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3권

상주학. 상주의 인물 3권 옳은 일에 소신을 굽히지 않은 선비 강형(姜詗)

빛마당 2015. 3. 27. 12:11

옳은 일에 소신을 굽히지 않은 선비 강형(姜)

조 희 열*


 연산군이 청계산(淸溪山)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환궁하여 곧 전교하기를,

“백관이 흩어지기 전에 차례로 서도록 하고, 강형(姜詗)을 능지 처참하라.”

하였다. 이어 승정원에 묻기를,

“형이 죽는 것은 오사(誤死)가 아니겠는가? 또 형은 스스로 어진 체하여 세상에 명예를 얻으려고 회릉(懷陵) 일을, 다른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는데 형이 홀로 말하였고 그 말한 바가 너무도 불공하였으니, 이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이다. 백관만 서립(序立)시킬 것이 아니라 유생(儒生)들도 또한 서립시켜 능지처참하여 효수(梟首)하고, 그 자식들은 모두 참형에 처하고, 처첩, 딸 및 며느리를 모두 바다 밖의 관비(官婢)에 소속시키라.”

하였다.

 

 1504(연산 10)년 10월 4일의 일이었다. 연산군은 강형에게 이렇게 능지처참 효수형을 선고하여 그 후손은 절손되었고, 그와 관련한 모든 기록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그의 올바른 삶의 모습을 짐작해 볼 뿐이다.

 강형의 정확한 출생연대는 알지 못하지만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형지(詗之)이며 상주가 고향이다. 안수(安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휘(徽)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자평(子平)이며, 어머니는 의성군(誼城君) 이채(李寀)의 딸이다.

 1483(성종 14)년의 일이었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경연에 입시하여 교리 권경우와 함께,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지만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집에 거처하고 있는데다가 봉양(奉       養)까지도 또한 군색하니 따로 한 집에 거처하게 하시고 관(官)에서 일용 물자를 공급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주청하자 왕은 원자에게 아첨하여 훗날을 대비하려 한다면서 채수를 금부에 가두고 국문했다. 그러나 채수는 굴복하지 않고 계속 똑 같이 대답을 하자 비로소 죄는 주지 않고 놓아주었지만 3년 후에 가서야 다시 임용했다.

폐위된 윤씨는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지만 궁중에서는 오히려 훼방(毁謗)과 중상(中傷)만 날로 더했다.

 이에 대해「파수편」은


   ‘윤씨가 폐위된 후에 임금은 항상 언문으로 그 죄를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어 날마다 장막을 사이에 두고      읽어 드려 그가 허물을 고치고 중궁에 복위되기를 바랐지만 윤씨가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사약(死        藥)을 내려 죽게 하였다.’


 라고 전한다.

임금이 윤씨의 행동을 확인하기 위해 내시를 보내 염탐하게 했는데 인수대비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을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했다.

「야언별집(野言別集)」에 의하면 숙의(淑儀) 윤씨(尹氏)는 증 좌의정 기묘(起畝)의 딸인데 1476년 연산군을 낳고, 그 해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477(성종 8)년 어떤 사람이 감찰 상궁의 집안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권 숙의(權淑儀)의 집에 엄 소용(嚴昭容)과 정 소용(鄭昭容)이 장차 왕비〔中宮〕와 원자(元子)를 해치려고 한다.…고 모함했다. 이로 인해 왕이 직접 조사하여 왕비의 방에서 작은 주머니에 든 비상(砒霜)과 작은 상자 속에 간수한 방술〔方穰〕하는 서책을 찾아내었다. 이를 증거로 하여 왕은 왕비를 죄 주어 빈(嬪)으로 강등하고 자수궁(慈壽宮)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후에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政院)을 시켜 금지시켰다.

이 일에 대해「기묘록(己卯錄)」은 전하기를 처음에 윤비(尹妃)가 원자(元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원(媛)들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했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이 났기에 인수대비(仁粹大妃, 昭惠王后)가 크게 노하여 임금을 격동시켜 외정(外廷)에 보이니 대신 윤필상 등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치게 했다고 한다. 1480(성종 11)년 10월 윤비가 폐출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강형(姜詗)이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1483년(성종 14) 7월 14일, 이조와 병조 등 각 관사에 국상 중에 수고한 신하들을 논상(論賞)하게 하였는데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 강형(姜詗)은 벼슬을 올리도록 하라.」

고 전지(傳旨)하였고, 1489년(성종 20) 4월 9일

“강형(姜詗)을 평양 판관(平壤判官)으로 제수할 때에 그의 장인[妻父]의 대가(代加)를 받은 것은 마땅하겠지만, 지금 경직(京職)으로 바꾸어 임명하면서 거푸 대가를 제수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라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권자후(權子厚)가 건의하는 것으로 보아 장인에게 내릴 상급이 사위에게 내려 평양판관이 되고, 역시 같은 까닭으로 서울에 근무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장인의 뒤를 이을 처남이 없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인 1489(성종 20)년 여름 5월 16일, 성종은 폐비 윤씨에 대한 참소를 그대로 믿고 윤씨에게 죄를 더 주어 사약을 내려 죽게 하면서,


   「…이제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 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 마다 제사를 지내     게 하여 그의 아들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동하게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더 높이 변경     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라, 했다고「소문쇄록(謏聞瑣錄)」은 전한다.

