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상주박물관장 재직시의 회고(回顧))

빛마당 2014. 3. 5. 13:35

상주박물관장 재직시의 회고(回顧))

전 상주박물관장 현 동국문화재연구원장 김호종(金昊鍾)

목 차

1. 박물관 건립과정464

2. 관장 공채465

3. 박물관 개관과 등록467

4. 기획전시와 전통문화대학 및 봉사활동469

5.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 승인471

6. 유물의 기증 기탁 운동전개473

7. 건물 신축 및 증축476

8. 주변 시설물의 부수적인 관리478

9. 앞으로의 과제와 전망480


1. 박물관 건립과정

경상도(慶尙道)의 중심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일찍부터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거점(據點) 구실을 하였다. 그러므로 선사시대(先史時代)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형(有形) 및 무형(無形) 문화재(文化財)가 다수 산재(散在)하여, 이를 보존(保存) 관리(管理)할 박물관(博物館)의 필요성은 매우 높았다. 그리하여 이 고장의 뜻있는 인사들이 이것을 시급히 건립하도록 집요(執拗)하게 주장했으나, 여러 가지 조건이 여의치 않았던지 차일피일 미루어 오게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8년 4월에 이르러서야 상주박물관(尙州博物館) 건립자문위원회(建立諮問委員會)를 결성하여, 상주시청 부시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12명의 위원들을 위촉(委囑)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주박물관 전경


그 다음 1998년 11월에 이르러 동 위원회는 박물관 부지로,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 18-7번지 일대를 선정하고, 편입토지 매입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2002년 7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토지매입을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2011년 현재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 부지는 34,800㎡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부지를 확보한 다음 소정의 절차를 거쳐 기본설계 및 실시설계용역에 들어가 2003년 12월 30일 드디어 착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만 3년이 지난 2006년 12월에 박물관 전시공간 공사가 준공(竣工)됨으로써 우선 외형적(外形的)인 모습은 갖추게 되었는데, 당시 건평은 대략 4,400㎡에 달하고 있었다. 박물관 준공 후 상설전시실에 전시될 유물들의, 전시부분 자문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상주시청 문화공보담당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자문위원 12명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2006년도 저물어 가는 하반기부터는, 박물관 근무 직원들이 업무담당․시설담당․경천대 관리담당 등 3분야로 나뉘어, 19명의 공무원들이 개관(開館)에 대비(對備)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관장 공채

내가 상주박물관장 공채(公採) 관계 기사를 대구에 있는 우리 집에서 목격한 것은 2007년 4월경 〈매일신문〉이었다. 당시 채용자격(採用資格) 조건을 보니 문화재관련(文化財關聯) 박사학위(博士學位) 소지자로서, 문화재 지표조사(地表調査) 경력(經歷)이 3년 이상인 자로 되어 있었다. 그 때 나는 대학교수를 정년 퇴임한 뒤 1년 8개월이 되던 때여서, 소일(消日)거리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퇴직하면서 전부 연금(年金)을 선택하여 받고 있었으므로 경제적으로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으나, 생활이 불규칙(不規則)하여 좋지 않았다. 퇴직할 당시에는 오랜 직장생활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滿喫)할 수 있어서, 그간 해외여행도 몇 번 다녀오고 마음맞는 친구들과 등산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았으나, 차츰 그런 생활도 계속하고 보니 시들하여 지면서 규칙적인 일거리를 찾던 중에 마침 공채 내용을 본 것이다.

