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상주문화원 금요사랑방 제75강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임진녹」 소고(小考)

빛마당 2015. 9. 29. 18:21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임진녹」 소고(小考)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목 차

1. 들어가며

2. 수암(修巖)의 가계(家系)와 주요 행적

3. <임진녹>의 보전내력

4. <임진녹>의 주요내용

5. <임진녹>이 주는 교훈

6. 맺음글

수암(修巖)류진(柳袗)의 「임진녹」 소고(小考)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들어가며

수암류진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셋째아들이다.

광해11년(1619)37세 되던 해에 상주 중동 사리촌(里村)에 터 잡아 이른바 상주우천(愚川) 학맥(學脈)을 개창(開創)하여 그의 자손은 물론 가격(家格)에 따라 명문잠영(名門簪纓)들 과의 각처혼맥(各處婚脈)으로 많은 현유(賢儒)들을 배출하였다. 11세가 되었을 때 우리 민족의 치욕적 외침이었던 임진왜란을 당하여 정승 자리에 있던 아버지는 선조임금을 호종(扈從)하고 남은 가족들은 살고 있던 한양을 떠나 경기, 강원 평안 등 3도(道)로 피난길을 겪고 서울에 되돌아 왔다. 그 사이에는 필설(筆舌)로 표현키 어려울 만큼 쓰라린 고난(苦難)을 삼키면서 파난 살이의 생활과 갖가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바 체험 이야기와 가족들과의 반가운 해후 등 생생한 사실(事實)을 공이 29세 되던 1618년도에 18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적은 글이 <“임진록”>이다. 그 내용은 11세 어린 나이에 전쟁의 참상을 겪고 철이 들어서 자신이 겪은 시련과 고초를 남겨서 후예들이 그 사실을 알고 크게는 국가 민족의 소중함과 작게는 가족과 사회생활에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임진록”은 2000년도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홍재휴(洪在烋) 교수의 역주(譯註)로 수암이 남긴 임자록(任子錄)과 수암선생행장(修巖先生行狀)을 합편하여 원문(原文)과 함께 책으로 간행한바 있다.

본고는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하여 그 보전(保全) 내력과 내용을 살펴보고 상주향토사(鄕土史) 사료(史料)로서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킴과 아울러 기록문화(記錄文化)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한다. 필자의 글은 「임진녹」에 대한 깊은 연구라기보다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壬辰錄>(임진록)에 홍재휴 교수의 해제(解題)문을 인용하고 내용을 살펴 이 시대에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것임을 우선 밝혀 둔다.


2. 修巖의 가계(家系)와 주요행적

수암의 휘(諱)는 진(袗)이요, 자(字)는 계화(季華)이며, 수암(修巖)은 공의 호이다. 관향(貫鄕)은 풍산(豊山)으로 조선 선조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에 위기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주역이라고 할만큼 공을 세운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셋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현감 벼슬을 지낸 형(炯)의 따님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조(祖)의 휘는 중영(仲郢1515~1573)인데 항해도 관찰사와 예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아들 서애의 귀(貴)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공작(公綽)이니 간성군수를 역임하였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고조 자온(子溫)공은 진사(進士)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수암은 선조15년(1582)에 한양의 집에서 태어나 인조13년(1635) 54세로 생을 마쳤다.

14살이 되기까지는 아버지의 관직을 따라 한양에서 자랐으나 8살 때 어머니 전주이씨가 별세하는 슬픔을 겪었다. 11살이 되던 해 선조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는 선조 임금을 모시고 서행(西行)길에 오르고 자형(姊兄)인 한산인(韓山人)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강원, 평안, 황해도 등지의 산골짜기를 다니며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과 인심의 후박(厚薄)을 골고루 보고 겪으면서 피란을 하고 이듬해에(1593) 한양 집으로 돌아왔다. 16세에 충정공(忠政公) 권벌(權橃)의 딸과 혼인하였고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에게 사수(師受), 수학(修學)하였다.

17세 되던 선조31년(1598)겨울에 아버지 문충공(文忠公)이 이이첨(李爾瞻)등 북인 정파의 소구(所構)로 파직되어 하외(河隈)로 돌아 오게 되었다‘ 이때에 아버지로부터 중용(中庸)을 수강하여 학문의 요체(要諦)를 자득(自得)하였다. 아버지는 수암이 공부에 정진하는 것을 보고 “너와같은 아름다운 자질을 얻기도 어려운데 퇴도(退陶)의 문에 미치지 못함이 안타까운 일이다” 라고 할 만큼 칭찬하였으니 자질(資質)을 알만하다 하겠다.

이후 19세에 금계제사(金溪齋舍)로, 23세에는 두 형님들과 산사(山寺)에 들어가 공부하는 등 학문에 더욱 힘썼다. 26세이던 선조 40년(1627)에는 아버지 문충공이 하세(下世)하여 망극의 슬픔을 겪게 되었다.

문충공이 임종에 자손들에게 남긴 유시유어(遺詩遺語)인 “勉爾兒曹須愼旃, 忠孝之外無難事(면이아조수신전, 충효지외무난사)”와 “力念善事, 力行善事(역념선사, 역행선사)”를 마음속에 품고 그 가르침을 다짐하였다.

29세 광해군 2년(1610)에 증광진사(增廣進士) 초시(初試)에 장원하고 이해에 또 성시(省試)에 나아가 장원 하였고 이 무렵에 임진록(壬辰錄)을 초(草)하였다. 31세가 되던 광해군 4년(1612)임자년에는 김직재(金直哉)등의 모반사건인 해서역옥(海西逆獄)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입어 서울 경옥(京獄)에서 옥고를 치루는 가운데 이한음(李漢陰)이 왕에게 공의 무죄를 건의하여 석방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 당시 옥살이 할 때 에는 공의 중형(仲兄)세마공(洗馬公) 휘 · 단(褍)이 서울에 따라 올라와 옥사(獄事)를 근심걱정 하다가 병이 들어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형제간의 그 애통(哀痛)을 무엇에 비기랴.

31세에는 거처를 옥연정사(玉淵精舍)로 옮기고 “靜坐終日易, 操存一刻難(정좌종일이, 조존일각난)” 이라는 좌우명을 삼아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정진하면서 지난 임자년의 음해(陰害), 옥고(獄苦)사실을 정리한 임자록(壬子錄)을 초(草)하였다.

이 뒤로 33세 광해 6년(1614)경에는 어릴 때 겪었던 임진왜란의 임진록과 장년기 31세때 임자년 옥고(獄苦) 사실의 임자록을 합편하여 자경(自警)과

뒷 사람들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병산서원(屛山書院) 존덕사(尊德柌)를 배알하였다. 30대 초중반에는 김백암(金栢巖), 김망언(金忘言), 김계암(金溪巖), 이창석(李蒼石), 정한강(鄭寒岡), 이오봉(李五奉) 등 사계(斯界) 선배 제공(諸公)들과 교류하여 중망(重望)을 얻었다. 35세되던 광해8년(1616)에는 어모장군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 벼슬을 배수(拜受)받고 한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36세에는 별시(別試) 동당(東堂) 초시(初試)에 합격하였고 그해 9월에는 선산의 노경암(盧敬庵)을 찾아 절하고 영해(寧海)의 읍령(泣嶺)을 유람하였다. 수암이 상주와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일찍이 아버지 문충공께서 상주목사를 역임한바 있고 문충공의 문하생(門下生)이었던 이월간(二月澗) 이창석(李蒼石), 정우복(鄭愚伏) 을 찾아 절하고 교분을 가진바 있어 37세되던 광해 10년(1618)에 마침내 상주의 중동면 우물 가사리(佳士里)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이곳은 위수(渭水)가 낙동강과 합류하는 승경지(勝景地)이고 가까운 곳에서 이월간등 선배 제공들의 강학(講學)을 듣고자 하였다고 한다.