윤씨가 억울함에 눈물을 닦아 피 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인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 또 나를 왕이 거동하는 길옆에 묻어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여,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지냈다.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폐비의 어머니 신씨가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이제 왕위에 오른 연산군에게 왕을 낳아 준 어머니 윤씨가 비명(非命)으로 원통하게 죽었음을 남몰래 호소하면서 피 묻은 그 수건을 보여주었다.

이를 받아 든 연산군은 밤낮으로 안고 울었고, 장성하면서 마음의 병이 되어 끝내는 폐위에 이르렀다고 하고,「아성잡기(鵝城雜記)」역시 동궁(東宮) 시절 어미 소와 송아지가 함께 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 할 만큼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까지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이었었지만, 윤씨가 폐비된 원인을 알고 난 뒤부터 본성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줄로만 알고 있던 연산군이 폐비 윤씨가 원통한 죽음을 했고, 그가 자신의 생모라는 말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면서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확인한 뒤 크게 노했다. 곧 당시 폐비 의논에 참여했던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棺)을 쪼개어 시신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1490년(성종 21)에 강형(姜詗)은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2월 5일 조산 대부(朝散大夫)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제수 받았다.

사간원의 정언이 된 강형이 1491년(성종22) 1월 9일 본원(本院)의 의논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이극증(李克增)이 그의 종[奴子]이 헌부(憲府)의 아전과 더불어 서로 힐난한 일을 가지고 직접 와서 아뢰어     이를 국문하게 하였으니, 신(臣) 등은 이로부터 세가(勢家)의 종들이 비록 실제로 법을 범했더라도, 법사(法     司)의 아전들이 반드시 외축(畏縮)되어 금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또 이극증은 사사로운 일을 가     지고 성청(聖聽)22934) 까지 번거롭게 하여 대신(大臣)의 체모를 잃었으니, 청컨대 추국(推鞫)케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헌부(憲府)의 서리(書吏)가 함부로 한 일은 그대가 아는 바 아니거늘, 와서 아뢰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극     증은 대상(大相)인데, 이렇게 작은 일을 가지고 죄를 청하였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이냐?”

    하였다. 강형이 아뢰기를,

    “국가(國家)와 관계되는 일은 대신(大臣)이 진계(進啓)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노자가 서리와 더불어 서     로 힐난한 작은 일을 친계(親啓)하는 것은 대신의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국문케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는 어디서 듣고 와서 계달하는 것이냐? 전석손(田石孫)이 이르기를, 네가 비록 정승의 종이라 할지라     도 내가 어찌 두려워하겠느냐?고 하였다. 소리(小吏)가 대신을 능멸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나는 이도       또한 국가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일찍이 들으니, 서울에 사는 소민(小民)들이 흔히 금란(禁         亂)하는 아전들 때문에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일도 이극증이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어    찌 알겠느냐? 이와 같이 불법(不法)한 아전은 탄로되는 대로 죄준 연후에야 경계할 줄을 알 것이다.”


 하였다. 강형이 다시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1491년(성종 22) 1월 16일

사헌부 지평 김윤신(金潤身)과 함께 사간원 정언 강형(姜詗)이 아뢰기를,


 “윤은로(尹殷老)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어 글을 주군(州郡)에 보내어 요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여기에 걸려들어 파직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다시 쓰시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이승조(李承祚)는 수령(守令)으로 제수하지 말라고 일찍이 교지(敎旨)까지 있었는데, 지금 오위장(五衛將)이 되어 사졸(士卒)을 거느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송흠(宋欽)과 김흥수(金興守)는 본래 의술(醫術)로 벼슬이 당상(堂上)에 올라 이미 그 분수를 넘었는데 이번에 중추(中樞)에 임명하였으니, 대체(大體)에 방해됨이 있습니다. 만약 공(功)이 있으면 상(賞)을 주시는 것은 옳겠지마는, 어찌 문무(文武)의 선비와 더불어 혼용(混用)하겠습니까? 이맹손(李孟孫)도 또한 전의감 정(典醫監正)이 되었는데, 또 다시 실직(實職)을 제수하라고 명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은로는 파직된 지가 이미 해를 넘겼으니, 다시 쓴다고 하여 무엇이 해롭겠느냐? 무릇 대소(大小)의 신하가 비록 죄고(罪辜)가 있다 하더라도, 오래 되면 다 마땅히 다시 써야 하거늘, 어찌 윤은로만은 안 된다는 것인가? 더욱이 중궁(中宮)의 가까운 친척으로 오래도록 폐기(廢棄)해 두는 것이 옳겠느냐? 이승조가 전일에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바뀐 것은 오서(吳澨)를 도로 임명했기 때문이며, 추국(推鞫)한 때문이 아니다. 비록 추안(推案)이 있으나 그 죄가 의심스럽다면 어찌 위장(衛將)의 직책에 방해되겠느냐? 지난번에 대비(大妃)께서 편찮으셨을 때 송흠 등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약(藥)을 드려서, 마침내 평유(平愈)할 수가 있었다. 비록 그 직분(職分)에 마땅히 할 바이긴 하더라도 나의 기쁜 마음을 어찌 헤아리랴? 또 의사(醫士)로서 중추 직에 임명된 것은 이미 전일의 규례(規例)가 있으니, 지금 그 직임에 임명한다고 해서 무슨 불가함이 있겠느냐? ……”


 라며 들어주지 않았다.


