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문화/상주문화 22호

침천(枕泉) 김상철(金相轍)선생 상주 여행기

빛마당 2014. 3. 5. 13:40

침천(枕泉) 김상철(金相轍)선생 상주 여행기

조 일 희

목 차

1. 임술년(1922) 1차 상주 여행500

2. 갑자년(1924) 2차 상주 여행505


1. 임술년(1922) 1차 상주 여행

임진년(1922)에 서울 서쪽 서헌정(署軒亭)은 종남산(終南山) 동쪽이오 한강 가인데 공자별묘(孔子別廟)를 짓고 전국 각 군(郡)에 유림(儒林) 2, 3인씩을 초청하였는데, 완도 향교에서는 나와 황계주(黃繼周)가 뽑히어 서울로 가게 되었다. 8월 21일 집을 출발하였다.

(중략)

8월 24일 대전에서 황계주(黃繼周)를 만났다. (중략) 8월 24일 오후 3시에 황계주는 먼저 출발하는 서울행 차를 타고 나는 오후 4시에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를 타고 김천 정차장(停車場)에 이르니 밤 12였다. 목포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차비는 5원 75전이었다.

다음 날 25일 출발하기에 앞서 주인이라고 하는 이효선(李孝善)에게 상주군 낙동면 양진당(養眞堂)으로 가는 직로(直路)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자동차(自動車)로 가려면 오후 4시 차가 있는데 차삯 또한 과중하니 꼭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를 타고 앞으로 20리를 가서 구미에 이르거든 하차하여 선산 읍내로 가는 자동차를 타면 선산에서 낙동과의 거리는 25리라고 하며 상주 읍내로 돌아가는 것은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옳다 하고 그가 이른 대로 부산행 차를 타고 구미에 닿았다. 조석(朝夕) 식비(食費)와 차비가 1원 45전(錢)이었다.

선산 행 차 시간을 물으니 오후 4시라 했다. 기다리다가 부득이 가방을 둘러메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읍내에 이르니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선산 읍내 여관에 투숙하고 숙비 45전(錢)을 주었다.

26일 일찍 일어나 신코를 메고 거리에 나가 낙동면 양진당으로 가는 직로를 물으니 혹은 동쪽이라 하고 혹은 서쪽이라 하여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노상(路上)에서 머뭇거리다가 한 노인을 만나 물으니 똑똑히 가리켜 주기에 지팡이를 끌고 서쪽으로 20리를 가니 큰 재가 있고 산 아래쪽에 음식점(飮食店)이 있어 조반(朝飯) 한 상을 먹고 15전을 주었다.

주인에게 양진당을 물으니 대답하길 재를 오르고 내리기 15리 평탄한 곳으로 내려가기 10리라 했다. 다리를 뻣고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재에 오르기 중간쯤 재의 반쯤에 이르러 쉬어 앉아 산허를 돌아보니 판국이 열렸는데 두세 인가(人家)가 조각조각 부쳐 있고 붉은 대추와 빨간 감이 가지 끝에 매달려 있고 누런 국화와 단풍이 길가에 난만(爛漫)하며 고개 마루를 우러러 바라보니 여러 산봉우리들이 우뚝 우뚝 벌려 섰다. 겨우 잿마루에 올라 허리를 펴고 다리를 뻗고 쉬며 바로 한 곳을 바라보니, 과실나무가 빽빽이 들어섰고 가지마다 끝까지 과실이 매달렸는데 비단 휘장을 두른 듯 찬란히 빛났다.

지팡이를 의지하고 섰다가 그 속에 초가 한 채가 있기에 가서 냉수(冷水)를 청해 마시고 쉬어 앉아 담배를 피우노라니, 반백(半白)이 된 늙은 부인이 홍시(紅柿) 세 개가 붙어있는 가지 하나를 꺾어 다 주며 요기(饒飢)나 하고 가란다. 흔연히 사례하면서 받고 바깥주인의 성씨(姓氏)를 물으니 김씨(金氏)란다. 어디 가고 집에 없느냐니까 과실을 팔아서 식량을 사러 용궁(龍宮)시장에 갔다고 대답했다. 그러기에 용궁시장이 여기서 몇 리나 되느냐니까 몇 리나 되는지는 모르는데 늘 아침에 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온다고 했다. 그래 사례하고 지팡이를 짚고 궁벽한 골짜기를 돌아서 재를 내려오니 동서로 놓인 두 산이 음양봉(陰陽峰)처럼 우뚝 서 있고 동북쪽으로 판국이 열렸고 산벼랑 남은 산자락이 넓고 커서 끝이 없었는데 이게 바로 낙동면이다.

