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상주 교육에 영향을 끼친 고승(高僧)들

빛마당 2014. 2. 27. 21:48

상주 교육에 영향을 끼친 고승(高僧)들

경북대학교 교수 한 기 문

목 차

1. 머리말288

2. 삼국․통일신라 시기289

3. 고려시기293

4. 맺음 말304

1. 머리말

- 고승의 호칭 : 법사(法師), 대사(大師), 화상(和尙) 등

- 금석 자료에는 법회를 주관하는 직임을 두다.

→강사, 복강사, 주강, 법사, 의학

- 나말(羅末) 선종 사원에는 강경,

법회와는 별도로 설법을 위주로 하는 선법당, 법당, 등의 건물이 특징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건물 옆으로 방장, 상방, 상원 등으로 불리는 건물 공간에 법사가 거주하고, 입적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 추앙된 고승에게는 진영(眞影)을 보관하여 추모하는 진당(眞堂)이 건립되고, 탑비가 있는 비각, 탑이 성립.

- 상주에 머문 고승들의 행적과 교화 내용을 문헌 자료에 보이는 예를 찾아 시기별로 정리한다. 그리고, 상주 지역에 고승이 머물 수 있었던 교통상, 수행상 여건을 이해하고자 한다.

- 조선 시기 이전엔 사상적, 정신적 교화력은 대개 불교 고승(高僧)들의 몫이다.

2. 삼국 ․ 통일신라 시기

 

1) 지수(智籔)와 대승사(大乘寺)

-「삼국유사」흥법 보장봉노 보덕 이암

- 보덕에게는 고제(高弟) 11명이 있었는데 그 중 지수(智籔)는 대승사(大乘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대승사가 상주 지역에 있는 대승사라면 상주 지역에 교화를 편 고승은 지수가 된다.

- 보덕은 열반경(涅槃經)을 강조한 고승이었음으로 상주 지역에 전파 된 사상적 영향은 바로 열반경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열반경은 모든 중생에 불성(佛性)이 자재함을 강조하는 경전이므로 상주 지역민에게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 것이다.

 

2) 승전(勝詮)과 길항사

- 삼국유사 권4 의해 5 승전촉루(勝詮髑髏)

- 692년(신문왕 12) 당에 유학 갔던 승전(勝詮)이 귀국하여 현수 법장의 저술 화엄경탐현기, 현의장, 화엄범어, 십이문론소, 법계무차별론소 등을 가져오고, 상주 관내 개령군 경계에서 거주하면서 화엄경을 강하였는데 돌 무리를 놓고 강연과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듣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다만 그의 제자 가귀(可歸)가 이를 듣고 심원장(心源章)을 지었다고 한다.

- 승전이 화엄경을 강한 곳은 지금 금릉군 남면 오봉리 길항사지이다. 이곳은 758년(경덕왕 17)에 승전을 추모하여 세운 쌍 탑이 있었으나 1916년 고궁박물관으로 옮겼다.

- 화엄 사상은 화합사상으로 이해되고, 신앙적으로는 관음, 문수 신앙 등이 주된 기능을 하고, 또한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찾아가는 행로를 보여 주는 구도의 가르침도 있다.

80권 화엄경에서는 60권 화엄경에 비해 비로자나불에 대한 명칭이 강조되는 등 법신 사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화엄경의 사상이 이 지역에 새롭게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혜소와 상주 장백사

- 흥덕왕께서 칙서를 급히 내리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道義) 선사가 지난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께서 뒤이어 이르러 두 보살이 되셨도다. 옛날에 흑의(黑衣)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오늘에는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노라. 하늘에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쪽 나라 계림(鷄林)의 경내를 길상(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고 하였다.

‘… 처음에 상주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석장(錫杖)을 멈추었다. 명의(名醫) 문전에 병자가 많은 것처럼 찾아오는 이들이 구름 같았다. 방장(方丈)은 비록 넓었으나 물정(物情)이 자연 군색했음으로, 마침내 걸어서 강주(康州) 지리산에 이르렀다.’「진감선사 비」

- 상주 장백사 역시 신라 왕경에서 대당(對唐) 교통로의 하나인 당은포로(唐恩浦路) 상의 중요 거점이다.

- 김헌창 난의 후유증에 따른 상주 지역민에 대한 위무(慰撫)가 필요.

- 상주 장백사는 지금 상주시 연원동에 폐사지로 남아있다.

