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1권(금요시민강좌)

상주문화의 자랑인 공검지恭儉池

빛마당 2014. 2. 24. 17:02

상주문화의 자랑인 공검지恭儉池

김 철 수 전) 국립상주대학교 제2대 총장

  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 상주문화원장


상주문화의 자랑인 공검지恭儉池

상주문화원장 김 철 수

<目 次>

Ⅰ. 개황 설명

Ⅱ. 공검지의 변천

1. 공검지의 축조연대

2. 1차 훼손

3. 2차 훼손

4. 복원사업

Ⅲ. 삼한시대의 저수지

Ⅳ. 공검지의 규모規模

1. 공검지의 둑 길이堤長

2. 공검지의 못 둘레

3. 공검지의 수심水深

4. 공검지의 관개면적

Ⅴ. 공검지의 문화유산文化遺産

1. 채연요採蓮謠

2. 공검지의 전설傳說

3. 공검지가 남긴 한시漢詩

Ⅵ. 맺는 말

Ⅰ. 개황 설명

우리 한민족은 역사기록 이전부터 쌀농사와 함께 정착하여 아시아 몬순지대의 공동체 문화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농사 중에서도 특히 쌀농사는 물이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후는 6-7월에 비가 많은 반면에 그 외의 계절에는 건조합니다. 따라서 쌀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6-7월에 내린 비를 가두어 두는 수리사업이 꼭 필요합니다.

특히 상주는 넓은 평야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삼한시대 이전부터 쌀농사의 적지로 주목을 받았고 그래서 다른 지방에 비해서 수리시설을 많이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된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총 3,695개의 저수지가 축조 되었는데, 이 중에서 168개가 폐언廢堰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 그 당시 전국의 저수지는 3,527개였습니다. 이 중에서 경상도慶尙道의 제언堤堰은 1,765개의 저수지가 있었고, 99개가 폐언廢堰 되었기 때문에 실제 저수지는 1,339개 였습니다. 따라서 경상도의 제언이 전국 제언의 절반을 차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상산지>, <경상도읍지>, <세종실록지리지>, <만기요람> 등에서 상주지방의 제언을 확인해 본 결과, 조선시대에 상주에는 총 42개의 저수지가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저수지가 공검지였습니다.

Ⅱ. 공검지의 변천

1. 공검지의 축조연대

공검지 축조연대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한시대三韓時代’다. 또는 신채호申采浩 같은 분 은 ‘가야시대’다. 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합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조선 전기의 문신인 허백당 홍귀달洪貴達이 <명삼정기名三亭記>에서 밝혔듯이 “방죽을 처음 쌓은 것이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다(始坡之不知何時)”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주목尙州牧에 큰 못이 있으니 이름을 공검恭儉이라 합니다. 명종明宗 25년(1195년)에 사록司祿 최정빈崔正份이 옛터를 따라 제방을 쌓았다.” 라는「고려사高麗史I」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 기록은 공검지 개축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2009년 5월 10일. 공검지 복원공사 도중에 옛 공검지의 수문으로 추정되는 나무 부재 14점이 발굴되었습니다. 출토된 이 목재가 수문이나 수통 부재라면 이들을 통해서 공검지 축조연대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상주시가 전문기관에 방사성 탄소연대를 의뢰한 결과, AD 655~695년대의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공검지가 언제 축조되었는가에 대한 추정치가 아닌 실측치가 나온 이상 이를 축조연대로 고정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2. 1차 훼손

이렇듯, 1500여년 전에 축조되어서 400여년 동안 상주 사벌평야의 젖줄 노릇을 했던 공검지가 첫 번째 훼손을 당한 것이 1896년입니다. 이 때 한성부윤을 지낸 총신寵臣 이채연李采淵이 논을 만들기 위해 공검지의 못둑을 헐어버리는 바람에 광활한 수면을 자랑했던 공검지는 5만7천평으로 줄게 되었습니다.

3. 2차 훼손

또한 1959년에는 공검수리조합이 이 공검지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오태저수지五台貯水池를 기공하여 1959년 12월 31일에 완공하였스습다. 따라서 이때부터 공검지는 저수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민들이 공검지의 못 터를 경작지로 불하받는 바람에 1964년에는 2,703평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공검지가 겪은 두 번째 훼손입니다.

이렇게 되자, 공검지는 옛날의 거대한 수면도 사라지고 만발하던 연꽃과 시인묵객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4. 복원사업

주민들이 19903년 ‘공갈못 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김강식)를 구성하고 공검지의 복원사업에 착수해서 우여곡절 끝에 현재 37,688평을 확보해서 공검지 1차 복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Ⅲ. 삼한시대의 저수지

삼한시대 축조된 저수지로서는 김제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를 꼽기도 하고 밀양 수산제의 축조시기에 이견이 있기 때문에 김제 벽골제, 상주 공검지, 제천 의림지를 삼한시대의 3대 저수지로 꼽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주 공검지는 3대 저수지 반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습니다. 무슨 기준에 의해서 이렇게 되는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벽골제와 수산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먼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벽골제의 길이가 60,843尺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환산하면 약 3.5km가 됩니다.