 1493년(성종 24) 9월 4일 조봉대부(朝奉大夫) 행 사헌부 지평(行司憲府持平)을 제수 받았고, 1495년 12월 11일 장령에 제수되었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왕이 대조전에서 춘추 38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12월 27일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표연말(表沿沫)⋅전한(典翰) 양희지(楊熙止)⋅응교(應敎) 권주(權柱)⋅부응교(副應敎) 홍한(洪澣)⋅부수찬(副修撰) 김감(金勘)이 서계(書啓)하기를,


“ …… 새로 즉위하시는 처음이며 신민이 우러러 바라는 날에 불재(佛齋)를 행한다는 것은 성덕(聖德)에 크게 누(累)가 되므로 감히 하던 일을 거두고 와서 아룁니다. 불교가 허황하고 망령됨은 지금 의논할 겨를이 없거니와,《예기(禮記)》에 효자는 그 어버이가 죽었다고 차마 어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대행왕께서 불교를 매우 배척하시어 털끝만큼도 믿는 뜻이 없으셨음은 사왕(嗣王)께서도 분명히 아실 뿐아니라, 일국의 신민이 모르는 이가 없사오며, 지금 대행왕께서 승하하여 재궁(梓宮)에 들어가시지도 않아서 목소리와 얼굴이 완연히 계신 것 같사온데, 이 애통한 때를 당하여 대행왕께서 하지 않으시던 일을 가지고 대행왕을 위하여 추천하겠다 하시니, 어찌 효자가 차마 그 어버이가 죽었다고 여기지 못하는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반드시 중들이 장막을 쳐놓고 영가(靈歌)를 외쳐 부르면, 하늘에 계신 대행왕의 신령이 반드시 크게 진노하실 터이니, 어찌 내려오셔서 그것을 받으시겠으며, 내가 후사(後嗣)가 있어 어버이의 뜻을 잘 이어 받는다. 하시겠습니까. ……”


 하니, 전교하기를,


 “선왕을 위한 일인데, 어찌 감히 말하는가?”


 하매, 표연말 등이 다시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불교를 믿지 않아 절을 혁파(革罷)하기까지 하셨으므로 헌릉(獻陵 34) 에는 홀로 재궁(齋宮)이 없거니와, 대행왕이 평일에 또한 불교를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이제 좋아하지 않으시던 일로써 명복(冥福)을 비는 것을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즉위한 처음에 사방에서 우러러 보는데, 먼저 사도(邪道)를 보여 주는 것이 어찌 정시(正始)의 도리이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태종께서 승하하신 뒤에는 재를 올리지 않았는지, 다른 능에는 다 재궁이 있는지 정승에게 물어보라.”


 하매, 정승이 아뢰기를,


“태종께서 과연 절을 폐지하셨으며, 재를 올렸는지 않았는지는 해가 오래되어 알 수 없으며, 다른 능에는 다 재궁이 있습니다.”


 하였다.

 1496(연산군 2)년 봄에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했는데 재상들에게 윤씨의 사당(祠堂)을 세우도록 수의하게 하고는 잔학한 위엄으로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다만 예조 참판 신종호가 혼자,


 “장사를 지내면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禮)를 상고해 보면 미안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상고하여 본 즉 …(중략)…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서 예를 어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사당과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묘(墓)에만 제사 지내어도 족히 효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라, 했다. 이 의논이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여러 의논이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했었고, 연산군도 어찌하지를 못했었다.

이때 교리 권달수(權達手)도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라고, 하여 귀양을 갔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위해 효사묘(孝思廟)를 세우자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간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라며, 10여일이나 버티자 왕이,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혼자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고, 묻자 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묘를 희릉이라 봉했다.