내려와 평탄한 곳에 이르니 물방아가 절로 소리 내며 돌아가고 가을빛이 바야흐로 무르녹았다. 길가의 초막(草幕)에서 쉬노라니 나이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인이 삼베 치마에 흰 상장을 하고 부엌문에 의지하고 섰었다. 이 여인이 주모(酒母)려니 생각하고 술이 있느냐 묻고 두 그릇을 사서 마시고 10전을 내 주었다. 그 여인더러 뉘 복(服)을 입었느냐고 물으니 이 달 초순에 남편이 죽었다고 하며 말도 끝내기 전에 눈물이 뺨을 적시었다. 측은(惻隱)한 생각이 들어 일어나 내를 타고 내려오니 밭둑길이 나섰다.

풀이 얽히어 길이 희미하기에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에 마침 관을 쓰고 낚싯대를 멘 사람을 만났다. 양진당을 물으니 손으로 가까운 곳을 가리켰다. 푸른 솔과 드리운 버드나무로 지붕도 보이지 않기에 또 양진당 이름을 물으니 대답하길 이 고을 조씨(趙氏)는 여러 대를 흥왕(興旺)하고 부귀(富貴)가 구현(俱顯)하니, 그 종가(宗家) 사랑(舍廊)을 건립할 때에 그 사랑의 현판(懸板)에 쓰기를 양진당(養眞堂)이라 했기 때문에 그걸로 동명(洞名)도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 노인의 성(姓)은 황씨(黃氏)라 했다.

냇가 모정(茅亭)에 쉬며 아이 하나를 시켜 영현(榮炫)에게 알리니, 오래 되어도 오지 않기에, 몸소 당(堂) 앞으로 나가 보니, 운동교과(運動敎科) 시간 중이었다. 당루(堂樓)에 들어가 앉아 부자가 상면하니, 조금 쌓인 회포(懷抱)가 풀리는 듯 했다. 4, 50명 되는 생도(生徒)가 모두 조씨(趙氏) 자제(子弟)인데, 곁에서 보고 있는 6, 7인 의관(衣冠)을 갖춘 이는 생도의 부형(父兄)이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서로 인사를 닦은 뒤 거기서 사별(辭別)하고 영현(榮炫)의 처소로 옮겨갔다.

큰 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 밑에 한 구역 판국이 열렸는데 초가삼간(草家三間)이 솔밭 가에 세워져 있었다. 앞에는 옛 기와집이 있어 중문(中門)이 높이 솟았는데, 이도 또한 조氏 사당(祠堂)이라 했고, 마을 이름도 승곡리(升谷里)라 했다. 가을바람이 소슬(蕭瑟)하게 부니 물색(物色)도 곱게 이루어졌다. 산과 들이 상반(相半)하여 생리(生理)가 가히 살만 했다.

새 자부(子婦) 이씨(李氏)가 상견례(相見禮)를 하고 점심밥상을 올렸는데 밥과 국과 채소가 입에 맞았다. 정성을 다하여 부덕(婦德)을 닦으라고 교훈적인 말로 대강 이르고 영현(榮炫)과 같이 주인 조태연(趙泰衍) 댁(宅)을 방문했다. 승곡리와의 거리는 5리인데, 마을 이름은 장천(長川=雲谷마을, 갈가실)이라 했다. 산이 둘러 있고 들은 적은데 푸른 솔이 빽빽이 들어섰고 맑은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속에 열대엿 기와집이 있는데, 제도가 극히 아름답고 장원(檣垣)도 웅장하여 참으로 잠영가(簪纓家)들이 사는 옛 마을이었다. 섬돌에 올라서니 주인이 맞으러 나왔다. 방에 들어가서 늦게 만나는 인사를 서로 나누고 한 번 만났지만 친구처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술잔을 나누면서 해가 기우는 줄도 몰랐다. 마음에는 섭섭하나 서로 헤어져 촛불을 켜들고 승곡리로 돌아와서 부자간에 밤새도록 쌓인 회포를 털어놓고 이야기 했다.

