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3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제3권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의 서하(西河) 임춘(林椿)

빛마당 2015. 3. 19. 09:58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의 서하(西河) 임춘(林椿)


김 재 수*


 임춘(林椿). 고려 인종 때의 문인(?1147-1197~?).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의종, 명종 때의 사람으로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이다. 임춘은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부친 광비(光庇)와 큰아버지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거친 유학자여서 임춘 역시 유학자로 소양을 갖춘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육갑(六甲)을 외우고 백가서(百家書)를 읽는 등 큰아버지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청년기에 벌써 문명을 날리는 등 귀족의 자제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고 조상의 덕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공은 자신의 실력으로 자립하겠다는 의지로 여러 번 과거에 응시를 하였다. 하지만 운이 없었는지 번번이 낙방하고 말았다. 이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공이 학문의 뜻을 한창 펼치려는 20세 전후인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武臣亂)이 일어났다. 이때 정권을 잡은 무신들에 의해 문신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임춘 역시 무신란의 1차 학살 때 그의 일가도 화를 당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공음전(功蔭田)조차 빼앗겨 버리고 간신히 목숨만 살아 개성 근처에서 숨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한 번 몰락한 가문은 일어 설 기회조차 없었다. 하는 수 없이 4년 후 여름, 경상도 예천(醴泉)으로 내려가 그 그곳에 살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산에 굴을 뚫어 강물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들판을 흐르는 물이 다른 곳으로 세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보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만든 굴과 보는 각각 굴모리굴, 임춘천이라 불렸으며 이런 예천에서의 생활로 인해 공은 예천 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다시 상주(尙州)로 옮겨와 7년여의 고단한 생활을 했다. 현재 전하는 그의 글 중 대부분은 이때에 쓴 것들이며, 한때는 개령현의 한골(아포읍 대신리)에 우거하기도 하고 수년간을 밀양부사와 지우(知遇)를 얻어 밀양에서 피난생활을 한 적도 있다.

 이렇듯 정중부의 무신란은 공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고, 그의 문명마저 수차례 과거에 실패하여 공이 새롭게 출세하는 일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서 시와 술로 실의와 고뇌에 찬 삶을 살면서 경기도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 장단(長湍) 가에 초당을 짓고 우거하다가 어려운 생활 끝에 마흔 살 남짓의 일생을 살다가 요절하고 마는데 김포 가련산(佳連山) 아래 남압사(南鴨寺) 동구(洞口)에 묻혔다. 지금은 예천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 되고 있다.

 공이 얼마나 곤궁한 삶을 살았던지 그 때의 공의 처지를 일컬어 이인로의『파한집(破閑集)』에서는“강남으로 피지(避地)한 지 거의 10여 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으나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어서[無托錐之地] 우연히 한 절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29권 시문문(詩文門) 임서하(林西河) 조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문집 6권을 남겼는데, 이인로(李仁老)는 서문을 짓기를, ‘의왕(毅王)의 말년에 온 집안이 화를 입을 때 홀몸으로 겨우 벗어나 강(江)의 남쪽으로 가서 피신했다가, 여러 해 뒤에 서울로 돌아와서 항상 삼분(三奔)의 치욕을 씻으려고 생각하더니, 마침내 일명(一名)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의 시문은 해동(海東)에서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세상을 주름잡은 자는 이 한 사람일 뿐이었다.’하였다. 뒤에 그의 유집(遺集)은 드디어 민멸되고 전하지 못했더니, 근자에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 중 인담(印淡)이 꿈에 한 도사(道士)를 만났는데, 그 도사가 손으로 가리키며,‘여기를 파면 기보(奇寶)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바로 동탑(銅塔)이 나오고 그 탑 속에 구리로 만든 항아리가 있고 항아리 속에는『서하집(西河集)』이 있었다. 그리고 탑에 글자가 새겨 있는데, 바로 중 담인(淡印)의 소장이었다 한다. 소장자는 담인이요, 발굴자는 인담이니 어찌 그리 신기한가! 나는 이 시문집을 얻어서 열람하니, 기격(氣格)이 그다지 고상하지 못하고 말의 구조도 그다지 치밀하지 못하니, 한때의 운사(韻士)에 지나지 않았을 뿐, 영원한 세대에 전하여 불후(不朽)할 것은 못 된다. 그러나 오히려 불감(佛龕; 불상을 모셔 두는 방이나 집)에 비장되어 거의 반천 년 만에 다시 나왔으니, 이는 우연한 것이 아닌 듯하다. 이것이 바로 이치의 궁구하지 못할 점이기도 하다.”