상주로 이거한 이후 당대 상주의 여러 현사(賢士)들과 돈독한 교류가 있었고 상주 향내에는 안동의 새로운 문풍(文風)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사 온 그해 9월에는 영농을 장려하는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를 편수 하였고 중동고을에 김추임(金秋任)등 향내 사우(士友)들과 협의하여 향약(鄕約)을 창립 하였다. 이때 향약당(鄕約堂)은 죽곡리(竹谷里) 에 두었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따른 고을차원의 협조와 권선(勸善)하고 과실(過失)을 상규(相規)하는 향풍을 진작하는데 힘썼다. 38세부터 정우복과 이창석 제공들과 함께 청리의 수선당에서 문충공의 문집(文集)을 교정(校正)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41세광해 14년(1622) 임술(壬戌)에는 도남서원의 도정사(道正祠)에 알묘하고 상주 낙동강 도남서원의 임술범주시회(壬戌泛舟詩會)에 참석하였다. 이 시회에는 당대 상주를 중심으로 한 명유현사(名儒賢士)들이었던 이월간 · 창석 형제와 조검간(趙黔澗), 전사서(全沙西), 강남계(康南溪) 제현 25인이 참여 하였고 이 시회는 이후 조선 말기에 까지 200여년 동안 이어져 전국에서도 희귀한 강상문학(江上文學)의 산실이 되었다.

42세(1623)때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봉화현감(奉花縣監)에 제수(除受)되었다. 봉화현감 재직시에는 오리(汚吏)들을 배척하고 부세(賦稅)를 공정히 하여 향민들이 안정된 삶이 되도록 하였으며 교훈 될 만한 선현(先賢)의 말씀을 모아 엮어 읽도록 하여 향민 교화(敎化)에 힘썼다. 이와 같은 선정(善政)이 조정에 알려져 표리(表裏)가 하사 되었다. 45세에는 형조정랑(刑曹正郞)에 배수 되었으나 사직하고 곧바로 영주군수에 배수 되었다.

인조5년(1627) 46세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정우복(鄭愚伏)의 차정(差定)으로 상주의병장(尙州義兵將)이되어 호령(號令)을 엄숙하게 하였으며 청도군수로 부임 하여는 흥학에 힘썼고 이어서 익위사(翊衛司) 익위와 사복시(司僕寺) 첨정(僉正) 그리고 예천군수, 협천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50세에는 아버지 문충공의 문집(文集) 교정(校正)을 마치고 정우복과 이창석에게 서발문(序跋文)을 청하였고 이듬해에는 해인사(海印寺)에서 아버지 서애문집(西厓文集)을 간행 하였다.

52세에는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상주로 돌아와 안빈자락(安貧自樂)하였다가

만년 53세에 뒤늦게 다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으나 곧 바로 사직 하였다.

54세 인조 13년(1635)정월에 안동 하외(河隈)옛집을 돌아보고 도산서원에 알묘(謁廟)하고 돌아오는 길에 영주의 구학정(龜鶴亭)에 유(留)하다가 당월 13일 감질(感疾)로 일어나지 못하고 종세(終世)하였으니 선산의 박곡에 장사하였다가 뒷날 군위 의곡에 이장하였다.

종후(終後)에는 공의 학덕과 행의(行誼)가 높고 두터워 강호에 제현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여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 월간(月澗) 이전(李㙉), 창석(蒼石) 이준(李埈), 사서(沙西) 전식(全湜), 계암(溪巖) 김령(金玲), 망언(妄言) 김영조(金榮祖),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택당(澤堂) 이식(李植),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용주(龍洲) 조경(趙絅), 무주(無住) 홍호(洪鎬),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검간(黔澗) 조정(趙靖)외 20수인과 예천 선산향교 그리고 여강(廬江) 도산(陶山), 도남(道南), 이산(伊山), 삼계(三溪 ), 빙계(冰溪), 병산(屛山), 남계(南溪), 속수(涑水)서원의 많은 유생(儒生)들이 만사(輓詞)를 올렸으니 살았을 때의 행의(行誼)를 알만 하다고 하겠다. 효종7년(1656)에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이어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증직(贈職)되었고, 현종3년 (1662)에는 사림들이 받들어 아버지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을 배향(配享)한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3.<임진녹>의 보전(保全)내력

현재 전하고 있는 <임진녹>은 <壬辰錄>(임진록)이라는 표제의 책안에 「임진녹」「임자록」「슈암션싱힝쟝」등 3편의 글이 합편 되었는데 책의 앞뒤에 이글을 배껴쓴 경위를 밝힌 전사자(轉寫者)의 기문이 있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모두 새로 줄로 내려 쓴 한글초서체 이므로 하여 현대인들이 읽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자체문맥(字体文脈)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2,000년도에 영남대학교 민족문화 연구소에서 홍재휴(洪在烋) 교수가 역주한 <譯註 壬辰錄>(역주 임진녹)을 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의 앞 머리에는 「임진녹」의 서지적(書誌的) 측면과 옛적에 이 책의 성책경위(成冊經緯) 및 현대에 와서 활자화(活字化)되어 학계에 밝혀지기 까지의 해제문(解題文)을 실었는데 이 해제문 안에 그동안 책의 보전 내력이 수록되었으므로 본난 에서는 그 내용을 요약하기로 한다.

가. 서지(書誌)

옛적에 전해오는 책은 가로 18㎝, 세로 32.5㎝, 규격으로 오침선(五針線)한장본(韓裝本)으로 엮어졌는데 여기에는「임진녹」24장 「임ㅈ록」28장 「슈암션싱힝쟝」11장과 함께 책의 앞뒤에 글을 배껴쓴 전사자(轉寫者)의 기문(記文)이 1장씩 붙어있어 모두 65장 130쪽의 책이다. 쪽마다 12내지 16줄씩으로 하여 한 줄에 30여자 내외를 세로 줄로 내려쓴 초서체의 필사본이다.

나. 성책보전경위(成冊保傳經緯)

「임진녹」이 현재까지 전해지기 까지는 당시의 사류(士類)들에 의한 문필관행(文筆貫行)으로 보아 먼저 한문체(漢文体)의 의자본(意子本)이 있었는 것을 뒷날에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 전하고 있는 한글본「임진녹」과 한문본 「임ㅈ록」의 “題日錄後”(제일록후)라는 편찬후기에 이르기를


日錄者 何日出所爲 必書二冊所以 備觀戒而資改耳 然則曷自庚戌始 前乎此者歲遠而不可詳 而舊篋有庚戌春日 記因而錄之 而其後事 亦多出於追記 ……… 獨其禍變之慘 愈久而愈不忘 嘹然心目間 故今載其始終 日時特詳焉 甲寅季夏上澣書 <修巖集券三跋>(일록자 하일출소 위 필서이책소이 비관계이자개이 연즉갈자경술시 전호차자세원이불가상 이구협유경술춘일 기인이록지 이기후사역다출어추기 ........‘중약.......독기화변지참 유구이유불망 요연심목간 고금재기 시종 일시특상언 갑인계하상한서 수암집권3발)

이 임진녹과 임자록은 어떤 날에 어려웠던 과거사를 갖추어 글로 남겨 후세 사람들 이 살아가는 자료로 삼아 경계심을 가지도록 할 뿐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경술년으로부터 이 보다 앞에 것을 비롯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 자세하지 못하다 하겠으나 옛날 상자에 경 술년(1610)봄의 기록이 있었기에 그것으로 이글을 기록 하였다. 그 뒤에 일 또한 추가 기록한 것이 많다. ..........중약..........유독 그 화변의 참상은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잊어버 리지 못하리 만큼 눈에 삼삼하기 때문에 이제라도 그 시종을 실어서 날로 때마다 특별히 상세하게 하다. 갑인년(1614)여름 한 것으로 짐작된다.