그 다음 27일에 영현과 함께 상주 읍내로 갔다. 나는 상주, 선산이 우리나라의 문화와 전통이 서린 곳이오, 금옥(金玉)같은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는 걸 여러 번 들었는데, 이제 그 풍경을 보니 참으로 우리 한국의 승지였다. 태산이 멀리 사방으로 둘러 가리었고 뻗어 나온 산자락이 셋으로 나뉘어 수구(水口)를 막았는데 곤방(坤方) 봉우리 한줄기 맥기(脈氣)가 들 가운데 토출하여 배북향남(背北向南)한데 관사(官舍)가 늘어서고 좌우 쪽은 평탄하여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환가(宦家)와 부옥(富屋)이 비늘처럼 교착(交錯)해 있고 누런 벼 흰 콩은 논밭에 잘 익어 있었다. 일찍이 조선의 명구(名區)라 하더니 과연 헛된 말이 아니었다.

영현이 자동차표를 샀는데 그 값이 2원 17전이었다. 부자(父子) 서로 헤어져 자동차를 타고 김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으니 30전이었다. 김천에서 서울 남대문으로 가는 차표를 샀는데 값이 6원 10전이었다.

(이하 생략)

2. 갑자년(1924) 2차 상주 여행

갑자년(1924) 5월 초9일 황혼(黃昏)무렵 닭장 대회에 앉았던 수탉이 두 날개 들어 치며 길게 세 번 울고 날아서 부엌 불속으로 들어가 죽으니, 비록 미물(微物)이라도 집안에서 사랑하던 가축이 우연히 제절로 불에 뛰어 들어 죽어 탄석(歎惜)해 마지않고 한 번 마음속으로 상서롭지 못한 조짐인가 의심이 나 우려(憂慮)하는 생각이 자꾸 일어났다.

다음 초10일 오전 8시쯤 상주 영현의 처소로부터 전보가 왔는데 내종(內腫)이 심중(沈重)하여 어제 파종(破腫)했다는 내용이었다. 어제 상서롭지 못한 조짐을 보고 오늘 이 전보가 온 것은 반드시 죽으려고 이런 소식이 있는가 하고 온 집안이 소동(騷動)이 나고 호산(湖山)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겁이 나 생각해 보니 천행으로 살아 있으면 내가 가서 구원해 보고, 비록 불행히 죽었다면 내가 마땅히 매장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주현(柱炫)을 시켜 노자(路資) 30원을 변통해오라 하니, 겨우 10원을 구해 왔기에 낙현(樂炫)을 불러다가 김충식(金忠植)의 나락 값 놓는 돈 30원을 빌려 오라 하여 겨우 출발했다.

죽청리(竹靑里)를 지나며 친구 오병무(吳炳務)에게 들려 점괘를 빼 보라 하니 초9일 경신(庚申) 대환(大患)을 다행히 면했다면 반드시 서서히 회복될 길조가 보인다고 했기 때문에 바로 군창(郡滄)으로 가서 마침 목포로 가는 윤선(輪船)이 있기에 이걸 타고 목포에 도착하니 12일 오전 3시였다. 정차장에 도착하여 조금 기다려서 오전 7시 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를 바꾸어 타고 김천에 이르니 밤은 이미 삼경(三更)이었다. 하차(下車)하여 여관(旅館)에 들어가 자고, 다음 13일 오전 9시 상주로 가는 자동차를 타고 상주 읍내에 도착하여 박정소병원(朴正紹病院)을 찾아 가니 며느리가 유아 재만(在萬)을 업고 나와 인사를 하는데 눈물 흔적이 뚜렷했다.

영현의 병세를 물어보니 위험하다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염(殮)해 놓은 시체 같았는데 아비를 보자 피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휘장으로 덮어 놓은 병석의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리에 앉아 몸을 어루만져 보니 처련(悽憐)한 생각 그지없고 속으로 생각하길 오 우(吳友)의 점괘대로 다행히 거의 조그마한 희망이나 있었으면 하고 조금 위로해 보나 마음이 초조하여 열어 놓고 봄에 미쳐서는 환처(患處)가 매우 흉하고 험하기에 눈물을 금할 수 없었고, 그 망측 불인한 사항이야 어찌 다 말하랴.