그리하여 소정의 여러 절차를 모두 거쳐 2007년 6월 13일자로, 상주박물관장에 취임(就任)하여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 관장(館長) 봉급을 받고 난 뒤 얼마를 지나니, 공무원 연금관리공단에서 1통의 공문(公文)이 날라왔다. 내용인즉 ‘귀하는 공무원 연금 수령자로서 공무원에 재취업했으므로, 공무원연금법 관계규정에 의하여 재직중(在職中)에는 연급 지급(年金支給)을 중단(中斷)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공채에 응시할 때에는 주변(周邊)에서 퇴직(退職) 후 재취업(再就業)한다고 하더라도 연급이 절반(折半)은 나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공채에 대한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완전히 지급 중단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래서 즉시 연금공단에 항의 전화(抗議電話)를 하였더니, 연금이 절반 정도 나오는 경우는, 공무원 재취업이 아니고, 일반 기업체 등에 재취업한 경우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심각(深刻)한 고민(苦悶)에 빠졌다. 나는 대학교수 때 주요 보직을 맡았으므로, 연금수령액이 매월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관장 봉급(지방 계약직공무원 나급)을 받아보니 모든 수당을 합쳐 보아야 세금(稅金) 등을 공제(控除)하고 나면, 평소 받던 연금보다 매월(每月) 10여 만원 적었다. 더욱이 가족은 대구(大邱)에 살고 있고, 내 혼자 상주서 거주하므로 별도(別途)로 생활비(生活費)가 들었고, 또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데 필요한 경비 등을 계산하니, 한 달에 최저 한도(最低限度)로 잡아도 60만원 정도가, 대구서 연금받고 사는 것 보다 손해(損害)였다. 그래서 사표(辭表)를 내고 대구로 다시 내려갈까 하고 한 동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 친구들 몇 명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네가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네. 그렇지만 이왕 부임(赴任)했으니, 경제적으로 손해를 좀 보더라도 새로 생긴 고향 박물관을 위하여, 자격있는 사람이 봉사(奉仕)를 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가’ 라고 계속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한 동안 깊이 생각하다가, 그래 좋다고 하면서 고향(故鄕)을 위해 계속 근무하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3. 박물관 개관과 등록

관장직 수행(遂行)을 결심한 이상 우선 시급히 추진할 업무는, 박물관을 개관(開館)하여 상주 시민들을 비롯한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을 독려하여 미비점(未備點)을 보완(補完)하면서 개관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통상적으로 9~10개월이 소요되는 개관 준비 기간을 최대한 단축(短縮)하기로 하고, 직원들에게 호소와 설득을 병행하면서 부단히 독려하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부임한지 약 5개월이 지난 2007년 11월 2일 박물관 앞 광장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모시고 성대하게 상주박물관 개관식 테이프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날부터 관람객(觀覽客)들을 입장시켜 정기 휴관일(休館日)인 매주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각종 문화재들을 관람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개관 이후 수행할 중요한 업무로는 경북 도청(道廳)에 관계 서류를 구비하여 공립박물관(公立博物館)으로 정식 등록(登錄)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2007년 12월 중순(中旬)쯤 경상북도 문화재과에 등록서류(登錄書類)를 제출했으나, 그쪽 이야기가


상주박물관 개관식


금년에는 등록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문화재위원들을 소집해서 회의(會議)를 통하여 등록심사(登錄審査)를 해야 하는데, 심사하는 문화재위원들 대부분이 대학 교수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학교가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교수들이 국내외로 뿔뿔이 흩어져 회의를 소집해도 정족수(定足數)를 채우기가 어렵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린애가 태어나면 출생신고(出生申告)를 하여 호적부(戶籍簿)에 등재(登載)되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듯이, 박물관도 해당 관서에 정식으로 등록되어야 제대로 된 역할(役割)을 수행할 수 있는 처지이므로 시급한 등록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신속한 회의 소집을 다시 요청하는 한편 경상북도문화재위원 교수 가운데, 평소 알고 지내던 몇 분에게는 개별적으로 연락을 해서 회의 참석을 부탁하였다. 그렇게 서두른 이유는 동기 방학후 대학 개강(開講)은, 대체로 그 이듬해 3월초순(初旬)이 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두른 보람이 있었던지 그해 2007년 12월 말일경에는 도지사 명의로 된 박물관 등록증(登錄證)을 수령(受領)할 수 있었다.