라고,하였으니 위의 일록 두 책은 임진록(壬辰錄)과 임자록(壬子錄)을 말한 것이고 이두 일록은 필시 한문체의 의자본(意字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후기를 쓴 갑인년이 광해 6년(1614)이므로 지은이 수암 33세때 였음을 알 수 있고 경술년에 쓰기 시작한 일록은 壬辰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해는 광해2년 (1610)수암이 29세 되던 해이다. 그러나 후사를 추기 한 것은 壬子錄(임자록)이라 할 수 있으니 수암선생 연보(年譜)에 “임자 선생 31세……… 중략 ……… 임자록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저자 수암이 31세가 되던 광해 4년(1612)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책 중에 임진록(壬辰錄) 은 광해4년(1612) 임자년에 수암이 역옥사건에 피체되기 이전에 지어졌고 이와 같은 사실기록에 따라서 壬辰錄과 壬子錄은 수암이 30세 전후 때에 각각 지어 졌으며 양 일록이 지어진 2년 뒤에 후기가 쓰여 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한문체 임진록은 전해지지 않고 한글본 「임진녹」이 전해올 뿐이다. 그 까닭은 수암선생연보 중에


계사년 선생12세 .....중약.....윤12월 관서(關西)로부터 문충공이 계시는 서울에 돌아왔다.

이 뒤에 선생이 피난하였던 처음부터 끝까지의 글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집안에 부녀들이 읽었다. 번역은 이재관(李在寬)이다.


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임진 · 임자 양 일록(兩 日錄) 두 책은 처음에 모두 의자본(意子本) 한문체(漢文体)였고 이것을 광해 6년(1614)에 합편되면서 “題日錄後”(제일록후)가 쓰여 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한글본의 표제 壬辰錄(임진록)의 성책(成冊)은 「임진녹」과「임자록」육필원본(肉筆原本)이 전해오다가 한문체 “修巖先生行狀”(수암선생행장)이 한글체 “슈암션싱힝쟝”으로 국역되어 3편이 합편되었고 이것이 낡아져 다시 옮겨 배낀 전사본(轉寫本)이라고 짐작한다.「임진녹」의 말미(末尾)에


이제는 부모 없으시고 동생들 다 죽고 나혼자 살아서 병이 들어 아무 때 죽을지 모르니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자식이라고 그리 신고(辛苦)하여 죽다가 살아난 줄 모를 것이라 일가 사람이라도 이야기 삼아 보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 하노라.


라고, 하였다. 따라서 「임진녹」을 지은 것은 부모와 두 형님이 세상을 뜬 뒤이고 병이 든 때라 하였으니 이는 곧 임자년 옥고를 치른 뒤의 불편한 심경을 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임자록」말미에는


구월 그뭄날 선산(先山)가매산에 영장(營葬)하니 그때 사설(辭說)이 대강이라 임진년 사 설과 한데서 자식들을 주어 제 아비 평생 서러워하던 까닭을 알게 하노라


라고, 하였고 수암선생행장 연보에 임자년 9월에 피체전말(被逮顚末)을 기록 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임진녹」「임자록」이 합편된 육필원본은 한자본 일록(日錄) 두책이 이루어져서 제일록후(題日錄後)를 썼던 광해 6년(1614) 33세 이후에 일로서 한글 본 첫 번째 원본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 두 가지의 한글 본 육필원본에 목재(木齋)홍여하(洪汝河)가 지은 한문체 수암선생 행장을 누군가에 의하여 번역한「슈암션싱힝쟝」을 다시 합편한 것이다. 따라서 「임진녹」「임자록」「슈암션싱힝쟝」등 3편이 합편된 것은 목재가 지은 한문본 행장이 지어진 이후이고 이것이 줄곧 전해오다가 헐어져서 다시 배낀 전사본(轉寫本)의 대본이 된 것이나 현재까지 발견되지 아니하였다. 「슈암션싱힝쟝」이 번역된 년대나 역자(譯者)가 분명하지 않고 3편이 합편된 성책(成冊)의 연대와 그 실행자가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수암의 사위였던 이재관(李在寬)의 주선으로 짐작한다. 그 이유는 한문체「壬辰錄」(임진록)을 한글체 「임진녹」으로 번전(飜傳)한 사실이라던가 「壬子日錄」(임자일록)을 「임자록」에 의하여 결락(缺落)부분을 보완한 사실이다. 따라서 행장의 국역도 이분이 이룬 것으로 짐작하고 책의 성책은 그가 살았던 숙종15년(1676)이전 이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세 번째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壬辰錄」(임진록)표제의 전사본(轉寫本)이다. 이 전사본은 두 번째 성책된 원전을 대본으로 하여 베낀 것인데 베껴쓴 경위을 앞뒤에 기록하였다. 먼저 앞의 기록에


우천(愚川) 류평창댁(柳平昌宅) 세세(世世) 귀중지물(貴重之物) 이니 장구(長久)하여, 유 전(遺傳) 천추(千秋)하라. 이 책은 우리 선세(先世) 유적(遺籍) 이시니, 자손이 극히 공 경 중대 하는 바 러니 본전(本典)이 많이 상한 것을 내 해포 두었다가 더 이상하여 버리 니 불초 죄 중하여 여러 해 경영하여 번서 하였으나, 본디 단필에 풍파환난(風波患難)에 정신이 몽황하고 칠십지년에 안력(眼力)이 희미하니 성자(成字)아니 되어 불성(不成)모양 이나 내성력(誠力)이 극진하니 대대(代代)종부들은 사적(斯籍)의 존중(尊重)함과 필주(筆 主)의 가득한 정성을 생각하여 아끼고 아껴 전지자손(傳之子孫) 만만세지(萬萬世之)무궁 하라, 시세(是歲) 기유(己酉)의춘에 평창의 종고모(從姑母) 봉대(鳳坮) 강댁(姜宅)은 수 회(愁懷)심요(心擾)중 추필서(醜筆書)하노라 우리 모녀의 글씨라 졸필(拙筆) 해괴(駭怪) 하니 통분(痛憤) 참괴(慙愧)하나 고어(古語)에 왈 유자 불사(不死)요 유문불후(遺文不朽) 라 하니 비록 흉필이나 이 책에 머물러 내 우리집 딸로 세상에 있던 줄 후인이 알게 하노 라


라고,하였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壬辰錄」(임진록)표제의 이 책은 우천마을 즉 중동면 우물리 풍

산류씨 류평창댁(柳平昌宅)의 종고모(從姑母)되는 분으로서 상주시 신봉동 봉대마을 강씨(姜氏)로 시집온 70세 가까운 류씨(柳氏) 딸래가 친정집에 오래도록 보관되고 있던 귀중한 서책을 펼쳐 두었던 것이 점점 더 상하게 되므로 하여 친정집 조상들에게 그 죄가 중하다는 것을 늬우쳐서 정성으로 다시 베껴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친정집 종부(宗婦)들이 조상이 물려준 사대부 가문의 귀중한 전적들을 존중함을 알고 글을 지은 수암 조상의 가득한 정성을 깊이 생각하여 자자손손 전해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고 이 책을 베껴 쓴 것이 친정집 류씨(柳氏) 딸로 태어난 자부심 이었음을 뒷날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다. 특별히 글의 끝부분에 “우리집”이라고 하여 시집 온지 수 십년이 지난 70 노경에도 친정집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담았고 친정집이 오로지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 이었다는 것을 이 한마디 말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책의 말미(末尾)에는 류씨부인(柳氏夫人)의 딸 봉대강씨(鳳坮姜氏)의 쓴 후기(後記)를 보면


