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인尙州人의 자존심自尊心 - 상주의 역사 ․ 문화 원류 고찰 - |
권 태 을 전)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장 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현)상주문화원 고문 |
<目 次> | ||
Ⅰ. 머리말 - 고도古都․웅주雄州의 상주 Ⅱ. 상주의 땅地利 - 삼재三才의 중심이 땅 1. 산수山水의 명승지 Ⅲ. 읍성국가 시대 1. 사벌국․고령가야국 (사적 생략) 2. 관련 문헌 자료 Ⅳ. 신라시대 1. 충절향忠節鄕의 원류源流 2. 충절향忠節鄕의 명예 전승 3. 불교문화의 선진 4. 유교문화의 선진 Ⅴ. 고려 시대 1. 상주 위상 2. 학술 3. 교육 Ⅵ. 조선 시대 1. 상주 위상 2. 학자 3. 교육자 4. 예술인 Ⅶ. 맺는말 |
Ⅰ. 머리말 - 고도古都 ․ 웅주雄州의 상주
상주는 읍성국가(사벌국․고령가야국) 시대부터 형성된 역사․문화의 고도요 웅주로, 신라의 역사․문화와 그 맥을 같이 해 왔다. 이 맥의 원류(근원)를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상주인의 자존심 회복은 물론 상주다운 상주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이는, 진실로 ‘내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내 것’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본 고는, 상주인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제언으로서 상주의 역사․문화의 원류 몇 가지를 재삼 성찰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상주의 상주다운 미래는 상주인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그 자존심을 살리는데서 밝게 열릴 것으로 믿는다. 아울러, 향토를 위한 모든 활동은 상주와 더불어 공생하려는 마음자세를 지녀야 함을 첨기한다.
Ⅱ. 상주의 땅地利 - 삼재三才의 중심이 땅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 孟子 公孫丑上)
◦人和는 사람끼리의 和合, 天․地와의 調和
◦삼백三白의 땅(생성의 땅), 교통의 요충지, 삼국의 왕(사벌국․고령가야국․후백제의 왕) 배출, 商山洛水鄕(명승지, 선비고을․유학의 고장)
1. 산수山水의 명승지
1) 왕산王山
왕산은 일명 장원봉壯元峰이라고도 하며, 상산 읍기邑基의 주산主山이다. 상산 삼악의 핵核(알)이요, 남천 북천을 통하여 낙강으로 탯줄을 놓았다.
산을 왕산王山이라 한 것은, 상주 중앙의 흙(土)에 해당하므로 토土는 오상五常(仁, 義, 禮, 智, 信)의 신信에 해당하고, 존비는 차례로는 임금(王)의 자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金岳柱, 王山記) 상주의 치소治所가 이 산 밑으로 옮긴 이래로 상주의 명산이 되었다. 상주에 장원이 연달아 태어남(임진란 전)을 왕산의 지령地靈 덕이라 믿었다.(창석본, 상산지)
※ 왕산王山(복원 운동 전말)
문제제기 : 창석 이준(1560 ~ 1635)의 ≪상산지≫(1617) <山川>조에서, 임진란(1592)에 왜적이 산정을 뭉개고 층루層樓를 지은 뒤로 지령地靈이 수치스럽고 욕스러워 장원(人材)이 나지 않는다. 지기地氣가 다시 깨끗해 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
복원 청원 : 쌍수당 김삼락(1610~1666)은 임란 북천전 순국의사 김순신의 손자로 문과 목사에 이름. 임란 60주기가 되는 1652년(효종 3)에 상주목사(장우한)에게 왕산정문王山呈文을 올림. 허락되지 않음.
“이제 60년이 지나, 나라도 이미 태평하고 백성도 이미 편안합니다. 동토東土를 에워싼 수천리 산하에는 절로 왜침의 흔적이 없는데도 유독 한 웅큼의 흙(왕산)만이 아직도 난리 중의 흔적을 띠고 있으니, 고을 백성의 슬픔만이 아니라 길손도 또한 흥감함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합하께서 하락만 내려 주신다면 민民 등이 몸소 흙과 돌을 지고 달려감을 사양치 않겠습니다.”
