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금요사랑방 제46강 강의자료

빛마당 2014. 5. 24. 23:29

금요사랑방 제46강 강의자료(2014. 5. 9)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중심으로 한 소나무 그림에 관하여

                                                              한국화가 창원(蒼園) 이영복(李英馥)


 추사의 <세한도>는 한 폭의 문인화이나 풍경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사제지간의 고매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 사연을 그리고 쓴 심경화(心境畵)이다.

국보180호 이기도 한 이 <세한도>를 조선학예의 총화요 문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지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왜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가를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

<세한도>는 단순히 한 폭의 그림으로만 이해하여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세한도>가 탄생하게 된 동기와 높은 격조의 예술성과 지금에 전해 오기까지 감동적인 사연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하기 때문이다.


 스승추사 김정희 (1786~1856)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학에 통달하였고 서화뿐만 아니라 금석학(金石學)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70평생을 서예의 종장(宗匠)으로 군림(君臨) 존경받아온 그가 침계(?溪)라는 두 글자를 완성하는데 30년 세월이 걸렸다고 하니 누가 믿겠는가.

사연은 이러하다.

 침계(?溪)는 윤정현의(尹定鉉)호다. 추사의 7년 연하로 판서직을 두루 거친 당대명망 높던 문신이다. 추사의 영향을 받아 비문에도 밝았다. 추사는 30년 후 두 글자를 완성하고 그 글씨 옆에다 다음 과 같은 사연을 기록했다.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 예서로 쓰고자 했으나 한비(漢碑)에 첫 글자가 없어서 함부로 만들어 쓰지 못하고 마음속에 두고 잊지 못 한 것이 이제 30년 이 지났다.

요즘 북조금석문(北朝金石文)을 많이 읽고 있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씌어있다.

 수당(隋唐) 의 진사왕(陳思王)이나 맹법사(孟法師)와 같은 여러 비(碑는)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그 뜻을 본떠 이를 썼으니 이제야 부탁을 들어주고 오래 묵었던 뜻을 쾌히 갚을 수 있게 됐다:.

추사도 평소 서론(書論)에서 글씨 쓰는 법을 한비(漢碑)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만큼 전범(典範)이 되는 한비에 없는 글씨는 제멋대로 지어서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즘말로 프로정신이다. 대강대강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었고 졸속을 피한 것이다. 자기 분야에 대한 투철한 장인정신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내 평생 천 자루의 붓이 몽당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으니 노력도 대단했다.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96)은 추사보다 18세 연하의 중인(中人) 이었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이 되어 중국을 12번이나 드나들며 스승이 닦아놓은 인연의 저명한 문사들과 깊이 교유하고 학문과 시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시로 크게 명성을 얻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상적은 벼슬길도 순탄하여 1862년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종신토록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았다.

이 제자 이상적이 여러 해를 두고 중국(청)을 드나들 때마다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등 귀한 책자를 수집 적소(謫所)의 스승 추사에게 다음 과 같은 간결한 서한과 함께 보내니 이로써 <세한도>탄생의 동기가 되었다.

?겨울입니다. 적소의 겨울은 유난할 터인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저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이 고독이라 했습니다.(중략) 이번에 연경의 고서점 거리를 걷다가 눈에 번쩍 띄는 것이 있어 구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손에 들고 기뻐하실 스승님의 모습 떠올리며 길거리에서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무쪼록 스승님, 이 책 읽으시고 연구하시면서 적소의 무료함을 달래신다면 저에겐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라고 쓰고 동봉했다.

우선 이상적이 보낸 사찰과 책자를 받아본 추사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추사가 5년째 유배생활(1884)을 하던 중에 제자 이상적이 선생에게 대하는 한결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그림을 그려 화면 위쪽 상단에 세한도<歲寒圖>라 화제를 쓰고 그림 왼편에 발문을 정성스럽고 엄정하게,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해서체(楷書體)로 썼다.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敬)의 [대운산방문고]대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 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 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쫓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 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 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은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 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 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은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阮堂) 노인이 쓰다.

이 추사의 발문 글에 이해를 돕는 글과 이글에 등장한 사마천을 비롯 급암과 정당시 등 인물에 관한 보충설명은 생략 .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본 이상적은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의 글을 올렸다.

