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상주 불교사원(佛敎寺院)의 어제와 오늘

빛마당 2014. 2. 27. 23:01

상주 불교사원(佛敎寺院)의 어제와 오늘

 

尙州鄕土文化硏究所 硏究委員

尙 州 市 廳 金 相 鎬

목 차

Ⅰ. 머리말358

Ⅱ. 불교의 개관(槪觀)359

Ⅲ. 고려시대 상주 주요 불교사원(佛敎寺院)362

Ⅳ. 기록에 나타나는 상주 불교사원365

Ⅴ. 사원(寺院)의 속암(屬庵)379

Ⅵ. 전통사찰(傳統寺刹)380

Ⅶ. 사원의 문화재 보유현황389

Ⅷ. 사라진 상주의 사원과 현대 종교391

Ⅸ. 부도(浮屠)394

Ⅹ. 시내의 옛 사원399

. 불탑(佛塔)414

. 맺음말419

상주 불교사원(佛敎寺院)의 어제와 오늘

尙州鄕土文化硏究所 硏究委員

尙 州 市 廳

金 相 鎬

Ⅰ. 머리말

프랑스인 샤를 루이 바라는 1888년~1889년까지 조선을 기행(紀行)하였다. 서울에서 문경 새재를 넘어 칠곡으로 향하면서 기록한 조선기행에서 승려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기록 내용을 보면 “어떤 걸인 중과 마주쳤는데 노란 옷차림을 한 그는 손에 쥔 나무막대기로 꼭 유럽의 맹꽁이 자물통처럼 생긴 자그마한 목재 용기를 두들기고 있었다. 연신 자비를 구하고 있는 그의 자루는 대부분의 조선불교 사원이 텅텅 빈 것과 마찬가지로 볼품없이 헐렁했다”라고 표현했다. 또한 조선 왕조는 몇 차례의 박해와 더불어 점차 불교를 멀리하고 영향력은 감소했고 불교의 사탑도 폐허화되었으며, 사원도 세속적인 유흥을 위한 장소로 전락하였다. 일반인이 몇몇 승려에게 보시를 하는 것은 종교적인 봉헌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의 표출이고 위세를 떨치고 있는 유교에 비해 경상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방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불교의 비참한 상황은 안타깝기 그지없고 불교신자들까지 앞으로 몇 세대가 지나면 불교에서 남는 건 희미한 추억뿐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 상황이 외국인이 본 구한말 우리나라 불교 사원의 현 주소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경상도에는 다른 지역보다는 다소 불교사원 유지 형편이 좋았던 것 같다. 상주에도 여러 불교 사원이 있었으나 사원에 관한 기록이 미미하고 사원내의 보관문서도 미미한 상황에서 상주 불교 사원의 변천을 정리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으나 몇몇 기록을 살펴서 상주 불교 사원의 성쇠와 시대별 사원의 명칭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Ⅱ. 불교(佛敎)의 개관(槪觀)

불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종교로서 2012년은 불기 2556년이다. 종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어려우나 굳이 불교를 정의한다면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로 정의할 수 있겠다. 법(法)과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불법(佛法). 불도(佛道)라고도 한다. 교리와 이론은 인도의 전통적 사상인 업(業). 윤회(輪廻). 해탈(解脫) 사상을 근저로 하여 근본 교리가 만들어졌는데 대중의 교화를 위해 설법한 가르침을 근거로 하고 인간의 실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중요시한다는 특징과 인생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제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인간의 사회적. 개인적 조건에 따라 가르침이 달리 적용되는 관용성을 가진다.

이후 불교의 성장과 발전에 따라 계율 해석의 차이에서 시작되어 점차 각각의 조직체와 지리적인 차이에 따라 새로운 교파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불교의 대중성이 상실되자 진보적 입장의 교파와 신도들에 의해 복귀 운동이 일어나 대승(大乘) 불교가 서기 1세기 무렵부터 대두되었고 대승 불교는 자기 해탈 보다는 대중의 구원을 선행하여 보살(菩薩)이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미래의 초월적 부처관을 내세웠다. 이후 이 대승 불교는 중국으로 전파되어 당시 중국의 대표적 사상이었던 노장(老莊) 사상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구마라습(鳩摩羅什) 등의 역경(譯經) 전교 사업을 통해 중국 불교가 형성되었는데 그 후 중국 불교는 우리나라의 불교 전파와 발전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대승 불교 이전의 6세기 동안의 불교를 소승(小乘) 불교라고 하는데 대승 불교와 달리 스리랑카. 태국 등의 남방 불교 문화권을 이루었다.

우리나라 불교의 전래는 삼국시대로서 초기 불교의 수용과 발전은 왕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국가적 공인하면서 고대국가의 기반체제가 정비되었다. 이때의 불교는 재래의 무격(巫覡) 신앙을 대체하였고, 고대 귀족 문화의 융성을 가져왔다.

고구려에서는 삼론종(三論宗)이 성행하였는데 중국의 삼론종 제3조가 되었던 승랑(僧朗)등의 활동이 있었다. 특징은 인과(因果)적 교리와 구복(求福)이었으며, 고구려 말 보장왕(寶藏王) 때 도교(道敎) 우대와 불교 억압 정책에 따라 보덕(普德)의 백제 망명과 같은 위축 양상을 보였다.

백제 불교는 계율(戒律) 중시의 특징이 있었는데 인도에서 유학한 겸익(謙益) 등이 있었고, 고구려와 함께 전교(傳敎) 활동을 통하여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초기 불교 수용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법흥왕(法興王). 진흥왕(眞興王)때부터 발전하여 화랑도(花郞徒) 설치 이념과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 등의 정치. 사회 지도 이념이 되었으며 자장(慈藏)이 신라 불국토(佛國土) 설을 강조하면서 삼국 통일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호국(護國) 불교는 신라 불교의 특징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의 여러 저술과 정토(淨土) 신앙을 통해 대중 교화에 힘썼던 원효(元曉)와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 시조인 의상(義湘)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활동과 불교 사상은 민족 사상으로 토착화되었다. 신라 말에는 중국에서 유학한 선승(禪僧)들에 의해 선문구산(禪門九山)이 형성되어 교종(敎宗) 중심의 한계에서 벗어나 경주 중심의 불교를 지방에 확산시켰다.

고려 시대에는 불교가 국교로 신봉되었고 호국적. 귀족적. 기복적(祈福的) 특징에 따라 많은 불교 행사가 성행하였다. 또한 전 시대 말부터 성장하였던 선종은 점차 중앙 집권체제가 성립되면서 밀려나고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문벌 귀족(門閥貴族) 중심의 화엄종과 법상종(法相宗)이 주류를 이루었다. 의천(義天)은 천태종(天台宗)을 성립시켜 선교(禪敎) 일치를 주장하였다. 무신란(武臣亂) 이후 귀족 불교에 대한 반성으로 신앙 단체로서의 결사(結社가 유행하여 대중 사회의 신앙으로 확산되었는데 선종의 수선사(修禪社)와 천태종의 백련사(白蓮社)가 대표적이었다. 또한 고려 대장경(高麗大藏經)이 만들어졌고 승과제도가 실시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명종(明宗) 때 일시적인 불교 부흥이 있었지만 전 시대에 걸쳐 배불(排佛)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세종 때는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하기 위한 종파 통폐합과 같은 조처와 승려를 동원한 사역(使役)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왜란(倭亂). 호란(胡亂)의 국가가 위급할 때에는 의승군(義僧軍)의 활동이 있어 호국 종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숭유억불 정책에서도 왕가의 불사(佛事)와 서민의 예불은 계속 이어졌으나 현세적이고 개인적인 복을 염원하였을 뿐이라고 하겠다.

Ⅲ. 고려시대 상주의 주요 불교사원(佛敎寺院)

불교가 국교가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불교의식은 서울인 개경 뿐 아니라 지방까지 전파되었는데 불교의식을 주관하는 관리는 계수관이었다. 고려시대 상주의 불교사원은 단밀면의 용암사, 장천부곡의 승장사와 용담사, 사불산의 미륵암만 나타나는데 이는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사원이고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은 사원이 있었다고 하겠다. 현재의 상주 행정 구역에 속해있는 사원은 장천부곡의 승장사와 용담사 2개 사원뿐이다. 고려 현종 때 상주 중모현에서 불사리(佛舍利)가 출현되어 이 사리를 현종이 창건한 현화사(玄化寺)에 봉안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중모현에도 대규모의 사원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사원은 현화사가 1017년 창건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까지 중모현에는 대규모의 사원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상주의 여러 사원이 나타나는데 이규보가 29세 때 사위가 상주목사로 나가 있어 그의 어머니가 사위한데 있자 그의 어머니 문안을 하기 위하여 그해 6월에 황려를 출발하면서 그해 10월 되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을 시로 남겼는데 상주에 도착했을 때는 한열병에 걸려 고생을 하면서 여러 사원을 방문하였다. 시에 나타나는 상주의 사원은 봉두사, 화개사, 용담사, 용원사, 원흥사, 용암사, 대곡사, 장안사, 동방사, 자복사, 신흥사의 11개 사원이 나타난다. 사원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추정해 보면 용담사는 낙동면 용포리, 원흥사는 선산의 가덕부곡, 용암사는 단밀면, 대곡사는 예천 다인면 비봉산, 장안사는 예천 용궁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머지 봉두사, 화개사, 동방사, 자복사, 신흥사 등은 상주시내의 사원에서 별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고려 왕실에서 불교의 보전에 대하여 태조의 훈요십조에서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의 십조 중 2항목에 포함된 것을 보면 고려는 불교 국가였고, 불교 역할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화엄종단(華嚴宗團)이 개경에서 인주 이씨에 의해 장악된 유가종단(瑜伽宗團)의 압박이 증가되자 지방으로 내려와 세력유지를 주도하였는데 대부분 경상도 서북지역의 상주 관할지역인 태백산의 각화사, 예안의 용수사에서 세력 유지를 담당해 왔다. 명종은 무신란으로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하여 사원에 재정지원을 하였는데 이 때 지원을 받은 사원은 예천의 용문사에 태자의 태장소(胎藏所)의 설치와 지원, 용수사에 의종(毅宗)을 위한 축수(祝壽), 상주 만악산의 용암사는 명종비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직지사에는 임유(林濡)가 명종을 위한 축성보(祝聖寶)를 설치하고 상주의 공성현에는 김영의(金令義)가 소림사를 중수하여 명종으로부터 축성보를 지원 받았다.

1241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최자는 지금의 산북면 소야리에 백련사를 60여칸으로 3년간에 걸쳐 중수하고 백련결사를 확대하여 몽고의 침입으로 피폐해지고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상주시내 복룡동에 석불좌상이 있으며, 서곡동에서 출토된 고려 범종의 명문에서 “辛亥三月日尙州牧廻浦寺金鐘入重四十五斤前典香大師玄寂鑄成”라는 명문으로 보아 회포사에서 신해년에 제작되었으며, 신해년은 1251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회포사가 어디인지는 모르나 비교적 큰 사원이 서곡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丁巳名尙州安水寺鍾”의 명문을 보면 정사년 안수사 종으로서 안수사도 어디인지 밝혀진바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범종을 제작한 사원이 있다는 것은 대규모의 불교 사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상주 사원은 여러 사원이 있었으나 상주의 계수관이 어느 사원에서 국왕의 축수와 팔관회를 주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축수(祝壽)와 하표(賀表)를 만들어 조정에 올렸는데 상주의 하표(賀表)가 가장 우수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상주의 불사에서 불교행사가 가장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Ⅳ. 기록에 나타나는 상주 불교사원(佛敎寺院)

불교사원에 관한 기록은 상주의 향토지인 상산지(商山誌)에 많은 사원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별로 보면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안사(詳安寺), 안룡사(安龍寺), 개원사(開元寺), 보제사(普提寺), 상원사(上元寺), 황령사(黃領寺)가 있으나 구체적인 위치의 표기가 없다.

