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3호

오광(五狂) 여석훈(呂錫塤) 선생(先生) -「오광자소(五狂自疏)」를 中心으로

빛마당 2014. 2. 26. 21:12

오광(五狂) 여석훈(呂錫塤) 선생(先生)

-「오광자소(五狂自疏)」를 中心으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재 수

목 차

1. 출생129

2. 향학열의 선구자130

3. 교육(敎育)의 선구자(先驅者)137

4.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144

5. 민주주의(民主主義) 교육의 선구자(先驅者)155

6. 탁월한 웅변가160

7. 글을 맺으며162

계몽운동(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

오광(五狂) 여석훈(呂錫塤) 선생(先生)

-「오광자소(五狂自疏)」를 中心으로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 재 수

역사란 미래를 향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며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자 미래의 지표이다.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은 과거를 살펴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하고, 미래의 발전을 모색한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상주문화원이 시민사랑방을 개최하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상주의 역사, 인물, 문화와 예술에 관한 강좌를 열고 있는 뜻 또한 미래 상주 발전을 위한 모색의 하나라고 말 할 수 있다.

화동면지 편찬 집필위원이 되어 자료를 찾던 중 오광 여석훈 선생의 ‘자양학원’과 ‘화동고등공민학교’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 화동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선생의 저서『오광자소』와 ‘자양학원 학칙’, 그리고 자양학원 학생들이 쓴 글도 읽게 되었다. 『오광자소』는 비록 60쪽 내외의 소책자였지만 우리 지역에 참으로 위대한 선각자가 계셨음을 알려 주기에 충분했다.

나름대로『오광자소』를 분석하고 정리를 했다고 하지만 선생의 삶을 다 알지 못함과『오광자소』에 나타난 사실 이 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찾지 못하여 안타까웠다. 보다 자세한 선생의 삶에 대한 자취는 앞으로 자료를 찾아내고 탐구해야 할 과제라 여겨 잠시 미루면서 선생의 개척자적 삶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1. 출생

선생은 1890년 조선 고종 27년 경인년 6월 7일. 경북 상주군 화동면 관제리에서 조선 선조 37년 (1604년)성균관 직강과 1606년 합천군수를 역임한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路)의 10대 손으로 아버지 여인성(呂麟聖)과 어머니 풍양조씨의 3남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자(字)는 현중(玄仲)이다.

선생이 태어난 그 즈음의 우리나라의 형편은 일본을 비롯한 구미 열강들에 의해 우리 주권 침탈의 위협을 받았고 국운이 극도로 약해 1889년에 방곡령 사건,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1896년의 아관파천 등이 일어난 혼돈의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선생은 어린 시절 가학(家學)과 봉암서당(鳳岩書堂) 및 모동면의 옥동서원(玉洞書院)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본격적(本格的)으로 유학(儒學)을 수학(修學) 하였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신학문에 대한 갈망이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2. 향학열의 선구자

선생의 신학문에 대한 목마름은 시대적 불운인 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경술년(庚戌年) 국치(國恥)와 연관이 있다. 자신이 수학해 온 유학(儒學)이 새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事實) 나는 성리학(性理學)의 개요(槪要)를 깨닫게 된 약관(弱冠) 때부터 은연중(隱然中) 그 말폐(末弊)가 적지 않다는 것을 자각(自覺)하게 되었었다. 조선조 후기(後期)에 와서는 유학(儒學)이 공(功)보다는 죄(罪)를 훨씬 더 많이 범(犯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다.”

가. 신학문 수학을 위한 국내에서의 모색

선생의 나이 21세.

신학문에 대한 선생의 갈망은 우선 국내에서 시도된다.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중동학교(中東學校)를 방문하였고, 여의치 않자 대구로 내려 와서 우현서루(友弦書樓)의 문을 두드렸지만 선생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한 장소로서 마땅치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나는 홀연(忽然)히 깨닫는 바가 있어서 유학수학(儒學修學)을 포기(抛棄)하고 일단 한성(漢城)으로 올라갔다. 소위(所謂) 신학문(新學問)을 닦아 보겠다는 뜻을 세운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찾아가 보았으나 입학(入學)이나 편입(編入)을 하는데는 당시(當時) 나의 가세(家勢)가 따를 수가 없었다. 실의낙담(失意落담)하여 이번엔 대구(大邱)로 가서 우현서루(友弦書樓)에 몸을 기탁(寄託)해 보았다. 그러나 미구(未久)에 그곳도 내가 신학문(新學問)을 수업(授業)할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초졸(憔倅)한 몰골로 귀향(歸鄕)길에 오르게 되었다.”

나. 신학문을 위한 일본 유학길의 선택

열정을 가진 자는 작은 절망에 굴하지 않는다. 선생의 신학문에 대한 열망은 21세에서 한 번 꺾일 듯 했지만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8세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마침내 1917년(丁巳年), 28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선생은 모내기를 한창 하다말고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그리고 가족들 몰래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선생은 자신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 연락선(連絡船)을 타기 전에 삭발(削髮)을 함으로써 결의(決意)를 다시 한 번 다졌다. 심중에는 기필코 뜻을 세워 출향을 했으니 반드시 그 뜻을 성취하고 돌아오리라는 각오였다.

일본에 도착한 선생은 당시 우리나라 형편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다른 세계가 펼쳐 있음에 놀랐다.

19세기 말(末)까지 세계(世界)의 강대국(强大國)으로 군림(君臨)했던 청국(淸國)과 러시아(露西亞)를 격파(擊破)하고 조선(朝鮮)을 자국(自國)의 식민지(植民地)로 병탄(倂呑)한 아시아의 패자(覇者) 일본(日本), 그 일본의 수도(首都) 동경(東京)의 번영은 마치 조선 벽촌의 촌사람으로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선생의 동경 생활은 고생문이 열리는 시작이었다. 우선 동경의 변두리에 집을 구하는 일이며 음식도 값이 가장 싼 것으로 골라 먹는 정도로 겨우 연명했다. 처음 며칠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무작정 동경 거리를 방황하다가 가까스로 제 정신을 차린 후 공부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다.

다. 야학을 통한 독학, 그리고 진학

잠시의 방황을 마친 선생은 수삼일 만에 마침내 우시고메쿠(牛込區)에 있는 쇼코각사(商工學舍)라는 곳에 들어가 야학(夜學)으로 일본어(日本語)를 배움으로 동경생활은 시작된다.

선생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 3개월 쯤 지나자 일본어(日本語)를 어느 정도 깨우쳐 무식은 면하게 된다.

선생은 곧 바로 다카다 무라(高田村)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 졸업 학년(卒業學年)에 편입(編入)을 하는데 이때는 황해도(黃海道)의 해주(海州) 출신인 강은준(姜殷俊)이란 사람을 알게 되어 그와 함께 월세 방(月貰房)을 하나 얻어 거처(居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생의 당면 목표(當面目標)는 신학기(新學期)가 되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專門部)의 정경과(政經科) 교외생(校外生)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이 무렵의 생활은 촌음(寸陰)의 휴식(休息)도 허락(許諾)하지 않는 악전고투(惡戰苦鬪)였음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신문 3백여 장을 배달(配達)하는 것으로 일과(日課)가 시작되었는데, 낮에는 엿을 행상(行商)하고 날이 저물면 고등소학교(高等小學校) 야간부(夜間部)에 갔다가 귀가(貴家)해서는 그 날 배운 것을 복습(復習)하고, 다시 한 두 시간 입시(入試)를 위한 자습(自習)을 했다. 취침(就寢)은 으레 자정(子正)을 넘어서였고, 수면시간(睡眠時間)은 길어야 네 시간이었다.”

그러나 대학 진학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들려 입학(入學)에 관하여 문의(問議)했을 때 전문부(專門部) 교외생(校外生)으로 응시(應試)할 자격(資格)은 문제(問題)가 되지 않지만 정경과(政經科)를 택(擇)하려면 영어(英語)가 입시(入試)의 필수과목(必須科目)이었다. 선생은 영어를 공부하지 않았기에 앞이 캄캄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생이 의기소침(意氣銷沈)하는 것을 보고 교무과(敎務科) 직원(職員)이 법과(法科)면 영어(英語)를 몰라도 되는 수가 있다는 말을 부연(敷衍)해 새로운 용기를 얻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동경(東京)에 온지 8개월 되는 이듬해 봄인 1918년, 천신만고(千辛萬苦)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專門部) 법과(法科) 교외생(校外生)으로 등록(登錄)을 마치고 그렇게 갈망하던 신학문(新學問)의 고등교육(高等敎育)을 받게 되었다.