- 1967년 정영호 교수가 발견한 이상화 씨 집 뒤뜰에 있었다는 길이 58㎝, 폭 41㎝ 크기의 석조주악천인상(石造奏樂天人像) 편은 현재 도난당하고 없다. 이 외에도 석등 하대석, 계단 난간석, 문지도리 홈석 등과 기와편이 발견된다. 석탑 옥개석 일부가 흥암서원(興巖書院) 강당 기단석으로 사용된 것도 있다.

- 혜소의 대중 교화에는 남종선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전통적으로 교화의 방법인 강경(講經), 예불(禮佛), 영당(影堂) 건립 등의 경상(經像)에 의지하는 방편을 적극 수용.

- 평소 범패를 잘 하였는데 그 목소리가 금옥(金玉)과 같았다. 구슬픈 듯한 곡조에 나를 것 같은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곡진하여 능히 제천(諸天)으로 하여금 크게 환희케 하였다.「진감선사 비」

- 혜소 자신이 직접 범패로 교화하는 점에서 이들 보다 대중 교화에 효과적이고 직접적이었다.

 

4) 지증대사(智證大師)와 문경 봉암사(鳳巖寺)

- 도헌(道憲)은 824년(헌덕왕 16)에 태어나 882년(헌강왕 8)에 입적했다. 김 씨로 왕경인(王京人)이었다. 부석사 범체대덕(梵體大德)에게 화엄을 배우고, 경의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입당(入唐)하지 않고 혜은(慧隱)으로부터 현지(玄旨)를 탐구했다.

도헌의 비문에 적힌 법맥은 지공(志空) → 신행(神行) → 준범(遵範) → 도헌(道憲) → 양부(楊孚)로 이어진다. 이로 보아 그의 법맥은 북종선계로 추정한다.

- 희양산 봉암사는 심충(心忠)이 봉암용곡을 도헌에 희사하여 성립되고, 헌강왕이 봉암으로 사액한 사원이다. 다른 기록에는 양산사(陽山寺), 희양원(曦陽院)으로 불리기도 한다.

 

5) 랑혜화상(朗慧和尙)과 영동(永同) 심묘사(深妙寺)

- 낭혜화상 무염은 속성이 김 씨이고, 무열왕이 8대조가 된다고 한다. 아버지 범청(範淸)은 득난이 되었다. 12세에 출가하여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의 가르침을 받고 부석사 석등(釋登)에게 화엄을 배웠다.

822년 중국에 유학하여 마곡보철(麻谷寶澈)에게서 법을 받고, 845년 법난으로 귀국했다.

웅천주 서남 지역에 임해공 곧, 김인문의 봉지에 사원을 세워 산문을 열었다. 문성왕 대에 성주사로 사액되었다. 명성이 높아 사류들이 선문 곧, 성주산문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일세의 수치로 여겼을 정도였다.

- 경문왕은 성주사의 무염을 왕경으로 불러 스승으로 예우하고, 왕경에서 멀지 않은 상주 심묘사(深妙寺)를 선방별관(禪房別館)으로 할 것을 청했고, 무염은 그 곳으로 가서 머물렀다.

- 심묘사의 소재지는 지금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이다.

 

6) 심광화상(深光和尙)과 영동(永同) 영각산사(靈覺山寺)

- 심광은 인중(人中)의 사자라고 존숭되었다고 하는데 무염의 제자가 되어 모든 학자가 우러러 보았다고 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와 그의 문하가 마치 저자거리와 같이 많았다고 한다.

심광은 숭엄(崇嚴), 곧 무염의 제자이며 또한 마곡의 법손(法孫)으로 족히 성도를 알았으니 그의 전한 바는 조계 6조(祖)를 존조로 하여 대대로 서로 마음이 계합하여 법경대사 현훈까지 이르렀다.

- 영각산사(靈覺山寺)는 영동군(永同郡) 남(南)의 영각산(靈覺山)에 있는 사원으로 짐작된다.

 

3. 고려시기

1) 정진대사(靜眞大師)와 문경 봉암사(鳳巖寺)

- 긍양의 속성은 왕씨(王氏)이고, 공주인(公州人)이다. 긍양은 충주 세력 예백의 소개로 고려 태조를 만나 ‘귀승숭불(歸僧崇佛)’의 방책을 논의하였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신역대장경(新譯大藏經)의 사경(寫經)과 개경 · 서경 양도 분치였다고 한다.