정미(丁未) 납월(臘月)에 필서(筆書)하다 본 책 다 떨어져 의지 없는 것을 두고 어머님 다시 베끼지 못하여 하 격정하시니 쓰려하니 가뜩 필재(筆才)없는 것이 종이 모자랄까 짝 잡아서 잘게 쓰니 더욱 괴이하고 이제는 아주 병세지인(兵勢之人)이 되어 이런 책장이나 쓰려하면 체증(滯症)고약하여 성실히 쓰지 못하여 가까스로 하루 넉장씩 닷장씩 이렇게 쓰니 겨우겨우 필서(畢書)하다. 필경 종이 남는 것을 잘게 형용 없이 그렇듯 한 것이 절 통(切痛)하나 이제는 어머님 뜻을 받자왔으니 시원하오며 평창(平昌) 형님 추필(醜筆) 이라 책(簀)지 마르시압 언제다시 두루 상봉 하올꼬 쉽지 않을 듯 애닯삽, 이라고 적어 두었고 뒤이어 나 류부인(柳夫人)이 3자(子) 이후 28세에 여아(女兒)를 얻으니 백벽의 티끗을 씻었으며 교옥(曒玉)에 비기리오, 면목(面目)에 정채(精彩) 징징(澄澄)하여 일천 가지 기이한 조화가 일신에 모여 그 면복의 자연한 광휘(光輝) 휘휘암암(暉暉暗暗)하여 분벽도요(紛壁桃夭)하니 회야(晦夜)에 능히 촉(燭)을 비(備)치 아니할 듯 자식자랑 과할 듯하나 멀리 성녀지풍(聖女之風) 늠름하니 이와 같은 군자도(君子道)가 우순(虞舜)이 이 비(二妣)를 배(配)하시며 문왕(文王)이 태사(太姒)를 두시니 어찌 군자 있고 숙녀 없으리 오.


라고, 류씨부인(柳氏夫人)의 마지막 맺음 글을 적었다. 앞의 류씨부인의 딸 봉대 강씨의 글을 살펴보면 글을 다 베낀 시기가 정미년(헌종13년 1847)12월이고 평소에 자기의 어머니가 떨어져 없어질 지경에 있는 이 책을 베끼지 못하여 한없이 애태우고 있어 딸로써 이 한을 들어 드리기 위하여 자기도 이미 중년이후 병든 몸 이였지만 하루에 너 댓 장씩 겨우 베끼게 되었다는 것과 베껴 쓴 글씨가 좋지 못하니 뒷날에 혹 어떤 사람들이 자기의 외6촌의 댁인 평창 형님이 쓴 것이라고 책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뒤이어 자기 어머니가 강씨 댁으로 시집와서 아들 셋을 둔 이후 28세에 딸 하나를 얻으니 교옥(皦玉)과 같이 귀하고 자랑 같지만 활발하고 기상이 넘치며 징징(澄澄) 하여 숙녀라고 할 만하였다고 한다.

위의 앞 뒤 두 기문을 종합하여 살펴본바 표제는 헌종11년(1845)에 평창군수로 도임한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대감의 종조부(從祖父)인 류광덕(柳 光德)의 따님이니 낙파대감에게는 종고모(從故母) 되는 분이 상주 봉대의 강우흠(姜遇欽)에게 출가한 강씨부인(姜氏夫人)모녀가 헌종13년(1847)에 베끼기 시작하여 헌종15년(1847)에 완성하여 어느 때인가 친정집 큰집이었던 낙파 대감 집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책은 수암선생 종택(宗宅)인 류시완(柳時浣)씨 댁에서 계속 보존 하다가 1973년도에 비로소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임진녹」은 당시의 효성여대 홍재휴(洪在烋)교수가 해역(解譯)하여 일간지 신문 동아 중앙일보에 “서애 류성용의 아들 류진의 난중체험기 임진녹”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 되었고 1982년도에는 효성여대에서 간행되는 학술지 <국문학연구>7편에 원전(原典)과 함께 한글 초서체를 정자체로 알기 쉽게한 현대어역(現代語譯)전편을 게재 하였다. 그리고 1974년도에는 일본에서 간행되는 <アシア公論>(아시아공론)에 임진왜란을 줄거리로 하는 일어판 소설의 소재로 인용 되기도 하였다.

2000년도에는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자료총서 제18집으로 「임진녹」「임자록」「슈암션싱힝쟝」3편이 합편된<壬辰錄>(임진록) 한글본 원전(原典)을 영인하고 한문본「壬子日錄」(임자일록)과 「修巖先生行狀」(수암선생행장)을 붙여서 홍재휴교수가 해역한 <譯註, 壬辰錄>(역주 임진록)이라는 책자로 간행하여 완성하였다.


4. 「임진녹」의 주요내용

「임진녹」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셋째아들 수암(修巖)류진(柳袗)이 11살 때 왜병을 피하여 피난하였던 생생한 사실기록이다. 이 당시 아버지 서애는 현직 좌의정(左議政)이고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선조 임금을 모시고 북쪽 의주(義州)방향으로 피난가 남은 가족들이 그의 자형(姊兄)인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경기, 강원, 평안 3도의 산곡간(山谷間)으로 피난살이를 하면서 겪었던 간고(艱苦)의 일들을 29세가 되었을 때 작성한 것이다.

18년의 세월이 지났을때의 일을 기억하여 글로 적었다고는 하나 그 내용이 사실적(寫實的)으로 소상하고 적나라(赤裸裸)하여 사료(史料)로서 교훈이 될 만 하거니와 특별히 전통시대에 사대부(士大夫)정승집 가족들의 위난극복에 대한 실상을 알게 하는 것 또한 흥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마도 이와 같은 사실적(寫實的)내용은 필자 수암이 11살 때 였지만 대단히 명석한 수재(秀才)였을 뿐만 아니라 자형 이문영공의 가르침에 따라 당시에 일기체로 요약해둔 것을 18년이 지난때에 기억을 더듬어 사실적(事實的)기록으로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임진녹」의 주요대목을 여기에 옮겨본다.


가.임진왜란 발발과 피난 초기


임진년 4월에 내 동녘 새집 다락에서 글 읽고 있었더니 불의(不意)에 계집종이 나와 말 하되 「아까 무슨 일이 온지 대궐에서 급히 명패가지고 와서 대감마님을 모셔 갔나이다. 하므로 내 놀라 묻되 「무슨 일이겠는고」종이 대답하되 「어떠한 일인줄은 모르나 대감 마님이 너무 근심 하시는 낮 빛을 띠고 가셨습니다」하므로 나는 즉시 책을 덮고 들어와 작은 어머니께 묻잡기를 「아버님이 어찌하여 대궐에 가셨습니까」작은 어머니도 어떤 일인줄 모르시므로 형님께 사뢰어 보았으나 모두 모르시드니 내 형님 모시고 대문 밖에 나가니 마침 관아의 서리(胥吏)가 오므로 물어보니 그도 자세히 몰랐으나 대개 왜 (倭)의 기별(奇別)이라 하더라 그때에 아주버님이 할머니를 모시고 김청송댁에 계셨 으니 우리3형제가 뵈옵고 기별 자세히 들으려하여 올라가니 아주버님이 근심을 그지없이 하였다. 그때에 도적이 벌써 부산을 치고 부산첨사 가 죽고 동래를 함성(陷城)하 여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사절(死節)한 뒤였더라, 경성이 진동하여 인심을 거두어 들이지 못하니 3~4일내에 경성이 비듯이 되니 아무리 하여도 하릴없더니 스무 이랫날 상 주 순변사 이일(李鎰)의 패한 기별이 들어오므로 위로께옵서 일이 잘되지 못 할 줄 아시 옵고 사대부 가족들을 먼저 나가라 하시니 그때에 아버님이 상감께 여쭙되 「소신은 국사 를 맡자와 위로께옵서 가시는 데를 떠나지 아니하려 하거니와 집에 늙은 어미 있으므로 형의 벼슬을 떼어주신다면 어머니를 데리고 다니게 하겠나이다」하옵시니 그날 밤에 아버님이 대궐에서 나와 계시어 할머님께 울며 절하시고 하직(下直)하셨는데 할머님이 말 씀하시되 「정승(政丞)이 벌써 나라에 몸을 허하였거늘 어찌 나를 돌 보리오, 나는 염려 치 말고 주상을 모시옵고 국사(國事)를 힘써 하라」하시니 아버님이 두 번 절하시고 목이 메어 말씀을 못 하시더라, 나와 계시어 아주버님과 손잡고 이별하시니 일가 사람이 아니 우는 이 없었다. 닭이 운뒤에 대궐로 가시느라 본가(本家)로 오시니 아주버님이 따라와 계시므로 다시 손잡고 이별하실세 아버님이 아주버님께 사뢰되 「나는 죄 중하와 어머님 을 떠나오니 이런 불효가 어디 있아오리까, 형님은 효심 지극하시니 어머님을 아무려나 무사히 아니 모시리까. 형님을 믿삽고 가나이다」하시고 아무간 없이 우시고 삼형제와 누님을 내어 놓으시며 또 사뢰되 「어미 없는 자식들을 던지고 가오며 형님을 믿사오 니 아무려나 살려내 주소서」아주버님이 우시며 대답하시되「죽으며 살기를 함께 하려 하 노라」하시며 헤어지시니 아버님이 그리고서 대궐로 들어가 계시어 다시 못 나오시더라. ………… 중략 ………… 작은 어머니도 우리 동생들을 데리고 함께 나가니 그때에 맏 누님 은 이진사(李進士)댁으로서 시부모 모시고 같이 가시고 둘째 누님은 처녀로 나이 열일곱 이고 맏형님은 나이 15세요, 가운데 형님은 13세요, 나는 11세, 얼동생 셋에 맏이 겨우 아홉 살 먹었었다.