(쌍수당집, 왕산정문. 졸고, <王山文學考>, ≪상주문학≫(10호) 1998. 참조)
※ 복원은, 역사․문화적 의미를 살려 원형에 가깝도록.
2) 백화산白華山
(1)상주 상대上代상산商山(순화연간 990~994 별호제정)의 진산鎭山임. (청대본, 상산지(1749), 9.고적․정관亭觀)
(2)신라 삼국통일 첫 지휘 본부, 태종무열왕이 660년 6월 말에서 7월 29일까지 이 산에 주둔하여 백제 정벌을 총괄 지휘함.(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
(3)항몽 대승첩지. 1254년(고종41) 10월 19일, 황령사의 중 홍지洪之가 상주성(백화산성)에서 민관병으로 몽고 차라대 대군을 격파함.(삼국사절요)
(4)임란 상의군尙義軍 결진지. 1592년 가을, 김각(의병장)․송량․이전․이준 등이 고모담에 모여 재결집함(이준연보 및 석천 창의사실)
3) 상산삼악商山三嶽
(1) 천봉산天峰山(石嶽)
상주읍 진산, 성황사 및 영암각靈巖閣 소재, 영암靈巖은 생산의 근원이요 모태가 되는 ‘알’ 숭배사상의 표상. ‘알바위’는 영암 외에도 윤직리 알바위, 중모 앞들의 알바위(새마을사업으로 제거), 천봉산 산정에 망월암望月庵이 있어 알바위와 연관됨.
※ 민속문화民俗文化의 보고寶庫
(2) 노음산露蔭山(露嶽)
상주 서편의 진산. 830년 이전부터 이 산에는 상주 4장사四長寺의 하나인 남장사와 북장사가 있었음.
830년, 당나라 유학승 진감국사 혜소가 귀국하여 이 산의 장백사(남장사 전신)에 주석, 한국 최초로 범패(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를 보급함. ※ 민요의 고장에 크게 영향을 미침.
보광전 철조비로나자불(보물990호), 비로자나불 후불목각탱(보물 992호), 관음선원 목각탱(보물 993호, 1690년 조성으로 한국 목각탱의 最古作), 석장승(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33호), 북장사 영산회괘불탱(보물 1278호), 북장사 3층석탑(문화재자료 238호, 인평동 폐탑 이건), 명부전 현액 식산 이만부의 글씨.
※ 불교문화의 보고(불교 음악․조각)
(3) 갑장산甲長山(淵嶽)
상주의 안산案山, 상주 4장사의 승장사(廢寺)와 갑장사가 있음.
산의 정상에 소도․구룡연九龍淵(기우제터)이 있음. 구룡에 문필봉文筆峰이 있어 상주 동남방이 장원향(김범․김우굉․조휘․하락․조익․김광준)으로 불림.
갑장산甲長山 이름 ; 고려 충열왕(재위 1275 ~ 1308)이 승장사에 머물며 조령 밑의 으뜸 산이란 뜻으로 ‘甲長’이라 하였다 함. <조목수, 次甲長庵韻詩>
갑장사․사인암․나옹암․용흥사․연악서재․용담사(폐사) 등의 명소에서는 학자와 문인들의 공부․작품 활동이 이어졌음. 1172년경 9월 9일, 서하 임춘의 <용흥사시>, 1196년 백운 이규보의 <용담사시>, 세종조 김상직(1405년 문과급제)이 <승장사지>를 씀, 1622년 5월 25일부터 닷새 간 연악서재에서 이전․이준․정경세․조찬한(목사) 등 15인이 문회를 갖고 <연악문회록>를 남김, 1779년 시승詩僧 연파대사(갑장사주지)와 상주 선비 이승연․조석철 등 60여명이 향화사香火社 유풍을 본떠 《갑장승유록》(실전)을 남김. 서하 임춘 이래 1800년초 정상관(1776~1820)의 시회까지 총 21회의 대소 시회가 있었음(졸고,《갑장산》, 상주문화원, 1996년 참조)
※ 학문․문학의 산실
(4) 낙동강洛東江
영남 생성의 젖줄, 교통의 수로, 상락上洛으로 인한 낙동강이란 자부심, 상산商山(선비의 고장)과 더불어 낙수洛水(유학의 근원)에 대한 긍지를 상주인에게 살려 준 강.