상산지는 편찬자와 발간년 간지에 따라 1617년은 창석본(蒼石本), 1749년 청대본(淸臺本), 1928년 무진본(戊辰本)으로 분류된다. 창석본에는 소림사, 흥왕사, 용담사 3개의 사원이 있었고 승장사는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대본에는 37개소의 많은 사원이 나타나고 있으나 창석본에 나오던 소림사, 흥왕사, 용담사 3개의 사원이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사원은 34개소가 있었고 승장사, 소림사, 용담사는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무진본에는 총 40개소가 기록되어 있는데 11개소가 존치하고 39개소가 폐사 되었다.

1757년 여지도서에는 총 5개소로서 남장사, 동관음사, 용흥사 3개소가 존치하고, 승장사, 용담사 2개소가 폐사되었다. 1910년 교남지에는 총 16개소 중 7개소가 존치하고 9개소가 폐사되었으며, 1929년 환여승람에는 북장사, 남장사, 중궁암, 낙수암, 청계사, 반야암, 용흥사, 갑장사, 동해사 10개소가 존치하고 폐사된 사원은 기록되지 않았다. 각 문헌별로 기록된 사원이 일관성이 없어 창건과 폐사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1749년 청대본에 나타나는 37개소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때 사원이 정확하게 조사된 것으로 보인다. 각 문헌별, 사원별, 연대별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구분

1530년

1617년

1749년

1757년

1910년

1928년

1929년

합계

6個

(有6)

4個

(有3, 無1)

37個

(有34, 無3)

5個

(有3, 無2)

16個

(有7, 無9)

40個

(有11, 無29)

10個

(有10)

勝長寺

小林寺

興王寺

龍潭寺

北長寺

望月庵

南長寺

中穹庵

東觀音寺

世至庵

鳳棲庵

念佛庵

落水庵

寂守庵

東 庵

靈山殿

淸溪寺

圓通庵

浩然庵

大院庵

龍門寺

有(?)

般若庵

有(寺)

有(寺)

松臺庵

眞佛庵

靈水寺

無(庵)

普玄庵

龍興寺

甲長庵

有(寺)

有(寺)

有(寺)

文殊庵

鳳歸庵

見日庵

淨水庵

靑龍庵

暎水庵

成佛庵

白雲庵

隱仙庵

明月庵

圓通庵

東海寺

西山寺

無(庵)

布敎堂

淨土宗

詳安寺

安龍寺

開元寺

普提寺

上元寺

黃領寺

주) Ⅰ.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Ⅱ. 상산지(창석본)(1617년)

주) Ⅲ. 상산지(청대본)(1749년) Ⅳ. 여지도서(1757년)

주) Ⅴ. 교남지(1910년) Ⅵ. 상산지(무진본)1928년

주) Ⅶ. 환여승람(1929년)

Ⅳ-1. 상산지에 의한 사원의 기록

상산지(商山誌)는 상주의 연혁, 지리, 행정구역, 특산물, 인물 등이 수록되어 현재 상주시에서 발간하는 상주지(尙州誌)와 같은 형태의 역사지이다. 상산지의 발간은 1617년(광해 9, 萬曆 丁巳) 강복성, 정호선 목사의 청에 의하여 창석 이준선생에 의하여 편집되었는데 이때의 명칭을 창석선생이 편집하였다하여 창석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후 창석의 손자인 재관이 이어서 재편집을 하였으나 현재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1680년(숙종 6) 도남서원에서 속편을 편집하였으나 운영상의 미비로 인하여 중단되었고 이때의 속편도 현재 전하여지지 않는다.

1749년에 이르러서는 청대 권상일 선생이 창석본을 바탕으로 새로 이어서 편집을 하였는데 이 때 발간된 것이 청대본이다. 그 후 구당 조목수가 이어서 편집을 하였다.

1832년(순조 32)에는 어명에 의하여 전국의 읍지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이때 발간된 것이 임진본(상주목읍지)이다. 이 목읍지는 상산지의 형식과는 다르게 편집되었다.

1928년(무진본)에는 향의에 의하여 이어서 편집을 하였는데 이 때 발간본은 무진본이라고 부르며, 2002년 상주문화원에서 한글로 번역을 하였다.

이러한 상산지는 상주지(尙州誌)로 이어지는데 상주지는 1998년 상주시와 상주군에서 합동으로 발간하였고, 이어서 2011년 상주지를 수보하여 상주시사(尙州市史)를 발간하였다.

상산지에 기록된 사원은 사원명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창석본, 청대본, 무진본의 기록을 그대로 이기하여 보았다.

Ⅵ-1-1. 창석본(1617년)

勝長寺(승장사) 在長川部曲今無(장천부곡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小林寺(소림사) 在功城縣金義令所重修林椿作記(공성현에 있었으니 김의령이 중수하였고, 임춘이 기를 지었다.)

興王寺(흥왕사) 在州治之西五里許(주치 서쪽 5리에 있다.)

龍潭寺(용담사) 在長川部曲(장천부곡에 있다.)

Ⅵ-1-2. 청대본(1749년)

勝長寺(승장사) 在長川部曲金尙直重創記曰 高麗忠烈王受中朝之命命上洛公金方慶東征倭冠王幸金海府以餞之反其還駕駐蹕于玆今廢(장천부곡에 있다. 김상직의 중창기에 고려 충렬왕 때 조정의 명을 받아 상락공 김방경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였다. 왕이 김해부에 김방경과 함께 갔다가 돌아올 때 이곳에서 머물렀다. 지금은 없다.)

龍潭寺(용담사) 在長川部曲李奎報‧金良鏡有詩今廢(장천부곡에 있었으며, 이규보, 김양경의 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小林寺(소림사) 在功城縣金義令所重修林椿作記今廢(공성현에 있었으니 김의령이 중수하였고, 임춘이 기를 지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北長寺(북장사) 在露陰山後(노음산 뒤에 있다)

望月庵(망월암) 在天峰山頂(천봉산 정상에 있다)

南長寺(남장사) 在露陰山前有千年鐵佛有時流汗則有兵亂或旱蝗上法堂重修時見古上樑文成化十四年戊戌己四度重創云(?)(노음산 앞에 있으니 천년이나 된 철불이 있어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닥칠 때에는 스스로 땀을 흘리는 영험이 있으며, 법당을 중수할 때 발견한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1478년(성종 9)에 네 번째 중창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中穹庵(중궁암) 在寺東北絶頂上(절 동북쪽 끝나는 곳 정상에 있다.)

東觀音寺(동관음사) 在化北面俗離山(화북면 속리산에 있다.)

世至庵(세지암) 在洞口有鄭愚伏題名(동구에 있었으며 정우복선생의 제명이 있다.)

鳳棲庵(봉서암) 在念佛西幽遠可愛(염불암 서편에 있었으니 유심한 경치가 가관이다.)

念佛庵(염불암) 在落水西(낙수암 서쪽에 있다.)

落水庵(낙수암) 在寺北高峰石壁水自石竇中懸出故是名所見通暢爲山下第一(절 북쪽 고봉 석벽에서 물이 떨어져 구멍이 되었으므로 이름이 지어졌고 전망은 산하에서 제일 좋은 곳이다.)

寂守庵(적수암) 在寺東(절 동쪽에 있다.)

東 庵(동 암) 在寂守庵下(적수암 아래에 있다.)

靈山殿(영산전)

淸溪寺(청계사) 在化西溪山中(화서 청계산 안에 있다.)

圓通庵(원통암) 在寺西(절 서쪽에 있다.)

浩然庵(호연암) 在寺北數里幽遠可愛(절 북쪽 수리에 유심한 경치가 가관이다.)

大院庵(대원암) 在寺西舊城中後有蒼壁眼界通暢爲山中第一庵後名泉自石窟中湧出庵名以是(절 서쪽 옛 성중에 있으니 뒤에는 창벽이 둘러쳐 있고 앞은 안계가 통창하여 산중의 제1암이며 암자 뒤에는 석천이 석굴에서 용출하므로 대원이라 불렀다한다.)

龍門寺(용문사) 在中矛白華山中舊名頭逆李公益著莅本州時以其名不雅改今名寺下有盤石長廣(?)五六十步溪水散流於其上逶迤數百步爲龍湫(중모 백화산 중에 있으며 옛 이름은 두역사였다. 이익저 목사가 본주에 있을 때 그 이름이 좋지 않다하여 이름을 고쳤다. 절 아래 반석에는 길이와 너비가 56보나 되는 계수가 산류하고 수백 보 아래에 용추가 되었다.)

般若庵(반야암) 在白華山普門寺北幾里許前望大野(백화산 보문사 북편 수리 허에 있으니 앞에 큰 들이 펼쳐졌다.)

松臺庵(송대암) 在龍門寺東北數里許山腹(용문사 동북 수리 허에 산중에 있다.)

眞佛庵(진불암) 在白華山南邊巖谷中(백화산 남변 암곡 중에 있다.)

靈水寺(영수암) 在熊耳山南麓一名沙寺舊有六房今餘一寮有上中兩庵(웅이산 남록에 있었으니 일명 사사였으며, 옛적에 육방 양암이 있다.)

普玄庵(보현암) 在白雲山下(백운산 아래에 있다)

明月庵(명월암) 在功城西回龍山(공성 회룡산에 있다)

龍興寺(용흥사) 在淵岳山(연악산에 있다.)

甲長庵(갑장암)

文殊庵(문수암)

鳳歸庵(봉귀암) 在梅岳東洞後 매악 동쪽 마을 뒤에 있다.

見日庵(견일암) 在外西兜率山庵後名泉自石窟中湧出水旱無盈縮(외서 두솔산에 있었으니 암자 뒤에 명천이 석굴에서 용출하여 물이 가득하여 마르지 않았다.)

淨水庵(정수암) 在兜率山西屬南長(두솔산 서편에 있었으니 남장사에 속해 있다.)

靑龍庵(청룡암) 在中東靑龍山下洛江邊屬道南役(중동 청룡산 아래 낙동강 변에 있으니 도남서원에 속해 있다.)

暎水庵(영수암) 在首陽書堂後一里山上別谷東南通豁壬亂時鄭侯起龍以本州牧到任于此有遺址(수양서당 1리 산상에 있었으니 별곡이 동남으로 통활하고 있으며 임진란때 정기룡 목사가 본주로 도임할 때 이곳으로 왔다하며 지금도 유지가 있다.)

成佛庵(성불암) 在西山北盤石洞(서산 북편 반석동에 있다.)

白雲庵(백운암) 在內西白雲山中(내서면 백운산 중에 있다.)

隱仙庵(은선암) 在白雲後一里(백운암 뒤 1리에 있다.)

Ⅵ-1-3. 무진본(1928년)

勝長寺(승장사) 在長川部曲今無(장천부곡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龍潭寺(용담사) 在長川部曲李奎報‧金良鏡有記今廢(장천부곡에 있었으며, 이규보, 김양경의 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小林寺(소림사) 在功城縣金義令所重修林椿作記今廢(공성현에 있었으니 김의령이 중수하였고, 임춘이 기를 지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望月庵(망월암) 在天峰山頂今無(천봉산 정상에 있으나 지금은 없다.)

北長寺(북장사) 在露陰山後(노음산 뒤에 있다)

南長寺(남장사) 在露陰山前有千年鐵佛有時流汗則有兵亂或旱蝗上法堂重修時見古上樑文成化十四年戊戌己四度重創 (노음산 앞에 있으니 천년이나 된 철불이 있어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닥칠 때에는 스스로 땀을 흘리는 영험이 있으며, 법당을 중수할 때 발견한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1478년(성종 9)에 네 번째 중창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中穹庵(중궁암) 在本寺東北險頂上(본 절 동북편 험한 정상에 있다.)

東觀音寺(동관음사) 在化西面俗離山今無(화북면 속리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世至庵(세지암) 在洞口有鄭愚伏先生題名今無(동구에 있었으며 정우복선생의 제명이 있으나 지금은 없다.)

鳳棲庵(봉서암) 在念佛庵西幽趣可愛今無(염불암 서편에 있었으니 유심한 경치가 가관이며 지금은 없다.)

念佛庵(염불암) 在落水庵西今無(낙수암 서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落水庵(낙수암) 在寺北高峰石壁水自石竇中懸出故是名所見通暢爲山下第一(절 북쪽 고봉 석벽에서 물이 떨어져 구멍이 되었으므로 이름이 지어졌고 전망은 산하에서 제일 좋은 곳이다.)

