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인물/상주의 인물 제4권

효자로 소문난 낙지정 박언성(朴彦誠)

빛마당 2016. 3. 29. 19:03

효자로 소문난 낙지정 박언성(朴彦誠)

곽 희 상*


소년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병환이 찾아 와 몸져 눕게 되었다.

여러 곳을 다녀 병에 좋다는 약을 구해 달여 드려도 효험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수일이 흘렀다.

“예야! 내가 망령이 들었나 보다”

“아니예요, 어머니! 이제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시면 돼요.”

소년은 더욱 정성을 다 하여 탕약을 손수 닳였다.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때마침 집 앞을 지나가는 스님이 들여 다 보고는,

“엄동설한이지만 가물치 밖엔 약이 없단다.”

그 말을 전해들은 소년은 바구니와 도끼를 들고 집을 나섰다.

“하느님! 제가 오늘 가물치를 잡도록 제발 도와 주십시오.”

하고는, 정성을 다 하여 기도를 올렸다.

개울에 도착하자, 도끼로 얼음을 깨기 시작하였다.

얼마를 깼을까? 이마엔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물이 차고 얼음이 둥둥 떠 다녔다.

개울 가를 열심히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물속에서 파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내가 찾던 가물치가 아닌가?

“아이고 하느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이 놈만 잡으면 된다.

멀리서부터 그물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고기가 빠져 나가지 않도록 그물에 가두었다.

이윽고 가물치를 낚았다. 하늘을 날 듯 기뻤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집에 왔다.

조심조심해서 가물치를 어머니께 달여 드렸다.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효험이 있었다.

하늘도 감동했나 보다.

어머니는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 나셨다.

그리고는, 나를 껴 안으시며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 어미가 이렇게 고생을 시켜서 어쩌면 좋으냐?”

소년은 두 번째의 기쁨을 맛 보았다.

극진한 효성은 곧 동리에 소문이 나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소년이 바로 박언성(朴彦誠, 1477∼1534)이었다. 선생의 본관은 문의(文義)이고, 자(字)는 진경(眞卿)이며, 호(號)는 낙지정(樂志亭)으로,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선생은, 일평생 부모에 대한 효도를 실천하여 1518년(중종 13)에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또한 사후(死後)인 1883년(고종 20)에는 사헌부 감찰(監察)에 추증되었다.

문의박씨는, 박혁거세 29세(世)인 신라 경명왕(제54대, 재위 ?∼924)의 첫째 아들 박언침(朴彦忱)의 10세(世)인 박원(朴元)부터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로 분파되었다. 그 후, 다시 박원(사문진사공파 1세)의 8세(世)인 박의중(朴宜中)이 고려 우왕 14년(1388) 철령위 철회의 공으로 이듬 해인 1389년(창왕 원)에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에 책록되고 문의군(文義君)에 훈봉된 박의중이 문의박씨 1세로 세계(世係)를 이어 오고 있다. 대제학⋅대사성을 역임하였다.

문의 2세 박연(朴衍, 1350∼?)은 시호가 문현(文顯)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며, 3세 박윤성(朴允成, 1368∼1419)은 문과에 들어 문하시중과 평리전서(評理典書)를 역임하였고, 4세 박태준(朴台俊, 1385∼1429)은 문과, 통훈판사, 의정부 참정 겸 선공감사를 역임하였다. 5세 박치(1402∼1454)는 증조부로, 문과, 선교랑남부주부를 지냈는데, 세 아들(지무⋅지화⋅지영)을 두었으며, 묘소가 낙동 운평리에 있다. 6세인 조부 지영(之榮, ?∼?)은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묘소는 상주시 개운동에 있다. 아버지(7세) 경원(慶元, ?∼?)은 성균관 진사이고, 어머니는 흥해배씨(興海裵氏)이며, 슬하에 두 아들(彦誠, 彦信) 중 장남으로 태어 나셨다.

선생은,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올바르게 가르쳤다. 12살 때에는 할머니 상(喪)을 당(當)하여 종손(宗孫)이 아님에도 3년의 복(服)을 입었고, 어머니 봉양(奉養)에 기쁨을 다 하였다. 명절(名節) 때마다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려 그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렸다.

아무리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라도 반드시 손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올렸고, 철마다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차려 놓고 친척들을 두루 불러 대접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데 노력을 다 했다.

또한,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하여, 초하루 보름으로 제사를 올리고 밖에 나갈 때나 들어 와서는 반드시 고(告)하여 조상 받드는 일을 한결같이 예문(禮文)을 따라 하였다.

