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조(節操)의 신하 백석(白石) 김계창(金季昌)
금 중 현*
예로부터 상주는 영남의 대도회로서 낙동강 문화를 창출한 고장으로 큰 고을에 버금할 만큼 많은 인 재를 배출 하였다. 그 연원을 살펴보면 고려 말에서부터 상산사족으로 터 잡아 살아온 상산김씨 삼원수(三元帥)로 세칭 하는 김득배(金得培), 김득재(金得齊), 김선치(金先致) 3형제를 비롯하여 이들의 자손 명사들이 배출됨과 아울러 외향(外鄕)의 명문사족들과 혼맥이 이루어짐에 따라 처향(妻鄕) 또는 외가향(外家鄕)으로 정착하여 조선중기에서 부터는 대대 명문가로 영남학맥의 대간(大幹)으로 이어왔다.
백석(白石) 김계창(金季昌, 1427∼1481) 공은 위 상산김씨 상산군(商山君) 김득제의 손서로 상주에 터 잡아 살던 영산인 김수화(金守和)의 사위가 되어 상주인이 되었고, 조선전기 세조조에서 성종조까지 3대에 이르는 동안 청현요직(淸顯要職)을 지내면서 절조(節操)있는 신하로서 올바른 삶을 살다간 선비였다. 공은 삼사(三司)를 두루 거치고 성균관 사성(司成, 종3품)으로 정수(精髓)한 학문과 중정(中正)한 도의로 후학들을 이끌었으며 임금을 모신 경연(經筵)에서는 당대의 거경석유(鉅卿碩儒)들과 경학과 국사를 토론하였다. 임금 곁에서는 승지(承旨)로 왕정을 보필한 문신으로서 항상 바른 말로 직간(直諫)을 하므로 바른 정치를 구현하는 직신(直臣)이었다.
공의 사적(事蹟)은 여러 사서(史書)에 많은 기록을 남겼으며, 점필재·허백정·용재 성현·난재 채수 등 동 시대 인물들의 문집에서 이들과 도의교(道義交)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이조참판에 오른 후 타고난 기국(器局)과 천품(天稟)을 다 펼치지 못하고 신하로서 조정정사(朝廷政事)에 큰 꿈을 더 할 차재에 향년 55세로 아쉽게 생을 마감 하였다.
공의 자는 세 번(世蕃)이요, 호는 백석(白石)이며 창원김씨로, 상주 고장에서는 대개 창원의 옛 지명을 따라 ‘회산(檜山)김씨’ 라고도 한다.
세종 9년(1427) 경기도 양주(陽州)에서 출생하여 성종 12년(1481) 12월 한성의 살던 집에서 향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창원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제3자 명종(鳴鐘)의 18세손인 김왈원(金曰元)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김왈원은 김을진(金乙軫)의 둘째 아들로 고려 충혜왕조에 추성선력익대 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 定遠公臣)에 책록 되어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진 분으로 창원을 관향으로 삼았다. 공은 시조 왈원의 증손자로서, 조부는 고려조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행 공조전서(行工曺典書)를 지내다가 조선조에 와서는 증직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제수 받은 상지(尙知)이다.
공의 아버지 갱(鏗)은 성균관 직강(直講)과 방목군사(榜目軍事) 겸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조 기록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기사와 전라도 지역을 감찰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머니는 영월손씨(寧越孫氏)로 공은 삼형제 중 막내 아들이다.
성장 시기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단종 원년 27세에 진사(進士)에 입격하고 세조 4년 32세 때 공조참의를 지내던 영산김씨(永山金氏) 김수화(金守和)의 따님과 결혼하여 비로소 상주 처향(妻鄕)을 왕래하였다. 성종 7년 50세 되던 해에는 정부인(貞夫人) 영산김씨가 향년 36세로 졸하여 상처(喪妻)하였다. 공은 정부인 영산김씨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공보(公輔)요 차남은 공작(公綽)이다. 기록에 따라 다르나 서자(庶子)가 1인 또는 2인이 있다고 한다. 공의 아들들이 한성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받들어 운구하여 외남면 조정산(照井山)에 정부인 묘 아래에 장례지내고 이후 자손들이 상주에 터 잡아 살게 되었다.