寂守庵(적수암) 在寺東今無 절 동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東 庵(동 암) 在寂守庵下以上屬東觀音寺今無(적수암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東觀音寺(동관음사) 이하 동암 이상 제암은 모두 동관음사에 속해 있었다.)

大院庵(대원암) 在寺西舊城中後有蒼壁眼界通暢爲山中第一庵後石泉自石窟中湧出故名以是己上屬淸溪寺今無(절 서쪽 옛 성중에 있으니 뒤에는 창벽이 둘러쳐 있고 앞은 안계가 통창하여 산중의 제1암이며 암자 뒤에는 석천이 석굴에서 용출하므로 대원이라 불렀다하고 청계사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龍門寺(용문사) 在白華山中舊名頭逆李公益著莅本州時以其名不雅改今名寺下有盤石溪水散流於其上逶迤數百步爲龍湫今無(백화산 중에 있었으니 구명은 두역사였다. 이익저 목사가 그 이름이 좋지 않다하여 용문으로 고쳤다. 절 아래 반석에 계수가 산류하고 수백 보 아래에 용추가 되었으나 지금은 없다.)

靈山殿(영사전) 屬東觀音今無(동관음사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淸溪寺(청계사) 在化北淸溪山中(산 북쪽 청계산 중에 있다.)

圓通庵(원통사) 在寺西今無 절 서편에 있으나 지금은 없다.)

般若寺(반야사) 在白華山普門寺北幾里許前望大野(백화산 보문사 북편 수리 허에 있으니 앞에 큰 들이 펼쳐졌다.)

松臺庵(송대암) 在龍門寺東北數里許今無(용문사 동북 수리 허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眞佛庵(진불암) 在白華山南邊巖谷中今無(백화산 남변 암곡 중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靈水庵(영수암) 在熊耳山南麓一名沙寺舊有六房兩庵今廢(웅이산 남록에 있었으니 일명 사사였으며, 옛적에 육방 양암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普玄庵(보현암) 在白雲山中今無(백운산 중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明月庵(명월암) 在功城回龍山今無(공성 회룡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西山庵(서산암) 在西山最高處有四溟堂影閣今廢(서산 정상에 있었으며, 사명당 영각이 있었다.)

龍興寺(용흥사) 在淵岳山(연악산에 있다.)

甲長寺(갑장사) 在甲長山最高處(갑장산 정상에 있다.)

鳳歸庵(봉귀암) 在梅兵東洞後今無(매병동 마을 뒤에 있었다.)

見日庵(견일암) 在外西兜率山巖後名泉自石窟中湧出水旱無盈縮廢 (외서 두솔산에 있었으니 암자 뒤에 명천이 석굴에서 용출하여 물이 가득하여 마르지 않았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淨水庵(정수암) 在兜率山西屬南長今無(두솔산 서편에 있었으니 남장사에 속해 있었다.)

靑龍庵(청룡암) 在中東靑龍山下洛江之邊屬道南書院今無(중동 청룡산 아래 낙동강 변에 있으니 도남서원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暎水庵(영수암) 在首陽書堂後一里山上別谷東南通豁壬亂時鄭侯起龍以本州牧到任于此有遺址(수양서당 1리 산상에 있었으니 별곡이 동남으로 통활하고 있으며 임진란때 정기룡 목사가 본주로 도임할 때 이곳으로 왔다하며 지금은 유지가 있다.)

成佛庵(성불암) 在西山北盤石洞今無(서산 북편 반석동에 있으나 지금은 없다.)

白雲庵(백운암) 在內西面白雲山中今無(내서면 백운산 중에 있으나 지금은 없다.)

隱仙庵(은선암) 在白雲庵後一里許今無(백운암 뒤 1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圓寂庵(원적암) 在化北面靑華山中今無(화북면 청화산 중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東海寺(동해사) 一名寒山寺在州東十里息山上高秀臺下無學上人爲邑基昌寺寺後有大明壇處士李慶南爲大明皇帝每當祭日焚香拜哭(일명 한산사이니 주동 10리 식산상 고수대 아래에 무학대사가 상주가 행주형이기 때문에 높은 곳에 집을 지어 주즙의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하여 창사 하였다 하며, 절 뒤에 대명단이 있어 처사 이경남이 대명황제를 위하여 매양 제일을 당하면 분향하고 배곡하였다.)

西山寺(서산사) 在靑里面西山中凹處舊安四溟大師眞影州牧李韓膺葬其親遂廢寺(청리면 서산 중복 아늑한 곳에 있으니 전에 사명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상주목사 이한응이 그의 친장을 이곳에 하니 드디어 폐사되었다.)

淸溪寺(청계사) 在州西四十里甄萱山城下去乙未兵火燒殘無餘五年前甲子女僧一人創建佛宇自南長寺移安金佛一坐(주서 40리 견훤산성 하에 있었으니 을미년 병화에 소실된 것을 여승 1인이 창건 불우하고 금불 일좌를 남장사에서 이안하였다.)

布敎堂(포교당) 在北城下金龍大乘南長本末寺所創建(북성 하에 있었으니 김용사 대승사 남장사 등의 말사로 창건되었다.)

淨土宗(정토종) 沙門在王山後日本僧所創建(사문 왕산 뒤에 일본인 승이 창건하였다.)

Ⅳ-2 : 기타 기록

상산지 이외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환여승람, 교남지, 조선지지자료에 사원에 관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데 상산지와 같이 상세하지 위치와 연혁이 기록되지는 않고 다만 사원의 명칭과 간략한 소개만 있는 형태이다. 각 기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Ⅳ-2-1.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詳安寺(상안사)

安龍寺(안룡사)

開元寺(개원사)

普提寺(보리사)

上元寺(상원사) 俱在岳山(재악산에 있다.)

黃領寺(황령사) 在縣西黃嶺山(현 서쪽 황령산에 있다.)

Ⅳ-2-2. 여지도서(1757)

勝長寺(승장사) 在長川部曲今無 金尙直重創記曰 高麗忠烈王受中朝之命命上洛公金方慶東征倭冠王幸金海府以餞之及其還駕駐蹕于玆遂屬于天台宗(장천부곡에 있는데 지금은 없다. 김상직의 중창기에 “고려 충렬왕 때 조정의 명을 받아 상락공인 김방경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였다. 왕이 김해부에 김방경과 함께 갔다가 돌아올 때 이곳에서 말을 머물렀다. 그래서 천태종에 소속되었다.”라 하고 있다.)

龍潭寺(용담사) 在長川部曲今無 李圭報詩(?)(장천부곡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이규보의 시가 있다.)

南長寺(남장사) 在露陰山(노음산에 있다.)

龍興寺(용흥사) 在甲長山(갑장산에 있다.)

東觀音寺(동관음사) 在俗離山東(속리산 동쪽에 있다.)

Ⅳ-2-3. 환여승람(1929)

北長寺(북장사) 在露陰山 노음산에 있다.

南長寺(남장사) 在露陰山有千年鐵佛有時流汗則有兵亂或旱蝗成化十四年戊戌四度重創(노음산에 있으니 천년이나 되는 철불이 있어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닥칠 때에는 땀을 흘리며, 성화 14년(1478) 무술년에 4번 중창을 하였다.)

中穹庵(중궁암) 在本寺東北險頂上(본 절 동북쪽 험한 정상에 있다.)

落水庵(낙수암) 水自石竇中懸出(석벽에서 물이 떨어져 구멍이 되어 이름이 지어졌다.)

龍門寺(용문사) 在白華山中舊名頭逆李公益著莅本州時以其名不雅故改今名寺下有盤石溪水其上有龍湫(백화산 중에 있으며 옛 이름은 두역사였다. 이익저 목사가 본주에 있을 때 그 이름이 좋지 않다하여 이름을 고쳤다. 절 아래 반석에는 계수와 용추가 있다.)

淸溪寺(청계사) 在淸溪山(청계산에 있다.)

般若寺(반야사) 在白華山(백화산에 있다.)

龍興寺(용흥사) 在淵岳山(연악산에 있다.)

甲長寺(갑장사) 在甲長山(갑장산에 있다.)

東海寺(동해사) 一名寒山寺在郡東十里息山上寺後有大明壇處士李慶南爲大明皇帝每當祭日焚香拜哭(일명 한산사라 한다. 군 동쪽 10리 식산 상에 있으며, 절 뒤에는 대명단이 있어 처사 이경남이 대명황제를 위하여 매 제일을 당하면 분향하고 배곡하였다.)

Ⅳ-2-4. 교남지(1910)

勝長寺(승장사) 在長川部曲今廢 金尙直重創記曰 高麗忠烈王受中朝之命命上洛公金方慶東征倭冠王幸金海府以餞之及其還駕駐蹕于玆遂屬于天台宗(장천부곡에 있는데 지금은 없다. 김상직의 중창기에 “고려 충렬왕 때 조정의 명을 받아 상락공인 김방경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였다. 왕이 김해부에 김방경과 함께 갔다가 돌아올 때 이곳에서 말을 머물렀다. 그래서 천태종에 소속되었다.”라 하고 있다.)

龍潭寺(용담사) 在長川部曲今廢 李圭報詩(?)(장천부곡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이규보의 시가 있다.)

東海寺(동해사) 一名寒山寺在郡東十里息山高秀臺無學大師所創(일명 한산사라고 한다. 군 동쪽 10리 식산 고수대에 있으며,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

南長寺(남장사) 在露陰山李朝成宗戊戌重修(노음산에 있으며, 이조 성종 무술년(1478)에 중수하였다.)

北長寺(북장사) 在露陰山後(노음산 뒤에 있다.)

龍興寺(용흥사) 在淵嶽山(연악산에 있다.)

東觀音寺(동관음사) 在俗離山東今廢(속리산 동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淸溪寺(청계사) 在郡西四十里山城內乙未火甲子重建(군 서쪽 40리 산성 내에 있으며, 을미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갑자년에 중건하였다.)

明月庵(명월암) 在回龍山今廢(회룡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西山庵(서산암) 在西山最高處有四溟堂影閣今廢(서산 정상에 있었으며, 사명당 영각이 있었다.)

見日庵(견일암) 在兜率山今廢有石泉(두솔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석천이 있다.)

淨水庵(정수암) 在兜率山西今廢(두솔산 서편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靑龍庵(청룡암) 在洛江邊今廢(낙동강 변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暎水庵(영수암) 在首陽書堂後一里壬辰亂牧使鄭起龍到任于此(수양서당 뒤 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임진란 때 정기룡이 이곳에서 도임하였다.)

甲長寺(갑장사) 在甲長山上(갑장산 위에 있다.)

成佛庵(성불사) 在西山北今廢(서산 북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Ⅳ-2-5.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甲帳寺(갑장사) 淵嶽山(연악산)

龍興寺(용흥사) 淵嶽山(연악산)

東海寺(동해사) 內東面維息山下寺刹ハ內南面〃附屬ィ

南長寺(남장사) 露陰山(노음산)

中穹庵(중궁암) 露陰山(노음산)

北長寺(북장사) 天柱山(천주산)

Ⅴ. 사원(寺院)의 속암(屬庵)

사원에 딸린 작은 절이 암자이다. 유교에서도 사원에 딸린 작은 집이 정자이다. 암자는 비교적 절의 규모가 커야지만 암자를 두고 운영을 할 수 있다. 상주에서 절에 부속된 암자는 없는 상태로서 대부분이 암자가 아닌 절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기록에서 상주에 암자가 있는 절은 남장사, 북장사, 청계사. 동관음사이다. 동관음사는 7개의 암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주 최대 규모의 사원이 아닌가 한다. 사원별 암자는 아래와 같다.