하루 묵어 그믐날 양주(楊州), 풍양(豊壤)으로 다 쓸어가니 마침 그날 바람과 비가 오니 길이 아득하여 가는 사람들이 길을 잃더라. 나는 4촌 형님과 말을 어울러 타고 두 형님은 딴 말 타고 계시더니 막 풍양에 가니 형님 간 데를 잃었으므로 아주버님이 「급히 사람을 시켜 추심하라」하시었다. 길가에 빈말이 있으므로 몰아보니 형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모 르겠고 서울서 나올 때 효손상자(孝孫箱子)에 어머님의 신주(神主)를 여러 형님이 메 고 계시더니 그 상자만 길마위에 얹혀 있으므로 아주버님이 보시고 이르시되

「불쌍 토다 본래 슬기로운 아이라 제가 비를 맞고 못 오게 되니 제 어머님 신주를 보고 얻어가게 여기 두고 어디로 가 없어 졌는고」하시고 사람들을 풀어 저물 무렵에야 가까스 로 데리고 오니라.


살펴 보건데 피난을 떠난 날은 임진왜란이 나고 상주(尙州)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장군이 4월 25일 상주 임난 북천 전쟁에서 패하였다는 기별을 들은 4월 27일 다음, 다음 날인 4월 29일 이었고 피난길에 동행한 가족은 수암의 할머니와 큰아버지 겸암 류운용 가족과 자형 이문영공, 수암의 3형제 그리고 수암의 작은 어머니와 얼동생 3인과 노비 몇 사람 등 20여명이

말 두 마리를 끌고 특별히 전쟁통 피난길이었지만 수암의 어머니의 신주를 모시고 행차한 사실 등을 소상하게 기록 하였다. 전통시대 한나라의 3인자 요인 반열에 있는 정승 가족들의 피난 행객이지만 가솔들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않고 많은 짐바리 없이 초초(草草)히 피난길에 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수암의 할머니이고 서애의 어머니 정경부인 김씨(金氏)는 70노경에도 아들 서애와 작별시에 나라일의 엄중함을 다시 깨우치는 용기를 주는 여중군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첫 피난지는 양주 땅 풍양으로 오늘의 의정부와 연접한 광능(光陵)의 들머리를 지나 포천 방향 어느 산골 이었다.


나.피난길의 고난(苦難)과 왜병의 만행

수암 가족이 피난길을 떠난 지 3~4일이 되어 왜(倭)가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어떤 사람이 왜병을 피하고자 하면 소나무 가지를 집 위에 걸치고 그 위에 잔디를 덮어 위장을 하라는 말을 하니 왜병에 대한 거동을 너무 몰랐던 당시의 민심이었다. 20여 대가족이 한데 모여 다니다가 전 가족이 한꺼번에 화를 입을까 하여 일시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합치기도 하면서 포천 땅을 지나 영평(永平)으로 몇일 동안 줄곧 걸어서 일행 모두가 다리가 부어 움직이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그 동안에 왜병들이 마을 곳곳에 분탕질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이리 저리 거처를 옮겨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을 반복하는 생활이 계속 되었으니 그 생생한 과정의 일부를 옮겨본다.


거기서 하루 묵어 희양땅으로 가도록 했더니 그때에 줄곧 비가 내려 물이 많으니 희양 으로 가는 땅의 길에 강물이 대창하여 배조차 없어 건널 길이 없고 왜 장수 청정(淸 正)의 군대가 점점 가까이 오므로 하다가 못하여 붉은 산으로 들어가니 그 산 빛이 붉 어 주토(朱土)같으므로 그리 크지도 않고 자못 깊숙하더라. 싸리를 베어 표막을 만들고 밤을 지내더니 하루는 아침밥을 갓 먹고 시냇가에 앉았더니 동녘 산에서 나이 열일곱쯤 된 아이가 거꾸러지며 기급하여 오래 말을 못하므로 모두 놀라 물으니 한참 뒤에 대답하 되 「나는 서울 양반의 종으로서 노년(老年)을 모시고 이 너머 민둥산에 숨었더니 왜가 불의에 달려들어 남편인 주인을 다 죽이고 홀로 여편네만 잡아가므로 내 혼자 뛰어 따라 나옵니다」하니 모두 놀라 짐을 다 버리고 즉시 헤어져 수풀에 각각 들어갔으나 그날은 도적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되 다만 산고개로 다니며 왜치는 소리가 되고 모질러 자세히 알아듣지를 못하겠더라, 어두워져서야 들어와서 풀막에 자고 새벽에 또 수풀에 들어가니 ………… 중략 ………… 산을 나오면서 큰길이 있으므로 그 길로 오리쯤 가니 길가에 집이 보여 곤하여 들어가 쉬고자 하여 한수에게 들어가 보라하니 뭇 왜놈들이 움불을 지르고 둘러 앉아 짓 쬐므로 한수가 놀라 급히나와 기별하였으나 빠져나갈 계교를 못하여 급히 몰아 지나가기를 칠 팔리 쯤 하니 건너 마을 불빛이 한창이고 도적의 지껄이는 소리 들리 므로 그리로 가지 못하여 동녘 적은 길로 들어가 겨우 십리쯤 가니 날이 새더라.


피난 행렬은 강원도 김화(金化)를 거쳐 금성(金城)으로 낭천(浪川)으로 피해 다녔다. 마침내 왜병과 맞닥뜨려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 광경을 적어본다.


