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치유(治癒)와 구원(救援)의 잠언적 시

빛마당 2014. 3. 5. 13:37

치유(治癒)와 구원(救援)의 잠언적 시

이창화 시인의 시세계 박 찬 선

목 차

치유(治癒)와 잠언적(箴言的) 시489

삶의 진실, 시의 진실493

구원(救援)의 시495

치유(治癒)와 구원(救援)의 잠언적 시

이창화 시인의 시세계

박 찬 선

“이창화님은 황해도 재령 출신. 1964년 10월 월남을 하셨다. 온갖 풍상을 겪으시면서 고희를 지나서도 한결같이 뜨거운 언어의 경작을 쉬지 않고 계신다. 다섯 차례의 시화전과 시집『五線紙』(1965)를 내셨다. 님에 있어서 시는 종교요 양심이며 생명이다. 님의 투철하고 귀한 시정신을 기리며 특집을 마련한다”.

상주문학 창간호에는 이창화(李昌化)시인의 시 특집을 하면서 필자가 쓴 글입니다. 이후 이 시인께서는 상주문학 5호(1993년 12월)까지 작품 발표를 하였습니다. 상주문인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모임에도 꼬박꼬박 나오셔서 자리를 지켜 주셨고 작품발표에 아주 열정적이었습니다. 단단한 체구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강한 의지가 담겼고 언제나 잔잔한 미소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시와 사회와 인생을 논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순수와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서 원론적인 주장으로 강직한 면을 보여주셨습니다. 한 번 주장한 사안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상주버스정류장이 현재 상주예식장 자리에 있을 때입니다. 이 시인께서는 리어카에 짐을 실어다주는 짐꾼 일을 하였습니다. 나이 드신 몸으로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두 옹주와 손자와 손녀 네 식구가 근근이 연명할 정도로 살기에도 빠듯했습니다.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더욱 힘이 들었으나 그래도 짐이 있는 날은 땀을 흘려도 고된 줄을 몰랐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나 찬바람이 몰아치고 기온이 떨어진 날에는 공치기가 일수였습니다. 그런 날에는 바람막이 벽에 기대앉아 묵은 문학잡지를 보거나 아니면 광고지 이면에 시를 적었습니다. 먹구름이 지나가고 맑은 햇살이 포근히 감싸주었습니다. 시도(詩道)를 닦는 수행자의 모습이, 삼매경에 잠긴 시인의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성스러워 보였습니다. 시를 쓴 원고는 보물인양 잘 접혀서 재건복의 호주머니에 지폐 대신 들어 앉았습니다. 다시 펼쳐볼 기쁨의 시간을 저축한 것입니다. 이 시인에게는 생활이 곧 시요, 시가 곧 생활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무료함과 절박감을 달래는 유일한 일이었겠지요.

나물 한 접시 놓고 앉으니

빗소리가 들려 온다

삶의 냄새가 싸하게 난다

볕에서 하얀 실을 빼내던 당신

당신의 마음이요

잠긴 슬픔이요

고운 빛깔 아니던가?

내가 붓을 쥐고 살아오게 한 당신

말과 글 아무리 갈고 심어도

명금名金의 금사과 빚어지지 않아

어둔 귀 탓한다.

상주문학 창간호에 실린「시와 귀」전문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할 때에는 자주 시가지에서 뵈올 때가 있었습니다. 내려서 인사를 드리면 주머니에서 또박또박 쓰신 시고를 건네주시며

“박 선생님,내 시 좀 봐 주세요. ”

“제가 뭘…”

“아니에요,인생이 어렵듯 시도 어렵기만 해요. ”

그러시면서 시작과정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습니다. 시가 잘된 날은 신봉동 학교까지 찾아오곤 하셨습니다. 생활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명금의 금사과 빚어지지 않아 어둔 귀 탓한다’는 시에 대한 한계를 토로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영적 구원 못지않게 시를 통한 구도적 시정신의 승화는 삶을 지탱한 지주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청빈(淸貧)의 삶은 청정(淸淨)한 시와 시론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시인의 시는 말기에 기독교적 사랑과 구원으로 채색되었습니다.