1496년(연산 2) 6월 18일 장령 강형(姜詗)이 차자를 올리기를,


 “건곤(乾坤)은 만물의 시작이 되고 군부(君父)는 인류의 주인이 되는 것인데, 고금 천지에 인기(人紀)를 유지하고 황극(皇極)의 표준이 되어, 높기가 태산과 같고 밝기가 일월과 같아서 천백 대를 지나는 동안에 쇠하고 어지러운 때가 얼마 없어, 마침내 이적(夷狄) 금수(禽獸)가 되기에 이르지 않은 것은 군부(君父)가 있는 때문이니, 군부가 없다면 인류가 멸망하였을 것이요, 천하 국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군부의 중함이 이와 같은데, 지금 성종이 전하에게 의(義)로는 군신(君臣)이요, 친(親)으로는 부자가 되어, 이 두 가지 중한 것을 겸하여 이치가 우주(宇宙)를 꿰었으니, 크고 작은 일에 모두 그 명령을 좇으시는 것이 전하에 있어서 바꾸지 못할 도리인데, 지금 전하께서 성종의 유교를 위배하신다면, 이는 신하로서 임금을 어기는 것이며,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어기는 것이니, 어떻게 임금을 배반하는 신하와 아비를 배반하는 자식을 책하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노사신이 선왕의 일시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그 허물이 작은 것이라고 말하니, 이는 사신이 군부를 흙덩이나 거적이나 추구(芻狗)로 아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미룬다면 어떤 악역 부도(惡逆不道)한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사신이 또 말하기를, 정에 미안하면 예라 할 수 없다.고 하니, 어머니를 서인(庶人)으로 대우함이 정에 과연 미안하다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정에 미안함이 없겠습니까. 유교와 정례(定禮)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니, 아버지 명령을 어기는 것이 정에 과연 미안하다면, 신주를 만들고 사당을 세우는 것이 과연 예에 합당한 것이겠습니까? 옛적부터 소인은 우직함으로써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자는 없는데, 사신의 의논을 보옵건대, 근사하여 분별하기 어려운 말로 꾸며대서 정리(情理)를 논하고 옛 제도에 붙여 만들어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에 교묘한 것이 옛날에 없던 바입니다. 전하로 하여금 저를 주공(周公)에 견주게 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저의 간사함을 부리려는 지극히 교묘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의논이 변사(變詐)되고 뜻이 착오되어, 지엽(枝葉)을 주워 모으고 대의(大義)에 어긋나서 간사한 정상이 환히 보여 임금의 비위를 미리 맞추는 죄가 깊고, 남의 소견을 덮어 가리워서 조정을 우롱하고 군부(君父)에게 배역(背逆)하고 풍교(風敎)를 상(傷)하게 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마땅히 중법(重法)으로 처치하여 간사하고 아첨하는 문을 막고, 또 유교를 준수하여 돌아간 어버이를 섬기는 효도를 다하시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듣지 않고, 인하여 묻기를,


 “네가 어찌 본부(本府)에 의논하지 않고 혼자 아뢰느냐?”


 하매, 형(詗)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제 말[馬]에서 떨어져 집에 있었더니, 본부에서 사람을 시켜 신에게 통지하되, 전에 아뢴 일을 내일 아뢰지 않으려 한다.하기에, 신이 답하되 이것은 국가의 큰일이니 아뢰지 않을 수 없다.하였더니, 본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우리들은 아뢰지 않을 터이니 네 혼자 아뢰겠는가.하므로, 신이 본부에서 만약 아뢰지 않겠다면, 나 홀로라도 아뢰겠다.하였으며, 또 오늘 아침 예궐(詣闕)할 때에 사람을 시켜 본부에 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신이 지금 병이 있으나, 아뢰는 일이 관계가 매우 크므로 억지로 참고 와서 감히 계청(啓請)합니다.”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다음 날 장령 강형은 서계(書啓)하여 폐비 윤씨의 신주 세우기를 건의한 사람들의 국문을 청하는데

“전교에 그대가 출모(出母)라고 말하나, 역시 천친(天親)이니, 감히 마음에 잊을 수 없다.하셨으니, 전하의 이 마음이 곧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할 발단입니다. 이 마음을 확충(擴充)하시면, 족히 대효(大孝)가 될 수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유교를 좇으소서. 노사신 등이 신주를 세우자거니 사당을 세우자거니 한 의논은 모두 정이란 한 글자를 가지고 그 말을 끌어다 붙인 것이니, 이는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여 말한 것입니다. 빨리 국문하소서.”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이 날 대사헌 이계남⋅집의 최한원⋅장령 서산보⋅지평 이윤 등이

“본부는 일반 관청의 예(例)가 아니므로 조금이라도 의논이 어긋남이 있으면 서로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며, 또 형(詗)의 한 일이 진실로 옳고 신들의 한 일이 그르니, 감히 취직(就職)할 수 없습니다.”

라고, 아뢰자 전교하기를,

“강형을 다른 관청으로 환차(換差)하라.”

하였다. 그러자 다음 날인 1496년(연산 2) 6월 20일 왕이 이계남 등을 불러 취직하게 하자 이계남은 아뢰기를

“강형은 일을 논하다가 환차(換差)되었는데, 신들이 말하지 않아서 재직하는 것이 다만 마음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홍문관과 사간원이 모두 강형을 환차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니, 지금 비록 명령이 계시나, 감히 취직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6월 21일 이계남은 왕에게 맞서 사직을 청했고, 왕이 재차 빨리 취직하라 일렀지만 사간원이 아뢰기를,

“강형이 일을 말하다가 체직을 당함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헌부와 간원에 전교하기를,

“신주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논란할 일이 아니요, 내가 또 듣지 않았으니, 물러가는 것이 마땅하다. 형(詗)은 병으로 집에 있다가 감히 홀로 와서 아뢰므로, 체직시킨 것인데, 경들이 이와 같이 굳이 아뢰는 것은 반드시 어떤 속셈이 있는 것이다. 내가 국문하고자 하니 대간이기 때문에 그만 둔다.”

