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상주문화원 금요사랑방 제77강의

빛마당 2015. 9. 29. 18:30

2015. 9. 11

상주의 지리사록 (地理史錄)

- 상산지 창석본을 중심으로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목 차

1. 들어가며

2. 조선시대 상주관련 지리사록 개요

3. 상산지 창석본의 주요내용

4. 상산지 창석본의 保全과 增補사실

5. 글을 맺으며

상주문화원 부원장 금 중 현

1. 들어가며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역사 속에서 역사를 창조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 가고 있다. 이에 따른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가 통용되는 시대부터 기록으로 전하게 되었고 한 지역의 지역사(地域史)를 근원으로 하여 그 나라의 국사(國史)가 되고 세계의 세계사(世界史)로 발전하여 왔다. 지역사는 그 지역의 자연과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겪어온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기초적 지리사록(地理史錄)으로서 향토사(鄕土史)에 가장 중요한 문헌(文獻)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서 전해 내려오는 지리사록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바람직한 역사를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鼓創新)의 인성(人性)을 계발(啓發)하는 디딤돌 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상주(尙州)는 예부터 웅주고도(雄州古都)로서 영남의 문화를 선도한 고장으로 지역과 관련한 여러 가지 향토 지리사록이 남아있다. 대게 상주의 향토 지리사록을 상산지<商山誌>라고 이름 하여 조선 광해군 때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수차례 편찬하여 왔고 현대 1989년에 <상주지(尙州誌)>를 간행한 이후 2010년에는 <상주시사(尙州市史)>를 간행하므로 하여 종합 상주역사 지리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상산지> 중에서는 1617년(광해9)에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찬술한 <상산지> 창석본이 상주 지역사록 으로는 효시(嚆矢)라고 한다. 따라서 이 책본이야 말로 상주 향토사록의 기본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먼저 이 책 본과 관련한 상주 지리사록 전반에 대하여 살펴보고 창석본 전반의 내용을 살펴 오늘의 상주인 으로 하여금 향토의 역사에 대한 소양을 쌓음과 아울러 상주정신 함양에 보탬이 되고자한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상주와 관련하여 간행된 향토 지리사록의 책본별 개요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상주지리사록 책본별 개요

책본별

간행년도

년차

간행주체

편저자

형 식

지역범위

상산지창석본

1617광해9

.

개인,

이 준

순한문 필사본

상주목

상산지청대본

1749영조25

132

권상일

상산지구당본

1786정조10

37

조목수

상산지임진본

(상주목읍지)

1832순조32

46

조술립

채주욱

상주읍지

1871고종8

39

관찬

미 상

상주목읍지

1895고종32

24

책본별

간행년도

년차

간행주체

편저자

형 식

지역범위

상산읍지

1899고종36

4

순한문 인쇄본

상주군

상산지무진본

1928일제시

23

정동철 외

상주군

함창포함

상주지

1989

61

류시완 외

국한문 인쇄본

상주시

상주군

상주시사

2010

21

상주문화원

상주시

표에서 보는바 창석(蒼石), 청대(淸臺), 구당(舊堂)본이라고 하는 것은 예부터 편저자의 호(號)를 책본의 이름으로 통용 하였고 이후에는 간행년도 등 편의상 붙여진 책본의 이름이다. 창석본 이후 어느해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창석의 손자 신와(新窩) 이재관(李在寬) 공이 속록을 내었다고 하고 이후 숙종년간(1690숙종6)에 향내 유지들이 도남서원에 모여 편찬하려 하였으나 유고가 있어 중단되고 영조년간에 이 협(李 埉) 목사가 도임하여 청대 권상일(權相一)로 하여금 편찬한 것이 청대본이다. 구당본은 간행 하였다는 기록만 전할뿐 완성된 책본이 발견되지 않다가 2013년도에 구당의 주손(冑孫)가에 의하여 그 초책(草冊)이 처음 발견되어 필자가 상주문화원에서 간행하는 <尙州文化> 제23호(2013)에 발표 하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순조 조(1832년순조32)에 이르러 조정에서 각주읍(各州邑)의 읍지를 증보하여 어람(御覽)토록 하라는 명에 의하여 상주향교로 하여금 간행한 것이 임진본 <상주목읍지>이다.

1871년 이후 조선조 고종년간에 간행된 세 차례의 읍지에 이어서 1928년도 일제강점기에 홍의식(洪義植) 군수 때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주와 함창을 통합하여 한 책본으로 간행 한 것이 <상산지> 무진본 이다. 한말 고종 년간 3차례의 읍지는 책머리에 서문과 말미에 발문이 없어 정확한 간행년도를 알 수 없어서 책본별 내용 중에 환적(宦蹟)조목 인물목에 상주목사 재임년도를 간행년도로 필자가 추정한 것이다.

년차는 책본간 간행년차 인데 청대본은 창석본이 간행된 후 132년으로 년차가 가장오래 이고 상산읍지와 상주목 읍지는 4년차로 가장 짧다.

간행주체는 한 두 사람 개인 또는 관청으로 구분한 것으로 대게 개인일 경우를 사찬(私纂)이라 하고 관청이 간행주체일 경우는 관찬(官纂)이라고한다. 형식은 현대 1989년 이전 까지는 모두 순한문 이고 지역범위의 상주목(尙州牧) 관할은 1914년 함창군이 상주군에 편입되기 이전의 구역으로 현대의 의성군 단밀면 일원과 문경시 영순면. 산양면. 산북면. 동로면 일부가 상주목 관할이었다. 대게 상산지 무진본 이전까지 간행된 상주 지리사록을 총칭하여 <상산지(商山誌)>라고 하는데 최초의 상산지 창석본을 기본으로 하여 간행시대에 따라 첨가 하거나 삭제한 내용으로 이어 왔다. 따라서 이 책본 들은 간행 책본마다 그 시대의 실상에 따라 변화과정을 수록 한 상주사(尙州史)의 통설(統說)로서 모두 다 중요하다 하겠다.


2. 조선시대 상주관련 지리사록(地理史錄)개요

조선시대 지리사록은 조선조 초기에 부터 각 고을의 지리사록이며 행정사례집으로서 읍지로 총칭하여 간행 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전국적인 관찬지지의 1차 자료가 되어 고을마다 읍지가 작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형되고 구체적이었다. 따라서 현존하는 <상산지> 창석본 이전에 이미 전국적 지역사의 기본이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상주와 관련하여 간행된 지리사록의 책본별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조선시대 상주관련 주요지리사록의 책본별 개요

책본별

간행

년도

년차

간행

주채

편저자

지역

범위

체제

상주관련주요 목록

경상도

지리지

1425

(세종7)

관찬

하연(河演)

금유(琴柔)

김빈(金鑌)

경상도

필사본

연혁, 속현, 부곡(部曲), 명산대천, 사방계(四方界), 호구, 토성(土姓), 공부(貢賦), 토산(土産), 제언(堤堰), 봉수(烽燧)

※본주와 7개속현별로 구분

신찬팔도

지리지

1432

(세종14)

7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전국

경상도지리지와 같은 지지를 전국적으로 합본함

세종실록

지리지

1454

(단종2)

22

변계량

(卞季良)

연혁, 속현, 부곡, 명산대천, 사방계, 호구, 토성, 인물, 기후, 풍속, 간전9墾田), 토산, 토공, 자기소, 읍성, 역, 봉수, 대제(大堤)

경상도속

지리지

1469

(예종1)

15

각읍

경상도

경상도지리지 속편으로 항목추가

수령명현(守領名賢), 제언추가, 역참과거리, 영현(嶺峴), 도진9渡津), 정도(程途), 약제, 도자기소, 읍성, 관방(關防), 유명누대(有名樓臺), 제영(題詠), 원우(院宇)

여지도서

1757

(영조33)

288

각읍

전국

상주목지도, 방리(坊里), 건치 연혁, 군명, 형승, 성지, 관직, 산천, 성씨, 풍속, 궁실 객관, 학교, 단묘, 공해(公廨), 제언, 창고, 물산, 교량, 역원, 누정, 사찰, 고적, 명환(名宦), 인물, 제영, 한전(旱田), 수전(水田), 진공(進貢), 조적(糶糴), 전세, 대동, 균세, 봉늠(俸廩), 군병(軍兵)

연려실

기술

1911

154

사찬

이긍익

(李肯翊)

전국

임진왜난사일부, 경상감영설치, 서원(書院), 사벌국역사

조선환여승람

1937

26

사찬

이병연

(李秉延)

전국

목활

자본

건치연혁, 속현, 군명, 산천, 군세, 토산, 기차역, 교량, 형승(形勝), 고적, 문묘(文廟), 단묘, 사찰, 학교, 수비(竪碑), 능, 총묘(冢墓), 누정(樓亭), 제영(題詠), 유현(儒賢), 학행(學行), 명환(名宦), 충효열, 문무, 사마(司馬)

교남지

1940

3

사찬

정원호

(鄭源浩)

영남

활자본

연혁, 군명, 관직, 성씨, 산천, 읍면동리, 호구, 토지, 부세, 토산, 관공서, 교원(校院), 사찰, 관안(官案), 인물, 도로, 교량, 제언, 시장, 역원, 봉수, 능묘, 고적, 누정, 비판(碑板), 책판(冊版)

<경상도지리지>는 조선시대 현존하는 지리지 중에 가장 오래된 책본 으로서 조선이 개국한 이후 20여년이 지난 대에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향토 지리사록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그 지역의 연혁을 비롯하여 토산품에 이르기 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수록하였음은 경이로운 일이다.

참고로 상주의 인구와 호수를 살펴보기로 한다.

○ <경상도지리지> 내용중 상주관내 인구 및 호수

지 역 별

호 수

인 구 (명)

비 고

2,392

12,164

5,718

6,446

본 주

1,845

6,397

3,312

3,265

중모현

109

822

150

672

청 리

54

629

307

322

단 밀

140

1,425

700

725

산 양

112

1,339

667

672

공 성

110

1,279

630

649

영 순

22

273

132

141

표에서 보는바 당시에 상주목 인구가 12,164명이고 호수가 2,392호 이므로 호당 평균인구는 5명 정도이다. 그러나 그 기준이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를 테면 노비의 인구도 포함 하였는지, 중모현의 경우 남자인구가 여자인구에 비하여 현저히 적은 것은 어떤 연유인지 의문이 많기는 하나, 일단 조사에 의한 통계인 만큼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경상도지리지>가 편찬되기 까지 조정에서는 이미 수년전부터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을 것이다.<경상도지리지>가 간행되고 7년이 지난 1432년에야 각 도별로 작성한 지지를 근거로 한 전국적 지리지인 , <신찬팔도지리지>를 간행하였으니 교통이 불편한 농경시대로서는 불가피 한 사정 이었을 것이다. 수록한 내용은 반드시 각 목 읍별로 조사 취합 하였을 것이고 일정한 조사기준과 체제가 있었음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당시의 기록이 상주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경상도지리지>로부터 <신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100여년에 이르는 동안의 책본별 수록 목록을 살펴보면 앞의 책본에 따라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 수록하면서 그 내용 또한 더 구체적이고 다양해 졌음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인물, 기후, 풍속, 간전(墾田), 자기소(磁器所), 읍성(邑成),역(驛), 누(樓),를 추가 하였고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역참과 거리, 영현(領縣), 도진(渡津), 정도(程道), 약제(藥劑), 원우(院宇) 그리고 유명한 문학작품이나 남겨두어야 할 기록물을 ‘題詠(제영)’ 이라는 조목으로 새로이 수록하였음은 지리사록으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적 가치 기준에 대한 중요성을 반영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책이 간행되기까지 편찬과정은 한 왕대에 완성하지 못하고 두 왕대 내지 세 왕대에 이르는 경우도 있으며, 이에 관여한 인사(人士)도 여러 사람 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지리지의 시초는 조선조 이전에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간략히 수록 되었으나, 주. 군. 현의 소속 관계와 변천과정을 약기(略記) 한 것에 불과하고 지리지다운 지지 편찬의 시도는 세종대에 와서 비로소 시작 되었다. 당시 전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는 세종 6년(1624)의 일이고, 그 대에 저술한 지지가 <경상도지리지> 라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세종 14년(1432) 왕명으로 윤 회(尹 淮), 신 장(申 檣) 등에 의하여 편찬하여 전국지지로서의 본격적 면모를 갖추어 세종실록에 수록하였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조선초기 국가 통치를 위한 전국적 지지로서 이후에 지리지 편찬의 모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조대에 와서도 집현전 학사 양성지(梁誠之)에게 지도까지 첨부하는 <팔도지지>를 편찬 하도록 명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예종대에 까지 양성지로 하여금 계속 추진하게 하였지만 역시 완성하지 못하고 성종대에 와서야 결말을 보게 되었다. 성종은 양성지가 편찬한 <팔도지지>를 기간으로 삼아 규모를 다시 크게 하여 노사신, 강희맹, 서거정, 성 임, 양성지 등을 총제로 임명하여 <동국여지승람>으로 책의 이름을 바꾸어 계속 찬수(撰修)하게 하여 성종12년 (1479)에 도합 50권의 책으로 완성 하였던 것이다.

이후 성종 16년(1483)에 다시 김종직 등으로 하여금 수정을 더 하게하여 그 이듬해에 2차로 수정을 거친 <동국여지승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이 2차 수정본은 정(精)에 정(精)을 더하여 5권이 늘어난 55권의 방대한 지리사록 이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성현(成俔), 임사홍(任士洪) 등에게 명하여 다시 수교(讎校)를 거쳐 동왕 5년(1499)에 완성하여 인출하였다. 다음 중종대에 와서도 전대로부터 진행 하여온 편찬 간행사업은 계속되어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 등에게 명하여 다시 새로운 것을 더하고 교오(校誤)를 그듭하여 동왕 25년(1530)에 끝을 맺으니 이 책본이 바로 <新 東國輿地勝覽(신 동국여지승람 )>이다. 이 책본의 권수는 55권 그대로 이나, 다만 증보한 곳에 ‘新增(신증)’ 두 글자를 삽입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 사회 경제적 변화가 큰 폭으로 진행되면서 지역 실정의 변화를 반영한 읍지(邑誌)들이 각 고을별로 속 속 간행되면서 이를 토대로 한 전국적인 지리지가 편찬되므로 하여 지방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져 하는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영조33년(1757)에는 <여지도서(與地圖書)>가 간행되었다. 이 책본은 조선 전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을 조선 후기에 변화한 시대적 실정에 맞도록 개정한 지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말기 내지는 근대에 이르러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한여승람>, 정원호(鄭源浩)의 <교남지> 등이 간행 되었는데 일개 개인 또는 사림들이 민족적 자존감과 사명감으로 상당한 비용을 들여가면서 발로 뛰어 지역의 유지들과 관청의 협조를 얻어 간행한 매우 소중한 역사서이다.


3. 상산지 창석본의 주요내용


가. 개설(槪說)


이 책본을 저술한 창석 이준(李埈)은 후지(後識, 편집후기)에 이르기를

상산은 영남중에 상유(上遊)이니 산수의 수려함과 인재가 많음이 옛적부터 있어 왔으나, 읍지가 없어 그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였다. 작년(1616년 광해8) 봄에 목사 강공(康公)이 서신으로 나에게 ‘이르기를 읍에 읍지가 있는 것은 나라에 국사가 있는 것과 같아서 전장과 문물의 증빙이 아름다움을 권장하고 악을 응징하는 관계를 이루어 정치와 체제를 보조함이 적지 않은데 읍지가 아직도 없으니 이 어찌 옛적에 사기를 등한히 하여 충의의 뜻을 외면하는 것과 다르랴. 그대가 사가가 되어 우리 읍지를 편찬하지 않으면 누가 이를 하겠는가.’ 라고, 하는 목사의 부탁하는 뜻이 이같이 간절하니 보고 들은 것을 수집하여 일읍의 구비하는 일을 사양 할 수 없었다. 회고하면 일국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문적이 다 회진되어 문자로서 근거 할 것이 없더니 마침 향우(鄕友) 구희급(丘希岌)이 일찍이 공관(公館)에 있는 기록을 등사하여 둔 것이 있어 병화(兵禍)의 백겁(百劫) 중에서도 이 낡은 유묵이 남아 있었으니 신물(神物)이 돌보아 준 것이라고 하겠다.