그 때 형님의 손에 들었던 활을 놓았기 망정이지 그 활을 곧 왜에게 보였으면 영락없이 죽을 뻔하였다. 명주 전대에 문서를 넣어 띠고 있었는데 왜놈이 손으로 만져보고 큰칼로 전대를 베어 가므로 헤어졌으나 찢기는 줄 도 모르는 듯하더라. 그 때 나는 물가 버들포 기 밑에 엎드려서 베는 모양을 지켜보며 생각하되 나 같은 어린 아이가 혼자로는 갈 길이 어려우니 도둑이 형님네를 살려주고 가면 나도 그를 의지하여 살 것이고 죽이고 가면 나 마저 죽을 것이로다 여겨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보니 마음이 황란하여 두려운 줄도 서러운 줄도 알지 못하여 거기 엎드려 잠이 들었으므로 왜가 가는 줄도 몰랐었다. ………… 중략 ………… 한 왜 놈이 우리가 앉아있는 곁으로 지나가며 쫑긋이 서서 오줌을 누니 양쪽 귀 에 튀어 오더라. 다른 왜가 무어라 지껄이니까 오줌 누던 왜가 이르되 「거기는 큰길이니 의심없으리라」하니 말이 우리나라 말이니 우리나라 사람이 왜에게 들어붙어 길이나 가리 키느라 함께 다니는가 싶더라, 그들이 지나가므로 물가의 뺑대 쑥밭을 헤치고 셋이 나가 앉았더니 또 왜놈이 물건너 편에서 고함을 지르고 조총을 놓으니 조총소리를 처음으로 들 으니 땅이 다 움직이고 하늘이 다 밝아지는 듯 하더라. 놀라 일어서서 줄곧 달리다가 마 음을 정하여 다시 그곳에 와보니 형님은 어느 곳으로 가셨는지 모르겠더라. ………… 중략 ………… 우리가 앉은 위에는 배병이 풀이 하늘에 닿은 듯 하고 비가 저물도록 내리니 도 둑의 다니는 소리만 먼데서 드문드문 들리었다. 너무 깊숙하니 왜가 들어올까 하는 근심은 없었지만 다만 날이 춥고 저물도록 굶어서 물속에 앉았으니 정신이 아득하여 낮 곁두리로 나는 빈 입을 씹고 기절하여 죽었으므로 형님 가슴을 내 가슴에 대이게 하여 품고 판관 실 내는 발을 주무르니 해가 져갈 무렵에야 겨우 인사를 차리게 되어 어두워질 무렵에야 일 어나 셋이 막대집고 아무 곳으로나 기망(期望)을 못하여 푸거리로 갔더니 이 삼리쯤 가니 큰 길이 있으므로 그 길을 좇아 백여 보쯤 가다가 또 왜의 고함소리가 나므로 길가의 덩굴 속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여 풀이 버석 이니 그 사람이 돌을 던지며, 「짐승이냐 사람 이냐」하므로 그때서야 판관 실내가 먼저 내달아 손 비비며 이르되「말씀 듣자 오니 우리 나라 사람이신가 싶으오니 우리를 살리소서, 내 입었던 명주치마를 벗어 드리 오리다」 하였으나 대답하지 아니하고 빨리 가므로 ………… 하략 …………


왜병을 처음만나 차고 가던 문서를 빼앗기고 왜병 중에는 우리나라 백성이 왜에게 빌붙어 척후병으로 안내를 맡고 있다는 사실과 조총소리를 처음 듣고 놀라는 사실 그리고 산야(山野) 숲에서 굶주리고 고생하는 실상은 참으로 목불인견 이었음을 알게 한다. 행열 중에 사대부 판관 벼슬을 지내는 아내 되는 사람이 입고 있던 명주치마를 벗어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의지는 부녀자로서 치욕을 무릅쓴 다급한 생존전략 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배고픔과 고난은 계속되었으니 그 사실을 계속 하여 옮겨 본다.


그날 왜는 북도(北道)를 들어 간다하고 큰길이 바쁘게 오락가락 저물도록 다니니 기(旗) 는 마치 영장재(永葬齋) 만장(挽章)같고 옷은 거의 검은 빛이더라 판관실내와 형님은 저 물도록 곤하여 다리를 거두지 못하여 인사를 못 차려 누웠으므로 내 혼자 앉아서 온 갖가 지 생각을 하니 귀에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이틀이나 물 외에 들어간 것 이 없으되 각별히 배고픈 줄은 몰랐으나 얼굴에 열이 오르니 불을 담아 붓는 듯 하고 깊 은 머리 아픈 줄을 알겠더라. 늘 듣기를 “사흘 굶으면 아니 죽을 이가 없다.” 하더니 내일 이면 죽겠다 싶어 어떻게 하던지 내일 못 미쳐 먹을 일을 생각하니 어떻게 할 줄 몰라 앞 들을 덩굴 사이로 내다보니 밭에 보리인지 밀인지 느르렀으므로 내 형님에게 사뢰되 「저 밭에 누런 것이 곡식인가 싶습니다. 어려서 시골 있을 때 아이들이 겉보리를 비벼 먹었으 므로 그것을 본 일이 있으니 행여 저 밭 가운데 밀이 있으면 해도 거의 없고 왜도 다니는 모습이 그쳤으므로 형님 전대를 끌러 주시면 내가 훑어 오겠나이다.」형님 이르되 「가지 마라」하여 내 멈추었다. ………… 중략 ………… 「저산을 보니 그 때 붉은 산으로 갈 때 조반(朝飯)하던 주인집 뒷산 같아 보이니 그때 그 주인에게 참 빛 따위 가지가지 것을 주니 퍼그나 관곡하게 대접하던 것이니 날이 어둡거든 이 산을 넘어 그 주인을 찾아가 빌 면 밥술이나 얻어먹을 길이 있을까 하나이다」하고 형님께 여쭈니「이제는 인심이 강한 (剛悍) 한데 이제 이리된 사람이기에 언제 한번 보았다고 대접하며 또 도적이 저리 가 까이 있으니 그 주인인들 제집에 있겠느냐 옛글을 보니 솔잎을 먹으면 곡식 없어도 살더 라 하니 어디 솔잎인들 얻겠는가」하시어 두루 살펴보니 없더라 ………… 중략 ………… 길도 없는 산골짜기로 엎어지며 가다가 무릎을 붙안고 앉았다가 가기를 거의 닭이 울게 될 무렵에 동쪽 소로(小路)같은 것이 있으므로 그길로 1리쯤도 못가서 길가에 어둑한 것이 집같이 보이므로 나아가니 피란한 사람의 풀막이었다. ………… 중략 ………… 고개를 넘어가니 과연 풀 막둘이 있고 남녀 노약병자가 아울러 거의 스무나문이나 있더라. 우리 가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놀라 물으되 「너희들은 어떤 사람인가」하므로 판관실내는 손 을 비비며 이르되 「죽게 된 거지를 살려 주소서 굶은지 사흘이니 밥 한술 얻어 손자를 살려 내고자 하나이다」하니 한 놈이 이르되「아이들아 저 사람들을 후려 쫓아라 저런 사 람들이 도적질을 하느니라」하므로 형님이 이르되「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는 서 울 양반으로서 피란 중 왜를 만나 이렇듯 왔으니 불쌍하지도 아니하여 그런 말을 하십니 까」그 놈이 이르되 「양반이라 하니 더욱 좋도다 왜가 고을 안에 있어서 양반을 잡아주 면 값이 작을까! 빨리 나가거라 더디 나가면 고을로 보내리라」하니 눈물이 비오듯 너무 도 서러워 하니 곁에 한사람이 패랭이에 글을 쓴 것을 붙이고 서서 불쌍히 여겨 이르되 「가엽도다! 저 양반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귀한 몸으로 이런 시절을 만나 저렇게 되 었으니 참으로 불쌍치도 아니한가」하고 인하여 자기 아내인지 젊은 계집을 불러서 큰 바 가지에 밥을 담아 오라하며 손수 가져다가 형님에게 드리며 이르되 「아까 이르시는 말씀 을 듣자오니 내가 목이 메니 늙은 어버이의 함부로 하는 말을 허물 마시오」하며 주는 밥 을 받아보니 서홉 쯤 담길 바가지에 반 남짓 하더라, 형님이 받아 기신 댁에게 드리니 울 면서 드시지 않고 우리 둘에게 먹으라 하시므로 둘이 그 밥을 막대로 끌어 반 남짓 먹고는 형님이 그릇을 들고 젊은 사람에게 청하기를 「노친이 곡기를 끊으신지 오래니 길에 가다 가 어디에 엎어지실 줄 모르니 덕분에 이 바가지를 주실 것 같으면 남은 밥을 가져다가 물이나 말아 드릴까 합니다」하니 그 사람이 이르되 「본시 적은 밥을 그 걸사 남겼으니 무슨 근기(根氣)가 있어 살겠는가, 마저 다 자시면 여기 밥이 조금 있으니 다시 담아 받 자오마」하므로 기신 댁은 손을 무수히 비비며 「덕분에 아무것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입 고 있는 명주치마가 물은 젖었거니와 벗어 드리고자 하나 몸 가리 울 것이 없아오니 칼을 주시면 베어 드리리다」하고 치마를 끄르니 늙은 놈이 나무 밑에 앉아서 말하되 밥주던 사람이 이르되「그것을 우린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도루 메어 가소서」하여 다시 사례하 고 나올 무렵에 …………