- 북 장 사 : 망월암(천봉산 정상)

- 남 장 사 : 중궁암(절 동북 정상)

- 청 계 사 : ①원통암(절 서쪽), ②호연암(절 북쪽), ③대원암(절 서쪽 성안)

- 동관음사 : ①세지암(마을 입구), ②봉루암(염불암 서쪽), ③염불암(낙수암 서쪽), ④낙수암(절 북쪽), ⑤적수암(절 동쪽), ⑥동암(적수암 아래), ⑦영산전

Ⅵ. 전통사찰(傳統寺刹)

상주의 전통사찰은 14개소이다. 전통사찰은 전통사찰보존법에 근거를 둔 사찰이다. 재산의 소유권 제도에서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사유재산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불교 재산도 사유화될 수 없었고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정책에 의해 대부분의 사찰 재산이 사유화되었다. 광복이후 심화된 불교 내부의 분규로 사찰 환경이 황폐화되고 있어 불교 재산을 신라. 고려시대에 형성된 민족적 재산이자 문화유산이라는 취지로 보존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불교재산을 보호하는 법률은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에서 대처승. 비구승 간의 분쟁을 방지하고 불교 재산을 보호하고자 1962년 5월 31일 제정. 공포된 법률이 불교재산관리법이다. 이 법률은 일제강점기에 사찰령이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법률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이라는 점과 종교 간의 형평성이 논란을 일으킴에 따라 불교계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1987년 11월 28일 전통사찰보존법으로 공포되었다. 상주에서는 남장사(관음선원 포함), 갑장사, 용흥사, 동해사, 용화사, 황령사, 북장사, 신흥사, 상락사, 청룡사, 광덕사는 1988년 7월 21일 등록하였고, 청계사는 1993년 2월 1일, 연수암은 2003년 2월 4일, 극락암은 2006년 12월 29일 각각 전통사찰로 등록하여 전체 14개가 등록되어 있다.

종파

사찰명

창 건 자

창건

소 재 지

14개소

조계종

황 령 사

의상대사

638

은척 황령 산35

조계종

용 화 사

의상대사

676

함창 증촌 258-3

조계종

남 장 사

진감국사

830

남장동 502

관음선원

남장동 504

조계종

연 수 암

진감국사

830

연원동 195

조계종

북 장 사

진감국사

833

내서 북장 38-1

조계종

용 흥 사

진감국사

839

지천동 722

조계종

갑 장 사

나옹화상

1373

지천동 산5-3

조계종

동 해 사

무학대사

1398

서곡동 227-3

조계종

청 계 사

도선국사

1617

화서 하송 310-2

법화종

청 룡 사

안 大 師

1672

중동 회상 산200

조계종

극 락 암

김보문행

1913

모서 화현 57-3

조계종

상 락 사

설홍스님

1921

서성동 60-8

조계종

신 흥 사

김 교 순

1925

화북 중벌 526

-

광 덕 사

배 순 강

1925

외남 구서 산2-1

Ⅵ-1. 황령사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 35번지에 위치하며, 칠봉산(七峰山) 아래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63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진성여왕 3년(889년) 대구화상이 중창하였다. 1254년(고종 41년) 10월, 몽고군 차라대가 상주성을 침공할 때 황령사 승려 홍지(洪之)가 관민병을 거느리고 나가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창을 중심으로 창의한 의병의 근거지가 되어 호국의 도량이 되었다. 이 절에는 지방문화재인 아미타후불탱이 보존되어 있다.

Ⅵ-2. 용화사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258-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사전 등 사원은 1954년경에 중창하였다. 설화에 의하면 의상대사기 처음 창건한 상안사의 유지라고하나 이를 증명할 근거나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경내에는 삼층석탑의 면석과 옥개석, 광배편, 주초 등 다수의 석조 유물이 남아 있으며, 석조여래입상과 석조여래좌상 2점의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Ⅵ-3. 남장사

상주시 남장동 502번지 일대 노음산 동남쪽 자락에 위치한다. 직지사의 말사로서 상주에서 가장 번성하였던 사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진감국사가 연원동 일대에 창건하여 장백사라 하였으며, 1186년(명종 16) 각원화상(覺圓和尙)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남장사라 하였다. 성종 무술년(1478)에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금당 등을 1635년(인조 13) 정수(正修)가 중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범패 보급지로 알려져 있다. 남장사 입구 좌측 산자락에는 석장승이 위치하고 있고, 일주문은 싸리나무로 만든 기둥이라고 전해온다.

남장사에는 사원 중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절에는 보광전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감로왕도 4점의 보물과 관음선원에 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 1점이 있으며, 지방문화재인 문화재자료 일주문과 민속자료인 석장승이 있다. 남장사의 주요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830년 (新羅 眞興王 5년) 이전부터 남장사(南長寺)의 전신인 장백사가 노악산(露嶽山)에 있었음.

- 830년 진감국사(眞鑑國師)가 당(唐)에서 귀국해 장백사(長白寺)에 머물렀음.

- 832년 (興德王 7년) 진감국사(眞鑑國師) 무량전(現 普光殿)을 창건함. 금당(金堂) 역할

- 1186년 (고려명종 16년) 각원화상(覺圓和尙)이 장백사(長白寺)를 남장사(南長寺)로 개칭함.

- 1203년 (神宗 6년) 남장사가 장백사의 영향권에서 완전 벗어남.

- 14세기 (공민왕 1330~1374) 보광전(普光殿)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조성함

- 1473년 (朝鮮成宗 4년) 정수대사(正修大師)가 중창함

- 1478년 (成宗 9년) 지금까지 4번 중창함.

- 1610년 (光海 2년)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창건함(남장사의 금당 구실을 함)

- 1621년 (光海 13년) 응진전(應眞殿)을 창건함

- 1645년 (仁祖 23년) 쌍림대사(䨥林大師)가 극락보전(極樂寶殿)의 3존불(三尊佛)을 조성함

- 1649년 (仁祖 27년) 성현(性賢) 수일(守一)이 대성루(大省樓)를 중창함

- 1668년 (顯宗 9년) 관음전(觀音殿)을 중창함

- 1694년 (肅宗 20년) 관음전 후불목탱(後佛木幀) 조성함

- 1704년 (肅宗 30년) 환성영각(喚醒影閣)을 창건함

- 1765년 (英祖 41년) 종언선사(宗訔禪師)가 중수함. 청천료(淸泉寮<嶠南講堂>) 중창함

- 1776년 (英祖 52년) 상하법당을 개수함.

- 1788년 (正祖 12년) 괘불탱(掛佛幀)을 조성함

- 1790년 (正祖 14년) 영산전(靈山殿) 16존상 탱화를 조성함

- 19세기 초, 보광전(普光殿) 후불목(後佛木)탱을 조성함

- 1841년 (憲宗 7년) 응월(應月), 보산대사(普山大師) 등이 모광전(暮光殿) 법당 중수하고 단청함

- 1856년 (哲宗 7년)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함.

- 1981년 (高宗 22년) 보광전(普光殿)을 중수함

- 1895년 (高宗 26년) 관음전(觀音殿). 보광전(普光殿). 불상을 개금(改金)함

- 1980년 5월 18일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을 건립함

Ⅵ-4. 연수암

상주시 연원동 195번지 일대에 조성되어 있으며 정확한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때 장백사의 5개 암자 중 하나였다고 전해지고 있어 창건연대는 83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1930년 중창 때에 와편과 자기편 등이 다수 수습되고,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옛 부터 절터로 전해온다고 한다. 천연의 바위를 둥지로 자리하여 연꽃이 피는 모양 아래 샘물이 항상 나온다 하여 사원명을 연수암이라 하였다.

1980년대 현 주지스님이 주석하면서 대웅전, 삼성각 등 많은 불사를 하였다.

Ⅵ-5. 북장사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 38-1번지 일대에 천주산 서쪽에 위치한다. 833년(신라 흥덕왕 8) 진감국사 혜소(慧昭)가 창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중국에서 10여명의 승려가 들어와 폐허가 된 절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북장사 뒷산에는 수미굴이 있는데 이 가운데는 아래가 좁고 위는 넓은 돌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이 하늘을 받치고 있다고 하여 천주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북장사 사적기에 의하면 1677년(숙종 3) 중창하였으며, 명부전은 1689년(숙종 15) 건립되었으나 최근 중창하였다. 이 절에는 파랑새의 전설이 전해오는 보물 영산회 괘불탱 1점이 있으며, 지방문화재인 삼층석탑 1점이 있다. 삼층석탑은 상주시 인평동에 있던 폐탑을 이건 복원한 것이다.

Ⅵ-6. 용흥사

상주시 지천동 722번지에 위치하며, 839년(신라 문성왕 1) 진감국사 혜소(慧昭)가 창건하였다. 고려 때 한때 폐사되었으나 공민왕 때 혜근(惠勤)이 중창하였다. 1647년(조선 인조 25) 법심, 인화 두 스님, 1680년(숙종 6) 사후, 홍흡 두 스님, 1707년(숙종 33) 사준, 도인 두 스님, 1805년(순조 6) 환월, 정화 두 스님이 각각 중수 또는 중건하였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상산지(尙山誌)에 사원의 이름과 황면(黃緬)의 ‘유용흥사시(遊龍興寺詩)’가 전하므로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비구니 종덕이 박정희의 누나 박재희로부터 시주를 받아 중건한 뒤 비구니 수도처로 이름이 났다. 이절에는 보물인 삼불회 괘불탱이 보존되어 있다.

Ⅵ-7. 갑장사

상주시 지천동 5-3번지일대에 위치한다. 1373년(고려 공민왕 22) 나옹(懶翁)화상이 창건하였으며, 1797년(정조 21)에 연파(蓮坡)스님이 중건하였고 근대에 와서 금봉스님이 중건하였으나 1985년 6월 화재로 대웅전이 전소되었다. 그 후 세웅(世雄)스님이 복원불사를 하여 1988년 5월 관음상을 봉안하였고 1990년 법당을 중창하고 2011년 단청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절 이름은 사장사(승장사, 남장사, 북장사, 갑장사)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갑장사라고 전하는 말이 있다. 법당 앞에는 고려시대 양식의 지방문화재인 삼층석탑 1기가 조성되어 있다. 법당으로부터 100m 동쪽 산 능선에 부도군이 조성되어 있으며, 최근 세웅스님의 부도는 법당 앞 사원 진입로 좌측에 조성되어 있다.

Ⅵ-8. 동해사

상주시 서곡동 227-3번지 식산의 서쪽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해사로 불리기 전에는 한산사(寒山寺)라고 하였다. 사원 서북쪽 정상 부근에는 숭명처사 이경남이 조성한 고수대(高秀臺)가 있다. 1398년(태조 7년) 무학대사가 “상주는 지형이 행주형(行舟形)이어서 이 곳에 사원을 세워 주즙(舟揖)의 역할을 해야 안정된다” 라 하여 세웠다고 한다. 그 후 1638년(인조 16) 희선장로(熙善長老)가 재창하였으며 1838년(헌종 4)에 용담화상(龍潭和尙)이 삼창(三創)하였다고 한다. 1879년(고종 16) 지영산인(智永山人)이 신사(信士)인 이정호(李挺豪), 박정선(朴貞善)이 동쪽으로 옮겨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해사는 무학대사가 이름을 짓고, 식산(息山)의 이름은 옥룡자(도선대사, 827~898)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식산 동쪽에는 식산 이만부가 자리를 잡고 천운정사를 운영하였다.

2004년 동해사 아래에서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되어 2004년 3월 11일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김천 직지사 성보박물관 전정에 전시되어 있다.

Ⅵ-9. 청계사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 310-2번지로서 후백제왕 견훤이 축조하였다는 성산산성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원래의 청계사 위치는 현재의 절 아래쪽 과수원과 펜션이 건립되는 위치로서 을미년(1895년 추정)에 화재로 소실되고 갑자년(1924년)에 중건되었다. 갑자년(1924)에는 청신여 김씨(淸信女金氏)가 현재의 법당을 다시 세웠다.

Ⅵ-10. 청룡사

상주시 중동면 오상리 산 200번지에 위치하며, 1672년(숙종 원년)에 안 대사가 창건하였다. 이 절은 낙동강에 연한 비봉산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한 법화종의 사원으로서 상산의 시인 묵객 등의 유람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Ⅵ-11. 극락암

팔음산 줄기인 상주시 모서면 화현리 57-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13년 김보문행(金普門行) 보살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당우는 극락전과 산신각, 요사가 있다. 사원내 유물로는 청동아미타불상, 아미타후불탱, 신중탱 등이 있으며, 2006년 12월 29일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Ⅵ-12. 상락사

상주시 서성동 60-8번지에 위치하며, 김용사, 남장사, 대승사 등의 포교당으로 1921년 냉림동에 설홍스님이 김룡사에서 불상을 모셔와 창건하였다.