- 긍양은 혜소와 도헌의 연결고리로서 사상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봉암사는 희양원(曦陽院)이라는 이름으로 광종이 선교 일치적 경향을 보인 법안종을 강조한 분위기에서 3대 부동 사원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2) 두운선사(杜雲禪師)와 예천 용문사(龍門寺)

- 범일(梵日)과 함께 당(唐)에 들어가 불법을 전수하고 돌아와, 868년(경문왕 7)에 이곳 예천 용문사에 자리 잡고, 가시덤불을 치고 터를 닦아 초암을 짓고, 수행했다.

태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천하를 평정할 방책을 물었고, 이어 가만히 도움을 주어 통일 후 두운이 머무는 곳을 용문사로 사액(賜額)하고, 30간의 집을 짓도록 하였으며 주현(州縣)의 세조(稅租)를 매년 150석 제공하도록 하여 사원 유지 경비를 지원했다.

- 이 사원은 고려 중기 굴산문이 사상적으로 주도하는 중요한 도량이 되었다.

 

3) 자적선사(慈寂禪師)와 예천 경청선원(境淸禪院)

- 홍준은 그의 법휘(法諱)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그의 선조는 진한의 무족(茂族)이었다. 882년(헌강왕 8)에 태어나 수학하고, 출가하여 흑암선원의 진경대사를 스승으로 모셨다.

918년 경명왕의 초청을 받은 스승 심희(審希)를 따라 경주를 방문한 바 있다. 그 후 예천에 이르러 단월 정광□□(正匡□□)를 만나 몇 년간 절에 머물렀다. 아마 이 절이 경청선원의 전신인 가지곡사(加知谷寺)가 아닌가 한다.

정광□□는 사사(四事) 즉, 공양하는데 필요한 물건 일체를 홍준에게 제공하였던 것 같다. 태조가 소문을 듣고 선사가 계신 곳에 사신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대궐로 오게 하여 구산선원(龜山禪院)에 머물게 하였다.

939년(태조 22)에 세상을 떠났다. 속세 나이 58세이고, 승랍은 48이었다. 시호를 자적선사(慈寂禪師), 탑호를 능운지탑(凌雲之塔)이라 예우하였다. 전법제자(傳法弟子)로 작인(綽麟), 승담(承湛) 등 100여 인이 있다.

- 그의 법맥(法脈)은 진경대사 심희의 법맥을 이었고, 봉림산파(鳳林山派)로 정리 된다.

- 예천은 고려 건국에 전략적으로도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4) 진공대사(眞空大師)와 영주 소백산사(小白山寺)

- □운은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계림(鷄林)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성한(星漢)에서 시작하여 나물 때 크게 일어났다고 한다. 가야산 선융화상(善融和尙)에 출가한 후 진전사(陳田寺)를 거쳐 왕경(王京)에 있다가 김해를 거쳐 930년에 소백산사에 머물 때 태조와 접촉한 것으로 추측한다.

930년(태조 13) 그 해는 태조가 고창(古昌) 전투에서 견훤에게 승리를 거두어 통일의 대세를 잡은 시기로서 소백산사가 고창(=安東)과 인접한 지역임을 감안하면 이 시기 태조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다.

- 진공대사의 비가 세워지던 939년에는 소백산사가 태조에 의해 가지산문의 사상적 중심 사원으로 강조되어 가지산파 세력을 수렴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지역의 중요성은 봉암사의 경우와 같이 태조 진전이 있었다.

 

5) 능여와 직지사

- 금산(金山) 직지사 사적비(直指寺事蹟碑)에는 능여대사(能如大師)가 태조의 인동 싸움에 신력(神力)으로 도와주고, 적을 이길 수 있는 시기를 예고해 주었다고 한다.

태조가 통합 후 여기에 큰 가람을 세우고, 토전재보(土田財寶)를 내려 보답했으며 그 후 광종조까지도 이 절을 봉숭(奉崇) 함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6) 화엄승과 용암사(龍巖寺)

 

- 태조는 통합 초에 상주 만악산(萬岳山) 동남 모퉁이에 빼어난 곳을 점지하여 6경(頃)을 입전(入田)하여 화엄 원교를 천양하는 곳으로 하였는데 용암사(龍巖寺)였다.

- 지난 갑오년(1174년 명종 4)에 손수 조서를 내려 주지 운미(雲美)에게 간난을 구제하고자 부처님께 빌게 하니 운미가 이곳을 택하였고, 1178년(명종 8)에 착공하여 1179년에 준공하니 모두 87간이었다.