공이 타계한 뒤 23년이 지난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에 성종의 후비(后妃)였던 윤씨(尹氏)의 회능(懷陵)을 폐위할 때 참여 하였다는 이유로 공에게 내렸던 직첩(職牒)을 거두고 공의 아들 형제에게도 서용(敍用)하지 말라는 화를 입었다.
선조(宣祖)조에 와서 공의 증손자 성(晟)과 련(鍊)이 묘갈(墓碣)을 세웠고 이어서 현손 극함(克緘)이 유고집을 초간(初刊)하였다. 숙종 6년(1630)에 외남면 조정산 아래의 영모재(永慕齋)에 배향(配享)하였다가 1981년도에 외남면 제천동(祭泉洞)에 세덕사(世德祠)를 신축하여 이안(移安)하고 매년 3월과 10월에 운잉(雲仍)의 자손들이 향사(享祀)하고 있다.
백석공의 환로는 한마디로 맞대어 바른 말을 하는 직간(直諫)하는 올곧은 선비의 벼슬살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이 몸 담았던 직책이 삼사(三司)를 비롯한 청요직(淸要織)이었다는 것으로 반증하는 것이고 맡은 간관(諫官)의 직분을 가감없이 그대로 간(諫)하여 임금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였다.
공은 단종 원년(1453) 27세 때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는데 진사 급제 전 세조조 년간에 이미 음직으로 장사랑(壯士郞)에 보임되었다고 한다. 세조 8년(1462) 36세 때 추장문과(秋場文科)에 2등으로 급제 하였다. 당시 명관(命官, 과거 시험관)은 명세를 떨친 신숙주였고 “문무(文武)”라는 대책문(對策文)으로 급제한 후 한성참군(漢城參軍)에 제수 되었다가 곧바로 불경간행을 수행하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 배치되었다.
세조 10년(1464) 38세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정자(正字)에 제수되어 세자[=예종]를 모시고 가르치는 직분을 맡았으며, 또한 세조가 연소재예(年少才藝)한 문신들을 예문관에 모아 36인을 6문(門)으로 나누었는데 문당(門當) 각 6인으로 점필재 김종직 등과 함께 공은 사학문(史學問)에 배치되었다. 이는 세조가 집권초기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의 온상이던 집현전(集賢殿)을 혁파한 뒤에 점차 세월이 흘러 정치적 안정을 되찾자 문예부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듬 해 39세 되던 해에는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하였다가 삼사(三司)의 하나였던 사간원의 헌납(獻納)에 올랐다.
예종 년간에 세조실록 편찬의 편수관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해에 사헌부 집의(執義)에 제수(除授)되었다. 백석공은 이로써 예문관·사간원·사헌부에 이르는 삼사(三司)의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올곧은 정사(政事)를 구현 하는데 직분을 다하였다. 사헌부 재직 시에 벼슬과 상을 주는 일을 공정하게 할 것을 청하는 상소 “청작상공정소(請爵賞公正疏)”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칼날같이 예리한 바른 말로 일관하였으니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I<전략>......어찌하여 요즈음에 오면서 조정의 위에는 기강이 서지 아니하며 상벌을 행하는 즈음에 권하고 막음이 법에 어그러져서 전하의 아름답고 밝은 정치로 하여금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하게 합니까? 생각하건데 모든 신하들이 성상의 교화를 능히 선양하지 못하여 전하의 상벌에 있어서 혹시 만분의 일이라도 미진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중략>......당상관은 혹은 노성한 사람 혹은 탁월한 사람 혹은 공로를 쌓은 뒤에야 비로 소 제수 할 수 있고 1자(資) 1급(級)이라도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중략>......지난 번 삼도감(三都 監) 낭청(郎廳)의 자궁(資窮)한 자를 당상관으로 올려주었는데 덕망으로 천거한 것이 아닐지라도 공로를 쌓음 을 기다린 후에 제수하는 것이로되 가볍게 제수한 것이니 안혜(安惠), 이영(李寧), 문수덕(文修德), 조지(趙 祉)의 무리는 모르기는 하나 별달리 무슨 공로가 있기에 모두 당산관이 되었습니까?......<후략>
공이 상소를 올린 해는 예종 즉위년으로 임금의 인사 정책이 처음부터 추호의 오류가 없도록 하므로써 장래 선정(善政)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공은 이 상소로 인하여 한때 예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같은 사헌부 관리들은 추국 당하였으며, 공은 사헌부 집의에서 파직되었다가 장악원 부정(副正)으로 좌천되었다.
