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학/상주학 제4권

상주학 상주문화원 금요사랑방 제78강의 陽村 權近의 敎育思想

빛마당 2015. 9. 29. 18:35

2015. 9. 25

陽村 權近의 敎育思想

- 入學圖說을 中心으로 -

聞慶大學校 招聘敎授 權世煥


상 주 문 화 원

目 次

Ⅰ. 陽村 權近의 生涯 …………………………………………………………………… 2

1. 陽村 權近의 略歷 …………………………………………………………………… 2

2. 年譜 …………………………………………………………………………………… 2

Ⅱ. 陽村 權近의 敎育思想 ……………………………………………………………… 4

1. 敎育行政 ……………………………………………………………………………… 4

2. 敎育制度論 …………………………………………………………………………… 6

3. 敎育哲學的 思想 …………………………………………………………………… 7

Ⅲ. 入學圖說 解題 ……………………………………………………………………… 10

1. 入學圖說序 ………………………………………………………………………… 11

2. 入學圖說은 성리학의 입문서 …………………………………………………… 11

Ⅳ. 陽村 權近의 性理學的 位置 ……………………………………………………… 16

1. 조선조 관학파의 기틀 마련 ……………………………………………………… 16

2. 道學의 연원 ………………………………………………………………………… 16

Ⅴ. 陽村 權近의 敎育思想의 위치 …………………………………………………… 21

1. 陽村 權近의 한국교육사상의 위치 ……………………………………………… 21

2. 陽村 權近의 시 한편 ……………………………………………………………… 23

참고문헌 …………………………………………………………………………………… 24

. 陽村 權近의 生涯

1. 陽村 權近의 略歷

연대 : 1352년 11월 6일 ∼ 1409년 2월 14일

본관 : 安東

부 : 僖

자 : 可遠, 私叔

호 : 陽村

시호 : 文忠

주요저서 : 入學圖說, 五經淺見錄, 經書口訣, 東國史略 등

문집 : 陽村集


2. 年譜

權近의 자는 可遠․私叔이며, 처음 이름은 晉이었다. 陽村은 그의 自號로 정도전의 양촌부 부주에 의하면 權近이 여말에 忠州에 유배되었을 때 고을 남쪽에 陽村이라는 마을에 살면서 ‘陽村’이라 號하였고, 이색이 지은 陽村記에 의하면 양촌부의 뜻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權近은 명문 安東權氏 출신으로 공민왕 원년인 1352년에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檢校政丞 僖이고 九封君인 菊齋 溥의 증손이다.

1352년(공민왕 원년) 11월 6일 공이 탄생

1368년 17세 8월에 成均試 합격

1369년 18세 焦隱 이인복(문충공)과 牧隱 이색(문정공)이 함께 장시한 礼闈(예위)에서 文科급제, 그의 座主는 牧隱 李穡, 春秋館檢閱 임명

1372년 21세 6월 승봉랑 전의부주에 임명, 12월 승봉랑 예의좌랑에 임명. 緋魚袋를 하사받음

1377년 26세 봉상대부 정의부령 지제교 겸춘추관 편수관 임명

1382년 31세 중정대부 좌사의대부 우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춘추관 편수관에 제수

1385년 34세 봉익대부 성균관대사성 진현관제학 지제교에 제수

1388년 37세 봉익대부 밀직부사 서연시상 보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에 제수

1389년 38세 우봉으로 귀양

1390년 39세 익주로 귀양, 入學圖說을 저술

1391년 40세 충주 양촌으로 돌아와 禮經의 절차를 考定하고, 易經, 禮經, 詩經, 書經, 春秋에 대하여 淺見錄 저술

1393년 42세 鷄龍山 행재소에서 桓王의 정릉 묘비문 찬, 자헌대부 검교예문춘추관태학사 겸성균관대사성 제수

1397년 46세 자헌대부 화산군에 제수

1400년 49세 정헌대부 참찬문하부사 지의정부사 판공조사 수문전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제수

1401년 50세 추충익대좌명공신 정현대부 참찬의정부사 판형조사 보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사겸 성균관대사성 길창부원군

1406년 55세 4월 숭정대부 예문관대제학 겸판예빈시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좌빈객 길창군. 8월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길창군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겸 판내자시사. 12월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길창군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겸 판내자시사 세자이사

1408년 57세 추충익대좌명공신 승정대부 길창군 집현전대제학겸 판내섬시사 지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

14019년 58세 2원 14일 졸 諡號 文忠公


權近의 연보에 나타난 것과 같이 선생의 뛰어난 업적으로 인해 安東 權氏의 자랑거리인 四始의 하나인 조선 최초의 文衡이 되었다.

四始란 첫째, 安東 權氏의 族譜인 成化譜가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이며, 둘째, 조선의 耆老所에 權僖가 맨 처음 들어갔으며, 셋째, 權近이 초대 文衡이 되었으며, 權採가 湖堂에 처음 뽑힌 것을 말한다.


Ⅱ. 陽村 權近의 敎育思想

1. 敎育行政

學誨와 修己․治人, 이것은 유학자가 평생에 두고 해야 할 본질적인 수행과업이다. 학문과 교육, 自己完成과 他者完成, 윤리적 실천과 경세적 헌신 이것을 겸전함이 유학자, 특히 성리학자로서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權近은 매우 다면적인 행보를 남긴 유학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權近의 참된 면모는 교육자로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가 익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많은 後進들이 雲集하여 그에게 배움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을 교육하는 일에 침식을 폐할 정도로 열중하였고, 이로써 교육을 통해서 세상에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陽村의 孫子 權擥이 쓴 陽村行狀에는 이러한 사실이 여실히 나타났다.