<세한도>한 폭 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 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였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 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을 내야 아니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 뿐 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知己)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추사 제발문, 이상적의 답서-오주석 주해 글 인용)

이상적은 편지의 글 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이 되어 <세한도>를 가지고 연경에 가서 청나라 최고의 문사들과 같이한 자리에서 내보이고 문사들의 감동적인 송시(頌詩)와 찬문(贊文)을 받는다.

현금에 이르러 사제지간의 도의(道義)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세태에 처한 우리 모두에 <세한도>는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감동을 주는 첫 번째 대목이다.

두 번째 감동을 주는 사유는 세한도의 격조 높은 예술성과 정신세계이다.

<새한도>를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의아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이 과연 그 유명한 <세한도>인가 하고, 배경도, 화려한 색채도 없는 황량하고 , 한기 마저 느껴지는 분위기 그림,

마치 대 빗자루로 쓱쓱 몇 번 쓸고 지나간 자국 같은 마당에 몇 그루의 나무와 상징적 허름한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어 쓸쓸함도 감도는 듯 한 화면이다.

실은 그림을 전공한 사람 중에도 어쩌다 대화중에 <세한도>가 왜 감동을 주느냐? 고 문의해 보면 선뜻 의견 말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차원 높은 정신세계서 나온 작의(作意)와 앞서 밝힌 대로 그림으로서만 보고 해석해서는 부족한, 학예의 총화적 작품이기에, 보는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심안과 눈높이의 안목에 따라 각기 다르게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동양회화의 중심사상은 외형의 형태나 아름다움 보다 물상 즉 대상에 내자하고 있는 본질정신을 깊이 파악 표현 되어야 한다는 것을 중시한 점에서 추사의 정신세계에서 나온 <세한도>는 회화적 측면에서도 그 세계를 이미 통달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철저하게 계산된 안정된 구도와 구성...나무 그림도 나무 종류를 구별 그 특징을 간명하게 표현된 필선은 한마디로 놀랍다.

필의 운용에 있어서도 노송과 젊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서로 다른 필선에서 추사가 의도한 심상과 일치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으며 조형적 감각은 물론 사물에 대한 관찰 인식도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세한도>는 소나무와 잣나무,상징적인 허름한 집 한 채가 주조(主調)를 이루고 있으나 중심 주체는 노송이며 이 노송은 바로 추사를 상징한다. 대지에 굳게 박힌 아름드리 노송은 추사 자신의 마음의 뜻을 실린 묵필선의 형상(形象)이다. 노목 몸체에서 한줄기는 곧장 하늘로 예리하게 치솟아 강한 의지와 기개를 나타내고 또 한줄기 곡선 가지가 옆으로 뻗쳐진 끝자락에 솔잎이 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혹자는 가지는 가냘프고 솔잎은 애처롭다고 하였으나 내가본 가지는 강한 선을 치기보다 더 어려운, 노련한 붓의 중봉필력이 요하는 가지의 선묘이며 솔잎은 애처롭기 보다는 희망의 솔잎으로 보이다.

노송 옆에 곧게 서 있는 젊은 소나무는 제자 이상적으로 노송을 받쳐주고, 저 허름한 집을 지탱하게 하고 있다.

전형적 소나무 준법을 요약 활달한 운필에 의해 한층 젊고 싱싱한 소나무로 표출되었고 현대적 감각까진 느껴진다.

소나무 둥치와 수피를 조화롭게 표현하는 운필은 소나무 그림의 격을 좌우하는 요건으로 이 아름드리 몸통의 수피 묵필 선은 묵의 농담을 비롯, 자유자재(自由自在) 통달(通達)하여 신묘(神妙)하게 변화 표현되었다.

*필자는 소나무 수피(樹皮)를 용린(龍鱗)이라고 즐겨 쓴다.

치밀한 구도와 구성 달관된 운필(運筆)은 추사(秋史)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에서 이루어진 필선도 있으리라고 생각이드나 붓을 붙들기 전에 화면의구상은 치밀했음을 알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 >우선시상(藕船是賞) 완당(阮堂)이라고 화제(畵題)를 왼쪽 상단에, 제발문(題跋文)은 왼쪽 아래도 자리를 잡아 넓은 공간 여백을 살려 주체인 나무와 집이 한눈에 시원스럽게 우선 들어오고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세한도>歲寒圖석자 글씨는 가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완당(阮堂) 은 수직으로 너무 길어지지 않게 우선시상 옆에 완당을 따로 쓰고 가로로 새긴 작은 인장으로 함축성 있게 마무리를 했다.

