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타고 다닌 조운흘(趙云仡) 대감
김 철 수*
선생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그리고 고려 태조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닌 조맹(趙孟)의 후손으로, 증조는 조정(趙晶)이고, 조부는 조숙령(趙叔鴒)이며, 아버지는 조건(趙虔)이다.
선생의 호(號)는 석간(石磵) 또는 서하옹(棲霞翁)이며,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많았고, 담대하여 매사에 얽매이기를 싫어했으며, 뜻을 세우는 것이 기이하고 뛰어났다. 그리고 성격이 호탕하였고, 유교의 사상과 교리의 뜻을 그대로 행하는데 충실하였으며, 시대의 풍습(時俗)을 따르는 가벼움이 없었다.
공민왕 6년(1357)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를 거쳐 합문(閤門)의 종4품 관직인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리고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恭愍王)은 이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남쪽 지방 여러 곳으로 피난 다녔는데, 많은 신하들은 도망가고 숨어서 구차하게 삶을 구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형부(刑部)의 원외랑(員外郞)의 신분으로 공민왕을 끝까지 수행 호종(扈從)하였고, 난(亂)이 평정되자, 이러한 공로로 이등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국자 직강(國子直講)으로 승진하고, 전라도(全羅道)·서해도(西海道)·양광도(楊廣道) 3도의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공민왕 23년(1374)에는 정4품 품계의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상 이속에 아무 욕심이 없고 초연(超然)하던 선생은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는 상주(尙州) 노음산(露陰山) 아래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나들이할 때는 꼭 소를 타는 기행(奇行)을 하였으며「기우도찬(騎牛圖贊)」과「석간가(石磵歌)」를 지어 자신의 속내를 표현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1377년에 선생을 다시 정4품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기용하였으며, 이어서 정3품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으나 우왕 6년(1380)에 두 번째로 벼슬을 버리고는 헤어진 옷과 짚신 차림으로 백성과 자연과 함께 지냈다. 이때 선생은,
“예로부터 공부하지 않고서 천하 국가를 제대로 통치한 군주는 없습니다. 공부의 핵심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어 이치를 깊이 탐구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가지며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성군들은 강관(講官)과 시학(侍學)을 두고 그들을 시켜 도학(道學)을 강론하게 함으로써 정도(正道)를 함양했으니, 그 생각은 매우 심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서연(書筵)의 강학을 어떤 때는 시행하다가 곧 중지하기도 하니 저희들은 전하를 위해 애석히 여깁니다. 부디 선왕의 유훈을 받들어 다시 서연을 여시고 곧고 올바른 선비를 항상 가까이 두셔서 정무의 여가에 경전과 역사서를 익히십시오. 그리하여 올바른 도를 즐겨 들으시고 덕성을 함양하시어 선정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는 내용의 간곡한 소(疏)를 올릴 정도로 임금님을 향한 충성심이 가득했던 분이었다.
그러나 창왕 원년(1388)에 다시 조정에 불려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으며 곧이어 동지(同知)로 승진했다. 그리고 공양왕 2년(1390)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나갔다가 조선 왕조에서는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었는데, 은혜와 사랑으로 백성들을 보살폈기 때문에 강릉의 사람들이 스스로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보답하였다.
그러나 신병(身病)으로 선생은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사직하고, 종2품 검교정당문학(檢校政堂文學)으로 계셨는데, 이때에도 검교(檢校)는 녹봉을 받는 직위였지만 선생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 4년(1404)에 7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다음과 같은 졸기(卒記)가 태종실록에 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은 풍양현(豐壤縣) 사람이니, 고려왕 태조(太祖)의 신하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대 손이다. 공민왕 대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의 문하로서 등과(登科)하여 두루 중외(中外)의 벼슬을 지냈으니, 다섯 주(州)의 수령이 되고, 네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가 없었으나 또한 더러운 이름도 없었다.
나이 73세에 병으로 광주(廣州) 옛 원성(垣城)에서 종명(終命)하니, 후손이 없다. 일월(日月)로써 상여(喪輿)의 구슬을 삼고, 청풍(淸風)과 명월(明月)로써 전(奠)을 삼아, 옛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지냈다. 공자(孔子)는 행단(杏壇) 위이요, 석가(釋迦)는 사라 쌍수(沙羅雙樹) 아래였으니, 고금의 성현(聖賢)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으리오! 아아! 인생사(人生事)가 끝났도다.”
선생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대신에 해와 달을 구슬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제물(祭物)로 삼았다. 묘지와 비석은 없고 묘비명만『고려사』권112「조운흘전」에 남아 있으며, 병(病)이 들자, 선생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돌아가셨다.