“등록(登錄)을 마친 그날 동경(東京) 와서 처음으로 안도(安堵)의 숨을 한 번 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니 참으로 감회(感懷)가 새로웠다. 몇 년 전까지 메마른 조선(朝鮮)의 벽촌(僻村)에서 서양(西洋)의 신지식(新知識)을 이단시(異端時)하고 언필칭(言必稱) 공맹(孔孟)의 추로학(鄒魯學)과 송(宋)나라의 염락관민지학(溓洛關閩之學)을 지상(至上)이라 여겨 맹신(盲信)해 온 나 자신의 핍새(逼塞)했던 사고(思考)가 밉도록 어리석게 느껴졌다.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신학문에 비한다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효(通曉)한들 그것은 혈병지지(絜缾之智)에 불과(不過)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한 마디 말도 없이 매정스레 두고 온 산하(山河)와 젊은 내자(內子)의 모습이 뇌리(腦裏)에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기필코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겠소’하고 지껄여 보았다.”

라. 쿠리하라(栗原)와의 만남

선생의 일본 동경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쿠리하라(栗原)와의 만남이다.

선생은 신문배달(新聞配達)과 엿을 파는 행상을 하면서 신학문의 고등교육과정을 수학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자신의 앞에 밝게 비칠 장래를 생각하면 만학(晩學)과 고학(苦學)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동경생활에서 잊지 못할 행운이 찾아 왔다.

코이시 가와쿠(小石川區) 야니기 마찌(柳町)에 있는 쿠리하라(栗原)라는 일본인 가구공장에 엿판을 메고 발을 들여놓았는데, 마침 그 집 직공들이 휴식 시간에 봄볕을 쬐고 있을 때였다.

“초색청청유색황(草色靑靑有色黃)이라 했으니 여러분과 나는 아무래도 초록동색(草綠同色)인 것 같소이다. 자 엿 좀 사 자시오.”

이 한마디가 선생의 동경생활에 희망과 활력을 준 계기가 되었다.

엿장수 주제에 문자를 쓴다는 그들에게 선생은

草色靑靑有色黃 풀색을 푸르고 버들 색은 누르구나

桃花歷亂梨花香 복사꽃이 만발하고 오얏 꽃이 향긋하다.

東風不爲吹愁去 동풍이 산들거리면 나의 시름은 실어가지

말고

春日偏能惹恨長 봄볕이 화창하지만 나의 한을 햇빛처럼

길게 끌어당길 뿐이다.

당(唐)나라 시인(詩人) 매지(買至)가 읊은 ‘춘사(春思)’라는 시 한 수를 읊어 주었다. 매지(買至)는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같은 시대(時代)에 산 시인으로서 벼슬이 경조윤(京兆尹)에서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르고, 사후(死後) 일본의 문부대신(文部大臣)격인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는 보충설명(補充說明)까지 해 주면서 말이다.

이 일로 인해 마침내 이 공장의 주인인 쿠리하라(栗原)를 만나게 된다.

쿠리하라(栗原)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인물로 당나라 시인 매지(買至)의 시를 줄줄 외우고 해설해 주는 선생의 학식에 반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동경에 유학을 온 까닭도 알고는 선생을 가구공장 직공들의 선생으로 채용하게 된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한 율원이었다. 일본인들이 얕보는 식민지 출신의 시골 청년에게서도 배워야 한다는 강한 의지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학비와 식생활의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공장에서 물품 구입(物品購入)과 전표 정리(傳票整理) 등 서무(庶務)에 관한 일과 직원들에게 틈틈이 한문을 가르쳐 주는 일을 맡았다. 직공들에게 주로 점심시간과 쉬는 날을 이용(利用)하여 우선 명심보감(明心寶鑑)과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나오는 대목을 하나씩 들어 가르쳤다.

그리고 일을 함에 있어서도 율원(栗原)의 신임에 대해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에는 신중(愼重)과 정확(正確)을 기했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에 율원(粟原)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준다. 선생을 2학기부터는 와세다 대학 (早稻田大學) 대신 니혼 대학(日本大學) 전문부(專門部) 법과(法科)에 정규생(正規生)로 편입(編入)을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대학(日本大學)에 보증인(保證人)은 물론 등록금(登錄金)까지 감당(堪當)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요 행운이 온 셈이다.

마. 희망(希望)은 다시 절망(絶望)으로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은 선생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동경 유학의 부푼 꿈이 한 순간 무너지는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7월이 가고 8월 상순 어느 날 새벽에 골목길을 비질하던 선생은 쓰러졌다. 병원에 옮겨 진찰을 받은 결과가 악성각기병(惡性脚氣病)이었는데, 원인은 환경이 맞지 않고 심한 영양실조(營養失調)때문이었다. 서둘러 치료(治療)를 하지 않으면 생명(生命)이 위험(危險)한데 풍토가 맞는 고향(故鄕)에 가서 치료(治療)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效果的)이라는 진단이었다.

그 때 선생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선고(宣告)인가! 나라는 위인이 이토록 흘복(訖福)하단 말인가! 병마(病魔)야 액귀(厄鬼)야, 네 어디 붙을 데가 없기에 하필(何必)이면 나 같은 빈핍도골자(貧乏到骨者)에게 붙었느냐! 무심하고 야속(野俗)한 하늘이 참으로 밉고 원망(怨望)스럽구나! 혈혈고종(孑孑孤蹤) 이역만리(異域萬里)에 와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요행(僥倖)으로 잡은 신학문(新學問)의 수학(修學) 길이 고작 1개년(個年) 남짓해서 이토록 허무(虛無)하게 허물어지고 말다니, 나는 입술을 깨물고 병상(病床)에 누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탄식은 바로 피눈물이었다. 청운의 뜻이 병마(病魔) 때문에 중도(中道)에 그치게 되었으니 그 원통함이 얼마나 컸을까.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의사(醫師)와 율원의 권고(勸告)를 쫒아 동경(東京)땅을 하직(下直)하고 일단 귀향(歸鄕)길에 오른다.

그 후 해가 두 번 바뀐 1920년 고향에서 선생의 병은 완쾌 되었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와 당시의 집안 형편(形便)은 다시 동경(東京)으로 갈 수 있게끔 허락(許諾)해 주지를 않았다.

3. 교육(敎育)의 선구자(先驅者)

가. 선교리의 사설학원에서 교육 사업 첫 발을 딛고

1922년 임술년(壬戌年).

선생의 나이 31세 되던 해이다.

인근(隣近) 마을 선교(仙橋)리 이영구(李榮求)씨 댁(宅) 사랑(舍廊)에서 사설학원(私設學院)을 차리고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다는 소문(所聞)을 들었다. 선생은 조카 술용(述龍)과 동생 석범(錫範)을 데리고 간다. 그러나 예정(豫定)된 인원(人員)이 찼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다는 대답(對答)이다. 궁여일책(窮餘一策)로 두 반을 편성하여 한 반은 유급(有給)교사가 맡아 일본어(日本語)와 산수(算數)를 가르치고, 한 반(班)은 선생이 맡아 한문(漢文)과 조선어(朝鮮語)를 가르치도록 제안했다. 이는 동생과 조카가 사설학원에 들어가서라도 무식함을 면하게 하려는 마음에서 자진 봉사(自進奉仕)를 제의(提議)한 것이다. 이 일은 선생이 교육의 길로 들어선 첫 발걸음이었다.

이러한 헌신의 길도 쉽지 않았다.

수업(授業)을 시작한지 사나흘 밖에 되지 않아서 말썽이 일어났다. 유급 교사(有給敎師)의 일본어(日本語) 실력(實力)이 당시의 학생수준에 맞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는데 비난은 선생에게 돌아왔다. 일어(日語)의 유급교사(有給敎師)를 재 채용(再採用)키로 했으나 쉽지 않아 끝내는 보통학교(普通學校)를 나온 청년(靑年) 한 사람을 불러다 미봉책(彌縫策)을 썼고 그리고 나머지 과목은 모두 선생이 다 맡아서 가르쳐야 했다. 한편 수업 장소(授業場所)도 종전(從前)의 이영구(李榮求)씨 댁(宅)사랑(舍廊)에서 한산이씨(韓山李氏)네 재실(齋室)로 옮기게 되었다.