한문(漢文)과 당시(唐詩)에 능하였기에, 이인로가 그의 유고를 모아서《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6권을 엮었다.《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문(詩文)이 기록되어 있고, 그 외 <파한집>, <동문선>, <지봉유설>등에도 시화와 함께 약간에 수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두 편의 가전체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이 전하고 있는데 이 두 작품은 가전체(假傳體) 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임춘의 포도 초충도>

 임춘의 문학은 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울분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기진맥진한 모습의 묘사가 중심을 이룬다. 작품에 나타나는 비분과 현실비판이 현실지향의 투철한 자아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현전하는 가전체(假傳體) 문학의 효시가 되는 작품으로 이규보의 국선생전에 큰 영향을 끼친 공방전(孔方傳)과 국순전(麴醇傳)을 살펴보자.

 

 가전(假傳)이란 세상을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일깨워 줄 목적으로 사물을 의인화하여 실전(實傳)과 같은 기술 방법으로 써 나가는 국문학의 한 갈래이다. 앞서 생성된 패관문학이 개인의 창작물이 아님에 비하여 가전은 개인의 창작물이어서 소설에 한 발짝 접근된 형태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전체 작품으로는 이규보의 국선생전(술의 의인화).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거북이 의인화). 이곡의 죽부인전(竹夫人傳 대나무 의인화). 이첨의 저생전(楮生傳 종이 의인화). 석식영암의 정시자전(丁侍者傳 지팡이 의인화) 등이 있는데 임춘의 공방전과 국순전은 이들 작품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공방전(孔方傳)의 공방이라 함은 엽전에 뚫린 네모난 구멍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 글은 서사 양식으로서의 (傳)의 특성과 우회적인 요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돈을 의인화시켜서 인간적인 품격을 부여하는 방식은 일종의 우의적인 표현법에 해당된다. 돈의 속성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각성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傳)의 사실성과 우화(寓話)의 윤리성을 결합시킨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이다.

 

 임춘은 이 작품에서 돈이 생겨나게 된 유래와 돈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각종 이득과 폐해를 사람의 행동으로 바꾸어 보여 줌으로써, 사람들이 재물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없애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고 결론지음으로써, 돈의 폐해에 대해 비관적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공방전에서 돈이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자기와 같은 불우한 처지에서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세태를 비판하고, 벼슬을 해서 나라를 망치는 무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라고 하겠다.

 

 국순전(麴醇傳)은 술을 의인화한 것이데, 술은 누룩으로 빚으므로 술의 성은 국이고, 이름은 순이다.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생과 술의 관계를 문제 삼고 있다. 즉,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을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해 본 것이다. 당시의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벼슬아치들이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함부로 부림과 또한 권력의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이 작품은 모리배들의 득세, 뛰어난 인물들이 오히려 소외당하는 현실을 풍자,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의 두 작품을 통해서도 공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현실을 보는 그의 눈은 어떠했는지 극명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이 잘 나타나 있는 그의 시 한편과 그가 남긴 작품들을 옮겨 본다.

十載崎嶇面撲埃 10년 동안이나 기구하게도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살았는데

長遭造物小兒猜 오랫동안 조물주 어린 아이가 시기했기 때문이다.

問津路遠槎難到 나루를 물으나 길은 멀어 뗏목으로는 다다르기 어렵기만 하고

燒藥功遲鼎不開 선단 만드는 것은 더디기만 한데 솥은 열리지 않는다.

科第未消羅隱恨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나은의 한을 아직 풀지 못하였고

離騷空寄屈平哀 이소에 부질없이 굴원의 설움을 붙였다.

襄陽自是無知己 맹호연은 스스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는데

明主何曾棄不才 명주(임금)는 어찌하여 일찍이 재주 없다 버리셨는가?


 시인 자신의 능력은 뛰어난데 조물주가 미워해서 세상에 쓰이지 못했으며, 과거에도 실패하고 왕의 눈에 뜨이지도 않아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고 하면서 불우하게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울분과 한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그가 남긴 수많은 시편 중 제한된 지면을 따라 몇 편을 소개 하고자 한다.