선생은 평소에 뜻이 높고도 우아했으며 성격이 대범하고 그릇이 컸다. 또한 늘 소신대로 곧게 행동할 뿐, 시류에 따라 절조를 굽히는 일이 없었다.
그 한 예(例)가 정승 조준(趙浚)과의 만남이었다.
정승 조준(趙浚)이 손님을 전송하는 일로 한강(漢江)을 건넜다가 선생이 생각나서 동렬(同列) 재상과 더불어 기악(妓樂)을 거느리고 주찬(酒饌)을 싸 가지고 가서 찾았는데, 선생은 치의(緇衣)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문(門)까지 나와 길게 읍(揖)하고는 정자(茅亭)에 좌정(坐定)하였다.
조준이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마련하니, 선생은 짐짓 귀가 먹어 듣지 못하는 척하고, 눈을 감고 정좌(正坐)하여 높은 소리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창(唱)하니, 조준이 풍악을 중지시키고, 황급히 차(茶)를 마시고 돌아갔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이처럼 선생은 세속을 희롱(戲弄)하고 스스로 고고(呱呱)하기가 이와 같았다.
또 서해도 관찰사로 내려가 있을 때, 임지에서 선생은 매양 ‘아미타불’을 소리내어 읊고 다녔다. 그런데 선생이 관내 군현을 순시하던 중 배천(白川)에 당도하여 잠을 자는데, 새벽이 되자 밖에서 갑자기,
“조운흘!” “조운흘!”을 염송(念誦)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가만히 살펴보니, 뜻밖에도 배천(白川) 현감 박희문이었다.
조운흘이 괴이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박희문이 말하기를, "관찰사께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성불(成佛)이 되려고 하시니, 저는 '조운흘'을 염송하여 관찰사가 되려고 그리 했나이다." 라고 답하여 모두가 웃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선생은 소탈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처신의 귀재였다.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선생은 고려 말에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는 청맹(靑盲)이라고 핑계되면서 벼슬길에서 스스로 내려오려고 애를 썼으며, 벼슬에서 벗어나서는 소를 타고 다니며 병든 백성과 배를 굶은 백성들과 함께하는 기행(奇行)을 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고려 말에 좌의정 김사형이 찾아와서 “다시 벼슬을 하라”고 설득하니, 선생은 소매 넓은 베적삼에 삿갓을 쓰고 나와서 길게 읍을 하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무안을 당한 좌의정이 일어서면서 혼잣말로 “뻣뻣한 이 늙은이의 태도는 지금도 어쩔 수 없구나”라 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선생은,
騎黃牛傍靑山(기황우방청산) 누른 소를 타고 청산 옆에 있으니
麁麁乎其身彩一疋(추추호기신채일필) 추하고 추한 그 풍신은 베 한필의 가치도 못된다.
라는 시(詩)를 지었는데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려 있다.
선생은 저서로『석간집(石磵集)』이 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다. 그리고 신라・고려의 한시(漢詩)를 모아 편찬한『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있다.
그 밖에 전해지고 있는 선생의 작품으로는 5수의 칠언절구가『동문선』에 있다. 이처럼 선생의 시(詩)는 모두가 수준이 높았다. 그 중에서『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실린 ‘즉사(卽事)’라는 시를 소개하면,
柴門日午喚人開(시문일오환인개) 한낮에야 아이 불러 사립문 열고서
步出林亭坐石苔(보출림정좌석태) 숲속 정자에서 걸어 나와 이끼 낀 바위에 앉았네.
昨夜山中風雨惡(작야산중풍우악) 어젯밤 산 속에 비바람 사납더니
滿溪流水泛花來(만계류수범화래) 시내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내려 오네.
이 시(詩)는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388년에 이인임(李仁任) 등의 일파가 전횡을 일삼다가 최영과 이성계에게 제거되고, 이 사건의 관련된 자들이 유배를 가면서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광경을 보고 지은 시라고 전해지고 있다.
‘거센 비바람에 개울 가득 떠내려 오는 꽃잎’은 정변(政變)과 그 희생자가 끌려가는 광경을 노래한 것일 것이다.
선생은 공민왕조에 급제하고 여러 직을 편력했으나, 세상이 어수선할 땐 거짓 미친 척하며 은거하는 등 숱한 일화(逸話)와 기행(奇行)으로 여말 선초 두 왕조를 선정(善政)과 청백리(淸白吏)로 살았던 사람이다.
이렇듯 선생의 시편을 살펴보면, 현실참여와 은둔 사이에서 고민하며 이를 자연을 매개로 해결하고자 하는 흔적이 나타나지만 현실 비판의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선생의 작품은 대부분 인멸(湮滅)되었기 때문에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대표적인 문인(文人)이면서도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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