4. 기획전시와 전통문화대학 및 봉사활동

주지하는 바와같이 박물관의 주요 기능(機能)은 문화재인 유물(遺物)의 수집(蒐集)과 보존(保存), 그리고 이에 대한 연구(硏究)와 홍보(弘報) 등을 포괄(包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遂行)하자면, 지역 사회 인사(人士)들의 깊은 이해와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지역 구성원들의 이러한 협조와 이해를 유도(誘導)하고 촉발(促發))하자면, 상설(常設) 전시실(展示室)도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안에서 가급적 빠른 주기(週期)로 이를 교체(交替) 전시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관람자들로 하여금 단조(單調)로움과 싫증도 줄이고, 유물의 피로(疲勞)도 제거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설 전시실 교체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예산이 수반되므로, 지방자치단체의 현재 재정형편으로는 이것을 자주 교체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조 수단(補助手段)으로 등장하는 것이 소위 기획전시(企劃展示) 또는 특별전시(特別展示)이다. 하지만 1년에 2번 정도 기획전시를 개최하는데도 대략 5천만원 전후의 예산과,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예산확보에 힘쓰는 한편 해당 학예연구사들과 상의하여 주제(主題)를 선정한 뒤 이를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상주박물관에서 개최한 기획전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연번

전 시 명

전시 개시연월일

1

(상주 출토)토기에 담긴 흔적

2007년11월 2일 전시

2

치열한 구도의 흔적(상주의 불화)

2008년10월 1일 전시

3

장롱속 한평생(우리할매 시집이야기)

2009년 3월 3일 전시

4

검간 조정선생 임진왜란을 이야기하다

2009년 8월 4일 전시

5

이스탄불에서 불어온 바람(터키유물)

2010년 3월23일 전시

6

낙동강 유물 특별전

2010년 7월 6일 전시

7

산수헌에서 우복 종부를 만나다

2011년 4월19일 전시

 

터키유물 기획전........전통문화대학 개강


그 다음에 역점적(力點的)으로 추진한 사업은, 박물관 전통문화대학(傳統文化大學) 운영이다. 전통문화에 소양이 깊은 각 분야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박물관 휴관일(休館日)인 매주 월요일 오후에, 관심있는 시민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외부 강사(講師)들 초빙(招聘)에 따른 강사료와 교재 제작비 등, 상당한 예산이 필요하여 시 당국과 협의한 결과 계속 사업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횟수를 거듭할수록 수강자(受講者)들도 늘어나는 한편, 수강자들의 반응(反應)도 비교적 좋았다 따라서 시민들의 문화의식(文化意識) 향상과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하는데도 상당히 기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봉사활동 가운데 또 하나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은, 희망하는 지역 인사(人士)들을 선발하여 일정한 교육(敎育)을 거친 다음, 박물관 안내를 보조하게 하는 자원봉사자(自願奉仕者)들에 대한 수련(修鍊)이었다. 이 사업도 비교적 반응이 좋아서, 앞으로 계속 운영되어야 할 사업으로 생각된다. 위와같은 봉사활동 이외에도 관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문화재 그리기 대회와, 문화재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활동 및 벽지(僻地) 소규모 학교 학생들을 위한 문화재 탐방 행사 등이 있어서 그런대로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자원봉사자 체험활동 시작


여기에 더하여 상주 지방의 전통문화에 대한 발굴(發掘)과 연구(硏究)의 일환으로, 10개년 계획을 세워 박물관 문화총서(文化叢書)를 발간(發刊)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제1차 연도에는 “낙동강을 품은 상주문화”를 출판하기로 하고 관계되는 집필자(執筆者)들을 선정(選定)한 뒤 원고(原稿)를 요청했던 것이다.


5.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 승인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박물관 업무(業務) 가운데 문화재에 대한 수집과 연구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리하여 이를 위한 방안(方案)의 하나로, 우선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 문화재 지표조사기관(文化財地表調査機關)으로 문화재청장(文化財廳長)의 승인(承認)을 받는 것이 시급한 과제(課題)였다. 현재의 상주박물관 전문인력 숫자로는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 승인은 곤란하므로, 우선 지표조사기관 지정 등록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문화재보호법령에 규정된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노력하는 한편, 조건 가운데 해석이 좀 애매한 부분은 문화재청을 찾아가 관계자들을 설득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제출한 뒤, 몇 차례 방문하여 타당한 논리를 전개하는 한편 전화로 당부하기도 하였다.