贈演之(연지에게 주다)-임춘(林椿)

風生虛閣抵千金 허전한 누대에 이는 바람 천금의 값어치

滿院荒凉碧樹深 정원에 황량함 가득하나 푸른 나무 깊다.

不覺天西殘月落 하늘 서쪽 쇠잔한 달 지는 줄 모르고

終宵空伴草蟲吟 밤새도록 풀벌레와 함께 벗 삼아 읊다.

西河 임춘의 시를 보고 이규보(李奎報)

一枝丹桂雖無分 한 가지 계수나무 비록 나누지는 못했지만

百首淸詩合有聲 백수의 청아한 시는 명성 얻기 합당하다

英魄如今何處在 꽃다운 넋 이제 어느 곳에 있다하더라도.

兒童猶解說君名 아이들도 아직껏 그대 이름 이해하여 말하고

있다네.

라고 시를 지었다.


동일도중(冬日途中) 겨울날 길을 나서다

凌晨獨出洛州城 찬 새벽 홀로 낙주성을 나왔네

幾許長亭與短亭 작고 큰 정자를 몇 개나 지났던가

跨馬行衝微雪白 말에 앉아 눈으로 희미해진 마을 길 지나며

擧鞭吟數亂峯靑 채찍 들어 어지러이 푸른 봉우리 숫자 센다

天邊日落歸心促 해 지려하니 돌아갈 마음 바빠지는데

野外風寒醉面醒 들판 바람이 차 취한 얼굴이 깬다.

寂寞孤村投宿處 적막한 외딴 마을 머물 곳을 찾았지만

人家門戶早常扄 집집마다 일찍 문을 걸어 닫았네.

모춘문앵(暮春聞鶯) 저문 봄날 꾀고리 소리

田家葚熟麥將稠 농가에 오디는 익고 보리도 곧 익으려는데

綠樹初聞黃栗留 푸른 나무 사이에 꾀꼬리 소리 처음 들리네.

似識洛陽花下客 낙양의 꽃 아래 노니는 손님인가 여겼더니

慇懃百囀未能休 은근히 온갖 소리로 울어 그치지 않네.