라고, 하여 상주 최초의 목읍지(牧邑誌)임을 밝혔다. 편찬하게 된 경위는 당시 상주목사 강복성(康復誠)의 권유에 따라 착수하게 되었고 그 근거는 때마침 자기의 친구였던 구희급(丘希岌)이라는 사람이 공관(公館)에서 등사한 것이 있어서 이에 그 기본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이 책본 편찬 이전에 이미 작성되었던 사료(史料)가 있어 왔음을 밝힌바 있다. 이어서

이미 조정에서 편찬한바 있는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과 잡지(雜誌)의 기록을 유취(類聚)하여 강목(綱目)을 정비하였고 편찬 도중에 강복성 목사 후임 정호선(丁好善) 상주목사로 부터 독촉이 있어 10개목을 정하고 2권으로 나누어 자문과 순방(巡訪)을 하여 가닥을 잡았다. 이에 연혁과 호구의 증감 그리고 치적의 우열과 풍습의 순리를 이 양권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슬프다 우리 상주가 조선에 들어와서 200여년을 지나면서 오늘에야 읍지를 편찬하게 되니 ...중 략... 만약 미진한 사항이 있으면 하루 빨리 보완하여 속간 해 주기 바란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비록 편찬사업은 자기가 주관 하였으나 처음에 강복성 목사의 청이 있었고 후임 정호선 목사의 독촉까지 받았다는 것과 관내를 순방하면서 지도자급으로 하여금 충분한 이해협조와 함께 실상을 파악 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한 농경시대에 관내를 두루 순방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이고 전통시대 가문간(家門間)에 원만한 의견을 모으기 또한 어려웠을 것이다. 편찬 과정에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 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관아(官衙) 행정력에 큰 힘을 입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창석본 책본의 형태는 간결한 필사본으로 번호를 붙인 목록에 뒤 이어 목록별로 차례차례 서술하였는데 그 주요 사항별 내용과 특기 할 만한 것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나. 수록내용 고찰


1) 목록(目錄)

---------- 商(상) 山(산) 誌(지) 目(목) 錄(록) -----------

1. 輿(여)地(지)(其(기)目(목)凡(범)11) : 沿革(연혁),屬(속)縣(현),疆域(강역),山川(산천),城(성)池(지),譯院(역원),橋梁(교량),姓氏(성씨),風俗(풍속),烽(봉)燧(수),津(진)渡(도) 2. 貢(공)賦(부)(其(기)目(목)凡(범)6) : 田(전)賦(부),土貢(토공),土産(토산),戶口(호구),軍兵(군병),徭役(요역)

3. 學校(학교)(其(기)目(목)凡(범)5) : 鄕校(향교),書院(서원),書堂(서당),學制(학제),學(학)田(전)

4. 秩(질)壇(단)(其(기)目(목)凡(범)2) : 壇(단)壝,廟(묘)制(제)

5. 官(관)制(제)(其(기)目(목)凡(범)4) : 牧使(목사),判官(판관),文(문)提(제)督(독),武(무)提(제)督(독)

6. 公(공)署(서)(其(기)目(목)凡(범)4) : 客(객)館(관),州(주)衙(아),附(부)留(유)鄕(향)所(소),醫(의)局(국)

7. 名(명)宦(환)

8. 人(인)物(물) (其(기)目(목)凡(범)5) : 文官(문관),武擧(무거),蔭(음)叙(서),恩(은)錫(석),孝烈(효열)

9. 古(고) 蹟(적) (其(기)目(목)凡(범)6) : 古都(고도),古(고)縣(현),山城(산성),部曲(부곡),亭(정)觀(관) 寺刹(사찰)

10. 文(문)翰(한) (其(기)目(목)凡(범)6) : 題詠(제영),記(기),序(서),碑文(비문),上樑(상량)文(문),雜著(잡저)

-----------------------------------------------


2) 목록별 수록 내용 고찰


가) 여지(輿地)


(1)연혁(沿革) : 사벌국(沙伐國)-상주(上州)-상낙군(上洛郡)-사벌주(沙伐州)-상주(尙州)-사벌주(沙伐州)-상주(尙州)-안동도독부(安東都督部)에 이어서 전국의 8목 중에 하나로 상주목(尙州牧)으로 고을의 명칭이 변경하였고, 조선시대에 상주목사가 경상우도 병마절제부사를 겸하였다는 등 지역의 변천사를 수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 9개주를 나눌 때 신라 본토 3개주 중에 1개주로서 큰고을 이었다는 것을 수록 하였다.


(2)속현(屬縣) : 화령. 중모. 산양. 단밀. 공성. 청리. 함창. 영순. 문경의 가은현과 예천의 다인현의 내력을 수록하였는데 문경 가은현은 고려 공양왕 때 문경에 감무를 두고 가은을 속현으로 하였으며 예천의 다인현은 고려 인종때 예천현으로 이관 되었다는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 진관(鎭管) : 상주목사가 관할하였던 군(軍) 지휘권에 관한 영역으로 1목(성주목) 1부(선산부) 1군(김산군) 5개현(개령. 지례. 문경. 함창. 고령)이 소속되었다.

이와 같은 상주목사의 지휘권은 창석본 이후 성주목은 1679년(숙종5년),선산부는 1699년(숙종25)에 별도의 독진체제로 이관되고 김산군과 이하 5개현을 관장하였다.

○ 군명(郡名) : 상주 고을의 명칭이 상주(上州)-상낙(上洛)-사량벌(沙梁伐)-사벌(沙伐)-상산(商山)-타아(陀阿)-귀덕군(歸德軍)등으로 변천하였음을 수록 하였다.

살펴 보건데 상주의 고을 명칭은 이미 신라 경덕왕 때에 상주(上州)에서 지금의 상주(尙州)로 개정된바 있었음에도 ‘尙州’ 라는 명칭이 누락된 것은 어떤 연유인지 의문이다.


(3)강역(疆域) : 상주고을의 관할지역을 밝힌 것으로서 주치(州治)로부터 동서남북 사방계 까지의 거리를 수록하였다. 동서의 길이는 137리요 남북의 길이는 76리이며 동쪽은 비안현 까지 76리이며, 서쪽은 보은현까지 70리, 남쪽은 선산부 까지 39리, 북쪽은 함창현 경계까지 29리로, 지금의 의성군 비안면과, 보은군 마로면, 구미시 옥성면 그리고 당시에는 함창현 관할지였던 공검면 양정리 또는 함창읍 금곡리 까지의 거리를 표기 한 것이다. 그리고 “거경(距京)478리(里)”라고 하여 서울까지의 거리를 수록하였다.


(4)산천(山川) : 왕산(王山), 갑장산(甲長山), 천봉산(天峰山), 구봉산(九峰山), 속리산(俗離算), 사불산(四佛山), 석악산(石嶽山), 병풍산(屛風山), 백화산(白華山), 노음산(露陰山), 서산(西山), 웅산(雄山), 소곡산(小谷山), 만악산(萬嶽山), 등 모두 14개의 산이 수록되고 왜유현(倭踰峴), 대조현(大鳥峴), 죽현(竹峴), 송현(松峴), 등 4개 산고개를 수록하였는데 지역마다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경승지 등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천봉산과 석악산은 일반적으로 같은 산으로 알고 있으나 천봉산은 주(州)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이고 석악산은 주의 북쪽 6리에 있는 산으로 별도 표기 한 것은 그 위치를 상고(詳考) 할 과제다.

하천(河川)은 북천(北川)과 남천(南川)에 이어 낙동강(洛東江) 화천(花川), 단밀천(丹密川), 송라탄(松羅灘) 등 6개 하천을 수록 하였는데 북천 조목에는

임진왜란에 순변사 이일(李鎰) 장군이 내 북쪽에서 패전하므로 하여 시체가 쌓여서 냇물이 내려가지 않았을 정도였다

고, 하였고 낙동강 조목에는

안동 태백산 황지에서 수 백리를 흘러서 상주의 동쪽 경계에 와서 이름을 낙동강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상낙(上洛)의 동쪽에 들어와서 흐르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낙동강 이라는 강 이름은 상주로 인하였음을 명정하였다.

이어서 공검지(恭儉池), 불암지(佛岩池), 대제지(大堤池), 굴수지(屈水池), 기지(機池) 등 농업용수 저수시설 5개소를 수록 하였는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공검지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주의 북쪽 27리에 있고 고려 명종시 사록(司錄) 최정빈(崔正汾)이 옜 날에 쌓은 못둑 길이를 걸음으로 헤아려 보니 860보이고 둘레는 16647척(尺)이며 그 못이 함창에 있으면서 물의 이용은 상주 사람들이 하고 있다. 홍귀달이 전하는 기록이 있다.

라고, 하여 그 역사성을 밝혀 놓았다.


(5)성지(城池) : 상주읍성의 둘래가 1549척(尺),높이가 9척(尺),이고 성안에 21개소의 우물샘과 2곳의 못이 있었다. 성밖에는 원래 해자(垓字)가 없었으나, 임진왜난 때 왜구가 14개월 동안 점거하여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성밖 서남쪽에 토성을 쌓았다, 고 하였다.

살펴 보건데 군사시설로서의 성지는 수록한 읍성이외에도 금돌성, 자산성, 성산산성, 견훤산성 병풍산성 등이 그 당시에 현존 하였음에도 누락한 것은 의문이다.


(6)역원(譯院) : 역원은 명령을 전달하고 행여객을 접대하는 시설인데 임진왜란 후 거개가 무너져 행정보고 및 하달에 문제점이 있어 보수가 시급함을 지적하고 이어서 낙양(洛陽), 낙동(洛東), 낙원(洛院), 낙서(洛西), 낙평(洛平), 장림(長林), 등 6개역과 남원(南院), 안빈(安賓), 광제((廣濟), 이두등(泥豆登), 요제원(要濟院), 양산지원(陽山旨), 흥왕(興王), 서원(西院), 어암(於岩), 율원(栗院), 부원(釜院), 북원(北院), 송원(松院), 당제(唐梯), 퇴산(退山), 유등(柳等), 죽현(竹峴), 대두(大豆). 중생(重生), 장혜(長惠), 공성(功城) 등21개원이 수록 되었다.


(7)교량(橋梁) : 북천교, 남대교, 양산지교 등 3개교량의 위치를 수록 하였는데 북천교를 일명 5리교 라고도 하였다.


(8)성씨(姓氏) : 본주(本州)에, 김(金), 박(朴), 주(周), 황(黃), 고(高), 이(李), 형(荊), 라(羅)씨와 중모(中牟), 단밀(丹密), 산양(山陽), 화령(化寧), 공성(功城), 청리(靑里), 영순(永順), 장천(長川), 연산(連山), 백원(白源), 하해(河海), 양영(壤寧), 보양(保良), 주선(主善), 단곡(丹谷), 생물(生物), 양보(壤寶), 관제(灌濟), 평안(平安), 평산(平山), 무림(茂林), 선은(繕銀), 해상이(海上伊) 등 23개 지역별로 거주하는 성씨를 수록 하였다.

살펴 보건데 본주라고 함은 오늘의 상주 시가지와 그 외곽 권역으로 추정하고 그 외 하해, 양영, 주선, 양보, 평안, 해상이 등은 어느 곳 인지 알 수 없다.

수록된 성씨 중에 형(荊), 구(仇)씨는 특별한 성씨로 현재도 사는 주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9)풍속(風俗) : “俗尙嗇簡 民風淳朴” (속상색간 민풍순박) 이라고 하여 상주 백성들의 성품이 간결하고 검소하며 순박하다고 하는 권근(權近)의 기록을 수록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상주백성들은 적에게 붙어서 부역한 자가 없었기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칭찬하는 교지(敎旨)가 내려졌는데

너희 상주민들은 적이 공략하는 요충도로에 위치하여 그 예봉을 당했으니 흉적들의 살상을 어찌 면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이 창의한 선비들이 함께 일어나 충의로 격려함으로서 군신의 대의가 혼란했던 시기에 충성을 더욱 더 높이고 밝혀서 범부와 촌부에 이르기까지 적에게 굴종함을 부끄럽게 여겨 부화하는 자가 없었으니 실로 가상하다. 이 모두가 우리 선조들의 유택이 백성들에게 젖어 들어서 조금도 해이하거나 태만하지 않았는 것은 평소에 예악의 학습을 돈독히 한 때문이라 믿어진다. 시전에 이르기를 ‘백성은 타고난 착한 천성을 지킨다. 그러므로 큰 덕을 좋아한다.’라고 하드니 바로 상주 백성들을 두고 한 말 같다. 너희들은 이 충성과 정절을 잘 본받고 실행하였으니 내 정녕 사랑스러워 칭찬하니 앞으로 나라에 더욱 힘쓸지어다.

라고, 하는 글을 수록하였다.


(10)봉수(烽燧) : 공성현(功城縣) 회룡산(回龍山), 본주(本州) 소산(所山), 청리현(靑里縣) 서산(西山), 산양현 소산(所山), 화령현(化嶺縣) 국사당(國師堂),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 함창현(咸昌縣) 성산(城山), 등 7개소 봉수의 위치와 각 봉수로부터 김산(金山), 문경(聞慶), 황간(黃澗), 으로 이어지는 봉수간의 노선을 수록하였다.


(11)진도(津渡) ; 죽암진(竹巖津), 관수진(觀水津) 등 2개소의 나루터를 수록하였다.


나) 공부(貢賦)

부(賦)라고 하는 것은 농토에서 거두어 종묘사직(宗廟社稷), 백신(百神)에 제사지내는 것과 조정(朝廷)을 운영하는 비용을 조달하는 것으로서, 농민(農民)은 경작토지의 수확물 중에서, 공여(工女)는 그 의직포(衣織布) 중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바치는 것이니 대체로 9등분 이외로 가중(加重)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는 사이에 판적(版籍)이 모두 소실되어 9부(賦) 9공(貢)으로 정하여진 공법(貢法)을 알 수 없으니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균등하게 세금을 바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아직도 완전히 정비되지 못하여 안타깝다

라고, 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토지의 소유권과 조세정책은 국가를 운영하는 근본일진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10여년이 지났음에도 토지 공부의 정비가 미비 하였다는 것은 임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였으며 농경시대 지방행정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1)전부(田賦) :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서술 하였으나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한다.

구 분

평시결수 (平時結數)

선조36년 (1603년 임난이후 )

비 고

전(田)

수전(水田)

전(田)

수전(水田)

15,592

8,363

7,229

3,874

1,470

2,404

원액(原額)

14,054

7,378

6,676

3,874

1,470

2,404

름전(廩田)

628

213

415

속전)(續田)

910

772

138

살펴 보건데 1603년의 결수는 임진왜란 후 토지조사를 실시한 이해 계묘(癸卯)년에 전국적으로 조사한 토지조사에 의거한 계묘량전(癸卯量田)의 통계 수치이다. 이 통계수치는 당시에 경작 하고 있는 시기전(時起田)을 대상으로, 양안(量案)에 등록한 것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표에서 보는바 임진왜란 전의 평시와 난후의 면적 감소는 현격하여 평시대비 25%에 불과하니, 임난 피해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평시 결수의 근거를 어디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1454) 상주목에 간전(墾田)이 이미 15,360결이고 그중에 수전 즉 논의 면적이 5분의 2라고 수록된바 있어 그때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당시는 태종13년(1413) 상주에 속하였던 보은, 옥천, 영동, 황간, 청산을 충청도로 이관한 연후이기 때문에 상주의 강역은 창석본 편찬 당시와 같으므로 임진왜란 이전 경작농경지 면적은 160여년이 지난 창석본 편찬 당시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토공(土貢) : 지역에서 생산하는 산물을 조정에 공납하는 것으로 봉상시(奉常寺), 재용감(齋用監), 상의원(上醫院), 혜민서(蕙民署)등 14개 기관에 참기름, 인삼 등 각종 진공품의 수량을 수록 하였는데, 특별히 초석자리 5장, 정포(正布) 94필, 홍시(紅柿) 30두(斗), 우황 1부, 화살 8부, 창 2자루, 소뿔 22쌍, 소몽동(작은 몽둥이) 10개, 은어, 연밥, 등등의 품목들을 열기 하였다. 품목별 종류와 수량은 조정 각 관서에서 필요로 하는 용품일체의 년간 수급계획에 의하여 각 지방 목읍(牧邑)에 부과한 것으로 짐작한다.

살펴 보건데 감홍시와 연밥은 그 당시에도 상주 특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고 특별히 작은 몽둥이를 공납 한 것은 죄인을 취조하는 형구인 듯하다.


(3)토산(土産) :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서 갑장산의 옥석(玉石), 대조현의 옥등석(玉燈石), 호도, 감, 은어, 송이, 인삼, 백화사(白花蛇 : 흰뱀), 완초(莞草) 등인데, 감은 그때부터 상주의 특산물 이었고 백화사가 상주의 특산물 이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4)호구(戶口) : 평시에는 7만명 이었으나, 장부(帳簿)로는 상고 할 수 없고 임진왜란 후(1616)에는 1만여에 불과하다고 수록 된바있어 전쟁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가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구는 그 지역의 군세(郡勢)인 만큼 창석본 간행전 사록(史錄)과를 비교한바 다음과 같다.