“언제나 후진을 가르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므로 모여드는 학생들은 무리를 짓게 되었고, 자상하게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잠자기와 밥 먹기를 폐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의 도학은 공에 이르러 더욱 밝아졌다.”

특히 權近이 지은 「入學圖說」은 權近이 익주에서 유배 생활(공양왕 2년. 1390년) 중 그에게 庸學을 배우려는 초학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저술한 것이다. 權近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대변하는 저술이며,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보급된 이래 처음 있는 저술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이는 宋儒 周濂溪의 「太極圖說」을 본 따고, 朱子의 章句를 참작하여 그림을 작성한 뒤, 선현들의 격언을 취하여 그 뜻을 재해석하였으며 다음에 자신이 학생들과 문답한 내용을 附記하여 「入學圖說」이라고 명한 것으로 시청각 교재의 嚆矢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다른 경서에서도 圖示할 만한 것은 모두 취하여 그림을 만든 뒤 자신의 학설에 붙여 완성한 것이다.

「入學圖說」은 서양에서 직관교육사상의 표현으로서 J. A. Comenius가 지은 「世界圖繪」보다 300여년 앞선 것으로 세계 교육사상 특기할 사실이다. 이 「入學圖說」은 세종 7년(1425년) 11월에 경상감사 河濱에 의해서 晉陽에서 전․후 합본으로 중간되어 成均館과 四部學堂에 분배되어 교과서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의 학문의 조예와 능력은 官에 나아가서도 언제나 교육자로서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태조 4년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유생을 교육하였고, 태조 7년에는 成均提調가 되어 閑良 4품 이하와 三館 유생에게 경사의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태종 즉위와 동시에 成均館大司成을 겸임하게 되었다. 또 태종 즉위 이후로 經筵에서 임금을 상대로 경사 강의를 계속하였으며, 태종 7년부터는 世子左賓客, 貳師 등의 직함으로 세자의 師傳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볼 때, 그의 교육대상은 아래로는 閭巷의 초학․유생으로부터 최고학부인 대학의 학생이나 현임 관원은 물론 세자와 왕에 이르기 까지 망라되었다.

태종 3년 3월에는 司諫院에서 건의하기를 權近은 동방의 大儒 李穡의 문하로서 그의 宗旨를 계승한 중요한 존재이므로, 그에게는 軍國重大會議에 참석하는 이외에는 오로지 成均館 유생의 교육에만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왕은 이를 윤허하였다.

“국가가 양경으로 옮김으로 인하여 학문을 폐한 지가 10년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에 곧 유사(攸司)에 명하여 학궁(學宮)을 수리하고 생도를 모아 길렀으니 인륜을 밝히는 근본을 알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입학한 생원이 수십 인에 차지 못하고 가르치는 방법이 마땅함을 얻지 못하여, 주현(州縣)의 학교와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죽은 한산백(韓山伯) 이색은 우리 동방의 대유(大儒)입니다. 전조의 공민왕이 성균대사성을 겸임하게 하고 날마다 경사를 강론하여 고무하고 작흥시키니, 인재가 배출되어 성리의 학문과 문자의 성함이 비록 중국의 선비라 하더라도 앞서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참찬겸대사성(參贊兼大司成) 권근은 이색의 학문을 공부하여 그 종지(宗旨)를 얻은 자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권근은 군무와 국무에 관한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를 제외하고는 날마다 성균관에 사진(仕進)하게 하고, 또 교관이 아문(衙門)에 사진하는 것도 매월 초하루 외에는 회의에 참석하지 말게 하여, 강론하고 권학하는 일에 전념케 하고, 또 유신 중에서 경학을 가르쳐 전할만한 자와 명민하여 수학할 만한 자를 골라 모두 교관을 겸하게 하여 경학을 강의하여 밝히면, 장차 진유(眞儒)가 나와서 도학이 밝아지고 이륜(彛倫)이 베풀어져 풍속이 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가 취해지게 된 것은 그의 학문과 자질과 능력이 오직 학술의 연구와 후인과 사회의 교화, 제왕과 왕세자의 교도에 전념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 인심과 사회를 교화하며 학문을 발전․보급시킬 수 있고, 이로써 국가 발전의 영원한 초석이 되도록 하고자 한 당시의 관심과 식견이 있었던 것을 提州, 延安, 利川, 永興 등의 각 鄕校記나 學則跋 등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2. 敎育制度論

權近은 “인재는 국가의 명맥이요 성인의 가르침은 인재의 原氣라 하고 이 기를 배양함으로써 그 덕을 이룰 수 있다면 인재가 무성하여 왕도화가 순조롭게 될 수 있고 세상의 道도 높일 수 있다”고 하였다. 權近은 이처럼 성인의 가르침을 통하여 국가의 명맥인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거시험에 있어서 고사과목을 공소한 경학 대신에 論․表 및 漢吏文을 부과하자고 건의했다.