나. 자양학원의 설립

선교리(仙橋里)의 사설학원(私設學院)이 일어교사(日語敎師) 자질 문제(資質問題)와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재실(齋室)이라는 장소 문제(場所問題)로 해서 또 다시 말썽이 생겼다. 그러자 관제마을에 선생이 결성한『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계원(契員)들 중심으로 관제리(官堤里)에 강습소(講習所)를 설립(設立)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내 그해 추수(秋收)가 끝난 뒤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임시총회(臨時總會)가 소집(召集)되어 강습소(講習所) 설립 안(設立案)을 만장일치(滿場一致)로 결의(決議)하기에 이르렀다.

총회(總會)에서는 강습소(講習所) 건물(建物)을 건축(建築)하는데 1천원의 적립특별계금(積立特別契金)과 부족(不足) 되는 비용(費用)을 충당(充當)하기 위해 별도(別途)의 현금(現金) 찬조금(贊助金)과 곡물 기부(穀物寄附), 노력 제공(勞力提供) 등을 받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해서 1923년 계해년(癸亥年) 봄, 선생의 나이 32세에 관제(官堤)에 건평(建坪) 15평(坪)의 강습소(講習所) 건물(建物)이 들어서게 되었다.

선생은『자양학원(紫陽學院)』간판(看板)을 걸었다.

“『자양(紫陽)』이라는 말은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송(宋)나라의 대유(大儒) 주희(朱熹)의 별호(別號)이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선대인(先代人) 주송(朱松)은 중국(中國)의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 성남(城南)의 자양산(紫陽山)에서 글을 읽었다. 뒷날 주자(朱子)는 그곳을 자양서실(紫陽書室)이라 부르고 자양(紫陽)을 자기의 별호(別號)로 삼았다. 또 주자(朱子)의 문하생(門下生)들은 그곳에 서원(書院)을 세워 자양서원(紫陽書院)이라 이름하고 주자(朱子)의 글을 자양지노필(紫陽之老筆)이라 하여 추앙(推仰)한데 연유(緣由)한 것이다.”

선생은 정식(正式)으로 당국(當局)에 학술강습소(學術講習所)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하고 학생(學生)들을 널리 모집(募集)했다. 그리고 학생(學生)한테서 약간(若干)의 월사금(月謝金)을 받아서 그것으로 유급(有給) 일어 교사(日語敎師) 1명을 채용(採用)하고, 그 이외(以外)의 과목(科目)은 구봉회(具奉會) 씨와 선생이 맡아 전력(專力)했다.

유급교사는 1인은 쯔키오카 우사부로(月岡卬三郞)로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출신이었다. 조교 구봉회(具奉會)씨는 충북 보은군 마로면 궁기리 출신으로 관기공립보통학교 출신이다.

한편 설립연도에 대해『오광자소(五狂自疏)』에는 ‘1923년 계해년(癸亥年) 봄’이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상주시사(尙州市史)』에는 다음과 같다. 1922년(大正11) 6월 5일 인가를 신청하여 6월 15일 경상북도지사 후지카와 이사부로(藤川利三郞)에 의해 ‘경북학 제1,631호’로 인가되었고 상주군청은 6월 16일 제1227호로 이를 확인했다. 학생 수는 1923년 8월 현재 1학년 여자 3명 남자 30명, 2학년 남자 26명, 3학년 남자 27명, 4학년과 6학년은 없고, 5학년 남자 7명으로 모두 93명이었다.

그러나 ‘1925년 10월 월말 조사보고 표’에 의하면 1학년 2명, 2학년 6명, 3학년 12명, 4학년 8명, 5학년은 없고, 6학년은 16명이었다.

학칙(學則)은 9장 29조로 되어있고, 입학금(入學金) 1원에 월사금(月謝金)은 1학년 40전, 2학년 60전, 3학년 80전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정 사정이 곤란한 자는 후에 대체할 수 있도록 했고, 모범생은 장학하는 의미로 1학년 간 면제하도록 했다.

자양 학원은 1930년 6월 화동면에 4년제 보통학교가 개교 1주년을 맞으면서 폐쇄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問題)가 생기게 되었다. 계원(契員) 가운데서 자양학원(紫陽書院) 발족(發足)을 반대했던 사람이 선생을 모함(謀陷)하여 주재소(駐在所)에 부정(不正)이 있는 듯이 밀고(密告)를 한 것이다. 주재소(駐在所)에서는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서류(書類) 일체(一切)와 강습소(講習所) 건축 서류(建築書類)를 압수(押收)했고, 이 일로 여러 차례 호출(呼出)도 당하고 심문(審問)도 받았다

10여일이 지난 뒤에 부정에 대한 혐의는 풀렸지만 근검저축계(契)의 일은 타인(他人)에게 위임(委任)하고, 자양학원의 경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우선 자식(子息)을 가르치고 싶어도 월사금(月謝金)을 내지 못해 애를 태우는 사람을 위해 면(面)에 교섭(交涉)하여 면답(面沓)의 경작(耕作)을 주선(周旋)도 해 주었다. 또 부형(父兄)이 연로(年老)하거나 극빈한 학생(學生)에게는 기한(期限) 없는 장래(將來)를 구두(口頭)로 담보(擔保)토록 하고, 월사금(月謝金)을 면제(免除)해 주기도 했다.

다. 자양학원(紫陽學院)에 대한 탄압(彈壓)과 폐쇄(閉鎖)

1926년. 자양학원을 설립한 지 3년 뒤이다. 선생은 그해 여름 교육(敎育)의 성과(成果)를 부형(父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름방학(放學)을 이용(利用)하여 학력 발표회(學力發表會)를 가지기로 했다. 하루는 부형(父兄)들을, 하루는 모자(母姉)들을 초청(招請)하여 학생들이 그간 배운 학문(學問)을 당당히 발표 하도록 했다.

그러자 주재소(駐在所)에서는 이번에는 자양학원(紫陽書院)의 학생들이 순박(淳朴)한 부모형제(父母兄弟) 들에게 불순(不純)한 신사상(新思想)을 고취(鼓吹)시켰다는 트집을 잡아 학생(學生) 10 여명을 불러 청취서(聽取書)를 작성(作成)하게 한 다음 선생을 불러 그 책임(責任)을 추궁(追窮)하였다.

선생은 이 일이 주재소(駐在所)의 계획(計劃)된 탄압(彈壓)임을 알고, 책임자(責任者)인 나 혼자서 시도(試圖)한 일이라 주장(主張)한 끝에 보안법(保安法) 위반(違反)혐의(嫌疑)로 상주경찰서(尙州警察署) 유치장(留置場)에서 13일간 구속(拘束)당하는 일을 겪었다.

뿐만 아니었다. 선생이 자양학원(紫陽學院)을 발족(發足)한 이후(以後) 매년(每年) 군(郡) 학무과(學務課)에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해 왔지만 번번이 서류(書類)가 반려(返戾)되곤 했다. 그러다가 8년 째 되는 해에는 선생을 군청(郡廳)으로 불렀다. 그리고 학무과(學務課) 직원이 한다는 말이, “당신은 청년운동(靑年運動)도 하고 사회운동(社會運動)도 하면서 또 교육사업(敎育事業)도 하겠다고 매년 학원설립(學院設立) 인가원(認可願)을 내고 있는데 교육사업(敎育事業)과 사회(社會) 청년운동(靑年運動)은 이율배반(二律背反)되는 일이 아니오. 어느 쪽이든 하나를 택(擇)하시오.” 했다.

선생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교육사업(敎育事業)만 하겠다는 대답(對答)을 하고, 그날로 청년회와 신간회에 탈퇴서(脫退書)을 냈고, 그 증명(證明)을 첨부(添附)하여 또 자양학원(紫陽學院)의 인가원(認可願)을 제출(提出)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1930년 6월을 기(期)해 화동면(化東面)의 4년제 보통학교(普通學校)가 개교(開校) 일주년을 맞았다. 따라서 인가(認可)를 받지 못하고 근 10년간 경영(經營)했던 자양학원(紫陽學院)을 폐쇄(閉鎖)하고 말았다.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變)한다 했는데 자양학원(紫陽學院)은 근 10년을 두고 노심초사(勞心焦思)를 했으나 인가(認可)라는 새로운 변화(變化)를 얻지 못하여 시대(時代)의 흐름 속에 소멸(消滅)되고 만 것이다.