사록별 호구 비교표

책 본 별

호 수

인 구

비 고

경상도지리지(1425)

2,392

12,164

종실록지리지(1454)

2392

5,718

평시 임난이전 7만

상산지창석본(1617)

수만여명

살펴 보건데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가 간행되기까지 29년이 경과 하였음에도 호구 수는 같고 인구는 오히려 6446명이 감소하였는 것은 노비나 여자를 제외한 남자인구를 적시한 것 인지도 모른다. 창석본에는 ‘수만여명’ 으로 계수적 통계를 수록하지 않았음은 의문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7년인 1606년(선조39년) 병오년에 전국적으로 호적조사를 실시한바 있음에도 당시 조사한 호구를 수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란이 끝나고 인구 파악을 위하여 호구법(戶口法), 또는 요패법(腰牌法)으로 조사에 정확을 기 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전란 후 급격한 인구 이동이 일어난 상황에서 유리민(遊離民)들을 원 거주지로 되 돌아 가게 하거나, 안집(安集) 시켜야 한다는 등 이설이 있기도 하였지만 해당지역 지방관들의 주관하에 원주민과 유랑민을 불문하고 모두 함께 가호(家戶)로 등록 하는 것으로 하였다.


(5)군병(軍兵)

선왕이 국민을 처우하는 법과 국민을 용역하는 도가 있어 가정을 비교하고 그 집의 주인과 관련하여 거주하는 친척 등을 고려하여 모병하는 오(伍)와 졸(卒)을 편성하였다.

평상시에는 교양을 통하여 결합하고 유사시에 법령에 따라 동원한다. 후세에 병제(兵制) 가 문란하고 또 옳은 장수를 얻지 못하여 주구(誅求)만 일삼으니 원성이 가득하다. 이러하니 유사시에 무슨 대책이 있겠는가? 아무리 심지를 굳게 하라 해도 이산(離散)만을 생각하고 아무리 규율이 엄해도 나태하여만 가며 군정은 변방의 수비에만 의존하고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근심하는 장수 없으니 하루 빨리 정도(正道)를 찾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여 그 당시 군관(軍官)의 충성도와 군율의 실태를 서술하고 이어서 정로위(定虜衛)등 8조(組)로 4,425명의 군대를 편성 하였는데 그중에 보병이 775명으로 제일 많다.


(6)요역(徭役) : 관아 행정업무에 소요되는 인력으로서 악공(樂工), 장빙(藏氷), 경방자(京房子) 등에 동원하되 그 인원은 유향소(留鄕所)에 협의를 거쳐서 정하고 그 내용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 고시한다.


다). 학교(學校)

학교를 설치하는 것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세월에 따라 우유(優遊)하고 규법으로서 약속하여 장차 실제에 효용 할 학문을 밝게 하는 것이 교육정책의 근본이다. 후세에 와 서 교육이 덕행을 근본으로 하지 않고 화려한 문장을 시험하는데 치우치고 이록(利祿)과 옜 고전의 논리 탐구에 유혹되어 이에 얽어 매여서 최근에는 학규의 퇴패 또한 우심하다. 지방에 교육풍토가 좋지 못한 것은 중앙 조정의 교육정책이 바로서지 못한 것이고 그 원인은 모두 울은 강학을 실행하지 않음에 있다. 가악이 밝으면 시례(詩禮)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에게 관습으로 익혀져 하교로 하여금 마을 마다 국민의 심성은 감화되고 풍속은 미화되어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이가 적어지고 5륜이 그 차례를 지키고 모든 백성의 업무를 평안히 하여 모든 가구가 미풍양속에서 생활 할 것이니 어찌 교육에 힘스지 않을 것이랴?

라고, 하여 당시 교육 정책의 실상과 창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육관을 특별히 역설하였다.

(

1)향교(鄕校) : 주의 남쪽 5리에 있고 선덕초(宣德初) 중종 년간에 판목(判牧) 조치(曺 致)가 남누(南樓)를 세우고 홍여방(洪汝方)의 기문(記文)과 홍귀달(洪貴達)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임진왜란에 화재를 당하였다.


(2)서원(書院) : 만력(萬曆) 병오(丙午)년 (1606)에 낙동강 가에 도남서원을 창건하였다.


(3)서당(書堂) : 집안의 전통에 따른 학방이 각 면마다 있어왔고 그 중에 과반수는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목사가 창건하였다.

(4)학제(學制), 학전(學田) : 학제(學制)와 학전(學田)은 목록(目錄)만 정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교육기관별로 묵시적으로 정해진 학제와 운영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는 경작토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라)질단(秩壇)


(1)단유(壇壝) : 사직단은 주성(州城) 3리쯤에 있었으니 목사 정곤수(鄭昆壽)가 사우를 세우고 위판을 봉안 하였으나 임진왜란 후에 없어졌다고, 수록하고 뒤이어

인간은 흙이 아니면 살지 못하고 곡식이 없으면 먹지 못한다. 사직을 설치하는 것은 복 을 구하고 은공에 보답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을 높이 숭상하여 받드는 예는 공경과 정성을 다 해야 하 고 그런 후에야 한발과 수해와 같은 재난없이 모두 편안히 살게 될 것이니 이것이 제 사를 지내는 본의(本意)이다. 옛일을 상고하면 사직(社稷)의 제도는 사(社)는 집을 짓지 않고 나무를 심어 표를 하여 ‘사(社)’라 하였는데 당나라 이후에는 돌로 만든 신주로 하다가 뒤에 나무로 만든 신주로 바꾸었고 나무로 만든 신주를 밖에 둘 수 없어 집을 지어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날에는 신주를 단으로 모시어 제를 지내 왔으니 이는 복을 구하는 도리에 당연하다 그런데 열읍(列邑)에 사직을 모시는 사당이 없고 위판(位板)을 관사안에 별로 깨끗하지도 못한곳에 봉안 하였다가 제삿날에 가마로 단소에 옮겼고 단소에 그대로 둔 곳은 새끼로 허리를 동여 메었으니 그 불경이 극심하였다.

라고, 하여 농경시대 민속적으로 사직(社稷) 신앙에 대한 숭배의식이 철저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2)묘제(廟制)


○ 문묘(文廟) : 향교의 북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임진왜란에 소실한 것을 광해2년(1610)에 중수 하였으며 그때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고 하고 임진왜란에 송이회(宋以誨)가 5성(聖의) 위판을 깨끗한 곳에 묻어서 병화를 피하게 하였다. 고 수록하였다.


○ 오현묘(五賢廟) ; 묘는 도남서원 뒤편에 있고 선조39년(1606)에 창건하여 광해3년(1611)에 봉안(奉安)하였다. 이어서 ‘오현봉안문(五賢奉安文)’과 오현 각위의 춘추(春秋) 향사(享祀) 상향축문(常香祝文)을 수록 한 후에 뒤이어서 오현 각위로 정하였던 상향축문을 한 장으로 통일하는 ‘춘추향사축문개오위일(春秋享祀祝文改五位一)’ 축문을 수록 하였으며 ‘소재선생종향오현묘고제문(蘇齋先生從享五賢廟告祭文)’,‘소재종향시오선생고사유문(蘇齋從享時五先生告事由文)’, ‘소재선생배향제문(蘇齋先生配享祭文)’등 소재 노수신(盧守愼)을 종향(從享)하여 배향(配享)한 의례문(儀禮文)을 수록하고 이어서 서애 류성용(柳成龍)을 추배하는 ‘서애선생배향오현묘제문(西厓先生配享五賢廟祭文)’, ‘고유오선생문(告由五先生文)’을 수록하였다.

오현묘는 오늘의 도남서원 묘우(廟宇)인 도정사(道正祠)를 말한다. 도남서원은 상주 최초의 서원으로서 창설 당시의 기록과 이후 소재 노수신과, 서애 류성용을 배향 할 때의 모든 기록문을 수록하였음은 그만큼 중요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원의 기능은 존현(尊賢)과 양사(養士)로서, 두 수례바퀴가 병행 할 때 그 목적을 달성 하는 것 이라는 일반적 사고와 달리 양사의 기능은 앞의 학교 조목으로 하고 존현의 기능을 이 조목에 분리하였다는 것은 그 기능의 독립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 이현사(二賢祠) : 이현사는 뒤에 옥성서원의 전신(前身)으로서 숭정(崇禎) 경오(庚午)년 즉 인조8년(1630)에 창건하였고 상량문이 있다고 하고 뒤이어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의 ‘정당문학김선생봉안제문(政堂文學金先生奉安祭文)’과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의 ‘영천신선생봉안제문(靈川申先生奉安祭文)’그리고 춘추향사(春秋享祀) 상향축문(常香祝文)을 수록하였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남서원의 묘우인 도정사(道正祠)를 오현묘로 하고 옥성서원의 묘우인 오늘의 경현사(景賢祠)를 이현사로 이름하여 “묘(廟)”와 “사(祠)”로 그 격을 달리 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도남서원의 5현은 조선의 유학(儒學)을 창시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 부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適)에 이어 그 유학(儒學) 학문을 집대성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봉향(奉享) 하였다는 것은 조선유학의 국조(國朝)급 현사를 영남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상주에 모셨다는 상주인의 자부심으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옥성서원의 이현사는 상주출신으로서 고려말에 나라에 큰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자로 포은 정몽주에게 학맥을 전수한 난계 김득배와 명종 년간 상주목사로 재직 하는 동안 서당교육기반을 확고히 하므로 상주고을 흥학육영에 큰 업적을 남긴 신 잠 을 “사(祠)”에 하였다는 것이다.


○ 성황사(城隍祠), 성황사는 천봉산에 있고 묘를 세운 것은 아니다.

성황신은 상주고을 안에 모든 신의 주신이고 태수(太守 : 목사)는 고을 백성의 주인이니 양자는 서로 같은 지위에 있다. 그런데 지금 묘가 없이 어찌 신이 편안 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중국인이 ‘성황묘‘라고 크게 써서 현판을 걸어 놓는 이유는 서민들이 공경하게 하고 묘의 면모를 존엄하게 하여 신령(神靈)이 보장되게 하므로써 만민이 평화롭고 풍요하며 또 신공으로 우순풍조(雨順風調)하여 년년이 풍년이 들고 적선에 보답하며 복이 오고 화가 없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여 성황신(城隍神) 숭상의 중요성을 기록 하였다.


○ 여단(厲壇)은 주의 북쪽에 있고,


○ 기독사(旗纛祠) : 주의 남문안에 있었는데 임진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하지 못하였다고, 기록 하였다. 기독사는 전쟁 출병에 기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이곳에는 쇠꼬리로 만든 큰 깃발을 세웠다.


마)관제(官制)


(1)목사(牧使) 1


(2)판관(判官) 1 : 임진왜란 후 관제 개혁으로 없어짐


(3)문제독(文提督) 1 : 구례(舊例)에 의하면 하위직 문관으로 교수의 직분을 맡았다. 만력(萬曆) 계미(癸未) 년간 (1583, 선조16), 당시 예조판서 였던 류성용(柳成龍)의 주장으로 교수를 제독으로 고쳐 6품으로 겸임하고 교관을 소속하게 하였다.


(4)무제독(武提督) 1 : 만력(萬曆) 경자(庚子) 년간 (1600, 선조21), 정승 이덕형(李德馨)의 주장으로 처음 시행하였으며 군사를 조련하는 것은 중국의 진법(陣法)을 모방하였다.

살펴 보건데 위의 문제독은 상주향교의 교수(敎授)이고 무제독은 상주영장(營長)으로 상주목에 소속된 인근 군현(郡縣)을 감독하였다.

바)공서(公署)


공서는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곳이고 민원을 해결하는 곳이니 사치하거나 추하여서는 안 된다. 관리는 부서(簿書)에만 골몰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완급을 가려서 적은 비용으로 실적을 올려야 하며 공청(公廳)을 잘 보수 관리 하고 풍수해가 있을 때 현명하게 처리해야 한다.

라고, 하여 근무하는 공직자의 자세와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어서 각 관서별로 내용을 수록하였다.


(1)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을 목록만 기록하였다.


(2) 주아(州衙) : 주아는 오늘의 상주시청 청사 본관을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시정의 모든 시책이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그 중요성에 대하여 이르기를

일찍이 시사청(視事廳)에 걸어 둔 주련(柱聯)에 ‘어떻게 하여야 많은 이익을 내고 어떻게하면 해로움을 없게 하며 공무의 일이 백성에게 밝게 미쳐 촌락 숨은 곳 까지도 들을 수 있으며 훌륭한 사람을 섬기고 어진 사람을 벗하며 관리로서 실력이 부족함을 항상 부꺼럽게 여기고 내가 이 주를 다스리면서 어찌 감히 주공(周公)이 공무를 수행하면서 입에든 밥을 토하고 빗던 머리를 그대로 쥐고 달려 나가든 부지런 함’을 명심하지 않으랴

라고, 수록하였음은 오늘의 공직자에게도 귀감이 될 만 한 격언이다.


(3) 풍영루(風詠樓), 풍영루 기문(記文)이 전한다.


(4) 관수루(觀水樓), 낙동강 동쪽 언덕에 있다.


(5) 응신루(凝神樓), 풍영루 서편에 판관 민 영(閔 寧)이 세웠으며 기문(記文)이 있다.


(6) 청양각(淸凉閣), 객관(客館) 북편으로, 바로 앞에 작은 못이 있다.


(7) 추월당(秋月堂), 서헌(西軒) 북에 있으며 목사 정종보(鄭宗輔)가 세웠다.


(8) 천향정(天香亭)

처음 이름은 연당(蓮堂)이다. 동헌 남쪽에 있으며 목사 정곤수(鄭昆壽)가 창건하였다가 임진왜란에 소실 된 것을 뒤에 한술(韓述)목사가 중건하였다. 정자의 좌우에 못을 파서 연과 화초를 심었으며 목사 강복성(康復誠)이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이름을 천향(天香)이라 고쳐 불렀다.

라고 하였다.

살펴 보건데 풍영루, 관수루, 응신루 등은 관아 밖에 누각이지만 관청에서 관리를 하였다는 것이고 천향정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헐어 버리고자 하는 것을 유지들이 매수하여 오늘의 북천 임란전적지로 옮겨서 침천정(枕泉亭)으로 이름을 새로 지었다.


(9) 군자헌(君子軒) : 아사(衙舍)안에 동헌이니 목사 김상용(金尙容)이 창건하여 못을 파고 연을 심어 군자헌이라 이름 하였다.


(10) 향사당(鄕射堂) : 향사당 기문(記文)이 있다.


(11) 존애원(存愛院) : 기문이 있다.

향사당과 존애원은 부록(附錄) 한다고 하여 ‘附’자를 앞에 써 놓았다 따라서 관청의 건물은 아니지만 공공적 성격을 지닌 중요 부서라는 것을 암시 하는 것으로 본다.


사) 명환(名宦)

상주는 강역(疆域)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교통의 요충지이고 사리와 체면이 다른 고을에 비하지 못할 만큼 크다. 그러므로 목사의 품계가 높아 이 직위에서 제상으로 승진되고 명망이 높은 분이 많았다는 것을 전해 내려오는 관풍안(觀風案)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임진왜란때 문적의 소실로 인하여 성명(姓名)과 행정치적을 잘 알지 못하나, 이제 잡지(雜誌)의 기록과 부로(父老)의 전하는 말을 정리하여 수록 하였다.따라서 착오나 누락이 염려되고 또는 장구한 세월이 흘러 고증(考證)이 어려워 선 후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다만 전팽령(全彭岭) 밑으로는 김상용 목사가 수로간 것을 옮겨 기록하였다.

라고 하여 상주 인물의 위상을 먼저 서술하고 시대별로 나누어 열기(列記)하였다.


(1) 신라(新羅) : 신라시대에는 모두 2명이 수록 되었다.

○ 김유신(金庾信) : 진덕왕때 백제를 정벌한 공적으로 이찬(伊餐)에 올라 상주(上州) 행군대총관(行軍大摠官)을 가자(加資)하였다.

살펴 보건데 당시의 상주(上州) 구역은 오늘의 경상북도 북부와 충청북도 일부를 관할하는 광역권이고, 김유신은 기록상 상주 최초의 목민관(牧民官)이다.

○ 이 등(伊 登) ; 법흥왕 12년(525) 대아찬(大阿餐)에 올라 상주 군주(君主)가 되었다.


