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고려 말, 장수와 정승으로 빼어난 충신 - 김선치(金先致)

빛마당 2016. 3. 29. 18:55

고려 말, 장수와 정승으로 빼어난 충신 - 김선치(金先致)

박 찬 선*

  상주읍성을 중심으로 하여서는 상산김씨가 상주문화를 대변하다시피 하였는데 김선치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상산김씨는 상주를 관향으로 하는 명가이다.

김선치(1318, 충숙왕 51398 태조 7)는 상성군 김록(金祿)의 3자로서 본관은 상산(상주)이며 관직은 계림부윤(鷄林府尹)을 지냈고 군호는 상성군(尙城君) ․ 낙성군(洛城君)으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의 아우다.

 시조 김수(金需)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고려시대에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으나 여러 대에 걸쳐 상주에 살았으며 5세인 김비중이 상산부원군, 9세 김일이 상락(상주)군, 19세 김록이 상선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상산으로 하였으며 상주김씨로 불리게 되었다. 상주시 신봉동 구월산(남산)에 시조의 단을 설치하여 음력 3월 15일에 향사를 지낸다.

 상주 산양으로 은퇴하기 전 개성 교외에 있는 김선치의 집에서는 묘경(윤필암의 창건 보시자인 김씨부인), 이색, 정몽주가 모여서 세태를 얘기하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의리를 다지면서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평소 낙성군과 친밀히 지냈다. 함창에 자주 왕래하기도 했는데 함창에는 그의 외가가 있고 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살고 있으며 139091년 2년에 걸친 유배지였다. 낙성군이 동갑내기 이몽유(李夢游)를 달려 보내서 나를 초청하므로 가서 꽃을 구경하고 한 수를 읊어 이루다.에서도“낙성군 정원은 푸른 이끼가 절반인데, 봄 지난 뒤 남은 꽃이 차례로 피네, 병 중의 정회를 아는 이 적거니, 풍류 알아 독차지하지 않고 와서 보라네”라고 읊었다. 시에 함축된 뜻에는 우국지사의 맺힌 정한을 서로가 알아 풀어주려는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知音)의 그윽한 정이 함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낙성군과 목은과의 우의도 알 수 있거니와 낙성군이 정계에서 소외되었을 때의 생각하는 정과 회포(情懷)도 엿보게 해준다.


雨中留我酒盃深(우중유아주배심) 비속에 나를 머물게 하니 술잔은 깊어지고

半日高談直百金(반일고담직백금) 한나절 고상한 대화 백금의 가치가 있네

只爲朝天促歸驥(지위조천촉귀기) 임금님 뵙기 위해 가는 말을 재촉하니

夕陽芳草惱人心(석양방초뇌인심) 석양의 향기로운 풀이 사람마음 괴롭히네


 위의 시 증 상주 김상국 선치(贈尙州金相國先致)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그의 집을 지나다가 읊은 시다. 비속에 마주앉아 취하도록 실컷 술 마시며 나눈 지적 대화의 높은 경지를 떠올리게 하며 한편으로는 국사의 조급함에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담겨 있다. 시를 통한 교류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운치가 있는 경지라고 생각한다. 서로간의 심정을 헤아리는 사귐이 깊고 넓지 않으면 시적 대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포은과 목은은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태어난 해는 차이가 있지만 지조를 생명으로 삼은 이들 선비들과 시로서 교류했다는 것은 지극히 높고 지극히 순수한 정신적 경지를 열어갔음을 뜻한다. 낙성군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만남이다.

 김득배, 이색, 정몽주, 김선치, 홍태후, 김씨부인 이들의 중심에는 나옹스님이 있다. 공민왕의 왕사인 나옹과 이색은 같은 영해 출신이요, 나옹의 출가지가 공덕산 묘적암이다. 그 곁에 윤필암을 짓고 그 기문을 이색이 지은 것이다.(윤필암기) 이색은 나옹과도 가까웠지만 김득배, 아우 김선치, 김득배의 문생 정몽주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윤필암 창건에 얽히고 설킨 인연은 바로 고려 말의 역사의 흐름 그대로다.

 이러한 선비에게 문방사우(文房四友)는 필수품이다. 그 중에서 기이한 일로 낙성군이 사용했던 벼루가 있다. 그의 사후 360여년만인 1716년 영빈예곡(潁濱禮谷) 이연원(李延元)이란 사람의 우물에서 발견되었다. 벼루에 대한 기록(硯記)을 후손 잠(湛), 정지모(鄭智模), 조협(趙浹), 정종로(鄭宗魯), 이승연(李承延), 조경직(曺景稷), 김이호(金頤浩) 등이 써서 낙성군의 벼루임을 고증하고 나아가 수택이 밴 진품이 보존된 기연을 특기하였다. 그리고 연기에는 헌순(獻淳) 이구서(李衢棲), 강희조(姜希祖), 류풍(柳灃) 등이 작품을 남겼다. 또한 연시(硯詩)에도 류종춘(柳宗春), 권상룡(權相龍), 권상기(權相虁), 이명항(李命恒) 외에 10여 명이 시를 남겼다. 그 중에서 류종춘의 시를 보자.


