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의 농가월령(農家月令) 소고(小考)

빛마당 2015. 1. 10. 13:51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의 농가월령(農家月令) 소고(小考)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윤 재 수

머리말

사람은 지혜를 가지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왔다. 그 결과 오늘 날과 같은 문명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문명의 기저(基底)에는 농업이 있었다. 사람들은 농업을 천하의 근본으로 생각하였다. 농업은 땅을 기본으로 하고 기후의 변화에 적응하고 토지와 기온을 이용하여야 한다. 즉 자연에 의존하여야만 하는 산업이다. 농업은 삶의 기본인 의복과 음식 그리고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자원(資源)을 만들어 준다.

농업생산에 적용하는 과학기술의 변천과 발달과정이 인류문화에 미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인류의 문화정도가 미개한 역사의 초기에는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농경기술이 개량되고 보급되었다. 농경기술의 발달은 농업생산성을 향상 시키고 인간들의 부를 창조하였다. 인류문명이 상당히 발전된 다음부터 농업기술의 과학화가 실현되었다. 작물을 재배하는 기술, 동물을 사육하는 기술, 의복을 만드는 기술, 주거 공간을 꾸미는 기술 등등이 과학적 이론의 토대위에서 발달 하여 왔다. 과학적 이론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필요에 의한 생산 활동을 수행하였다. 경험으로 터득한 새로운 경작방법을 계속 발견하여 첨가함으로서 농사 기술을 점진적으로 발전 시켜왔다.

농업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생존과 문화를 보존하고 향상시키는 근본 토대가 되었다. 오늘은 400 여 년 전 사회적으로 냉소적 대우를 받아 왔던 농촌에 농업기술을 보급시키고 농민들의 부(富)를 만들어 주어 국가 경제에 도움을 주었던 농업의 선각자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의 농가월령(農家月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합니다.

농가월령의 자료를 제공하여 주신 상주문화원 금중현 부원장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1. 태촌(泰村)의 생애(生涯)

태촌 고상안(高尙顔)은 본관이 개성(주)[開城(州)]이고 자(字)는 사물(思勿) 이며 용궁의 왕태리에서 부(父) 한성우윤(漢城右尹, 증직)공(公) 천우(天祐)와 모(母) 신천강씨(信川康氏) 사이에 1553년 7월 22일 출생하였다. 1573년(선조 6) 계유(癸酉)에 사마시(司馬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76년 [선조 9, 병자(丙子)]에 식년시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1577년(선조 10, 丁丑)에 일선횡관(一善黌官)제수되었다. 1578년(戊寅)에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지금의 체신청)에 임명되고 1581년(辛巳)에 만기가 되어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빌려 함창현감(咸昌縣監)에 임명되었다. 함창현감으로 재임 시 수정보(水晶洑)(지금 위치를 모름)를 축조하여 상주, 함창 3~4천 두락(斗落)을 관개(灌漑) 할 수 있어 몽리자(蒙利者)들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각자하였다. 1582년 좌랑(佐郞), 1584년 감찰(監察)에 배임되었으나 1585년 부친 우윤공(右尹公)의 상을 당하여 일시 귀향하여 3년 여묘(廬墓)하셨다. 1588년 정량에 배임되었다. 1591년 서울에서 귀향하여 선묘에 배소하던 중 1592년(壬辰, 선조 25)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상주(尙州) 당교(唐橋)에 진을 치고 인민(人民)들을 노략질 하였다. 그 때 상주 함창 사족(士族)들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킬 때 공(公)을 추대하여 대장(大將)을 삼으니 공이 즉일(卽日)에 대중에게 맹세하고 산에 올라 신(神)께 제지내고 이어서 부대를 나누어 험한 곳에 거점을 두고 왜적이 나와 약탈할 때 많이 잡아 목을 베고 아울러 총, 칼 등 많은 물건을 노획하여 방백(方伯)에게 전보(轉報) 하니 의기(義氣)가 조금씩 신장되어 가는데 어쩔 수 없이 예천군수가 결원이 되니 방백이 공에게 “군사(郡事)를 섭행하라”하였다. 공이 가고나니 의병은 드디어 해산되고 말았다. 1594년에는 삼가현감(三嘉縣監)에 배임되어 근무 중 권율의 천거로 무과(武科) 별시(別試) 시관(試官)으로 차출되어 통영으로 가게 된다. 통영에서 같은 해에 급제한 동료 이순신과 보름동안 같은 병영에서 생활하면서 이순신과 많은 시를 교환하면서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丁酉)에 왜구가 다시 움직이는데 조정의 공론은 멈춰져 있고 수비하는 방책도 소루하였다. 공이 그 때 모친상을 당했음에도 우국일념(憂國一念)은 권권(券券)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범문정공(范文正公)은 평화시대에 살면서도 복중(服中)에 재상에게 글을 올려 조정의 득실을 논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은 상란 중이라 문정공(文正公)의 시기에 비할 바가 아닌데 의리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왜적을 막을 여덟 가지 계책을 진술하여 체찰사 유서애(柳西厓)에게 올렸다. 1601년 지례(知禮) 현감, 1602년 함양(咸陽) 군수, 1606년 울산(蔚山) 판관, 1607년 풍기(豊基) 군수 등의 지방수령(地方首領)을 역임하면서 관리를 독려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제배(儕輩)들 중 헐뜯고 이간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공은 개의치 않고 “통하고 막히는 것은 운명에 있는데 시세(時勢)들에게 아부하는 것은 내가 실로 부끄럽게 생각 한다”하고 권명(權明)에 발길을 들여 놓지 않았다. 1609(光海 元年)년에 33년간의 벼슬살이를 끓고 전원(田園)에서 우유(優遊)하면서 자호(自號)를 태촌거사(泰村居士)라 하고 산양의 영수(潁水)가에 별업이 있었기에 집을 짓고 왕래하고 소영(嘯咏)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집 남쪽에 반석이 가히 앉을 만한 것이 있어서 또 호를 남석노인(南石老人)이라하고 정자에 현판을 걸고 남석재(南石齋)라 하고 이재(頤齋)라고도 하여 친히 가동들에게 농사를 잘 짓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이러한 그를 이광정(李光庭)은 묘표(墓表)에서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기개가 있었다. 목숨을 버릴지라도 변절하지 않을 성품 이며 조용하고 온화하였다. 비굴하게 아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몸을 낮추어 가시밭길을 걸었으니 그 은덕은 오로지 지방 고을에 베풀었다. 조정이 어두워짐에 그 오염되고 혼탁함을 벗어나 초야에 묻혔으니 누가 그 고귀한 족적을 알라 주리오”라고 설명하였다. 이렇듯 명리에 집착하지 않고 안분할 줄 알았으며, 세상도리에 대한 원칙을 지켜나간 그의 성정은 가는 곳마다 쌓아 올린 그의 치적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는 사실이지만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의 상항에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용기와 기개라는 특별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시를 지은 것이 있는데 “문 앞에 벼 익으면 견딜만한 식량이 될 것이요 집 뒤에 목화 피면 가히 의복을 지을 것이다. 시원한 탁자위에서 낮잠을 즐길라치면 아이들이 갑자기 고기 잡아 왔다고 보고 하네” 하였으니 그 한가롭고 더할 나위없는 취미를 가졌음이 엿보인다. 그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학문과 지성을 고도로 수련한 사대부로서 농민의 농사일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농경의 진작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을 뿐 아니라 백성과 직접적으로 교감하면서 직접 농경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의 사회상으로 보아서 실로 파격적인 행적이었다. 이는 후일 실학을 중시할 때에 높은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다. 또 이광정은 묘표에서 “태촌은 문장이 단아하고 박식하여 시문과 잡저를 지은 것이 많으나 상당부분 흩어지고 소실되어 소수의 자료만이 남아 세상을 교화 한다”고 하였다. 1619년에 그가 남긴 농가월령(農家月令)은 한글로 언역(諺譯)하여 농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나 작품은 전하여지지 않는다. 농사에 밝았고 농부를 가르치기까지 한 그의 행적은 농업을 중시하고 농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높고 깊었다. 농사에 관심을 두고 농부와 교감하고자 한 그의 삶의 태도는 높이 올라 출세를 하기 보다는 초야에 들어가 민중적 삶을 공유하고자하는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1611년 조정에 정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는 초동(草洞)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니 초동은 상산(商山) 북쪽 90여리에 있는 골이 깊어 사람이 많이 사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두 어 칸 집을 지어 종로(終老)할 곳을 마련하였다. 그는 자제들에게 항상 말씀하시기를 “궁(窮) 하여도 굳건하고 가난하여도 편안한 것은 사람으로서 어려운 일이지만 또한 용이(容易)하게 할 수도 있다. 벼슬길에 작위가 낮고 잔미한 것이 한(恨)이 되거든 마땅히 벼슬 못한 사람을 생각하여 ‘나는 그래도 저자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의식(衣食)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한탄되거든 곧 당장에 거리에서 얻어 먹는 자를 생각하여 ‘나는 그래도 저것은 면했구나’라 하라. 이와 같이 하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뜻이 안정되어 부러움이나 개탄하는 생각은 없어질 것이다. 또 경계하여 ‘사람이 살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 하는 것은 모두 만족할 줄 모르는데서 말미암게 된다. 당 나라 속담에 [넓고 큰 집이 일천간이라도 밤에 팔척(八尺)한 몸을 누울 뿐이요, 좋은 밭이 십경(十頃)이나 되어도 하루에 두어 되만 먹을 뿐이다]하였으니 지족(知足)의 요(要)를 이에서 더 가까이 하지마라’하시고 손수 유훈(遺訓)을 써서 경계”하셨다. 1623년(癸丑) 10월 4일 병환으로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시니 향년(享年) 71세 였다. 그해 12월에 선암산(仙巖山) 사향(巳向)의 언덕에 장사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권상일(權相一)이 지은 태촌선생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2. 시대적 배경