이렇게 경학을 폐지하고 漢吏文을 부과하자는 건의는 이제현에 의하여 고시과목에서 시․부를 폐지한 것과는 모순된 것이며 스스로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표전문제로 국가가 외교적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몸소 겪고 외교문서를 잘 작성할 수 있는 문장력을 고시과목에 넣으려고 한 것은 그의 현실적 경세사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현은 문장력만 뛰어난 사람들은 성학의 바탕이 부족하고 확실한 경세의식이 없고 현실 대처능력이 부족하여 경박하고 부정부패에 연루되기 쉽다고 보았지만, 그는 표전문제의 경험을 통해서 문장력도 유가의 두 목표인 修己․治人 중 치인의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權近은 교육과 문화의 발전책으로서 합리적인 교육제도개혁을 모색하였으나 그것은 그가 태종 7년 儒學提調로 있을 때 제출․건의한 勸學事目 제8조에 나타나 있으며, 그 내용은 학교교육제도, 과거제도, 문신고과제도에 관한 개혁론이다. 이는 權近의 陽村集 上書類에 文科를 논하는 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權近의 교육개혁론은 고려 이래의 전래 교육제도와 당시의 교육실태를 감안한 매우 적절한 것들로서 거의 모두 채택 실행되었다.

勸學事目은

가. 문과 初場에서 실시하는 講論은 공부하는 자가 자칫 외는 데만 힘써 義理의 오묘한 뜻과 문장의 법에 대하여는 소홀하기 쉬우므로 이를 疑義(필답)로 대체할 것.

나. 中場의 古賦는 初學의 선비에게는 무리이고 실용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이를 論 ·表 ·判의 시험으로 대체할 것.

다. 한문과 吏文은 事大에 중요하므로 이를 正科로 삼을 것.

라. 예문관의 直館 이상은 조선 사람의 시문 찬집에 힘써, 이를 全書로 만들 것.

마. 館閣의 관원과 閑良文臣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자는 매일 예문관에 모여 서로 講磨하게 하고 학문과 글을 짓는 정도에 따라 임용과 천거에 반영할 것.

바. 유학제조는 매월 한 차례씩 3館 관원들의 경서읽기 등 면학 정도를 점검하여 이를 인사고과에 반영할 것.

사. 서울과 지방의 교수관은 생도들에게 반드시 小學을 익힌 다음에 다른 경서를 배우도록 할 것.

아. 지방의 儒官으로서 개인적으로 서재를 두고 후학을 가르치는 자는 함부로 다른 고을의 교수로 정하지 말 것 등이다.

勸學事目에 제시된 건의사항들은 과거제도 개선과 학사행정에 크게 반영되어 조선 초기 교육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위 勸學事目에서 1조, 2조, 3조는 과거제도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며, 4조와 5조는 문신고과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6조와 7조는 학교교육제도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었다.


3. 敎育哲學的 思想


가. 교육본질론 - 實學

權近은 유교는 道學이다. 道學이란 인륜의 실천을 본의로 하는 학문이요, 교육이다. 인륜의 실천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실천궁행을 떠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實學에 이르게 된다.

權近은 勸學事目에서 강조한 것과 같이 교육에 있어서 일상생활의 실천적 규범을 일깨워 주는 小學을 무엇보다 중요시하였다. 그에 있어서 교육의 의미는 高遠한 학문의 이론을 탐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灑掃應對 進退之節」을 익히고 실천하는데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뜻을 權近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三代의 학교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곳이었고, 六經의 글도 또한 道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은 마땅히 그 道를 구하기를 생각하고 그 人倫을 敦篤히 하기를 생각하며, 신하가 되어서는 忠을 생각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孝를 다하며, 長幼朋友에 이르기 까지 가는 곳마다 각각 그 직분을 다하여야 하니 이것이 곧 儒者의 實學이다.”

또한 權近은 다만 독서만을 일삼아 문장의 암송에 능하다거나 이론을 위한 뛰어남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隨時隨處에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실천해 나가는 교육이 올바른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道란 일상생활의 작고 큰 하나의 행동과 사물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함으로서 배우는 교육이요, 생활을 위한 교육이다.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인륜․도덕을 참으로 실천궁행할 때 天理를 다하게 되는 것이며, 인간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닥치는 바에 따라 각각 그 직분을 다하는 것이어야 말로 聖賢의 人倫을 다하고 天理를 온전히 하는 所以이다. 禮樂刑政이나 冠婚喪祭와 같은 큰일에서부터 부부생활이나 밭갈이, 길쌈하기의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道는 있지 않음이 없으며 또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문의 길은 일상생활의 사물에 따라 각각 그 사물의 법칙이 있게 하면 親으로 말미암아 愛가 있고, 嚴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敬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은 표현 속에서 그의 교육에 대한 본질적인 견해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양촌은 인간의 현실적인 생활이나 인간관계나 사회 문제와 관계없는 비사회적․비현실적․비인륜적인 것에는 교육적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했다.


나. 교육목적론 - 實心

일상생활에 있어서 도를 실천하고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실학적 교육에 있어서는 먼저 실심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참으로 진실한 행동은 참으로 진실한 행동을 하려는 마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진실한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서 피어나는 마음이요 人間性 속에 내재해 있는 天理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道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현실적으로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마음, 그릇되고 사악한 마음을 진실하고 사악한 마음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하는데, 그 목적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權近은 實學을 강조하되 이 實心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이 權近은 그 마음을 바로 잡는 일이 實心, 그것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權近의 실학은 實心하는 그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實心과 실학, 그리고 인간다운 가치 있는 행동․생활과의 관계 및 효과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며 친구와 사귀며, 일상생활에 있어서 사물과 應接할 때, 어디를 가나 실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면 그 信常함이 위대하다고 하겠다.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케 하는 것도 또한 이루게 할 수 있다.”


다. 敎育方法論 - 敬

實心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實心을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實心이란 인간의 純善한 天理의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불과하다. 천리의 본성은 인간이 모두 꼭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로되 인간의 사욕이 그것을 헤치는 나머지 마침내 인간은 악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욕은 인간의 본성과 인륜의 실행에 있어서의 최대의 적이다. 따라서 實心의 방법은 이 사욕을 극복하는 일에 두지 않을 수가 없다.