書生勳業弟兄擅(서생훈업제형천) 서생으로서 공적은 형제가 오로지 하였으나

桑海前塵只一硯(상해전진지일연) 상전벽해 된 티끌 속에 오직 한 벼루만 남았네

地得古甃猶可藏(지득고추유가장) 땅은 옛 우물을 얻어 오히려 간직할 수 있었고

天敎蒼玉詎先變(천교창옥거선변) 하늘이 푸른 옥으로 가르친 바는 선변이 아니겠는가

高風景仰山無言(고풍경앙산무언) 고풍을 우러르고 사모함이 산같아 할 말 없네

小字分明石不轉(소자분명석부전) 작은 글자가 분명하여 연석(硯石)은 변함없네

至便幽潛能再揚(지편유잠능재양) 그윽히 잠기게 하여 능히 거듭 드날리니

一時傳誦聲門見(일시전송성문견) 일시에 칭송이 전파되어문성(門聲)을 용동시키네


 삼 형제의 공훈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어지러운 세태 속에 남은 벼루 하나. 아끼고 사랑하며 사용했던 손때가 묻고 이름이 새겨진 벼루를 통해 천지의 가르침을 알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니 어찌 예찬치 않겠는가.

 상주시 외서면 가곡리 상산김씨 낙성군파 종중의 벼루(硯, 가로 10.8cm, 세로 19cm, 높이 1cm, 김국희 소장)가 2002년 6월 29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4호로 지정되었다.

 이 벼루는 고산석(高山石)으로 석질과 양식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14세기 또는 15세기에 제작된 벼루로서 시대가 확실한 명문을 가지고 있으며 고려의 문인이자 무신인 벼루의 주인공 김선치의 12세 때 명선치년십이(名先致年十二)라는 자서명이 음각된 벼루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또한 400여 년이 지난 1762년에 이 벼루가 발견이 되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14세 손 담(湛)에게 돌아오자, 담은 당시 문경현감에게 보여주니 기이하다하여 특별히 1768년 9월에 제작케 한 벼루집은 목질이나 양식이 당대의 것으로 인정된다. 특히 이 벼루를 두고 조선시대 당시의 문사 30여 명이 기(記), 시(詩), 가(歌), 행(行) 등으로 찬양하고 있어 그 정신문화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하겠다.

상주 사람 김선치는 여러 대에 걸친 빛나는 업적이 사기(史記)에 모두 실려 있다. 아버지 록(祿)은 원충단력 안사보정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 상성군(元忠端力 安社保定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門下贊成事 商城君)이고, 어머니는 연창군 부인 박씨인데 대영서령 영의 따님(延昌郡 夫人 朴氏 大盈署令瑛之女)이다. 공은 원나라 연우(延佑) 무오년 1318년에 산양현 구곡에서 태어났다.

 빼어난 인물의 출생에는 이야기가 따른다. 고려 때 고을 아전(州吏) 김조(金祚)에게 만궁(萬宮)이라는 일곱 살 난 딸이 있었다. 부모가 글안(契丹) 군사를 피하여 백화성(白華城)으로 몸을 피하는데 쫓아오는 군사가 가까이 오자 황급하여 응급결에 길가에 떨구고 달아났다. 초조함과 애탐 속에 사흘 만에 수풀 속에서 찾았다. 스스로 말하기를“밤에는 무엇이 와서 안아주고 낮에는 간다.”고 하기에 놀랍고 이상히 여겨 자취를 찾아보니 바로 호랑이였다. 이처럼 산신령이 보호해 준 것이다. 귀한 인물은 영성이 통하고 자연이 알아서 빛을 내나보다. 시집갈 때가 되어 호장 김일(金鎰)에게 시집가서 아들 김록(金祿)을 낳고 김록이 연창군 부인 박씨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으니 김득배, 김득제, 김선치이다.