저수지 축조에는 제당길이가 짧아야 비용과 노력이 적게 들기 때문에 위치선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양안兩岸이 상박相迫한 곳”이어야 한다고 했고, 지금도 이점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소양강댐의 길이가 530m에 불과 합니다. 따라서 벽골제의 뚝 길이라 3.5km라 하는 것은 당시의 국가재정이나 토목기술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벽골제는 순수한 의미의 저수지가 아니고 서해의 바닷물이 김제평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조제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또한 밀양의 수산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산제가 있었던 곳은 낙동강의 범람원보다 낮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저수기능 보다는 이 지역의 연례적인 침수를 막는 방수언제防水堰堤의 역할이 주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정리하면 삼한시대의 가장 오래된 저수지 반열에서 공검지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Ⅳ. 공검지의 규모規模

세종 7년(1425)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를 보면, “상주에는 큰 제언이 둘 있는데 주의 북쪽에 있는 공검지는 함창현 땅에 있으나 상주목尙州牧에서 축조한 바요, 그 다음이 굴사제掘史堤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전기의 문신인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이 쓴 <명삼정기名三亭記>에서는 “못이 많기로는 대개 남방이 가장 성한데 그 크기로는 공검恭儉과 견줄만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남방南方의 못 가운데에서는 최대다.”라는 기록이 있고, 조선 초기의 문신인 다인 정희량鄭希良은 그의 시 속에서 “남국南國의 산수로 뉘 이 못과 자웅을 겨루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과해寡諧 강필공姜必恭의 시 속에는 “남국에서는 이 못이 가장 장하다.”고 했고 식산 이만부의 증손인 임하林河 이경유李敬儒의 시에는 “서남쪽 십리 크기의 만경창파다.”라는 글들이 있습니다.

문인들의 눈에 비친 공검지의 규모는 그 당시의 저수지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문헌에 나타난 공검지의 규모를 파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공검지의 둑 길이堤長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年刊)」,「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年刊)」,「상산지商山誌(蒼石本, 1617年刊)」,「대동지지大東地志(1862年刊)」,「함창군읍지咸昌郡邑誌(1899年刊)」에는 공검지의 둑 길이가 ‘8백 60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자료를 환산하면 그 당시 공검지의 둑 길이는 430m였다고 봅니다.

2. 공검지의 못 둘레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년)」에는 공검지의 못 둘레가 ‘22리’로 기록되어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年)」,「상산지商山誌(蒼石本, 1617年)」,「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1萬6千6百47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을 환산해 보았더니, 공검지의 못 둘레는 약 8.56km이었습니다.

실제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콩 한 되를 볶아서 넣고 공검지를 돌면 그 콩을 다 먹을 시점에 처음자리에 도달한다고 했습니다.

3. 공검지의 수심水深

공검지의 수심水深에 대해서는「함창군읍지咸昌郡邑誌」와「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즉「함창군읍지咸昌郡邑誌」에는 ‘물이 만수滿水일 때 4.5장으로 기록되어 있고,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10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역시 포백척布帛尺으로 환산해 보니 5.6m 였습니다.

이렇게 환산한 수심이 맞는가를 검증하기 위해서, 현 1/5000지도 상에서 공검지가 있는 곳의 평균 표고 64m에다가 수심 5.6m를 합한 69.6m에 해당하는 등고선을 따라 공검지의 수면을 그려 본 결과 환산한 공검지의 둘레와 비슷하였습니다. 따라서 공검지의 둘레와 수심에 대한 환산은 정확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4. 공검지의 관개면적

공검지를 비롯한 상주지방의 저수지들이 관개한 농경지 면적을 자세히 기록한 문헌이「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입니다. 이 책의 <상주도 상주목조尙州道 尙州牧條>를 보면 “무지산 밑 마을(현재의 양정리)에 있는 공검지는 관개면적이 268결 40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세종世宗12년에 개정된 량전척量田尺으로 환산해 보니

2,650,101m2(257.2 정보)이었습니다.

그런데「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기록된 저수지의 평균 관개면적이 ‘26결’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공검지의 관개면적이 ‘268결 40부’라는 것은 공검지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Ⅴ. 공검지의 문화유산文化遺産

공검지恭儉池가 정말로 보배스러운 것은 단순히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기능 외에 민요民謠와 전설傳說과 한시漢詩가 한데 어울려서 독특한 호수문화湖水文化를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1. 채연요採蓮謠

삼한시대三韓時代의 3대 저수지 중에서 민요가 탄생한 곳은 상주 공검지가 유일합니다.