“대체로 능히 慾이 적으면 그 마음은 저절로 맑을 것이며. 그 마음이 맑으면 곧 여러 선이 생기며, 맑은 극치에 있어서는 마음이 밝게 트인다. 사람의 慾이 말끔히 없어지면 天理가 행하여지며 성현의 덕에 이르게 된다.”

“탐욕이 廉을 해침과 사나움이 仁을 해침과 아첨함이 公을 해침과 사곡됨이 정을 해침은 모두 사람이 마땅히 敵으로 삼아서 극치할 대상이다.”

여기서 탐욕, 사나움, 아첨, 사곡됨은 모두 私 또는 慾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욕을 극복 절기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움직임을 항상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 발동이 理에서 말한 것이면 이를 더욱 확충해야하고 만일 慾에서 말한 것이면 즉각 용감히 이를 극복 절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럴 때 그 擴充과 克治는 存養과 省察이다. 그런데 이 존양과 성찰을 터한 방법 원리가 敬이다.


라. 視聽覺的 敎育方法

이미 발한 바와 같이 權近의 실학적 교육사상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이론보다는 행동이나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은 실천적인 도학이긴 하나 太極․理氣와 心․性․情을 논하고 四端․七情이나 선악의 문제를 논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적인 理學이기도 하다. 또 유교의 經書의 이론체계는 방대한 바 있어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이나 지식을 도설화하여 그것을 시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게 하도록 고안한 것이 入學圖說이다. 어려운 이론이나 지식을 시각적으로 도설화한 것은 확실히 權近이 시청각적 교육방법의 효과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성리학의 근본이론을 「天人心性合一之圖」와 「天人心性分釋圖」 즉 ‘天은 陰陽五行으로서 만물을 화생하고 氣는 形體를 이루고 理 또한 稟賦된다.’라는 말을 대전제로 하고서, 인간의 心性 상에서 理氣善惡을 밝히고, 주로 周子의 太極圖와 朱子의 中庸章句에 의하였는데 전자에서는 天人心性을 종합적으로 후자는 분석적으로 다루었다. 이러한 圖說을 통하여 성리학을 효과적으로 지도한 것은 성리학 지도 뿐만 아니라 교육 방법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Ⅲ. 入學圖說 解題


1. 入學圖說序

陽村 權近이 “洪武 庚午年 가을 金馬郡에 귀양을 와서 있자니, 나에게 와서 大學, 中庸을 배우는 초학자들이 한 둘 있었는데 거듭 자세히 설명을 해 주어도 분명히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이에 周子의 太極圖를 근본으로 하고 章句의 설을 참작하여 그림을 그려 보이고 다시금 선현들의 格言을 취하여 그 의미를 재해석해 주었다. 또 학생들의 질문이 있으면 그기에 대하여 일일이 대답을 해 주었는데, 그 문답 내용을 기록하여 그 뒤에 붙였으니 이름 하여 「入學圖說」이라 하였다. 그 밖에 다른 경서도 그림으로 그릴만한 것은 모두 그렸고, 때때로 제각기 나의 臆說을 더 붙여 놓았는데 선배 선생들에게 교정을 받고 싶어도 鄕間에 그럴만한 분들이 없고, 몸은 귀양살이에 매여 있는 터라 오직 뒷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독자들이 그 잘못된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가르침이 있으시길 바라마지 않는다.”라고 지었다.


2. 入學圖說은 성리학의 입문서


가. 入學圖說의 가치

入學圖說은 權近이 공양왕 2년(1390년) 가을에 저술한 책으로 權近의 성리학적 이해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책이다. 入學圖說은 그 책 이름이 말해주듯이 당시 학문의 길에 뜻을 둔 젊은이들이 우선적으로 알아야 될 기본적인 지식, 예를 들면 大學, 中庸, 天人心性合一說 등을 도설로서 알기 쉽게 풀이한 성리학의 입문서이다.

그 작성 요령은 주로 周敦頤의 太極圖說을 근본으로 하고 朱子의 中庸章句를 참고로 하여 도설을 만들고 그 밖에 선현들의 설을 취해서 해설을 붙인 것이다.

入學圖說의 이 중 첫머리에 나오는 天人心性合一之圖는 가장 중요한 도설로 평가된다. 天人心性合一之圖는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태극·천명·이기·음양·오행·사단·칠정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특성들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나 물건이나 똑 같이 기로 형성된 것인데 왜 차이가 나는가, 사단과 칠정은 어떻게 다르며 왜 선악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가, 음양오행은 태극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氣와 눈에 보이는 形은 어떤 관계인가, 또 인간의 본성인 선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의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을 그림 한 장 속에 넣은 것이 바로 天人心性合一之圖이다. 入學圖說에는 그 밖에 大學指掌之圖․中庸首章分釋圖․語孟大旨․五經體用合一之圖 등과 같이 사서와 오경을 일목요연하게 해설하고 체계화하고 있으며, 그 밖의 河圖․洛書․太極․先天․後天․律呂․五聲 등의 그림과 해설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入學圖說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독자적인 심층적 주장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오늘날 전하는 圖說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것이 후세에 나온 도설과 학문상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退溪는 聖學十圖 중에서 제4 大學圖에서 權近의 大學指掌之圖를 거의 그대로 인용 설명하였고, 또 退溪의 修校를 받은 秋巒 鄭之雲의 天命圖說이 뒤에 4․7(四端七情) 논쟁의 발달이 되었던 것을 미루어 보아도 權近의 영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나. 入學圖說의 내용과 발간 경위