선생의 첫 교육 사업에 대한 꿈은 이렇게 10년 만에 무너졌다. 학원(學院)의 문(門)을 닫는 날 선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관제(官堤)라는 마을에 대해 무한(無限)한 연민(憐憫)의 정(情)을 느꼈다. 이 학원(學院)이 관제(官堤)에 소재(所在)했지만, 지난 10년 동안에 이곳을 다녀간 학생(學生)들 가운데 관제(官堤)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꼽을까 말까 하는 숫자였던 것이 선생을 가슴 아프게 했다. 이유(理由)는 마을이 전반적(全般的)로 가난한데다가 일부 학부형(學父兄)들이 고루한 사상(思想)과 고집(固執)때문이었다고 판단하면서 학원(學院)의 폐문(閉門) 자체(自體)보다도 그 점이 못내 애석(哀惜)하기만 했다.”

라. 화동중학교 기성회 조직 및 화동고등공민학교 개교

선생이 다시 교육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조국 광복(祖國光復)을 계기(契機)로 고향(故鄕) 화동(化東)에 중학교(中學校)를 세우고자 한 일이었다.

1945년 을유년(乙酉年) 9월 15일.

조국이 광복 된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모든 이들이 광복의 환희로 들떠 있을 때 선생은 관제의 김진만 씨 댁에서 자양학원 강학계 총회를 열고, 화동중학교 건립발기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10월 20일에는 ‘화동중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고향발전을 도모하고 조상들이 하지 못한 영광된 향토건설을 꿈꾸었다.

선생의 꿈은 가정이 어려워 도회지(都會地)에만 있는 중학교(中學校)를 가지 못하는 향토(鄕土)의 어린 새싹들에게 중등교육(中等敎育)을 우리 힘으로 이수(履修)시키자고 함에 있었다.

선생의 꿈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11월 1일에 화동초등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학생모집을 시작하였고, 1946년에는 화동중학교 교지를 상주와 황간, 화령의 중심인 화동면 이소리에 확보 하였다. 그리고 1월 27일부터 정지 작업을 시작으로 4월에는 75평의 교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수업을 시작한 지 8 개월 만에 내적으로도 수업의 성과가 나타났다. 학생들 중에는 도시의 기존 중학교 2학년에 15명이 편입을 하게 되었고, 상주농잠학교부설 사범과에 3명이 합격 했으며, 초등학교 교원 채용시험 합격자도 10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 일도 순탄하지 않았다. 의욕적(意慾的)이고 진취적(進取的)이었던 육영사업(育英事業)이, 발족(發足) 1주년(周年)이 되자 관(官)에서 무인가(無認可)를 빌미로 문책(問責)도 하고, 이것저것 규제(規制)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설이 인가 기준에 미달이라 하여 당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면민(面民)의 후원(後援)도 그 열도(熱度)가 식기 시작했고, 또 우리의 고질적 병폐인 중상모략(中傷謀略)과 유언비어(流言蜚語)까지 생겼다.

결국 선생의 뜻은 또 한 번 꺾이게 되었다. 1968. 3. 7 화동중학교가 개교함으로 정식 중학교 인가를 얻지 못하고 화동고등공민학교(化東高等公民學校)로 그 명맥을 다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에 지역민이 뜻을 모아 향토 인재를 길러 내려는 높은 교육에 대한 열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4.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의 선구자(先驅者)

농촌계몽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 농촌사회의 현실적 문제점과 폐해, 그리고 농민의식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농촌운동이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생각한다. 특히 상록수의 주인공인 최영신은 실제 최용신 이라는 인물로 이론과 실습을 통해 농촌운동가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우리는 상록수의 ‘샘골 학원’과 ‘최영신’이라는 여성 계몽운동가는 대부분 알고 있지만 정작 우리 고장의 계몽 운동가이자 선각자는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가. 근검저축계(勤儉貯蓄契)의 조직

1922년. 선생의 나이 31세 때 관제 마을 사람들과 협의하여 ‘근검저축계’를 조직하였다. 근검저축계란 말 그대로 근검절약(勤儉節約)의 정신으로 새로운 농촌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조직한 계(契)이름이다.

우선 1구좌(口座)를 현금(現金) 10전(錢)으로 하여 1인당 5구좌까지 가입할 수 있도록 규약(規約)을 만들었다. 그 결과 일차적(一次的)으로 금 천 원(金千園)이 모였다. 그래서 그 천원을 계원(契員)들과 의논한 후 월리(月利) 4분(分)으로 융자(融資)를 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매월(每月) 신규 가입자(新規加入者)가 증가(增加)하여 1개년(個年)이 지났을 때는 계원 수(契員數)가 1백 명에 육박(肉迫)하고 총 계금(總契金)이 6천여원에 달(達)하였다.

나. 순회 강연회 개최

1927년 34세, 화령청년회장으로 피선되어 화령청년회(化寧靑年會) 주최로 동경유학생(東京留學生) 순회강연단을 초청 지방계몽강연회를 가졌다. 유학생 강연단의 중심 인물은 정열모(鄭烈模) 씨였는데 결과(結果)는 의외(意外)로 대성황(大盛況)이었다.

이튿날 유학생 연사(演士) 5명을 초대(招待)하여 위로연(慰勞宴)겸 평가회를 가졌다. 선생은 솔직한 심정으로 연사들에게 청년회원(靑年會員)들은 강연(講演)의 내용이 다분히 전문적(專門的)이고 어려워서 많은 청중(聽衆)이 나중에는 졸았는데, 역사적(歷史的)이고 문학적(文學的)인 수준(水準) 높은 표현(表現)을, 보다 서민적(庶民的)이고 보다 평범(平凡)한 말로 대신 해 주었더라면 아주 효과적(效果的)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현하며 그들이 다른 곳에 강연이 있을 경우 참고로 삼도록 조언을 하기도 했다.

다. 마을의 갱생(更生)운동 전개

당시 30여호(戶)가 되는 관제 마을은 자작(自作) 농가(農家)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마을 전체(全體)에 농우(農牛)가 두 세 마리뿐이고, 농기구(農器具) 하나를 구입(購入)하는 것도 두 세집이 어우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춘궁기(春窮期)에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기아(飢餓)를 모면(謀免)하면서 장리곡(長俚穀)을 얻으려 인근(隣近) 마을의 부자(富者)를 찾아 가는 것이 매년의 관행(慣行으로 되었다. 가을에는 지붕을 이는 집이 거의 없어 비가오면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비가 새어 그 모습이 비참했다.

그런 상황(狀況)이건만 소위(所謂) 양반(兩班) 행세를 하는 자들은 노동(勞動)을 천시(賤視)하여 안일(安逸)을 쫒으려 들었고, 일부 몰지각(沒知覺)한 이들은 도박(賭博)으로 마을이 거의 폐촌(廢村)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다.

1) 의식 개혁 운동

이를 보다 못한 선생은 결연(決然)히 마을의 갱생(更生)을 도모(圖謀)하기로 했다. 선생은 전 동민(洞民)을 모아서 회의(會議)를 열어 다음과 같은 결의(決議)하였다.

첫째, 남녀노소(男女老少)와 반상(班常)을 막론(莫論)하고 전 동민이 1일 10시간의 노동(勞動)을 실행(實行)한다. 10시간 중에 점심시간(點心時間) 1 시간이 포함(包含)된다.

둘째, 남녀간(男女간)의 내외(內外) 인습(因習)을 타파(打破)하여, 남녀가 함께 노동한다.

셋째, 도박(賭博)의 근절(根絶)을 위해, 1회 발각(發覺) 시(時)는 충고(忠告)하고, 2회 발각 시는 전 동민이 절교(絶交)하고, 3회 발각 시는 마을에서 추방(追放)한다.

넷째, 전 동민의 백주(白晝) 주점(酒店) 출입(出入)을 금(禁)하고, 야간(夜間)일지라도 그 출입을 삼가 하도록 한다.