여기에 노송에서 옆으로 한줄기 곡선으로 뻗어 나온 솔잎달린 가지가 우선시상과 완당 낙관을 받쳐주고 있는 듯, 한 치만 더 나갔더라도 답답할 터 절묘하게 낙관과 어우러져 있다.

서화(書畵)에서 낙관인장(落款印章)은 화면의 한 획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여 때로는 전체 화면의 균형을 잡아주고 품격을 가늠하게도 하는 매우 중요한 분야이다.

추사가 서화 만 아니라 금석학의 대가인 것은 유명한 사실이지만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청나라 문사들도 추사에게 인장을 새겨 달라는 부탁이 많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좋은 인장만보면 좋아하고 애장했다고 한다.

고문헌 연구가 박 철상 씨는 <세한도>에 관한 글 중에서 인장의 중요성을 <세한도>에 찍혀있는 인장을 예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한도>에서 바람소리가 느껴진다. 이런 을씨년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빛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장이 뿜어내는 붉은 인주의 빛깔이 있다. 거칠고 메마른 붓 터치 속에서 인장은 ,<세한도>의 눈이 된다. 인장은 <세한도>의 꽃이다.<세한도>인장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모두 4방이 찍혀있다.<정희>正喜<완당>阮堂<추사>秋史<장무상망>長毋相忘이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추사는 우리나라 인장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라고 적었다.

<세한도>의 격조 높은 예술성 과 정신세계를 어찌 이루다 쓸 수 없겠으나 줄이고,

세 번째 <세한도>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를 생각한다.

이상적은 스승께 쓴 편지글 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 이정응을 수행 연경에 가게 되어 <세한도>를 가지고 가서 다음해 정초에 청나라 문사 16인과 자리를 같이한 자리에서 <세한도>를 내보였다. 모여 있던 문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하나같이 치하의 말이 이어지니 시,서,화 가 천하일품이거니와 더욱 뜻 깊은 것은 완당선생과 제자 이상적의 두 사제지간의 아름답고 고매한 인간관계다. 외람되지만 그 그림의 말미에 발문을 쓰겠다.

모두가 감동하여 너도나도 다투어 시(詩)와 찬문(贊文)을 옥판선지를 이어가며 쓰니 그 두루마리 길이가 무려 스물두 자(약10m)나 되었고 이상적은 귀국하는 길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었다.

1년이 지나 다시<세한도>를 대하게 된 추사의 반갑고 기쁜 마음은 큰 위안이 되었고 자신도 감격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감동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세 번째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유가 아닌가?

추사의<세한도> 대표적인 문인화의 정수로 학예의 총화라고 칭송되고 있는 것은 이런 경로를 통해서 더욱 빛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세한도>돌아와서 다시 스승에게 보인 후에 물론 이상적이 소장하다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이 소장하게 되었고 그 아들 김 준학(金準學)이 물려받아 2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추사 연구의 권위자였던 경성대학 교수 흐지즈카 지카시(藤塚?)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직전인 1943년 10월 현해탄을 건너갔다.

이를 알게 된 서화가의 대가 진도출신 소전(素?) 손재형(孫在馨) 선생이 일본 도교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석 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양도 받아 다시 조국 땅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소전(素?) 선생은<세한도>를 찾기까지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의 글이 있다.

나는 경성제국대학교수 후지쓰카 박사가<세한도>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히고 그것을 다시 찾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가 양보만 한다면 나의 소장품 중 무엇과도 바꿀 수 있겠고 금액으로 말한다면 부르는 대로 주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인 누구보다도 완당에게 심취해 있는 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패망전인 1943년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나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것처럼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듬해 거금 3천 엔을 전대에 차고 일본으로 행했다. 당시는 미국의 B29폭격기와 잠수함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전쟁 말기였다. 생각하면 그림 한 장 때문에 거금을 차고 연일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지 않을 까 두려운 도쿄로 향 한 것은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쿄에 도착했다. 후지쓰카 박사는 우에노쿠 망한려에 있었다. 나는 근처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일주일동안 매일 문안 인사를 갔다. 나의 소행을 이상히 여긴 그가 용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뜸 세한도를 돌려주십사 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가 나를 쏘아 보았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많은 작품들을 송두리째 내놓을 수 있어도 <세한도>만은 내내 간직할 것입니다. 이제 전쟁도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폭격도 차츰 무차별로 나오니 어서 조선으로 돌아 가시오

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가 <세한도>를 양보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폭격도 아랑곳 않고 9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만 되풀이 했다. 90일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을 불러 나와 나란히 앉히고 말했다.