Ⅲ. 읍성국가 시대
1. 사벌국 ․ 고령가야국 (사적 생략)
2. 관련 문헌 자료
사료史料 : 《삼국사기》,《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상산지》,《함창지》 등.
연구보고서 : 《고대사벌국관련지표조사보고사》(상주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권태을, 1996),《상주청리유적》(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8),《상주병성동․헌신동 고분군》(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4), 《상주신상리구석기유적유물산포지》(영남문화재연구원, 2003),《상주복룡동256번지유적》(영남문화재연구원, 2008) 등.
※ 상주의 역사 연구 과제 중 가장 절실한 과제
Ⅳ. 신라시대
통일신라 이전에는 신라 3대 도시<慶州․上州(상주)․하주(창녕)>의 하나.(삼국사기권34, 지리) 신라 6정六停(1정은 군단 규모) 중 두 번째로 상주정 설치(525년).(《상주함창목민관》, 1997, 조희열, 군사분야 참조). 신라 지리조에 경주 다음 상주(삼국사기 권34, 지志 제1, 지리1)
통일신라 이수. 757년(경덕왕 16) 상주尙州로 개칭함, 1주 10군 30현 관할(10郡 ; 예천, 고창(안동), 문소(의성), 숭성9선산) 개령, 영동, 관성(옥천), 삼년(보은), 고령(함창), 화령군)
1. 충절향忠節鄕의 원류源流
1) 화랑정신 보급
김유신(6445년 상주장군, 647년 상주행군대총관), 용화도龍華徒와 화북 용화동의 전설
품일(661~668년) 상주총관, 화랑 관창(660년 순국․16세)의 아버지.
“우리 아들이 면목이 살아있을 때와 다름이 없다. 나랏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다행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 660년)
죽지랑竹旨郞(661년 귀당총관), 죽만랑竹曼郞의 낭도 득오得烏가 죽지랑의 신의와 우의를 찬양하는 <慕竹旨郞歌>(삼국유사권2, 기이2)를 지음
※ 향가 전파
※ 원광법사 세속5계 널리 보급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
※ 충절향忠節鄕의 원류(根源)가 됨.
2) 문무겸전의 인물 배출(고려·조선)
박원작(덕종․정종조 1032~1046), 문신 상사붕어, 1040년(정종 6) 서면병마도감사로 <수질구궁노繡質九弓弩․천균노千鈞弩>를 최초로 만들어 실전 배치함.(고려사절요 立傅)
김득배 삼형제 홍건적 퇴치의 3원수. 김득배(1312~1362) 문과 정당문학, 서북면도병마사로 수훈. 김득제(1315~?) 문과장원 대장군으로 수훈. 김선치(1318~1398) 17세 판관, 삭방도도순무사로 수훈.(고려사절요 立傅)
홍귀달(1438~1504) 문과 대제학, 1466년, 장수감 30인 중에 선발되어 조선 최초로 문겸선전관文兼宣傳官이 됨.
1467년, 이시애난에 공훈, 7품에서 5품으로 특진. 1500년, 건의하여 최초로 비융사 설치, 지포紙布 대신 철갑옷 제조(연산군 일기․해동명신록)
김순고(1489~1574) 경학에 밝아 손자들 훈도, 무과 오위도총관, 전선에 철환 설치, 좌우에 바퀴 설치, 배의 전후에 대포 설치(조선 최초) (이제신․평양군 김공묘지명). 갓을 실용화시켜 ‘金舜皐體’가 생김
김각(1536~1610) 경학에 밝은 교육사(이전․이준 등 제자), 임란에 의려, 상의군尙義軍 대장, 수훈.(석천집, 창의사실)
이준(1560~1635) 문과 부제학, 임란 상의군 소모관으로 수훈, 정묘호란(1627․인조 5)에 전주 동조東朝(소헌세자 주둔)에 나아가 헌책하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군량미 모음에 대공, 종3품 보덕에서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折衷將軍에 특승特陞됨. (창석연보)
2. 충절향忠節鄕의 명예 전승 (신라 ․ 고려 ․ 조선)
1) 신라
(1) 889년(진성왕 3), 원종․애노의 반란에 관군조차 무저항일 때, 사벌 촌주 우연佑連이 역전 순국, 10세 된 아들에게 촌주 세습. (삼국사기)
(2) 935년(신라말), 궁중악사 염석천이 불사이군하여 백화산 구수천 임천석대에서 투신. (상산 탄금대; 이만부, <백화동대벽기>, 《식산속집》(권5). 창석본, 《상산지》에서는 고려 악사로 소개됨.