태촌(泰村)이 농가월령(農家月令)을 지을 당시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8)의 7년 전쟁이 끝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농민의 생활이 곤궁하여 생명 유지가 어려운 시기였다. 조선은 권농정책을 표방하였지만 농정을 담당하는 독립된 국가기관이 없었다.

경국대전의 기록을 보면 농정은 다원화되어 있다. 현재 농수산부가 담당하는 농업업무는 ① 호조(戶曹)의 판적사(版籍司)에서 토전(土田), 권과농상(勸課農桑), 고험풍흉(考驗豊凶) 등을 맡아 식량증산과 양정업무를 다루었다. 농업관련 직속관서는 평시서(平市署)와 사포서(司圃署)가 있었다. 평시서는 종 5품관이 책임자이며 시장(市場)을 담당하였고 사포서는 정 6품관이 책임자로 원포(園圃)와 채소를 담당하였다. ② 공조(工曹)의 산택사(山澤司)에서는 산림보호 및 경제수종과 조원(造園)을 담당 하였다. 경제수종으로 종이원료인 닥나무(楮), 칠의 원료인 옻나무, 자리의 원료인 완초(莞草),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 뽕나무, 각종 과목(果木)의 재배와 권장 및 통계를 다루었다. 장원서(掌苑署)는 정 6품이 기관장이며 궁성 내의 화훼, 조경, 과수, 진기한 동물 사육 등을 관장 하였다. ③ 병조(兵曹)의 승여사(乘輿司)에서는 황실용 말을, 무비사(武備司)에서는 군마의 사양관리 및 증식과 통계업무를 다루었다. 직속관서는 정 3품관이 책임자인 사복시(司僕寺)가 있다. 사복시는 마정(馬政)의 실무관서로 중앙 직속의 농정아문(農政衙門)중 가장 직급이 높으며, 각 도의 목장을 관리 하였다. ④ 예조의 전향사(典享司)에서는 국가적 연회, 국가적 제사 등을 담당하였다. 제수용 가축은 종 6품관이 책임자인 전생서(典牲暑)에서, 연회용 가축은 종 6품관이 책임자인 사축서(司畜署)에서 생산 공급하였다. ⑤ 지방 농정기구는 각 도에 종 2품 관찰사가 있고 보좌기구로 감찰을 담당하는 종 5품의 도사(都事), 종 6품의 판관(判官), 보건과 약초를 담당한 종 9품의 심약(審藥)이 각각 1인씩 있었다. 심약은 중앙의 전의감(典醫監 )이나 혜민서(惠民署)에서 파견되고 그 기관의 지휘를 받았다. 이상과 같은 농정기구의 직제를 살펴 볼 때 농업담당 전문인은 없었다. 지방의 농정은 지방 수령들이 수행하였다.

지방 수령은 고을의 크기에 따라 품계가 주어 졌다. 서울과 같이 큰 고을은 부윤(府尹)으로 종 2 품이 임명 되었고, 그 다음은 대도호부(大都護府)에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목(牧)에는 목사(牧使)로 이들의 수장에는 정 3 품이 임명되었다. 도호부(都護府)에는 종 3 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명되었고 군(郡)에는 종 4 품 군수(郡守)가 임명 되었다. 각 현(縣)에는 종 5 품 현령(縣令) 또는 종 6 품 현감(縣監)리 임명되었다. 이들 7계 품계 수령들은 수직적 관계는 아니고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협조 하였다. 지방 수령은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시행정도로 평가 받았다. 수령칠사는 첫째는 농상성(農桑盛)이고 둘째는 호구증(戶口增), 세 째는 학교흥(學校興), 네 째는 군정수(軍政修), 다섯째는 부역균(賦役均), 여섯째는 사송간(詞訟簡), 일곱째는 간활식(姦猾息)이다. 이들 업무의 실적은 매년 말 관찰사가 근무평정 하여 고과(考課)를 중앙에 보고 하여야 한다. 수령에 대한 관찰사의 근무 평정은 수령들이 농정에 관심을 가지고 권농행사를 시행 하도록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지방 수령의 업무 수행은 중앙의 육조체제에 따라 수령을 보좌하는 육방관속(六房官屬)과 고을의 자치조직인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감관(監官), 별감(別監), 아전(衙前), 통인(通引), 사령(使令), 군관(軍官), 관노(官奴), 관비(官婢) 등의 협조를 받았다. 수령의 보조 인력은 헌종(1834~1849)연간의 홍산현(鴻山縣)은 131명의 관원이 있었고 9개면에 각 1명씩의 권농관이 있었다. 권농관은 면내에 상주하면서 권농을 담당하였으나 품계는 없고 무급의 명예직이었고 면대표의 역할을 하였다. 면의 호수(戶數)가 많으면 늘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잠이 주산지인 경우는 양잠관(養蠶官)을 두도록 하였다. 면은 조선조에 확립된 자치조직으로 서울의 방(坊)에 해당하며, 권농관은 방을 대표하는 관령(管領)과 같이 면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풀이 된다. 수령은 각 면마다 1인 이상의 권농관을 지휘하여 권농업무를 수행하고, 잠업주산지에는 양잠관을 두도록 되어 있어 이들을 지휘하여 업무를 추진할 수 있었다. 각급 행정 기관의 농정업무 추진체계를 간단하게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중앙부서(호조, 공조, 병조, 예조) → 각도(관찰사) → 각 군 현(수령) → 각 면(권농관, 양잠관) → 각 마을(농민)

병조(兵曹)에서는 직속기관인 사복시(司僕寺)와 각 도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전국 각지에 목마(牧馬)를 담당하는 목장이 있었다. 이 목장의 책임은 종 6품의 감목관이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해당 고을 수령이 겸하였다. 감목관 밑에 군두(群頭)와 군부(群副)의 직책이 있고 실무로 목자(牧子)가 있었다. 수령은 직무상 목마의 직접책임을 맡을 때가 아니면 그들을 지휘, 감독할 의무가 없었다. 이 마정(馬政)의 업무체계를 계도화하면 다음과 같다.