27세 때인 1504년(甲子) 사마시에 합격하여 조정(朝廷)에 나아가게 되었으나 어머니 봉양(奉養)을 위해 벼슬하지 않았다.

1519년(중종 14)인 42세 때에는 고을 사람들이 추대하여 향약정(鄕約正)이 되었고, 또한 조정에 천거된 일이 있었으나 어머니 봉양으로 벼슬에 나아가기를 원치 않았으며, 양산지원(陽山之院, 양촌 2리) 부근에 있는 작은 동산 위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낙지정(樂志亭)이라 이름하고 또한 정자의 이름으로 자호(自號)하여 사용하였다.

선생이 정자 주변의 풍광 즉, 송림(松林)을 노래한 시가 전한다.


詠 陽山松林 (영 양산송림)

翠色遙連淵嶽峯(취색요연연악봉) 아름다운 비취색은 아득히 연악의 봉우리에 이어지고

護村功邁大夫封(호촌공매대부봉) 마을 지킨 공적은 대부의 봉지(封地) 지키듯 했네

莫將斤斧傷枝葉(막장근부상지엽) 도끼로 나무를 상하게 하지 말지니

枝葉皆含遠祖風(지엽개함원조풍) 가지와 잎이 모두 선조들의 깊은 뜻을 품고 있으니


 라고, 읊었다.

1622년 5월,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이 주선한 연악문회 당시만 하여도 소나무 1만 그루가 생육하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현재는 지천동과 양촌동 사이에 경북선이 가로놓여 마을이 양분되면서 지천솔밭양촌솔밭은 양분이 되어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결국 우람한 지천솔밭은 소나무가 200여 그루 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경북선 철도 부설이 원망스러워 진다.

선생의 효행은 일찍이 원근에 소문이 나 있었다. 특히, 당시 경상감사 김안국(金安國. 재임 1517∼1518)이 이 정자를 찾았다. 선생의 나이 쉰 일곱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니 상복을 벗지 않고 밤낮으로 슬퍼하며 몸이 여의어 뼈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효행은 관찰사의 마음을 움직였고 선생에 대한 효행 시한수를 남겼다.


題 樂志亭(제 낙지정) 김안국(金安國)

咨詢無效雪侵頭(자순무효설침두) 눈바람 머리에 막을 계책없이

原隰驅馳未暇休(원습구치미가휴) 감사소임 돌아보느라 쉴날이 없구나

孝里高風能起我(효리고풍능기아) 효자마을의 아름다운 풍습이 나를 움직이게 하니

爲傾行盖暫遲留(위경행개잠지유) 백년을 사귄듯한 교분은잠시 머무름을 더디게 하는구나.


 라고 하여, 선생의 효행을 극찬하는 시를 남겼다.

관찰사는 이 효행을 나라에 보고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다음으로, 선생이 실천한 효행에 대해 기록을 살펴보면,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1518, 정덕 13) 3월 26일(을축)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진사(進士) 박언성(朴彦誠)은 상주(尙州)에 사는 사람으로, 어려서 아비를 잃고 자라면서 그 아비를 추모하여 삭망(朔望) 때마다 주과(酒果)를 베풀어 가묘(家廟)에 제사하며, 모친을 지성으로 섬겨 조석 식사를 손수 챙기는가 하면,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날이 갈수록 독실히 하였으며 혹시 몸이 조금 불편해도 잠자리에서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그 어미가 병이 있었는데 몸소 탕약(湯藥)을 달이면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며, 가물치[鱧]가 그 병에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 섣달이라 얼음을 깨고 몸소 물에 들어가 가물치를 잡아다가 어미에게 드려 끝내 병이 낫게 하였으며, 향리의 친구와 음식을 먹을 때도 모친에게 드릴 만한 음식이 있으면 구하여 모친에게 드렸습니다. 집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있고 없는 것을 관계하지 않았고 모친을 섬기는 데에만 전념하여 언제나 맛있는 음식을 드렸으며 밖에 나가 노닐 때에도 반드시 가는 곳을 말하는가 하면, 일이 있지 아니하면 관부(官府)에 출입하지 아니하므로 향당(鄕黨)과 종족이 그의 효제(孝悌)를 칭도합니다. 항상 경사(經史)를 보고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고, 나이 40이 넘도록 영리(榮利)를 구하지 않습니다. 학문의 공적은 비록 적으나 기식(器識)이 비범하여 직임을 감당할 만합니다.”