다섯째, 매(每) 호당(戶當) 저금통장(貯金通帳)을 필(必)히 만들고, 매월(每月) 10전(錢) 이상 저축(貯蓄)할 것을 의무화(義務化) 한다.

이를테면 노동의 중시, 내외하는 인습 타파, 도박 근절, 백주 주점 출입 금지, 저축의 생활화를 전 동민의 결의(決議)로 시행하게 했다. 이런 결의가 있은 후에 매월(每月) 10전(錢)의 의무 저축금(義務貯蓄金)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반상(班常)의 타파(打破)였다고 선생은 고백했다.

“나는 먼저 소위(所謂) 양반(兩班)입네 자칭(自稱)하는 사람들을 보고 알량한 양반(兩班)의 가식(假飾)을 털어 버리라고 충고(忠告)했다. 양반(兩班)의 자격(資格)을 옳게 따지자면 당시(當時) 관제(官堤)에는 양반(兩班)이 한 집도 없었다. 아무리 양반(兩班) 가문(家門)이라도 3대(代) 무현관(無顯官) 다시 말해서 백골남행(白骨南行)의 음직(蔭職) 관명(官名)조차 못 붙여 제사(祭祀) 지방(紙榜)에 학생부군(學生府君) 신위(神位)나 처사부군(處士府君) 신위(神位)를 쓰는 집은 백두(白頭)로서 중인(中人)에 준(準)하는 대우(待遇)밖에 받지 못한다. 5대 6대 때부터 품계(品階)의 최하위(最下位)인 종구품(從九品)의 장사랑(將士郞)도 지방(紙榜)에 쓰지 못하는 집안이 양반(兩班)은 무슨 양반(兩班)이란 말인가. 그따위 양반(兩班) 핑계로 굶더라도 천(賤)한 노동과 상인(商人)과 장인(匠人) 노릇 못하겠다는 어리석은 잠꼬대에서 깨어나라고 했던 것이다.”

“또 상인(常人)을 보고는 제발 스스로 상놈 질 그만 하라고 타일렀다.

그랬더니 자칭(自稱) 양반(兩班)들보다 상인(常人)이 전혀 반응이 없는 데는 정말 기가 막혔다.”

2) 혼례와 상례, 세시풍습의 정화

먼저 혼례의 간소화와 낭비(浪費)를 없애기 위해, 마을 공동소유(共同所有)의 혼구(婚具) 일습(一襲)을 장만하여 타동(他洞)에서 빌려오는 폐단(弊端)을 막고, 신랑(新郞)의 행차(行次)를 보행(步行)토록 적극 권장(勸獎)하여 실효(實效)를 거두었다.

그리고 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약(規約)을 만들었다.

첫째, 장례(葬禮)는 3일장으로 한다.

둘째, 상가(喪家)의 일을 보는 사람은 자기 집에서 식사(食事)를 하고 다닌다.

셋째, 장사(葬事) 날에는 20세에서 40세까지의 남자 전원이 나서서 상여(喪輿)와 산역(山役)을 맡는다.

넷째, 장사(葬事) 날의 점심을 위하여 가가호호(家家戶戶) 빠짐없이 형편(形便)대로 부조(扶助)한다.

다섯째, 상가(喪家)에서는 최고(最高) 5두(斗) 이상의 술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한편 음력(陰曆) 정초(正初)만 되면 으레 보름 이상을 놀면서 물자(物資)와 시간(時間)을 낭비(浪費)하는 폐습(弊習)이 오랫동안 이어 왔다. 선생은 이를 척결(剔抉)키로 했다.

우선 마을의 집단(集團) 세배 안(歲拜案)을 실행(實行)에 옮겨 음력(陰曆) 섣달그믐께 동민 회의(洞民會議)를 열어서, 그 집의 형편(形便)에 따라 떡이나 과일을 부담 시키고, 탁주(濁酒) 몇 말만 마을 기금(基金)으로 받게 하고, 초(初) 3일에 남자(男子)들의 세배(歲拜)를, 초 4일에는 여자(女子)들이 세배(歲拜)를 마치도록 했다.

오전(午前)에 세배(歲拜)를 마치면 매호(每戶)에 분담(分擔)시켰던 음식(飮食)으로 함께 점심(點心)을 먹고, 오후에는 편을 갈라 척사대회(擲柶大會)를 열어 설을 마냥 즐기도록 했다.

그러고는 5일부터 14일까지 특별노동기간(特別勞動期間)을 설정(設定)하여 가마니와 새끼와 그 밖의 고공품(藁工品)을 생산(生産)토록 하여 대보름 하루를 쉰 다음날 아침 그것들을 마을의 너른 마당에 일제히 출하(出荷)시켜 수량(數量)의 다과(多寡)와 품질(品質)의 우열(優劣)을 가려 포상(褒賞)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17일에는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삶기, 고공품((藁工品) 만들기 경진대회(競進大會)를 열어서 시상(施賞)함으로서 종래(從來)의 무위도식(無爲徒食)의 폐풍(弊風)을 시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 종전(從前)의 나쁜 관례(慣例)를 교정(矯正)시킨 일로 품앗이 노력 제공(勞力提供)이었다. 춘궁기(春窮期) 때 꾸어 먹은 곡식(穀食)을 일로 갚는 품앗이인데, 그러다 보니 자기 집 이앙(移秧)할 때를 잃게 되어 한 해 농사(農事)를 낭패(狼狽)보는 수가 있었다. 그러기에 강력(强力)히 자기 집 이앙(移秧)을 우선(于先)하라 강조(强調)하여 실천(實踐)에 옮기도록 했는데, 반대급부(反對給付)로 선생은 때로 비난(非難)을 받기도 했다.

라. 부자마을을 위한 시책 전개

1) 가마니 짜기

어느 정도 저축액(貯蓄額)이 적립(積立)되었을 때, 선생은 그것을 담보(擔保)로 군(郡) 농회(農會)에서 가마니 짜는 기기(器機) 20대, 새끼틀 1대, 타고기(打藁機) 한 대를 주문(注文)하여 마을에 적절(適切)히 안배(按配)했다.

그리고 가마니 1매(枚) 짜는 노임(勞賃)은 10전(錢), 가마니 날 새끼 대는 3전(錢), 가마니 꿰매는 품삯은 2전(錢), 원자재비(原資材費) 5전(錢)해서 완성(完成)된 가마니 한 장에 20전(錢)을 매상(賣上)하기로 했다. 선생은 매일(每日) 아침에 집집마다 찾아가서 그 수(數)를 조사(調査)하여 기록(記錄)했다가 보름마다 모아 대금(代金)을 현금(現金)으로 지불(支拂)해 주었다. 이렇게 두세 달을 모으니 가마니가 근 1천장에 달했다.

당시 가마니 값은 1등품이 17전(錢)이고 등외품(等外品)은 7전(錢)이었는데 관제마을에서 짠 가마니의 초기(初期) 것은 거의 등외품(等外品)으로 보아야 했다. 거기에다 상주읍(尙州邑)까지 운반(運搬)하는데 한 장에 운임(運賃) 1전이 먹혔다. 20전(錢) 원가에 1전(錢)의 운임(運賃)을 물어 상주읍(尙州邑)으로 가지고 가서 검사(檢査)를 받는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2) 매상을 위한 화동출장소 설치

선생은 그 적자를 보충(補充)하기 위해 검사원(檢査員)이 화동(化東)에 나와서 검사토록 요청(要請)을 한 것이다. 생산자(生産者)로서는 매당(枚當) 1전(錢)씩의 운임(運賃)과 상주읍(尙州邑) 왕복(往復)의 여비는 물론 왕복(往復)에 소요(所要)되는 긴 시간을 오히려 생산(生産)에 활용(活用)할 수 있는 이득(利得)이 있었다. 거기에다 농회(農會)에서 다량(多量) 생산자(生産者)에게 지급(支給)하는 매당(枚當) 3전의 장려비(獎勵費)가 가산(加算)되는 것이다.

선생은 군(郡) 농회(農會)측에 매(每) 2,000장 단위(單位)로 출장 검사(出張檢査)를 간청(懇請)하면서, 상주(尙州)의 곡상(穀商)들이 중화(中化) 5개 면(面)에 나와 곡물(穀物)을 매상(賣上)하는데 현지(現地) 조달(調達)이라는 편의(便宜)가 따른다는 점을 역설(力說)했다.