병조 → 사복시 → 각 도 병마절도사 → 각 목장의 감목관(監牧官) → 군두 → 군부 → 목자

1663년 허목(許穆)이 작성한 ‘목장지도’를 보면 전국 131개의 목장에 말 20,213필, 소 895두 등 모두 21,108 마리의 우마를 사육하였다. 실무를 담당한 목자 수는 5,187명이었다.

이조(李朝)의 전기에는 농정의 주무부처인 호조의 사포서에는 기술직이 전혀 없었고 공조와 병조의 농업직은 기술 관청이면서도 그 기관의 책임자가 될 수 없도록 6품 이하로 한품(限品)화 되어 있었다. 기술직은 6품 이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종 6품의 화훼를 담당하는 사람을 정점으로 과수 담당, 가금담당, 짐승담당의 순으로 품계를 낮추었고 더 오를 수 없도록 한품화 하였는데 이는 기술의 경중으로 품계를 정한 것이라기보다 취급대상인 동식물의 품위나 정결성이 고려된 것 같다. 농업기술직의 농업기술 습득은 일정한 교육기관이 없고 도제(徒弟)식 교육이었다. 기술직은 중인 계급이었고 사류(士類)에 들지 못하였다. 따라서 기술직인 잡과에 합격한 기술인들은 최고위직에 올라갈 수 없었으며, 양반은 잡과응시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농업기술직은 관품(官品)이나 실직(實職)에서 제도적으로 소외되고 사회적으로 양인(良人)이하의 천인으로 억압되어 있었다. 권농정책으로 농업기술을 필요로 하면서도 기술과 기술직은 천시한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수행한 이들은 바로 그 사대부 관료들이었다.

농업의 기반인 토지와 토지생산에 대한 농민들의 국가에 대한 조세 부담은 농업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의 농지제도는 근본적으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곡풍지습(谷風之什) 편(扁)의 북산(北山)에 표현된 “부천지하 막비왕토 솔토지빈 막비왕민(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사상에 근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 토지의 사유화가 확립되지 않은 가운데 전국의 토지를 국유로 간주하는 원리가 작용하였다.

조선조는 전국의 토지를 일단 공전(公田)으로 편입한 다음 그 일부를 왕족이나 공신 및 관료들에게 지급하였다. 관계(官階)와 신분에 따라 18과(科)로 나누고 제 1 과인 정 1 품이 150결에서부터 차등하여 최하위인 종 9품에 대해서는 10결이 지급되었다. 이와 같이 지급된 수취권의 사전을 과전(科田)이라 하고 수취권자를 전주(田主), 경작농민을 전객(田客) 또는 전호라 하였다. 농민들은 경작지에 부과되는 조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조세는 국가가 관리를 파견하여 현지를 답사하고 작황(作況)을 판단하여 실제수량을 기준으로 10%의 과세율을 책정 하였다. 즉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합리적이라 생각되나 수확 전 단기간 내에 전국의 작황을 모두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방관이나 향리의 농간, 기술, 사무적 어려움으로 세종 12년에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답험손실법과 병행하였다. 공법은 수년간의 수확고를 평균하여 평년수량을 책정하고 정액의 조세율을 책정하였으나 폐단이 있어 세종 26년에 전품연분법(田品年分法)이 성안되었다. 전품연분법은 가장 풍요한 풍년이 든 해를 상상(上上)으로 하여 결당(2,753평)에 200두의 현미량을 생산하였다면 20두를 과세하고, 90% 작황은 18두, 80% 작황은 16두, 70% 작황은 14두, 60% 작황은 12두, 50% 작황은 10두, 40% 작황은 8두, 30% 작황은 6두, 20% 작황 일 때는 4두, 10% 작황일 때는 면세하였다.

농민의 부담은 조세곡(租稅穀) 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공전, 사전을 막론하고 각 종 명목으로 그 이상 수납하는 남수(濫收)가 있고 수납은 전주나 관리가 지정하는 곳까지 조세곡을 운반해야 했다. 이외에 사전의 경우 마초(馬草)인 곡초(穀草) 10속(束)울 납부하거나 쌀로 환산하여 초가미(草價米)가 가산되고 쑥, 숯, 섶, 꼴 등 제반 잡물도 현물이나 쌀로 환산하여 가산 되었다. 또 국가에서 지방 특산물을 징수하는 공(貢) 또는 잡공이 있었다. 특산물로는 도자기, 유기, 목기, 모시직물, 종이, 자리 종류 등 수공예품과 금, 은, 철 등의 광산물, 각종 수산물과 건어물, 각종 모피류, 과실류, 각종 우마피(牛馬皮), 꿀, 송진 등이 진상품으로 징수 되었다. 특산품은 특산지에서 징수되어야 하지만 특산지 여하에 관계없이 의영고(義盈庫), 장흥고(長興庫), 내수사(內需司) 등 실수요처인 6사(司) 이상에 미납이 확인되면 수령을 인사 조치하고 생산이 없을 경우 쌀로 환곡하여 대납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조세나 공물 이외에 경작자인 전객들에게는 국가의 과중한 부역이 있었다. 대전(大典)에는 8결당 한 해에 한사람이 6일 이내의 요역을 부담하였다. 또 왕의 친경의식에는 농민들이 동원되어 100여 결을 경작하였다. 또 도처의 국둔전(國屯田)이나 관둔전(官屯田)의 경작은 군인이나 관노비를 동원시켜 경작하여야 하나 실재는 인근 농민들을 동원하여 경작하였다. 또한 궁궐과 산성 수축, 지방관아와 제방 수축, 채광노역, 군역에 복무 중인 자의 농지를 대리 경작해 주는 노동 등 국가에 대한 직. 간접적 요역 등이 중첩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적 부역 외에 전주들의 사적 부역이 또 다시 겹쳤으니 조선 전기의 농민부담은 실로 너무나 과중하였으며, 의무만 존재하고 권한이 없는 농민들의 희생적인 부담이 조선 전기의 국가 운영을 지탱한 원동력이 되었다.

농업인들이 활용할 농서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 까? 중국의 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와 사시찬요(四時纂要)가 있었다. 범승지서(氾勝之書), 사민월령(四民月令), 제민요술(齊民要術), 진씨농서(陳氏農書), 왕씨농서(王氏農書), 산거사요(山居四要) 등의 중국 농서가 이용되었다. 이러한 중국 농서들은 내용면에서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에 적합하지 못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환경에 맞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부분만을 초록하고 이두로 풀이한 초록주해본의 농서 편찬이 이루어 졌다. 한상덕의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이행. 곽존중의 농서집요(農書輯要), 임경화의 양잠지법(養蠶之法), 강희맹이 1482년에 편찬한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1541년 중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그리고 1630년대 이서(李曙)가 초록언해한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 박흥생의 촬요신서(撮要新書) 등이 그 예이다.