내가 죽거든 손재형 선생께 <세한도>를 내어드리라' 그것으로 나는 후지쓰카가 죽은 후 <세한도>가 돌아온다는 희망을 갖기는 했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막연했고 서로는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더욱 치열해지는 폭격을 피해 산속으로 피난을 가겠다고 했다.

피난처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일. 나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작별의 뜻을 전화로 알렸다. 헌데 사정이 달라졌다.

?소전, 내가 졌소. 지금 곧 오시오, 하지 않겠는가, 나는 단숨에 뛰어갔다.

그러자 비단으로 싼 <세한도>를 몇 대독자를 출정 보내는 비통한 얼굴로 내 놓았다. 나는 감격하여 3천 엔 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세한도'를 다시 조선으로 보내는 것은, 첫째 소전이 조선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성심에 감탄한 것이며, 둘째로 그대라면 이 작품을 귀하가 오래 간직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요, 내가 돈을 받고 '세한도'를 내놓는다면 지하의 완당선생이 나를 뭘로 치부하겠소? 더구나 우리나 그 분을 사숙하는 동문 아닙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뭔가 답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곧 청부업자를 시켜 그댁 정원에 콘크리트 지하실을 짓고 그의 망한려에 있는 수많은 소장품을 옮겨주고 귀국하는 길에 천하를 품에 안 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고 술회하였다.

*소설가 곽 의진 님 의 '향 따라 여백 찾아가는 길에서' 발췌

<세한도>가 돌아온 후 후지즈카 집은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고 그가 소장했던 추사 김정희 연구에 관한 수많은 자료들도 대부분 타버렸다고 하니 <세한도>는 그야말로 기적같이 화를 피하게 되었다.

고문헌 연구가 박철상 씨가 펴낸 <세한도>글에 의하면<세한도>를 가지고 돌아온 소전 손재형 선생은 그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난 1949년 9월 오세창 선생을 찾아가 펼쳐 보여주니 감개하여 <세한도>를 다시 보게 된 감회를 쓴 글에서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지는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겨우 돌아오게 되었다. 아!자신의 목숨보다 나라의 보물을 더 아끼는 마음을 가진 지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잘했구나, 잘 했어! 그런데 이 사실은 감추고 말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한지가 56년이 되었다. 올 9월에 손 군이 갑자기 이 그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주었다.

서로 펼쳐놓고 읽으며 어루만졌는데, 마치 죽은 친구를 일으켜 세워 악수하는 듯하여 기쁨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에 몇 달을 감상하다가 이렇게그 전말을 기록하고 시를 한 수 쓴다,

완당 노인 그림 한 장 그 명성 자자 터니

북경으로 동경으로 이리저리 방랑 했네

일백년 인생살이 참으로 꿈만 같네

기쁨 인가?슬픔 인가?얻었는가?잃었는가?

대한이 이틀 지나서 12월5일 위창 86세 노인 오세창은 발문을 쓴다.

발문은 16인의 청나라문인들이 남긴 제영뒤 쪽에 오세창(吳世昌) 선생을 비롯 정인보(鄭寅普) 선생 이시영(李始榮) 선생의 감격한 발문(跋文)이 이어져있다

<세한도>가 우리에게 왜 감동을 주는가?에 대한 네 번째 생각은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의 보물을 더 아끼는 마음을 가진 지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세한도>가 환국하여 다시 보게 된 오세창 선생의 감격의 전말 글과 제영시를 발문에 기록한 바와 같이 소전 손재형 선생은 청사에 길이 남길 감동적인 큰 업적을 남겼다고, 많은 사람들은 공감하고 있다. 도쿄에서 구사일생으로 화를 피해 돌아온 <세한도>는 오랫동안 궁금하였으나 근래(2010년)소장하고 있던 손창근 님으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영구한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누구나 모두가 감사와 기쁨을 함께 하게 되었다.