도중폭우(道中暴雨) 길 가다 만난 소나기

天底野濶雨跳珠 하늘은 낮고 들은 넓은데 비가 구슬 티듯하는데

猛勢橫空望却無 맹렬한 기세 공중을 가로질러, 보아도 아무 것도 없도다

想得符堅初戰退 생각해보니 마치 부견이 처음 전쟁에 패하여 달아나니

千兵萬馬一時趨 온갖 병사와 말들이 일시에 다 달아나는 것과 같구나

서외원벽(書外院壁) 외원 벽에 쓰다

早抱文章動帝京 어려서 문장으로 서울에 알려진

乾坤一介老書生 천지의 한 사람 늙은 서생이었다네

如今始覺空門味 이제야 깨닭은 불교의 맛

滿院無人識姓名 절 가득해도 성명을 아는 이 아무도 없다


어부(漁父) 어부

浮家汎宅送平生 물에 뜬 집에서 평생을 보내니

明月扁舟過洞庭 밝은 달, 조각배로 동정호를 지난다

壇上不聞夫子語 단 위에서 공자님 말 듣지 못하고

澤邊來笑屈原醒 못 가에서 굴원 깨어 산다는 말에 웃었다

臨風小笛歸秋浦 바람에 작은 피리 불며 가을 포구로 돌아오니

帶雨寒簑向晩汀 비에 젖은 차가운 도롱이 입고 저녁 물가로 향한다

應笑世人多好事 웃으리라, 세상 사람들 일하기 좋아하여

幾回將我畵爲屛 몇 번이나 나를 그려 병풍으로 삼았는가


과장단(過長湍) 장단을 지나며

長湍風急浪如山 여울에 바람 몰아쳐 물결이 산 같아

欲借孤舟上瀨灘 작은 배 빌려 여울물을 오르려 하노라

十二時回朝復暮 열두 시간 돌아와 아침이 다시 저녁되니

人間何日少波瀾 인간세상 어느 날인들 파란이 없겠는가


도금열보(悼金閱甫) 김열보를 애도하며

蟬貂七葉盛西都 일곱 대 귀족 가문이 서도에 번영했는데

光祿宜爲烈丈夫 광록은 과연 열장부이었다

映世片心淸似水 세상을 비추는 한 조각 맘은 맑은 물 같았고

致君忠膽大於軀 임금 위하는 충성된 마음은 몸보다도 대단했 도다

驥馳猍路爭駑馬 준마가 좁은 길에 달리면 둔한 말이 다투기도하고

虎出空山舞孼狐 호랑이가 빈산을 떠나면 요사스런 여우가 춤을 추는구나

正是風流今頓盡 그대의 그 풍류 이제 그만 없어져버리니

幾令多士涕氷鬚 천하의 선비들 눈물이 귀밑머리를 몇 번이나 얼게 하였던가


여리미수회담지가(與李眉叟會湛之家)이미수와 담지의 집에 모여서

久因流落去長安 오래도록 유락하여 서울 떠나

空學南音戴楚冠 초나라 관을 쓰고 공연히 남방 음곡 배웠도다

歲月屢驚羊胛熟 세월은 양의 어깻살 익는 것처럼 빨라 자꾸 놀라

風騷重會鶴天寒 풍류와 시와 다시 모이니 찬 하늘의 학이로다

十年計活挑燈話 10년 동안 살아온 일을 등불 돋우고 이야기 하니

半世功名抱鏡看 반 세상 공명 거울 안고 들여다보는 것 같도다

自笑老來追後輩 늙어 후배들 따라다니는 것 스스로 우습고

文思宦意一時闌 글 생각 벼슬할 뜻이 동시에 둘 다 쇠했도다 


영몽(詠夢) 꿈을 읊다

疎慵多是泥春天 게으른 이 몸 자주 봄날에 취하여

頻到香閨玉枕前 꿈에서 자주 규방의 베개 머리를 찾는구나.

詩榻夜涼風斷續 서늘한 밤, 시 짓는 자리에 가끔 바람이 불어

倡樓日晏酒拘牽 저물녘 기생 있는 누각에 술이 취해 끌려나 온다.

一場會把浮生比 깨고 나면 인생이 한바탕 꿈인 줄 알겠으니

千里長將別恨傳 천리 밖 먼 장차 이별의 한을 전하는구나.

更爲等閑拋世慮 세상 일 던져두고 시름을 잊었으니

近來還繞故山川 요즘에는 돌아와 고향 산천을 돌아보노라.


팔월십오일야(八月十五日夜) 팔월 보름밤

共看中秋月 추석날 달을 함께 보며

高樓對酒壺 높은 누에 올라 술병을 마주했네

雲頭初湧出 구름 끝에서 솟아오르니

天面淨都盧 하늘과 고을이 모두 맑아라

子落恒娥桂 알은 항아의 계수나무에 떨어지고

光潛老蚌珠 빛은 오래된 진주 속에 잠겨있구나

誰知淸景好 누가 알리오, 맑은 경치가 좋음이

却勝武昌都 무창의 도읍보다 더 낫은 것을 말이오


칠석(七夕) 칠석날

銀河靑淺月華繞 은하수는 푸르고 잔잔하게 달빛을 두르고

也喜神仙會此宵 기쁘기도 하다, 신선들이 이 밤에 보였구나

多少人間烏與鵲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까마귀와 까치로

年年辛苦作仙橋 해마다 고생하며 오작교를 만드는가


다점주면(茶店晝眠) 찻집에서 낮잠을 자며

頹然臥榻便忘形 쓰러져 평상에 누우니 잠이 드네

午枕風來睡自醒 바람 불어 낮잠에서 저절로 잠이 깨었네

夢裏此身無處着 꿈속에도 이 한 몸, 머물 곳 없었으니

乾坤都是一長亭 이 세상도 곧 긴 여행의 한 역이라네


* 참고자료

http://blog.daum.net/brrrjo/2649574(무인도)

물그림자 블로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ZFJx

경북 인물열전 (29)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어 고생했던 임춘(林椿)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醴泉郡 人物 條] 이웅재

http://www.gimcheon.go.kr/culture/page.

http://blog.naver.com/lym6887/100194887744

http://blog.daum.net/tasofhso/14224872(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http://symbi.tistory.com/448(책읽어주는 心自閑)

http://blog.daum.net/leejh1938/15115571(나그네)

http://blog.naver.com/sohoja/50079122039

http://cafe.daum.net/iterarymeet/(문학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