우리나라 자연 기후와 토질에 적합한 농서도 세종의 적극적인 장려로 편찬 되었다. 농사직설(農事直說), 양화소록(養花小錄), 금양잡록(衿陽雜錄),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한정록(閑情錄), 치농문(治農門), 도문대작(屠門大嚼) 등이 있었다.


3. 농가월령(農家月令)

자연의 변화 현상에 인간이 생활 할 수 있도록 자연을 관찰하고 응용한 사람은 중국의 요(堯)임금이다. 요임금은 방위에 따른 자연조건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하여 동쪽 양곡(暘谷)에 희중(羲仲), 남쪽 명도(明都)에 희숙(羲叔), 서쪽 매곡(昧谷)에 화중(和仲), 북쪽 유도(幽都)에 화숙(和叔) 등에게 명령하여 살게 하시어 해, 달, 별 등의 천체의 운행과 그변화를 관찰하여 천체의 나타남과 사라지는 시각을 기록하게 하여 방위의 기준과 생물의 생장 생육 상태른 관찰 하게 하였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를 활용하여 4계절과 1년 12달 366일과 윤달을 만들게 하여 백성들이 농사일에 활용 하도록 하였다.

월령(月令)이란 말은 예기(禮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기대전 제 2 권 제 6 편 월령(月令)으로 사용하였다. 즉 진(秦)나라 여불위(呂不韋)가 3,000명의 문도(門徒)들을 모아 12 개월의 기명(紀名)을 정해서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수편(首篇)으로 삼아 “12월령(月令)”으로 만들어서 정령(政令)의 시행 방법을 논했다. 정령을 12개 분야로 나누었다. 달은 하(夏)나라의 정월을 기준 하였으며 그 안에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 일과 진(秦)나라 예가(禮家)의 이야기들을 혼합하여 기록하였다.

농가월령은 고상안(高尙顔)이 67세 되던 해인 1619년에 편찬한 월령식(月令式) 농서로 월별, 24절기 순으로 농가에서 하여야 할 작업을 기록하고 있다.

24절기는 서한(西漢)의 맹희(孟喜)가 괘기설(卦氣說)을 창안하여 8괘, 64괘를 1년 사시(四時), 12달, 24절기, 365일에 배열하고 절기의 변화를 해석 하였다. 이 괘기설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12벽괘(壁卦)이론이다. 12벽괘는 복(復), 임(臨), 태(泰), 대장(大壯), 쾌(夬), 건(乾), 구(姤), 둔(遯), 비(否), 관(觀), 박(剝), 곤(坤)으로, 12달과 1년 절기 가운데 중기(中氣) 즉 월중(月中) 절기를 대표하고 1년 사시의 변화를 상징하였다.

24 절기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절기는 동지, 춘분, 하지, 추분이다. 동지는 해가 가장 짧았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니 예부터 동지를 해의 생일이라 하였고, 새해의 시작으로 삼기에 제일 좋은 날로 여겼다.

24 절기는 해를 비롯한 천체의 이동과 지구 대기권의 기후 변화,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들의 성장 발육을 조화롭게 표현하여 사람들이 생활에 응용하도록 만든 계획표이다. 절기력은 태양과 지구의 이동을 기준으로 만든 년력(年曆)이다. 지구에서 보아 태양이 지나가는 길 즉 황도(黃道)를 24등분 하여 15~16°씩 이동하는 거리를 1 절로하여 15일, 16일 간격으로 1 년을 24등분 하였다. 태양의 움직임은 지구에서 보아 완전한 원을 그리지 않고 타원 괘도를 순회 하기 때문에 절기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15일 아니면 16일이 되어 절기 간격에 약간의 차이가 난다. 태양이 황도를 따라 순회 할 때 하루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의 길이가 가장 긴 지점을 동지라 하고 절기의 시작점으로 만들었다. 절기는 기준점이 되는 기절(基節)에 동지(冬至), 하지(夏至), 춘분(春分) 및 추분(秋分)을 두고,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입절(立節)에 입동(立冬), 입춘(立春), 입하(立夏) 및 입추(立秋) 넣어 8개의 중추 뼈대로 삼았다. 이들 기절과 입절 사이에 두 개씩 나누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교절(交節)과 계절의 절정을 이루는 극절(極節)을 두었다. 일 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나눈다면 봄은 입춘에서 입하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입춘과 춘분 사이에 우수와 경칩, 입하와 하지 사이 소만과 망종, 입추와 추분 사이 처서와 백로, 입동과 동지사이 소설과 대설을 교절이라 하고, 춘분과 입하 사이의 청명, 곡우, 하지와 입추 사이의 소서와 대서, 추분과 입동 사이의 한로와 상강, 동지와 입춘 사이의 소한과 대한을 극절이라 한다. 기절기는 계절의 분기점이 되고, 입절기에는 계절이 일어서게 되며, 교절기에는 계절이 교차하게 되고, 극절기에는 계절의 절정을 이룬다. 또한 24절기는 크게 절(節)과 중(中)으로 나누며 매월 4~8일 사이에 오는 것을 절이라하고 19~23일에 오는 것을 중이라 하며, 중을 기준으로 달을 정한다. 중은 우수, 춘분, 곡우, 소만, 하지, 대서, 처서, 추분, 상강, 소설, 동지, 대한이다. 절은 입춘, 경칩, 청명, 입하, 망종, 소서, 입추, 백로, 한로, 입동, 대설, 소한이다. 음력으로 중기(中氣)인 우수가 들어간 달을 1월, 춘분은 2월, 곡우는 3월, 소만은 4월, 하지는 5월, 대서는 6월, 처서는 7월, 추분은 8월, 상강은 9월, 소설은 10월, 동지는 11월, 대한은 12월이다. 음력은 달의 변화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1년 12달이 354.37일고, 태양의 이동을 기준으로 한 태양력은 365.24일 이다. 이 둘 사이에는 대략 11일의 차이가 난다. 절기는 한 달에 두 개씩 들어온다. 초순에 절이 들어오고 하순에 중이 들어온다. 이를 계속 이어가다 보면 음력과 양력의 편차 때문에 한 달에 세 개의 절기가 들어오는 경우가 생긴다. 세 개 중에 중(中)이 두개가 들어오면 당연히 다음 달에는 절(節) 한 개만 들어온다. 즉 중이 없는 달이 생기는 것이다. 중을 기준으로 달을 정하기 때문에 그달은 무슨 달인지 정할 수가 없다. 정할 수 없는 달이니 이 달을 윤달로 정하여 한 달을 억지로 끼워 넣으면 편차는 없어진다. 이를 무중치윤법(無中置閏法)이라 한다. 이러한 차이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윤달을 두었다. 땅의 시간인 12지지와 오행, 음양, 절기 및 계절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1. 12월과 음양 오행 및 절기 관계

음력

11

12

1

2

3

4

5

6

7

8

9

10

12지

동물

토끼

원猿

돼지

오행

음양

월괘

大壯

중기

동지

대한

우수

춘분

곡우

소만

하지

대서

처서

추분

상강

소설

절기

대설

소한

입춘

경칩

청명

입하

망종

소서

입추

백로

한로

입동

계절

겨울

여름

가을

겨울

양력

12

1

2

3

4

5

6

7

8

9

10

11

하늘의 시간을 10간(天干)이라 하고 땅의 시간을 12지지(地支)라 하며, 인간의 시간을 60갑자(甲子)라 하고, 하루의 변화는 모습을 오방색으로 표현하고, 우주의 공간을 오방위로 나타내는 관계는 다음 표와 같다.