연하여 연제에 따른 소나무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쓴다.

<세한도>를 보면 맨 먼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노송과 젊은 소나무, 잣나무 두 그루다. 이 나무 네 그루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매운 인심, 억울함,옛사람과의 고마운 정,의리,선비의 굳센 의지와 기개, 허망함, 희망, 서광 등 인생의 모든 것을 내재하고 있는 화의(畵意)에 앞서 소나무를 많이 그려온 나로서는 보이는 나무들의 형상을 운필한 필선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는 선이 있는가 하면 굵은 선이 직선이 있으면 곡선이, 둔한 선이 있는가 하면 예리한 선이 있고, 약한 선이 있으면 강한 선이, 느리게 친 선이 있으며 빠르게 친 선이 있다.

간결하지만 나무를 구별하여 친 필선, 노송수피의 신묘한 묵필선등 문인화를 비롯한 동양회화의 중요 요건 인. 선의 조화가 <세한도>에 다 들어 있다. 전 해 오는 옛말에 서예를 하는 사람은 소나무 가지의 선을 보고 필세를 세우고, 훌륭한 검객에 되려면 소나무를 보고 운검 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였으니, 의미 있는 말이다.

화업 50여년에 소나무 그림 그리기 40여년 하다 보니, 나름대로 크게 깨달아 자득하게 된 것 몇 가지 중에 가장 어려운 것 하나 들면, 소나무 그림에 있어, 가지와 솔잎을 잘 그리고, 나무수형 포치를 잘 했다 하더라고, 소나무 그림의 우열을 가늠하는 관건은 둥치(몸체)표현이 좌우하는데 그것은 몸체와 수피 필선의 조화에 있다는 것, 특히 노송은 수피의 필선에 의해 높은 격의 운치와 신운이 감돌게 된다.

수피는 수령과 환경에 따라 수형과 수세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은 운필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작화할 시 그때-그때 감흥에 따라 무의식에도 자유 자재한 운필선이 이루어져 기운생동이 형성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겠으나, 다만 자기에게 냉혹할 정도의 끊임없는 숙련에 의할 일이다

천재라고도 하고, 수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여 폭넓은 학문과 식견을 가진 추사 김정희!평생 먹을 갈아 일 천 자루의 붓이 '몽당'되었다라고 술회하였으니 노력도 대단했다.

그러나 더하여 어려움이 있으니

?서화는 그 사람 됨됨이만큼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숙련이 능수능란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해도 기술자적 붓질에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격수양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대 많은 미술사가 들이 위대한 화론가로 동양 산수화의 시조라고 일컫는 형호(荊浩 唐末五代)는 그의 유명한 화론 필법기(筆法記)에 위대한 예술가의 성공은 천부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수양에 달려있다.라고 기술 하였다,

이 형호의 필법기는 과거는 물론, 현재 앞으로도 영구히 그 범주에서 연구 발전할 화론으로 평가 받고 있다.

미술사가 고 김종태 교수는 그의 저서 <동양화론>애 동양화의 창작예술의 영역은 예술정신과 기교가 서로 배합되어야 완전한 미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고 피력하였다.

이 모두가 동양회화 정신사상의 논리로 비단 서화예술세계 에만 해당될 말이 아니라, 인간만사 에 적용될 철리(哲理)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나, 숙련과 인격수양 이라는 것, 어찌 말대로 쉬운 일인가 다만 생활 속에서 마음부터 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다스려 힘쓸 일이다.

근래에 이르러 소나무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많이 있으나, 이런 동양예술 사상이나 기법보다도 현대화라는 관념에 집착, 아크릴채색이나 기타 자료에 의해 대체적으로 짙은 색채를 강조 제작 하며 서양화 동양화가 따로 있나 다 같은 회화지하는 사고이다 .다 같은 회화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소나무 그림은 회화적 측면만 생각해서는 매우 부족하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소나무가 지니고 있는 특징이 있다.

외형으로는 우람하기도 한 줄기(둥치-몸체)는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운치가 있다 .직선, 곡선 조화로운 가지와, 크기와 연륜이 주는 세월의 무게, 소나무가 지닌 에너지의 느낌! 추운 겨울에도 늘 푸르름을 잃지 않고 의연한 자태를 보이고, 소박하나 의젓하고, 고졸한 맛과 멋의 기상,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소나무! 조형감각으로도 뛰어난 나무 중 나무다.