문화재 지표조사기관 승인



그러한 노력 때문인지 2009년 12월 28일 문화재청 고시 제2009-128호에 의하여 문화재 지표조사기관으로 등록되어, 관보(官報)에 게재(揭載)됨으로써 이제 합법적(合法的)으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재 지표조사기관 승인 후 그동안 각계 요청으로, 실시한 지표조사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연번

조 사 명

면적

(㎡)

조사기간

의 뢰 처

1

대구 상인동 1200번지 다가구주택

363

2010.1.27~2.1

개인업자

2

상주 회상지구 농경지 리모델링 1차

200,000

2010.3.2~3.18

한국농어촌공사

3

병풍산 고분군 지표조사

578,000

2010.3.29~4.30

학술지표조사

4

상주 회상지구 농경지 리모델링 2차

780,000

2010.4.8~5.7

한국농어촌공사

5

경북대 상주캠퍼스 생활관 증축부지

30,000

2010.8.20~9.20

경북대학교

6

대구 내당동 945-9 근린생활시설

499

2010.11.29~12.5

내당천주교회

7

상주 하송리 산1-3번지 채석장부지

83,320

2010.11.22~12.21

세진산업(주)

8

상주시 헌신동 388, 노유자시설

4,068

2011.2.22~3.7

개인업자

위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표조사기관 등록 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간 상당한 활동을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특히 한국농어촌공사의 요청으로 1,2차에 걸쳐, 상주시 중동면 회상지구의 농경지 리모델링사엽 980,000평방미터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는 상당히 큰 실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6. 유물의 기증 기탁 운동전개

상주박물관이 비교적 늦게 건립되었기 때문에 그 동안 상주 지방에서 출토(出土)되었거나 보관(保管)되고 있던, 문화재들이 외지(外地)로 많이 유출(流出)되어 안타까운 심정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TV 등 언론매체(言論媒體) 등의 영향으로 유물이 큰 재산이나 되는 듯이 오인(誤認)되어 후발(後發) 박물관으로서는 유물 확보에 더욱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문제점(問題點)을 타개(打開)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講究)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우선 유물의 기증 기탁 운동(寄贈寄託運動)을 전개(展開)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박물관에 유물 기증과 기탁의 중요성을 홍보하고자〈매일신문〉등에 기고(寄稿)하기도 하고, 지역 사회의 유수한 문중 대표(門中代表)들을 만나 호소(呼訴)도 하여 보았다.

호소한 내용의 주요 골자는, 개인들이 집에서 유물을 보관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선 도둑맞을 위험이 크고, 그것을 관리하는데도 상당히 신경(神經)쓸 일과 비용이 수반(隨伴)될 것이라고 역설(力說)하였다. 그러나 박물관에 기증이나 기탁을 하게 된다면,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되므로 도난이나 화재의 위험이 거의 없고, 정기적으로 소독(消毒)을 실시하여 쥐나 곤충, 습기 등으로 훼손(毁損)되지 않아 오래 보존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아시는 것 처럼 박물관에는 수많은 CCTV가 설치되어 있고, 경비업체(警備業體)가 경비를 하는 동시에 직원들도 2명씩 매일 교대로 숙직(宿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수장고(收藏庫)는 튼튼한 철제문(鐵製門)과 그 안에는 자동 소화장치(消火裝置) 및 항온(恒溫) 항습