2) 고려
(1) 상주성(백화산성) 항몽대승첩
1254년(고종 41) 10월 19일, 황령사 석홍지釋洪之가 관민병을 이끌고 몽고 차라대 대군을 격파함. (삼국사절요)
(2) 상산절의商山節義 3절三絶
홍건적난의 충신 난계 김득배(1312~1362)가 김용의 모함에 원사하자 문하생 포은 정몽주(1337~1392)가 왕의 허락을 받아 시신을 거두고 만사輓詞와 제문(동문선 등재)을 지음. 포은이 선죽교에서 순결함에 그 제자 단구재 김후金後(1372~1404, 난계와 3종손, 뒤에 산청으로 이주)가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고 만시輓詩를 남김. (상산김씨전세적)
3) 조선
(1) 15세기 함창 중심 사림파 선비들의 절의節義
의리학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지닌 함창 출신의 많은 선비들이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고 선비의 도리를 다 하려다 목숨을 잃거나 유배되었다. 조선초 사림파 선비로서 의리에 살다 간 분이 한 지역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함창이 으뜸일 것이다.
남계 표연말(1431~1504)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이름.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무오사화에 순절함.
허백정 홍귀달(1438~1504)은 문과로 대제학에 이름, 문무겸전의 명신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갑자사화에 순절함에 아들 우암 홍언충(1473~1517)의 4형제들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다 모두 절도絶島로 유배됨.
동계 권달수(1469~1504)는 문과로 교리에 이름. 직언을 서슴지 않다 극형에 처했을때 도 동지들의 죄까지 다 자신에게 돌린 의리의 선비요, 부언 동래정씨도 남편이 갑자사화에 순절함에 자진하여 정려가 내린 열부임.
퇴재 김민수(1466~1517) 문과 대사헌, 난재 채수(1449~1515) 문과 참판, 이자견(1454~1529) 문과 관서, 이자견(1455~1524) 문과 좌참찬, 이자화(?~1520) 문과 참찬 등도 직언을 서슴지 않고 뜻을 굽히지 않다가 다 유배되었음.
※ 조선초 영남 사림파 형성의 진원지가 됨.
(2) 16세기 상주읍 중심 선비들의 효사상
낙지정 박언성(1511~1571) 진사, 효행으로 증사헌부감찰, 연악서원 봉안.
운정 김언건(1511~1570) 진사, 교육자, 효행으로 증사헌부 감찰. 연악서원 봉안. 운정의 모친 홍양이씨는 효열로 복호가 내리었고, 운정의 아들 석천 김각(1536~1610)은 성균진사로 임란 상의군 대장으로 충효를 다한 선비. 연악 서원 봉안. 전공으로 현감에 이름.
서재 김신(?~1592)은 무인으로 의병하여 순국함. 아들 김유성(효행․정려)․유명․유진․유휘 4형제가 아버지를 구하려다 동시에 순절함. ‘一家五忠孝’의 방명을 남김.
후계 김범(1512~1566) 진사장원. 명경행수로 천거된 징사徵士. 학행으로 옥과현감이 되었으나 순직, 명종이 사제문. 효행으로 정려가 내림. 옥성서원 봉안.