고, 했다.

6월 22일 대사간 조숙기(曺淑沂) 등이, 강형이 체직됨은 불가하다는 것을 아뢰었으나, 들어 주지 않다가 6월 24일 장령(掌令) 강형(姜詗)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강형은 6월 25일,

“대간은 범상한 관원이 아니어서, 만약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하루라도 자리에 있을 수 없으므로 지금 다시 취직하기 어려우니, 사피하기를 청합니다.”

하자, 환차(換差)시켰다.

왕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지평 김효간(金效侃)이 1496년 6월 29일 왕에게 아뢰기를

“처음에 본부가 합사(合司)하여 폐비의 신주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논계하다가 중지하였는데, 장령 강형이 논계하여 마지아니하매, 대사헌 등이 인혐(引嫌)하여 사피하기를 청하므로 명하여 강형을 체직시켰다가 홍문관과 사간원이 모두 형(詗)을 체직시켜서는 안 된다 하므로, 얼마 안 되어 형을 복직시켰으니, 이는 형(詗)을 옳다고 한 것인데, 지금 다시 체직시킴이 옳겠습니까. 형을 복직시키소서. 또 신주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것은 모자의 정은 비록 간절하나 예는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이니, 지금 단연코 모자의 사사로운 정으로써 선왕의 유교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노사신의 의논은 다만 신주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것을 옳다고 할 뿐 아니라 추숭하는 전례도 차례로 거행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과거에 성종께서 제의(祭儀)를 작성하실 때에 사신이 이미 지당하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전하의 뜻에 맞추어 문득 그 의논을 변경하였고, 윤효손 또한 대신으로서 추숭하는 일을 들어서 전하의 뜻에 아첨하였으니, 아울러 국문하소서. 사간원이 애초에 본부와 더불어 합사(合辭)하여 신주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논계하다가, 중지하고 먼저 물러간 것은 이미 옳지 못하고, 또 헌의(獻議)의 그른 것이 사신과 효손이 일반이되 사신이 더욱 심한데, 간원이 사신을 놓아두고 효손만 논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신은 국권을 맡은 대신이요, 그의 아들 공필(公弼) 또한 지위가 높은 재상이므로 두려워하여 그런 것이니, 그 실정을 국문하소서. 한치례는 대비(大妃)의 세력을 믿고서 감히 자기의 일을 가지고 의심 없이 직계(直啓)하고, 또 정성근(鄭誠謹)이 둔전(屯田)을 받은 일을 적발하여 보복할 꾀를 하니, 사대부(士大夫)의 풍기가 어찌 이와 같이 심할 수 있겠습니까. 본부가 그를 국문하기를 청하매, 이미 허락하셨다가 곧 그만두게 하시니, 매우 불가합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신주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는, 이미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여 정하였으며, 그대들의 논계를 윤허하지 않을 때에 이미 다 타일렀다. 지금 어찌 알지 못하여 이와 같이 굳이 논하는가. 반드시 그 속셈이 있는 것이다. 또 임금이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권력이 있으되, 간관(諫官)이 위엄을 피하지 않고, 항론하여 마지않는데, 지금 간원이 어찌 사신의 부자를 두려워하여 논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말한 자 또한 반드시 속셈이 있는 것이니, 곧 모조리 의금부에 내려 오늘 안에 형신(刑訊)을 마치고서 아뢰고, 또 곧 개차하라.”

하였다.

1496년(연산 2) 7월 1일, 대사헌 이육(李陸) 등이 다시 아뢰기를,

“강형(姜詗)을 이미 죄 없다 하여 복직을 명하셨는데, 어찌 또 체직을 명하십니까? 노사신(盧思愼)·윤효손(尹孝孫)의 의논을 보면 사신이 더욱 심한데, 간원이 효손만 논박하였으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청(六淸)이 중으로서 사족(士族)의 부녀를 간통하였으므로 그 죄악이 비할 데 없으니 심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주와 사당을 세우는 데 관한 것과 한치례·김순손 등의 일에 대하여도 또한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적에 양공(襄公)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내친 바가 되었으므로 양공이 즉위하매 그 어머니가 생각하나 의(義)에 돌아갈 수 없어서 하광(河廣)의 시(詩)를 지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어머니가 쫓겨났으매 진실로 종묘와는 끊어졌지만 자식과 어머니는 처음부터 끊는 도리가 없으니, 양공의 처지로서 어떻게 하여야 할까? 종묘 가운데서는 은혜로써 의(義)를 가리지 못하는 것이요, 규문(閨門) 안에서는 의(義)를 은혜에 앞세우지 못하는 것이어서, 양공이 능히 종묘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니, 밖으로는 이미 승중(承重) 1027) 하는 의(義)를 잃지 않고, 자모(慈母)에게 효성을 다한다면 안으로 또한 어버이를 사랑하는 인(仁)을 잃지 않을 것이니, 은의(恩義) 두 가지가 온전하여 결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돌아오게 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수레는 비록 사정으로써 돌아오게 할 수 없으나 아들의 사자(使者)는 사정으로써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세시(歲時)에 문안하는 사자가 길에 잇달아서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먼저 모친에게 드린다면 자식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어머니의 마음도 조금 위로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신들이 이 말을 보오니, 송 양공(宋襄公)의 어머니가 다만 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사사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의(義)가 중하고 예(禮)가 방(防)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신주를 세우고 사당을 세우는 것은 결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노사신이 성종조(成宗朝)에 있어서는, 상교(上敎)가 지당하시니 모름지기 일찍이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서 후세로 하여금 영원히 준수하여 어기지 말게 하라고 아뢰어 놓고, 오늘날에 와서는 그 말을 이와 같이 변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반복한 정상(情狀)은 전하께서 이미 아시므로 전하께서 불러서 그 말을 바꾼 연유를 물으시면 그 정상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형(詗)이 굳이 사면하므로 체직시켰고, … 나머지는 들어 주지 않는다.”

