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법(國法)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박이창(朴以昌) 선생
김 철 수*
박이창(朴以昌, ?∼1451)의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박안신(朴安臣, 1369∼1447)이다.
1417년(태종17)에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고, 1420년(세종 2) 세자시강원주서(世子侍講院注書)를 거쳐서 1426년에는 전라도에 감찰로 파견되어 조희정(趙希鼎)·양맹지(梁孟智)·이신(李伸)·문헌(文獻) 등이 재물을 감춘 것을 탄핵하였다.
그리고 1430년 4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1434년에 내자소윤(內資少尹)으로 경기도와 황해도에 파견되어 진휼(賑恤)의 상황을 살폈으며, 1443년에는 우부승지, 1445년에는 좌부승지를 역임하였고, 1447년부터 인수부윤(仁壽府尹)·공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450년부터는 호조참판과 평안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 해 문종이 즉위하자 중추원부사에서 형조참판이 되어 평안도를 좌우로 나누어 각기 도절제사를 보내고, 강계(江界)와 삭주(朔州)에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물을 보내기를 청하였다. 같은 해에 경창부윤(慶昌府尹)과 평안도감사가 되었고, 9월에는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때 먼 길에 대비하여, 많은 양곡을 가져간 것이 죄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붙잡히자 국법을 어긴 것을 뉘우치고 자결하였다.
선생은 평소 해학이 넘치고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성품은 대제학을 역임한 아버지 박안신(朴安臣)을 닮아서 매우 강직하고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였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선생은 젊은 시절 상주에 살았는데 처음에는 학문에 별로 힘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향시(鄕試)에 응하게 되었는데, 시험장에 들어가서 문득,
“조교(曹交)처럼 키만 크고 향시장(鄕試場)에서 백지(白紙)를 내고 나오면 반드시 남에게 웃음거리 가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억지로 붓을 들어 글을 써 냈더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장원(壯元)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로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열중하여 마침내 급제(及第)하였다.
선생은 성격이 강직해서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절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일화(逸話)가 있다. 선생이 급제한 후에 처음 들어간 곳이 한림원(翰林院)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관리가 처음 임명을 받고 오면, 오늘날의 ‘신고식(申告式)’과 같은 ‘면신례(免新禮)’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 면신례는 아주 혹독하기고 하도 짓궂어서,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울고 웃기’, ‘흙탕물에서 구르기’, ‘얼굴에 똥칠하기’와 같은 장난을 참아야 했고, 뒷짐을 지고 머리에 쓴 사모를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직속상관의 이름과 직책을 외우는 일도 시켰다는데 어긋나면 벌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면신례’의 폐단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서, 조정에서는 금지령(禁止令)까지 내리기도 했다.
성격이 강직한 선생은 ‘면신례’가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겨서 처음부터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참이 관례를 따르지 않자, 선임자(先任者)들은 꾸짖으며 50일이 지나서도 면신(免新)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은 분기(憤氣)를 참지 못하고 자신이 앉아서 일할 곳으로 스스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선생을 가리켜서 ‘자허면신(自許免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성격이 직설적이고 엄격하며, 과단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연륜이 쌓여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길의 마지막을 국법(國法)의 준엄함을 죽음으로 지켰다.
조선(朝鮮)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신(使臣)에게는 평안도 고을에서 관례적으로 마른 양식을 규정보다도 많이 챙겨주었다. 그래서 알뜰하게 쓴 사람은 남은 양식으로 금은보화로 바꾸어 들어와서 부자(富者)가 되기도 했다.
조정에 있으면서 선생은 이런 폐단을 낱낱이 임금에게 아뢰어서 양식을 더 가져가지 못하도록 했고, 왕은 선생의 말을 따라서 그 폐단을 시정하라고 명(命)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선생이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연경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중간에 장마라도 만나면 식량이 모자라게 되어 낭패를 겪는다는 통역사의 주문으로 규정보다도 많은 양미(糧米)를 준비해 갔었다. 맡겨진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때, 이 일 때문에 의주에서 잡혀서 신안관(新安館)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선생은 한밤중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목과 배를 찔러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같이 갔던 서장관(書狀官) 이익(李翊)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뛰어오자, 선생은,
“노신(老臣)이 본디 오명(汚名)이 없었고 충성을 다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당초에 양미(糧米)를 국 법(國法)에 정해진 양만큼 가지고 가려 하였으나 통역관(通譯官)들의 말이 ‘지금이 장마가 시작되 었으니 팔참(八站)에 들어서서 수재(水 災)를 만나 중도에 막히게 되면 양미가 떨어져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더 가져가십시오.’하기에 나도 그 말이 옳 다고 생각되어 쌀 40 말을 더 갖고 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일의 전말을 아뢰려 했는데 이미 국법에 저촉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성상을 뵈며 동료 대신들을 보겠습니까.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낫습니다.