명종이 비(妃)의 추복(追福)의 장소로 하고, 속전 40경(頃), 내탕물(內帑物)로 조 2,000석을 유향비로 하게 하고, 고승 지영(智英)을 주지로 명하였다.

운미 대사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고, 명주인(溟州人)이다. 묘령에 치악산(雉嶽山) 개선사(開善寺)에 들어가 윤공(胤公)의 강하에 수업하여 박학고행(博學高行)으로, 위로 주상의 귀의를 받고, 아래로 학자의 첨앙(瞻仰)을 받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28, 尙州 佛宇, 龍巖寺

 

7) 계응(戒膺)과 각화사(覺華寺)

- 화엄종의 경우 의천의 적사(嫡嗣)로 알려진 계응(戒膺)은 태백산에 돌아가 각화사를 창건하고 법시를 여니 사방의 학자가 폭주하여 날마다 1,000명은 되어 법해용문(法海龍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 계응(戒膺)은 명리(名利)를 버리고, 태백산에서 화엄학을 연구하여 명성이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8) 확심(廓心)과 용수사

- 원종문류집해(元宗文類集解)는 의천이 편집한 원종 문류에 대해서 그의 계승자가 집행한 주석서이다. 이 책의 저자는 확심(廓心)으로 그는 의천의 대표적 문도였던 계응의 계승자이다.

- 확심은 용수사의 3대 주지로서 빨라도 개창비를 세웠던 1181년(명종 11) 여름까지 생존하였다.

 

9) 조응(祖膺)과 용문사

- 혜조국사의 제자 영보의 문하에 출가한 조응(祖膺)이 예천 용문사에 1171년(명종 1) 명종의 태자 태장소(胎藏所)를 설치하여 명종과 연결되었다.

그는 1179년(명종 9)에 용문사의 중수 공사를 마치고 그 낙성 기념으로 구산학도(九山學徒) 500인 50일 담선회(談禪會)를 개최하였다.

- 그의 문도에 수미산문, 천태종, 소자종, 화엄종 출신이 참여함으로서 그의 선풍은 탄력적이며 선교 융합적임을 알 수 있다.

 

10) 지눌과 보문사(普門寺) · 거조사(居祖寺)

- 지눌은 1185년(명종 15) 하가산(下柯山)에 놀 때 보문사에 몸을 붙여 대장경을 읽다가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화엄론을 얻어 더욱 신심을 내었다고 한다.

- 지눌은 1188년(명종 18) 공산 거조사에 있으면서 1190년(명종 20) 늦봄에 근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을 지어 내외에 알렸다.

결사문에서 지눌은 ‘명문이양(名聞利養)’하는 세속적 풍토에 환멸을 느끼고 정혜 계발에 헌신하는 은둔 결사를 천명하였다. 정토 관행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였다.

 

11) 혜운사(惠雲師)와 용담사(龍潭寺)

- 사원의 종파는 시구(詩句) 속에 ‘선방(禪房)’ ‘노선거(老禪居)’라는 것으로 보아 선종 사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혜운사(惠雲師)도 선종 승려일 것이다.

여기서 머문 시기는 8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이다. ‘내가 남으로 내려 왔을 때 잠시 병(病)을 요양하던 곳이다.’라고 하다.〈이규보〉

 

12) 규사(珪師)와 원흥사

- ‘대사는 이미 옛날 얼굴이 아니라

소나무 위의 늙은 학처럼 여위었네.’

라 하였다. 자신도

‘나 역시 늙고 의지 또한 좁아져서

다시는 무지개 같은 옛날 기개가 없다오.‘

라 하여 규사와 같은 처지임을 알 수 있다. 시(詩)에서도 ‘십년을 통곡한 궁도의 눈물’이라 하였다. 서로의 처지가 같아 회포를 풀었던 것은

‘정을 다 토로하지 못하고 각각 슬퍼하여

산 중턱에 해지는 줄 몰랐다.’

라 한데서 알 수 있다.

 

13) 망명(亡名)과 상주(尙州) 소사(小寺)

- 승(僧) 망명(亡名)이 상주(尙州) 소사(小寺)에 머물렀다. 항상 음양점복(陰陽占卜)으로 여리(閭里)에 출입하였는데 남녀가 모두 환영하였다. 화복(禍福)을 묻고 대가로 의식을 제공하였다.