표 2. 천간,지지, 60갑자, 오방색 및 오방위

60갑자

오방색

오방위

갑자甲子

갑술甲戌

갑신

갑오

갑진

갑인

청 靑

동 東

을축乙丑

을해乙亥

을유

을미

을사

을묘

병인丙寅

병자

병술

병신

병오

병진

적 赤

남 南

정묘丁卯

정축

정해

정유

정미

정사

무진戊辰

무인

무자

무술

무신

무오

황 黃

중앙中央

기사己巳

기묘

기축

기해

기유

기미

경오庚午

경진

경인

경자

경술

경신

백 白

서 西

신미辛未

신사

신묘

신축

신해

신유

임신壬申

임오

임진

임인

임자

임술

흑 黑

북 北

계유癸酉

계미

계사

계묘

계축

계해

이러한 1년의 절기를 농민들이 계절에 맞추어 농작물 관리에 활용 할 수 있도록 표로 정리하여 만들어 놓은 표가 농가 월령이다. 월령이란 말이 처음 사용한 기록은 예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태촌이 농가월령을 저술한 목적은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바와 같이 임진왜란 후 농서가 흩어져 없어 져서 탄식한 나머지 “40 여 년간의 목민관직(牧民官職)에서 항시(恒時) 상농(尙農)을 권농(勸農)하면서 얻은 농사 경험과 견문한 바의 실험적 자료를 모은 실용적 농역(農曆)” 서(書)로서 여러 농가에 농업기술을 지도하고자 저술 하였다. 그는 한문체를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농부가 알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농가월령의 소고(小考)에서는 고영조 저서의 번역본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1] 정월 절 입춘

1) 절기일(節期日); 전월(前月)에 물에 담구었던 곁 보리(大麥) 씨를 들어내어 밖에 두어 얼게 한다.(비록 진맥(眞麥)을 섞더라도 부패하면 나지 않는다.)

김영진과 이은웅은 그들의 저서 “조선시대 농업과학 기술사”에서 고상안의 농가월령 중 1월령의 내용을 소개하였다. 맥류의 춘화처리에 관한 기록은 “소련의 리센코(Lysenko)가 개발한 춘화처리(Vernalization)보다 300년이나 앞섰다고” 하였다. 그들은 또 “17세기 초 문경지방의 농법을 이해 할 수 있고 최초의 담배 재배법이 수록 되었다는 면에서 귀중한 과학기술사의 자료가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김영진과 이은웅이 밝힌 바와 같이 맥류의 춘화처리에 관한 기록이다. 문경은 산간 지방이라 가을에 가을보리를 파종하면 월동 중 보리 싹이 얼어 죽는 해가 있다. 그렇다고 가을보리를 봄에 파종할 경우 여름이 다되어도 이삭이 나오지 않는 좌지(座止) 현상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극복하고자 겨울에 가을보리를 싹틔어 얼리는 소위 얼보리(凍麰)를 개발하여 이런 봄에 파종함으로써 정상적으로 보리를 수확 할 수 있게 하였다. 선진국 보다 300년이나 앞서 춘화처리법을 기록하고 있지만 계속 발전 시켜 전하여 오지 못한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2) 이엉을 엮고 새끼를 꼬아 빨리 지붕을 인다.

농기(農器)를 준비한다.(중 보습, 작은 보습, 경칠(景鐵) 및 큰 가래, 써레, 호치(虎齒), 파과(把錁), 시서(屎鋤), 흘라(迄羅), 못자리 번지판 등이다.)

농기의 명칭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같은 농기를 달리 표현하고 있다. 김영진과 이은웅은 중리(中犂)를 중쟁기, 소리(小犂)를 극쟁이(보습만 있고 볏이 없음), 이구급(犂口及)을 보습, 경철(景鐵)을 볏, 대삽(大揷)을 가래, 파과(把錁)를 쇠스랑, 시서(屎鋤)를 거름통, 파노(杷橯)를 고무래, 흘라(迄羅)를 써래로 번역하였다.


2] 정월 중 우수

3) 비온 다음날 띠풀을 베는데 길고 짧은 것을 가리지 않는다.(짧은 것은 남자 도롱이에 알맞고 긴 것은 여자 것을 만드는데 알맞다.)

4) 왕골초로 끈을 만들어 농사짓는 도롱이를 만든다.

5) 뜰 안 밖의 잡초를 베어 모아서 태워 재를 만든다.(재가 식기 전에 대. 소변과 섞어, 쌓아서 뜸 들였다가, 봄보리를 가는데 쓴다.)

6) 장작과 섶나무를 쌓아서 농사철에 쓸 것을 준비 한다.

7) 얼음이 녹으려 하면 얼구었던 보리를 파종한다.(봄보리와 같은 시기에 익는다.)

8) 소나무를 심는다.(흙은 넣은 흔적만 남기고 과하게 흙을 쌓으면 안된다. 과하면 반드시 죽는다. 산양(山陽) 사람이 이미 경험한 이가 있다.)

9) 메주를 만든다.

10) 목화밭을 재경(再耕)한다.

11) 칡넝쿨을 걷어서 마소(馬牛)를 방목 할 때의 고삐로 사용한다.

12) 절후말(節侯末)에 해동이 되면 봄보리를 파종한다. 더빨라도 무방하므로 빠를수록 좋다.


3] 이월 절 경첩

13) 봄갈이 전에 땔감을 쌓아둔다.

14) 절기 내에 봄 보리씨를 다 파종한다. (절기내에 마치니 못하면 너무 늦 어 좋지 않다. 재가 많은 것이 잘되고 보리는 습한 땅에 좋으며, 겉보 리는 약간 건조한 땅이 좋다. 콩을 심을 밭에 보리를 갈 때는 써레로 하지 아니하고 나무보습으로 얕게 갈아서 왕골 사이에 들깨와 수수와 삼씨를 모래와 잘 섞어 드물게 뿌려 써레로 함께 흙을 덮으면 이들 몇 가지 씨앗이 먼저 나서 콩을 심는데 편리한 것 같다.)

15) 메주를 햇빛에 말린다.(마르면 담근다.)

16) 과목과 잡목을 심는다.(과목은 보름날 전에 심는 것이 좋다. 보름 후에 심은 것은 과일이 적게 생산되니, 위방법은 오곡도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17) 삼씨와 홍화를 파종한다.(모두 비옥한 땅을 가려서 파종하고, 파종 후에 마소의 똥을 덮는데 많을수록 좋다.)

18) 담배씨를 파종한다.(먼저 오줌을 파종할 곳에 많이 뿌리고, 흙을 덮어 주어 마른 후에 씨를 뿌린다.)


4] 이월 중 춘분

19) 여러 채소와 청대(靑黛) 풀씨를 파종 한다.

20) 묵은 밭이 있으면 중 보습으로 일구어서 서속(黍粟)을 갈도록 해둔다.(오래 묵은 밭은 서속과 목화, 메밀이 잘 될 것이다.)

21) 호미와 삿갓을 산다.

22) 닥나무를 심는다.(벤 자리에 흙을 쌓으면 안된다. 반드시 죽으므로 흙으로 그 뿌리를 덮을 정도면 된다.)

23) 청포를 심는다.(물이 있고 비옥한 땅이 좋다.)

24) 얼군 보리(冬麥)를 맨다.(파종한 양골 사이에 서속이나 콩을 낙종(落種)하는 것이 좋다. 조를 낙종하였다면 간간히 붉은 팥을 뿌린다.


5] 3월 절 청명

25) 올 조와 올 기장을 파종한다.(건조한 땅이 좋다.)