入學圖說은 전집 단간본과 전․후집 합간본의 두 가지가 있다. 전집 단간본은 入學圖說은 전집 단간본과 전·후집 합간본의 두 가지가 있다. 전집 단간본은 1397년 경상도 晉陽에서 도호부사 金爾音에 의하여 간행되었는데, 天人心性合一之圖․天人心性分釋圖․大學之圖․中庸首章分釋圖․諸侯昭穆五廟都宮之圖 등 26개의 그림과 그에 대한 해설, 그리고 그림이 없는 語孟大旨로 구성되어 있다. 합간본은 十二月卦之圖․周天三辰之圖․一朞生閏之圖․天地竪看之圖 등 14개의 도와 해설을 첨가하여 1425년 출간되었으며, 卞季良의 발문이 있다. 발문에는 “하늘이 陽村선생을 우리나라에 낳게 하시니 학자들에게 크게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여 저자를 높이 추앙하였다.

이 중 첫머리에 나오는 天人心性合一之圖는 가장 중요한 도설로 평가된다. 天人心性合一之圖는 성리학의 중심 개념인 태극․천명․이기․음양․오행․사단․칠정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특성들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나 물건이나 똑 같이 기로 형성된 것인데 왜 차이가 나는가, 사단과 칠정은 어떻게 다르며 왜 선악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가, 음양오행은 태극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氣와 눈에 보이는 形은 어떤 관계인가, 또 인간의 본성인 선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의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을 그림 한 장 속에 넣은 것이 바로 天人心性合一之圖이다.

晉陽에서 전후로 출간된 판본 이외에 浪州本, 永川本 및 일본에서 나온 慶安刻本 등이 있다. 浪州本은 후간본이 나온 후 120년 뒤인 1545년(인종 2년) 을사에 부안에서 간행된 것으로 蔡無逸의 발문이 붙어 있는데 이는 진양 초간본을 대본으로 한 것 같다.

永川本은 浪州本이 나오고 2년 뒤인 1547년(명종 2년) 간행되었는데 黃孝恭의 발문이 있다. 이 책은 경상도 관찰사 安玹의 지시에 의해서 영천군수 琴椅가 간행하였으며, 전․후집을 합친 것이다. 하권에는 후집이 실려 있다. 끝으로 일본의 경안본이란 상․하 두 책으로 된 것인데, 상원에는 前集, 하권에는 後集이 실려 있


다. 상권의 첫째장 후면 끝에 「慶安元年 10월 吉日 安田十兵衛가 開板하였다.」하였는데 慶安元年은 조선 인조 26년(1648년)이 되므로 이는 明宗때 나온 영천본보다 100년 뒤가 된다. 하권의 끝에는 里村遇巷子의 발문을 붙였는데 그에 의하면 里村遇巷子가 이 책이 개판되기에 앞서 15∼6년 전에 영천본을 처음으로 읽고서 그 설리학설의 정심함에 감복하여 이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목적으로 일일이 구두점까지 찍고 발문까지 써 놓은 것을 15년 지난 뒤에 安田十兵衛라는 자에 의해서 번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里村遇巷子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으나 발문으로 미루어 그가 朱子學의 연구에 깊은 조예가 있는 학자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양촌의 入學圖說이 일본의 유학에 끼친 영향이 어떠하였을 것인지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 入學圖說의 天人心性合一之圖

入學圖說은 전․후집을 합해서 도합 40개의 도설이 있고, 학자와의 문답 형식으로 된 해설이 약간 편 삽입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또 후세에 크게 영향이 된 부분은 책 첫 머리에 나오는 天人心性合一之圖를 비롯해서 그의 분석도 및 대학과 중용의 분석도라고 할 수 있다. 양촌은 이 부분에서 크게 程子와 朱子의 면목과 이론을 드러내어 선양하였다. 양촌은 유학의근본 사상이라고 할 天人合一說에 착안하고 中庸章句에 이른바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시키니 氣」로써 형태를 이루고 理가 또한 주어졌다.

「天陰陽五行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이라 한 것을 참작하여 天․人․心․性 네 글자의 혼합체로 된 인간의 형상을 생각하고 거기에서 인간의 심성과 理氣․善惡의 구별을 나타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상부에는 太極․天命․陰陽․五行을 설정하여 이로부터 心性이 연역되어 나타나는데 理之源 性과 氣之源 心을 구별하고 性에서는 惻隱․辭讓․羞惡․是非의 四端을 心으로부터는 喜․怒․哀․懼․愛․惡․慾의 七情을 연출시켰다. 四端 밑으로는 誠字圈을 배정하고 七情 밑으로는 慾字圈과 敬字圈을 좌우로 배정시켰는데 誠은 성인의 성품이고, 敬은 군자의 닦아 나갈 바이며, 慾은 衆人을 해치는 것인데 군자가 敬으로서 공을 쌓으면 「參天地 贊化育」하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衆人도 四端의 정과 통하고 있기는 하지만 自暴自棄에 빠지기 때문에 금수와 다를 바 없게 된다고 圖示하고 있는 것이다.


라. 入學圖說의 天人心性分釋圖

權近은 天人心性分釋圖의 分釋圖에서 각 자획을 분석하여 정교한 설명을 가하였다. 그 중 心자를 예로 보면 중앙의 점은 性理의 근원을 형상화한 것으로 지극히 둥글고 지극히 바른 모양을 하고 있는바 마음의 본체가 되고. 중심점 아래가 오목 들어가 있음은 마음속의 虛한 것을 본뜬 것인데, 그것이 비어 있으므로 모든 이치가 갖추어 담겨 질 수 있으며, 그 머리가 뾰족하고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 온 것은 氣의 근원을 본뜬 것이다. 또 꼬리가 아래에서 위로 삐친 것은 마음의 오행으로는 불에 속하기 때문에 그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뜬 것이라고 하였다. 오른 쪽의 점은 性에서 생기는 情을 본 땄으니 마음의 작용이요, 왼 편으로 한 점은 心에서 생기는 意를 본 땄으니 이 또한 마음의 작용인데 道心은 전자에 속하고 人心은 후자에 속한다.