문화재 유물 기탁 잇달아

(恒濕) 장치가 끊임없이 작동(作動)하여, 개인들이 보관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안전(安全)한 편이다. 여기에 더하여 상주(尙州)와 관련이 있는 유물(遺物)은 상주에서 보관하는 것이 여러모로 타당하다고 역설(力說)하는 한편, 귀중한 유물은 심사를 거쳐 약간의 보상도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더욱이 기증․기탁한 분이나 그 후손들은 필요한 경우 언제나 열람하고 확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보람이 있었던지 그 뒤 기증과 기탁을 하는 개인과 문중들이 늘어나 유물확보에 일정한 보탬을 주었다. 기증과 기탁의 자세한 내용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기서는 밝히기 어려우나, 상세한 자료는 박물관에 비치되어 있어 필요하다면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물확보에 무엇 보다 크게 기여한 것은, 그간 상주교육청에서 관리하고 있던 유물들이었다. 이들 유물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 교육청 산하 교직원(敎職員)과 학생들이 수집(蒐集)해온 것으로 들었는데, 보관 현장을 가서 보니 시설이 상당히 허술하여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당시 김동량 교육장을 찾아가, 상주박물관에서 유물을 보관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육장은 난색(難色)을 표하면서 선뜻 동의(同意)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뒤에도 몇 번 만나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논리(論理)를 전개하였다. 즉 그 유물들이 비록 교육청 소속 여러 교직원과 학생들이 장기간에 걸쳐서 수집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대부분이 상주 시민들이고, 또 현재 보관시설(保管施設)도 불비(不備)한 상태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시립(市立) 상주박물관이 설립되어, 양호한 수장고를 갖추고 있으므로 유물을 오랫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데는 훨씬 유리하다고 강조하였더니 ‘그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 같다.’는 동의(同意)를 얻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현재 유물을 보관하던 장소에서 유물을 빼내어 가져간다면, 그 시설(施設)을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되는데, 그러자면 리모델링 비용(費用)이 상당히 소요(所要)되니 그것을 시청(市廳)에서 부담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시장을 만나 그 동안의 경위(經緯)를 설명하고, 리모델링 비용은 지불(支拂)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교육청에서 보관하고 있던, 유물 1306점을 2007년 9월 10일자로 인수(引受)하게 되었던 것이다.


7. 건물 신축 및 증축

관장으로 취임하고 보니 해결하여야 할 현안 문제(懸案問題)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새로 설립된 그야말로 신설(新設 박물관이고 보니 시설물(施設物)에 대한 불만(不滿)이 무엇보다 컸다. 앞에서 이미 거론한 바 있지만 오늘날의 박물관은 단순히 유물의 보존과 전시에만 그치지 않고, 전통문화의 센터로서 일반 대중(大衆)들과 접촉할 기회가 더욱 많아져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갖는다. 그러므로 일반 대중들이 함께 모여 서로 학습(學習)하고 토론할 수 있는 교육적인 시설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선 규모는 적어도 백오십명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세미나실이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유물 수장고도 교육청 소관 유물을 인수하여 옴으로써 자리를 많이 차지하여, 얼마 지나지 않으면 거의 포화상태(飽和狀態)에 이를 처지였다. 그리하여 고민하던 끝에 시설담당자를 불러 15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세미나실 신축(新築)과, 현재의 수장고 크기로 2층에 증축(增築)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뽑아 오도록 하였다.

그 뒤 얼마를 지나 소요예산(所要豫算)을 산정하여 왔는데 대략 25억원 정도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근거로 시청에 가서 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만나, 세미나실 신축과 수장고 증축에 필요한 예산 확보를 역설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현재 시 재정 형편상 도저히 불가능하니 그냥 참고 지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좌절(挫折)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다시 도청(道廳) 해당 부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원을 강요하니, 대답하기를 ‘경북도의 재정자립도가 20% 정도이니 불가능하며, 더욱이 상주박물관에 예산을 지원하여 준다면 다른 시․군립 박물관들도 모두 요청할테니 도에서는 이것을 감당(勘當)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시․도의 얘기를 듣고 한동안 침울(沈鬱)한 나날을 보내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도청 해당 책임자를 찾아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협조를 거듭 당부하였다. 그랬더니 어쩔 수 없었던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업에 필요한 예산 가운데 국비(國費)를 어느 정도만 따오면, 도비(道費)와 시비(市費)는 자동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길로 상주에 돌아와서 국비 확보방안을 모색하던 중, 마침 예산담당 중앙부처인 기획재정부 고위 간부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어서 시설 건축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소요 예산중에서 국비 일부를 지원(支援)받게 됨으로써, 도비와 시비를 보태어 공개입찰공고(公開入札公告)를 거쳐 착공(着工)하게 되었다. 그 뒤 비교적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2010년 11월 30일에는 드디어 소망(所望)하던, 세미나동 신축과 수장고 증축의 준공(竣工) 테이프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미나실  준공       수장고 증축