광활한 공갈못을 배경으로 태어난 이 「채연요採蓮謠」는 일명 ‘연밥따는 노래’라고도 하는데 지금까지 상주지방의 대표적인 민요로 전국의 국악인들이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이 「채연요採蓮謠」는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처녀야 연밥줄밥 내따주께/ 이내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가오”

로 이어지는 문답체 형식이고, 연정戀情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남녀간의 애정을 솔직히 표출하지 못했던 시대에 상주향민鄕民들은 이 채연가를 통해서 순수한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여서 문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채연요採蓮謠」는 상주뿐만이 아니라 영남의 대표적인 민요이고, 동부민요권의 대표 민요로 전국에서 애창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검지라는 거대한 호수 속에 연꽃이 만발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연밥따는 노래’가 탄생한 것은 김제의 벽골제에도 없고, 밀양의 수산제에도 없고, 제천의 의림지에도 없는 보배로운 문화유산이며, 상주의 자랑거리라고 봅니다.

2. 공검지의 전설傳說

벽골제에는 ‘단야의 전설’이 있습니다. 태수의 딸 단아가 벽골제 공사에 훼방을 놓는 청룡의 재물이 되는 덕분에 벽골제를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제천의 의림지 역시 신라의 악성 ‘우륵이 의림지를 쌓았다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두 저수지가 전설 하나씩을 품고 있는데 비해서 상주 공검지는 10여개의 전설을 안고 있습니다.

못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성된 ‘매아설화埋兒說話’와 ‘인주설화人柱說話’가 있고, 물을 다스리고 관장한다는 ‘용’에 얽힌 사랑싸움 인 쌍룡연투설화雙龍戀鬪說話, 농사일과 관련해서 생겨난 ‘용갈이 설화(龍耕說話)’와 ‘소갈이 설화(牛耕說話)’를 비롯하여, 공갈못의 규모와 지형에 얽힌 ‘지형설화地形說話’, ‘용을 잡은 이여송李如松의 설화, 공검지의 경관에 얽힌 설화, 공검지의 흥쇠와 관련된 각종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공검지의 전설은 설화가 가지고 있는 문학성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상주사람의 삶 자체가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며, 한 시대를 살아온 민중들의 의식과 생활감정이 혼융되어 포괄적으로 나타나 있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3. 공검지가 남긴 한시漢詩

김제의 벽골제나 제천의 의림지 그리고 밀양의 수산제에는 이들 저수지를 내용으로 한 시 작품이 한 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상주의 공검지는 공검지를 배경으로 한 시인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다른 지방의 저수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초最初의 호수문학湖水文學의 산실이 공검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공검지가 남긴 한시문漢詩文은 지금까지 60여편에 달하고 이들 시문을 남긴 작가는 23명으로, 모두가 당대에서 이름을 떨친 문필가들이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홍귀달洪貴達ㆍ정희양鄭希良ㆍ박상朴祥ㆍ이행李荇 같은 분들은 「동문선」에 오른 문장가들이며, 채소권蔡紹權은 비록 「동문선」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당대에 문명文名이 조야朝野에 알려진 사람이다.

또한 조선 중기의 이황李滉ㆍ권문해權文海ㆍ류성룡柳成龍ㆍ조찬한趙纘韓과 같은 분들이 문학사에 당당하게 거론되는 시인들이며, 강세언姜世○ㆍ정상관鄭象觀은 당대 영남사문장嶺南四文章의 한분들이요, 고성겸高聖謙ㆍ황난선黃蘭善 등도 조선 말기 영남에선 문명文名을 얻은 시인들입니다.

따라서 공검지를 배경으로 이분들이 남긴 시문詩文은 공검지가 낳은 귀중한 문학유산으로서 질적인 면에서도 전국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Ⅵ. 맺는 말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공검지는 풍부한 수자원으로 넓은 상주 들녘의 젖줄 역할을 하여 상주가 신라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도 전국 8목 중의 하나로 큰 고을을 형성하였으며, 경주와 함께 경상도라는 지명을 창출할 정도로 역사가 깊은 고을 입니다.

또한 공검지는 농업용수의 공급뿐 아니라 ‘채연요’ 같은 민요를 탄생시켰고 수많은 시문학이 꽃피워서 ‘호수문화’라는 독특한 세계를 열었던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그 동안 많은 시민들이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복원하고자 했으나, 정부의 관심밖에 있어서 소규모의 복원에 기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공검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논습지(濕地)’로 지정을 받았고 이어서 국제적인 람사르의 지정을 받고자 하는 활동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검지의 복원과 함께 역사관 유물관 등이 자리 잡을 것으로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복원사업에 대해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옛 공검지에는 화동리에 ‘화동나루’가 있었고, 율곡리에는 ‘법구나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수滿水가 되면 공검지 서남쪽은 물길이 수십 가락이 있어서 이 아름다운 풍광風光 속에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호수문화를 창출했으나 이런 모습들은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복원이란 옛 모습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본적인 구상이 이곳 공검지에는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또한 현재 공검지는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호수문화湖水文化」가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에 마땅히 국가 지정문화재로 그 격을 높여야 합니다.



공검지 담수 예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