人心은 위태한 것이므로 항시 욕심을 누르고 敬을 쫓아서 道心을 따라야만 위태한 것이 안정된다고 하였다.

權近의 글자 해석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매우 정밀하고 오묘하며 道理를그진하게 표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心자 하나로 天人心性合一의 이치와 형태를 설명하는 일은 다소 牽强附會한 점이 있음을 후세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天人心性의 圖說은 陽村의 근본사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圖說 전편의 精神이 되고 있으므로, 후세의 학자들이 陽村하면 入學圖說을 연상하고, 入學圖說하면 天人心性의 圖說을 연상하게 되는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있다고 하겠다.

마. 權近의 근본사상

權近의 근본 사상을 간략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요약하면, 權近은 天․人․心․性 을 合一的․一元的으로 보는 동시에 이것이 다시금 분석적으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즉 理氣․心性을 둘로 보는 二元的 견해와 가까운 것이 아닌가한다. 情意르르 心性에 分屬시켰는데 情은 性의 發이고, 意는 心의 發이라고 하였고, 四端은 性의 發, 七情은 氣의 發이라고 보는 것이 그것들이다. 이 이론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근원이 朱子의 이른바 「사단은 理가 發한 것이고, 七情은 氣가 발한 것이라는 데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바. 入學圖說이 후학들에게 미친 영향

權近의 圖說과 그 사상을 직접적으로 이어 받아 세상에 드러난 사람으로는 權近의 문인 金泮과 權近의 조카 權採가 있다. 金泮은 權近에게 수학하고 成均館 大司成 직을 전후로 40년간이나 맡았던 사람으로 태종․세종 때의 명신으로서 續入學圖說 1권이 있다.

權採는 梅軒 權遇의 아들로서 大司成 벼슬을 지냈는데 그 숙부의 학풍을 이어받아 作聖圖 및 作聖圖論 1권을 지어 天人心性의 학설을 발휘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성리학과 도설상에 있어서의 權近의 영향은 일일이 다 들어 말할 수는 없어나, 특별히 鄭秋巒과 이퇴계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鄭秋巒은 慕齋 金安國과 思齋 金正國 형제의 문하에 출입한 선비로 그의 天命新․舊圖는 입학도설과 작성도를 참고해서 그린 것이고. 그 중 天命新圖는 이퇴계의 교정을 받아 지었는데 퇴계도 평시에 입학도설을 애독하였다.

그의 문인 金惇敍에게 준 글 가운데 ‘陽村의 학술은 깊고 넓어서 이 도설을 지으매 그 증거가 확실하다. 후학이 어찌 감히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으랴.’라고 아였고, 선조대왕께 바친 聖學十圖 중에는 네 번째로 大學圖에서 入學圖說 중의 大學指掌之圖를 인용하고 있다. 특히 權近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지금이라도 성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사람은 權近이 쓴 入學圖說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예학을 집대성한 沙溪 金長生은 權近의 入學圖說이 조선 성리학에 미친 영향을 近思錄釋疑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退溪先生, 四端七情互發之說 其原出於權陽村入學圖說 其圖中四端書於人之左邊 七情書於人之右邊 鄭秋巒因陽村而作圖 退溪又因秋巒而作圖 此互發之說所由起 退溪曰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 是陽村書左右之意…”

“퇴계 선생의 사단칠정호발설은 본래 양촌의 『입학도설』에서 나온 것이다. 『입학도설』의 그림 중 사단을 사람의 왼편에 그리고 칠정을 오른편에 그렸는데 정추만이 이를 토대로 천명신도를 그렸고, 퇴계는 정추만으로 인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퇴계는 사단이란 이(理)가 발(發)해 기(氣)가 이를 따른 것이며, 칠정이란 기가 발해 이가 여기에 탄[乘]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양촌이 사단을 왼편에 그리고 칠정을 오른 편에 그린 뜻과 같다.”

權近의 제자인 金泮은 성리대전․理學提要․易象圖說․四書章圖 등의 문헌을 읽어서 저술했는데 續入學圖說일 것으로 추정된다.

權採는 입학도설이야말로 理學의 연원을 열어준 것으로 간주, 그것을 본떠 作聖圖와 圖說을 지었다. 권근의 입학도설은 후세의 鄭之雲․金麟厚․李滉․奇大升 등에 의해 작성된 각종의 天命圖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Ⅳ. 陽村 權近의 性理學的 位置


1. 조선조 관학파의 기틀 마련

權近은 증조부인 權溥는 정승을 지냈으며, 원나라로부터 성리학을 도입·보급한 학자중의 한 사람이며, 할아버지는 權暄은 僉議贊成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檢校政丞을 지낸 權僖이다. 그의 어머니는 좌정승 韓宗愈의 딸이었으므로 친가 외가가 다 같이 당대의 명문이었다. 그의 처가 역시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 모두 명문가문 출신이었다. 특히 두 번째 부인은 신돈의 횡포에 맞서 그를 탄핵한 李存吾의 딸이다. 이와 같은 가정환경은 그가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긍지와 자질을 제공하였으며, 그가 정치가로서 무너져가는 고려의 체제유지를 위하여 노력하도록 했을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태조와 태종이 그의 학문적 식견과 외교적 역량을 인정하고 그를 초빙함으로써 그는 다시 신흥 조선의 기틀을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權近은 18세 때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을 놀라게 하였다. 우왕11년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문교진흥에 이바지했다. 1375년에는 박상충․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외교를 주장하고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것에 반대하다가 친원파 李仁任 등 보수 세력의 공격을 받아 유배될 뻔했지만 그가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權近은 李穡과 마찬가지로 온건개혁의 입장을 취했으며, 1389년에는 이색의 뜻에 따라 門下評理 尹丞順의 부사자격으로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감독하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급진세력을 억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자 이색과 더불어 반대하였다.

