 25 상주시․군 구일출판사
4. <상주시사> 2010. 11. 30 상주시 대한인쇄
5. <상주문화유적> 2002. 12. 30 상주문화원 문창사
6. <상주문화유적 불교편> 2000. 7. 상주문화원 제일기획인쇄
7. <상주한문학> 2001. 12. 31 상주문화원 문창사
8. 김현영 <한국사에서의 지방사> 논문 2004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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