이 시인께서는 생전에 다섯 권의 시집을 내셨습니다.

제1시집『오선지(五線紙)』(1965.8.20 영주에서 초판출간.

1983년 재출간,24쪽, 19편)

제2시집『들에 핀 백합화』(1987.9.3. 82쪽,54편)

제3시집『잔설(殘雪)』(1989.5.1. 45쪽,40편)

제4시집『금잔화의 의미』(1991.5.5. 73쪽,62편)

제5시집『겨울 속에 빗소리』(1992.5.3. 50쪽,40편)

모두 215편의 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1991년 10월 31일 상주문화상을 받으셨습니다. 시옹께서는 1994년 봄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이 시인께서 가신지 어언 열일곱 해. 생전에 펼치신 시에 대한 열정과 사랑과 신념과 지조가 세삼 되새겨지는 때입니다. 시가지 은행나무 그늘에서 리어카를 세워두고 시를 쓰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위의 글은 지역신문인「상주고향신문」에「상주문화와 그 주변③」(2011.2.21)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당면한 삶에 투입되어 자연과 스스로의 진지(眞摯)한 음성은 무시되고 따라서 감정의 상태는 거칠어져 자신에 대해서 까지 냉담해 졌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삶 속에는 그 무엇인가를 위한 원체가 숨어 있지 않은가 싶어 그 항심적(恒心的) 희구의 원체를 향하여 그리는 이 한 편의 몽타-쥬(Montage)가 독자와 동료간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오직 키우는 헤아림으로 상(想) 만을 가려 주시고 시(詩)와 제현(諸賢)과 작자 사이가 직선이 되기를 머리말로서 맺습니다. ”

-을사년 1965 팔월 스무날 -영주에서

첫 시집『오선지』의 머리말 전문입니다. 여기에는 삶의 현장에서 진지한 발언은 소외되고 거칠고 냉담한 감정상태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진정성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고뇌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항심적(恒心的) 희구의 원체’가 있다고 하여 그려내는 ‘한 편의 몽타-쥬’ 즉 시가 시와 독자 사이에 굴절되지 않고 시원스레 소통될 것을 희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으로 바라고 요구하는 근본 형체인 원체(元體)는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경지라고 하겠습니다. 맹자 양혜왕 장구에는 유항산이면 유항심이란 말이 나오는데 변치 않는 마음으로 구하는 원체는 이 시인에게 있어서 이후 시작을 하게 되는 근본 바탕으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내가 남을 위하여 나를 버릴 수 있다면

나는 그들의 되받쳐 오는 사랑에 에워 싸여

황금으로 엮은 오선지에 뛰어 오르리라

내가 정녕 예절을 따라 행할 수 있다면

청천에 일월이 자명하듯이

향기로운 기품이 점철點綴 하리라

내가 남에게 진실한 벗이 될 수 있다면

내 적은 우주는 또 다른 하나에

장미가 피는 불모의 지역이 되어 주리라

-「오선지」전문

남을 위한 나의 희생이 전제된 ‘황금으로 엮은 오선지’는 음률을 담을 수 있는 무한의 공간입니다. 그기에 뛰어오른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표출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리로서 감동적인 가락이 솟구치게 하는 일이요, 사랑과 축복의 연주를 할 자리입니다.

예절에 따른 행실이 전제된 ‘향기로운 기품이 점철하리라’는 향 싼 종이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난다는 말을 연상케 합니다. 예절 바른 삶을 통해서 얻게 되는 삶의 향기는 그윽이 넘칠 테지요. 윤리적 실천에서 오는 인생의 향기는 세상을 일월처럼 밝히겠지요.

진실한 벗이 전제된 ‘장미가 피는 불모의 지역’은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그런데 기름지고 풍성한 지역이라야 될 텐데 메말라서 작물이 자라지 못하는 거친 땅이 되어 주리라고 합니다. 역설입니다. 쓰레기통에도 장미는 핀다고 했지만 동란 뒤의 피폐한 우리사회를 우의화한 ‘불모지’가 실감나게 젖어옵니다. 장미가 피는 불모지,반어적 표현은 강한 긍정을 일깨웁니다.