매일 한 번씩 환부를 열어 놓고 약물로 씻어 내는데 두 세 사람이 부호(扶護)하여 일으키고 눕히고 하니 그 견디지 못하는 모습은 곁에 있는 사람도 코가 시큰하고 가슴이 막혔다. 그게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두어 주일 동안만 딴 증세가 없이 정신이 온전(穩全)하면 자못 회복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내 거처가 협착(挾窄)하다고 가까운 곳에 의관(議官) 조갑성(趙甲星)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데 인심도 두텁고 가산도 넉넉하여 영현(榮炫)과는 친분(親分)이 있고 해서 며칠이건 그 사랑(舍廊)에서 거처(居處)하라 하기에 사례하고 그리 하기로 하였다. 거기서 상종(相從)해 놀던 대여섯 노옹(老翁)이 있었는데 날마다 모여 바둑 장기를 두고 시를 읊으며 서로 잘한다고 자랑하며 성음이 고준(高峻)하여 풍치(風致)가 좌탑(座榻)에서 풍겼다. 이들은 대개 조씨(趙氏) 노인인데 그중 한 분이 문경 신석호(申錫浩)라는 이다. 시(詩)와 바둑 솜씨가 좌중에서 제일 나았는데 나이 80이었다. 나를 남객(南客)이라 이르고 응당 시율(詩律)이나 기보(棋譜)를 알 것이기에 시(詩)는 남은 모임에 할 것이니 먼저 대국을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기에 일찍이 유습(遊習)하였으나 이걸 피하고 눈을 두지 않아 이제는 호구(虎口)도 잊었다고 해도 굳이 청하기 때문에 부득이 대국했는데 나보다 몇 점 위였다.

조금 있다가 주인 영감(令監)이 술상을 드렸는데 창포처럼 푸르고 앵두처럼 붉어 유리 소반에 찬란하니 차례로 돌리는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만족하게 취하고 배부르게 마시었다.

신 문경(申聞慶)이 다시 시회(詩會)를 하자기에 운자(韻字)를 내놓지 않았으나 이마에 땀이 먼저 났다. 사정이 어찌 할 수 없어 억지로 읊었다.

迷兒罹疾洛東洲 변변치 못한 집 애가 낙동강가에서 병이 걸려

爲問仙方晩上樓 선방을 묻고자 하여 늦게 다락에 올랐네.

嶺北簪纓猶穆穆 영남의 잠영은 오히려 씩씩한데

湖南苗裔猶區區 호남의 후손은 홀로 변변치 못하네.

蒲杯足補弊脾胃 포배는 피곤한 비위를 족히 보태 주고

梅軸能忘孤客愁 매축은 외로운 나그네의 수심을 잊게 하네.

莫認此生過逆旅 이 생을 역려과객으로 아직 마세나

復來相續菊花秋 국화 피는 가을에 다시와 놀아 보세.

이처럼 같이 즐기다가 저물게야 헤어졌다.

다음 날도 다시 태평루(太平樓)에 모이니 이는 옛날 남문(南門)이었다. 2층으로 된 집이 단청이 오히려 가시지 않았다. 올라 앉아 둘러보니 좌우의 평야가 넓어 끝이 없고 누른 벼는 금을 펴놓은 것 같고 마을은 옥(玉)을 이룬 듯해서 참으로 금수강산(錦繡江山)이었다.

조금 있으니 파파노인(皤皤老人) 한 분이 앞뒤에 호위하는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올라와 윗자리에 앉으니 위의(威儀)가 평상인과는 달랐다. 좌우에 있던 사람이 일어나 인사하니 높이 앉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생각되어 옆에 있는 사람더러 누구냐고 물으니 참봉(參奉) 황한승(黃漢升)이라고 했다. 상주 부중(府中) 제일 부자인데 문벌(門閥)과 학행(學行)도 있고 향중(鄕中)의 영수(領袖)이며 지금 91세라고 했다. 신장(身長)이 8척이오, 모발(毛髮)은 다 빠져 붉은 피부가 풍후 원만하여 참으로 부자 집 노인 같았다.

내가 인사하고 이름을 통하고 여기 온 사유를 알리니 지금 병세가 어떠하냐고 하기에 아직 위태로운 상태이어서 천명(天命)이나 바란다고 대답하니 황 참봉은 이런 것이 이른바 뜻밖의 재앙이라고 했다. 좌우의 청년들이 황 참봉에게 부채질하며 호위하는데 한 참 있다가 술상이 들어오는데 산해진미가 상에 가득했다. 노인이 먼저 석 잔을 들고 상을 물리니 잔을 늘어놓고 또 요리점에서 가져다가 일탕(佚宕)하게 벌려놓고 취하게 배부르게 먹고 헤어졌다.