“전 밀직사(密直使) 김선치가 졸(卒)하였다. 선치는 상주 사람인데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김군실(金君實)의 아들이다. 전조(前朝)에 벼슬하여 처음에 산원(散員)을 제수 받았다가 옮기어 낭장(郎將)에 이르고 임오년(1342)년에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류탁(柳濯)을 따라 왜구를 막아서 수십 인을 무찔렀다. 임진년에 나주판관(羅州判官)이 되었는데 세력가(巨室)에서 진도 군리(郡吏)를 강제로 천인(賤人)을 만든 자가 있으므로 곧 처결하여 양인(良人)을 만들었다. 들어와서 도관(都官)·이부(吏部)의 낭중(郎中)이 되었고 나가서 전라, 양광(楊廣) 두 도를 안찰(按察)하였다. 신축년(1361, 공민왕 10)에 장작감(將作監)으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 이암(李嵒)을 따라 홍건적을 막았는데 서경에 이르니 적의 기세가 대단히 치성(熾盛)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였다. 도원수가 선치를 시켜 부고(府庫)를 불태워서 적으로 하여금 양식을 의뢰할 데가 없게하려 하니 선치가 말하였다.

“만일 부고를 불 태워서 적의 식량을 의뢰할 데가 없으면 급히 나라 안으로 들어올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도원수가 노하여 꾸짖으니 대장(大將) 안우(安祐)가 옆에 있다가 천천히 말하였다.


“이 말이 그럴듯하다.”


 도원수가 그대로 따랐다.


 그해 겨울에 적이 송도(松都)를 함락하니 선치가 그의 형 김득배를 따라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경성(京城)을 극복하였다. 이듬 해에 위위판사(衛尉判事)를 제수받고 여러 번 옮기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고 위조(僞朝) 갑인년에 동지밀직(同知密直)이 되었으며 을묘년(1375)에 숭경윤(崇敬尹)으로 승진하였다. 무오년에 나이 61세로 낙성군(洛城君)에 봉하여졌고 인하여 추충보절찬화공신(推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임술년에 상주에 퇴거하였다. 정축년에 서울에 이르니 임금이 늙은이로 여기어 쌀을 주고 돌아가기를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집에서 죽으니 나이 81세였다. 아들이 셋인데 김추(金錘), 김전(金銓) 김균(金鈞)이다.”


 간소한 졸기에서 좀더 첨가한다면, 1363년에 홍건적을 평정시킨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그 형상이 벽상(壁上)에 그려졌고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다. 그때 재상이 남경(南京)의 궁궐을 헐어 백악(白岳)으로 옮기려하자 왕에게


 “전날 남경을 지을 때 사람과 짐승이 피곤했는데 이제 다시 헐면 백성들이 실망할 것입니다.”


 라고 의견을 밝혔다.

왕이 놀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65년에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1373년에 삭방도 도순문사(朔方道都巡問使)가 되었다. 갑인년 1374년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을 거쳐 이때 오래 해결하지 못한 강도사건과 그 연루자 1백여 명에 대해 처결을 내렸다. 이후 상성군(尙城君)에 봉해지고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이 되었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전라도 도순문사가 되었고. 우왕 초(禑王初)에 투항해 온 왜구의 무리를 유인해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수졸(戍卒)에 편입되기도 했다. 무오년 1378년(우왕 4) 나이 61세로 낙성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지켰고 임술년 1382년에 상주 산양현(山陽縣)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1398년 3월 22일 정들었던 집에서 운명하니 향년 81세였다. 상주 귀호서원(龜湖書院)에 배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에 졸기(卒記)가 있다.

 그의 묘는 상주시내에서 개운저수지 끝부분에서 오른쪽으로개운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그 길로 600m 정도 들어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200m 정도 더 가면 길 오른 쪽에 있다. 임좌병향(壬坐丙向)에 모셨다. 묘비에는 유명고려추충보절찬화공신중대광 낙성군김공지묘(有明高麗推忠保節贊化功臣重大匡 洛城君金公之墓)로 새겨 있다.

 형인 상낙군(上洛君) 문충공(文忠公) 김득배(金得培)와 상산군(商山君) 김득제(金得齊)와 더불어 원수(元帥)가 되어 도적과 난리를 평정하여 나라를 다시 편안케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삼형제를 삼원수(三元帥)라 불렀다.