하루는 관청(官廳)에서 연 법석(法席)에 상주 내의 제사(諸寺)의 전향자(典香者)가 모두 모였는데 망명은 비록 참여는 하였지만 다만 음양승으로 말석에 있었다. 모두 소홀하기를 풀과 같이 하였다. 야반에 이르자 등촉(燈燭)이 꺼지고 거의 잠든 무렵에 홀연히 광명이 등화(燈火)와 같았다. 무리가 모두 놀라 일어나 찾으니 망명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흑업(黑業)을 부끄러이 여겨 내면으로 참회(懺悔)하고, 단지 연경(蓮經)을 외우기를 여러 해 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승(僧)이 모두 탄복하고 공경하였다. 해동전홍록(海東傳弘錄)에 나온다.〈了圓「法華靈驗傳」〉

- 상주 호장 김의균(金義鈞)은 법화경(法華經) 읽기를 늘 즐겼으므로 기로소장(耆老少壯)을 모근(募勤)하여 도속(道俗) 두 무리로 나누었다. 매월 육재일(六齋日)에 기노를 사재(私齋)에 모아 연경을 습송하였다. 경(經) 읽기를 마치면 다과로 위로하였다.

소장(少壯)을 모을 때는 술도 아울러 대접하였다. 이때부터 소장(少壯) 중에 불음(不飮)을 발심한 자들이 기노도(耆老徒)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 때 사람들이 희롱하여 모(某)와 모(某)는 무주법화도(無酒法華徒)에 이미 들어갔고, 모(某)와 모(某)는 유주법화도(有酒法華徒)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 수기격발(隨機激發)이 이와 같아 무상하였다.

 

14) 동순선사(洞純禪師) · 원진국사(圓眞國師)

- 명종 대에 이르러 양산 곧, 희양산에 주석한 동순선사(洞純禪師)가 있었다. 그의 상족 제자가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이다.

그는 속성이 신씨(申氏)인데 상락 산양인(上洛山陽人)이라 한다. 그는 천태종 진정국사 천책보다 한 세대 위에 해당한다. 각기 태조 대 삼한 공신 신염달(申厭達)의 10세(世), 11세 후손이 된다.

부모를 조실하고 숙부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3세(歲)되던 해에 희양산에서 득도하고 익년에 금산사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승형은 희양산 파를 크게 부각 시킨 셈이다.

- 청평산 문수사(文殊寺), 설악 한계사(寒溪寺), 운문산 복안사(伏安寺), 청도군 칠엽사(七葉寺), 공산(公山) 염불란야(念佛蘭若) 등에 주석하였다.

생을 마감한 곳은 공산 염불난야였고, 다비 역시 공산 남록에서 하였다. 영골을 모아 이장한 곳은 신구산(神龜山) 보경사였다.

 

15) 현여법사(玄如法師)와 승장사

- 승장사는 균여(均如)의 도문(圖文)을 연설한 것을 2권으로 번역한 화엄종 계열의 현여(玄如) 법사가 머물렀던 사원이다.「均如說一乘法界圖圓通記」 卷 下

 

16) 정통사와 백련사

- 이규보가 보광선사(普光禪師)에게 보낸 시(詩)에

‘부끄럽구려, 그대는 일찍이 백련장(白蓮莊)을 짓고

산수(山水)의 경치가 어디보다도 좋다고 했지.

동산에 과일이 익으면 원숭이 살림살이 넉넉하고

소나무 우거진 골짜기는 온통 학(鶴)의 세상일세.

조화옹(造化翁)이 꾸며 놓은 석벽(石壁)은 천 길이나 높고,

용(龍)은 한 줄기 영천(永泉)을 토해 내누나

불공을 끝내고 대(臺)에 올라 조용히 앉으니

티끌 한 점인들 깨끗한 마음 더럽힐 손가.’

라고 했다.

 

17) 노승〈권적 손자〉과 백련사

- 권적의 손자이자 최자의 연척이 되는 노승의 이력을 소개한 것에 의하면 과거에 합격하고 출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선사(修禪社)의 혜심(慧諶)이나, 백련사(白蓮社)의 천책과 그 출가 과정이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18) 진정국사와 백련사

- 진정국사(眞靜國師)의「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에는 1243년에 법회(法會)에 초청되었지만, 1244년에야 이곳에 이르러 동백련(東白蓮)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 그는 고려 개국공신 신염달(申厭達)의 11대손(代孫)으로 이름이 신극정(申克貞)이다. 백부(伯父)의 손에서 자라 16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20세에 등제(等第)하였다.