하였다.

1504년(연산 10) 3월 16일 연산군은 간관들인 승지 강징(姜澂)⋅직제학(直提學) 박소영(朴紹榮)⋅부응교(副應敎) 이행(李荇)⋅교리(校理) 이자화(李自華)⋅부교리 심정(沈貞)과 권달수(權達手)⋅수찬(修撰) 박광영(朴光榮)⋅부수찬 김양진(金楊震)과 이사균(李思鈞)⋅박사 유부(柳傅)⋅저작(著作) 김내문(金乃文)⋅정자(正字) 강홍(姜弘)⋅승지 이의손(李懿孫)⋅형조 좌랑 김언평(金彦平)⋅전 정자 김양보(金良輔)⋅전 대사간 강형(姜泂)⋅호조 참의 이과(李顆)⋅부제학 손주(孫澍)⋅전 사간 성세정(成世貞)⋅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유희저(柳希渚)⋅병조정랑 이후(李堣)⋅예조좌랑 윤원(尹源)⋅전 정언 조유형(趙有亨)⋅정언 유인귀(柳仁貴)를 의금부 옥에 가두게 하였다.

3월 18일 연산군은 승정원에 전교하여

“……대간(臺諫)은 역시 형장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강형(姜詗)·조유형(趙有亨)·성세정(成世貞)은 직에 있은 지 오래지 않지만 전 대간의 예대로 논죄(論罪)하라.……”

하고, 전 대간들을 귀양 보냈는데 이세영을 전의(全義), 유세침을 남포(藍浦), 정사걸을 김제(金堤), 서후를 음성(陰城), 유희저를 의성(義城), 윤원(尹源)을 금산(錦山), 강형(姜詗)을 비인(庇仁), 조유형을 결성(結城)에 부처(付處)하였다.

6월 19일 추관 유순 등이 죄인의 공사(供辭)를 가지고 조율(照律)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공사를 보니 모두들 죽은 사람에게 미루거니와, 재상(宰相)으로도 범한 자가 있거늘, 내 어찌 재상이 앞장서서 주장하였다고 여기랴. 자질구레한 무리가 어지러이 발언하거늘 그 반박(反駁)을 두려워하여 막지 못하였으니, 또한 그르다. 앞장서서 주장한 사람은 고르게 죄주어야 하니, 이인형(李仁亨)·윤석(尹晳)은 비록 직첩(職牒)만을 거두었으나, 최세걸(崔世傑)·서산보(徐山甫)와 더불어 다 부관 참시(剖棺斬屍)하고, 안윤덕(安潤德)은 비록 범하였을지라도 허물이 적은 사람이니 다만 장(杖) 1백을 속(贖)하여 유임하게 하고, 이자건(李自健)도 허물이 적으며 또 여러 번 죄를 받았으니 다만 장 1백을 속하게 하여 놓아주고, 최해(崔瀣)는 이문(吏文)4511) 을 아니 장 60으로 결단 유임시키고, 최한원(崔漢源)⋅이집(李諿)은 다만 장 1백을 속하고, 이세인(李世仁)⋅윤석보(尹碩輔)는 장 80으로 결단하여 외방으로 배소를 분정하고, 김숙정(金淑貞)⋅이자견(李自堅)·이의손(李懿孫)은 장 1백으로 결단하여 외방으로 배소를 분정하고, 강형(姜泂)⋅유세진(柳世珍)은 장 80으로 결단하여 배소로 도로 보내라.”

고, 했다.

1504년(연산 10) 9월 28일,

“……강형(姜詗)은 죄인 강겸(姜謙)의 형인데, 전일 대간으로 있을 때, 불공한 말이 많았으니, 낭관을 보내어 사형수로 잡아오도록 하고, 회묘(懷墓)를 이장할 때에 상소한 사람 및 그때 대사간·대사헌을 고찰하여 아뢰라.”

하였다.

10월 1일에는 전교하기를,

“김일손(金馹孫)이 소릉(昭陵) 4684) 복위(復位)를 청할 때, 그 도당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니 모두 찾도록 하고, 이주(李胄)가 유독 성종(成宗)우리 임금이다. 칭하였으니, 이런 사람도 모두 수금(囚禁)하도록 하며, 강형(姜詗)이 말한 자식으로서 그 아버지를 거역한다물려준 활이나 신발도 오히려 영원히 아끼는 마음을 갖는다는 등의 말은, 지극히 불초(不肖)하니, 잡아다가 낙형(烙刑)을 하여 그 실정을 추국하도록 하라.”