 아내(配位)는 김제군부인(金堤君夫人) 조씨로 판문하사직보문각학사(判門下司直寶文閣學士)인 영회(令晦)의 따님으로 묘는 공의 묘 서쪽에 있는데 산 둔덕은 다르나 좌향은 같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추(錘)는 중랑장(中郞將), 전(銓)은 한성부윤, 균(鈞)은 전농정(典農正)이며 승귀(承貴)는 대호군인데 상낙군의 뒤를 이었고 승부(承富)는 대호군이다. 사위 노숭(盧崇)은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공의 내외 자손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으나 호군공(護軍公)의 후손에 휘 덕겸(德謙)은 벼슬이 동지충추(同知中樞)이고 호는 청육(靑陸)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들 상(尙)은 관찰사를 지냈다. 덕함(德諴)은 큰 절개와 맑은 지조로 드러났으며 인조 때에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광해정란으로 십년을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가 인조 등극 후에 다시 불리어서 전한시강원문학(典翰侍講院文學),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춘추관 기주관, 성균관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두루 지냈으며 충정(忠貞)의 시호를 받았다. 아들 설(卨)은 벼슬이 홍문관수찬이고 그 아들 우석(禹錫)은 형조판서로서 곧 선고 이상 삼세(三世)이니 이분들이 우리 자손 중에 가장 드러난 분들이다. 참찬(參贊) 홍귀달, 좌찬성 정응두(丁應斗), 영의정 이덕형, 판서 정경세, 우의정 강사상, 판서 송준길이 외손 중에서 크게 현달한 분들이다.

 아! 우리 선조가 고려의 조정에 대대로 높은 자리에 있던 신하로서 말세를 만나 장수와 정승(將相)을 겸하시어 왕실을 돕고 난리에 나라를 안정시켜 그 공이 커서 사기에 기록되어 있고 형제의 공명이 기린각(麒麟閣)에 빛났으니 고금을 통해서 드문 일이다. 예전에 은(殷)나라의 운수가 다하고 주(周)나라에 천명이 새롭게 있었던 것처럼 나라가 바뀌게 되어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주선하던 당시의 명현(名賢) 석보(碩輔)들이 모두 운세를 타서 날개를 떨치고 천명을 도와 개국하여 존영(尊榮)을 누렸으나 공은 이와 같은 일을 초연히 멀리하고 고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상주에서 고사리를 캐고 낙동강의 물결에(洛波)에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며 역경에도 스스로 절개를 보전하니 고상한 품격과 높은 절개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서로 같으면서도 더욱 위대하도다. 이제 그 후손들이 옛터를 지키고 매년 10월에 모여 묘소에 참배하며 제향을 폐지하지는 않았으나 묘역에 잡초가 우거지고 비지(碑誌)는 징거할 것이 없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를 한탄하고 상심하였는데 공께서 돌아가신지 308년 만에 후손 연(演)이 선대의 공덕을 이어서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묘소를 중수하고 다시 표석을 세우고 개요를 적어 그 뒷면에 새긴다.

 숭정기원 후(崇禎紀元後) 78년 을유년 늦봄에 십대 손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嘉善大夫 慶尙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大邱都護府使)(演) 삼가 글을 짓다. 판관 이징해(李徵海) 글씨를 쓰다.

자손들 이야기는 낙성군 신도비 음기에 담겨진 내용이다.


鐘精川岳(종정천악) 천악에 정기를 타고나서

趾美家庭(지미가정) 가정을 아름답게 빛내었다.

再佐帥坦(재좌수탄) 두 번이나 군수로서 왕사를 도와

幾揚王靈(기양왕령) 몇 번이고 왕령을 선양하였다

紅豆壓境(홍두압경) 홍두적이 경내로 침범하였을 때는

白面登壇(백면등단) 백면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塵淸廟社(진청묘사) 난을 평정하고 묘사를 안정하니

功埒崧山(공날숭산) 공이 숭산 보다 드높다.

樹立旣偉(수립기위) 이미 위훈을 세웠으니

流澤宜長(유택의장) 유택이 마땅히 길이 흐를 것이다

屹屹開原(흘흘개원) 높디높은 넓은 언덕에

衣冠所藏(의관소장) 의관을 소장하였도다.


 외손 정호선(丁好善)이 목사가 되어 와서 그의 묘에 제사하며 지은 제문이다. 낙성군의 일생을 압축하여 나타낸 글로서 가정과 나라 위한 충신의 업적이 잘 나타나 있다.

 고려말 어지러운 시절 장수와 정승으로서 충성을 다한 낙성군! 국란의 중심에서 빼어난 용기와 밝고 빠른 지혜로서 나라와 백성을 사랑한 일생이 크게 감동을 준다. 더구나 선비의 표상으로서 지절을 지킨 목은과 포은과의 시적 교류는 인문의 아름다움과 정신의 고귀함을 일깨워준다. 상주 명가의 후손으로서 명가의 명예와 명인의 긍지를 심어준 문충공의 쌓은 공덕과 위대한 삶이 어찌 빛나지 않으랴.

지금 우리가 유사 이래 가장 넉넉하게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음도 역사를 이끌고 꾸려온 인물들이 있었기 가능한 일이다. 추모와 유덕을 기리고 선양하는 일이 미래의 삶으로 이어짐은 이를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