26) 잠종을 따뜻한 곳에 안치한다.(만약 뽕나무가 잎이 피지 않았는데 누에가 일거 던 전년 가을에 가루로 만든 뽕잎을 물로 축여서 먹이면 누에가 살아나게 된다.)

가루로 만든 뽕잎은 인공사료의 시초로 볼 수 있다. 1960년에 일본의 하마무라(氵兵 村)가 누에 인공 사료 육을 시도한 실험 보다 340년 전에 누에 인공사육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 점이 아쉬움을 남게 한다.

양잠지요(養蠶之要)

양잠의 요체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겨울에 누에씨(蠶種)를 펴놓은 종이를 바람이 드는 곳에 두고, 수시로 물에 담궈 얼게하면 기(氣)를 적게 받은 놈은 죽고 살지 못하며, 기를 많이 받은 놈은 여러 차례 얼궈도 상하지 아니하고 함께 살아서 첫 잠부터 섶에 오르기 까지 영영 누에가 강사(疆死)하는 걱정이 없다. 둘째 7, 8월 사이에 뽕잎을 따서 햇볕에 강하게 말려 가루로 만든다. 뽕 가루를 체로 쳐서 단지에 담는데, 많아도 지장은 없다. 만일 뽕잎이 나지 않았는데 누에가 깨어 나오면 그 가루를 온화한 물에 약간 적셔서 누에를 먹이면 좋다. 또 누에의 성질이 습기를 싫어하는데, 뽕잎이 비나 이슬에 젖었으면 뽕잎 가루를 뽕잎 위에 뿌려서 먹이면 좋고, 비단, 누에의 성질만이 아니고 고치를 지어도 굳고 단단하여 실을 배(倍)로 얻을 수 있다. 항상 양잠을 하는 사람은 꼭 알아 두어야 할 일이다.

27) 전해 가을에 마련해 둔 방초나 참깨 깍지를 소변에 담궈 무논(水田)에 넣고 올 모씨를 뿌린다. (마련해 둔 것이 없으면 귀록(貴綠)잎이나 어린 버들 잎 혹은 노구초( 老嫗草, 할미초)를 소변에 버무려 땅바닥에 쌓아 띄워서 써도 된다. 소변이 없으면 마구에 넣어 밟힌 후 지상(地上)에 도로 내어 띄운 후에 쓴다.)

28) 올 볍씨를 파종한다.(흙살이 깊은 곳이 좋다. 그렇지 못하면 땅에 똥을 뿌려 주는 것이 좋다.)

29) 묵은 밭이 있으면 갈아 두어 목화를 심도록 준비한다.

30) 보리밭을 김맨다.


6] 3월 중 곡우

31) 절기 초에 곧 목화씨를 파종한다.(사이사이에 참깨 씨를 뿌린다. 밭이 건조하고 똥거름이 많은 것이 좋다.)

32) 율무를 파종한다.(습진 땅이 좋다.)

33) 누에 발(箔)을 만든다.(발에 누에를 눕히면 무름병이나 굳은병(경화병)을 없에 준다. 전년 가을에 베어 둔 갈대로 발을 만든다.)


7] 4월 절 입하

34) 들깨를 파종한다. 모를 달게도 드물지도 않게 한다.(혹 목화밭 고랑 중이나 밭 가운데 빈틈, 보리밭이 멀면 그 밭의 남은 이랑도 좋다.)

35) 다음벼(次稻; 중생종)볍씨를 파종한다.(전기해서 풀을 베어 밭에 두껍게 덮은 후 땅을 갈아 낙종한다. 등어리 꽃(登於里花)이나 창포를 베어서 앞과 같이 마구에 넣어 차앙(次秧;중생종)볍씨를 부쳐 지상에 두어 울기기 날라 간 후에 쓰기도 하므로 또한 앞과 같다.)

36) 갈보리밭을 두 번째 김매기 한다.(보리밭만 못한 것은 한번만 김매기 해도 가하다.)

37) 천수봉답(天水奉畓)에 만약 비가 오지 않으면 마른 볍씨를 파종하는 것이 좋다.(씨는 밀달조(密達租)를 쓰는데 이것이 아니면 안되는데 흙이 부드러워 너무 무성해서 주저 앉게 한다. 파종 후에 사립문(싸리문)을 끌고 다녀 흙덩이를 깨는 것이 좋다. 꼭 이절(是節) 후에는 너무 가물어서 벼 싹이 나기 전에 잡초가 무성하여 제초에 어려움을 겪는다.)

38) 이 절기에는 누에가 이미 크고 벌어져서 뽕잎을 따서 우로(雨露)를 무릅쓰고 누에를 치는데 누에의 성질이 습기를 싫어하여 병이 드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뽕잎가루를써서 이슬 뭍은 잎에 뿌려서, 먹이면 습기를 없앨 뿐 아니라 고치도 다른것보다 야물다.)


8] 4월 중 소만

39) 이 절후 안에 늦벼를 모두 파종한다.(풀을 베는 것은 차도(次稻;중생종)를 파종하는 예와 같다.)

40) 목화밭을 첫 번째 김매기 한다.

41) 올조와 올 콩을 김매기 한다.

42) 올모내기를 한다.(전기해서 풀을 베어 넣은 것은 위와 같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반달 전에 논갈이를 하여 부종(付種)을 못하면 속담에 말하는 ‘건삶이(쓰레질)’를 해둔다. 이 같이 하면 풀이 나고 땅이 부드러워져서 다시 논을 다스려 모를 심으면 풀을 넣은 것과 다름이 없다.)

43) 천봉답에 만약 마른 논에 볍씨를 넣지 못하였다면 이 절기 내에 늦심는 볍씨를 파종한다.(볍씨는 털이 있는 외조(倭租)와 홍도(紅稻) 등 품종을 쓴다.)

44) 여름(夏月)에 소를 풀 뜯어 먹일 때 수수 밭을 가까이 하지 말라.(청개구리가 수수 잎 뒤에 숨었는데 소가 잎을 먹다가 이것을 먹게 되면 반드시 죽고 구하지 못한다. 근일에 경험 하였다. 혹 어떤 사람은 대서이후에는 무방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45) 목화가 겨우 나서, 모진 바람과 서리, 우박의 재해 등을 만나면 태반이 말라 죽는데, 삼가 갈아엎지 말라. (그 살아남은 것을 보존하고 조를 파종하여 김매고 목화뿌리를 북돋아 주고 조(粟)씨를 덮어 주면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다. 백곡이 모두 목화를 방해하나 오직 조는 해가 없다.)


9] 5월 절 망종

46) 도리깨를 고쳐 둔다.

47) 조밭을 두 번째로 김맨다.

48) 목화밭을 두 번째로 김맨다.

49) 들완초를 베서 자리를 짜는 데 쓴다.

50) 다음 벼 모내기를 한다.(논 다스리기는 올모내기 예와 같다. 모가 부족해서 논에 남는 곳이 있으면 밀달조를 파종한다.)

51) 비온 후에 담배모를 옮긴다.


10] 5월 중 하지

52) 급히 가을보리를 수확한다.(껍질과 까시랑이를 모아 태워서 재를 소변과 버문다.)

53) 근경(根耕)을 하는데 먼저 대.소두(大 .小豆)를, 다음에 서속(黍粟)을, 다음에 녹두를 간다.(녹두는 박전 薄田에 심는 것이 가장 좋고, 밭도 약간 비옥해지며, 또 가뭄에 견디는 성질이 있다.)