이 때 그는 李琳(창왕의 외조부)의 일파로 몰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하고 이색일파와 같이 청주의 감옥에 갇히었다가 마침 수해로 용서를 받고 益州에 머무르면서 그를 유배지까지 찾아온 수많은 유생들을 위하여 入學圖說을 저술하였다.

조선조 개창 후 그 이듬해에 이성계는 비개국세력의 회유책의 일환으로 하륜․권근․이첨․조용 등에게 등용을 권하였고, 權近도 이때 조용(나중에 합류함)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 개국세력에 합류하였다. 權近이 합류하게 된 것은 이성계가 그의 아버지인 權僖와 고향 학우였던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權近은 조선조 초기 검교예문춘추관태학사 성균관 겸대사성직을 맡아 인재양성과 후학양성에 노력하여 부족한 인재를 충당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또한 知經筵事와 世子師 등을 맡아 국왕과 세자의 왕재 교육에 힘써 조선조 초기의 안정을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또한 건국 초기 權近은 표전문제 해결을 위하여 자기가 직접 명에 갈 것을 자청했으며 하륜과 함께 명에 사신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여, 태조의 신임을 얻었지만 개국세력의 견제가 심하였다. 그러나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등 개국세력들이 제거된 후 權近은 佐命功臣이 되어 태종을 보필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태종3년 그의 아들을 태종의 딸과 혼인시킴으로써 태종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大提學에까지 이르렀고 兼大司成職을 맡아 인재양성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생전에 교육에 관련되는 것 외의 직을 맡지 않았다.

그의 저서로서는 유명한 입학도설과 五經淺見錄이 있고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四書五經口訣) 등이 있었다고 한다. 입학도설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최초의 도설서로서 후대에 天命圖說의 모델이 되었고 이 천명도설이 발단이 되어 퇴계와 고봉간의 四七論爭을 불러 일으켜 우리나라 학문발달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2. 道學의 연원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고려말 安珦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뒤를 이어 彛齋 白頤正, 易東 禹倬, 菊齋 權溥 등이 그 뒤를 이어 주자학을 선양시켰다. 菊齋는 사위 益齋 李齊賢, 稼亭 李穀에게 전하고, 李穀은 牧隱 李穡에게 전하고, 李穡은 圃隱 鄭夢周, 陶隱 李崇仁, 三峯 鄭道傳, 陽村 權近으로 이어져 왔다. 특히 陽村은 圃隱과 三峯을 師友로 하였다. 典故大方에 의하면 조선의 도학 연원은 다음과 같다.

가. 朝鮮 道學의 연원

安珦 백이정 이재현 정몽주

권부 이곡 이색 ➮이숭인 ➮권우

권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강희맹

김일손

남효온

조 위

정여창

김굉필

변계량

우탁 이인복


나. 權近의 學脈

白頤正, 安珦 이제현 이색 ➮정도전

            ➮이숭인

              정몽주 權近

權近

     권우 세종대왕

      정인지

변계량․맹사성․허조․김반․금종리․권채

신숙주․이석형

     길재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백인걸 이이(율곡)

                         성수침 성혼(우계)

                         이연경

                    김안국

                    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


다. 조선조 유림학맥도

고려 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후 근대까까지 학통이 전수된 과정을 정리해 보면 安珦부터 백이정, 권부, 이제현이 주도하여 왔으며 圃隱과 牧隱 이후의 전수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학맥도

圃隱 鄭夢周(1337-1392) ➮ 冶隱 吉再(1353-1419) ➮ 江湖 金叔滋(1389-1456) ➮ 佔畢齋 金宗直(1431-1492) ➮ 寒暄堂 金宏弼(1454-1504)로 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冶隱 吉再는 鄭夢周의 문인으로 보기 어렵고, 陽村 權近의 문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둘째 權近의 학맥도

牧隱 李穡(1328-1396) 陽村 權近(1352-1409) 冶隱 吉再(1353-1419) 江湖 金叔滋(1389-1456)와 같은 학통에 속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冶隱 吉再가 權近의 문인인 분명한 증거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특히 冶隱 吉再는 權近과 朴賁의 상에는 모두 心喪으로 삼년을 지냈다는 기록이 靑莊館全書 吉再篇에 기록되어 있다. 상복을 입는 例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임금이 붕어하셨을 때,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등에는 극진한 예로서 喪服을 입었다. 孔子의 喪에는 모든 제자들이 3년간 喪服을 입었으며, 특히 子貢은 3년 喪을 마치고 다시 3년간 喪服을 입어 스승에 대한 지극한 禮를 다 하였다. 이와 같이 冶隱 吉再도 스승인 陽村 權近의 喪에 心喪 3년을 함으로써 弟子의 禮를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冶隱 吉再의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면 圃隱 鄭夢周가 아니라 陽村 權近과 牧隱 李穡의 문임임이 명백하다. 圃隱 문집에 冶隱 吉再가 문인인 기록이 없으며, 冶隱 吉再와 陽村 權近은 師弟間임을 명시하였다.