(2) 고려(高麗) : 고려시대에는 모두 20명을 수록 하였으나 그 중에 공적이 많은 인물에 대하여만 거론 하기로한다.

○ 이주좌(李周佐) : 목종시 과거에 올라 상주목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 김부일(金富佾) : 자는 천흥(天興)이고 경주인이다. 예종때 상주목사가 되어 치적으로 명성이 높아 보문각 직학사에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 한림(翰林)과 중서문하 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지내고 다시 수태위(守太尉)에 올랐다. 왕이 학문을 좋아하여 유생들과 경사를 강론할 때 공의 웅변과 해석을 아무도 따를 수 없었다.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김인경(金仁鏡) : 초명은 양경(良鏡)이고 고종13년(1226)에 좌천하여 상주목사가 되었다가 다시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으며 중서시랑으로 승진하였다.문무(文武)를 겸전한 인물로 인품이 맑아서 한점의 진누(塵累)가 없었고 학문이 높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근체시부(近體詩賦)를 많이 남겼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 최 자(崔 滋) : 자는 덕수(德樹)이고 성품이 순박하고 학문에 능통하였다. 강종때 상주 사록(司祿)이 되었다가 목사로 진급하였다. 상주가 도내에서 으뜸가는 고을로 백성들 간에 소송이 많았는데 부임하여 판결을 신과 같이 바르게 하여 모두 두려워하고 윤리 강상(綱常)을 어기는 백성이 없어지므로 옥살이 하는 백성이 없었다.만기가 되기 전에 조정으로 영전하여 태사중서문하평장사(太師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스스로 호를 동산(東山)이라 하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며 10권의 문집과 그 유명한 < 破閑集(파한집) > 3권이 있다.

○ 안 유(安 裕) : 학문을 좋아하고 원종초에 한림원(翰林院)에서 근무 하다가 충열왕 1년에 상주 판관이 되었다. 이때 상주에는 여자 무당 3민이 대중을 무혹하니 공은 이들을 옥에 가두어 장형(杖刑)을 내렸다. 이 뒤부터 상주에는 무당들의 요괴(妖怪)한 화가 근절되었다. 3년 동안 재임 하는 동안 안렴사가 공의 청정(淸正)을 포상하여 판도좌랑으로 승진 되었고 학문을 일으킨 공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되었다. 호는 매헌(梅軒)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순흥인이다.

○ 김영구(金永煦) : 상주목사로 재임중 상산관을 중수(重修)하였다.목사 재임후 조정에 정승을 역임하였다.

○ 안 축(安 軸) : 목사 재임중에 흥령을 왕래하면서 모친의 기거를 돌보는 효도를 다 하였다. 충목왕이 제상을 가릴 때 으뜸으로 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시켰다. 마음이 항상 공정하며 근검하였으며 가정을 잘 다스려 타의 모범이 되었다. 호는 근재(謹齋)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 정 택(鄭 澤) : 판관에 이어 목사를 역임한 후에 향사대부(鄕史大夫)가 되었다.

살피 건데 정택은 아들 정의생(鄭義生)이 고려시대부터 상주의 사족이었던 상산김씨 고려 삼원수(三元帥)중에 한 분 이었던 상산군 김득제(金得齊)의 딸에게 장가들어 뒷날 정국성(鄭國成), 정경세(鄭經世) 등 많은 인제를 배출한 진양정씨 상주 문호(門戶)의 입향조가 되었다.

○ 박 분(朴 賁) : 충목왕 때에 상주사록이 되었으며 야은 길재(吉再)에게서 논어와 맹자 등 서책을 받았다.

이밖에 고려시대 명환으로 수록된 인물로 한 충(韓 冲), 정극영(鄭克永), 정 항(鄭 沆), 양원준(梁元俊), 최유청(崔惟淸), 최기우(崔奇遇), 김부의(金富儀), 윤해충(尹諧忠), 정운경(鄭雲敬), 최득평(崔得枰), 최제득(崔帝得), 김남득(金南得), 최충청(崔忠淸), 등 목사와 판관, 그리고 사록(司祿)을 역임한 인물이 수록 되었다.


(3) 조선(朝鮮) : 조선시대에는 권집경 등 모두 105명이 수록되었는데 그중에 공적기록이 많이 수록된 인물과 상주 역사와 관계가 깊은 인물에 대하여만 살펴보기로 한다.

○ 김수온(金守溫) : 세조 때에 목사로 재임한 후에 대제학에 이르렀다.호는 괴애(乖崖)이다.

○ 강구손(江龜孫) : 진산군 강희맹의 아들이다. 목사 역임 후에 한성판윤과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 윤 탕(尹 宕) : 목사 재임시에 실화(失火)한 상산관을 중수하다가 준공하지 못하고 관사에서 순직하였다.

○ 손중돈(孫仲暾) : 목사 재임시 선정(善政)으로 비(碑)를 세우고 단밀현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후에 판서를 역임하였다.

○ 권 기(權 祺) : 명종 20년(1565)에 목사로 부임하여 한결같이 청념 선정하니 그에 탄복한 백성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 전팽령(全彭齡) : 목사 재임시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녹봉을 털어서 주아(州衙)에 큰 가마솥 수십개를 걸어 놓고 굶주린 백성들을 먹여 살렸다.소세양(蘇世讓)의 양신정(養神亭) 기문(記文)에 “그대가 상주의 목사가 되어 청렴과 성실로 자산(資産)을 초월하니 내가 진정으로 치하하며 세상에서 이를 아는 사람 모두가 장차 크게 잘 될 것이라 하였다” 라고 하였다.

○ 신 잠(申 潛) : 목사 재임시 선정으로 유애비(遺愛碑)가있다. 특별히 흥학에 힘써 서당을 창건하였으며 관아에서 순직하여 관(棺)이 떠날때에 백성들이 호곡을 하며 이 비를 세웠다 문장의 저술과 서화(書畵)에 능하였다. 호는 영천(靈川)이다.

○ 김취문(金就文) : 선정을 하였고 풍영루(風詠樓)를 중수 하였으며 퇴계(退溪)의 발문(跋文)이있다.

○ 정곤수(鄭昆壽) : 목사 재임 후에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이 되었다. 사직단(社稷壇)옆에 재실(齋室)을 지어 신판(神板)을 봉안하고 문묘 석전(釋典)후에 사직단(社稷壇), 성황단(城隍壇), 려단(厲壇),에 제를 지냈다.

○ 류성용(柳成龍) : 목사 재임시 선정으로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그 비문에 이르기를 “주의 정사를 학문 그대로 하여 명령을 발동하지 아니 하여도 이민이 모두 스스로 경복(敬服)하니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여(野)에 있으면 민(民)이고 관에 있으면 이(吏)이니 이(吏) 또한 민이다. 그러므로 민(民)을 침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모두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성력을 다하여 돌봐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재임시는 관아가 정숙하여 마치 영사(靈祠)에 들어가는 것 같아서 본말(本末)과 크거나 작은 것 모두가 잘 되어 모두가 편안 하였다.

○ 황준량(黃俊良) : 상주 교수관을 역임하였다. 호는 금계(錦溪)이다. 인물이 그림같이 준수하고 글짓는 기량이 뛰어나 젊을 때부터 문인(文人)으로 자처하였다. 만년에 퇴계의 문안이 되어 유자(儒者)의 학문을 얻었으나 40여세로 요수 하였다. 혹자는 소시에 기(氣)가 너무 예리하여 교유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게 험이라 하였다.

○ 김 해(金 澥) : 목사 재임시 임진왜란에 왜구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살피건데 김해목사는 임난 병화시에 주성(州城)을 비우고 화북 용화 산중으로 피신하여 남아 있던 권길(權吉)판관과 박걸(朴傑)호장이 성을 지키다가 왜병에게 살해 되었다.

○ 권 길(權 吉) : 판관 재임 중 임란에 북천 전투에서 전사 하였다. 사의비(死義碑)가 있다.

○ 정기룡(鄭起龍) : 임란때 가판관(假判官)으로 도임하여 전공(戰功)으로 실판관(實判官)이 되었고 다시 가목사가 되었다가 군공(軍功)으로 실목사가 되었다. 후에 통제사(統制使)에 올랐다.

○ 김 용(金 湧) : 목사에 이어 참의(參議)에 올랐다.빙옥(氷玉)과 같이 청렴하였다.

○ 김상용(金尙容) : 선정을 하였으며 벼슬이 정승에 올랐다.

○ 강복성(康復誠) : 목사를 지냈으며 선정비가 있다.

○ 정호선(丁好善) : 목사를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었다.

○ 김지남(金止男) : 목사를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었다.

○ 조찬한(趙纘韓) : 목사를 지냈다.

이밖에 수록된 인물을 열거하면 박이창(朴以昌), 안 성(安 省), 하윤원(河允源), 이인손(李仁孫), 김 구(金 鉤), 이전수(李全粹), 류문통(柳文通), 이복시(李復始), 송 인(宋因), 한 암(韓 巖), 정종보(鄭宗補), 송요년(宋遙年), 황 인(黃 麟), 신 현(申 礥), 이인우(李仁祐).

민 영(閔寧), 설순조(薛順祖), 신종지(申宗之), 김 창(金 琩), 윤 상(尹 祥), 권 박(權 博), 한 린(韓 隣),이덕창(李德昌), 김자양(金自陽), 정희홍(鄭希弘), 정 경(鄭 褧), 이진희(李軫希), 홍봉세(洪奉世), 남응노(南應老), 송희규(宋希奎), 장응량(張應良), 김 자(金 滋).

박세훈(朴世勳), 김 정(金 貞), 이중양(李仲樑), 김언거(金彦琚), 신사형(辛士衡), 엄 서(嚴 曙), 임 회(林 誨), 정 척(鄭 惕), 김명언(金明彦), 최흥원(崔興源), 윤지형(尹之亨), 윤견철(尹堅鐵), 홍 연(洪 淵), 김억령(金億齡), 남응서(南應瑞), 한 옥(韓 沃), 남언순(南彦純).

이 선(李 選), 신중엄(申仲淹), 이정현(李廷顯), 윤탁연(尹卓然), 황대유(黃大猶), 권두문(軍斗文), 이 희(李 熹), 양사원(梁士元), 이희급(李希級), 고응척(高應陟), 류영길(柳永吉), 송유민(宋惟敏), 송응형(宋應泂), 조희철(趙希轍), 윤국형(尹國馨), 허 구(許 鉤), 한명철(韓明徹).

오 운(吳 雲), 박이백(朴已百), 황 서(黃 曙), 이 원(李 原), 강 절(姜 節), 이 집(李 潗), 이수록(李綏祿), 강 인(姜 絪), 이광길(李光吉), 황 창(黃 琩), 한 술(韓 述), 원 곤(元 錕), 이호신(李好信), 홍사효(洪思斅), 윤안국(尹安國), 이정겸(李廷謙), 송석조(宋碩祚), 류 항(柳 恒), 이여규(李如圭), 김상복(金尙宓).

등의 이름 밑에 간단한 행적을 수록 하였을 뿐이다.


아) 인물(人物)

예로부터 천악(川岳)의 정기를 타고 시서(詩書)의 유택을 입어 훌륭한 위인이 세상에 많이나서 혹은 공업으로 알려지고 혹은 문장으로 나타나고 또는 행의로 칭송을 받아, 마땅히 후세에 방명(芳名)을 전해야 할 분이 한없이 많으나 살펴보면 문헌에서 고징(考澂)할 수 없고 기록 또한 상세하지 못하며 또 병난중에 사녀(士女)의 효절(效節)한 분이 많았음에도 창황한 가운데 인몰됨이 많았으니 어찌 천고에 한이라 아니하랴. 혹자는 고향이거나 의관(衣冠)을 소장함이 없는 사람의 성명이 지(誌)중에 왕왕 있으니 어찌 이같이 찾아내는 범위는 넓게하고 기사는 불실하게 하였는가. 옛적에 추도경(鄒道卿)이 한번 의흥의 여관에 유숙 하였는데 후인이 향선생으로 모시고 제사 지냈으니 지금의 기록이 이와는 다르나 외가나 처가의 향중이 되면 모두 향안에 수록 되어 있으니 어찌 고사에만 근거하였다 아니하랴. 인물은 개관(盖棺)하지 아니하면 기록하지 않는 것이 구례이므로 이를 따랐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라고, 하여 인물 수록에 신중하였음을 밝힘과 아울러 죽기 전에 살아 있을때는 수록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수록한 인물을 전사하면서 고찰 하기로 한다.


(1) 고려(高麗) : 김 식(金 湜)을 비롯하여 모두 20명이 수록 되었는데 행적이 많은 인물을 위주로하여 기술(記述)하기로 한다.

○ 김 조(金 祚) : 벼슬이 보문각제학(寶文閣 提學) 호장(戶長)에 올랐다‘ 제학(提學) 벼슬은 달관(達官)하였으므로 이른바 호장이라고 함은 지금의 향리(鄕吏)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 삼한대족(三韓大族)의 조상으로서 호장 벼슬 한 인물이 많으나 오래 되어 잘 모른다.

○ 김 일(金 鎰) : 벼슬이 삼중대광(三中大匡)에 올랐고 상낙군(上洛君)에 봉하였다. 부인 김씨의 이름이 만궁(萬宮)인데 호장 김 조(金 祚)의 딸이다. 태어 난지 7세 때에 부모가 몽고병을 피하여 백화산으로 숨을 때 몽고 병이 가까이 따라오자 길가 왼쪽에 버렸는데 3일이 되어서야 숲속에서 찾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밤에는 어떤 물체가 와서 안아 주었다고 하여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다. 상주의 김(金)씨는 4성씨가 있는데 보첩이 전하지 않아서 잘 모른다.

○ 임 춘(林 椿) : 호는 서하(西河)이고 중년에 본주에 우거 하였다. 문집이 전한다.

○ 김 록(金 祿) : 김일의 아들이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 찬성사(門下 贊成事)에 올랐고 상성군(尙城君)에 봉해졌다.

○ 김득배(金得培) : 김록의 아들이다. 공민완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시종(侍從)하였으며 서북면 도 순문사(都 巡問使)가 되었다. 홍두적(紅頭賊)난에 공을 세우고도 김 용(金 鏞)일파에게 모함을 받아 상주에서 효수(梟首)를 당하니 문인(門人)이었던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거두고 글을 지어 장사 지냈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며 상낙군(上洛君 )에 책봉 되었고 조선조에 와서 시호를 문충(文忠)우로 내리고 마전(麻 田)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 되었으며 숭정(崇禎) 임신(壬申:인조10년 1632)에 옥성(玉城) 이현사(二賢祠)에 배향하였다. 호는 난계(蘭 溪 )이고 불훤재(不諼齋) 신 현(申 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포은의 제문은 유명하여 < 동사강목(東史綱目) >에 올랐다.

○ 김득제(金得齊) : 득배의 아우이다. 벼슬이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고 상산군(商山君)에 책봉 되었으며 형 득배와 아우 선치(善致)를 삼원수(三元帥)라고 세칭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왜적을 칠 때 함께 공을 세웠으며 고려말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지니 상주에 은거 하였다.

○ 김선치(金善致) : 득제의 아우로 전라도 도 순문사(都 巡問使) 류 탁(柳濯)을 따라 왜적 수십인을 격살 하였고 공민왕 때에도 적을 막아 녹공 1등이 되었으며 홍건적이 경성에 침입 하였을 때도 여러 장수와 같이 경성 수복에 공을 세웠다. 벼슬이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올랐으며 낙성군(洛城君)에 책봉 되었다. 포은 정몽주와 외손(外孫) 정호선이 상주목사 재임 중에 공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 조운흘(趙雲仡) : 관직을 버리고 노음산하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石磵) 서하옹(棲霞翁)이라 호를 짓고 미친 체 하며 신분을 숨겼다. 출입 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니며 기우도(騎牛圖)를 그리고 석간가를 지어 고상한 뜻을 보였다.

○ 김구용(金九容) : 이인임에게 쫒겨 여흥에 살다가 강호에 두루 다녔으며 벼슬은 판전교가 되었다. 우왕10년(1384) 명나라에 행례사로 가다가 요동에서 총병에게 잡히어 귀양중에 병졸 하였다. 척약재 문집이 전한다. 그의 본이 영가(永嘉 * 안동)인데 본주의 가리방(佳里坊)에 그의 유허가 전하고 있으니 영가에서 이곳으로 우거한 것인지 아니면 상주가 안동부에 속해 있을 때 영가가 읍호 였는지 또는 그가 안동에서 계출(系出) 되었으므로 본관을 따라 부른 것인지 미상이다.