이 시인의 머리말이 무슨 의미로 씌어졌는지 분명해졌습니다. 이 시인이 말한 원체는 오선지에 오르기와 향기로운 기품과 장미가 피는 불모의 지역이 되어주겠다는 세 가지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실제적 모습을 볼 차례입니다.

치유(治癒)와 잠언적(箴言的) 시

이 시인이 시는 만년에 <가르쳐 경계가 되는 잠언적 요소>를 강하게 띄웁니다. ‘인간은 다만 우주에 기생충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를 찬미하며 관리인으로 살고 있다. (「무한과 휴머니즘」 끝연)“바람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불지 않는다/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죽어간다/그리하여 그림자라고 불리우는 것이야 말로/진실한 빛이다(「죽음」끝연)”대다수의 경우 재난은 자신을 의지하는데서 일어난다(「세인트헬레나에 화산」 끝연)“이 하늘에 깔린 빛!그러자 그 멀던 빛의 비췸이/얼마나 가까이 있었다는 속삭임이 들렸다”(「이슬같이 빛같이」끝연)에서 보듯이 확신에 찬 단정적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인생과 시를 거듭 생각하다가 얻게 된 결과이겠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 아래에 별도로 시 내용을 정리하는 요약된 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시의 표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나 봅니다.

한 아버지가 딸의 병(病)을 구(救)하기 위하여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환자에 에워싸여 속히 나올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와 의사가 함께 집으로 올 때

사람들이 딸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딸은 완전히 나아 있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었던 것이다.

시차(時差)란 아무에게도

허락되어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과정(過程)이다.

치유(治癒)는 조용히 섭리를 기다리는 얼굴에 비친다

-「치유(治癒)」전문

치유는 쉽게 읽혀지는 시입니다. 아래에 “시차란…비친다” 부분은 시가 실린 한 면에서 제일 아래에 있습니다. 마치 그냥 지나칠까봐 저어하여 부연 설명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 아픈 딸, 의사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의사는 딸의 병을 구하기 위한 마음과 집으로 오는 행위는 같으나 병든 딸은 이들과는 관계없이 잠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병이 나은 것이지요. 치유가 서둘러서 의사의 진단을 받고 주사와 약을 먹어서 낫는다는 통념을 부순 것입니다. 그래서 ‘치유는 조용히 섭리를 기다리는 얼굴에 비친다“고 한 것이지요.

치유, 힐링(healing)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일입니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 오는 정신의 빈곤이 근래에 힐링의 바람을 거세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힘(心力)과 마음의 근육(心筋)을 길러야 하겠지요. 위안과 편안만을 추구하다보면 직면한 현실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경우도 생길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이 시인은 일찌감치 시로서 치유를 보여준 선견의 지혜를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딸이 치유되는 ‘조용히 섭리를 기다리는 얼굴에 비친다’고 말입니다.

여인은 물을 긷고 있었다

이때 여인이 불모로 여겼던 유대인 나그네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영적 무한성을 가르쳤고 성공했다

호주에 하나의 바위섬을 매입한 회사는

이곳 광물성 천연 음료수로 20여 나라에 갈증을

해소 시켜 주고 있다

나그네는 “나를 쳐다 보라 내가 생수다”라고 했다

여인은 물동이를 놓고 마을로 달려가 이 일을 사람들에게

고했다.

뻐꾸기도 옹달샘도 쪽박도 사라졌다

시원한 물동이를 이고 오는 여인도 없다

목마른 때에 살고 있다 -「갈증」전문

우리는 치유 즉 힐링이 필요하며 그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수에 목말라하며 목이 타는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는 한 나그네가 나타나 ‘영적 무한성’을 얘기하며 ‘내가 생수’라고 했으니 경이로운 일이지요. 그것도 호주에 있는 천연 음료수를 취급하는 한 회사의 실제적인 사실을 곁들임으로써 실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증의 해소라는 차원에서 중의적 표현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런가하면 덧붙인 뻐꾸기, 옹달샘, 쪽박이 사라지고 물 긷는 여인도 없는 목마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순수한 자연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내가 생수’인 나그네가 그립습니다. 그 나그네가 우리 곁에 있고 우리와 함께 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출현은 메시아의 출현과 다름이 아니겠지요.