 라고, 기록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효행은 백행의 근본이라 하여, 인륜의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인조실록』[인조 2년(1624, 갑자) 3월 5일(기미) 조]에도 다음과 같이 정표의 기록이 있다. 즉,


 “효자인 현감 김범효(金範孝), 진사 박언성(朴彦誠), 진사 김언건(金彦健), 생원 강식(康栻)을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김범효 등은 모두 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인데 효행이 남보다 뛰어나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다. 김범효는 명종(明宗) 때에 불러 보고서 발탁하여 수령에 제수하고 죽은 후에도 부제(賻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이 일제히 정표하는 은전(恩典)을 행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따랐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 상주사람 김범효(金範孝)는 후계(后溪) 김범(金範)을 착오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사림에서 칭송한 내용을 소개하면,

『우복집』(제2권)「시(詩)」에 이르기를,

“진사(進士) 박언성(朴彦誠)은 효행(孝行)이 있었다. 그는 정자에 낙지(樂志)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 김안국 관찰사)이 본도를 안절(按節)하였을 때 그의 집을 방문하여 절구 한 수를 남겨 두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咨詢無效雪侵頭(자순무효설침두) 임금 도운 성과 없이 머리 온통 하얘지고

原隰驅馳未暇休(원습구치미가휴) 험한 곳서 말 몰아 쉴 겨를이 없구나.

孝里高風能起我(효리고풍능기아) 효자의 높은 풍모 능히 내 뜻 일으키니

爲傾行蓋暫遲留(위경행개잠지류) 길 가다가 수레 멈춰 잠깐 동안 머무누나.


라고, 하였다.

이는 선생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겼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다. 강형 명보(康兄明甫)는 바로 선생의 외증손(外曾孫)인데, 모재 선생의 시를 벽에 건 다음 나(우복 정경세)에게 한마디 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이에 삼가 그 운을 써서 느낀 바를 말한다.


孝於百行是原頭(효어백행시원두) 효라는 건 모든 행실 으뜸이 되는 거니

從此循循德日休(종차순순덕일휴) 이로부터 덕이 날로 아름답게 될 것이리

我欲御公那可作(아욕어공나가작) 공의 수레를 몰려 하나 어찌 될 수 있으리오

獨憐亭扁至今留(독련정편지금류) 정자 편액 지금까지 남아 있어 보기 좋네


이상은, 낙지정(樂志亭)에 대한 생각을 서술한 것이다.

다음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운정(芸亭) 김언건(金彦健)의 행장을 쓰면서 행장의 내용 중에 선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낙지정(樂志亭) 박 선생 언성(朴先生彦誠), 남계(南溪) 강 선생 응철(康先生應哲)과 함께 연악서원(淵嶽書院)에 배향하였는데 공론을 따른 것이다. 서원은 상주의 갑장산(甲長山) 아래에 있는데, 두 선생 또한 영남(嶺南)의 악조(樂祖)이다. 무릇 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것은 이름난 벼슬아치들도 부러워하는 바이다. 저 두세 분의 어진 군자는 모두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행할 일을 행하고 나가서는 도를 몸소 실천하였다. 살아서는 교화(敎化)를 펴고 죽어서는 이름을 영원히 후세에 남겼으니, 이것은 과연 사문(斯文)의 실제 형적이며 영남 풍속의 아름다움이다.”


선생은, 천성(天性)이 효자였다. 효행을 위해 조정(朝廷)에 천거되었으나 어머니 봉양(奉養)을 위해 벼슬까지 포기한 효자였다. 그 효행이 갸륵하여 정문이 내려졌다.

아우인 언신(彦信)을 효제(孝悌)로서 하고 공부를 시켜 기축년(1529, 중종 24)에 무과에 급제토록 하였다.

선생의 부인 달성배씨(達成裵氏) 사이에 딸을 넷 두었으며, 묘소는 상주시 개운동에 있다. 사후인 1883년(고종 20)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추증(追贈)되고, 연악서원(淵岳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선비로서 가장 기본 덕목인 효행을 몸소 실천한 장본인이다.

【참고문헌】

1.『중종실록⋅인조실록』

2.『여지도서(輿地圖書)』(하권)

3.『연려실기술』별집 제4권.

4.『상산지(商山誌)』

5.『상주시사(尙州市史)』

6.『우복집(愚伏集)』(권2)

7.『상주의 서원, 상주청년유도회, 2006.

8.『상주의 누정대, 상주문화원, 2008.

9.『문의박씨 대동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