그 이외에 소규모(小規模) 공사로는 학생 체험실(體驗室) 신축과, 야외 전시장 인근 연못가의 정자(亭子) 건립이었다. 우선 체험실 신축의 필요성을 거론하자면, 요즈음 관람자들 특히 관람하는 학생들의 추세(趨勢)가 박물관에서 단순히 유물을 견학하는 차원을 넘어, 그러한 유물의 모형을 직접 만들어 보려는 경향이 강하여졌다. 따라서 우선 작은 체험실이나마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박물관 뒤뜰에 누에 고치 모양을 딴 119㎡의 소규모 체험실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고 야외 전시장 근처에는 작은 생태 연못이 있는데, 또 그 옆에는 상당히 큰 물레방아가 돌고 있어 제법 운치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연못가에는 대체로 정자가 있어야 어울리는 법인데, 그것이 없어서 매우 허전하였으므로, 시설담당자와 상의하여 정자를 짓기로 하였다. 다 지은 후에 정자 이름을 〈松山亭〉으로 하고, 현판(懸板)과 기문(記文)도 하나씩 걸어 놓았다.


8. 주변 시설물의 부수적인 관리

공채(公採)에 의하여 박물관장에 취임했을 때는 당연히 박물관만 운영(運營)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날 담당자(擔當者)들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으니, 근처에 있는 국민관광지인 경천대(擎天臺)와 약 3㎞ 떨어진 충의사(忠毅祠)까지 함께 관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나는 깜짝 놀랐는데, 그것들이 박물관 업무와 얼마나 관련성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어쨌던 당시 시청(市廳)의 직제(職制)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니, 새로 부임한 사람으로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인접한 전통의례관(傳統儀禮館)도 역시 관리하게 되어 있어서 업무량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를 지나니 세 사람의 담당자들이 와서 시의회(市議會)에 업무보고를 해야 한다면서, 관계되는 자료를 갖고와 같이 의회에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교수생활(敎授生活) 30여년 하면서 대학원장(大學院長)과 교무처장(敎務處長) 및 대학 부속 박물관장(博物館長) 등 주요 보직(補職)을 거쳤지만, 의회(議會)라는 것은 난생 처음 상대하기 때문에 그 성향(性向)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몇 번 상대하여 보니 마치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서 국무위원들을 상대하는 듯 하다는 인상(印象)을 받았다. 박물관장 업무보고 차례가 되어 단상(壇上)에 올라가 소관(所管) 업무를 보고하였다. 보고 후 몇몇 의원들의 질문(質問)이 있었는데, 박물관 고유업무에 관한 것은 드물었고, 대부분이 경천대․충의사․전통의례관 등 부수적(附隨的)으로 관리하는 것에 대한 질의(質疑)이었다. 나는 아는 범위안에서 답변(答辯)하여 나가는 한편, 소회(所懷)의 일단(一端)도 함께 피력(披瀝)하였다. 나중에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박물관장은 업무보고(業務報告)하는 태도가, 마치 교수(敎授)가 대학생들 앞에서 훈계(訓戒)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에게 오랜 교수 생활의 잔재(殘滓)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렇게 비치었는지도 모르겠다.