○ 정의생(鄭義生) : 상주목사를 지내던 아버지 정 택(鄭 澤)이 김득제의 딸을 공의 처로 하니 이후 상주에 살게 되었다. 벼슬이 판서에 올랐다.

이외에 김 식(金 湜), 김희일(金希逸), 김문도(金文道), 박인석(朴仁碩), 김 선(金 愃), 김수자(金守雌), 김원리(金元理), 김 균(金 鈞), 김상안(金尙顔), 이민도(李敏道) 등이 수록 되었다.


(2) 조선(朝鮮) : 조선시대에는 박안신(朴安信)을 비롯하여 모두 202명을 수록 하였는데 그중에 공적 기록이 많은 현사를 위주로 전사(轉寫)하고 이 조목 말미에 몇가지 사항을 살펴보기로 한다.

○ 박안신(朴安信) :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태종 때 대관(臺官)으로 언사(言事)에 연좌(連坐)되어 왕의 노여움을 사 죽게 되었다가 자기의 소회를 시로 지어 왕께 올려 용서를 받았다

○ 박이창(朴以昌) : 박안신의 아들이고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 활달하여 곧은 말을 하며 아버지와 같은 기풍이 있었다.

○ 노 숭(盧 崇) : 호가 상촌(桑村)또는 암살(暗室)이고 낙성군 김선치의 사위가 되어 상주에 살게 되었다. 집현전 대제학과 우의정에 올랐으며 시호는 경평(敬平)이다. 경사(經史)를 즐겨 보았으며 태종때에 원종공신에 책록 되어 사전(賜田) 30결을 받았으며 옥연사(玉淵祠)에 봉향(奉享)하였다.

○ 황효원(黃孝源) : 장원급제 하엮고 좌리공신으로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 황보신(黃保身) : 정승 희(喜)의 아들이고 소윤 벼슬을 지냈다 홍여강의 사위가되어 상주에 살게 되었다.

○ 이 은(李 垠) : 초명은 치(致)이고 문과에 장원 하여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글을 잘 지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묘는 무량동에 있다.

○ 이 언(李 堰) : 은(垠)의 아들로 남원에 출수(出守))하여 고을을 잘 다스려 광해군이 손수 글을 지어 상을 내리고 전주 부윤에 승진하였다. 퇴직 귀향 후 매년 생일 때에는 벼슬한 자녀들이 마당에 가득 하다고 하여 그가 사는 집을 오인당(五印堂)이라 하였다.

○ 홍귀달(洪貴達) : 벼슬이 판서겸 대제학에 올랐고 연산군에게 상소로 간(諫) 하였다가 도리어 죄가되어 경원 귀양처에서 죽음을 당했다. 중종때에 복직되고 문광(文匡) 시호가 내려졌다. 허백정(虛白亭) 문집이 전한다.

○ 김수화(金守和) : 괴애(乖厓) 수온(守溫)의 아우로 형조참의르 역임하였고 상산군 김득제(金得齊)의 손서가 되어 상주에 살게 되었다.

○ 김계창(金季昌) : 중요한 직책에서 현관(顯官)으로 이름나 조정 관리 시험에 뽑혀 이조참판에 올랐다. 문장에 격력(格力)이 있어서 승지로 있을 때 왕과 시문을 수창(酬唱)하였다. 김수화의 딸과 혼인으로 본주에 살게 되었다.

○ 한가구(韓可久) : 강능부사(府使)를 역임하고 떠나올 때 고을 사람들이 시를 지어 공적을 찬양 하였으며 청백리로 강능에 생사당(生祠堂)이 섰다.

○ 홍언충(洪彦忠) : 홍귀달의 아들로 호는 우암(寓庵)이다. 연산조 때 이조정랑 이조정랑을 역임하면서 해도로 귀양을 가게되니 스스로 시를 지어 마음을 달래었는데 그 자명시(自銘詩)가 유명하다.

○ 정옥형(丁玉亨) :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강직하여 굴 함이 없었다. 영남 안렴사(按廉使)로 와서 고을 사람 김수연의 딸에게 혼인하여 향적(鄕籍)에 들었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 주세붕(周世鵬) : 참판이 되었으며 풍기군수를 할 때 소수서원을 창건하여 흥학의 공을 세워 부제학이 되었고 심도(心圖)를 찬술하였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무릉집(武陵集)이 전한다.

○ 황여헌(黃汝獻) : 군수를 역임하였고 문장이 화려하고 섬세하여 많은 저술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모두 실화 하였다.

○ 황효헌(黃孝獻) : 여헌의 아우로 벼슬이 아경(亞卿)에 올랐다. 청빈과 검소 하기가 평민과 같았으며 맹자를 탐독하여 괴롭고 바쁠 때도 반드시 한편씩 외웠다고 한다. 문장이 고고 (高古)하여 모두 문형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제수되지 못하고 졸 하였다. 하유편(下帷篇), 갈굴편(渴堀篇)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호는 축옹(畜翁)이다.

○ 김순고(金舜臯) : 무과에 올라 병사((兵使)가 되었고 평양군(平陽君)에 책봉되었다. 젊을 때 낙동강 얼음에 빠져 겨우 살아 나와 그 후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수요(壽夭)의 화복은 분수로 이미 정해 졌느니라고 하였다. 윤원형을 출척하다가 10년 유배를 당하였다. 병사(兵事)를 판단하는 데 능하였다 한다.

○ 김 범(金 範) : 호를 후계(後溪)라 하고 사마시에 장원을 하여 옥과 현감 재임중에 순직하였다. 효우와 행의로 고을을 교화 하였으며 학행이 높아 징사(徵士)로 뽑혔다.

○ 박언성(朴彦誠) : 진사(進士)이며 천성으로 효우가 지극하여 조모상에 3년복을 입었고 어머니 에게는 재롱을 부려 즐겁게 해 드렸다. 독실한 행의로 조정에 천거 되었으나 모친 봉양을 위해 사양하였다. 뒤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 되었다.

○ 김언건(金彦健) : 호는 운정(雲亭)이다. 효행이 돈독하여 향인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매양 부모의 휘진(諱辰)에 시전(詩傳)의 애보모 편을 읽으며 애통하니 모두 감동 하였다. 목사가 그의 행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사헌부 감찰을 증직하였다.

○ 정응두(丁應斗) : 정옥형의 아들로 형조 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문장과 시에 능하였다.

○ 강사필(姜士弼) : 벼슬이 통정에 이르렀다. 형제가 영남과 호서의 감사가 되어 속리사에서 서로 만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형은 영남의 감사를 역임하고 정승에 오른 강사상(姜士尙)이다.

○ 김 충(金 冲) : 호가 서대(西臺)이며 문과에 급재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고상한 지조로 시를 지으니 많은 사람들이 전하여 외웠다.

○ 노수신(盧守愼) : 노 홍(盧 鴻)의 아들로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자품이 고상하여 어릴 때부터 고상한 기풍이 있었으며 청년시절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때 김모재(金慕齋)가 크게 칭찬하였다. 생원과진사, 문과에 모두 장원을 하니 세칭하여 삼괴선생 이라 하였다. 진무경(陳茂卿)의 < 숙흥야매잠(夙興夜寐潛) >에 주석을 달아 시종 체험하였다. 일찍이 서신으로 퇴계와 학문을 논 하였는데 유독<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에서 이동(異同)이 있어 퇴계가 애석해 하였다. 문장이 고고(高古)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 김귀영(金貴榮) : 사원(士元)의 손자로 정승을 지냈다.

○ 노 기(盧 麒) : 호는 불기당(不欺堂)이며 천질(天質)이 화락하고 단아하여 몸가짐이 구차하지 않았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청빈과 신중한 정사를 펴 칭찬을 들었다.

○ 김우굉(金宇宏) : 명문의 자손으로 기국이 크고 학문을 잘 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호는 개암(開巖)이다.

○ 성윤해(성允諧) : 호는 판곡(板谷)이니 천자가 정중(靖重)하고 독실하게 은거하며 뜻을 구하고져 공부하든 중에 조정으로부터 여러번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 강 서(姜 緖) : 정승을 지낸 강사상의 아들로 승지(承旨)를 지냈다. 대절(大節)로 말술을 먹어도 흩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신과 같다고 하였으니 일세의 기사(奇士)였다.

○ 정국성(鄭國成) : 효옹(孝翁)의 6대손으로 호는 복재(復齋)이다‘ 천자(天資)가 장중(莊重)하고 언소(言笑)가 적어 향인들의 의표가 되었고 많은 제자에게 학문을 권하고 그 방법을 알려주었다. 목사 윤국형(尹國馨)이 조정에 천거하여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 하지 않았다.

○ 권문해(權文海) : 벼슬이 승지(承旨)였고 < 대동운옥(大東韻玉) >을 찬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열람하여 옛 문화 연구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 하 락(河 洛) : 진사시에 장원을 하여 왕자 사부(師父)를 역임하였다.

○ 김 각(金 覺) : 언건의 아들로 풍채가 호상(豪爽)하고 역량과 학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임진란때 창의(倡義) 유공하여 순찰사가 조정에 보고하니 예빈사정(禮賓寺正)이 제수되었고 후에 아들 지복(知復)의 유공으로 좌승지에 증직 되었다.

○ 송 량(宋 亮) : 임진란에 창의 유공으로 주부(主簿) 벼슬이 제수 되었다.

○ 조 휘(趙 徽) : 사마시에 장원하여 역임하고 공훈을 세워 교리(校理)로 증직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나, 수를 하지 못하여 나라를 위하여 쓰이지 못하여 애석하다.

○ 김홍민(金弘敏) : 김 범(金 範)의 아들로 가문의 학풍을 선승하고 실천이행함을 독실히 하였으며 마음이 맑고 물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김학사9金學士)라 칭송하였다. 기상과 심지가 이마위에 나타나 있어 오래 수를 하지 못 하였고 벼슬 Edh한 전한(典翰)에 그쳤다. 뒤에 도승지로 추증되었고 호는 사담(沙潭)이다.

○ 김홍미(金弘微) : 홍민의 아우로 일찍이 서애의 문도가 되어 학문이 엄정(淹精)하고 글 솜씨가 남보다 뛰어났다. 그는 평소 말하기를 총명한 것이 꾸준히 공부하는 것보다 못 하다고 하였다. 문화(文華)가 전아(典雅)하여 대성 할 것으로 촉망 하였으나 이찍 죽어서 벼슬이 이조첨의에 그쳤다.

○ 조 익(趙 翊) : 일찍이 장원으로 진사가 되고 문과에 올라 장령(掌令), 필선(弼善) 등을 역임하고 행의가 강방하며 학문과 글 솜씨가 뛰어났으나, 조졸(早卒)로 사회에 조금더 이바지 하지 못 하여 애석하다.

○ 김광엽(金光燁) : 장원으로 사마에 뽑히고 같은 해에 등재하여 응교가 되었으며 문재가 민첩하고 행의가 맑고 신중하여 당세에 추중하였으나, 쌓은 실력만큼 뜻을 펴지 못하였다.

○ 김정룡(金廷龍) : 김담수(金聃壽)의 아들로 가문의 효를 이어받았으며 군수를 역임하였다.

○ 김사종(金嗣宗) : 임진란에 군공으로 거제 현령을 역임하고 노량진(露梁津)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성 람(成 灠) : 초명(初命)은 협(浹)이나 59세에 개명하였다. 음사로 현관(縣官)을 지냈다.

○ 조우인(曺友仁) : 승지를 역임 하였고 글짓는 솜씨가 화려하고 민첩하였다. 광해군 년간 (광해13년 1621) 서궁에 입직하면서 “장추고문(長秋錮門) 감구시(感舊詩)”라는 시를 지은 것으로 화를 입어 3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서 낙동강가로 물러났다.

○ 김 혜(金 혜) : 사람됨이 소탕하고 시 짖기를 즐겨 하였으며 군수를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 황 뉴(黃 紐) : 근후하며 기국이 홍원(弘遠)하였다. 지평을 역임 하였으나 불행이 요절(夭折)하였다.

○ 정경세(鄭經世) : 효옹(孝翁)의 후손이다.

○ 정 심(鄭 杺) : 경세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청개(淸介)하고 글짓는 솜씨가 정교하고 치밀하였으며 과거 급제 후 예문관 검열을 역임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요절(夭折)하였다.

이밖에 곽득하(郭得賀), 곽규창(郭規昌, 김사우(金師禹), 김자연(金自淵), 김효정(金孝貞), 김 겸(金 謙), 김 장(金 漳), 한 겸(韓 謙), 김안생(金安生), 박 옹(朴 擁), 정효옹(鄭孝翁), 손 등(孫 登), 홍여강(洪汝剛), 홍우명(洪禹明), 황종형(黃從兄), 황경형(黃敬兄), 황 관( 黃 觀),

황 연(黃 椽), 김상직(金尙直), 이정양(李貞陽), 김팽수(金彭壽), 김 화(金 鏵), 김 약(金 若), 권득경(權得經), 노 봉(盧 峰), 이 곽(李 廓), 노덕기(盧德基), 김관도(金觀道), 김기관(金淇觀), 김민수(金旼守), 김 치(金 錙), 김장춘(金長春), 김언충(金彦冲), 홍 주(洪 澍),

홍수주(洪修澍), 이효장(李孝長), 이 조(李 雕), 김안래(金安來), 김수균(金守鈞), 김원수(金源守), 이수생(李壽生), 최문손(崔文孫), 이수붕(李壽朋), 이수천(李壽川), 이수몽(李壽蒙), 한가견(韓可堅), 강응겸(康應謙), 김정원(金貞元), 정회아(鄭懷雅), 김수억(金守億),

김광복(金匡復), 김수말(金守末), 김문기(金文紀), 노상지(盧尙志), 박수림(朴守林), 박인정(朴仁亭), 박인정(朴仁貞), 방유령(方有寧), 이 반(李 胖), 하 결(河 潔), 김의견(金義堅), 신송주(新松舟), 구달손(丘達孫), 김숙춘(金叔春), 김사원(金士元), 변이흠(卞李欽),

김국량(金國良), 노치무(盧緇武), 김효급(金孝給), 구수복(具壽福), 이 항(李 沆), 신 담(申 澹), 신 징(申 澄), 신 활(申 活), 한순가(韓順可), 장순손(張順孫), 박유경(朴裕慶), 조 하(趙 夏), 조서경(趙瑞卿), 조서정(趙瑞廷), 조윤령(趙允寧), 황맹헌(黃孟獻), 황신헌(黃信獻),

김수홍(金粹洪), 강 온(姜 溫), 황이윤(黃怡允), 김경석(金景錫), 박윤경(朴潤卿), 박언신(朴彦臣), 김 옹(金 顒), 김정간(金貞榦), 김광준(金光準), 정 인(鄭 璘), 이수홍(李守弘), 노공좌(盧公佐), 왕 당(王 撞), 김미수(金眉壽), 홍춘경(洪春卿), 홍춘년(洪春年), 김대종(金大鐘),

우 상(禹 鏛), 강사상(姜士尙), 강사안(姜士安), 노 홍(盧 鴻), 박귀서(朴龜瑞), 박영준(朴英俊), 서극일(徐克一), 조희윤(趙禧允), 홍침(洪 琛), 정유길(鄭惟吉), 정지연(鄭芝衍), 노국신(盧國慎), 김 표(金 彪), 홍영효(洪永孝), 홍윤최(洪胤崔), 홍섭윤(洪涉胤), 김 발(金 潑),

정윤조(丁允祚), 정윤희(丁胤禧), 정윤우(丁胤祐), 정윤복(丁胤福), 성 낙(成 洛), 성 영(成 泳), 고흥운(高興雲), 황기효(黃愭孝), 황혜기(黃憓愭), 황징혜(黃撜憓), 권 겸(權 㻩), 강 신(姜 紳), 김 근(金 瑾), 김 침(金 琛), 이빈유(李빈由), 김담수(金聃壽), 하 항(河 沆), 강 연(姜 綖), 강 설(姜 雪), 이민성(李民聖), 강 우(姜 우), 노대하(盧大河), 김득가(金得可), 윤 진(尹 瑱),

정이홍(鄭而弘), 노대해(盧大海), 이덕형(李德馨), 서 의(徐 誼), 김 옥(金 玉), 윤 식(尹 湜), 김인선(金麟善), 노도형(盧道亨), 신경익(申景翼), 신한룡(辛翰龍), 정여룡(鄭汝龍), 황준원(黃俊元), 서희조(徐希祚), 등이 수록 되었다.