그 결과(結果) 교섭(交涉)을 벌인지 한 달 만에 마침내 농회(農會) 측으로부터 화동 출장 검사(化東出張檢査)의 동의(同意)를 받아 내는데 성공(成功)했다.

뿐만 아니라 1차(次) 검사(檢査) 때는 가마니의 수량(數量)이 2천장이었으나, 2차 이후부터는 3천장으로 증가(增加)하게 되었고, 등급(等級)도 1차분에서 2, 300장 등외품(等外品)이 나왔을 뿐 항상(恒常) 전량(全量)이 1등의 판정(判定)을 받았다.

이렇게 전 동민(洞民)이 합심 전력(合心全力)하여 가마니와 새끼 생산(生産)에 큰 성과(成果)를 거두는 것을 보고, 군(郡)농회(農會)에서는 마침내 그 노력(努力)을 포상(褒賞)하는 뜻으로 관제(官堤)에 가마니와 새끼의 지정검사소(指定檢査所)를 설치(設置)하여 종전(從前)의 월 1회 검사(檢査)를 2회로 하게 되었다.

3) 전(錢)・곡(穀) 장리채(長利債) 일소(一掃)

그쯤 되자 이번에는 마을의 전(錢)・곡(穀) 장리채(長利債)를 일소(一掃)하기 위하여 총력(總力)을 경주(傾注)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 방안(方案)으로 마을사람 전원을 화령금융조합(化寧金融組合)에 가입(加入)시키고 신용대부(信用貸付)를 받아 그것으로 장리채(長利債)를 일차적(一次的)으로 정리(整理)했다. 그리고 잔여(殘餘) 장리채(長利債)는 마을의 공동(共同) 저축금(貯蓄金)으로 반제(返濟)토록 하고 그래도 부족분(不足分)은 여유(餘裕)있는 사람들의 돈을 모아서 마침내 마을의 전(錢)・곡(穀) 장리채(長利債)를 청산(淸算)하였다.

첨엔 금융조합(金融組合)의 신용대부금(信用貸付金) 상환(償還) 문제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매호(每戶)의 형편(形便)이 되는대로 원리금(元利金)의 일부(一部)라도 거두어서 우선(于先) 대부금액(貸付金額)이 많은 사람의 몫부터 상환(償還)해 나갔다. 그 결과(結果) 약정(約定)한 그 해에 한 집의 미상환(未償還)도 없이 갚을 수가 있었다. 면내(面內)에서 관제(官堤)만이 금융조합(金融組合) 직원의 채무(債務) 독촉(督促) 출장(出張)이 없었던 마을이 되어 또 한 번 그 성과(成果)를 거두게 되었다.

4) 문맹퇴치(文盲退治) 운동 전개

장리채 정리가 끝을 낸 그 해 가을부터 동민(洞民) 전원(全員)의 문맹(文盲) 퇴치(退治)를 위해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이 야학(夜學)을 열었다. 장소(場所)는 자양학원(紫陽學院) 자리였다. 낮에는 부지런히 일하고 밤에는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하기를 1년쯤 계속하니, 마을의 부녀자(婦女子)치고 편지(便紙)와 가계부(家計簿)를 못 적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5) 공동 우물 파기와 보(洑)의 설치

마을의 공동(共同) 편의(便宜)를 위해 종전(從前)에 하나밖에 없었던 공동우물을 네 군데로 늘리고, 화재(火災)와 한발(旱魃)에 대비(對備)하여 새로 연못을 세 군데 팠다.

보(洑)의 경우는 종전(從前)보다 더 많은 보(洑)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한해(旱害)를 무사히 극복(克服)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6) 공동양잠(共同 養蠶)과 마을 공동 경작을 위한 토지 마련

마을의 소득(所得)을 높이기 위해 공동양잠(共同養蠶)을 시도(試圖)했다. 선생은 백씨(伯氏) 소유의 산전(山田) 약 2천 평(坪)을 금(金) 일백(一百)원에 지가(地價)를 정하고 매년 10원씩 지불하여 10년에 완결(完結)토록 주선했다.

아울러 마을 부녀자(婦女子)들의 공동(共同) 경작(耕作) 전(田) 한 필지(筆地)와 마을 소유의 공동(共同) 경작(耕作)답(沓) 3천 평(坪)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산(家産) 농우(農牛)의 생식(生食)을 권장(勸獎)하여 군(郡) 농회(農會)에서 장려비(獎勵費) 70원을 수령(受領)하여 56평짜리 함석지붕의 건초 저장고(乾草貯藏庫)를 세웠다.

그리고 마을 사람의 자작(自作) 농토(農土) 증대(增大)를 위해 금융조합(金融組合)에서 저리(低利) 대출금(貸出金)을 인출(引出)하여 우선 저축액(貯蓄額)이 많은 집부터 몇 마지기씩 매입(買入)토록 하였다. 그 결과 10년 가까이 지났을 때는 동리(洞里) 주변의 농토(農土)가 거의 동민 소유(洞民所有)가 되었다.

7) 마을 공동 판매장(共同販賣場)을 통한 상공업(商工業) 권장

상주・화동・황간 국도가 관제마을을 중심으로 신설 되는 행운이 오자 선생은 종전(從前)에는 반대(反對)했던 상점(商店)과 주점(酒店) 개설(開設)을 권장(勸獎)하고, 마을 사람에게도 적극적(積極的)으로 상공업(商工業)에 종사(從事)할 것을 권했다. 그와 동시에 마을에서 가까운 신작로 교차점(交叉點)에 마을의 공동 판매장(共同販賣場)으로 쓸 30여 평짜리 함석지붕의 창고(倉庫)를 짓고 1차적으로 벼의 공판(共販)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창고 옆에 다시 20여 평의 집을 지어 여인숙(旅人宿)과 음식점(飮食店).잡화점(雜貨店)을 겸하게 했다.

이 해 가을 마을의 공판장(共販場)에서는 군 농회(農會)의 검사원(檢査員)이 검사(檢査)한 벼 5만 가마니 정도가 거래(去來)되었다. 그래서 검사(檢査) 수수료(手數料)와 보관료(保管料)로 징수(徵收)한 돈으로 창고(倉庫)와 부속(附屬) 점포(店鋪)의 건축비(建築費) 융자금(融資金)의 이자를 어렵지 않게 갚을 수가 있었다.

이상과 같이 부촌(富村) 건설(建設)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동민의 사기진작(士氣振作)과 정서 함양(情緖涵養)을 위해 봄의 이앙(移秧)이 끝났을 때는 전(全) 동민(洞民)이 참석(參席)하는 야유회(野遊會)를 가지고, 7월의 백중(伯仲)날에는 씨름대회를, 추수(秋收)가 끝났을 때는 각종(各種) 농산물(農産物)과 고공품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례행사(年例行事)로 성대(盛大)히 개최(開催)했다. 특히 이 품평회(品評會)는 소문(所聞)이 널리 퍼져서 타지방(他地方)의 관리(官吏)들이 견학(見學)하러 오는 마을이 되었다.

마. 모범 마을 선정

1936년 병자년(丙子年).

선생은 다시 마을 사람의 앞장을 서서 소득증대(所得增大)를 위해 협동(協同)하고 근면(勤勉)하는데 전력(全力)을 경주(傾注)했다.

이해 가을 마을에서는 예년(例年)처럼 농산품(農産品)의 품평회(品評會)를 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주군수(尙州郡守)와 경찰서장(警察署長)이 경상북도(慶尙北道) 경무부장(警務部長)인 오노 갠이지(大野謙一)를 수반(隨伴)하여 품평회(品評會)와 경진대회(競進大會)를 참관(參觀)하러 왔다. 실(實)로 화동면(化東面) 유사이래(有史以來) 최초로 맞는 고관(高官)들의 행차(行次)였다.

그들은 품평회(品評會)와 경진대회(競進大會)뿐만 아니라 마을의 연중 행사표(年中行事表)와 개량 실적표(改良實積表), 저축 상황(貯蓄狀況) 등을 일일이 살핀 다음 많은 칭찬(稱讚)과 격려(激勵)를 하고, 군(郡)과 도(道)로서 포상(褒賞)하겠다는 말까지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 대야(大野) 경무부장(警務部長)은 김천 군청(金泉郡廳)에 도내(道內) 군수・서장(郡守・署長)의 기관장 회의(機關長會議)가 소집(召集)된 자리에 나가 상주군(尙州郡) 화동면(化東面) 관제리(官堤里)의 발전적(發展的)인 실황(實況)을 소개(紹介)하고, 모두 모범(模範)으로 삼으라는 훈시(訓示)를 했다.