5월 24일 본 집으로 막내아들 주현(柱炫)에게 전보를 쳤다. 26일 주현이 올라왔기 때문에 그 길로 머물러 두고 그 형(兄)의 병간호를 하라 시키고, 27일 작별 인사를 하고 걸어서 80리길인 선산 덕곡(德谷)으로 향했다. 도로와 거리는 앞서 가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소섭(疎涉)한데 이르지는 안 했다.

새 사돈(査頓) 이우목(李宇穆)의 집을 방문하니 가난해서 손님 대접할 형편이 못 되었다. 같이 마을 앞에 있는 여관으로 나와 새 사돈과의 정의를 서로 펴고 하룻밤을 묵은 뒤 그 길로 서로 헤어져 거기서 20리쯤 되는 대신리(大新里)로 나와 차를 타고 대전에 와서 호남線 열차로 갈아타고 강경 정차장에 도착하니 29일 오후 10시였다. 다음날 30일 목포에 도착하여 현 진사(玄進士)를 방문하여 머물면서 또 토지 되돌려 줄 것을 청하니 지금 시가대로 사가라고 하기 때문에 피차 얼굴만 붉히고 헤어졌다. 어찌할 것인가?

6월 1일 목포에서 배를 타고 완도 군창(郡滄)에 도착하니 전후 비용은 30원이었다. 영현은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8월 보름께야 퇴원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와 매일 약수로 환처를 씻어내니 그 다음 해 봄에야 완인(完人)이 되어 그전처럼 군향(郡鄕) 사회에 출입할 수 있었다. 내가 들인 병비(病費)만도 얼마가 되는지 모른다.

※ 원고제출: 金在千 (침천 김상철의 손자, 현재 전남 완도에 거주, 현재 항일운동완도기념사업회 부회장)

���_ ��p.Z �T �� 사는 지상에서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을 위하여 죽는 것으로 우리 영혼의 평화와 자유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말한 시금(詩琴)으로서 다윗을 통해서 잠언적 치유의 시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진실, 시의 진실

지금 어디쯤 머뭄인가/한 폭 수정화(水淨畫)/어우러진 조경//잔솔 바람에/흰 달 떠/소원에 기(旗)들고 달려가/불꽃 회(檜)나무 아래서/시신(詩神)을 맞는다

-「정화수(井華水)」전문

오백년 솔바람이 쉬고 있다/예대로 나타난 한 폭 묵화에/맑은 시내가 흰 돌에 눕고 있다//금수레가 떠오르면/나는 기(旗)를 꽂으러/성터에 오른다/기달나무 아래서/시신(詩神)을 맞는다// 「성터」1, 2연

위의 시 두 편에서 시신(詩神)이란 말이 거듭 나옵니다. 시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상정하는 것이 시신입니다. 시에 대한 절대적 권능을 지니면서 시를 관장하고 시의 권위를 지키면서 시를 이루게 하는 시신, 시와 노래의 신 뮤즈Muse를 생각합니다. 시 창작이 어렵고 난산을 겪을라치면 으레 모시게 되는 시신. 시신의 사랑을 받고 베풂을 입음으로써 명시를 남기려고 합니다. 시에 대한 간절한 기원 속에 맞이하는 천사 같은 시신입니다.

시신을 맞이하기 위해서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이창화 시인입니다. 궁핍이 막다름에 이르고 때꺼리가 없는 절박함 속에서도 시를 놓지 않았던 이창화 시인. 이 시인의 시 사랑은 정신의 보루였습니다. 시의 높은 아성을 스스로 구축하고 그 속에서 님을 맞이하고 님을 찬양하고 님을 사랑하고 님을 그리워하면서 님에 대한 기도를 뜨겁게 해왔습니다. 시는 삶을 지탱케 해주는 버팀목이자 전부였습니다.

이 시인의 시는 진실에서 출발합니다. 시는 거짓일 수 없고 진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마음이 아닐 때는 ‘명금(名金)의 금사과’도 빚으지지 않습니다.

내가 참회에서/모든 것이 벗겨질 때/당신이 옵니다//내가 당신의 세계로 내 딛는 순간/당신이 나타납니다//당신은/침묵의 사랑입니다/고르게 내리는 쉬임표입니다/사랑의 늪을/건너게 하는/하늘의 다리입니다.