우곡 송량(1534~1618) 우계 성혼의 제자, 교육자. 효행으로 동명 소곡素谷이 효곡孝谷으로 바뀜. 임란에 창의, 부친(우곡)의 위급을 구하려다 아들 송이회와 이팔이 절사 하였고 딸 노경건의 처 송씨와 정이괄의 처 송씨 역시 순절한 열부로 정려가 내림. 충효로 사포서 별제 제수. 효곡서원 봉안. ‘一家忠孝烈’의 방명을 남김.
서상남(명종조) 진사 효행. 회암 윤진(1541~1612) 효행으로 현감에 오름. 월간 이전(1558~1648) 우애友愛의 화신化身, 옥성서원 봉안. (이상은 주로 상주 남촌 중심의 선비)
※ 임란을 통하여 효孝의 충忠으로의 승화를 보임.
(3) 임진왜란(1592)이 증언한 충절향忠節鄕
◦북천전北川戰1592년(임진․선조 25) 4월 25일, 관군 60명 및 민병 8백 명이 왜군 정예 1만 5천과 격전, 중과부적으로 모두 국토수호신으로 산화함. 임진년 가을, 왕이 적에게 귀부함 없이 장렬히 전사함에 감동하여 상주 창의사들에게 포유褒諭(공을 칭찬하고 타이름)하고, 석천 김각(창의대장)에게는 선무원종훈 1등에 기록하고 복호復戶를 내림. (<慶尙巡營錄>, 《석천집․창의사실》)
※항일 전공으로 한 고을 모두에게 복호를 내린 일은 유일무이한 특전․가판관 정기룡의 상주성 탈환1592년 11월 23일, 가판관 정기룡이 화공으로 상주 주둔 왜적 400여 급을 베고, 성을 탈환함.
◦의병활동창의군倡義軍(대장 이 봉) : 1592년 7월 30일, 황령사에서 결진.충보군忠報軍(대장 김홍민) : 1592년 8월 16일, 속리산에서 결진.상의군尙義軍(대장 김 각) : 1592년 9월 13일경, 백화산 고모담에서 결진.
(4) 병자호란의 충혼이 숨쉬는 경천대擎天臺
조선의 선비들이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을 지닌 것은, 명나라의 도움으로 임란을 극복한 은의恩義와 중화사상에 동조하여 청나라는 야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에는 치욕적인 형제국으로 청에게 항복. 1636(병자․인조 14) 병자호란에는 망국적인 군신지국으로 항복.
우담 채득기(1604~1646), 숭명처사로 병자호란에 자천대自天臺(경천대)로 숨음
1639년 12월, 심양에 불모로 있는 소헌세자․봉림대군의 주치의(針醫)로 떠나 1645년 5월에 귀국함.
◦충신연주지사(한글가사), <鳳山曲․天臺別曲>제작(1639년)
◦군신간의 진정을 주고 받음, 《君臣言志錄》(1647년), 봉림대군(효종)의 시 12수가 남음.
◦《예조삼강록》에 충신으로 입전됨.
◦자천동 28경, 보림세자의 병풍에 오름 (唯一한 일)
◦경천대비(大明天地 崇禎日月) 삼석분三石盆(蓮盆․盥盆․藥盆 ), (이만부, 上洛文會記)
※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음.
◦낙강 기우제터 우담雩潭․용담龍潭
※ 龍 思想과 祈雩祭(민속놀이로 재현 가능)
※ 자천동(경천대) 28경 위치 고증
(5) 항일 의거
위암 장지연(1864~1921), <是日也放聲大哭>(1905. 11. 20, 황성신문). 소몽 최기중(1873~1921)의 항일 의거 등.
※ 신라 이래의 충효사상이 한말까지 전승됨.
3. 불교문화의 선진
기록상, 이차돈의 순교(527) 60년 후, 사불산에는 587년(진평왕 9) 대승사 창건. 상주읍성 근교에는 4장사四長寺가 있었음. 불교문화의 선진은 단순히 종교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각종 문화면의 선진화를 촉진한 것은 사실이나 필자는 몇 사항만 살피기로 한다.