1960년에 현재의 서성동으로 이건하여 상주지역 불교의 포교와 부흥에 크게 기여하여 왔다. 당초 사원 명칭을 처음 포교당이라 하였다가 2000년 9월 상락사로 변경하였다. 법당에는 지방문화재인 목조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Ⅵ-13. 신흥사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 526번지에 위치한다. 1925년 김교순 보살에 의하여 창건하였으며, 법당의 탱화는 1873년에 조성하였다.

Ⅵ-14. 광덕사

상주시 외남면 구서리 산 2-1번지에 위치하며, 서산의 동쪽 자락에 위치하며 1925년 해운당 배순강 스님이 창건하였다. 1946년 5월 15일 “최수운 도덕연원 영세불망비”를 세우고 매년 4월 5일 천제를 올리고 있다. 동학의 교주였던 최제우의 영세불망비를 세우고 천제를 올리는 것으로 보아 동학에 바탕을 둔 불교 사원의 창건으로 볼 수 있다.

해운당은 배순강(裴順江)으로서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자는 영탁(永槕), 호는 기강(基江) 또는 기창(基昌), 별호는 망월퇴(望月退), 도호(道號)는 청임(淸任) 또는 철관도사(鐵冠道士), 당호는 해운당(海雲堂)으로서 고종 16년(1879, 己卯) 1월 15일 상주시 외남면 서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14세 때인 1892년 동학에 입도하여 16세 때인 1894년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다.

상주 서산 성불당에서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 중찰인사(中察人事),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를 목표로 수도 정진하였고, 백두산에서 낙동강까지 강산을 편답(遍踏)하고 산재수제(山祭水際)를 올리는 수도정진을 통하여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도통군자(道統君子)가 되었다.

상주시 청리면 월로리에서 포덕을 시작하여 제자를 기르고 외남면 서산의 북쪽 기슭에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를 이룩하기 위한 서산 광덕사(西山 廣德寺)를 창건하였다.

해운당 73세 때 갑오년 후 58년째인 4월 초 5일에는 광덕사 앞에 최수운 대선생 도덕연원 영세 불망비를 세웠으며, 광덕사 주지 스님에 의하면 해운당실기는 해운당의 제자인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나고 외남면 소상리에 거주한 손광호(孫光浩)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이 실기는 1책 16장 32면(21㎝×30㎝)으로서 한글 행서체로서 1년은 평균 13행씩 전체 약 14,560자가 된다. 그러나 저자와 제작 연대가 기록되지 않아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56년 2월 18일 77세로 타계하여 산소는 외남면 서산 전록(前麓) 미좌(未坐)이다.

Ⅶ. 사원(寺元)의 문화재(文化財) 보유현황(保有現況)

상주 문화재 중 보물은 대부분 사원에 있다. 유물의 비중이 있는 보물이 사원에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신라시대 불교 전성기 이후 시대를 달리하면서 불교가 쇠퇴하였으나 불교의 쇠퇴는 정치적, 외형적 형상으로는 쇠퇴라고 하고 있으나 실상 종교를 믿는 신도는 정치적 영향과 관계없이 불교를 믿어 왔고 규모가 작은 사원은 자연 소멸되었다. 그러나 비교적 규모가 큰 사원은 국가의 지원없이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에 존립을 거듭해 왔고 그 안에 있는 각종유물이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대로 전승되어왔다고 할 것이다.

상주 사원의 문화재 보유 현황을 보면 국가지정 문화재가 9점 지방문화재가 8점이다. 국가지정은 보물로서 남장사(관음선원 포함) 5점, 용화사 2점, 북장사와 용흥사에 각각 1점씩 보유하고 있다. 지방문화재는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로서 남장사 2점, 황령사, 북장사, 갑장사, 동해사, 상락사, 관음사에 각각 1점씩 보유하고 있다.

사원명

문화재

주요 문화재

국가

지방

합 계

9

8

황령사

1

유형(아미타후불탱)

용화사

2

보물(석불입상, 석불좌상)

남장사

4

2

보물(보광전목각탱, 철불좌상, 목조아미타여래

삼존좌상, 감로왕도), 민자(석장승,일주문)

관음선원

1

보물(목곽탱)

연수암

-

북장사

1

1

보물(영산회괘불탱), 문자(삼층석탑)

용흥사

1

보물(삼불회괘불탱)

갑장사

1

문자(삼층석탑)

동해사

1

문자(석조여래입상)

청계사

-

청룡사

-

극락암

-

상락사

1

문자(목조여래입상)

신흥사

-

광덕사

-

관음사

1

유형(아미타회상도)

상주 관내의 불교유적은 27개소 28점이다. 상주전체 문화재 중 약 28%를 차지하는 수량으로서 대부분의 비중 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불상 9구, 석탑 6기, 천인상 2구, 설법도 2기, 탱화 5점, 당간지주 1기, 석장승 1구, 사적비 1기, 일주문 1동이다.

구분

번호

명 칭

수량

위 치

소 유

지정일

27개소 28점

보물

117

화달리 삼층석탑

1기

사벌 화달 422-1

국 유

63.01.21

118

증촌리 석불입상

1구

함창 증촌 258-2

용화사

63.01.21

119

복룡동 석불좌상

1구

서성 163-48

국 유

63.01.21

120

증촌리 석불좌상

1구

함창 증촌 258-2

용화사

63.01.21

661

석각 천인상

2구

상주 박물관

국 유

80.06.11

683

상오리 칠층석탑

1기

화북 상오 699

국 유

80.09.16

922

보광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

1기

남장 502

남장사

87.07.16

923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

1기

남장 504

남장사

87.07.16

990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구

남장 502

남장사

89.04.10

1278

영산회괘불탱

1폭

내서 북장 산38

북장사

98.06.29

1374

삼불회괘불탱

1폭

지천 722

용흥사

03.04.14

1635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1구

남장 502

남장사

10.2.24

1641

감로왕도

1폭

남장 502

남장사

10.2.24

유형

6

복룡동 당간지주

1구

복룡동 207-2

상주시

72.12.29

337

아미타후불탱

1점

직지성보박물관

황령사

02.07.15

431

아미타회상도

1점

함창 오동

관음사

11.9.22

민자

33

석장승

1구

남장 산63-6

남장사

82.02.24

문자

125

삼층석탑

1구

지천 산5-1

갑장사

85.08.05

126

신봉리 석조보살입상

1구

화서 신봉 산2-2

국 유

85.08.05

127

낙상동 폐탑

1기

상주박물관

국 유

85.08.05

128

무곡리 3층석탑

1기

공성 무곡 산46-1

국 유

85.08.05

238

삼층석탑

1기

내서 북장 산38

국 유

98.12.07

437

목가리 석조관세음보살입상

1구

사벌 목가 산6

국 유

03.04.14

442

일주문

1동

남장 502

남장사

03.08.14

456

석조여래입상

1구

직지성보박물관

동해사

04.03.11

518

관음사지 사적비

1기

화남 동관 산178-1

국 유

07.04.30

536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

1구

서성 60-8

상락사

08.04.28

Ⅷ. 사라진 상주의 사원(寺院)과 현대종교(現代宗敎)

상주의 불교 관련 지명과 흔적은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주지역은 예부터 육로와 수로의 교통 중심지로서 일찍부터 농경 문화와 유교 문화가 정착되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지역이었으나 각종 외침과 전쟁의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지역으로서 전통 문화의 흔적은 다른 지역에 비해 파괴의 속도가 빠르고 가속되었다. 또한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가속화되어 지금은 유래와 흔적으로서만 그 역사를 추정해 볼 뿐이다.

이러한 지형적 여건에 따라 불교의 흔적도 마찬가지로 피폐화되고 융성을 보지 못하고 지명 등으로서 전해올 뿐이다. 전국의 사지 조사 현황을 보면 전체 5,393개소로서 경북이 1,334개소로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충남이며, 부산이 12개소로서 가장 적다.

시도명

합계

서울

인천

대전

대구

울산

부산

광주

개소수

5,393

27

73

23

77

40

12

55

경기

강원

충북

충남

경북

경남

전북

전남

제주

536

377

490

854

1334

449

441

560

45

경북의 사지 현황을 보면 전체 1,334개소로서 경주가 353개소로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안동 129개소, 상주가 87개소로서 경북에서 3번째로 많다.

합계

포항

경주

김천

안동

구미

영주

영천

1,334

69

353

36

129

44

44

25

상주

문경

경산

군위

의성

청송

영양

영덕

87

38

16

31

83

22

25

33

청도

고령

성주

칠곡

예천

봉화

울진

울릉

60

8

68

30

30

64

36

3

상주에서는 청리와 화동지역은 전무하며 동지역은 연원동 장백사지외 12개소, 모동면은 용문사지외 7개소, 공성면은 초오리 사지외 9개소, 외서면은 개곡리 사지외 5개소 등이다.

합계

동지역

함창

사벌

중동

낙동

청리

공성

외남

내서

87

13

3

4

3

8

-

10

3

5

모동

모서

화동

화서

화북

외서

은척

공검

이안

화남

8

2

-

3

4

6

4

3

6

2

또한 상주의 지명에서도 불교관련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사된 내용을 살펴보면 상주의 지명을 전체 13,621개의 지명을 조사하였다. 이 지명 중에서 불교와 관련된 지명은 아래 표와 같이 불상, 절터, 절골, 탑골 등의 지명이 전체 지명의 3.2%에 달하는 445개에 달한다. 이와 같은 지명이 전래되고 있는 현상은 상주의 불교가 융성하였고 아직까지 불교의 사상이 시민의 심리에 그대로 살아 있는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불상

불상골

부처

사찰

절터

절골

탑골

445

56

38

34

26

126

100

65

이와 관련하여 불교와 개선교, 천주교 등의 통계와 비교해보면 93개 시설, 23,268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있어 시설 수는 기독교의 178개소에 비해 뒤지는 수치이나 불교는 상주 종교인의 55%를 차지하고 있어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의 전통 교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통계 수치는 단순한 행정적 통계수치이나 대부분은 개선교나 천주교 등의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기 전의 전통 불교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전승 불교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불교

개선교

천주교

기타

시설수

신도수

시설수

신도수

시설수

신도수

시설수

신도수

시설수

신도수

306

42,692

93

23,268

178

12,608

31

6,636

4

180

100%

100%

30%

55%

58%

30%

10%

16%

1%

1%

Ⅸ. 부도(浮屠)

부도(浮屠)는 승탑(僧塔)이다.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으로서 형식은 탑, 석종, 석등형과 기타 특수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상주의 부도는 석종형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북장사의 경우에는 마애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체의 부도는 16기로서 남장사의 부도가 가장 많다.

갑장사

용흥사

남장사

북장사

청계사

황령사

동관음사

서산

16

2

3

4

2

2

1

1

1

Ⅸ-1. 갑장사

법당 동쪽 약 100m 떨어진 지천동 산 5-3번지에 위치한다. 석종형과 육각원당형 부도 2기가 있으며, 2기 모두 일명승탑(逸名僧塔)이다. 석종형은 조선후기에 조성되고 높이 124.3㎝, 폭 77㎝이며, 육각원당형은 1705년에 조성되어 높이 262.8㎝, 폭 55㎝이다.

Ⅸ-2. 용흥사

상주시 지천동 산9-1번지인 용흥사 서북쪽 옆 계곡 산자락 등산로 옆 언덕에 자연석 석축 위에 위치하고 있다.

 일명승탑(逸名僧塔) ①

상주에서 가장 큰 석종형으로서 높이에 비해 둘레가 좁기 때문에 안정감이 적고 지대석은 토사에 묻혀 있다. 상부에는 상부로 가면서 지름이 줄어드는 테를 2개 조식하고 그 위에 8각의 보주를 각출하였다. 조선후기에 조성되었으며, 높이 230.5㎝, 폭 102.8㎝이다.