의주에 도착했을 때, 이런 결심이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일행을 호송하는 중국인이 많으므로 타국 사람이 알 아 서는 안 되겠기에 여기 와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하고는 돌아가셨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승정원에 전지를 내려,
“박이창(朴以昌)은 틀림없이 법을 어긴 것이 부끄러워 자살했을 것이다. 심히 측은하다. 만리(萬里) 길에 고생했으므로 나는 처음에 잡아오고 싶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들의 강력한 청(請)에 못 이겨 따랐더니 이제 와서는 후회막급이다. 치제(致祭)하고 쌀, 콩, 관곽을 내려주라.”
고 하며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선생은 사람됨이 몹시 활달하여 작은 절개와 지조에 구애받지 않았고, 말에는 우스개가 많았으며, 단 지 국법을 어겼다는 그 오명이 수치스러워서 자살한 것이다. 이에 임금이 내린 제문(祭文)은 이러하였다.
“생각하건대, 경(卿)은 타고난 성품이 탁월하고 품행이 곧았다. 글을 읽고 과거에 올라 벼슬길에 들어와서는 중요한 관직을 두루 밟았다. 세종 임금에게 대우를 받아서 갑자기 발탁되어 남이 주목하는 관직에 두었고, 승지의 자리도 맡겼다. 충성스러운 말을 임금에게 아뢰는데 공이 많았고 죄목(罪目)을 들추어내어 늘어놓는데 충성을 다했다. 사(私)를 버리고 공(公)에 봉사하였으며, 문장이 멋있고 화려한 것을 취하지 않고 실질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 이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중요한 지위에 등용하시니, 전국에서 국사에 힘써 명성과 덕망과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내가 즉위함에 이르러 위임과 의지함이 또한 돈독하였다. 경에게 사절의 노고를 부탁하여 중국으로 예물을 받들고 갔던 것이다. 우연히 금(禁)하는 명령에 저촉되었으나 그 진실은 조심하는 데 있었다. 담당부서의 보고에서 법으로 보아 경을 신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였지만, 결국에는 뭇 사람의 의견에 물었고, 우선 법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상주한 것을 좇아서 재가하였더니, 경의 수치스러운 마음을 불러 일으켜 생명을 버리고 결백을 보이게 된 것이다.
경의 고집이 세고 지조가 굳음은 내가 아는 바인데도,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실상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왕명을 받고 나갔다가 시체를 싣고 돌아왔으니, 유명을 달리 하는 사이에, 의(義)를 등진 것이 실로 많구나. 후회하여 미칠 바 없으니, 내 마음을 어이하랴?
이에 호상할 것을 명하여 상여는 선영 아래로 돌아가게 하였고, 모든 부의를 내림에 있어서도 보통 때 보다 더함이 있노라.
사람을 보내어 변변하지 못한 제사를 베풀어서 나의 부끄러움과 슬픈 마음을 펴는 바이니, 영혼이 있으면 경은 이 심정을 알지어다.”
(“惟卿稟性卓犖, 操履勁直。讀書捷第, 筮仕揚歷。遇知昭考, 驟加顯擢, 置之耳目, 任以喉舌。功多啓沃, 忠在論列。匪躬奉公, 不文以實。皇考乃嘉, 進登樞密, 中外賢勞, 懋有聲績。肆予臨朝, 委倚亦篤。煩卿使節, 奉幣上國。卿偶觸禁, 情在所矜。有司上請, 法須訊卿。謂此何傷, 終當議賢, 姑從法司, 可其奏焉, 致卿愧恥, 捐軀以白。卿之狷介, 予之所識, 而令至此, 實予之爲。受命而出, 載屍而歸, 幽明之間, 負義良多。後悔無及, 余心柰何? 爰命護喪, 轝歸先域, 凡厥賻贈, 有加常式。伻奠菲薄, 抒我慙悲, 不亡者存, 卿其知之。”)
선생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였기 때문에 국법을 어긴 것은 분명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선생이 국법을 어기게 되었던 사정은 ‘장마로 인한 부득이한 것’이었기 때문에 돌아와서 해명만 잘 하면 문제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선생은 종2품 벼슬인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로 있었기 때문에 그만한 일은 충분히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구차하게 용서를 받는 대신 자살(自殺)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택함으로써 관료로서 법(法)을 어긴 데 대한 대가(代價)를 치렀다.
이러한 선생의 일은 그 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권력(權力)만 믿고 함부로 국법(國法)을 어기고 치부(致富)했던 사람들에게는 크게 경종을 울리는 일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엄격했던 선생의 처신(處身)은 본받을 만하다고 하겠다. 더구나 선생은 자신의 죄를 중국에서 알고서도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서 굳이 조선에 와서야 자살(自殺)했다는 것은 가슴 뭉클한 선비정신의 발로라고 하겠다.
그래서 비록 국법(國法)을 어겼지만, 선생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문종(文宗)이 장례 때 쓸 여러 물품과 비용을 하사(下賜)한 것도 선생의 대쪽같이 곧은 신념(信念)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국법을 어긴 일은 청백리(淸白吏)의 행동이 아니었지만,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죽음을 택함으로써 선생은 만고(萬古)에 빛나는 청백리(淸白吏)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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