성종이 즉위한(1470) 44세 되는 해에, 예문관 응교(應敎)에 다시 제수되고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겸했는데, 이는 강직한 성품과 곧은 공직의 수행 능력을 조정의 신료들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고 임금을 모신 어전에서 경전(經典)을 강(講)하는 자리의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나큰 명예라고 할 수 있고 인품과 역량 그리고 사서(史書) 경전에 대한 학문이 탁월하였음을 말해준다.
성종(成宗)조에 와서도 공의 직간(直諫)은 계속 되었다. 성종 즉위 다음 해(1471)에는 불경 구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이유는 “간경도감에 비치된 불경도 많이 있으니 다시 중국에서 구입할 필요가 없고, 즉위 초부터 불당(佛堂)을 헐어 버리고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펴면서 불경을 구입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세조비였던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세조를 위하여 불경을 구입하고자 하는 것이고 모자라는 불경의 완질을 갖추고자 하는 것인 만큼 이것을 산들 무슨 폐단이 있을 것인가?” 하고 공을 설득하였으나 공은 3차례나 계속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후 불경구입을 그쳤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는 지난 고려왕조 때 불교의 과람(過濫)된 전파로 인한 혹세무민과 정사 전횡의 폐단으로 마침내 왕조를 마감하고 유교도학을 표방하는 새 시대 국초(國初)에 다시 불경을 구입하는 자체는 국시(國是)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간(諫)하는 공의 철학적 신념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성종 5년(1474) 48세에 주문사(奏聞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북경에 다녀왔는데, 이는 성종이 자기 아버지의 시호(諡號)와 어머니의 왕후(王后) 칭호를 받기 위한 파견이었는데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게 된다.
성종 6년(1475) 49세에 경상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는데, 이때 점필재는 경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공의 안내를 맡게 된다. 점필재의 시 ‘망호당화세번(望湖堂和世蕃)’은 이때 공과 수창한 것이다.
성종 8년(1477) 51세에 사간원의 사간(司諫)을 제수 받았다가 현석규(玄碩圭)의 일로 사직(辭職)의 장(狀)을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의금부에서 판결한 어떤 사건에 도승지인 현석규가 동의한데 대하여 분분한 이설(異說)이 있었다. 현석규의 수하 승지들이었던 임사홍·홍귀달 등 다섯 관원은 현석규가 동의한 것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승정원 수장(首長)인 도승지와 수하 승지 간에 서로 의견이 대립된 것이다.
현석규는 크게 노했고 동부승지 홍귀달을 불러 임금에게 올린 상소를 주제넘은 짓이라며 크게 나무라며 상소리로 능멸하였다는 것을 당시의 대사간 손비장(孫比長)이 임금에게 보고하자, 현석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했고 왕은 그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국 대간의 개입으로 이어져 현(玄)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종은 현석규를 오히려 더 높은 자리인 사헌부의 대사헌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백석공 등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자 왕은 도리어 그를 더 높은 형조판서로 제수하였다. 이러한 성종의 인사 정책에 백석공을 필두로 한 대간들은 자급을 초월한 인사의 명을 거둘 것을 청하는 청수초자지명소(請收超資之命疏)를 연이어 세 차례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성종은 끝내 이 상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나 상소의 내용은 찬바람이 일어날 만큼 예리하고 준엄하였다.