다윗의 생(生)의 목적을 위한 과정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극심한 육체와 영혼의 갈구에서 돌파구를 찾는

경우다

평화와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서 영혼의 의(義)와

자유는 영혼 자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평화와 자유를 얻는 것은 하늘과 지상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평화와 자유를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 후기」전문

이 시인의 시「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망향(望鄕)」에서는 “다윗(Le David)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아침에 터져오는 햇빛”을 보았다//절망과 찬양의 다섯 권으로 나누인 150수(首)에 불과한 그의 시편은…우리 몸에 유독 심장이 고동치며 맥박을 일으키듯이/특이한 율동으로 심혼(心魂)을 고동치게 하며/애환과 애증이 3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동질성의 공명(共鳴)과/공감(共感)을 갖게 하는 그를 가리켜 어떤 시인은/「영혼의 해부학자」라고 하고 어떤 철학자는「인간 감정의 거울」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체(詩體)는 객관적 사실이나 가설(假說)에 의한 서사시(敍事詩)가/ 아니오 운율(韻律)을 따라 읊은 감정이나 정서(情緖)의 서정시도 아니다/인위적 음운(音韻)이 아니라 극기(克己)와 힘의 상념(想念)의/구도(構圖)에 리듬을 맞춘 형식으로 전신으로 반응하게 한 체험시다. …”라고 산문체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위의 시「다윗의 시편 후기」는 서술 자체가 절망과 힘의 찬양, 극기와 힘의 상념을 전제로 한 생의 목적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상에서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 우리 영혼의 평화와 자유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말한 시금(詩琴)으로서 다윗을 통해서 잠언적 치유의 시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진실, 시의 진실

지금 어디쯤 머뭄인가/한 폭 수정화(水淨畫)/어우러진 조경//잔솔 바람에/흰 달 떠/소원에 기(旗)들고 달려가/불꽃 회(檜)나무 아래서/시신(詩神)을 맞는다

-「정화수(井華水)」전문

오백년 솔바람이 쉬고 있다/예대로 나타난 한 폭 묵화에/맑은 시내가 흰 돌에 눕고 있다//금수레가 떠오르면/나는 기(旗)를 꽂으러/성터에 오른다/기달나무 아래서/시신(詩神)을 맞는다// 「성터」1, 2연

위의 시 두 편에서 시신(詩神)이란 말이 거듭 나옵니다. 시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상정하는 것이 시신입니다. 시에 대한 절대적 권능을 지니면서 시를 관장하고 시의 권위를 지키면서 시를 이루게 하는 시신, 시와 노래의 신 뮤즈Muse를 생각합니다. 시 창작이 어렵고 난산을 겪을라치면 으레 모시게 되는 시신. 시신의 사랑을 받고 베풂을 입음으로써 명시를 남기려고 합니다. 시에 대한 간절한 기원 속에 맞이하는 천사 같은 시신입니다.

시신을 맞이하기 위해서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이창화 시인입니다. 궁핍이 막다름에 이르고 때꺼리가 없는 절박함 속에서도 시를 놓지 않았던 이창화 시인. 이 시인의 시 사랑은 정신의 보루였습니다. 시의 높은 아성을 스스로 구축하고 그 속에서 님을 맞이하고 님을 찬양하고 님을 사랑하고 님을 그리워하면서 님에 대한 기도를 뜨겁게 해왔습니다. 시는 삶을 지탱케 해주는 버팀목이자 전부였습니다.

이 시인의 시는 진실에서 출발합니다. 시는 거짓일 수 없고 진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마음이 아닐 때는 ‘명금(名金)의 금사과’도 빚으지지 않습니다.

내가 참회에서/모든 것이 벗겨질 때/당신이 옵니다//내가 당신의 세계로 내 딛는 순간/당신이 나타납니다//당신은/침묵의 사랑입니다/고르게 내리는 쉬임표입니다/사랑의 늪을/건너게 하는/하늘의 다리입니다.