살펴 보건데 조선시대 인물 조목에 대하여는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 하게 된다.


첫째, 수록된 인물 중에 행적 기록이 대단히 소략한 분이 많다 예를 들면 정승을 지낸 김귀영, 강사상, 등 그 당시에 이미 상당한 행적이 있음에도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행적이 소략하다.


둘째, 임진왜란에 유공하였거나 화를 당한 인물에 대한 행적의 기록이 없거나 대단히 소략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임란으로 죽은 정국성, 하 락 부자, 창석 본인의 어머니, 정경세의 어머니와 아우 정흥세, 그리고 송 량, 김홍민, 조우인, 김 혜, 김광두, 조 익, 조 정, 등등 은 임난에 창의의 주역이었음에도 행적 기록이 전혀 없거나 소략함


셋째, 창석본 편찬당시(1617) 인물조목 서두에 개관(盖棺)하지 아니하면 수록 않는 구례에 따른다고 명정 하였음에도 그 당시에 생존하였던 김정룡(1561ㅡ1619), 조우인(1561ㅡ1625), 김 혜(1566ㅡ1624), 정경세(1563ㅡ1633), 성 람(1556ㅡ1620),등이 수록되었음은 의문점이다. 따라서 이 책본은 이후에 간행된 청대본 책본의 머리에 적어둔 바와 같이 창석의 손자 이재관이 속록을 낼 때 상당부분 증보를 하였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생존자를 수록한다면, 조 정, 김광두, 등 유력인물이 누락 되었는 것은 어떤 기준이었는지 의문이다.


넷째, 지금의 관점으로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일부 인물은 수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창석 자신의 형 월간(月澗) 이 전(李 㙉), 풍양조씨 상주 입향조 조 숭(趙 崇), 상산김씨 전서공 파조 김거도(金居道), 벼슬과 문장으로 이름난 정사룡(鄭士龍), 등등 여러 인물들이다.

이상 수록 인물은 일반 현사(賢士)이고 이어서 효열(孝烈)과 은사(恩賜) 인물을 구분하여 수록하였는데 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서문을 실었다.

일찍이 중국 사람들이 지은 읍지를 살펴보면 벼슬한 자는 비록 낮은 벼슬 일지라도 모두 수록하였으나 처사(處士), 수재(秀才)는 후세에 이름이 들나지 않으면 수록하지 않은 것은 그 인물을 고르기가 어려워서 벼슬한자를 일률적으로 한계를 정한 것이다. 군자(君子)의 논리로 사람을 논 할 때 그 사람의 좋은 행적을 취하고 그 세밀한 행적은 하자가 없으면 비록 3 사람 중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고 10집중에 충신이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문헌에 인재로 여러 사람이 있다고 함이랴. 그러므로 내가 기록하는 것 또한 이 예를 한계로 삼아 덕을 숨기지 아니하고 잠행(潛行) 하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칭찬 할 만 하드라도 모두 등재하지 못할 것이다. 규모지국(規模之局)이 어편애성가괴야(於偏隘誠可媿也)라 이미 그 이름 밑에 행적의 사실 기록이 없는 자는 그 사람을 선한 행적이 없지 않다고 하는 것을 가기(可紀)라. 특별히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넓지 못 하기 때문에 이번에 빠진 기록은 뒷날에 박식한 아량을 기다릴 뿐이다.

라고 하였으니 인물 수록기준 설정의 애로점을 설명하였다.


- 효행(孝行) : 모두 조선시대 효행자 7 명이 수록 되었는데 5명이 임란에 살해 당하였다.

○ 박세연(朴世延) : 사친지효(事親至孝)하고 장례 삼년 려묘(廬墓)하고도 수 일을 지체하니 향인들이 감탄하였다.

○ 김희정(金希禎) : 벼슬이 별시위(別侍衛)로 어릴 대 부모상을 장성한 뒤에 3년 추복(追服)하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 김유성(金有聲) : 진사로서 임진난에 산중에서 부자 함께 적군과 교전할때 적장이 그의 부친을 살해 하려 하니 그가 달려들어 몸으로 저항하다 부자모두 살해 당했다. 명(命)으로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 정흥세(鄭興世) : 임진란에 그의 형 경세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뒤 따라오는 왜적을 피하다가 형은 적의 화살을 맞고 넘어지고 혼자 어머니를 호위하다가 살해당했다. 뒤에 주부(主簿)벼슬이 증직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 권응정(權應井) : 임진란에 모친과 강변에 피난중 적을 만나 혈서(血書)로 ‘勿殺害(물살해)’라고 하는 글을 옷깃에 써있는 것을 본적이 감동하여 살려 주었다가 다른 적을 만나 막무가내로 어머니를 해칠려고 하니 몸으로 가로막았으나 끝내 모자를 함께 살해하였다. 이때 그의 처 채씨는 어린 딸과 함께 강물에 투신 수절 하였다. 뒤에 정려를 내렸다.

○ 하경휘(河鏡輝) : 하 락의 아들로 생원이다. 임난에 부친이 적에게 상하여 빨리 피하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 없어 부자가 함께 살해당했다.

○ 정 일(鄭 鎰) : 진사로 글을 잘 하는 천재라고 하였다. 부모상에 3년 시묘살이 중 임진란에 적을 만나 굴하지 않으니 끝내는 살해당했다.

- 은사(恩賜) : 모두 11명이 수록 되었는데 노 홍, 강 온 은 아들 노수신, 강사상이 정승을 지내므로 하여 정승에 각각 증직되었고 조윤성, 신 운, 이수인, 고흥운, 황 빈, 김 막, 조광헌, 송신민 은 아들 조휘, 신경익. 이 준, 고인계, 황정간, 김원진, 조정,송광국 등의 훈공(勳功)으로 참판, 승지, 정랑 등이 증직 되었으며 정여관은 아들 정경세의 귀로 좌찬성이 증직되었다.

- 효열(孝烈) : 효자와 열녀를 구분 수록 하였는데 먼저 효자는 고려시대 1명과 조선시대에 4명이다.


* 효자(孝子)

○ 신 우(申 祐) : 고려시 안찰사를 지냈다. 3년 시묘에 묘 앞에 대나무가 돋으니 기이하다고 하고 정려를 내렸다.

○ 강 익(康 杙) : 생원으로 모친상에 죽으로 연명하였으며 부친상에는 아우와 함께 밤마다 흙을 져다가 장사를 지냈다. 아우가 저역 병이 들었을 때 주야로 극진 간호 했으나 차도가 없자 뱀미 명약이라는 말을 듣고 손수 잡아 먹이니 향중인 들이 그의 효우를 칭송했다.

○ 하 빈(河 빈) : 17세에 임난 피난시 부친이 적의 칼에 상할 지경에 대적하다가 부자 함께 살해를 당하였다.

○ 서상남(徐尙男) : 부사 극일의 아들이다. 아버지 상에 여막을 치고 조석으로 예를 드렸다. 어느날 꿈에 공의 효행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장황한 꿈 이야기를 수록 하였다.

○ 신 경(申 擎) : 임진란에 그의 아버지가 적에게 해를 당할 때 스스로 막았다


* 열여(烈女) : 열여는 모두 17 명이 수록 되었는데 그중에 임란에 있었던 사실이 9명이고 남편을 위하여 순절한 부인이 4명이다. 아래의 전(錢)씨이하 4명은 중인 신분 으로서 국법에서는 ‘씨’로 부를 수 없지만 중조(中朝* 중종 임금 대)부터 ‘씨’로 칭하는 제도 개선에 의하였음을 부기(附記)하였다.

○ 김 씨(金 氏) : 김 심(金潯)의 처로 17세에 남편이 죽자 머리를 잘라 죽을 때까지 몸을 지켰다.

○ 정 씨(鄭 氏) : 교리 권달수(權達手)의 처이다. 연산조로 부터 권교리가 피살되자 60여일동안 식음을 전패하고 부군의 유체(遺體)가 돌아 왔을 때 기력이 쇄잔 하여 통곡하며 따라 죽었다.

○ 이씨(李 氏) : 흥양인으로 김 자(金 滋)의 처이다. 남편이 죽자 아들 언건(彦健)을 데리고 날마다 집전(執奠)을 하면서 가지고 간 제반(祭飯)을 저울로 달아서 신이 응향(應饗) 하였는지를 알아 볼 정도로 정성을 다 하였다.

○ 황 씨(黃 氏) : 박사 강 설(姜 雪)의 처이다. 남편이 서울에서 임종할 때 ‘그대와 자식이 걱정된다.’ 고 졸하자 ‘나도 따라 가겠노라’고 하면서 30일이나 식음을 전패하고 절명하였다. 윤국형 목사가 이를 듣고 조정에 상달하여 정려의 명이 내려질 무렵 임진란이 이러났다.

○ 하 시(河 氏) : 참봉 김 도(金 燾)의 처이다. 김 도는 조리(操履) 수결(修潔) 하였는데 임진란에 내외가 ‘만약 적이 해치려고 하면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말자’ 고 약속하고 어느날 적이 다가오자 내외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 양 씨(楊 氏) : 부솔 김 환(金 瓛)의 처다. 남편의 죽음에 따라 죽었다.

○ 배 시(裵 氏) : 부장 충원의 딸이다.19세에 임란을 당하여 적에게 끌려 갈세 큰소리로 적을 꾸짖고 물에 뛰어 들어 자결했다. 세인들은 그 웅덩이를 열녀연 이라했다.

○ 윤 씨(尹 氏) : 사인 김 현의 처이다. 임진란에 산속 피난중 적에게 들켜서 스스로 강물에 투신 자결했다.

○ 김 씨(金 氏) : 사인 권손건의 처이다. 임난 숲속에 피난중 적에게 발견되어 데려가려 하자 그는 옷을 덮어 쓰고 대적하니 노한 적이 칼로 마구 베었지만 수절했다.

○ 전 씨(全 氏) : 사인 황 위의 처이다. 임진란에 산속 피난중 적을 만났지만 병으로 달아날 수가 없어 종에게 업고 갈 것을 청했지만 거부하고 달아나 강안 절벽으로 떨어 졌다가 적에게 대항 하다가 적이 마구 찍어 죽음에도 수절했다.

○ 한 씨(韓 氏) : 사인 정영국의 처이다. 임진란에 강섶 험한 곳에 숨었으나 적이 다가오매 강에 투신 수절 했다.

○ 노 흔(盧 忻)의 처 양녀(良女) : 밤중에 집에 불이 났을 때 거동이 어려워 방에 있던 시아버지를 구출하다가 불에 쌓여 함께 타 죽었다.

○ 유월이 : 현감 김 유의 종이다. 16세에 들어와 60까지 수절하고 임종하며 ‘내 천하여 감히 주인 곁에 갈수 없으니 주인 묘 바라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 이르니 그 소행이 갸륵하여 목사 이 선이 제 지내 주었다.

○ 전 씨(錢 씨) : 정병 최순형의 처이다. 남편의 상에 정성으로 장사하고 조석으로 치전하기를 초상 때와 같이했다. 임난 산중 피난시에도 신주를 품고 제전을 평시와 같이 하다가 적을 만나 항거하고 수절하였다.

○ 이 씨(李 씨) : 정병 엄석산의 처이다. 젊을 때 남편이 죽고 평생토록 복을 입으면서 조석으로 제전에 성심을 다 하였다. 혹 포악한 자에게 몸을 더럽힐까 하여 나쁜옷을 입고 밤이면 칼을 품고 평생 절개를 지켰다.

○한 씨(韓 씨) : 이응남의 처이다.16세에 왜란을 만나 마을 사람들과 산중 바위굴에 숨었다가 왜병이 다가오자 ‘나를 죽여라‘ 고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 정 씨(鄭씨) : 사인 김체신의 첩이다. 임진란 때 남편과 본부인 박씨가 함께 바위굴에 피신중 박씨가 왜병에게 잡혀 갈 때 적에게 박씨를 살려 달라 애원 하여 피신케 하였으나 자기가 적에게 잡혀 욕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자 있는힘을 다 하여 항거하다가 적이 배를 갈라 죽임을 당했다.

전(錢)씨이하 4인은 모두 양녀(良女)이다. 국법에 부인은 사족(士族)이 아니면 소사(召史)라고 호칭 하였는데 그 호칭에 아무 의미가 없어서 중조(中朝) 이후부터 부인의 귀천에 구분없이 통칭하여 씨(氏)로 하였다. 이 4인들의 절행은 모두 표표(表表)히 상을 줄 만 하므로 중조에 씨로 칭하는 제도에 따라서 적는 바이다.

라고, 하여 당시의 신분사회 실상을 알게한다.


자) 고 적(古蹟)


(1) 고도(古都) : 사벌국 고성(古城)은 병풍산(屛風山) 밑에 있다 성 곁에 언덕이 사벌왕의 능으로 전하고, 신라 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웅거한 곳이다.


(2) 고현(古縣)

○ 화창현은 김부식이 이르기를 본래 지내미 현인데 경덕왕 때에 상주(尙州)로 이름을 고쳤고 그 영현(領縣)은 미상이다.

○ 공성현은 본래 신라 때에는 대병부곡(大幷部曲) 이었는데 고려 초에 공성이라 개명하였고 현종년간에 상주에 속 하였으며 주의 남쪽 35리에 있다.

○ 영순현은 북면 임하(林下)촌이니 고려 때 태(太)씨 촌인이 적을 잡는데 공이 있어 영순이라 개명하고 현이 되어 상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북방 33리 허에 있다.

○ 청리현은 리(里)자를 리(理)자로도 표기하고 신라 때 읍리화현(邑里火縣)이니 경덕왕 때에 청요현(靑요현)이라 개명하고 상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 때에 청리라 개명 하였다. 주의 남쪽 25리에 위치한다.

살펴 보건데 예전 고도는 이 조목에 수록한 이외에 중모(中牟), 화령(火嶺), 단밀(丹密), 산양(山陽)현 또한 상주에 속한 고현 이었음에도 수록 하지 않은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3) 산성(山城)

○ 백화산성(白華山城) : 석성(石城)으로 둘래가 1904척 이고 성 안에 개울이 있고 5개소에 샘이 있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 성산(城山) :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무오년(1618년 광해10) 가을에 목사 정호선(丁好善)이 중수 하였다.

우리나라는 3면이 모두 적과 맞서고 있어서 침범하는 적들의 강하고 약한 형세에 따라 방비하고 막아왔다. 이에 대하여는 모름지기 경계지역 험한 자연산천에 방비시설을 하는 대책 없이는 적들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혹 사졸을 잘 훈련시키고 들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자고로 오랑캐를 힘으로 막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정 이라는 사람이 돌궐의 힐리를 격멸한 것이 모두 험하고 기이하게 방어하는 설비로 막아냈던 것이니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겪은 일이다 이와 같은 형세를 버리고 야전에서 성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집에서 적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본주의 산성은 가히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갑자기 액운이 닥쳐왔을 때 계책을 염려하는 것이 실로 오늘의 급하게 힘쓸 일이다.

라고 외침의 대비에 튼튼한 산성이 긴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4) 부곡(部曲)

○ 장천부곡(長川部谷) : 재 주남 20리

○ 무림부곡(茂林部曲) : 재 주북 30리

○ 고무흥촌(古茂興村),연산부곡(連山部谷) : 낙동강 5리쯤 염창(塩倉)이 있다.

○ 백원부곡(白源部谷) : 재 주남 15리

○ 양영부곡(攘寧部谷), 하해부곡(河海部谷) : 모두 본주에 있음

○ 양보부곡(壤寶部谷) : 산양현에 있다.

○ 관제부곡(灌濟部谷), 선은소부곡(繕銀所部谷) : 모두 화령현에 있다.

○ 가량부곡(加良部谷) : 재 주동 15리

○ 보량부곡(保良部谷) : 재 주동 20리

○ 평안부곡(平安部谷), 평산부곡(平山部谷) : 모두 공성현에 있음

○ 주선부곡(主善部谷), 단곡부곡(丹谷部谷), 생물부곡(生物部谷) : 모두 재 단밀현

○ 해산이(海山伊) : 중모현(中牟縣)에 있음

(新增) 장원향(壯元鄕) : 사마방(司馬榜)에 원상(元相)이 계속 나오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장원방(壯元坊)이라 하였으니, 김 범(金 範), 김우굉(金宇宏), 조 휘(趙 徽), 하 락(河 絡), 조 익(趙 翊), 김광엽(金光燁)이 모두 이 고장에 살고 있다.