그러자 우리 마을에는 도내(道內) 각지(各地)에서 시찰단(視察團)이 끊이지 않고 방문하게 되었다.

바. 상주・화동・황간 국도 유치

해가 바뀌어 1937년 정축년(丁丑年)이 되었다.

양력(陽曆) 1월 초에 선생은 상주경찰서(尙州警察署) 경무 계장(警務係長)의 호출(呼出)을 받았다. 이 호출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 하고 선생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와 국체명징(國體明徵)을 위해 국민계발(國民啓發)의 앞장을 서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선생은 그에게 건성으로 동의(同意)한 다음, 오히려 이 무렵 도(道)에서 개설(開設)을 추진하고 있는 상주(尙州).보은(報恩)간의 새로운 국도(國道)가 화동(化東)을 경유(經由)할 수 없겠는가 하는 부탁(付託)을 해 보았다.

그 점은 이미 계획(計劃)이 확정(確定)된 것이기 때문에 수정(修正)을 할 수 없지만 그 공사(工事)에 뒤이어 상주(尙州)-황간(黃澗) 간에 신작로(新作路) 개설(開設)이 있으니 그 도로(道路)는 반드시 화동(化東)을 경유(經由)토록 서로 힘을 써 보자는 새로운 정보(情報)를 귀 뜸해 주었다.

그리고 그 후 수개월(數個月) 뒤에 경무계장(警務係長)의 말대로 상주(尙州)-황간(黃澗) 간의 도로가 관제(官堤) 바로 앞을 지나서 개설(開設)되었다. 매 호당(戶當) 2개월이라는 가중(加重)한 부역(賦役)이 고통스러웠으나, 이 신작로(新作路)의 개통(開通)은 선생뿐 아니라 마을의 발전(發展)을 약속(約束)해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5. 민주주의(民主主義) 교육의 선구자(先驅者)

가. 사회주의 운동에 반대

선생이 사회주의 운동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첫 기회는 선생이 1921년 화령청년회 회장 일을 할 때였다.

당시 상주에는 상주읍(尙州邑)과 함창(咸昌), 화령(化寧)의 3개소(個所)에 청년회(靑年會)가 결성(結成)되어 있었다.

경북도(慶北道) 당국(當局)에서는 도내(道內)의 각(各) 청년회를 지도(指導)하기 위해 1921년부터 매년(每年) 각 지방의 청년회장(靑年會長)을 불러 모아서 수일간(數日間)씩 교양 강습회(敎養講習會)를 개최했다. 마침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서 열린 제2회 강습회(講習會) 때 함창(咸昌)의 김한익(金漢翊) 씨와 화령(化寧)의 선생이 지명(指名)을 받고 나갔다.

강습회 마지막 5일 째 되는 날 참석(參席)한 사람들끼리 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민족주의(民族主義)를 겉으로 표방(標榜)하며 사회주의 단체(社會主義團體)를 만들려는 사회주의자들의 계책이었다.

선생은 그들이 의도한 회칙과 결성방법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반대의견을 분명히 했다.

“회칙(會則)에는 30세 이상 자는 청년회 회원 자격을 제한(制限)한다는 조항(條項)과 각 청년회의 규약(規約)을 동일(同一)하게 통일(統一)하여 이번에 새로 결성(結成)되는 모임의 산하(傘下)에 예속(隸屬)시킨다는 조항(條項)이 있었다.

그 두 가지 점(點)에 대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의 토론(討論)이 시작되었다.

나는 각 청년회의 규약을 통일한다는 점에 의혹(疑惑)이 갔다. ‘어떤 내용(內容)으로 통일을 한다는 말인가?’ 나는 미심(未審)쩍게 여긴 나머지 일어서서 ‘규약 통일안(規約統一案)을 제시(提示)하라, 맹목적(盲目的)으로 규약 통일을 한다는 것은 절대(絶對) 승복(承服)할 수가 없다. 적어도 상주(尙州) 화령청년회(化寧靑年會)만은 그런 불투명(不透明)한 조직(組織)에 가담(加擔)하는 것을 나 혼자서 결정(決定) 할 수가 없다’라는 발언(發言)을 했다.”

이 발언으로 회의가 무산되자 회의 무산의 책임이 선생 때문이라고 한 청년에게 폭행을 당할 뻔했다.

“그날 저녁 그 청년은 내가 묵고 있는 여관(旅館)에 술 한 병을 사들고 찾아와서 자기의 무례(無禮)한 짓을 사과(謝過)했다. 그리고 자기는 의성(義城)이 고향(故鄕)이고 명치대학(明治大學)에 재학 중이며 지삼달 씨는 자기가 존경하는 학교 선배(先輩)라고 하면서 사회주의(社會主義) 운동(運動)만이 조선(朝鮮)을 일제(日帝)의 식민지(植民地)에서 구(救)할 수 있다는 일장(一場)의 열변(熱辯)을 토(吐)했다.”

그들의 정체를 선생은 이미 간파(看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1922년부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표방(標榜)하는 사회주의(社會主義) 운동이 젊은 지식층(知識層)의 호응(呼應)을 받아 전국적(全國的)으로 맹렬(猛烈)히 확산(擴散)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유학생(留學生)의 7할(割)이 사회주의(社會主義) 동조자(同調者)였고, 그 중 절반(折半) 정도는 맹신자(盲信者)가 되어 그 선전(宣傳)의 전위(前衛)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강습회(講習會) 이후도 몇 차례 여러 사람으로부터 가맹(加盟)의 권고(勸告)를 받았으나 끝내 동의(同意)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선생은 몇 년이 지난 1927년 정묘년(丁卯年) 3월에는 자진(自進)하여 신간회(新幹會) 상주지회(尙州支會)의 회원이 되었다.

“신간회(新幹會)는 ‘우리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정치적(政治的), 경제적(經濟的) 해방(解放)의 실현(實現)을 기(諆)한다’, ‘전(全) 민족(民族)의 현실적(現實的) 공동이익(共同利益)을 위하여 투쟁(鬪爭)한다’는 정강정책(政綱政策)을 밝혔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민족주의(民族主義)에 공명(共鳴)해서 회원(會員)으로 가입(加入)했던 것이다.”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 민주주의 교육의 필요성 강조

선생은 광복 이후 사회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혼란이 극심할 때 민주주의 정신의 교육이 필요함을 확신한 분이었다.

그 이유를 앞으로 세워질 이 나라의 국체는 민주정부임에 틀림이 없다고 예견(豫見)하고 있었다.

“아직 국체(國體)가 확정(確定)되지 못하고 우리의 정부(政府)도 수립(樹立)되지 않은 상태(狀態)에서 교육(敎育)의 민주화(民主化)를 부르짖는 것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구(未久)에 세워질 우리 정부(政府)는 민주정부(民主政府)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니까. 지금의 시점(時點)에서도 정치가(政治家)는 민주주의(民主主義) 구현(具現)을 위해, 사업가(事業家)는 민주적(民主的) 산업(産業)을 위해, 교육자(敎育者)는 민주주의(民主主義)에 입각(立脚)한 교육(敎育)을 위해, 연구(硏究)와 노력(努力)을 기울여야 한다.”

선생은 민주 정부와 민주교육의 필요성은 국치의 수모를 겪은 까닭이 왕조시대 교육을 받을 권리의 불평등에서 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옛 왕조시대(王朝時代) 특히 조선 조(朝鮮朝) 시대(時代)의 교육(敎育)의 장(場)은 서당(書堂), 서원(書院), 향교(鄕校), 성균관(成均館) 등이었다. 그리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돈과 권려(權力)이 있는 소위(所謂) 양반 계급(兩班階級)과 일부(一部) 중인 계급(中人階級)에 제한(制限)되어 있었다. 또 교육과정(敎育課程)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바탕으로 한 성리학(性理學) 뿐이었다.

그런데 유교(儒敎)는 효(孝)를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으로 지나치게 강조(强調)했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자들이 이기(利己) 이가(利家)를 우선(于先)하고, 사회(社會)나 국가(國家)를 2차적(二次的)으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경시(輕視)하는 폐해(弊害)가 있었다.