 

경천대와 자전거 박물관


2008년 초두(初頭)에 이르니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부수적인 관리시설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경제교통과(經濟交通課)에서 주관하여 설치한 태양열(太陽熱) 시범홍보관(示範弘報館)이, 바로 옆에 있다는 이유로 박물관에서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강력히 반대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정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맡고 말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박물관장 소관 업무가 매우 복잡하여, 때로는 박물관 고유업무(固有業務)와 부수적인 업무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듯한 느낌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시장을 비롯한 집행부 간부들과, 의회 의장 등 의회관계인사들에게도 관할(管轄) 업무 조정(調整)을 요청하였다. 핵심적인 요구 내용은 박물관 업무와 별로 상관이 없는 업무를 단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맡긴다는 것은 행정(行政)의 편의주의적(便宜主義的) 발상(發想)이라고 주장하였다. 여러 번에 걸친 이러한 요구(要求)가 결실(結實)이 되었는지, 2011년 1월 부터는 경천대와 충의사 관리 업무가 다른 부서로 이관(移管)되고, 대신 상주자전거박물관(尙州自轉車博物館) 관리업무가 상주박물관장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9. 앞으로의 과제와 전망

상주박물관(尙州博物館)이 앞으로 더욱 성장 발전하자면, 우선 부수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몇몇 시설물들을 다른 부서로 이관하고, 그야말로 박물관의 고유업무만 맡아서 전력투구(全力投球)하여야 하겠다. 그리고 학예연구담당(學藝硏究擔當)을 독립시켜 전문성(專門性)을 강화(强化)하는 한편, 전문직(專門職)을 적어도 2명 정도는 더 증원(增員)시켜야 제대로 업무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아는 바와 같이 상주의 전통문화는 그 넓이와 깊이가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아직 이것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상주에는 전통문화에 대하여 정식(正式)으로 교육받고 훈련된 인사들이 너무 적은 편이다. 더욱이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에는 그러한 학과(學科)도 전무(全無)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상주문화권(尙州文化圈) 안의 전통문화의 연구(硏究)와 보급(普及)은, 우선 상주박물관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여야만 하겠다. 다른 시․군의 공립박물관 전문직 인원수를 비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상주지방은 연구개발(硏究開發)해야 할 전통문화 자원(資源)이 다른 일반 시․군에 비하여 너무 많기 때문이다.

상주의 진정한 성장발전(成長發展)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 아래, 영향력 있는 지역 인사(地域人士)들이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여기에 적극 참여하는 길 밖에 없다고 확신(確信)한다. 그러므로 상주의 전통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이를 확대 보급(擴大普及)하는 중심 센터로서, 상주박물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풀어야 할 또 다른 과제(課題)는, 박물관에 대한 접근성(接近性)을 개선(改善)하는데도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시민(市民)들과 외지인(外地人)들이 용이(容易)하게 드나들 수 있어야 박물관이 활성화되는 법인데, 그러자면 우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또 욕심을 더 낸다면 상설 전시실(常設展示室)의 확충(擴充)이다. 그렇게 되면 지역 안의 여러 문중(門中) 코너를 새로 더 만들 수 있어서, 문중간의 선의(善意)의 경쟁(競爭)도 유발(誘發)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기증과 기탁 움직임도 활발해 질 것이다. 내가 2007년 6월 13일부터 관장에 취임하여 이러한 과제들을 하나씩 풀어 나가려고 했으나, 주변 여건(與件)이 여의치 않아 일부의 과제만 해결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갑자기 집 사람의 건강이 악화되어 부득이 2011년 9월 7일자로 사퇴(辭退)하고 대구로 내려오게 되었다. 돌아와서 얼마를 지나니 소일거리가 대구에서 다시 생겨 현재 나가고 있는 중이다.

대구에 내려와서도 상주박물관이 앞으로 더욱 성장발전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있으며, 주위에서 계속 많이 도와준다면 대단히 좋겠다. 다행스럽게도 박물관을 둘러싼 주변 환경(周邊環境)은, 보다 개선되어가는 추세(趨勢)여서 기쁘기 그지없다. 우선 가까운 곳에 낙동강 생물자원관이 공사중이고, 또 그 인근에 다른 시설물들도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 박물관이 성장할 수 있는 전망(展望)은 비교적 밝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관람객수도 늘어나서, 박물관 활성화(活性化)에 기여(寄與)할 것으로 확신한다. 내가 상주문화와 상주박물관에 대하여 이렇게 관심을 갖게되는 주된 이유는, 아마도 상주가 나의 고향(故鄕)이고, 또 그곳에서 지난 4년 3개월 동안 박물관장(博物館長)으로 근무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