고, 하였다. 살펴 보건데 신증(新增) 이라고 함은 초간본에 새로운 사실을 더하여 수록 한다는 것인데 현존하는 창석본 상산지가 상주 최초의 향지로 알려진 거와는 상당한 의문이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창석본 이전에 원전이 있었던 것을 창석의 손자 이재관 공이 증보판을 간행하였음이 확실하고 이 조목의 ‘신증’ 수록분은 이재관 공이

증보판을 낼 때 새로 수록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정관(亭觀)

본주의 산은 상령(商嶺)이라 하고 물은 낙강(洛江)이라고 하니 신령스러운 지경의 이름이 산수(山水)에서 오래 이어 졌다. 강의 지류와 산의 예학(裔壑)이 분수에 따라서 유람 할 만 한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므로 그 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을 다음에 열기 하였는데 모두 점지한 까닭은 산수의 상하를 인물에 불구하고 선 후 차례로 하였으니 보는 이는 참고하기 바란다.

고, 서술 한 후에 모두 32개 정관을 열거하였다.

○ 육익정(六益亭) : 청리에 있으니 진사(進士) 김직지(金直之)가 지었다. 목은(牧隱)이 기사(記事)를 지었으나 수 백년 전에 세워 기지(基址)가 허물어져 지금 상고할 수 없다.

○ 낙지정(樂志亭) : 양산리에 진사 박언성(朴彦誠)이 지었다.

○ 지락정(至樂亭) : 산양현의 현감 변계흠(卞季欽)이 세우고 채 수(蔡 壽)가 기를 지었으니 동문선(東文選)에 올랐다.

○ 광여정(曠如亭) : 도연(道淵) 위에 우암 홍언충이 세웠다.

○ 백석정(白石亭) : 낙빈(洛濱)에 강사문(姜斯文) 제(霽)가 지었으며 잡영(雜詠)한 시가 있다.

○ 이적정(二適亭) : 낙동강 상류에 승지 조우인(曺友仁)이 세웠다.

○ 개암(開巖) : 낙동강 상류에 부제학 김우굉(金宇宏)이 이름을 지었다.

○ 매호정(梅湖亭) : 낙동강 상류에 부사 권 겸(權 겸 )이 세웠다.

○ 풍호정(楓湖亭) : 낙빈(洛濱)에 있고 좌랑 조 휘(趙 徽)가 세웠다.

○ 점암(簟巖) : 낙빈에 있고 전한 김홍민(金弘敏)이 이름을 지었으며 지금은 서원으로 들어왔다.

○ 반구정(伴鷗亭) : 낙빈에 있고 진사 문익명(文益明)이 세웠으며 지금은 직장 조 굉(趙 竤)의 것이다.

○ 초학대(招鶴臺) : 삼봉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내달아 낙강의 남쪽에 멈춰 섰고 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을 분황(汾黃)이라 하며 산위에 있는 대이다.

○ 죽암(竹巖) : 낙강의 북안에 있으니 김광준(金光準)이 이름 지었다.

○ 낙지정(樂志亭) : 죽암 아래 가까운 곁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경사스런 날 모여 잔치하는 곳이다.

○ 우암(牛巖) : 낙빈에 있는데 군수 조 정(趙 靖)의 구업(舊業)이다.

○ 무량동(無量洞) : 강에 임하여 마을이 있으니 현감 이 전(李 㙉)이 세웠고 그 밑에서 시를 지었으나 집을 지어 살지는 않았다.

○ 천인대(千仞臺) : 낙빈에 있으니 현감 김 각(金 覺)이 이름 지었다.

○ 가사촌(佳士村) : 합강대 동쪽 단수(丹水) 물가에 지평 류 진(柳 袗)이 살았다.

○ 봉양(鳳陽) : 낙빈(洛濱)에 있으며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이름을 지었다.

○ 낙서헌(洛西軒) 한연당(閒燕堂) : 관수루(觀水樓) 위에 있고 이 항(李 沆)의 거처이며 남 곤(南 袞)의 기문이 있다.

○ 무진정(無盡亭) : 관수루 밑에 있고 본래는 이 항의 것 이었으나 지금은 황윤헌(黃允獻) 소유이다. 이 항이 지은 시가 있다.

○ 목우대(牧牛臺) : 무진정 서편에 있으니 주서 황 뉴(黃 紐)의 거처지로서 본주의 경계지점이다.

○ 신덕촌(新德村) : 헌수봉(獻壽峯) 북편 기슭에 현감 황 징(黃 징)의 거처지이며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의 팔영시(八詠詩)와 소서(小序)가 함께 남아있다.

○ 애일헌(愛日軒) : 헌수봉 밑 남쪽 개울 위에 있고 부사 황세헌(黃世獻)이 세웠다.

○ 풍춘정(風春亭) : 천하리에 잇는데 생원 황 완(黃 琬)이 세웠다.

○ 옥봉정사(玉峯精舍) : 장령 김지복(金知復)이 세웠으며 개울 남쪽에 옥을 깎아 세운듯한 봉우리가 있어 이름 하였고 구명은 헌수봉이다.

○ 사담(沙潭) : 옥봉의 서편 100보 허에 있고 속리산의 물길이 서남(西南)으로 수 십리를 흘러 화산(華山) 밑에서 멈추어 눈썹같이 물이 돌아 못을 이루고 못가에는 송석(松石)이 아름답다. 김학사 (金學士) 홍민(弘敏)이 그 위에 집을 지어 산택정(山澤亭)이라 편액을 달고 류서애(柳西厓)의 시를 차운 하였으니 진세(塵世)를 멀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계류를 따라 내려가면 첩장여단(疊嶂如丹)으로 단장하여 황간 냉천에 이른다.

○ 임천석대석(林千石臺石) : 고려 악사(樂士) 임천석(林千石)이 고려가 망하자 거문고를 안고 백화산에 숨어 높은 절벽위에 대를 쌓고 그 위에서 거문고를 타니 곁에 원효사(元孝寺) 승려들이 가까이서 식사를 하였다. 후인들이 악사의 이름을 대의 이름으로 하였다.

○ 서대(西臺) : 서산 한가지가 동으로 수리(數里)를 뻗어 내린 곳에 큰 언덕이 있고 그 밑을 냇물이 감싸니 서대라 이름하고 사성 김 충(金 冲)이 거처하면서 시를 지었다.

○ 석천대(石川臺) : 현감 김 각(金 覺)이 대를 쌓아 수칸의 집을 짓고 부림 하였고 공의 아들 장령 김지복이 중수 하였다.

○ 우복산(愚伏山) : 속리산 물길이 동남으로 흘러서 수회동(水回洞)에 이르고 상하 10여리에 창애단벽(蒼崖丹壁)이 천석지간(川石之間) 물길에 비치고 사람들이 그 사이를 왕래하니 마치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 소동천(小洞天)이라 할 만 하다.우복(愚伏)은 그 아래에 판서 정경세가 서실을 짛고 이름을 석상(石潒)이라 하였고 잡영(雜詠)을 남겼다.

○ 창석정(蒼石亭) : 청리 오른편 협곡에 있다. 그 가운데 물이 흐르고 그 밑에 송석(松石)의 아취가 있으니 이를 나의 소복(所卜)으로 하고 중간에 이거 하면서 폐정하고 남쪽 수십보에 마을 사람들이 새로 서재를 지어 관동(冠童)의 풍영지지(風詠之地)로 하여 만족하게 서로 만났다.

살펴 보건데 수록된 32개 정관의 권역별 분포는 주치 중앙권에 육익정 외 6개소, 낙동강 권역에 반구정 외 18개소, 백화산 권역에 6개소, 그리고 서부권이 2개소로 낙동강 권역이 제일 많다. 형태별로는 정자 건물이 17개소, 자연승경지 12개소, 촌락 3개소이다.


(6) 사찰(寺刹) : 사찰은 모두 6 개소가 수록 되었다.

○ 용암사(龍巖寺) : 만악산에 있으며 이규보(李奎報)의 기문이 있다.

○ 승장사(勝長寺) : 장천부곡에 있으니 부제학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가 있다. 고려 충열왕이 중국 조정의 명을 받아 동쪽 왜구를 정벌하기 위하여 출정한 상낙공(上洛公) 김방경(金邦慶)을 김해부에서 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이 이 절에서 묵으며 천태종에 소속케 하였다.

○ 미륵암(彌勒菴) : 사불산(四佛山)에 있으니 권 근(權 近)의 기문이 있다.

○ 소림사(小林寺) : 공성현에 있었으니 김의령(金義令)이 중수 하였고 임 춘(林 椿)의 기문이 있다.

○ 흥왕사(興王寺) : 주치 서쪽 5리 쯤에 엄대선(嚴大選)이 이루었고 이 색(李 穡)의 적암기(寂菴記)가 있다. 절은 오래 전에 폐사 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서당을 세워 이명 하곡(霞谷)이라 한다.

○ 용담사(龍潭寺) : 장천부곡에 있다.

살펴 보건데 창석본 간행 당시에 수록한 6 개 사찰 이외에도 남장, 북장, 갑장, 대승, 김용, 용흥, 동해, 황령, 청계, 등 고찰(古刹)이 있었음에도 누락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차) 문한(文翰) : “商山誌 卷之二”(상산지 권지이) ‘十文翰’(10문한)으로 표기한 후 문한의 종류별로 제목과 찬자(撰者)에 이어 글의 내용을 수록하였다.


(1) 제영(題詠) : 관사(官舍)가 여러번 재난을 입어서 제영이 많이 전하지 못하였다고, 서술한 후 작품과 저자를 이어 수록하였는데 본란에서는 작품이름과 저자를 나열하기로 한다.

* 제고헌(題高軒) : 이규보(李奎報), * 발상주(發尙州) : 이규보, * 상주신루(尙州新樓) : 용헌(容軒) 이 원(李 原), * 차상주객사운(次尙州客舍韻) : 조 준(趙 浚) * 차운(次韻) : 관찰사(觀察使)송 렴(宋 렴) * 풍영루(風詠樓) : 이숭인(李崇仁) * 차(次) : 이 행(李 荇)

* 차운기상목(次韻寄尙牧) : 신 잠(申 潛) * 봉화전현운(奉和前賢韻) : 려성위 (礪城尉) 송 인(宋 寅), * 차운(次韻) : 관찰사(觀察使) 심수경(沈守慶), *차운(次韻) : 관찰사 오 상(吳 祥)

* 차운 : 황준량(黃俊良) * 차운 : 풍기군수 이 황(李 滉) * 차운 : 관찰사 이양원(李陽元) * 차운 : 목사 : 류영길(柳永吉) * 차운 : 관찰사 윤탁연(尹卓然) * 차운 : 관찰사 안 성(安 省)

* 차운 : 관찰사 유 홍(兪 泓) * 차운 : 감사(監司) 윤탁연(尹卓然) * 즉사술회록봉조목안하(卽事述懷錄奉趙牧案下) ; 감사(監司) 이사균(李思鈞) * 차운 : 관찰사 유 홍

* 차운 : 황준량(黃俊良) * 차경호운(次景浩韻) 조사수(趙士秀) * 차운 : 관찰사 오 상(吳 祥) * 차운 : 관찰사 유 홍(兪 泓) * 차성목황중거운(次星牧黃仲擧韻) : 관찰사 이양원(李陽元)

* 차운 : 관찰사 홍성민(洪聖民) * 차운 : 관찰사 윤탁연(尹卓然) * 차운(次韻) : 어사(御使) 홍인서(洪仁恕) * 자운 : 조사수(趙士守) * 차운 : 어사 황준량(黃俊良) * 차운 : 관찰사 유 홍(兪 泓) * 차북천조춘운(次北川早春韻) : 감사 이언적 * 차운2수 : 어사 황준량

* 차운 : 관찰사 유 홍(兪 泓) * 차사암상운정도사(次思菴相韻呈都事) : 박소립(朴素立) * 기증상산부로(寄贈商山父老) : 관찰사 윤탁연(尹卓然) * 제서헌(題西軒) : 김종직(金宗直)

* 차운 : 목사 류영길(柳永吉) * 근영(謹咏) : 향인(鄕人) 조 휘(趙 徽) * 차운봉답언주(次韻奉答彦冑) : 목사 류영길 * 차벽상운정류목사(次壁上韻呈柳牧師) : 윤안성(尹安性)

* 제추월당(題秋月堂) : 류영길 * 풍영루망산대호운(風詠樓望山大呼韻) : 조 휘(趙 徽) * 문종형정옥도상주이시희지(聞從兄庭玉到尙州以詩戱之) : 임 춘(林 椿)

* 기상주정서기(寄尙州鄭書記) : 임 춘 * 우(又) : 임 춘 * 차운정서기견증(借韻鄭書記見贈) : 임 춘 * 중유상주기인(重游尙州寄人) : 임 춘 * 낙동강(洛東江) : 안 축(安 軸_)

* 낙동강(洛東江) : 이규보(李奎報) * 용담사(龍潭寺) : 이규보 * 용담사(龍潭寺) : 김양경(金良鏡) * 낙동요(洛東謠) : 김종직(金宗直) * 낙동진(洛東津) : 김종직 * 권상주학자독소학(勸尙州學者讀小學) : 김안국(金安國) * 방 박진사언성유거(訪 朴進士彦誠幽居) : 응철근지(應哲謹識) * 경차(敬次) 회낙지정(懷樂志亭), 회모재(懷慕齋) ,속주인(屬主人) : 정경세 (鄭經世)

* 경차(敬次) : 이 준(李 埈) * 경차(敬次) : 관찰사 김지남(金止男) * 여향지등관수루(與嚮之登觀水樓) : 김일손(金馹孫) * 차(次) : 권오복(權五福) * 별향지(別嚮之) : 김일손

* 차(次) : 권오복 * 신덕정사잡영(新德精舍雜詠) 백화서원(白華書院), 수봉춘화(壽峯春花), 계정향음(禊亭鄕飮), 점탄조어(簟灘釣魚), 사연낙월(沙烟落月), ○암효무(○岩曉霧), 남○어화(南○魚火), 서촌취연(西村炊烟) : 황여헌(黃汝獻)

* 연악서재(淵嶽書齋) : 김 범(金 範) * 차운(次韻) : 김 충(金 冲) * 차운(次韻) : 김홍민(金弘敏) * 차운(次韻) : 이 준 * 차운(次韻) : 목사 강복성(康復誠) * 차운(次韻) : 균전사(均田使)김 ○(金 ○) * 차운(次韻) 목사 정호선(丁好善) * 차운(次韻) : 목사 김지남

* 회산양구거차류광미운(懷山陽舊居次柳光美韻) : 강사상(姜士尙) * 존성당(尊性堂) 산양서당(山陽書堂) : 具鳳坽(구봉령) * 제정희아연정(題鄭希雅蓮亭) : 김 옹(金 顒) * 경차(敬次) : 김 충(金 冲) * 우(又) : 김 충 * 차운(次韻) : 노 기(盧 麒) * 차운증우곡(次韻贈愚谷) : 이 준

* 제김희장소헌(題金希張小軒) : 노 기 * 차사담운(次沙潭韻) : 성윤해(成允諧) * 수경재즉사(水鏡齋卽事) : 김 충 * 송면우대설(松面遇大雪) : 노수신(盧守愼) * 차송면운시무회(次松面韻示無悔) : 노수신 * 회노음산우거처야((懷露陰山寓居處也) : 노수신

* 봉산서원유감취필(鳳山書院有感醉筆) : 노수신 * 발사곡(發沙谷) : 노수신 * 귀은가(歸隱歌) : 노수신 * 국화사(菊花辭)병서(幷序) 장암(藏岩), 송전조우(松田阻雨) : 노수신

* 제매호정(題梅湖亭) : 류성룡(柳成龍) * 제재벽(題齋壁) : 조 휘(趙 徽) * 제사담(題沙潭) : 민여해(閔汝諧) * 범월(泛月) : 강 신(姜 紳) * 제암(題岩), 문산(問山), 산답(山答), 계정(溪亭) : 정경세

* 우곡잡영20수(愚谷雜詠20首) 서실(書室), 계정(溪亭), 오봉당(五峯塘), 오로대(五老臺), 상봉대(翔鳳臺), 별주석(鱉柱石), 우화암(羽化岩), 어풍대(御風臺), 만송주(萬松洲), 산영담(山影潭), 수륜석(垂綸石), 강암(舡岩), 화숙당입차하(花淑當入次下) 운금석(雲錦石), 쌍벽단(雙壁壇), 청산촌(靑山村), 화비암(畵啚巖), 공선봉(拱仙峯), 수회동(水回洞), 화숙(花淑) : 정경세