그 폐해(弊害)가 결국(結局)은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자초(自招)하였으며, 다시 일제(日帝) 하(下)에서는 모든 교육(敎育)이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의 수행(遂行)에 귀결(歸結)되어 왔다.

그런 후진적(後進的)이고 모순(矛盾)된 과거(過去)의 교육 잔사(敎育殘渣)는 이제 티끌하나 남기지 않도록 깨끗이 털어버리고, 모름지기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 교육(敎育)을 시행(施行)해야 한다.”

아울러 민주교육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전국(全國)의 각(各) 면(面)에 최소한(最小限) 1개의 중학교(中學校)가 있음직하고, 큰 군(郡)일 경우에는 전문학교(專門學校)나 대학(大學)이 하나쯤 있는 것이 바람직한 민주국가(民主國家)의 교육정책(敎育政策)이며 가장 효과적(效果的)인 방법(方法)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6. 탁월한 웅변가

화동의 교육과 잘 사는 화동을 만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선생은 대부분의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정에는 소홀했던 부분이 없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희생하고 노력한 대가가 온전히 큰 기쁨으로 안겨오지도 않았다. 그 실망과 허무함이 얼마나 컸을까?

선생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자양학원을 위해 10년의 노력이 인가조차 받지 못하고 문을 닫는 경험이 그랬고, 화동중학교 설립을 위해 또 헌신했지만 고등공민학교 인가로만 그치는 아픔도 맛보았다.

잘 사는 화동을 만들기 위해 의식개혁으로부터 시작하여 공동작업, 공동판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찾았으나 정작 선생에게 돌아 온 것은 원망과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멍에로 짊어지고 고향을 떠나는 삶을 살기도 했다.

오광자소의 마지막인 ‘오광’은 이러한 선생의 아픔과 좌절을 딛고 다시 한 번 일어 서려는 선생의 웅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오광의 내용은 화동중학(化東中學) 건립(建立) 발기인(發起人) 제위(諸位)에게, 화동면(化東面)공무원(公務員) 제위(諸位)에게, 의연자(義捐者) 제위(諸位)에게 보내는 호소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첫째, 화동중학 건립 발기인들에게 드리는 글에서는 모두 열 번씩이나 물음표를 던지면서 초심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이 일을 이루어 보자는 호소를 하고 있다.

물음표는 결국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이러한 ‘되물음’의 방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그날 여러분과 나, 어른과 아이, 육체(肉體) 노동자(勞動者)와 정신(精神) 노동자(勞動者), 문맹자(文盲者)와 식자(識者)가 똑같이 만세(萬歲)를 부르고 손에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모임에 앞장섰던 우리 모두가 화동중학교(化東中學) 건립(建立)의 발기인(發起人)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있는 힘을 다 합하여 ‘내 고향(故鄕) 발전(發展)을 도모(圖謀)합시다. 우리들의 부조(父祖)가 못하신 영광(榮光)된 향토 건설(鄕土建設)을 우리 세대(世代)에 기필(期必)코 실행(實行)합시다.’ 하고 뜻을 모아 화동중학교설립기성회(化東中學設立期成會)를 발족(發足)시키지 않았습니까?

1945년 을유년(乙酉年) 9월 15일, 관제(官堤)의 김진만(金眞萬) 씨 댁(宅)에서의 자양학원(紫陽學院) 강학계총회(講學契總會)에 이어 결성(結成)한 화동중학교걸립발기인회(化東中學設立發起人)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습니까?

이어서 그해 10월 20일, 화동국민학교(化東國民學校)에서 개최(開催)한 화동중학교(化東中學校) 기성회(期成會)는 얼마나 화기애애(和氣靄靄)하였습니까?

중등교육(中等敎育)을 받고 싶으나 가세(家勢)가 허락(許諾)하지 않아 도회지(都會地)에만 있는 중학교(中學校)를 가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 향토(鄕土)의 어린 새싹들을 위하여, 또 우리 향토(鄕土)의 내일의 장한 파수(把守)꾼이 될 다음 세대(世代)를 위해, 그들의 중등교육(中等敎育)은 우리 힘으로 이수(履修)시키자고 서로가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

-“화동중학(化東中學) 건립(建立) 발기인(發起人) 제위(諸位)에게” 중에서

둘째, ‘화동면(化東面)공무원(公務員) 제위(諸位)에게’는 역시 화동중학교 설립의 배경과 경위, 그 동안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하루 속히 정식 인가가 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간곡함이 염원으로 나타나 있고, 이어 화동국민학교 선생님들에게까지 화동중학교가 지역교육의 요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곡함을 피력하고 있다.

“이미 일부나마 교사(校舍)도 건립(建立)되었고 학생 다수(多數)를 확보(確保)한데다 그 학생(學生)들 가운데서는 보다 발전적(發展的)인 진출(進出)까지 한 실적을 올렸습니다. 타면(他面)에서는 아직 볼 수 없는 우리 면(面)의 선각(先覺)이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이제 여러분께서 조금만 더 보호(保護) 육성(育成)의 따뜻한 손길을 뻗어 주시면 미구(未久)에 훌륭한 중학교(中學校)로 굳혀 질 것이 확실시(確實視)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近者)에 와서 여러분께서는 화동중학(化東中學)을 대안지화(對岸之火)처럼 보시는 듯이 느껴집니다. 옛말에 선즉제인(先則制人)이요 후즉위인소제(後則爲人所制)라 했습니다. 인근(隣近) 면(面)에 앞서서 장(壯)하게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린 우리 화동중학(化東中學)이 인근 고을에 빛을 발하도록 여러분께서 끝까지 지도편달(指導鞭撻)이 계셔야 마땅합니다.”

-“화동면(化東面)공무원(公務員) 제위(諸位)에게” 중에서

마지막으로 ‘의연자(義捐者) 제위(諸位)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자 모든 것을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심기일전(心機一轉)하자는 호소였다.

7. 글을 맺으며

끝으로 선생이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결사(結辭)에 나타난 글을 여기에 옮기면서 이글을 맺고자 한다.

“나는 매사(每事)에 실행(實行)을 앞세우고 살아왔다. 스스로 실천궁행(實踐躬行)했을 뿐 아니라 학업(學業)이든 처신(處身)이든 기회(機會) 있을 때마다 남에게도 실행(實行) 할 것을 권고(勸告)해 왔다.

보다 부연(敷衍)하면 나는 자로(子路)를 좋아하여 그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따르려고 한 것이다. 논어(論語) 공치장(公治長) 편(篇)에 보면

“자로유문(子路有聞), 미지능행(未之能行), 유공유문(唯恐有聞)”

하는 구절(句節)이 나온다. 우리말로 쉽게 풀이하면

“자로는 무엇이든 한 가지를 배우면 그것을 이내 실행(實行)에 옮기려 했다. 실행(實行)을 하지 못했을 때는 다른 가르침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라는 뜻이 된다. 나는 한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섯 차례 사업(事業)을 벌이면서 여섯 번 집을 지었다. 그러면서 여섯 번 모두 스스로 만족(滿足)할만한 성과(成果)를 얻지 못하고, 종내(終乃)는 반도면폐(半途面廢)의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자로(子路)의 행동적(行動的) 성품(性品)과 결단성(決斷性)을 존숭(尊崇)하여 따르고자 했으나, 자로(子路)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벼슬한 것처럼 관도(官途)에 나설 생각은 애시 당초부터 가지지 않았었다.

나는 끝까지 내 스스로 지향(志向)하는 바를 개척(開拓)하기 위해 실행(實行)하였지 관(官)이나 어떤 공공기관(公共機關)이 기설(旣設)한 길에 편승(便乘)하여 안주(安住)나 안형(安亨)을 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가 그것을 그릇된 편파(偏頗)고 아집(我執)이라 해도 좋다. 나는 그 편집광(偏執狂)이 삶의 전부(全部)였다. 한 번 미쳐보기 시작하여 다섯 번을 미쳐 보았다. 그리고 다섯 번 모두 유종(有終)의 미(美)라는 점에 도달(到達)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사연(事緣)으로 해서 나는 스스로『오광(五狂』이란 자호(自號)를 만족(滿足)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용문(冗文)이나마 그것을 자소(自疏)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