-「진실」전문 제4시집

뉘우침을 통해 마음이 깨끗해질 때 비로소 오시는 당신, 당신은 사랑이요 안식이요 하늘에 오르는 다리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혼탁해진 마음, 거짓된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진실된 마음만이 당신을 만날 수 있고 하늘에 오를 수도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은 진실된 시로 통합니다.

진실은/거짓이 무너지는 소리요/노를 부끄럽게 함이요/가식이 드러남이요//잠긴 향기요/빛의 용모요/동산에 어머니의 자상으로 나타난/신(神)이요//고이 일름은/사랑의 전달이요/어둠에 성체(聖體)요/고통의 찬미요//먼 미래 바람의 기도요/숨어 내리는 눈물이요/사랑의 보루(堡壘)이외다

-「진실」전문 제2시집

이 시인은 애초부터 진실을 추구해 왔습니다. 진실된 삶을 영위하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진실은 향기요 빛이요 어머니의 인자하신 모습으로 나타난 신입니다. 진실은 사랑, 성체, 찬미, 기도, 눈물입니다. 진실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시가 생각에 거짓이 없는 사무사(思無邪)를 표현한 것일진데 당연히 삶의 진실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진실은 시의 진실 입니다.

구원(救援)의 시

이곳이 나의 패각(貝殼)입니다

어느 기간 여기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친근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패각의 선장(船長)입니다

위태로운 날 나는 명예를 잃게 되겠지요

그러다가 어는 상이(相異)한 시간

나만의 비밀을 안고

죽음의 사이길로 걸어갈 것입니다

-「패각(貝殼)의 병동」1,2연

삶에 대한 자각이 잔잔하게 표출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크게는 지구요 지역이며 작게는 내가 거처하는 집입니다. 그것이 크던 작던 내가 사는 삶의 공간입니다. 일정한 기간만 머무르는 곳이 삶의 공간인 조가비입니다. 조가비는 조가비만의 삶이 있습니다. 마치 호두 속처럼. 조가비 속의 삶은 유한합니다. 독립된 삶의 주체인 명예로운 선장으로서 주어진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만큼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삶과 죽음의 시간이 다를 때, 이 곳의 시간과 저 곳의 시간이 다를 때 나만의 비밀을 안고 죽음의 길로 갈 것입니다.

시의 제목「패각의 병동」은 솔제니친의『암병동』을 연상시켜 줍니다. 삶에 대하여 관심을 환기시켜 준 돈초바. 그는 자기의 병으로 일상적 관계와 항구적으로 보였던 인간관계는 단지 며칠 아니 몇 시간 사이에 망가집니다. 병원과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바꿀 수 없었던 돈초바가 불편한 존재가 되어가고 아무리 집착한다고 해도 영원히 존속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이 제목은 여러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인간사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불지 않는다/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죽어간다/그리하여 그림자라고 불리우는 것이야 말로/진실한 빛이다 (「죽음」끝연)

가상과 실재의 관계 설정으로 그림자가 오히려 진실한 빛으로 삶과 죽음의 실상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두어 줄에 글줄을 위하여

내가 살아온 지 모르겠다

곱도 않은

후회도 없는

나는 이�{���T ��d ��

인간이 닿지 않았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생명의 존귀를 아는 것이라고-

죽음의 소리는 다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일까

-「삶의 재조명(再照明)」전문

죽음이 있기에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죽음의 곳으로 가지 전 두어 줄 글을 위하여 내가 살아온 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글을 써온”(『들에 핀 백합화』발간에 즈음하여) 점으로 보아 글쓰기는 절대절명의 일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글(시)은 이 시인의 존재이유이자 근거였습니다. 바로 구원의 따스한 손길이었습니다.

이제 “시의 탄원은 시의 샘 앞에서 구원(久遠)의 불꽃 아래 꿇는다”(나의 제5시집을 내며)라는 말을 되새기며 이 시인의 결이 고운「저녁 길」을 읽으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마지막 회상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혹시나 당신의 부르는 소리 들릴까

뜰을 닦고 귀를 기울입니다

저녁 무지개가 섰습니다

빠른 새 날고

들나간 소 돌아옵니다

언젠가 돌아오실 님의 길목을

바라봅니다

빈 길 헤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동구(洞口)너머로

사무쳐 그리움이 서산 마루에

붉은 시름 한 빛깔로 물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