정승댁 피란길은 참으로 참혹하고 어려운 형편이었음을 엿 볼 수 있다. 그 후에 다른 어떤 서울에서 온 양반 총각을 만나 동행을 하면서 길가에 죽은 백성들을 숱하게 보았고, 끝내는 같이 가던 가족들이 흩어지고 수암의 형님 한분과 기신댁 이라는 친척부인 세 사람 뿐이었다. 각고 끝에 가족 중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형님과 함께 흩어진 가족을 찾고자 늘부러진 주검들 중에 혹여 있을까 수풀과 개울을 뒤져 보기도 하였다. 얻어먹는 걸식은 계속 할 수 밖에 없고 그런 가운데도 가끔씩 왜병을 만나면 홀연히 숲으로 쥐 죽은 듯이 숨은 일들이 반복되었으며 때로는 왜가 온다는 거짓말로 피난무리들이 혼비백산이 되는 경우도 여러번 이었다. 이윽고 강원도 춘천 땅에 이르러 왜병의 만행을 목격하였는데 그 광경은 너무도 끔찍하였으니 그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본다.


저물 게쯤 되어 한산에 들어가니 춘천 땅이라 하되 마을 이름을 잊었으니 그 마을 사람이 마침내 화살을 가지고 지나가는 왜를 쏘려고 하였더니 그 왜가 원병을 청하여 온 마을을 둘러싸고 남녀노소 없이 죽이니 200여명이나 사는 마을에 다만 사나이 하나와 간난이 둘 이 살아났다. 시체가 삼 쌓인듯하여 우물이며 개울이 핏빛이 되었으니 물을 가리어 먹지 못하겠더라.


라고 하였다. 그 사이에 우연하게 아버지 서애의 옛적 선비시절에 친구였던 김찬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선조임금을 호가(扈駕)하고 평양에 있던 서애의 안부를 듣기도 하였고 아버지와 알고 지내던 박춘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후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포천땅 현등사라는 절에 수암의 할머니 정경부인을 모셨던(정경부인은 이절에서 안동본가로 떠났음) 그 절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이미 9월이라 날이 춥고 비가 올 때는 지붕이 낡아서 비가 세는데도 한 달간을 피하면서 들판에 거두지 못한 조를 손으로 비벼 연명하였다. 때로는 우리나라 사람이 의병을 칭하면서 곳곳에 모여서 왜병은 못 잡고 피난민을 괴롭히고 그 행태에 항의하면 그 자리에서 죽이는 광경을 보기도 하였다.

다. 피난 말기 양식이 떨어져 수암 누이의 반물치마를 팔아서 나락(벼) 열서말(13)을 받 아 연명하기도하였고 가지고 다니던 밀패(密貝) 갓끈을 광주목사(廣州牧 使)에게 보내어 겨우 무명 열일곱 필을 받았다고 하니 전쟁 중 정승집 가 족의 피난 길 이었지만 약간의 귀중품이 남아 생활에 보탬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피란 행열이 광주를 지나 남양으로 가던 중 금양땅에서 아버 지 서애가 보낸 사람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금양(衿陽)땅에는 왜의 큰 진(陣)이 있으니 부디 그 진을 건너야 남양(南陽)을 가게 될 것이므로 금양 못 미쳐 이십리 쯤에서 머물러 음식 하여 먹고 밤이 들거든 가려고 하였더 니 벌써 어두워 졌는지라 뒤에서 사람들이 따라 오며 이르되 「이진사의 행차가 어디 가 시나이까? 평안도에서 정승 대감이 보내시므로 왔나이다.」그때에 아버님이 말 두 마리에 행장(行裝)을 노사실로 만들어「말과 사람을 딸려 자제(子弟)를 찾으러가니 열로(裂 路)에 금지하지 말라」하여 네 사람을 각각 주어 보내주셨으므로 점점 추심(推尋)하여 가평(加平)에 와 물으니 양근(楊根)으로 갔다 하므로 양근에 오니 또 남양으로 지향하여 밤으로 왜진을 건너려고 갔다 하므로 사람들과 말 둘을 두고 종 하나와 군사 하나가 따라 왔다. 형님이 나를 딸려 보내지 아니 하려고 하여 이르되 「아무리 하기로니 그토록 사생 (死生)을 함께 하다가 오늘에사 사람들에게만 내어 보내리까 결연히 보내지 못 하리로 다」하셨으므로 나는 울며 굳이 가려고 하였으나 그래도 보내려 하지 아니 하므로 가만히 일어나 나왔더니 종놈이 나를 업고 가니 형님이 노하여 기어이 뒤 쫓으라 하여 천억이를 보내니 천억이 따라오며 이르되「진사님이 기별이나 하여 보내려 하시는데 어찌 도련님이 그리 망령스럽게 하시는가」하였다. ………… 중략 ………… 그날 밤에 평양에 도적 장수 가 나왔다는 기별이 오므로 원(員)이 밤새도록 지응(支應) 거동을 차리어 아니 새어서 가더라 삼등(三登)고을에 가니 원은 평양에 가고 비었는데 하인에게 물으니 아버님이 현장(賢將)과 함께 평양에 계신다 하므로 평양으로 가며 먼저 사람을 보내니 아버님이 들 으시고 군관(軍官)을 보내어 「평양이 하도 요란하니 아직 중로(中路)에 머무르고 들어오 지 말라」하시므로 평양을 이 십리쯤 앞두고 못가니 막 바로 날이 새자 어떤 원(員)이 행 차(行次)와서 보압 고자 하므로 나가니 그는 은산원(殷山員)이라 전전부터 뵈오러 다니더 니 오늘 새벽 이제독(李提督)이 한명의 왜를 따라 서울로 행하셨으므로 어젯밤에 가뵈 오니 대감이 이르시되 「내어린 자식을 잃었다가 겨우 찾아 왔으니 만나지도 못하고서 이 렇게 떠나며 데려가지도 못하니 저 자식을 어디 머물게 하리오」하시므로 「내 데려다가 힘써 두었다가 보내겠나이다」하고 사뢰니 대감이 기뻐 하셨다 하며 「그렇게 하셨으니 자네는 나와 함께 하세」하므로 그 말을 듣고 엎드려서 울었더니 아버님이 또 군관을 보 내어 기별하시되 「너를 어떻게든 보고 가려 하였지만 국사가 급하여 이렇듯 빨리 가니 은산원이 내 젊었을때 벗이라 너를 데려가고 싶다 하니 서러워 말고 갔다가 서울이 편하 거든 사람 보낼 것이니 오너라」 하시고 그 군관에게 「데려다가 두고 오라」하셨으므로 마지못하여 은산에 와 영유(永柔)로 가서 안주(安州) 누을기라 하는 마을의 아전(衙前) 이(李) 중백의 집에 오래 머물렀다.