이는 전제 군주시대였지만 조선시대 조정에서 정당한 언로(言路)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절대 권력자가 이미 실행한 인사에 대하여 강력한 시정을 요구하고 조목조목 반박하는 직설(直說)을 한다는 것은 자기 신분의 위험성을 감수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각오하는 결단이 아니고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상소문을 올렸을 때 조정 경연에서 있었던 실록의 장면을 옮겨보기로 한다.
성종 8년(1477) 8월26일 김계창, 이명숭, 김재신, 안침등과 현석규의 일에 대하여 논의하다.
사간(司諫) 김계창 등이 아뢰기를,
“이미 현석규를 그르다고 하고서 또다시 두 자급을 뛰어 올리셨으니 작록은 인주(人主)가 의지하여 영웅을 어 거하는 것인데 지금 이와 같이 하셨으니 신등은 작상(爵賞)이 범람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형벌이란 형벌이 없기를 기하는 것이다. 현석규가 형방승지가 되고서부터 사수(死囚)가 간소하여져서 내가 장차 오랫동안 맡겨서 시키려고 했는데 지금 특별히 그대들의 말을 따라서 체임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가 없는 까닭에 두 자급을 뛰어 올린 것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김계창이 이르기를,
“대저 두 자급을 뛰어 올린 것은 적을 능히 막았거나 혹은 난리를 능히 평정한 연후에야 주는 것입니다. 지금 현석규가 무슨 공능(功能)이 있어서 갑자기 두 자급을 뛰어 올리십니까? 작록이란 세상을 갈고 둔한 것을 닦 는 그릇이니 가볍게 사람에게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내가 어리석은 사람과 소인을 등용하였으면 옳지 못하거니와 현석규는 내가 신임하는 사람인데 특별히 그대 들의 청에 따라 체임한 것이다. 이렇게 제수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하였다. 김계창이 다투어 마지않으니 전지하기를,
“현석규를 이미 대사헌으로 제수하였으니 말하지 말라”
하였다.
경연의 자리에서 이와 같은 간언(諫言)은 그 이튿 날인 8월 27일과 8월 29일 그리고 9월 4일과 9월 8일, 9월 10일까지 연이어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성종 임금은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를 이유로 하여 백석공은 9월11일 사간(司諫)직의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이후에도 다른 여러 건의 정사에 대한 간언은 계속 되었다. 백석공은 임금의 잘못하는 정사(政事)를 바르게 하는 직분을 가진 사간의 관원이긴 하였지만 이미 시행한 정사를 되돌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일 것임에도 며칠을 두고 계속하여 바로 잡아야 함을 역설한 공의 기개(氣槪)는 오늘의 우리들도 본받을 일이라고 하겠다.
한편으로 끈질기게 주장하는 간언이 있었지만 옳다고 인정하여 실행한 정사를 흔들림없이 밀고 나가는 성종 임금의 통치자로서의 면모 또한 대단하다고 하겠다.
성종 10년(1479) 6월 2일 조선왕조에서는 씻을 수 없는 큰 사건이 태동되었다.
바로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尹妃)를 왕후의 자리에서 폐출하는 일이었다. 이 날에는 영의정 정창손을 비롯한 대소 신료들이 모인 가운데 성종은 윤비의 폐출을 언급하기에 이르니, 공은 홍귀달 등과 함께 왕후를 함부로 사제(私第)로 출궁하는 것의 부당함을 간언하였지만 성종은 오히려 성을 내면서 “그대들은 출궁할 준비만 하면 될 것을 무슨 말이 많은가?” 라며 질책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여러 대신들이 만류하였지만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폐출은 결정되었고, 공을 비롯한 반대한 승지들을 옥에 가두어 추국(推鞫)을 하였으나 불복하므로 승정원에 다시 불러들여 설득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정승들의 용서를 청하는 계(啓)를 성종이 받아들여 복직되는 것이다.