고 하여, 10월 3일 의금부 도사 조인손(趙仁孫)이 강형(姜詗)을 잡아 오자 전교하기를,

“즉시 삼공(三公) 및 의금부 당상·도승지·좌부승지·동부승지를 불러, 당직청으로 가서 낙형(烙刑)을 써 끼쳐 준 활이나 신이라고 한 말을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1504년 10월 4일,

“대간의 말은 비록 마땅히 격절(激切)해야 하지만, 군자는 초야에 있고 소인이 나라를 그르치는 때라면 말이 격절해야 하나, 승평(昇平)한 때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이 격절하게 말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근래 죄인들이 으레 모두 이미 죽은 사람에게 미루고 있으나, 이계남이 공술한 말에 강형이 홀로 이 일을 논하였다. 한 것을 보면, 강형이 이 말을 한 것이 분명하다.

성종께서 포용하는 아량으로 대간의 말을 우대하여 받아들이고, 경연의 신하들을 중하게 대우하셨으며, 논죄할 때에도 또한 모두 속바치게 하고, 때로는 식물(食物)을 하사하셨기 때문에 교만과 방종이 이러한 게 된 것이다. 갑인년4689) 이후에도 그 여풍(餘風)이 남아있어, 만약 누구를 추국하려 하면 대간이 말하고 정부가 말하며, 만약 대간을 추국하려 하면 승정원에서 말하고 정승들이 말을 하되, 모두가 언로(言路)에 해롭다. 하고, 대간도 또한 말의 근거는 물을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이렇게 되면 인주(人主)는 위에 고립되고, 밑에 있는 자는 사사로이 서로 구호하게 되는 것이다

전일에 누군가가 형을 쓰면 상하게 된다. 하였는데, 법에 누구는 상하고 누구는 상하지 말라.는 글이 있다는 것인가. 만약 처벌을 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어찌 정승과 판서를 헤아리며, 또 어찌 그 상함이 있을 것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일체 엄중히 다스려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원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끼쳐준 활과 신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은, 어찌 당연히 해야 할 말이겠는가. 비록 성인(聖人)일지라도 반드시 부모에게 태어나는 것인데, 강형은 하늘에서 태어나거나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늘 이와 같이 말을 하니 그를 살려둔들 어디에 쓰겠는가. 마땅히 중한 벌을 써야 할 것이니, 낙형(烙刑)을 써 심문한 뒤에 의금부에 도로 가두었다가 행차가 환궁(還宮)한 뒤에 백관을 늘어세우고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그 자식은 참형에 처하며 연좌(緣坐)된 사람은 난신(亂臣)의 예에 의하여 논죄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 청계산(淸溪山)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돌아와

“백관이 흩어지기 전에 차례로 서도록 하고 강형(姜詗)을 능지처참하라. ……백관만 서립(序立)시킬 것이 아니라 유생(儒生)들도 또한 서립시켜 능지처참하여 효수(梟首)하고, 그 자식들은 모두 참형에 처하고, 처첩, 딸 및 며느리를 모두 바다 밖의 관비(官婢)에 소속시키라.”

하였다.

다음 날인 10월 5일,

“강형(姜詗) 부자를 처형한 사실을 예조 판서 김감(金勘), 형조 참판 박열(朴說), 승지 강혼(姜渾)으로 하여금 전지(傳旨)를 지어 의정부로 내려 사서인(士庶人)에게 효유하도록 하라.…… 형의 가산을 몰수하라. 또 자녀를 적몰하는 것이 법에 있는가?”

하니, 승지 윤순(尹珣)이 아뢰기를,

“출가하지 아니한 자녀는 적몰하여도, 출가한 자녀는 부재차한(不在此限)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은 계속하여 10월 22일에는

“강형(姜詗)의 아들은 잡아온 지 이미 오래니, 머리를 베어 효시(梟示)하도록 하라.”

고 하고, 11월 24일에는,

“죄인들의 처첩은 반드시 곤하고 괴롭게 해야 하니, 전라·경상 두 도에 유시하여, 강형(姜詗)의 처첩과 딸 및 그 아들의 처 등을 고역(苦役)에 차정하고 때로 살펴 단속하라.”

하였다.