셋째, 鄭夢周의 학통

圃隱 鄭夢周(1337-1392) ➮ 趙庸(?-1424) ➮ 別洞 尹祥(1373-1455) ➮ 江湖 金叔滋(1389-1456)와 전해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넷째, 조선조육왕학파의 학맥

「조선조 육왕학파의 학문과 학맥」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元祖(權近) 씨앗(발아기) 기호유학의 형성기(奇大升, 李珥) 뿌리내리다(착근기) 만회, 탄옹, 명재는 줄기 하곡, 강화학파 꽃피다(개화기) 박은식 열매 맺다(결실기)라고 한국육왕학파의 학맥을 제시하였다.


Ⅴ. 陽村 權近의 敎育思想의 위치


1. 陽村 權近의 한국교육사상의 위치

權近은 鄭道傳과 함께 조선을 위해서 유교입국 이념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조선초기의 유학의 석학으로서 그의 풍부한 학식과 문필은 조선의 모든 문물제도의 기초를 닦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크나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대학자로서 성리학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독창적인 견해와 사상이 적지 아니했다. 특히 理를 공허한 理가아닌 實理로 보는 동시에 만물이 太極에서 流出하여 각각 一理를 구비하고 있다는 사상이나 實理 형이상학적인 근거로 해서 실학사상으로 발전시킨 동시에 實心을 위한 敎育을 강조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또 필연적으로 가치론적 사상에 있어서는 가치론적 사상에 있어서는 誠을 중요시한 것도 주목해야 할 사실이라 하겠다. 또 性命에서 말한 道心과 形氣에서발한 人心을 확연히 구분하는 동시에 性의 發을 情, 心․心=氣의 發을 意로 구분함으로써 四端을 情, 七情을 意로 分對시킨 것은 그 의도가 理를 실천윤리 상 傍爲視 한 것인데. 이와 같은 동기의순수성을 강조하는 실천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탁월한 견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그의 入學圖說은 후세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쳐 한국의 유학계에 圖說 제작의 한 전통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入學圖說은 시청각 교육의 선구자로서 유교의 기본 이론적 이론 체계를 圖說化 한 것은 특히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入學圖說」은 서양에서 직관교육사상의 표현으로서 J. A. Comenius가 지은 「世界圖繪」보다 300여년 앞선 것으로 우리나라 교육사상 특기할 사실이다.

權近은 조선 초기 성리학의 기초를 확립하여 성리학 연구의 실마리를 열어 준 것이나 여러 가지 교육에 종사하여 유교적 윤리에 의한 교화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權近은 文筆로서 조선의 창업 완성에 공헌했던 사실은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헌신적인 활동과 노력으로 크게 공로를 세운 것을 그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건국 창업 초기에 있어서 유명한 석학들이 모두 고려의 유신관계로서 퇴거해 버리고 훌륭한 인재와 학자가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던 시기에 있어서, 權近이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權近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탁월한 학자로서 유학사상에 공헌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따라서 그가 조선 초기의 大碩學, 大文章家, 大思想家, 大敎育家, 大政治家였던 점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2. 陽村 權近의 시 한편

金剛山

雪立亭亭千萬峰 - 눈 같이 흰 높이 우뚝 선 천만 산봉우리

海雲開出玉芙蓉 - 구름바다가 걷히니 옥부용 솟았네.

神光蕩樣滄溟近 - 신비한 빛 물결 출렁이니 넓은 바다는 끝이 없는데

淑氣蜿蜒造化鍾 - 맑은 기운 서리서리 뭉쳐 조화롭구나.

突兀岡巒臨鳥道 - 높은 봉우리는 조도에 다다르고

淸幽洞壑秘仙蹤 - 깊은 계곡은 신선이 놀다간 발자취가 있네.

東遊便欲凌高頂 - 동쪽을 유람하다 비로봉 정상에 올라

俯仰鴻濛一盪胸 - 천지를 굽어보며 가슴을 열어보고 싶구나.

權近의 金剛山은 금강산의 신비스런 모습을 보고 그 조화의 무궁함을 기운차게 읊은 것이다.

이 金剛山를 通解하면

비바람이 씻긴 하얀 바위가 높이 솟아있는 봉우리마다 구름이 감돌아 부용꽃이 핀 것처럼 신기하다.

거기에다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니 바다도 유리 속 같이 맑게 보이고 맑은 기운이 서리어 잇는 것 같아 조화의 극치를 이루었다.

우뚝 솟은 돌산은 나는 새나 간신히 건너갈 수 있는 절벽이요, 몸이 오싹해지는 깊은 골짝은 곳곳이 신선들의 놀이터라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 온 목적이 가장 높은 비로봉에 올라서 천지를 바라보고 맺힌 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보고 싶은 소망이었으니 어서 올라보자.

參考文獻

[도서․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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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책포럼, 권근의 입학도설, 서울 : 경제․인문사회연구소, 2011(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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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기타]

東國文獻備考 248卷 藝文考.

沙溪全書 17卷, 近思錄釋疑.

위키백과, 권근(사상과 영향)

奏者語類 53卷

靑莊館全書, 제69권, 寒竹堂涉筆下. 吉再.

退溪集 券28, ‘陽村學術淵博 爲此圖說 極有證據 後學安敢議其得失…’.

太宗實錄, 卷10, 太宗7년 3월 戊寅條.

청하연, 조선조 영남유림학맥도, http://blog.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