이러한 소나무의 참 맛과 멋을 제대로 표출하기 위해서는 묵필 선에 의한 운필에서 뜻을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운필하는 자신도 의식하지 않은 순간 (찰라)의 필선이 작품의 격을 높이는 경우가 있어, 유화채색이나 아크릴채색은 일필휘지운필이 어렵기 때문이다.

특강할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뜻밖에 접하게 된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오싱젠이 '아트파리,아트페어'가 2014년3월27일 그랑팔레에서 개최한 인터뷰 내용을 미술비평가 심은록 씨가 미술 원간지에 쓴 글에서 주요 대목을 옮겨 소개 쓴다.

?가오싱젠은 중국태생으로 1988년 프랑스로 망명한 작가로 그는 문학을 비롯해 영화와 연국 각본과 연출도하여, 또한 다수의 국제전은 개최한 화가이기도 하다.

18개국에서 온 140개 갤러리 50%이상이 외국 갤러리였다고 소개하고 올래 중국은 프랑스와 50주년 수교를 맞이하여 아트파리에 참여한 90여명이 넘는 중국작가들 가운데 대중매체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세계적인 화가로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Q. 전시된 그림이 모두 먹으로만 그려졌는데 지금까지 색깔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나요?

A. 어렸을 때는 유화를 하면선 색깔도 사용 했었습니다 만, 묵만을 사용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중국에서는 형편없는 복사품만 보다가, 유럽에 와서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과 이탈리아의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대가들의 진품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 때 유화를 그만두고, 내방식으로 잘 할 수 있는 수묵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Q.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하시는데,'아름다움' 이란 어떤 것인가요?

A. 아름다움이나 미적 판단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익과는 관계를 끊어야 해요.

그 다음으로는 미술시장에 종속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현대작가들은 이 미술시장에 저항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감각에 선행하는 숭고함이 아름다움입니다.

또 한 차례 , 아주 바쁘실 텐데, 어떻게 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하신가요? 하고 질문과 이에 답한 말과 가오싱젠 자신이 앞날의 생활패턴을 정리 예술가로서의 창조적 일에 충실하겠다고 하며 그가 2000년 노벨 문학상 수상기념 연설한 내용이 이어지나 생략함.

현재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 받고 있으며 국제적 감각이나, 다방면의 문화첨단을 겪고 인식하고 어느 화가보다도 잘 느끼고 있는 가오싱젠이 아크릴채색이나 유화채색 과감한 색감을 몰라서 , 그만의 수묵그림을 고집 창작하고 있겠는가 ?

한국화(동양화)를 하며 동, 서화가 따로 있는가라고 하는 작가들과 요즈음 많은 지성들이 오늘에 한국화 현상에 대하 염려하고 있음을 듣고 있기에. 가오싱젠의 간략한 예술관을 읽고 한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풍경과 실경산수에 개성이 뚜렷하게 득의(得意)하고 이화대학교 조형대학 학장을 역임한 오용길 교수의산수와 소나무 글에서 소나무는 늘 화가의 관심의 대상이거니와, 특히 수묵화가에게는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재이다. 서양화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소나무는 수묵화로 그려야 제 맛이 난다고 나는 생각 한다. 그간 소나무 그림을 꽤 그렸지만 결과는 늘 나의 기대를 저버리곤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멋들어진 소나무의 영상을 늘 머릿속에서 그리며 언젠가는 만족할만한 소나무 그림을 그려보리라 다짐하며 오늘도 화필은 매 만져 본다.

역시 정도에서 작품을 많이 한 작가의 안목으로 소나무의 정취와 소나무 그림의 격조를 바로 파악한 글이다.

소나무는 소나무를 그리려 하는 작가(사람)나 소나무 그림을 감상하려는 사람도 좋은 소나무를 많이 보고 우선 소나무의 정취를 깊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림 그려 온지 50여 년 산수화를 시작으로 화조, 억새풀, 수많은 소나무를 그려 왔으나 아직도 소나무 그림은 어렵다. 하지만 늙어 갈수록 격을 더해 가는 노송의 운치와 의연함을 바라보며 심의(心意)를 세운다.

2014년5월

聽松軒에서 창원 이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