1) 고승들의 상주 주석住錫 (신라)
대량혜화상 무염(801~888 ; 경문왕․헌강왕의 국사, 당나라 유학), 상주 심묘사深妙寺에 머묾. 헌강왕이 손수 지은 비碑가 있었음. (최치원, 대향혜화상비문) 헌강왕은 향가 <처용가>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며, 대량혜화상이 서울(경주)을 떠나려 하자,
“임금이 할 수 없음을 알고 이에 교서를 내려 상주의 심묘사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으므로 선나별관禪那別館으로 할 것을 청하였다. 스님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이 그곳으로 가서 머물게 되었다. 하루를 머물더라도 반드시 수리하였으니 엄연하게 훌륭한 절이 되었다.” (최치원, 대량혜화상비문)
이로써 보아도, 대량혜화상이 머문 심묘사(현 미상)는 대찰이 되었을 것이요, 헌강왕과 연관되어 처용가處容歌의 보급은 물론 사악함을 물리치는 구나의驅儺義로서 처용무處容舞 또한 일찍이 시행되었을 것이다.
또한 대량혜화성은 당나라 불광사에서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당나라 고승으로서 향산거사香山居士 백거이白居易(樂天)와는 절친하여 백낙천이 치사한 뒤 향화사香火社를 결성, 이 향화사는 승속僧俗이 모인 단체로 처음은 신불神佛이 위주였으나 후세로 가면서 승속의 문회文會 내지 시회詩會의 성격을 띠게 됨.
◦1977년, 임춘의 <소림사중수기> 제작. 공성현의 전당 김영의가 선비로서 향화사를 결성하여 소림사를 중수함.
◦1799년, 갑장사 주지 연파대사가 상주 선비 이승연과 조석철 등 60여인과 향화사풍의 시회를 개최하여 <甲長勝遊錄>(실전)을 남김
진감국사 혜소(774~850), 830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상주 장 백사(남장사 전신)에 처음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범패(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를 보급함에 배우러 오는 이가 구름같이 모였다. (최치원, 眞鑑禪師大空塔碑文)
※범패는 엄연히 상주에서 최초로 보급되었으나, 하동 옥천사(쌍계사)에서 처음 보급된 것으로 알려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문화대백과사전》)
※‘공갈못 연밥따는 노래’(공갈못 채련요) 등의, 상주민요와의 연관성은 연구의 과제로 남음.
2) 고려초
지증대사 지선智詵(824~882), 경문왕의 누이 단의장옹주의 스승, 봉암사 주석. (지승대사적조탑 보물 137호,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호․현 문경지)
원종대사 찬유(869~958), 상주 공산公山 삼량사三郎寺 주석. 당나라 유학승, 고려 태조 국사.
진철대사 이엄(870~936), 상주권 영동의 남쪽 영각산靈覺山에서 수도. 당나라 유학승, 고려 태조 국사.
정진대사 긍양(878~956), 당나라 유학승, 고려 태조․혜종․정종․광종이 존숭한 고승. 봉암사 중창. (정진대사원오탑 보물 제171호, 정진대사원오탑비 보물 제172호․현 문경지)
※상주에 주석한 고승들은 당대 신라․고려의 대표적인 고승들로서 당나라에서 유학하여 불교문화의 보급은 물론 유교문화 및 선진국의 각종 문화 또한 널리 전파함. 상주로 하여금 전국적인 문화향이 되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함.
※불교사상 및 각종 문화적인 영향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임. 이는, 상주문화 전반의 위상 정립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리라 믿음.
4. 유교문화의 선진
1)낙수洛水에 담긴 유교적인 의미와도 깊은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임. 하나라 우禹왕이 홍수를 다스리다 낙수에서 신귀神龜의 등에 새겨진 낙서洛書를 얻어,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음. 특히 기자箕子가 주무왕에게 홍범구주를 강하였다는 설이 있음. 곧 ‘유학의 근원’ 또는 ‘유학의 성행지’라는 상징성이 있음. 추단이지만 ‘上洛’이란 고을 이름을 정한 것은 ‘유학의 고을’임을 드러냄이기도 하다.