 일명승탑(逸名僧塔) ②

정암당승탑(晶岩堂僧塔) 아래에 위치하고 근래 훼손된 부도를 수습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조성되었고, 높이 79.5㎝, 폭 46.5㎝이다.

 정암당탑(晶岩堂塔)

석종형 부도 ① 아래에 위치하고 원형에 가깝게 치석하였는데 지대석 부분은 노출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하부가 중심부에 원좌를 음각하여 탑신을 놓고 그 주변에 단 옆의 연화문을 조식하였다. 조선후기에 조성되고 높이 126㎝, 폭 55㎝이다.

Ⅸ-3. 남장사

부도는 남장동 502번지 노음산 남동쪽의 계곡의 끝 부분 남장사에서 관음선원 가는 길 왼편 언덕에 위치해 있다.

 취진당탑(醉眞堂塔)

석종형으로서 탑신 하단에는 굽을 돌리고 그 위쪽으로 양각 대를 장식하여 화지문(花枝紋)으로 조식(彫飾)하고 탑신 정상에 보주를 만들었는데 이중으로 된 앙연봉(仰蓮峰)으로 조각되었다. 조선후기에 조성되었으며, 높이 161㎝, 폭 66㎝이다.

 호영당대사신경탑(晧影堂大師神鏡塔)

석종형으로서 앙연대석과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 정상에는 보주가 연출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조성되고 높이 161.5㎝, 폭 72.5㎝이다.

 환옹당대사삼응탑(喚翁堂大師三應塔)

석종형으로서 탑신부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이 소박하게 조선후기에 조성되었다. 높이 121.5㎝, 폭 61.5㎝이다.

 쌍원당탑(雙圓堂塔)

석종형이며, 대석이나 탑신부분에 아무런 조각이 없고 탑신 측면에 (雙圓堂)이란 명문이 있다. 높이 184.5㎝, 폭 82㎝이다.

실측치는 고 175㎝, 지대석고 6㎝, 탑신고 114㎝, 지대석 일변장 140㎝, 팔각하대석 일변장 38㎝, 보주고 30㎝, 원대고 25㎝이다.

 설한당동화사리탑(雪寒堂東華舍利塔)

불교학자인 뇌허 김동화(1902~1980)의 탑이다. 뇌허는 상주 서곡동에서 출생하여 1913년 상주 동해사(東海寺)로 출가하여, 1914년 상주 남장사(南長寺)에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1930년 남장사에서 혜봉(慧峰)을 법사(法師)로 법맥을 이어받아 뇌허라는 법호를 받았다. 1944년 조선불교 중앙포교사 및 조선불교 교학위원으로 취임하였다. 1947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된 이후 부학장·학장·대학원장, 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거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재 불교계에서는 그의 평소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뇌허 학술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상하고 있다.

Ⅸ-4. 북장사

 일명승탑(逸名僧塔)

내서면 북장리 38-1번지 천주산에 위치한다. 북장사에서 절 좌측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의 잡석 틈에 도괴된 석종형 부도탑신석이 있는데 원 위치와 대석은 찾을 수 없고 탑신 측면을 치석은 하였으나 각자가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다. 상부에는 낮은 원좌를 일단으로 마련하고 그 정상에 보주를 조출하였으며 하면 중앙에 경 14㎝, 심 6㎝의 원공이 시공되어 있어 주인공의 사리공임을 알 수 있으며 조선시대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높이 70㎝, 폭 45㎝이나 1986년까지는 있었으나 수해로 매몰되었는지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 경암당탑(景巖堂塔)

절 좌측 계곡 옆 북장리 37-3번지 상 자연석면을 다듬어 묘갈(墓碣) 모양의 마애(磨崖) 부도 윤곽을 선각(線刻)하고 정상은 원호(圓弧)를 그렸고 하부는 대석과 같이 장방형돌대(長方形突帶)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경암당부도 임인팔월립(景巖堂浮屠 任寅八月立)』이라 기록했다. 높이 65㎝, 폭 44㎝이다.

Ⅸ-5. 청계사

화서면 하송리 310-15번지 절 남쪽 언덕에 조성되어 있다. 원래의 청계사 위치는 견훤사당 뒤쪽 과수원이 조성된 곳인데 폐사되고 새롭게 중창한 곳이 현재의 청계사이다.

 춘파대선사탑(春坡大禪師塔)

석종형이며, 원형지대석으로 탑신에 조식한 흔적이 없으며, 탑신 측면에 춘파대선사탑(春坡大禪師塔)이란 명문만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되고, 높이 140㎝, 폭 84㎝이다.

 영월선사탑(影月禪師塔)

석종형이며, 지대석은 8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나 일부 매몰이 되어 있어 확인 할수 없고, 탑신 측면에 영월선사탑(影月禪師塔)이란 명문이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되고, 높이 159㎝, 폭 80.8㎝이다.

Ⅸ-6. 황령사

부도는 황령리 36-2번지, 대문채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절 앞 있는 황령 저수지 조성공사 때 발견된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전한다. 모양이 같은 부도가 절의 남쪽 맞은편 암자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한다.

 벽허당탑(碧虛堂塔)

석종형 부도로서 지대석 위에 조성된 하면에 8개의 앙연화가 조각되어 있고 상면에도 연화를 복연으로 조각하고 정상에는 보주를 각출하였다. 탑신에는 벽허당(碧虛堂)이 각자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되고, 높이 183㎝, 폭 96㎝이다.

Ⅸ-7. 동관음사

 일명승탑(逸名僧塔)

부도는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산178-1번지, 동관리 절골 마을의 북동쪽 계곡에 있는 관음사 사적비에서 산 정상 쪽으로 약 10m가량 위에 위치하며, 원래 절골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 옆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전하는 일명승탑(逸名僧塔)이다.

석종형 부도로서 다듬어 그 위에 조성되었고 탑신 상부에 1단의 테를 두르고 그 위에 보주(寶珠)를 얹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높이 127㎝, 폭 66㎝이다.

Ⅸ-8. 서산사

 대행당탑(大行堂塔)

서산은 외남면 구서리, 공성면 인창리, 청리면 하초리, 가천리, 덕산리에 걸쳐져 있다. 부도는 서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다. 지대석은 없고 넘어져 있으며, 탑신에는 대행당(大行堂)이 각자되어 있다. 부도의 형태는 석종형(石鐘形)으로서 연화가 조각되어 있으며, 탑신 상부에 1단의 테를 두르고 그 위에 보주(寶珠)를 얹었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높이 175㎝, 폭 81㎝이다.

Ⅹ. 시내의 옛 사원(寺院)

우리나라 가람의 배치는 평지가람(平地伽藍)과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뉜다. 평지가람은 평지에 세워진 사원을 말하는데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사원들은 왕도(王都)나 고을 한복판의 평지에 주로 세워졌다. 따라서 평지가람 중에는 대규모 사원들이 많았다. 경주의 황룡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등이 대표적인 평지가람이다. 또한 평지가람은 건물 배치방식이 궁궐건축의 중문(中門), 정전(正殿), 회랑(回廊) 등과 비슷해서 궁궐과 같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산지가람은 산중에 터를 잡은 사원을 말한다. 산지가람은 기본적인 가람의 질서를 존중하되,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안에 부속건물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상주 읍성 주변에 조성된 사원은 평지가람에 해당된다.

상주시내 즉 옛 상주읍성 성곽내외에 있었던 사원은 백운 이규보(1168~1241)가 상주를 유람할 때의 기록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백운이 상주의 사원을 두루 거치면서 유람을 하였을 때 상주 사원은 봉두사, 화개사, 동방사 등 여러 사원의 이름이 나온다. 이 시찰의 현재 위치를 추정해 보면 봉두사는 신봉동, 화개사는 화개동, 동방사는 복룡동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여기에 나타나는「동방사」가 복룡동 석불좌상과 복룡동 당간지주가 위치한 일대 영역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의 사원은 남성동에 위치하였던「만석사」인데 이곳은 상주읍성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나 용화전기에만 사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원이다. 백운 이규보의 유람 내용에 만석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고려 시대 이전에 폐사된 사원으로 보인다.

지금은 사원이 훼철되고 없지만 불탑과 석등 등 불교 관련 유적이 잔존하고 있어 폐사전의 위치와 남아 있는 유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Ⅹ-1. 복용동 석불좌상(伏龍洞 石佛坐像)

Ⅹ-1-1. 연혁(沿革)

석불좌상은 상주시 복룡동 358번지에서 1975년(단기 4308년) 10월 18일 현재 위치인 서성동 163-48번지로 이건한 것이다.

복룡동에 봉안되어 있을 당시 석불을 보호하고 있는 손학모(80세, 복룡동 358번지 거주) 옹의 말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현재 위치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였으며, 이전의 불상의 유래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가 없다.

불상은 마을 중심에 동향으로 단간와우(單間瓦宇)를 세우고 그 안에 봉안 하였는데 입구의 주두에는「毘盧殿」이라 쓰인 현판이 있고, 당우 내에는「미륵전(彌勒殿)」이란 현판이 있는데 현판에는「庚戌(?)秋書(?)李」란 부기가 있다. 층계를 올라 당내에 들어가면 시멘트 바닥이고 그 중앙에 좌상을 안치하고 주위 벽에는 대. 소등이 걸려 있어 최근까지 불상을 공양하는 신도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경인년(庚戌年)은 바닥이 시멘트 바닥으로서 시멘트를 사용하였다면 근대로서 근대의 경술년은 1910년이다. 따라서 보호각은 1910년경에 건립하여 석불을 봉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복룡동 358번지는 종교용지 13㎡, 상주시 소유로서 인근 주민이 전(田)으로 경작을 하고 있다.

Ⅹ-1-2. 현상(現狀)

상주시 서성동 163-48번지 왕산 7부 능선 남향 기슭 보호각에 봉안하였으며, 명칭은「상주 복룡동석불좌상」으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19호로 지정되었으며, 국가 소유이다.

현고 153㎝, 무릎 잔존높이 116㎝의 석조 불상으로서 광배와 대좌는 결실되었고, 불신도 하반신과 육계, 손 등이 훼손된 불 완전형 불상이다.

육계는 흔적으로 보아 넓게 펴진 것으로 보이며, 육계 아래로 나발흔적이 남아 있다. 둥글고 풍만하게 내려 뜬 눈, 작고 두툼한 입, 양귀는 길고 두터운 편이고 목에는 삼도가 보이는데 바튼 목과 어깨가 위축된 감이 있다. 손은 파손되었으나 지권인(智拳印)으로 통식(通式)과는 반대로 잡았다. 통견의(通肩衣) 주름은 U자형이 연속되면서 무릎을 덮었는데 간격이 좁은 평행의습(平行依褶) 선이다. 어깨에 걸침주름은 부채꼴 모양으로 대칭되게 처리하였으며, 하체는 파손이 심한데 가부좌를 올린 왼발 발바닥이 거칠게 표현되어 불신 표현과는 차이를 보인다. 유연한 옷 주름 표현과는 달리 신체는 다소 둔중해지고 형식적인 면도 있어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Ⅹ-2. 복용동 당간지주(伏龍洞 幢竿支柱)

Ⅹ-2-1. 연혁(沿革)

현재의 농지보다 높게 조성된 기단위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고, 주변의 논에서는 조선시대의 자기, 와편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단선문, 고려시대의 어골문 와편이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 말이나 고려초기부터 사원이 위치하고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의 위치는 복룡동 207-2번지로서 1972년 12월 29일 지방문화재 제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Ⅹ-2-2. 현상(現狀)

당간지주는 폭과 두께가 상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제형으로 모서리 부분은 말각(抹角)으로 처리하였다. 주두의 외면 정상부는 호형으로 처리하여 곡선을 이루고 있다. 외형상 통일신라기에 유행하는 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주신 중앙의 절이나 단을 두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과는 구분된다. 단지 주신과 매몰되는 부위와는 거칠게 치석한 단을 두고 구분하고 있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2매는 총길이는 345㎝, 주신은 330㎝이다. 2개의 당간지주 사이에 누워있는 1매는 총길이 347㎝, 주신 236㎝로서 치석된 하단에서 64㎝되는 곳 중앙에 지름 35㎝, 깊이 11㎝의 원형 홈이 있다.