명나라는 국경을 침범하는 건주위(建州衛)를 소탕하기 위한 전쟁에 조선의 원병을 청하는 사신을 파견하는데, 공은 이해 윤 11월 1일에는 이를 영접 위문하는 별선위사(別宣慰使)로 임명되어 신의주 국경지대 가산(嘉山)에 파견되어 외교 업무를 수행하고, 이듬 해(1480) 4월 28일에는 조선 군대의 건주위 토벌 원군 유공(有功)으로 명나라 현종의 태감벼슬 자리에 있던 정동(鄭同)과 강옥(姜玉)을 보내어 포상하는 사신 일행을 영접하는 개성부별선위사로 그 임무를 수행하는 등 외교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6월 23일에는 드디어 통정대부에에 올라 도승지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과 예문관 직제학 및 상서원(尙瑞院) 정(正)을 겸하는 고위직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경연이라고 하면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왕권의 행사를 구현하거나 규제하는 왕이 주관하는 왕도 정치의 심장부라고도 칭하였다.
경연관(經筵官)으로 참여하는 당상관은 모두 16인인데 참찬관인 백석공 또한 경연관의 일원이었다. 강의는 한 사람이 자치통감 등 경서의 교재를 음독 번역 설명하면 왕이 질문도 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였다. 따라서 당상관의 작위에서 왕과 일상으로 대면하면서 정사(政事)를 논한다는 것은 오늘 날 대통령이 주관하는 각료회의 또는 청와대 특별 보좌관 회의 이상으로 높은 격을 가진 회의체라는 점에서 모든 관료들의 선망의 대상이고 명예였던 것이다.
백석공은 통훈대부 사간(司諫) 벼슬에 있을 때부터 관례에 따라 경연에 참석하였고 마침내 통정대부 도승지에 올라 경연 참찬관이 되었다는 것은 바른 정사를 위한 직간을 서슴치 않았지만 성종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어느 날에는 임금을 모실 때 편전에서 성종이 내린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공에게 임금의 금포를 벗어 덮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성종의 은총 또한 두터웠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종 11년(1480) 6월 15일에는 효령대군의 손부 박씨의 간통사건이 있었으니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고 하였다.
박씨는 승문원지사 박창윤의 딸로 왕가에 시집왔으나 그녀의 음행으로 신세망친 관리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공은 왕에게 줄기찬 탄핵으로 그녀를 사형에 처하게 하여 사회 기강을 바로 잡는데 앞장섰다.
공은 성종 12년(1481) 2월 14일 55세에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승차되고 후임자는 상주 출신 채수가 임명되었다. 공은 이로써 관직을 끝내고 그 해 12월 10일 생을 마감하니, 12월 14일 조정에서 부의로 쌀과 콩 10석, 종이 60권 그리고 관곽과 유둔(油芚)을 하사하였다. 도승지를 역임하였기에 성종이 부음을 듣고 특별히 부의(賻儀)한 것이다.
살펴 보건데 공의 환로(宦路)는 임금에게 바른말하는 간관(諫官)과 오늘 날의 청와대 비서관실을 넘나들며 통치자인 왕의 최측근에서 청화직(淸華職)을 역임하면서 하나도 욕됨이 없이 맡은 직분을 다 한 관료였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몸소 체험한 정사의 경험과 깨끗한 성품을 바탕으로 이제 막 이조참판(參判)에 올라 본격적으로 정무를 펼치고자 할 때 타계하는 비운을 맞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공이 장수하였다면 속속 승차(陞差)하여 나라의 큰 기둥으로 매김 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아쉬움은 더한다고나 할까?
공의 생애에서 남긴 시문 저작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사화(士禍)와 병난(兵亂)을 거치면서 다량이 산일(散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교적 남은 기록들이 적다하겠으나 적을수록 더욱 값지고 귀중하며 남아있는 그것만으로도 공의 학문 성향과 절조의 품성을 충분히 알 수 있음이다.
공은 입조 직후 연간에 간경도감에서 김수온, 강희맹, 노사신, 효령대군, 한계희 등 당대의 석학들 아래에서 불경간행에 참여 하였다.