※1606년, 낙동강 무임포無任浦에 조선 유학의 정통맥이 영남에 있다는 뜻으로, ‘오도남吾道南’을 표방한 도남서원(도남서원)을 창건한 것도, ‘洛水’에 담긴 유교(학)적 원류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봄.
2)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해 유교사상도 일찍부터 보급되었을 것임
3)통일신라 시대, 상주 거주 지식계급(귀족) 사이에서는 우리말 표기를 시도한 이두어에 사용된 차자표기의 ‘화’자가 사용됨. (<복룡동 256번지 유적 출토 납석제 명문銘文>, 《상주복룡동256번지유적Ⅳ≫, 영남문화재연구원, 2008. 부록 참조)
Ⅴ. 고려 시대
1. 상주 위상
1) 983년(성종 2) 전국 12목의 하나
순화연간(990~994년), 상주의 별호로 상락上洛(유학의 고장, 유학의 근원)과 상산商山(商山四皓, 선비의 고을)이라 함.
2) 1018년(현종 9) 전국 8목의 하나. 7군 18현 2지사부.
7군郡 : 문경․용궁․개령․보령․함창․영동․해평군
18현縣 : 화령․산양․화창․공성․단밀․비옥․안정․중모․호계․ 어모․다인․청리․가은․일선․군위․효령․부계현
2지사부知事府 : 경산京山․안동安東
2. 학술
1)992년(성종 11), 국자감 설치로 상주의 유학 진흥 및 인재등용에 활력이 생김.<선종은 전국 12목에다 서재․학사를 짓게 하고 학비에 충당토록 (田庄)을 지급함. 상주는 7군 18현 2지사부의 계수관으로서 관할 주현에서 명경明經에 뛰어난 사람, 효제孝悌로 소문난 사람, 의방醫方(의술)으로 등용할 만한 사람을 서울(개성)로 천거할 책무가 있었다.> (고려사 74권, 志권 28, 選擧學校 ; 성종 6. 987년 참조)
2)1177년(명종 7), 서하 임춘이 <小林寺重修記> (동문선등재). 향화사香火社 유풍을 이은 공성현의 전당 김영의(소림사 중수 장본인) 논, 백낙천과 같은 사상으로 유불儒彿을 숭상하여 “유교와 불교 두 교의 근본은 다름이 없다.” (儒釋二敎 本無異歸焉)
※ 12세기에는 이미 儒彿이 相生 했음을 알게 함.
3)1254년(고종 41) 10월 19일, 상주성(백화산성)에서 몽고군을 대파한 석홍지釋洪之의 항몽대승첩은 그가 군사학에도 높은 식견을 지녔기 때문임. ※ 호국불교
4)난계 김득배(1312~1362)의 도학은 포은 정몽주에게로 이어졌고, 난계가 병학兵學에도 뛰어나 홍건적 퇴치의 대훈大勳을 세움. 고려말에는, 상주박씨와 상산 김씨문에서 많은 인재(유학자)를 배출함.
3. 교육
1)1129년(인종 7), 국학 학유 김수자(인종조 1123~1146․상산인)가 예종․인종간의 학교 진흥책과 교육제도를 밝힌 <행학기幸學記> (동문선등재)를 씀.
※ 상주 최초(기록상)로 사학私學을 해설함. (유학 진흥)
2)1247년(고종 34), 동산수 최자(1188~1260, 상주사록․상주목사 역임)가 동남로에 출진出鎭 중 상주 방문. 목사․군수 및 향교 제생이 가시歌詩와 인계引啓로 환영함. 일흔 여든의 네 노인이 자칭 상원사로尙原四老라 소개하고 절구시 두 수를 바침
※향교 교육의 활성화 및 유학적 상주 교육의 위상을 가늠케 함. 유학과 더불어 문학도 왕성했음을 알게 함.