54) 들깨모를 근경(根耕)한 밭에 옮긴다.(심을 때 분(糞)에 버문 재를 쓰면 그 무성함이 배기 된다.)

55) 늦모내기를 한다.(논 다루기와 심기는 다른 모내기의 예와 같다.)

56) 목화밭을 세 번째 김매기 한다.

57) 경험(임자년 6월 초6일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왔다. 두 하인이 비로소 밀단조와 털 있는 왜조를 봉답에 낙종하여 두 번 논매기한 뿐인데 가을이 되어 수확하니 1두, 2두요 충실하기가 평상시와 같으니 절기로 보면 소서(小暑)3일전 이였다.)

58) 얼군 가을보리가 익어 이미 거두었으면 콩과 조를 김맨다.


11] 6월 절 소서

59) 잡초와 버들가지를 베어 잘게 썰어서 마구에 넣는다.(수시로 밟히고 수시로 내어 쌓아서 가을 농사에 혹 씨 뿌릴 때 똥, 재(糞. 灰)가 부족하면 보충한다. 이로부터 7월 그믐까지 계속하여 중단치 아니한다.)

60) 겨울 보리를 낙종한 골을 갈아서 콩과 조 뿌리를 덮어 준다.

61) 비온 후에 산마(山麻)를 벤다.(껍질은 바(索 삭)을 만드는데 좋고 속대는 광주리나 상자를 만드는데 좋다.)

62) 목화밭을 네 번째 맨다.


12] 6월 중 대서

63) 올(早) 기장과 올 조를 수확한다.(삭갈이(근경 根耕)하여 메밀을 재배하면 밭 토질이 점점 박해지니 녹두를 심어서 그 무성해짐을 기다렸다가 녹두를 갈아엎어 곧 가을보리를 파종하면 보리 수확이 배가 되고 땅도 약간 비옥해지는 편이니 그렇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13] 7월 절 입추

64) 절기 후 4,5일에 메밀을 파종한다.(중보습으로 띠와 갈대가 무성한 밭을 갈아서 메밀을 파종하면 띠와 갈대가 없어져 나지 아니한다. 토질이 두터우면 무를 함께 심는다.)

65) 무를 삼밭에 파종한다.

66) 목화밭을 여섯 번째 김맨다.

67) 겨울보리 간 곳을 두 번째 갈고, 콩 조밭은 삭갈이 한다.


14] 7월 중 처서

68) 올벼를 거둬들인다.(볏짚은 갠날에 널어 말린다. 저녁에 걷고 아침에 널어 이미 마른 것을 묶어서 비 가림한 곳에 둔다.)

69) 띠풀을 베어 가장 긴 것은 초석(草席-돗자리)을 짜도록 한다.

70) 뽕잎을 따서 그늘에 말려 가루로 만들고, 종이 봉지에 담거나 옹기에 넣는다.(온돌에 두면 더욱 좋다.)

71) 잡초와 버들가지를 베어 잘게 썰어 마구에 넣는다.(전월에 한 일과 같다.)

72) 목화밭을 일곱 번째로 맨다.(호미를 쓰지 않고 손으로 풀만 뽑는다.)

73) 참깨를 베어 처마 아래에 세운다. 마르면 깨를 떤다. 다 떨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떤다.(그 깍지는 올 모판에 쓴다.)

15] 8월 절 백로

74) 절기 초에 배추와 부루(상추)씨를 파종한다.

75) 산중의 잡초와 상수리 가지를 베어 큼직막하게 썰어서 쌓아 둔다.(겨울과 봄에 마구에 넣을 거리로 한다. 9월 중까지 계속한다.)

76) 부들(香蒲)을 베어 묶어 비를 맞거나 녹지 않도록 둔다.(내년 봄 올모용으로 준비한다. 뽕잎 가루를 넉넉하게 준비치 못했으면 이 계절에 해도 된다.)


16] 8월 중 추분

78) 가을보리(麰麥)를 파종한다.(만일 삭갈이(根耕)는 곡식을 미쳐 거두지 못했으면 한로(寒露)절 초에 갈아서 심어도 좋다. 만약 얼군 모맥 밭이면 내년 봄에 콩과 조를 골 갈이 한다.)

79) 중생종 벼를 벤다.(짚은 또한 널어 말린다.)

80) 띠 풀을 베어 많이 모으고 펴서 서리를 맞게 하여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좋다.


17] 9월 절 한로

81) 꼴초를 베어 말려서 쌓아 둔다.(겨울절 마소의 사료로 한다.)

82) 잡초와 상수리가지를 벤다.(전달과 같이 한다.)


18] 9월 중 상강

83) 들깨 이삭이 약간 검은 곳이 있으면 곧 베어 알을 떤다.

84) 칡(葛)을 걷어서 짐 싣는 바를 만든다.(갈 한줄기를 네 갈래로 쪼개고, 나무칼로 그 심을 긁어 내어 바를 만드는데, 숙련되면 부드럽기가 익혀 만든 삼바와 다름이 없고, 또 습기에 견딘다.)

85) 딱잎이 떨어지면 베어 쪄서 껍질을 취한다.(껍질은 종이를 만들고, 속줄기는 큰 것은 가히 울타리를 만들 수 있고, 가는 것은 도투마리 뱁대로 쓸 수 있다.

86) 늦 곡식을 수확한다.


19] 10월 절 입동

87) 추수를 다 마치고는 먼저 토실을 짓고 다음에 울타리를 보수 한다.(원장을 쌓으면 더욱 좋다.)

88) 창호와 헐은 벽을 보수한다.

89) 갈대를 베어 내년 봄에 누에를 눕힐 발을 만든다.

90) 메주를 만든다.

20] 10월 중 소설

91) 벼 타작을 하고 막대로 볏짚을 두드려 남은 벼 알을 턴다.(볏짚을 털어 먼지를 없애면 마소가 즐겨 먹는다.)

92) 섶나무를 쌓아 눈비에 대비한다.

93) 무논에 갈풀이 많이 나거든 이 달에 갈아엎는 것이 좋다. 양년을 이 같이하면 씨가 져서 나지 않는다.

94) 마른 논을 갈아엎어 작은 고랑을 만들어 얼군 보리를 심을 수 있게 한다.

95) 억새풀을 베어 이엉을 만든다.(빗물을 막고 오래 견디어 볏짚보다 낫다.)

96) 땔감을 마련한다.(많을수록 좋다.)

97) 비온 후에 목화밭을 갈아엎는다.(내년에 목화를 심으려는 밭이다.)

98) 어떤 이는 말하기를 얼군 보리의 절목(節目)이 간단치 않아서, 입춘 후에 직파하여도 가을보리가 또한 된다고 한다.


21] 11월 절 대설

99) 사람(人夫)과 마소(馬牛)를 고르고, 어염(魚鹽)을 사둔다.(본전은 두고 이식(利息)을 취해서, 겨울 동안의 반찬을 잇는다.)

100) 비온 이튼 날 띠풀과 왕골초를 취하여 정월에 하는 일과 같이 한다.

101) 전월과 같이 땔감을 쌓는다.


22] 11월 중 동지

102) 사람을 시켜 토실(土室)에서 멍석을 만든다.

103)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이엉을 엮는다.


23] 12월 절 소한

104) 멍석을 만들고, 이엉을 엮는 것은 전달과 같이한다.