이 원형의 홈 외곽에는 8엽의 단판연화문(單板蓮花紋)이 조형(造形)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공(圓孔)이 당간을 고정시키는 용도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개 당간지주 말각 정도의 차이와 간구의 위치가 서로 다른 점으로 볼 때 이곳에 2기의 당간지주가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청주시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도 2개의 당간지주 사이에 1매가 누워있는 형태인데 그 위에 철 당간을 세웠다. 누워있는 1매도 상주의 당간지주와 같이 앞쪽 한 면이 넓고 뒤쪽 한 면이 좁은 형상으로 비슷하게 제작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상을 볼 때 2기의 당간지주가 아니고 1개의 당간지주로서 당간만 유실된 형태로 볼 수 있겠다. 또한 누워있는 1매는 홈이 파여져 있는데 이 홈은 당간의 하부가 홈에 들어가 이동이 되지 않도록 요철(凹凸)을 둔 구조이고, 홈 주변에는 연화문을 조각한 것으로 보아 1기의 당간지주 임을 확신할 수 있겠다.

또한 상산지의 기록을 살펴보면「주동(州東) 율수중(栗藪中)에 있으니 두 대석(大石)이 대립(對立)하고 있고, 중간(中間)에 혈(穴)이 있으며, 옆에 누워 있는 또 한 대석(大石)은 길이가 5(丈)이나 되니 모두 다듬은 흔적(痕迹)이 있어 천작(天作)은 아닌듯하며, 어느 때 무엇에 쓰기 위하여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혹자는 야사(野寺)에 지탑석(支塔石)이라 하고 또 혹자는 풍수설(風水說)에 상주가 행주형(行舟形)이기 때문에 대석(大石)으로 주즙(舟楫)(배와 삿대)을 만들어 진정(鎭定)하게 한 것이라 하나 상고(詳考)하기 어렵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불교 유적과 풍수지리설에 의한 진압용으로도 해석하고 있다.

Ⅹ-3. 동방사지(東方寺址)

도시가 형성되면서 수구(水口)는 풍수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건 중의 하나로서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도 지리 선택의 첫 번째 요건으로 보고 제대로 닫힌 수구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상주 시내의 지형은 모서 대포재에서 발원하여 시내의 북동쪽으로 흐르는 물과 공성의 웅이산에서 발원한 남천이 남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복룡동에서 합수하여 병성천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에 충적평야가 조성되어 상주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이 남천은 중국의 지명을 따서 남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이천(伊川)이라고 하였다. 북천 변에 있는 흥암서원의 뒷산은 노음산에서 분기하여 북천에서 머무는 형상이 지네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오공지형(蜈蚣之形)”이라고 하였다. 오공지형의 형상은 지네가 시내를 엄습하여 오는 형상이라 하여 북천과 남천이 합수하는 지점에 밤나무를 심어 지네가 시내로 엄습하지 못하도록 제방을 만들고 율수(栗藪)를 조성하였다.

또한 동해사에는「동해사사실기」가 목판에 음각한 현판이 보존되어 있는데 1881년에 제작되었다. 이 사실 기에는「상주 들녘이 떠다니는 배의 형국과 같아서 돛에 해당하는 부위에 일석을 두고 동쪽외곽에 있는 곳에 걸어 이로서 노를 멈추고 배를 묶어 놓는 의미다. 또 멀리 수구의 허한 곳에 가산을 만들고 두 하천(북천과 병성천) 사이의 허한 곳에 동방사를 세웠다」라는 내용에서 두 하천의 허한 곳은 지금의 새봇들 주변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동방사는 현재의 당간지주가 위치한 일원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비보사상에 의해 조성된 것이 복룡동에 있는 조공제와 율수, 그리고 동방사라고 할 수 있겠다.

상주와 유사한 도시 형성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성주 읍기의 형세는 이천(伊川)이 성주읍을 감싸 안고 동편으로 흘러 백천(白川)과 합류하고 있는데 이곳이 읍기의 수구이다.

이곳이 성주의 지기가 이천(伊川)과 같이 빠지는 형세로서 이를 비보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예산리에 있는 동방사지 7층 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60호)이다.

율수(栗藪)에 관한 비보도 상주와 같이 전해지는데 성주읍이 오공지형의 형상이라 지네의 극기(極忌)인 밤나무를 심어 지네의 독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향교 남쪽 이천(伊川)변에 밤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상주와 성주는 도시가 형성된 지형이 비슷하기 때문에 풍수지리에 의한 비보도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 특이하며, 진압 및 수구막이로 조성된 사원 이름도 동일한 것이 주목된다.

Ⅹ-4. 남성동 용화전(南城洞 龍華殿)

용화전의 위치는 상주시 남성동 9-6(현재 남성동 9-14. 9-22. 9-7)번지에 위치하였으나 1982년 상주시 신봉동 2-1번지로 이건하였고, 2007년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소재 상주박물관으로 용화전의 보호각은 남겨두고 취악천인상과 공양천인상, 석등하대석, 용화전 편액, 용화전 창건기 현판을 옮겼다. 석각천인상은 1980년 6월 11일 보물 제66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 신봉동 2-1번지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보호각만 남아 있다. 용화전에 걸려 있던 박인술이 쓴 현판에는「신라, 고려 때 소 암자가 왕산의 서남쪽 수십 미터 거리에 있었는데 “만석사”라고 하였다. 그 곳은 지금 폐허가 된 터 즉 서성내의 도창지이다. 지금 도창은 없고 창고 하나만 있다. 절이 폐허가 된 후부터 2구의 석불이 창고의 남쪽 뜰에 세워져 있었다..... 본 동민이 그 창고의 재료와 기와를 사서 부역으로 공사를 하여 옛터에 1간의 전각을 짓고 용화전이라 하고, 2구의 불상을 전각의 중앙남벽에 모셨다」라고 하였다. 이 기에 따르면 현재의 서성동 9-6번지에 “만석사”라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은 탑의 기단 갑석 1개와 면석 1개, 취악천인상 1개, 공양천인상 1개를 기단위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용화전 터는 보호각이 철거되고 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Ⅹ-5. 폐탑 흔적(廢塔 痕迹)

시내에서 발견되는 폐탑의 부재는 왕산 아래와 시내 곳곳에서 나오는 부재를 모아서 임란북천전적지에 모아 두었다. 이와 같은 폐탑 부재는 왕산 아래 축조된 석축시설 자재로 이용되었고, 일부는 묘지의 석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시내 곳곳에서 발견된 석탑부재는 주택의 주초나 석축, 담장 부재로 이용되다가 주택을 개축하면서 발견되어 옛 상주군청 전정과 상주시청 전정에 모아둔 것을 임란북천전적지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폐탑 부재는 옛날 시내에 있었던 사원인「동방사」나「만석사」의 탑 부재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왕산 아래에서 발견된 석등하대석은 상주박물관 전정에 전시하고 있으며, 석탑 면석의 일부는 왕산 주변을 정비하면서 매몰되었다.

석탑이 묘지 석물로 사용된 경우에는 상주시 화개동에 위치한 사서 전식의 묘역에 석탑 기단갑석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기단갑석은 만석사지에 있었던 기단갑석과 형상이 같은 것으로 보아 시내에 있던 탑 부재를 옮겨 간 것으로 보인다.

Ⅹ-6. 사원(寺院)의 조성(造成)과 폐사(廢寺)

불교유적의 위치는 용화전(만석사)는 남성동 2-9번지, 석불좌상은 복룡동 358번지, 당간지주는 복룡동207-2번지이다. 용화전과 석불좌상과의 거리는 직선거리 670m, 옛길 도보거리 1,080m 이며, 석불좌상과 당간지주는 직선거리 760m, 옛길 도보거리 1,120m 이다. 즉 석불좌상을 중심으로 만석사(용화전)와 당간지주는 비슷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거리는 동일한 시기에 1㎞이내에 3개의 사원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시기를 달리하는 사원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유적의 시기를 판단해 보면 용화전의 유물인 석각천인상(취악, 공양)은 조성시기가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은 고려시대,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말~고려시대이다.

이러한 시기별로 볼 때 만석사(용화전)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어 어느 시기에 폐사되고, 석불좌상과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말 ~ 고려시대에 조성되어 그 후 어느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백운 이규보가 동방사를 본 것으로 추정해 본다면 백운의 생몰기간이 1168~1241년으로서 가장 늦게는 1241년까지는 동방사가 존립하였으며, 석불좌상과 당간지주는 직선거리 760m가 이격되어 있으나 평지가람 조성은 대규모의 가람이 조성되므로 석불좌상과 당간지주 2개의 유적이 동방사지(東方寺址) 경내로 이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Ⅹ-7.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의 행선지

(行先地)로 본 상주의 사원

백운 이규보는 1168년 12월 16일 황려현 즉 현재의 여주에서 호부낭중(戶部郎中) 이윤수와 금양군인(金壤郡人)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1189년 21세에 장원을 하였다. 1232년 65세에 보문각학사에 기용되고, 1241년 7월 73세에 최이(崔怡)가 이규보가 지은 시들을 모아 판각하였다. 그 후 1241년 9월 2일 74세에 운명하여 시호를 문순공으로 봉하고 그해 11월 6일 진강산 동쪽 기슭에 안장하였다.

이규보가 지은 자료를 모은 동국이상국집을 아들 함(涵)이 1241년 전집(全集)41권을, 그 이듬해에 후집(後集) 12권을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상주의 지명과 관련된 시(詩)를 바탕으로 행선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32년 5월 거주지에서 출발하여 고향인 황려(경기도 여주)에 도착하여 고향 사람 마암, 이대성과 교유(交遊)하고 6월 11일 황려를 떠나 상주로 향하였다.

요성(문경시)의 역루를 지나 6월 14일 처음 상주에 들어 왔다. 봉두사(鳳頭寺)를 거쳐 화개사(花開寺)에서 병으로 우거하다가 용담사로 갔다. 8월 7일 새벽 용담사를 출발하여 용포에 배를 띄워 낙동강을 지나 견탄으로 가서 8월 19일 장안사에 묵고 21일에 하풍강에 배를 띄웠는데 길을 잘못 들어 협촌에 이르렀다. 상주에 들어와 동방사(東方寺)에 묵는데 박군문로(朴君文老)와 최수재(崔秀才)와 김 수재가 기생과 술을 준비해 찾아왔기에 한 수를 구점(口占)하였다. 9월 9일에 자복사(資福寺)의 늙은 주지를 찾아 머물러 술을 마시고, 두 번째로 봉두사에서 놀았다. 9월 15일에 상주(尙州)를 출발하였는데 서기가 신흥사(新興寺).에 나와 전송하였다.

이 유람의 행선지에 나타나는 사원은 봉두사, 화개사, 용담사, 동방사, 자복사, 신흥사라는 6개의 사원이 나온다. 봉두사는 신봉동 일대, 화개사는 화개동 일대, 용담사는 낙동면 용포리, 동방사는 복룡동, 자복사는 남성동 만석사지를 보는 견해가 있으며, 신흥사는 연관되는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

따라서 1232년경에는 상주 시내에 봉두사, 화개사, 동방사, 자복사라는 4개의 사원이 있었다고 하겠다.