11월 30일 영의정 유순, 좌의정 허침, 우의정 박숭질, 의금부 당상 김감⋅정미수⋅김수동⋅이계남이, 이세좌(李世佐)⋅윤필상(尹弼商)⋅이파(李坡)⋅이극균(李克均) 등 중죄에 처한 사람에 대하여 아뢰기를,

“전일 죄인들의 원근 족친을 모아 익명서 일을 고문하도록 명하셨는데 이세좌⋅윤필상⋅이파 등 3인의 원근 족친으로 이미 정배(定配)된 자가, 동성은 팔촌, 이성은 사촌 등이, 모두 2백 3인입니다. 이 3인의 원근 족친이 이와 같이 많으니, 이극균 이하 30여 인의 족친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으며, 옥사(獄舍)도 또한 수용할 수 없겠으니, 그 친자식들만 신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고, 또 죄인들의 자식으로 나이를 기다리느라 죽이지 아니한 자를 기록하여 아뢰기를,

“이세좌의 첩의 아들 이지명(李知命)은 나이 7세, 윤필상의 첩의 아들 윤활(尹佸)은 나이 8세, 강형의 아들 강세숙(姜世叔)은 나이 4세인데, 전일에 전교하기를 젖먹이 유아를 제외하고 모두 처결하라. 하셨으니, 어떻게 처결하리까? … ”

하니, 전교하기를,

“젖먹이로서 나이를 기다리게 한 자는 추문(推問)하지 말라. …”

하였다.

이에 대해 허목은 1504(갑자)년 봄에 이르러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이면서 응교 권달수는 사형에 처하고,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고 전한다.

강형의 아내 김씨는 한 달 동안을 먹지 않고 슬피 울다가 죽으니 중종 2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였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공은 너그럽고, 공평하고, 후하고, 정직했으며, 또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고,「사우명행록」을 인용하여 전하고 있다. 올바른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상주의 대표적 선비 중 한 분이었다.

이 당시 상주의 함창 사람 권달수도 강형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연산군 일기》는 1504년(연산 10) 12월 2일 기사에서

「권달수(權達手)의 조율안(照律案)을 내리며 이르기를,

“추숭(追崇)하는 절차가 예에 이미 극진하게 되었으니 다시 더할 것이 없다.’고 한 이와 같은 의계(議啓)는 진실로 잘못이다. 대체로 사람이 비록 적선(謫仙)의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마음이 진실로 불초하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조율을 고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조율을 고쳐 권달수(權達手)·김세필(金世弼)은 죄를 참형에 해당시키고, 최숙생(崔淑生)·이행(李荇)은 장 1백에 처하여 먼 외방에 종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각각 장 1백 유 삼천리(流三千里)의 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전교하기를,

“즉시 형을 집행하되 백관을 참관시키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달수와 세필은 비록 죄가 같다 할지라도 달수가 수범이니, 세필은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외딴 섬에 종으로 삼도록 하고, 또 세필 등 13인의 홍패(紅牌)를 추탈하라.

하였다.

달수는 함창(咸昌) 사람으로 글을 잘 지었는데 꾸미기를 일삼지 아니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선한 일을 즐겨 하며, 기절(氣節)이 탄탕(坦蕩)하여 큰 뜻이 있었다. 장차 죽음에 당하여 같이 수감된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술을 가져다가 나의 길을 전송해 주어야 하네. 하였는데, 말이나 모양이 평시와 같았었다. 그 아내 정씨(鄭氏)도 절조가 있어 장례를 마치자 먹지 않고 죽었다. 이때 죄 없이 죽은 자를, 더러 그 처자를 종 삼으므로 분주하게 역사에 나가지 않는 자가 없어 절의를 스스로 지킨 사람이 드물었는데, 홀로 정씨와 대사간 강형(姜詗)의 처 김씨만의〈절의를〉지키다 죽었다.」

고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2월 15일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총(摠) 및 강형(姜詗)과 같은 죄가 중한 사람은 모두 그 해골을 분쇄하여 바람에 날려 버리게 하라.”

하였고, 1505년(연산 11) 1월 26일에는

“어리니(於里尼)⋅홍식(洪湜)⋅강형(姜詗)⋅엄산수(嚴山壽)⋅정인석(鄭仁石)⋅정진(鄭溱)⋅정옥경(鄭玉京)⋅윤채(尹埰)⋅조지서(趙之瑞)⋅이파(李坡)⋅두대(豆大)⋅송흠(宋欽)⋅한치형(韓致亨)⋅이극균(李克均)⋅이세좌(李世佐)⋅이총(李摠)⋅윤필상(尹弼商)⋅김순손(金舜孫)⋅이덕숭(李德崇)의 뼈를 부순 가루를 강 건너에 날리라.”

고, 전교 하였다.

7월 15일에는 종부시(宗簿寺)에 전교하여《선원록(璿源錄)》에서 강형(姜詗)⋅강겸(姜謙)⋅정여창(鄭汝昌)⋅김천령(金千齡)⋅임희재(任熙載)⋅남세주(南世周) 및 그 자식들의 이름을 삭제하게 하였다.

중종 초년(1506)에 이조참판으로 증직하였고, 1526년(중종 21) 9월 5일 왕이 낙점을 하도록 하기 위해 사옹원 참봉의 의망을 올릴 때 연산군에게 죄를 받았던 사람들의 자손을 올렸는데 이때 강형(姜泂)의 아들 강속(姜涑)도 의망에 올랐었다.

강형의 손자 온(溫)은 중종 때 사인(舍人)이 되었고, 증손 사상(士尙)은 선조 때 상신(上臣)이 되었다.

강형의 아우인 군수(郡守)(謙)도 형(兄)의 죄에 연좌되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그만 사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