24] 12월 중 대한

105) 절기 일에 가을보리를 물에 담그고, 쇠그릇을 토실에 둔다.(전일에 이미 가을보리를 파종하여 이를 돌보고 또 돌보더라도 만약 땅이 양지바르지 않고 또 겨울눈이 평상의 배가 내리던가 하면 가을에 심은 것이 죽어 다시 살아나지 않아서 일손을 잃어 가꾸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니 이것으로 나중에 심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06) 그믐날에 큰 쥐를 잡는다.(껍질과 창자를 버리고 햇빛에 말린다. 사람이 걱정하는 두진(痘疹;천연두)에 걸렸을 때 다려서 그 물을 마시면 차도가 있다.)

107) 이날 말똥을 주워 간수한다.[더위병(暑症)에 쓴다.]

108) 그믐날 온 눈을 옹기에 담아 토실에 둔다.(얼지 않게 하여 봄이 왔을 때 그 물로 모맥을 담구어 파종하면 황모병에 걸리지 않고, 또 이물로 능히 두진, 염질(染疾)의 열을 치료할 수 있다.)

☀ 잡령

109) 무논(水田)농사는 조만(早晩;싹이 일찍 트고, 늦게 틈)이 고르지 않아 목화와 다르기 때문에 김매기의 절목을 말하지 않았으니, 요컨대 잘 짐작하여 하면 된다. 대개 벼 밭은 네 차례 김매기 하는 것이 좋으나 못자리와 근경(根耕)한 밭은 두 차례가 적당하고, 서속(黍粟)도 또한 같다.

110) 농가가 정낭(변소)을 고칠 때 제일로 삼아야할 조건은 옛글에 단성(경남산청소재) 땅 모(某)가 합천에 살며 정낭 밑 몇 척을 파서 큰 옹기를 그 가운데 안치하여 소변이 모두 옹기 속으로 흘러들게 하고, 차면 막대기로 저어 떠내서 재와 버무려서 곡식 심을 때 써는데 이로 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111) 빨래한 더러운 물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회분(灰氣), 티끌, 때(塵垕)가 있어서이다. 소변 통에 붓는 것이 좋다.

112) 질요강(窃料瓮)은 터질 것이 두려우니 나무통을 파서 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말통(馬槽)같은 것도 정낭 구멍 아래 놓아 소변을 받도록 한다.

113) 통 안에 구더기가 성하면 파리 또한 성해짐을 막기 어려우니 할미꽃을 베어 잘게 썰어 통에 넣어두면 구더기 걱정을 가히 덜 수 있다.

114) 명주(溟洲) 사람은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니 소변을 더없는 보배로 삼고 있다.

115) 새삼(免絲)넝쿨은 그 해가 막심하여 콩밭에는 뻗기를 좋아하나 팥밭에는 즐겨하지 않으니 만약 우려가 있으면 콩 한고랑에 팥 한 고랑을 사이를 두어 낙종하는 것이 좋다.

116) 농사는 전적으로 소 기르는데 의지하므로 삼동(三冬)에 미리 잘 거두어 두지 않으면 안된다. 덕시기(襲具)를 두껍게 해서 그 몸을 따뜻이 하고, 나무를 적게 실어 그 힘쓰는 것을 편토록 한다.

117) 부뚜막 아래 재를 거두어 비 가림 곳에 쌓아둔다. 아침에 땐 것은 저녁에 거두고 저녁에 땐 것은 아침에 거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많이 모을 수 없다.

118) 밥 짓는 나무는 재가 매우 적으므로 홍초(烘草)의 많은 것 보다 못하다.(항차 홍초는 밥 짓는데 매우 좋으니 이것은 꼭 알아 두어야 한다.)

119) 참깨 깍지와 다복쑥은 비록 갈무리해 두었다 하더라도 땔나무가 떨어지는 날엔 땔감으로 바뀌는 근심이 없지 않다.

120) 꼭지를 묶어 땅 위에 놓고 통속에 있는 소변을 그 위에 부어두면 틀림없이 땔감으로 대신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121) 닥나무(楮)를 찔 때 닥을 당겨 구덩이에 묻는데, 닥은 땅위로 3척이 높고, 불집위의 돌이 이미 붉게 단 후에 흙으로 먼저 닥을 덮고 다음에 불집을 덮어 물을 계속하여 부어 불집에서 끓는 소리가 없어짐을 한계로 해서, 두 시간쯤 지난 후에(닥을) 꺼낸다. 삼을 찌는 것도 또한 같다.

* 닥무지는 닥나무를 쌓은 무더기를 의미하며 닥나무를 찌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닥나무는 11월부터 익년 2월에 1년생을 채취하여 껍질을 벗기기 위하여 증기로 쪄야한다.

122) 갯밭은 수해의 우려가 많다. 모맥 사이에 파종한 콩, 조는 성숙하기가 어렵고, 콩, 조를 파종할 때 털이 있는 피(稷)를 섞어 파종 한다면, 비록 콩, 조는 없어지더라도 보리는 가히 거둘 수 있다.(털이 있는 피를 장자직(長者稷)이라 부른다.)

123) 수수는 오곡의 최하위이나 또한 소주를 빚거나 벽을 치는 쓰임에 좋다. 목화밭 이랑의 머리 쪽이나 근경(根耕)한 밭 안에 간간히 낙종(落種)하는 것이 좋다.

124) 오곡 중 가뭄에 견디는 것은 서속(黍粟)이 최상이고, 녹두, 동배가 다음이다. 단 서속 밭은 점점 박(薄)해 지고, 녹두, 동배 밭은 점점 비옥해지므로 근년에 서속을 심었다면 명년에는 녹두, 동배를 심어 서로 바꾸어 재배하는 것이 좋다.

125) 물에 견디기는 피가 최상이고, 들깨가 다음이다.

126) 매년 동짓날에 각 곡식을 홉대로 똑같이 떠서 각각 주머니를 달리하여 땅을 파서 묻었다가 입춘 일에 꺼내서 개량(改量)하여 많이 불어난 것은 배가 되고, 작은것은 다음이니 이를 이용하여 오는 해의 풍흉(豊凶)을 짐작한다.


맺는 말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여 나라 경제가 발전하도록 하는 정책을 펴는 나라였다. 그러나 유학이년의 선비정신으로 국가적 농업정책을 수행하고 농업기술을 개발하는 정부 조직은 소원하였다. 오직 선각자들의 개인적 사유(思惟)로 노동방법을 갱신하려는 개개인의 관심이 표출되어 농업 기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농업의 과학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농기구들이 발명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농민의 살림이 전보다 넉넉해졌다.

고상안의 농가월령은 농업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 기술의 개발과 농민들에게 보급하고 실천 시켜 궁핍함을 피하고 윤택한 생활을 유도할 목적으로 쓰여 진 농역서(農曆書) 이다. 400년 전의 우리 선조들은 상당히 발전적 농사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맥류의 저온 처리법, 누에 인공사료의 사용 등은 특기 할만하다. 옛 선조들의 선진적 농법을 널리 알려 개발하고 선조들의 자연 적응성을 부각 시킬 필요성이 충분이 있다고 생각 된다. 농가월령의 가치는 17세기 초 지역의 농법을 이해할 수 있고, 서구과학보다 300년이나 앞서 맥류의 춘화처리를 실천하였다는 사실, 최초의 담배 재배법이 수록되었고, 누에 사료의 저장법을 실행하여 인공사료의 시초를 일본의 인공사료 시도보다 350여년 앞선 점 등은 특기할 만한 역사적 사료라 생각한다.

고상안의 농가월령 저작 발표와 교육으로 “산간지역 농민들은 과거보다 훨씬 발달된 농업 기술로 영농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지역과 토질에 따라 알맞은 농법을 쓰는 일은 주목할 만한 발전이었고, 농사의 기술이 향상되어 산간지역에서의 농산물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고 추정할 수 있다.


인용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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