그 후에는 최항(崔恒)과 <역대후비명감(歷代后妃明鑑)>을, 서거정(徐居正)과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진(撰進)하였고, 노사신(盧思愼),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양성지(梁誠之) 등 당대의 명문대가들과 함께 <동문선(東文選)>을 펴내는데 참여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들을 응대하면서 수창한 시가 <황화집(皇華集)>에 수록되었다.
당시 문풍 진흥기에 활동했던 김종직, 홍귀달, 이육, 성현 등 명유석학(名儒碩學)들과 동유 수창 하였던 자취가 그 분들의 문집에도 실려 있다.
시문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작품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동문선(東文選)> <해동시선(海東詩選)> <용재총화(慵齋叢話)> <상산지(商山誌)> <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함창현읍지(咸昌縣邑誌)> 등 10여 책에 실려 있다.
성종실록에는 왕의 명으로 당대의 명신 거유들과 함께 시를 지어 열두 폭 병풍을 만든 일이 전해지며, 공의 작품은 ‘포파고슬도(匏巴鼓瑟圖)’라는 글로 한 폭을 장식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사신이 와서 조선의 시를 보여 달라 했을 때 공의 부시(賦詩)인 ‘오장원부(五丈原賦)’를 보여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공이 남긴 문장을 보면 사서(史書)와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가 선망하였던 경연관(經筵官)을 오래 지낸 것으로도 알 수 있거니와, 상소문에 나타난 문장들은 고금(古今)과 중외(中外)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유려함 그리고 그 설득력은 읽는 임금으로 하여금 큰 감동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성종실록에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가 “김계창은 문예가 뛰어나 이름을 떨친 사람으로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기도 하다.
후대에 조경직(曺景稷)선생은 “그 시들은 깊고 아득하며 간결하고 담백하며 창연한 고색이 담겨져 있다.”고 하였으며, 상산지 창석본(蒼石本)에도 “공의 문장은 격조와 힘이 담겨있다”고 하였다. 남아있는 문장으로는 상소 <청작상공적소(請爵賞公正蔬)> 외에 4건의 상소문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벼슬살이는 영욕(榮辱)이 교차하는 위기의 연륜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절대 왕정시대에서 본의 아니게 군주의 미움을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왕실과 정파와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복잡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맡은 바 바른 정사를 수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신하의 도리였을 것이다.
백석공은 세조조부터 성종조에 사직(社稷)의 기반이 안정되어가는 조선 전기 중앙 관료로서 임금 곁에서 올바른 정사를 인도하는 소임을 다하는 유가적 선비의 상(像)은 이 시대의 정치 지도자에게도 귀감이 아닌가 한다.
역사 인물은 문묘(文廟)에 봉향(奉享)되거나 서원에 배향(配享)되기도 하고 나라에서나 지방유림에 서 불천위(不遷位)로 길이 천양(闡揚)되기도 한다. 인물을 천양한다 함은 그 인물이 살아온 행적을 뒷 사람들이 본 받아 바르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 인물의 천양은 후세 자손들이나 제자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손의 문호가 번성치 못하거나 한미(寒微)한 탓으로 훌륭한 조상이 있어도 그 인물이 살아온 행적만큼 천양이 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비단, 백석 김계창공을 여기에 비정(比定)한다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시대를 불문하고 있어 왔고 앞날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공의 후손들이 갑자피화(甲子被禍) 이후 각지로 흩어진 것과, 그리고 상주지역에 남아있던 누대 후손들이 어느 정도 공의 장리(杖履)를 지키려 노력해 온 것에 대해, 진한 아쉬움과 감사한 감정이 교차함은 어쩔 수 없다.
500여 년 전의 한 인물에 대해 몇몇 자료에서 수집한 자료로 대강 얽어 보았으나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을 기약해 본다.
참고문헌
․ <백석선생유고> 2013. 창원김씨 참판공파 간행
․ <회원세고(檜原世稿)> 1958. 창원김씨 상주파 간행
․ <국역점필재집> 1997. 임정기 역
․ <상산지> 1617. 창석본
․ <함창현읍지> 1832
․ <상주목읍지> 1832
․ <상주시사> 2010. 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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