※ 상주는 문화의 선진향 - 익재 이제현의 증언
“동남로 주군州郡 가운데 경주慶州가 가장 크고 상주尙州가 그 다음이다. 그 도道의 이름이 경상慶尙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을 받든 자는 반드시 먼저 상주를 거친 뒤 경주에 이르는 까닭에 풍화風化의 유행은 상주를 말미암아 남으로 갔지 일찍이 경주를 말미암아 북상한 적은 없었다.”(이제현 1287~1367)
《익재난고》(권5), <序․送安大夫赴尙州牧序>. 안대부는 1343년 봄, 상주목사로 부임하는 근재 안축에게 준 서문임.
※고려조에는 이미 상주가 영남에서는 가장 선진한 문화의 도시였음을 알게 하였음.
Ⅵ. 조선 시대
1. 상주 위상
전국 8목의 하나.
조선초(1392년 태조원년, 1408년 태종 8년), 경상도 감영을 경주에서 상주로 옮김. 1593년 성주로 옮김. 좌우도의 변동은 있었으나 근 2백년 간 경상도 도청 소재지가 상주에 있었음.
2. 학자
박원작(군사학)․난계 김득배(성리학)․단구재 김후(성리학)․김순고(군사학)․소재 노수신(양명학)․청죽 성람(의학)․태촌 고상안(농학)․우복 정경세(예학)․목재 홍여하(동국역사)․우담 채득기(의학)․식산 이만부(성리학․실학)․청대 권상일(성리학)․취음 성이홍(성리학)․입재 정종로(성리학)․손재 남한조(성리학)․계당 류주목(성리학․예학)
3. 교육자
난계 김득배(포은의 은사)․남계 표연말(의리학)․허백정 홍귀달(의리학)․난계 채수(의리학)․신재 주세붕(최초로 서원 창설)․영천 신잠(18개 서당 건립)․김겸(傅 야은의 은사)․행촌 박눌(5자 문과급제)․소재 노수신(숙흥야매잠․1551 국가 간행)․후계 김범(명경행수의 징사)․태촌 고상악(농학)․월간 이전(주자서절요)․목재 홍여하(동국 역사)․신산 이만부(경상감영 직영 낙육재 절목 제정)․청대 권상일(성리학)․입재 정종로(성리학, 248인의 제자)․손재 남한조(성리학)․계장 류주목(성리학, 321인의 제자)
4. 예술인
진감국사 혜소(범패 최초보급․830년)․석진정(고종조 1214~1259)․사불산유산기)․서하 임춘(최초 가전체소설, 국순전․공방전)․나옹화상(시)․난계 김득배(시)․조운흘(시)․남계 표연말(기문)․허백정 홍귀달(기문)․난재 채수(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졸재 채소권(花王戒系 최초소설, 화왕전)․박안신(시)․채무일(중종초상화, 草虫第一)․채무직(중국에 가서 律管을 교정)․유촌 황여헌(시, 竹枝訶)․호음 정사룡(시)․신재 주세붕(경기체가 4편․시조 9수)․소재 노수신(시, 조선의 두보) 동원 김귀영(시)․개암 김우굉(시조 12수)․검간 조정(난중일기 보물1003호)․가규 조익(시․진사일기) 사서 전식(시)․창석 이준(시)․우복 정경세(시)․이재 조우인(詩書畵三絶․한글가사 4편)․조휘(시)․우담 채득기(한글가사 1편)․근곡 이관징(書)․박천 이옥(書)․식산 이만부(書․畵, 시․기․문)․국포 강박(시)․반룡재 이병연(시)․임하 이경유(시평집, 창해시안)․삼명 강준흠(금강산시)․곤자자 김악주(閭巷文人)․녹차 황오(시)․위암 장지연(是日也放聲大哭․서대 김충(시)
Ⅶ. 맺는말
이상에서 살핀 바 몇 원류 고찰은 다른 자리에서도 여러 번 발표한 내용들이다.
고도古都요 웅주雄州인 상주문화 전반의 연구나 상주 사랑에의 지름길은, ‘상주의 본질(실체)’을 아는 일이요, 이의 달성은 ‘상주문화의 원류(근원)’을 아는 일로부터 성취되리라 본다.
사람끼리의 인화人和뿐 아니라,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의 조화에 상주인이 얼마나 기여해 왔는지에 대하여서는 깊은 성찰이 절실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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