* 창석정기(蒼石亭記) : 이 준 * 창석정8영(蒼石亭8詠) 청효고첩(靑요古堞), 백록유허(白鹿遺墟), 견산낙경(見山洛景), 상령부운(商嶺浮雲), 경지소여(竟池小여), 유수평사(酉水評沙), 장정취류(長汀翠柳), 곡체창랑(曲체蒼筤),

*낙강범월시회연구(洛江泛月詩會聯句) 제북계계축(題北溪契軸 : 조 익(趙 翊), 용타운(用他韻) : 이 준, 세연당(洒然堂) : 李德馨(이덕형), 차(次) : 이호민(李好閔), 무량동병소서(無量洞幷小序) : 이 전(李 㙉), 사담감구(沙潭感舊) : 강복성(康復誠), 차(次) : 이 준, 우용타운(又用他韻) : 이 준, 제옥봉정사2수(題玉峯精舍2韻) : 이 준, 우(又) : 이 준, 차운2수(次韻2首) : 강복성, 차운(次韻) : 정호선, 우옥당((又玉堂) : 정호선, 차옥봉정사운(次玉峯精舍韻) : 황 면(黃 緬), 차운(次韻) : 전 식(全 湜), 배○간지주유서기(陪○澗地主游書院) : 이 준, 차(次) : 강복성, 춘일유연악(春日遊淵嶽) : 이 준, 동간일명등담(東澗一名釜潭 : 이 준, 서간일명조암(西澗一名槽岩) : 이 준, 유유취(有幽趣) : 이 준, 효곡수석(孝谷壽席) : 이 준, 낙사회석즉사봉우곡제공(洛社會席卽事奉愚谷諸公) : 정호선, 차운(次韻) : 이준, 방유천(訪酉川) : 조우인(曺友仁)


(2) 기(記)

* 객관기(客觀記) : 안 축(安軸), * 풍영루기(風詠樓記) : 이 색(李穡), * 풍영루기(風詠累記) : 권 근(權近), * 풍영루중수기(風詠樓重修記) : 김종직(金宗直), * 응신루기(凝神樓記) : 홍귀달(洪貴達) *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 홍귀달(洪貴達),

* 육익정기(六益亭記) : 이 색(李 穡), * 한연당기(閑燕堂記) : 남 곤(南 袞), * 공검지기(恭儉池記) : 남 곤, * 지락정기(至樂亭記) : 채 수(蔡 壽), * 사불산유산기(四佛山遊山記) : 승진정(僧眞靜), * 용암사기(龍岩寺記) : 황보탁(皇甫倬), * 소림사중수기(小林寺重修記) : 임 춘(林 椿),

* 미륵암기(彌勒庵記) : 권 근(權 近), * 향사당중수기(鄕射堂重修記) : 이 준, * 존애당기(存愛堂記) : 이 준, * 락지정기(樂志亭記) : 이 준,


(3)서(序)

* 상주향사당제명서(尙州鄕射堂題名序) : 주세붕(周世鵬), * 향사당제명록서(鄕射堂題名錄序) : 정경세(鄭經世), * 낙사인해계서(洛社寅亥稧序) : 정경세(鄭經世)


(4)비문(碑文)

* 천조도독부도독고공책위애비명 병서 (天朝都督府都督高公策威愛碑銘 幷序) : 이 준, * 판관권공사의비명 병서(判官權公死義碑銘 幷序) : 이 준,


(5)상량문(上樑文)

*풍 영루상량문(風詠樓上樑文) : 황준량(黃俊良), * 향교대성전상량문(鄕校大成殿上樑文) : 이 준, * 향교명륜당상량문(鄕校明倫堂上樑文) : 이 준, * 도남서원상량문(道南書院上樑文) : 정경세, * 이현사상량문(二賢祠上樑文) : 이 준,


(6)잡저(雜著)

* 낙강범주시발(洛江泛舟詩跋) : 유호인(兪好仁) * 유사장문(諭師長文) : 류성용(柳成龍) * 정순찰사정공문(呈巡察使鄭公文) : 이 준 * 우암기(愚岩記) : 정경세 * 옥성동제명기발(玉成洞題名記跋) : 이 준 * 서문한후(書文翰後) : 이 준 * 서상산지후(書商山誌後) : 이 준

살펴 보건데 문한편(文翰篇)은 <商山誌 卷之二> (상산지 권지 이) 별책으로 편집되었다.

먼저 수록한 문한의 종류별 현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한 종류별 수록현황

구 분

수록편수

저자수

최다작자편수

비 고

172 편

76

이 준 27편

졔 영(題 詠)

148

54

이 준 12

원운(原韻)54,차운(次韻)41,연구(聯句)53

기 (記)

17

12

이 준 3

서 (序)

3

2

정경세 2

비 문(碑 文)

2

1

이 준 2

상량문上樑文

3

3

이 준 4

잡 저(雜 著)

4

4

이 준 4

문한편 인물들은 당대 상주 출신이거나 상주와 관련한 전국적 인물들이고 특별히 고려시대에 이규보, 임 춘, 조선시대에 김종직, 김안국, 김일손, 구봉령, 류성용, 이 황, 이덕형, 이호민, 주세붕, 유호인, 황준량, 권 근, 이 색, 등 외지의 전국적 인물이라는 점은 웅주거목(雄州巨牧)으로서 상주의 위상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제영편에는 낙동강과 백화산, 우산 등 명승지와 관련한 창작시(創作詩)가 제일 많고 도남서원에서 개최한 낙강범월시회에서 남긴 30여편의 연구시(聯句詩)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수록한 글의 편수 중에 창석 자신의 글이 제일 많이 실렸다. 이에 대하여 ‘書 文翰後’(서 문한후)에 이르기를

나는 문묵(文墨)을 드려내려는 뜻이 아니고 약간의 기사(記事)한 문장을 스스로 지었다는 혐의(嫌疑)로 삭제된다면 장차 이일마저 따라서 세상에 밝혀지지 않을 것이 두려워 쓰는 것이다. 당초에 찬술할 뜻이 아니었으나 자연 산천을 대상으로 하여 읊은 구절에 사적(事蹟)이 기록되고 아울러 만록(漫錄)도 그 사이에 병록(幷錄)되니 뒷날 내가 다녔던 산천을 탐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함이고 또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중에 내 것만 제외하는 것이 불가한 때문이다....중략....우리 퇴계 이 선생도 또한 그의 기문과 시록(詩錄)을 단양산수편(丹陽山水編)에 병록 하였으니 예전의 예를 근거하여 보는 이는 관대히 여겨주기 바란다.

고, 변명하였다.

문한편 모두가 크게 보아 상주사(尙州史)와 관련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記), 서(序), 비문(碑文), 상량문(上樑文), 잡저(雜著)는 상주향토사와 깊은 역사성을 가진 글이라 할 수 있다.

4. < 상산지 >창석본의 보전(保全)과 증보(增補)

창석본 <상산지>는 ‘書 商山誌 後’(서 상산지 후)에 최초의 상주 향지(鄕誌)라고 밝혀 놓았다. 그리고 권상일이 영조 년간(1949 영조25)에 간행한 청대본의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만력(萬曆) 병진(丙辰 *1616 광해8년)에 창석 이공이 찬성(撰成)한 <상산지> 2권은 옥성동(玉成洞)에 소장(所藏)하였고 그 후 선생의 손자 신와(新窩) 이재관(李在寬) 공이 간략한 속록(續錄)을 내었다’ 라고 하였다. 옥성동 이라고 함은 그 당시에는 이현사(二賢祠)였던 옥성서원(玉成書院)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옥성서원에 보관한 이후 130여년 동안 계속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겠으나 청대본 찬술은 창석본을 근거로 한 속지(續誌)라는 점에서 그대로 보관한 것으로 인정하고, 이후에 구당본 이나 상주목읍지를 간행 할 때에도 창석본 원전을 참고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창석본 원전의 소장처가 어디라고 밝힌 문헌 또한 발견하지 못 하였다. 주지하는바 오늘날 창석본 < 상산지 > 원전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는 것이 유일 하다고 알고 있고 필자 또한 이에 따라 수록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러 조목에서 1617년 (광해 9)에 간행한 원전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 질단(秩壇) 조 (2) 이현사(二賢祠) 목(目)에 옥성서원 창건년도 ‘ 숭정(崇禎) 경오(庚午) ’년은 1630년이다.

둘째 : 명환(名宦) 조목에 김지남(金止男)의 상주목사 도임은 1620년 (광해12)이고 이후 조찬한(趙鑽韓), 원 곤(元 錕), 이호신(李好信), 홍사효(洪思斅), 윤안국(尹安國), 이정겸(李廷謙), 송석조(宋碩祚), 류항영(柳恒永), 이여규(李如圭),에 이어서 마지막 김상복(金相宓) 목사는 1638년(인조16)에 도임하였다.

셋째 : 인물(人物)조목 수록 인물 중에는 창석본 원전 간행 이후 작고한 조우인(曺友仁 1561~1625), 김정룡(金廷龍 1561~1619), 김 혜(金 혜 1566~1624), 정경셰(鄭經世 1563~1633), 황준원(黃俊元 1548~1618), 성 람(成 灠 1556~1620), 등이 수록 되었다.

넷째 : 고적(古蹟) 조 (3) 산성(山城) 목(目)에 ‘성산산성(城山山城)을 광해10년(1618)에 중수 하였다’고 ,수록 되었다.

다섯째 : 고적조 (4)부곡(部曲) 목(目) 말미에 “新增” (신증)이라 표기하고 ‘장원향(壯元鄕)’에 대하여 수록하였다.

여섯째 : 정관(亭觀)조 우복산(愚伏山) 목에 ‘판서 정경세가’ 운운 하였는데 창석본 간행시 우복 정경세는 판서 직위에 있지 않았다.

위 6개항 수록 사실은 모두 창석본 원전이 간행된 1617년 이후에 까지 있었던 일이거나 생존하였던 인물들이다. 특별히 인물에 대하여는 관(棺) 덮개를 덮기 전에는 수록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新增”(신증) 표기까지 하면서 추가 수록 하였다는 것은 원전을 증보하여 새로 편찬 한 것이 분명 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현재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창석본은 청대본 발문에 밝혀 놓았듯이 신와 이재관 공의 신증 증보판이 확실 한 것으로 본다. 신증 증보판을 언제 편찬 하였는가에 대하여는 앞의 ‘명환(名宦)편에 1638년 상주목사로 도임한 김상복 목사 이후가 확실하나 그 년대는 잘 모른다. 다만 신와 이재관 공의 생몰년대는 1620년 (광해12)에 출생하여 1689년 (숙종15)에 69세로 졸 하였으니 필력이 왕성하다고 할 수 있는 50세경으로 본다고 하면 1670년 (현종11) 정도로 짐작 하면 창석본 원전이 1617년에 간행되고 11년 내지 53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5. 글을 맺으며

앞에서 거론한바 있거니와 창석본 <상산지>는 고도(古都) 상주의 최초 향지(鄕誌)로서 이후 조선 말기에 까지 수차례 간행된 여러편의 상주 사록(史錄)의 기본이었고 현대에 간행한 <상주시사>의 기초 또한 여기에서 비롯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식견 부족으로 비록 충분하지 못한 앞의 서술한 내용을 요약하고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첫째,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조선시대에 상주의 향지(鄕誌)는 창석본 <상산지>를 비롯하여 7차례 간행 되었는데 이후 청대본이 간행되기 까지는 무려 132년이 경과하여 그 사이의 상주 사록(史錄)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할 수 있고 조선말기 고종년간 에는 연달아 3차례가 간행한 것은 국운이 기울어지므로 하여 민심이 초조한 까닭에서 인지도 모른다.

간행한 책본 마다 특성이 있고 시대적 변화의 실상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 만큼 일곱편 모두 소중한 상주사(尙州史)의 단면이라 할 수 있으므로 모든 향토사의 연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나 순 한문본(漢文本) 전 책본에 대한 완전한 번역과 종합적인 연구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하여 상주 향토사를 연구하는 후학들로서는 크나큰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먼 훗날을 위하여도 번역과 연구 결과물이 긴요하고 화급한 일인 만큼 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둘째, 조선시대 상주와 관련한 지리사록으로 <경상도지리지>외 7종에 수록한 목록과 그 편찬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지리사록은 앞의 <상산지>와 같은 지역의 향지들을 취합한 것으로 편찬당시에 주목(州牧)에서 상부에 보고한 문적(文蹟)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그 당시에 언제 어떻게 조사하여 보고한 것인지 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셋째, <상산지>창석본 전반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이 책본은 1. 2 두 권으로서 2권은 모두 문한편(文翰編)으로 역대 유명한 창작 글들을 수록 하였다. 책본 전반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적어 둔다.

1. 군명(郡名) 조목에 ‘상주(上州)’로부터 ‘귀덕군(歸德郡)‘에 이르기까지 6차에 걸쳐 변천하였는데 신라 경덕왕때에 전국적으로 지역명칭을 개정할시 ’상주(上州)‘가 ’상주(尙州)‘로 이미 개정한 사실이 누락되었다.

2. 천봉산(天鳳山)을 일명 석악(石嶽)으로 현재까지 알고 있으나 각각 별도로 표기 하였는데 그 각각의 위치어디를 두고 이름 한 것인지 알아야겠다.

3. 성지(城池) 조목에는 상주읍성 만 수록하고 금돌성, 자산산성, 병풍산성 등 당시에도 현존하였던 여러 개소의 산성이 누락되었다.

4. 전부(田賦) 조목에 상주의 평시인구가 7만 여명 이었으나 임난 이후 1606년 조사에 따라 수만 여명으로 수록한바, 수만이라고 하면 2~3만으로 추정할 때 임란으로 인한 인구감소가 극심하였음을 증명한다.

5. 묘제(廟制) 조목에 ‘오현묘(五賢廟)’와 ‘이현사(二賢祠)‘는 오늘의 도남서원과 옥성서원 인데 포은 정몽주를 비릇한 국조유현(國祖儒賢) 5현을 모신 도남서원과 난계 김득배와 영천 신 잠을 모신 옥성서원의 위상을 “묘(廟)”와 “사(祠)“로 그 격을 달리 하였다는 것은 특기 할만하다.

6. 인물 조목의 수록 인물 중에 석천(石川) 김 각(金 覺)등 임난 창의 유공자등에 대한 행적 기록이 없거나 아주 소략하고 그 당시 상주인물로 부각할 만한 일부 인물이 누락되었다.

7. 특별히 수록한 인물 중에는 생존하고 있는 인물이 상당수 등재 되었다는 것은 “개관(蓋棺)하기 전에는 인물편에 수록 하지 않는다는 구례(舊禮)를 따르겠다”고, 하는 당초의 편집 방침과는 상충 된다. 뿐만 아니라 부곡(部曲) 조 말미에는 “신증(新增)”이라 표기하고 ‘장원향(壯元鄕)’에 대한 사실을 추가 수록한 것으로 보아 현재 보전하고 있는 창석본 <상산지>는 창석이 찬술한 원전(元典)이 아님이 확실하다. 따라서 현존 창석본은 창석본을 기본으로 편찬하였다는 청대본<靑臺本) 발문(跋文)에 밝힌 바와 같이 창석의 손자 이재관 공이 증보한 증보판 이라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존 <상산지> 창석본은 그 명칭을 “증보 <상산지> 창석본”으로 명정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8. 열여(烈女) 조목에 17명 수록 인물 중 9명이 임난에 순절한 부인(婦人)들이라는 사실은 잔학한 왜병의 만행이 어떠하였는지를 엿보게 한다.

9. 고현(古縣) 조목에 화창 등 4개현이 수록 되었는데 중모, 화령, 단밀, 산양, 현 등 당시 행정체제에 있었던 현이 누락 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다.

10. 사찰(寺刹) 조목에 6개 사찰이 수록 되었는데 그 당시에도 현존하였던 남장, 북장, 대승, 용흥사 등 상당수의 사찰이 누락 되었다.

넷째, `별책으로 편집한 ‘문한편은 모두 172편의 시문학 등의 작품이 수록 되었는데 찬술(撰述)한 인물들 모두가 당대 전국에서 명망이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은 고도(古都) 상주의 위상을 엿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역사기록이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완벽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편찬 당시의 사정과 집필자의 견해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간과 할 수 없다. 후세 사람들은 오로지 선인(先人)들이 남긴 사록으로 문헌적으로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연하여 각고의 힘을 기울여 편찬한 선인들의 노고에 경의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지금까지 <상산지>창석본을 훑어보는 과정이 필자에게는 상주 향토사에 큰 공부였음을 고백하고 필자의 부족한 서술에 이해와 질정(叱正)을 바라면서 뒷날 누구인가 더 깊은 연구가 있기를 간망(懇望)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