상주의 사원에서 지은 시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봉두사(鳳頭寺)에 쓰다

절은 오래지만 산은 지금도 푸르고 / 寺古山猶碧

스님 고명하니 경치 더욱 맑아라 / 僧高地更淸

들 구름은 비 올 징조 보이는데 / 野雲含雨意

소나무에 부는 바람 가을인가 의심하네 / 松籟僭秋聲

지는 해는 까마귀 떼에 반짝거리고 / 落日鴉邊耿

지는 놀은 해오라기 위에 밝구나 / 殘霞鶩外明

시인의 기습이 남아서 / 詩人餘習氣

잎을 따서 그윽한 정을 쓴다오 / 摘葉寫幽情

 화개사(花開寺)에 우거(寓居)하면서 당두(堂頭)에게 주다

잠깐 한가한 즐거움을 얻어 / 暫得休休樂

고생스러웠던 수고를 갚으려 하오 / 聊償役役勞

샘은 급하게 멀리 흘러가고 / 石泉飛趁遠

솔 덩굴은 뻗어서 높은 데로 오른다 / 松蔓走緣高

풀가에 매미는 허물을 남기고 / 草際蟬遺蛻

숲 속의 새는 털을 떨어 뜨렸네 / 林間鳥墮毛

선사가 복축하는 것을 용납해 준다면 / 憑師容卜築

잠시 여기에 은둔하여 쑥대로 비녀 하겠네 / 小隱此簪蒿

 화개사에서 고인(故人) 혜운사(惠雲師)가 머무는 용담사(龍潭寺)에 이르러 쓰다

빈 골짜기는 바람이 오히려 소리를 내고 / 空谷風猶響

찬 시내에는 물이 스스로 방아 찧는구려 / 寒溪水自舂

지둔은 말을 사랑하여 기르고 / 養憐支遁馬

섭공은 용을 축원하여 내리네 / 呪下涉公龍

작은 채전의 영출을 물주고 / 小圃流靈朮

그윽한 뜰의 어린 솔을 보호 하네 / 幽庭護稚松

맑은 밤 한 번의 경쇠 소리에 / 一聲淸夜磬

반달이 먼 봉우리에 떨어지누나 / 半月落遙峰

 자복사(資福寺)의 늙은 주지를 찾아 머물러 마시다

문 앞에 찾아오는 백의가 없어 / 門前不見白衣來

홀로 절을 향하여 술을 찾는다 / 獨向僧家索酒杯

머리엔 꽃가지 가득 꽂고 입엔 향기 넘치니 / 枝揷滿頭香滿口

황하로 하여금 헛되게 핀 것을 한하지 않게 하였네

/ 免敎黃花恨虛開

 두 번째 봉두사(鳳頭寺)에서 놀다

한 번 양주의 청루몽을 깨고 / 揚州一覺靑樓夢

거듭 여악의 백련사(白蓮社)를 찾았네 / 廬嶽重尋白社栖

화류를 놓아버릴 적에 붓도 던져버렸다 / 花柳放時兼放筆

산승은 어찌 머물러 쓰기를 바라는가 / 山僧何苦乞留題

 이날 서기(書記)가 신흥사(新興寺)에 나와 전송하자 최백환(崔伯桓)이 첫머리에 쓴 운을 차하다

강남의 쓸쓸한 갈대꽃 가을 / 江南蕭洒荻花秋

멀리 노는 사람 전송하는 낭관에 감사하오 / 多謝郞官餓遠遊

섬섬옥수는 쟁 한 곡조를 타지 말라 / 纖玉莫彈箏一曲

줄마다 온갖 근심을 띄었도다 / 絃絃帶萬船愁

Ⅹ-8. 소결

상주시내에 위치한 사원을 기록과 남아 있는 유적을 토대로 고대 사원의 위치를 비정해 보았다. 그러나 기록과 발굴 유물의 한계로 인하여 정확한 고대 사원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읍성 내부와 읍성동쪽에 조성되었던 사원은 만석사와 동방사라고 할 수 있다. 평지에 조성된 사원은 산지에 조성된 사원보다 규모가 크고 정형적으로 조성되기 때문에 상주읍성의 상주목 관아 남서쪽에 만석사(자복사)가 조성되어 일정 시기 동안 존립해오다가 폐사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그 이후 상주읍성 동쪽에 동방사가 조성되면서 복룡동 석불좌상과 당간지주가 조성된 것으로 할 수 있겠다.

현재의 불교 유적 이외에 사원과 관련된 명문이 발굴되던지 아니면 사원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만석사 또는 동방사지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점은 있으나 다른 기록이나 발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지금에서는 남성동 2-9번지 일대는 만석사지, 복룡동 358번지와 217번지 일대는 동방사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Ⅺ. 불탑(佛塔)

불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묻고 그 위에 돌이나 흙을 높이 쌓은 무덤이나 묘(廟)였다고 한다. 솔도파, 수두파, 탑파라고도 하며, 일반적인 탑은 고대 인도어인 범어의 stūpa의 소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탑파’(塔婆)를 파고다(pagoda)라고 부르는데 서울 종로에 있는 파고다 공원의 명칭도 이러한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주의 불탑은 불교 사지가 다른 지역보다 많은 지역으로서 탑이 일부 남아 있지만 많은 사지에 비해 탑은 적은 편이다. 현재 복원된 탑을 포함하여 석탑재가 발견된 곳을 포함하면 탑이 22여기 정도로 파악된다.

또한 불탑은 석탑과 석심회피탑이 전해지지만 현존하는 탑은 모두 석탑이다.

Ⅺ-1. 화달리 삼층석탑

사벌면 화달리 422번지에 위치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어 보물 제117호로 지정되었다.「조선 보물 고적조사 자료」에는 화달리에 2기의 탑이 조사되었는데 “불탑이 국유림 내에 높이 8척, 직경 6척, 사방 사층으로 이루어진 탑이 있었고, 석탑이 화달리(달천) 민유림 내에 높이 20척, 기단부 2간의 4방 3중 석탑이 있고 탑 아래에 높이 3척, 견폭 1척2촌의 석불좌상이 있다”라고 하였다.

조사 자료에서 8척의 탑은 불탑으로 표기하였고, 20척 탑은 석탑으로 표기 하였다. 표기의 오기인지는 불확실하나 2기의 탑 모두 불탑으로 보이고 높이 20척의 탑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탑이고, 높이 8척의 탑은 사라지고 없다. 일설에는 이 탑을 철거하여 도남서원에 중수 부재로 사용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고적조사 자료는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자료이고 도남서원은 1871년 훼철된 후 설단을 한 것으로 보아 도남서원에 사용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도남서원의 석축에는 탑재로 보이는 석부재가 여러 곳에 보인다.

또한 탑의 소재 위치별로 보면 높이 8척의 탑은 화달리이고, 높이 20척 탑은 화달리(달천)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같은 위치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높이 20척 탑이 현재 보물로 지정된 탑이라면 8척 탑은 화달리내 다른 위치에 있었는데 사라졌다는 것이다.

Ⅺ-2. 낙상동 폐탑

낙상동 석문정 고개의 우측 산기슭에 있던 것을 2000년 2월 23일 충의사로 옮겼다가 2007년 11월 2일 상주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야외 전시장으로 옮겼다. 잔존부재는 대부분 옥개석이며, 옥개석은 8개의 돌을 다듬어 각각의 다듬돌을 결구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형식은 모전 석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조성 시기는 8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Ⅺ-3. 북장사 삼층석탑

인평동 소재의 우암산 7부 능선에 도괴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1998년 북장사로 옮겨와 복원한 것으로서 탑 높이는 5.45m, 한변 길이는 3.27m로서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탑이 있었던 곳에는 표석을 세우고 주변에는 일부 탑부재가 아직도 남아 있다.

Ⅺ-4. 용화사 석탑

함창읍 증촌리 258-3번지 용화사내에 위치하며, 약사전 맞은편에 폐탑부재를 이용하여 삼층석탑으로 복원하였고, 석탑 주변에는 석탑을 복원하고 남은 옥신석과 옥개석이 1개씩 있다.

기단부 상층에 8면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으나 이탑에는 2개의 상만 남아 있다. 북면에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합장하는 모습을 하고 있고, 동면에는 오른손은 가슴위로 왼손은 복부에 위치하면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모습을 하고 있다.

복원하고 남은 옥신석에는 불좌상 1구가 부조되어 있다. 불좌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두광과 신광이 있고 머리는 소발이며, 그 위에 육계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조성 시기는 복원된 석탑재는 8세기 후반, 석탑 아래에 있는 부재는 9세기로 보인다.

Ⅺ-5. 상오리 칠층석탑

화북면 상오리 699번지에 위치하며, 이 탑은 고려 때 장각사라는 절이 있어 장각사 내의 탑이며, 장각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또한 한일 병합 시기에 일본 낭인이 북쪽 기단을 헐어서 무너뜨렸다고도 한다. 무너져 있던 탑을 1977년 복원을 하였으며, 2007년 탑이 기울어지고 붕괴의 우려가 있어 전체를 해체하고 지의류를 제거한 후 복원을 하였다.

탑의 규모는 높이가 9.21m, 한 변 길이가 2.8m, 7층으로서 고려시대 조성되었다.

Ⅺ-6. 갑장사 삼층석탑

상주시 지천동 산 5-1번지에 위치하며, 법당 앞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단층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는 없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서 2007년 붕괴의 우려가 있어 해체 복원하였으며, 탑의 높이는 2.03m이다. 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Ⅺ-7. 유곡리 삼층석탑

낙동면 유곡리 1035-2번지에 위치하며 관터 마을 주변이다. 이탑은 1988년까지 현재 복원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2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었던 것을 상맥회에서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면서 3층과 상륜부까지 만들어 복원하였다. 높이는 3.19m 이며,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한다.

Ⅸ-8. 무곡리 삼층석탑

공성면 무곡리 산 46-1번지에 위치하며, 원래는 기양산 정상 부근인 산 37-2번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82년 주민이 발견하여 1991년 현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탑신의 2층과 3층은 없고, 나머지 부재는 원래의 것이며, 고려시대 탑이다.

Ⅺ-9. 초오리 삼층석탑

공성면 초오리 570번지 일대 초오리 사지에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77년 옥산초등학교 동편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옥개석 3개는 원래의 것으로 기단, 탑신, 상륜부는 새로 만들어 복원한 것이다. 「조선 보물 고적조사자료」에는 “높이 6척, 기단 4척의 3층 석탑이 경작지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석탑을 무너뜨리고 탑 속의 금제 사리 장치를 가져갔다고 한다. 3층으로서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Ⅺ-10. 인창리 석탑

공성면 인창리 301-1번지 탑골 마을에 있다. 소형 탑으로서 2층 기단부와 1층 탑신부만 남아 있다. 1층 기단부와 갑석을 하나의 석재로 제작되었고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다. 2층 기단 면석은 4매 판석을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갑석 모서리 일부는 결실되었다. 1층 탑신부 옥신석에는 감실을 표현하고 감실 주위에서 3개선을 돌렸다. 그 위에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한다.

Ⅺ-11. 용호리 삼층석탑

모동면 용호리 219번지로서 탑골 마을 진입 전 포도밭 삼거리 중앙에 있다. 원래는 백화산 용문사에 있었던 것을 219번지인 삼거리에서 탑골 마을 진입로 옆 약 80m 지점 포도밭 내에 이건하였다. 그러나 포도밭 내에 위치하고 있어 2번의 분실과 횟수를 거듭하면서 탑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2009년 이건 복원하였다. 3층으로서 탑신부와 상륜부는 없어졌다.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한다.

이외에도 탑으로 복원되지 못하고 부재로 남아 있는 곳은 박물관에 전시된 용화전 석조물, 화북면 운흥리 석탑재, 연원동 장백사지 석탑재, 외남면 지사리 석심회피탑 기록, 외답동 석탑재, 목가리 삼층석탑, 득수리 삼층석탑, 중벌리석 탑재, 신흥사 석탑재, 동관음사지 석탑재, 남성동 석탑재로서 전체 22개소의 석탑 흔적이 남아 있다.

Ⅻ. 맺음말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국가정책에 따라 불교가 쇠퇴의 기로에 있었을 때 규모가 작은 사원은 폐사되었으나 규모가 큰 사원은 더욱 번성을 하였으며, 또한 일부 맹렬 선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백성은 불교를 숭상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상주의 지명에서도 절터, 절골, 탑골 등으로 불리는 곳이 400여개 이상이 남아 전래되고 있으며, 상주의 사원과 암자는 일제 강점기까지는 기록상 최대 41개소가 있었던 것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현재는 93개소, 신도 2만3천여 명으로서 종교인의 50%를 넘게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주에서 아직까지 불교가 성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불교는「전통사찰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문화재 보호법」등의 보호 법령의 뒷받침에 따라 불교 번성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최근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 천주교 등에서 활발한 포교 활동을 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상주에서는 불교가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조상의 종교를 이어 받은 전통 종교의 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