그 때는 시절이 잠깐 안정 되가고 그 땅은 고을들이 퍽 안전하였다. 원이 지나가는 때는 아는 원이나 모르는 원이나 기별 들으면 청하여 보고 혹 후회하며 옷을 한 가지씩 하여 주시더라. 안주원은 내가 있는데서 한줌게쯤 멀었지만 줄곧 사나이 종에게 먹을 양찬 (糧饌)을 이어 보내니 아이 시절이라 미안 한줄 모르고 보내는 족족 받았더니 아버님이 서울에서 들으시고 「일절 이 고을 것을 먹지 말고 가산(嘉山)땅에 선세(先世)전토 (田土)가 있고 외가 종도 있으니 거기 가서 소출(所出)을 먹고 생심(生心)도 각관(各官) 의 폐를 지지 말라」하여 계시므로 즉시 가산으로 가니 가산원(嘉山員)심(沈) 신경이 전 (前) 안동 판관을 지냈으니 아버님이 아시 옵더니 나를 청하여 보고 쌀섬이나 많이 주시 므로 나는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고 쌀은 안 받겠다고 하니 그 원이 기특히 여겨 「대감이 청렴 하시니 어린 아기 네도 다 저러하다」하더라


위의 기록으로 보아 선조 임금을 모시고 의주 땅에서 왕가 조정의 피난살이는 다시 평양을 거쳐 서울에 수복 하였고 중국에서 지원 온 이여송 대장이 한 사람 왜병의 인도에 따라 왜장수를 만나 협상을 하고자 하는 길에 나섰 는 듯 하는 짐작도 하게 된다. 전쟁의 시국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정승대감집 가족에 대한 지방 관료들의 예우도 있었음을 엿볼 수 있으나 일부 관료출신은 전쟁의 어려운 시기였지만 귀한 쌀을 많이 보관하여 수암 가족에게 몇 섬을 주려고 하는 정도 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한 반면 아버지 평소 신념에 따라 굶주림 속에서도 주는 쌀을 받지 않은 서애가문의 청렴성을 엿 볼 수 있다. 가산 땅에 선세(先世) 전토(田土)가 있다고 한 것은 서애 윗대에서 이곳에 벼슬살이를 하였을 때 마련하였던 밭이 었는 듯 하여 전통시대 영남의 사대부집에서 경기도 땅 먼 거리에 까지 토지를 소유하고 관리 하였다는 것 또한 특기할 일이다.

라. 가족해후(解逅)와 글을 남기는 심경


거기에 있다가 시월(10월)에 위로께옵서 서울에 들어오시고 아버님도 경상도로 내려와 할머님을 뵈옵고 올라가 계시어 오라하시고 사람을 보냈으므로 윤 동짓달에 들어오니 이 듬해 3월에 서모(庶母)가 누님 형님 얼동생들을 데리고 한데 모우니 그 시절의 부모야 동생이야 떠나 그립던 마음과 만나 반갑던 정을 어찌 다 이르리오. 이제는 부모 없으시고 형님 동기(同氣)들 다 죽고 나 혼자 살아서 병이 들어 어느때 죽을 줄도 모르니 내가 곧 이르지 아니하면 비록 자식이라도 그리 신고(辛苦)하여 죽다가 살아난 줄 모를 것이라 일 가 사람이라도 이야기 삼아 보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 하노라.

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였다.


5.「임진녹」 이 주는 교훈

임진녹은 수암(水癌) 류진(柳袗)이 11세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족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면서 형용하기 어려운 피난길의 고난(苦難)을 겪은 후 18년이 지나고 수암이 29세 때에 일록(日錄)으로 남긴 것이다. 처음 기록은 한문체(漢文体) 로 짐작하고 그 뒤에 누군가가 한글체로 번역 하였는데 번역한 인물이 수암의 끝에 사위였던 이재관으로 추정한다. 한글체 임진녹은 오랜 동안 지내면서 너무 낡아서 수암의 종고모되는 강우흠(姜遇欽)의 류씨부인과 그의 딸이 다시 베껴서 친정집에 주어서 수암의 종가 류시완(柳時浣)댁에 계속 보관 하다가 영남대학교 홍재휴교수에 의하여 학술적 연구 과정을 거쳐 언론계 등에 발표하고 2000년도에는 영남 대학교 민족문화 연구소에서 학술총서 책자로 간행 되었다. 이 귀중한 역사서가 애틋한 관심을 가진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세상에 밝혀졌다는데 대하여 찬사와 함께 고마움을 드리면서 몇 가지 소회(所懷)를 적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하고저 한다.


첫째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하였다는 점이다. 11세 되던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에 겪었던 간고(艱苦)의 실상을 뒷날에 다시 글로 남겨 후대(後代)에 전해졌다는 것은 필자의 기록에 대한 의지를 높이 살 뿐만 아니라 원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그 번역본을 다시 베껴 오랜 세월동안 보관 하였다는 것은 어려웠던 생활 기록(記錄)을 해두어 뒤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삼게 한다는 사명감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시대 최고 관직이었던 증승 직위 가족들의 피난살이 였지만 다른 평민들과 다를 바 없는 인고(忍苦)의 생활상(生活相)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피난살이 중에 지위를 들어내는 특권의식으로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가장(家長)인 서애(西厓)의 청렴성과 평상심(平常心)의 가풍으로 짐작하는 것이다. 그 가풍은 수암으로 이어져 수암이 중동면 우천 마을에 정착한 이 후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 말기에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는 좌의정에 오를 만큼 영남의 명유잠영(名儒簪纓)의 소박한 자취뿐 그 이외에 화려함을 물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라 하겠다.


셋째 한글본「임진녹」이 낡아 헤어져서 다시 베껴 보전(保全)한 수암의 종고모인 류씨부인(柳氏夫人)의 친정집에 대한 각별하고 애틋한 정(情)과 사명감(使命感)그리고 그의 딸이 노래(老來)에도 오직 「임진녹」을 베껴 보전 하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과 애쓰는 바를 보고 어머니를 도와 힘을 드렸다는 모녀간의 또 하나 애틋한 정(情)과 효심은 오늘 이 시대 사람에게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넷째 이와 같은 귀중한 사료가 우리상주에 보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옛 역사서는 여러 유형이 있다 하겠으나「임진녹」은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그 기록의 보전 등 여러 가지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더욱 소중하기 때문이다.


6. 맺음글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日常)은 갖가지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지낸다. 그 일상의 일중에 특별하고 영원히 기억하는 일을 누구든지 지나친다. 그 지나치는 일들로 하여 반성하고 회개(悔改)하며 방비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심성이다. 그런데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을 글로 남겨 후세에 남겨 교훈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보통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암 류진 선생이야 말로 오로지 후세를 위하여 통찰하는 선각자로서<임진녹>이라는 옥고를 남긴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 이 시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귀중한 상주 사료(史料)라고 하겠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고는 필자의 깊은 연구에 따른 성과물이라기보다 홍재휴교수의 「임진녹」해제문을 인용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상주 시민들 에게 소개하는 정도의 글에 지나지 않으므로 부족하기 이를데 없다. 오로지 독자 재현의 질정을 바라면서 뒷사람의 깊은 연구를 기대하는 바이다.

<참고문헌>

1. <譯註 (역주), 壬辰錄(임진록)> : 2000년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간행 홍재혹 역주

2. <수암선생문집> “연보” 1980년 류시완 발행 신흥 인쇄소

3. 金昊種(김호종) 저 <西厓柳成龍硏究>(서애류성용연구) 1994 도서출판 새누리

4. 權泰乙(권태을)저 <尙州의漢文學>(상주의 한문학)2001년 상주 문화원간

5. <상주시사> 인물편 2010년 상주시 간

6. <尙州學講座 금요사랑방Ⅰ> “제15강 강사 금중현 구당조목수의 상산지 초책고” p 403~404

7. 인터넷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