23세에 료세(了世)에 출가(出家)하였다. 출가 후 그가 동백련사에 초청되어 오기까지의 활동은 1232년 료세(了世)가 결성한 보현결사(普賢結社)에서 ‘보현도장기시소(普賢道場起始疏)’를, 1236년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1237년 ‘답김경손서(答金景孫書)’를 료세(了世)를 대신해서 썼다. 이 시기까지 그는 료세(了世)의 결사활동(結社活動)을 보좌하면서 자신의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1241년에는 강남(江南) 영흥산(靈興山) 보현사(普賢社)에 머물고 있었다.

료세(了世)가 다섯 곳에서 결사를 성공적으로 일으켰다는 비문(碑文)의 기록을 감안할 때 영흥산(靈興山) 보현사(普賢社)는 보현도장기시소(普賢道場起始疏)를 쓴 1232년에 강화도 천도와 함께 사민입보책(徙民入堡策)이 중앙정부의 대책으로 강제성을 띤 것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입보된 산성(山城)이나 해도(海島)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한다. 보현도장(普賢道場)은 피난민(避難民)을 안주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 일연(一然)과 인각사(麟角寺)

- 가지산문의 일연(一然, 1206∼1289)이 부각되어 국존(國尊)에 올랐다. 그는 장산(章山 = 경산) 출신으로 포산(包山 = 비슬산)에서 20대 수행기(修行期)를 보냈고, 노모(老母)의 묘소가 있는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로 지정 받았다.

여기서 말년 5년여 기간 동안 구산문도회를 개최하여 구산문은 물론 불교계를 사상적으로 주도하였다.

 

20) 혼구(混丘)와 송림사(松林寺)

- 가지산문의 기반은 혼구(混丘)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는 일연(一然)의 추모 사업 곧, 인각사의 비문 건립에 적극 참여하였고, 일연의 저술 특히 「삼국유사」를 마무리하는 일도 주관하였다.

- 혼구는 1315년(충숙왕 2)부터 1322년(충숙왕 9)까지 영원사에 주석하다가 송림사(松林寺)로 옮겨 입적하였다.

 

21) 정오(丁午)와 동백련사

- 1280년(충렬왕 6) 천태종의 고승 정오(丁午)가 이 동백련사에서 10년간 머물렀음은 그가 찬(撰)한「암거일월기(庵居日月記)」에서 확인 된다.

 

22) 혜근과 공덕산 묘적암

- 나옹 혜근은 1320년 출생하여 1376년에 입적하였다. 공민왕 대와 우왕 대 왕사(王師)를 역임한 고승이다. 이 시기 왕실 천도불사를 담당하고 공부선을 주맹하여 선종의 주도권과 신돈 지지 승려를 배제한 교단 개편을 이루었다. 또한 지공 현창 불사에 참여하여 계승자임을 표방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 문도들에 의해 현창 사업이 전개되어 우왕 대 불교계 큰 세력으로 대두하여 여말 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 그는 영해 부인 선관서령 아서구를 부(父)로, 영산군인 정씨를 모(母)로 1320년 태어났다. 옛 이름은 원혜, 법명은 혜근, 호는 나옹이고, 왕사로서 보제존자라는 존칭도 쓰였고, 입적 시 머문 강월헌이란 거처가 그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는 20세였을 때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 선사에게 의탁하여 출가하였다. 회암사에 이르러 수도하고, 1348년 원 대도 법원사에 도착하여 지공 곁에 머물며 수도하였다.

이후 남중국 강남인 불교계의 주도적 위치에 있던 임제종 양기파의 평산처림을 만나 전등의 신표를 받았다. 다시 대도로 돌아와 지공을 만나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혜근의 사상 기반은 국내 조계종, 원에서의 임제종, 지공의 영향으로 정리된다. 무심선을 강조.

 

4. 맺음 말

- 상주는 고려 이전 시기는 소국(小國) 시기 사벌국, 신라에 편입 된 후는 광역주로 고려시기에는 계수관으로서의 위상을 지닌 곳이다.

- 상주의 위상은 수륙교통이 교차하는 교통상의 결절지(結節地)였던 지리적 요인과 이 지역민의 정신적 결속력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 이러한 결속력은 상주 지역민에 대한 사상적 영향력을 끼친 고승의 역할이 컸다고 하겠다. 따라서 고승이 머문 중요한 사원들도 이 지역에 다수 분포하였다.

- 고승의 사상적 내용은 자세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특히 상주에는 천태종 승의 법화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영향은 다수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