-「진실」전문 제4시집

뉘우침을 통해 마음이 깨끗해질 때 비로소 오시는 당신, 당신은 사랑이요 안식이요 하늘에 오르는 다리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혼탁해진 마음, 거짓된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진실된 마음만이 당신을 만날 수 있고 하늘에 오를 수도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은 진실된 시로 통합니다.

진실은/거짓이 무너지는 소리요/노를 부끄럽게 함이요/가식이 드러남이요//잠긴 향기요/빛의 용모요/동산에 어머니의 자상으로 나타난/신(神)이요//고이 일름은/사랑의 전달이요/어둠에 성체(聖體)요/고통의 찬미요//먼 미래 바람의 기도요/숨어 내리는 눈물이요/사랑의 보루(堡壘)이외다

-「진실」전문 제2시집

이 시인은 애초부터 진실을 추구해 왔습니다. 진실된 삶을 영위하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진실은 향기요 빛이요 어머니의 인자하신 모습으로 나타난 신입니다. 진실은 사랑, 성체, 찬미, 기도, 눈물입니다. 진실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시가 생각에 거짓이 없는 사무사(思無邪)를 표현한 것일진데 당연히 삶의 진실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진실은 시의 진실 입니다.

구원(救援)의 시

이곳이 나의 패각(貝殼)입니다

어느 기간 여기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친근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패각의 선장(船長)입니다

위태로운 날 나는 명예를 잃게 되겠지요

그러다가 어는 상이(相異)한 시간

나만의 비밀을 안고

죽음의 사이길로 걸어갈 것입니다

-「패각(貝殼)의 병동」1,2연

삶에 대한 자각이 잔잔하게 표출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크게는 지구요 지역이며 작게는 내가 거처하는 집입니다. 그것이 크던 작던 내가 사는 삶의 공간입니다. 일정한 기간만 머무르는 곳이 삶의 공간인 조가비입니다. 조가비는 조가비만의 삶이 있습니다. 마치 호두 속처럼. 조가비 속의 삶은 유한합니다. 독립된 삶의 주체인 명예로운 선장으로서 주어진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만큼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삶과 죽음의 시간이 다를 때, 이 곳의 시간과 저 곳의 시간이 다를 때 나만의 비밀을 안고 죽음의 길로 갈 것입니다.

시의 제목「패각의 병동」은 솔제니친의『암병동』을 연상시켜 줍니다. 삶에 대하여 관심을 환기시켜 준 돈초바. 그는 자기의 병으로 일상적 관계와 항구적으로 보였던 인간관계는 단지 며칠 아니 몇 시간 사이에 망가집니다. 병원과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바꿀 수 없었던 돈초바가 불편한 존재가 되어가고 아무리 집착한다고 해도 영원히 존속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이 제목은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인간사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불지 않는다/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죽어간다/그리하여 그림자라고 불리우는 것이야 말로/진실한 빛이다 (「죽음」끝연)

가상과 실재의 관계 설정으로 그림자가 오히려 진실한 빛으로 삶과 죽음의 실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두어 줄에 글줄을 위하여

내가 살아온 지 모르겠다

곱도 않은

후회도 없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이 닿지 않았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생명의 존귀를 아는 것이라고-

죽음의 소리는 다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일까

-「삶의 재조명(再照明)」전문

죽음이 있기에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죽음의 곳으로 가지 전 두어 줄 글을 위하여 내가 살아온 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글을 써온”(『들에 핀 백합화』발간에 즈음하여) 점으로 보아 글쓰기는 절대절명의 일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글(시)은 이 시인의 존재이유이자 근거였습니다. 바로 구원의 따스한 손길이었습니다.

이제 “시의 탄원은 시의 샘 앞에서 구원(久遠)의 불꽃 아래 꿇는다”(나의 제5시집을 내며)라는 말을 되새기며 이 시인의 결이 고운「저녁 길」을 읽으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마지막 회상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혹시나 당신의 부르는 소리 들릴까

뜰을 닦고 귀를 기울입니다

저녁 무지개가 섰습니다

빠른 새 날고

들나간 소 돌아옵니다

언젠가 돌아오실 님의 길목을

바라봅니다

빈 길 헤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동구(洞口)너머로

사무쳐 그리움이 서산 마루에

붉은 시름 한 빛깔로 물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